허를러깅 처이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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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몽골 정부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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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대칸

국가대의회의장

상임 간부회 주석

1대

권한대행

2대

3대

4대

복드 칸

발링긴 체렌도리

나바안도르징 자담바

펠지디인 겐뎅

잠찬긴 담딘수렌

상임 간부회 주석

5대

6대

7대

8대

9대

허를러깅 처이발상

로솔린 라강

아난딘 아마르

단스란비레긴 독솜

공치긴 봄첸드

국가대회의 간부회 주석

인민대회의 간부회 주석

임시

10대

임시

임시

11대

수크바타린 야니마

잠스랑긴 삼보

차간라밍 두게르수렌

소노민 루브산

욤자깅 체뎅발

인민대회의 간부회 주석

대통령

대통령

임시

12대

13대

14대

15대

냐민 자그바랄

잠빈 바트뭉크

폰살마깅 오치르바트

나차긴 바가반디

남바린 엥흐바야르

대통령

16대

17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할트마긴 바트톨가

복드 칸국 | 몽골 인민 공화국 | 몽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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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

인민복 차림

색을 입힌 그의 살아생전 모습

1. 개요
2. 생애
2.1. 권력을 쥐기까지
2.2. 독재의 시작
2.3. 몽골 문화 말살
2.4. 근대화
2.5. 사망

1. 개요

몽골어 :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1] /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2] (Khorloogiin Choibalsan)[3]

1895년 02월 08일 - 1952년 01월 26일

몽골 인민 공화국독재자이자 학살자. 1929년 1월 24일부터 1930년 4월 27일까지 몽골 최고회의의 주석을 지냈고, 이어서 1939년 3월 24일부터 1952년 1월 26일까지 몽골의 총리를 지냈으며, 1930년대부터 죽을 때까지 몽골 인민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는 몽골 역사상 큰 변혁기였던 때에 몽골의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몽골의 독립을 쟁취하고 근대화를 이룬 업적을 남긴 지도자라는 평가도 있지만, 전무후무한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자국민을 대량학살한 독재자로 평가되기도 해서 이름하여 몽골의 스탈린이라고 불린다.

2. 생애

2.1. 권력을 쥐기까지

처이발상은 1895년 동몽골 지역에서 미혼모 어머니(이름은 허르러)의 네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때 이름은 ‘두가르(Dugar)’였으나 13세 때 티베트 불교 수도승으로 출가하면서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즉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란 이름은 어머니의 성씨에 법명이 붙여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5년 뒤에 사원에서 도망쳐(이유는 불명) 수도 후레, 현재는 울란바토르라고 불리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 그를 가엽게 여긴 부랴트러시아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서 1914년부터-1918년까지 러시아어 전문학교에서 통역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914년 러시아로 유학했을 때 러시아 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쉬수정외몽골 출병을 단행해 몽골의 독립을 취소하자 귀국 후 중국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몽골인민당 초기 멤버로 참여하였다. 1921년 몽골 내에 주둔하던 중국군과 러시아 반혁명 잔당인 운게른 남작의 군대를 수도에서 모두 몰아내고 복드 칸을 복위, 독립 선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처이발상은 혁명가 담딘 수흐바타르의 동료로 몽골의 독립 운동에 참여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권력을 잡았다.

독립영웅 담딘 수흐바타르차우찬 닮았다(左)와 처이발상(右)

처이발상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고 독립군을 지휘한 2살 위인 수흐바타르 장군을 스승처럼 따랐다. 그래서인지 수흐바타르도 처이발상을 아꼈고 1922년 혁명정부의 급격한 풍습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군중반란이 일어나 국방부 차관이었던 처이발상이 처형을 당할 처지였는데 수흐바타르가 그를 보호했을 정도였다. 실수하셨네 그러나 수흐바타르는 30살의 나이인 1924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이후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칸 역시 같은해 사망하였다.

2.2. 독재의 시작

이후 1929년 소련정부에서는 토지몰수와 불교사원의 박해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지도자로 그를 선택하게 되고 이후 몽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가 통치하던 중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37~1939년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불교말살을 들 수 있다. 처이발상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로 유명하며, 정치 행보도 비슷해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평을 들었다.

1936년,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 사원을 없애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한 펠치딘 겐덴(Пэлжидийн Гэндэн) 총리 일파를 기습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을 기점으로 65명의 고위직을 전격 체포한 이후 18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1936년부터 39년까지 대숙청(Их Хэлмэгдүүлэлт)을 벌여 겐덴 전 총리와 아난딘 아므르(Анандын Амар) 전 총리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들을 처형했다. 혁명 원로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이 대숙청에서 당과 정부의 수뇌부 인사 중 25명이 처형되었으며, 군 지휘부 중 187명이, 중앙위원회 위원 51명 중 36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에다가 굴라크까지 건설하여 사람을 잡아넣었다. 그야말로 동시대 소련 대숙청의 마이너 카피판.

가장 엽기적인 부분은 처이발상이 좋아한 처형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죄수를 비행기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 처형 방법은 말 그대로 비행기에서 사람을 떨어뜨리는 방법인데 자신에게 반항하는 정치범들을 소련에게서 받은 비행기들에 태워서 먼 사막에 떨어뜨려 죽였다는 흠좀무한 처형방식을 사용했다고 한다.[4]

승려의 경우 세 부류로 나뉘어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비지식인층의 경우 당장의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총 10만에 달하는 승려들이 사망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불상과 조형물은 녹여서 소련의 무기 공장으로 보내졌다. 다만 일부 사원은 군사용으로 쓰여서 파괴되지는 않았다. 처이발상은 한 때 불교 신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불교에서 내려준 법명이니 참 웃지못할 일이었다. 스탈린도 신학생 출신으로 정교회 때려잡는데 열심이었으니 이 점도 비슷하다. 췌언하자면 스탈린은 사람들 감시하고 가두고 벌주는걸 신학교에서 당하면서 배웠다. 차이점이라면 스탈린은 나중에 정교회 탄압을 멈추고 겉으로나마 정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처이발상은 티베트 불교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것.

그렇게 18,000명의 지식인층 승려가 처형당했으며, 몽골 각지에 있던 746개 사원이 파괴되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쫓겨났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본산격인 간단 사원도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또 수천 명의 반혁명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다수의 부랴트족, 카자흐족들 또한 ’혁명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5] 정도로 추산되는데, 당시 몽골의 인구가 80만~9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이 와중에 칭기즈 칸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보르지긴 가문은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2.3. 몽골 문화 말살

또한 이 시기에 만들어낸 병크가 하나 있는데 성씨금지 정책(!!)이다. 소련에서 기획한 몽골의 전통 말살을 위해 기존 모든 성씨를 못쓰게 만들었다. 그럼 어떻게 이름을 만들었고 하니, 간단히 말해서 누구의 자식 누구 이런 식으로 이름을 만들어냈다.[6] 덕분에 누가 누구 후손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어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려다 그 둘이 친척관계라는 게 드러나서(...) 그냥 헤어져야 했다는 사연이 몽골에는 부지기수였다.[7]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생긴 근친상간으로 생겨난 유전병의 피해도 심각하였다.[8]

몽골이 민주화가 되고 나서 성씨 금지도 풀리게 된다. 오죽했으면 민주화 이후 첫 민선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첫번째로 시작한 게 "자기 성씨 찾기"였다. 그러나 이것도 국민의 대부분이 끝내 자기 선조들의 성씨를 못 찾아내어 그냥 자기 아버지 이름을 성으로 쓰며 간혹 새롭게 성씨를 만들어내거나 전근대 몽골에 실존했던 성씨들 중 마음에 드는 것(특히 보르지긴)을 골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대통령조차 성씨 복원 얘기를 꺼낼 때 처음 나온 말이 "사실 난 내 진짜 성이 뭔지도 모른다."였다. 여러모로 현대 몽골의 흑역사 중 최고봉.

혁명 이후에도 한동안 잘 쓰였던 몽골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가 러시아어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갈아치웠다. 중국, 라오스, 북한 등 여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화 이후에 문자 개혁을 한 예는 있어도 자신의 전통 문자를 폐지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막장성이 두드러진다.[9]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몽골 전통 문자가 세로쓰기인데다가 좌서로 읽고,[10] 정서법도 옛날 그대로라 이걸 현대에 적용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문맹률 증가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11]

2.4. 근대화

몽골은 그의 치하에서 상당히 근대화되어 포장도로가 국토 곳곳에 깔리고 통신선이 개통되었으며,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도 낮아졌다. 몽골 동부에 위치한 인구 4만여 명 규모의 몽골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인 투멘(Баян Түмэн)은 그의 이름을 따서 처이발상이라고 개칭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공산주의 숙청과 근대화라는 점에서 강철의 대원수의 마이너 카피판 같다.

또한 일본 제국의 공격에도 끝끝내 나라를 지켜냈고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2.5. 사망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스탈린이 그를 무척이나 아꼈기 때문에, 그가 죽자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을 일으켜 처이발상을 치료한 주치의들을 대상으로 암살혐의를 씌우고 고문한 후 처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의 병사는 의심많은 스탈린이 자신의 주치의들에게 의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들을 숙청하게 한다. 결국 이 숙청은 1953년 스탈린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을 길동무로 삼았네

악행을 많이 저질렀지만 현대 몽골인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사람 많이 죽였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면 "칭기즈 칸도 사람 많이 죽였어요"라고 한다고... 근데 처이발상은 자국민을 죽였는데 세계적으로 따진다면야 흔한 독재자가 된 영웅이라 그 전에 인간백정 운게른을 몰아내기도 했고 그 전엔 중국 군벌에게 지배당했으니 지금의 몽골을 유지시켰다고 보면 뭐...물론 진짜 주역 영웅은 수흐바타르지만 수흐바타르와 함께 한 동지인 것은 사실이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위에서 거론한 대로 몽골의 전통 문화 파괴와 자국민 학살을 들어 비판한다. 특히 샤머니즘이나 티베트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몽골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이들은 한 가지 음모론을 굳게 믿고 있는데 그 음모론이란 바로 처이발상이 몽골 독립 영웅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몽골인들 중에 처이발상이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처이발상이 정말로 담딘 수흐바타르를 살해했는지는 불명확하며 수흐바타르의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이다.

이 사람이 죽고 나서 욤자깅 체뎅발이 그의 뒤를 이어 몽골의 지도자가 되어 공산당 독재정치를 펼쳤다. 이 사람도 억압적인 독재자이긴 했지만 처이발상처럼 극단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대신 몽골을 망가뜨리고 말았다는게 문제


  1. [1] 몽골 문자 표기.
  2. [2] 키릴 문자 표기.
  3. [3] 이를 러시아식으로 그대로 읽은 호를로긴 초이발산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4. [4] 이건 소련과 몽골의 공산정부 치하에서 주로 이용되었는데, 몇 십년 뒤 아르헨티나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민주화 인사, 야당 정치인들을 공군 비행기에 태운 뒤 비행기 안에서 마약을 잔뜩 투약시켜 환각 상태로 만들고 마대 자루에 담아서 자루째로 대서양에다 떨궈놓는 식으로(이른바 죽음의 비행) 업그레이드시킨다.
  5. [5] 일부에서는 사망자를 1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참고로 당대 소련에서는 많아도 200만 명 정도가 죽은 걸로 추산되는데 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율적으로는 몽골이 더 엄청난 것.
  6. [6] 예를 들어 아버지 이름이 간볼드고 자식 이름이 자르갈이면 "간볼딩 자르갈"이 되는 거고 그 자르갈이 자식 낳고 이름을 하탄바타르라 지으면 그 자식 이름은 "자르갈링 하탄바타르"가 되는 식이다. 허를러깅 처이발상 본인의 이름 자체도 허를러의 자식 처이발상이란 뜻이다. 헌데 아닌 게 아니라 성씨의 기원 중 하나가 '누구의 자식'이란 뜻을 담은 형태이다. 영미권에서 흔해빠진 Johnson, Anderson 같은 성이 대표적이고 중국의 공손씨의 경우도 넓게 보면 이 부류이다. 아라비아와 북유럽에도 이런 식의 이름이 흔하다. 하지만 몽골은 특정 세력의도를 가지고 이미 있던 성을 갑자기 없애놓은 케이스다.
  7. [7] 결혼했다가 사실이 드러난 경우도 많았는데 이 경우엔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대로 살게 되었다. 콩가루 족보 메이커
  8. [8] 몽골족 중 독립국가인 외몽골의 몽골족은 황인답게 대체로 흑발흑안이지만 간혹 금발이나 벽안 중 한가지 특징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이는 옛 몽골 제국 시절에 있었던 색목인과의 혼혈 때문인 것도 있지만 처이발상 정권의 성씨 폐지로 인한 근친상간으로 인해 열성인자가 발현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9. [9] 물론 중앙아시아처럼 소련에 의해 문자를 갈아치운 경우는 존재했지만, 이전에 썼던 아랍 문자도 따지고 보면 외래문자였다. 몰도바는 라틴 문자에서 키릴 문자로 문자를 바꾸었지만 몰도바의 루마니아어는 아주 예전에 키릴 문자를 썼다는 명분이 있었고, 전통 문자를 가졌던 아르메니아조지아는 스탈린 시절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전통 문자라는 이유로 잘 썼다. 애초에 소련은 소수민족 문자교육을 장려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키릴문자를 쓴다는 실용적 이유로 키릴 문자가 밀어낸 것이다.
  10. [10] 세로쓰기 문화가 있던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우종서다.
  11. [11] 민주화 이후 몽골 민족주의자들과 어학자, 역사학자들이 다시 몽골 문자 표기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몽골 내에서는 호응이 적다. 그래도 몽골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몽골 전통 문자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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