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조선)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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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헌종(憲宗)

시호


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1]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
장화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
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2]

장숙(莊肅,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

본관

전주(全州)

능묘

경릉(景陵)

성씨

이(李)

환(烉)

문응(文應)

원헌(元軒)

출생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

사망장소

창덕궁(昌德宮) 중희당(重熙堂)

황후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부황

조선 문조(효명세자)

모후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생몰
기간

음력

1827년 7월 18일 ~ 1849년 6월 6일

양력

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
(21년 10개월 17일,7991일.)

재위
기간

음력

1834년 11월 18일 ~ 1849년 6월 6일

양력

1834년 12월 18일 ~ 1849년 7월 25일
(14년 7개월 7일, 5,333일.)

1. 개요
2. 치세
3. 어진
4. 가계도
5. 여담
5.1. 조선의 사랑꾼?
5.2. 기타
6. 헌종이 등장한 작품
7. 관련 항목
8. 둘러보기

1. 개요

세도정치로 망해가던 조선을 살리고자했던 조선의 마지막 불꽃 그러나 죽음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미완의 개혁군주

조선 제24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헌종(憲宗), 시호는 성황제(成皇帝). 휘는 환(烉). 자는 문응(文應).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익종→문조)의 외아들이다.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할아버지 순조마저 건강 악화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의 신분으로 8살 나이에 왕이 되었다. 조선 왕으로서는 최연소로 단종보다도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비슷한 경우로 고려의 충목왕이 있다.

2. 치세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풍양 조씨다. 첫 왕비는 안동 김씨로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였으나, 그녀는 결혼 2년 만에 1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고, 이후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았다. 외가와 처가에서 알 수 있듯, 헌종의 치세는 실로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조선이 파탄 직전까지 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순조의 비, 즉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척사윤음'이 반포되어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 박해가 발생해 정하상과(1839년 기유박해) 한국 최초의 신부김대건이 순교했다.(1846년 병오박해)

더욱이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민생은 파탄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딱히 세우지도 못했고, 외부에선 서양선박들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는 이양선 출몰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민심은 동요했다. 실로 안습의 세월이라 할 만하다.(…)

기존의 견해로는 헌종조 전반을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와의 세력 다툼이 치열한 시기로 알려졌고, 그래서 야사에서는 조병구가 권세를 휘두르자 "외삼촌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가는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째 김좌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김택영의 <한사경>인데, 헌종 앞에서 애체(안경)을 썼다고 한 소리 들은 것. 한 소리만 듣고 끝난 게 다행인 게, 당대 예법에서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안경을 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으니 웃어른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뽐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 헌종의 이 말에 조병구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황급히 물러나와 퇴궐하다가 가마가 뒤집혀서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도 하고, 이게 신정왕후 조씨 앞이었는데도 헌종의 책망을 듣자 음독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는 죽기 전 해까지도 한성판윤, 예조, 이조, 공조판서를 한창 지내다가 대간들의 탄핵에 몰려 쫓겨나 그해 1845년 졸. 이는 어디까지나 안동 김씨의 편인 대간들의 견제에 따른 것으로, 사망 시기 자체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시기보다 이르다. 무엇보다도 조병구가 헌종이 그렇게 말할 정도로 권세를 휘둘렀다면 졸기에 좋은 내용이 실릴리 없다.[4]

실상은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큰 견제 없이 커가는 시기였고 헌종은 친정이 시작된 이후 20세가 될 무렵부터 척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수렴청정이 15세 때 끝나고,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으면서 할머니 순원왕후의 의중에 따라 홍재룡(洪在龍)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1903년 졸)를 계비로 맞은 것. 이 때 주부(主簿) 김재청(金在淸)의 딸을 후궁(경빈 김씨)으로 삼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조금이나마 흔들리기 시작했다.

헌종은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 등을 압박하여 유배를 보내는 등 반 안동 김씨 행보를 밟았고, 대구 서씨 서희순을 이조판서 겸 총위대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5영의 훈련대장을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채워넣고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한 건 대표적. 이렇게 군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장용영처럼 친위대인 총위영(총융청)까지 구성하는 등 아주 활발한 왕권 강화 정책을 펼쳤다.

수령의 장죄(뇌물)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와서 법률 개정을 주도한 적도 있었는데, 수령의 뇌물이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보면 세도 가문들을 타깃으로 노린 것이 100%다. 하지만 비변사의 비협조로 법 개정은 무산되었다. 그런가하면 암행어사도 활발하게 전국으로 파견했고 안동 김씨의 조병헌 사사 요구를 매우 강력하게 거부하면서 삼사를 모조리 파직하기도 했다. 조병헌은 결국 귀양을 갔다가 헌종 말에 풀려나지만 철종 초에 사사된다. 대사간 서상교를 통해 안동 김씨의 실세 중의 실세인 김흥근을 탐오하고 대왕대비의 비위를 맞추어('궁위를 엿보아') 정치를 했다고 탄핵하고 귀양 보내기도 했다. 안동 김씨에게 밉보인 김정희, 조병헌도 헌종 14년에 유배에서 풀렸고 영상 정원용은 안동 김씨에게 아부하다가 파직 당한다. 그러나 그 직후 향년 23세로 사망(…) 증조할아버지 정조처럼 헌종 역시 스스로 약을 조제하고 의원을 불렀으나 결국 병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앓다가 갑자기 차도 없이 사망했다는 것과 안동 김씨의 세력을 한창 조지던 와중에 급사하는 바람에 미약하게나마 독살설이 나올 정도다. 특히 순원왕후의 어필 봉서[5]를 근거로 한 독살설은 증거는 없으나, 헌종과 순원왕후가 의외로 증조할아버지 정조와 고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 급, 어쩌면 그 이상의 갈등을 벌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6].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독살설에 대해서는 실록에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만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7], "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이, 호색과 죽음 사이에 그토록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안동 김씨 일문에게 헌종의 때 이른 죽음과 순원왕후의 2차 수렴은 행복한 사태 반전이었다." 등을 언급하며 헌종의 이른 죽음에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뉘앙스를 살짝 띄우고 있다.

나름대로 '국조보감'의 증수를 위해 정조·순조·익종에 대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고, 각 도의 제방과 저수지를 정비하는 등의 치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런 정도의 치적으론 조선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는게 문제.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을 척결하고자 하였지만 돌연 죽음으로 왕권을 바로 세우지 못했다.

아들은 없었으며 궁녀 출신 숙의 김씨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함에 따라 결국 효종 때부터 이어진 직계 왕통은 단절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혈통도 끊겼으며 결국 안동 김씨가 강화도를 뒤져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인 철종을 옹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3. 어진

헌종의 정식 어진은 1954년 12월 26일에 부산 용두산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만 조선왕들의 간략화된 어진을 실어놓은 열성어진에서 헌종의 초상화를 찾을 수 있다.

열성어진에 실린 헌종 초상화

4. 가계도

5. 여담

5.1. 조선의 사랑꾼?

야사에 따르면 헌종은 계비 삼간택 때 김재청의 딸인 경빈 김씨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자신의 의사와 달리 할머니 순원왕후와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홍재룡의 딸인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간택하자, 3년 뒤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빈 김씨는 계비 삼간택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야사라고 한다. 여하튼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었을 정도라고.

애초에 얼굴이 꽤나 잘생겨 당대에 꽃미남 취급을 받았다고 하며, 그에게 반하기도 한 궁녀들과 지나치게 호색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그가 궁녀들을 가까이 한 것은 욕구 이전에 안동 김씨 출신의 자손을 더는 낳지 않겠다. 어떻게든 후궁을 통해 대를 잇겠다는 의지였다는 해석도 있다. 실록에서 아름다운 외모와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적고 있으며 넷상에서 그가 소개될 때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미남인 왕이었다고 설명된다. 그래픽으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다는 이미지도 도는 중. 어느덧 잘생긴 왕이 헌종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로 자리잡은 상태. 다른 것으로는 그대의 목 혹은 배에 칼 안 들어가냐는 야사도 꽤 유명한 이미지.

또한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9]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5.2. 기타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의 경릉(景陵). 왕비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와 나란히 묻힌 삼연릉으로 삼연릉 형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우왕좌비[10]'의 원칙에 따라 맨 오른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작가 박시백은 이 능에 대해 "안동 김씨효현왕후를 헌종과 효정왕후가 모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촌평하기도 했다. #

할머니 순원왕후는 "남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고 뭐든지 두 번 생각하고 움직이며 눈치가 빠르다"는 평을 내렸다. 이를 안동 김씨가 장악한 조정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보를 밟은 것이라 보는 해석도 있다.

좋은 외모에 영민하고 재능도 있는 편이었지만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20대 초반에 요절한 등 여러모로 아버지 효명세자를 닮은 왕이다. 승하 당시 나이도 효명세자보다 불과 1살밖에 많지 않았기도 하고. 실제로 효명세자와 헌종은 많이 닮은 외모였다고 하며 위에 상술되었듯이 4살 때 떠나보낸 아버지를 그리워했는데 본인이 효명세자의 초상화보다도 효명세자를 더 닮았다는 말을 듣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눈물 흘렸다는 일화도 있다.

서예에 능했으며 특히 예서에 능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인 정조에게 정약용,채제공이 있다면 헌종에게는 김정희,박규수가 있다.헌종은 원래 증조부인 정조와 마찬가지로 개혁적성향의 군주였고 성년이 돼자 보니 이미 정치는 할아버지인 순조가 방치하는 바람에 안동김씨가 득세하는 세도정치가 판치고 있었고 이에 헌종은 세도가문을 조지기 위해 증조부인 정조의 정책들을 고려해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고 점점 세도가문을 조지기 시작한다. 이에 주목한 인재가 바로 김정희와 박규수로 김정희는 헌종초기 이조판서였으나 세도가문의 공격을 받고 유배를 가있었고 박규수는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키우던 인재였으나 효명세자가 죽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에 헌종은 직접 김정희의 유배를 풀어주었고 박규수역시 중앙에 불러들인다.하지만 김정희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박규수는 병과에 합격 벼슬을 하기시작한다.그리고 실학적성향의 선비들을 우군으로 만들거나 총위영이라는 근위대를 만들고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안동김씨들을 주요자리에서 몰아내는등 세도가문을 조지면서 개혁을 추진하지만 헌종 자신이 친정한지 3년만에 죽어버리며 흐지부지 됐고 김정희와 박규수는 시련을 맛보는데 이들을 아끼던 헌종이 사망하자 안동김씨 들의 공격을 받고 김정희는 또유배를 갔고 박규수는 중앙에서 쫏겨나 한직을 전전했다.이들을 헌종이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김정희의경우 헌종이 경빈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지을때 현판의 글씨는 김정희의것으로 하라 명했고 김정희의 제자를 불러 김정희의 유배상황을 듣기도하였고 박규수의 경우 아버지가 아끼는 인재이니 등용하겠다고 하면서도 너무늦게 만난것을 한탄하였다.

6. 헌종이 등장한 작품

한국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 중 유일하게 한번도 등장하지 못한 왕이다. 하다 못해 '죽는 장면'으로라도 나온 적이 없다.[13] 아버지인 효명세자는 퓨전사극에라도 등장해 보았다. 아내 효정왕후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배우 김정하가 연기했다.

사실, 주목을 별로 받지 않는 것에 비해서 포장을 하자면 의외로 드라마로 만들 만한 소재가 될 법 하기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젊은 왕"이라는 점도 그렇고, 세도 정치를 개혁하는 개혁 군주의 모습도 어느 정도 넣을 수 있기는 하고, 게다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수를 적게 잡아도 된다.하지만 이런 소재는 훨씬 더 대즁적인 관심도 많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도 많은 정조에게 묻힌다. 헌종으로 드라마를 만들 바에 정조로 만드는게 더 나을 정도 게다가 정조는 적잖은 시간도 있었으나 헌종은 없었다

사극에 등장할 한 적은 있었다.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작가 윤이수, 삽화 kk)이 2016년 KBS에서 드라마화 되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가상의 세자로[14] 설정이 바뀌어서 실제로 등장하지 않게 된 것.

광해의 연인을 쓴 유오디아의 차기작인 (현재 시점으로는 완결된) <반월의 나라>의 메인 남주가 헌종이다. 연재 당시에는 휘가 연으로 쓰였지만 후에 종이책으로 발간되면 본래 휘인 환으로 수정된다는 듯. 전체적인 내용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부모님을 잃고 청나라로 건너가 공주가 된 여주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선으로 건너가 남주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드디어 흥부(영화)에서 출연하게 되었다. 담당 배우는 정해인. 참고로 실제 배우가 정약용의 직계 6대손인데 정조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인 정약용의 6대손이 정조의 증손자 헌종을 연기하는 것이 뭔가 묘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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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사후 조선 왕실에서 올린 시호.
  2. [2] 1908년 순종 황제에 의해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시호
  3. [3] 훗날 서재필고종황제 앞에서 안경을 썼다가 욕을 먹기도 했고, 순종황제도 지독한 근시였지만 아버지 고종황제 앞에서는 예를 지키기 위해 안경을 안 썼다고 한다.
  4. [4] 조병구의 졸기엔 '숙성한 재주를 지녔다. 다만 각박한 게 흠이었다'고 되어 있다.
  5. [5] (헌종 죽기 며칠 전) '왕을 몰아내지 않으려고', '내 집의 패악한 자식', (헌종 사후) '나도 거리길 거시 업서 싀훤해' 등
  6. [6] 변원림의 해석(<순원왕후 독재와 19세기 한국사회의 동요>, 2012) 참조. 다만 <순원왕후의 한글편지>를 편집한 이승희 교수는 이를 '안동 김씨 일가의 패악한 이'로 해석한다. <대비, 왕 위의 여자>의 김수지의 종합에 따르면, 순원왕후는 대체로 안동 김씨가를 '우리 집'이라고 하고, 왕가를 '내 집'이라고 했는데, 순원왕후는 '내 집'을 거론했으므로, '내 집의 패악한 자식'이라고 언급할 만큼 손자 헌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본다.
  7. [7] 실제로 그녀를 안동 김씨 수장이요, 독살의 주체로 보기는 어렵다. 안동 김문의 김흥근이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그것을 막지 않은 순원왕후에게 질타가 쏟아지자 같은 편지에서 "김흥근이 떳떳하다면 (유배는) 금방 지나갈 액운이며, 우리 가문이 흥하는 것은 오히려 하늘의 경계이니라.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철종의 왕비를 간택할 때 안동 김문을 배제하도록 조언하거나, 김흥근의 아들이 요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등 가문과 거리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8. [8] 헌종의 유일한 자녀였다.
  9. [9] 초상화를 말하며 당시 효명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었으므로 정확히는 효명세자의 어진을 말한다.
  10. [10] 오른쪽에 을 장사하고 왼쪽에 왕비를 장사함
  11. [11] 연대로 보아 아마 아역이었을 것이고 왕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12. [12] 헌종이 승하했다는 내레이션이 처음에 나올 때 이불 뒤집어쓰고 나왔을 수는 있었겠지만 실제 시청했던 사람의 기억에 등장장면은 없었다.
  13. [13] 단 네이버 대하사극 카페에는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 파문에 이경현이라는 배우[11], 위키백과에서는 대원군에 정명환이 헌종으로 등장했다는 게시물이 있는데 확인 필요.[12]
  14. [14] 이름은 이영 맞는데 한자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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