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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50년경의 영향권

흉노족 - 훈족 동계설에 따른 서진 모델

1. 개요
2. 풍습
3. 전투
4. 언어
5. 편제
6. 문명
6.1. 유적과 유물
7. 인종
8. 훈족과의 연관성?
9. 대외관계
9.1. 중국과의 관계
9.2. 한민족 국가와의 관계
9.3. 기타 국가와의 관계
10. 역대 선우
10.1. 흉노
10.2. 동흉노
10.3. 북흉노
10.4. 남흉노
11. 흉노 소속 인물
11.1. 흉노 분열 이전
11.2. 흉노 분열 시기
11.3. 남흉노 멸망 이후
12. 관련 문서

1. 개요

몽골어: ᠬᠣᠨᠨᠣ (Qunnu) / Хүннү (훈누, Khunnu)[1]

상고한어: 훙나아아(qhoŋ naa, 정장상팡), 흉나그(hjuŋ nag, 리팡구이)

상고시대부터 오호십육국시대까지 활동한 유목 국가. 동아시아와 인접한 유라시아 초원 동쪽에서는 최초의 유목 제국이다.[2] 이 시절 끊임없이 중화권 국가와 치고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첫 등장은 기원전 4세기 말 전국시대 때부터이고 이후 한(漢)대에 이르러서는 북아시아 최강의 유목 국가로 성장한다. 건조한 초원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현재의 중국 북부에서부터 서쪽으로 캅카스 일대에까지 달하는 방대한 제국을 건설했고,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그리고 현재 중국의 내몽골(네이멍구 자치구), 간쑤 성, 동투르키스탄(신장 웨이우얼 자치구)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사마천 사서 사기에는 하나라의 후손으로 서주를 밀어버린 험윤과 훈육이 이들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북방 이민족들은 제대로 된 유목민이 아니라고 한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성과로 보면, 이후 시대의 유목민족들처럼 제대로 된 유목문화는 기원전 10세기에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8~7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중국 북방에 유입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즘엔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 사이에 등장하는 '호(胡)'라는 이름의 족속이 중화권 사람들이 최초로 조우한 유목민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얻는 상태이다.

전한 초기엔 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한고조 유방사로잡을 뻔한 기염도 토했으나, 이후 화친으로 돌아섰고, 전한의 형님에 해당하는 위치로서 정기적으로 전한이 재화를 바치는 것에 만족했다. 한무제 시절엔 한과의 데스매치 끝에 결국 막북으로 밀려나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혼란기를 거쳐 두 차례 국가가 분열되는 등 중원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후한시대에 흉노가 분열한 남흉노 등은 후한의 제후격으로 떨어지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서진(西晉)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에 북하 등 유목왕조를 세우기도 하지만 이때부터 중국 내부에 들어오면서 문화적으로는 중화권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다가 선비족에게 된통 얻어맞고 점점 세력이 약화되더니 끝내 흉노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수백 년 이상 중국 북부를 헤집고 다닌 관계로 지금도 '북방민족'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유목민족 중 하나로, 중국 문화에도 흉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천고마비, 만리장성, 왕소군 등이 대표적. 참고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남북조 시대의 중국 대륙을 침략한 세력도 흉노였다.

2. 풍습

북아시아의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했다고 한다. , 염소, , 당나귀 등을 주로 길렀고, 개중에는 낙타 같은 진귀한 가축도 있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고기를 주식으로 했으며,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한다.

농사는 짓지 않았으며 일정한 주거지가 없었다. 평화 시에는 목축, 수렵으로 생계를 이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부족 전원이 전투에 임해 약탈에 나섰다고 기록된 것이 중국 측 기록.

그러나 정주민들에게서만 나오는 물산을 얻기 위해서 그저 교역이나 약탈로 얻는 것을 넘어서, 정주민, 주로 한나라 사람 그 자체를 대량으로 약탈해 자신의 영향권하에 두고 정주 생활을 하면서 흉노에게 봉사하게 했다. 이것 역시 중국 측 기록에 나오며, 흉노 유적들에서 보이는 정주 흔적은 이렇게 흉노에 끌려와 하층민이 된 정주민들의 유산으로 주로 해석한다. 현대 러시아 학자들이 발굴한 러시아 흉노 유적지에 농사, 축산을 한 듯한 일정한 주거지와 철기, 청동을 생산한 대장간 흔적 등이 있다. 또 독특한 문양의 예술품도 있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흉노 후대의 유목민족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형태로, 피지배계층이 농업과 공업을 하고, 지배계층은 목축과 수렵을 하는 체계를 수립한 경우일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 가령 몽골의 경우는 청나라 대에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서 몽골인 지주들이 나름 비옥한 토지들을 골라서 한족 출신의 소작농들에게 소작을 맡기고, 지주 본인은 전통적인 목축업에 종사했다[3]. 그리고 더 이전 시대인 금나라에서는 맹안, 모극제라 하여 한족발해 유민들에게는 대규모 농경 생활을 하게 하고, 지배층인 여진족에게는 반농반목 생활을 유지할 것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 역시도 그 자신들이 반농반목을 하는 등 순수한 유목민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농업을 주로하던 주변의 정주민들인 동예, 옥저 등을 정벌하여 조공을 받거나, 후한 등의 여러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통해 잡아온 한족 농민들을 농지에 투입시키는 식으로, 하층민들에게 농사를 시켰다. 이는 유목민들 자신이 농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농업을 통해 얻은 곡식에서 주로 섭취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얻고자 택한 방법이다. 본래는 이를 위해 정주민들을 수시로 침공해서 조공을 바치게 하거나[4], 아예 대대적인 약탈을 하던 식이었는데, 이를 정주민들을 직접 자기들 땅에 정착시켜서 농사셔틀로 부리는 온건한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정주민들은 좋은 탄수화물 공급원이죠

흉노의 귀족들은 난제(攣鞮), 혁련(赫連), 호한(呼韓) 등의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흉노 사회에서는 건장한 자가 존중되었고 노약자는 비교적 천대받았다. 예컨데, 식사를 할 때에도 맛좋은 살코기는 장정들이 먼저 먹었고, 노인들은 남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사기열전의 흉노 열전 부분에서 나오는 중항열과 한나라 사신의 대화에서 이를 알 수 있는데, 한나라 사신은 흉노가 노인을 천대한다면서 장정들이 맛있는 걸 먼저 먹고 남은 걸 노인에게 주지 않냐고 했다. 이에 중항열은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하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싸울 수가 없어 젊고 힘센 장정들이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고 나아가 노인들을 지켜줄 수 있지 않냐고 했다.[5] 애초에 한 일화 가지고 전부를 재단하는 것도 좀 아니지 않나

아버지나 다른 식구가 먼저 죽을 경우, 그의 부인과 첩을 취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당연히 생모는 제외된다. 다만 이는 대부분의 유목민에게서 나타나는 제도이다. 과거 고구려형사취수제라 하여 형이 죽으면 그 부인을 동생이 데리고 사는 풍습이 있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정주민족은 가장이 죽더라도 남은 유가족이 생활할 수 있지만, 유목민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딸렸던 식구들의 부양을 책임지워 노동력 감소를 방지하려는 사회적 의무이고 게르만을 포함한(카이사르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에게서 나타난다. 역시 유목민족 느낌이 강했던 진(秦)나라에서도, 상앙의 변법이 있기 전까지 부자(父子), 형제가 처첩을 공유했다고 한다. 나중에 상앙이 자뻑 드립할 때 언급된다. 유동성이 강한 현재의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에서도 형제의 처첩공유는 흔했다. 그냥 첩 말고 형수로 모시기엔 부담스러웠나

군주가 죽으면 측근 신하나 애첩이 순장 당했는데 많을 경우 수백에서 수천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 과 의복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무덤에 봉분을 쌓지는 않았으며, 상복도 입지 않았다. 장례 땐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어 죽은 자의 이마를 흘리는 이면이라는 풍습이 있었고, 머리카락 일부를 베어 묻는 전발의 풍습도 있었다. 이 풍습은 순장을 억제하여 노동력 감소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가 아닐 때 을 한 자 이상 뽑은 자는 사형에 처했고, 도둑질한 자는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 측 기록뿐이어서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긴 하다. 실제 발굴된 흉노의 유적은 중국 측 기록과 다른 점도 있었다.

3. 전투

을 잘 다루었는데 어린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면서 작은 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활을 당길 만한 힘을 가진 남성 전원이 기병으로 활약하였다. 접전 시에는 칼과 짧은 을 사용했다고 한다. 한나라 효경제 시절 한 군관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다가 단 3기의 궁기병을 만나 병사를 모두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싸움에 있어서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싸움이 유리하면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고.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를 잡으면 상으로 한 잔을 받았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맹렬히 싸웠고 패색이 짙어지면 맹렬히 도망쳤다.

전쟁을 하거나 큰일을 일으킬 때 의 모습을 보고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달이 차고 빛나면 좋은 징조이고 흐릿하면 나쁜 징조였다고 한다. 실제로 달이 흐릿해지는 경우 중 달무리가 지는 경우엔 다음 날 비가 올 확률이 높으므로 흉노에 있어 궂은 날씨가 전투나 야외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듯한 부분.

일설에는 흉노가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던 스키타이인들로부터 기마술을 전파받았고, 흉노의 동검인 경로(徑路) 역시 스키타이 칼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기마술 부분은 크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 기마술은 모든 인류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문화적 소양이기 때문이다. 말이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탈주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녔던 북미 원주민들을 생각하면 쉽다.

4. 언어

흉노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요새들어 미국과 일본 웹의 흉노 관련 글에는 확실한 흉노문자가 유물로 발견된 소식들이 있고 한국 웹에서도 언급이 있다. 즉 흉노의 유물로 보면 흉노는 "탐가"라는 고유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6] 다만 흉노어는 튀르크어족몽골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그 외에도 데네예니세이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 고립어 등 설이 분분하다.

고대 중국어로 음역/번역된 단어로, 도기(屠耆)/현(賢), 약제(若鞮)/효(孝) 등이 있다.

5. 편제

사마천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선우(單于, 단우가 아니다)라 부르며, 선우 밑에 좌현왕, 우현왕, 좌록리왕, 우록리왕, 좌대장, 우대장, 좌대도위, 우대도위, 좌대당호, 우대당호, 좌골도후, 우골도후를 두었다. 이들은 크게는 1만 기, 작게는 수천 기의 병사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24인의 군단장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기라고 불렀다. 군단장들은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 비소왕, 상, 봉, 도위, 당호, 저거 등의 관리를 두었다.

태자는 좌왕이라고 하고, 이를 좌도기왕이라고도 불렀는데, 흉노 말로 도기가 고대 중국어로 현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각 부족들은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이동하며 살았다. 좌우현왕과 녹리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매년 정월과 5월에 군단장들이 선우에게 모여서 회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에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6. 문명

흉노는 한나라나 진나라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전국시대부터 이미 흥기하여 철기 시대에 진입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인 기원전 5세기부터 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온 것인지 또는 중국이 자체적으로 제철기술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철은 서남아시아 아나톨리아 지방의 옛 국가 히타이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곳에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역의 앞선 철기 문명을 일찍 접한 흉노가 당시의 중국보다 일찍 철기 문명을 가질 수 있었고,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군사력 역시 강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실크로드 교역의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앞선 서역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할 수 있었다. 흉노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철촉, 철검, 철제 마구 등이 출토되고 있다.

철기 문화는 흉노의 생산력을 크게 증대시켰다. '한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와 한나라 간에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역은 서로 교환할 물건이 확보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흉노는 실크로드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여 무역권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는 흉노에 큰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서역에는 화려한 물품이 많다는 장건의 보고를 읽은 한무제는 이를 탐내기도 했었다.

서한 초기 흉노의 위협에 직면해 이를 막아내기 버거웠던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하여 무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흉노에 패배한 직후였으므로 한나라에 불리한 조건의 화친이었지만 흉노에 정기적으로 바쳐야 하는 물자는 중국의 거대한 생산성으로 극복 가능한 정도였다. 그렇게 화친과 교역으로 흉노를 달래는 사이 한문제경제는 이른바 문경지치를 이뤘고, 내실을 쌓은 이후 한무제가 다시금 흉노 정벌에 나서 승리하면서 흉노는 서역 지배권을 빼앗기고 쇠퇴하게 된다. 물론 대흉노전에 국력을 너무 쏟아부은 나머지 한나라도 이후 점차 쇠퇴해간 게 함정이지만, 흉노만큼 쇠퇴하진 않았다.

6.1. 유적과 유물

문화상으로 흉노는 한 중원문화에 필적할 만큼 빠르고 넓게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문화권을 상징하는 몇 가지 심볼적인 유물이나 표징으로는 동복(청동솥), 동물문 장식의 금공유물들이 대표적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고분출토품을 통한 연구가 활발한 편이며 흉노와 한(漢)의 교류나 관계망의 형성에 대한 연구도 많다.

흉노 또한 중국의 유물을 받아들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동경(銅鏡)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한 문화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한으로부터 책봉을 받음과 동시에 사여되었던 각종 인장(印章)과 중국식의 마차 구성품들 또한 동경 등과 함께 조사되기도 하여 당시 한의 외부 민족에 대한 통제 방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흉노와 관련된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만 국내에 그렇게 넓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고 흉노의 유물들의 여러 요소들이 꽤 동북지역,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 간과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흉노족 신라왕족설과 같은 게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직접적인 것은 아니고 모티브적인 차원에서의 영향을 생각보다 많이 받았다. 일단 흉노 자체가 고조선과 동맹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흉노는 한과 더불어 기승용 마구(馬具)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었으며 이로 인해서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경의 동북아시아는 크게 중원계 마구와 흉노계 마구로 나뉘어 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적들은 대부분 고분 자료들이며 도르릭 나르스, 보르한 톨고이, 골모드, 노용올, 모린 톨고이 등이 유명한 고분이다. 이 가운데서 도르릭 나르스와 모린 톨고이 고분군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발굴한 유적이다.

동물문 장식이 많은 만큼 실제로 무덤에서도 동물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많은 편이다. 한국에서야 통상 일부 품목에서만 골각기가 확인되지만 흉노는 활부터 시작하여 화살촉이나 각종 장식 등으로 활용한 다양한 골각기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예 무덤의 시신 안치 공간의 머리맡에 동물의 두개골을 고스란히 묻기도 하는 등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유목민족'스러운 부장품을 매납하였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 내 전시된 흉노의 유물

흉노의 벨트 버클[7]

보르한 톨고이 출토 동복

유수 노하심 출토 동복

▲흉노의 유적에서 출토된 동복과 부여 유적에서 출토된 동복

7. 인종

인종적으로 어떤 존재를 흉노라고 불렀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진 않다. 흉노란 집단이 없어진 지금에 와선 모든 게 추측의 영역이기 때문.

일단은 튀르크계 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많이 나오는데, 현대 들어 흉노 고분에서 발굴된 흉노 관련 자수화 같은 것을 보면 튀르크계 외모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몽골계 주장도 나오지만, 몽고비사로 주장하던 몽골의 선조인 몽올실위는 몽골 초원 동쪽에 존재하긴 하였지만 돌궐보단 훨씬 늦게 나타났고, 돌궐은 몽골보다 몇 세기 먼저 간, 가한(khan)이라는 단어를 쓴 걸 봐 튀르크계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존재한다.

몽골의 노욘 울라(Noyon Ula)에서 발견된 그림

그 외 일부 고분에서 발견된 유골 가운데는 인도/유럽계 인종과 유사하다고 추정되는 인골들도 출토되었고, 몽골계일 가능성도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상황. 다만 동양적 특징이 보이는 장두 인종인 튀르크계가 그런 식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때문에 터키몽골은 흉노의 역사를 놓고 여전히 줄다리기 중이지만[8]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현재로선 그저 미궁일 뿐이다.

한편, 절충론 비슷하게 중앙아시아 다양한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가 흉노였다는 말도 나온다. 이 중엔 튀르크계 외 일부 몽골계, 퉁구스계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사마천은 《흉노전》에서 묵특에 의한 건국 초기의 일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십진법을 따른 군사, 정치, 사회 조직을 관통하고 있다.

2. 남쪽으로 좌, 중, 우로 된 3대 분할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군주를 중앙에 둔 좌우 양익체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영민, 분지를 가진 24인의 만기들에 의한 연합 권력체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가하고 있는 이성의 비소왕들도 그들이 인솔하는 제족 집단을 포함하여 흉노국가는 다원, 다종족의 국가였다고 추측한다.

흉노를 민족명이면서 국가명으로 보면 설명 가능하다. 즉 흉노란 여러 유목민족의 여러 집단 중에서도 지배민족의 명칭이고 이것이 동시에 흉노가 이끌던 국가의 이름으로도 쓰인 것으로 추측 된다. 즉 흉노족 자신들이 이끌던 국가명에 자신의 종족명을 붙이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흉노 이후의 유목민족들도 중국으로 침투하여 한화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답습했다. 후대의 유연, 돌궐, 위구르 등도 모두 이런 케이스에 해당한다. 그리고 흉노 국가 자체는 망했어도 흉노란 민족 자체는 살아남아 5호 16국시대에 다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든 것으로 보면 된다. 다만 이 당시의 흉노족은 많이 한화가 된 상태와 국가 설립지가 중국땅이어서 한.조.하 같은 중국 왕조명을 썼던 것이다.

흉노를 국가명과 민족명으로 구별하면 흉노족이 선비족 등의 다른 민족들과 세력다툼을 벌인 것이나 민족 단위로 분쟁이 끊이지 않은 오호십육국시대혁련발발이 '북하' 같은 흉노족 국가를 세운 것 등을 설명하기 쉽다.

물론 확실한 자료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추측의 영역에 속하지만, 다른 유목민족의 예를 보아도 흉노를 단일민족으로 보기는 힘들며 여러 유목민족의 집단 연합체일가능성이 제일 높다.

8. 훈족과의 연관성?

로마 제국 동쪽에서 등장해 유럽을 휩쓸었던 아틸라훈족(Hun族)을 이 흉노와 같은 종족으로 보는 시각이 옛날부터 꾸준히 있어왔다.

흉노의 '匈'은 '훈(Hun)'[9]중국어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고, 훈족의 경우 남흉노와 한나라 연합의 세력 다툼에서 밀린 북흉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에게 동화되면서 그 집단이 유럽으로 일직선 전진한 거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이건 가설의 단계. 아직까지도 시원하게 반박되거나 증명되지 않았다.

현재에는 적어도 훈과 흉노는 동일한 어휘이고, 몽골 고원 일대에서 기원한 인적집단이 서방으로 확산되었다는 설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양자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것은 입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13년, 소그드 상인은 간수 회랑에서 사마르칸트로 보내는 편지에서, 중국의 남흉노 집단을 훈Xw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이름은 유럽의 훈Hun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 흉노ʿχiʷongʿnuo와 연관이 있을까? 이 연관성에 대해 중국어 음운학자들은 큰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흉노가 중앙아시아에 출연한 이후 언제나 이와 같이 불렸기에 다른 기원이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대 소그드의 편지 이외에도, 둔황의 월지인인 축법호Dharmarakṣa는 280년에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Tathāgataguhya-sūtra)』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며, 흉노를 후나Hūṇa로 옮겼으며(산스크리트어 판본은 현존하지 않으나, 티베트어 번역에서도 마찬가지로 Hu-na라 적혀있다), 308년 번역한 『보요경普曜經(Lalitavistara)』에서도 똑같이 옮겼다(산스크리트어 판본이 현존하고 있다).

Étienne de la Vaissière, “Xiongnu,” Encyclopædia Iranica, online edition, 2006, available at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xiongnu (accessed on November 15, 2006).

아래의 영상은 흉노와 훈족이 동계라는 논거를 펼치는 영상이다.

2018년, 에스케 빌러슬레프 덴마크 코펜하겐대 지리유전학센터 교수팀이 약 4500∼1500년 전 사이의 중기 구석기∼신석기 시대 인류 137명의 유골로부터 게놈을 추출, 해독해 ‘네이처’에 발표했는데, 물론 향후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하는 부분은 있겠지만, 이 연구만 보자면 일단 훈족과 흉노족이 적어도 유전적으론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기사엔 흉노족이 중국이라고 되어있는데, 당연히 중국 특히 한족계와 혈연적 연관성은 떨어진다. 그냥 유럽 훈족마냥 그 지역에서 인상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 듯. 물론 애초부터 흉노라는 말 자체가 여러 유목민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하긴 하지만.

9. 대외관계

9.1. 중국과의 관계

산해경에 따르면 흉노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이계의 자손이라고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게다가 산해경이라는 책 자체가 소설에 가까워서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 못 된다. 사마천은 산해경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기서'라면서 판단을 유보했지만, 정작 그런 사마천도 사기에서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苗裔)라고 적어놓았다. 이는 상술한 바처럼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된 억지스런 갖다붙이기라는 견해가 강하다.[10] 한국의 김병준 교수는 특이한 설을 제시했는데, 흉노가 원래는 중국에 살던 민족 중 하나였으나 점차 북방으로 이주하면서 정주 문화를 버리고 유목 문화로 갈아탔고 사기의 기록은 그런 정황을 신화적으로 풀어낸 것이라는 것.

중국사에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인 설원(說苑)에 따르면 312년 누번의 영토에 거주하는 흉노가 급습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만 이 정보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전국칠웅 중에서도 북방의 조(趙)나라를 꾸준히 괴롭히다가, 그만 이목의 기만책에 낚여서 처절하게 발려버린 기록이 있다. 이때 자그마치 10만이 죽고 선우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고 하니, 이목도 이목이지만 10만이나 모여있던 흉노도 대단하다. 물론 중국 사서의 특성상 주최 측 추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다.[11] 어쨌든 이 한 판으로 흉노의 조직은 거진 와해된 셈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은 무리들은 서쪽 오르도스 지방[12]에 모여 살면서 진(秦)나라의 우환이 되었는데,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명을 받은 몽염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해 밀어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황하 밖으로 오르도스를 빙 둘러서 만리장성을 쌓아버렸다. 오르도스 확보와 만리장성 축조는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자원을 소모하여 결국 진의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흉노의 약화라는 목적만은 달성할 수 있었다.

시황제 아래에선 끽소리도 못 하고 지내던 흉노였지만 진말의 농민봉기에 이은 내전으로 중국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이룬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묵돌선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유방전한을 세우고 나서부터이다.

한고제 유방은 기세좋게 토벌에 나섰지만 그야말로 캐관광. 흉노는 유방의 조심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유방의 보병을 유인한 뒤 기병 포위전략을 써서 유방을 떡발랐다. 진평의 계략으로 겨우 풀려났지만 결국 패배는 패배. 한은 흉노에게 한나라 여인을 선우의 아내로 바치고, 그 외 각종 물자와 인력을 보낸다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화약을 맺게 된다. 그나마 북송거란요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을 때 송 쪽이 역할을 맡아 체면이라도 차렸는데, 이 화약의 경우엔 한나라 쪽이 동생이었다.

나중엔 여후에게 묵돌 선우그대가 과부가 되었다고 들었소. 나도 외로우니 우리 서로 부족한 것을 결합해 나와 혼인하는 게 어떻겠소 같은 식의 무례한 편지를 보내도 토벌도 할 수 없었다.[13]

그 뒤로 평소엔 평화유지비 받아먹고 먹을 거 떨어지면 국경을 두들겨대다가 복수의 칼날을 갈던 한무제에게 된통 걸려서 너 죽고 나 죽자로 싸우게 되었는데, 수십 년간 지든 이기든 10만 이상씩 계속 초원으로 원정군을 보내는 쇼미더머니 소모전에 밀려 결국 선우정이 막북으로 쫓겨가게 된다. 그래도 세력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기에 마지막 한의 총공세를 기적적으로 막아내 민족 자체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세력은 쪼개지고 황하 상류 서쪽의 4군(무위·장액·주천·돈황)을 잃으면서 서역과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이후 한나라를 약탈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 대신 오손을 공격했다가 한선제가 오손과 손잡고 무제 사후 오랜만에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니, 흉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나다가 수만 명씩 죽어나가는 참혹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나중에는 흉노가 이 꼬라지가 된 걸 본 오손, 오환, 정령 등 흉노에 복속되어 있던 민족들이 전부 들고일어난다. 이때 흉노는 진압하지 못하고 그들에게까지 거꾸로 두들겨맞는 동네북이 되었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한나라가 흉노에 기병을 보내 흉노인을 약탈하는(!)주어와 목적어가 바뀐 것 같다면 착각이다 일까지 벌어졌다.

적어도 두만 때부터 흉노는 장자 세습의 원칙을 이어갔으나, 한무제와의 대전 중에 군신선우가 죽자 급했는지 병약한 장자 어단 대신 군신선우의 동생 이지사를 선우로 세웠고, 이후 이지사의 후손들이 일찍 죽어나가 장자 세습의 원칙을 더 견지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선우위를 놓고 내부에서 궁정 암투가 극심해지며 선우의 정통성도 점차 결여되었고, 결국 한무제의 손자인 선제 때에 이르자 후계 구도가 막장으로 치달아 한때는 선우를 일컫는 자가 다섯 명이나 되는 혼란상에 빠져들었다.다섯 선우의 해, 세 선우의 해 그중 호한야가 겨우 대충 아우르나 싶더니 그전까지는 조용하던 형 질지가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호한야를 두들겨 내쫓았다.

궁지에 몰린 호한야는 한에게 칭신하고, 질지 역시 한과 잘 지내려고는 했지만 서로 대등한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한은 호한야의 편을 들었다. 고립된 질지는 서쪽으로 활로를 찾으니 호한야의 세력은 동흉노, 질지의 세력은 서흉노가 되었다. 서흉노는 강거로 가서 서역의 패권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한의 토벌로 멸망하였다. 그 잔존세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재.

후한대에 이르어서 다시 선우직 문제로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다. 북흉노는 그후 여러 번 국경을 침범하다가 후한 명제~화제반초의 서역 정벌과 화제 때 두헌(竇憲)의 북방 정벌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반초의 아들 반용(班勇)의 서역 정벌 때 다시 털린 후 151년 이오(伊吾)를 공격하다 실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신장 일대에서 완전히 그 세력을 잃는다. 그 후 4세기 엄채국[14]을 함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었다.[15]

이후 후한은 남흉노에 대한 회유정책을 펴 남흉노는 사실상 후한에게 복속된 상태가 되었으며 결국 후한이 남흉노인들을 관내로 집단 이주시켜 군사적 용병으로 써먹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흉노의 명목상 선우 직위는 계속 유지되어왔는데 건안 16년(216년) 조조가 흉노 부락을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분할하고 각 부 중에서 "수(帥)"를 선발해 통솔시키고 수 아래 한인의 사마(司馬)를 두어 감시했으며 5부 전체는 사흉노중랑장이 감시하게 했다. 중랑장은 태원(太原)에 주둔했는데 병주자사(幷州刺史)를 겸했고 남선우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으므로 흉노 전체가 노예 상태가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조위-서진의 지배를 받았으며 흉노는 정치적으로 자립성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생활에서도 하층민으로 전락하여 한인들의 멸시를 받았다. 이후 흉노가 다시 흥기한 것은 서진의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인한 혼란 때문으로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며 오호십육국시대 한(漢),[16] 전조(前趙), 북량(北凉), 북하(北夏)[17] 등의 국가를 세우기도 한다. 이후 선비족이 중심이 된 북위가 흉노 호한체제 국가들을 멸망시키면서 흉노의 명맥은 완전히 사라진다. 독고부 등 몇몇 후세 인물들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기록만이 남았을 뿐이다.

관롱집단의 대명사로 유명한 수문제의 부인 독고씨는 흉노의 후예이다.

9.2. 한민족 국가와의 관계

좌현왕 이하의 장군들은 예맥,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 흉노의 왼팔이 잘렸다고 중국 사서에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고조선 왕이 내린 작호 중 하나인 비왕(裨王)은 흉노족의 비소왕(裨小王)에서 따온 말로 추정된다. 아마도 고조선이 흉노와 연계하여 전한에 대항했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조선 멸망 때 흉노의 왼쪽 팔을 잘라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에 고조선과 흉노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다.

신라 마립간 시대의 무덤돌무지덧널무덤이 흉노지역의 쿠르간 무덤과 형태가 유사해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무덤양식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18] 근원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었다. 또 이와 별도로 신라 중대 이후 몇몇 신라인들이 묘비에 자신을 흉노 귀화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자칭하기도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이 때문인지 인터넷에선 일부 네티즌들이 경상도를 깔 때 쓰는 말로도 쓰인다.(...) 유래는 흉노족 신라왕족설인데, 물론 제대로 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설이다. 만에 하나 흉노가 신라에 정착했을 정도면 그 중간에 있는 고구려와 이웃한 백제 역시 영향을 안 받았을 리가 없다.[19]

9.3. 기타 국가와의 관계

서역 국가들을 여러 차례 위협하면서 부세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으며, 서역 국가들의 싸움에 개입하기도 한 모양. 심지어 왕을 죽이고 옹립할 정도였던 듯. 때문에 당시 서역 국가들이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10. 역대 선우

여기서 선우란 군주를 지칭한다. 성씨은 '연제'(攣鞮), '난제'(欒提), '허련제'(虛連題) 등으로 쓰이는데, 다들 음이 비슷해 어떤 흉노어를 한자로 다양하게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10.1. 흉노

대수

칭호

재위기간

1대

두만(頭曼)

두만(頭曼)

기원전 ???년 ~ 기원전 209년

2대

묵돌(冒頓)

묵돌 / 모돈 / 묵특(冒頓)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3대

노상(老上)

계육(稽粥)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

4대

군신(軍臣)

군신(軍臣)

기원전 161년 ~ 기원전 126년

5대

이치사(伊稚斜)

이치사(伊稚斜)

기원전 126년 ~ 기원전 114년

6대

오유(烏維)

오유(烏維)

기원전 114년 ~ 기원전 105년

7대

오사려(烏師廬)

오사려(烏師廬), 첨사려(詹師廬), 아(兒)

기원전 105년 ~ 기원전 102년

8대

구려호(呴犁湖)

구려호(呴犁湖)

기원전 102년 ~ 기원전 101년

9대

저저후(且鞮侯)

저저후(且鞮侯)

기원전 101년 ~ 기원전 96년

10대

호록고(狐鹿姑)

호록고(狐鹿姑)

기원전 96년 ~ 기원전 85년

11대

호연제(壺衍鞮)

호연제(壺衍鞮)

기원전 85년 ~ 기원전 68년

12대

허려권거(虛閭權渠)

허려권거(虛閭權渠)

기원전 68년 ~ 기원전 60년

13대

악연구제(握衍朐鞮)

도기당(屠耆堂)

기원전 60년 ~ 기원전 58년

10.2. 동흉노

대수

칭호

재위기간

1대

호한야(呼韓邪)

계후산(稽侯狦)

기원전 58년 ~ 기원전 31년

2대

복주루약제(復株累若鞮)

조도막고(雕陶莫皋))

기원전 31년 ~ 기원전 20년

3대

수해약제(搜諧若鞮)

저미서(且麋胥)

기원전 20년 ~ 기원전 12년

4대

거아약제(車牙若鞮)

저막거(且莫車)

기원전 12년 ~ 기원전 8년

5대

오주류약제(烏珠留若鞮)

낭지아사(曩知牙斯)

기원전 8년 ~ 13년

6대

오루약제(烏累若鞮)

함(咸)

13년 ~ 18년

7대

호도이시도고약제(呼都而尸道皋若鞮)

여(輿)

18년 ~ 46년

8대

오달제후(烏達提侯)

오달제후(烏達提侯)

46년

10.3. 북흉노

대수

칭호

재위기간

1대

포노(蒲奴)

포노(蒲奴)

46년 ~ ?

2대

우유(優留)

우유(優留)

? ~ 87년

10.4. 남흉노

대수

칭호

재위기간

1대

혜락시축제(醢落尸逐鞮)

난제비(欒提比)

48년 ~ 56년

2대

구부우제(丘浮尤鞮)

난제막(欒提莫)

56년 ~ 57년

3대

이벌어려제(伊伐於慮鞮)

난제한(欒提汗)

57년 ~ 59년

4대

혜동시축후제(䤈僮尸逐侯鞮)

난제적(欒提適)

59년 ~ 63년

5대

구제차림제(丘除車林鞮)

난제소(欒提蘇)

63년

6대

호야시축후제(胡邪尸逐侯鞮)

난제장(欒提長)

63년 ~ 85년

7대

이도어려제(伊屠於閭鞮)

난제선(欒提宣)

85년 ~ 88년

8대

휴란시축후제(休蘭尸逐侯鞮)

난제둔도하(欒提屯屠何)

88년 ~ 93년

9대

-

난제안국(欒提安國)

93년 ~ 94년

10대

정독시축후제(亭獨尸逐侯鞮)

난제사자(欒提師子)

94년 ~ 98년

11대

만씨시축후제(萬氏尸逐侯提)

난제단(欒提檀)

98년 ~ 124년 / 94년 ~ 111년

12대

오계후시축제(烏稽尸逐侯提)

난제발(欒提拔)

124년 ~ 128년

13대

거특약시축취(去特若尸逐就)

난제휴리(欒提休利)

128년 ~ 140년

-

-

차뉴(車紐)

140년 ~ 143년

14대

호란약시축취(呼蘭若尸逐就)

난제두루저(欒提兜樓儲)

143년 ~ 148년

15대

이릉시축취(伊陵尸逐就)

난제차아(欒提車兒)

148년 ~ 172년

16대

도특약시축취(屠特若尸逐就)

난제□(欒提□)[20]

172년 ~ 178년

17대

-

난제호징(欒提呼徵)

178년 ~ 179년

18대

-

난제강거(欒提羌渠)

179년 ~ 188년

-

수복골도후(須卜骨都侯)

-

188년 ~ 189년

19대

특지시축후(持至尸逐侯)

난제어부라(欒提於夫羅)

188년 ~ 195년

20대

-

난제호주천(欒提呼廚泉)

195년 ~ 216년

흉노 멸망

-

좌부수(左部帥)

유표(劉豹)

-

-

선우

고우위거(高憂位居) [21]

-

11. 흉노 소속 인물

11.1. 흉노 분열 이전

★는 한나라 → 흉노, ☆는 흉노 → 한나라로 투항한 인물이다.

11.2. 흉노 분열 시기

11.3. 남흉노 멸망 이후

  • 노송다(路松多) - 도각흉노 사람으로 신평, 부풍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마보에게 붙었으며, 초벽을 점거해 진, 농산에 사는 저족, 강족의 호응을 받았으며, 전조의 유요가 장수를 파견해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해 유요가 직접 공격해 초벽을 함락하자 농성으로 퇴각했다.
  • 대두득일육국(大豆得一育鞠) - 흉노의 도독으로 287년에 종족 부락 1만 1천 5백 명을 인솔해 진나라에 항복했다.
  • 석무(石武) - 흉노의 휴저왕(休屠王)으로 322년에 상성을 바치고 전조에 항복해 진주자사에 임명되고 주천왕에 책봉되었다.
  • 위사호(萎莎胡), 호도대박(胡都大博) - 흉노의 인물로 286년에 각기 종족 부락 10여만 명을 거느려 옹주에 와서 사마준에게 항복했다.
  • 유고승원(劉誥升爰) - 흉노의 수령. 유맹의 아들로 유맹이 하정의 계략으로 살해당하자 그 무리를 관장했으며, 그가 죽자 유호가 계승해 철불부를 이루었다.
  • 장배독(張背督), 풍막돌(馮莫突) - 흉노의 인물. 석륵의 설득으로 307년 겨울 10월에 전한에 귀부해 장배독은 친한왕, 풍막돌은 도독부대에 임명되었다. 장배독의 한자의 배는 정확히는 勹, 背를 합친 한자이다.
  • 장숭(張崇) - 흉노의 수령. 서하에 거주하고 398년에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조곡(曹穀) - 흉노의 인물. 우현왕으로 전진에 항복했다가 365년에 전진을 배반했고 무리 2만 명을 이끄고 행성을 공격했으며, 부견이 군사를 이끌면서 8월에 격파되었다. 조활이 죽자 항복을 요청해 전진에 항복했다.
  • 조홍(曹弘) - 흉노의 인물. 416년에 병주의 호족 수만 락이 후진에 대항해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조홍은 대선우에 추대되었으며, 흉노보에서 요성도를 공격했지만 요의의 공격을 받아 토벌되면서 사로잡혀 장안으로 보내졌다.
  • 조활(曹活) - 흉노의 인물. 조곡의 동생. 365년에 조곡과 함께 전진을 배반해 행성을 공격했다가 부견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 학노(郝奴)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르자 이에 호응했고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군사를 파견했으며, 4월에 학다가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히자 항복했고 진북장군, 육곡대도독에 임명되었다.
  • 학다(郝多) - 흉노의 인물로 노수에 거주하다가 386년에 전진의 형양태수였던 조곡이 장안으로 부른 것을 학노가 호응했는데, 왕린이 마외를 점거하자 학노의 지시로 왕린을 공격했고 4월에 후진의 공격을 받아 붙잡혔다.
  • 학도원
  • 학산(郝散) - 흉노의 인물로 294년 여름 5월에 봉기해 상당을 공격해 장리를 살해하고 가을 8월에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항복했다가 풍익도위가 이들을 살해했다.
  • 호연철(呼延鐵) - 흉노의 수령. 이석에 거주하고 398년에 대군으로 옮기는 것에 불만을 품고 복속하고 있던 북위를 공격했지만 유악의 공격을 받아 격파되었다.
  • 호태아후(胡太阿厚) - 흉노의 인물. 요새 밖에 있다가 285년에 부락민 2만 9천 300명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항복했으며, 사마염은 그들을 요새 안쪽 서하에 두도록 했다.

12. 관련 문서


  1. [1]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 Хүн(훙)과 의미상 같다.
  2. [2] 유라시아 초원 서쪽에서는 이미 최초의 유목제국 스키타이가 활동했고 서역의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3. [3] 사족으로, 이게 쿠부치 사막의 직접적인 생성 원인이었다. 가뜩이나 척박한 땅에서 농사와 유목 생활을 병행하다보니, 빠르게 지력이 고갈되어 오늘날 서울특별시의 5배에 달하는 면적의 거대한 사막이 형성된 것이다.
  4. [4] 조공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조공의 형식만 빌린 무역이 아니라, 진짜로 삥뜯는 것을 말한다. 병자호란 때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을 생각하면 쉽다.
  5. [5] 이는 스파르타와도 대조되는데 둘 다 전투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노인을 공경했다. 이쪽에서 노인은 오랜 전투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 이러한 차이에는 스파르타는 농경 국가고 흉노는 유목 국가인 차이가 있어보이는데, 농경 국가에서는 노인에게까지 음식이 돌아갈 정도로 먹을 건 있는 데다가 속국인 메세니아를 정복해 거기서 나오는 식량까지 얻을 수 있던 반면, 흉노는 그러질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6. [6] 일반적으로 유목민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정주민들만 문자를 사용했다는 편견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이나, 베르베르족의 경우는 티피나그 문자라는 자체 문자를 만들어 쓴 바 있었고, 흉노보다 훨씬 후대에 나온 돌궐도 돌궐 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아랍인의 일파인 베두인들도 친척뻘 민족인 페니키아인들의 문자를 개량한 아랍 문자를 만들어서 썼다. 그리고, 거란족도 한자를 모방한 거란 문자를, 몽골족위구르 문자를 개량한 몽골 문자를 만들었다. 때문에 역시 같은 유목민인 흉노라고 자체 문자가 없진 않았을 것이다.
  7. [7] 두 마리 고양잇과 동물이 산양의 목을 물어뜯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
  8. [8] 터키는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괵튀르크(돌궐)와 더불어 흉노 역시 자기들 조상 역사로 본다. 한편, 몽골이나 유라시아(특히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흉노와 관련, 꽤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중국과는 사이가 안 좋아 그런지 서로 고고학 연구에 협조적이지 않아 이쪽과 연계 연구는 그다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9] 이 외에도 몽골어로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10. [10] 사실 고대엔 이런 갖다붙이기가 흔해서 그리스 신화만 봐도 테티스의 아들 닐로스의 딸 멤피스의 딸 리비아의 손자 아이굽토스포이닉스... 하는 식으로 족보가 엮이고, 로마인들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그 주변 민족들도 일리아스에 나오는 모 씨가 서쪽 모처에 정착해서 자국을 세웠다는 식이었다. 지금도 아라비아 씨족들은 족보가 아담까지 올라간다. 이는 고대 세계관의 문화권력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자고로 이웃들과 교류하려면 먼저 정체를 밝혀야 하는 법 아니겠나. 여기서 자기만 남들과 다른 종류의 세계관을 따른다면 낯선 이방인, 곧 아싸가 될 테니 주변에 맞춰 족보를 손볼 수밖에 없다. 주류 문화권 입장에서도 여태 우주부터 인간까지 모든 것을 가르쳐온 자기네 세계관이 한낱 변두리 촌놈들 앞에서 데꿀멍하도록 놔둘 수는 없을 테고. 비록 중국 사마천이 갖다붙이긴 했지만, 흉노 역시 공식 세계관에 맞춘 동인설정을 지어주는 것이 고대인 기준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
  11. [11] 이건 고대 서양도 마찬가지라서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 당시 페르시아군의 규모를 500만으로 추산했었다.
  12. [12] 티베트 고원에서 내려온 황하가 북쪽으로 크게 곡류하면서 만드는 중간지대. 그 때문에 하투(河套)라고도 하고, 하남(河南)이라고도 한다. 중국 한복판의 하남성과는 다르다.
  13. [13] 물론 여후와 중신들은 진노했고 번쾌가 10만의 군사를 요청했지만, 계포가 "번쾌는 10만의 군사로 고제가 40만으로도 못한 걸 하겠다는 망발을 하니 참해야 합니다" 라는 직언을 올렸고 없던 일이 되었다.
  14. [14] 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했던 이란계 유목민족.
  15. [15] 6세기경 수서에서 수나라가 다시 서역으로 진출해 동로마까지 기록에 남기지만 흉노는 없는 걸로 보아 시베리아로 튀었거나 망했거나. 현재로서는 추측할 단서가 없다.
  16. [16] 흉노족인 유연(劉淵)이 흉노와 형제의 관계였던 한이 멸망했으니 그 전통을 형인 흉노가 잇겠다며 국호를 한이라 했고, 실제로 한나라의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17. [17] 호하, 혁련하 등으로 불리는 국가로 역사상 마지막으로 흉노국가임을 내세운 대표 국가였다. 결국 선비족의 북위에게 멸망한다.
  18. [18] 한국인들이 더이상 한복을 평소에 입지 않고 한옥에 모두가 살지 않지만 무덤이나 장례는 (물론 이것도 좀 변질되긴 했지만) 되도록 옛날식으로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처럼 말이다.
  19. [19] 반대로 신라인이 지금의 만주 땅으로 가서 금나라 황실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오히려 이쪽이 근거는 더 그럴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진족=신라인'으로 보는 건 가당치 않지만. 기타 자세한 내용은 완안함보 항목 참조.
  20. [20] 이름이 유실됨.
  21. [21] 오나라의 자의적인 책봉
  22. [22] 흉노에서 한나라로 투항했다가 다시 흉노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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