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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시궁창

1. 개요
2. 변천
3. 평가
4.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5. 관련 문서

1. 개요

북한의 경제 정보링크

인구

24,554,000 명링크 (2012년)

경제 규모(명목 GDP)

144억 달러, 2012년

경제 규모(PPP)

456억 달러, 2012년

1인당 명목 GDP

621달러, 2013년

1인당 PPP

1800 달러, 2012년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0.4% (2007년) 링크

동아시아 소속 국가들인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마카오 모두 세계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보여주는것에 비해, 북한의 경제력은 같은 동아시아권이 맞는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혼자서 바닥의 바닥을 긁고있으며 매우 심각하게 안좋은 상황이다. 주변국들은 다 잘사는데 북한만 거지인 것이다.

북한 경제의 심각성은 누구나 다 알지만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다소 모호한데, 예를들어 CIA WORLD FACTBOOK(2013)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GDP는 약 1200달러로 파키스탄(1300), 카메룬(1200)과 비슷한 수준이며, 캄보디아(1000), 아프간(700)보다 위라고 나오는 반면, IMF(2013)의 자료를 보면 북한(583), 아프간(678)로 아프간이 위이다. 이 같은 오차는 북한 경제의 불투명성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어느 쪽 자료를 신용할 것인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긴다.

하지만 모두들 공통적으로 북한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은 뜻을 같이하고 있다. 저 비교대상으로 꼽히는 국가들은 보통 주변이 정치적이나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등으로 불안정 지역에 속한 국가들(서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인데, 북한은 들이 하나같이 최소한 먹고 살 만한 수준은 되고 그만큼 안정적인 국가들만 모인 동북아시아의 국가인데도 저런 국가들과 비교를 당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헌데 이것이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양날의 검이다. 북한의 경제가 깡통을 찬 덕에 북한이 현재 상태보다 군사력을 더욱 증강하기 어려운 반면 이 경제상태 때문에 통일이 될 경우 통일분담금이 엄청난 액수가 될 전망이다. 북한의 국채 항목도 참조해볼 것. 당장 남북간의 경제 격차를 좁히기 전에 빚부터 갚아야 할 판... 대한민국 주도 통일 한국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이 망할 북한의 경제 상황은 우리가 책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진짜 통일이 된다면 대한민국이 주도하고 뭐도 없이 북한이 쫄딱 멸망해 버려서 이뤄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2. 변천

1980년대 들어 경직된 경제 체제의 단점이 드러나고 80년대 후반 들어 많이 주춤거리더니 1990년대에 고난의 행군을 선포, 순식간에 배급도 안 나오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사회주의국가에서 배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두손두발 다 들었다는 것이다.

2.1. 1940년대

일제 강점기, 일본 사업가로부터 막대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이루어졌다. 1918년 일본제철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본질소비료에 의해 당시 아시아 최대 공장이었던 흥남비료공장이 세워진다. 이 비료 공장은 해방 이후까지 한반도 최대의 비료 공장이었다. 또한, 일제는 압록강에 여러 수력 발전소를 건립해서 만주국한반도에 전력을 공급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수력 발전소가 다름 아닌 수풍수력발전소였다.

해방 직후 북한은 이러한 산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남한보다 경제적인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또, 일제가 침략 전쟁을 수행을 위해 많은 전략 물자와 막대한 양의 보급 식료품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당시 일본군이 남겨둔 보급 식료품의 양이 상당해서 일본이 이를 반출하려 했지만 소련 군정이 불허하여 북한이 차지하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경제적 배경을 내세우며 토지 개혁을 밀어 붙이는 데 성공한다.

해방 직후 전력 생산이 가능한 발전소가 남한 지역에는 아예 없어 북한에서 남한 쪽으로 전력 지원을 해주는 형편이었다. 당시 남한에도 당인리 발전소가 있기는 있었지만 일제의 전략 물자 통제로 발전 원료인 무연탄 공급이 중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전이 불가능했다. 만성적인 전력 부족 현상은 미 해군의 발전선이 인천에 정박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북한은 일본으로 귀국하는 일본인들 중 기술자들을 1948년까지 억류하여 산업 기술을 강제에 가깝게 전수받았다. 북한은 일본이 건설해 놓은 무기 제조 공장에서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과 같은 기초 병기와 탄약을 생산하였다. 반면 남한이 이러한 기초 화기를 자립적으로 생산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기존 남한에 있던 몇 안 되는 조병창들도 미군정이 철저하게 파괴하여 철거해버릴 정도였다.

일제의 침략 전쟁에 동원되던 중공업이 북한의 남침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2.2. 1950년대

그런데 이러한 산업적 기반은 한국전쟁 당시에 박살이 나고 만다. 특히,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중화학공업단지였던 흥남 지역은 미군측의 폭격 등으로 거의 초토화가 되었으며, 송림 지역에 있던 겸이포 제철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상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였으나,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경제적 지원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동유럽권 국가들을 원조하기 위한 소련의 몰로토프 프로그램[1]이었으나, 북한도 이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지정받는다[2].

사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 아래서 신화적인 공업화를 이룩한 바 있기 때문에, 당시 소련과의 교류는 북한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한의 많은 인재들이 소련에 유학을 하면서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워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초토화된 북한의 산업 기반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으며, 특히 흥남질소비료공장의 경우에는 이전 시기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다. 당시 북한의 산업화 정책은 초기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유사한 선중공업 노선이었기 때문에 제철소, 조선소, 화학 공장 위주의 산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때 경제발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조금 뒤의 일이지만 이때는 한국의 기적이 남한의 경제발전 과정(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뜻하는 말이 아닌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을 뜻하는 말이었을 정도였다. 오히려 당시 남한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2.3. 1960년대

1950년대 후반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자, 북한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양쪽과 적절히 거리를 두며 양쪽 모두로부터 꿀을 빠는 외교 정책을 구사한다. 선진 기술과 산업을 갖춘 소련으로부터는 설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공업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중국으로부터는 원자재나 식료품을 들여오게 된다. 또한, 50년대에 기초를 닦은 중화학 공업의 기반을 바탕으로 경공업 발전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까지는 북한 정권 내에서 선군노선이니 군수공업이니 하는 소리를 하는 세력이 그리 없었기 때문에 순수한 민간 경제 부문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50년대까지는 소련 중심의 원조를 받게 된다면,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원조 국가의 다변화가 이루어진다. 동유럽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재건되면서 이들의 지원이 시작된 것. 60년대부터 북한은 기초 과학 분야[3]와 최신 산업 기술들을 단순히 전수받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술로 체화하는 과정을 들어서게 되었다. 남한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 과학 기술 인재의 싹을 육성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을 생각한다면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빠른 것이다.

북한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광풍이 불고 있는 당시 우회적으로 이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였고 66년에는 사상적인 독립을 꾀하고, 69년 중소 국경 분쟁 때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을 택하면서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만 챙기는 정책을 택한다.

2.4. 1970년대

북한 경제의 황금기이자 전성기

북한 스스로도 이 시기를 황금기라 칭한다. 1960년대 닦아 놓은 경공업 기반을 바탕으로 어느정도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70년대 초반부터는 농업 기계화를 추진하게 된다. 사실 이 농업 기계화는 소련에서 1950년대 중반 부족한 식량 생산을 극복하고자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초원 지대를 대규모 농토로 개간한 것에서 기인한다. 북한도 이에 자극 받아 농업 기계화를 추진한 것이다. 본래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각종 농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술 이전을 받으려 했지만 소련이 1960년대 중반부터 기술 유출을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면서 기술 이전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농기계 생산을 자력갱생하려고 했고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조선형 뜨락또르(트렉터) 이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같은 농업 기계화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농업 생산량도 북한 내의 수요를 충족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고, 또 어획량도 상당히 많아서 명태를 무상 배급할 정도였다.

이러한 북한의 경제 발전으로 1973년까지는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북한의 국가주석이 최용건에서 김일성으로 교체된 시기다. 남한보다 1인당 GNP가 높았다. 구체적인 년도는 지표마다 다르다. 가령 이헌창의 한국경제 통사에서는 60년대 후반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실제 생활 수준에서도 소득분배나 사회보장은 북한이 더 우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미 1973년에 남한보다 1년 일찍 평양 지하철을 개통시켰고,[4] 1974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했으니 말 다한 수준.

아시아에선 컬러 TV 방송을 일찍히 한 국가는 당시 경제가 많이 좋은 편이던 일본필리핀이었다. 여담으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처음 시작된 것은 미국이지만 방송 전부를 컬러로 송출한 것은 소련이 처음(1968년)이었다. 소련은 인터비전(Интервидение)이라는 소련-동유럽권에 이르는 거대한 컬러 텔레비전 표준을 제정하고 컬러 텔레비전을 그야말로 찍어내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보편적 일반화는 사회주의권에서 먼저 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1970년이 되기 전에 정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적어도 70년대 초반에는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74년도부터 전면 컬러 방송을 시작했는데, 사회주의권 사이에서는 너무 늦었다고 까일 정도였다.

실제로 남북 적십자회의 당시 평양에 파견되었던 남한 대표단들은 귀국해서 '평양이 서울보다 좀 발전한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당시 남북 적십자사의 수행단으로 다녀온 송종환 교수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평양이 우리보다 좀 발전한 것 같다, 더 앞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예를 들면 우선 우리가 했던 회의장, 국제 호텔의 회의장도 국제 컨퍼런스를 한다는데 아주 좋았고 그리고 우리가 서울에서 보기 힘들었던 비데라는 것이 화장실에 있었는데....

―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박정희와 김일성' 편 중에서

다만, 북한 역시 7. 4. 공동성명 등 대남 문제로 고위급 인사들을 여럿 남한에 파견했는데, 이들 역시 남한의 경제 발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바 있다. 남한은 원래 경공업은 꽤 발전한 편이었고, 중공업도 슬슬 시동을 걸었으니.

다만 경공업 제품의 질은 오히려 남한보다 떨어졌다고 한다. 생활의 질은 경공업에 좌우되는 바가 큰데, 남한은 북한보다 1인당 소득이 떨어졌던 그 옛날부터 경공업은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공업 구조는 한국전쟁 이전의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의 남농북공 정책에 기인한다. 1920년대 후반 폭발하는 공업 수요가 일본 본토를 넘어, 당시 조선 반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력(수력 발전)과 지하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북부 지방에 중화학 공업 시설을 집중시키고, 남부 지방에는 농업과 중화학 공업 시설을 뒷받침 해 줄 경공업 시설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공업 구조는 해방 이후 20여 년간 계속되어 왔다.

남한의 경우에는 이렇다 할 중화학 공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차관이나 투자금을 유치해서 중화학 공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경우에는 이미 남아 있던 시설과 인력이 당시 소련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과 결합되어 빠른 속도로 중화학 공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경공업만큼은 우위를 점하여 산업적 영향력을 독점하려는 소련의 공업 정책 탓에 경공업은 잘 발전하지 못했다. 경공업품은 일반인들의 단순 소비품이기도 하면서 중화학 산업의 1 · 2차 원료이기도 해서 경공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중화학 공업에서의 기득권 역시 함께 쥐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의 이러한 공업 정책으로 많은 계획경제권 국가들은 그 국가의 역량 이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전했으나, 경공업은 중화학 공업보다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나 생필품(비누나 샴푸 등)의 질이 떨어지거나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해지는 현상은 북한 뿐 아니라 동구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계획경제 국가들이 겪었던 문제이긴 했다. 60-70년대 들면서 여타 동구권 국가들도 경공업부분에서의 부진문제를 해결할려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 과정에서 민간 경제와 당 · 군 경제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즉, 한 국가의 경제 내에 군수 산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군수 산업이 아예 따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등장 이후 이러한 경제 분리는 더욱 가속화 되어, 잠재적인 경제 성장의 배경을 저하하게 된다. 하지만 70년대의 경제 성장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둔화의 조짐이 지표 상으로는 나타났을지라도 실제 주민들의 피부에는 와닿지 못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까지는 2015년 현재의 북한 상황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정도 삶이 보장되었으며, 이 시기를 살아온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인민락원이 왔다거나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곧이어 폭망할 거라는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나 많은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음식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버리는 수준이었으며 교육, 의료, 의식주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국가가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았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은 그때 흥청망청 돈써서 지금 이렇게 못 산다고 불만을 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상대적 의미가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 잘 살았다고 볼수는 없다. 아시아에서 제일 잘 살았던 일본조차도 1970년대에서야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고려하면 북한의 삶은 제3세계에서야 선두에 있었지 실제로는 서방세계는 물론이고 동유럽과 비교해도 소득은 매우 떨어졌다.

음식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한정적인 이야기로, 위에서도 언급된 명태 이야기다. 당에서 매해 생산량을 책정하고, 해가 바뀌면 또 반드시 그보다 많은 양을 목표로 잡아 주었는데 이는 성장 지표를 강제적으로 할당하여 외부에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걸 진짜 따라가고 아예 초과생산까지 가능했던 게 명태. 풍어였던데다가, 많이 잡아 오라고 하니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엄청난 양이 쌓이게 된다. 그러나 저장설비도 부족했거니와, 국가가 계획적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게 목표였던 당시에는 '남는 걸 저장한다' 라는 것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당이 필요 생산량을 잘못 책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많이 잡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게 그렇게 많이 잡으면 목표 초과달성이 되고, 이런 것이 곧 김일성의 은혜로 풍어가 왔네 주민들의 충성으로 힘들어보이던 목표도 초과달성이 가능했네 어쩌네 하며 당의 선전에 필수적인 부분이었기 때문. 그리고는 그렇게 초과생산된 양을 목표량으로 잡고 그걸 또 강요하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걸 또 다 나눠준다. 하도 나눠주다보니 명태를 삽으로 퍼서 준다, 북조선엔 명태와 처녀가 넘쳐난다 라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나눠줘도 창고에 쌓이는 양이 더 많아 썩어버리는 일도 있어 그런 건 또 창고 단위로 꺼내다가 썩은 걸 분류하고 남은 걸 강제할당해서 분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명태를 주는 대로 받아가야 다른 배급품을 주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할 정도. 다만 이 덕분에, 당시에는 명태 등으로 젓갈을 담아 판매하는 지금 남한으로 치면 반찬가게 비스무리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아직 소련도 팔팔했고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살아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제 짧은 전성기의 끝이 다가온다.

2.5. 1980년대

경제적 황금기가 종식되고 경제 몰락의 원인이 축적되는 시기였다.

70년대 부터 진행된 당 · 군 경제의 분리는 더욱 가속화되어 민간 경제의 비율이 축소되었다. 북한이 투입할 수 있는 상당수의 자원이 당 · 군 경제에 투입되면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인 독재 체제의 강화로 사회적 분위기 또한 대단히 빠른 속도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도 경제적 활력이 떨어지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때인데다가 석유파동과 이자율 급증에 따른 외채문제로 인해 사회주의권이 전반적인 불황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이와 함께 북한의 대외 교역이 둔화되면서 경제적 대외 지표가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한다. 더구나 1968년 1월 23일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이 '경제국방병진노선'을 천명하면서 국가전체예산 중 50%를 군수산업으로 전용하기 시작하면서 민간경제에 불안감을 끌어들였다. 이는 김일성이 소련의 원조를 기본 전제로 해서 국가예산의 비율을 이렇게 조정한 것인데 문제는 1986년 4월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소련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만 전념한 나머지 북한에 대한 지원이 소흘해지고 북한의 경제는 그대로 구렁텅이행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북한 경제의 기반이 매우 위태롭게 된다. 대규모 정책 실패로 엄청난 경제적 자산을 날려버리게 된다. 특히, 북한의 고위 관료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특히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직격탄이었다는데, 북한은 1988 서울 올림픽보다 큰 국제 행사를 유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는지 엄청난 규모로 행사를 열었다. 1988년 대한민국의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자 북한은 노골적으로 올림픽 개최 취소를 위해 긴장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방법을 바꿔 남북한 공동개최를 주장하는 등 대한민국의 올림픽 개최 방해공작을 많이 일으켰고, 결국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어 22,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초청 형식으로 동원했다. 이 초청이라는 것이 이들의 체류 비용, 항공권 비용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정책 실패와 군비의 과도한 확장으로 북한의 경제적 황금기는 종식되었다. 당장 일반 주민들에게 큰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 것은 아니었지만, 70년대의 풍족한 생활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북한의 경제 관료들은 축적된 외화를 이용해서 해외에서 식량이나 기초 생필품을 구입해왔기 때문에 배급제가 정상 유지되었다.

당시 북한이 디폴트를 선언했다고 하지만 상당수 제3세계 국가들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와 같은 다른 동구권 국가와 다르게 사실 경제적으로나 큰 혼란이 오지는 않았다. 정전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2.6. 1990년대 초반

이 시기에는 북한으로서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붕괴는 물론이거니와 그에 따른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대혼란을 거치게 되서 북한이 의존할 대외시장이 거의 허물어졌을 뿐 아니라 중국마저 덩샤오핑의 노력으로 개혁개방이 실질적으로 체감이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실 북한의 주된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가 일본 물품을 사서 중국에 파는, 일종의 밀수 혹은 중개무역이였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오는 강명도교수가 한 일이 바로 이런 일로 일본 중고차를 사서 중국에 파는 일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문호를 열면서 돈줄은 돈줄대로 줄어들고 정치적 입지도 정치적 입지대로 곤란해진 것. 심지어 중국은 남한과도 1992년 한중수교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1989년에 폴란드 첫 자유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압승하는걸 시작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경제는 침체기에 빠진다. 다만 이 시기에도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외화로 배급에 필요한 양곡이나 생필품을 해외에서 구입해 오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생활난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주요 교역국가들이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경제 · 사회적 이행을 거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역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산업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의 수입과 생산재의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히 수많은 공장들이 멈추었고, 북한은 외화를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김일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식량 배급은 반드시 지속해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에 단순하게 먹는 문제는 없었다. 다만, 화석 연료의 부족으로 정전이 발생하고 열차가 지연되는 등 경제난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이라는 국가 전체가 마비되면서 '경제'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게 된다. 그 다음 해부터는 현세의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2.7.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국가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1995년 북한 지역에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말 그대로 현세에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 수립 당시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보다도 더욱 더 참혹한 수준으로 타임 슬립을 하게 되었다.

사실 1995년 북한에 발생한 자연재해는 전근대 시대의 국가가 아닌 이상 현대의 공공정부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의 전력이 김일성 신격화, 김정일 우상화, 당의 결속과 정치적 숙청 등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는 붕괴되버리고, 중국은 문호를 개방한 시점에서 북한이 택한 세습 독재정치는 이미 고립된 북한의 외교적 입지마저 더더욱 악화시켰다.

김일성 생전에도 이러한 외교적 문제를 타개하고 싶었던 것인지 남북 정상회담을 거의 다 진행시켜놓았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없던 일이 되버린다. 실제로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에 남한과의 대화를 원치 않았던 김정일이 김일성을 도발하여 뇌출혈이나 급성 심장마비를 유도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 놀랍게도 실제로 전화 통화를 한 뒤 급격한 응급상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평양에서 수송헬기를 띄우는 등 응급처치가 고의적으로 지연된 것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정황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내부적으로는 생산된 양곡을 배분하고 수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멈춰 선 것이 가장 타격이 컸다. 실제로 1996년 남포항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곡물이 산 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전력 공급이 중단되어 철도로 이 곡물들을 운송할 수 없어 항구 하역장에서 상당수가 썩어 나갔다. 1995년 황해남도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년보다 좋은 작황을 보여서 쌀 수확이 매우 많았는데, 이 쌀을 타 지역으로 보내고 타 지역에서 다른 물자를 들여올 교통 수단이 마비되어 몇 달동안 말 그대로 쌀만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해주시같은 경우는 오히려 쌀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쌀을 갖고 있음에도 아사자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또한, 김일성 사망이후 본격적으로 집권한 김정일이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오히려 자신의 권력 기반을 이용하는데 활용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은 더 커지게 되었다. 보통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집권자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 보통인데 김정일은 식량을 자신이 직접 통제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계층이나 자신의 정권을 보위할 군 위주로 배급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정일의 권력은 공고해졌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1994년 6월까지만 해도 1인당 쌀 배급량은 600g 내외로, 한 사람이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에는 쌀 배급량이 500g 내외로 줄더니 1995년 3월에는 350g 가량으로 급격히 줄어들며, 그 이후에는 아예 배급이 중단되었다. 어느 정도의 인명피해가 있었는가 하면 심화조 사건 문서에도 서술했지만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였다.

이처럼 식량난이 발생하자 노동력의 총량이나 질도 급감하여 전반적인 산업 활동이 저하되었고, 1997년에 이르러서는 군수 산업이나 당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제 조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경제 단위는 조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기능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 거의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탈북자들은 평양 주변지역에서도 굶어죽는 사람들의 시체를 제대로 치울 인력조차 부족하여 발에 채이는 시체를 그냥 두고 걸어다녔다고 증언할 지경.

당시 북한에는 해외에서 화석 연료나 곡물을 수입할 수 있는 충분한 외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실제로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는 북한을 권력유지를 위해 주민들을 일부러 굶기는 나라로 분류한바 있다. 2008년 북한 전역에 파견된 UN조사단의 인구통계학적 조사에 의하면 이 시기 아사자는 30~4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이 시기 굶주림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200만에서 많게는 300만에 이른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사망한 사람의 수는 UN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보통 2~3%의 인구가 감소할 때, 그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5%이상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정권이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실제로는 1%만 감소해도 현세에 헬게이트가 열린 듯한 혼란이 벌어진다.), 2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을 따른다면 북한의 인구는 10%이상이 감소하게 된다. 즉, 실제로 그만큼의 인구가 감소했다면 북한 정권은 진작에 무너졌어야 한다는 의미. 인구 감소와 국가 존망의 위기와 관련해서는 경신대기근 참고.

그러나 만일 당시 북한 정권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외화를 활용하여 일시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넘겼다 하더라도 이미 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되어 자본주의로 이행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를 고수한다면 또 다른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쿠바도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한 후에 상당한 경제난을 겪었으며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은 2000년대에 중남미에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중국이 급부상한 뒤의 일이다.

2.8. 2000년대

2000년, 북한 당국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일 뿐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직후에도 북한의 경제는 그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는 커녕 왜곡된 시장 경제 체제의 도입으로 오히려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북한의 경제 정책은 오히려 퇴보하여 GDP의 30% 가량을 군사 부문에 몰빵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 부문에 대한 투자는 어떤 경제적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는 것으로, 사실 상 돈을 날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군이 강군이 된 것도 아니며, 사회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만 기형적으로 커져 사회적 안정성을 저해하고 있다.

90년대 말 집권한 김정일은 사회주의권이 없어진 대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철권통치를 계속 유지해 나가며 국제 사회의 여러 압박을 겪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국의 대북 압박이 심해지고 경제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봉쇄 조치의 목적은 김정일 정권의 목을 죄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북한 권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러한 제재를 교묘하게 빠져나갔으며, 제재의 피해는 북한 경제의 일반 부문과 하위 계층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이러한 제재로 인해 일반 교역이 상당한 타격을 받으며, 북한 내에서 생산된 제품이 해외로 수출되는 것이 원천봉쇄되었고 해외에서 돈을 주고 곡물을 반입하려고 해도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시장 경제는 북한 내부의 주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일단 장마당과 같은 의사자본주의(擬似資本主義)적 요소를 통해 북한 주민들은 배급 이외의 방법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곧 북한 주민 개개인이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함을 의미했다. 본래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마다 국가에서 지정한 직장이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가 외형 상 유지되는 가운데 주민들의 실질적인 생계 수단이 변경되면, 직장에서도 일을 해야하고 다른 생계수단에도 종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사실 동유럽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상당수가 자본주의로 이행될 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가 직장 지정 제도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러한 것은 곧 사회주의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권의 골간을 이루는 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권의 포기와 다름 아니기 때문에 외형상 기존의 체제를 고수했던 것이다.

2.9. 2010년대

2011년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느리지만 그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면, 김정은은 뭐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로 김정일 시기 내각총리로 개혁개방을 추진했다가 군부의 반발로 실각한 것으로 알려진 박봉주가 김정은 시기 들어와서는 2013년부터 3년째 내각총리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김정은이 개혁개방에 호의적인 입장인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개혁개방은 안된다는 입장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주장해도 되니까 해결책들을 내보라고 하고는 회의 후에 개혁개방을 주장한 사람들을 숙청했다는 소문도 있다.

김정일 집권 시기 여러 차례의 핵실험으로 국제 사회의 지원이 완전히 끊겼음에도 알아서 먹고 살아라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심지어는 간헐적으로 장마당도 통제하여 더 먹고 살기 어렵게 했었다. 하지만 김정은은 사실상 시장 경제 체제를 인정하고, 장마당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제도권 아래로 가져왔다. 또한, 김정일 시기 때는 일반인은 물론 간부들까지도 외화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했었는데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외화 사용 제한 조치를 완전히 해제했다. 더해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부존자원을 싼 값에 해외에 넘겨서라도 북한에서 필요로하는 곡물이나 경공업품을 들여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또한, 김정은 집권 이후 큰 자연 재해도 없어서 북한 내 식량 사정도 김정일 때보다는 큰 폭으로 개선되고 있다#. 특히, 흥남비료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해서 비료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농업 기반이 워낙 심각한 수준으로 붕괴되어 아직 자급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확실시 김정일 시대보다는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있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4년에는 묵은 쌀이 아닌 햅쌀이 풀릴 정도로 작황이 좋았다#. 그러나 2015년 북한은 라선시가 쑥대밭이 될 정도의 자연재해로 인해 WFP에 의하면 식량수확고가 대략 전년 대비 17% 정도 감소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지속적인 관찰과 업데이트가 요구되는 부분임을 부가해둔다. 심각한 경제난과 기아로 인해 자연환경도 거덜난 상황이라[5] 홍수나 가뭄 등이 극히 취약한 상태라 일시적인 풍작을 결코 희망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인 것.

이와 함께, 김정일 시기의 개발 투자는 평양 및 수도권에 국한되었으나,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평양권뿐만 아니라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방 개발에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발표된 지방 13개 경제개발구 지정과 2015년 원산공항 현대화 재개장이며, 특히 원산은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 지정, 원산공항 현대화, 송도원지구 정비 등 김정은과 김여정의 출생지라는 추측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6] 여기에 자율경영관리조치를 도입하여 독립채산제를 강화하는 조치로 김정일 시대에 완전히 멈춰섰던 지방의 공장들도 다시 가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즉 과거에는 사회주의권에서도 가장 중앙 통제가 심한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들이 원자재의 수급과 생산물의 유통에 엄청난 제약을 받았으나, 자율경영관리조치로 각 산업체가 자율적으로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치와 함께 공장에서 출고하는 상품의 단가를 국정 가격이 아닌 시장 가격에 출고할 수 있도록하게 되면서 급료공시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었다#.

한편, 김정은 시기에 들어 외화를 갖고만 있다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외화 상점 등을 평양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에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외화 상점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평양에 있는 해당화관으로, 거의 호텔 아케이드 수준을 보인다. 평양 이외에 지방의 도청 소재지에도 이런 고급 외화 상점을 계속 개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외화 상점의 개설은 그동안 북한 내 기득권 층이 숨겨두고 있던 외화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써 외화가 시장에 돌아 경기가 활성화되고, 가장 결정적으로 국가는 그 외화를 회수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주도로 건설 붐을 일으키고 있다. 김정은은 그동안 중하위권대학으로 인식되던 평양건설건재대학을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자신이 스스로 이 대학의 명예 총장까지 하면서 대대적인 건설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건설 활성화는 북한과 같이 낙후된 국가에서는 경기 부양에 매우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다. 김정은의 지시로 평양에는 수십 층[7]짜리 아파트가 계속 들어서고 있고, 위성과학자지구같은 신도시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건설 경기 부양은 지방에도 파급되어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주택 거래를 암묵적으로 허용하여 부동산 시장까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이 2015년 11월에 [라선특구 종합개발계획을 확정한 부분도 주목할 만 하다. 북한은 1996년 라선경제무역지대와 관련해 개발계획을 공표한 바 있었으나 2000년대를 거치면서 사실상 사문화되고 중국 및 러시아 자본에 의한 파편적인 투자만이 진행되어 왔다. 국가 종합개발계획이 새롭게 공표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북한 당국이 라선 개발에 상당한 의욕을 보이고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2016년 연초에 4차 핵실험에 따른 제제 논의 중 이를 비웃듯이 광명성 4호를 발사하는 어그로를 끌면서 국제사회와 중국의 뒤통수 마저 때린 것이 역린으로 작용하였다. 이로인해 매우 강력한 제제가 실행 되었으며 이로인해 북한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경제적 부담감을 떠앉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북한의 -4%의 성장률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최가 예정되어 있다. 김정일 시대 사실상 정지되었던 조선로동당 내 회의기능을 되살려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김정은의 방식을 감안하면, 이번 제7차 당대회에서는 경제부문에서 중요한 강령이 언급,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핵경제병진노선이라는 초병맛 방침을 제시한 북한이 제7차 당대회를 앞두고 제4차 핵실험이라는 엄청난 이벤트를 열면서 주민들에게 '강대국의 위상'을 선전한 만큼, 김정은은 7차 당대회를 통해 경제 부문에서도 기존에 비해 진일보해 보이는 정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뒤따라오는 제제 때문에 시궁창인 상황이지만 북한은 외부의 잘못으로 돌리고 꼭두각시 언론을 통해 업적만 떠벌리고 체제만 유지시키면 되는지라 추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갱신이 요구된다.

다만, 이러한 경제 상황 개선은 어디까지나 현 북한의 체제를 유지시켜나가기 위한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김정일 시기 경제정책은 주로 시장에 대한 통제가 주를 이루었으나, 2009년 화폐개혁이라는, 그야말로 시장에 대한 완패를 경험한 김정은 시기 들어서는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장경제적 요소의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마당 정책을 통해 이러한 변화의 단면을 살펴보자면, 김정일 시기 북한은 수시로 장마당에 대한 폐쇄, 거래금지 등을 반복해왔으나, 김정일 시대 말부터는 국가에서 아예 장마당 구역을 지정하고 상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구역을 경쟁 입찰로 임대하며, 정기적으로 상세를 받는 등 시장 경제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가져왔다. 또한, 자유로운 외화 사용을 허가한 것은 북한 내의 기득권 층이 장롱 속에 숨겨두고 있던 외화를 유통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외화를 국영 상업체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국가가 외화를 회수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정은의 이러한 시도 역시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 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데, 일차적으로는 결국 인민들과 간부들의 주머니에서 외화를 끄집어내서 국고로 돌리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김정은이 외화 금지를 풀어주기 전에도 이미 북한돈은 북한 내부에서도 가치를 거의 상실한 상태였으며, 이를 풀어준 것은 단지 외화를 시장에 더욱 노출시켜 국가가 긁이들이기 쉽게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이에 대해 위조지폐 등의 문제로 중국도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자금세탁에 쓰일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인한 외부 압박으로 결국은 다시 달러고 위안화고 외화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차적으로는 이것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과연 향상시켰는가에 대한 의문인데, 장마당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형편이 나아진 계층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공식적인 장마당은 여전히 간부들에게 자릿세와 상납금, 거기에 더해 뇌물을 찔러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여전히 비공식적 장마당과 '불온한' 물품들[8]이 거래되는 메뚜기 장 등은 존속되고 있으며 이런 곳에서 장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더욱 내몰리게 된다는 것. 김정은 이후의 탈북자들은 오히려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할 것 없이 탈북욕구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다만 덕분에, 남한에 대한 정보는 물론 북한에 대한 불만도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이라고.

2.10. 특징 및 문제점

3. 평가

한반도 북부를 최빈곤기로 이끈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신화

사실 북한은 공산권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망할 만한 나라가 절대 아니었다. 못해도 남한보다는 상황이 좋았고 소련, 중국같은 든든한 지원국이 있었다. 대개 냉전 붕괴로 인한 필연이었느니 하는 주장이 많고 외국의 제재 탓이라고까지 하지만 이들의 주장대로면 자력갱생한다는 나라가 외부 제재의 영향을 받았다는 모순이 성립된다.

당장 북한의 유일한 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조차도 개혁, 개방을 전혀 하지 않는 북한 정권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많이 한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덩샤오핑이 "중국은 개혁, 개방으로 이렇게 발전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북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힐난했다가 김정일이 당장에 북한으로 돌아가 중국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은 1990년대의 일인데 이후 공산권 국가들은 모두 그럭저럭 제 갈 길을 찾았다. 우선 미국의 제재는 1993년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착수한 뒤에야 시작되었고 경제제재가 있었지만 중국은 항상 교류했으며 한국과 일본도 상황에 따라서 경제 교류가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경제 발전을 하고자 한다면 주변국의 지원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장 미국 본진 앞에 있어서 냉전 이후 외국과 교류가 다 끊긴 쿠바보다는 사정이 수십 배는 나았다. 하지만 쿠바는 경제발전은 미미했지만 적어도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할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북한의 몰락 원인은 100% 북한 자신에게 있다. 90년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자본주의 체재로 돌아선 것을 보고는 "우리식대로 살자!"라고 더더욱 자력갱생에 열을 올렸다. 거기에다 북한은 소련이나 동구권의 자본주의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열악한 경제사정을 TV화면으로 주민들에게 보이며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시켰다. 사실 화면에 나온 것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진 이른바 성장통이었음에도.

애시당초 북한은 정말 허허벌판이었던 남한과 달리 서방 국가들과 비교해 봐도 상당한 수준의 공업력을 자랑하는 경제 대국이었고, 이는 1970년대 당시 서방 국가들로부터 대량의 돈을 빌리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북한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운영했던 공장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남한보다 더 경제적 성장이 수월했었다. 한국전쟁으로 산업 기반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는 하지만 전후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다 복구하고도 계속해서 많은 지원을 받아먹었으니 변명거리가 못 된다. 그에 비해 남한은 그만한 산업기반조차 없어서 당장 있는 것은 죄다 내다 팔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으로 한 차례 날아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보다 여전히 앞서 있었고, 여기에 내부 출혈까지 감수하는 공산권의 적극적인 지원은 그런 북한이 빠르게 전후 복구를 마치고 다시 살아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결과는 그 엄청난 삽질에도 불구하고 남한에게 1인당 GDP로 1970년대 중반까지 추월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1960년대 초 통일 운동의 내용을 보면 남한의 쌀과 북한의 철을 교환하자는 내용도 있을 정도.

북한의 성장이 빨랐던 이유는 노동력 부족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1958년까지 주둔하면서 해결해 줬고, 경제적 지원은 같은 시기 남한의 두 배였으며 대부분이 생산 시설 등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것 들 뿐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남한미국에게서 생산 시설이나 그 기반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고, 밀가루 한 포대라도 더 얻어내려고 별의별 쇼를 다 했으며(그 유명한 반공십자군 파병 주장도 실상은 원조물자 뜯어내려는 노력의 일환), 일본과도 구상권 청구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미국은 원조를 어떻게든 줄이거나 없애려 안달이었고, 그 결과는 1950년대 말의 경제위기와 이승만 정부의 몰락이었다.

따라서 북한이 김씨왕조의 정신나간 자력갱생, 총력군비 정책 같은 걸 때려치고 라오스, 베트남처럼 현실적인 대외 무역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라도 세우는 한편 어차피 한-미가 북한을 선제 공격할 일은 없으니 방어 위주로 전력을 전환하여 군비를 크게 감축했더라면 오늘날 북한은 최소한 동유럽의 개발도상국이나 쿠바 수준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최빈국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북한만큼의 배경과 지원을 받고 있던 국가들 중에 오랜 삽질 끝에 가난한 처지로 전락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최빈국까지 떨어진 경우는 북한이 유일무이하다. 최소한 한국의 독재자들은 그 평가와는 별개로 한국이라는 국가의 공업화, 근대화를 시행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외교 문제에도 열심히 뛰어나녔으나, 북한의 지도층은 오직 자기 배 불리기에만 열중하고, 외교 문제에서도 줄타기를 통해 (국가가 아닌 지도부)자신들 이익 챙기기에만 몰두했다.

북한이 얼마나 답이 없는 집단인지를 알고 싶으면 이 글을 참조.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한 경제가 과거에 비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북한에 왕래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이나 통계상으로도(북한의 통계를 정확히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수치는 추정치임.) 확인되는 사실. 김정은이 2012년 6월 28일 기업의 자율성을 허용하고 시장을 확대하는 내용의 '6·28 조치'와 2014년 5월에는 기업 경영 자율권을 더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개혁, 개방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는 데다 중국과의 교역등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실제로 2011년 이후 중국에 석탄 수출로만 50억 달러를 벌었다고 하며, 민간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의 신창훈·고명현 연구위원은 북한 정권이 북한 주민들을 해외에서 강제 노동을 시켜 연간 12억~23억 달러(약 1조3000억~2조6000억원)의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 애초에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경제 규모에서 한강의 기적급의 초고속 성장이 아닌 이상 성장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그 성장이라는 것이 추정치지만 GDP 대비 1% 성장 안팎이다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의 7% 이상의 고도 성장은 당연히 아니며 경제가 포화상태인 선진국들 또한 압도적인 GDP 1~3%대 성장으로 차이를 벌리니 사실상 의미가 없다.

현재의 북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말은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하고 있다"랑 동의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애초에 김씨 왕조 스스로가 나라의 성장판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으니 최빈국 신세를 벗어날 만한 성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장마당 묵인 등 이전보다 다소 개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차피 막지 못하는 걸 그냥 방치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는 하부에서의 극단적인 빈곤 상황을 면하고 보여주기 식으로 임시방편으로만 행해지고 있을 뿐 중앙 권력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김씨 왕조를 외부에서 붕괴시키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이 변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열병식이나 당대회를 여는데 1조원 넘게 돈을 쏟아 붓고있다. 이는 북한예산의 1/6~1/3 정도 된다고 한다.

4.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북한/경제제재 문서 참고.

5. 관련 문서


  1. [1] 미국의 마셜 계획에 대응하는 것으로, 소련이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에 무제한적인 물자 · 기술 지원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문화적인 교류와 학술 교류도 이루어졌다.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은 국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2. [2] 중국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했다.
  3. [3]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돈이 안 되는 학문의 육성에 인색하지 않은 것은 과학 분야에게 있어선 장점이라고 한다. 특히 방위산업 기술 이전과 직접생산면에서 한국이 미국에게 받은 대우와는 정반대.
  4. [4] 참고로 남한은 1974년에 수도권 전철 개통
  5. [5] 산에 나무가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다 흘러내리고 저장이 안된다.
  6. [6] 그러나 원산에 대한 이러한 투자는 김정은이 어릴 때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김일성이나 김정은처럼 자신의 우상화 일환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많기도 하다.
  7. [7] 20~30층짜리가 아니다. 만수대에 새로 건설된 아파트들은 기본이 40층, 가장 높은 건물은 60층이 넘는다.
  8. [8] 주로 북한 당국에서 소지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외제품들. 특히 남한 물품.
  9. [9] 일본은 20년 넘게 생활수준이 정체되었지만 그래도 유수의 선진국이며 러시아는 1980년대 중반부터 생활수준이 저하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지만 2000년대에 그럭저럭 회복된 상태다.
  10. [10] 자력갱생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다. 맨바닥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쌓아가 최종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산업화, 공업화가 달성된 후에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다. 선진국 중에서도 골고루 산업, 공업, 서비스업 등을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나라는 매우 적다. 미국/서유럽/일본/한국 등을 제외하면 인구가 적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자원 관련 산업 비중이 크거나, 1차 산업 중심이거나, 혹은 아직 발달하지 못한 공업/산업이 많은 경우가 많다. 당연히 한국/일본/서유럽 등이 이걸 피와 땀을 흘리며 일궈낸 것이지, 공짜로 이룩해낸 건 아니다.
  11. [11]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처럼 소련보다 발전된 국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국가들이 해당된다.
  12. [12] 덕택에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보리스 옐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최악이며, 타 동구권 국가에서는 그보다 사정은 나은 편이지만 1995년 폴란드 대선에서 레흐 바웬사가 재선에 실패하고 공산당이 재집권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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