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이트

히타이트
𒌷𒄩𒀜𒌅𒊭[1]
Ḫattuša

존속기간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178년

위치

아나톨리아

수도

하투샤

국가원수

언어

히타이트어, 루위야어

종교

히타이트 종교(주신: 테슈브, 아린나)

성립 이전

하티족

멸망 이후

바다 민족[2]
히타이트 소왕국들
리디아

1. 개요
2. 발음
3. 발굴
4. 언어
5. 정치
6. 법률
6.1. 당시 주변의 법률 형태
6.2. 더 진보적인 히타이트의 법률
6.2.1. 배상 중심
6.2.2. 비자유민에 대한 배려
7. 문화
7.1. 종교
7.2. 식문화
7.3. 철기 사용 논란
7.3.1.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방법: 바람
7.3.1.1. 한계
8. 역사
8.1. 기원전 1178, 바다민족의 침공
8.2. 부활(카르케미쉬)
8.3. 기원전 717, 아시리아에게 멸망
9. 민족
9.1. 터키의 관심
10. 기타
11. 대중 문화에서

언어별 명칭

히타이트어

𒄩𒋾 (Hati)
𒌷𒄩𒀜𒌅𒊭 (Ḫattuša)

터키어

Hititler

영어

Hittites

1. 개요

고대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에 존재했던 국가(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178년).

이집트바빌로니아 못지않게 인류 문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대 왕국이었지만, 남겨진 기록이 거의 없어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국가다.

2. 발음

성경에 '헷'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이집트의 조각에 ht라는 표기로 등장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모음을 거의 표기하지 않았으므로 h와 t라는 자음만 남은 것. 이집트학 학자들은 이를 헤테(Hete)라고 읽었지만, 나중에 밝혀진 올바른 이름은 하티(Hati)였다. 문제는 위에 언급한 사례 외에 그들과 관련된 자료가 없어 그 실체가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지만, 1870년 시리아의 하마라는 지역에서 그들의 글자가 새겨진 돌들이 발견되어 연구가 시작되었다.

3. 발굴

1907년 터키의 보아즈칼레(Boğazkale)[3] 마을 근처에서 수도 하투샤(Ḫattuša)가 발굴되었다. 히타이트라는 이름은 '하투샤인'을 의미하는 '하티'라는 말에서 나왔을 정도이므로 이 일대에서 유물이 방대하게 발굴되어 히타이트의 실체가 상당 부분 드러났다. 심지어 요리책까지 발굴되어서 히타이트 사람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 다만 발굴된 유물들이 대부분 도서관에 있는 '문서'였고, 값비싼 보석이나 장신구 등은 일절 발굴되지 않았다. 국가가 멸망할 때 도시를 전소하고 값나가는 물건은 죄다 빼버렸다고 추정된다.

발굴 결과 트로이가 바로 히타이트 문명권의 도시였던 윌루샤(𒌷𒃾𒇻𒊭, Wiluša)[4]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로이 문서 참조.

4. 언어

히타이트인들은 인도유럽어족 아나톨리아어파에 해당하는 히타이트어를 사용했는데, 다른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언어이며,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되는 언어들 중 사멸된 고전어를 포함해서 해독된 가장 오래된 언어 중 하나이기 때문에[5] 원시인구어를 재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한다. 이들의 언어는 제1차 세계 대전체코의 학자 베드리흐 흐로즈니(Bedřich Hrozný)가 해독했다. 덕분에 히타이트인들의 삶에 대한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히타이트어의 가장 큰 특징은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산스크리트 등 잘 알려진 고전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에 비해 문법이 굉장히 단순하다는 것으로, 이들 언어뿐만이 아니라 이 언어들의 직계 후손격 언어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명사의 성 구분, 동사의 접속법이나 기원법 등이 없다.

다소 기이한 점은, 다른 민족들은 오늘날 우리가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민족을 하티(Hati)인, 즉 히타이트인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히타이트인들 스스로는 그들이 소아시아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서 살았던 민족이나 그들의 언어를 하티라고 지칭했다는 점이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언어를 네샤어, 카네쉬어라고 불렀는데, 네샤(카네쉬)는 하투샤 동쪽에 있는 더 오래된 도시이다. 하투샤 지역을 정복하기 전에는 네샤가 히타이트인들의 중심지였던 것 같다.

5. 정치

히타이트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은 그들의 정치체계와 법률이다. 히타이트의 정치체계는 타바르나(왕), 타와난나(제사장+왕비+대비), 판쿠(귀족회의)의 세 주체에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상호 견제하게 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타바르나의 여성형인 타와난나는 대왕비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왕비와 타와난나는 별개의 지위였고 왕의 정비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타와난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타와난나는 여제사장의 지위도 함께 맡았으며, 왕비일 때는 왕의 배우자로서, 왕위가 계승되고 나면 왕의 어머니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왕과는 별개의 권한을 가진 여성판 최고직위가 왕의 부인이나 어머니에게 별도로 계승되는 제도라 할 수 있겠다.

텔레피누의 칙령으로 판쿠는 왕위와 타와난나의 계승을 비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왕에게 지명된 후계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다음 왕이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판쿠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는 왕위를 둘러싼 지나친 권력다툼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며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요소가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쿠와 왕 사이에 특별한 권력다툼이 일어난 흔적은 없다.

6. 법률

6.1. 당시 주변의 법률 형태

히타이트에서 시행된 칙렁이 200개 이상 발견되어 이들이 비교적 도시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타이트 이외의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법률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원칙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복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즉 눈에는 눈 하나만을 받아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없으며 재보복도 금지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6.2. 더 진보적인 히타이트의 법률

6.2.1. 배상 중심

그런데 히타이트의 법률은 이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우선 법률조항 자체도 이전이나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문명과 달리 매우 너그러운 편이었으며, 민법적인 문제를 형법적인 문제와 구별하여 민법적인 문제에는 체벌보다 배상을 규정하고, 형법적인 문제에서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는 등 로마 제국을 제외하면 고대와 중세는 물론 근대 초기까지도 달성하지 못한 개념에 도달했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는 8가지로 한정하고 아시리아 문명권의 법률에서 흔히 보이는 가죽 벗기기, 거세, 말뚝에 꿰찌르기 같은 혹형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아예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 전에 사형에 처하는 범죄에 대해서 사형시키지 않도록 법이 바뀌었다는 언급을 바탕으로 하며, 정말로 사형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6.2.2. 비자유민에 대한 배려

히타이트 법률에서 또 다른 독특한 점은 비자유민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자유민은 상류층, 비자유민은 하류층으로 생각하며 같은 범죄에 대해서도 비자유민에 대한 범죄는 배상액이 절반이다. 즉 자유민이 농노 같은 비자유민에게 범죄를 가했을 경우에 그에 대한 처벌/배상액이 자유민에 대한 범죄 처벌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비자유민이 내야 할 배상액 역시 절반이라는 것이다. 권리가 절반이면 의무도 절반인 셈이다. 상류층은 당연히 더 많은 권리와 더 적은 의무가 주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바빌로니아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노예의 범죄는 더 심하게 처벌하는 동시에 노예에 대한 범죄는 가볍게 처벌한다. 또한 히타이트 여성의 지위도 다른 국가에 비해 비교적 높게 인정되어,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가 있다. 이때 자식들은 남편에게 귀속되지만 아내는 자신이 데리고 갈 자식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

7. 문화

7.1. 종교

종교적인 면에서도 특이했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면 그들에게 히타이트의 종교를 전파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신을 받아들여 하투샤에서 숭배했다. 이때 원래의 기도문 등을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피정복민의 언어 역시 하투샤에 도입되었다. 수도 하투샤에서만 8개 언어가 확인되었다. 예술이나 철학 쪽의 독자적인 발전은 크게 이루지 않은 듯하며, 구바빌로니아인들이나 다른 주변 문명의 것을 차용했다.

7.2. 식문화

발굴된 히타이트의 요리책을 보면 우유을 첨가한 유제품 위주의 식사를 했다고 한다.

7.3. 철기 사용 논란

히타이트인들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철기 사용자로 유명하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의 국가들은 청동기를 사용했는데, 이 설에 따르면 당대에 오직 히타이트만이 용광로를 이용해 철을 주조할 수 있었고 이 철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무기를 가진 히타이트인들이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등에서도 극히 소량이지만 철기가 사용된 흔적이 있으나, 히타이트 이전의 철기는 운철[6]을 이용해 만든 것으로 철광석을 캐서 제련하는 단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반론: 다른 연구에 의하면 당시 히타이트의 철기 제작 수준은 동시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가 사용했던 철기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철제 무기 역시 상용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출처1] 히타이트의 유물 중에 청동기보다 우수한 품질의 철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히타이트의 제철 수준은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7.3.1.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방법: 바람

용광로에서 철을 녹일 정도로 온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산소를 공급할 풀무가 필요한데 당시 히타이트에는 풀무가 없었다. 때문에 히타이트 문명은 풀무의 역할을 자연의 바람으로 대체하였다. 특정한 시기에 하투샤 부근의 황야에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히타이트인은 바로 이 시기에 황야에 용광로를 설치하고 맹렬한 황야의 바람을 풀무 대용으로 써서 용광로가 철을 녹일 수 있는 높은 온도를 가까스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히타이트는 멸망하는 날까지 하투샤를 버릴 수 없었고, 그들에게 철기를 선사하는 히타이트의 신(神)들은 곧 바람과 동일시되어 표현되었다.

7.3.1.1. 한계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기술은 그 특성상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갈 수 없었다. 히타이트의 자연풍으로는 오직 황야에 바람이 거세게 부는 얼마 안 되는 때에만 쇠를 만들 수 있었으니 생산량이 아주 적고 공급도 일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생산 시기, 생산지는 물론 제조에 필요한 기술도 아주 특수한 것으로서, 천시(天時. 황야에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는 때)와 지리(地理. 하투샤 부근의 황야)와 인화(人和. 제조방법을 아는 히타이트인)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이유로 히타이트에선 바람의 신이 최고신이었기도 해서 당시 히타이트 문명에서는 '철기 자체가 초자연적인 신성한 재료'로 대우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 시대에는 단지 철로 만들어진 것 자체가 칠지도사인검 정도의 주술적 권위를 가진 셈이다.

8. 역사

선주민인 하티인들까지 계산하면 기원전 2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기지만, 우리가 보통 히타이트라고 부르는 종족이나 국가는 고왕국이라고 불리는 기원전 17세기부터 시작된다. 이후 기원전 1170년대 후반 바다 민족에게 파괴된 이후, 잔여세력이 기원전 717년까지 소아시아 동부 지역에 존재하였다. 수도는 하투샤.

도시 성문, 라이온 게이트

원래부터 소아시아에 있었던 민족은 아니며, 어딘가에서 이동해 와서 소아시아 동부에서부터 정복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발상지는 알 수 없다. 히타이트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인도유럽어족의 발상지를 흑해 북부로 보는 초원 유목민 모델에서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발칸 반도를 통과해서 이동했거나, 시계 방향으로 코카서스를 거쳐 아나톨리아로 이동해 왔을 것으로 생각하며, 아나톨리아를 발상지로 보는 아나톨리아 농경민 모델에서는 원래부터 아나톨리아 지방에 살았던 사람으로 생각한다. 초원 유목민 모델을 중심으로 서술하자면 동유럽의 신석기 문화인 Old Europe이 쇠퇴하는 와중에 다뉴브 강 하류를 지나 아나톨리아로 진입한 사람들이 히타이트인의 선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기원전 3000년대 말~2000년대 초). 선주민인 Hatti인이나 Hurri인을 밀어내거나 동화시켜 아나톨리아를 점거하였다. 히타이트라는 이름도 선주민인 Hatti인에서 따온 것이다. 도장용 등 특수한 곳에 사용하는 상형문자가 있었고 그 외에는 쐐기 문자를 사용하였다.

하투실리 1세가 히타이트계 소왕국들을 통합하였고, 그 다음 왕인 무르실리 1세가 이미 초장거리 원정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히타이트의 국력으로는 무리한 것이었고 무르실리 1세는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살해당한다. 이후 히타이트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히타이트 고왕국 말기인 텔레피누 왕은 기록된 세계 최초의 왕위계승 법칙을 만들어 내어 침체기 중 그나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8] 그러나 기원전 14세기인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히타이트는 소아시아를 안정시킨 후 아시리아 및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을 위해 수필룰리우마는 바빌로니아의 왕녀와 결혼했다. 동맹의 효과는 확실하여, 당시 중동 지역의 최강자였던 미탄니 제국을 정복하며 일약 오리엔트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당시 이집트아케나톤으로 개명한 아멘호테프 4세가 종교개혁을 했다가 어린 투탕카멘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종교개혁이 취소되었다. 또 투탕카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80대의 사제인 아이가 왕위에 올랐다가 1년 만에 사망하는 등의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대외적인 활동에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필룰리우마는 이집트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고 있었는데, 아들인 제난자가 투탕카멘의 누이이자 아내인 안케세나멘의 요청으로 파라오가 되기 위해여 이집트에 가는 도중 국경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이집트와 본격적으로 적대관계에 들어섰다. 히타이트는 이집트령 시리아에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이는 다시 말해, 히타이트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엿먹이는 수준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 그러나 이 지역은 전염병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군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히타이트 역시 전염병으로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 뒤를 이른 아르누완다 2세 등이 잇달아 사망하면서 전쟁은 흐지부지 끝났다. 이 전염병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이후에도 20년 이상 히타이트를 괴롭혔음은 확실하다.

아르누완다 2세의 사망 이후 그 형제들이 모두 태수 자리를 담당하여 히타이트의 법령상 왕위를 이을 수 없기에 아직 어린 아들인 무르실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히타이트의 속국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고, 이집트군도 히타이트에 위협을 가해 왔으며, 각지의 태수 자리에 있던 무르실리 2세의 형들이 전염병으로 잇달아 사망하는 등 일시적으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무르실리 2세가 이 혼란을 수습하고 전 영역을 안정시키면서 히타이트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히타이트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지방 및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출해 있었다.

무르실리 2세의 후계자인 무와탈리스 2세는 기원전 1274년에 이집트람세스 2세카데시 전투를 벌였다. 이집트의 조각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히타이트 측의 승리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실제 전투의 경과를 보면 이집트의 기록에 따르더라도 전투 초반에 이집트군의 절반은 궤멸당했고, 나머지 절반은 전장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결국 마지막까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보면 히타이트의 승리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이집트 측의 설명에 따르면 그 상태에서 람세스 2세가 갑자기 신으로 변신해서 혼자서 히타이트군을 전멸시키고 승리했다고 나온다. 실제 전투의 경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카데시 전투의 결과로 히타이트는 우피(현재의 다마스쿠스 부근) 등의 이집트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고, 이집트의 동맹국이었던 시리아 지역의 아무루 왕국이 히타이트에 종속하게 되었으며, 아시아에서의 이집트의 세력은 가나안(Canaan) 지역만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에도 이집트와 긴 전쟁이 계속되기는 했지만 카데시 전투 이후에는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며, 소규모의 지역적 다툼만이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하투실리 3세의 딸이 람세스 2세와 결혼하면서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우호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무와탈리 2세 시대를 기점으로 히타이트는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기후 변동으로 오리엔트가 점차 건조화되어 현재의 기후로 변했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수도인 하투샤 근처에 흐르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 강(히타이트 시대에는 마라샨티야Maraššantiya 강으로 불림) 정도의 수자원으로는 건조화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히타이트가 쇠퇴하면서 나일 강이라는 대하천을 끼고 있는 이집트와 역시 대하천인 유프라테스 강을 보유한 아시리아 등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였지만, 이런 나라들도 점차 망조가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8.1. 기원전 1178, 바다민족의 침공

결국 청동기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대규모 바다 민족의 이동이 유럽 대륙에서 시작되면서 히타이트는 미케네와 윌루샤(트로이의 본래 이름) 등과 함께 멸망했다. 다만 수도 하투샤에 도시 전체를 불태운 화재의 흔적은 있어도 대규모 외침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몇몇 바다 민족들의 침략으로 망했다기보다는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상태였던 걸로 추정된다. 물론 유럽 대륙의 대규모 민족이동이 내전으로 이미 멸망한 히타이트만 때린 것은 아니라서 아시리아와 이집트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위축된 시기를 보내게 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히타이트가 멸망한 이후, 하투샤 부근에서 히타이트인들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의 도기 양식들이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다.

8.2. 부활(카르케미쉬)

이후 히타이트는 유프라테스 강 어귀의 카르케미쉬에서 부활했지만, 이전과 같은 제국이 아닌 몇몇 도시 국가들로 잔존했을 뿐이며 군사적인 정복보다는 상업 등에 주력한 것 같다.

8.3. 기원전 717, 아시리아에게 멸망

기원전 717년 아시리아에 완전히 멸망했다.

9. 민족

히타이트인들은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민족이다. 따라서 현대 터키 민족의 원류로 여겨지는 튀르크족과 그다지 상관없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터키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존재했던 민족의 역사라고 꽤 큰 관심[9]이 많다. 미국유럽 고고학자들과 함께 꽤 열정적으로 히타이트 유적 발굴 및 조사를 하고, 미국과 합작으로 히타이트 고대사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까지도 만들었다.

9.1. 터키의 관심

터키가 땅의 역사에 관심을 많이 두는 이유는 현재의 터키인이 순혈 튀르크인보다는 11세기 이후 튀르크화한 아나톨리아 선주민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전자 조사 결과 그리스인과 터키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한다.[10]

10. 기타

  •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오리엔트 지역에 철기를 널리 보급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에 이집트에게 격퇴당했다" 정도가 서술의 전부. 전자는 히타이트의 철기 문화, 후자는 카데시 전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이 문구의 내용은 전자와 후자 둘 다 틀린 내용이다.

11. 대중 문화에서

  • 게임 문명 3에서는 아직 들에 비해 문명별 특색이 그리 강하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비싸지만 강력한 전차를 가지고 있다. 그 밖에 문명 5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에서도 등장.
  •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서는 선택 가능한 문명으로 등장. 철기의 이미지 때문인지 궁사 공격력 +1과 투석기 체력 2배[11] 라는 무지막지한 보너스가 있다.
  • 만화 하늘은 붉은 강가는 상술된 최전성기의 히타이트를 배경으로 한다. 참고로 하투샤 부근을 흐르는 크즐으르막(Kızılırmak)강의 이름이 바로 '붉은 냇물'이라는 뜻이다.
  • 만화 왕가의 문장에서는 이집트의 강력한 라이벌 나라로 나온다. 이즈밀 왕자라는 강력한 후계자가 있기에 주인공 멤피스에게 골칫거리이다.
  • 영화 트로이에서 네스토르가 언급한다.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벽의 전투에서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군대에게 대패하는데, 이대로 트로이에게 쉽게 패배하고 후퇴한다면 그리스는 모든 영향력을 잃게 되고 히타이트의 공격을 받게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 웹툰 카산드라의 번외편인 아베나에도 나온다. 전혀 등장이 없고 언급조차 말미에 딱 두 번 나오는데 알고 보면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는 계기가 된 국가.
  • Fate 시리즈에서는 맞수인 람세스 2세가 무지막지하게 강해지며 덩달아 파워업. 이런 람세스도 고전시킨 강국이다. 라메세움 텐티리스 중 주신전 외벽은 히타이트의 신철로 덮혀있는데, 범상한 대군보구는 상처없이 튕겨내는 강도를 자랑한다.


  1. [1] 해당 문자가 표기되지 않고 깨지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추가하자면, 로 표기된다. 쐐기 문자(Cuneiform) 표기.
  2. [2] 히타이트인들의 일부가 해적이 되어 바다 민족의 일원이 되었다고 추정된다.
  3. [3] 이전 지명은 보아즈쾨이(Boğazköy).
  4. [4] 그리스어로는 일리온.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다.
  5. [5] 무려 기원전 16세기경까지 올라가는 기록물이 존재한다.
  6. [6] 철 성분이 많은 운석.
  7. [출처1] 7.1 'From Bronze to Iron' 56-58p. Jane C. Waldbaum
  8. [8] 왕비가 낳은 적자가 제1계승권을, 후궁이 나은 서자가 제2계승권을 가진다. 아들이 아무도 없으면 사위가 계승권을 가진다.
  9. [9] 심지어 에르도안도 후원한다. 이 양반은 이슬람 우월사상주의말고도 튀르크 우월주의도 있기에 히타이트 역사가 터키 고대 역사 우월성이라고 하여 매우 좋게 본다.
  10. [10] 이처럼 한 국가의 현재 거주 민족이 자신들과 얼핏 상관 없어 보이는 듯한 과거 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우즈베키스탄티무르를 영웅시하고 연구하는 것, 그리고 요르단이 자국 학자들을 우대하며 페트라를 만든 나바테아인들을 조상으로 받들며 연구하는 것 등이 있다. 다만 나바테아인은 요르단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요르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의 직계 조상이다.
  11. [11] 풀업 시 300이라는 상당한 체력을 자랑한다. 탱딜 겸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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