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한국의 역사 韓國史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7px"

청동기 시대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원삼국 시대

남북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구한말

일제강점기

군정기

분단

삼국 시대

후삼국 시대

고조선

부여

두막루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

조선
총독부

소련군정

북한

한사군

고구려

고구려

옥저

신라

태봉

동예

마한

백제

후백제

미군정

대한민국
1 2 3 4 5 6

변한

가야

신라

신라

진한

신라

우산국

주호

탐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

아! 나의 조국[1][2][3]

1. 개요
2. 관련 자료
2.1. 경향신문 - 실록 민주화운동 (2004. 12. 19. ~ 2005. 1. 12. 연재분)
3. 진행
3.1. 5월 이전
3.2. 항쟁의 서막
3.2.2.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3.3. 6월 10일, 항쟁의 시작
3.5. 항쟁의 진행
3.6.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4. 결과
4.1. 독재정권의 항복
4.2. 의 분열과 군부 정권의 잔재
4.3.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護憲撤廢! 獨裁打倒! 民主爭取!)[4]

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기념 홈페이지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군부독재에 맞서 전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화 운동을 지칭하는 단어로, 6월 항쟁,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10 항쟁[5]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6]

1987년 4월, 전두환은 특별 담화 형식으로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7년 동안 독재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반발을 끌어냈다. 이로 말미암아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된 27년 군부 독재는 끝나고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7]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헌법과 정권의 개혁안을 발표하게 만든 사건으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9차 개정안이 지금까지도 1987년 체제라고 표현될 정도로 한국 정치, 법률 운영의 기초가 되고 있다.

또한 평화적인 시위로 독재자를 쫓아 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이 평가받는 시민항쟁이기도 하다. 시민항쟁이 일어나면 대개 공권력의 폭력 남용에 의한 내란, 쿠데타, 폭동 등의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6월 항쟁은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할지언정, 전반적으로 치안은 양호했다. 당시 취재를 나선 외신 기사들도 이 점에 대해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6월 항쟁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시민들의 힘(People's Power)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소위 '3번째 민주화 열기'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된다.[8][9]

2. 관련 자료

2.1. 경향신문 - 실록 민주화운동 (2004. 12. 19. ~ 2005. 1. 12. 연재분)

3. 진행

3.1. 5월 이전

1986년 인천 5.3 운동10.28 건대항쟁 실패 이후 5공 정권의 엄혹한 민주화세력 탄압으로 민중들은 혹한 속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반전의 계기를 가져온 건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일명 '탁억사건' 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10]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고 책상을 내리쳤더니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망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동아일보.[11][12]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고,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되었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 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 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人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민정당과 신민당 두 당이 제시한 개헌안의 내용은 구체적으로는 매우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은 의원 내각제를 주요한 내용으로 삼은 반면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다. 어째 여야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야권의 기세가 올라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벌어질 경우 대통령 중심제에 의해 가해질 충격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여권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비교적 약한 의원 내각제안을 추진한 것이다. 이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호응하는 이민우 구상이 나오면서 신민당은 대분열 결국 김영삼, 김대중 세력이 일거에 탈당하여 새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3.2. 항쟁의 서막

6·10항쟁 30돌을 맞아 당시 숨은 주역이었던 이부영 전 의원과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대담했다.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

3.2.1. 정의구현사제단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축소·은폐·조작 폭로

2017년 6월 8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이부영, 한재동

그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김승훈 마티아 신부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이 발표된 과정이 매우 극적이었다.[13] 당시 고문치사 사건 주범들은 사건 축소, 은폐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에 대해 억울해하며 감방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이것을 우연히 근처 방에 수감 중이던 재야민주화운동가 이부영[14]이 듣게 되어 교도관에게 문의했더니 "박종철 사건이 은폐조작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흘러나온 것.[15] 이부영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관련 내용을 휴지에 써서 다른 교도관을 통해서 외부에 내보냈고, 이를 받은 김정남 전 수석이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발표하게 된 것이다.[16][17]

여론은 폭발했고, 이에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이때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로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드러누워 집회를 하다 경찰이 체포하려 하자 시민들이 항의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6월 초, 국본은 서울시내에 약 20만 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3.2.2.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

그리고 6월 9일.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천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18] 연세대생 이한열의 후두부(뒤통수)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은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로이터 통신에 사진의뢰를 했는데,[19] 문제의 사진을 받았고 편집국 일부에선 데모를 유발할 위험성이 큰 사진이라며 말렸으나, 이창성 사진부장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해[20] 사진을 키워 신문에 게재했다는 일화가 있다.[21]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정작 악명 높은 보안사령부조차 그를 끌고 가 고문을 할 틈이 없었다. 언론사 간부를 불러 쪼인트 날릴 생각을 하는 와중에 시위대가 계속 불어났기 때문. 동아일보는 6월 10일자에 학우들에게 들려져 병원으로 후송되는 사진이 올라왔고,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정태원 기자의 사진을 본 최병수 작가는 바로 그날 밤 연세대로 달려가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를 담은 목판화를 제작하였고, 이는 보도 다음날 스카프와 손수건 등으로 만들어져 시위 참여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연세대 학생회관에는 목판화를 확대한 대형 걸개그림이 걸렸다. # 이 사진은 군사정권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는 촉매제로 작용했으며, 훗날 AP통신 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쓰러지는 또 한 명의 젊음

한편 연세대학교경영학과 학우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뇌사상태가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예비역 출신부터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운동권에 반감[22]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당시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민주화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1991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시신 탈취 사건과 2016년의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 논란도, 적어도 유족들과 민중총궐기 당사자들에게는 이러한 의도로 비춰지고 있다.

1960년 4.19 혁명 당시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2 모두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이를 기점으로 범국민적 시위로 확산되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결국 역사는 반복되었다.

3.3. 6월 10일, 항쟁의 시작

6월 10일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수일 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경적을 울리는 모든 차량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잡아넣겠다"고 뉴스를 통해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또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타넘어 어찌어찌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일담에 보면 이러한 조치 때문에 도리어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회사는 일찍 끝났는데(조기퇴근), 집은 못 가고(지하철 무정차), 서머타임으로 인해 날은 밝으니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세할 환경이 갖춰진 것. 당시 시대상을 그린 만화 <100℃>에서는 조기 퇴근한 직장인들이 "이거 시위에 참가하라는 국가의 명령이겠지?"하고 집회를 막으려고 애쓰는 정부의 멍청한 대응을 비웃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6월 10일 저녁 6시, 서울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날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땡전뉴스였던 당시 사정상 제1헤드라인이 민정당 전당대회 소식이고 이를 10분 넘게 보도하고 있다. 시위 소식은 3~4꼭지 뒤에 &quot;서울 시내 몇몇 곳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큰 충돌 없이 끝났습니다.&quot; 라고 언급한다.

한 편, 이 때 제16회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가 한창 진행되었는데 이날 오후에 태국헝가리 축구대표팀 간의 경기가 이어지다가 이어서 경남 마산에서 열린 한국 A팀과 이집트 간의 경기가 치러졌다. 경기 도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 연기가 경기장으로 날아들었다. 당시 최루탄에 익숙했던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은 큰 동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집트 선수 중 다수가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 사이에 한국선수들이 골을 넣었기는 했지만 이집트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이상을 보이자 한국 선수들과 관중들도 웅성웅성 거렸고 결국 주심은 해당 경기를 재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몰수무를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시켰고, 이 장면은 KBS 1TV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생중계되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경기가 끝나자 경기 전에 강제로 자기 돈으로 표를 사야 했던 마산 관중들이 표 환불을 요구하며 주최 측에 대거 항의하다가, 표 환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대에 합세하며 심야시간까지 시위를 벌였고(관련 포스팅). 이 소식은 다음 날에 주요언론들을 통해 보도되면서 대중들에게 시위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널리 알린 셈이 되었던 것이었다.

3.4. 명동성당 항쟁

명동성당에는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수녀들이 나와서 앞에 설 것이고, 그 앞에는 또 신부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맨 앞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밟고 신부들을 밟고 수녀들까지 밟아야 학생들과 만날 것이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23]에서 주교좌 성당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24]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명동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 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다고 한다. 이게 현실이 되었다면? 88올림픽은 그대로… 결국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게 되었다.[25][26][27]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여담으로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인권 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양복 정장을 착용한 변호사들의 복장을 경찰들이 정부 관료로 오인하여 처음에는 달리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허나 곧 상황을 파악한 경찰들은 재빠르게 접근을 막아세웠고, 변호사들의 접근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 나오는 이야기.

3.5. 항쟁의 진행

서울이 심합니다. 광주는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6월 13일, 대통령 주재 관계 기간 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

6월 11, 12일은 데모가 가속화하다가 13일은 절반으로 감소되었습니다. 월요일(15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데모에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습니다.

6월 14일, 대통령 주재 비상대책회의. 내무장관 고건[28]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로 일순 긴장했지만 13일~14일의 주말이 찾아오면서 시위가 소강 상태에 이르렀고 가장 우려한 광주가 첫 날을 빼고[29] 비교적 조용함에 따라 청와대는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 자신감과 내각 내 온건파의 주장으로 치안 당국은 명동성당 농성자들에게 성당 농성을 중단하면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무사 귀가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며, 농성자들은 찬반 투표 끝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치안 당국의 약속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판이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주말 시위가 소강 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다시 거리로 몰려왔다. 특히 지역의 주요 대학가들은 일제히 6월 15일을 신호탄으로 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고건이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신경썼던 광주도 마찬가지였다. 애시당초 광주 대학가가 조용했던 이유는 전남대는 학교 축제로, 조선대는 학내 민주화 문제로 6월 10일 직후 시위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이 끝나자마자 전남대조선대는 항쟁 첫 주에 적극 가담하지 못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가장 격렬하게 항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도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본 학생 시민들은 정권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인식하며 투쟁에 불을 붙였다.

이한열 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이날 저녁 청와대 안가에서는 심야 대책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 국방부 장관, 각 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 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각하(전두환)는 1987년 6월 시위대가 부산 거리를 가득 메우자 군대를 투입해 진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국가가 뒤집힐 수 있는 결정[30]이었습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면서 전두환을 설득하여 즉각적인 군 투입은 막았다. # 6월 19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계엄령으로 군을 투입하든지, 아니면 물러서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옆 회의실에서 군 고위회의가 열렸다. 이는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대 파견 계획을 세밀히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때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하면서 "이것은 계엄령이 아니라 계엄령에 플러스 알파를 하는 비상 조치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 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다 준비가 되어 있지"라고 했다. 이에 따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 진압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이 났으며 수도권 외곽에 주둔 중이던 충정부대[31]들을 서울 외곽 지역에 집결시켰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 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 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 진압으로 소요 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 보고를 하였다. 또다시 5.18과 같은 대숙청과 '광주의 살육'이 눈앞에 있었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는 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 당시 경찰력의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지방의 시위는 서울과 달리 과격성을 띠고 있었다.

몇몇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상술했듯이 6월 10일 한국 A팀과 이집트 간의 축구 경기가 최루탄 탓에 중단되고 표 환불을 요구하던 관중들이 표 환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거 시위에 합세하여 1,500명이었던 시위대가 3만 5,000명으로 대거 불어났으며 양덕, 자산동[32] 2개 파출소가 전소되었고 민정당 국회의원 우병규의 사무실이 습격받아 전두환과 우병규의 사진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되었다.[33]
또, 순찰차나 전경 버스 같은 경찰 차량, 안기부 직원의 차량, KBS와 MBC의 보도 차량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습격받아 전소되었으나, 경찰력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에 급급해야 했다.
  • 6월 13일 부산에서는 전방입소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부경대, 경성대 학생 천여 명이 부산역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이고,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합실에 있던 시민들이 합세해 1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민들은 인근 상점에서 쭈쭈바를 수십 개씩 사서 시위대 위로 던지며 응원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으로 흩어져 남포동과 서면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 6월 15일, 충남 대전(현 대전광역시)에서는 충남대, 목원대, 한남대, 배재대, 대전대 등에서 학생들이 일제히 교문 봉쇄선 돌파를 시도했고, 병력 대부분을 서울에 차출당한 충남 경찰은 모든 학교에서 방어선이 돌파당했다. 쏟아져나온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시민들이 대전 도심을 가득 메웠고, 이에 대전 치안 당국이 타협안을 제시해 대전역까지의 가두 시위를 보장하고 진압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다.# 다른 때같았으면 협상에 나선 치안 당국 책임자가 온건하다며 처벌받을 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 6월 16일, 부산에서는 부산대생 5천여 명 등 9개 대학생 1만여 명이 비상 학생 총회를 개최하고 시내에서 연합 시위를 벌였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시위대 5천여 명은 충무동 시위대와 합세하면서 남포동 거리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고, 시위대는 금방 1만여 명을 넘어섰다. 대중 집회를 마친 남포동 시위대는 인근 시청 옆 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경찰 저지선까지 이동한 시위대는 연좌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화적 연좌 시위도 아랑곳 않고 몇 차례 경고 방송과 함께 곧바로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진격했다. 흩어진 시위대는 국제 시장과 대청동, 보수동 등지로 나뉘어 시위에 들어갔다. 대청동 사거리에서 폭력 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던 소규모 시위대는 경찰 진압에 밀려 영선 고개 쪽으로 피하다가 가톨릭 센터 앞에서 멈췄다. 이들은 인근 공사장에서 가져온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따위로 바리케이트를 쌓았다. 이윽고 몰려온 경찰들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투석전이 벌어졌다.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은 집요하게 해산을 시도했고,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이 전방위적으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면서 시위대는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톨릭센터와 접촉했고, 심각성을 인지한 가톨릭센터가 비상 시에 센터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해 피신하고, 가톨릭센터를 항쟁의 중심지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 6월 16일, 경남 진주시에서도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 4곳이 공격받아 불탔고 전경 병력 주둔지였던 한국도로공사 진주지사가 공격받았으며 남해 고속도로를 점거했다.
  • 6월 17일, 전날에 이어 시위를 이어가던 진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 고속도로로 재차 진입, 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고 폭파 협박을 하며 진주시 진입을 시도하며 정촌 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초유의 사태에 치안 당국도 경악하여 경찰 특공대까지 투입,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키고 LP차를 탈환했다. 그날 밤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경전선 철도 차량을 점거하여 철도 운행도 일시 중단되었다. #
  • 6월 17일, 경남 마산에서는 10일에 이은 대규모 시위가 이어져서 산호 1파출소, 의창군청[34], 노동부 마산사무소(현 고용노동부 창원지청 마산고용센터)가 공격받았고 방범 초소가 전소되었다.
  • 6월 18일, 부산에선 시위대가 가톨릭 센터를 거점으로 대청동, 충무동, 남포동 일대를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장악하고 인근 공사장의 철근, 벽돌 등으로 격렬히 대항했다. 이들은 밤이 되면서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호헌철폐' 등지의 4.4조 음율의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범일 및 좌천동 고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러나 좌천동 고가 경찰 저지선에서 최루탄이 무차별 난사되는 중에 회사원 이태춘 씨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져 인근 봉생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다.[35] 이 소식에 분노한 시민들은 저지선을 뚫어 KBS부산방송총국을 습격하여 화염병을 던져 집기 일부를 파손했으며 밤 사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렸다.[36]
  • 6월 18일, 강원도 춘천시에서는 학생 및 시민 약 1만 여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벌이며 주요 관공서와 파출소, 방송국 등을 습격했고, 시위가 이어지던 19일 새벽 1시경에는 일시적으로 강원도청을 점거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몇몇 전경 부대는 접전 중에 진압장비 다수를 뺏겨 그대로 시위대가 불태웠고, 경찰 차량 몇 대로 전소되었다.#
  • 6월 19일, 부산에서는 10개 대학 및 3개의 전문대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나와 기동대들을 무장 해제시키고 진압 장비를 탈취했으며, 초량 파출소, 남포 1, 2, 3, 파출소, 보수 1 파출소, 부산진 파출소 등에 방화하고 집기를 파손했다.
  • 6월 19일, 대전시에서는 과격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가 휴식 중인 전의경 대열을 덮쳐 박동진 일경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2명의 대원이 부상을 입었다.
  • 6월 19일, 충북 청주시에서는 충북대생 200여 명으로 시작된 시위가, 최루탄 파편에 유아가 맞아 다치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총 1만 명이 넘는 시위대로 크게 불어났다. 이 기세를 타고 청주시청, 민정당 충북당사, 사직 경찰서, KBS 청주총국, 충청일보사 등에 화염병 및 투석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청주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이니 인구의 2.5%가 시위에 나선 것이다.
  • 6월 19일, 충북 충주시에서는 시위대 1천 여명이 가두 시위에 나서며 KBS 충주방송국과 민정당사, 신민당사[37], 전신국, 용암 파출소 등을 공격했다. 충북 경찰 역시 다수 병력이 서울로 차출되고 남은 전력 중 다수가 청주에 결집한 상황이어서 고작 1천여 명에게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결국 옆동네인 제천에서 급히 병력을 지원받아 시위대를 해산했다.#
  • 6월 20일, 19일에 이어 청주시에서는 연이틀 연속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KBS 차량을 불태우고 석교 파출소를 함락(!)하고 영운파출소를 전소시켰다. 21일에도 다시 시위에 나서서 3일 연속으로 시내로 나아갔고 19일 공격한 KBS 및 충청일보사를 다시 공격했으며 이후 전경들에 밀려 퇴각하는 와중에도 사창 파출소를 공격해 불태웠다.#
  • 6월 21일, 부산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806명이 연행되었다. 이 시기에 부상자가 속출해 부산대 의대·치대, 동아대 의대, 고신대 의대 4학년생을 중심으로 진료반을 구성해 남포동 국도극장 앞에 고정 진료소를 설치했고, 이동 진료반도 구성했다. 제약사에서는 약품을 트럭 채로 실어 날라 주기도 했다.
  • 6월 26일 경기도 안양시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사와 안양 파출소가 공격받아 불에 탔고, 민정당 안양지구당도 마찬가지로 전소되었다. 노동부 안양출장소(현 고용노동부 안양 지청)도 사측 편만 든다는 노동자들의 분노가 시위에 담겨지면서 같이 공격받아 불타올랐다. 그리고 안양 경찰은 패퇴했다.

6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치안력의 한계는 명백해졌다. 경찰들은 지방에서 공세적 진압을 사실상 포기하고 행정기관 등을 중심으로 한 거점 방어에 치중해야 했으며 그조차도 한계에 다가오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급받은 최루탄이 바닥나서 전경들이 시위대와 투석전으로 맞대응하는 상황까지 내몰렸고, 각지에서 경찰 부대가 시위대에 압도되어 퇴각하거나 얌전히 항복한 뒤 무장을 해제당하고 쫓겨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위가 워낙 대규모에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보니 지방의 시위 진압 부대들은 어느 한 도시에 머물지 못하고 열심히 버스타고 돌아다니며 이곳 막고 다시 이동해서 저곳 막는 등 땜방을 하고 있었다. 지역마다 민정당사, 도청 및 시군청, KBS 방송국, 파출소 등은 제1 공격 대상이 되어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안 그래도 6월 13일 고건 내무장관은 전두환에게 서울의 시위는 현재 치안 전력으로 진압 가능하지만 시민들이 경찰이 아닌 시위대에 호응, 동조 및 가담하면서 경찰들의 사기가 매우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그리고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들의 체력도,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져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루탄이 바닥나고 있었다. 경악한 당국은 공장을 풀가동했지만 생산량은 소모량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최루탄까지 바닥난다면, 체력과 사기까지 바닥인 경찰로는 도저히 시위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통해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6월 17일, 작전명령 제 87-4호가 의한 병력동원 계획이 정식 수립되었다. 비상 계엄령 선포 후, 후방을 담당하는 2군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의 위수군단 군단장이 지역별 계엄 사령관을 맡으며 부산경남지구와 충남북지구를 특히 핵심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또, 전방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고 특전여단 6개와 해병연대 2개, 그리고 각 군단 직할대인 특공연대 4개를 동원해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 마산, 대전, 대구 등 시위가 거센 곳에 집중 배치하기로 하였다. 육참총장 박희도는 철도청과 병력 동원을 위한 열차 수송 계획의 협의까지 마친 상태였다.

무력 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되었으며 시위 지도부는 유혈 사태에 대비하여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3.6. 미국의 경고, 군부의 반대

미국의 정계와 여론도 결코 전두환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제3세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일이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였고, 군부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것을 좋게 볼 리 없었다.

미국 입장에서 1980년의 5.17 쿠데타와 뒤이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때에는 한반도 안보상황에다가 자국의 여러 이슈로 침묵했다. 당장 1980년 내내 미국 외교가와 정계의 최대관심사는 이란 이슬람 혁명과 그 여파로 일어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어서 백악관이건 국무부건 한국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론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의 여론이나 언론은 외교관을 포함한 자국민들이 대거 인질로 잡힌 테헤란에 관심을 기울였지, 자국민의 안전과 무관계한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현지시각 1980년 5월 18일(한국시각 5월 19일) 세인트 헬렌스 화산이 대분화를 일으켜서 미국의 여론은 더더욱 한국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1987년 6월은 명백히 상황이 달랐다. 일단 미소 냉전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많이 완화된 상태였고, 당시 기준으로 미국의 이익이나 미국인의 안전에 위협이 초래되는 곳이 없었다. 이란-이라크 전쟁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고, 더 나아가 우방국인 필리핀에도 1986년에 민주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80년과 달리 본격적으로 한국의 정치상황에 관심을 두고 적극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 필리핀 민주혁명을 계기로 레이건독트린을 수정해 반공친미 독재자와도 결별하겠다고 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한국은 차기 하계 올림픽 개최국이었던지라 수많은 외신 기자들이 체류 중이었다. 이들이 타신한 한국의 상황은 6월 10일 이후로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유수의 신문사들의 1면을 장식했고 미국민들은 한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받아보게 되었으며 이는 그대로 미국의 여론으로 연결되었다. 6월 16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에 한국 민주화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24일 하원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의회와 별개로 행정부도 움직이고 있었다. 6월 17일, CIA 한국지부장 존 스타인이 YS의 최측근 최형우와 접촉했다. 최형우는 이 자리에서 이게 다 전두환의 후견인 노릇을 한 미국 탓이라며 만약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된다면 YS와 자신은 광화문 앞에서 분신자살하겠다고 선언했다. 최형우 말고도 다방면을 통해 한국 주요인사와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한 CIA는 군 출동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이를 주한미국대사관 및 본국에 보고한다.

워싱턴의 대응도 이에 동조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즉시 한국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하여 군 투입을 막고자 하였다. 이때 특사 후보로 여러 명이 거론되었는데 레이건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를 특사 후보로 점찍었다고 한다. 미국의 2인자라는 강력한 상징성에다가, 부시 부통령이 닉슨 행정부에서 UN 대사와 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 포드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낸 이력이 있는 외교/정보통이기도 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주미 한국대사 김경원은 국무부 등을 통해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전두환 정권의 미국 대사라는 입장에서 무작정 전두환을 옹호할 수도, 그렇다고 미국의 대응에 구경만 할 수 없던 그는 "전두환의 성격상 특사를 보내면 오히려 성질만 돋구게 된다"며 경고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보내달라고 읍소했다. 최종적으로 백악관은 그의 읍소를 받아들여 특사 파견대신 대통령 친서 전달로 격을 낮추게 된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정작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진 않았다. 릴리 대사는 지방 문화원 순시[38] 중 대통령 친서를 받았다는 연락에 급히 서울로 귀환, 바로 청와대를 방문하여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고 만일 평화적으로 정권이 이양되면 전두환의 방미를 주선하겠다고 전두환에게 제의해 전두환의 마음을 돌렸다. 이때 전두환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인사는, 만약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를 투입한다면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이 그러한 것처럼 일부 지휘관들이 쿠데타를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한 측근의 조언과 레이건의 친서가 결정적으로 전두환의 마음을 돌렸다고 증언했다.

6월 20일 오후에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하여 전두환에게 미국 국무부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계엄을 선포하면 한·미 동맹이 훼손될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39] 이건 또다시 군부대를 동원해서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면 적어도 전두환과 미국간의 관계는 끝장난다는 뜻이다. 게다가 미국의 정권 지지 철회 효과는 단순히 정권의 상징적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군부 일부가 5공 정부 전복 쿠데타를 벌일 위험성을 급격히 증가시킨다. 당장 군 내부에서 전두환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는 후일의 하나회 숙청과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후술할 민병돈의 회고와, 10.26 사태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박정희 정권과 미국 사이의 심각한 마찰이 꼽힌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결국 전두환은 군을 투입해 봐야 미국의 지지는 없고, 오히려 군대가 자기에게 총을 겨눌 것이라 우려해야 할 상황이었고 군투입 명령을 철회하게 된다.

21일에는 게스틴 시거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한국문제에 군부가 개입하는 건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고, 23일에는 급히 한국을 방문하고 이틀 뒤에 돌아갔다. 이때 시거는 25일 한국을 떠나기 전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선포 반대의 뜻을 분명히 전했다."고 전했다.

또한 군 내부에서도 시위 진압에 대해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기에 작정하고 진압을 명하면 오히려 그 군인들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청와대로 쳐들어갔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전두환이 믿고 있던 군부조차 무력 진압에 회의적이었는데, 군의 주축에 해당하는 야전 지휘관들은 당연히 무력진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소장 ~ 중장급 실전부대 지휘관들 또한 같은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병력투입에 찬성하고 있던 일부 대장급 지휘관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에서 하나회 핵심이며 5월까지 내무장관이었던 정호용과 인터뷰했는데,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부대가 시위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당시 민정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 고명승 보안사령관민병돈 특전사령관이었다. 둘은 육사 15기로 해당 기수 하나회의 대표주자였으며, 고명승은 12.12 당시 청와대 경호실 소속에서 쿠데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런 둘이 전두환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민병돈은 유사시 예하 부대의 진압 동원에 반대하겠다는 뜻을 고명승에게 밝혔고, 고명승은 이 의견을 전두환에게 전달하였다. 보안사와 특전사는 12.12 당시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는 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들로, 전두환으로선 상당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40] 12.12 군사반란 당시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보안사도 보안사지만 실병력들을 동원했던 소장, 준장급 지휘관들의 역할이 컸다. 당장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9사단 병력들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기에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항쟁에는 이 실질 병력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지휘관들이 선봉에서 반대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국이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기에 미국의 관할 밖에 있는 특전여단들이 진압작전의 핵심이었으나 특전사령관부터가 반대하고 나섰으니 대략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87년 당시에는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부가 쉽게 넘어간 것을 교훈삼아 707특임대가 특전사령부 영내에 주둔중이었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을 쉽게 제거할 수도 없었다.

당장 전두환의 측근들조차 대놓고 직선제를 수용하라고 권할 정도였으며, 전두환 본인이 생각보다 의외로 쉽게 직선제를 수용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의 군부개입 포기 배경엔 올림픽이 얼마 안 남았다는 현실적 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 증거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역시 만일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난다면 올림픽 개최지를 다른 곳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거론했다.

4. 결과

4.1. 독재정권의 항복

1987년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 행렬.[41]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먼저 민정당은 6월 21일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인 22일에 전두환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김영삼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틀에 걸쳐 협상을 조율한 끝에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의가 성사되었지만, 김영삼이 요구한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전두환이 거부해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한국국민당 총재 이만섭과의 회담도 이루어졌는데, 이때 이만섭은 "깨끗이 직선을 해서 국민 심판을 받도록 하시지요. 그래서 동교동, 상도동 머리 처박고 싸우게 하고 이쪽은 정정당당하게 물가 안정, 올림픽 가지고 심판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한편 노태우와도 이틀 전에 만나 직선제로 하자고 설득을 했다. 25일에는 김대중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드디어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 것이다. 6월 항쟁의 대미는 7월 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이때 100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는데 이 장례식 참가 인원수는 정부 수립 이래 역대 집회 중 최고였다.[42]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의 군중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의 완전 퇴진을 위해 전민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본 지도부도, 서대협도 백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군중들이 흩어져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 데에는 대학교를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때마침 낮이 가장 긴 6월인데다 서머타임 시행으로 저녁 9시까지도 햇빛은 쨍쨍하고, 시위가 진행되는 서울 도심 한복판(특히 서울 지하철 2호선)은 지하철 운행을 중단 혹은 무정차 통과해 시위 참여의 좋은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강남아파트촌까지 소등 형식으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음식점 주인들과 아줌마들은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을 위해 김밥을 싸주며 시위에 박차를 가하였고, 넥타이 부대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시위를 막고 있는 전경들에게 장미꽃을 꽂아주었다.[43] 남녀노소와 지역과 빈부 격차를 떠나 거국적인 여론이 흔들리고 있었다.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담화가 발표된 직후 소공동 가화다방에서 주인이 직접 내걸었던 무료영업 메시지.
당시 국민들이 가졌던 환희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이 6월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제6공화국으로 개헌된다.

6월 항쟁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44]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 현재까지도 한국은 제6공화국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87년의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앞선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의 경우 4.19 혁명의 배경으로 50년대 말 원조 감소로 인한 경제의 혼란이, 박정희 - 전두환 정권 교체기 부마민주항쟁서울의 봄, 5.18 민주화운동 등의 배경으로 제2차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의 위기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은 이미 다각적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경제적인 변화가 정치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에서도 실증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의 경우, 3저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 앞서 다룬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4.2. 의 분열과 군부 정권의 잔재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하여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다.


이랬던 그들이[45]


이렇게 돌아섰다.[46]

역대 선거정보 시스템에 의하면 1987년 대선 결과

  • 노태우 (8,282,738표, 민주정의당): 36.6%
  • 김영삼 (6,337,581표, 통일민주당): 28.0%
  • 김대중 (6,113,375표, 평화민주당): 27.0%
  • 김종필 (1,823,067표, 신민주공화당): 8.1%
  • 신정일 (46,650표, 한주의통일한국당): 0.2%
  • 홍숙자 (사회민주당), 김선적 (일체민주당), 백기완 (무소속): 중도 사퇴

야당 후보였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평화민주당 김대중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인한 북풍으로 인해 야권이 축소되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하나회 인사에 의한 정치는 5년 동안 더 지속되었다. 다만 이러한 배경[47]으로 당선된 노태우의 득표율은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저였으며 당선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정권의 색채는 계속 유지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으로 지칭하는 의견도 있다. 밥상은 국민들이 잘 차려주었는데 정작 잘 떠먹어야할 사람들이 서로 맛있는 반찬을 먼저 먹으려고 싸웠다가 정작 먹어선 안 될 사람이 먹어버린 격이다.

그러나 이미 크게 치솟은 개혁의 물결을 묵살할 수는 없었으므로 민주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 붕괴에 의한 공산권과의 수교 등(이른바 북방외교)은 활발히 진행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1988 서울 올림픽전두환이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백담사에 칩거한다든가, 5공 청문회가 열린다든가 하는 기존 정권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상황도 계속해서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1987년 선거는 지역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첫 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강원, 인천, 경기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남과 부산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과 전북, 광주, 서울에서 김종필 후보는 충남[48]에서 각각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이용한 선거의 기원은 어디까지 잡겠다고 말하는 데도 다양한 논의가 있을 정도로 60년대 후반 혹은 7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나타나지만 각 후보자들의 연고지와 그 인근에 다득표지가 집중된 것이 1987년 선거에서부터 유독 눈에 띄었으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과 개헌, 대선 등을 통해 확립된 각 정당과 정파의 합종연횡, 정치 체제,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구도, 대중에게 각인된 정치 의식과 사회 의식, 세대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 등을 통틀어 흔히들 '87년 체제'라 칭한다. 이 '87년 체제'는 비단 정치 구도를 칭하는 범주를 벗어나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와 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4.3. 과거사 청산과 민주화의 재조명

6월 항쟁을 계기로 과거사 청산운동, 과거사 진상규명을 비롯해 오랜 세월 동안 금기시 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과 헌법 정신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헌법재판소의 탄생 등이 이뤄졌지만 이는 정치적 민주화에 한정된 것이었고 경제적[49], 사회적 민주화에까진 이르지 못했다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진보진영에서는 그런 시각에서 1987년 체제의 한계를 논하는 여러 논의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항쟁으로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한국 현실에서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치적 민주화였다.

여하간 6월 항쟁이 민주화를 이룩한 결정적 사건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노무현문재인이 각각 20주년, 30주년 기념사에서 대통령의 자격으로 6월 항쟁의 의의에 대해서 연설을 한 바 있다.

5. 기타

6월 항쟁 당시 친정부 어용, 왜곡언론이라는 이유로 경향신문 뭉치가 서울역 앞에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의 기준이다. 이후 신문사의 운영주체[50]가 바뀌면서 성향이 바뀐 사례.

6월 10일에 있었던 민정당 전당대회는 호헌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는 사실상 다음 대통령을 지명하는 자리였고, 이때 노태우가 지명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막간 공연을 하였던 곳이 MBC였다. 당시 MBC 소속 인기 코미디언 김병조가 원고에 쓰여있던 '민정당은 국민에게 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을 주는 정당'이란 글을 그대로 읽었다. 이 표현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은 하늘을 찔러서 그는 이후 사실상 연예인 생명이 끊어지게 된다.

이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필두로 한 각종 노래패들과 그들이 만든 민중가요가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사계 같은 곡은 지금도 유명하다. 안치환 등의 가수는 6월 항쟁을 기반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천안문 6.4 항쟁을 이끌었던 3대 학생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인 외르케슈 될레트(Uerkesh Davlet, 중국명 우얼카이시(吾尔开希))는 6월 항쟁을 모델로 삼았다고 밝혔다. 87년 6월 중국 중앙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의 시위 모습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중계하듯 보도를 했는데 이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지방에서는 왜곡보도로 인해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진 않았지만, 소문은 계속 들려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큰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한다. "6.29 직전에는 '우리들도 뭔가 해야 되지 않느냐'는 학생들의 이야기도 있었다"고 당시 지방 거주 고등학생들은 회상하고 있다.

6월 항쟁 기간 중에도 코리아컵 축구대회가 취소되거나 프로야구 시즌이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여럿 있는데 상기한대로 마산에서의 시위가 있고 부산에서도 6월 12일 한국과 미국간 축구경기 도중에 최루탄이 구덕축구장에 최루탄이 난사되어 30분간 경기가 중단되고 관중의 절반이 빠져나오면서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고, 6월 14일에 롯데와 해태와가 열리는 와중에 대학생들이 구장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경기가 끝날때즈음에 경기장안에서도 어김없이 독재타도 구호가 나오자 질겁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강제해산하는 일이 벌어졌기도 했다.

6월 항쟁을 다룬 노래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부른 '유월의 노래'가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오직 맨주먹

피눈물로 동지를 불렀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나된 소리

민주와 해방의 나라 이뤘다.

아 우리들의 수난 우리들의 투쟁

우리들의 사랑 우리의 나라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손 맞잡은 우리 전진하는 우리

이 세상의 주인은 너와 나

투쟁하는 우리 사랑하는 우리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아 해방 통일의 우리 되살아오는 유월에

유월의 노래 #듣기

6. 대중매체에서

이걸 다룬 만화로는 최규석의 100℃가 있다. 물이 99℃까지는 온도가 올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100℃가 되면 기체가 되는 것처럼 6월 항쟁을 그때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계속 벌어지다가 임계점에 이른 것을 100℃에 비유한 제목(만화 내용에 나온다. 링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만화를 볼 수 있다).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다루지만 전개가 빨라진 후반부에 나와서인지 비교적 간략하게 나온 편이다.[51] 공화국 시리즈제6공화국의 제작이 실현된다면 초반부에 비중있게 다룰 것으로 보인다.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 6월 항쟁을 바탕으로 한 대체역사 캠페인이 등장한다. 초기는 역사와 동일하지만 6월항쟁 중반부터 이때를 적화통일의 기회로 본 김일성이 간첩을 투입, 대규모 혼란을 유발시킨다. 전두환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만 결국 1980년 광주 때처럼 군대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생기게 된다. 이를 틈타 북한은 남침을 개시한다. 사회적 혼란 때문에 북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국군과 주한미군은 부산 근방까지 밀리게 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 미군의 증원을 기다린다.

대체역사소설 <10월의 폭풍>은 6월 항쟁의 끝무렵 김영삼을 모델로 한 야당 지도자가 암살당하면서 다시 시위가 불이 붙어 정국이 혼란해지고 정부의 진압도 과격해지는 가운데, 군 일각에서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제5공화국을 종식시키면서 전두환은 스위스로 망명하고, 쿠데타 세력이 새로운 군사정권을 수립한다는 가정으로 전개된다. 이 군사정권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쿠데타에 반대해 서울올림픽을 보이콧 하려던 움직임도 달래고, 오히려 올림픽을 성공리에 개최한 후 1990년대 초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와 김대중이 모델인 야당 지도자를 둘러싼 암살 음모가 소설의 본격적인 배경이다.

2017년 12월에 개봉한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이희준, 김태리 주연의 영화 1987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알려지는 과정과 6월 항쟁의 발발과정을 다룬다.


  1. [1] 보도사진연감 1988년판에는 "쏘지 마시오"라는 제목으로 써져 있다.
  2. [2]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 고명진 기자는 훗날 '흔들리는 나의 조국'을 보았다고 술회했으며, 셔터를 눌렀을 때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평생의 특종이 될 것을 셔터 누르는 순간에 직감했다고. 이 사진은 1999년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개최되었던 "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 외치며 뛰어가는 장면이다. 참고로 이 사진에서 뛰어가는 시민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뒤에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는 시민 2명이 누구였는지는 한겨레신문에서 찾았지만, 정작 웃옷을 벗고 뛰어가는 주인공은 많은 언론사들과 기자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음에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간혹 위 사진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사진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의 대표 사진으로는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유명하다.
  3. [3] 참고로 이 동네(문현로터리)는 반 5공 시위의 단골 장소여서, 부산 시민들끼리는 이 동네 이름 전포동을 두고 '전두환도 포기한 동네라서 전포동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4. [4] 해석하자면 '4.13 호헌조치를 철폐하고,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라는 의미로, 당시 가장 대중적으로 등장했던 구호이다. 신문에 음조차 달리지 않은 한자가 헤드라인에 빈번이 실렸을 정도로 한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시절이라, 당시 시위 사진을 보면 한자로 적힌 경우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5. [5] 항쟁당시의 날짜인 6월 10일
  6. [6]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은 "6월 민주항쟁"이다.
  7. [7] '제도적인'이라는 말이 붙는 까닭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노태우 정부가 사실상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과 마찬가지로 군부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노태우 본인을 포함해 노태우 정권 내내 여전히 정(政)·관(官)·군(軍)에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이 실세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해보자. 또한 노태우 정권은 1991년 대한민국 민주화 시위(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의 유혈 진압, 방송관계법 날치기 통과 등의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행동도 행하였다. 그래서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부의 시작은 1961년부터 시작된 총 32년간의 군부독재의 종식과 노태우가 퇴임하고 하나회를 완전히 쓸어버린(?) 김영삼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으로 본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부터 어떻게 민주주의로 나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전환(transition)의 문제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고 질적으로 향상시킬 것인가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공고화(consolidation)의 문제로 민주주의 담론이 전환된다.
  8. [8] 시기상으로는 6월 항쟁보다 앞선 시대이긴 하지만,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이 이 범주 내에 들어갈 수 있으며, 6월 항쟁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던 필리핀대만, 태국, 중남미, 동유럽남아공의 민주화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된다.
  9. [9] 참고로 첫 번째는 미국 등에서 일어난 전체주의 왕조로부터의 독립, 2번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에 일어난 식민지의 식민모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리고 4번째 민주화 열기로 2010년대 초 '아랍의 봄'을 들기는 하나, 현 시대의 사건이라 섣불리 판단을 내리는 것은 힘들거니와 아랍의 봄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이 매우 막장스럽게 전개되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기가 급작스럽게 사그라들어 '4번째 민주화 열기'라고 정식적으로 칭하기엔 매우 어렵다.
  10. [10] 중앙일보, 경찰조사 받던 서울大生 숨져, 1987년 1월 16일
  11. [11] 이와 관련된 고바우 영감 만화 일화가 있다. 당시 정부에서 "박종철 군에게 아무런 고문도 가하지 않았는데 쇼크사했다."라고 발표하자 고바우 영감이 "그럼 왜 온 몸이 멍투성이였소?"라는 질문에 "아무튼 쇼크사했다."라고 반복하자. 갑자기 고바우 영감이 "억!"하고 안색이 파래지더니 "내 심장도 이상해진다."라고 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원고로 냈는데 이게 정부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고바우 영감이 한 질문 중 "왜 온 몸이 멍투성이었느냐"란 대목이 걸렸던 것. 결국 신문에는 "그럼 왜…?"라는 것으로 대신 실린다.
  12. [12] 조중동 중 하나인 그 동아일보 맞다. 물론 (따지고 들어가면 이래저래 복잡하겠지만) 가장 의구심이 강했던 사망 원인에 대한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니 이것만으로 정치적인 어떠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당시의 동아일보는 親 김대중 신문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야당색이 강했다. 그러나 그래봐야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6대 중앙일간지 중에서 비교적 야당 쪽에도 지면을 할애해서 유연하게 써주는 정도였지 지금의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이 확실한 진보언론은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13. [13] 교도소의 이부영에게서 사건 진상을 전달 받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 하여금 폭로하는 데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김정남 전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은 <이 사람을 보라 - 인물로 보는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우연 같은 사건의 연속으로 진상의 폭로가 가능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본시오 빌라도가 잡혀온 예수를 보고 한 말.
  14. [14] 나중에 서울 강동구갑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낸 그분 맞다.
  15. [15] 당시 교도관-경교대를 위시한 교도소의 폭력적인 통제 분위기 속에서 교도관의 이런 모습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당시 교도관 중에는 심정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음으로 양으로 수감된 민주화운동가들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저 교도관의 경우는 이부영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예의를 갖췄다고.
  16. [16] 이 교도관들의 신원은 혹시 모를 불이익 때문에 비밀에 부쳐지다가 모두 정년퇴직한 2012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처음 이부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귀뜸한 사람은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였으며, 문서를 외부로 운반한 사람은 교도관 한재동이었다. 이 두 사람은 2012년 박종철 25주기 추모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17. [17] 이부영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한재동 교도관이 이부영이 적은 메모를 전 교도관 전병용을 만나 전달했고, 전병용이 다시 이를 김정남 전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아찔했던 건, 당시 전병용은 이부영과 장기표를 숨겨준 일 때문에 수배를 받고 쫓기던 중에 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김정남에게 이를 전달하고 이틀 후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만약 전병용이 이를 전달하기 전에 체포되었다면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수도 있었다고...
  18. [18] 본래는 45도 위로 세우고 발사해야 한다. 당시 경찰은 "수평사(射)는 불가능하게 방아쇠장치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으나, 그 후 광주집회에서 당시 학생들이 노획한 장비로 진압경찰들을 향해 SY-44를 수평발사한 사실이 있었다. 여러모로,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19. [19] 당시 연세대 정문 앞 굴다리에는 경찰과 더불어 사진기자들의 대열이 마련되어 있었다. 외신기자들은 이 구역은 연세 비치(Yonsei beach)라고 불렀고, 로이터 통신 파견 사진기자가 피격 직후 이한열 열사 앞에 달려가서 사진을 찍고 바로 빠져나왔다. 연세대 정문 앞은 최루탄으로 뿌옇게 변했었다.
  20. [20] 이는 한마디로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1. [21] 원 출처: <한국신문사진론> - 장충종 저. 눈빛. 1998. p70~71.
  22. [22] 당시 시위를 보면 투석전은 기본 사양에 화염병같이 위험한 시위도구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로 인해 너무 급진적인 시위대에 반감을 가진 것이지, 실제로 시위대를 빨갱이나 그런 것으로 오인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런 묘사는 <100도씨>라는 만화에서 잘 표현된다.
  23. [23] 비장한 어조로 느껴지지만, 의외로 실제 말할 당시에는 담담한 말투였다고.
  24. [24] 유럽권이라고 해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1930년대부터 70년대 전반기를 거쳐 장기간의 독재정권기를 거쳤던 경험이 있었고, 중남미 국가들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에콰도르, 페루, 도미니카 등 대다수 국가에서 군사독재정권이 펼쳐졌지만 1970년대 말을 전후한 시기부터 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시작하여 80년대 중반기에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민주화 운동을 강제진압할 경우에는 그대로 보이콧할 가능성이 높았던 것. 참고로 남미의 독재는 정말 지독하다 할 정도였다. 대한민국도 보도연맹 학살사건, 인혁당 사건, 삼청교육대등 반인륜적인 사건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미지 관리는 하였는데 남미의 독재국가들은 대외적 이미지 관리도 하지 않았다.
  25. [25]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당시 한통 노조의 파업을 '국가전복행위'라 간주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경찰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체포하였고, 이에 국민들은 제1회 지방선거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에 대패를 안겨주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한총련 5기 출범식 이후 1997년 6월 13일에 한총련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와서 '대선자금 공개 및 김영삼 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농성을 벌이자 성당 측은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므로 나가달라고 촉구했으며 농성이 장기화될 경우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요구했으며, 1998년 퇴출대상 은행 노조들의 천막농성, 1999년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2000년 한통노조 파업, 2016년 대구 희망원 사건 해결을 위해 장애계 인사들이 올 때도 이들을 성당에서 내모는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명동성당 스스로 보수 행보를 걸었다는 주장이 있다.
  26. [26] 명동성당은 원래 정치투쟁이나 노동운동하는 장소도 아닐 뿐더러 치외법권지대도 아니다. 6월항쟁 당시 학생과 경찰의 관계는 민주화 투사와 독재정권의 구도가 명확하고 누가봐도 어느 쪽이 정의고 어느 쪽이 악인지 뚜렷하기 때문에 명동성당 측이 불법행위를(경찰의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어쨌거나 법적으로는 불법) 감수하면서까지 치외법권지대를 만들어 주게 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교황청의 지지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정부인 김영삼 정권이 이미 들어서 있었던 97년 당시 한총련은 이미 연세대 사태이석 치사 사건, 그리고 잇따른 친북성 행위 등으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이며, 노조 같은 이익단체들이 벌이는 이권다툼에는 아예 명동성당이 끼어들어야 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그런데 이 단체들에게 단지 명동성당이 치외법권지대라는 불법적인 특혜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보수진영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흑백논리에 기반한 억측으로 보인다('명동성당이 진보진영을 돕지 않았으니 보수다'라는 주장). 그렇다고 명동성당이 기득권으로 불릴 만한 자본가나 권력자의 편에 선 적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애초에 명동성당이라는 종교 단체를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적, 정치적인 진영논리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은 각자 스스로 하길 바란다.
  27. [27] 대구 희망원 사건의 사례도 이견의 여지는 있다. 대구 희망원은 엄연히 대구대교구의 관할이기 때문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에 시정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이를테면 미국에서 강도 사건을 당한 것을 가지고 캐나다 대사관에 항의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구조는 서울대교구가 한국의 다른 지역 교회들을 교황청 밑에서 수직적으로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 교구의 교구장 주교들이 동등한 위치에 있으면서, 단지 주교회의를 통해 협력하는 구조일 뿐이다. 한국 천주교 중앙의 개입이나 중재를 요구하려면 굳이 서울대교구 주교좌인 명동성당에 갈 것이 아니라 광진구 중곡동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 주교회의로 가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항의차 방문한 장애인들을 내쫓은 것만큼은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다. 명동성당 측 역시 이들을 예의 있게 대하는 등 보다 책임감 있는 대응을 해야 했다.
  28. [28] 출처: 이윤섭, <한국을 뒤흔든 10일 - 6월 항쟁>.(이북스펍). 2013
  29. [29] 첫날 광주 시위를 주도한 쪽은 대학생보다는 광주 종교계 쪽이었다. 천주교, 개신교는 물론이고 10.27 법난으로 정권에 비교적 순응적이었던 불교계까지도 가세했는데 광주 불교계를 분노하게 한것은 5월 18일, 5.18 7주기 추모법회가 열리고 있던 금남로 근처 원각사에 전경 60여명이 대웅전까지 난입해서 최루탄을 터트리고 학생들을 연행하는 일을 벌인것이 계기가 되었다.
  30. [30] 전국적으로 150만 명이 나와있는 상태에서 천안문 사태급의 사고를 치려고 한 것. 1980년 5월의 광주와 달리 1987년의 시위는 전국적이었고, 만약 실제로 계엄군을 투입했다면 후술하다시피 내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31. [31] 제17보병사단, 제20기계화보병사단, 제30기계화보병사단 등 서울 주변에 있는 부대로 유사시 시위 진압에 투입될 수 있는 부대. 유사시라는 말에서 알 수 있지만 계엄과 쿠데타 등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기 때문에 충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89년부터 해당 계획 자체는 '상록수 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1999년부터 헌법이 정한 대통령 긴급 명령과 계엄법에 의해 병력 이동을 제한하는 쪽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32. [32] 양덕동은 4.19 당시 허허벌판 논밭이었지만 자산파출소는 3.15 때도 불탔던 곳이다. 불탄 정도로 끝난 게 아니라 아니라 3.15 때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난 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다.
  33. [33] 마산아재 문서에도 있다.
  34. [34] 1995년 도농 통합으로 창원시에 통합되어 폐지
  35. [35] 이후 이태춘 씨는 엿새 뒤인 6월 24일에 숨을 거두었다.
  36. [36] 이날 서면~범내골 일대에는 30만 명이 운집해 6월 항쟁 최대의 시위가 일어났다
  37. [37] 당시 신민당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모두 탈당하고 호헌 조치에 찬성하는 세력만이 남아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38. [38] 말이 문화원 순시지 실질적으로 지방의 시위 진행 사악을 직접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39. [39] 앞서 청와대가 눈치를 채고 접견 요청을 거절하자 릴리 대사는 ‘동맹국 대통령의 친서를 무시하느냐’며 밀어붙여 면담을 이뤘다. #
  40. [40] 후일 민병돈은 진압명령이 강행되었을 경우, 예하 부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청와대를 점령할 각오까지 했다고 회고하는데, 시일이 꽤 지난 다음의 회고라 자기 포장용 뻥일 가능성이 크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진압명령이 강행되었다면 오히려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 되니까. 게다가 명분마저도 확고하니 더더욱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무력진압에 반대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41. [41] 무려 100만여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였고, 발인 행렬이 출발한 연세대학교의 신촌거리부터 종로 일대까지 행렬로 가득 채워졌다. 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정문 앞 삼거리이다.
  42. [42] 이 기록은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190만)/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232만)로 인해 깨졌다. 그러나 이한열의 장례식 당시 100만여 명은 정부 추산(= 순간 최대 인원. 연세대에서 명동까지 꽉 채웠던 인파가 광화문 광장부터 서울역까지 꽉 채운 인원보다 적었을 리가). 정부 추산 43만인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보다 2배 이상 많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의 날 당시 경찰측 정부 추산이 시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적게 잡히고 있었던 것과, 232만명은 전국적인 참가 인원이라는 것을 감안하여야 한다.
  43. [43] 맨 위의 동영상 10분 20초 부근에서 어떤 아저씨가 장미꽃을 거부하는 경찰에게 장미꽃을 억지로 꽂아주며 "경찰관도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그 직후 경찰이 아저씨에게 "경찰관이 대한민국 국민입니까?"라고 묻고 아저씨는 다시 그 경찰에게 "네!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이거 달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4.19 혁명 당시 시위대 진압을 위해 온 군인들의 탱크 위로 한 어린아이가 올라가 대한민국 국군 만세를 외친 것과 비슷한 대목. 실제로 민주화를 논할 때 시위 진압입장이던(징병제로 군대나 전경으로 군대간 사람들)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44. [44] 이로 인해 세계 시민 항쟁을 논할 때도 자주 나온다. 제1민주화 물결이 유럽과 미국의 보편선거권 운동이고 제2민주화물결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의 독립이라면 제3민주화 물결은 1980년대 한국의 6월 항쟁을 포함한 많은 피플 파워 혁명이고 제4의 민주화 물결은 이 아랍의 봄이라는 것.
  45. [45] 주변 보좌관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당 사진처럼 손을 맞잡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기쁜 일에는 서로 얼싸안기를 수차례, 길을 가다가 서로 멀리서 상대를 발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의 앞으로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고 한다. 두 지도자가 상대의 보좌관들을 잠깐 마주칠 때에도 불러서 바빠도 식사는 챙기고 다니라면서 용돈을 쥐어주거나 진행하고 있는 일의 안부를 가볍게 물어보며 격려한 일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로 호감으로 뭉친 한 패밀리급. 이런 절친 오브 절친이었으나... 결국 갈라져버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가 되어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입원실로 찾아와 화해의 제스처를 남겼다. 기사.
  46. [46] 두 사진을 보면 그들의 측근들의 밝은 표정(좌)과 어두운 표정(우)이 서로 대비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47. [47] 노태우의 당선에는 부정선거 의혹도 있다.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제기된 주장이다.
  48. [48]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
  49. [49] 다만 1987년 7~9월경에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다수의 노조가 결성되기는 했다.
  50. [50] 1981년 5공 출범 이후 MBC와 분리되어 정수장학회에서 벗어나 문공부 감독하의 사단법인으로 있었다. 민주화 이후 1990년부터 한국화약에 처분하면서 주식회사로 바뀌었고, 이후 IMF로 구조조정에 따라 독립, 현재의 경향신문이 된 것.
  51. [51] 전반부의 5.18 민주화운동이 5화 분량인데, 후반부의 1987년 1년 간이 4화 분량이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