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국가: 대한민국

개최지역: 서울특별시

개회식: 1986년 9월 20일

폐회식: 1986년 10월 5일

1. 개요
2. 유치과정
3. 경기장
4. 경기 결과
5. 메달 순위
6. 마스코트
7. 이모저모

1. 개요

1988 서울 올림픽의 신호탄

1986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아시안 게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였던지라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적 기대가 컸는데 무엇보다도 2년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리게 될 올림픽을 대비한 리허설 성격이 강했기에 정부와 서울특별시 또한 성공적인 개최에 사활을 거는 등, 여타 아시안게임에 비해 무게감이 높았다.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또한 2년 후 올림픽이 열릴 장소를 그대로 썼으나 선수촌의 경우에는 따로 건설했다. 아시안게임 선수촌은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에 짓고 올림픽 선수촌은 올림픽공원 동편에 건설. ~~즉 아시안게임 때 잠실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은 걍 도보로 이동하면 그만이었지만 올림픽 때는.....당연히 선수촌과 경기장을 연결하는 선수용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2. 유치과정

사실 아시안게임의 서울 개최는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70년에 실현될 했다. 그러나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 사건을 비롯한 북한의 망발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이 거셌던데다, 직접적인 개최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는 정부 시책에 맞춰 각종 건설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재정 여건 또한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1] 이런 시기에 아시안게임을 개최할 경우 그야말로 서울시의 재정이 바닥날 수 있었던데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이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곧 대한민국 재정에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태국방콕에게 유치권을 위임하면서 사실상 개최를 포기하게 되었던 것.

그러다가 경제 사정이 보다 나아진 1970년대 후반에 아시안게임을 다시 한 번 유치해서 정말 개최해보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1979년에 마침내 공식적으로 유치에 도전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2년 후 열리게 될 올림픽과 함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연달아 개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나 지금이나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방안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이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를 개최한 경험이 없었던지라 아시안게임을 통해 개최 능력을 보여준 뒤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2]

그렇게 1986년 아시안게임 유치에 나선 서울의 경쟁 상대는 애초 이라크바그다드 하나였고[3] 여긴 얼마 전부터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개최가 거의 유력해보였다.[4] 그런데 유치 확정 발표를 않고 미적미적거리던 1980년 10월 말에 뜬금없이 개최 신청서를 접수한 곳이 있었으니 북한평양직할시.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아시안게임 개최하는 꼬라지를 눈 뜨고 볼 수 없는 불청객의 등장이었다. (...)

그러나 서울이 1970년 대회 개최 포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올림픽 개최까지 염두하면서 야심차게 경기장을 만드는 등의 여러 진전된 모습을 보인데다, 바그다드와 평양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전쟁중이거나 그저 이념 대결에만 몰두하는 일그러진 민낯 일색이었기 때문에 표 대결로 갈 경우 서울이 유력했다. 그리고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을 한달여 앞둔 1981년 9월 30일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 때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됨에 따라 대세가 완전히 기울자 바그다드와 평양이 모두 유치를 포기, 서울이 1986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덤으로 북한은 도대체 뭐하러 능라도 경기장을 지었는지 의문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3. 경기장

당연한 얘기지만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과 종목별 경기장이 거의 대부분 같다.

4. 경기 결과

대한민국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를 획득하여 금메달 94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한 중국에게 한 끗 차이로 밀렸다.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아시안 게임에서 종합 우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안습.[5] 금메달 수가 아닌, 전체 메달 수에서는 대한민국이 1위라(대한민국 224개, 중국 222개) 엄청난 성과를 보인 아시안 게임인 것은 맞다.

그리고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많이 이용했다. 편파 판정 같은 것도 있지만, 아시안게임이 올림픽에 비해 개최국이 경기종목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권한이 더 많다. 양궁 같은 경우, 이미 세계대회가 그랜드피타 방식[6]으로 경기를 한데 비해, 서울 아시안 게임은 구식인 더블라운드 방식[7]을 채택했었다.[8] 그리고 28년 후에 초반 1위를 달리는데.....

대한민국복싱 12체급을 전부 우승했다[9]. 도리어 태권도는 8체급 중 하나를 놓쳤다.

일본 유도가 대한민국에 개발살이 났다. 금메달 8개(7체급+무제한급, 남자부만 실시) 중 대한민국이 6개(+은 1, 동 1), 일본이 2개를 가져갔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편파판정, 자국 버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비판을 받는 경기이기도 하다.

유치경쟁에서 밀려서 감정이 상한 북한에 동조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라오스, 몽골, 남예멘, 시리아가 대회를 보이콧하였다.[10] 시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전 올림픽에도 불참한 반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후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였다. 물론 북한은 죄다 보이콧을 날렸지 이에 따라 참가국 수가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직후 대회인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보다 적었다. 그냥 중국 빼고 공산권 몽땅 불참이라고 보면 맞다. 하지만 중국 하나 덕에 이들의 부재감이 사라진 듯.[11]

하지만 북한은 보이콧만으로도 모자라 이 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아랍계 테러범에게 사주를 내려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바람에 5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서울올림픽도 보이콧한 상태에서 약 1년 뒤인 1987년 11월 29일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참가했다.

5. 메달 순위

순위

국가명

합계

1

중국[12]

94

82

46

222

2

대한민국

93

55

76

224

3

일본

58

76

77

211

4

이란

6

6

10

22

5

인도

5

8

23

36

6

필리핀

4

5

9

18

7

태국

3

10

13

26

8

파키스탄

2

4

3

9

9

인도네시아

1

5

14

20

10

홍콩

1

1

3

5

11

카타르

1

0

3

4

12

레바논

1

0

1

2

12

바레인

1

0

1

2

14

말레이시아

0

5

5

10

15

이라크

0

5

2

7

16

요르단

0

3

1

4

17

쿠웨이트

0

1

7

8

18

싱가포르

0

1

4

5

19

사우디아라비아

0

1

0

1

20

네팔

0

0

8

8

21

방글라데시

0

0

1

1

21

오만

0

0

1

1

6. 마스코트

공식적으로 마스코트는 없고[13] 대신 19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홍보용으로 썼다.[14] 사실상 올림픽 리허설 성격으로 치러진 대회였기 때문에 따로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를 만들어봐야 비용만 들고 올림픽 홍보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으로 보이니 그냥 안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호돌이가 개회식 매스게임에도 묘사되고 폐회식에서는 다음 베이징 대회 마스코트와 함께 등장했다.[15] 말 그대로 올림픽 리허설 대회라는 평가답게 아시안게임 홍보는 버리고 올림픽 홍보에만 집중한 셈... 이런 이유로 대회를 앞두고 아시아경기대회 기념품은 찾기 힘들고 호돌이밖에 없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여담으로 기업후원사 선정에서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합해서 받았기 때문에 후원기업들도 호돌이를 광고에 사용하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동시에 내걸곤 했다. 이런 상황이니 설령 아시안게임 마스코트가 따로 있었다 하더라도 기업입장에서는 올림픽에 보다 무게를 두고 홍보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는 호돌이에 밀려 별로 사용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무위키 이전 버전이나 인터넷 검색 등에서 86 아시안 게임 마스코트라는 설명이 붙은 채 돌아다니는 녀석인데, 얘는 1985년 태국에서 열린 제13회 방콕 동남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 샴고양이 (태국어: Wichien-maat)이다.# 가장 공신력이 있어야 할 OCA 공식 홈페이지가 느닷없이 서울아시안게임 마스코트로 올려놓은 탓에 잘못된 정보가 사실처럼 유포된 것.

7. 이모저모

  • 폐막식 끝나자 마자 바로, 그러니까 다음 날도 아니고 그날 저녁도 아니고 폐막식 끝나고 바로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도력 때문에 우승했다는 특별방송을 방영하는 바람에 바로 TV 끄고 싶어졌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인데 아시안 게임의 좋은 성적으로 고조되었던 기분이 저 방송들 때문에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바로 TV 부숴버리고 싶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당시에도 한국 국민들은 스포츠와 정치를 연관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에 한껏 고양된 감정이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원수에 대한 선전으로 이어져서 역효과만 난 방송이었다. TV를 보던 보수지향적 6,70대 노인들에게서도 쌍욕이 튀어나왔다는 증언이 있다.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은 <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전두환제5공화국 정권은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양대 행사로서 정권의 부족한 정당성을 땜질하고, 위세를 과시하며 국민들을 스포츠에만 눈에 돌리게 하는데 했다. 이때부터 내세운 슬로건이 "86・88". 하지만 그만큼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을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5공 정권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항목 참조.
  • 한편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단에게 총 2억 5천만원의 포상금을 쐈다.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액수였기에 화제가 되었다.[17]
  • 한편 1986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철도 수송의 후진성이 다시 드러났다. 당시 여객철도차량의 노후화라든지, 70년대 초 지어져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를 필두로 한 도로교통의 급성장으로 철도교통이 얼마나 쇠락해갔던 것. 이런 후진성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새마을호 PP 동차나 무궁화호 NDC 동차 등이 속속 개발되었고, 나아가 1987년 12월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공식적으로 경부고속철도의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게 된다. 실제로 2010년대 기준으로 현재 볼 수 있는 여객 철도의 골격이 이 때를 전후해서 형성되었다. 그 이전의 것은 2004년을 기점으로 쇠퇴해 갔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이후 탄생한 새마을호 PP 동차가 27년을 달리고 2013년 1월에, 무궁화호 NDC는 24년을 달리고 2010년에 잠들었다.
  • 가수 조용필1985년에 이 대회를 앞두고 낸 앨범에 "아시아의 불꽃"이라는 곡이 들어가 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조용필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 태권도가 최초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남자부만 8체급으로 실시하였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7체급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 이때 조직된 자원봉사자회는 그대로 88년까지 이어져 계속 활동했다. 다만 86년 아시안게임 때는 자원봉사자들의 외국인에 대한 과잉친절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86 아시안게임은 국가 규모로 여는 최초의 대형 스포츠 대회였기 때문에, 시대 분위기상 자원봉사자들이 사명감과 긍지에 불타올라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좌석 앞까지 일일이 들어주기도 하고, 알아듣지도 못 하는 영어에 무조건 예스를 연발한다거나, 심지어 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짐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18] 정작 내국인에 대한 친절은 이것보다 못하여 "비굴한 친절"이라며 조직위 내에서도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은 서울 올림픽에 가서야 다소 개선된다. 그런데 정작 28년 뒤에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이보다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 개최일 전날이 추석연휴기간 마지막날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편성된 추석특집프로그램 중에서는 아시안게임 참가선수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1986년, 1989년, 1996년에 나온 TV광고 영상 중에서 1분 29초 ~ 6분 23초 사이의 영상을 보면 서울아시안게임 특집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 중계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기간 중에 방송되는 특집 예능프로그램 예고와 추석특집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이 나온다. 이중에서 추석특집 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을 보면 '아시아경기대회 참가선수와 함께'라는 내용이 나온다.
  • 2018년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의 일부 고위층 인사가 선수로 위장, 참가해 우리측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 비인기 종목의 관중 동원을 위해, 주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입장권을 나눠주고, 응원할 국가의 노래도 학교에서 가르쳤다. 해당 국가의 선수들은 뜬금없이 한국인 학생들이 자신들의 국가나 인기곡을 불러줘서 감동했을지도....당시 잠실 주변 중, 고등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은, 응원할 국가의 노래 한 곡씩 외웠던 기억이 있다.


  1. [1] 1960년대 후반에 당대 건설업계에 빛을 준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세운상가 건설이나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사업, 고가도로와 지하도 건설, 흑역사 시민아파트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이중 상당수가 단기적으로 수익을 기대해볼만한 사업이 아니었던지라.....
  2. [2] 다만 이는 말 그대로 표면적인 주장이었을뿐, 실제 관계자들은 개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올림픽보다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보였던 아시안게임 유치에 사활을 걸 작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림픽 유치의 경쟁 상대는 이미 두 번이나 큰 대회를 유치해본 이웃 국가의 대도시였기 때문.
  3. [3]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1980년 4월에 서울로 확정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신청 마감일인 4월까지 유치 의사를 밝힌게 서울 하나뿐이었기 때문. 물론 앞서 언급했다시피 1970년의 개최 포기 전례가 있는데다 당시 AGF 자체가 한국을 비롯한 친서방 진영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제3 세계 비동맹 국가들의 입김이 제법 셌던지라.....
  4. [4] 물론 이라크측은 전쟁을 일찍 끝낼 것이니 바그다드 개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으나 알다시피 전쟁은 1988년까지 이어졌다. (...)
  5. [5] 승부가 마지막 날 밤에야 결정된 터라 그 날 밤에는 경기를 중계해주면서 금메달 숫자를 자막으로 속보 띄워주기도 했다. 우리나라로서는 허재가 중국과의 농구 결승전 도중 발목부상을 당해 5분밖에 뛰지 못해 금메달을 내준 것 등, 당일 중국과 금메달을 겨뤘던 경기들이 아쉬울 따름.
  6. [6] 요즘의 올림픽 양궁을 생각하면 된다
  7. [7] 육상이나 수영처럼 거리에 따라 세부종목을 많이 두는 방식. 당연히 금메달 수도 훨씬 많아서 김진호 선수가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개인전 단체전 2개만 있는 요즘 방식에서는 3관왕은 불가능하다.
  8. [8] 당연히 다른 나라도, 자국에서 개최하는 아시안 게임에 자국에 유리한 경기종목을 많이 집어넣곤 한다.
  9. [9]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7체급 우승했기에 원래 실력에 개최국 버프까지 받은 셈. 다만 복싱이 경우는 편파판정 논란이 발생할 정도로 말이 좀 많았다.
  10. [10] 당시 아프가니스탄소련군이 점령 중으로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철수할 때까지 사실상 소련 식민지. 몽골/남예멘/베트남/라오스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다.
  11. [11] 사실 중국은 소련과 반목하는 사실상의 독자 공산 국가였던데다 한국과는 1983년 5월의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잘 해결되면서 관계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차기 대회 개최를 천명한 마당에 서울 대회에 불참하게 되면 모양새가 매우 안 좋았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올림픽 개최까지도 노리고 있었기에 두말 않고 서울에서 개최된 두 대회 모두 참가했다.
  12. [12] 당시에는 중공이라고 불렸다.
  13. [13]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백서에도 휘장만 올라와 있을 뿐 마스코트에 대한 내용은 없다. 다만 휘장사업 부문에서 호돌이를 사용했다는 것은 나온다.
  14. [14] 호돌이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 메달을 목에 걸고 있어서 이 부분은 바꿔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냥 썼다. 사실 아시안 게임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승인 하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주관하는 올림픽의 지역 버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륜 메달을 썼다고 크게 이상할 건 없다.
  15. [15] 해당 폐회식 영상에서도 호돌이를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로 소개하지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라고 안한다.
  16. [16] 1990년, 2002년, 2010년. 그 외에는 4위로 메달을 놓치거나 아예 준결승조차 못갔다. (...)
  17. [17] 이때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아파트 1채를 사려면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일반 기업에서 과장급 직장인의 평균 연봉이 600만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통 축구 대표팀의 엔트리 인원이 25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인당 1,000만원 정도의 포상금이 돌아간 셈이 된다.
  18. [18] 중동에서는 남의 짐을 들어주면 하인 취급을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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