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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북한으로 송환되는 북송(北送)에 대한 내용은 탈북자 문서를, 일본이 북한으로 재일교포를 보냈던 일에 대한 내용은 재일교포 북송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중국의 역사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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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송
大宋

Da Song

[image]

960년 ~ 1127년

별칭

북송(北宋), 송조(宋朝)

위치

중국

수도

동경 개봉부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국성

(趙)

주요 황제

초대 태조 조광윤,(960~976),
2대 태종 조광의,(976~997),
3대 진종 조덕창,(997~1022),
4대 인종 조정,(1022~1063),
8대 휘종 조길,(1100~1125),

주요 재상

범중엄, 사마광, 왕안석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대승 불교, 도교

종족

한족

통화

교자, 송전[1]

주요 사건

960년 진교의 변, 건국
961년 배주석병권[2] & 금괘지맹[3]
965년 전운사 설치, 금군 강화
973년 과거제 전시 도입
975년 남당 병합
979년 북한 병합, 천하통일.
979년 1차 북벌, 고량하 전투
986년 2차 북벌, 기구관 전투
1004년 전연의 맹
1005년 태평어람 편찬
1041년 호수천 전투. 장방평, 천언서
1043 - 1045년 경력변법 (범중엄)
1044년 경력의 화의
1069 - 1076년 희녕변법 (왕안석)
1071 - 1073년 티베트 동북부 점령[4]
1075년 심괄, 요나라와 담판
1086년 사마광 복귀, 신법 폐지
1078년 붕당 발생[5]
1094년 신법 부활[6]
1097 - 1098년 서하의 침공 격퇴
1102년 채경 집권, 원우당적비 건립.
1105년 채석강 시작.
1108년 청해 일대 3천리 개척[7]
1118년 해상의 맹
1120 ~ 1121년 방랍의 난
1122년 연경 공격 실패
1125년 금나라 남하, 개봉 포위
1127년 정강의 변

성립 이전

후주

멸망 이후

남송
금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
2. 역사
2.1. 관료제의 발달과 중앙집권화 성공, 하지만 허약한 군사력
2.1.1. 보병 위주의 송군
2.1.2. 비효율적인 용병술
2.1.3. 재평가 할 부분
2.2. 결과적으로 실패한 외교 정책과 이로 인한 멸망
3. 왕안석의 신법(新法)
4.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5. 평가
6. 고려와의 관계
7. 역대 황제
8. 계보
9. 추존 황제
10. 여담

1. 개요

北宋. 960년 오대십국시대 후주(後周)의 무신 조광윤이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중국의 한족 왕조.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다. 조광윤이 애초에 송주에서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송, 연호를 건륭으로 정했다. 보통 북송은 960~1127년까지 존속한 167년의 역사를 말하나, 이후 남송도 1127~1279년까지 152년을 더 존속했으므로 송이라 하면 보통 960~1279년까지 총 319년간 존속했다고들 여긴다.

2. 역사

송나라는 육조시대 유송(공교롭게도 이름이 똑같이 宋이다) 이래로 계속되던 전 황제에게 선양을 받고 통수 크리로 그 일족을 멸족하던 관행을 중지하고, 후주의 황족인 시씨 일족을 보전하고[8] 우대하면서 상당히 인도적으로 건국되었다. 실제 송태조 조광윤의 유언에 따라 송나라 존속 기간 동안 시씨 가문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남송 멸망시 다수의 시씨가 송나라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이때 시씨들을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증거로 내려준 것이 바로 단서철권이다. 애초에 후주 자체가 단명 왕조이기도 했지만, 후한의 유지원 - 후주 태조 곽위 - 후주 세종 시영처럼 양자제로 대를 이어왔던 상황이었다. 곽위에 비해서도 매우 온건한 계승을 한 셈이다.

송태조는 스스로 장수 시절부터 거란족을 물리치고 후주의 북조 전역을 완수하는 제1공신이었으나, 광주남한과 남부 최대의 국가였던 남당을 멸망시키는데 그치고 자기 대에 통일을 완수하진 못했다. 2대 황제는 조광윤의 동생인 송태종 조광의.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번에도 송 태조 조광윤의 의지로 조광의가 선양 받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조광의가 방에 들어간 다음 갑자기 조광윤이 급사하고 다음 황제가 되는 식의 기록으로 볼 때,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자체가 조광의를 디스하는 이들의 주장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송태종은 오월북한을 멸망시키고 통일을 완수한다.

하지만 이후부턴 약한 군사력이 발목을 잡게 되는데, 태조 조광윤과 태종 조광의 시절엔 이들이 무인 군벌 출신이기도 해서 나쁘지 않은 군사력을 선보였으나, 태종의 아들 송진종은 심성이 여린 군주로 거란(요나라)의 침략에 우물쭈물하다 굴욕적인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게 된다. 하지만 함평지치라 해서 송 번영기를 연 황제였던건 함정 이 조약은 거란이 송을 으로 모시는 대신에 송이 요에게 비단 20만필과 10만냥 등을 바치는 내용으로, 한마디로 돈 뜯긴 대신 자존심은 그나마 지킨 요상한 조약이었다. 심지어 송은 요를 물리쳤었다.[9]

이후엔 요와 금에게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던 서하에게조차 여러 전투에서 참패한다. 서하 건국 초기의 혼란한 시절에 송나라는 자기들이 황제국임을 내세워 이제 막 건국한 서하에 자주 찝쩍댔으나 오히려 빡친 서하의 역공을 받고 호수천이라는 곳에서 크게 패한다. 덕분에 서하에게 공물을 바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사실 지휘관들이 대부분 군대를 전혀 모르는 문관 출신인데다 작전에서 장군들의 말을 안듣고 제멋대로 하니 당연히 발릴 수 밖에 없었다.[10] 물론 송 초기의 경제력은 후술되어있듯 가히 역대급이라 서하와 금에 바치는 세폐가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이후 송의 재정이 나빠지자 문제가 된다.

그러다 1127년에는 정강의 변으로 송휘종송흠종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충공깽한 치욕을 당하고, 남은 세력은 항주로 천도하게 되는데 이후의 시기를 남송, 그 전은 북송이라 일컫는다. 참고로 이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송의 외교로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었던게, 송은 요를 제압하고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금과 결탁했는데, 이후 승리 좀 했다고 기분에 취해서 금나라까지 뒤통수 치려다 되레 털린 것이다.

2.1. 관료제의 발달과 중앙집권화 성공, 하지만 허약한 군사력

[image]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

조광윤은 당나라 멸망 후 거의 60년에 가까운 전란을 수습하고, 이 혼란이 나라 각지에 군벌(절도사)들이 할거하여 생긴 것이라는 판단 아래 모든 절도사를 해체하고 전군을 황제의 아래에 두며 금군을 설치하는 등 중앙집권제를 완성하였고, 과거제로 관료를 발탁해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력한 군주제를 완성한다. 원래 과거 제도가 시행된 시기는 수나라 때지만, 진정한 관료 발탁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송나라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이 송나라의 관리에 대해 평하길 송나라가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매우 두텁게 하였고 재물의 하사가 실로 풍족했기에, 관직에 오른 자들은 일신의 걱정에 매달릴 필요가 없이 각자 직무에만 몰두하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어진 신하들이 대로 나왔고 관리들의 품행과 치적이 뛰어났으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너무 지나쳤기에 나라의 곳간을 흔들리게 만들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는 법으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11]

하지만 이런 뛰어난 관료제와 중앙집권화 성공, 풍성한 경제력, 넓은 국토,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의 군사력은 이상하리만큼 너무나 허약했다. 그렇다고 송이 국방력에 마냥 소홀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라, 송나라 후기의 병력수는 무려 126만명에 달하기도 했다. 다만 이 병력은 송 인종 시기에 서류상의 병력이었고 실제 병력은 이보다 더 적기는 했다. 실제 전투에서 송군이 이긴 횟수는 그닥 많지 않았고, 특히 북방 민족과의 전투는 상당수가 개박살이 났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너무 강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 요나라발해도 멸망시켰다. 송만 털린게 아니었다. 하지만 1억 인구의 송나라와 말기 발해의 압도적인 체급차이를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가 생긴 원인 중 하나는 송 조정이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멸망한 당을 보고 배운 점이 있는지 반란을 꽤나 두려워하여, 무관 대신 전투 경험이 없고 군대를 잘모르는 문관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를 잘 모르는데다 의견도 일치되지 않아 군대의 단합이 도무지 안되었던 것. 한 예가 바로 동관이다. 반면 한·당은 이세적, 이정 같이 사령관을 무관으로 임명하거나 군대를 잘 아는 문관을 임명하였기에 흉노, 돌궐과의 전쟁에서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무인들의 지위는 격하되었는데,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몇몇이 있다.

대충 이정도다.(...)

송군이 오합지졸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자면, 1126년 음력 2월 송 지방관 중 한 명이 무슨 배짱인지 공을 세우겠답시고 애먼 지나가던 금 사신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의 보병이 무려 2천 명이나 동원되었다. 그렇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천 명은 금나라 사신 일행들을 공격했지만 황당하게도 이들은 기병,궁기병이긴 했지만 금 호위무사 17명에게 가볍게 발렸고, 금의 사신은 그대로 제 갈 길 갔다. 심지어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 송 보병들도 제대로 훈련이 되었으면 싸울 수 있었을텐데, 훈련도 제대로 안되어있을 뿐더러 목숨 아까우니 서로 앞에 나가려 하지 않다가 오히려 겁을 먹고 전부 다 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12]의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으로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다만 군사비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는데 정1품 재상의 식비 보조금은 매월 300관인데 장군인 정2품 절도사의 식비 보조금은 400관이었다. 장군들의 녹봉도 등급에 따라 매월 3천 관 내지 1만 관을 받았다. 군인들의 정치,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대신에 많은 봉급이라는 반대 급부를 주었던 것이다. 송태조가 휘하 번진 절도사들에게 병권을 회수하는 대신에 많은 재산을 줘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게 한 것과 비슷한 이치.

하지만 북송시절에는 이미 "좋은 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다.[13] 그 외 송의 군사력이 약했던 원인 몇가지와 재평가 할 부분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2.1.1. 보병 위주의 송군

송과 비슷하게 친문관 정책을 펼쳤던 고려의 경우에는 기병이 약하진 않았으나, 상대 기병과의 야전을 최대한 피하고 산성에서 버티는 전법을 썼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던 것이 목초지를 당 말기랑 오대 십국 시대 때 유목 민족들한테 빼앗기다보니 목초지의 부족이 심각해져 기병을 양성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니 보병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기병 위주인 여진족이나 거란족 같은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훨씬 불리한 요인이 되었다.

다만 보병이 기병에 비해 야전에서 흔히 불리하다고 하지만 항상 보병이 불리한 건 아닌데, 예를 들면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은 보병대가 장창 등으로 진형을 구성하고 버티기 시작하면 기병대가 역으로 화력에 눌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대로 자리잡은 궁병이나 총병이 사격하면 충분히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다. 나당전쟁 당시 기병이 주축이던 군을 상대하던 신라군의 주력 병력은 장창병이었으며 나당 전쟁에 승리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들을 이용한 전술이다.

하지만 송나라처럼 지나치게 보병 위주로 전력을 짜면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동력 때문이다. 보병은 기병에 비해 기동성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한 기병이 불리한 장소에서의 회전에 응하지 않고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면 그만이라 보병 쪽이 수동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기병 입장에선 보병이 대응을 잘해서 만만치 않다면 진형을 우회해서 보병대의 거점을 타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보병이 대응을 위해 이동하여 도착할 무렵 기병대는 이미 상황을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게 거점이 당하면 보병대는 버틸 수가 없다.

특히 전략적으로 로마처럼 바다를 끼고 있거나 이탈리아와 같이 본토의 입구 경계가 생각보다 좁거나 하는 등의 지리적인 배경이 없으면 기병에 비해 보병은 매우 불리하다. 보병을 중시하고 잘 육성하던 로마 역시 기병을 망치와 모루 같은 전술, 전략에서 핵심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보병보다 높은 전력으로 두었던 것이 사실인만큼, 보병도 기병을 막을 수 있다 정도로 생각을 해야 한다. 대전차 보병/창병이 전차/기병을 상대로 대승하거나 선전하는 사례가 있다고 항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며 동서고금 할거없이 보통은 선제공격권의 차이 때문에 기병이 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송나라는 일단 영토가 크고 그리 쓸만한 자연적인 장애물들도 없다 보니 많이 불리했다. 그리고 대륙적 민족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벌판에 성 여러 개 짓는 비용 감당이 어려웠는지, 성에 짱 박히는 것을 선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멀쩡히 잘 싸우던 장군을 불러다 숙청하기도 했다. 주전론자였던 악비를 처형한 게 바로 그 예다.

이렇게 말이 부족한 문제점을 막기 위해 왕안석은 보마법을 시행했다. 호구마다 말을 기르게 하여 농사 짓는데 이용하고 전쟁시엔 징발한 말을 기병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한데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왜냐하면 목초지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말을 기를 여건이 안되는데다 농사 짓는 말과 기병의 말은 요구되는 스펙이 다르다. 농사용 말은 좀 느려도 덩치크고 뼈 튼튼하고 근력과 지구력만 좋으면 그만이지만, 기병용 말은 좀 작아도 빠르고 민첩해야 한다. 따라서 평생 농사 짓던 말로 전쟁에 나서면 나가는 족족 발리기 십상이다.

(전쟁나면 농사용 트랙터를 징발해 탱크로 쓰자 수준이다.)

평야가 넓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랑 다른 가축도 많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래서 요, 금, 원의 기병 앞에서는 족족 참패하기 십상이었다.

2.1.2. 비효율적인 용병술

총 병력 중 절반 가량인 60만명을 수도 방위 겸 해서 수도인 카이펑 근처에 밀집시켜놨었다. 당나라 시절 변방의 군대가 지나치게 막강해져서 안녹산의 난이라는 사태가 터졌기에 그걸 방지하려고 한 조치인데 이걸로 인해 변방의 수비력이 약해지고 만다. 변방이 깨지면 어쩔 수 없이 중앙군을 보내야 했는데, 자원과 시간 낭비도 있었을 뿐더러 중앙군은 변방의 지리와 기후를 자세히 알기 힘들었다. 지방군의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어느 정도 개선이 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변방이 근본적으로 오합지졸 투성이였다.

조선이 쓴 진관 체제제승방략과도 어느 정도 겹치는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낭비, 지휘관이 현지 사정을 잘 모름 등.

또한 군사 지휘권을 여타 장수들이 아닌 황제가 직접 가지게 하였다. 당연히 황제는 대개 군사 전문가가 아니다. 이는 전 통일 왕조인 당(唐)의 실책에서 배운 것이였으나, 진짜 위협인 이민족 방어에 허술한 약점을 노출하였다. 당이 문제네 거기다 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군사는 서류상으로는 수만 대군이었으나 실제 배치 병력은...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외침을 막으면 내란에, 내란을 막으면 외침에 취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후한 말 삼국시대야 한족 제국의 파워 덕분에 3국이 서로의 주력을 내전에 투입하면서 변방군으로 이민족을 막기에 충분했지만, 이민족이 대오각성한 후에는 통일 진 제국도 무너진 것처럼.)

또한 앞서 말했듯 장수들의 반란을 견제하기 위해 장수 직속 부하들을 대폭 줄여 군사 훈련과 상하 교류를 적게 만들어 버렸고, 이민족의 침략 당시에는 멀리서 파병한 생판 처음 보는 군사를 억지로 조련하여 싸워야 했으니... 상황이 이러면 전투에서 이기는 건 기적이다.

참고로 이런 사태는 조선의 임진왜란 때 재현되기도 한다. 그나마 조선에서는 군사 지휘권이 그래도 현지의 장군들에게 있긴 했다. 이거라도 없었다면 이순신이 날아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의 군대는 병사들의 연령대도 높았다. 당시 군대가 철밥통이다보니 병사들이 군대에 오래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들어오는 자들은 위에서 언급된 대로 소위 '질 나쁜 놈들'이었고, 그들은 결국 군대 밖 사회 양지에 발 붙일 곳이 없다는 말이니 오래 남아있으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송 정부 입장에서는 이 '질 나쁜 놈들'이라도 있어야 했기에 군대를 철밥통으로 만들 수 밖에. 자연스럽게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병사들이 죽은 다음에야 충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약체화를 초래했다.

2.1.3. 재평가 할 부분

다만, 송이 동네북마냥 매번 털리는 군대는 아니었다. 초기에도 요를 상당히 몰아 붙였고, 금과 몽골의 침략을 막고 심지어는 북방 중원을 일부 회복하는 경향도 있었다. 물론 그 이전대인 전한, 당이나 이후의 명처럼 밖의 이민족들에게 진출하여 간섭하는 수준이 되지 못하고 셔틀화 된건 사실이나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질 낮은 군대와는 달랐다. 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그리고 화약 무기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였다.

또한 북, 남송 합쳐 직계 왕조로 300여년을 유지한 것도 결코 쉽게 볼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들 중에서 300년 이상을 유지한 건 한과 송 뿐이다. 명 또한 남명을 포함하면 306년가량 존속했지만 사실 남명 정권은 합치기에 뭣한게 여러 지방에서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명나라 후신을 자처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서 본 개념으로, 단일 왕조가 아니었다. 때문에 망한 후 남쪽으로 이동한 다른 정권인 동진, 남송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심지어 그 때문에 혼란스런 동진마저 사직을 그래도 100년 넘게 보존했는데 남명은 50년도 못갔다. 재위한 황제들의 기간을 다 합쳐도 50년이 안 된다.

실제 남송금나라에게 바로 망하지 않고 금나라를 포함한 수십개국을 멸망시킨 전천후급 전투 민족이었던 몽골에게 망했다. 그것도 한방에 폭삭 무너진게 아니라 장장 40여년에 걸친 항전 끝에 망했다.

경제력 + 군사력으로 주변국에 패권을 행사하는 강대국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경제력으로 자기 나라 국방을 300여년간 땜빵할 정도는 되었다는 것. 즉, 송대가 문치주의였던건 맞지만 그것만 가지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송이 가지고 있던 지리적인 약점도 있었다. 바로 연운 16주의 상실이었다. 거란이 이 연운 16주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송과 전면 대결을 할 수 있는 국가 세력으로 성장한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연운 16주는 송 이전 한족 왕조들의 북방 방어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런데 이 요충지를 몽땅 거란이 차지해버린 것. 연운 16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운 16주 이남에는 딱히 지리적으로 진격에 방해가 되는 지형이 없으며 화북과 강남의 평야 지대로 직행할 수 있는 루트이다. 즉 북송은 처음부터 방어상의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남송 때는 국토가 쪼그라들고 장강, 회수, 사천의 산맥 등 험준한 지형을 국경으로 삼게 되면서 오히려 방어에 유리해졌다.

사실 졸전 중 송 사례가 많이 알려져있다보니 편향적 시선을 많이 받아 그렇지, 무경총요 같은 걸 보면 이론적으로는 군사학 진보도 상당히 이룬 시대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실사용자인 전문적인 군인들이 문제라 상당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좌절을 많이 겪었다. 이점은 지나친 문치주의의 폐해라고 볼 수 있다.

2.2. 결과적으로 실패한 외교 정책과 이로 인한 멸망

허약한 국방력에 가려진 송나라의 진짜 문제. 허약한 국방력을 메꾸기 위해 송나라는 문인들이 외교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는데, 의도는 좋았지만 방법이 한참 잘못되어서 외교책이랍시고 내놓을 때마다 나라를 두동강 냈다. 군대가 나라 머리끄댕이를 잡고 흔들면서 견제도 없이 막 나가던 일본군수준의 외교 극과 극은 통한다. 이게 송이 화를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 실제적인 사례는 후술되어있는 고려와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중원 북쪽을 찝적대는 요나라를 해결하기 위해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안 여진과 직접 싸워본 고려에서는 사신을 보내 여진은 믿을만한 족속이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송은 듣지 않았다. 송은 순망치한이라고 요가 쿠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충치 치료한답시고 이를 통째로 뽑은 격 제일 큰 문제는 송과 금 연합군에 의해 요가 무너졌을때 금에게 바치기로 한 공물을 그냥 씹어버렸던 것이다. 덕분에 송은 빡친 금에게 수도가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며 나라 반쪽을 잃었다. 다행히 남쪽으로 이동 후 회수까지 영토를 확보하긴 했다.

그런데, 그 전략을 남송때 썼다가 이번엔 아예 멸망까지 당했다.

3. 왕안석의 신법(新法)

송(북송)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법이다. 송인종 이후 송은 재정상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 지주들의 토지 겸병, 대상인의 독점 행위, 세폐 문제 등이 재정 적자를 초래하여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했다. 이런 때 왕안석송신종의 신임을 얻어 신법을 시행했다. 신법은 부국책과 강병책의 두 종류로 나뉘는데 부국책은 청묘법과 시역법, 모역법, 균수법이 시행되었고 강병책으로는 보갑법과 보마법이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묘법은 20%라는 싼 이자로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어 자연 재해로 인한 농민들을 구제함과 동시에 대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막음으로서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참고로 송대에는 호구를 따질 때 주호와 객호로 따졌다. 그 중 주호가 주 납세층이었는데 주호 또한 5개 등급으로 나뉘었다(1, 2등급이 대지주, 3, 4등급이 대부분의 보통 농민, 5등급이 영세 농민). 그러나 대지주들은 토지 장부를 위조해 은닉하기 일수여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5등급의 영세 농민들은 세금낼 능력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3, 4등급의 농민들이 1, 2등급의 대지주의 세금까지 떠맡게 되었고, 이들마저도 몰락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폐단을 막고 대지주의 성장을 막기 위해 실행된 청묘법은 안정된 세수 확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시역법을 실시해 중소 상인들을 보호하였다.

무엇보다도 왕안석이 가장 심려를 기울인 신법은 모역법이었다. 당헌종 때 양세법이 시행되어 원칙상 양세를 제외한 잡세는 폐지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송대에도 여전히 양세법 하에 여러 잡세들이 많았다. 그 중 백성들을 괴롭힌게 역이었다. 일반 농민 뿐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도 역을 져야 했다. 돈많은 지주야 거주지를 도시로 옮겨 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따라서 왕안석은 광범위한 여론조사와 시범운영을 통해 모역법을 시행하게 된다. 모역법은 납세층을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눈 후 각 등급에 맞게 세금을 거두고, 국가는 거두어진 세금으로 역을 수행할 사람을 고용하는 제도였다. 송철종 즉위 후 사마광 등 구법당이 신법을 폐지할 때 모역법을 폐지했다는 소식을 듣자 왕안석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왕안석의 신법은 전체적으로는 적절한 개혁이었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관리들이 실적만 노리고 부실 운영하는 등 많은 부작용도 낳아 결국 송철종 때 구법당이 세력을 잡자 폐지된다. 그 후 다시 신법당이 등장하지만 이 때가 되면 개혁 의지는 사라지고 오로지 정쟁을 위해 신법을 이용하게 된다. 결국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 심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백성의 실생활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 안타까운 결과로 그치고 말게 된 셈이었다.

4. 풍성한 경제력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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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송의 수도인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부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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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력을 이용하는 물레방아간

군사, 외교적으로는 안습한 행보를 거듭해서 보였으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역대급의 융성과 호황을 누렸다. 과거 중국 대륙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져 있었으나, 송나라 대에 서역과의 무역 등이 활발해지면서 그 폐허를 딛고 완전히 부활했다. 수도 개봉은 당시에만 인구가 무려 130만여명, 남송 수도 임안(항저우)은 100만여명이었으며, 불야성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24시간 내내 각종 상점은 불이 꺼지지 않고 시장에는 사람들이 빼곡했다고 한다. 각종 문화, 예술도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중국의 산수화성리학도 이 때 기틀이 서기 시작했다.

심지어 송은 요, 금, 서하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고려에 그렇게 퍼주고도 이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흠좀무. 아니, 애초에 그 '막대한 조공' 자체가 당시 송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니었다. 실제 막대한 군사비 지출보다 조공으로 몇 푼 주고 백성들 고생 덜 시키는게 당시 풍요롭던 송 입장에선 더 싸게 먹히는 측면도 있었다. 문제는 그동안 허약한 군사력 문제를 보완했어야 되는데 이게 고질적이었다는 것과 이후 송의 재정도 악화되면서 부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력의 근원은 송나라가 당시만 해도 촌동네에 불과했던 강남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선 이런 이미지를 반영하여 오나라가 '비옥한 강남의 토지'를 끼고 어쩌구 하는데,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시기가 명나라 초기였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지 실제론 고증 오류다. 후한 말 남양에서 강성한 세력을 지닌 군벌이었던 원술이 비어있는거나 다름없는 강남 놔두고 중원에서 피터지게 싸우다 망한 것도 그만큼 강남이 별로 매력적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강남에 자리를 잡은 손책과 그 뒤를 이은 손권 역시 지방 군벌로 끝났거나 독자적으로 제위에 올랐지만, 당시 한(漢)의 천하에 군사적이거나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대한 영향은 주지도 못했다.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육조시대 이후로, 그것도 강북을 능가한 것은 남송 이후의 이야기다.

송나라 때에 드디어 강남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던 이유는 쌀에서 찾을 수 있다. 송 이전에 쌀은 주식이 아닐 뿐더러 강북에서는 자라기 힘든 작물이었다. 그러나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점성도(占城稻)’ 품종이 동남아에서 들어와 강남 전역에 쌀 농사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쌀 농사에서 중요한 물 때문에 수차가 개발되어 계단식 논 또한 생겼다. 게다가 이앙법의 도입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졌다. 이런 연유로 백성들의 경제적 부가 늘어나자 상업이 발전하였고 운송업도 같이 발달했다. 그에 따라 숙박 시설이나 여관 수리업 등 서비스업도 발전했다.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 명을 넘는 시기도 이 때쯤 시작되어, 화폐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나온 것이 천희통보이나 연간 막대한 양을 찍어내도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하였다. 화폐 다음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화폐 대신 어음동이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으로 사기를 치거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었고 근대적 회계 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일본에서도 중국의 화폐를 잔뜩 배에 싣고 와 자기네 나라에서도 썼다고 한다. 나름 동아시아 글로벌 화폐였던 셈. 한의학에서 기존과 선을 긋는 사상적 전환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

상업 발달의 산물로서 상인 동업 조합(행, 작)도 번성했다. 도자기 기술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문화가 발달해서 농민들은 차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고 찻집 같은 곳도 생겨났다. 예식을 대신 준비해주는 (요즘으로 말하면) '출장 뷔페 서비스'(!)가 있었고 기계식 물시계가 등장했으며 시중에는 음식점 숫자가 너무 많아서 맛을 넘어서 공연이나 냉난방, 배달 서비스 같은 마케팅으로 경쟁하였다. 도시 내에는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간이 극장이 존재했고, 각 가정에서는 석탄을 가정연료로 썼다.

또한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수출품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시점도 이 시점으로, 도자기의 도시 경덕진이 본격적으로 융성하기 시작했다. 외국 무역과 수출입 관리, 출입품 검사와 징세는 당나라때 설치된 시박사에서 담당하였다. 송대에는 광주를 비롯해 항주, 명주(영파), 천주, 밀주(칭다오), 화정 등 여덞 곳의 시박사가 설치되었다. 고려와의 무역은 주로 명주 시박사에서 관리했다 한다.

당시 사람들의 성품이나 인심 역시 매우 후했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와 옆집에 살게 되면 서로 도구들을 빌려주고, 뜨거운 탕과 마실 것을 갖다 주었으며, 물건을 사고 파는 일 등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 어떤 집에 경사나 흉사가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몰려가 그 집을 가득 메웠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15]

그러나 송대 이후 중국의 경제력은 급격히 위축되었다. 예컨대 화북 지방의 철강 생산량은 송대에는 3만 5천 톤이었지만 원대에는 8천톤으로 격감했다. 이는 철강이나 석탄이 고갈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유가 뭘까[16]

서양학자들 역시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17]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18] 참고로 산업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달러, 1800년엔 2080달러였다.

1인당 PPP 또한 송이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추정했다. 북송 시대 인구는 대략 8천만[19] 유럽은 서유럽만이 아니라 전체 유럽 인구가 같은 시대 5천만 정도로 추정된다. 다만 Angus의 수치는 1990년대 초반의 자료이며, 2014년 기준(Angus의 최신 자료 포함) 학자들의 자료로 추산할시 1인당 PPP가 앞선 중국 시대 또한 많다.

'사회발전지수'라는 에너지/도시성/전쟁 수행 능력 기반의 지표로 동/서양을 구분한 이언 모리스는 저서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제시한 그래프로 기원전 1만 4천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의 비교선을 그려보였는데, 대운하가 뚫리고 남중국이 개발되면서 동서양의 격차가 가장 컸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 시기가 청대까지도 이어지고 170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끝난다고 봤다.

남송시대를 북송의 후계구도로 보지 않고 남북조시대의 재현으로 간주할 경우, 첫번째 남북조시대가 호한체제(胡漢體制)로 이어진 것과 달리 이 두번째 남북조시대는 오히려 강남인들의 선민의식으로 이어진 원인을 북송의 높은 경제력에서 찾기도 한다. 남쪽의 한족들 입장에서 사마진 정도의 나라가 파괴 당한 것은 극복 가능했지만 북송이 파괴 당한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큰 여파를 미쳤다는 것. 이는 먼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다민족국가로서의 길을 공언한 뒤에야 어느 정도 해소된다.

5. 평가

송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가질 수 있는 나라다. 일단 경제적으론 상당히 융성했고, 이를 기반으로 각종 문화들이 무르익기 시작한 시대였다. 서민 문화도 발달해서 그래서 그런지 송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많다. 수호전, 금병매 등이 대표적이고 건축적으로도 이전 시대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한 누각 등이 많이 출현하고, 의장 면에서 풍부해졌다.

정치적으로도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고 꽤 안정되어 유교적 이상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시대였다는 것은 특별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냥 대충 봐도 정치적으로 뭔가 문제가 크게 꼬여서 사단이 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권력을 전횡하는 환관도 별로 없었고, 황제의 힘을 넘보는 황후도 없었다.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송휘종동관(童貫)이라는 환관이 방랍의 난의 시발점이 되기는 했다. 그리고 수호전에서도 악역으로 나온다.

특히 잔혹한 혹형이 이후 시대보다도 오히려 훨씬 적었다는 것은 큰 특징이다. 송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당나라, 오대십국시대의 막장 행각을 보고,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명나라·청나라의 피비린내 나는 사태들을 생각해보자. 물론 정적 제거나 당쟁 같은 게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피비린내는 훨씬 덜 나던 시대였다. 송태조의 석각 유훈에도 '사대부와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남송 문서에도 나오듯이, 국가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전조의 황족(후주의 시씨 가문), 사대부, 장수, 병사, 일반 백성들이 모두 끝까지 조정을 따라서 몽골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애산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할 정도로 체제가 안정되고 그 단합력이 강력하였다.

그래도 송나라 이전의 나라들 중 비교할 법한 나라는 역시나 당나라인데, 문무에 고르게 편승된 과거 제도도 본시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가 확립했으며, 당나라 말기 지주전호제와 유사한 토지 제도의 영향도 송나라에 꽤 보인다. 뿐만 아니라 지공거 체제도 당나라와 송나라가 비슷하며 빈공과 역시 송나라가 그대로 계승했다. 대신에 당나라의 경우는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벌였다는 점과[20] 송나라는 꽤 주춤했다는 점이 차이고, 반란의 빈도는 오히려 군사력이 강했던 당나라가 훨씬 심각했다는 점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그 반란을 줄이려 시행한 여러 조치들이 송나라의 군사력 약화를 가져왔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

물론 허약한 송의 군사력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다. 그래도 북송에 비해 남송은 몽골을 상대로 멸망하긴 했지만 첫 침공을 받은 후 40년 동안 상당히 선전했다. 두 번째 침입 때는 몽골의 몽케 칸이 직접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했다. 몽골 주력 부대의 침공을 받고도 이처럼 오래 버틴 나라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송의 군사력이 부족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반대로 당시 북방 민족들의 전투력이 너무 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송나라의 군사력을 마냥 저평가할 수 만은 없는게, 세계 최초로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쓴 군대가 송나라 군대라는 점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때의 화약무기는 흔히 생각하는 대포 같은 건 아니었다.

중화권에선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明)이 막장 황제들로 인해 말기에 실망스러운 행보를 꽤 보였기 때문인지, 한족 왕조 중 송을 은근히 더 쳐주는 분위기도 있으나 최근에는 명도 어느 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명이 암군들 때문에 과소평가 받는거지 국력 자체는 상당했던 나라고 후에 해금령을 내려서 그렇지 초창기에는 나름 국제사회에 관심이 있어서 동아프리카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지역별로 평이 좀 갈리긴 한데, 중국 본토의 경우 송의 경제력이나 문화력 등을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아직은 정강의 변이나 몽골에게 치욕을 당한 것 때문인지 특히 한족주의자에겐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오히려 대만 지역에서 문화 부흥 운동으로 송나라를 높게 쳐주는 편. 판관 포청천 관련한 작품들이 그 예로 이는 송나라의 치세를 가장 잘살린 매체로 알려져있다. 중국 본토 매체에선 보통 송의 영웅이 찌질한 황제에게 탄압받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포청천의 경우는 성군과 충신이 둘 다 맞물려 신임을 두텁게 받는 것으로 나온다.

이 시기에는 법의학수학 등의 학문이 발달했고, 기계공학도 발달해서 소송(蘇頌)이 거대한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톱니바퀴(물레)를 사용한 것이어서 자명종과 유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고, 원대에 이르러 그러한 혁신들은 법의학만 남고 수학은 쇠퇴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송의 경제력은 많은 주목을 받는데, 때문에 일부에선 송대에 이미 산업 혁명의 기반이 있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는 송의 발달된 과학력, 그리고 산업 혁명 시기 영국과 비슷한 석탄 사용량과 제철 능력 때문에 나온 말. 그러나 산업혁명이 단순히 석탄 사용과 제철 능력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화는 삼갈 필요가 있다. 애초에 흔히 주장하는 산업혁명 떡밥이라는게 송의 석탄 사용량을 주 근거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중국의 인구 수가 예나 지금이나 많아서 그런 것이다. 석탄을 취사, 난방용으로 이용하는 건 이슬람과 유럽에서도 옛날부터 있어왔다. 중국과 비견되도 지지않을 인구와 국가규모를 지닌 로마에서도 또한 근세 이후에서나 볼 이산화탄소량이 배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의 수력 방적기[21]는 유럽에서 산업혁명 과정에 쓰인 방적기와 큰 관련 없는 데다가 실제 사용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결정적으로 송 시대엔 산업에 필요한 제대로 된 증기기관이나 외연/내연기관의 발명도 없었고, 이걸 이용해 대량 생산에 응용하려는 시도도 전무했다. 애당초 '송나라 산업혁명론' 자체가 마오쩌둥 시절 정치성 이론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중국 자본주의 맹아론 부록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학술적인 연구나 고찰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파생된 썰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한편, 송은 명나라와 더불어 조선 왕조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라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편찬된 대학연의가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과거제도 송나라의 과거 제도를 조선 왕조가 완성시켰다. 주자학과 강목체 역시 조선 왕조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형법 역시 송나라의 제도를 많이 참고하였다. 물론 조선은 이후에 등장한 명나라의 영향도 송에게 받은 영향 못지않게 많이 받게 된다.[22]

6. 고려와의 관계

후대의 국가들인 조선명나라 간의 관계는 꽤 좋았기 때문에, 고려와 북송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미묘하게 조금 다르다.

두 나라는 일단 겉으론 사이가 좋았다. 960년 송나라 건국시기 부터 고려 광종이 사신을 보내 통교를 시작했다. 만주에 거란이 등장하고 여요전쟁이 발발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하면서 필요에 따라 국교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 과정에서 고려는 송을 이용해 요를 견제하는 동시에 공무역을 통해 송에게서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송 역시 요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에게 좋은 대접을 해줬다. 의천이 송으로 건너갔을 때 고려사란 절도 지어주고, 급기야는 고려의 사신을 서하의 사신보다 높이고, 조공사가 아닌 국신사란 별도의 명칭을 붙여 격을 높여주었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송 독자적으로는 요나라금나라를 상대할 힘이 부족했기에 고려와 힘을 합쳐 요나라와 금나라를 뒤통수 막아보려 했던 의도가 있었기에 고려를 잘 대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송나라의 외교적 방침을 요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요(聯麗制遼)라 했고 금나라가 있었던 때는 연려제금(聯麗制金)이라 했다. 물론 동상이몽이라고 정작 고려는 송이 원하는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이었다. 사실 송도 고려가 여요전쟁 당시 3차례나 도움을 요청했으나 요가 두려워서 고려를 외면하였고 그 후 고려가 틈틈이 요와 금의 상황을 알려주면서 도와줄테니 요나 금을 치자고 하면 발빼기 바빴다는 점에서 도긴개긴이긴 했다. 니가 먼저 나서면 도와줄게

그래도 고려나 송, 모두 상대방에게 원한 것은 유목 제국에 대한 무언의 견제였기 때문에 견제 그 자체만으로도 외교상의 실리가 있긴 했다. 서로 군사적으로 크게 도와주진 못해도 후방 견제 그 자체에서 나오는 효과가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발해를 멸망시킨 저력이 있는 요나라도 송과 고려 어느 쪽도 멸망시킬 수 없었고, 이것만으로도 송과 고려가 연합할 가치는 있었다는 것. 다만 고려의 경우는 요나라 침입 당시 결과적으로 요를 관광 태우긴 했지만, 고려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의 문자 기록이나 유물, 사적들을 보면 요나라의 침공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분간될 정도. 그래도 여요전쟁 당시 피해는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긴 한데, 몽골과의 전쟁은...그냥 고려가 깡그리 불태워졌다. 북송의 후신인 남송은 아예 몽골에게 멸망해 버렸고.

하지만 고려 사신에 대한 융숭한 대접과 고려와의 (조)공무역은 점점 송의 국가 재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번은 남송의 상인들이 고려 사신들에게 물품을 빼앗겨 물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 이로 인해 요나라의 실제적인 위협이 줄어들자 송의 신료들 사이에선 반고려 입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소동파). 그는 고려를 대놓고 맥적(貊狄)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 고려와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1. '돈이 너무 많이 든다.'

2. '백성들이 힘들다.'

3. 고려가 송에서 '가져간' 물품을 거란에게 '갖다 주고' 있다.

4. 고려는 입으로는 '송을 받든다' 하면서 정작 실리만 챙길 뿐이며, 심지어 송의 지형을 '그려 가고' 허실을 조사하고 있다.

5. 거란이 고려와의 관계를 '트집잡을' 위험이 있다.

여담으로 특이하게도 당시나 이후나 고려에서 소동파의 인기는 대단했다. 예를 들어 김부식과 동생 김부철은 소식과 소철 형제에게서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었다. 기타 고려가 송에게 갑질한 내용이나 소동파의 인기는 항목 참조.

송과 고려의 이런 미묘한 관점 차이는 요 대신 금(여진)이 들어섰을 때도 비슷하게 이어지는데, 흠종 땐 소식이 주장했던 것과 비슷한 이유를 들어 고려 사신을 개봉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객관에 1년이나 머물게 하다가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근데 이때 개봉에 있었으면..

이 외에도 송사를 보면 송의 여러 안습한 처지를 볼 수 있는데, 가령 고려의 사신이 들어오자 송 조정이 백성까지 동원해 운하까지 파려고 했는데 이때 손부(孫傅)라는 신하가 반대하자 이를 파직시켰다. # 이에 손부의 파직이 부당하다고 허한(許翰)이라는 또다른 신하가 이의제기를 하자 허한마저 파직시켜 버렸다.[23] #

한편 고려사신이 지금의 산동성인 청주를 방문하자 청주의 관원들이 성 밖에 나와 고려사신에게 절을 올렸으나 오직 청주의 종사 호순지만이 절을 하지 않아 송나라의 자존심을 지킨 일화도 있다.[24] #

그럼에도 고려에게 송이 퍼준 이유는 당연히 요나라 견제인데 과하다 싶을 정도로 퍼준 이유가 있다. 일단 요나라에 퍼 주는건 물론이고 서하의 경우도 하사금이라는 형식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세폐를 내야한다. 요나라에게 퍼 준 정도는 아니지만 절반 이상은 된다고. 고려랑 비슷하게 고개 숙인 안남국의 경우는 스스로를 남제라고 자칭했다. 북송 입장에선 주적인 요나 서하 견제엔 도움 안되는 위치에 있어서 별 신경을 안 쓴 것도 있다.

그에 비해 고려는 안남국처럼 해동천자 드립을 북송에게 직접 치지는 않았다. 북송 입장에선 고려가 주적인 요를 견제하기도 좋은 위치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고려와 북송 간에는 요나 서하 같이 정기적 세폐를 달라는 조약도 없었다. 사신들한테 많이 챙겨주긴 하더라도 이게 매년 서하나 요나라 한테 조약맺고 주는 세폐급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쉽게 말해 서하나 요한테 퍼붓는 어마무시한 세폐 비용을 고려의 경우는 달라고 안하니까 고려 사신이 오고 가는 데 접대용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니까 당연히 아낌없이 접대용으로 쓰게되는 것.

결론적으로, 송나라 입장은 우리가 고려랑 친하게 지내면 고려가 알아서 원쑤 요나라를 막아 주겠지?이었고, 고려 입장은 송나라 님들아, 제발 요나라 정벌 좀. 정벌만 시작하면 우리가 참가해 줌. 그전까진 우리도 힘들어이었기 때문에 양자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강의 변이 일어나고 북송의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북송 체제가 사실상 멸망하면서 양국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친선 관계는 강제 종료되어 버린다.[25]이후 남송과 고려와의 관계는 남송 항목 참조.

7. 역대 황제

참고로 황제 재위 기간에 연호가 여러 차례 바뀐 관계로 명이나 청처럼 연호를 붙여서 "XX제" 형식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대수

묘호

이름

연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 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조광윤
(趙匡胤)

건륭(建隆, 960년 ~ 963년 11월)
건덕(乾德, 963년 11월 ~ 968년 11월)
개보(開寶, 968년 11월 ~ 976년 12월)

960년 2월 4일

976년 11월 14일

16년 284일

영창릉(永昌陵)

02

태종(太宗)

조경(趙炅)
[26]

태평흥국(太平興國, 976년 12월 ~ 984년 11월)
옹희(雍熙, 984년 11월 ~ 987년)
단공(端拱, 988년 ~ 989년)
순화(淳化, 990년 ~ 994년)
지도(至道, 995년 ~ 997년)

976년 11월 15일

997년 5월 8일

20년 174일

영희릉(永熙陵)

03

진종(眞宗)

조항(趙恒)

함평(咸平, 998년 ~ 1003년)
경덕(景德, 1004년 ~ 1007년)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년 ~ 1016년)
천희(天禧, 1017년 ~ 1021년)
건흥(乾興, 1022년)

997년 5월 8일

1022년 3월 23일

24년 319일

영정릉(永定陵)

04

인종(仁宗)

조정(趙禎)

천성(天聖, 1023년 ~ 1032년 11월)
명도(明道, 1032년 11월 ~ 1033년)
경우(景祐, 1034년 ~ 1038년 11월)
보원(寶元, 1038년 11월 ~ 1040년 2월)
강정(康定, 1040년 2월 ~ 1041년 11월)
경력(慶曆, 1041년 11월 ~ 1048년)
황우(皇祐, 1049년 ~ 1054년 3월)
지화(至和, 1054년 3월 ~ 1056년 9월)
가우(嘉祐, 1056년 9월 ~ 1063년)

1022년 3월 24일

1063년 4월 30일

41년 37일

영소릉(永昭陵)

05

영종(英宗)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년 ~ 1067년)

1063년 3월 1일

1067년 1월 25일

3년 331일

영후릉(永厚陵)

06

신종(神宗)

조욱(趙頊)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
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1067년 1월 25일

1085년 4월 1일

18년 66일

영유릉(永裕陵)

07

철종(哲宗)

조후(趙煦)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소성(紹聖, 1094년 4월 ~ 1098년 5월)
원부(元符, 1098년 6월)

1085년 4월 1일

1100년 2월 23일

14년 331일

영태릉(永泰陵)

08

휘종(徽宗)

조길(趙佶)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1100년 2월 23일

1125년 1월 18일

25년 329일

영우릉(永祐陵)

09

흠종(欽宗)

조환(趙桓)

정강(靖康, 1126년 ~ 1127년 4월)

1125년 1월 19일

1127년 1월 9일

1년 355일

영헌릉(永獻陵)

8. 계보

추존 황제 선조 조홍은

1.태조

2. 태종

조덕소

조덕방

3. 진종

4. 인종

5. 영종

6. 신종

7. 철종

8. 휘종

9. 흠종

10.고종

11.효종

원의 태자

12.광종

13.영종

14.이종

15.도종

16.공종

17.단종

18.소제

9.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비고

능호

성조(聖祖)

상령고도구천사명보생천존대제
(上靈高道九天司命保生天尊大帝)

조현랑(趙玄朗)

태조 추숭, 송 왕실의 시조

-

희조(僖祖)

입도조기적덕기공의문헌무예화지효황제
(立道肇基積德起功懿文憲武睿和至孝皇帝)

조조(趙朓)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

순조(順祖)

혜원예명황제
(惠元睿明皇帝)

조정(趙珽)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

익조(翼祖)

간공예덕황제
(簡恭睿德皇帝)

조경(趙敬)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

선조(宣祖)

소무예성황제
(昭武睿聖皇帝)

조홍은(趙弘殷)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영안릉(永安陵)

-

황고복안의황
(皇考濮安懿皇)

조윤양(趙允譲)

영종 추숭, 영종의 생부

-

10. 여담

중국의 자동차 제조사인 BYD에서 생산하는 BYD 송, BYD 송 맥스 이름의 유래가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1. [1] 태조대의 송원통보(宋元通寶) 등 수많은 동전들이 발행되었다. 동전명의 앞부분은 주로 각 황제의 연호가 붙으며 ~원보(元寶), ~통보(通寶), ~중보(重寶)로 끝난다.
  2. [2] 술자리에서 공신 장수들의 병권 회수.
  3. [3] 두태후의 유언으로 형제 세습 약조.
  4. [4] 왕소가 20만 귀순시킨 후 원정.
  5. [5] 소식의 촉당, 정이의 낙당, 유지의 삭당.
  6. [6] 철종, 장돈, 채변.
  7. [7] 하지만 막대한 재원 낭비, 후에 악영향.
  8. [8] 설정인지 진짜인진 모르겠으나 수호지의 등장 인물 중 하나인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 이 후손들 중 하나로 작중에서도 그 사실이 언급된다.
  9. [9] 사실 이건 송나라의 막장 군사력 때문에 그런 것으로, 군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많은데 정작 요나라를 막아내는 데는 별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나라를 이긴 것조차도 실상 송나라에게는 피로스의 승리나 다를 바 없었기에 승전하고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10. [10] 예외로는 범중엄이 있었는데 범중엄은 서하의 군대를 여러 번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11. [11] 이십이사차기 권 25 송사.
  12. [12] 송과 금 양국간의 전쟁 및 평화교섭을 기록한 책
  13. [13] 다만 이러한 점은 비단 북송 시절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대 중국 왕조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장군인 척계광이나 청나라의 장군인 증국번이 거느린 군대가 정예로 유명했던 것은 그들의 군대에는 순박한 농촌 청년들만 병사로 모집을 했고, 도시의 불량배나 범죄자들을 병사로 받지 않아서 군기가 엄정했기 때문이었다.
  14. [14] 길이만 5m에 달하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북송시기 한림학사였던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그림으로서, 당시 상업이 발전하여 불야성(不夜城)이라고도 불린 송의 수도 개봉(카이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사회탐구영역 세계사 문제에서 자주 출제되기로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송나라 관련 기출 문제 중에서 그림으로는 단연 1위다.
  15. [15] 물론 모든 이가 이런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빈부격차로 거지나 도둑이 생기거나 부자의 자녀를 납치해 몸값을 받거나 하는 문제도 있었다. 수호지의 배경도 북송 말기다.
  16. [16] 아마 잦은 전란과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격감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북송 초기 송 전역의 인구가 5천만이었고, 이후 정강의 변으로 화북을 점령한 금나라 후기의 인구가 여기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인구가 몽골의 침공과 흑사병을 겪으면서 1천0만 명까지 격감한다. 당연하지만 거의 4천만에 달하는 인구가 모두 죽은 것은 아니고 그 중 상당수는 전란과 피난으로 통계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잔혹한 전쟁과 전염병으로 정말로 죽은 인구도 엄청 많았으리란 추측은 가능하다.
  17. [17]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List_of_regions_by_past_GDP_(PPP)&oldid=272230369#1000.
  18. [18] http://www.nuffield.ox.ac.uk/users/broadberry/China8.pdf. 양측 자료 모두 1990년 달러가 기준이다.
  19. [19] http://www.china-profile.com/data/fig_pop_0-2050_large.htm.
  20. [20] 다만 당나라는 나중에 가면 국력이 약화되면서 정복전쟁을 못하게 되었다.
  21. [21] 왕정농서에 14세기 수력 방적기가 실려있다.
  22. [22] 당장 조선의 관복은 명나라 관복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으며 경국대전 역시 명나라의 대명률을 많이 참고했고 군사면에서도 조선군임진왜란을 거쳐 원앙진 같은 명나라의 전법과 낭선, 당파 같은 명나라의 무기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23. [23] 송사 권363 열전122
  24. [24] 송사 권 303 열전 62
  25. [25] 물론 윤관의 여진정벌을 통해 여진족의 힘이 예전과 다르니 금나라를 믿지 말라고 고려가 경고했으나 송은 이를 씹고 금나라를 이용하여 요를 멸망시킨 후 금나라를 뒷통수 치려다가...
  26. [26] 초명은 광의(匡義)였으나 형의 이름을 피휘해 광의(光義)로 바꿨다가 즉위 후 경(炅)으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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