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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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s Angeles Riots

1. 개요
2. 전개
3. 원인
4. 영향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5.1. 한인 사회의 대응
5.2. 폭동 당시 한국인 조폭들은 뭘 하고 있었나
5.3. 폭동 이후
5.4. 한인 사회의 변화
6. 기타

1. 개요

4.29 시민봉기(4.29 Civil Uprising)[1]라고도 불리는 사건.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미국 역사상 12번째 흑인 폭동이다. 비단 흑인뿐만 아니라, 온갖 차별로 인해 소외된 히스패닉계까지도 가세하였다.[2]

2. 전개

폭동의 발단은 일명 '로드니 킹 사건'에서 출발한다.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순찰대 소속의 백인 경찰관 네명이 210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과속(115mph, 185km/h)으로 달리던 현대자동차흰색 엑셀 승용차[3] 1대를 추격전 끝에 세우고 범인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경찰은 운전자인 로드니 킹[4]을 끌어냈지만, 그는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고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당시 경찰은 킹이 마약인 PCP를 복용하고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하는데 킹이 체포된 지 며칠 후 여러번 마약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고 한다.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자신이 과속으로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영상)

피투성이가 된 킹은 그대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데,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비디오로 찍어 방송사에 제보를 하게 된다. 다음 날 이 영상은 뉴스에 방영되었지만 방영된 영상은 81초짜리 원본 테이프가 아닌 65초짜리 편집된 테이프였고, 편집되어 사라진 분량은 바로 로드니 킹이 경찰에게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이였다. 즉 언론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조작되어 보도된 것이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장 데릴 게이츠 총경은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언플만 하고 있었다. 결국 3월 15일에 킹을 구타한 경찰관 4명은 법원에 기소되었다. 7월 9일에는 경찰 위원회가 과잉폭력 인정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정말 문제가 잘 해결될 듯 싶었으나...

해가 넘어가 1992년 2월 5일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 동안 진행된 법정 심의 결과, 4월 29일에 발표된 판결은 4명의 경찰관 중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 당시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이름은 스테이시 쿤, 로런스 파월, 티머시 윈드, 시어도어 브리세노, 롤란도 솔라노이다. 당시 배심원은 10명의 백인, 1명의 히스패닉, 1명의 아시아인으로 구성되었고 검사 테리 화이트는 흑인이었다. 취재 열기가 뜨거운 탓에 재판지를 옮겼는데 그 동네 사람들 대신 근처 다른 동네 구역, 그것도 백인 및 히스패닉 구역에서 배심원을 모집했다.

이런 판결에 분노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판결이 발표된 그 날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점점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그리고 방화가 TV가 방송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자리를 비워서 초동진압 시점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SWAT의 창설자인 게이츠 총경은 이 사건으로 직위해제, 1992년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한다. 이후에도 게이츠 총경은 경찰 관련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폭동으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55명, 부상자 2,383명, 체포된 사람은 13,779명이었다. 그리고 진압에는 경찰뿐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육군 병력 6,000명과 다수의 장갑차, 연방 육군 병력 1,000명이 동원[5]되었다.

3. 원인

결국 폭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인종차별이었다. 거기다 당시 LA의 슬럼가에는 극빈층 흑인이 늘어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고 자신들의 권리를 표현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 로드니 킹 사건이 터지자 격분한 흑인들이 자신들의 불만과 권리를 폭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전에도 로스 엔젤레스의 경찰은 흑인의 불신을 샀는데 당시 LA경찰국장이었던 데릴 게이츠 이 양반은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유명했다. 마약사범 검거를 위해 장갑차에 충각을 달아 가정의 벽을 부수고 특수요원처럼 무장시킨 경찰을 투입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6], 이 무자비한 진압 방식으로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니 로드니 킹 사건과 경찰관이 무죄를 선고받자 감정이 폭발한 것. 사건이 종결된 후, 위에도 적혀 있지만 1992년 6월 28일에 LA 경찰국장 데릴 게이츠가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7] 이후 원인 제공자인 경찰관 4명은 연방 민권법 위반 혐의로 모두 재기소되었고 그 결과 2명에게는 유죄가 선고되고 2명에겐 무죄가 선고되었다.

다른 문제로 비교적 최근에 재조명되기 시작한 원인은 LA 언론 특유의 삽질에 있었다고 할수 있다. 즉, 애초에 원인 불명으로 언론 자체가 한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차가웠다. 두순자 사건 이전에부터도 "Korean Invasion"이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내 놓았는가 하면 지역 흑인정치인들이 이걸 적극 활용하는 꼴까지 발생했으니 이미 이쯤되면 폭동이나 충돌을 피할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는 흑인들 측에서도 시인하는 바이기도 하다. 사회학자들의 분석은 대부분이 전형적인 미디어 플롯에 의한 피해자 타기팅 사례의 하나로 꼽히는데, 이건 사건 전 보도 뿐 아니고, 사건 당시 보도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되는 바이기도 하다.

4. 영향

이 사건은 현대의 인종차별 문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차별을 표현하는 단어는 암묵적으로 터부화되었는데, 이를 테면 인종을 색깔이 아니라 그 발상지로 지칭하는 풍조가 퍼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같은 명칭이 대표적으로, 근래의 픽션 등에서는 인종차별적인 악당이 등장하여 '너희 검둥이, 아니 요즘은 소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 부르던가?'라는 식의 대사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언급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199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차별 문제[8]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LAPD는 관련자들이 싹 물갈이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많지 않던 유색인종 경찰이 중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경찰수사에 인권 문제가 심도있게 논의되었으며 경찰들이 매우 몸을 사리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사용해오던 폭행과 협박이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작품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요 무대인 로스 산토스의 모티브는 LA이고 스토리도 흑인 갱과 경찰관의 이야기다.[9] 작중 시간 배경도 1992년. 거기다 최후반부에 나오는 폭동까지 완전히 LA 폭동의 오마주다. 게임 내에서 로스 산토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보면 경찰관들이 시민 한 명을 다굴치는 이스터 에그가 있는데, 이는 로드니 킹 사건의 패러디인 듯하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1995년작 영화 스트레인지 데이즈에서도 로드니 킹 사건과 이후 벌어진 폭동과 유사한 내용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블랙팬서에서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되는 배경이 1992년이며 흑인들이 무장을 준비하는 모습에서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다.

5. 한인 사회와의 관계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지금도 LA의 대표적인 흑인 슬럼가로 알려져 있는 컴튼(Compton, 뮤직비디오에도 자주 나오며 흑인 갱단의 근거지로 많이 묘사되기도 한다. GTA 산 안드레아스의 주인공 CJ가 사는 동네 갠튼(Ganton)은 이 곳의 패러디)은 LA의 코리아타운과 LA의 위성도시인 토랜스(Torrance)의 한인타운 사이에 햄버거처럼 끼어 있다. 즉 이 동네 흑인들이 뭔일 있어서 자기 동네 밖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한국 사람들 사는 동네이다. 당시 경찰의 대처에서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폭동을 막기 위해 백인거주지역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막았지만 한인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도 몰려가도록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계기가 흑백갈등이라 백인이 일차적인 목표가 된다 해도 시위가 폭동으로 변한 뒤에는 초기의 목적성이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흑인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한인들의 거주지가 흑인 거주지와 바로 접해있어 주변으로 확산되면 피해가 생길 것임이 분명한 폭동에 대해, 아예 차단하는 게 아니라 폭동지역과 거리가 있어 대응할 시간이 충분한 특정구역을 보호하려는 식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여 한미간의 외교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게다가 주방위군이 출동하고도 북쪽으로 가는 흑인들을 제 때 차단하지 못했기에 피해는 심각했다. 다만 흑인들과 한인들의 갈등도 어느 정도 원인으로 작용했는데, 흑인 래퍼들은 폭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한인들에 대한 불만을 곡으로 써서 비난하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래퍼 아이스큐브의 Black Korea란 곡이다. # 드렁큰 타이거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2부에서 잠깐 나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폭동이 터지자 미국 언론들은 로드니 킹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순자 사건을 폭동과 연관지어 집중 보도,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어쨌든 이 사건으로 직접적으로 폭력에 노출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한인사회의 피해는 최소 3억 5천만 달러의 손해,[10] 2,300여 개의 점포손실, 그리고 가게 주인만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청년단 소속이었던 18살의 이재성은 한인간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였다. 서로를 폭도로 착각해서 벌어졌고, 가해자는 처벌되지 않았다. 기사 참고 소수지만 한인이 운영한 가게 중 피해를 입지 않은 곳도 존재했는데, 주로 평소에 흑인들을 편견없이 대했거나,[11] 폭도들이 미치지 못한 지역 정도이다.

또한 한국인의 가슴에 두번 못을 박은 이들은 바로 한인 중 "이 모든 것이 한인 탓이다"라는 식으로 성토하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과 대립하는 백인 및 정치적, 인종적 동맹관계였던 히스패닉들은 더욱 한국인 탓을 해댔다. 단지, 미국 측 시각에서 보면 한인들에 대한 로스앤젤레스 시 정부의 갈등이 쏟아진, 한마디로 불똥튄 상황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즉, 당시 LA의 지방정계는 이런 저런 일로 상당히 시끄러웠는데 이 상황에서 흑인 정치운동가들이 등장하면서 한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언플을 시작했고 이는 LA 타임스 등의 기사에서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미국의 시각은 양자간의 갈등보다는 미국의 당시 언론의 플로팅 문제가 결국 폭동을 키워 놓은 주 원인이 된 것으로 보고 있는 셈. 더군다니 LA내부에서 경찰 책임자 해임건에 대한 여러 갈등이 산적해 있다 보니 이게 인종 이슈로 간 거고, 사실상 당시 흑인들의 정치운동 행태도 흑인들 내부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시안은 미국내에서 흑인보다도 소수이기 때문에 백인에게 당한 차별을 아시아계에 퍼부었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트리비아에 가깝긴 하지만 모든 일의 근원인 로드니 킹 본인이 강도질을 벌인 대상이 다름 아닌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인들은 로드니 킹을 안 좋게 보는 사람도 있다.

5.1. 한인 사회의 대응

어떤 한인 가게 주인들은 산탄총을 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흑인들과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12] 뉴스에 방영된 동영상 중 가장 유명한 동영상은 "가주마켙"의 주인과 점원들이 소총산탄총, 글록17 등으로 무장하고 거리를 경비하며 권총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이렇게 폭동 속에서도 털리지 않고 정상영업을 계속한 가게들은 옥상에서 총 들고 지킨 가게들이었다. 대개의 가게들이 쇠창살과 안전문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평소의 도둑 하나 둘은 막아줄 수 있어도 무리지어 떼로 덤벼드는 폭동 앞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옥상에서 총을 들고 강력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을 보여주자 폭도들이 알아서 피해갔다고 한다.

사실 한인타운에서 경비에 동원한 민간인의 사용이 제한되어 있는 일정 크기 이상의 중화기는 모두 장난감 모형 총이었다고 한다. 발사한 산탄 탄피 같은 걸 땅바닥에 좀 뿌려놓거나 실루엣만 기관총처럼 보이는 나무나 플라스틱 모형을 만들어서 옥상에 올려놓은 경우도 있었는데, 기관총이 등장했다는 신고를 받고 미국 경찰들이 와서 조사해보고는 가짜라는 걸 깨닫고 그 황당한 발상과 용기에 감탄했다고 한다. 사실상 교란으로 물리친 셈. 다만 이는 이번 사건처럼 단기적으로만 먹힐 만한 발상이니 폭동이 일찍 끝난 게 다행일 따름. 다만 실제로 AR-15AK 계열 화기, 그리고 UZI가 사용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여기 또 여기참조. 원래 AR-15와 AK는 단발사격 전용으로 민수용으로 존재했고, UZI의 경우에는 민수용 자동화기로 판매가 되었다가 단종된지 오래되지 않은 때였다.[13]

또한 재미교포들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대처도 빨랐다. 사건 당시 한인 AM 라디오 채널인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어느 곳에 피해가 있으니 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실시간 중계를 했다.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이 대목은 무릎팍도사 이장희 편을 보면 그 일화가 자세하게 나온다. 이 구호활동으로 인해 당시 가수 이장희가 사장으로 있었던 라디오 코리아는 미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14]

단지, 이 당시 대처가 빨랐다고 해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 처음에 한인들 사회에서도 가게를 지켜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고 한다. 이걸 지키려면 결국 총을 들고 가야 하는 경우인데 이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저런 규제 문제가 있다 보니 한인들 내부에서도 그러다가 독박쓰는 거 아니냐는 여론과 우리는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맞선 것이다. 사회의 구성상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등이 섞여 있던 문제도 이런 갈등에 한 몫을 하게 된 셈이라고 볼수도 있는데, 정리하면 사람들이 권리숙지가 안 되었고 사회적 신분의 구성상 무기 소지에 대해 모두 같은 입장이 아니었던 셈. 때문에 먼저 언급된 라디오 코리아에서도 맞서 싸우라는 방송을 내기 전까지 상당한 숙고가 필요했으며, 그걸 시행했을 때는 이미...수많은 건물들이 불타고 약탈당하고 수많은 한인들이 죽거나 강간 당한 후였다고 한다.

LA 폭동이라고 하면 보통 두순자 사건 때문에 미국 내에서 한인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절에 한인 타운의 자경 활동을 직접 봤던 미국 경찰관들에게는 의외로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공공기관 중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 경찰서와 소방서였는데,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차에 폭도들이 총을 쏴서 불 끄러 가는 것을 막았던 일까지 있었다. 폭도를 잡는게 아닌 단지 불 끄러 가는 사람에게 말이다. 결국 각급 소방서들은 선별적으로 장비와 인원을 파견해서 방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한인 자경단들이 총을 들고 와서 이들을 지켜주었다.

자기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업주로서의 입장도 있겠으나, 치안에 대한 보수성을 지닌 한국문화의 특성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재해 체제를 지키면서 가게는 계속 정상 영업을 해서 일상을 지켜나가는 행동은 지극히 보수적인 미국 경찰관들의 감성에도 와 닿았는지, 지금도 당시를 추억하는 나이든 경찰관들은 그 때의 혼란 속에서도 괜찮게 평가하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경찰들이 달아나기 바빴다. 1992년 5월 3일자 LA 타임스에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총포상의 인터뷰에 의하면 "경찰차가 4대나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마자 (경찰들이) 거의 1초도 안 돼 죄다 차를 타고 도망갔다. 솔직히 실망했다"고 한다.

폭도들도 살해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자신들이 피해를 입겠다 싶으면 금방 달아났다. 일례로, 히스패닉계 마을에서는 갱단들의 저항에 의해서 폭도들이 잽싸게 물러났다고 한다.

(위의 영상에서 안경 쓰신 분은 "데이비드 조", 모자 쓰신 분은 "리처드 박"이라고 한다.)

당시 한인타운의 한인들의 총격전 영상.[15] 징병제로 인해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이 군대 경험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가전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16] 문제는 이 앵커가 매우 인종차별적인 태도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것.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 가게 주인들이 총기를 들고 자신의 가게를 지키는 상황으로, 당연히 정당한 저항이다. 그런데 이 앵커는 그들(영상의 한국인들)이 폭력 사건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마구 총을 쏴대고 있습니다!" 이런 뉘앙스로. 덕분에 영상 댓글도 앵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욕하는 것이 태반.

2010년대에 나온 "L.A. Burning" 다큐멘터리에 데이비드 조의 자세한 인터뷰가 나온다. 당시 폭동 발발 후 경찰들은 순식간에 도망갔고, 결국 자신들이 직접 가게를 지킬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하여간 폭발하면 도망갈 것들이 왜 인종차별을 해서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이 쓴 책을 보면 당시 일본 방송이 방송에서 한국인들이 총을 쏘는 모습만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한국인이 과격하다는 편견을 심으려고 해서 비판한 적이 있다.[17]

재미교포 영화감독 크리스티나 최는 1988년 "누가 빈센트 친을 죽였는가?"[18]라는 다큐멘터리로 작품성을 인정받은 감독이다.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4.29 사이구(영어 제목도 Sa i G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으나 이 작품은 그녀의 지뢰작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많은 가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보험 처리로 팔리지 않던 재고까지 보상받아 오히려 이득인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탈세 등의 목적으로 보험사에 판매량을 엉터리로 하던 가게들은 신고한 만큼만 보상받아서 큰 피해를 입었다. 자업자득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세계의 한민족과 흑인들의 갈등이 생겨난 것처럼 묘사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작 한인층에서는 교포들의 피해를 걱정하면서도, 인종차별 이슈 또한 이해한다는 태도가 공존했다. 오히려 교민들 사이에서도 일부 여론이 흑인들을 무시했던 정황에 대한 반성이 많이 나왔다. 고립적인 태도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유도 "당연한" 공존의 필요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한인교회는 봉사를 많이 했으나 이후 봉사활동 등을 더 늘린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비판되고 있는 것은 역 인종주의, 즉 흑인들이 다른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성을 보이는 태도를 두고 지적하는 경향은 강해졌다. 사실 흑인 커뮤니티는 한인들하고만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니었고 당시에는 아직 비주류인 히스패닉이라든가 다른 소수인종들과도 사이가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대응도 일부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경찰들은 한인 자경단을 가게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고 무장보복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오인했던 것인지 몇몇 이들을 체포했고 무기를 압수했으며, 방어하고 있는 상점에서 해산시켰다. 그리고 그 상점은 방어자들이 해산된 다음에 불타버렸다(...).[19] 사실 당시 공권력의 대응 방식은 전체적인 불신으로 이어졌고, 퍼거슨 사태 당시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자주 까이는 소재가 되었다. 물론 퍼거슨 사태 당시에는 대통령이 주방위군 육군 투입을 미루라고 한다든가 하는 이런 저런 이슈가 있었지만 약탈당한 가게들 입장에선 그게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 때문에 이 사태를 보는 시각은 LA나 퍼거슨이나 정부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인종주의는 이상이지만, 문제는 그 흑인들의 분풀이가 행해지는 대상은 백인들이 아닌 다른 소수인종들인 사태가 소규모로 재현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억새바람>도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루었고, 드라마 아테나:전쟁의 여신에서 손혁(차승원)이 윤혜인(수애)를 이 사건 때 만난다.

더 퍼지 시리즈의 한 비디오에서 권총을 들고 다른 사람을 쏘는 퍼지 비디오가 LA 폭동 당시의 한인들의 모습이다.

흥미롭게도 2010년대 들어 미국쪽 인터넷에서는 LA 폭동 당시 한인들의 대응을 소재로 하여 rooftop korean이 일종의 이 되었는데 총기소유를 원하는 미국 보수 지지층에서 말하는, 총으로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주장의 좋은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딴에는 한국인들이 멋있게 활약했다는 칭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었다는 데서 좀 씁쓸하게 볼 수도 있는 부분. $

5.2. 폭동 당시 한국인 조폭들은 뭘 하고 있었나

한국인 조폭들은 평소 보호비를 갈취하던 상인들을 내팽겨쳐버리고 도망쳤다.

당시 한인타운에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한인타운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삼고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을 갈취하던 한국인 조폭들이 폭동이 터지자 한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흑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혼란을 틈타 한인 상점의 물건을 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는 무서워서 잽싸게 도망. 가까운 동네의 히스패닉 갱단이 어찌됐건 자신들의 동네 주민들을 지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이들도 평화시에는 주민들을 착취하겠지만.

이 사례뿐만 아니라 조폭들은 세계 각지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 파라과이에선 한국인 조폭들이 한인 상대로 등쳐먹다 걸려 추방당한 바 있고 프랑스에서는 외인부대 출신 한국인이 주인인 '라 파리지엔느'[20]라는 술집이 있었는데 이 가게에 생판 모르는 한국인들이 와서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려다 주인이 파리 갱단 친구들(외인부대원 동기)에게 연락하자 조폭들이 쫄아서 엎드려 울며불며 빌었던 실화가 있다. 그야말로 자업자득.

당시에 한인타운을 구역으로 삼은 조폭들은 한국에서 건너간 자들로, 당시에 한국 정부에서 펼쳤던 캠페인인 범죄와의 전쟁의 단속을 피해서 미국으로 도망친 조폭들이었다. 당연히, 같은 한국인이라도 갱단 같은 범죄자들은 경원시 당하는 입장이고 단속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지 얼마 되지 않아 한인사회로 들어가지 못 했으므로, 위기가 터졌을 때 동질감이 적었다는 점도 원인이긴 했다.

애초에 조폭들에게 보호를 바라는것 자체가 문제다. 생각해보라. 왜 조폭이겠는가. 이 일이 벌어진 뒤로 열터진 한국인 상가주들이 여럿 모여 아예 자경단 조직하여 조폭들이 여전히 돈내놓으라 오면 늬들부터 쏴죽인다면서 돈만 갈취하던 놈들이 뭐하러 오냐고 분노하던 사례도 있었다...당연하지만 조폭들은 뺑소니....

5.3. 폭동 이후

당시 한인들의 피해는 LA 폭동 전체 피해액의 절반일 정도로 처참했다. 당시 18살이었던 교포 이재성은 한인 자경단끼리 서로 폭도로 오인해서 쏜 총에 맞아 즉사했고, 총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으며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또한 고가품이나 식품 등을 강탈하고, 건물까지 훼손하면서 한인사회에 커다란 후유증이 남았다. 게다가 폭동 초기에 파견된 경찰에 이어서, 방위대마저도 주로 백인 밀집지역에 몰리는 바람에, 한인촌은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했다.

백인 사회에서는 한인들을 모범 소수민족(model minority)이라하면서,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흑인들의 공격을 방조하는 모습을 보였다.[21]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피트 윌슨은 재정 때문에 한인촌에 대한 지원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서 교민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또한 애초에 언론들부터가 상술한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며 한인에 대한 흑인들의 공격을 대놓고 부추긴 주범들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한국인들이 흑인 상권을 침해했다고 까는 추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명백하게 한인들을 "희생양"으로 쓰겠다는 모습이었고, 상황을 파악한 교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어쨌든 한인들은 재기를 위해서 복구작업을 했고, 몇몇 한인들은 흑인과의 평화를 원하며 거리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로 히스패닉들과 흑인들과 결혼을 통해 좀 더 가까워지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덕분인지 현재는 미국 내 한인과 흑인간의 감정 갈등은 낮아진 편이라고 한다.

5.4. 한인 사회의 변화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로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인으로서 권리를 얻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인들이었으며, 심지어 미국 시민권 취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세금만 더 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 즉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에 무심했기 때문에, 흑백 양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이었다.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교포들이 미국 시민권 취득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서, 미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두순자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 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다른 소수민족과의 더 많은 인적 교류가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22]

6. 기타

2014년 8월 미국 미주리 주에서 또다른 흑인 소요사태인 2014년 퍼거슨 소요가 벌어졌고, 또 한인 상가가 불타고 약탈 당했다. 정치계 진출이건 인종교류건 결국 아무런 영향도 없이, 다시금 흑인 동네 옆에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보게된 것. 미국/인종차별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결국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흑인들이 다시금 그들의 분노를 자기들 보다 소수인 인종에게 배출하고 만 것이다.


  1. [1] 한국계 미국인 일레인 김(Elaine H. Kim) 교수가 붙인 명칭이다. 4.19 혁명과 비슷한 명칭. 이게 아니다 실제로 구글에 Sa-i-gu라고 치면 뜬다. 이 명칭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인종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계층구조와 그로 인한 반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본다. 백인들의 거주지역에만 중점적으로 폴리스 라인을 친 위치도 그렇고.
  2. [2] 물론 참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히스패닉들은 딱히 흑인들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민주투사들에 저항하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으로 상점주들과 갱스터들은 이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한인 등과 함께 총으로 무장하고 저항했다. 게다가 로드니 킹에게 폭력을 휘두른 경찰 4명 중 한 명인 시어도어 브리세노 경관은 히스패닉계였다.
  3. [3] 사건 이후 현대자동차 측에서는 그 차량이 그런 속도로 달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과속이라는 자체는 의심이 없었다.
  4. [4] 2012년 6월 17일 자택의 수영장에서 익사했다.
  5. [5] 연방군이 폭동 진압에 동원된 건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다.
  6. [6] 영화 스트레이트 아우터 컴튼에서 제대로 묘사된다.
  7. [7] 참고로 게이츠는 이후에 자서전에서 경찰국장 자리에서 질려서 자의로 물러났다고 적었다.
  8. [8] 정확히는 흑인과 백인 간의 문제.
  9. [9] 덧붙여 산 안드레아스의 악역인 프랭크 텐페니 경관은 백인으로 설정하면 인종차별을 조장할 것 같아 흑인으로 교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소리가 있다.
  10. [10] 그 당시 일어난 모든 피해액이 약 7억 달러. 즉 한인 사회가 전체 피해의 절반 이상을 받은것이다.
  11. [11] # 실제로 LA에서 환전상을 겸한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홍정복은 그 지역의 흑인 및 히스패닉들에게 MAMA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누구에게나 친절했는데, LA 폭동 당시 흑인 주민들이 교대로 경비를 서준 덕분에 아무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9년에 히스패닉 갱단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기사 참고
  12. [12]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이들의 활약상은 지금까지도 'Roof Koreans'라 불리며 대접받고 있다.
  13. [13] 자동화기 판매 금지가 1986년. 이후 자동화기는 중고거래 등은 가능하지만 자격요건이 까탈스럽고 가격이 수만 달러 수준이라 매니아들이나 구입한다. 이 이전에는 총기규제가 워낙 약해서 국군이 쓰는 K-1과 K-2가 거의 그대로 미국에 수출되었다. 이후 총기규제가 걸리자 K-2의 소염기, 개머리판 등의 모양을 바꾸어 Daewoo DR-200이라는 이름으로 수출한다. K-1은 그 구조상 법에 맞게 수정시 사용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서인지(화염이 세서 소염기가 커야 한다.) 수출이 중단된 듯.
  14. [14] 이장희는 1970년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1989년에 라디오 코리아를 세웠다.
  15. [15] 이 영상은 영화 "프리덤 라이터즈"의 극초반부에 삽입되기도 했다.
  16. [16] 1992년이면 한국전쟁 이후 40여 년, 베트남 전쟁 이후 20여 년이 지났을 때이다. 가게를 지키던 40대 이상의 중년 한인들이라면 충분히 참전용사 출신들이 있을 수 있다.
  17. [17] 다만 이건 일본 방송은 물론 현지 미국 방송에서도 한인 가게가 털리는 모습은 거의 보도하지 않고, 옥상에서 총을 쏘는 한인들의 모습만 찍어서 논란이 됐다. 하지만 NRA를 비롯한 보수단체들에서는 흑인들을 까내리기 위해서 이민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NHK의 기자들은 한국인 슈퍼마켓 앞에서 전격 취재를 했는데, 이 장면이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
  18. [18] 1982년 해고된 두 미국 백인 자동차 기술자들이 술집에서 우연히 한 동양인을 일본차 때문에 일본인으로 여기며 죽인 사건. 그러나 죽은 빈센트 친은 중국인이었다. 그리고 사건은 무죄로 끝나면서 중국 및 동아시아 이민 단체들의 격렬한 항의에 부딪힌 일을 다루었다. 이전 글에는 빈센트 친을 죽인 범인이 나중에 중국 갱조직에게 살해당했다는 엉터리 서술도 있었으나 헛소문이며 범인 2명 모두 잘만 살아있다. 그나마 30년이 지난 2012년 범인 중 하나인 로널드 에벤스는 친을 죽인 게 잘못이란 인터뷰를 했지만 그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파직한 크라이슬러 모터스에 다시 복직했으나 소송당하고 성깔있던 터라 회사에서 결국 다시 잘렸다. 또다른 범인은 마이클 니츠는 어떠한 인터뷰도 피하며 잠적하듯이 살아있다.
  19. [19] 위에서 총기 관련해서 대부분이 사실 권총 같은 게 아니라 AR15 등 소총 계열로 무장했단 주장이 나온 근거로도 한 가게가 방어력이 취약해 털려서라고 나온다. 보석 가게가 털리자 그 보석 가게 사장이 자신이 운영하던 총포상에서 총을 싸게 뿌렸고 한인들이 단체로 그걸로 무장했다는 것.
  20. [20] 현재는 폐업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소문이 있다. 다만 이 술집의 존재 자체가 약간의 카더라성이라 신빙성은....
  21. [21] 로드니 킹 사건 이후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은 보수, 진보 언론을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다. 보수언론도 흑인들과의 정치싸움에서 좋은 명분이자 방패막이로서 한인들을 띄워줬을 뿐이었다. 실제로, 격한 대립 구도에 끼어들면 죽어나는 건 주민들뿐이다.
  22. [22] 이 점은 시대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기존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식이 더 익숙하고 초기 이민자들보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2, 3세대로 바뀌고, 미국이 이민자를 제한한 후 들어온 새로운 이민자들은 전문적인 직업이 많아 미국 현지 사회와의 교류가 늘게 되었다.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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