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 대한 내용은 7년전쟁(김성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7년 전쟁


(벤저민 웨스트의 '울프 장군의 죽음', 1771년 작.)

날짜

1754년/1756년 ~ 1763년

장소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 남아시아

이유

(아래 배경 문단 참조.)

교전국

<^|1> 프로이센 왕국
대영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이로쿼이 연맹
포르투갈 왕국
헤센 대공국
샤움부르크-리페

<^|1>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스페인 제국
스웨덴 제국
작센 왕국
무굴 제국

지휘관

<^|1> 프리드리히 2세
조지 2세조지 3세
페르디난트
주제 1세

<^|1> 루이 15세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여제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1]
카를로스 3세
아돌프 프레드리크

결과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의 승리
1763년파리조약,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체결
영국의 북아메리카, 인도 식민지 획득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

영향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됨.

1. 개요
2. 최초의 세계대전?
3. 배경
4.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5. 유럽 외 전장
6.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7. 결과
8. 이야깃거리
9. 연도별 전투 목록
9.1. 1754년
9.2. 1755년
9.3. 1756년
9.4. 1757년
9.5. 1758년
9.6. 1759년
9.7. 1760년
9.8. 1761년
9.9. 1762년
10. 관련 인물
10.1. 러시아
10.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0.3. 스웨덴
10.4. 스페인
10.5. 영국
10.6. 오스트리아
10.7. 작센
10.8. 포르투갈
10.9. 프랑스
10.10. 프로이센
10.11. 하노버
10.12. 헤센-카셀
11. 둘러 보기

1. 개요

七年戰爭

The Seven Years' War / The French and Indian War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왕국, 스웨덴, 스페인 왕국 등 당시 유럽의 열강국가 전부와, 기타 포르투갈 왕국이나 독일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까지 참전했다. 아시아 쪽에서는 무굴 제국까지 끼어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있는 신대륙에서는 아예 유럽 본토와 별개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이 커져버려 이 식민지들이 모국을 따라 서로 싸우고, 이 싸움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끌어들여 부족들끼리 또 서로 싸우는 등(...)[2] 정말 각양각색의 세력들이 뛰어든 전쟁이다.

2. 최초의 세계대전?

독일(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중부유럽 대부분 지역과 서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북해 및 북프랑스 지역에 북미 대륙 대부분과 서인도 제도, 동부 및 남부 인도필리핀, 그리고 남미의 우루과이 지역 등에서 벌어져 단순히 전장의 규모로 보자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크다. 그래서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총력전의 성격을 띠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세계대전으로 보지는 않으며, 다만 세계대전급에 준한 전쟁이었다고 평해서 해당 전쟁의 거대함을 설명한다.

3. 배경

단순하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상실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전쟁이 유럽 전역 및 세계 각지로 확산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대륙과 인도에서의 식민지를 두고 충돌을 계속하고 있어서, 7년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양 식민지에서는 무력충돌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명예 혁명 이후 하노버 공국을 동맹국으로 삼은 영국과[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를 옹립시킨 프랑스의 유럽 패권경쟁은 치열했다.

이처럼 당시 유럽에는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영국 vs 프랑스의 양대 대립축이 격렬하게 충돌하려 하고 있었으며,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4]을 공격하면서(미노르카 해전) 전쟁은 시작되었다.

4.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프리드리히 대왕

개전 첫 해인 1756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공격을 통해 먼저 오스트리아를 전열에서 이탈시킨 후,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전략으로 전력을 다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이후 군제를 개편하고 군비를 강화한 상태였다. 그래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보지츠 전투, 라이헨베르크 전투, 프라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프라하 공략을 가시권에 두었으나 결국 콜린 전투에서 패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조기종결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러시아군이 내부사정으로 후퇴하여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 직후 프리드리히 2세는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을 대파하며 다시 한번 천재적인 전술역량을 보여주었다. 로이텐 전투는 세계 전사에서 손꼽히는 천재적인 작전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1758년까지 이어진 프리드리히 2세의 대 오스트리아 공세는 보급부대의 붕괴(돔슈테트 전투) 등으로 인하여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고, 같은 해 8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맞붙어 가공한 피해를 입으면서 전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고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5] 프리드리히 2세가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전투 직후이다.

이후 프로이센은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전으로 일관했으며, 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은 콜베르크 요새 및 베를린 등을 함락하며 승리 직전까지 나아갔다. 이때까지 프로이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을 영국-하노버 연합군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하노버군 역시 방어전 중심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공세는 여전히 동맹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일찍 유럽전장에서 이탈했다는 것.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와 어렵게 손을 잡은건 프로이센을 효과적으로 다굴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인접국이자 육군강국인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는데 정작 프랑스는 몇 번 발렸다고 초반부터 이탈해버리니 속이 상했을 것이다. 결국 이는 유럽전장에서 동맹국이 프로이센을 빨리 무너트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다만, 오스트리아측 입장에서도 지난 전쟁당시 혼자서 프랑스-프로이센 양국을 상대하다가 이번엔 러시아와 함께 프로이센과 2:1 승부를 펼친 것이니 손해는 아니었다.[6] 그리고 프랑스가 아주 발을 뺀 것도 아니고 서부 독일 지역에서 계속 군사행동을 펼치긴 했는데, 프로이센 이전에 서북 독일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노버 공국, 그리고 하노버 공국과 동군연합 상태인 영국과 격전을 치루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부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영국은 다수의 병력을 기습적으로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시켜 약탈 및 파괴행위를 하고 있었기에 후방을 비울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고.[7] 오스트리아도 사실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참전해주면 좋지만, 그냥 대륙에서 상대할 적을 하나 줄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전략적 이득이었고 애시당초 동맹 체결 당시부터 프랑스의 주 전략목표가 영국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좀 섭섭하다는 의사표시만 하고 그쳤다.

5. 유럽 외 전장

중부 유럽 전선과 달리, 식민지에서는 프랑스군이 압승하고 있었다. 북미 전역에서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루이 조제프 드 몽캄과 프랑스군의 선전으로 영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일례로 1758년 뉴욕주의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1만 6000명의 영국군이 몽캄 장군이 이끄는 3600명에 불과한 프랑스군에 대패를 당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본국에서의 대대적인 증원과 제임스 울프라는 뛰어난 지휘관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했다. 특히 프랑스령 캐나다의 중심부인 퀘벡에 대한 공성전중 벌어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장군은 4,400명의 병력으로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몽캄 소장을 전사시키지만 그 자신도 역시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다. 동귀어진 피해 자체는 영국이 좀 더 컸지만 영국 해군때문에 병력충원과 보급이 막힌 프랑스군은 더이상 싸울수 없었다. 결국은 제해권이다

울프의 죽음은 월리엄 피트(대 피트)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우상화될 정도로 컸는데, 그 결과만 따져봐도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북미 전역의 프랑스 세력을 소멸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루이지애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황열병 때문에 침공을 못한 것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북미 전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이 모기로 인한 황열병 때문이다.

프랑스도 한때 승리의 기회가 있었고, 영국의 북미주둔군을 절대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으나 영국 함대가 신속하게 병력증원을 해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스 주력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격파당해 대서양 제해권을 영국에 빼앗겨 본국으로부터의 추가증원에 실패한 것이 북미 전역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북미 전역을 별도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병력과 보급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원주민 부족과 연합했기 때문. 흔히 프랑스 + 아메리카 원주민 vs 영국군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8]

인도에서도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군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적인 벵골 태수를 앉히고, 남인도에서 프랑스의 핵심거점인 퐁디셰리를 함락시켰다. 1760년, 프랑스의 동맹으로 참전한 스페인도 영국군에게 쿠바필리핀을 빼앗기며 패배를 거듭했다.

영국군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모조리 휩쓸었고, 필리핀과 쿠바라는 스페인의 식민제국의 두 핵심지역을 장악했으며, 쿠바에서 막대한 부를 전리품으로 확보해 전시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군은 남미 우루과이 지역에서 포르투갈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브라질로 약간 진격했으나 큰 의미는 없는 승리였다. 이로써 대영제국과 거의 판도가 맞먹던 프랑스 식민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와 같은 승리는 모두 비유럽 지역에서의 것으로, 대륙의 동맹국 프로이센이 패전 직전에 내몰리면서 이와 같은 승리는 빛이 바래고 있었는데...

6.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옐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3세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그 뒤를 표트르 3세가 이었는데, 이 표트르 3세는 열렬한 프리드리히 대왕 숭배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부터 천재적인 용병술을 보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시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표트르 3세 역시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그의 열렬한 빠돌이가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영토를 포함,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아무 조건없이 제안했고, 품 안의 독약을 언제 먹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 표트르 3세는 그걸로 부족해서, 대프로이센 전쟁의 동맹국이던 스웨덴까지 설득시켜 스웨덴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9] 이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Miracle of the House of Brandenburg)"이라고 부른다.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이런 대반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루이 15세마담 드 퐁파두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원래 대프로이센 동맹은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3부인 동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정식지위는 황후인지라...그래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이 전황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뒤엎을 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더 이상 국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전쟁의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동기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건재한 동맹국 러시아가 이탈하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동맹 이탈도 이탈이지만,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협상 내용을 그것도 러시아가 먼저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표르트 3세가 단순히 빠심에 의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표르트 3세는 이 근대화의 모델을 프로이센으로 생각했다는 것. 게다가 3국동맹이라고는 하나 프랑스는 이미 식민지 전쟁에 눈을 돌려 7년전쟁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도움도 거의 안되었으며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쥐어짜내며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로이센을 멸망시키긴 어려웠으며 목표 또한 프로이센의 멸망은 아니었다. 실제로 표르트 3세는 6개월만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서 폐위 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러시아는 7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표르트 3세가 폐위가 된게 1762년 7월이고 7년 전쟁은 그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1762년 10월에 끝났다.). 즉, 동맹에서 빠진게 마냥 이유없는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 배상금이나 영토 일부의 할양처럼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면 모르겠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부분에서 러시아가 가시적으로 얻은 성과가 없었다. 러시아가 7년 전쟁에 가담한 이유는 발트 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점령한 뒤 프로이센과 강화하여 동프로이센을 얻어낸 후 이를 폴란드의 쿠를란트-젬갈렌과 교환할 속셈이었다. 차라리 원래 속셈대로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은 동프로이센을 내놓으라 하면 좋았을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러시아 전선은 러시아가 유리하긴 했지만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졌고, 프로이센군은 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거나 매우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 괜히 이 일이 기적이라 불리는건 아닐 것이다. 즉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것으로 러시아 국내의 여론을 납득시키기엔 여러 모로 부족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전국 상대로 되려 패전국에 이득이 되는 미친 협상을 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국내 뿐 아니라 국외, 나아가 현대 외교사를 비롯한 역사계에서 보면 정말 어이없고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이렇게 표트르 3세의 삽질은 프로이센에겐 큰 회생 기회가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표트르 3세를 몰아낸 예카테리나 2세조차 그렇게 타격을 입었음에도 6개월만에 좀비같이 살아나 오스트리아에게 대반격을 성공해버리는 것을 보고 승기를 다시 잡기 어렵다 판단했는지 표트르 3세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지원을 하게된 러시아군을 물리는 것으로 전쟁을 그칠수 밖에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며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고,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7. 결과

  •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하며 결국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명목상으로까지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어이없게 패하기는 했지만 프로이센에게 받은 자극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돌려 군제를 개혁하고, 수도 베를린을 여러 번 밟아버리는 데 성공한 덕에 오랫동안 유럽에서 대표적인 열강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치르면서 과거에나, 이 당시에나, 미래에나 불안정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보헤미아 통치권을 재확립하고, 총 결과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이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털리기만 했던 문약한 면모를 모조리 씻어 버리고, 프로이센에게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각인 시켰으니 내부적으로 따지면 잃은 것만큼 얻은 것도 많아 그럭저럭 위기를 잘 극복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배팅이었는데, 합스부르크 전 영토에서의 세입 22%가 걷히는 지역을 찾겠다고 11년치 예산을 퍼부었는데도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되찾아도 적어도 50년은 적자 그래도 남편의 뛰어난 재테크 능력 덕분에 전쟁 기간 동안 황실은 돈을 엄청나게 벌었고 이를 담보로 국채를 발행해 파산은 면할 수 있었다.
  • 프로이센은 명목상으로는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쟁과정에서 국토가 자주 점령당했고 국력이 고갈되어 이후 유럽에서 폴란드 분할 등 나름 큰소리 치게 되는 건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슐레지엔은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부터 실효지배하고 있던 터라 승전대가로 뜯어낸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뒤로 오스트리아는 다시는 슐레지엔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과 프로이센군의 강함을 전 유럽에 알렸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어야 할 듯.[10]
  •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승리를 날려먹은 거에 대한 반감으로 즉위 몇 달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하였으나, 궁정 쿠데타의 뒷수습으로 이후 나폴레옹 전쟁까지는 유럽과 별개로 움직였다. 하지만 이 이전에는 아예 유럽 나라 취급도 못 받고 대놓고 머나먼 아시아 스텦의 칸국들과 비슷무리한 무엇으로 인식 되었던 러시아가 본격 유럽 열강들의 대국 정치에 거대한 존재감을 발휘하며 전쟁 상황을 크게 바꾸었던 경험에 기반하여 훗날 당당한 열강 중 하나이자 동서유럽 열강들 사이 큰 분쟁이 발생할때 마다 거대한 머릿수와 동원력을 발휘하며 소방수로 부상한 러시아 제국의 유럽 진출의 초석이 된다.
  •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북미에서는 초기 패전의 와중에 북미 식민지의 커다란 도움을 받고, 이들의 힘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힘이 커진 북미 식민지에 세금 좀 내시지? 했다가 보스턴 차 사건이 터졌다.
본격 4배로 팽창한 영 북미 식민지

8. 이야깃거리

  • 이 전쟁을 알기 쉽게 서술한 만화가 있다.#
  • 7년 전쟁은 임진왜란의 또 다른 명칭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에 대한 호칭이 당시 참전한 한중일 3국에서 다 제각각인데가[11] 각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명칭이라 중립적인 입장, 특히 북미-유럽의 동양 사학계에서는 7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서양에서 7년 전쟁 하면 주로 이 문서가 설명하는 전쟁, 혹은 18세기 러시아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간의 북방전쟁을 지칭하기에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정확히 구분해야 한다.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 중 김성한의 <7년전쟁>이라는 작품은, 당초 <7년전쟁>이 원 제목이었으나 1990년대 초반 <임진왜란>으로 바꾸고 나중에 다시 <7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다만, 연도가 7년인 이 문서가 말하는 7년 전쟁과 다르게 임진왜란은 햇수만 따지면 6년이기에 단순히 봐서는 와닿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연도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 두 전쟁의 지속일은 거의 겹친다. 임진왜란은 1598년 12월까지 이어졌고 7년 전쟁은 1762년 2월에 끝났기 때문.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졌는데 1756년 5월 20일 미노르카 해전을 개전일로 보고 1763년 2월 15일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종전일로보면 정확히 2463일간 벌어진 전투고 임진왜란은 마찬가지로 계산하면 2399일간 벌어졌다.
  • 역사서는 아니지만 # Ladenijoa라는 블로거의 포스트들도 7년 전쟁을 가볍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러시아 드라마 예카테리나에서 간접적으로 전황이 언급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숭배자인 표트르 3세가 유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엎는 상황과 표트르 3세의 행동에 빡친 러시아인들의 모습이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병사하자,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 측은 이 7년 전쟁의 기적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즉 친소련 성향이 강한 루즈벨트가 없어진 것을 이용해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연합국들과 강화 협정을 맺고 소련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는 반공주의 연합을 맺는 방법을 구상한 것.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루즈벨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한 첫마디가 "차르가 죽었습니다."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나치 독일의 만행이 전세계에 폭로된 상태에서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과 관계를 끊고 나치와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기대는 망상으로 끝나고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9. 연도별 전투 목록[12]

9.1. 1754년

9.2. 1755년

9.3. 1756년

9.4. 1757년

9.5. 1758년

9.6. 1759년

9.7. 1760년

9.8. 1761년

9.9. 1762년

10. 관련 인물

10.1. 러시아

10.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0.3. 스웨덴

10.4. 스페인

10.5. 영국

10.6. 오스트리아

10.7. 작센

10.8. 포르투갈

10.9. 프랑스

10.10. 프로이센

10.11. 하노버

10.12. 헤센-카셀

11. 둘러 보기

세계 대전

1914 ~ 1918
제1차 세계 대전

1918 ~ 1939
전간기

1939 ~ 1945
제2차 세계 대전

관련문서: 7년 전쟁 | 냉전 | 제 3차 세계 대전


  1. [1] 1763년 7월 9일 정변을 일으켜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킨 뒤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을 지원하고자 파견한 러시아군 2만 명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2. [2] 이로쿼이족과 체로키족은 영국 편에 가담했고, 쇼쇼니족과 오타와족은 프랑스 편에 가담했다.
  3. [3] 정확히 말하면 하노버 왕가는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이기도 했다. 거기에 칭호상으로는 스코틀랜드와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앤 여왕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물론 무슨 제위 계승권 따위를 요구한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다.
  4. [4]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은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 7년 전쟁 직후 스페인에 반환되었다.
  5. [5] 어찌나 심하게 털렸는지 프리드리히 2세도 포로로 잡힐 뻔했고, 이를 피한 직후 몰려오는 적군의 전열을 바라보며 당장 자결할지 싸우다 죽을지 고민하다 기병 사령관 폰 프리트비츠의 설득을 받고 퇴각했다.
  6. [6] 오스트리아 편에 선 스웨덴은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프로이센 편에 선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더 신경 썼고.
  7. [7] 이처럼 후방 상륙 교란 행위로 꽤 성과를 얻은 영국이었지만 1758년 생 카스 전투에서 개털린 이후로는 프랑스 본토쪽으로는 신경을 꺼버린다. 문제는 그 때가 프리드리히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의 국력 차로 인해 점점 밀리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 여기에 왕실의 친정인 하노버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영국의 행동에 분노한 조지 3세윌리엄 피트 총리를 잘라버리면서 영국의 지원 또한 끊겼다. 병사의 상당수를 영국의 지원으로 고용한 용병으로 충당하던 프리드리히는 병사 숫자가 1/3으로 토막나면서 결국 개털이 되기 직전까지 몰린다.
  8. [8]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원작 소설이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프랑스군과 동맹한 인디언 부족을 거의 부모안부까지 섞어 무지하게 욕한다.
  9. [9] 심지어는 러시아의 병력 중 일부를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로 넣어주기도 했다.
  10. [10] 이와 관련해 7년 전쟁과 마리아 테레지아가 없어 프로이센의 힘을 빼놓지 못했다면 오스트리아는 얼마 안 가 독일에서의 패권을 상실하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이 1세기 가량 앞당겨졌을 거라는 예측도 있다.
  11. [11] 임진왜란+정유재란(韓), 만력조선전쟁(中), 분로쿠・케이초의 역(日)
  12. [12] 1754~1755년은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의 전투이다. 중요 전투는 볼드 처리.
  13. [13] 조지 워싱턴의 첫 전투.
  14. [14]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2세
  15. [15]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3세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165.56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