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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관련 틀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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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재임 중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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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기록관 사진[3]

[image]
공식 초상화

출생

<colcolor=#000000>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4]
(現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

사망

1979년 10월 26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97)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제5대 대통령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제6대 대통령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제7대 대통령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제8대 대통령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

제9대 대통령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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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고령 박씨 직강공파 29세손

부모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형제자매

5남 2녀 중 5남

배우자

김호남[5], 이현란[6], 육영수[7]

자녀

박재옥[8],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학력

구미보통학교[9] (졸업)
대구사범학교[10] (졸업)
신경군관학교[11] (졸업 / 2기)
일본육군사관학교[12](졸업 / 57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13] (졸업 / 2기)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미국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종교

불교[14]

신체

164cm[15], B형, 왼손잡이[16]

약칭

, 박통, PP[17]

중수(中樹)

군사 경력

복무

만주군 육군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1944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임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1945년 ~ 1963년

최종 계급

중위 (만주군 육군)
대장 (대한민국 육군, 국가재건최고회의)

병과

포병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일전쟁)
여순사건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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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3. 평가
4. 선거 이력
5. 소속 정당
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7. 각종 타이틀
8. 저서와 관련 서적
9.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
10. 묘소
11. 관련 시설
11.1.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서관
11.2. 박정희 대통령 생가
12. 기타
13. 미디어에서
13.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
14. 어록
15. 가족관계
16. 관련 단체
17. 관련 문서

1. 개요

이 문단은 토론에서 '사측 강제 결론 도출'(으)로 합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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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을 전복한 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관권/금권선거, 3선 개헌10월 유신으로 장기집권을 획책해 독재자의 길을 걸었으며, 임기와 생을 측근 암살로 마감하였다.

경상북도 구미시 출신, 본관은 고령 박씨이며, 호는 중수(中樹)이다. 제18대 대통령인 박근혜의 부친이다.

2. 일생

[image]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평가

[image]   자세한 내용은 박정희/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5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4,702,640 (46.6%)

당선 (1위)

1967

제6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5,688,666 (51.4%)

당선 (1위)

1971

제7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6,342,828 (53.2%)

당선 (1위)

1972

제8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2,357 (99.9%)

당선

[18]

1978

제9대 대통령 선거

민주공화당

2,577 (95.9%)

당선

[19]

[imag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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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대선

6대 대선

7대 대선

5. 소속 정당

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6.1. 이승만

현대에는 두 사람의 지지세력이 겹치는 경향이 강하지만, 정작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박정희 본인의 집권에 여전히 인기 있던 이승만은 장벽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귀국을 불허하였으며 장면 총리는 죽어서야 집 밖에 나오도록 했다. 아울러 이승만을 무능한 지도자라 평가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해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정치군인의 횡포, 여기서 비롯되는 인사 적체 문제 등을 이승만 집권기에 겪은 바 있다.[22]

박정희는 발췌 개헌 당시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상관인 이용문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수립한 바가 있다. 즉 5.16 군사정변은 두 번째 계획이었다. 본래 5.16은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계획되었다. 시행날짜는 3월 15일로부터 두 달 뒤인 5월 8일이었다. 그렇게 정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사람이 송요찬인데 그 송요찬이 미국으로 가는 날이 5월 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8일로 정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영결식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대독한 추모사에서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김종필은 박정희가 우남 '이승만 박사를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던간에 일단 죽은 고인에 대해선 심한 비판을 삼가고 되도록 좋은 점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과 별도로 영결식에서의 발언은 립서비스에 가까울 수 있다. 그 증거로 박정희 대통령의 1962년 저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이승만 평가는 영결식 당시 연설과 전혀 다르다. 내용 일부 발췌 그리고 2015년 4월,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조사에 대해 "박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않고 대신 참석한 정일권 전 총리가 말하길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사는 노산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쓰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 #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정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례에 대해서도 시큰둥했는데, 당연하게도 이승만의 장례 문제 때문에 갈등이 일었다. 거기서 양자와 의견 조율이 안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의 유족에게 국민장을 권유했다.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한다고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장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었다. 하지만 이석제 당시 총무처 장관은 이 보도를 부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독립운동가와 그 일족에게 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의) 그게 독립운동이냐, 그따위 경력으로 정치에 나서 당파싸움이나 유발했다. 그 경력 자체가 엉터리다.'라고 평가했는데, 이것은 아직도 기록에 남아있다.#[* 실제로 박정희의 가족 중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와 밀접하게 연관된 형 박상희가 있었는데, 비록 자신이 만주군에 있었긴 했으나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고 냅뒀으며 오히려 임시정부의 실체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도 박정희에게 할 말이 없는 것이 일제에게서 독립시키고자 정부를 열었으나 정작 독립군을 이끌고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당파 싸움으로 여러 번 무산 되었으며 결국에는 중일전쟁으로 여러 번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 이승만 본인도 미국한테서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러 미국에 갔지만 정작 받아온 것은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약속'''을 들고 와서 임시정부의 의원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신채호에게도 멱살을 잡혔다고 한다.]

6.2.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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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입장에서 박정희는 반평생을 섬겼던 그의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소장이던 시절에 전두환은 대위에 불과했으니 계급 차이가 상당했었다.[23] 나이 차이도 14살이니, 당연히 전두환은 박정희에게 꼼짝 못했을 수밖에 없다.#

5.16 군사정변 직후 전두환은 지지시위를 벌임으로서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고 이후 군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두환에게 있어 박정희는 주군이자 은인인 셈.

박정희는 전두환을 위해서 하나회를 만들어 주고 꼭 하나회 출신들 위주로 진급시켜줬다. 대위까지는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느렸던 전두환이었지만 박정희의 도움 덕분에 소령은 그 계급을 달고 있는 척만 하고 사실상 생략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짧게 달고 있었으며 중령부터는 되려 동기들 중 가장 진급이 빨랐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잘해야 중령 정도에서 제대했을 전두환은 순전히 박정희 덕분에 장성급 장교가 될 수 있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덕분에 당시 장성급들도 못건드리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게 어찌나 심했던지 12.12 군사반란 당시 차규헌유학성황영시 이 3명의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6.3. 김영삼

[image]

1961년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집권하자, 당시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은 반(反)군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할 뻔했다. 다만, 김대중 납치 사건처럼 배후에 박정희 정부가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다.[24]

1979년 YH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고, 부산·마산 민주 항쟁을 촉발시켰으며, 결과적으로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어 유신 체제를 붕괴시켰다. 10.26 사건 이후 김영삼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라고 했으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에 "솔직히 죽어도 싸다(...)" 고 생각했다고 밝힌 걸 보면 그냥 겉치레일 가능성이 높다.

2009년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

2017년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대표가 당사에 대한민국 보수정당을 상징하는 인물들인 이승만·박정희·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을 걸기로 하면서 김영삼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 박정희와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6.4. 김대중

[image]

김대중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낙선하다가, 자유당 소속 전형산 국회의원이 3.15 부정선거로 인해 자격이 박탈됨에 따라 1961년 인제군 선거구에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드디어 당선되었으나... 이틀 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회가 해산되면서 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이 신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해 박정희와 맞붙게 되었다. 선거 운동에서 김대중은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면 총통제가 실시될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주장했는데 1972년 10월 유신으로 결국 둘 다 현실이 된다. 이 선거에서 중앙정보부 등 관권의 개입이 노골적으로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겨우 95만 표(8%) 차이로 박정희를 따라붙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이라는 초강수를 두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72년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를 위해 일본 도쿄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 유신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 망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약 10개월간 일본과 미국 각지에서 기자 회견과 연설을 통해 반(反)유신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듬해 1973년 이후락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가택 연금 상태에 처한다.

가택연금 속에서도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은 계속되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삼일절 57주년 기념 미사에 참석하여 윤보선 등과 함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일으켰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병원에 수감당했다가 박정희가 9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다시 가택 연금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면서 가택 연금에서 해제된다. 당시 김대중은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박정희가 사망한 지 약 20년 후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용서와 포용'을 강조하며 김종필DJP연합의 상징적 조건으로 내걸었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 208억 원의 예산을 책정해 지원한다. 1999년에는 대구광역시를 방문하여 "나는 맹세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했지만 사람 박정희를 미워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근대화를 이룬 것도 있지만 국민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확신감을 갖게 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공이 크다.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라며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했을 때부터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서로 대립하고 갈등했던 두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만남의 순간은 딱 한 차례 있었다. 1968년 새해를 맞아 당시 국회의원 김대중은 7살 많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사차 만난 적이 있었다. 5분여 동안 나누었던 대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훗날 김대중은 당시를 회고하며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얼굴 어떤 얼굴인가 한번 본다고 갔어.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엄격한 인상 아니야, 냉철하고. 그런데 가니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더라고."라고 말했다.#

6.5.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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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은 육군사관학교에 8기로 입교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보병 소위로 임관해 육군본부로 배속되어 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육군본부 정보국 상황실장 박정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박정희는 육사 2기로 임관하여 현역 소령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재직 중 남조선로동당 입당 전력이 들통나서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으로 파면당한 후 백선엽의 도움을 받아 문관 신분으로 직제에도 없던 정보국 상황실장 직을 맡고 있었다. 정보국으로 배치된 육사 8기생들에게 전투정보과장 이후락이 상황실장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했는데 박정희는 현역 장교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나한테는 인사할 필요 없다"라며 자리를 피해 버렸지만, 이후 박정희와 육사 8기생들은 서로 죽이 맞아 어울려 다녔다. 일명 대한음주당이란 주당들 모임을 결성하여 틈만 나면 모여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친목을 다질 정도였다나.

이것이 인연이 되어 박정희의 중매로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큰딸 박영옥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김종필은 박정희와 처삼촌-조카사위라는 인척 관계로 묶이게 되었고 이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 입장에서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거의 항상 임자라고 불러댔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내각이 들어선 시절에, 김종필은 예비역 중령의 신분으로 5.16 군사정변의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쿠데타 실행을 김종필 자신이 계획해 먼저 박정희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쿠데타 성공하자 김종필은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 후 다시 예편했다. 군사정부에서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다. 강력한 정보기관의 설립을 주장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 부장을 지내며 박정희 정권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의회정치에 부정적이었던 박정희와는 달리,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주공화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4대 의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물러나고 잠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나게 된다. 이후 민정 이양이 결정되자 귀국하여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초기에는 반대하였으나, 설득과 압박에 눌려서 결국 찬성으로 전향하였다.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된 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다음 차례에는 대통령이 되어보나 했는데...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해버렸다. 유신 이후에도 박정희에게 적극 협조하며 국무총리직을 장기간 유지했고, "통일, 외교, 국방, 중화학공업만 빼고 나머진 모두 임자가 알아서 하라"는 박정희의 신임으로 보기 드문 실세 총리로 군림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세 총리라도 결국 절대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아래 서열인,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일 수 밖에 없었다. 대통령 눈밖에 나면 코렁탕을 먹을지도 모르는 시절이었으니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75년, '건강상의 이유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다.[25]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자 민주공화당 총재에 선출되고 김영삼, 김대중과 "빠른 시일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하였다. 민주공화당에서는 유신헌법에 따른 후임 대통령 선거를 준비했지만, 김종필 본인이 직선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박지원의 증언에 의하면 김종필은 사석에서 박정희에 대해 한번도 좋은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36살에 중앙정보부장, 45살에 총리를 역임하며 최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해왔지만, 박정희의 행태에 원한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를 중앙정보부에 조사하게 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박정희가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딸한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도 못 했다고 증언하였다.#

7. 각종 타이틀

8. 저서와 관련 서적

9.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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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에 제작된 각종 비석들 중에 박정희 친필 비석이 심심찮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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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에 쓴 '상승해병' 휘호. 이 휘호는 대한민국 해병대사령부가 서울 대방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시절에 해병대사령관실에 걸려 있었다. 현재 이 휘호의 행방을 아는 분은 추가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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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가 1979년에 쓴 신년 휘호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 판매하는 걸 푸틴이 개인적으로 구입하였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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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만큼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케치나 수채화 그림들이 대부분. 그림을 보면 알다시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 기준에선 상당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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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관련 구상도.

10.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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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육영수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박정희대통령묘소에 자리하였다.

서울현충원 정문에서 직선방향으로 맨안쪽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당시 유명한 지관(地官) 지창룡(1922~1999)이 터를 골랐으며, 수맥을 막기 위해 토목공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앞을 내어다보면 앞에 장군 제1묘역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한눈에 보인다.[30]

11. 관련 시설

11.1.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서관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난지천공원 맞은편에 있으며, 운영법인은 (재)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다.

건립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는데, 1997년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 뒤인 1999년에는 기념관 건립에 200억원이 넘는 보조금을 보태기로 약속한 뒤, 부지를 서울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매립장 권역에 잡고 2002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박정희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등 재야 시민사회단체들이 극렬히 반대하면서 착공이 2002년으로 미뤄졌고, 이듬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후 2004년 들어 모금액이 1백억 원에 그치고 2005년에는 행정자치부가 국고보조금 회수를 명령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에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측이 행정소송을 제기해 2006년 1심에서 2009년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이듬해부터 공사를 재개해 2011년 준공 후 2012년에 개관했다. 도서관은 개관 후 1년이 넘도록 개방이 되지 않았다가 # 현재는 개방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추가바람)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을 맞아 지지자들이 기념관에 4.2m 짜리 동상 설치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지역 주민과 시민 단체들이 반대하는데다 또한 기념관 부지가 서울특별시청 땅인지라 동상 건립 움직임에 서울시청도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 공공용지에 동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공미술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이미 만들어진 조형물을 심의한 적이 없다보니 서울시도 이를 보고 당혹스러워한 것이다. 기념관은 원래 동상 제막식까지 하려던 것을 어쩔 수 없이 기증식으로 축소했다며, 최대한 빨리 설치하겠다고 한다. 서울시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쪽에서 거세게 반발할게 뻔해서 동상을 둘러싼 갈등은 쉽게 끝나지 않는 전망이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추가바람

11.2. 박정희 대통령 생가

박정희가 태어난 1917년부터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1937년까지 20여 년을 살았던 집으로, 1993년 2월 25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이다.

현재 구미의 가볼만한 관광지로 자주 소개되어 일반인들도 많이 찾으며, 특히 보수 정치인들이 자주 와서 참배를 하곤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도 여기서 행해진다.

여담으로 여기에 쓰인 영정 사진은 실제 장례 때 쓰인 사진이 아닌 테일코트 차림에 무궁화대훈장을 패용한 사진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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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30일, 누군가가 생가에 불을 질러 박정희 영정이 있는 추모관이 전소되었다. 경찰이 현장에서 백모 씨(48)를 방화 용의자로 체포하였는데, 이 사람은 4년 전에 노태우 대통령 생가에도 불을 지른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백모 씨는 2007년에도 송파구에 위치한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를 훼손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 백모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고도 하야를 하지 않아 방화를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하였다. 그는 방화 외에도 폭행, 상해, 재물손괴 등의 전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이에 구미시는 약 9천만 원을 복구비로 들여 생가와 추모관을 곧 복원하겠다고 한다.

2017년 4월 25일, 법원은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백모 씨에게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

12. 기타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에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박정희, 1961년 11월또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사관생도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전 일본군 중장을 이케다 수상 관저 오찬장에 특별히 초청하여[33]# 큰절을 올렸다. 박정희는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교장 선생님 덕택에 일본 육사를 나왔고 이제 한국을 대표해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됐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술을 따랐고 이를 본 일본 요인들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이 민족은 겨우 삼천리의 좁은 변강 속에서 세계 희유(稀有)의 순혈(純血) 동포이면서도 혹은 분방 혹은 상잔을 거듭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두터운 봉건 속에서 빈곤과 나락과 안일무사(安逸無事)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아 왔다. 단 한번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 보지 못하였음이 오늘까지의 우리 역사다.'>><국가와 혁명과 나> 1963, p. 22
또한, 박정희는 명치유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세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p. 167)>>"명치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중략)명치혁명인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조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 (pp. 171-172)>><국가와 혁명과 나> 1963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34] #이번에는 박정희는 5.15 사건, 2.26 사건을 말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35]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이재복)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前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정윤회 저자 <실록 군인 박정희>, 2004, p. 118 중에서이를 두고 김승곤 前광복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수교 협상에서 짜증스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
(President Park said he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1965년 5월 18일, <한일협정 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 2권 231쪽##
>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 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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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미디어에서

13.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

이창환이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14. 어록

내 [ruby(一,ruby=일)][ruby(生,ruby=생)] [ruby(祖,ruby=조)][ruby(國,ruby=국)]과 [ruby(民,ruby=민)][ruby(族,ruby=족)]을 [ruby(爲,ruby=위)]하여

우리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적어도 1세기라는 시간을 잃었다. 이제 더 잃을 시간의 여유가 없다. 남이 한 가지 일을 할 때 우리는 열 가지 일을 해야 하겠고 남이 쉴 때 우리는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겠다.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해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잔재하는 수구(守舊)와 파쟁(派爭)이며, 시기와 모함이며, 독선과 아집이며, 단견(短見)과 무정견(無定見) 등 전근대적이며 비생산적인 요소이다.

체육은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고 규율과 질서와 협동을 존중하는 슬기롭고 애국적인 시민을 만들어 준다. 실로 체육은 심신을 연마하고 조화시키는 사회교육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는가?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 中(1965.6.23.)

농사는 하늘이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서 짓는 것이다.

연두교서 中(1966.1.18.)

제자가 스승을 우습게 여기는 교권(敎權) 없는 학원에서 진정한 교육은 이루어질 수 없다.

연두교서 中(1966.1.18.)

한 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단견(短見)과, 아무런 계획이나 한 가지 실천도 없이 덮어놓고, 헐뜯고, 불평하는 비생산적인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지 않고서 “번영이다, 발전이다, 조국의 근대화다”라고 하는 말은 한낱 공염불에 그치고 만다는 것을 나는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사 中(1966.4.28.)

자유는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평화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의 것이다.

아태지역각료회의 치사 中(1966.6.14.)

하나의 발전은 보다 큰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하고, 오늘의 기쁨은 내일의 영광을 위한 분발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광복절 경축사 中(1966.8.15.)

우리는 모두 정의를 지지하며,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희구한다. 그러나 정의가 힘을 동반하지 못할 때, 그것은 정의일 수 없고, 남는 것은 한낱 굴욕과 노예상태밖에 없을 것이다.

월남지원국 정상회의 기조연설 中(1966.10.24.)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연두기자회견 中(1967.2.2.)

바르게 알도록 하고, 바르게 판단하도록 하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하는 무거운 책임이 바로 우리 언론에 있다.

신문의 날 치사 中(1967.4.6.)

역사는 언제나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있는 국민에게 발전과 번영의 영광을 안겨다 주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사 中(1967.4.28.)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을 주장하기에 앞서, 타인의 권리와 인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사랑과 신의, 이해와 존경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인권은 보장된다.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치사 中(1967.12.8.)

우리는 죽을 수 없다. 나도 살아야 하고, 너도 살아야 하고, 민족도 살아야 하고, 조국도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길밖에 없다.

서울대학교 졸업식 유시 中(1968.2.26.)

무방비 상태의 자유는 압제를 자초하는 법이며, 힘이 없는 정의는 불의의 노예가 되고 만다.

아무리 방대한 국력을 자랑하는 나라라도 안일과 태평 속에 연약해지고 방종에 흐를 때에는 세계사의 무대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中(1968.4.1.)

우리가 서있는 이 땅은 자손만대(子孫萬代) 이어 받아서 번영과 행복의 땅으로 가꾸어 가야 할 우리들의 고향이요,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고, 또 우리의 뼈도 언젠가는 이 곳에 묻힐 우리의 향토다. 이 땅을 수호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단란한 가정을 우리 힘으로 지키고, 내 고장, 내 직장을 내 힘으로 수호하는 자기 방위의 사명과 책임감이야말로 진정한 향토애(鄕土愛)이며, 이것이 곧 조국애(祖國愛)의 구현이다.

향토예비군 창설식 유시 中(1968.4.1.)

참다운 평화수호의 길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비축하고, 어느 때나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연한 결의를 침략자에게 보여 주는데 있다.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 中(1968.7.23.)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약에 북괴가 또 다시 6.25와 같은 전쟁을 도발해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결심은 명백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때는 [ruby(軍,ruby=군)]과 [ruby(民,ruby=민)], 전방과 후방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전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이번만은 최후의 결단을 짓겠다는 각오로써 최후까지 싸워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국군의 날 유시 中(1969.10.1.)

평시(平時)에 땀을 많이 흘리면 전시(戰時)에 피를 적게 흘린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 中(1969.3. 29.)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서울대학교 총장에게 보내는 친서 中(1970.3.16.)

우리는 전통문화의 가치 있고 품위 있는 밝은 면을 찾아 내어 그 속에 숨어 있는 민족의 예지(叡智)와 긍지를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문화적 자주성을 견고히 지키고 꿋꿋한 정신문화의 전통을 계승 및 발전시켜야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우리의 빛나는 민족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자손 만대에까지 길이 빛내자는 것이다.

도산서원 보수 정화 준공식 치사 中(1970.12.8.)

토지가 국민이라면, 지도자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種子)는 민족의 이상이 될 것이다.

자서전 <민족의 저력> 中

이제 우리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되찾았고, 체념 속에서 의욕을 일깨웠으며, 불안 속에서 자신을 얻었다. 우리의 이 희망, 이 의욕, 그리고 이 자신이야말로 민족의 생동하는 정신자원인 것이며, 바로 여기에 조국의 앞날을 밝히는 빛이 있고, 길이 있는 것이다.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수락연설 中(1971.3.17)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체념해 버렸던 그 어려운 일들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거뜬히 성취시켰고, “하면 된다.”는 인간의지의 승리를 역사 앞에 실증하였다. 10년 성장의 힘겨운 과정에서 우리는 드디어 잠자던 민족의 얼을 일깨우고, 묻혔던 민족의 저력을 개발한 것이다. 유구한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이처럼 희망과 의욕과 자신과 긍지와 생명력이 생동한 때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던가?

제7대 대통령후보 지명수락연설 中(1971.3.17)

공산당과 대결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힘이 있어야 한다. 공산당과 입으로 싸워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공산당은 상대방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하면 절대 침범하지 않으며, 약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언제든지 침범하는 것이 공산당이다. 이것이 지난 20년 동안에 얻은 교훈이다.

광주 유세 연설 中(1971.4.22.)

우리는 안정의 그늘에서 싹트는 안일과 타성의 병폐를 배격해야 하겠고, 성장의 이면에서 활개 치는 낭비나 사치의 폐풍(弊風)을 근절해야 한다. 안일과 타성은 발랄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말살할 뿐 아니라, 생산적인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것이며, 낭비와 사치는 융화와 친화력을 파괴할 뿐 아니라, 정직과 성실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정녕 이 폐풍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 완수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배격해야 할 사회의 공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으며, 우리 국민은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사회 정화에 앞장서야 하겠다.

5.16민족상 시상시 치사 中(1971.5.16.)

우리는 우리를 해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들을 우리의 친구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해치려는 자에 대해서는 그 누구와도 감연히 대결하여 끝까지 싸울 의연한 자세를 지킬 것이다.

제26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1971.8.15.)

우리에게는 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우리의 글인 한글이야말로 민족문화의 큰 분수령(分水嶺)을 이루는 찬연한 위업이요, 자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글날 담화문 中(1971.10.9.)

우리는 비록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해도 같은 말, 같은 역사, 그리고 하나의 피로 이어져 온 운명공동체다. 이데올로기는 변해도 민족은 영원하다.

제27주년 광복절 경축사 中(1972.8.15.)

민족의 생존권은 절대불가침의 천부적 권리다. 그러나 이 권리는 결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지켜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자주-자조-협동의 정신이 바로 집단안전보장의 기본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제25주년 국군의 날 유시 中(1973.10.1.)

유신 체제공산 침략자들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이다.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은 자유는 일시적으로 이를 희생할 줄도 알고, 또는 절제할 줄도 아는 슬기를 가져야만 우리는 보다 큰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제2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 축사 中(1974.10.1.)

나는 물론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대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 부럽지 않게 떳떳이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다.

기자들과의 환담 中

15. 가족관계

16. 관련 단체

17. 관련 문서


  1. [1]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인터넷상에서는 다카'키'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다카키 마사오 쪽이 다카기 마사오보다 구글 검색결과 6배 가량 더 많다.
  2. [2] 사후 국장 때에 영정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박정희 생가에 비치된 영정 사진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 제복을 입고 아내 육영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이등분하여 각각 비치했다.
  3. [3] 아랫쪽 '대통령 기록관'이란 글씨가 좌우반전이 되어 있는데 원본은 이 구도가 맞다. 원래 사진을 좌우반전 시키고 '대통령 기록관' 글씨를 넣은 것이다.
  4. [4]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
  5. [5] 1936년 결혼. 1950년 이혼.
  6. [6] 사실혼 관계(약혼, 동거). 1948년 6월부터 1950년 2월까지 약 3년간 교제.
  7. [7] 1950년 12월 12일 결혼.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 휘말려 사망(사별). 육영수 사후,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근혜가 귀국해 영부인 역할 대행.
  8. [8] 김호남 소생.
  9. [9]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으며, 구미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修學)'이라 기재되어 있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10. [10]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는 나빴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때의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8012270389 대구사범학교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은 박정희를 동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11. [11]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수석 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12. [12] 편입학. 300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졸업.
  13. [13] 단기과정. 194명 중 3등의 성적으로 졸업.
  14. [14] 어렸을 때는 강제로 개신교였다.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집권 중에는 불자였던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親) 불교적 행보를 보였다. 무종교라는 말이 있으나, 일단 공식 약력에는 불교로 되어 있다.
  15. [15] 역대 남성 대통령최단신이다. 인터넷상에는 158cm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s-6에서 '최단신 남성 대통령' 참고.
  16. [16] 필기는 오른손으로 한다.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한 왼손잡이다.
  17. [17] President Park의 앞글자로, 요즘에는 많이 쓰이진 않지만 신문에는 주로 쓰였었다.
  18. [18]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 선거.
  19. [19]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 선거. 1979년 10월 26일 피살.
  20. [20] 좌익이었던 형 박상희대구 10.1 사건 당시 우익에 의해 피살되자 남로당에 가담하여 프락치 활동을 했다. 이후 여순사건 때 발각되어 수감된 후 전향했다.
  21. [21] 입당 원서도 공개되었다.
  22. [22] 다른 야사로는 6.25 전쟁 당시에 박정희가 군대에 머물면서 자신은 죽어라하고 싸우고 있는 와중에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자 길길히 날뛰며 분노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서로의 사이는 많이 안 좋은 듯 하다. 1차적으로는 여순사건이 박정희와 이승만의 앙금을 만드는데 기여했고, 2차적으로는 전후 진급심사에서 곽영주가 자신의 남로당 행적때문에 진급을 누락시키려하자 백선엽이 말려 겨우 진급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이승만의 사이가 나쁜 것으로 보인다.
  23. [23] 그야 전두환은 최초의 정기육사 세대인 육사 11기이고, 박정희는 육사가 막 생기던 시절 육사 2기였으니 나이 차이에 비해 계급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 박정희 시절엔 육사가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았던 터라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
  24. [24] 김대중 납치 사건도 현재 이 사건의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누가 납치를 지시했는지는 정확하게 알아낼 길이 없다. 그나마 김종필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김영삼은 납치 사건을 매우 비판했다. 나중에 김대중과 결별한 후에도 갈라섰을때도 "이 사건은 박정희가 김대중을 노린 테러"라고 언급했다. 
  25. [25] 김종필은 저 때 학을 떼며 결사적으로 박정희 곁에 있기를 거부했었다. 박정희의 조카와 결혼을 한 조카사위인데도 숱하게 자신을 감시하고, 김형욱 등의 토사구팽을 봐 오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겨 총리직을 몇 번이나 사임하겠다고 했지만, 박정희는 "임자가 정말 아픈게 맞냐?"며 대통령 주치의까지 보내 검진하고는 수시로 압박을 해와서 미칠 뻔했다고 몇 번이고 회고했다. 견디다 못해서 "각하. 조카사위이면 한 집안 식구인데 왜 자꾸 저를 의심하십니까?" 라고 박정희에게 소리를 내면서 따지니 그제야 박정희도 머쓱해하며 사임을 받아주었다고.
  26. [26] 박정희를 임신한 어머니가 아이를 더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간장을 끓여마시거나, 산에서 굴러 떨어져보기도 했지만 낙태는 되지 않았다. 어릴 적 그의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발육을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유년시절에 잦은 체증을 앓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박정희의 키는 시대상으로도 매우 작았다. 인터넷상에는 158cm설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나 실제 키는 164cm이다. 당시 재임 중 기록된 공무원 인사기록카드상의 신장은 163cm#와 165cm##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조갑제는 중간인 164cm###라고 보고 있다. 아버지 박성빈의 키가 170cm 정도였고 셋째 형 박상희가 그보다 10cm 큰 180cm 전후라고 하는 것을 보면 덩치 큰 집안에서 유달리 키가 작은 사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70 cm의 장신이라 대통령 위엄 떨어져 보인다고 측근들이 의자에 방석을 까는 등 최대한 크게 보이도록 기를 썼는데, 정작 당사자인 박 대통령은 자기의 작은 키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되레 의자에 키높이 방석이 있는 걸 보고 화내면서 그걸 던져 치워버린 적도 있다.
  27. [27] 황해도 출신 이승만, 충청도 출신 윤보선, 강원도 출신 최규하, 전라도 출신 김대중, 일본에서 태어난 이명박을 제외하면 2020년 기준 현 대통령 문재인을 포함하여 전부 경상도 출신이다. 근데 이명박마저 정치적 고향은 경상북도 포항시(...)
  28. [28] 사실 과거사까지 한국사를 통틀어 봐도 임기 중에 수반이 살해된 사례는 아주 드물다. 마지막 좋지 못한 왕들도 일단 왕위에서 내려온 다음에 처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고구려 모본왕 암살 사건, 백제 부여(책계/)분서 부자, 연개소문영류왕 시해, 고려 공민왕 시해 사건 정도가 꼽힐 정도다.
  29. [A] 29.1 29.2 2번째는 친인척들의 비리조사 중에 자살한 노무현 대통령
  30. [30] 출처/두번째 사진 블로그 출처
  31. [31]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등의 과거 일본의 만주 인맥들
  32. [32] 정치학자 강상중의 책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에서는 11월 11일 일본 수상 관저 오찬회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한홍구 역사학자는 신문사설에서는 11월 12일 아카사카의 요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33. [33]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 나구모 신이치로를 한일회담 오찬장에 부를 것을 부탁했다.
  34. [34]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
  35. [35] 토론 71369
  36. [36] 정확하겐 주연인 최불암이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박정희도 같이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적당히 피워주십사 요청했다 한다.
  37. [37]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셋째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요청으로 내가 작곡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38. [38]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39. [39] 청와대 전 인사의 말을 인용한 조갑제의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의하면, 얼굴에 던져서 피멍이 들었다는 말은 사실은 아니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는 증언도 존재함으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육 여사의 눈두덩이에 피멍을 목격한 건 공통적인 증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주색으로 인한 부부싸움이라고 판단했다.#
  40. [40] [image]
  41. [41] 대표적으로 문재인 대통령. 당시 문재인은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법학과 동기들에게도 열심히 시위 동참을 호소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 1차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이후 경희대학교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반유신 집회를 주도한 것으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한 일을 보면 이게 결코 유화적인 태도라 볼 수는 없다.
  42. [42] 과거 몰래 충무공 유물을 팔아 치우려 했던 전적이 있다.
  43. [43]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이름이 나오진 않고 박 의장이라고만 불린다.
  44. [44] 직접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고 박통이라고 나오나, 군복 등의 명찰에 박정희라고 적혀 있는 것이 간간히 나온다.
  45. [45]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64102
  46. [46] 은지원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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