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25 전쟁

전쟁 발발

전개

영향

미군의 참전과 역할

인식

관련 기록

6.25 전쟁 10대 미스테리

UN기념공원

6·25 전쟁 · 한국전쟁 · 조선전쟁
六二五戰爭 · 韓國戰爭 · 朝鮮戰爭
Korean War

1951년 퓰리처상 수상작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Max Desfor[1][2]

기간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 현재
(1953년 7월 27일 22시 이후 정전 상태)

장소

한반도 전역 및 부속도서 일부[3]

원인

김일성 등 북한 수뇌부의 무력 적화통일 시도

교전국

유엔군

공산군

대한민국 제1공화국
미합중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프랑스 제4공화국
에티오피아 제국
터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태국
필리핀 제3공화국
그리스 왕국
콜롬비아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비에트 연방[4]
중화인민공화국[5]

의료 지원국

<^|1>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6]
인도
서독[7]

<^|1> 동독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

물자 및 기타 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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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의사 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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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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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최소 92만명[16]
+전투협조 병력

최대 200만여 명

결과

휴전[17]

영향

미소 주도의 냉전 체제 가속화
분단 고착화와 남북 체제 대결 심화
남북 독재체제 수립
휴전선 형성
이산가족 발생

피해규모

<^|1>• 군인 26만명 전사[18]
• 민간인 100만여 명 사망 추정
• 민간인 납북, 월북
• 공업 기반의 절반 소실, 30억 달러 또는 국부의 1/4 손실[19]

<^|1>• 군인, 민간인 최소 250만여 명 사망[20]
• 민간인 월남
•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 소실

6.25 전쟁의 전개 과정[21]

1. 개요
2. 명칭
3. 상세
3.1. 전쟁 발발
3.2. 전쟁의 전개
3.3. 미군의 참전과 역할
3.4. 전쟁의 영향
3.5. 6.25 전쟁 결과의 대체 역사
3.6. 전쟁에 대한 인식
3.7. 관련 기록
3.8.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4. 전쟁범죄
4.1. 유엔군
4.2. 공산군
4.2.2. 중국
5. 기타
6. 다룬 책
6.1. 학계
6.2. 군사적 자료
6.3. 다큐멘터리
7. 관련 작품
7.1. 문학
7.2. 영화
7.3. 드라마
7.4. 뮤지컬
7.5. 만화
7.6. 게임
7.7. 노래
7.8. 미술작품
7.9. 동영상
8. 어록
9. 유사사례
10. 관련사건
11. 관련 인물
11.1. 자본진영
11.1.1. 남한
11.1.2. 미국
11.2. 공산진영
11.2.1. 북한
11.2.2. 소련
11.2.3. 중국
12. 같이보기

1. 개요

Guiness World Records

Most countries to support an ally in war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국으로 참전한 전쟁 )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등재 시일
(When?)

KOREA (SOUTH) (SEOUL)#

KOREAN WAR

67개국

2010년 9월 2일

Longest ceasefire without a peace treaty
(종전(평화) 협정 없이 지속된 가장 긴 휴전)

장소
(Where?)

대상
(Who?)

규모

등재 시일
(When?)

KOREA (NORTH)#

SOUTH KOREA, NORTH KOREA

+24422일(현재 진행형)

2011년

6.25 전쟁, 한국전쟁 또는 조선전쟁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사전 계획에 따라 북위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한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유엔군중국 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한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어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 간 교전이 이어졌다.

6.25 전쟁의 종전 협정(Peace treaty)은 체결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현재까지 진행 중인 전쟁으로 남북 양측의 시민들도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이는 법적으로는 평시(平時)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시(戰時)에 시행되는 비상 법령을 계속 발동하기에는 유례없이 긴 휴전이 지속되고 있는 중이라, 준전시(準戰時)라는 특수한 대치 상태로 구분된다[22]. 남북의 지도자가 전쟁 상대인 적국 원수(元帥)를 만나고 스포츠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등의 일도 이러한 특수한 상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6.25 전쟁의 휴전 기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기록을 실시간으로 갈아치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영국-프랑스-소련-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전쟁이다.

한편으로 일본이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하였고, 제2차 국공내전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내몰린 중화민국이 살아나고 침략자로 규정된 중국은 20년 넘게 외교적 고립을 면하지 못하는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6.25 전쟁의 침공 동기에 대한 통일된 정설은 아직 없다. 다만, 2010년 이후 국지전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6.25 전쟁을 외적기원(김일성 또는 스탈린의 기획)과 내적기원(내전의 확대)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쳐 발생한 것으로 보는 복합기원설이 국제적으로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23]에서 6.25 전쟁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기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대립하고 있으며, 주류 역사학계의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24]

2. 명칭

일반적으로 전쟁은 분쟁의 주체, 전투는 발생한 장소를 그 명칭으로 쓴다. 반면 이 전쟁은 (한국 기준으로는) 발발한 날짜가 전쟁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및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관습적으로 날짜-사건을 조합해 6.25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로는 The Korean War라고 부른다. Korean War라는 이름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전쟁을 주도한 UN군 사령부에서 붙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한국 전쟁'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 외에도 6.25 전쟁을 호칭하는 몇몇 어휘들이 있는데, 가령 북한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한국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자신들을 '조선'이라 칭하므로 '조선전쟁'이라 하는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선전쟁 혹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의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른다.[25] 한편 일본에서는 조선전쟁(朝鮮戦争)이라고 부르며 현재 중국도 정식 수교국인 한국을 의식해 항미원조전쟁 대신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좀 더 많이 사용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한국(韓國)을 한반도 남반부의 국가(대한민국)에 한정된 의미로 보고 조선(朝鮮)을 '한반도' 혹은 '한민족'을 일컫는 말로 쓰기 때문에 '조선전쟁'이라는 용어를 쓴다.

1952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정부간행물 "6.25사변 피살자 명부"와 1952년 국방부에서 간행된 정부간행물 "한국전란지"로 표현되기도 했다. 행정관서에서는 주로 '6.25'로 표기했다. 1973년 한국 정부에서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도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이 등장하고, 2014. 3.24일에는 6·25 전쟁일로 개정되었다. 반면 한국 정부에서 만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한국전쟁이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전쟁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6.25라고도 많이 불러오고 있으며, 6.25 사변 또는 6.25 동란이라도 부르기도 한다. 또는 경인년(庚寅年)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발발한 난(亂)이라고 하여,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도 불린다.

6.25 전쟁이란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하는 단어로 한국적인 자주성, 주체성을 강조하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한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Korean War라는 명칭은 객관성 중립성을 보여준다고는 하나, 그 번역어인 '한국전쟁'은 엄밀하게 중립적이지는 않다. 전쟁의 한 쪽 주체인 북한에서 스스로를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조선'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아무튼 한국학계에서는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서 대체로 6.25 전쟁 또는 한국전쟁으로 쓰인다. 2011년 한국전쟁학회에서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할 경우 전쟁 발발 책임이 모호해지거나 전도될 우려가 있다면서 6·25전쟁이라 부르는 게 옳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6·25가 당시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국제전의 성격을 띤 점을 감안하면 이 전쟁의 영문 표기는 '1950~53 한국 6·25 전쟁(the 6·25 War in Korea 1950-53)' 혹은 '1950~53 한국 공산주의자 전쟁(the Communist War in Korea 1950-53)'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The Korean War를 한국전쟁으로 번역하는 것은 '조선'과 '한국'이 가지는 역사적, 개념적 차이를 간과한 것으로 기계적인 번역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일보 전병근 기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1980년대 미국의 수정주의 학자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1, 1981년 출간·국내에는 1986년 번역·출간)이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국내 좌파들에게 확산됐다는 기사를 썼다. 기사

국방부에서 발간한 군 공식간행물을 보면 1952년부터 2004년까지 발간된 서적은 제목이 '한국 전쟁'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4년부터 '6·25전쟁'이 사용되기 시작해 2005년부터는 6·25전쟁 한가지만 사용하고 있다.[26]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가 과거에는 한국 전쟁이었으나 2004년부터 6·25전쟁으로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 중인 단행 자료를 검색하면 1980년 이전에 발간된 자료 중 제목이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는 자료는 제목이 6·25로 되어 있는 자료보다 2배가 더 많이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출판계나 학계에서도 '한국 전쟁'이란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27]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비단 6.25 전쟁만이 아닌데 한국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6.25가 그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건들의 명칭도 바꾸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5.18 민주화운동이나 6.10 만세 운동 등도 모두 사건이 발발한 날짜를 근거로 명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건의 명칭을 부여한 예도 존재한다. 따라서 6.25 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의 해석의 산물이자,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 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 대통령과 미국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 서방의 대중들에게 6.25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 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하여 지칭한 것이었다(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후에 6.25 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 쯤, War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남한과 북한이 싸웠다고 해서 남북전쟁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용어는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혀져 있기에 혼동의 여지가 있어 공식적인 자리에선 잘 쓰이지 않고 있다.

3. 상세

과거에는 수정주의적 관점이 대세였으나, 소련의 기밀문서가 해제된 지금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이 전쟁의 주 원인이라는 데에 큰 이견이 없다.[28]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국군으로 위장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 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을 키우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29]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고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30][31] 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전쟁 억제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5공화국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은 남조선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국가 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까지 이 전쟁으로 생긴 각 체제(體制, Regime)는 유지되고 있다.

3.1. 전쟁 발발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전쟁의 전개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미군의 참전과 역할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전쟁의 영향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5. 6.25 전쟁 결과의 대체 역사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대체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6. 전쟁에 대한 인식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인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관련 기록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관련 기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쟁의 참전국, 주요 전투, 주요 인물, 사용된 장비를 다룬다.

3.8.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전쟁범죄

4.1. 유엔군

※ 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이 저지른 학살 행위는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 문서 참조.

4.1.1. 대한민국

반공이 국시였던 지난 세기에는 "북한의 사악함과 국군의 영웅적 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상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와 국군도 전쟁 범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단체에 의해 10만~30만 명의 38선 이남 거주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나마 북한, 중공과 달리 유엔군은 이런 행위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살을 저지르는 국군 및 경찰을 유엔군이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존재하는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영국군이 홍제리 학살 사건 당시 추가적인 학살을 막은 사례 등)

그 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 징집(자발적으로 종군한 학도병과는 별개),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군 위안부 등이 있다.

4.1.2. 미국

6.25 전쟁에 참여한 여러 군대 중에서 그나마 가장 신사적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완전히 깨끗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국군, 인민군, 중국군은 물론이고, 미군 스스로가 저지른 학살까지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에 모조리 사진과 자료로 남겼다. 그렇게 남은 미군의 대표적인 학살 사건은 제1기병사단이 했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이다. 그 밖에 세균전을 행했다는 의혹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미국측도 이를 부인하고 있다.

4.2. 공산군

※ 공산군과 좌익이 저지른 학살행위는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문서 참조.

4.2.1. 북한

소위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지역주민을 모아놓고 지역 유력가, 정치인 등을 처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였다.

또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손진태, 박열, 정인보, 이광수, 방응모 등 유명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납북자의 88.2% (84,659명)가 한국 전쟁 발발 이후 3개월(1950년 7월~9월) 동안에 납북되었으며, 그 중 80.3% (77,056명)가 자택이나 자택 인근에서 납치되었다. 납북된 한국 인사 중에는 법조인이 190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언론인이 226명이었다.[32] 또한 이러한 납치의 기획은 전쟁중에 뿐만아니라 전쟁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생산된 북한 당국의 문서에서도 확인이 된다.[33][34]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그 외에 포로에 대한 처우가 처참했다는 말도 있다.

선제공격으로 6.25 전쟁을 일으켰으면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정전 협정을 위반하고 계속해서 대남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4.2.2. 중국

흔히 삼대기율 팔항주의를 들먹이며 중국군은 범죄가 없는 깨끗한 군대였다는 환상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 전쟁범죄가 아예 없었다기보다는 중국 지휘관들이 아군도 자주 처벌해서 나온 이야기에 가깝다.[35] 식량을 배급하지 않고 행군을 시키거나, 낄낄 웃으며 포로들을 쏴죽이거나, 채찍 등으로 구타, 부상당한 포로들을 산 채로 불태우는 등 중국군도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하는 전부 중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UN군 장병들이 증언한 내용이다.

수용소에 있던 포로 일부는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되었고, 부상당한 포로들은 수류탄 혹은 몸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태워 죽였다.

중국군에게 잡힌 UN군 포로 중 건강하거나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부상자들은 수용소까지 걸어갔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가거나 총살시켰다. 포로들이 죽은 이유는 대부분 위생관리 부재, 식량 부족, 이질, 폐렴 등이었다. 중국군들은 소량의 식량을 주거나 아예 주지 않았고, 배급된 식량 또한 영양가가 없었다.

또 중국군은 포로들을 자그마한 철장에 가두고 살을 에는 추위에 맨발로 서 있게 하거나 찬물에 몸을 담갔다 빼게 하곤 했다. 적군은 포로들을 두들겨 패고 물로 가득한 구덩이에 한동안 집어넣기도 했다.

죽음의 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였다. 이곳에 보내진 포로들은 담요도 없고, 화장실 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했다. 벨리 아타소이 병장은 이러한 포로수용소들 중 한 곳인 450M짜리 터널에서 며칠을 지냈는지 모르며, 이틀에 한 번 주 모래 섞인 보리밥을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 '터키인이 본 6.25 전쟁' 지음 : 알리 데니즐리, 옮김: 이선미, 감수 이난아

중국군은 부상당한 나를 다른 포로들과 함께 차에 태우고 새끼줄로 묶었다. 차는 여차하면 전복 될 것만 같았다. 자동차 바퀴는 울퉁불퉁한 돌 길 위를 지나갔다. 부상자들 중 자동차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떨어진 사람은 다시 차에 태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총을 쏴 죽여 버렸다. 중국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미군 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밧줄을 붙잡고 차 뒤에 질질 끌려오다가 힘이 빠지자 그 줄을 놓았다. 중국군 중 한 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다 중국군 한 명이 내게도 총을 발사했다. 총알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머리에 닿을 듯 지나갔다.

- 터키군 무자페르 쉔부르치 하사의 증언

장진호 전투 제 3 일 째인 11월 30일 저녁까지 사망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땅은 얼어 붙어서 파지지 않았다. 시체들은 잘라 놓은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려졌다. 12월 1일 오후 1시를 기해 포위 돌파전은 오후 늦도록 일대도살극을 연출했다. 이날 오후 늦게 대열이 유린 되자 중국군은 부상병들이 실려 있는 트럭으로 기어 올라가서 무력하게 누워 있는 아군 부상병들을 쏘고, 찌르고 했다. 또 어떤 차에 휘발유를 끼얹어 부상병들을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대열을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고 완전한 살인이었다. 나는 열두 평생을 살아도 다 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아픔과 피, 죽은 자와 다친 자들을 보았다.

- 미 육군 7사단 제임스 블롬 하사의 증언

5. 기타

6. 다룬 책

6.1. 학계

6.2. 군사적 자료

지난 60년간 세계 각국에서 발간된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존재한다.[44]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다보니 한글로 된 책자도 그 양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그러나 수준이 제각각 천차만별이라 기본 텍스트는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공식간행물부터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초등학생용부터 중고등학생용, 일반인용, 전문가용 각종 버전의 자료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45]

그 다음은 미 육군 당국의 공간사를 읽어 보는게 좋다. 영문판은 미 육군 전사감실 홈피에서 무료로 구독할 수 있다. 한글판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피에서 무료로 원문보기를 할 수 있다.

<정책과 지도> 제임스 F. 슈나벨, 온창일 옮김, 육군본부, 1974. (James F. Schnabel,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OCMH, 1972.)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로이 E. 애플먼, 육군본부, 1984. (Roy E.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OCMH, 1961.)

<밀물과 썰물> 빌리 C. 모스맨, 대륙연구소출판부, 1995. (Billy C. Mossman,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OCMH, 1990.)

<휴전천막과 싸우는 전선> 월터 G, 허메스, 육군본부, 1968. (Walter G.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OCMH, 1966.)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6.3. 다큐멘터리

1부 영상, 2부 영상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방송대상까지 받았던 작품. 이후 2010년에 리메이크되는데 이때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자료와 중국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이 다큐에는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46]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한편 국내에 소개된 국외 제작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4부작)'과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이 있다.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은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은 6.25 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6.25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외의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7. 관련 작품

외국 것도 많기는 한데 , 당연하게도 한국의 작품들이 더 많다.

7.1. 문학

7.2. 영화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7.3. 드라마

의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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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bottom:-15px"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중앙극장 습격 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6.25 전쟁

단성사 저격 사건

황금마차 습격사건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충정로 도끼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혁명재판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국회 오물 투척 사건

}}}}}} ||

7.4. 뮤지컬

7.5. 만화

7.6. 게임

7.7. 노래

7.8. 미술작품

7.9. 동영상

8. 어록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 이승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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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러스 맥아더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

- 김달육 육군 소령(퇴역),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8사단 16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평화 시에 한국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Korea as a Christian missionary in peacetime if I am not first willing to be there to help the Koreans defend their freedom in time of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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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대위,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본부중대 정보장교로 6.25 전쟁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녹번리에서 전사.)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 백선엽[50]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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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튼 워커

"Stand or die."

고수 혹은 죽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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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튼 워커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

- 신성모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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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우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

- 박헌영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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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우언라이[51]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52]

---

-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이승만 본인 입으로 말한 것을 포함해서 이를 재구성하고 각색한 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틀은 방송. 정작 이 방송이 들린 시점에서 이미 이승만은 국군과 피난민들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 다리마저 끊고 서울에서 도망친 후였다.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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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해오던 1950년 10월 11일 밤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 시간 뒤 김일성은 평양에서 도망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

---

- 김일성[53]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

- 이오시프 스탈린

"조선 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

- 마오쩌둥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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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S. 트루먼

"딘 장관, 우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개새끼들을 막아야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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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S. 트루먼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 해리 S. 트루먼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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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 S. 트루먼[54]

"인천 상륙작전은 5000 대 1의 도박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확률에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그들을 격멸할 것입니다."

"...Inchon is a 5000 to 1 gamble, but I am used to taking such odds... We shall land at Inchon and I shall crush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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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러스 맥아더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 손원일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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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원일

"친애하는 동포형제자매들,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과 남녀빨찌산들, 용감한 중국인민지원군 장병들, 친애하는 동지들, 지난 7월 27일 10시에 판문점에서는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들을 일방으로 하고 미제국주의자들을 위수로 한 무력침공군 대표들을 타방으로 하여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정전의 달성은 외래제국주의 련합세력을 타승하고 미제국주의 리승만 매국도당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여 우리 조국 인민이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이며 우리나라와 우리 인민이 쟁취한 위대한 력사적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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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55]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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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 다쓰지[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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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유사사례

10. 관련사건

11. 관련 인물

11.1. 자본진영

11.1.1. 남한

11.1.2. 미국

11.2. 공산진영

11.2.1. 북한

11.2.2. 소련

11.2.3. 중국

12. 같이보기


  1. [1] '무너진 다리를 건너 탈출하는 피난민들', 맥스 데스퍼. 1950년 12월 4일 촬영했으며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퍼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2. [2] 흔히 한강철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대동강철교다. 한강철교는 폭파 당시 아무도 건널 수 없는 수준으로 무너졌었다. 그때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있었다.
  3. [3] 막연하게 전체 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본토에서는 전투와 교전이 일어났지만 제주도, 울릉도, 독도 등 일부 부속도서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 [4] 물자지원만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군 병력을 보낸 전적도 있고, 참전군인들의 수기와 증언에 따르면 MIG-15 기와 F-86 기가 교전 하던 도중 통신에서 러시아어가 감청이 됐다는 증언이 있었고, 소련 장교 시신을 발견했었는데 묵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이유는 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5. [5] 중국 측 또한 세계대전의 확전은 우려 했는지 ‘사회주의 형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의용군이 참전한 것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라는 입장을 표명 했으나, 이들의 정체는 정규군인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밝힐 필요도 없이 당시 중공군의 무장상태와 공세는 누가봐도 정규군 수준임이 명확했다. 이들은 전후에 중국에서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현재 만주 일대에서 한국을 사실상 주적으로 상정하여 유사시 한반도에 투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훈련 중인 부대들의 전신이기도 하다.
  6. [6] 사실 이탈리아는 6.25 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
  7. [7] 서독 정부는 1953년 5월 80여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대한민국에 파견해 휴전 이후인 1954년 5월 부터 약 5년 간 의료지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료지원활동 시점이 휴전 이후였다는 이유로 의료지원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2018년에야 대한민국 국방부는 공식적으로 독일을 6번째 의료지원국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전쟁기념관이나 UN평화기념관 등지에서 내용 수정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8. [8] GHQ하의 비공식 참전.참고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군의 개입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요구에 따라 비밀리에 소규모 참전하여, 동해상의 기뢰 제거 작전 등에 투입되었으며 사상자도 발생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의 각종 민간선박업체들이 병력 및 화물 운송 등에 동원되었다. 이는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도 언급된다.
  9. [9] 당시에는 카스트로 정권 수립 전이여서 국군 측으로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다.
  10. [10] 쿠바와 마찬가지로 당시엔 사회주의 계열의 바트당이 정권을 잡기 전이라서 국군 측으로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다.
  11. [11]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 뿐만 아니라 국군도 지원했다.
  12. [12] 유엔군 측에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군도 지원했다.
  13. [13] 군마 지원.
  14. [14] 북한 측 지휘관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사연표에 근거함.
  15. [15] 에티오피아군 사령관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 1974년에 멩기스투 정권이 벌인 '60인 학살 사건' 당시 처형되었다.
  16. [16] 전쟁 말기 한국군 58만, 미군 34만 가량이었기에 이 이상의 수치로 추산된다. 최대 수치는 공산군보다 적은걸로 추정된다.
  17. [17] 2018년 4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판문점 선언을 통해 연내에 종전을 선언하겠다고 합의한 적이 있으나, 지켜지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18. [18] 미군 사망자는 4만 명 가량이고 국군 사망자가 14만인데, 국군의 경우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다.
  19. [19] 이대근,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2008, p.60
  20. [20] 공산군의 경우 누락된 수치가 많기에 정확한 수치 추산은 힘들다. 그래서 자료를 보면 온갖 추측이 다 있다.
  21. [21] 저작자: Roke(2006.06.05.)
  22. [22] 대법원의 판례는 지금이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그렇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23. [23] 구소련 문서는 매우 파편적이고 제한된 기록이기에 6.25 전쟁의 기원을 해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24. [24] 김태우, "한국전쟁 연구 동향의 변화와 과제,1950-2015." 『한국사학사학회』, 32권, 2015, pp. 325-364
  25. [25] 참고로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부르는 표현은 보통 '만력조선지역'이지만, 항왜원조(抗倭援朝)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는 왜적에 대항해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6.25를 의미하는 항미원조와 대상만 다르다. 중국 측이 6.25 전쟁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려고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26. [2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간행물 목록에서 확인 가능.
  27. [27]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자료 검색에서 확인 가능.
  28. [28] 공개된 소련의 기밀문서에는 김일성이 전쟁 전 소련의 지원을 요구하는 자료가 남아있고 이에 소련은 중국과 지원방안 및 개입정도에 대해 사전에 논의한 부분이 확인되었다.
  29. [29] 당시 맥아더는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장제스와 함께 중국해안에 상륙하자는 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30. [30]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은 1945년, 6.25 전쟁 발발은 1950년으로 고작 5년 뒤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누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싶겠는가. 했다가는 전세계의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심지어는 패배에 망신까지 살 수 있을 일이다. 이때문에 문책당한 맥아더 장군이 미국에서 전쟁광 등등 안좋은 별명이 생긴 이유이다.
  31. [31] 특히나 소련은 2차대전으로 수천만명의 인명피해와 핵심 농-공업지대가 전장이 되어 초토화되었다. 실전경험 풍부한 대병력은 있지만 한창 전후복구중인 소련이 또다시 대전쟁을, 그것도 어마어마한 경제력(렌드리스 참조)을 보여준 미국을 상대로 벌일 생각을 할수 있을리가...
  32. [32] 이미일,〈6·25전쟁 중 남한민간인 납북 문제에 대한 전후 처리 현황과 과제〉
  33. [33] 1949년 8월 5일〈연천주재지사업보고서〉"…반동분자들을 분열.와해시키고 납치함으로써 국토완정의 결정적 역할을 높일 임무…"
  34. [34] 1950년 8월 17일〈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서울시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 명을 후송하도록 한다."
  35. [35] 어떤 중년의 미군은 젊은 중공군 병사가 몰래 풀어줘서 본대로 복귀할 수 있었는데, 중공군 병사가 풀어준 이유가 압권이다. (그 병사가 한 말) “난 어릴 적부터 항일동지들이었던 미국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어서 여기서 떠나라.”
  36. [36] 미덕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스탈린도 남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가 그 "미덕"을 무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강력한 집권체계와 전시동원체제가 완비된 다음이라 점령지 주민을 짓밟아도 전쟁을 수행하는 데 지장없었기 때문이다.
  37. [37] 물론 항목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정말 아무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8. [38] 1946년 2월 12일 미 육군에서 명예제대하고 민간버스 편으로 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어 휴게소 정차를 요구한 아이작 우더드 병장과 이를 거부한 버스기사 사이에 시비가 붙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이 아이작 우더드 병장을 집단구타 후 유치장에 불법 감금하고 부상당한 눈을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여 실명에 이르게한 사건으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서 이 사건을 공론화 하여 미합중국 정부의 흑백분리 정책 철회를 이끌어 냈다.
  39. [39] 당시에는 주요 전투병력은 대부분 백인이었고 흑인황인종, 히스패닉등은 극히 일부를 제외 하고는 입대 자체가 힘들었다. 입대 했더라도 대부분 비전투직에다 인종별로 나누었다. 지금이야 다민족국가의 대표주자지만 이시절만 해도 미국은 '백인의 나라' 였다.
  40. [40] 지금처럼 피부색 따윈 상관 없이 여러 인종의 병사들이 같은 참호와 막사에서 먹고 자며 부대끼는 풍경은 6.25전쟁 당시에는 아주 생소한 모습이었으나 월남전에 이르러서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물론 아직 인종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이라 장교진은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거나 패싸움을 하는등 순탄치만은 않았다.
  41. [41] 그 때문에 작가의 어머니는 그 유엔군에게 고마워서 아프리카 고아를 입양하고 싶다고 말버릇처럼 말했고, 겨울만 되면 길가에 보이는 군고구마 장수의 모자를 보면 그 인민군이 생각나서 항상 고구마를 사온다고 한다.
  42. [42]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밀려났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측근으로부터 제주도로 피난해야 한다는 제안을 들었으나 이를 묵살했다고 한다. 월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아예 대한민국 정부를 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로 대표되는 위기가 닥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유엔군사령부가 북한군과 중공군이 금강-소백산맥 방어선을 도달할 경우, 한국 정부를 제주도로 이전해서 차후 공세 전환의 거점으로 삼자는 구체적인 안건이 나왔지만 연합군이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백지화되었다.
  43. [43] 원서는 레이건 집권 초기인 81년에 나왔으나 한국어판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 나왔다.
  44. [44]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
  45. [45]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있다.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원대돈으로 살수야 있겠지만 상업용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군에서 발간한 전문학술 자료인 만큼 흥미 위주의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기간 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 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내용과 특정전장의 지리환경, 투입부대, 전투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기록명시가 있다.
  46. [46] 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
  47. [47] 중국판 이름은 아적전쟁. 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 동영상이 중국군의 6.25 참전을 미화하고 한국 측을 조롱하여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영화는 흥행 평가 모두 거하게 망했다.
  48. [48] 오! 인천 못지 않은 괴작인데, 감독은 놀랍게도 임권택이다!
  49. [49] 참고로 타 퀴즈 프로그램에도 나온 적이 있다.
  50. [50] 다부동 전투 당시 방어 담당 구역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후퇴한 11연대 1대대 장병들에게 한 발언. 이 발언 직후 백선엽은 주머니 속 권총을 뽑아 사단장 일선 돌격을 감행한다(...)
  51. [51]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제3보병사단이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을 시작한 직후 한 발표.
  52. [52] 이 연설은 영화 부산행의 안전행정부 장관의 연설의 모티브가 되었다.
  53. [53]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
  54. [54] 1950년 6월 28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 행위를 유엔의 경찰 행위라고 부를 수 있느냐?" 고 질문한 기자에게 트루먼이 한 대답.
  55. [55]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 된 이후 정신승리전쟁승리를 자축하는 이른바 ‘전승열병식’에서 한 연설내용 #
  56. [56] 6.25 전쟁과 관련이 깊지 않지만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아닌 일개 변호사가 무서울 만큼 한반도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발칸반도에서도 구 유고내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연방의 대립, 키프로스 분쟁을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을 발생하고, 그것을 구 1세계 및 유럽권 전체가 떠안게 됨으로써 이 발언이 역으로 실행되기도 하였다. 뭐 이 발칸반도는 1차대전의 원인으로써 지목된 것이고 구유고 내전은 그렇게 전세계에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57. [57] 국군의 전투보병휘장은 오로지 50년대에 6.25전쟁의 포상으로만 수여되고 폐지된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