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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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독일어)
Osztrák-Magyar Monarchia(헝가리어)

국기

문장

1867년 ~ 1918년

표어

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나뉘어 지지 않으리다.
뭐? 결국은 나뉘어 졌다.)

국가

민중의 노래

위치

동중부 유럽

수도

정치체제

입헌군주제,동군연합

국가원수

황제

언어

독일어, 헝가리어

민족

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등 다수

종교

로마 가톨릭

주요사건

1867년 건국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제 1차 세계대전
1918년 해체
1919년 멸망

통화

굴덴 → 크로네

성립 이전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멸망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1. 개요
2. 역사
2.2. 본격 다민족 국가
2.3. 발칸 반도 진출 시도
2.4. 재편성 계획
2.5. 국내 정세
2.6. 1차대전 패전 및 해체
2.7. 역사 연구상 난점
2.8. 역대 황제
3. 행정구역
3.1. 시스라이타니아
3.2. 트란스라이타니아
3.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4. 재편성 계획
5. 기타

1. 개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유럽제국.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인들의 대타협(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Ausgleich,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Kiegyezés)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엄청나게 복잡한 역사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1]로 역사학도들을 엿먹이는 본좌지만, 유럽 근대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나라다.

정식명칭은 아래에서 보다시피 어마어마하게 길다.

독일어 : 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

헝가리어 :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

정식명칭의 뜻은 '제국회의(라이히스라트)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슈테판) 왕위의 영토들'이다.

제국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는 오스트리아 제국의회의 의원을 뽑는 나라들이란 의미며, 성 이슈트반(헝가리의 초대 왕) 왕관이란 헝가리 왕이 대대로 써온 왕관으로 이 왕관의 영토라는 것은 헝가리 왕국들 뜻한다.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의 영토가 제국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와 별도로 언급된 것은 헝가리가 이제는 제국의회의 일원이 아닌 독립적인 의회와 체제를 가진다는 것이다. 별명은 K&K(KuK-Kaiser und König(lich); 카이저 운트 쾨니히(리히)) 제국.[2]

2. 역사

2.1. 대타협

1848년 3월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1830.8~1916,11, 재위 1848.12~1916.11)는 신(新)절대주의 통치(이른바 바흐 절대주의)로 일관했지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이 대세인 가운데 시대에 뒤떨어진 통치 방식은 오스트리아에서도 통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의 프로이센을 '2등 국가'로 무시하며 타협을 거부한 고자세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지자(1866.7), 독일연방에서 강제로 쫓겨났다.(프라하 조약)[3]

이 패배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능력이 크게 쇠잔했음을 직감한 여러 소수민족들[4]이 점차 반합스부르크를 기치로 분리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고, [5]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에 오스트리아 정부와 황제는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비중(약 20%)인 헝가리인들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체제를 만들었다.

2.2. 본격 다민족 국가

'대타협'의 기본 골자는,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풀어내어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6]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곧 헝가리 왕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제국에 긴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만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고 나머지 사항은 두 나라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재정 분담금과 관세 따위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7]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조차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수의 민족집단이 흘러넘쳐나고 있던 제국의 상황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이 나라의 정식명칭은 '제국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왕국과 제후국들'이었다- 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루테니아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며, 유대인도 많았다.[8] 그야말로 민족의 샐러드볼이었던 셈.

2.3. 발칸 반도 진출 시도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더 많은 민족 집단이 흘러넘치고 있는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열강이 1884~85년의 베를린 (연합)회의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운력이 뒤떨어졌던 오스트리아는 이럴 기력이 없어서 가까운 발칸 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의 캐치프레이즈가 곧 오스트리아의 '동진 정책'인데, 이는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결국 1908년 튀르크에서 '통일진보위원회(일명 청년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튀르크가 혼란에 빠지자 잽싸게 보스니아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러시아의 분노를 사게 된다.[9]

사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나름대로 발칸 문제를 떠맡아야 했던 사정이 있다. 민족주의란 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과 달리 19세기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사상이었고, 실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대다수의 신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열렬히 지지했고, 프랑스를 관광태울 정도로 강대한 신생 독일제국이 오스트리아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군사력와 외교력이란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따라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강제로 배제되어 서쪽과 남쪽으로 판로를 확장할 길이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 발칸 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결정이기도 했다. 문제는 당시 갓 독립을 획득한 발칸 국가들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로 고분고분 들어가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

2.4. 재편성 계획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명칭으로 세간에 알려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제안하고, 정치가 아우렐 포포비치(Aurel Popovici)가 1906년 세부 안건을 작성한 방안. 시대를 앞서간 EU 모델로도 평가받는다.

비록 독일계들이 헝가리인들에게 권력을 배분하고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다른 민족들은 여전히 동등한 주권이 없었다. 또한 아무리 독일계와 헝가리인 들이 국내 인구수 1, 2위라지만, 둘을 합해도 겨우 44% 정도라, 제국내 반도 안되는 민족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면, 이중제국 체제가 굉장히 불안정하며 결코 오래 못 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빼면 크로아티아인만 그나마 제한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고,[10] 그 밖의 나머지 계층(보헤미아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등)은 제대로 동등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게다가 헝가리는 격렬한 민족운동 끝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자치권을 보장을 얻어낸 영향으로,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헝가리 내 다른 소수민족 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걱정할 정도였다. 이중제국 성립 이후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민족들은 오히려 헝가리에서 보다 핍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11]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이런 민족 불균형과 민족 분규를 해소해, 좀 더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전 국토 내부 경계선을 민족 및 언어권 위주로 다시 그리자고 제안했다. 새로 편성한 각 지역에 자치권을 줘 제국을 아예 연방국가로 만들자는 것인데, 이것을 가칭 대오스트리아 합중국(Vereinigte Staaten von Groß-Österreich, United States of Greater Austria)이라고 했다.[12] 이 계획 아래 각 언어나 문화 정체성을 살리고 민족간 불균형도 바로잡자는 뜻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황태자가 본인이나 독일계의 기득권도 선뜻 내놓겠다는 매우 대인배스러운 방안이었다.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에 따른 지도.[13] 제국 안에 새로 설정할 지역들의 경계선이 있다. 초록색은 해당 지역의 주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이라 그 지역 내에서 다시 자치권을 부여 받을 지역들인데, 대부분 독일어 사용 주민들이 몰려 사는 곳들이다.

헝가리는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영토와 이권이 대폭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이 방안에 강력 반대했다.[14]. 그리고 남슬라브인의 패자를 꿈꾸는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자들도 이 방안이 실시되면 제국 내의 남슬라브인이 제국에서 이탈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위기를 느꼈으며, 이후로도 이 방안을 추진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남슬라브인을 회유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대공을 죽이고 이 계획에 결정타를 날려버렸다. 이에 격노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끝내 멘붕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고 나발이든 1차대전을 일으키며 제국까지 싸그리 날아간다(...).

다만 이 방안에 의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시대를 앞서서 EU의 초기 모델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1차대전 후 승전국들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을 여러 개의 민족국가로 분리 독립시킬 때 이 지도를 참고했다고.

2.5. 국내 정세

오스트리아는 세계사 교과서나 겉핥기용 입문서 등에서는 자유주의 사상을 심각하게 탄압한 것으로 나와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어있지만, 오랜 다민족 국가의 역사로 인해 기본적으로 '다른 것'에 관대한 국가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심각한 탄압을 받지는 않았다.[15]

요컨대 검열은 형식적이었고, 수많은 글들에서 여러 사상가와(심지어는 아나키스트(!)도)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해냈다.[16] 아니, 검열이고 자시고 당장 1911년 제국 의회에서 이탈리아계 정당 소속 의원이 이탈리아계 영토의 독립을 부르짖고 있을 정도다(...).[17]

1907년 남성 보통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오스트리아 쪽 제국 의회의 정당 구성만 봐도 상식적으로는 군대를 보내 때려 잡아도 이상할 거 없을 과격 민족주의나 좌파 계열 정당들이 버젓히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온건하긴 하지만 분명 좌익이었던, 빅토르 아들러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 원내 제1당일 정도였다.[18]

오스트리아의 사회보장제도도 당시 세계 최고수준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20대 초반을 부랑아 짓을 하면서 보냈지만, 그런 노숙자에도 사회보장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몇년간 별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노숙자용 무료숙소에서 잠을 자고 무료급식소에서 밥을 먹으면서 보냈다. 이밖에 공립대학이나 고등교육도 무료였는데, 이론상 재능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교육받을 수 있었다. 무일푼이었던 화가지망생 히틀러가 국립미술학교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재능이 없어서였다.

다만 헝가리는 오스트리아보다 민족적 억압책을 펴 오스트리아 같은 정치적 다양성이 없었다. 헝가리는 강압적인 마자르화 정책 -나치의 민족말살 정책과 비슷한 것- 으로 슬로바키아인은 민족의 생존에 위협을 느껴야 할 지경이었다.[19]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정부, 황실과 군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이는 당대 유럽인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헌신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합스부르크 왕조는 1278년 이래 600년(!) 이상 그 땅을 지배하며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서 일어난 개신교의 전파와 오스만 투르크로 대표되는 무슬림의 침공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고, 합스부르크 지배자들은(스페인 합스부르크 또한) 자국을 정통 기독교 신앙의 보루로 여겼다.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

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뒤떨어진 산업화는 선발 산업국가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전체 산업생산량은 열강 중 가장 낮았지만(이탈리아보다 겨우 높거나 그보다 낮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농촌 사회가 성공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특히 헝가리와 갈리치아에서). 도시화에 따른 문제점들도 선발 산업국가들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또한 제국의 관료들은 선진적인 복지 정책들을 도입했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당대 유럽에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20]

군대의 경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는 군인이라기 보다는 경찰과 같은 치안 사무를 주로 맡고 있었고, 군사훈련이 힘들지 않았으며[21] 심지어 규율이 엄격하지도 않았다(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 행동이라도 결과가 좋으면 주는 훈장[22]도 있었다. 프로이센-독일이라면 상상도 못할 훈장). 또한 군대의 제복이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고 황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각종 행사를 밥먹듯이 벌이는지라 전 국토에서 인기가 폭발이었다고 한다. 친근하고 멋있는 군인아저씨들이라고 해야 할까.[23]

이런 느낌.

물론 이런 군대가 전쟁에서 제대로 싸울 리는 없었다. 심지어 군인들이 서로 쓰는 말이 달라서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이탈리아와 비교하자면 약간 셌지만[24] 세계대전에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도 쓸려 나갔다(...).

이처럼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롬바르디아 등 다른 지역들에서 한데 모여 나라를 지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한 문필가는 1918년 이후 사람들이 더 이상 '깃털 달린 모자를 쓴 군인들'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매우 불평한다고 쓰기도 했다.

2.6. 1차대전 패전 및 해체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으로 갔다가 패배한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승전국들이 함께 패전한 헝가리를 비롯해 체코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 트란실바니아, 갈리치아 같은 곳들을 죄다 독립시켜 버렸고 그 이후 오스트리아는 한때 봉으로 삼았던 스위스보다 조금 큰 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제위에서 밀려나서 제국은 해체되었다.[25][26]

제국이 해체되어 독립한 신생 국가들은 신생국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옛 종주국인 오스트리아에 식량이 수출되는 것을 거부했고, 농토가 거의 없는 산지만 남겨진 오스트리아를 덮친 기아 상태로 말미암아 국제연맹이 오스트리아에 식량을 긴급지원해야 할 정도였다.[27]

아무튼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하에서도 처음에는 주로 헝가리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수립된 후에는 슬라브인들 -특히 세르비아인들- 이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고 제국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지 않았고 결국 제국은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파국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 결코 단순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단적으로 헝가리 민족주의 독립 운동의 분수령으로 기념되는 1848년의 봉기만 하더라도 봉기가 진압된 이후 적지 않은 전직 반군들이 다시 제국군에 입대한 경우도 많았다. 같은해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졌다. 애초에 1848년 혁명 외에도 헝가리(혹은 보헤미아)의 반란, 오스트리아의 진압+회유, 재편입과 상황 안정(...)의 패턴은 1526년 이래 합스부르크 제국 역사상 무수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헝가리보고 츤데레라 해도 부족할 지경.

슬라브계 민족주의 문제만 하더라도 체코(보헤미아) 민족주의자들의 경우 1차대전 발발 이후 제국의 앞날 자체가 막막해질 때까지는 완전 독립이 아니라 헝가리 이중제국 같이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추구하는 계열이었다.[28]

1848년 혁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19세기의 민족주의라는 건 식민지의 반제국주의 독립 운동처럼 나라와 민족이 일치 단결된 투쟁이 아니라 사실 지식인들과 지방 정치적 엘리트들의 권력 잡기를 위한 불장난인 측면 또한 많았다. 이러한 문맥에서 근대 동유럽만큼 지극히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를 단순한 측면에서 보는건 역사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이중제국과 민족주의의 문제를 논할 때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민족주의가 제국에게 있어 골칫거리였던 건 사실이지만 제국이 망한 건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지 민족주의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게 아니다.

물론 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분할된 직접적 원인인 것은 사실이나, 이에 바탕이 되는 당시의 민족주의 발흥을 아예 무시한다는 것도 난감한 일이다. 당장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형성으로 헝가리인들의 분노가 잦아들었던 것은 사실이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제국에 속해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약해졌다는 견해도 많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한 새로운 문제는 오스트리아내 게르만계 인구의 민족주의의 방향 변화였다. 다른 시기라면 게르만이 나머지 민족들을 모으려 했겠지만, 이미 독일제국이 만들어진 이 시점에 들어서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 이런 분리주의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방침도 변경되었으니, 이전과 같다면 제국 소속 소수민족들의 비중 증가를 막기 위해 발칸반도의 현상유지정책을 펼쳤지만,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힘의 정치를 펼치고 영토 확장을 꾀하게 된 것이었다. 이런 팽창 정책은 발칸반도를 노리던 다른 강대국이었던 러시아와의 긴밀한 외교정책을 통해서 이뤄져야 했다. 제국은 러시아와 이에 대한 영토 및 영향권 합의는 봤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변경을 다른 강대국들에게 알리고 인정 받기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먼저 직접 통치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국제적으로도 문제가 되었으며 남슬라브 민족들에게는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강대국들에게 승인을 못받은 러시아와는 뿌리 깊은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3b정책으로 터키쪽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된 독일뿐이었고,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으로 독일밖에 남지 않는 효과를 가져왔다.(게다가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적극적인 러시아 배제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필연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국제적 입지 약화에 보탬이 된 것이 발칸 내 세르비아의 성장이다. 제국은 발칸에서 영향력이 약해진 것을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약해졌을 때 회복하려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대전에서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일주일 내외로 승기를 잡는(...) 엽기적인 전투력으로 큰 손실 없이 이득을 얻었고, 설상가상으로 본래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있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댓가로 오스트리아의 도움 없이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을 벗어던졌다. 보스니아 외에 모든 부분이 악화되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외교정책을 떨어진 위신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 일어난 일이 사라예보 사건이었고, 이를 빌미로 제국은 힘이 약해서 독일에게 백지 허락을 구한 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제국은 멸망했다[29]

2.7. 역사 연구상 난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와 이 당시 동유럽의 외교 관계와 역학은 1차대전 발발 이후 90년째 역사학자, 정치학자, 외교학자들을 골머리 썩이게 하는 문제이므로 단순한 접근이 어려운 실정이다.

일단 특정한 영토가 특정 인구의 소유물이라 규정하는 민족주의 자체가 이 당시 유럽에서는 여전히 발전 단계에 있었으며, 지금처럼 단순히 외세/동족으로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발칸 반도는 여전히 아니라고 봐야 한다

당장 보스니아 문제만 해도 해당 지역은 그 때나 지금이나 구교(가톨릭)도 크로아티아계, 정교세르비아계, 무슬림 알바니아계로 나누어져 삼분지계 구체적인 국가 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통치권을 인정[30]받은 1878년의 베를린 회의(베를린 의회) 이래로도 여전히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가 끼어들어서 소유권을 두고 사사건건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애당초 베를린 회의의 목적 자체가 신생 불가리아를 내세운 러시아의 팽창적 의도를 막으려고 했던 성격이 컸던 만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통치권 역시 비스마르크를 필두로 한 열강들이 이런 골치 아픈 문제 다루는 데에 익숙한 오스트리아에게 맡기자(...)라는 심정으로 양도한 측면도 컸다. 동진정책을 내세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자체의 야심도 없진 않았지만.

이 시기 내부 정책적으로 제국 당국은 3대 민족 집단 사이 관계를 조율하고 모든 종교적, 민족 집단에게 공평한 민권을 부여하고 법치에 근거한 행정을 추구했으나[31] 바로 옆의 세르비아쪽 민족주의자들의 불장난으로 이리 저리 위협 받고 있는 셈이었다.[3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자체도 내부 민족 문제에 신경을 기울이느라 외교적으로 세르비아 같은 세력들을 혼내주는 거라면 몰라, 영토 자체의 확장은 그다지 추구하고 있지 않았다.[33]

이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으신 분은 한국어로도 번역된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영명 The Austrian Mind)라는 책[34]을 참고하길 추천한다. 그 외에도 2013년 한국에 정식 발간된 디오세기 이슈트반의 《모순의 제국》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외교정책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나와 있다. 번역자가 저자에게 직접 배운 인물인 것도 장점. 다만 저작 시기가 좀 오래됐으며, 헝가리 학자이기에 헝가리 인물의 이야기 중심인 부분이 있다.

위의 항목이 말해 주듯,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제국의 정체성을 합스부르크 황가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등극한 이후 망할 때까지 500년 가량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 역사가 끝내주게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며, 또 수많은 떡밥들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오스트리아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기존 고지 독일어와는 외계어 수준으로 차이나는 오스트리아 독일어,[35] 헝가리어, 체코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등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배했던 11개 이상의 민족의 언어들을 알고 있어야 하니 서양 사학계에서는 아무리 건드리고 싶어도 도저히 제대로 건드릴 수가 없는 서양사학계의 최종보스로 꼽힌다.

그나마 제국의 후신인 동유럽 국가들의 현지 학계들끼리 교류가 제대로 된다면 몰라, 그 동네 역사학계 수준이 여전히 "우리나라는 킹왕짱 잘난 민족인데 저 못된 이웃 독일놈/헝가리놈/폴란드놈/체코놈/러시아놈 등등 때문에 이리 된거임!" 차원의 민족 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해 저러한 시도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36] 그러나 유럽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트리아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 독특한 위치를 생각하면 반드시 서양 사학계에서 파고들어가야 할 장애물이기도 하기에, 여러모로 서양 사학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역사는 최종 보스이면서도 미묘한 애증의 대상이다.

2.8.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기간

1

프란츠 요제프 1세

1867~1916

2

카를 1세 & 4세

1916~1918

3. 행정구역

행정구역은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과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이 구별되어 있었으며, 비교적 후기에 점령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둘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근교에서 도나우(Donau)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지천 라이타(Leitha)강을 기준으로 잡아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은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a),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은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a)로 부르기도 한다.

지도상의 순번은 시스라이타니아, 트란스라이타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순으로 매겨져 있으며, 시스라이타니아 해당 지역 순번은 각 지역 영문명 알파벳 순으로 매겨져 있다.

3.1. 시스라이타니아[37]

순번

명칭

수도

비고

01

뵈멘[38]

프라크[39]

왕국. 현재 체코 서부.

02

부코비나

체르노비츠[40]

공국.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03

케른텐

클라겐푸르트

공국. 남부 일부분은 현재 슬로베니아령.

04

크라인

라이바흐[41]

공국. 현재 슬로베니아 중부.

05

달마티엔

차라[42]

왕국. 현재 크로아티아 남부 해안 지역.

06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렘베르크[43]

왕국. 현재 폴란드 남부 및 우크라이나 서부.

07

퀴스텐란트

트리에스트[44]

현재 이탈리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45].

08

니더외스터라이히[46]

대공국

09

메렌[47]

브륀[48]

변경백령. 현재 체코 동부.

10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공국

11

슐레지엔

트로파우[49]

공국. 현재는 체코폴란드 영유중.

12

슈타이어마르크

그라츠

공국. 남부 일부분은 현재 슬로베니아 동부.

13

티롤[50]

인스부르크

후작령. 남부 쥐트티롤은 현재 이탈리아령.

14

오버외스터라이히[51]

린츠

대공국

15

포어아를베르크

브레겐츠

3.2. 트란스라이타니아[52]

순번

명칭

수도

비고

16

운가른[53]

부다페스트

왕국. 현재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다수 국가령.[54][55]

17

크로아티엔 운트 슬라보니엔

아그람[56]

왕국. 현재 크로아티아 내륙 및 북부 해안 지역.

3.3.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57]

순번

명칭

수도

비고

18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4. 재편성 계획

연두색으로 표시된 곳은 비 독일계 지역 중 독일인 인구가 많은 곳으로 독일계 자치구역 설정 경계다.

순번

명칭

수도

비고

01

도이치 외스터라이히

독일계 지역[58]

02

도이치 뵈멘

에거[59]

독일계 지역[60]

03

도이치 메렌

트로파우

독일계 지역[61]

04

뵈멘

프라크

체코계 지역[62]

05

슬로바켄란트

프레스부르크[63]

슬로바키아계 지역

06

베스트갈리치엔

크라카우[64]

폴란드계 지역

07

오스트갈리치엔

렘베르크

우크라이나계 지역

08

운가른

부다페스트

헝가리계 지역[65]

09

제클러란트

노이마르크트[66]

헝가리계 지역[67]

10

지벤뷔르겐[68]

클라우젠부르크[69]

루마니아계 지역

11

트리엔트[70]

트리엔트

이탈리아계 지역

12

트리에스트

트리에스트

이탈리아계 지역

13

크라인

라이바흐

슬로베니아계 지역

14

크로아티엔

아그람

크로아티아계 지역

15

보이보디나

노이자츠[71]

세르비아계 지역

5. 기타

  • 근대 올림픽이나 국제 축구경기에 있어서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3개 팀이 출전했다.
  • 루리웹에서 이 나라의 국기를 튀어나와요 동물의 숲 전용 마이디자인으로 구현한 사람이 있다(...)링크 컴플리트 컬렉션(...)
  •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인물이자 모델인 폰 트라프 대령은 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잠수함대 출신이다.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것.


  1. [1]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참전을 명령하는 징집 포스터가 무려 15개 언어로 작성해 포고도 했다. 흠좀...아니, 흠많무. 정확히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이탈리아어, 슬로베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보스니아어, 루신어, 이디시어
  2. [2] 카카니아(Kakania)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장편소설 <특성없는 남자>(Der Mann ohne Eigenschaften) 제8장 제목이 카카니엔(Kakanien; K&K, kaiserlich und königlich에서 첫 알파벳 독일어 발음인 Ka und Ka에서 따온 말)이고 최근 영어 번역으로 Kakania로 번역되었다.
  3. [3] 비스마르크는 웬만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타협하고 싶어했다. 그 스스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모두 있어야 진정한 독일국가를 이룬다."라 말했을 정도.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대등한 주권인 국가로서의 평등한 협상을 거부하자 이러한 노력은 꺾였고, 끝내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강퇴를 겪었다.
  4. [4] 제국 내 최다 인종은 분명 독일계였지만, 그 수치는 단 1번도 과반수를 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후기로 접어들면 독일계는 줄고 슬라브계와 헝가리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5. [5] 그런데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제국 내 슬라브족의 필두로 여기던 체코인들은 완전 독립에 미온적이었다. 체코인은 당시 오스트리아 안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앞선 지역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유럽 최대의 자동차 공장 가운데 하나가 체코에 있었다!- 체코인의 이런 미온적인 대응은 다른 슬라브족의 대응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6. [6]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니라 양자를 커버하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7. [7]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치세 후반기에 헝가리 의회가 군대 내의 독일어 상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헝가리어를 동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자, 황제는 헝가리 국민의 투표권을 개정해 빈민과 농민이 대거 참정권을 가지도록 해서 언어 운동을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을 엿 먹이려고 했다. 그러자 언어 운동 지지자들은 재빨리 꼬리를 내리고(...) 황제에게 지지를 보냈다.
  8. [8] 19세기 유럽 대륙 전역에서 확산된 반유대주의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다소 기세가 약했다. 러시아는 포그롬이라는 대학살을 자행하고 프랑스에서조차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났지만,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유대인에 대한 경계와 차별 자체는 있긴 있었지만, 강도가 훨씬 약했다는 의미이다. 그랬기에 프로이트 같은 전형적인 유대인인 사람도 나치가 합병하기 전까지는 계속 오스트리아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9. [9] 사실 이 때 세르비아는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님, 아직 준비가 안 됐거든요? 좀 참아주삼."하고 주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는...
  10. [10]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병합하기 직전까지의 사실상 유일한 해안지역이 오늘날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였는데, 크로아티아 지역이 바다와 상당히 넓게 비중있게 인접했기에 가장 중요했고, 때문에 크로아티아인에게 함부로 대하기는 힘들었을 지도 모른다. 보스니아 병합이후에도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중요한 해양진출의 교두보 지역이었다.
  11. [11] 실제로 헝가리에서 민족운동 발생 시의 진압병 중 다수가 슬로바키아 농민 출신 징집병들. 오늘날에도 두 민족 사이는 아주 나쁘다.
  12. [12] 이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은 임시 명칭이지 그가 반드시 국호도 이 이름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만약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개편안을 따랐다면 새 국호를 따로 논의해서 결정했을 것이다. 참고로 현재 유럽연합을 현재의 복수 국가들의 연합체에서 하나의 연방국가로 통합하자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이것을 '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오스트리아 합중국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가칭일 뿐, 실제로 새로운 나라 이름을 유럽 합중국이라고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United States of Soviet Republics가 떠오른다면 지는거다
  13. [13]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통치령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일단 이 지도에서 제외했다.
  14. [14] 이중제국 당시의 행정구역상 헝가리 권역은 오늘날의 헝가리 본토 외에도, 슬로바키아 전역, 우크라이나 남서부, 루마니아의 3/4 가량, 세르비아 북부,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5. [15] 이런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의거한 통제와 느슨한 집행방침을 당대인들은 '슐람페라이'적 관행이라고 불렀다. 간단히 말하자면 솜방망이 처벌.
  16. [16] 당장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운동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레프 트로츠키,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오스트리아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활동했다. 스탈린은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동안 민족문제에 관한 마르크시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 자신이 조지아 출신이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처럼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17. [17]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이 많이 사는 곳은 제국 내 제3위의 대도시였던 트리에스트 인근과 달마티엔 지역, 그리고 쥐트티롤 일대였다.
  18. [18] 사실 독일제국에서도 빌헬름 2세가 합법화시킨 이후 사회민주당이 당당하게 주요정당으로 등극하고 1912년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었긴 했다. 다만 황제의 권한이 강해서...
  19. [19] 그래서 슬로바키아인은 체코인과 연대해 헝가리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그 결과 탄생한 나라가 191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20. [20] 덕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정 상태는 늘 나빴다. 군대의 장비가 부실하고 장교들의 기강이 해이한 것도 부분적으로 그런 탓이었다. 장교들 가운데는 공공연히 적성국의 첩보기관에 매수되기도 했는 데, 1913년 터진 레틀 대령 사건은 오스트리아 군부 최악의 스캔들이었다.
  21. [21] 대학생은 1년만 복무하면 장땡이기도 했다.
  22. [22] 테레지아 훈장. 병사가 상관의 명령을 받지 않은(직접적인 명령 불복종은 제외) 자발적인 행동으로 공을 세웠을 경우 포상한다.
  23. [23]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들 가운데 트란실바니아나 갈리치아 같은 지방은 대단히 후진 곳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치안을 위해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세상물정에 어둡고 순진한 농부들에게는 합스부르크 황제의 힘을 과시하는 중요한 선전효과를 낳기도 했다.
  24. [24]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군을 상대로도 고전해서 독일이 구원군을 보내야 할 정도였다.
  25. [25] 처음 연합국은 오스트리아를 해체시킬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같은 제국인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남아 있었고 발칸 반도에서의 전황도 시원찮았기 때문. 하지만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져 나가고 미국의 발언권이 강해짐과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내적 역량이 한계에 도달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공중분해되고 만다.
  26. [26] 그런데 정작 미국,영국,프랑스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해된게 현재까지도 골칫거리이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동유럽 제국은 러시아의 강력한 인접국 라이벌이자 원수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엔 라이벌이긴 했지만 오스트리아 만큼이나 원수처럼 심하게 대립하는 경우는 7년전쟁 이후로는 그다지 많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이벌+원수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일종의 확실한 보험이었는데 제 1차 대전직전까지의 러시아는 오늘날의 러시아처럼 동유럽에 당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거나 하질 못했다. 국력이 영프독 다음으로 높다는 오스트리아라는 대제국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기들과 너무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동맹관계 인것도 한몫했다. 일단 1차대전이 끝나고 처음으로 문제가 시작됐는데 새로 등장한 소련이 막 독립한 동유럽 지역에 영향력행사와 더불어 공산화 야욕때문에 찝쩍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유럽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 못지않게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함부로 영향력 같은것을 행사하기 어려웠지만 2차 대전 후에는 영프가 소련보다 훨씬 군사력이 약해진 탓에 동유럽 공산화는 물론 영향력 확대까지도 순조로워지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라면 치를 떠는 폴란드를 제외하면 러시아가 동유럽에서 영향력이 만만치가 않은 상황이다.
  27. [27] 오스트리아는 본토의 대부분은 산악이라 유제품 말고는 산물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남겨진 영토의 주민은 비엔나만도 2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먹는 문제의 해결만도 큰일이었다. 당시 거대한 농토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거대 시장인 비엔나에 공급하던 헝가리와 루마니아, 루테니아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때의 여파인지 이후 비엔나에서는 1930년대 중반까지 좌파가 정국을 장악한다. 이른바 '붉은 빈'의 시기.
  28. [28] 훗날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로 대접받는 토마스 마사리크조차도 이 노선을 고수했다!(여담인데, 지식인 출신으로 열강에게 실용적 외교노선으로 초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점에서, 이승만과 토마스 마사리크는 최소한 집권과정까지는 매우 닮은 점이 많다.)
  29. [29] 디오세기 이슈트반 저, 모순의 제국 '힘의 정치, 마지막 사반세기' 참조. 요약한 것이므로 잘못된 부분 있으면 수정바람.
  30. [30] 형식적인 소유권 자체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 있었다. 실제 합병은 1908년.
  31. [31] 이걸 추진한 인물이 바로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였다.
  32. [32] 그리고 이 불장난하던 놈들 물리칠 집주인이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막장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십 만 단위로 서로 학살하고 다닌 발칸 전선이다(...).
  33. [33] 하지만 크림 전쟁 때도 몰도바와 루마니아에 집적거렸으며, 1912~13년 발칸 전쟁에서 승리한 세르비아가 크게 팽창하여 기세를 타자,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에 합병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 물론 이런 시기들은 오-헝 제국의 역사에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시기로 평가받는다는 걸 알도록 하자.
  34. [34] 원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문화, 사상가들에 대해 다룬 책이며 정치사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고 있으나, 그나마 한국어 서적 중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 많은 편이다.
  35. [35] 특히 빈 자체가 워어어어낙 국제 도시였다 보니 헝가리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이디시어, 체코어 등 다른 언어의 흔적이 굉장히 심하다. 고지 독일어에 비하면 오스트리아 독일어는 외국어고, 또 그 오스트리아 독일어에 비하면 빈 독일어는 아예 외계어 수준이다.
  36. [36] 말하자면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전문 학계도 학문의 이름으로 옆 동네 욕하고 자뻑하는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 겨우 투쟁하는 수준이란 것이다. 특히 이 동네 다수가 냉전 당시 공산권에 속해 있어 학문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학풍 또한 마르크스 계열 사관 주도에서 또 냉전이 끝나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족사관이 폭발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오른지라 학계 간의 국제적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질 상황이 되려면 여전히 멀었다.
  37. [37] 오스트리아 제국 관할 지역
  38. [38] 보헤미아의 독일어식 표기다.
  39. [39] 체코의 프라하.
  40. [40]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41. [41]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42. [42] 크로아티아의 자다르.
  43. [43] 우크라이나의 르비우.
  44. [44]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45. [45] 이탈리아 극동부, 슬로베니아 서부, 크로아티아 북부 해안 지역.
  46. [46] 하(下)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독일어식 표기는 외스터라이히.
  47. [47] 모라비아의 독일어식 표기다.
  48. [48] 체코의 브르노. 여담으로 강철의 누이들에 나오는 브륀의 그 어원이 맞다.
  49. [49] 체코의 오파바.
  50. [50] 쥐트티롤, 즉 남부 티롤은 이탈리아인이 많은 지역이었고, 1차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할양되어 현재 볼차노 자치구가 되어있다.텟사의 조부모의 고향 나머지 티롤 지역은 오스트리아에 잔류. 웃기게도 남티롤은 현재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걸 원하는 운동이 있으며, 2013년 조사결과 독일어 화자의 58%, 전체 화자(독일어 화자, 이탈리어 화자 및 기타 언어 화자의 49%가 오스트리아에 다시 편입되는 걸 찬성하고 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 편입되는 걸 원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까지 있다. 이렇게 독일어 화자가 굉장히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테니스 선수 Andrea Seppi가 있다. 이탈리아인인데도 불구하고 남티롤 출신으로 독일어가 제 1언어다 그러나 본인은 이탈리아인으로 생각한다고.
  51. [51] 상(上)오스트리아.
  52. [52] 헝가리 왕국 관할 지역
  53. [53] 헝가리의 독일어식 표기다.
  54. [54] 루마니아계인 트란실바니아, 세르비아계인 보이보디나가 합쳐져 있다. 이들을 별도 구별하는 지도도 있고, 같이 묶어놓는 지도도 있다.
  55. [55]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헝가리 전역, 슬로바키아 전역, 우크라이나 남서부, 루마니아 3/4 가량, 세르비아 북부.
  56. [56]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57. [57] 오스트리아 제국-헝가리 왕국 공동관리 지역
  58. [58] 기존 오버/니더외스터라이히,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티롤, 포어아를베르크, 뵈멘 남부 독일계 지역 통합.
  59. [59] 체코의 헤프.
  60. [60] 기존 뵈멘 북부 독일계 지역.
  61. [61] 기존 메렌, 슐레지엔 중 독일계 지역 통합.
  62. [62] 기존 뵈멘, 메렌, 슐레지엔 중 체코계 지역 통합.
  63. [63]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64. [64] 폴란드크라쿠프.
  65. [65] 헝가리 본토. 현재 헝가리 국경선과도 거의 비슷하다.
  66. [66] Neumarkt am Mieresch, 루마니아의 태르구 무레쉬.
  67. [67] 트란실바니아 내부 헝가리계 지역.
  68. [68]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어식 명칭. 트란실바니엔이라는 이름도 있지만 이쪽이 더 많이 쓰인다.
  69. [69] 루마니아의 클루쥐 나포카.
  70. [70] 이탈리아의 트렌토.
  71. [71] 세르비아의 노비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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