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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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황석영 (黃晳暎)

본명

황수영

출생

1943년 1월 4일 (76세)
만주국 창춘 시

학력

경복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1]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명예학사[2]

첫 작품

입석 부근 (1962)

최근작

해질 무렵 (2015)

웹사이트

블로그

제4회 만해문학상 수상

고은
(1988)

황석영
무기의 그늘
(1989)

현기영
(1990)

1. 소개
2. 생애
2.1. 사고를 부르는 남자
3. 표절 논란
4. 작품 목록
4.1. 소설
4.2. 비소설
5. 트리비아
6. 같이 보기

1. 소개

한국의 소설가, 본명은 황수영,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3학년 중퇴. 모교에서 명예학사 졸업장을 받았다.

2. 생애

1943년 12월 4일 만주 창춘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 6.25 전쟁이 터졌는데, 가족들이 피난길에 오른 와중에 인천에 배를 타러 가서 한밤중에 배수구에 숨어 있다가 한 무리의 군복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나왔고, 그들이 "이승만을 지지하느냐, 김일성을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황석영의 아버지가 "저희는 정치라고는 전혀 모르는 양민입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들어 가라"며 보내주었다고 한다.#[3]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4.19 혁명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때 친구가 총에 맞고 사망했다고.

62년 고교를 자퇴, 같은 해에 사상계에서 '입석 부근'이라는 단편 소설로 등단했다.

그전에 이미 '부활이전'이라는 단편으로 지방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전적이 있다. 경복고등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에 황순원을 비롯한 원로들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교내 문학상에 투고해서 당선했던 작품인데, 심사위원들에게서 '이건 고등학생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라는 평을 들었다. 황석영의 등단작인 입석 부근을 처음 읽어본 심사위원들 역시 반응이 '글에서 원숙미가 느껴지는게 40대 중년 남성의 작품 같다.'였었다. 그런데 당선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인물은 빡빡머리의 고3... 심사위원들이 다들 기절초풍을 했다고.

그런데 '부활이전'이 다른 이에게 도용되어서 지방의 한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본인이 응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서 당선이 취소되었다.

그리고 한참 방황하던 끝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다. 군 수사대로 복무하며 베트남 전쟁의 배후에 대해서 파악하게 되었으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의 그늘'을 쓴다. 본인이 말하기를 그전까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역사나 정치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비록 베트남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런 역사관은 <한씨 연대기> 같은 나중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황석영의 누나가 군의 높으신 분과 사귀는 관계였기 때문에 황석영이 군 수사대로 전출되는 특혜를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한겨레21인터뷰

특혜 여부와는 별개로 본인이 PTSD를 앓았다는 전적이 있다고 알려져있었다. 잠결에 자신의 곁을 지나치는 누이를 꿈속에서 맞닥뜨린 적군으로 오인하고 화병으로 누이의 머리를 내리쳤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는 적과 맞딱뜨린 적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낙타누깔'이나 '돌아온 사람' 같은 작품에서는 PTSD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데, 한겨레21과의 인터뷰가 맞다면 본인 경험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

그 외에도 한겨레21과 베트남전관련 인터뷰를 했는데, 중대기지에서의 방어전술을 구사한 한국군의 전술과는 거의 상관도 없는 웨스트모어랜드의 색적섬멸 등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참전당시 위험지역에 투입되거나 작전을 직접 수행한 적은 없는 것으로도 생각되며, 이후로도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도 생각된다. 본인스스로도 짧게 투입된 전투에서조차 적을 본 적도 없다고 했고, 이후는 후방에서 복무했다. 관련인터뷰#

제대하고 귀국한 뒤에 본격적으로 소설가로 활동한다. 2000년대 이후에 황석영을 알게 된 젊은 독자층에서는 황석영을 그저 여러 가지 잡다한 역사적 사건을 체험한 이야기꾼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단편 소설을 위주로 치열하게 문학 세계를 형성했던 작가였다. 프랑스에 소개되었을 때 한 문예지로부터 "고통을 지나치길 거부하는 글쓰기, 그러나 동시에 파멸에 굴복당하길 또한 거부하는 글쓰기.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위대한 도전이 될 이러한 글쓰기를 황석영은 성취하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70년대 이후부터는 광주로 내려가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한다. 본인이 밝히기를 <무기의 그늘>과 <장길산>이 공식적으로 완간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지만 실질적으로는 70년대 말에 집필이 끝난 상태였으며 80년대 초반의 대부분을 민중 운동에 할애했다고. 마찬가지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 조직에 몸 담았던 전용호씨는 "1978년부터 1986년 광주를 떠나기 전까지 황석영은 작가이기 전에 광주의 민중문화 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가였다"고 말한다.

1985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2만권이 압수되면서 금서로 지정되고, 나병식 풀빛출판사 사장을 포함한 관계자가 대거 구속되었고, 황석영 본인도 경범죄처벌법상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류를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넘어 넘어>로 불리던 이 책은 학생운동권과 민주화운동가들의 필독서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져나가면서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초판은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으로 되어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저간의 사정이 복잡하다.

1989년 3월에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에 응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대변인 자격으로 일본과 중국을 경유해서 방북하였다. 이후 1989년 한해에만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 전대협 대표 임수경, 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들의 방북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 이전해 7월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 동포의 상호교류 및 해외동포의 남북 자유왕래 개방, 이산가족 생사 확인 등을 담고 있는 7.7선언을 발표하고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 및 동구권,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자, 민간 차원에서의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황석영을 포함한 민족문학작가회의도 남북 작가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황석영이 방북을 한 것이다.

당시 황석영은 방북 한달전에 안기부와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쪽에 북한 방문 계획을 사전에 통보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가 서로 엇갈리는데, 황석영은 방북 직후 "이종찬 사무총장, 안기부 관계자들에게 분명히 방문의사를 타진해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종찬 의원은 단순히 방북계획을 통보받았을 뿐이며 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다고 해명했다. 이 때문에 이종찬 사무총장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더불어 둘의 만남을 주선했던 김상현 평민당 원내총무도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다. 정부에선 북의 대남선전공세에 말려들 수 있다면서 방북을 반대했는데 황석영쪽에서 일방적으로 방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여튼 정권쪽에서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건 사실로 보인다. 설마 진짜로 갈지 몰랐겠지... 황석영은 1988년부터 공공연히 '내년에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황석영은 평양에 머무르면서 북쪽과 여러가지 문화교류, 남북협력 사업에 합의하였지만, 남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하겠다는 강경방침을 세우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과 독일 등을 떠돌아 다녔다. 이 기간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4차례 추가 방북하였으며 (물론 정부 허가는 당연히 없고) 김일성도 여러차례 만나서 추켜세워주고 범민족대회 등의 행사에 관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북 당시 경험을 다룬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창작과비평에 연재했으나 이시영 주간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해당 작품은 이적표현물로 판정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귀국해서 국가보안법의 잠입탈출죄 등으로 수감되었다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1998년 4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2000년 8월 8.15기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허가를 받은 공식방북단 300여명의 일원으로 다시 북한을 방문하였다. 기념행사 과정에서 방북단 내부에서 남남갈등이 벌어지는 등 여러가지 평지풍파가 있었다. 하여튼 사고를 몰고 다니는 남자

방북 이후 '선명성 경쟁, 좌경화가 문제다'라면서 급진적인 통일운동단체들 특히 자신이 과거에 관여했던 범민련 등을 비판하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남한 통일운동, 민주화운동 세력 사이에서 범민련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되었다. 첫 번째는 남북 민간 차원의 순수한 통일운동체를 표방하지만 북한에 순수한 민간조직이 어디 있냐는 비판으로 단체 창립때부터 나온 것이다.

두 번째는 의도는 민간통일운동이었지만, 실제로는 북의 대남공작 거점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이다. 범민련 초대 위원장이었던 문익환이 이런 관점에서 범민련 해산과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결성을 준비하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흐지부지 되버렸다.

세 번째는 극단적인 통일지상주의자, NL강경주사파들이 범민련을 장악하면서 북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북한딸랑이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일본 교도통신 기자 세키가와 나쓰오가 저서 <북조선: 마지막 신의 나라>[4]에서 그를 깠다.

황석영은 2000년 방북 과정에서 범민련 등의 노골적인 종북행보가 대다수 대중들의 반감을 사고, 조중동과 우익에게 색깔론의 빌미를 준다고 우려했다. 이후로는 범민련, 통일연대 등과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 운동가로서의 활동과는 별개로 창작욕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 쓴 창작물들은 몇몇 단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프로파간다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한 것은 북한을 방문한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을 마친 뒤다.

...그러나 2009년 결국 이런 길을 걸음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누굴 지지하느냐야 사람 마음이지만 때가 때였던지라...결국 진중권에게 비판을 받았다. 해서 5월 15일 한겨레와 이런 인터뷰를 하여 자신의 뜻이 와전되었다는 뜻을 밝혔다.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같은 시기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됐다.

스스로를 B급이라고 자처하는 급진좌파 김규항 같은 경우는 손학규를 지지하던 사람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게 어째서 변절이냐고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황석영과 손학규는 1970년대 노동운동을 위해서 같은 공장에 위장취업해서 활동하기도 했고 그 뒤도 평생 친분을 유지한 사이. 손학규의 2007년 한나라당 탈당도 황석영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위의 행동을 노벨상을 타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정작 황석영 본인은 자신은 노벨 문학상이랑 얽히는 게 싫어서 스웨덴에서 책이 번역되었을 때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황석영은 2000년대 초반에 노벨 문학상 타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며 고은을 깐 적도 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가 진작 노벨상을 받아야 했어야 할 사람으로 르 클레지오를, 앞으로 노벨문학상을 탈 사람으로 오르한 파묵, 모옌, 황석영을 꼽았는데 앞의 세 사람은 각각 2008년, 2006년, 2012년에 모두 수상했다. 유일하게 황석영만 못타고 있는 상황.

저 행보를 걷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MB정권이 희망이 없다며 지지를 철회했다. 기고문 지지 철회라고 해도 MB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실망을 표한 것 뿐이다. 다만 남북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아직 발생하기 전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본과 북한의 노동력으로 몽골을 개발시키겠다는 '알타이 연합론'은 아직도 지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환빠와 엮고 있는데 어디에서도 대쥬신이나 환단고기 언급을 한 적 없으니 이유없는 매도는 지양해야 한다.

2012년 문학인생 50주년 맞이 축하연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 후보, 이수호 서울시교육감 후보 지지선언을 하였다.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신 건 아닐까

2017년 9월 6일과 1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2회에 걸쳐 출연, 패널들에게 황석영 자신의 문학 인생과 자신이 겪었던 한국근현대사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특히 광주항쟁을 회고한 두 번째 방송은 시청률 5.6%로 방송 당일 자체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같은 시기에 개봉되어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영향도 있었던 듯 하다.

2019년 10월 7일 공지영 등 작가 1276명과 함께 대표발의자로 조국 장관 지지성명을 냈고, 취재진을 만나 서초동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실을 언급하며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기사

2.1. 사고를 부르는 남자

2008년 MBC의 예능 프로그램 강호동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가[5] 대중에게 큰 어필을 하였다. 유튜브로도 볼 수 있었는데 현재 해당 유튜브는 저작권 문제로 계정이 막혀서 볼 수 없고,[6] 인터넷에 해당 방송분의 캡처본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찾아보면 꽤 나온다.

오죽하면 사신으로 유명한 김전일코난이 명함 못 내밀 정도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을 정도다. 둥신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상 따지면 둥신의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니 오히려 이쪽이 원류. 한 역술인은 파괴왕 주호민과 비교를 해 보기도 했다. 링크 우스개로 "황석영 가는 데 가지 마라. 큰일 난다"는 말도 돌았다고...

참고로 이 방송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주가 1000이 무너지는 등 심각한 악재가 잇달았고 방송한 MBC 또한 PD수첩 문제 등으로 압수 수색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무릎팍도사의 시청률도 계속 하향세를 겪다가 한참 뒤에나 회복할 수 있었다...믿거나 말거나.

3. 표절 논란

2010년에는 인터파크에서 '강남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다가 탈고했다. 강남 형성사를 둘러싼 근현대사에 대해 해석한 작품으로 6월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중심으로 그 이전의 이야기로 거슬러올라가며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강남'이라는 욕망의 소용돌이를 어떻게 형성했으며, 그 가운데에서 어떤 식으로 괴물로 변해가는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월간조선은 황석영 비판 기사를 쓰면서 강남몽이 신동아 기자의 르포를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황석영은 출처 표기를 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표절 여부는 신동아 기사를 직접 보고 판단할 것. 당시 황석영 측의 반응.

이에 대해 신동아는 12월호에서 해명이 명쾌하지 않다고 재차 비판하면서, 황석영의 다른 작품들에도 전방위적인 의혹을 제기하였다.명쾌하지 않은 강남몽 해몽 이 기사 내용중 <넘어 넘어>에 관련한 부분은 해당 책의 원저자들이 다시 반박기사를 내었다. 아래 내용 참조. 그 외 어둠의 자식들, 삼국지 등 다른 작품에 관련한 의혹제기는 흐지부지된 듯 하다.

4. 작품 목록

소설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냐는 리얼리즘 논쟁이 일었던 1970년대에, 황석영의 작품은 참여문학 계열의 비평가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모더니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경우엔 '노동자의 삶을 다루려면 적어도 노동자의 언어가 반영되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리얼리즘 계열 평론가들한테 외면을 받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예전 같이 딱딱한 리얼리즘 소설이 통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상상력이 가미된 작품을 쓰려고 시도 중이라고 한다.

4.1. 소설

책 표지

제목

출판년도

설명

객지

1971

단편집의 표제작이며, 단편집에는 <객지>, <한씨연대기>, <아우를 위하여>, <낙타누깔>, <이웃 사람>, <잡초>, <돼지꿈>, <삼포 가는 길>, <섬섬옥수>, <장사의 꿈>, <탑>, <입석부근> 등 황석영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단편 12개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황석영의 가장 초기작인 입석 부근은 작가 본인이 학교를 자퇴하고 일반적인 학생의 삶에서 떨어져나가 방황하던 시절을 그린 작품으로,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산을 타고 다니며 학생 시절에 느끼던 아웃사이더로서의 고립감을 암벽 등반이라는 육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최근에 발표한 성장 소설인 개밥바라기 별보다 이 작품을 더 높게 치는 사람들도 적잖다.

아우를 위하여

1972

황석영의 단편집으로, <아우를 위하여>, <지붕 위의 전투>, <남매>, <입석 부근>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무기의 그늘 上,下

1985

베트남전에서 작가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소설. 후방으로 전입된 보병 안영규가 돈으로 엉켜 있는 베트남 전쟁의 내막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만해문학상 수상작이다. 또한 2012년 스웨덴에 번역출간되어 호평 받고 있다.

장길산 1~12

1974~1984

홍명희의 <임꺽정>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대표 대하역사소설 중 하나다. 198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오래된 정원 上,下

2000

활동가 오현우가 복역을 마치고 나서 자신이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숨어지내던 장소인 갈뫼로 돌아가서 지난 나날을 돌이키는 내용이며, 황석영 작품세계에서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이문열이 '한국 문학의 거장이 돌아왔다'고 치켜세우며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던 동인문학상 수상 후보작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황석영은 '나는 김동인의 문학적인 업적에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 파시즘에 기생해서 자라난 조선일보가 주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수상 후보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정과리(동인문학상 심사위원 중 하나인 비평가) 같은 경우엔 '사실 관계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그 사실 관계가 부적확하다'며 비판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황석영은 80년대에 광주에서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주인공 오현우가 활동하는 서울의 운동권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다. 그해 동인문학상 수상작은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에 돌아갔고, 이 작품은 단재상과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삼포 가는 길

2000

황석영의 중단편집이며, <한씨연대기>, <낙타누깔>, <밀살>, <기념사진>, <이웃 사람>, <잡초>, <삼포 가는 길>[7], <돼지꿈>, <야근>,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섬섬옥수>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몰개월의 새

2001

황석영의 중단편집이며, <장사의 꿈>, <심판의 집>, <가객>, <철길>, <몰개월의 새>, <한 등>, <돛>, <맨드라미 피고 지고>, <골짜기>, <열애>의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손님

2001

신천군 사건을 소설화한 작품. 신천군 사건의 생존자와 살해 당한 자들의 망령이 한 데 모여서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큰 틀에서 사건을 복원시키는 내용이다. <황해도 진지노귀굿>에 맞춰서 쓰여 있고, 오에 겐자부로는 이 구성을 두고 '황석영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유한 작가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칭찬한다. 대산 문학상 수상작.

모랫말 아이들

2001

황석영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이다. 동화답게 이전 소설에 비해 글씨 크기가 큼직하고 페이지 수도 적으며, 페이지 중간중간에 삽화가 들어있다.

심청, 연꽃의 길

2007

2003년에 출간된 『심청』의 개정판으로, 이전에 제목에 빠졌던 '연꽃의 길'을 황석영의 원래 의도대로 붙여 출간하였다. 심청전의 리얼리즘을 극대화시킨 작품이다. 그리고 엄청 야하다

바리데기

2007

바리공주 신화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이 즈음부터 다시금 언론매체 톱에 황석영의 이름이 많이 불리운다.

개밥바라기 별

2008

자전적 소설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연재된 것으로 유명하며 황석영의 2000년대 작품중에 가장 유명하다. 블로그 연재를 한 기성작가중에 블로그를 가장 잘 활용한 사례로 꼽히며 이때 신진독자들을 많이 만들었고 무릎팍 도사에까지 출연하게 된다.

강남몽

2010

'강남의 꿈'을 좇아 달려온 인물들을 통해 수십년에 걸친 남한 자본주의 근대화의 숨가쁜 여정과 오점투성이의 근현대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였다고 하지만, 위에 서술한 표절파문을 일으키면서 상당히 빛이 바랜 작품이기도 하다.

낯익은 세상

2011

등단 후 첫 전작소설로 연재를 따로 하지 않고 바로 출간되었다. 인터뷰를 보면 "앞으로 연재 같은 건 당분간 안 할 생각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붙잡고 앉아서 끝을 내는, 탈고가 끝난 다음에 세상에 내놓는 전작 작업을 계속할 생각입니다."라는데 바로 다음해에 여울물 소리가 나와 팽(...)

여울물 소리

2012

등단 50주년 기념 소설. 2월에 구상을 밝히고, 4월 2일에 스타트를 끊었다. 매화마다 단아한 일러스트가 들어가는 것이 포인트. 2012년 11월 19일에 출간된 뒤에 곧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만 출판사가 책을 사재기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었다. 황석영은 책을 절판시키고 출판사 대표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강경 대응에 들어갔다. 근데 사장은 사재기 한 적 없단다. 이인간이. 결국 출판사를 바꿔 2014년 11월 창작과 비평사에서 재출간되었다.

해질 무렵

2015

4.2. 비소설

책 표지

제목

출판년도

설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985[8]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물. 1985년 풀빛출판사에서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으로 나왔다. 2010년경부터 신동아는 황석영이 북한 책 두 권을 자기 이름으로 짜집기해서 사실인양 유포했다는 공격을 퍼부었으나# 이미 책 초판부터 황석영은 자신은 기록을 취합하고, 문장을 세련되게 다듬는 수준의 편집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다. 신동아의 왜곡기사 이후 이 책의 출판에 관여한 인사들이 저간의 사정을 밝혔는데 5.18의 현장에 있던 광주지역 청년들이 은밀히 취재해서 기록한 자료를 황석영이 편집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원기록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설가와 민주화운동가로 이름이 높던 황석영이 방패막이 역할을 떠맡은 것이라고. “광주의 이름 없는 청년들이 썼다고 하면 기록을 믿었겠나?” 또한 이 책의 인세는 전부 광주권 민주화운동 활동자금으로 쓰였다고 밝혔다. &lt;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gt; 집필과 경위

아들을 위하여

2000

황석영의 에세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2000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원래 이 에세이집은 1989년 창비에 연재된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1994년에 황석영석방대책위원회가 엮어서 냈다가, 2000년에 이룸에서 다시 낸 것이다.

장산곶매

2000

황석영의 희곡전집.

황석영의 맛과 추억

2002

2001년 5월에 발간되었던 <노티를 꼭 한 점 먹고 싶구나>의 개정판. 표지와 구성 순서만 조금 바뀌었을뿐 내용은 같다. 소설가 황석영이 자신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는 맛의 기억에 얽힌 애틋한 추억들을 모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냈다.

삼국지 1~10

2003

자세한 내용은 황석영 삼국지 참고.

수인(囚人) 1, 2

2017

황석영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5. 트리비아

  • 소설 <강남몽>과 관련하여 표절 시비가 붙기도 했다.

  • <강남몽> 파문으로 신동아와 정면충돌했지만, 2008년 '개밥바라기' 출판때만 해도 신동아쪽에서 호의적인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세계시민’ 황석영'
  • 한편, <님을 위한 교향시>에 삽입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 황석영의 방북은 1989년~1993년 사이이고 '임을 위한 교향시'는 1991년에 나왔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에 나온 노래다.황석영은 1989년 이후에도 4차례 추가 방북하였다. 자세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 문서와 임을 위한 행진곡/논란 문서 참조.
  • 황석영은 약장수들이 하는 재담을 매우 잘해서 1970년대부터 이미 '황구라'란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한글 타자기를 개발한 공병우에게 오해아닌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장길산 연재로 큰 인기를 얻을 당시 한 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재담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마침 술집에 공병우와 친구들이 있었다. 공병우가 한참 재담을 재미있게 들은 뒤 황석영을 불러서 '자네는 무슨 일을 하나? 그리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 와중에도 장난기를 멈추지 않던 황석영은 자신의 직업이 약장수이며, 이름이 황석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병우는 "자네 같은 건달이 약이나 팔 일이지, 어찌 황석영 같은 작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가?"라고 호통을 쳤다. 잘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할 것 같아서 황석영은 그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단다.
  • 같은 소설가인 김훈(소설가)과는 '악연'이 있다. 황석영이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할 당시 김훈은 이를 담당한 기자였는데 주로 한 일이 원고 펑크낸 황석영 잡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자유분방함이 하늘을 찌르는 황석영답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전화나 인편 등으로 원고를 신문사에 보내는 형태로 연재를 했는데 이러다 보니 연재가 툭하면 펑크가 났다. 당시엔 팩스조차 매우 귀한 시대라서 전화로 직접 원고를 구술해서 기자에게 받아적게 한 적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지방에서 거는 공중전화라는 게 상태가 안 좋아서 전화 한 통화 하려면 소리를 있는 대로 빽빽 질러야 했는데(검정고무신 외갓집 에피소드에도 이를 반영한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서 욕설이나 음담패설 섞인 대사를 할라치면 통화하면서 여직원이 그걸 받아적다 말고 그만 펑펑 우는 일도 있었다고.
황석영의 말로는 그 원고를 중간에 잃어버리거나 해서 펑크내고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데...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밝힌 에피소드로, 황석영 선생은 "그때 전국에서 장길산 원고 배송 해 주신 분들 따로 한 번 모아서 축하 모임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때문에 김훈이 직접 황석영을 쫒아가서 원고를 구하는 일이 잦았다. 잡다잡다 못해서 연재가 멈출 위기에 처하면 다른 기자와 함께 그 동안의 연재 분량을 기초로 줄거리 요약글을 써서 땜질하는 일도 김훈의 몫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훈은 황석영에 대한 원한(?)이 대단하다고. 황석영 본인이 무릎팍도사에 출현해서 남긴 말에 의하면, 아직도 함께 술을 마시다가 이 일을 떠올리면 "그때 잡아서 죽여버리는 건데"라는 농담까지 던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 함께 술마시다가 농담까지 던질 정도면 기본적인 친분은 남아있는 듯 하다.
  • 중학생 시절 수영선수였다. 하루는 한참 수영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데 웬 예쁜 누나가 오더니 '선글라스를 물에 빠뜨렸는데 좀 찾아달라'고 해서 선글라스를 찾아줬다. 사실 곧바로 발견했지만 괜히 애쓴 척을 하려고 여기 저기 찾는 시늉을 했다고. 참고로 그 예쁜 누나는 당시 '동양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받던 톱 영화배우 김지미. 수영장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날 예쁜 누나가 고맙다며 촬영장으로 데려가서 참외도 깎아주었다고 MBC 무릎팍 도사 에서 회상하였다.
  • "오늘날 한국 문학이 이 꼴이 된 것은 문예창작학과 때문"이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정확히는 소설의 기본은 서사 즉 이야기인데 요즘 글 쓴다고 나오는 젊은이들 작품은 대부분 서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공모전에 당선되기 좋은', 또는 '(묘사 같은) 기술에만 편중되어 있지만 실속이라고는 없는' 작품들만 쓸 뿐이라며, 서사를 잘 쓰려면 본인이 실생활에서 직접 이것저것 부딪쳐 보고 체득한 경험,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서사를 지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니 자질구레한 문장 묘사에나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이는 문학 기술밖에 가르치지 않는 문예창작학과 잘못도 있다는 것.# 이에 시인 권혁웅의 반박을 받기도 했다.#
  • 소설가 이문열과는 좌우를 대표하는 문인으로서 서로 대립항을 띄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황석영 본인은 이런 시각을 꺼리는 듯하다. 황석영은 2017년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자신의 자서전 《수인1: 경계를 넘다》에서 본인이 이문열과 겪은 한 일화를 가지고 다음과 같은 회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문열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대구에서였다. 당시에 고은 시인이 광주항쟁 이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로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중이었다. 사건은 별게 아니었지만 일반면회가 금지되어 있던 당시에 동료를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문인들과 언론인, 교수 등이 어울려 대구에 몰려갔다.

마침 대구에는 영남대학교를 비롯해 계명대 경북대 등지에서 교수직을 하는 지인들과 문인들도 많아서 형식적인 재판이 끝난 뒤에 술집에 모여보니 삼십 명이 넘었다. 나도 광주에서 송기숙과 함께 갔었고 마침 석방되어 있던 김지하이시영, 조태일,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김종철 등등 여럿이 있었다. 이튿날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는데 오후 뒤늦게 이문열이 대구의 기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나는 그가 민음사에서 '사람의 아들'을 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의 활발한 창작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문단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 무심하게 지나쳐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있었는데 이문열 청년이 술이 올라서 김지하와 더불어 이야기를 했다. 이문열은 '삼국사기의 역사적 관점이 글렀다고 그러는데 문장은 고문 중에서 가장 좋다'라고 말했다. 무슨 얘기인지 들으면 대충 뜻을 알 만한 말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서예 얘기를 나누다가 이문열이 '이완용은 매국노였지만 당대의 명필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듣다못하여 나도 취한 김에 '야 이 사람아 그러면 일본군 총 맞아 죽은 동학농민군 돌쇠가 죽으면서 이완용은 명필이다 외치고 죽겠냐' 그랬던 기억이 난다. 김지하가 '니가 서예에 대하여 뭘 아냐'고 하자 나는 홧김에 '니가 배웠다는 미학이 경성제대 창설 이래 가장 쓰잘데기없는 학문이라는 건 안다'고 대꾸했고 술자리는 파장이 되었다.

나는 이문열에게 '이제 시작하는 모양인데 모든 건 자기 선택의 문제' 라고 말했다. 나는 애초에 논쟁적인 사람이 아니다. 공격받고 오해되는 일이 있어도 그냥 흘려버리고 잊는다. 이문열이 80년대 이래로 치열한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체제의 편에 서서 여러 가지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했다. 솔직히 게을러서 그의 작품들은 거의 읽을 인연도 없었다.

내가 방북하고 베를린 거쳐서 뉴욕에 체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마도 1992년이었다. 어느날 이문열이 뉴욕에 왔다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나는 외롭던 시절이고 문인이 해외에서 나를 찾은 것도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그래서 부근에 사는 동창에게 천 불을 꿔가지고 맨해튼으로 나갔다. 아무리 망명자 신세라지만 내가 선배이니 마땅히 술은 내가 한잔 사야겠다는 허세였다. 술이 몇 잔 돌아간 뒤에 이문열이 언제 귀국할 거냐고 물어 왔고 나는 그냥 때를 보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문열은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북한체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격렬하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무덤덤하게 듣고 있다가 나도 이형과 같은 생각이라고 대꾸했다. 북한은 사회주의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실상 군사파시즘의 모습을 띄는 독재체제라고.

이문열이 물었다. 그럼 왜 방북했냐고.

나는 언제나처럼 '민주화와 통일은 한몸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성숙되는 것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는힘이 되며 그것이 평화적 통일의 길이다' 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피차 술이 좀 취하고 나서 이문열이 문득 월북한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나에게 북한을 통해서 좀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언제 뉴욕에 다시 오느냐고 물었더니 일주일 뒤에 온다고 했다. 그럼 그때 연락하라고 일어둔 뒤 뉴욕 UN으로 파견된 북한대표부에 전화를 걸어 이문열 부친의 월북 시기와 인적사항을 적어서 팩스를 넣었다. 좀 기다려보라더니 사흘 뒤에 답변하는 팩스와 전화가 차례로 왔다. 팩스에는 이문열 부친의 간단한 이력과 가족관계가 적혀 있었고 생존해 있는 현주소도 나와 있었다. 일주일 후에 이문열이 뉴욕에 왔을 때 그 팩스를 보여 주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이문열의 부친 이원철은 북한에 가서 전공을 농업경제사가 아닌 수리공학으로 바꿨다. 그는 남로당에 대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정도로 대단히 유능한 지식인이었다. 원산의 어느 공업대학에 직을 얻었고 재혼하여 오 남매를 두었다. 종이에는 이문열의 배 다른 아우들 이름과 직업과 나이가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문열은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무너지듯이 허리를 굽히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처절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여 고개를 돌리고 눈시울을 닦았다. 한참 뒤에 격정의 파도가 가라앉고 이문열은 술 한 잔을 넘기고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감쟁이, 우리 어머니는 진작 당신이 재혼할 줄 알고 있습디다' 나는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오면 아버지와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의 낚시일 수도 있다. 라고 말해주었다.

그 후 얼마 있다 우리 측 정보 영사는 힐난조로 '황선생, 그러다가 어떻게 귀국하려고 그럽니까. 왜 월북 권유를 하고 다니쇼?'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일도 없고 그럴 사람도 아니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이 모든 분단의 억압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문학에 대한 노심초사도 벗어버리고 익명의 망명자로 살아가고픈 생각도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의 망명 권유를 마다하고 무국적자로 체류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이문열의 모든 상처와 그늘은 내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누가 의도적으로 이문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게 물으면 나는 대답했다. '그는 전쟁 때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거리에서 손을 놓친 아우 같다' 라고.

아, 그리고 나는 뉴욕에서 이문열과 헤어지기 전에 말했다. 이제는 당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그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뻘이었고 훨씬 미숙했던 젊은이었다고.[9]

내가 한국에 와서 구속되었을 때 이문열은 나의 석방 촉구 성명서에 서명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와 연설하는 일에도 흔쾌히 나서 주었다. 이문열이 그러한 종류의 일에 동참한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이문열은 면회 올 때마다 자신의 책들을 한 아름씩 들여주고 갔었다. 그래서 나는 그제서야 이문열의 작품들을 읽었다.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

영웅 시대 등.

내가 석방된 뒤에 이문열은 논객이 되어 좌충우돌 논쟁을 벌이고 홍위병 사건으로 그의 책들이 화형대에 오르기도 했다. 나는 분노하여 반문화적 처사라고 입장을 밝혔지만 그래도 이문열에게 전화를 걸어 정치 칼럼은 그만 쓰고 소설만 쓰자고 했다. 언제부턴가 언론에서는 진보 보수를 갈라서 선정적으로 이문열과 나를 나란히 올려서 상징화했다. 나는 그것이 불편했고 이문열과 정치적인 맞수로 취급당하는 게 싫었다. 나는 이문열이 그놈의 물귀신 같은 '이념의 덫'에서 놓여나 자유롭게 휴머니즘의 대 벽화를 완성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나름대로 한 시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우리가 누린 모든 영욕도 그들이 준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문열의 관념 과잉인 듯한 계열의 작품들보다는 그의 자전적 요소가 엿보이는 '하구'같은 성장소설에 끌린다. 솔직하고 풋풋하며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소설의 '인생파'다운 수수함이 여운을 길게 남긴다. 언제나 그러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순정하고 비틀리지 않은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읽고 싶다.

이문열은 원래 그런 사람일 것이다.[10]

위 일화가 아니더라도 중앙일보에서 유라시아 횡단 관련한 기획 탐사를 할 때에 두 사람도 같이 가 나눈 대화를 다룬 내용에서도 나름 친분이 두텁다고 볼 수 있다.

6. 같이 보기


  1. [1] 본래 경복고등학교에 다녔으나 1962년 자퇴했다.
  2. [2] 2000년에 받았으며 실제로는 1970년 3학년 과정 중 자퇴했다.
  3. [3]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1971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4. [4] 한국에선 1993년에 연합통신 출판국이 냈다.
  5. [5] 한국 근현대사가 엄청나게 롤러코스터를 탔고 황석영 자신이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도 많다는 뜻이지만.
  6. [6] 외국에서는 볼 수 있다.
  7. [7] 본인 말로는 원고료는 선불로 받아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마감 전날에 "원고 다 되셨죠?"라는 편집부 연락 받고 급하게 써서 하루 만에 완성시킨 거라나...
  8. [8] 2017년에 창비에서 개정판이 나왔다.
  9. [9] 이문열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이문열의 작품 속 아버지상은 월북한 아버지로 인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배척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이문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는 지적이 있으며, 이문열의 정치 성향이나 우편향적인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월북한 아버지의 그림자에 쥐어 산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10. [10] 참고로 이문열은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라면?: "'가장'이란 말을 덧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여럿 있다. 하지만 거명하기는 조심스럽다. 살아있는 사람을 거론하면 줄 세우는 꼴이 될 수도 있고, 원로가 빠지면 섭섭해 할 수도 있고.(웃음). 그래도 우리 중에서는 황석영 선배가 다양성이나 기교의 화려함이나 독특한 안목, 모든 면에서 우뚝하다. 진지하게 파고 드는 걸로는 돌아가신 이청준 선생. 선생은 지겨울 정도로 세밀하게 살피고 이모저모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웃음) 최인훈 선생도 거대담론적 사고로 가공해 내는 것을 보면 언제나 감탄스럽다. 이병주 선생의 글도 그 풍려(豐麗)와 우미(優美)를 좋아한다. 특히 '지리산'은 압권이다. 자발없는 표절 시비로 상처를 입긴 했지만, 한길사에서 나온 걸 최근에 다시 봤는데 정말 잘 쓴 글이었다. 그밖에도 우리 문단은 풍성한 자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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