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궈펑

중국의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
(1949 ~ 1976)

화궈펑
(1976 ~ 1978)

덩샤오핑
(1978 ~ 1992)

장쩌민
(1992 ~ 2002)

후진타오
(2002 ~ 2012)

시진핑
(2012 ~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초대

2대

3대

4대

5대

6대

저우언라이

화궈펑 (1976 ~ 1980)

자오쯔양

리펑

주룽지

원자바오

华国锋·華國鋒(화국봉) / Huà Guófēng (1921년 2월 16일 ~ 2008년 8월 2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

본명은 쑤주(苏铸·蘇鑄 / Sū Zhù / 소주). 화국봉국뽕이란 이름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中)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든 가명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제2대 국무원 총리이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제2대 주석이다. 마오쩌둥의 직계 후계자. 그러나 1979년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당고위직에 머물긴 하지만 권력은 없었다.

2. 생애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 성 출신이다. 고향에서 상업학교에 재학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공산당에 입당하고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으며, 국공내전에도 참전했다.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후난성 샹인현 당서기가 되었다.

마오쩌둥 노선을 열렬히 지지하였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열심히 문혁 정신(?)을 퍼뜨렸다. 이를 바탕으로 초고속 승진하여 공안부장, 그리고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1976년 초대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총리 대리에 올랐고, 마오쩌둥이 지명하여 마오의 공식 후계자가 되며 마오 사후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란 당/정/군의 최고위직 3자리를 모두 거머 쥔다. 권력의 트리플 크라운(...) 이 세자리를 모두 가지고 있던 사람은 화궈펑이 유일한데, 마오쩌둥은 행정부 수반인 국무원 총리를 저우언라이에게 양보했고, 덩샤오핑 역시 그에게 밀려 총리를 지내지 못했으며, 덩샤오핑 이후에는 아예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를 겸직하지 못하게 된다.

화궈펑은 당시 무명이었기 때문에 4인방에 휘둘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으나, 마오 사후 한달만에 화궈펑은 군에 4인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오는 병석에 있을때 문병 온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으면 나는 안심이다.(你办事 我放心)"라는 붓글씨를 전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화궈펑은 이 붓글씨를 내세워 자신이 마오의 신임을 가진 절대적인 후계자라고 내세웠다. 어쨌든 갖은 언플과 무리수로 국정을 농단하던 4인방은 축출되면서 화궈펑이 대권을 손에 쥐는가 싶었는데...

"붉은 기를 높이 들고, 강철의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문혁직후 만들어진 화궈펑 우상화 포스터. 화궈펑은 마오쩌둥 대신 스스로를 우상화하려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에 의해 제동이 걸린다.

마오시절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당에 복귀하여 점점 세력을 강화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그를 사면해 준 화궈펑의 권력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덩샤오핑은 화려한 혁명가의 커리어에 워낙 당과 군에 신망도 높았고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무난한 지도력과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라는 명분을 갖췄어도 실질적인 권력기반으로는 후난성 한곳밖에 없는 화궈펑이 상대하기는 너무나 힘겨웠다. 화궈펑은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임을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세력을 강화하던 덩샤오핑 일파를 상대하기는 역량이 못미쳤다.

게다가 중국 대중들이 몇십년동안 찌들은 가난과 문화대혁명 때의 마오이즘의 병크를 들어 마오쩌둥에게서 등을 돌리니 마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마오의 인기를 이을려고 하던 화궈펑도 덩달아 인기가 폭락했다. 화궈펑에게 문혁 부정이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무리수나 다름없는 문혁 정신의 계승을 열심히 외쳤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먹혔고 오히려 반발만 높이고 만다.

그에 비하여 덩샤오핑은 대장정국공내전을 이끈 건국의 영웅 중 한명 인데다가 그의 지지자들이 문혁 중에 대거 숙청되었다고 해도 후야오방, 천윈 등의 상당수가 건재했다. 특히 국공내전 시절 덩샤오핑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2야전군 출신들이 군 상층부에 대거 포진해 있어서 군부의 지지가 덩에게로 쏠리게 된다. 거기다가 덩샤오핑의 경제개혁이 식량 자급자족, 차관 전액상환 등의 우수한 실적을 내면서 화궈펑은 점점 궁지에 몰렸다.

결국 권력을 잡은지 2년만인 1978년 12월 덩샤오핑이 당을 장악하고 사실상 중국의 최고통치자가 된다. 1979년 문화대혁명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고 사임하였다. 화궈펑은 차례로 1980년에는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내줌으로써 완전히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마오쩌둥의 직접 지명을 받았고 국정을 뒤흔든 사인방을 순식간에 제압하는 등 나름의 역량은 있었지만, 시대흐름을 제대로 잘못타서 실패한 사례다. 만약에 문화대혁명이 그때 좋은 의미로 남았다면 오래 집권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권력의지가 약했는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을 이용해 덩샤오핑과 권력투쟁을 벌이지 않고,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선양을 했기 때문에 덩샤오핑에 의해 예우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실권은 잃었지만, 하야한 후 박해를 당한 류사오치펑더화이와는 달리 덩샤오핑에 의해 일정 대우를 받았다. 그 이전엔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 얄짤없이 시골오지로 귀양 혹은 처형 [1], 친인척 전원 추방이었지만, 이때부터 실권없는 명예직으로 밀려나는 정도로 그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반대파를 굳이 숙청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체제가 안정화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같은 공산권 국가인 소련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스탈린 시대까지는 피의 숙청이 일상이었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시대가 되면 권력투쟁에서 밀려도 실권이 없는 한직이나 지방 전출로 끝나게 된다. 반대파에 의해 밀려난 흐루쇼프도 죽을때까지 고급아파트에 연금 심지어 지방별장까지 보장받았다.

그런데 다만 다당제와 언론자유보장 등 급진적 정치개혁을 요구했던 '자오쯔양' 전 총서기는 천안문 6.4 항쟁 이후 해임되어 죽을때까지 가택연금상태였다. 그만큼 체제에 위협적이란 판단 때문이었을듯.

화궈펑은 정년(70세)가 되는 1991년까지는 당중앙위원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후에도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점지한 중앙위원은 정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2000년대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그렇게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랫동안 잘먹고 잘사시다가 2008년에 사망하였다. 이 해가 2008 베이징 올림픽 기간이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거의 묻혔다. 물론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직속 후계자로서의 예우를 갖추어 그를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장사지냈다.


  1. [1] 중국공산당은 어지간해서는 일정 수준의 고위직은 처형하지 않았다. (일부 무지한 중까들이 나무위키에 지속적으로 문화대혁명을 대숙청 처럼 수천만 명을 처형했다는 식으로 왜곡하곤 하는데, 문화대혁명은 소련처럼 공안기관이 희생자들을 무더기로 체포해서 처형한 것이 아니라, 희생자는 홍위병에 맞아서 사망하거나 혹은 홍위병의 괴롭힘으로 자살한 것이다 ) 심지어는 린뱌오 쿠데타 음모에 연루된 고위 장성들이나, 후에 4인방에 대한 재판에서도 기껏해야 사형집행유예(2년후 무기징형으로 감형되는 것)가 대부분이었고, 고위직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적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국공내전에서 포로가 된 중국 국민당군 장교들이나 만주국의 황제 푸이, 총리 장징후이가 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혁때 대반동으로 몰려 추방된 류사오치의 경우도 처형당하거나 맞아 죽은게 아니라, 시골로 유배되었다가 의사가 당뇨병의 치료를 거부해서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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