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권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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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胡锦涛

중화 인민 공화국 제6대 주석

임기

2003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부주석

쩡칭훙
시진핑

총리

원자바오

중국 공산당의 제8대 중앙 위원회 총 서기

임기

2002년 11월 15일 ~ 2012년 11월 15일

중국 공산당의 제7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임기

2004년 9월 19일 ~ 2012년 11월 15일

중화 인민 공화국의 제7대 부주석

임기

1998년 3월 15일 ~ 2003년 3월 15일

이름

胡锦涛 / 胡錦濤 (Hú Jǐntāo)
한국 한자음: 호금도

출생일

1942년 12월 21일 ~ (만 76세)

출생지

중화민국 장쑤성 타이저우

정당

중국공산당

학력

타이저우 중학(고교) 졸업.
칭화대학 수리 엔지니어 학부(기계 공학 전공) 졸업

종교

없음 (무신론)

신체

175cm

부모

불명

배우자

류융칭(刘永清, 1940년 10월 3일 ~ )

자녀

장남: 후하이펑(胡海峰, 1971년 11월 ~ )
장녀: 후하이칭(胡海清, 1972년 12월 ~ )

가족

불명

1. 생애
2. 소개
3. 자리에 오르기까지
4.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5.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6.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7. 미국과의 관계
8. 퇴임
9. 알고 보면 장쩌민에게 수난을 당한 10년
10. 후진타오의 이모저모

1. 생애

청소년 시절의 후진타오

후진타오와 아들

장년기 시절. 위 프로필 사진에 나온 어리버리해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꽤 잘생겼다.

2. 소개

후진타오는 1998년전국인민대표대회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 이후 2002년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 2003년에 중국의 국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2004년에 중국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이 되어 중국의 국가 지도자가 된 인물이다. 2012년까지 중국을 다스린 후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공산당 총 서기 직과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직을 시진핑에게 넘겨주었으며 국가 주석 직도 2013년 3월 퇴임하였다.

이른바 "과학적 발전관"과 "붉은 자본가", "8영 8치" 등의 아이디어를 당의 행동 강령에 집어넣으면서 명실상부하게 4세대 중국 지도자로서 역사에 남을 모양이다. 과학적 발전관은 인간을 근본으로 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내세운 발상이라고 한다. 2007년의 중국 공산당 제17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주요 전략 사상"으로 "덩샤오핑 이론"과 장쩌민의 "삼개 대표 사상"과 나란히 당 규약 중에 명기되었다. 뭔가 지도자마다 하나씩 붙이는 것 같지만 그런건 상관 없어. 뒤의 두가지 아이디어보다 원자바오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보기도 한다.

후계는 자신을 추종하는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단) 파벌인 리커창을 밀었으나 결국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손을 잡은 태자당시진핑이 되는 등 확고한 당 장악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리커창은 2인자로 차기 국무원 총리 직을 맡는 것으로 타협. 본인도 큰 미련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젊다는 자체가 시진핑 체제에 대해서는 제법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참고로 1953년생인 부주석 시진핑은 2013년 국가 주석에 취임하면 60세로 61세에 주석이 된 그보다 한살이 더 어린 셈이 된다.

러닝메이트인 국무원 총리(내각 수반)은 원자바오(온가보温家宝)로 2003년부터 10년간 계속 함께 한 것이 특징이다.

대만과 홍콩 문제, 반체제 - 사회 자유 언론에 대해서는 반체제 선동과 독립 문제만 빼면 후임인 시진핑보다 상당히 온건한 편이다. 다만 북한 핵개발 문제는 시진핑보다는 과감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것이 후진타오는 스승인 후야오방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유지 당내 민주화를 꿈꾸는 것이고 시진핑은 권위주의와 당권주의를 기반으로 중국을 다스리는 것이다.

3. 자리에 오르기까지

문화대혁명 시기 하방(下放)[1]되어 일개 노동자로 간쑤성(甘肅省)에서 말 그대로 굴림 당했다. 그러다가 성실함 등을 이유로 하급 관리직으로 올라가고, 이후 지방 시찰을 나온 후야오방의 눈에 띄어 중앙 정계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앙에서 다시 몇 년 있지 못하고 구이저우 성 당 서기로 발령되었는데, 사실상의 성 최고 책임자이기는 하나 구이저우가 깡촌 오브 깡촌이라 사실상 여기가 그의 정치적 성장의 한계점이라고 생각되었다. 거기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후야오방도 급진적 정책을 이유로 실각하여[2], 그의 실각과 비슷한 즈음에 깡촌 시짱 자치구 당 서기로 부임하는데 이것이 역으로 그의 정치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시짱 자치구 당 서기가 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에게서 과감하고 결단력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했다. 티베트인의 독립 운동이 발생하자 직접 철모를 쓰고 강경 진압을 진두지휘하여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화 제국주의자들 높으신 분들은 크게 만족했고 이것이 중앙 정계로 치고 올라가는 발판이었다.

후진타오 본인도 후야오방 라인임을 부정하고 덩샤오핑을 지지, 덩샤오핑의 적극적 지지 속에 1993년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으로 마침내 중앙 정계의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성장 배경을 가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단원들을 자기 파벌로 삼아 세력을 키워 장쩌민의 후임으로 중국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덩샤오핑과 후진타오. 하지만 원본은(...)[3]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1992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지위를 넘겨주는 대신 차기 국가 주석은 후진타오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장쩌민도 이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국가 주석에 등극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본인의 적극적인 권력의지나 카리스마로 최고자리까지 오른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등의 당지도부의 후원 및 계파간 합의에 의해 최고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에, 집권 내내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타협하는 자세로 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반중 논객의 분석처럼 장쩌민이 뒤에서 수렴청정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이야기다. 후진타오의 공청단은 상하이방 세력보다 당내에 뿌리가 매우 깊고, 특히 상하이방은 60년대생 이후의 세대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부분 노장이지만, 공청단은 공산당의 제도상 계속 충원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더 권력투쟁에서 유리해지게 되어 있다.

4. 대국 굴기 - 대외적 치적

그의 통치 시대는 전반기의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일어선다)'에 이어 거침없이 상대를 압박한다는 뜻의 '돌돌핍인(咄咄逼人)'까지 나아갔다. # 관련기사

중국은 그의 10년 사이 어느새 부쩍 성장하였다. 처음 4년간(2003년 말 ~ 2007년 말)에는 GDP가 12조 위안(1.5조 달러)에서 24조 위안(3조 달러)으로 2배, 무역액은 3.5배(6천억 달러 → 21억 달러)나 성장했고, 뒤의 5년 동안에도 계속 성장하여 2010년 일본의 경제 규모를 추월하고 세계 2위로 올라갔다. 4배 ~ 5배로 증가한 외환 보유액은 이미 2007년 1조 5천억 달러로 세계 1위가 되었다.

여담으로 종합 주가 지수는 2003년말 1497에서 2005년 6월 998로 최저점을 찍었다가 2007년 5291, 2007년 말 6124로 급상승, 이후 2008년 금융 위기를 만나며 다시 추락하여 지금은 2200선까지 빠졌다.#

국민 소득은 3천 달러가 채 안되던 상황에서 5천 달러까지 증가했다. 이는 환율 탓이 크긴 해서, 위안화로는 2002년 초 9천 위안#[4]에서 2010년 현재 3만 위안에 육박한다#.[5] 여하간, 5천 달러니 중진국에 진입했다.

대외적으로는 항공모함(랴오닝급)까지 도입했다.

5.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이 시기의 엄청난 성장은 한국에겐 경제 안정의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당장 동북공정이나 이어도와 같은 실제적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위협이 대표적.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에서 미국을 제치고 중국이 최대 수출국이 되었고, 그 정도는 외수의 영향이 큰 한국이 더 심하다. 북한김정일 시기 북핵에 의한 대북 제재로 사실상 경제적 속국(…)이 되어, 위화도 황금평나선 항을 50년간 임대해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대만의 민진당 정권에 대해서 유화책을 쓰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6. 경제 성장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인권 문제

경제는 엄청나게 성장하면서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에도 끄떡 없었지만 그만큼 버블경제의 정도가 심해 부동산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 더 심각해진 양극화와 계층 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구체적인 중국 경제의 현황은 중국/경제를 참조. 명목 인구 성장은 10년간 1억(12억 → 13억)으로 성장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만큼 눈앞에 다가온 고령화사회도 골치덩이.[6] 후진타오의 시대에 중국인 평균 수명은 73세까지 올라갔다. 특히 상하이선전 같은 경우 세계 최고 수준.

중국 내에서는 이런 빠른 경제 성장에 정신없이 달려가는 신세대들이 천안문 사태 세대보다 더 약한 정치 의식을 가진다고 한다. 이른바 '80后(빠링허우)' 세대. 중국판 88만원 세대로 그만큼 현실지상주의의 성향도 강해졌다고 한다. 약간 한국과 10년, 미국과 20년 간격을 띄고 X세대 필도 난다.

쓰촨성 대지진 같은 악재도 있었다. 물론 원자바오 같은 인물이 나름 땜빵은 하고 있지만...

비록 경제 성장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경제 자유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1억 5천만 명이 최저 임금제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하루에 1000원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문화 대혁명 직후에 1인당 소득에서 인도보다도 경제 수준이 더 낮았지만 현재는 1인당 소득은 인도보다 4배 이상이다. 비교 대상국들을 보면 중국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용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된다. 여러모로 빈부격차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성장과 분배 모두 잡기는 힘들며, 분배에 신경을 안쓰는 것은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중국 정부가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25만 ~ 30만명이 판결도 받지 못하고 노동 재활 캠프에 감금돼 있으며, 범죄 판결 중 목격자를 확보한 경우가 5% 미만이며, 유죄 판결 비율이 99.7%이다. 정부는 우편물을 검열할 수 있으며, 전화, 팩스, e메일과 텍스트 메시지를 검사할 수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올림픽 경기장을 짓기 위해서 강제 이주 등의 조치가 있었다.[7]

7. 미국과의 관계

아니 이 사람아!!!! 사람 팔 잡아당기고 무슨 지거리야!!!!

사진은 2006년 04월 21일, 후진타오 주석이 부시 대통령을 공식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받았을 떄 생긴 일이다. 당시 후진타오 주석이 연설을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부시 대통령이 후 주석의 왼쪽 팔 소매를 잡아끌었다. 부시 대통령은 후 주석을 준비된 계단으로 안내하려고 다른 계단으로 내려갈려는 후 주석의 소매를 잡아끈 것이나 이때 후 주석이 짜증을 내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는 장면이 방영됐다. 소매를 잡아끄는 과정에서 후진타오가 입고 있었던 양복이 찢어졌는데, 알고보니 이게 또 짝퉁 이태리 양복임이 밝혀져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일부러 이러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서 별다른 의도 없는 행동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미국의 모든 방송사와 중국 국영 방송인 CCTV가 생중계하는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서 말이 매우 많았다. 당연히 중국측에서는 미국의 외교적 결례라며 비판했고, 미국측은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지 부시는 원래부터 외교적 결례에 관련해서 말이 많았으나[8]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비판도 받았다.

사실 이는 조지 W. 부시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그래서 더더욱 화평굴기를 내세운 감도 있지만, 결국 부시의 엄청난 삽질들이 중국이 더 빨리 성장하는데 유리한 국면을 제공한 감도 있다. 사족으로 부시 집권기에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만찬을 가지려할 때 사회자가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으로 잘못 소개한 적이 있다고 한다.[9]

한편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경우, 중국을 일찌감치 단독 만찬 초대 등 "G2"로 대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대신 그만큼 더 높은 수준의 인권과 대국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면서 "체면은 살리고 이득은 얻자"는 정책으로 전향하면서 중국 입장에선 반은 뿌듯하지만 반은 떨떠름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8. 퇴임

2012년 11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예상대로 국가 부주석 시진핑에게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을 물려주며 권력 이양에 나섰는데, 많은 관측자들은 후진타오도 전임 장쩌민처럼 인민해방군 통수권을 가진 직책인 당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직은 몇년 더 유지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실히 심어놓을 것으로 예상했다.

일단 인민 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로 인민해방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라고 설파했듯이, 중국의 최고권력자는 국가주석도 중국공산당 총서기도 아니고 바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다.. 덩샤오핑 이후로는 보통 한 명이 세자리를 겸임하면서 당 / 정 / 군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지만, 그렇지 않을때에는 굉장히 미묘한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후진타오의 행보를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중앙 군사위 주석 직까지 시진핑에게 이양하고 퇴임했다. 여기에는 몇가지 관측이 있는데

  • 자신이 첫 몇년 간 장쩌민의 눈치를 보며 반쪽짜리 국가원수였던 설움을 후임자에게는 겪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즉 자신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퇴임함으로써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장쩌민까지 함께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정치적 메시지로 보인다. 실제로 장쩌민은 18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도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는 등 아직 막강한 권력이 있음을 과시하였다.
  •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바로 넘겨주었다는 관측이다.
  • 중앙 군사위 주석 직을 바로 넘겨준 것 자체가 '빚지게 만든 것'이라는 의견이다. 즉 바로 넘겨주는 은혜를 베풀어 자신과 계파인 공청단을 해코지하는 것을 막은 의도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다. 사실 둘 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시진핑의 집권 자체가 후진타오의 장쩌민에 대한 대항 의식 때문이고 둘이 연계해 장쩌민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아마도 진실은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러나 상하이방 다음의 반부패 타겟은 공청단인게 확실해져가는 분위기라 시진핑에게 통수를 맞았다는 의견도 있다.

2017년 춘절을 맞아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히는 후춘화(胡春華) 광둥 성 서기와 함께 공개 행보를 벌였다.#

9. 알고 보면 장쩌민에게 수난을 당한 10년

#

알고 보면 집권 기간 내내 장쩌민에게 처절하리라만큼 수모를 당한 주석이기도 하다. 2002년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당 총서기를 이양했지만 정작 중앙 군사위 주석은 본인이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존의 7인 체제인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의 정원수를 9명으로 확대하고 그 상무 위원에 무소불위의 권좌가 되어버린 정법위 서기[10](당시 정법위 서기는 장쩌민의 측근인 뤄간이 역임하고 있었고 그 저우융캉은 공안 부장에 재직할 시절이다)까지도 편입시키었고 그 9명중 6명 가량을 전부 상하이방으로 채워넣다시피했다. 또한 장쩌민은 궈보슝과 쉬처이허우를 중앙 군사위 부주석으로 삼음으로서 이 둘로 하여금 군부를 장악하게끔 하였다. 장쩌민의 이러한 장악은 훗날 후진타오가 중앙 군사위 주석을 인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후진타오를 허수아비로 맴돌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궈보슝, 쉬처이허우 이 둘이 군부 내에서 매관 매직을 통하여 군내에 세력을 키우고 후진타오는 철저하게 배제해버렸기 때문... 이 때문에 후진타오 시절에 생긴 말이 바로 정령불출 중난하이(政令不出中南海, 정책이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 밖으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후진타오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로 2004년에는 당시 상하이 당 서기인 천량위가 당 중앙의 거시적 조절 통제가 상하이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면서 원자바오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개 직할시 당 서기가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 위원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하극상이었지만 정작 후진타오와 원자바오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소리를 하지 못했다. 원자바오는 총리급인 상무위원인데 부총리급인 정치국원 천량위에 갈굼에 당할 정도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광역시장겸 시도당위원장이 국무총리에게 개기는 꼴이다. 당시 상하이방의 위세가 어땠는지 그리고 당시 후진타오의 처지가 어땠는지 알 수 있다. 주변 정치국 상무 위원은 상하이방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것도 모자라 주요 요직도 상하이방이 독식하고 있었으며 군부는 장쩌민의 군부 대리인인 궈보슝, 쉬처이허우가 마음껏 날뛰던 시절이었다.

중앙 군사위 주석직을 이양받은 뒤에도 후진타오의 허수아비 생활은 변한 것이 없었다. 사방이 전부 장쩌민에 의해 포위당했는데 후진타오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기조는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 천량위[11]가 부패 혐의로 인해 낙마하기 전까지 이어진다.

후진타오는 중앙 정치국 상무 위원회에서 많이 밀리는 계파(공청단)의 세력을 군에서 많이 확보했다고 한다. 실제로 상무 위원회 7명 중 2명만 공청단이지만 군의 요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어쩌면 대외적인 군사 경쟁과 충돌이 심화되어 군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 예상하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후진타오 본인만 알 것이다.

10. 후진타오의 이모저모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편에 따르면 대학 시절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두 만점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치하에서 선생일을 하다 그만두고 찻집을 운영했는데 중화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찻집을 빼앗겼다.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 아버님 지못미.

애처가라고 한다. 아내 류용칭이 자신의 부탁으로 공산당원으로서의 출세를 포기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아내를 아껴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한다.

올림픽 폐회식 다음날 곧장 방한을 하는 깜짝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각국 정상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황제처럼 알현을 받았다. 이 모습이 중국 각지는 물론 세계로 퍼져나가 후진타오는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여 정계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관련 기사 #1, #2

부시 부처(!), 이명박 부처, 후쿠다 야스오 부처 등 우리에게 익숙한 정상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 할렐루야!

  • 약력

1942년

상하이 출생

1965년

베이징 소재 칭화대 수리 공정과 졸업

1988년 ~ 1992년

티베트 시짱 자치구 당 서기, 14차 당 대회 최연소 정치국 상무 위원 선출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당국의 무력 진압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짐

1992년

덩샤오핑이 중점 배양 후계자로 지명, 당 서열 7위로 상승

1997년

15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 위원 재선출

1998년

국가 부주석 임명

1999년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2001년 2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회동

2002년 4월

미국 방문, 부시와 재회동

2002년 11월 15일

당 총서기 취임

2003년 3월 15일

국가 주석 직 취임

2004년 9월 19일

장쩌민 중앙 군사위 주석의 사임으로 주석직 승계[12]

2012년 11월 15일

당 총서기 및 중앙 군사위 주석 직 퇴임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에 잘 정리되어 있다. 단, 후진타오의 정치적 평가와 향후 전망 등은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링크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 가장 짧은 집권 기간을 자랑(...)한다. 아, 물론 화궈펑 빼고.


  1. [1] 쉽게 말해 당, 정, 군 고위직이 관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는답시고 시골이나 공장으로 보내 체험 삶의 현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게 전시행정에 그쳤거나 일년에 며칠 정도 단기간이면 또 모르겠는데, 완전히 거처를 옮겨서 시골로 보낸 다음에 일부러 방치했다. 사실상의 귀양이 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물론이고 덕분에 간부와 지식인, 학생 등 고등교육을 받은 천만명 가량의 엘리트 계층이 졸지에 시골 깡촌의 노동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문화 대혁명 당시 하방은 마오쩌뚱이 홍위병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못된 물이 들었으니 다시 혁명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이었다.
  2. [2] 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개혁 개방은 어디까지나 공산당 일당 독재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만 진행한다는게 지금까지도 공산당 지도부의 공식 입장이다. 이것에는 보수파 / 개혁파 모두 동의한다.
  3. [3] 중앙에 있는 장쩌민이 지워져 있다. 안습.
  4. [4] 그때부터 2만 위안이란 설도 있으나 뻥튀기로 보인다.#
  5. [5] 다만 여기에는 인플레이션의 원인도 꽤 있다. 즉 물가도 상당히 올랐다.
  6. [6] 산아제한정책이 한국보다도 더한 수준으로 너무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2010년 기준으로 출산율 1.18명) 게다가 소득은 중진국 수준인데 벌써 고령화 사회가 닥쳐온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7. [7] 그런데 이것은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8. [8]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This man"이라고 말하는 등 미국의 일방주의적 사고를 잘 보여주었다
  9. [9] 사실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영문명 차이는 People's를 서두에 붙이냐 안붙이냐의 차이로, 사회자가 조금이라도 실수했으면 가능한 일이다.(중국 : People's Republic of China, 대만 : Republic of China). 참고로 한국도 북한이랑 혼동하는 경우가 굉징히 많다.
  10. [10] 당시 정법위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우리나라로 치면 검찰, 법원, 국정원 등등을 전부 산하에 두는데 이어 무장 경찰권의 지휘권마저도 정법위 서기에 귀속되어있다. 이 정도면 그냥 또 다른 권좌라고 해도 무방하다.
  11. [11] 당시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으로 만들려는 목적하에 후계자로 키우고 있었다. 천량위가 후진타오의 후임 주석이 되면 사실상 장쩌민이 도로 정권을 가져오는 꼴이 되어버린다.
  12. [12] 이것으로 장쩌민과의 밀고 당기기 권력 암투는 일단락 되었다. 명예로운 퇴장과 승계의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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