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

{{{#!wiki style="margin-right:10px;margin-left:30px"

이 문서는 비로그인 사용자의 편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사유는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역대 하계올림픽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bottom:-15px"

Citius, Altius, Fortius -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


2020 도쿄 올림픽

대회 기간

2020년 7월 24일 - 8월 9일

슬로건

Discover Tomorrow
未来をつかもう

1회

2회

3회

4회

5회


1896 아테네


1900 파리


1904 세인트루이스


1908 런던


1912 스톡홀름

6회

7회

8회

9회

10회

취소


1920 안트베르펀


1924 파리


1928 암스테르담


1932 로스앤젤레스

11회

12회

13회

14회

15회


1936 베를린

취소

취소


1948 런던


1952 헬싱키

16회

17회

18회

19회

20회


1956 멜버른-스톡홀름


1960 로마


1964 도쿄


1968 멕시코시티


1972 뮌헨

21회

22회

23회

24회

25회


1976 몬트리올


1980 모스크바


1984 로스앤젤레스


1988 서울


1992 바르셀로나

26회

27회

28회

29회

30회


1996 애틀랜타


2000 시드니


2004 아테네


2008 베이징


2012 런던

31회

32회

33회

34회

35회


2016 리우데자네이루


2020 도쿄


2024 파리


2028 로스앤젤레스


미정

* 1916년 6회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0년 12회 및 1944년 13회 올림픽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

제24회 하계올림픽대회
1988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


[1]

대회 기간

1988년 9월 17일 ~ 10월 2일

개최국·지역

대한민국/서울특별시[2]

대회 이념
(슬로건)

화합과 전진
Harmony and Progress

주제가

손에 손잡고 - 코리아나
(Hand in Hand - KOREANA)

마스코트

호돌이

참가

160개국

경기 종목

27개 종목 (263개 세부 종목)

개회 선언

노태우[3]
대한민국 대통령

선수 선서

허재, 손미나[4]

심판 선서

이학래[5]

성화 점화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개·폐회식장

서울올림픽주경기장

공식 사이트

[6]

1. 소개
2. 유치 과정
2.1. 혼란
2.2. 문제
3. 역대 조직위원장
4. 개막
6. 자원봉사
7. 경비활동
8. 종목
9. 시범종목
10. 특징
12. 개최 의의
12.1. 냉전의 종결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상
12.2. 독재정권의 종식
12.3. 경제발전
13. 개최 이후
13.1. 올림픽 유치 열기의 시작
13.2. 문화적 변화
14. 논란
14.1. 강제 이주와 보여주기
14.2. 편파판정
14.3. 약물
14.4. 경제
15. 방송
16. 한국측 중계진
17. 스폰서
18. 기타

1. 소개

서울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캐치프레이즈.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일부 수도권 지역[7]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자,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면서[8][9] 동시에 대회의 운영방식에서 지역 대회(아시안게임) 2년 만에 치른 유일한 하계 올림픽으로 기록된다.[10] 단순한 올림픽의 의미를 넘어서 여러 국가, 나아가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안되는 올림픽.

대회 마스코트의 이름은 호돌이. 로마자로 Hodori로 표기되었고. 동물 모티브는 당연하게도 호랑이. 그리고 당시 디자이너였던 김현의 작품이었다. 또한 이는 86년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 표기를 포기하는데 이는 오로지 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마스코트이었고 또한 서울 아시안 게임 폐회식에서는 후에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가 될 호돌이를 더욱 더 부각시키면서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8년 미국의 MSNBC는 2008 베이징 올림픽 특집 방송에서 ‘역대 올림픽 최고의 마스코트’를 선정했는데, 20년 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가 무려 3위를 차지했다. 더불어 당시의 시대적 혹은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관으로만 평가한 기준으로 매겨진 순위였다.

2. 유치 과정

1979년 4월, 서울특별시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당시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을 관람하러 왔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일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김택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겸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정상천 서울특별시장과의 저녁식사에서 올림픽 개최를 직접 논의하게 된다. 특히 한국으로서는 1970년에 자국의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아시안게임 유치를 포기했었던 전례가 있었던지라 1978년에 자국에서 개최했던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 대회가 당시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유치했던 대회들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대회였으며, 또한 대회를 개최하고 진행하기에는 변변치 못한 경기장들 밖에 없는 시대 전반적으로 엉망이었던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불우한 상황은 오히려 한국 체육계에 세계 대회 개최라는 목표를 분명하게 심어준 당시 대한민국 체육계에 크나큰 자극으로 나타난다.[11]

당시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은 이러한 국가 스포츠 기반 활동의 저변 경쟁력 강화와 더불어 성장이라는 목표의 일환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였고, 그리고 올림픽의 최초 구상안에 대하여 이를 직접 전담하게 되면서 이때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유치에 관한 준비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12]

1979년 6월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푸에르토리코 ANOC 총회에 참석해 직접적으로 서울 올림픽 유치 가능성을 타진하게되고, 같은 해 9월 1일, 정상천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올림픽 유치를 천명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곧 바로 터져버린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결국 사망하면서 당시 갑작스러운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올림픽 유치 계획은 점점 잊히게 된다. 후임으로 정권을 인계받았던 최규하 내각은 1980년 1월 19일에 공식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했고, 또한 박종규 대한체육회장도 신군부로부터 모든 공직에서 파면당하여 물러났다. 이런 당대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올림픽 유치 계획은 일시 백지화 계획에 이른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권좌에 앉자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 결정한 중대사를 해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나" 라고 언급하면서 과거 최규하 내각의 결정을 번복한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 유치를 적극적으로 재구상하여 1980년 11월 30일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내고 12월 2일에 접수를 완료시켰으며, 1981년 1월 6일 KOC가 올림픽 유치계획을 위한 실무반을 편성했다. 신군부의 제5공화국은 출범 뒤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한 3S정책으로, 특히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13] 국풍81 등 각종 대형 행사들을 연달아 기획했다. 올림픽은 3S정책의 필두인 스포츠의 필두라 할만했다.[14][15][16][17]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올림픽 유치를 도시 수준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 지원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서울 올림픽이 효시가 된다.

다만 개최 도시가 될 서울특별시가 당시 가치로 2조원에 육박하는 예산 부담을 이유로 하여 올림픽에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 이에 소극적인 행테를 벌이는데, 이는 결국 1980년 1차 올림픽 실사단 조사에서 서울시가 정부와 올림픽 준비위원회의 협조를 전혀 하지 않는 등과 같은 최악의 불협화음을 내는 상태로 치닫게 된다. 또한 당시에 남덕우 국무총리가 '올림픽 망국론'을 제기하면서 이에 엄청난 반대를 하고 나서자 정부 내부에서도 "일본은 내각이 일치단결하여 나고야에 유치하고자 한다는데, 우린 총리부터가 유치에 반대를 하고 있으니 상대가 되겠는가?"라는 반대 여론이 대두되었다.[18] 또 이는 경제관료들이나 전문가들도 올림픽 개최를 막대한 비용부담을 이유로 반대했던건 마찬가지였다.[19] 그러나 이후 서울시는 유치과정 초기의 불리함을 적극적인 유치 노력을 통해 극복한다. 또한 그저 느긋한 자세로 자국 유치에 별 관심도 적극성도 보여주지 않은 방심함과 오만함을 풍기던 일본 정부에 비해 온갖 노력과 성의를 다한다. 결국 한국 측의 유치 준비에 나고야의 백중세이자 절대우세 분위기는 갑자기 개최지 결정 당일에 상황이 역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컨벤션과 프레젠테이션에서 한국이 잇따라 우세를 점하면서 상황을 호전시켰다.

물론 분단된 국가 현실을 감안하면 공산권이 서울 유치에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라는 건 명백했으며,[20] 게다가 새롭게 구성된 전두환 정부자체가 반민주적이고 정통성 없는 정부(5.17 내란,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라는 오명과 같은 페널티가 존재했기 때문에[21] 유치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이 오히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물론 당대 서유럽과 선진국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중남미동유럽, 그리고 제 3세계 국가로 일컫어진 아프리카, 동남아 국가들, 거기에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대만, 중국도 독재정치가 펼쳤기에 남한과 정치적인 상황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공산권은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한국을 찍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인해 여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만들과 우려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일단 하고 보자!!"는 식으로 올림픽 유치에 나서기로 결정했고 이는 엄청난 의의를 지닌 올림픽 개최의 성공과 동시에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은 수많은 국가들의 성장의 대표적인 롤 모델이자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을 끌어올리게된다.[22][23]

당시 한국은 국한된 의미의 세계 대회는 개최가 되었었지만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적 스포츠 대회 개최라는 경험이 아예 없었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받는다. 또한 당시 아시안 게임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평양직할시라 한국 입장에서는 이를 더욱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또한 이라크바그다드도 이에 함께 참여했지만 둘다 중도에 포기를 선언한다.[24]

그리고 당시 국내에 관련된 여담으로 실제 1970년대 말 추진되었던 충남지역 신행정수도 건설 도시에 관한 계획에, 1996년 올림픽 주 경기장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초 계획은 새로 지어질 행정수도가 1988년, 1992년 유치전에 참여하여 국가신행정수도의 인지도를 높힌 다음, 1996년 유치에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는 1970년대 말의 구상으로는 10년 뒤인 1980년대 말까지도 아직은 올림픽을 유치할 역량이 되진 않았으리라 예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1992년도 올림픽 개최지1996년도 올림픽 개최지가 어디였는지를 생각하면,[25] 이들과 경쟁하는 것을 피해 당초 계획보다 빨리 유치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여러면에서도 신의 한 수가 되었다는 관측이 높다.

그리고 노신영 외무장관 등은 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대륙간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구미권 국가들은 12년 만에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 걸 탐탁치 않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또한 20세기가 지나면 중국이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당시 그의 견해는 지금 21세기에 와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혜안이라 평가가 가능하다. 또한 2000 시드니 올림픽의 유치전에서도 과거의 만행 때문에 이후 발목을 잡혔지만 그래도 중국의 베이징은 마지막 4차 투표를 제외하고는 계속 선두를 유지했었다. 또한 2008 베이징과 이후 일본의 2020 도쿄 올림픽 재유치, 게다가 21세기 들어 중국과 마찬가지로 급부상하는 국가인 인도와 지금까지 2번의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을 유치해오면서 이제는 올림픽의 유치 전쟁에도 뛰어들 준비가 된 인도네시아가 이를 검토 중에 있으며, 또한 타 메이저 대회에서 특히나 오일머니라는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여 결국 개최지로서 확정지은 카타르 월드컵 등과 같이 이러한 여러 중동 국가들마저도 이제는 국제대회 유치에 의욕을 보이는 현재의 상황으로만 보더라도 만약 1981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레 겁먹고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면 사실상 한국에서의 올림픽 유치는 지금까지도 향방과 매우 묘연한 상태였을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최악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올림픽 유치를 해내지 못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썼을 가능성을 내포하고있다. 그렇기에 서울 올림픽이 단순한 국제 대회라는 의미의 범주를 넘어 대한민국의 현대사와 그리고 국가 전체의 대외 경쟁력의 신장과 국내에서 사회전반적으로 국민들에게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같은 어떤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시 상기해본다면 만약 올림픽 개최가 자국에서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판도와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에 관하여 분명히 이는 실로 아찔한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무조건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결심한 전두환 정부가 자신들 정권의 2인자격인 노태우 정무장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뛰어들면서 정부와 현대그룹의 인력을 총동원하면서 본격적으로 유치전에 뛰어든다. 사실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 결심을 국내에 보여주기 위한 단순 얼굴마담이었기에, 실질적인 유치는 정주영과 과거 박정희 시절 올림픽 개최에 최초로 공을 들였던 대한체육회장이었던 박종규의 공이 크다. 그 외에 유학성 안기부장 또한 음지에서 로비를 벌이며 적극적인 활약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유치를 전적으로 자신의 공으로 내세우고 그 동안 고생해온 정주영을 무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정주영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하게된다. 그리고 노태우 보다 공헌한바가 큰 인물이면서 정주영 회장 못지 않게 올림픽 개최의 필요성을 이야기 했을 정도의 공로자 역할을 해오던 박종규는 정치 생명이 끝난채로 1985년에 이미 사망했다. 물론 사실 노태우도 저렇게 나올 만한 게, 그 동안 올림픽을 개최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것을 철처히 자신이 이를 관여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여러가지의 이유에 따른 올림픽에 관한 부정적인 회의론과 각종 문제들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다.[26] 이로 인해 일본나고야와 대한민국 서울 딱 이렇게 아시아의 두 국가의 도시들만이 올림픽 유치 경쟁 후보지로 남게되었다.[27] 허나 이렇게 되자 IOC는 올림픽 회의론의 확산 그리고 경쟁 유치지가 없는 올림픽 단독 개최지 확정 이루어질시에 일어나게 될 논란을 우려하게되는데 이는 즉 유치과정에서 영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결과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예비심사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던 나고야의 유일무이한 경쟁 지역이었던 서울의 유치계획안을 중요 검토와 탈락과정을 생략하면서 그냥 바로 통과시키기에 이른다.[28][29][30][31]

유치전 당시 서울 대회 엠블럼

유치전 당시 나고야 대회 엠블럼

이렇게 대책없이 무작정 유치전에 나선 서울과 달리, 나고야는 이미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를 준비해왔었기 때문에, 서울로서는 승산이 없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했으면 유치 도시가 어디인가보다는 나고야가 몇 표까지 얻느냐에 관심이 집중될 정도였고, 서울의 경우에는 달랑 3표 나올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3표의 정체는 바로 한국, 미국, 중화 타이베이(대만)으로 전망되었을 정도였다.

특히 정주영 당시 현대 회장 특유의 뚝심있는 행보가 압권이었는데, 유치위원들이 서독바덴바덴에 도착한 와중에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의 IOC 위원들과 식사를 했을 때의 일화이다. 당시 식사 도중 영국의 IOC 위원 한 명이 정주영 회장에게 "체육계에서 얼마나 일했는가" 를 묻자, 이에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처음 일하는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원은 오히려 이에 "초보자를 내보냈다"고 말하면서 정주영 회장에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한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와중에 정주영 회장이 대뜸 "일본은 이미 올림픽과 같은 엄청난 세계적인 행사들을 개최한 이후 엄청난 경제대국으로서 발돋움하고 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만약 이번에도 유치한다면 일본의 경제발전을 더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자 이에 돌연 관심을 갖고 정주영의 말을 귀기울이면서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간사업들 상당수가 일본과 서로 경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떄문에 이는 즉 영국 측에서도 귀가 솔깃한 발언이었으며,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선진국들은 엄청난 성장속도를 이룩하면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무려 자신들을 뛰어넘는 제 2의 경제대국이자 최고 선진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이제는 견제해야 된다. 라는 일본에 대한 위기의식과 경쟁의식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로도 일컫어지고있다.

그리고 물론 한국이야 설명은 필요 없고, 미국과 서방진영은 당시 일본의 급성장과 독식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서울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으며[32] 일본 스스로도 올림픽 유치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도 않았으며[33][34] 대만은 수교국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외교상 최후의 대국[35]이었기에 당연히 서울을 절대적으로 밀 것이라고 예측했었다.[36][37]

그리고 당시 일본 측 프레젠테이션 연사는 일본어만 할뿐 영어는 못했고, 반대로 한국 측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박종규 IOC위원 겸 대한체육회장은 군 시절 미국 유학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 아울러 양자 대결 구도에서 처음 개최하는 쪽에게 기회를 달라는 호소가 먹혔다. 물론 일촉측발의 위기상황이 없지는 않았지만 절묘하게 넘어갔다. 당시 국제체조연맹 회장 겸 IOC 위원이었던 소련인 티토프가 일본과 공조하여, 한국이 당시 일본에서 받은 차관 60억 달러를 걸고 넘어졌다. 티토프가 "당신들은 일본에서 빌린 60억 달러도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서울올림픽 유치단 일원이던 당시 무역협회장 유창순 회장이 "우리나라와 일본이 장사하는데 우리가 200억 달러 정도 적자이다, 그래서 그걸 고쳐보겠다고 60억 달러를 빌려간 것이며, 우리나라는 매년 수백억 달러를 수출하는 나라이다. 그 정도 돈은 얼마든지 갚을 수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질문하지 마시오!"라고 반박하며 티토프를 데꿀멍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때의 한국은 인구 수 때문에 소련에 비해 경제적인 규모에서는 밀렸지만 인당으로 실질적 삶의 질을 따졌을때는 결코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상황 아니 그 이상이었기에 이러한 소련의 지적은 그저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그 결과 1981년 9월 30일 서독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38]에서 일본나고야를 52 대 27로 꺾고 결국 최종 개최지로 결정되었다.[39]

그리고 당시에 자유주의 세력이었던 대한민국의 서울을 걀코 지지하지 않을 세력이었던 공산권 국가들이 IOC 위원의 약 2할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또한 북한의 여러 방해공작 속에서도 무려 52 대 27이라는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 급성장하는 일본을 경계한 서방 국가들을 비롯해, 일본보다는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의 지지 속에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다는 분석도 존재했었다.

그리고 중동 지역의 경우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에 관한 대대적인 붐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1980년대 초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다수의 유수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일본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서 쿠웨이트의 IOC 진출을 반대하는 행보를 보이는 일명 삽질을 해버리는 바람에 쿠웨이트가 한국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같은 문화권이면서 유대감이 강한 나머지 제 3세계의 중동 국가들의 표들 모두가 단숨에 한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은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을 도와주었던 국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즉 당시 미국과 유럽과 같은 선진국 및 강대국들 못지 않게 새롭게 중동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에 저변활동을 늘리는 것과 같은 상당한 공을 들이게된다. 또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등장했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내 정세 및 현안이 너무 복잡했었던 까닭에 당시 전두환은 일정에 잡힌 제 3세계 관련 순방외교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이들 제3세계 국가 덕분에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설득해 결국 순방외교를 이어가게 한다. 심지어 북한과 수교국이었던 버마(미얀마) 순방 도중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초유의 참사가 있기도 했지만 순방은 계속되었다.

물론 이는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관한 지지기반을 잘 다지지 못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의 성공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40] 그리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의 표밭으로 알려졌던 유럽 지역(특히 동구권) 표심 공략에는 스포츠 용품의 절대 강자인 아디다스의 지원을 받는데 성공했다는 점이 컸다. 이는 당시 한국에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선진국이었던 일본보다 블루 오션이었던 한국을 더 선호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당시 일본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였던 미즈노아식스가 있었던 것과 다르게 당시 한국에는 오직 국내에서나 유명한 프로스펙스 정도가 있었을 뿐이었다.[41] 또한 만일 일본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면 휘장사업 등에서 일본업체가 독차지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들은 한국으로 올림픽이 넘어가는 것을 희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즉 이는 만약에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결국 성공하게 될 시에 큰 의미로는 한국에 아디다스가 사업권을 따내면서 이러한 자신의 브랜드를 새롭게 런칭하면서 한국 시장에 진출이 가능해진다는 것, 혹은 적어도 경쟁하는 일본업체의 승승장구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을 밀었다는 것이고 이처럼 이후에는 올림픽으로 인한 한국 시장의 브랜드 진입로 확보와 또한 여러가지의 상업적인 파트너쉽을 펼칠수 있는 중요한 국가로서 인식되었다.[42] 때문에 우리나라 올림픽 유치단은 아디다스의 회장으로서 국제 스포츠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43] 홀스트 다슬러에게 스포츠마케팅 관련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가 영향력을 유지하던 많은 IOC 위원들을 한국을 지지하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정부의 특사격이던 박종규가 다슬러와 여러차례 만나면서 협상했다고 한다. 다슬러가 1982년 설립한 스포츠마케팅 기업 ISL은 이후 2001년까지 올림픽과 월드컵의 방송중계권과 각종 스포츠 이권을 독점하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남겼고, 또한 타국 기업인 아디다스도 이러한 올림픽을 통해 전세계 스포츠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44]

또한 당시의 한국은 국한된 의미의 세계 대회는 개최가 되었었지만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인 대규모적 스포츠 대회 개최라는 경험이 아예 없었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에 "먼저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받는다. 또한 당시 아시안 게임 유치전의 상대국이 하필이면, 북한평양직할시라 한국 입장에서는 이를 더욱 신경써야 하는 대목이기도 했었다. 또한 이라크바그다드도 이에 함께 참여했지만 둘다 중도에 포기를 선언한다.[45]

한국은 개최신청 초기에는 일본과 서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빅딜을 제안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한국의 해당 제안은 86년 아시안 게임 서울 개최를 일본이 지지하고 대신 한국은 88년 올림픽에서 일본을 지지해달라는 권유였다.[46], 물론 한국 자체를 배척한 일본이 이를 거부한다.[47] 당시의 일본은 자국이 당연히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는 자만과 건성스런 태도 때문에 대한민국에 참패하고 유치에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뒷날 일본은 "당시 올림픽에 관련된 사람들이 너무나 무능하고 무관심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리고 결국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도 유치하고 동시에 88년 올림픽도 유치하는 유일무이한 전례를 만든 것으로 보면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이에 너무나 무능함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이는 분명하게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까지도 가능할 정도이다.[48]

그리고 참고로 당시 일본의 상황에 관해서는 당시 나고야의 시민들 사이에서 올림픽 경기장 건설등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 등을 우려해서 지속적으로 올림픽 반대의 여론들이 팽배했었다. 또한 이는 일부 일본의 시민단체를 통해 적극적인 올림픽 유치의 대대적인 반대 활동을 벌여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 명분이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아시아에서는 일본 의외에는 올림픽 개최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1964년에 하계올림픽과 1972년에 동계올림픽을 이미 치른 일본이 얼마 지나지 않은채로 연달아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에 대한 형평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1970년 오사카에서 개최되었던 만국 박람회 이후 우여곡절끝에 35년만에 2005년에 개최된 등록박람회2005 아이치 엑스포를 여는데 이는 지역적으로 바로 1988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가 그 한을 풀기 위해서 무려 20여년 이상의 노력을 했던 끝에 개최했던 엑스포이며, 이후 국제대회이자 아시아 지역의 올림픽 대회라 할 수 있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을 개최 유치하는데 성공하였기에 어느 정도 이 때의 한을 푼다.

2.1. 혼란

분단 상황에 대한 우려를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극복했지만, 북한의 방해는 여전히 심했다. 이미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대한민국 서울이 개최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논리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49] 일본을 지지했던 북한1987년까지 뜬금없는 공동 개최론을 주장하며 대회 명칭을 평양-서울올림픽으로 해야한다는 등, 한국에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가 60만명에 달한다고 방해 선전을 하는 등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50]. 결국 포기한 북한은 대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여 올림픽보다 더 규모가 컸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나, 해당 대회를 무리하게 개최하여 북한이 떠안은 후폭풍은 상당히 컸다. 이 일로 인해 원한을 가졌는지, 북한은 특히나 아시안게임 방해를 위해 아랍계 테러리스트에게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사주했다. 그리고 이 테러로 5명이 죽고 32명이 부상당했으며,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 올림픽 때 공항 경찰이 비상사태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또한 북한은 급기야 올림픽 보이콧 운동까지 시도했었다. 물론 이 정도는 사실 애교 수준에 불가했고, 당시 북한의 공작 활동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사건은 KAL기 폭파사건으로도 널리 알려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과 현재 미얀마인 과거 버마에서 일어났던 아웅산 묘지 테러 사건등이 있었다.

게다가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88올림픽의 남북 분산개최를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도 사회주의 국가의 대회 참가 명분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를 북한에 제안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특히나 당시 IOC의 사마란치 위원장은 1984년 9월에 방한하여 한국의 고위인사와 자리를 통해 만나게되는데 이떄 남한이 일부 종목의 남북 분산개최안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자 "북한은 결코 이 제안을 수락하지 못할 것"이라며 대답하면서 "한국은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말고 'IOC가 공식적으로 제안해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용의가 있다' 정도로만 답하면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LA대회 보이콧 이후 서울 대회에 오고 싶어하고, 올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단 한 가지 장애물이 북한"이라며 "그래서 한 가지 핑계를 찾고 있는데 만약 북한이 2∼3개 종목 개최를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에 갈 구실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북한과의 관계와 테러 위협을 이유로 소련과 인도에서 불거진 올림픽의 아테네 영구 개최설 등으로 잠시 올림픽 개최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6월 항쟁의 와중에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유 삼아 LA베를린 등에서 유치권을 가져오려는 시도가 있었다. 또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만약 한국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날 시에 올림픽 장소변경을 고려했을 정도로 상당히 이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뻔했다.

이처럼 심각한 한국의 상황에 관해 IOC에서도 1988년은 어렵고 1996년으로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는데 이에 대하여 당시 노태우가 IOC로 가서 문제없다는 연설[51]을 하고 이후 6.29 선언으로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면서 예정대로 1988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었다.

또한 올림픽이 열리기 1년 전이었던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는 당시 명동성당에 민주화 시위대가 정부의 공권력을 피해 주둔해 있었는데 또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이러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직접 맞서게된다. 이처럼 만약 정부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서울 올림픽은 3번 연속으로 반쪽 올림픽이 될 뻔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군다나 이 올림픽은 전두환의 최대 역작이라 할 수 있을만큼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대회 행사인데 만약 시위를 무력진압함으로 자기가 불러온 복을 도리어 자기가 걷어차 버리는 상황이 될 뻔 했다고도 볼 수 있다.[52] 그리고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민병돈 중장은 정부의 군대 출동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보안사령관 고명승 중장에게 밝히게 되는데, 이처럼 군인 세력마저도 폭력사태가 일어나 올림픽을 그르치는 행동은 피해야한다는 움직임을 보여주게되면서 결국 특전사의 무력진압사태를 봉쇄하고 또한 6.29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1등공신이자 든든한 방패막으로서 올림픽이 지대한 역할로 작용된다.

2.2. 문제

냉전 시기였던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자유주의 진영을 고수하는 서방 국가가 보이콧을 했고, 1984 LA 올림픽에서 동구권과 대부분의 공산 국가가 보이콧을 했다. 이처럼 2번의 올림픽은 연속적으로 반쪽짜리 올림픽으로 개최되었는데, 이처럼 서울 올림픽에서도 공산권의 참가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일단 공산권에서도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중국은 소련과 반목하는 독자적 공산 국가였던데다, 1984년 LA올림픽도 이미 참석했고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당시 시점에서 2년 후 열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친소련 아시아 공산국가들[53]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는데,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다른 문제가 없어보였으나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참가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LA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54] 소련과의 협의없이 발표된 것이라서 여전히 오리무중의 상태였다는 것.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소련이었는데,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을 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다른 공산 국가가 죄다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한 김운용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55] 소련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를 설득하였다. 이처럼 비록 이념이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마침내 1988년 초 소련의 참가가 완전하게 확정되고 또한 여러 공산 국가들도 이에 동참 의사를 밝히면서 이처럼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만에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어진다.

그러나 완벽하게 모든 IOC 국가가 참가한 것은 아니라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일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에 대한 참가를 거부하거나 포기했다. 에티오피아[56]쿠바를 비롯해 알바니아[57], 마다가스카르[58], 세이셸[59], 니카라과[60] 등 총 7개국이 참가를 포기했다. 이들 외에 불참국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는데 여긴 냉전과는 별개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결국 촉발되었던 사태로 인해 IOC에서 제명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면에서 동서화합의 올림픽이었다는 동시에 마지막 보이콧이 벌어진 대회라는 기묘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61][62]

또한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대한민국 정부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63][64] 그럼에도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65]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66]

3. 역대 조직위원장

4. 개막

KBS-1TV 서울올림픽 개막식 영상. 캐스터는 당시 KBS 스포츠 중계의 간판 캐스터였던 서기원 아나운서이다. 정확히는 스타디움 식전행사부터 담겨 있어서 이 앞의 뱃놀이 같은 부분이 좀 잘렸지만 화질이 대단히 선명하다. 1988년 당시 영상인데도 주사선 노이즈 하나 없이 쨍한 화면에 풀 스테레오.[67][68] KBS의 기술수준이 대단히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당시로부터 불과 5년 지난 시점이다.(!) 해당 항목의 영상 화질과 중계기법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수준향상이 더욱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69]

선수단 입장 및 올림픽기 게양, 성화 점화. 1시간 9분경 손기정 옹이 주자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대단히 역사적인 장면이지만 어째 현 세대들은 이 직후 있었던 비둘기 통구이만 떠올린다.[70]

  • 개막식(3/3) 식후행사. 스카이다이빙, 태권도, 굴렁쇠, 고싸움(고놀이), 손에 손잡고 등 현재 중장년층들이 서울 올림픽 하면 기억하는 장면들은 다 이 부분에 담겨 있다. 또한 이 3번째 영상에서 보면 스카이다이빙 장면에서 "KBS는 특수 카메라 2대를 동원해 이 장면을 시청자 여러분께 생생히 전달해드리고 있습니다"란 멘트를 하는 것에서 KBS 중계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영상 베댓에는 당시 점프했던 외국 카메라맨이 추억어린 댓글을 달아놓았다.

개막식 처음부터 끝까지 담긴 자료는 위 영상을 참조. KBS-2TV 서울올림픽 개막식 중계다. 캐스터는 이창호 아나운서와 정미홍 아나운서.[71] 이창호는 KBS 1TV에서 아침 인기 프로그램인 '전국일주'[72]를 수 년간 중계하던 중견 아나운서였다.[73]

개막식은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30분에[74] 시작되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올림픽 개막식이 보통 오후 3시경에 시작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것이었다.[75] 이러한 개막식 시간 조정에는 당시 국가 이미지 모토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춰 아침에 개막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더 주요한 가설로는 미국내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 그 덕분에 개막식 당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된데다[76][77] 주간 정파없이 연속으로 방송이 진행되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78][79] 그리고 서울 올림픽은 낮에 개막식을 진행한 마지막 하계 올림픽이기도 하다.[80]

개막식 입장은 한글 ㄱㄴㄷ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나가 2번째[81],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 다만, 국가 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의 앙금 때문에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 한국은 개최국은 마지막에 입장한다는 전통에 따라 맨 마지막에 입장했다.

개막식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은 행사 도중 윤태웅[82]이라는 7세 소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이어령.

16년 뒤에 열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스타디움 바닥이 에게 해(海)를 상징하는 호수로 변하며 한 소년이 홀로 대형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는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감독을 지낸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에 의하면,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 연출을 위해 과거 여러 올림픽의 개회식을 참고하던 도중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 장면에서 어린 소년이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던 순간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어 아테네 올림픽에서 어린 소년이 종이배 모양의 보트를 타고 물을 가르지르던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굴렁쇠 소년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다섯 아이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굴렁쇠 다음에 나오는 '새싹'(바람개비)은 잠실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서울잠전초등학교와 서울삼전초등학교의 한 학년이 맡은 것이다.

영상 3시간 10분 무렵부터 나오는 대규모 메스게임에는 서울시내 실업계 고등학교(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외) 학생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 이처럼 개막식 예행연습을 위해 강제로 1년여간 단축수업을 받고 또한 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는 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큰 문제로 대두되었을 부분도 있지만, 당시 교육현장 자체가 권위주의 일변도인 데다 국가적으로 워낙 거국적인 행사였기에 말이다.[83]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뀌기도 했다.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너무 뻔하고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막판 방침을 바꾸게 된다. 손기정은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되었다. 정확히는 끝에서 2번째다.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잠시 돌다가 점화자에게 넘긴 것. 그리고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84], 섬마을 학교[85] 체육 선생님이던 정선만[86]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재학생이던 손미정[87]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성화 최종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대회다. 이때 최종 성화 봉송주자였던 손기정 옹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0:14~0:47]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

점화식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까지는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이 당시 평화의 상징으로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닭둘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개회식 때 풀어놓은 비둘기들이 성화대에 옹기종기 모여있다가 성화가 점화되는 순간……[89] 해외언론 만평에서도 이 사건을 가지고 '불고기 왕국이라 성화 점화 때에도 불고기를 구웠다'고 비꼬기도 했으나, 국내에서는 올림픽의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우려해서 이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는 금지되고 그냥 떠도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렇지만 언급만 되지 않았지 사실 화면상으로는 나오기는 나왔다. 당일 9시 뉴스 오프닝에도 멀쩡히 나오는걸 보면. 사실 중요한 장면인데 아예 안쓰기도 뭐했다. 이 비둘기가 타 죽은 것 때문에 최근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최악의 개막식 중 하나로 꼽았다. 다만 미국 쪽에서 이것으로 꼬투리 잡기엔 서울올림픽 입장에선 좀 억울한 감이 있는 것이, 개막식에서 이 사건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비둘기들이 불길 옆에서도 날아가지 않고 자리 잡은 걸 보면 죽은 비둘기는 극소수인걸로 보인다. 굳이 비둘기가 타 죽게 된 이유를 꼽자면, 서울올림픽의 성화대가 이전 대회와는 달리 크고 화려해서 새들이 앉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미처 경기장을 벗어나지 못 한 비둘기들이 큰 성화대에 앉아 쉬고 있었고, 최종 점화자들이 본인들 신장보다 큰 성화대에 앉아 있는 비둘기를 일일이 쫓아낼 시간적 여유도 없었기에 몇 마리가 죽은 것이다. 사실 올림픽 비둘기의 이런 참사는 비단 서울 올림픽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둘기 퍼포먼스는 서울올림픽 이전부터 동물학대 논란이 많았던 퍼포먼스였다.

이때를 교훈삼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후에는 비둘기를 폐회식 때 풀거나 상황이 여유치가 않으면 주로 밤에 개막식을 열기로 하였다.

맨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손에 손잡고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의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까지 총집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뮌헨 참사가 일어난 비극적인 대회의 마스코트인 발디,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 미샤,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

고화질의 개ㆍ폐회식 영상이나 대회경기, 86 아시안게임의 영상을 올림픽 자료실에서 볼 수 있다. 단 WMP 기반이므로 일부 브라우저에서는 재생되지 않을 수 있다.

5. 입장 순서

6. 자원봉사

레슬링 경기 자원봉사를 했던 어느 분이 사진과 같이 봉사도중 있던 일들을 블로그에 올렸다.

7. 경비활동

서울시 경찰국은 1988년 5월 17일부터 1986 서울아시안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88올림픽경비단'으로 개편했다. 이들은 신변보호대, 제2~3올림픽경비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주 업무는 경기장 주변 경비, 선수단 신변보호, 대테러 작전수행 등이었다. 1989년 말에 해체됨.

8. 종목

9. 시범종목

10. 특징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이를 발판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한다.
  • 탁구테니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이고, 테니스는 1988년 당시 기준으로 64년만의 합류였다.
  • 배드민턴이 전시종목으로 채택되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정식 종목이 되었다. 야구 역시 이 대회 시범종목이었다. 당시 한국은 야구에서 4위를 달성했다. 이때 금메달은 미국, 외팔 투수로 유명했던 짐 애보트가 결승전 선발에서 맹활약하면서,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문에도 오르내렸다.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푸에르토 리코.
  •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 미국의 맷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다만 이 중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다는게 흠.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 비욘디의 6관왕을 저지한 남자 접영 100M 금메달리스트는 남미의 소국 수리남의 안소니 네스티다. 그의 조국에는 당시 수영장이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첫 흑인 수영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헝가리의 수영 선수 타마스 다르니는 한쪽 눈이 실명인데도 남자 개인 혼영 200m와 400m에서 2관왕을 차지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여자 중장거리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는 미국의 재닛 에번스가 처음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세.
  • 역도의 나임 술레이마놀루는 자기 몸무게의 3배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당시 체급이 -55Kg이었던 그는 자기보다 더 위 체급의 선수의 1위 기록을 능가하는 기록으로 우승하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 전까지는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인데, 이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인 190kg을 들어올려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 여자 테니스 단식 금메달 리스트인 슈테피 그라프는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 올림픽 금메달. 이때까지 이를 모두 이룬 선수는 그라프만이 유일하다. 2013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그라프가 유일하다. 애초에 한 해에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이라는 캘린더 슬램을 달성한 사람이, 오픈 시대 이후 마거릿 코트, 그라프와 남자부의 로드 레이버 외에는 없는데, 거기에 4년에 한 번씩 하는 올림픽 금메달까지 겹치기란...
  •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93] 남자팀은 은메달.
  • 레슬링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김영남이, 프리스타일에서는 한명우가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김영남은 이 대회 후로 은퇴 예정이었고, 한명우는 국대 선발전에 탈락했다가 대회 직전에 최종 선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 개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메달이었다.
  •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웠다. 여자 개인전은 금, 은, 동 모두 한국이 가져갔다(...). 그리고 12년 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 소련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고 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여자 4×400미터 계주에서 소련의 세계신기록이 나왔는데 그 기록이 3분 15초 17이었다. 이 기록이 놀라운 이유는 2012 런던 올림픽까지도 깨지지 않는다는것 이다. 참고로 2012 런던 올림픽 해당 종목 1위 기록은 3분 16초 87(미국)이다. 스포츠 과학도 엄청나게 성장했을 텐데 그때 그 기록이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 당시 여자 펜싱은 플뢰레만 시행했다. 에페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사브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도입되었다. 또 사브르는 2004년에는 개인전만 진행했고, 단체전은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처음 시행되었다. 펜싱 여자 플뢰레는 개인전에서 서독 선수 3명이 모든 메달을 휩쓴데 이어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부문에서 2관왕을 한 선수는 아냐 피히텔(Anja Fichtel)인데, 그녀는 당시 불과 20세였다. 여자 플뢰레 석권에 힘입은 서독은, 아언트 슈미트(Arnd Schmitt)의 남자 에페 금메달까지 합쳐 펜싱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동독 또한 남자 플뢰레의 우도 바그너(Udo Wagner)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에서 종합 1위를 달성하였다.
  • 복싱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였던 한국 박시헌의 결승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상대였던 미국 선수가 누가봐도 긴 리치와 빠른 스피드로 경기 내내 박시헌 선수를 압도 하였으나 결과는 박시헌 선수의 승리였다. 모로코와 우루과이의 부심은 박시헌 승리, 소련과 헝가리의 부심은 존스의 승리, 우간다의 부심이 동점이지만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하였다. 당시 기록. 이 판정은 올림픽 복싱 역사상 최악의 편파 판정 중에 하나로 꼽힌다. 박시헌 선수도 다소 당황해했으며, 마음놓고 기뻐하지도 못했다고. 당시 그 미국 선수는 프로로 전향해서도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메달이 바뀌지는 않았고, 후에 그는 90년대 초특급 스타가 된다. 그 선수가 바로 로이 존스 주니어.
  • 승마의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방역 규정이 없어 승마만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뻔했다. 어떻게 보면 멜버른 대회[94] 이후 희대의 굴욕, 즉 흑역사가 될 뻔했다. 그러나 과천 경마공원을 짓고 또 방역 규정을 새로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승마 대회까지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첫번째 올림픽이기도 했다. 1984년도 경기까지만 해도 기록을 문서로 기록해 보관했으나, 1988년도 경기부터는 컴퓨터에 기록을 입력하고 컴퓨터 데이터로 기록을 관리하였다. 또한, 계측 부문에도 컴퓨터 측정 기술이 도입되어 1/1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첫 번째 경기가 되었다.
  •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000미터 2연패를 차지한 동독의 크리스티나 루딩 로텐부르거는 1988년 서울올림픽 싸이클 개인추발에 출전해서 은메달을 차지했는데 이로써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여성선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11.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88년 24회 서울 올림픽 (1988 Summer Seoul Olympics)

  • 기간 : 9월17일~10월2일
  • 규모 : 160개국 13,600(여)명 참가.
  • 종목 :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야구(시범종목), 태권도(시범종목)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125명, 선수 477명 참가.(근대5종,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양궁, 역도,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 획득. 종합순위 4위.
  • 금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74kg) 김영남
  • 금메달 : 레슬링(자유형 82kg) 한명우
  • 금메달 : 복싱(라이트급) 박시헌
  • 금메달 : 복싱(플라이급) 김광선
  • 금메달 : 남자 양궁(단체) 박성수, 이한섭, 전인수
  • 금메달 : 여자 양궁(개인) 김수녕
  • 금메달 : 여자 양궁(단체) 김수녕, 왕희경, 윤영숙
  • 금메달 : 유도(60kg) 김재엽
  • 금메달 : 유도(65kg) 이경근
  • 금메달 : 남자 탁구(단식) 유남규
  • 금메달 : 여자 탁구(복식) 양영자, 현정화
  • 금메달 : 여자 핸드볼
  • 은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8kg) 김성문
  • 은메달 : 레슬링(자유형 68kg) 박장순
  • 은메달 : 복싱(헤비급) 백현만
  • 은메달 : 남자 사격(소구경 소총 복사) 차영철
  • 은메달 : 남자 양궁(개인) 박성수
  • 은메달 : 여자 양궁(개인) 왕희경
  • 은메달 : 역도(52kg) 전병관
  • 은메달 : 남자 탁구(단식) 김기택
  • 은메달 : 여자 하키
  • 은메달 : 남자 핸드볼
  • 동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2kg) 이재석
  • 동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2kg) 안대현
  • 동메달 : 레슬링(그레코로만형 82kg) 김상규
  • 동메달 : 레슬링(자유형 57kg) 노경선
  • 동메달 : 레슬링(자유형 90kg) 김태우
  • 동메달 : 복싱(페더급) 이재혁
  • 동메달 : 여자 양궁(개인) 윤영숙
  • 동메달 : 역도(82.5kg) 이형근
  • 동메달 : 유도(무제한급) 조용철
  • 동메달 : 남자 체조(도마) 박종훈
  • 동메달 : 남자 탁구(복식) 안재형, 유남규

대한민국은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뒀다.

참고로 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전까지 미국,소련(현 러시아),동독,서독(현 독일) 4개국이 전통적으로 매우 강세였고 빅4를 형성했지만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4위를 차지하고 서독이 5위로 밀려나면서 올림픽 빅4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2. 개최 의의

12.1. 냉전의 종결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상

1980 모스크바 올림픽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으로 인해 각각 진영에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그저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이 대회는 특히나 과거 6.25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진영/자본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을 벗어나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탈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95] 북한은 반대했지만 남한에서의 개최, 주제곡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도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다만 미국에서는 중계권자인 NBC[96]가 별도로 휘트니 휴스턴의 'One Moment in Time'과 존 윌리엄스[97] 작곡의 'The Olympic Spirit'을 중계방송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NBC는 자기네 주제곡 앨범을 미국 밖에서까지 발매했다.

한편으로는 서울 올림픽이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해석이 가능한데, 특히나 북한의 악의적인 선전으로 인해 대한민국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그 동안 익히 알고 있었던 동구권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오히려 자국보다도 더 풍요로운 자유주의 진영이자 시장 경제 체재를 도입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데서 시작된 것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98]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공산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을 거지떼가 득실거리고 판자촌이 난무하는 빈민가 천지로 여겼는데 정작 개회식 및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한 서울의 모습이 도리어 자국의 번화한 도시보다 넘사벽급 이상으로 화려한 것을 보고 깜짝놀랐다고 한다.[99] [100]

여담으로 사실 이 시기 1인당 GNP를 보면 1987년 기준으로 소련과 동독 모두 한국보다도 높으면서도 거기에 2배 이상인 8,000달러~9,000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동구권 유럽 국가들은 과거 미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봉쇄정책과 8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오일쇼크의 여파를 극복하는데 실패하면서 10년 넘게 경제가 침체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그나마 유일하게 살만했다는 소련도 1980년대 중반의 유가하락으로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동독은 그나마 서독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유지한 상태였다. 여기에 공산권 국가 특유의 고정환율에 의해 GNP 수치가 표기된 것도 감안해야 하는데, 일례로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NP는 무려 13,000달러로 대한민국의 2.2배 남짓되었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환산한 결과였으며[102] 비공식 환율대로 환산하자면 4,500달러 수준이었다. 물론 동독의 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임대료가 월등히 싸다는걸 감안하면 동독의 구매력이 형편없다고는 말할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치품을 살려면 발품을 팔아야했다. 실제로 이 무렵 동독을 다녀온 서독 국민들은 "1인당 GNP 13,000달러의 나라가 왜 이리 못 사는가?!"라고 의아하게 여긴다.

즉, 동구권 유럽국가들 중에서 가장 형편이 좋았던 소련과 이러한 소련을 제외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위성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부흥했던 동독의 실질적인 경제 상황도, GNP 지표 수치와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보다 우세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 국가이면서, 그것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강점기를 지났으며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올림픽이 개최되기 무려 30여년 전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인 최초의 전쟁터로 변모함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촉발되었던 6.25 전쟁으로 인해 순식간에 온나라가 쑥대밭이 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의 빈민국가이자 더 이상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전락했었던 대한민국이 이러한 공산주의 이념의 국가보다도 더 부유한 경제를 꾸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수십여년간 고수해오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은 절정에 다다를수밖에 없었고, 또 그들도 이와 같이 자유시장 경제체재를 받아들이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 행보를 보이게 되면서 이는 결국 공산정권 붕괴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있다. 더군다나 한국이 폴란드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 슬로바키아[103] 등의 동구권 국가 및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유럽 국가들과 대대적으로 수교를 시작했던 것이 1989년부터였으니, 후에 이처럼 올림픽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일이 수월하게 돌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올림픽의 개최로 인해 그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과 기아, 가난이라는 키워드로 알려져 있던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또 이것은 도리어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과 위상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게된다.[104]

물론 공산권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서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발전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70년대부터 중고등학생 수학여행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방한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알거지 수준이었던 광복 직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지만[105] 미국이나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북미/유럽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정보가 한참 모자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은 그야말로 엄청난 임팩트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실상 서울 올림픽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공산권이든 서방권이든 가리지 않고 대외적으로 세계에 광범위하게 알린 올림픽이었다는 데에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106]

12.2. 독재정권의 종식

또한 전두환 5공화국 정권의 종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민주화 운동을 '좌경폭동'으로 매도하며 탄압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언론이 자승자박의 형태로 변모하면서 결국 1987년 6월 항쟁에 대해 계엄령 선포를 하지도 못한채 사실상 항복선언을 하게되고, 이후에 직선제 개헌을 하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올림픽 때문이었다.

앞서 올림픽 유치 시도 자체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1979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사실 1996년에야 승부수를 띄울 작정이었다. 1988년에는 인지도를 알리며 간을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당시 신행정수도 계획의 '1996년 올림픽 주경기장 부지'도 그렇고... 그러나, 대통령이 사망하고 총대를 메던 양반은 공직에 물러나며, 유치시도 자체가 완전히 표류하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3S정책의 일환으로 개최되었으며 어쨌든 개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는데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이유로 야댱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논의되던 민주화 논의를 강제적으로 억누르고 있었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을 때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이유의 핑계를 걸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면서, 계엄령 선포 및 시위대 유혈진압을 하려고 했지만 진짜로 시위대를 유혈진압할 경우에는 올림픽 개최가 취소되면서 개최지가 변경될 가능성이 높았고, 설사 개최지가 변경되지 않았어도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처럼 학살자들이 개최하는 불명예스러운 올림픽이라는 엄청난 오명을 쓸게 뻔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이 겹쳐서 6.29 선언이 발표되었으니 정권에 도움 되라고 유치한 올림픽이 도리어 자승자박의 형태로 비수가 되어 날아와 결국에는 전두환 독재 정권의 명줄을 끊어놓은 종지부로서 이는 후에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역사적인 사건의 원인이자 촉매제로서 변모한다.[107]

또한 만일에 6.29 선언 없이 과거 1980년 광주처럼 그저 정권이 시민들의 유혈진압으로 6월 항쟁을 끝났다면, 교황청유럽남미가톨릭 국가들에게 서울에서의 올림픽 개최에 관한 전면적인 보이콧을 호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상술했듯 IOC에서도 당시에 개최국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공산권에 대한 견제 효과를 노리던 같은 자유주의 진영이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서울 올림픽이 무산되면 뒷목잡을 일인지라, 과거 광주 민주화 운동 때와는 다르게 묵인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두환을 압박했고, 또한 올림픽 때문에 외신 기자들도 잔뜩 방문한 판국이라, 이처럼 올림픽만큼은 어떻게든 개최해야만했던 전두환은 결국 유혈진압을 포기하게된다.

만약 6월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유혈진압을 했다면 올림픽은 1976년부터 계속 집단 보이콧으로 점철되었을 것이고, 서울올림픽 역시 실패한 올림픽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울러 국가 이미지는 멕시코와 비슷하게 완전히 막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고 또 후술할 경제효과와 올림픽 준비에 쏟은 예산과 시간도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었고, 올림픽 자체도 존립이 위태로웠을 가능성이 크다.[108]

어찌되었든 전두환 정권 때 올림픽이 유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는걸 외국인들이 보면 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다. 결국 전두환은 자기 집에서 TV로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했다.[109] 이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된다. 이는 결국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오히려 군부 독재의 거물인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던 것. 그리고 또한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5공화국 종식과 더불어 독재 정권의 청산, 대통령 직선제와 비밀 투표 그리고 더 이후에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문민 정부 시절에 들어서는 아예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움직임으로까지 불씨가 거대하게 번지게 된다.[110]

물론 서울 올림픽이 과거 도시 재개발에 따른 철거민에 관한 문제와 이에 따른 노동자의 노동착취, 또한 부동산 투기 등과 같이 당시 빈번하게 만연했었던 당시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오히려 이후에 모두 감추어버렸다는 비판이 이어지기도하나, 그래도 이를 역설적으로 바라보면 올림픽이 또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오히려 안전한 지지대이자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렇게 서울 올림픽은 그동안 치러졌던 역대 올림픽 가운데서도 그 자체로 의미가 크면서 동시에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이벤트의 다방면적 의미를 비롯한 이후 올림픽의 역사,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 나아가 세계사까지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올림픽으로 남게 되었고, 어쩌면 이렇게 서울 올림픽과 같이 복합적으로 엄청난 의의를 지닌 올림픽은 두 번 다시는 개최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12.3. 경제발전

사실 이 하계 올림픽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지에 대한 여부는 해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미리 서두에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정부 당국에서도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111]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더 성공적으로 올림픽이 끝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신화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일본이 24년 전에 먼저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누린 것과 거의 똑같은 효과를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으로 독립한 지 고작 반 세기도 안 되었고, 그나마도 한 차례 전 국토가 폐허가 되는 끔찍한 전쟁까지 겪은 국가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고 올림픽까지 개최했다는 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112][113]

반대로 이 올림픽의 성공과 1989년 동구권 유럽국가들의 붕괴, 1990년 독일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한국의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 올림픽에 대한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남북공동개최까지 주장했었던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혁신적인 정책보다 보수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늘어난 것도 올림픽의 여파라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80년대부터 엔화의 고점 현상과 3저호황도 함께 몰아닥쳤고 이 시기를 전후해 내수경제가 급신장했다. 기본적으로 3저호황의 영향이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과 1988년 최저임금법 제정으로 임금이 크게 높아진 영향도 있다. 이 삼저호황으로 이른바 1인 1차 시대라 부를수있는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이에 따라 레저산업과 부동산 경제 활성화등등의 각종 경제가 급성장하는 등과 같이 90년대 중반 IMF이전까지 당시의 생활 환경부문에서 상당하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는 자신감을 남겼다. 탈북자들의 말에 따르면 남한의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된다는 사실을 듣고 자신들이 체제 경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도 올림픽의 위상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상징하는 이미지에 반드시 이 서울 올림픽과 2002 한일월드컵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그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는 국내의 일부 강경했던 좌파 그룹들의 속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후 사회주의보다는 사민주의를,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속성이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변화는 민중당 계열에서 일어났다. 다만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애초에 민중당이 창당된 것이 1990년도였고...)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부터였다.

심지어 5공에 반대했던 인사들 중 서울올림픽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1990년에 낸 자서전 <장정> 4권에서 올림픽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한편, 3년 전 자신을 총장직에서 쫓아낸 전두환에 대해서도 "독재자로서 죄가 많지만, 올림픽 유치와 물가안정 등 공로도 있다"고 평가했다.[114]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도 19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기념 특별 서면회견에서 "올림픽으로 고양된 국민의 자부심과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들의 쿠데타와 좌경 민중혁명을 없앨 수 있다"고 발언했다.[115]

13. 개최 이후

13.1. 올림픽 유치 열기의 시작

서울 올림픽 유치 전까지는 올림픽 유치는 원래 올림픽의 취지 그대로 도시가 유치하는 것이었다. 경쟁 상대였던 나고야 역시 일본 정부가 나서서 유치전을 지휘했다기 보다는 체육계 인사와 나고야 시 차원에서 유치위를 꾸리고 활동했다. 물론 실제 개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많은 신경을 쓰기는 했다. 그리고 물론 1936 베를린 올림픽이나, 1964 도쿄 올림픽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회를 주관하는 사례는 있었다. 그러나 유치부터 정부에서 대규모 계획을 짜고, 범 국가적인 역량을 동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즉, 올림픽은 유치하면 정말로 좋지만, 실패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마치 양날의 검과 같은 사업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캐나다에서 열렸던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면서 파산하게 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 뮌헨 올림픽에서 엄청난 테러사건과 또한 당시까지도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올림픽 개최에 관한 각 국가들의 부정적 회의론이 급부상하게되고 또한 각기의 여러나라들도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더더욱 부정적인 시선으로 나타나게된다.

그런데 빈곤에서 막 빠져나온 한국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이 반대로 변하게된다. 즉 과거 빈민국에서 신흥 개도국으로 성장하면서 이제는 강국과 비슷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 입장으로 단숨에 급부상한 한국을 바라보면서 다른 많은 국가들은 이제는 회의론을 벗아나 올림픽 개최에 관하여 이는 나름대로 해 볼만한 시도로 여겨졌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과거에 이루어진 단순 수도 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차원에서의 계획만이 아닌 이제는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또한 이것이 유치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서울 올림픽의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던 개발도상국의 여러 국가들 혹은 기타 한국 이상의 경제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여러 선진국들은 이제 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과 비슷하게 개도국이면서도 훗날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은 본격적으로 국가로서 인정받은 80년대 후반이후로 1990년에 개최했던 베이징 아시안 게임 이후로 무려 2000년부터 당시 올림픽이 개최되는 시드니와 연장전까지 가는 박빙의 경쟁을 했었던 그들의 올림픽 유치에 관한 노력은 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으로 그 결실을 맺게되었고 또한 중국은 이 일을 계기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추세는 급기야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총리토니 블레어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4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는 유력 도시였던 소치와 평창의 각 국가원수인 블라드미르 푸틴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IOC에서 "국가원수의 프리젠테이션 금지를 명문화하자"는 얘기도 나왔었다. 결국 올림픽 유치 열기가 과열된 것이었다.

여하튼 서울의 이러한 성공적 올림픽 개최의 사례를 통해서, 올림픽이 이제는 국가적 위신을 높일 수 있다는데 착안한 다른 개발도상국들, 심지어 소위 선진국까지도 국가적인 역량을 집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즉, 흔들리던 올림픽 개최 운동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13.2. 문화적 변화

올림픽 개최를 했으니만큼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야되었기 때문에 장발과 미니스커트 착용에 대한 단속이 중단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전면 해체되는 등 이전에 비해 문화에 대한 제한이 상당부분 풀어졌고,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프로스포츠가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지하철과 도로, 경기장 건설, 서울 외곽지역 재개발 및 한강정비사업 등 각종 인프라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올림픽 자체만으로도 문화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컸지만, 때 마침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가 진행되며 그간 한국언론과 문화계를 억누르던 각종 정치적인 검열과 규제가 부분적으로나마 철폐되거나 완화되었고, 상업적인 부문에 있어서 광고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가처분소득이 크게 늘어나며 자가용 승용차가 대중화 되기 시작했고 외식부분도 괄목할 성장을 기록했으며 또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루워지면서 여가산업이 크게 번창하여 많은 부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 나라가 발전해서 국가적으로 스포츠 시설 건설을 지원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하더라도 한국은 그야말로 스포츠 시설들이 부족한 국가였다. 현재 기준으로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은 낙후되었겠지만 서울 올림픽 개최 전만 하더라도 여러 비인기 종목들의 시설들이 부족은 커녕 없는 것도 많았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로 모든 올림픽 종목시설들이 건설되면서 현재도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봤을 때, 서울 올림픽은 스포츠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고 볼수있다. 또한 서울올림픽 유치 이후로 프로야구K리그, 민속씨름과 농구대잔치 등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렸고 3S정책의 영향이지만 적지 않은 프로구단들이 올림픽 당시에 지어진 시설을 썼거나 쓰고있다는 점을 강안하면 프로스포츠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교통, 통신 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 부산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1기 지하철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으며 동차형 새마을호 열차가 올림픽 대비용으로 제작되었다. 카드형 공중전화도 서울 올림픽을 위한 중요한 시설이다. 커피 자판기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한국 전통 음식에 대한 홍보를 위해 음식에 왁스를 넣고 가열하여 굳힌 모형음식[116]이라는 것도 서울 올림픽 당시 정부의 지시사항으로 나온 것이다. 방송 역시 서울올림픽 방송실시본부(SORTO)가 올림픽 방송제작용으로 신형 방송장비들을 개발해 방송기술 발전에 공헌했고, 방송사 내부에서도 올림픽을 앞두고 각종 방송시설을 들이면서 방송기술과 화면을 개선했다. 비디오 시장도 올림픽 붐을 타 1988년 4월 기준 VCR 보급대수 180만 대를 연말에 220~250만 대로 증가시켜 영화산업을 초월시켰다.

또한 언론기본법이 적용되었던 1987년까지는 자원 및 외화낭비 방지라는 명목으로 신문지면 제한을 해서 특정한 날이 아니면 신문지면을 1일 12면씩만 발행할 수 있었지만, 민주화에 따른 언론기본법의 폐기에 따라 신문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어 올림픽을 앞두고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과 잡지들이 발행되기 시작하거나 복간되고 12면으로 묶여있던 지면제한도 폐지되어 16면으로 발행면수가 증가했다. 이는 곧 신문사 입장에서는 광고비를 잔뜩 챙겨먹을 수 있는 철호의 기회였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한겨레를 뺀 주요 언론매체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켜 신문 쪽수를 하루 8면씩[117] 증면시켜 막대한 광고비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며, 올림픽 특수의 맛을 본 주요 신문사에서 광고수익의 증가를 위해 신문지면을 적극적으로 늘리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를러서는 조중동한[118]에서 발행부수를 48면까지 늘리고 다른 여타 언론사에서도 기본 20~30면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서 신문광고 시장이 크게 번창했으며 신문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늘어났다. 다만 방송광고시장은 생각보다 성장을 못한 축이기는 한데 토요일 낮방송 허용을 제외하면 올림픽 이후로도 TV 방송시간 연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못했다는것이지 자가용 보급으로 라디오 방송 수요가 다시금 늘어나고 개신교 일색이었던 종교방송이 개국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매년 두자릿수대 정도의 성장을 기록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보면 못한축 은 아니었다.

또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공중화장실 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데다가 설치했다 하더라도 관리가 잘 안되어 불결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매우 불편했는데, 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시켜놓았다. 물론 이용의식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닌지라 공중화장실 자체의 불결 문제는 2002 한일 월드컵 때를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개선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시설자체가 매우 열악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인 수준으로 개선되었다.[119]

올림픽을 앞두고 5월 20일에 도입된 바코드의 국가코드 880의 의미가 바로 이 서울 올림픽이다.

게다가 올림픽 특수를 크게 탄 건 요식업, 숙박업, 관광/레저, 스포츠/여행장비 등 여가산업들이었다. 이는 IMF이전까지의 대한민국의 최전성기로 불릴 정도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시 재벌기업들은 관광호텔 및 레저시설 건축 등 관광/레저사업과 스포츠용품/의류 등에까지 뛰어들었다. 당시 쌍용 계열이던 용평리조트가 10년 적자를 보다 살아난 게 그 예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붐은 90년대 중반까지의 국민소득 향상에 근거한 '여가의 상품화'에 편승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 기업들이 급증하던 노사문제로 리스크를 겪을 제조업 대신 인력 적고 관리가 편한 레저산업을 택했다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골프장 개장/허가 수도 1988년 들어 16개월 간 99개로 급증해 기업가들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조성했다.

14. 논란

14.1. 강제 이주와 보여주기

(<상계동 올림픽>의 캡처영상)

허울 좋은 86, 88올림픽이 없는 사람 다 죽여요. 살고 있는 주민들 다 쫓아내고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건 재개발이 아니고 투기개발이요, 투기개발.

- 1986년 7월 31일자 p49. <투기 개발에 저항하는 오금동 세입자들>.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는데, '86, 88'이라는 마법의 주문 아래 경기장 건설 및 환경정비라는 명목으로 수십만 주민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 성화봉송 루트 주변 경관에 보여지는 판자집이란 판자집은 전부 무단으로 철거해버렸다. 부랑자, 거지,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혀가 부랑자/장애인 보호시설에 수용되었다. 올림픽 개최 이후 장애인 올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인권 침해 문제도 발생했다.

이미 1982년부터 대규모 건설자본을 끌어들인 대대적 재개발사업 '합동재개발'이 실시되면서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국회대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 때 철거된다.[120][121]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및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됐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상계동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공장 지대이던 양천구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대규모 주거 단지이자, 8학군에 버금가는 명문 학군,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부천시원미, 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빈민가에 있던 사람들은 밀려나서 난곡이나 시 밖으로 쫓겨났다.[122] 이를 다룬 다큐 영화가 송환을 만든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이다. 이 때 상계동 천막촌의 철거 이유는 성화 봉송이 이쪽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보기 좋으라고.[123] 심지어 전국 도시 노점상도, 성남 모란시장 역시 폐쇄 대상에 올랐다.

이 때 철거민,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을 쫓아내면서 겉보기에는 도시 미관이 좋아졌지만, 이미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통해 1970년대부터 끓어오르던 하층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말았다. 이로 인해 1986년 10월 31일 신당 6동 강제철거 당시 철거민 2명이 분신을 기도했고, 12월 4일에는 철거민 1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5명이었으며, 1986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14명이나 되었다.[124]

그러나 철거민 문제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된 계기가 바로 88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대로 폭발하여 올림픽 개막 1년 전인 1987년에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을 탄생시켰고, 이는 1993년 전국철거민협의회, 1994년에는 분파인 전국철거민연합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8년 6월 29일에 수도권 등 30여개 지역 주민들이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규탄대회'를 열었고, 오후 8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서민주택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밀려 파급되지 못했다.

게다가 1988년 8월 5일부터 제정/시행된 '올림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에 따라 17일부터 올림픽 기간 중 전국 주요도시 특정구역에 '평화구역'이 선포되면서 구역 내에선 어떠한 집회/시위가 금지되었다. 그 증거로 8월 18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주지역 8개 재야단체들이 5.18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다 평화구역이란 이유로 경찰에 강경 진압되었고, 서울시내 극장에서 열린 미국 영화 직배반대 투쟁도 휴관 형식으로 경찰과 대치해가며 시위했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 주요 도시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서울 시내와 경기가 열리는 곳 주변, 대로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 영양탕, 보양탕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위성 도시나 변두리로 쫓겨나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또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 음식을 모르기 때문에 서울시의 음식점에서는 필수적으로 점포 밖에 음식 샘플을 비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하기도 했다.[125]

군대도 보여주기식 정책을 폈다. "군인들이 거리에 보이면 위압적이고 남북이 심각한 대치 상황인 것처럼 보여 안 된다"고 하여 군복 입고 출퇴근 하던 당시 방위병[126]은 대회 기간 동안 평상복을 입고 다니게 했고, 군용 차량은 서울 시내 다니는 게 전면 금지되었다. 주둔지가 서울시내라 꼭 다녀야 하는 수방사 소속 차량은 얼룩무늬 위장색 위에 파란색이나 회색, 황토색 등 단색을 칠해 다니게 했고, 수도권 부대 병사들의 휴가 외출 외박도 안 줬다. 지역 부대 소속 장병들도 군복 입고 서울시 주변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은 88올림픽 직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올림픽의 예행 연습이라 할 86 아시안 게임 말고도 1983년 IPU 총회, 1986년 IMF 및 IBRD 총회 등의 국제행사가 우리나라에 개최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도시 빈민들과 힘 없는 이들에게 장기간 고통을 주고, 외국인들에겐 쌍수 들어 환영하는 저자세를 보여줬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 시절이라 월간 말이나 한겨레신문같은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는 보도되지 못했고, 더불어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특히 중산층)가 너무나 강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정책의 부당함과 힘 없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14.2. 편파판정

편파 판정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특히 당시에 주관적인 요소가 컸던 복싱에서 이 문제가 불거졌고, 복싱 역사상 가장 큰 이슈 중 2가지가 88 올림픽 때 발생했다.

먼저 한국 복싱선수 변정일이 편파 판정으로 탈락했는데 당시 32강 2회전에서 변정일은 2회 경고만으로 2점 감점됐으나 상대방 불가리아 선수는 8회 경고를 받았으나 일절 감점되지 않았다. 변정일의 탈락으로 관중들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당시 경기 영상 그러나 이 때 한국 코치진이 링에 난입하여 심판진에 폭력을 행사하며 아수라장을 만드는 촌극을 벌였고, 변정일은 67분 동안이나 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무식하게 주먹부터 쓰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변정일은 경기 진행을 방해한 이유로 국제복싱연맹으로부터 5년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고, 한국은 국제적 비난과 망신을 당하여 한국복싱연맹 회장과 김종하 대한올림픽협회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변정일의 경우는 1990년대에 프로로 전향하여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했으나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보다 더욱 논란이 되는 사건이 나오고 마는데...

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도 멋적게 존스 선수의 손을 들어주는 박시헌 선수. 차라리 그냥 은메달이었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중 불거진 논쟁 등과 같은 경우에 "한국은 스포츠계에서 비열하게 장난친 전례가 있으므로 편파판정 당해도 싸다"라고 주장하는 측[127]이 흔히 드는 2가지 예가 바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과 바로 밑에 서술할 88 올림픽 복싱 결승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9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권투 선수인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 선수가 한국의 박시헌 선수를 상대로 터무니없이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진은 박시헌의 손을 들어줘 존스가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받게 된다. 당시 경기 영상 1부 2부 이것이 흔히 "88 서울 올림픽 복싱 강탈(robbery) 사건" 이라 불리고, AFP가 역대 올림픽 최악의 판정 2위에 선정된 바가 있다(5위가 신아람 선수의 2012 런던 올림픽 1초의 기적, 4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 급 8강전, 3위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 1위가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 당시에 한국이 종합순위 4위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음에도 타국들이 흔히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다.

당시에 한국의 박시헌 선수는 안 그래도 16강전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이탈리아 선수를 꺾고 올라왔는데, 결승전에서도 전설적인 복싱 선수였던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관중들은 물론이고 박시헌조차 존스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심판진 5명의 판정 결과 2:3으로 박시헌이 금메달을 따는 역대 최악의 판정이 나와버렸다. 패배한 존스는 말할 것도 없고 박시헌조차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이 경기에 대한 미국의 항의가 아마추어 복싱의 룰을 더욱 객관적으로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존스 선수는 그 이후 IOC에 제소했으나 1997년 5월에 IOC 조사위원회가 최종 기각했다. 우선 조사 결과 한국측의 심판매수 흔적이 없었으며 비디오 분석에서도 로이 존스에 딱히 손을 들어줄만한 결과를 찾아내지 못했다. 존스의 유효타가 2배 더 많았다고 하지만 존스가 확실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텐딩 다운 판정 역시 박시헌이 바로 항의하고 나섰을 정도로 존스에 대한 판정 또한 석연치 않았고 이 때는 박시헌이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마지막 라운드, 특히 종료 1분을 남겨두고는 박시헌이 경기를 주도하며 상당수 유효타를 성공시켰다. 거기에 홈 어드벤티지까지 감안하면 박시헌이 이기는 판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 쪽 언론들은 이 경기를 갖고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리다가 2004 아테네 올림픽 양태영 사건이 터지면서 꽤 조용해졌다.

그래도 당시 19살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이 논란의 은메달을 계기로 미국 전체의 관심과 격려를 받고 절치부심하여 이듬해 89년에 프로 데뷔를 하고 90년대~2000년대 복싱계를 평정한 대스타로 발돋움 하게 된다. 미들급에서 시작해 헤비급까지 정복했으며 당대를 넘어 역대급 복서로 평가받는 선수. 나이 들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뛰면서 전적에 흠이 많이 가긴 했다. 그리고 2001년에 랩가수로 데뷔했다. 현재도 현역. 박시헌 선수 본인 잘못이 아니라 심판 잘못이었고 박시헌 본인도 "조국이 나의 은메달을 뺏어갔다"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으나, 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으며 그는 한참이나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여론은 미국에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는 둥 모금으로 금메달을 만들어서 보내주자는 둥 박시헌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그 이후로 복싱 인생이 꼬여 국내외로 비난에 시달리다 조기은퇴하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자살 고민까지 했다고 한다. 근황... 지못미.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복싱팀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 하다.

14.3. 약물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이 적발된 대회가 바로 서울 올림픽이다. 100m 결승 우승자였던 벤 존슨은 우승 직후 약물 검사에서 약물 복용 사실이 적발되면서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다만, 그만 약물을 복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여자 100m 우승자인 그리피스 조이너에 대한 약물 복용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100m 올림픽 미국대표 선발전 기록인 10초 49는 여자의 기록이라고는 믿기 힘든 엄청난 기록이었으며,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조이너 선수가 9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칼 루이스도 약물을 복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외에도 역도 선수들의 약물 복용 적발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특히 남자 100m 경기는 올림픽에서 마라톤, 축구와 함께 가장 많은 세계적 관심이 쏠리는 핫 이슈 종목[128]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만약 남자 육상 100m가 아닌 다른 일반 종목이었으면 상대적으로 잠잠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129] 그만큼 남자 육상 100m가 올림픽의 핫 아이콘이란 의미다.

조선일보 2012년 6월 1일 기사에 의하면 당시 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이 "루이스의 음모로 인해 박탈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서서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기사

다만 벤 존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던 것이 80년대까지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대표 체육인들의 약물 복용이 만연했으며 한때 동독에서는 이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다. 이 대회 수영 6관왕을 차지했던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와 단거리 육상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의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역시 약물 복용 논란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다. 10종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했던 동독 선수 크리스티안 솅크2018년 9월에 도핑 사실을 자백하기도 했다.[130] 러시아는 소치, 리우올림픽까지 약물복용을 했다는 게 확실시되고 있다. 물론 약물의 힘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려고 한 시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벤 존슨의 경우는 서울 올림픽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 지나치게 집중 포화를 퍼붓다 보니[131] 그 이후에도 약물 스프린터라는 오명이 붙어서 이후 출전한 대회에서도 요주의 대상이 되었으며 90년대에는 선수 자격까지 박탈당하여 다시는 트랙 위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이 많은 육상 커리어에 대해 반성을 많이 했는지 벤 존슨은 반(反) 도핑 전도사로 활약하며 자신의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곳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트리비아의 샘, 퀴즈 탤런트 명감, 수요일의 다운타운 등의 일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빨리 달리기와 관련된 것이 나오면 땔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쓸데없이 거창한 소개에 비하여, 순방향으로 움직이는 무빙워크 위에서 달려도 10초대를 못 넘거나, 거대 송풍기를 등지고 달렸음에도 11초를 기록하는 등 최후에 고통받는 모습 같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게 다반사.

역으로, KIST에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을 밝혀내어 우리의 도핑테스트 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냥 듣보잡 선수 하나 잡아낸 수준이 아니라 올림픽 최고의 스타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리고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역대급 월척이다. 100m 경기 자체가 올림픽에서 중계권료와 광고료가 가장 비싼 종목임을 감안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사건(!) 덕분에 2002 월드컵, 2011 대구 육상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벤 존슨의 유죄를 밝혀낸 당시 수장인 박종세 박사는 다른 사건에서 뇌물수수(...)로 인해 집행유예를 받아 흑역사가 되었다.

14.4. 경제

서울 올림픽은 경제적 성공만 있었던 것이 아닌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풀게 됨에따라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게 되었고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건설 공약으로 서울 근교지역 및 지방 대도시 지역으로까지 투기열풍이 확산되었으며 대기업들도 비업무용 부동산 대량매입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부동산 가격은 매년 20% 이상 올랐으며 전월세비도 급속하게 치솟아 서민들의 삶을 짓눌렀다. 서울올림픽 이후로는 만연한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면서 신도시 추가 건설 등[132] 부동산 투기억제 정책을 폈지만 당장의 부동산 투기를 짖누르는데 실패했으며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라 물가도 급속히 올라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물가상승률이 오일쇼크 이래 최고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올림픽 이후에 부동산 가격을 억제할려고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한다거나 신도시 건설 규모를 확대하는 방책이 1991년부터 약효를 얻기 시작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약 10년간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 될수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물론 올림픽으로 인한 거품 경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주가지수가 1000까지 가는 기염을 토하지만 금세 바로 무너지는 등, 자산에서 버블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이 문제는 대규모 신도시 건설 등으로 일단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으나 이 때의 거품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하고 기업들도 기술투자 대신 무리한 사업다각화와 부동산 투기 등에 정신을 팔다 보니 결국 9년 뒤 1997년 외환 위기로 경제주권을 잠깐 잃었다.

15. 방송

당시의 NBC 올림픽 엔딩

  • 원래 대부분 개막식은 밤에 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의 오전 11시가 미국의 프라임 시간인 저녁 시간대라서 NBC 방송의 요구로 대낮에 열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서울올림픽까지는 모든 올림픽의 개막식이 낮에 열리는 것이 관례로 당장 바로 직전인 LA 올림픽 개막식도 현지시간 정오에 시작하였다. 이 관례는 2년 뒤에 열린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때 개막식을 저녁에 열면서 깨지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계속 개막식이 밤에 열리고 있다. 사실 밤에 개최하면 다양한 조명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중간에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낮에 열렸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개막식이 낮에 열린 마지막 하계 대회이다. 하지만 NBC의 요구로 주요 결승전이 한국의 프라임시간보다 약간 뒤인 오후 9시에 치러지진 것은 사실이며,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몇몇 종목은 자정이 지난 후 결승전이 끝나기도 하였다.
  • 1988년도 BBC Olympic Grandstand는 서방세계 제도권 방송사 타이틀에 한글이 등장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 붉은색 한글로 '한국'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로고는 대회 내내 전 영연방에 방송되었다!(관련 영상 4분 45초부터 보자.)
  • 미국 프로그램 젠장뉴스에서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강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도중에 군인들을 동원했는데 군용 헬리콥터가 장비를 운반하다가 추락하면서 폭발하여 군인 4명이 사망했다는 내레이션과 같이 동영상(33초부터)을 방영한 바 있다. 그런데 이건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2001년 5월 29일에 올림픽대교 위에 성화모양 상징물을 올려달라는 서울시의 협조 요청에 군이 응하여 치누크 헬리콥터로 장식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리 위에서 하강 기류가 발생하여 뜨지 못하고 계속 하강하다가 결국 다리 구조물과 장식에 충돌하여 추락 및 폭발한 사건이다. 이 프로그램이 잘못된 정보를 보여준 경우이다.

MBC의 개막식 당일날 ID 서울올림픽 개막 시간인 오전 10시 맞춰 북소리를 내는것이 포인트다.

KBS의 서울올림픽 개회식 오프닝 겸 엔딩 타이틀

  • KBS 뉴스 9의 경우 올림픽 기간동안 아예 올림픽 경기/행사 장면을 배경으로 오프닝을 내보냈다(위 영상). 특히 이 때 쓰인 오프닝 음악은 오히려 1990년대보다도 더 낫다는 평을 받는지라 올림픽 기간에는 더욱 그 간지를 자랑한다.
  •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대회 기간에는 방송 2사가 뉴스와 한두 개 정도의 드라마, 교양프로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올림픽 경기를 보여줬다.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교육방송인 KBS 3TV(현재 EBS의 전신)조차도 매일 정규방송 말미에 외국인을 위한 올림픽 안내프로그램을 영어와 불어로 송출하고, 정규방송이 없던 아침~낮시간대에 사이클 도로경기, 승마 종합장애물 같이 경기시간 한참 걸리는 비인기 종목을 중계해 줄 정도였다. 케이블 조차 없던 시절이다 보니[133] 이런 방송에 드라마광인 아줌마들도 짜증냈고, <개구리 왕눈이> 같이 당대에 방영하던 만화를 못 봤던 국딩들도 짜증을 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이에 내색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터라...[134] 근데 거꾸로 평소에는 안 하던 낮 방송을 계속 해주니 낮에 AFKN 말고 우리말 방송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긴 했다. 당시에는 평일엔 아침 6~10시, 저녁 5:30~새벽 1시에만 방송을 하였다. (KBS 3TV는 오전방송 없이 4:30~12:00).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세계 최초로 HD방송한 올림픽이다.[135] NHK에서 MUSE 방식으로 시범방송한 것이 그것.[136] 분명 영상을 보면 HD 영상소스가 존재한다. 출처[137]아카이브 영상[138]
  • 2018년 9월 16일 14시, KBS1에서 88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인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88/18'을 방영했다. 자세한 내용은 88/18 항목을 참조.

16. 한국측 중계진

17. 스폰서

18. 기타

  • 다이빙 종목 우승자인 그레그 루가니스는 당시 AIDS 보균자였다. 그는 다이빙 시합 도중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서 다쳐서 피를 흘렸는데, 이 당시 응급처치를 위해 의사가 별 보호장치 없이 그대로 그를 치료했다. 훗날 그가 AIDS 보균을 고백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AIDS 약도 당시 가지고 다녔는데, 한국을 떠나 출국할 때, 검역장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니 공항에서 검역을 면제해 줬다고. 훗날 루가니스는 공식적으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LGBT 운동가로 활동중이다. 참고로 루가니스를 키워낸 코치가 바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올림픽 영웅 새미 리.
  • 부대행사처럼 여겨지던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기틀을 잡은 것이 바로 서울 대회였다. 이 때부터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올림픽의 곁가지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체육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 장애인 올림픽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서울 장애인 올림픽의 심볼 마크가 그대로 국제 장애인 올림픽 기구의 심볼로 1994년까지 쓰였으며, 그 이후 모양은 바뀌었으나 태극 무늬는 2004년까지 심볼 모양에 남아있었다.
  • 1988 서울 올림픽의 한국 선수단 유니폼은 한국 의상 디자이너계의 거장으로 유명했던 앙드레 김이 디자인을 했다. 하늘색 재킷과 흰색 바지/스커트 형식이다. 여기에 소품으로 태극선(태극 무늬의 둥근 부채)을 접목했다.
  • 서울 올림픽도 흑자를 봤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수입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막상 올림픽이 끝난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그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서 새로운 공공기관을 설립한다. 바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데다 KAL기 격추사건이 일어난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력했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로 결국 소련이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국민들도 소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미국 NBC 취재진들이 한국의 집창촌이나 PX 유출 같은 것에만 사실상 한국을 폄하하는 식의 편파보도를 한데다가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 미국 선수들의 추태 그리고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이 겹쳐서 상대적으로 소련에 대한 감정이 괜찮아졌던것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당시로써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소련이 불참한 명목상의 이유가 '선수들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올림픽이 코앞이던 1988년 9월 1일은 KAL기 격추사건 5주기였지만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의 PD 출신 보수 정당 정치인들이 사민주의를 거쳐 우파로 전향한 것도 이때쯤.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소련을 응원하는 관중 모습은 사회적으로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 소련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당시 아마추어인데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던 미국 농구 올림픽 대표팀[140]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도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한다. 패배에 충격받은 미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 소련 농구팀에게 설욕은 하지 못했지만 이 때부터 미국 농구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문에 1992년과 1988년 남자농구는 1-3위가 뒤바뀌었다. 1988년에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미국 순서였는데, 1992년엔 미국,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소련의 후신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 개막 1개월 전에 소련 외무부의 영사급 외교관들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141] 올림픽 폐막 후인 10월 10일까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머무르면서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영사관 업무를 진행했었다.[142] 미수교 상태인데다 대표부조차 없는 일체의 미교류 관계였기 때문에 이렇게 임시로 영사관을 만들었던 것. 소련 외 공산권 국가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국민의 영사 업무를 진행했다.
  • 이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감정은 상당히 안 좋았는데, 안 그래도 미국정부에서 1987년 대선노태우 당선에 대해 대놓고 축하 논평을 낸 것과[143] 경상수지 적자가 벌어진다면서 감내놔라 배내놔라 하는 참견질과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 서울올림픽 직전에 주한미군 자녀가 임산부를 폭행하고 주한미군 병사가 택시운전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보도가 난데다가, 개막식 입장에서 미국 선수들이 자기 안방인 것 마냥 무질서한 분위기[144]를 보여주었고, 거기에다가 올림픽 방영권을 지니고 있는 미국 NBC 방송국이 올림픽 기간 내내 집창촌이나 미군 PX 물품 유출같은 한국의 안 좋은면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한국을 폄하하는 보도를 한데다가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중계를 했고, 거기에 미국 선수 일부의 태극기 모욕, 그리고 미국 수영선수단이 절도를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당연히 NBC와 미국 선수들의 이러한 행태에 국민들은 "미국이 한국을 아직도 후진국으로 생각하면서 내리깔고 무시한다!!"고 분노했고, 안하무인격인 미국에 대한 비난여론이 급속히 증폭되었다. 거기에다가 이 상황에서도 NBC 제작진이 한국과 변정일을 비웃는 티셔츠의 제작을 문의하는 일까지 알려지자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사태가 터졌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은 급히 한국인 달래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무분별한 반미감정은 한미관계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자제에 나서달라고 부탁했으며 미국 선수단이 폐막식 때 한국을 달래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겨우 무마되었지만 그래도 NBC가 사고를 치는 일만큼은 30년 뒤 한국에서 다시 평창 올림픽이 열렸을 때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고, 서울 올림픽의 평화와 동서 화합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 아래 서울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초기 수상자들은 완전 엉망이었다. 오늘날에는 좀 잠잠했지만, 수상 초기에는 정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수상 재단도 내분에 시달렸다. IOC 위원장 사마란치가 있질 않나...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은 <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서울 올림픽에 관련된 지명들이 서울특별시 시내에 여럿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 올림픽대교, 올림픽공원,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올림픽로[145], 88올림픽고속도로 등. 88올림픽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이 고속도로 명칭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대격변급의 개량공사 완료 및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 내부에는 올림픽체육관 이란 이름의 체육관이 존재하는데 88올림픽 당시 학교측이 부지를 제공하는 대신 국비로 체육관을 짓기로 해 실제 올림픽 당시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예술/체육대학 단과대 건물로 활용중이며 교내 행사 등에 자주 사용된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단 주경기장이 송파구에 있는데다가 처음 송파구가 분구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올림픽을 기념한다며 송파구의 명칭을 올림픽구로 변경하려고 추진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이 "5백년 역사가 담긴 많은 유적지와 송파 산대놀이, 송파 답교놀이, 송파 나루터 등으로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송파‘라는 이름은 구 이름으로라도 마땅히 남아 있어야 한다"며 맹렬하게 반대를 해 무산된 바가 있다. 다만 송파구는 1992년부터 서울올림픽의 개막일인 9월 17일을 송파구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당시 올림픽 기간에 추석연휴가 겹쳤는데(9월 24일~26일) 공교롭게도 30년 뒤에 한국이 개최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설 연휴(2월 15일~18일)가 겹치면서 한국은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 동안 자국 최대의 명절을 함께 하게 되었다.
  • NIKE에서 1988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으로 하여 에어 조던 3 서울을 더 드로우 방식으로 발매할 예정이다. 3월 7~8일 동안 나이키 공식 홈페이지에서 응모를 하면 되고, 3월 9일에 발표를 한다. 대한민국(우리나라)에서만 발매하기에 외국인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여의도 63빌딩 주차장 쪽으로 가면 올림픽 때 대한생명이 세운 성화대가 있다.
  • 이후 KBS스포츠국은 유튜브에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곳곳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중국 외교관의 증언이 나왔다.


  1. [1] 이른바 '삼태극'으로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 있다.# 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前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
  2. [2] 일부 경기는 경기도에서 개최
  3. [3] 개회식 당시에 삼김도 초청받았는데 6.29 선언 직후부터 13대 대선 선거운동 기간까지는, 자신들이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멋진 모습을 상상해서였는지 어두침침한 표정(...)을 지었다. 초대받지 못하고 개회식을 집에서 본 전두환에 비하면 한참 낫다. 그래도 김영삼1993 대전 엑스포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김대중2002 한일월드컵,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개회선언을 맡았기 때문에 한(?)을 풀기는 풀었다.
  4. [4] 1964년생 핸드볼 선수. 1972년생 아나운서 출신 작가 손미나와 이름이 같다.
  5. [5] 유도심판
  6. [6] 한국어 관련 홈페이지(입장권, 스토어, 안내, 뉴스, 등등)는 폐쇄되었으며, 올림픽 위원회의 공식홈페이지만 남아있다.
  7. [7] 요트경기는 부산 수영만에서 치뤄졌다.
  8. [8] 첫 번째 대회는 일본1964 도쿄 올림픽이며, 3번째 대회는 중국2008 베이징 올림픽이다.
  9. [9] 동계 올림픽을 포함하면 아시아에서 3번째로 개최된 대회. 그리고 서울 올림픽 이전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이 있었다.
  10. [10] 아테네, 로마, 런던 등과 같이 수십여년 혹은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개최된 도시들과 달리, 당시 신흥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의 올림픽이란 자체가 특이할 수 밖에 없었다. 비슷한 위상으로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이나 2008 베이징 올림픽 뿐인데, 한 국가의 이후 위상변화에 있어서도 서울 올림픽은 두드러진다. 식민지 일제강점기6.25 전쟁을 거쳐 세계 최악의 빈민국이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불과 30년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눈부신 발전상을 자랑하는 국위선양의 장이 된 대회이며, 세계적으로는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올림픽이다.
  11. [11] 덧붙이면 체육활동 장려와 같은 것도 거의 전무했고 이처럼 체육 활동과 기반시설들 또한 엉망이었다.
  12. [12] 여기서 박종규 체육회장은 전직 대통령경호실장(별명 "피스톨 박")으로, 즉 박정희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였고, 동시에 대한체육회장 겸 사격연맹회장으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하는 등 당시 체육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13. [13] 집권 3년차에 야구에서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규합하여 프로리그의 성격인 바로 프로야구를 급조해서 출범시켰고, 연달아서 K리그의 전신이었던 프로축구 , 민속씨름, 다만 농구의 경우에는 당시에 프로농구라는 의미로 넘어가기 이전까지는 대학농구와 실업농구팀을 주무대로 한 농구대잔치를 출범시켰다. 또한 여기에 스포츠 인재 양성을 위해 예술체육요원의 선발 범위를 더 넓히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스포츠인들을 양성하게 된다.
  14. [14] 여기에 일본인 세지마 류조가 간접적으로도 관여하면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일관계를 조율하던 세지마 류조가 전두환에게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년 개최되었던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그 예로 들면서 이처럼 한국에도 올림픽이나 만국 박람회 즉 지금의 엑스포와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형 이벤트를 유치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당시의 일본의 나고야가 하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맹렬히 준비하던 시점이기도 했는데, 정작 세지마 류조는 자신들 국가의 올림픽이 아닌 오히려 자신들 국가의 유일한 경쟁지역이었던 서울의 올림픽 유치를 오히려 돕겠다는 뜻을 보였다고 한다.
  15. [15] 물론 당시 일본의 나고야는 올림픽 개최를 주도하던 나고야 시장인 모토야마 마사오가 일본사회당일본 공산당의 지지를 받던 혁신계 인사라서 자민당이자 골수 우익인 세지마가 서울을 밀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올림픽을 준비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나고야 시 차원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다는 설을 방증할 수 있다.
  16. [16] 일본 내부에선 나고야의 올림픽 유치 문제로 사회당이 여세를 몰아 일본 자민당의 55년 체제를 무너뜨릴 것을 우려했다. 다만 그래도 국정은 괜찮게 처리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1981년 시장선거에서 혁신계뿐만 아니라 자민당의 지지도 얻으며 압도적으로 재선에 성공했고, 이후에는 자신의 후임자도 12년간 시장직에 계속해서 재임했다.
  17. [17] 반면 당시 아이치현 지사였던 나시야 요시아키도 나고야 올림픽 계획구상을 이끌던 인물이었는데, 나고야 올림픽 개최실패 이후로 책임지고 1983년 지사선거에서 불출마했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뒤에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8. [18] 정주영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출간했던, 자신의 자전적 홍보책자에서 회고한 말이다.
  19. [19] 당시 정주영 현대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기업가들의 입장도 올림픽에 유치에 대하여 비관적일 것으로 전망했다고 한다.
  20. [20] 예비군 탄생의 기점이 된 김신조 사건이라 불린 1968년 1.21 사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등.
  21. [21] 이 때문에 중국이 과거 천안문 사태로 인해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했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었다. 물론 이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 개최에는 성공하지만 말이다.
  22. [22] 서울 올림픽 30주년 다큐 88/18에서 당시를 회고하는 허화평 曰: 언제 대한민국이 준비해놓고 일 제대로 한 적이 있나요?. 라는 말에 우리는 해놓고 봤다고, 왜? 그것 밖에 길이 없는 나라야.(...). 라고 대답했다.
  23. [23] 그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올림픽에 관한 비화가 있다고도 하는데 이는 확실치는 않으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올림픽 관련 관료들에게 만약 서울 올림픽 유치에 실패시에 고국에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도 한다.
  24. [24] 북한은 남한이 개최하면 안된다는 그저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고, 이라크는 전쟁으로 인해 타국의 압박을 받았기에 결국 이후 두 국가는 아시안 게임 유치를 포기한다.
  25. [25] 애틀랜타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바르셀로나는 당시 IOC 위원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이었던데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에서 벗어나 다시금 약진하던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만일 올림픽 유치를 놓고 맞붙었다면 한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6년 올림픽의 경우에는 비록 미국의 상업적 로비에 놀아난 이유로 인해 애틀랜타가 유치했지만 경쟁국가 및 도시들 중 하나가 그리스아테네였다. 하필 1996년의 올림픽은 1896년에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부활하여 다시 아테네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한 근대올림픽이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즉, 명분만 놓고 보면 당시 미국 월드컵을 개최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욕심을 내면서 유치전에 끼어들은 애틀랜타는 상대가 되지 못하며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근대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아테네에서 개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큰 지지를 얻었고 유치전의 흐름도 아테네가 주도했던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서울이 1988년 개최에 도전하지 않고 물론 1996년 개최에 도전했으면 1981년보다 1990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더 좋았겠지만, 무조건 밀린다는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만약에 이를 더 미루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1997년에 터진 IMF라는 엄청난 사건에 국면했을지도 모르니 뭐. 더 이상 선진개도국의 후보지로서의 메리트와 경쟁력이 확보 됐을지가 만무하지 않았을까 싶다.
  26. [26] 특히나 1972 뮌헨 올림픽에서 벌어진 검은 9월단의 테러로 인해 그 다음번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보안경호 비용이 무려 40배 이상 폭증하게된다. 거기에 제 2차 오일 쇼크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라는 엄청난 여파까지 겹치면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였고, 또한 캐나다 중앙정부의 지원없이 올림픽을 유치했던 도시 몬트리올은 결국 파산에 이른다. 이 때문에 1988년 올림픽 유치를 계획하던 오스트레일리아시드니, 알제리알제, 그리스아테네가 이러한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의 참담한 현실과 따른 후폭풍을 직시하게 되면서 다른 국가의 도시들 모두 결국 올림픽 유치 계획을 철회하게된다.
  27. [27] 참고로 시드니와 아테네는 이후 2000년과 2004년에 각각 하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
  28. [28] 원래 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유치희망도시들이 계획안을 제출하면 IOC에서 심사해서 최소기준에 못미치는 도시들을 걸러내고 3~4군데 정도로 후보군을 압축한 다음에, IOC위원들의 비공개 투표로 결정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서는 처음부터 후보가 서울나고야 둘뿐인데다가, 당시 서울의 계획안은 그야말로 낙제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29. [29] 즉 당시에 올림픽 유치지로 나고야가 거의 확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높았던 상황에서 만약 IOC위원회가 서울을 유치 후보에서 최종 탈락을 시키면서 나고야를 단독으로 개최지 확정을 시켰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위원회가 '자폭했다.' 라는 부정적인 사안으로도 언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올림픽 개최지에 강대국 유럽에서는 후보가 등장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며 또한 올림픽 유치를 포기한 국가들을 제외하면 유치 지원에 힘쓴 지역이 무려 아시아에서만 단 2곳만이 남아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를 더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는 유럽국가들 혹은 강대국들의 여러 우려와 반발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 스포츠 축제라 불리는 올림픽의 존립 자체에 관한 근간을 뿌리채 뒤흔들수도 있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번졌을 가능성이 분명히 높았을 것으로도 당시 상황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30. [30] 당시의 올림픽 회의론은 분명 제 3세계쪽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자유주의 서방 진영 즉 미국과 같은 강대국과 유럽진영에서 유독 더 많이 나왔던 말이었다. 그러니 올림픽 유치에 대하여 또 관련된 대륙간 안배원칙 즉 지역 할당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시아권을 평가절하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기에. 만약 올림픽이 위신을 완전히 잃게되면서 이에 따른 극단적이면서 부정적인 여파와 국면이 일어났을시 대충 그림이 이렇게 그려진다. (자본주의 진영인 미국과 유럽 강대국 VS 올림픽 위원회 VS 사회주의 진영 VS 제 3세계 국가들의 양상의 구도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31. [31] 더군다나 한 국가가 자국의 올림픽 개최로 인해 이에 투입이 될 국내의 기업들뿐만 아니라 참가국인 타국의 기업들까지 또한 이를 복합적으로 따졌을때에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이에 따른 경제적 효과와 이득을 얼마나 얻게 되는지 이는 어느 정도 고민하고 생각하더라도 답은 뻔하게 나온다. 즉 그 동안 연속적으로 반쪽 올림픽의 오명등과 같은 여러 문제들로 인해 더 이상 올림픽의 질적 요소와 그리고 위신을 떨어뜨릴수 없다라 판단한다면 바로 현재에서의 최선의 방법이자 가장 좋은 수로 경쟁자인 나고야와 서울의 경쟁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면서 오직 서로가 치열하게 승부를 펼칠수 있도록 끊임없이 장려해야한다는 의미를 뜻하게 된다. 그래야지만 적어도 올림픽 유치 위원회에서도 자신들의 결정을에도 그에 대한 조금의 명분이라도 챙길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혹시나 예상 못할 변수가 튀어나오면서 향방을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운 상황이 연출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는 후에 진짜로 나고야가 아닌 서울이 유치지로 완전히 확정되는 엄청난 이변이 발생하게된다.
  32. [32] 한국은 당시 남미, 중동, 아시아 등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으며, 일부 선진국도 노골적으로 세번씩이나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일본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33. [33] 일본 내부에서도 나고야 올림픽 개최에 대한 피로심리와 견제심리 그리고 일본 스스로도 유치에 반대하는 나고야 시민들도 많았다는 뉴스도 있었다(참고)
  34. [34] 참고2
  35. [35] 중공의 부상으로 수교국을 대거 상실한 대만에게 가장 존재감이 큰 국가는 대한민국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미국, 영국, 서독, 일본 등 주요 열강의 대사급 외교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대만이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대한민국이었던 것. 오죽하면 대만 외교관이 외교부장으로 영전하는 마지막 관문이 주한대사였을 정도였다.
  36. [36] 그런데 대만은 "한국이 절대로 올림픽을 개최하면 안 된다"며 노골적으로 일본 나고야 올림픽을 공개지지했고, 이후 실제로는 반대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서울이 24회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자 이 후 일부러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는 서울의 종로 등의 뒷골목과 서울의 달동네들을 대만 방송사가 취재하며, 이런 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운 거리의 도시라는 식으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방송을 올림픽 특집으로 꾸며서 당시 대만거주 한국인들에게 항의를 받기도 했다. 당시 대만은 한국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경제발전에 성공하여 1970년대에 컬러TV가 보급되고 1980년대 들어서면 자가용 자동차가 대중화될 정도로 1인당 국민소득 수준에 있어서 한국을 훨씬 앞서고 있던데다가 전통적으로 한국은 조공국으로 여기던 중화사상까지 겹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을 깔보는 경향이 만연해있었는데, 그렇게 얕잡아보던 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해버렸으니... 대만의 국제적 고립이 불 붙은 상황 속에서 배가 아팠을 것이다.
  37. [37] 결국 1992년 들어 한국이 중화민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했으니 이러한 고립상태는 더더욱 심화되었다. 물론 한국이 중화민국과 단교한 게 결코 이것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지만.
  38. [38] 참고로 이 총회는 올림픽 의회를 겸하고 있는 총회였다. 올림픽 의회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 올림픽 의회 문서 참조.
  39. [39] 그리고 그 유명한 쎄울!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발음. 참고로 총회는 프랑스어로 진행되었는데, 다만 상세한 득표수를 발표할 때는 프랑스어-영어순이었다.
  40. [40]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고,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의 아프리카 3개국 순방(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이전까지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
  41. [41] 지금이야 세계적 브랜드에 속하는 FILA가 있긴 하지만, 휠라는 본래 이탈리아 회사였고 훗날에 한국에게 넘어오게 되어 한국 회사로 바뀐 것이었다. 즉 이때의 휠라는 유럽 브랜드였다.
  42. [42] 이것과 똑같은 이유로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개최권 추첨시 유럽세가 카타르를 지지하여 결국 카타르가 유치했다. 국제 대회 개최 노하우가 거의 없는 나라이면서 오일머니만 많은 나라이다 보니 경기장 건설사업이나 방송 중계 및 IT 관련 사업들을 유럽 업체가 수주할 수 있는 나라라고 본 것이었다. 당시 경쟁국인 한국, 일본, 미국 같은 나라에서 유치했다면 거의 대부분 자국 업체들이 사업 수주를 했을 것이라는 점이 지배적이다.
  43. [43] 당시에는 나이키의 사세가 미약했다.
  44. [44] 물론 2001년 FIFA와 아디다스의 유착와 부정부패가 폭로되면서 ISL은 결국 파산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국제스포츠계에서 아디다스의 영향력은 여전히 굳건한 상황이다. 당장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도 아디다스 출신이다.
  45. [45] 북한은 남한이 개최하면 안된다는 그저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고, 이라크는 전쟁으로 인해 타국의 압박을 받았기에 결국 이후 두 국가는 아시안 게임 유치를 포기한다.
  46. [46] 대한민국은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 태국에게 개최권을 넘겨준 전적이 있었다. 때문에 아시안게임 유치전에 참여했다가 또 상황이 어렵다고 중간에 빠지기는 힘들었기에 일본에 올림픽 <-> 아시안게임 맞교환 제안을 했던 것이었다.
  47. [47] 저 엄청난 빅딜 걷어차고 나고야는 2026년이 되서야 국제 스포츠대회 아시안게임을 열게 된다고
  48. [48] 또한 이후 일본은 타 세계대회였던 월드컵의 개최지의 선정 상황의 경우에도 과거 서울 올림픽의 유치 과정때와 같이 비슷한 행보를 보이게 되는데 2002 월드컵 유치전에서도 크게 자만한 나머지, 그것도 한국보다도 무려 5년이나 일찍 조직위원회를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일본: 1989년, 한국: 1994년) 공동개최를 허용하는 실수를 반복하는데 그래도 당시 브라질 출신의 FIFA 아벨란제 회장의 일본 유치론과 그에 반대되는 한국을 제창하는 여러 국가들 그리고 정몽준 회장의 여러 노력들 덕분에 공동 타이틀인 한.일 월드컵으로 이는 2026년에 캐나다, 미국, 멕시코를 모두 묶은 북중미 월드컵 이전까지를 보더라도 국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아시아와 21세기 최초의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게된다. 또한 여담으로 이 제목 타이틀에 관하여 일한이 아닌 한일 월드컵의 의미가 크다. 또한 이를 통해 지금까지도 한일 월드컵의 주체에 관하여 아직까지도 이를 일본보다는 오히려 한국으로 더 알고 있는 외국인들이 많다. 물론 이는 결승전과 개막전을 일본에 내주면서까지 제목 타이틀에 관한 공식 명칭 네이밍을 얻은 것이기 떄문에 이후의 평가는 더욱 값지며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는 이는 다시 한번 엄청난 만행으로 기록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의 유치 과정 문단 참조 바람.
  49. [49] 북한의 서울올림픽 개최 비방
  50. [50] 이 당시만해도 북한은 남한에 대해 "헐벗고 굶주리며 거리에서 사람들이 미제가 먹다버린 것까지 주워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곳"이라는 거짓선전을 날이면 날마다 해대던 실정이었다. 게다가 북한도 올림픽에 대해서는 잘알고 있는 상황인지라 "헐벗고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나라에서 올림픽?"이라 의문을 들 수 있어 이런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51. [51] 노태우는 이후 1988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걸 자랑하듯이 홍보만화에서 큼직하게 다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교적으로 충분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노태우가 비장하게 가서 연설하길 "1988 올림픽이 서울에서 못 열리면 잠실종합경기장을 IOC 위원들 무덤으로 쓰겠다"고 연설했다.
  52. [52] 게다가 전년도에 개헌 안 하겠다고 하면서 핑계를 댄 게 이 올림픽이다. 하마터면 전두환이 자가당착의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53. [53]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54. [54] 동독뿐만 아니라 여러 공산권 국가의 경우 스포츠 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토대로 국력도 과시하고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노렸는데, 한편으로는 세계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게 되면 사실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관계자 및 선수들 또한 그 무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 LA 올림픽에 나가지 못한데 대한 스포츠계의 실망은 엄청났고, 동독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 것.
  55. [55] 이 때 김운용의 나이는 50대였다. 물론 기존에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만큼 언어적 감각이 탁월한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
  56. [56] 1974~19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내전으로 인해 사정이 안되어서 불참이 안된 것에 가깝기는 했다.
  57. [57] 1945~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권 가운데서도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고 1980년대 후반에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공산권에서 폐쇄적인 정책이었다.
  58. [58] 1975~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당초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마감 시한까지 선수단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최종 불참 처리됨.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혜리)의 올림픽 피켓걸 출현이 좌절될 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벌점자들의 대타로 우간다 선수들과 입장한다.
  59. [59] 1979~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이쪽은 당대에도 경제상황이 괜찮았는데도 굳이 불참한 예이다. 다만 다당제 전환 이후로는 대전 엑스포에는 정상적으로 참여했다.(집권정당이 교체된 것은 아니고 집권정당이 교체된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60. [60] 쿠바의 지원으로 1979~1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민주국가였고 여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야당세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나라였기에 참가가 가능했겠지만 콘트라 내전으로 인해서 경제사정이든 뭐든 개판이었기 때문에 불참했다는 것에 가깝다.
  61. [61] 물론 모든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62. [62] 이들 중 북한과 알바니아, 마다가스카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선수단을 파견하게 된다.
  63. [63] 지금이야 어느정도 용인이된다 쳐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권의 반공 성향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적국인 북한의 인공기를 게양하고 또한 북한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 물론 북한은 엄연한 IOC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참가했다면 인공기와 북한 국가 연주는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스포츠는 정치색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은 신성한 의무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실제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 당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했을 때도 북한을 적성 국가로 간주해 수교 자체를 하지 않은 영국의 경기장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었다. 물론 영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부에 양해를 구하긴 했다.
  64. [64] 물론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국가 이미지의 하락을 감수하고서라도 어떻게든 둘러대자면 인공기 게양이나 북한 애국가 연주 봉쇄를 못 할 것은 없었다. 또한 경기장 시설의 기술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면서라도 이를 봉쇄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북한 애국가가 연주되거나 인공기가 게양될 타이밍에 경기장 전체 전력공급을 강제 중단했다가 한 30분 후에 복구한다던지, 아니면 북한 애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방송장치 볼륨을 최저로 하고서는 스피커 고장으로 해명한다던지, 국기가 게양될 때 일부러 올라가다가 북한 인공기만 바닥에 떨어지게끔 고의적으로 고정을 부실하게 하고 직원의 단순 실수로 떠넘긴다던지... 시설 방면이 아니더래도 편파판정을 해서 애초에 메달 순위권 안에 거의 들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북한 선수가 시상대 위에 올라갈 일이 없게 만드는 방법도 있고. 찾아보면 인공기 게양과 북한애국가 연주를 사보타주할 방법은 참 많다. (실제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중에 게양이 되지 않거나 연주가 되지 않고 넘어간 경우도 찾아보면 있긴 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경기일정이 꼬이기 때문에 복구에 일정 이상 시간이 지연되면 그냥 경기속행한다.)
  65. [65]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인공기가 게양되고 북한 국가가 연주된 것은 14년 뒤에 열린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때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30년 뒤인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북한이 참가했다.
  66. [66] 당시 공산권의 중심인 소련은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개혁, 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소간의 물밑 대결은 치열했지만, 공개적으로 1987년 중거리 미사일 감축협정을 체결하는 둥 유례없이 분위기가 훈훈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념논쟁을 이유로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북한을 공산권 국가들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소련이 1988년에 들어서야 참가선언을 한 것도 나름 동맹국인 북한을 배려해서 시간을 끈 것이었다. 게다가 스포츠를 통한 국력과시에 집착하던 소련과 동구권 입장에선 LA에 이어서 2회 연속으로 불참한다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67. [67] 이 문서의 맨 아래쪽, 그리고 NHK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개막식 생방송은 아날로그 HD 시험방송으로 제작되었다.
  68. [68] 스테레오 방식은 Zweikanalton(A2)이다.
  69. [69] 동일 방송국 버전에 강상제와 전세계 TV 중계 타이틀을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 영상. 음질과 화질은 무척 좋지 않다. 이건 강상제 파트가 조금 잘린 버전.
  70. [70] 미국 NBC의 주도로 채택된 서울 올림픽 미국 공식 주제가 휘트니 휴스턴의 'One Moment in time' 뮤직비디오는 서울 올림픽의 장면을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문제의 성화 점화 장면이 초반부에 등장한다.
  71. [71] 이전 버전에는 신은경 아나운서라고 서술되었으나 아니다.
  72. [72] 현재의 인간극장 시간대에 편성되었던 전국 기행프로로, 'KBS 아침뉴스 뒷시간대에 편성되었다. 성격은 현재의 '6시 내고향'과 비슷하다. 이 프로가 폐지되던 시기 즈음에 맞물려 6시 내고향이 오후 6시대에 새로이 편성되었다.
  73. [73] 그리고 우연히도 두 아나운서는 정확히 30년 후, 같은 해에 세상을 뜬다.
  74. [74] 서머타임 적용
  75. [75]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회식은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76. [76] 당시는 주5일제와 52시간 근무제도가 시행되기도 한참 이전이라서, 토요일은 오전 근무를 했다. 따라서 개막식이 늦은 오후나 저녁이었으면 임시공휴일 지정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지만, 얄짤없이 근무시간(+학교 수업시간)인 오전에 개막식이 열리게 되었으므로 별 무리없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었다.
  77. [77] 사실 개막식이 근무시간 후에 열렸다 한들 임시공휴일 지정은 애초부터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 일단 재계가 일 시키려는 그 특유의 욕심을 발동해봤자 상대는 올림픽. 당대 최초이자 최고의 국가적 이벤트를 앞둔 상황에 전국민을 대동단결시켜도 모자랄 판에, 재계가 쓰잘데기 없는 욕심으로 초를 치는 건 당시 중앙정부가 결코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78. [78]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도 지상파의 경우 낮에는 방송이 없었다.
  79. [79] 사실 주간 정파시간대 자체가 특집편성 앞에서는 무력화되었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당시에는 당연히(?) 온갖 특집 프로그램으로 융단폭격을 때렸고, 이외에도 태풍 쎌마호 내습같은 기상특보나 남북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전두환 해외순방 귀국 퍼레이드 등등 의외로 낮에도 방송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낮 방송 종료는 어디까지나 정규편성에 한했던 이야기. 사실 꼭 특집이 아니어도 방송이 가능했다. 당시 스포츠 중계에 한해서는 정파시간대에도 방송이 가능했었다. 올림픽 역시 스포츠 행사니까 특집 타이틀 안달고도 중계가 가능했다. 실제 올림픽 기간 내내 낮 정파 없이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방송이 이뤄졌다. 심지어 정파시간대에는 지금의 EBS인 KBS 제3TV에서도 중계를 했었다.
  80. [80] 동계 올림픽까지 포함하면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마지막.
  81. [81] 종주국인 그리스가 1번
  82. [82]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날인 1981년 9월 30일에 태어나서 굴렁쇠 소년으로 뽑혔다고 한다. 현재 38세. 그 이후 2009년 10월 4일 방영한 해피선데이 1박 2일 시즌1 연평도 1편에 깜짝 출연했었고, 2008년부터 2017년 2월 초까지 모 결혼정보업체 광고 모델로도 고정 출연하는 등, 연기자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에서도 주역으로 출연.
  83. [83] 1986 서울아시안게임 개/폐막식 준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됐다.
  84. [84]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바로 이전 짧게나마 한국 마라톤계를 빛냈던 선수.
  85. [85] 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현 가거도분교)
  86. [86] 아내가 만삭이라 낙도 근무를 할 수 없던 친구를 대신해, 스스로 낙도 근무를 선택했다고 한다.#.
  87. [87] 이후로도 계속 무용계에 종사하며 뮤지컬 배우로도 활동했다.#.
  88. [0:14~0:47] 88.1 경기장 입장에서 넘겨주는 부분까지
  89. [89] 응답하라 1988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되는데, 주인공 성덕선우간다 피켓걸로 참가하고서, "불에 타 죽은 비둘기들을 묻어줘야 한다"고 집으로 가져왔다.
  90. [90] 축구 경기가 열린 광주 무등경기장도 사실상 전면 철거되고, 현재는 아예 야구장으로 바뀌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되었으나, 이쪽은 예산상의 문제로 성화대 주변의 극히 일부를 남겨놓고 구조 변경으로 처리해 만든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는 전면철거가 아니다. 동대문운동장도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명탑 2개가 남아 있으므로 역시나 전면 철거는 아니며, 2018년 현재 대구 시민운동장이 이 전철을 비슷하게 밟고 있는 중이다. 또한 문화재 문제로 인해 태릉 국제 사격장이 철거 예정이다.
  91. [91] 정확히는 1번 국도-356번 지방도-39번 국도를 이용해 당시의 구파발-원당-벽제를 순환하였다. 현재 신도시 개발로 도로의 선형이 많이 바뀌어(특히 구파발역 인근) 당시의 도로와는 많이 다르다.
  92. [92] 건물 입구에 올림픽 볼링 경기를 개최한 기념비가 있다.
  93. [93] 참고로 남자 단체 구기 첫 금메달은 20년 뒤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나온다.
  94. [94]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유럽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별도 개최
  95. [95] 그 동안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연대기: 중공의 탄생과 6.25전쟁 => 도리어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마셜플랜과 동시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 실시와 쿠바사태 => 베트남 전쟁=> 탈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탕트 논의와 미국&소련 세력과 별개인 제 3세계의 출현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대립 => 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등등 상황을 지나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과 관련된 소련의 급진적인 변화와 북한과 중국을 제외한 동구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직전의 변화 시작이 되던 시점이 바로 서울 올림픽의 시점과 맞물리게된다. 이후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북한과 중국, 쿠바를 제외하고 전부 무너지지만 말이다.
  96. [96] NBC는 올림픽이 최초로 국제 중계된 1964 도쿄 올림픽 이래로 IOC에 있어 대회마다 10억달러 이상을 부담하는 최대의 돈줄이다. 이 때문에 서울 올림픽의 경기가 미국에서 보기 좋은 오전에 편성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압력을 행사한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미국 방송사가 올림픽 중계에 나서는 것이 어려울 정도.
  97. [97] 미국에서 개최된 1984, 1996 (하계), 2002(동계) 대회의 공식 주제곡을 작곡하였다. 곡명은 각각 Olympic Fanfare and Theme, Summon the Heroes, Call of the Champions이다.
  98. [98] 다만, 올림픽 개최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년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어느 동유럽의 체육인이 한국 코치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했는데, 며칠 후 갑자기 다시 한 번 식사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당황한 한국 코치가 부랴부랴 부인에게 연락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동유럽 체육인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한국이 헐벗고 못사는 나라인데 일개 체육인의 집이 너무 호화로워서 한국 정부가 선전을 위해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알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99. [99] 특히 주제도 모르고 중화 사상에 찌들어 있는 당시의 중공 그리고 지금의 중국이 2년 전에 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국 중국 수교 이후에 만난 한국인들에게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언급한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100. [100] 사실 이 시기부터 대한민국이 개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서 도약을 위한 변화를 많이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그 동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경제발전에 집중했던 대한민국의 대기오염에 대한 실태와 개선 노력에 국가적으로 나선 계기가 이 올림픽 준비였다. IOC에서 올림픽 하려면 대기오염 문제 개선해라라는 요구사항이 내려왔기도 하고, 이 문제로 북한에서 대남방송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101. [101] 순위로는 미국, 일본, 소련, 독일 순서였다.
  102. [102] 당시 서독은 유럽 2위, 세계 4위[101]의 경제 대국이었는데, 바로 윗 순위인 소련은 몸집만 컸을 뿐 내실이 영 좋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서독이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이었다. 이런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대등하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
  103. [103] 당시의 통일 체코슬로바키아
  104. [104] 여담으로 과거 6.25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평가는 21세기에 들어선 시점에서부터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국가들만큼이나 혹은 그 이하 수준의 경제력과 동시에 전 국토가 초토화 상태에 이르렀을 정도로 매우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랬던 국가가 후에 개도국으로 성장하면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면서 G20에 가입하고 또 세계 경제 순위에서도 순위권에 있는 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에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05. [105] 물론 직접 대한민국에 와본 경험이 없는 일본인들은 2년 전에 이어서 또 다시 TV에 비친 서울과 그 외 대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 감히 견줄 수준이 아닌 빈국으로 여겼는데 말 그대로 격차가 확 줄어버렸으니.
  106. [106] 서울올림픽 이후 도래한 1990년대 대한민국은 마치 7~80년대 일본처럼 그저 미래가 긍정적이던 국가였다. 그만큼 수많은 국민들이 번영을 누렸다고 회자되고 또 이야기되기도 한다.
  107. [107] 이는 분명하게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의 개최는 물론 전두환 정권의 업적으로 여겨진다. 허나 이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다는 의미 즉 이는 세계의 이목을 받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자신들의 폭정에도 한계점을 드러냈다는 뜻을 정권이 이를 후에서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108. [108] 즉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개최될 월드컵과 올림픽에 관련된 국가에 치안과 같은 여러 방면적인 사회적인 문제와 같은 복합적인 상황에 관하여 이를 관심있게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당시 다른 국가들도 이를 중심적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당시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함부로 행동을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즉 자신들 스스로를 묶는 자승자박이라는 형태로 최악의 수로 작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나 만약에 전두환이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계염령을 선포했다면? 분명 이를 국제언론을 통해서 세계 각국에 이에 대한 행태에 관하여 고발되었을 것이고 이와 동시에 국제적인 위신이 후퇴되고 아먄인들이라 불리면서 동시에 '후진국'이라는 프레임이 씌어지는 무지막지한 대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109. [109]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110. [110] 하나회 해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부정부패 척결,
  111. [111] 1987년에 나온 대체역사물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보면 저자인 복거일이 어떻게 서울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
  112. [112] 서독, 일본, 대한민국, 중국이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
  113. [113] 서독은 전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고 일본은 64년 도쿄올림픽 이후로 선진국 진입 그리고 대한민국도 일본과 독일과 같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중국은 90년 후반에 시장 경제체재의 부분적 도입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에 들어서게 된다.
  114. [114] 원 출처: <장정 4: 나의 무직 시절> p309~310.
  115. [115] 원 출처: <김영삼 회고록 3: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p157.
  116. [116]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117. [117] 경제지는 +4면.
  118. [118] 19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발행부수 200만부를 넘어서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과도한 투자를 한데다가 IMF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한겨레와 경향에도 밀리게 되었다.
  119. [119] 이는 과거 시골의 푸세식 => 도시의 현대식 화장실로 격변하는 과정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120. [120] 애석하게도 이 문제는 이후의 올림픽 때도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도 서울올림픽 때와 비슷하게 올림픽을 명분삼아 베이징 도심지와 그 근교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150만명이 넘는 서민들이 당국과 철거용역에 의해서 내쫓겼다. 민주국가들에서 펼쳐진 올림픽이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아서 이후에 치러진 2012 런던 올림픽2016 리우 올림픽 때도 경기장 근처에 있는 빈민촌을 재개발하고 거기서 살던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든지 해야 했고, 심하면 당국과 건설업체에 의해 고용된 철거용역에 의해서 강제로 다른 곳으로 내쫓긴다거나 했다.
  121. [121] 게다가 당시 달동네 터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조차도 서민용이 아니라 중산층 등 가진 자들을 위한 주택이었는데, 당국이 재개발 계획에 10평 미만짜리 소형 아파트까지 추가시킬 시 입주 예정자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투기꾼들이 달동네에 몰려와 불량주택을 사서 세입자를 내쫓고, 건설업체 사주를 받는 재개발조합 임원들까지 달동네 공동체사회까지 침해해가며 가담했다.
  122. [122] 이제 난곡도 2000년대 난곡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여기 살던 빈민들은 아예 서울특별시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23. [123] 그러면서 정작 주공아파트가 지어지고 나서 동일로에 신호등 설치도 안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다라 터졌다.
  124. [124] 출처 : <가짐없는 큰 자유: 빈민의 벗, 제정구의 삶(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저.)> 학고재. 2000. p180.
  125. [125] 여름철이라 실제 음식을 두면 부패해서, 위에서 말한 밀랍 음식모형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26. [126] 현재의 공익근무요원이나 상근예비역에 해당
  127. [127]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편파판정의 수혜를 받은 박시헌 선수는 오히려 이 일로 인해 한국 복싱계에서 매장당했고, 무엇보다 편파판정의 수혜를 입은 선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후의 후배 선수들이 편파판정을 받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128. [128] 육상 인기가 태생부터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서조차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의 남자 100m 결승전은 가장 빨리 매진되었으며 암표가 가장 많이 들끓었던 종목이었다.
  129. [129] 위에도 나오는 당시 소련 팀이 낸 여자 1600미터 계주 신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모른다.
  130. [130] 공소 시효가 끝나서 메달이 박탈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131. [131]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한국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나라여서 벤 존슨이 흑인인 것도 한 이유로 볼수 있다.
  132. [132] 일산신도시분당신도시도 이때 건설이 추진되었고 1991년부터 분양되기 시작했다.
  133. [133] 다만 케이블TV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계유선방송에서 당대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나 비디오 같은 것을 틀어주기는 했다.
  134. [134] 그래서 비디오점이나 만화잡지 파는 서점들이 매출액이 크게 증가했다는 후문이 있다.
  135. [135] UHD의 경우 같은 국가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세계 최초이다.
  136. [136] 참고로 일본에서 아날로그 HD방송을 개시한 시기는 1989년
  137. [137] NHK 공식 홈페이지 50주년 연표에 서울올림픽을 HD로 제공했다고 영어로 적혀있다
  138. [138] 원래는 nhk의 영상을 올린 유튜브가 존재하였으나 저작권 문제로 해당 영상은 삭제되었다. 다만 이후 IOC에서 공식적으로 HD영상을 제공하여 당시 HD화질의 영상을 지금도 볼 수 있다.
  139. [139] 패럴림픽은 서울신탁은행(現 하나은행)이 스폰서였다. 30년 뒤 평창올림픽에서는 우연히도 후원은행이 같은 은행이 되고 말았다.
  140. [140] 당시 해군 의무 복무 때문에 NBA 진출이 늦춰졌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속해 있었다.
  141. [141] 이들의 입국 비자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받았다고 한다.
  142. [142] 단, 전적으로 소련인들의 영사 업무만 진행했을 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소련 접촉은 일체 받지 않았다.
  143. [143] 당시 노태우 당선에 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졌으며 한국 국민이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혼란보다 안정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오늘 보도했다.뉴욕타임즈와 월스트리트 저널은 선거를 지켜본 외국 단체 인사의 말을 인용해서 선거 부정이 있었다는 야당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뉴욕타임즈 신문은 노태우 후보가 두 김씨보다 2백만표 정도의 표차를 보인 사실만으로도 부정선거라는 야당의 비난을 무색케 할 수 있고 특히 두 김씨의 득표를 볼 때 노 후보보다 3백80만표를 앞선 것은 두 김씨의 분열이 패배를 좌초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은 미국에 주요 무역 상대국일 뿐만 아니라 전략적 중요성으로 해서 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따라서 한국의 정치적 안정은 미국에도 중요하다고 강조. 미국무부는 어제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면서 내년 2월에 출범할 새 한국정부와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144. [144] 카메라에 대고 술취한 눈빛으로 욕설을 한다던지, 트랙을 벗어나 이상한 곳으로 걸어간다던지 등등
  145. [145]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부터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서 이어지며, 서울 지하철 2호선, 8호선이 이 도로 지하를 달린다.
  146. [146]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각각 UN에 가입했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477.53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