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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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원인
4. 영향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5.1. 한인 사회의 대응
5.2. 당시 한국인 조폭들의 행동
5.3. 폭동 이후
5.4. 한인 사회의 변화
6. 기타
7. 유사 사례
8. 관련 문서

1. 개요

The Los Angeles Riots

4.29 시민봉기(4.29 Civil Uprising)[1]라고도 불리는 사건.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미국 역사상 12번째 흑인 폭동이다. 비단 흑인뿐만 아니라, 온갖 차별로 인해 소외된 히스패닉계까지도 가세하였다.

2. 전개

폭동의 발단은 일명 '로드니 킹 사건'에서 출발한다.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의 백인 경찰관 네명[2]이 21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과속(115mph, 185km/h)으로 달리던 흰색 현대 포니엑셀 승용차[3] 1대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경찰은 운전자인 로드니 킹[4]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당시 경찰은 킹이 마약인 PCP를 복용하고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하는데 킹이 체포된 지 며칠 후 여러번 마약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고 한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영상)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다음 날 이 영상은 뉴스에 방영되었지만 방영된 영상은 81초짜리 원본 테이프가 아닌 65초짜리 편집된 테이프였고, 편집되어 사라진 분량은 바로 로드니 킹이 경찰에게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이였다. 즉 언론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조작되어 보도된 것이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법원에 기소되었다.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4명의 경찰관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노, 롤란도 솔라노[5]이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 1명의 아시아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그리고 방화와 약탈이 TV로 방송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던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게이츠 총경은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폭동은 규모가 커졌고 흑인과 히스패닉 갱단들까지 무장하고 합세하여 경찰로서는 감당할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진압에 경찰뿐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험비, 트럭, 연방 육군 제7보병사단 2,000명과 제40보병사단 헌병중대, 미합중국 제1해병사단 병력 1,500명과 제1경기갑정찰대대 LAV-25 장갑차가 동원 되었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아예 제82공수사단 공수부대 대대가 18시간안에 배치 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상태였다.[6] 여하튼 총합 13,500명의 사단 급의 군대가 투입되면서 경찰과 함께 폭동을 진압하기 시작해 5월 4일에 폭동이 모두 종결되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5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

3. 원인

결국 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었다. 거기다 당시 LA의 슬럼가에는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요구를 폭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전에도 로스 엔젤레스의 경찰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7],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과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한 것. 사건이 종결된 후, 위에도 적혀 있지만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8]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고 그 결과 2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4. 영향

이 사건은 현대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근래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9]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LAPD는 데릴 게이츠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유색인종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 인권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으며,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강압수사 및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과 경찰관의 이야기다.[10]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슬럼가로 알려져 있는 콤프턴(Compton,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 흑인들이 뭔일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 사람들 사는 동네이다. 당시 경찰의 대처에서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거주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지만 한인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결론은 백인들과 똑같이 세금을 내도 황인종들은 같은 법적인 보호를 받을수 없다. 아무리 계기가 흑백갈등이라 백인이 일차적인 목표가 된다 해도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뒤에는 초기의 목적성이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한인들의 거주지가 흑인 거주지와 바로 접해있어 주변으로 확산되면 피해가 생길 것임이 분명한 폭동에 대해,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폭동지역과 거리가 있어 대응할 시간이 충분한 특정구역을 보호하려는 식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주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다만 흑인들과 한인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래퍼 아이스큐브의 Black Korea란 곡이다.# 타이거 JK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2부에서 잠깐 나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순자 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어쨌든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최소 3억 5천만 달러의 손해,[11] 2,300여 개의 점포손실...그래도 폭도들에게 살해된 한인은 없었다. 유일한 한인 희생자는 청년단 소속이었던 18살의 이재성은 한인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기사 참고 소수지만 한인이 운영한 가게 중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존재했는데,[12] 폭도들이 미치지 못한 지역 정도이다. 또한 한국인의 가슴에 두번 못을 박은 이들은 바로 한인 중 "이 모든 것이 한인 탓이다"라는 식으로 성토하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과 대립하는 백인 및 정치적, 인종적 동맹관계였던 히스패닉들은 더욱 한국인 탓을 해댔다. 단지, 미국 측 시각에서 보면 한인들에 대한 로스앤젤레스 시 정부의 갈등이 쏟아진, 한마디로 불똥튄 상황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당시 LA의 지방정계는 이런 저런 일로 상당히 시끄러웠는데 이 상황에서 흑인 정치운동가들이 등장하면서 한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언플을 시작했고 이는 LA 타임스 등의 기사에서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의 시각은 양자간의 갈등보다는 미국의 당시 언론의 플로팅 문제가 결국 폭동을 키워 놓은 주 원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는 셈. 더군다니 LA내부에서 경찰 책임자 해임건에 대한 여러 갈등이 산적해 있다 보니 이게 인종 이슈로 간 거고, 사실상 당시 흑인들의 정치운동 행태도 흑인들 내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아시아인은 미국내에서 흑인보다도 소수이기 때문에, 결국 흑인들이 백인에게 당한 차별을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들인 아시아계에게 괜히 화풀이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인들 중에선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5.1. 한인 사회의 대응

어떤 한인 가게 주인들은 산탄총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흑인들과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 뉴스에 방영된 동영상 중 가장 유명한 동영상은 "가주마켙"의 주인과 점원들이 소총산탄총, 글록 17 등으로 무장하고 거리를 경비하며 권총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이렇게 폭동 속에서도 털리지 않고 정상영업을 계속한 가게들은 옥상에서 총 들고 지킨 가게들이었다. 대개의 가게들이 쇠창살과 안전문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평소의 도둑 하나 둘은 막아줄 수 있어도 무리지어 떼로 덤벼드는 폭동 앞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총을 들고 총격전을하면서까지 강력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여주자 폭도들이 알아서 피해갔다고 한다.

사실 한인타운에서 경비에 동원한 민간인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는 일정 크기 이상의 중화기는 모두 장난감 모형 총이었다고 한다. 발사한 산탄 탄피 같은 걸 땅바닥에 좀 뿌려놓거나 실루엣만 기관총처럼 보이는 나무나 플라스틱 모형을 만들어서 옥상에 올려놓은 경우도 있었는데, 기관총이 등장했다는 신고를 받고 미국 경찰들이 와서 조사해보고는 가짜라는 걸 깨닫고 그 황당한 발상과 용기에 감탄했다고 한다. 병법 삼십육계 중 '수상개화'[13] 계책으로 물리친 셈.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되었다면 블러핑이라는 게 들켰을지도 모르니 폭동이 일찍 끝난 게 다행일 따름이다. 다만 실제로 AR-15AK 계열 화기, 그리고 UZI가 사용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여기 참조. 원래 AR-15와 AK는 단발사격 전용으로 민수용으로 존재했고, UZI의 경우에는 민수용 자동화기로 판매가 되었다가 단종된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 또한 수출형 민수용 K1 기관단총을 사용하는 사진도 있다.#,#,# 당시 국내에서조차 국산 총기의 모형 장난감이 흔치 않았는데, 미국이라고 당시 개발도상국의 총기류를 장난감화 했을 리 없으니 실총일 것이다.[14]

또한 재미교포들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대처도 빨랐다. 사건 당시 한인 AM 라디오 채널인 라디오 코리아는 제보를 받으면 "OO에 피해가 생겼으니 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실시간 중계를 했고, 이에 한인청년단과 해병대 전우회로 이루어진 자경단이 지원을 나가는 식이었다. 이 대목은 무릎팍도사 이장희 편을 보면 그 일화가 자세하게 나온다. 이 구호활동으로 인해 당시 가수 이장희가 사장으로 있었던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15]

그러나 처음에 한인들 사회에서도 가게를 지켜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게다가 총격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를 지키려면 결국 총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도 총기 규제가 강한 지역이라 한인들 내부에서도 그러다 독박쓰는 거 아니냐는 여론과 우리는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맞선 것이다. 사회의 구성상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등이 섞여 있었는데 사람들이 권리숙지가 안 되었고 사회적 신분의 구성상 무기 소지에 대해 모두 같은 입장이 아니었다. 때문에 먼저 언급된 라디오 코리아에서도 맞서 싸우라는 방송을 내기 전까지 상당한 숙고가 필요했으며, 그걸 시행했을 때는 이미...수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약탈당한 후였다고 한다.

LA 폭동이라고 하면 보통 두순자 사건 때문에 미국 내에서 한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절에 한인 타운의 자경 활동을 직접 봤던 미국 경찰관들에게는 의외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공공기관 중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 경찰서와 소방서였는데,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차에 폭도들이 총을 쏴서 불 끄러 가는 것을 막았던 일까지 있었다. 폭도를 잡는게 아닌 단지 불 끄러 가는 사람에게 말이다. 결국 각급 소방서들은 선별적으로 장비와 인원을 파견해서 방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 자경단들이 총을 들고 와서 이들을 지켜주었다.

자기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업주로서의 입장도 있겠으나, 치안에 대한 보수성을 지닌 한국 문화의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즉, 자경단을 구성해 폭도들의 침탈과 난동에 공동 대응하면서 가게를 정상 영업해 일상을 지켜나가는 행동은 지극히 보수적이고 공포감에 사로잡혔던 미국 경찰관들의 감성을 자극할 정도였다. 일례로 1992년 5월 3일자 LA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한 총포상 점주는 "(일대에) 경찰차가 4대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마자 1초도 안 돼 죄다 도망가서 솔직히 실망했다"고 인터뷰할 정도였다.

2010년대에 나온 "L.A. Burning" (불타는 LA) 다큐멘터리에선 당시 총포상이었던 데이비드 조의 증언이 상세히 담겨있는데, 폭동 발발 직후 한인 타운에 경찰차가 몇 대 와있는걸 보고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총격전이 시작되자마자 경찰은 순식간에 도망갔고 결국 자신들이 직접 가게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좀 더 당시 이야기를 추가하자면 당시 자신은 총포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지인인 리처드 박이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하자 아무 고민 없이 나왔다고 한다.

인터뷰에선 위트 넘치게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총을 쏘며 방어하면서도 정말 무서웠다고 한다.

폭도들 역시 시가전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없어서 저항이 거세 자신들이 되려 죽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심지어 히스패닉계 마을에서도 텃밭을 지키려는 갱단들의 저항에 의해 폭도들이 잽싸게 물러났다고 한다.

(위의 영상에서 안경 쓰신 분은 "데이비드 조", 모자 쓰신 분은 "리처드 박"이라고 한다.)

당시 한인타운의 한인들의 총격전 영상.[16] 징병제로 인해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군대 경험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가전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17] 문제는 이 앵커가 매우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것.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 가게 주인들이 총기를 들고 자신의 가게를 지키는 상황으로, 당연히 정당한 저항이다. 그런데 이 앵커는 그들(영상의 한국인들)이 폭력 사건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마구 총을 쏴대고 있습니다!" 이런 뉘앙스로. 덕분에 영상 댓글도 앵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욕하는 것이 태반.

왜 한국인들이 스스로 무장했어야 했었는지 호의적인 관점에서 조명하는 영상이다. 한인사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한 회고와 당시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려있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시선도 담겨있다.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이 쓴 책을 보면 당시 일본 방송은 한국인들이 총을 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편견적인 모습을 비판한 적이 있다.[18] 하지만 NRA(전국총기협회)를 비롯한 보수단체들에서는 흑인들을 까내리고 총기소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인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NHK의 기자들은 한국인 슈퍼마켓 앞에서 전격 취재를 했는데, 이 장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1988년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19]라는 다큐멘터리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재미교포 영화감독 크리스티나 최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4.29 사이구(영어 제목도 Sa i G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많은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보험 처리로 팔리지 않던 재고 몫까지 보상받아 오히려 이득이 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탈세 등의 목적으로 판매기록을 엉터리로 하던 가게들은 신고한 만큼만 보상받아서 큰 피해를 입었다. 자업자득이다.

한인층에서는 교포들의 피해를 걱정하면서도, 인종차별 이슈 또한 이해한다는 태도가 공존했다. 오히려 교민들 사이에서도 일부 여론이 흑인들을 무시했던 정황에 대한 반성이 많이 나왔다. 고립적인 태도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유도 "당연한" 공존의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한인교회는 봉사를 많이 했으나 이후 봉사활동 등을 더 늘린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역 인종주의, 즉 흑인들이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성을 보이는 태도를 두고 지적하는 경향은 강해졌다. 사실 흑인 커뮤니티는 한인들하고만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었고 당시에는 아직 비주류인 히스패닉이라든가 다른 소수인종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대응도 일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경찰들은 한인 자경단을 가게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고 무장보복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오인했던 것인지 몇몇 이들을 체포했고 무기를 압수했으며, 방어하고 있는 상점에서 해산시켰다. 그리고 그 상점은 방어자들이 해산된 다음에 불타버렸다(...).[20] 사실 당시 공권력의 대응 방식은 전체적인 불신으로 이어졌고, 퍼거슨 사태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자주 까이는 소재가 되었다. 물론 퍼거슨 사태 당시에는 대통령이 주방위군 육군 투입을 미루라고 한다든가 하는 이런 저런 이슈가 있었지만 약탈당한 가게들 입장에선 그게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 때문에 이 사태를 보는 시각은 LA나 퍼거슨이나 정부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인종주의는 이상이지만, 문제는 그 흑인들의 분풀이가 행해지는 대상은 백인들이 아닌 다른 소수인종들인 사태가 소규모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억새바람>도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루었고, 드라마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 손혁(차승원)이 윤혜인(수애)를 이 사건 때 만난다.

더 퍼지 시리즈의 한 비디오에서 권총을 들고 다른 사람을 쏘는 퍼지 비디오가 LA 폭동 당시의 한인들의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 미국 인터넷, 엄밀히는 미국의 보수주의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LA 폭동 당시 한인들의 대응을 소재로 하여 rooftop korean이 일종의 이 되었다. 총기 규제에 찬성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이들의 활약상은 지금까지도 'Roof Koreans'라 불리며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총기소유를 원하는 미국 보수 지지층에서 말하는, '총으로 자기 자신과 가정을 지킨다'는 주장의 이상적인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도 총기 관련 유투버들에 의해 'Roof Koreans'가 꾸준히 언급되고 있으며,# 해당 영상의 코멘트란도 한국인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물론 한국인들이 용감하고 멋있게 활약했다는 칭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었다는 데서 씁쓸한 면도 있다.#

심지어 송하나로 모에화 됐다.#

5.2. 당시 한국인 조폭들의 행동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은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 커녕, 혼란을 틈타 흑인이나 히스패닉들이 들이닥치기 전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고 잽싸게 도망쳤다. 이는 당시 히스패닉 갱단과 중국계 삼합회가 어찌됐건 자신들의 물주들을 지키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이 당시 한인타운에서 삥 뜯던 조폭들은 한국에서 기반을 잃거나 쫓겨온 이들이 대부분으로, 특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늘어났다. 게다가 민족 정서상 같은 한국인이라도 범죄자들은 따돌림 당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겉돌음으로서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기도 했다.

하여간 이 때문에 한인들은 조폭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경단을 구축해 대응했던 깡까지 더해져 여전히 돈내놓으라는 조폭들에게 돈만 갈취하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 한번만 더 그러면 쏴죽이겠다며 분노하던 사례도 있었다.

5.3. 폭동 이후

당시 한인들의 피해는 LA 폭동 전체 피해액의 절반일 정도로 처참했다. 당시 18살이었던 교포 이재성은 한인 자경단끼리 서로 폭도로 오인해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고, 총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으며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또한 고가품이나 식품 등을 강탈하고, 건물까지 훼손하면서 한인사회에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다. 게다가 폭동 초기에 파견된 경찰에 이어서, 방위대마저도 주로 백인 밀집지역에 몰리는 바람에, 한인촌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백인 사회에서는 한인들을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라하면서,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흑인들의 공격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21]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피트 윌슨은 재정 때문에 한인촌에 대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서 교민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또한 애초에 언론들부터가 상술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에 대한 흑인들의 공격을 대놓고 부추긴 주범들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이 흑인 상권을 침해했다고 까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명백하게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쓰겠다는 모습이었고, 상황을 파악한 교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어쨌든 한인들은 재기를 위해서 복구작업을 했고, 몇몇 한인들은 흑인과의 평화를 원하며 거리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5.4. 한인 사회의 변화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로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인들이었으며, 심지어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세금만 더 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즉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에 무심했기 때문에,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포들이 미국 시민권 취득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서,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순자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 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다른 소수민족과의 더 많은 인적 교류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22]

6. 기타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 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교류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보게 된 것. 미국/인종차별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 보다 더 약한 소수 민족들에게 표출한 것이다. 그 결과 흑인들에 대한 이미지만 안 좋아지고 경찰들의 강경진압에 대한 정당성만 강화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자 흑인사회 내에서도 이를 비판하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폭동시 공권력이 폭동과 약탈에 대처 못하는 추태를 보이고 한인들이 자체 무장하여 자신들의 지키는 모습은 총기소지에 대한 옹호론이 강화되었고 한인 등 백인과 흑인에 비해 소수인 아시아계와 동유럽, 아프리카 이민자의 총기소유 비율이 높아져 총기규제시 이들의 반대가 만만치않다.

코리아타운과 다저 스타디움이 인접해있었기 때문에, 폭동 기간동안 잡혀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홈 3연전중 2경기(첫 경기는 폭동 당일인 4월 29일 열렸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홈 3연전 시리즈가 전부 연기되었다. 문제는 두 팀 연고의 거리는 거의 미국 동서 끝자락이라서 다음에 언제 올 있을지가 문제가 되는지라, 다음 잡혀있는 필리스와 엑스포스의 LA 원정때 잔여일정을 어떻게든 전부 다 끝내야 했다. 그래서, 두 팀이 다시 LA를 찾은 7월 2일부터 5일까지 필리스와는 4일동안 5연전(7월 3일 더블헤더), 그 다음 엑스포스는 3일 연속 더블헤더라는 엽기적인 일정을 소화했다. 1992년의 다저스는 리그 최하위 팀이었기 때문에 지구 우승 경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점이 다행일 정도. 다저스의 1992년 스케줄.

다이 하드 3에서 이 사건이 잠깐 언급된다. 존 맥클레인과 어거지로 파트너가 된 제우스 카버가 "자네 LA에서 무슨 일 있었나? 혹시 자네 유명인물이야? 설마 로드니 킹 사건은 아니겠지?"라고 묻자 존 맥클레인이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의 동생을 옛날에 빌딩 32층에서 던져버린 일이 있었어."라고 대답한다.

7. 유사 사례

  • 시카고 폭동 (1919)
  • 대공황 약탈 폭동 (1929~1932)
  • 뉴욕 할렘 폭동 (1935)
  • LA 폭동 (1965)
  • 뉴어크 폭동 (1967)
  • 디트로이트 폭동 (1967)
  • 마틴 루터 킹 암살 관련 폭동 (1968)
  • 마이애미 폭동 (1980): 특히 해당 사건의 발단이 된 '아서 맥더피 폭행치사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과 진행양상이 대다수 비슷했다.
  • 신시내티 폭동 (2001)
  • 오클랜드 폭동 (2009)
  • 퍼거슨 폭동 (2014)

8. 관련 문서


  1. [1] 한국계 미국인 일레인 김(Elaine H. Kim) 교수가 붙인 명칭이다. 4.19 혁명과 비슷한 명칭. 실제로 구글에 Sa-i-gu라고 치면 뜬다. 이 명칭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인종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계층구조와 그로 인한 반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백인들의 거주지역에만 중점적으로 폴리스 라인을 친 위치도 그렇고.
  2. [2] 이 중 한 명(시어도어 브리세노)은 히스패닉이었다.
  3. [3] 사건 이후 현대자동차 측에서는 그 차량이 그런 속도로 달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속이라는 자체는 의심이 없었다.
  4. [4] 2012년 6월 17일 자택의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5. [5] 5명 중 이 사람만 킹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직 현역이다.
  6. [6]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
  7. [7] 영화 스트레이트 아우터 컴튼에서 제대로 묘사된다. 재임 당시 LA 반문화랑 사이가 안 좋아서 LA 하드코어 펑크 씬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서구 문명의 몰락 상영도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8. [8] 참고로 게이츠는 이후에 자서전에서 경찰국장 자리에서 질려서 자의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이후 게임 디자이너로 활동해, 폴리스 퀘스트 시리즈 중 4와 S.W.A.T 제작에 참여한다(...).
  9. [9] 정확히는 흑인과 백인 간의 문제.
  10. [10] 덧붙여 산 안드레아스의 악역인 프랭크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
  11. [11]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 피해의 절반 이상을 받은것이다.
  12. [12] # 당시 환전상을 겸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홍정복씨는 그 지역의 흑인 및 히스패닉들에게 MAMA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친절했는데, LA 폭동 당시 흑인 주민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준 덕분에 아무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9년에 히스패닉 갱단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분이 무장강도에게 살해당하자 300여명의 흑인 등이 와서 장례식을 지켰고, 심지어 동네 갱단원들은 살인자를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쪽지까지 써붙일 정도였다고. 기사 참고
  13. [13] 세력을 크게 부풀려서 눈속임으로 적들이 피해가게 하는것. 다시 말해서 블러핑.
  14. [14] 사실 이 당시는 1986년 자동화기 판매 금지 시행 이후라 자동화기인 K 시리즈는 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K-2는 소염기, 개머리판 등의 모양을 바꾸어 연사가 불가능한 Daewoo DR-200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수출됐으나 K-1은 그 구조상 법에 맞게 수정시 사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서인지(화염이 세서 소염기가 커야 한다.) 더는 수출되지 않았기에 중고거래로 사들였거나(다만 자격요건이 까탈스럽고 회소성 때문에 가격이 수만 달러를 부르기에 이를 감수해야 한다.) 그 전에 구매해 놓은 걸 꺼내 썼을수도 있다.
  15. [15] 이장희는 1970년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1989년에 라디오 코리아를 세웠다.
  16. [16] 이 영상은 영화 "프리덤 라이터즈"의 극초반부에 삽입되기도 했다. 영화 더 퍼지의 소개 영상에서도 나왔다.
  17. [17] 1992년이면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 베트남 전쟁 이후 20여 년이 지났을 때이다. 가게를 지키던 40대 이상의 중년 한인들이라면 충분히 참전용사 출신들이 있을 수 있다.
  18. [18] 그러나 비단 일본 방송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 방송에서도 한인 가게가 털리는 모습은 거의 보도하지 않고, 옥상에서 총을 쏘는 한인들의 모습만 찍어서 논란이 됐다.
  19. [19] 1982년 해고된 두 미국 백인 자동차 기술자들이 술집에서 우연히 한 동양인을 일본차 때문에 일본인으로 여기며 죽인 사건. 그러나 죽은 빈센트 친은 중국인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무죄로 끝나면서 중국 및 동아시아 이민 단체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힌 일을 다루었다. 지금도 범인 2명 모두 잘만 살아있다. 그나마 30년이 지난 2012년 범인 중 하나인 로널드 에벤스는 친을 죽인 게 잘못이란 인터뷰를 했지만 그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파직한 크라이슬러 모터스에 다시 복직했으나 소송당하고 성깔있던 터라 회사에서 결국 다시 잘렸다. 또다른 범인은 마이클 니츠는 어떠한 인터뷰도 피하며 잠적하듯이 살아있다.
  20. [20] 위에서 총기 관련해서 대부분이 사실 권총 같은 게 아니라 AR15 등 소총 계열로 무장했단 주장이 나온 근거로도 한 가게가 방어력이 취약해 털려서라고 나온다. 보석 가게가 털리자 그 보석 가게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총포상에서 총을 싸게 뿌렸고 한인들이 단체로 그걸로 무장했다는 것.
  21. [21] 로드니 킹 사건 이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은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다. 보수언론도 흑인들과의 정치싸움에서 좋은 명분이자 방패막이로서 한인들을 띄워줬을 뿐이었다. 실제로, 격한 대립 구도에 끼어들면 죽어나는 건 주민들뿐이다.
  22. [22] 이 점은 시대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기존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식 문화를 더 익숙하게 여기며, 초기 이민자들보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2, 3세대로 바뀌고, 미국이 이민자를 제한한 후 들어온 새로운 이민자들은 전문적인 직업이 많아 미국 현지 사회와의 교류가 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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