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

和緩翁主

1737년 - 1808년?

1. 개요
2. 인생
2.1. 총애를 독차지하다
2.2. 혼인
2.3. 과부가 되다
2.4. 조카에게 집착하다
2.5. 유배
2.6. 말년
3. 평가
3.2. 묘사
4. 창작물에서

1. 개요

조선옹주. 영조와 그의 후궁영빈 이씨(선희궁) 사이에서 태어난 1남 3녀 중 3녀이다.[1] 따라서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으로서 정조고모이고 혜경궁 홍씨시누이가 된다. 화평옹주, 화협옹주는 그녀의 동복 언니들이었다. 남편은 일성위 정치달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정치달이 요절했기 때문에 더 후사를 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정치달의 사후에 정치달의 친척인 정후겸을 양자로 입적했다.

2. 인생

2.1. 총애를 독차지하다

보통 화완옹주라고 하면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로 알려져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 비해 딸들을 아낀 것으로 유명하지만[2] 그 중에서도 화평옹주와 동생인 화완옹주를 유독 편애했다고 한다. 영조가 딸 가운데서도 유독 아꼈던 화평옹주화순옹주[3]는 일찍 죽고, 곧 화완옹주에게 편애가 쏟아졌다. 화평옹주에 대한 애정이 화완옹주에게 옮겨간 이유로는 화평옹주가 죽은 당시 영조에게 혼인하지 않고 부모 곁에 남아 있는 딸은 화완옹주와 화유옹주 뿐이었고, 화평옹주의 동복 자매인 데다가 어리고 애교 많은 나이인 화완옹주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영조선희궁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2.2. 혼인

화평옹주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편애하는 것에 대해 동생들에게 늘 미안해하며 사랑받지 못하는 동생들과 아버지 사이를 현명하게 중재하려고 했던 것에 반해, 어린 시절의 화완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양보하려 하지 않아 남매 사이에 갈등을 유발했던 듯하다. 그러나 혼인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는 지나친 편애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이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눈치가 생겼고, 남편인 정치달도 화완옹주에게 영조의 사랑을 형제들과 나누라 조언하였다. 한중록의 기록에도 "정치달이 화완옹주에게 영조의 편애가 쏟아지고 사도세자에게는 자비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인지 화완옹주는 1756년에 영조가 사도세자명릉 수행을 허락하도록 영조를 설득하는 등 사도세자의 편에 서서 그와 영조 사이를 중재하려 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도 이에 대해 화완옹주에게 매우 고마워하였으며, 얼마 후 화완옹주가 첫 딸을 순산한 것도 매우 축하하였다고 전해진다.

2.3. 과부가 되다

그러나 이듬해 1월에 화완옹주의 딸은 생후 5개월 만에 요절하고, 다음 달인 2월 15일에는 남편 정치달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날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도 사망했는데, 영조는 아내의 죽음을 내팽개쳐 두고 사별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런 일화를 보면 그 유별난 딸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다. 반대로 얼마나 정성왕후가 홀대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대간은 물론이고 각 대신들도 당시 반응을 보면, 해도 너무하다며 경악하고 옷자락 부여잡고 늘어지는 수준으로 격렬하게 행차를 반대했는데도 영조는 이를 무시하고 행차를 강행했다.

또한, 출가한 왕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대로 사가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나, 영조는 화완옹주를 염려하여 관례를 깨고 옹주를 다시 입궁시켜 궁에서 살게 했다. 다시 입궁하여 영조의 바로 곁에서 총애를 받게 되기 때문인지, 남편과 자식을 잃어서 부모의 애정이 고팠기 때문인지 화완옹주는 다시 영조의 편애에 집착하기 시작했던 듯하다.

2.4. 조카에게 집착하다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정조에게도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한다. 한중록을 보면 친모인 혜경궁 홍씨보다 더 세세하게 신경쓰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조카며느리인 효의왕후(당시에는 세손빈)에게도 자신이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면서 심하게 구박했다고. 혜경궁 홍씨는 화완옹주가 정조의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온갖 사람, 심지어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고모에게 정조가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조카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은, 당연히 남편과 사별한 혜경궁 홍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2.5. 유배

정조의 즉위 과정에서 정조와 척을 진 것은 사실이기에, 정조 즉위 직후 화완옹주 역시 양자인 정후겸, 비슷한 혐의를 받고 있는 홍인한 등과 함께 죄인으로 몰려 탄핵당했다. 실제로 본인도 "아바마마가 저렇게 정정한데 대리청정이 웬 말이냐?!"며 대리청정을 반대한 전력이 있으니,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논의 끝에 옹주의 신분을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뭍으로 옮겨져 파주로 이배되었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약을 받은 것은 양자인 정후겸 뿐이고 화완옹주는 계속 유형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6. 말년

정조 원년에 귀양을 갔다가 23년이 지나고 나서야 석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정조도 "정처[4]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오랜 귀양에서 풀려나기는 한 것 같다. 하지만 왕실 인물임에도 졸기는 없다. 이것으로 볼 때, 끝까지 옹주의 신분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1808년 5월 17일자에 기록된 순조 실록에서 대신들이 "정처가 죽어 더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3. 평가

3.1. 근친상간?

여담이지만 한중록을 통해 화완옹주와 사도세자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 가능성을 제시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 근거라는게 겨우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궁에만 오면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 정도의 문구밖에 없다. 상상력이 뛰어난 건 좋지만 너무 지나친 비약이 아닌지. 근데 조선조에 이정도 문구면 충분히 노골적인 묘사 아닌가? 때로는 화완옹주가 정조에게 집착하는 모습과 영조가 화완옹주를 사도세자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습을 근거 삼기도 한다.[5] 이에 대해서 영조에게 편집성 인격장애가 의심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아끼는 딸 화완옹주가 세자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세자를 증오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올 수 있다.

한편 한중록에는 사도세자는 화평옹주화협옹주와는 달리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상단에 나오다시피 아버지와 남동생 사이의 중재에 신경을 썼던 화평옹주와 아버지에게 무시당해서 서로간에 동병상련을 느끼던 화협옹주와 달리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언니처럼 중재에 별 신경을 안 썼기에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사도 세자가 그런 화완옹주를 밉살스럽게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3.2. 묘사

흔히 각종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화완옹주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사도세자 사후에는 조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화완옹주의 시가(媤家)는 소론[6]였으며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시누이 화완옹주를 정처[7]라 칭하며 싫어했던[8] 혜경궁 홍씨도 그 점만은 명확히 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정조의 왕위 계승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정조가 홍인한-정후겸의 연합 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홍인한과 정후겸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고, 화완옹주도 정조에게 "주상께서 정정하신데 마땅히 대리청정의 명을 사양하는 것이 옳다."고 옆에서 부추겼다. 어쨌거나 정후겸, 화완옹주는 정조에게 크게 척을 지지 않았고 홍인한이 주도적으로 정조를 공격했지만, 영조가 총애하는 적법한 후계자에게 반기를 든 것은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조는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홍인한과 정후겸은 모조리 숙청됐다.

4. 창작물에서

정조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정후겸의 양모인데다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의 영향으로 정조를 다루는 사극에서는 거의 악의 축으로 취급받는다. 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한 관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찾기가 어렵다. 유일한 예가 대왕의 길인데, 여기서는 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한 관계가 구현되었다.

  • 맹꽁이 서당에서는 노론파와 함께 사약을 받고 죽는 걸로 묘사되었다.
  •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MBC) / 이상숙 - 내내 아버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며,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세손(정조(조선))의 일기장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내용이 있다고 일러바치는 등 정말 악랄하게 각색되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도세자(최수종 분)가 침소로 쳐들어와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행동을 조심하라고 할 정도.
  • 이산(MBC) / 성현아 - 정후겸과 함께 정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정조 즉위 직후 귀양을 가며 하차.
  • 화성에서 꿈꾸다(뮤지컬) - 정조에게 끝까지 발악하다 귀양을 가는 역으로 그려진다.
  •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KBS) / 박소담 세자가 폭주할 경우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정도로 묘사된다.[9] 그예로 영빈 이씨의 생일날 세자가 가마를 준비했는데, 그 가마가 중전만이 탈 수 있는 화려한 가마였다. 영빈은 중전만이 타는 가마라면서 신분에 맞지 않으므로 세자에게 탈 수 없다고 하자 세자가 폭발하여 칼을 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외에도 세자가 내관을 죽이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 시체를 자신의 침소에 넣어놨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을 처리해 주고 위로해주는 명백한 아군으로 묘사된다.
  • 사도 / 진지희 - 붉은 달과 이 작품은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출간해 노론 음모론이 만연했던 창작 분위기에서 노론 음모론을 전격 배제한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 역시 세자와 옹주의 관계가 나쁘지 않게 그려지는 작품. 잘 알려진 대로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모습도 나오지만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을 못 이기고 칼까지 들고 폭주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기함할 때 화완옹주만이 '자신이 중재할테니 일단 진정해 달라'고 간곡히 설득하는 모습도 나온다.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조카인 세손 정조에게 매달리며 집착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1. [1] 사실 3녀가 아니라 5녀이다. 기록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1왕자 5왕녀를 낳았다. 그러나 화평옹주 뒤로 태어난 2왕녀와 3왕녀는 옹주로 봉해지기 전에 유아기 때 일찍 죽었다고 한다. 이후 1733년부터 2년 터울로 4녀 화협옹주, 고명아들 사도세자, 5녀 화완옹주가 태어났으며 화협옹주와 화완옹주가 차녀, 3녀로 올라섰다.
  2. [2] 그러나 또 딸 중에서도 화협옹주는 매우 미워했다.
  3. [3] 38세에 죽었으니 요절한 다른 자매들에 비하면 오래 산 편이다. 남편 김한신이 죽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곡기를 끊어 사실상 자살했다. 정조 대에 열녀로 봉해졌다. 조선 왕녀들 중 유일한 열녀이다.
  4. [4] 정씨, 즉 정치달의 아내라는 뜻.
  5. [5] 배경은 약간 다르지만 연산군과 숙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관계도 이럴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박씨를 범해서 아기를 임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정사에는 없다. 다만 신하들이 지나치다며 지적할 정도로 연산군이 박씨에게 각종 물품을 많이 하사하고 세자의 교육을 맡기는 등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는 기록은 있다.
  6. [6] 흔히 노론파로 알려졌지만, 화완옹주의 시가는 엄연한 소론이었다.
  7. [7] 鄭妻. '정씨의 처'라는 뜻으로, 옹주에서 폐해진 뒤 이런 호칭으로 불렸다.
  8. [8] 혜경궁 홍씨가 화완옹주를 싫어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때 화완옹주는 이미 옹주 직위를 박탈당해 정처가 공식 명칭이었기 때문에 화완옹주를 정처라 부른 부분이 혜경궁 홍씨의 화완옹주에 대한 감정의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9. [9]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아버지(영조)는 갈등의 대상이고 어머니(영빈 이씨)는 후궁출신, 혜경궁 홍씨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부인일 뿐이지만, 화완옹주는 자신과 같은 왕족이자 모든것을 이해해주는 자기편으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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