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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무신정권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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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대 무신 집권자

본관

청주 경씨

이름

경대승(慶大升)

아버지

경진(慶珍)

출신지

고려 청주

사망지

고려 개경 자택

생몰연도

1154 ~ 1183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관직 진출
2.2. 기해정변과 집권
2.3. 도방(都房)
2.4. 요절과 도방의 몰락
3. 후일담
4. 평가
4.1. 호의적 평가
4.2. 비판적 평가
4.2.1. 정치력 부재
4.2.2. 사병의 부활
4.2.3. 도방의 폐해
4.2.4. 공포정치
5. 여담
6. 창작물
7. 같이보기

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세 번째 집권자. 무신정권 시대에 집권한 무신 최고 집권자 중 유일하게 국왕과 문신들의 존폐를 위협하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이후 사대부들에게 상당히 고평가를 받았으며 유일하게 반역 열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집권자였다.

2. 생애

2.1. 출생과 관직 진출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1]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당시 지역에서 유서 깊은 군반 씨족이었다. 부친인 경진(慶珍)은 무신정권 2기 집권자 정중부의 편에 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다만 차후의 행보를 보자면 경대승은 그러한 아버지를 그닥 탐탁치 않게 생각한 듯하다.

경대승은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꽤 능했고, 무엇보다 그의 청주 경씨 가문이 무신 가문들 중에선 잘 나가는 집안이었던 지라 당시 음서를 통해 15세에 국왕 친위대인 견룡군 교위가 되었다. 이후 명종 4년인 1174년에 그는 불과 21세의 나이로 송군수[2] 등과 함께 고려 왕의 친위대인 견룡군에 속해 있었으며, 같은 해 견룡군의 하급무관직인 견룡행수로 부임한다.

그의 아버지인 경진은 타인의 토지를 많이 빼앗아 지탄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사망한 뒤 청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자 가지고 있던 모든 전답을 세인에게 돌려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때 자신과 가문이 원래 지녔던 전답까지 국가에 환속해버리면서 항상 일식에 이찬으로 생활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생활고로 고생했다고 한다.[3]

1178년에는 원래 충주 주민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이동한 사람들과 청주 토착민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100여 명이 죽게 된다. 이 때문에 경대승은 청주의 사심관으로서 대장군 박순필과 함께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면직된다.

2.2. 기해정변과 집권

1179년 9월에 자신과 같은 견룡군 소속인 허승, 김광립 등과 더불어, 당시 실권자이던 정중부, 정균, 송유인, 송군수, 대장군 이경백, 지유 문공려 등을 살해한 뒤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의 나이 겨우 26세 때였다. 또 이후 그의 족형인 장군 손석의 부추김으로 자신의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인 오광척, 장군 김광영, 지유 석화, 습련, 중랑장 송득수, 기세정 등을 잡아 처형시켰다.

당시 임금인 명종을 비롯한 문신들은 폭정을 일삼던 정중부와 그 일당을 척살한 경대승에게 축하연을 열었는데, 경대승은 모든 문신들이 모여있는 그 자리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라고 대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선왕 의종을 죽인 이의민데꿀멍해서 병사를 두어 경비할 정도로, 당시 겨우 26세의 나이였음에도 대신과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니 확실히 풍모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쫄아버린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그의 사후에야 명종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들게 된다.

한편, 일각에선 이 일 때문에 경대승이 명종의 신뢰를 얻지 못한거 아니냐는 시각도 제기하는데, 사실 선왕 의종은 정당하게 계승한 왕위를 무신정변으로 빼앗긴 것이고 명종은 그러한 정변 세력에게 옹립되었기에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명종이 비록 인종의 아들이기는 했지만 태자로서 계승한 왕위와 무력으로 신하들이 옹립한 왕위에서 명분이 어느 쪽이 밀릴지는 자명한 것.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틀어쥔 경대승이 의종에 대해 '선왕'이란 말을 언급하며 이의민의 숙청을 외친 것은 현 임금인 명종의 약한 정통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4]

1180년 12월에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 김광립 등이 교만을 부리며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고 방약무인한 행동을 보이자 그들을 죽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자신을 위협할 만한 경쟁자를 미리 죽인 거라는 시각도 있다. 선왕을 시해한 자라 일침을 놓았던 이의민 역시 끔살하려 했으나 이의민의 동지이자 경대승의 친우였던 두경승의 밀고로 이의민은 부리나케 도망친다.

허승 등을 죽이자 경대승은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재상 이하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축하하니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한 국가의 권력을 틀어쥔 최고 실세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으며, 집권 후 군부도 사직하여 집에서 소소히 생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는 대궐로 나가 왕에게 의견을 밝혔는데, 그 때마다 명종은 그의 의견에 무조건 따랐다고 한다.

경대승은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쳐 많은 문인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합격하였지만, 그렇다고 무신 세력을 대놓고 탄압하진 않았다.[5] 허나 거사 과정에서 정적들이 많아지고[6] 독살 위협 등에 시달려서인지 의심이 많아져 문객들을 보내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 뭔가 낌새가 보이면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는 등 여러 번의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1181년 3월에는 전(前) 대정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자 영사동정 대공기의 밀고를 듣고 왕에게 고하여 체포했다. 이후 석화, 별장 박화, 주부 이돈실 등도 이 사건에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이돈실 등은 귀양을 보내고 석화는 남해 현령, 박화는 하산도 구당사로 강직시켰다.

2.3. 도방(都房)

경대승 집권기의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도방이라는 경대승의 사병 집단일 것이다. 이전 무신 집권자들의 기록에도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 등의 기록이 있어 사병을 다뤘을 가능성은 있으나, 경대승과는 그 규모나 조직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은 정적들이 많아지자[7] 이에 100명의 장사를 뽑아 도방이라는 사병 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를 맡게 했다. 이 도방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싸움과 무기술에 능했으며, 이들은 경대승을 화장실까지 호위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아버지인 경진이 착취한 토지를 반환하며 가문이 지녔던 토지까지 함께 반환해버려서, 결과적으로 경대승은 상당히 가난한 편이었다.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다 따져보면 집 한채와 쌀 몇 섬, 말먹이 뿐이라서 100명이라는 인원을 먹여살릴 경제적 능력이 전무했기에 이 장사들은 제때 월급을 받지 못하였고, 군적이 아니기 때문에 군인전도 받지 못하여 생존을 위해 점차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경대승의 권력과 도방의 무력을 이용한 일종의 상납을 강요했을 것으로 보인다.[8] 도방 인원을 가두면 법관이 찾아가 이들을 석방시켰으며, 이로 인해 도방 장사들은 상당히 거리낌 없는 약탈을 자행하게 된다. 하지만 경대승의 입장에선 도방을 해체하자니 당장 암살 위협이 다가오고, 도방을 냅두자니 유지비용 조달에 문제가 생겨 약탈을 적극적으로 말릴 수가 없어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조정에 건의라도 좀 하지

다만 이에 대해선 여러 견해가 나오는데, 그의 상여가 나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있던 백성들의 상당수가 통곡했다는 점, 특히 도방이 집권자나 부유층을 살해하는 등에 전문이었던 점을 들어 이들이 일반 백성보단 오히려 권력층을 털었을 거란 의견도 있다. 실제 '상납'을 받으려면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일반 백성을 쪼기보다는 돈을 많이 가진 부유층을 터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대목.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를 반영해 도방을 마치 탐관오리 잡는 의적 활빈당 같은 이미지로 묘사해놨다. 물론 부유층을 털어도 약탈은 약탈이고, 이 때문인지 도방을 한국 조폭의 뿌리(...)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도방이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받는 와중에도 경대승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경대승 개인에 대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점은 특이한 점. 앞서 말했듯 그 자신의 뛰어난 카리스마 덕분일 수도 있고, 도방 사람들이 같이 숙식하는 친밀한 대장을 버리지 않은 의리의 사나이들이였을 수도 있겠지만, 때론 내부에 파가 갈리고 분란이 생겨 싸움질도 일삼았다고 한다.

도방은 경대승 사후 해체되었으나 최충헌 집권 이후 더 강대하게 재건되었다. 최우 시기 내외도방으로 확대되었고, 최항 시기도 마찬가지였다가 김준 시기 때 축소되었다. 그리고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도방도 결국 해체되었다.

2.4. 요절과 도방의 몰락

경대승은 집권 4년차인 1183년 7월에 30세의 이른 나이로 병사하는 비운을 맞는다. 사망 원인은 정신적인 문제가 병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설이 중론. 일각에서는 이의민 세력이나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설도 제기하지만, 일단 고려사에는 정중부을 꾸고 병을 얻어 이로 인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9]

고려사에 보면, "경대승의 상여가 나가니 백성들 중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어 그 울음 소리가 왕도를 진동시키더라."라고 적혀 있으며 이것으로 볼 때 백성들 사이에서 인망은 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사병 집단이었던 도방은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도방 우두머리였던 김자격[10]이 뭔 일인지 도방 사람들을 반역 모의로 무고해버리면서 통째로 몰락하고 만다. 결국 왕의 명을 받은 대장군 정존실, 오숙 등에게 치죄되어 도방 인원 대부분은 고문받다 죽고, 나머진 귀양가게 된다.[11]

경대승의 요절은 그가 바라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많은 정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은 무인임에도 경인년 이전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그래서 다시 조정을 문신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무신들을 숙청하거나 무신들의 권력기관인 중방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문신우대정책을 펼쳤지만, 이게 무신들에게 옹립된 명종의 눈에는 마냥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명종의 두려움을 샀다. 사실 상기된 도방의 가혹할 정도의 몰락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는 측면도 일부 있는데, 경대승에 반대하던 세력 입장에선 도방의 씨를 확실히 말려두지 않으면 이후가 상당히 불안했을 것이다.

3. 후일담

도방의 몰락과 달리, 경대승의 일족들은 치죄를 받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았다. 덕분에 이후엔 문하시중에 오르는 경복흥이라는 인물도 나온다. 참고로 후손들은 조선 중기 가세가 점점 기울어 본적인 충청도 쪽으로 이주하여 지금도 25대손까지 충북 충주 지방 근처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다만 가문의 시조가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임에도, 현재 종파인 청안공파의 후손들은 경대승의 직계가 아니기도 하고[12] 해서 그런지 역사에 이름 남은 인물을 물어보면 경대승보단 경복흥이 먼저 나온다고 한다. 아니면 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경권중이나... 드라마 무인시대를 보고 나서야 경대승을 처음 알게 됐다는 사람도 많다고 족보 편찬자가 말한 걸 보면....

상기되어 있듯 고려사를 보면 다른 무신 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열전에 실려 있는 반면 유독 경대승만은 반역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경대승이 권력을 차지한 후에도 선임 무신 집권자들처럼 관작을 받지 않고 나가버린 것, 개인의 재산축적을 거부한 것,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문신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비춘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이 그나마 역대 무신 집권자들 중 온화적이었기에 그가 오래 살았다면 고려 역사가 바꼈을 것이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어찌됐건 경대승 역시 상대적일 뿐 조정의 의사결정에 간섭했고,[13] 공포정치, 도방의 횡포 방치, 정치적 지향점 부재 등 한계점 역시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4. 평가

4.1. 호의적 평가

무신 집권기에 한해서 보면, 그 누구도 경대승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이 죽자 백성들 중에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경대승은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선동 능력 등을 보여주는 일화가 제법 많은거 보면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후대 문신들이 문신을 우대한 경대승을 더 쳐줘서 호평한 점도 있겠지만,[14] 이런 평을 빼고 팩트만 보더라도 최충헌까지의 무인 집권자들을 보면 이의방, 정중부는 의종 폐위, 이의민은 의종 시해, 최충헌은 명종, 희종 폐위를 하였지만, 경대승만은 유일하게 왕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도 조선의 문신들에게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덕분에 집권자 중 유일하게 반역열전에 기록되지 않았다.

경대승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의 열전이 무신란 이후 집권한 무인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고려사高麗史≫ 반역전叛逆傳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 이전이나 이후의 무인집권자들 모두가 반역전에 수록되어 있는데, 경대승만은 일반 열전에 올라있는 것이다. 경대승의 전기를 일반 열전에 수록한 것은≪고려사高麗史≫의 찬자였다. 그런데 동 찬자의 그와 같은 편찬 방침에는 경대승 당대의 인물들, 특히 문신들의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참고되었을 것이다. 경대승 당대 문신들의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그를 ≪고려사高麗史≫ 반역전叛逆傳에서 제외시켰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당시의 문신들은 그를 이의방·정중부 등과는 다른 인물로 파악했음이 분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무신 정권

다만 성격적인 부분에선 강직한 성격만큼 확실히 융통성도 부족하여 쓸데없이 적을 양산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천문에 밝고 사람됨이 강직하여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섞지 않았으며, 남을 꾸짖음에 말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애꿎은 정적을 만든 측면도 있을법하다. 대표적으로 정통성이 없다시피 한 명종 앞에서 선왕을 운운하는 것 역시 명종 입장에선 조선 세조 앞에서 노산군의 정통성이 어쩌구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들렸을지도 모른다.[15] 사실 명종은 무신 집단인 중방에서 옹립된 왕이기에 중방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지만, 경대승은 그 중방의 정중부 등을 싫어했기 때문에 애초에 명종과 양립하기가 좀 힘든 부분도 있었다. 물론 다르게 보자면 그렇게 적이 많은 와중에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자택에서 칩거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경쟁자나 적들이 무서워 지방에 도망갔을 정도라는거니 개인적인 카리스마만큼은 굉장했던 모양.

전술했듯이 도방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경대승의 삶은 전쟁마냥 정치에서도 개인만 잘났다고 다 잘되는 것은 아님을 반면교사를 통해 일깨워주게 된다. 다만 확실히 경대승이 도방의 폐해, 정치력 부재 등 단점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무신집권자 중 가장 온건적이고 본인이 무인임에도 진영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아닌건 아니라고 보고 조정에서 중방, 무신의 영향을 크게 줄인 자였다는 점은 평가할만하다. 물론 덕분에 견제 세력이 약해져 후대 무신집권자들이 더 활개를 친 것 아니냔 의견도 있지만, 당시 경대승이 본인 요절 후 권력공백기가 올 것을 알고 의도했다고 보긴 힘드니 그만 탓하기도 뭐하다. 도방 때문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가산 역시 죄다 기부하면서 개인적 탐욕도 누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상기했듯 고려사는 경대승을 반역 열전에 넣지 않았고, 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서도 경대승이 무신정권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문신들이 그를 의지했다고 상당히 좋게 평가했다. 동사강목에서도 경대승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크게 슬퍼했다며 나름 호평했다. 또한 경대승의 죽음을 졸(卒)이라 하여 선비의 죽음으로 표현해 우대해 주었다.[16]

4.2. 비판적 평가

경대승이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무신정권의 막장 집권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그 역시 오점은 꽤 남겼다.

4.2.1. 정치력 부재

사실 경대승은 난신을 척결한다는 혈기 하나만을 내세워 젊은 나이에 권력을 잡았지만, 이로 인해 거사가 성공한 이후부턴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라는[17] 일종의 복고주의 외에는 딱히 어떤 정치적 비전이나 소신을 보여주질 못했다. 실제로 그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큰 정책은 무신 정변 이후 극도로 세가 약화되있던 문신들을 우대하는 정책 몇 개뿐이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 경대승은 평생 조정에 출사한 바가 없고, 집권 후 곧바로 군부에서도 사직하였으며 이후 고작 4년 여 간의 집권기 동안도 딱히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고 몇 차례 왕에게 찾아가 간언을 했다는 기록만 남았던 걸로 볼 때, 애초에 정치적인 소신이 담백했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인 권력욕이 없었던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본인의 역할은 왕과 문신들이 나라를 잘 이끌게 토대를 지키는 것일 뿐이라고 인식했을 수도 있다는 것. 또 다르게 보면, 요절해서 명확히 알 길은 없지만 경대승 역시 장기집권했다면 나이를 먹으면서 학식도 쌓고 그만의 정치적 비전을 보여줬을지도 모르는 셈.

사실 무신정변을 통해 고려 제1정치기구로 부상할만큼 권위가 올라간 중방을 제대로 구슬리지 못한 것 역시 경대승 입장에선 심각한 패착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게, 중방은 무신정변에 참가하거나 동조한 고위급 무신들의 합좌기구라서 권위 뿐만 아니라 고려군에 대한 실제 권한도 여기를 통해 나오다 보니 함부로 중방을 건드렸다간 순식간에 다굴 당해서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무신정변의 삼두 중 이고가 이의방에게 살해당해 살얼음처럼 유지되던 균형이 깨져버린 상황에서도 이의방이나[18] 정중부가[19] 중방을 차마 깔아 뭉개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

오히려 어떨땐 중방이 이들의 권력을 견제할만큼 입김이 쎄기도 했는데, 이는 무신정변의 주도 세력이 이의방과 이고로 대표되는 군부 내 신진 세력이었고, 여기에 원로인 정중부를 얼굴 마담으로 끌어들인 구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의방과 이고 역시 군부 내 원로들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고, 이들 원로들은 중방이라는 형태로 애송이인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일단은 자기들 중 리더격이기는 해도 동료에 불과한 정중부를 적절히 견제했던 것이다. 또한 정중부도 자신의 지지 세력인 중방을 그만큼 대우해주고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20] 실제 정중부 집권시엔 중방과 정중부의 대립이 별로 나오지 않고 정중부가 문하시중에 올라 조정의 영수가 되었음에도 정중부가 알아서 조정이 아닌 중방을 존중하며 중방에서 결정을 내리자는 식으로 나온다.

하지만 경대승이 정중부와 그 일파를 살해한 뒤 집권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방의 수장과 원로를 모두 죽여 중방은 경대승을 적대시하게 되었으니, 정치 현실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경대승 사후 이의민 집권 전까지의 공백 기간 동안 중방의 중요 인사였던 조원정은 명종이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기를 들며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것이 실패하여 처형당했는데, 당시 조원정이 중방에서 차지하던 위치[21]를 감안해 본다면 탄핵 같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 이 당시 중방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전 중방을 이끌던 자들에 비해 인물 자체의 부실함도 있긴 했겠지만.

경대승이 주도한 중방 무력화 정책에 맞서 무장들의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경대승은 이를 타개하고자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함께 문신들을 적극 등용하고 또한 친위대인 도방을 설치했다. 자신은 평생 출사를 하지 않았지만 정작 친위대인 도방의 권력이 커짐과 동시에 심각한 부패를 가져왔다. 이쯤 되면 중방 무신들의 부패를 가지고 경대승이 지적하여 거병한 명분도 힘을 잃어버리는 것. 게다가 애초에 경대승이 복귀시키려한 무신정권 이전의 문벌 귀족들 역시 상당수는 부패하기 매한가지였고, 무신정권 이후 문신들은 무신들과의 통혼을 통해 결국 생존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대승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정중부 가문 덕에 뒷배를 채웠던 상당수 탐관오리들을 제대로 척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특히 공포정치 속에서도 경대승은 조원정은 물론이고 최세보, 이광정, 정세유, 석린, 이영진, 그리고 본인이 척결하겠다고 다짐한 이의민도 결국 제거하지 못했다. 덕분에 경대승 사후에도 조정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지속되었고, 특히 석린은 명종에게 대드는 짓도 저지르며[22] 고려 왕실의 권한까지 대폭 실추시켰다. 다만 이건 경대승의 입지가 그만큼 불안했다는 방증이기도 한데 조원정, 정세유 등 무신들은 난신이기 이전에 고려군 내에서 명망이 높은 장군들이었기 때문에 경대승도 함부로 건드리기가 쉽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군부 내 반란까지 우려되어 정중부 일가만 제거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경대승 사후 서로의 갈등 속에서 풍비박산이 난다.

4.2.2. 사병의 부활

도방 이전 무신들의 사병들은 대체로 용사, 장사 혹은 무뢰배 등으로 불리는 등 고용인의 목적에 의해 임시적으로만 형성된 비공식적인 집단이거나[23] 집에서 부리는 노비들을 무장시켜 동원하는 등의 아마추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경대승의 도방은 체계적으로 전투 훈련을 받아 오로지 경대승의 호위만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앞의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신라 말기 진골들간의 왕위쟁탈전에서 동원된 사병 집단들과 그 성격을 같이한다.[24] 게다가 이들은 경대승의 호위만을 담당하지는 않고 첩보 및 반대파 제거에도 동원되었다.

경대승의 도방 조직은 창설에 대한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불법적 군사 사조직이었으며, 비록 그 숫자는 백여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였던 것으로 보이나 전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경대승은 후대의 최충헌이 이름도 바꾸지 않고 도방을 재창설, 최우대에는 확장 및 재편되어 삼별초라는 정규군의 전투력을 뛰어넘는 사병 집단이 탄생하는데 간접적으로나마 일조했다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보인다. 도방은 이후 최씨정권 60년의 기반이 되었고, 삼별초는 고려 정규군의 질적 하락 및 지휘체계의 문제를 불러와 대몽항쟁에서 고려 정규군이 제대로 된 방어 전략 대신 임기응변으로만 대응하다 각개격파 당하는 결과에 일조하는데, 이는 경대승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안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

특히 사병은 이들이 중앙정부가 아닌 사병을 보유하고 있는 주군과 그 집안에게만 충성을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집단인데, 중앙정부가 사병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나라 전체가 박살이 나버린 신라 말기 상황을 보면 그 위험성이 입증된다.[25] 특히 경대승처럼 지방도 아닌 수도에 버젓이 불법적 군사 사조직을 창설했다는 점은 명종(고려) 입장에서 보면 대놓고 어그로라 불쾌함을 넘어 위협을 느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26] 물론 이들 백여명의 적은 숫자로 만월대 공격은 무리겠으나 왕궁 밖에서 사는 대신들에 대한 위협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며, 어디까지나 당시만 해도 이들의 창설 목적은 경대승의 호위였겠지만 이후 약탈로 변질되는 마당에 명종(고려)과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정적제거를 위해 창설했다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경대승 사후 이 도방 조직원들이 명종이 보낸 중앙군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나버린 것도, 명종의 경대승에 대한 감정도 있었겠으나 그보다는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따르지 않는 불법적인 군사 사조직이 수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고려)이 경대승과 도방에 대해 느낀 위협은 경대승 사후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키고 두경승에게 이의민과 맞먹는 권한을 주어 서로 견제하는 연립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는데 당시 조정의 대신들은 경대승이 주장하던 무신정변이전으로의 복귀에 대해 대놓고 지지를 하거나 동조를 하던 상황이라서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 본인의 입장에선 조정의 대신들을 도저히 국정 파트너로 삼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사병 집단의 성격을 넘어 후술된 도방 조직원 개개인의 일탈도 문제였다.

4.2.3. 도방의 폐해

당시 개경에 강도떼들이 마구 설치며 자신들을 경대승의 도방이라 일컬었다. 해당 관청에서 체포해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그때마다 석방하니 이로 말미암아 강도들이 약탈을 거리낌없이 공공연하게 자행했다. 경대승의 문객(門客)이 양가의 자제를 대로상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가에서 체포하여 죄를 다스리려고 했지만, 경대승이 극력 힘써준 바람에 방면되었다.

고려사 경대승 열전.


도방은 처음에는 경대승의 신변 보호를 주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점차 경대승의 호위에 그치지 않고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탐지하여 형벌을 내리거나 숙청하는 역할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당시 개경(開京)에는 스스로 도방의 구성원이라고 칭하는 도적떼가 일어났는데, 관부에서 이들을 체포하면 경대승이 석방해 주었으므로 공공연히 약탈을 자행하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도방 항목

경대승 자신의 청렴함은 앞서의 예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 딱히 의심할 바가 없지만, 경대승이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덕분에 그의 호위 부대였던 도방은 파가 갈려 분란이 일어나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게다가 경대승은 이들이 막 나갈 수 있게 뒤를 봐주기도 했다.

경대승의 본관인 청주 경씨는 경대승의 아비인 경진이 시조인 신흥가문으로서 무신정변으로 인해 급격하게 재산을 불린 여타의 다른 무신 가문들처럼 의외로 가문 자체의 재산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대승은 아비 경진이 불법적으로 불린 재산을 대부분 반환하고 나머지 일부를 도방 운영에 사용했는데 이러니 자금난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후대의 최충헌이 재창설한 도방 및 최우삼별초 군대가 최소한 민간에 대한 약탈 문제는 없었다는 점에서[27] 경대승의 경우 그나마 있던 집과 전답을 모조리 처분했음에도 고작 백여명의 사병을 먹여살리지 못해 이들이 민간 약탈이라는 파행의 길을 걸었다는 것은 자금난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경대승은 도방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는데[28], 이는 정중부를 죽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의 정치 현실을 무시하고 중방마저 무력화 시켜 버리면서 무신정권에 호의적이었던 고위급 장교들에게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버렸기 때문이다. 기록에도 경대승에 대한 암살 시도가 줄을 이었다고 나와있는데, 결국 경대승은 집권기 중 도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화장실에 갈 때조차 도방 병력들이 그를 호위했을 정도로 본인 신변에 대한 노이로제가 걸려버렸다고 판단된다.[29]

게다가 사실 도방은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닌 경대승 개인 사병 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정당성 또한 부족했는데, 이런 도방의 형태는 후일 최충헌이 그대로 따라하여 삼별초 같은 사병 집단을 보유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4.2.4. 공포정치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한 이후부터 마음이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을 큰 거리로 보내 몰래 정황을 살피게 하였다. 어쩌다가 유언비어를 듣기만 하면 즉시 잡아 가두고 국문했기 때문에 큰 옥사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매우 혹독한 형벌이 가해졌다.

- 《고려사》 경대승 열전.

경대승은 자신의 얕은 입지를 불안히 여겼는지 여론에 항상 신경썼다. 덕분에 고려사를 보면 경대승이 명백한 죄명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언비어를 듣기만 해도 혹해서 잡아다 국문을 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다른 무신들과 마찬가지로 인명을 좀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으로 덕분에 집권기 대비하여 옥사한 인물은 무인 집권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편.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경대승의 정치스타일을 잔혹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경대승은 그의 집권기에도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항상 몇 사람씩 거리로 내보내어 잠복시켰다가 유언비어를 들으면 즉시 잡아 가두어 국문하였다. 자주 옥사를 일으켰고 형벌을 사용함이 매우 가혹하였다” 한다. 그가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것은 정적으로부터의 위협이 심각했음을 알려 준다. 또한 정보원을 풀어 유언비어를 단속했다던가,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등의 행위는 그만큼 그가 집권에 자신이 없었음을 말해 준다 하겠다. 즉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미약했기에 경대승의 정치는 잔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집권은 순리가 아닌, 당시의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국사편찬위원회, 무신정권 中

왕이 선지를 내리길: 사형선고를 받은 자를 제외한 범죄자는 형을 정지하고 거주지에서 연금되도록 하였다. 경대승이 누차 재판을 벌여 옥사를 일으켜 형벌이 가혹해졌다. 이를 왕이 측은히 여겨 명을 내린 것이다. 이 명을 듣고 중외가 모두 기뻐하였다.

- 고려사 명종 세가 중 발췌. 재위 9년(1179년) 11월.

즉, 무신정권의 지배층 중에 상대적으로 문인(文人) 친화적 정책을 펼치고 국왕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지, 경대승은 인명을 존중하는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이 모습은 어느 정도까진 감안해야 하는게, 당시 경대승은 중방의 무력화를 주도한 탓에 다수의 무인들에게 배척받고, 심지어 암살 위협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의민을 처리하지 못한 것도 무인들 사이에서의 지지를 받지 못해 정치적인 입지가 좁아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 게다가 고려 시대는 현대처럼 만민평등이나 인권의 개념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혼돈과 살육이 넘치던 무신정권기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일례로 고려 경종 시절에는 복수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이 시행되다가 경종이 폐지시킨 적도 있었다.

허나 시대상이나 가혹한 사례 몇몇을 들어 "그러므로 경대승은 잘못이 없다"라고 비약하는 것도 잘못된 논리일 것이다. 둘 다 엄연히 잘못된 정치행위이고, 복수법의 경우는 시행 후 폐단이 심각해지자 경종이 후회하며 바로잡았지만, 경대승은 딱히 그러지도 않았다. 게다가 경종은 엄연히 국가의 최고지도자인 국왕이었기 때문에 폐단을 바로잡을 정통성 있는 권력이 있었지만, 경대승은 실질적 집권자였다 하더라도 형식상으론 엄연히 일개 무장이었고 집권 이후엔 그것조차도 사임한 야인이었다.

5. 여담

사실 고려사 자체가 조선사 등에 비해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측면도 있지만, 무신정권기 하면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집안이 가장 많이 알려져있어 경대승은 상대적으로 묻혀져있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2003년 드라마 무인시대 등으로 경대승이란 인물이 재조명되면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상승한 측면은 있다.

정중부가 경대승에게 기습을 당해 죽은 과정을 보면, 정중부 정권의 의외의 취약성을 간파한 경대승의 올인성 도박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중부 세력은 본인들의 집권만을 위하는 군사조직 즉 사병집단이 없었거나 취약했고, 물론 중방의 수장이었기에 정규군을 동원할 권한은 있었지만 실상은 중방의 고위장성들이 견제하는 상황에서 이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렇게 정중부 정권이 붕괴하자 경대승은 본인만의 군사 사조직인 도방을 만들었고, 경대승이 죽기 직전까지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대의를 거스르게 된다.

이의민의 행보도 주목해볼만한데, 경대승에 찍혀 나름 대비를 한다고 자기 집 골목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노복들을 무장시키기도 하였으나, 단순 노복들에 불과한 본인의 사병들은 전문적으로 전투 훈련을 한 경대승의 도방 병력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이의민은 위험한 개경보다는 나름대로 기반이 있는 경주로 낙향한다. 여담으로 이의민의 아비는 천민 출신 소금장수라고 기록되어있으나, 근대까지만 해도 소금은 나라에서 전매로 관리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이를 고려해보면 소금장수를 단순하게 천민으로만 재단하는 것은 1차원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신분은 낮았더라도 나름대로는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는 이의민이 경주로 낙향함으로서 간접 증명되는데, 이의민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데 단순히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낙향해 버린거라면 경대승 입장에선 이의민이 개경에 있는 것보다 더 죽이기 쉬웠을 것이다.[30] 어느정도 경주에 재력적 기반이 있고 개경보다는 안전하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이의민은 낙향한 것이라는 의견.

6. 창작물

7. 같이보기


  1. [1] 지금도 씨들의 본관 중 하나가 청주다.
  2. [2] 송유인의 아들.
  3. [3] 사후 가산을 정리해보니 집 한 채와 쌀 몇 섬, 말먹이 뿐이었다고. 다만 이렇다보니 살림살이가 돌아가질 않아 가신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집도 허름하여 수하인 도방 장사들이 누울 곳이 없자 자신의 방은 필요 없다 하여 허물어 버리고 호위 부대인 도방들과 숙식을 같이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4. [4]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 설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5. [5] 사실 이때 쯤이면 이미 문벌귀족들과 고위 무신들의 혼인 동맹이 맺어지고 있는 때였다. 특히나 정중부는 문벌귀족들의 말살을 원하지 않았던 인물로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문벌귀족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구 날뛰는 이의방이고를 제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6. [6] 애초에 경대승 세력은 집권 이전까진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기존 권력층들과 접점이 있는 세력이라고 보긴 어려웠고,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것 역시 세력 싸움에서 이겼다기보단 기습에 가까운 뒤통수치기로 이뤄낸 결과였다. 덕분에 결과적으로 경대승은 권력을 차지하고서도 (하급 관리들의 인식과 무관하게) 무신 권력 집단이었던 중방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으르렁댔기 때문에 운신의 폭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의민을 결국 못죽인 것만 봐도.
  7. [7]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정중부는, 당시 무신들이 부러워할만한 존재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정적' 가운데에는 이런 정중부의 죽음에 반감을 가진 일부 무신들도 포함되는데, 이는 정중부 항목 참고.
  8. [8]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족형 손석이 군자금을 대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게 알고보니 상당수가 당시 벼슬아치들의 뇌물로 운영된 것이었고, 이 일을 모르고 부정부패 척결을 울부짖던 경대승의 도덕성에도 치명타가 가해지며 대노한 경대승에 의해 족형 손석이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9. [9] 이 기록은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등장하는 무신 집권자들이 최후를 맞기 직전, 자신이 제거한 전 집권자에게 냉소와 비난을 받는 연출의 모티브가 되었다.
  10. [10] 김자격은 정중부 살해 당시 경대승 측에 가담했던 인물이었고, 이때 일로 경대승은 김자격이 도방을 다스리도록 임명했다.
  11. [11] 귀양 간 사람이 4명이었다고 한다. 1명은 귀양을 간 건지 아닌지 불확실한데, 갔다고 쳐도 5명. 나머지 95명은 고문을 못 견디고 옥사했다고 한다.
  12. [12] 경대승의 동생이 무신정변에서 굴욕을 당한 것으로 유명한 이소응의 딸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13. [13] 사실 집권기 경대승은 벼슬을 버리고 자택에 칩거했던지라, 본인이 직접적으로 조정의 의사결정에 관여했다고 보이는 기록은 문신우대정책 하나뿐이다. 물론 큰 일이 있을땐 명종 앞에 가서 알현하고 의견을 말했다고 하니 기록에 안적혀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14. [14] 고려사는 고려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때 작성되었는데, 이미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의 평가만 봐도 (일 잘하는 왕 중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문신들을 대우해 준 왕에게 평이 후한 편이었다.
  15. [15]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경씨 일가는 정말로 세조 앞에서 노산군의 정통성을 떠벌리다가 일가가 참살당하고, 당시 삼남이었던 경학중이 조카 경사원을 데리고 야반도주하여 겨우 일족의 명맥을 잇게 된다.
  16. [16]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선비는 졸(卒), 평민은 사(死)로 표현한다.
  17. [17] 만약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지 않았더라면 실제 경대승은 의종을 복위시켰을지도 모른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18. [18] 이 쪽은 중방의 수장인 정중부가 최대 정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때로는 힘을 빌리기도 했으나 평상시엔 서로 정적이었으며, 이의방이 알아서 중방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
  19. [19] 이 쪽은 중방의 수장이며 애초에 지지층이 중방의 원로들이었다.
  20. [20]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가 중방의 수장으로서 원로 격의 대표로 그려졌다. 이의방이 철퇴를 마구 휘두르니 정중부가 "그래, 어디 우리 다 죽이고 너 혼자서 다 해먹어봐!"라고 강경하게 나왔으며, 이의방이 이를 갈면서도 철퇴를 내리는 모습으로 이의방 정권과 군부 내 원로들로 이루어진 중방 세력의 대립과 견제가 잘 묘사되었다.
  21. [21] '응양군 상장군'으로 정중부 이후 중방의 수장이었다.
  22. [22] 본인 맘에 들지 않자 명종 앞에서 투구를 던져버리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무신정권 이전이라면 중죄에 처해질 행위다.
  23. [23] 특히 승려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24. [24] 그렇다고 본다면 이는 거의 300년 만의 사병 부활이다.
  25. [25] 한국 밖으로 눈을 돌려도 사병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나라 전체가 공중분해 된 사례는 정말 많다.
  26. [26] 경대승은 국가의 중요 정책이 있을때는 어김없이 궁에 출입하여 명종(고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간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명종 입장에서는 관직도 박차고 나간 자가 본인의 사병 집단을 믿고 왕에게 압력을 행사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27. [27] 최충헌의 경우 외가가 당시 매우 부유했던 지역인 진주의 유지인 진주 유씨였던 관계로 자금에 관해서는 다른 무신집정들에 비해 사정이 매우 나은 편이었다. 최씨정권의 집정들인 최충헌, 최우, 최항이 차례로 진주에 부를 개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데, 최충헌의 본가는 우봉 최씨로서 우봉은 지금의 황해도에 있는 지역이다. 외가의 자금력이 아니라면 진주에 부를 개설할 이유가 없다.
  28. [28] 형식적으로라도 사병이 정규군에 편입되어 버리면 경대승이 가지고 있던 도방에 대한 지휘권이 완전히 사라지게된다. 후대의 조선에서 정도전이 사병 해체를 노리며 각 가문의 사병들을 형식적으로라도 삼군부에 귀속시키고자 했을때 왕자들과 유력 가문들이 격렬하게 저항한 것이 이때문이다. 사병이 정규군에 편입되는 순간 지휘권은 사병 집단의 VIP가 아니라 정규군의 수장인 국왕이 가져가게 되고 사병들과 그들의 수장이 이에 저항하는 것은 얄짤없는 반역 이기 때문이다.
  29. [29] 경대승이 죽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기록에는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라 죽었다고 나와있으나, 이는 암살 시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이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죽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면 실제로 암살이 성공하여 죽었던가..
  30. [30] 무인시대에서는 신라 부흥 세력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확고한 정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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