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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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서문
3. 관련 서적
3.3. 실록본
4. 여담
5.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訓民正音》

1. 개요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쉽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443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 기사#[1]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 가리키는 대상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443년 12월에 세종대왕이 만든 한국어의 표기체계(즉, 오늘날의 한글)를 당대에 부르던 말이고, 두 번째는 1446년 9월[2]에 발간된 책이다. 여기서는 후자, 즉 '훈민정음'이라는 책에 대해서 설명한다.

2. 서문

여기에서 충남대학교 언어학과 김차균 교수의 발음으로 전기 중세 국어음에 해당하는 재구음을 들을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소리를 낸 것 같다고 추측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 나눔바른고딕 옛한글, 나눔명조 옛한글(이 둘은 여기서 다운 가능), 함초롬체 LVT(아래아 한글 항목 참고), 본고딕(또는 Noto Sans CJK KR, 여기서 다운 가능) 중 하나가 설치되어 있으면 제대로 보인다.
  • 원문 표기와 현대어역을 실었다.
  • 한자 為(할 위)는 爲를 줄여 쓰는 속자이나, 원문 표기가 為에 가깝고 당대 가장 엄밀하게 기록되었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그대로 표기하였으므로 원문 표기를 살렸다.[3]

원문:

솅〮ᄌ\ᅩᇰᅌᅥᆼ〮졩〮훈〮ᄌ\ᅧᇰ〮ᅙᅳᆷ

나랏〮말〯ᄊᆞ미〮

ᄃ\ᅲᇰ귁〮에〮달아〮

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ᄉ\ᅧᇰ〮이〮니르고〮져〮ᄒ\ᅩ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 便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방점제거판]

–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현대어:

세종 어제 훈민정음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경우)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언해본의 원문과 그 현대어 해석은 여기(PC에서만 지원)서 볼 수 있다.
  • 文字는 전통적으로 한자를 칭하는 표현으로, 최소한 설문해자 때부터 등장한다(비슷한 맥락으로 한문은 원래 文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는 원문의 文字가 뜻하는 것이 글자 또는 한자가 아니라 '한자로 된 숙어나 성구(成句) 또는 문장'이라고 한다. '문자 쓰고 앉아 있네' 같은 표현의 '문자'와 같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 구(句)·문장과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한문 구·문장을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능히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또한 왜 '문자'를 새로 만들었는데 훈민정문(文)이나 훈민정자(字)가 아니라 훈민정음(音)인지에 대해서도 이 점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주장은 이 글의 4쪽부터 13쪽을 참고.
  • '능히'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시러'인데, 직역하면 '얻어'('실어'가 아니다)이다.[5] 중세 한국어의 '싣다'는 현대 한국어의 '싣다'의 뜻을 지닌 것과 '얻다'라는 뜻을 지닌 것이 두 종류 있었다. 이 단어에서 파생부사 '시러곰'(능히)이 생겼다.
  • '사람이'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을 직역하면 '놈이'이다.(위의 원문에 보면 '노미'라는 표기가 보일 것이다.) 당대의 '놈'은 비칭(卑稱)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평칭이었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者'를 '경우' 또는 '(~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정요일, 2008).

中ᄃ\ᅲᇰ國귁은皇ᅘᅪᇰ겨신나라히니우리나랏常ᄊ\ᅣᇰ애江ᄀ\ᅡᇰ이라ᄒᆞᄂᆞ니라

(중국은 황제 계신 나라이니 우리나라 상담으로 강남이라 하느니라)

  • 당시에 중국의 국호는 '명'이었고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던 표현이며, 문제의 '듕귁에 달아'는 '나라 가운데에서 달라(=국내에서 차이가 있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이비 역사 측의 엉터리 주장이 있는데[6], 훈민정음에 이르는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을 이루며 중화를 상징하는 그 중국이 맞다. 국립국어원 답변[* 흔히 말하는 '중원(中原)'의 다른 표현이 바로 '중국'이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또는 '중화(中華)의 나라[國\]', '세상의 중심(中心)이 되는 나라[國\]'라는 의미로 '중국'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놀랍게도 기원전부터 중화왕조국가를 칭하여 중국이라 불렸다.] 덧붙여서 삼국사기에서도 당나라를 중국이라 칭하였단 기록도 있다.[7] 애초에 '중국'이란 단어 자체가 중국 역대 왕조 및 국가를 통틀어 이르는 일련의 국가 체계를 의미하는 말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8] '중국'이 중국(China)인 증거는 이 문서의 이미지. 훈민정음 언해본 이미지를 보면 '중국' 밑에 "황제가 계신 나라,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말로 강남을 말한다"라고 작은 글씨로 분명히 부연되어 있다. 강남은 장강(양쯔강) 이남을 말하며, 중국의 이칭 중 하나다. ‘강남 가는 제비’, '강남 천자'와 같은 말에서도 나오는 표현. 명 초기에는 남경(난징)이 도읍이었기 때문.
  • 일부 한자의 음을 표기한 부분에서 현 시점에는 없는 받침이 있는데, 아무 음가도 없는 그냥 장식이다(...). 현재의 ㅇ받침 발음은 초성/종성 무관하게 로 표기했다.

3. 관련 서적

3.1. 해례본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발음기호 등 문자 창제 과정을 종합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자세한 내용은 훈민정음 해례본 참조.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3.2. 언해본

세조 때 발간된 《월인석보》의 권두에 세종대왕의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다.그런데 이는 '한문(+현토)+언해'의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언해본'이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싸미…'도 여기서 나왔다. 이를 훈민정음 언해본이라고 부른다.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붙어있는 것이며, 이외의 언해본으로 2종(박승빈 본, 일본 궁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 사실 위 두 그림 중 아래 그림이 실제 《월인석보》에 실린 내용에 해당하며, 원본의 전체를 보고싶다면 여기로. 위의 그림은 창제 당시의 것으로 예상되는 모습을 국어사학회에서 디지털 기술로 재구한 것이다. 관련 기사. 서울대 김주원 교수의 저서 《훈민정음》(2013)에도 관련 서술이 나온다.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일단 제목이 《훈민정음》과 《세종어제 훈민정음》으로 각각 다르다. 또한 아래의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 부분[9]의 첫 네 줄은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언해 부분과 글자체나 글자 간격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뭔가 더 각진 글씨인 데다, 글자를 욱여넣은 듯한 모습. 여타 대목에서는 한 줄에 작은 글자 16자가 들어가지만 첫 네 행에서만은 20자까지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조 시대에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의 시호인 '세종'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글자 수가 늘어났기에 목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냥 《훈민정음》이라는 타이틀을 단 채로 위 그림과 같이 가지런한 언해가 붙었을 것이지만, 세조 시대에 발간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에는 '세종어제'라는 말을 추가하면서 언해 부분에도 글자를 추가로 욱여넣었던 것. 사실 '세종' 등의 묘호는 해당 임금의 사후에야 붙여졌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한 버전은 국어사학회에서 재구한 위 버전이 아닌, 《월인석보》에 실린 모습인 아래 버전이다. 보러 가기

3.3. 실록본

《훈민정음》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해례본에는 실려 있는 '해례'와 '정인지 서문'을 제외한 '세종 서문', '본문(예의)'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4. 여담

국어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왜 '훈민정문(文)'이 아니라 '훈민정음(音)'이었을까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문자를 창제해 놓고서는, 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문자’라 하지 않고 ‘바른 소리’라 했을까 하는 것.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난립할 뿐 아직까지 이렇다 할 정설은 없는 실정인데, 이 의견들 가운데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감안하여 '새로 문자를 만든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다. 다만 국어학이나 사학이 아니라 언론학 교수의 글임은 감안하자. 또 성음의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예를 들어 로마자에서는 동일 조음점과 조음방식인 d, t가 형태적으로 서로 완전히 관련없는 반면, 한글 ㄱ, ㅋ, ㄲ는 하나에서 다른 둘을 파생시켰고, 그것은 소리상의 유사성과 차이를 나타낸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시험삼아 사용해보기위해 1445년에 용비어천가를 완성했다. 용비어천가는 1446년 훈민정음 반포 이후인 1447년에 간행됐다.

글을 지을 때 초중종 삼성(三聲)이 모여야 합자(合字)를 이룬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ㅍㅜㄹㅇㅓ" 쓰지 말라고 하던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렇게 낱자를 만들어 놓곤 다시 모아 쓰는 글꼴을 보인다. 훈민정음은 표음문자지만 한자처럼 한 토막마다 하나의 완성자가 들어간다.

지금이야 수 많은 다른 문자들이 알려져 있고 표의문자인 한자와 달리 표음문자도 문자로 취급하지만, 창제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서 한글의 위상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는 있었으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극렬한 반대는 없었다. 문자로는 오로지 한자만이 인정받으며 표의문자만이 문자라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그저 별가치가 없는 '문자가 아닌 그냥 표기'일뿐이라는 입장으로, 문자로 인정하지 않고 '이두'보다 못한 표기라고 치부당했다. 그러므로 한자서적을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낭비,재원낭비'라며 반대하였다.[10] 이는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어서 일본의 고유의 문자는 한자(마나: 真名)가 아닌 가짜 글자라는 의미의 가나(仮名)이고,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방법 중 하나인 주음부호 역시 문자가 아닌 부호다. 훈민정음도 문자(文) 그 자체가 아닌 소리(音)를 표기하는 기호라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을 수 있다며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훈민정음 해례본만 보더라도 이는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선중기쯤 오면, 백성들에겐 가뭄의 단비였고, 사대부들에게도 한자를 보완하는 보조문자로써의 역활을 톡톡히 해냈다.

이외에도 훈민정음의 창제를 일반 민중이 글을 배워 문자의 혜택을 누리는 특권이 없어지는걸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철저히 후대의 관점에서 본 것으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 시각이다. 오히려 일반적인 양반 계층은 한글의 유용성을 알고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이후 나오는 조선시대의 개인 문집을 보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양반들의 호평이 이어진다.

물론 똑바른 인간만 있는 게 아니라서 정창손의 상소에서 드러나듯 일반 민중을 태생적으로 낮게본 시각이 등장하기도 하나, 집현전의 수많은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의 일화로 일반화를 시키는 것은 과잉사고이다. 애초에 정창손은 당대에도 꽤 비뚤어진 사고관으로 종종 손가락질 받던 인간이다. 통념과는 달리 조선에서 법적으로 인정한 계급은 왕족과 양인 그리고 노비 뿐으로 말인즉슨 현실은 달랐지만[11] 적어도 법적으로는 사대부와 농부 모두 동등한 신분이였으니 양인을 하찮게 본 정창손이 얼마나 문제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12]

  • 훈민정음 해례본에 일종의 이스터 에그가 있다는 식의 설이 있다. 해례본에 각 자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ㄱ"을 설명하는 글자로 임금 군(君)자를, "ㄲ"을 설명하는 글자로 아기룡 규(虯)자를, "ㅋ"를 설명하는 글자로 즐거울 쾌(快)자를, "ㅇ"을 설명하는 글자로 일 업(業)자를 사용했는데 이를 합치면 君虯快業(군규쾌업), 곧 임금과 용(세자 문종)이 즐겁게 일을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 KBS 역사저널 그날 관련 블로그
  • 해례본에 따르면 글자를 만들 때 역학(易學), 즉 음양오행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의 첨부파일에 원문과 해석이 있으니 참고.
  • 교육부 구 로고나 현용 통합 로고인 대한민국 정부 통합 상징의 글씨체인 '대한민국정부체' 역시 역시 훈민정음의 글씨체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야민정음황정음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일부를 따온 것이다. 황정음의 경우, 자신과 오빠들의 이름을 합치면 훈민정음이다. 황정음은 오빠가 둘인데 이들의 이름이 '황훈', '황민'이다. 해당 항목 참조.

5. 관련 문서

6.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의 죽음으로 극이 끝난 관계로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충녕대군이 이미 문자 창제에 뜻을 가지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에게 '소제가 문자를 창제하면 형님의 치세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식으로 언급된다.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극 최후반부의 중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반대 상소 한 장 올리고 말았던 최만리가 유생들을 동원한다거나 수양대군을 꼬드겨 세종 대신 옹립하려 한다거나 명나라 환관들이 창제를 저지하기 위해 암약한다거나 장영실과 최해산이 기여한다거나[15] 하는 등 역사적인 사실과 까마득히 거리가 먼 장면들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새 글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民音訓正(민음훈정 : 백성의 소리를 새김이 마땅하다)"을 쓴 후 아나그램을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개그 콘서트 위대한 유산 코너의 황현희가 등장할 때마다 언해본을 읊는데 "이런 젼차로~니르고져"를 건너뛰어버리고 "홇배이셔도"를 많이 반복한다.


  1. [1] 음력 12월 30일이 훈민정음이 완성된 날이 아니다. 실록 기록도 분명히 '이 달'이라고 적고 있다. 원래 조선왕조실록 같은 편년체 사서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를 모르는 경우 그 달의 마지막 날이나 그 해의 마지막 달, 어느 왕의 재위기 마지막 해에 기록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2. [2] 반포일 기준 1446년 9월 상한(10일) → 양력 환산 → 1446년 10월 9일
  3. [3] 현대 대만의 표준 자형인 국자표준자체에서도 為를 표준 자형으로 삼고 있다.
  4. [방점제거판] 4.1 世솅宗조ᇰ御ᅌᅥᆼ製졩訓훈民민正져ᇰ音ᅙᅳᆷ나랏말ᄊᆞ미中듀ᇰ國귁에달아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5. [5] 이 '얻어'도 한문 부분의 '할 수 있다'라 뜻을 가진 得(얻을 득)을 직역한 것이다.
  6. [6] 사실 이런 주장의 원조는 중국을 폄하하는 일본인 지식인들이다. 한 예로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2002년 5월에 번역된 일본인 작가 오카다 히데히로의 저서인 <세계사의 탄생>에서는 1911년 중화민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중국이라는 개념이나 단어가 없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버젓이 적었다. 물론 이는 엄연히 틀린 주장인데, 중국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나왔으며, 중국이라는 개념도 빠르면 진시황의 중국 통일이나 늦어도 한무제의 시기에 가면 등장하기 때문이다.
  7. [7] (若新羅以一意事中國(약신라이일의사중국) : 신라 같은 나라는 한 뜻으로 중국을 섬겨) : 삼국사기 제5권 중)
  8. [8] '중국사'라고 해서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만 배우는 것이 아니듯.
  9. [9] 한 줄에 우리말 작은 글자로 두 행을 써 넣은 부분
  10. [10] 그렇다! 훈민정음을 자체를 반대하는게 아니라 번역서를 만들고 백성에게 반포하는 등의 재정소모를 반대했다. 사실 사대부들에게 훈민정음 자체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11. [11]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당장 대한민국도 법적으로는 온국민이 평등하지만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상급자와 하급자가 나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이만큼이나 법적인 평등을 이룬것이 대단한거다.
  12.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훈민정음-한글을 반대했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일제의 프로파간다. "이렇게 훌륭한 문자를 조선의 학식층인 양반은 반대했다 > 그러니 조선은 망할 만 했다."라는 식민사관이었던것.
  13. [13] 극소수의 조력자라고 해 봐야 소헌왕후, 문종, 정의공주, 세조, 안평대군 등의 가족이 거론될 뿐이다
  14. [14] 통역교재인데 훈민정음으로 당시 조선과 관계하던 외국들의 언어와 음가, 사용법과 회화 등이 적혀 있다.
  15. [15] 이 와중 최해산은 명 환관들에게 해를 입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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