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 모바일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image]   상위 문서: 북한

[image]   관련 문서: 경제학, 국가별 경제, 경제 관련 정보

북한의 경제 정보

[image] [1]

[image]

[image]
[2]

[image]

인구

25,491,000명

2017년, 세계 51위

GDP

$173억 9,600만(2015년 기준)

2015년, 세계 113위

GDP(PPP)

$400억

2015년, 세계 114위

GDP 성장률

3.9%

2016년

무역규모

65억 5000만 달러

2016년

1인당 명목 GDP

$648

2016년, 세계 176위

1인당 PPP GDP

$1,700

2015년, 세계 184위

3)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 대한 당의 령도를 확고히 보장하며 국가, 경제 기관 및 근로단체 일군들은 당에 철저히 의거하고 당의 지도밑에 모든 사업을 조직집행해나가야 한다.

당의 유일적 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 9조

1. 개요
2. 역사
3. 북한의 국내총생산 (GDP) 현황
4. 산업 구조
5. 북한/지하자원
6.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7. 북한국채 문제
8. 북한의 경제 개혁,개방
8.1. 개요
8.1.1. 중국식 개혁, 개방
8.1.2. 베트남식 개혁, 개방
8.1.3. 쿠바식 개혁, 개방
8.1.4. 사회주의 포기후 러시아, 동유럽식 개혁, 개방
9. 특징 및 문제점
9.1. 대한민국과의 차이
9.2. 중국의 원조
10. 평가
11. 하위 문서
12. 관련 문서

1. 개요

남북한 경제 비교

동아시아 권역은 세계를 통틀어 북미, 북서유럽, 호주 다음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하며, 역내 경제력 역시 북미, 유럽연합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특히 20세기 들어서 꾸준한 경제성장을 토대로 대표적으로 일본이 강대국이자 선진국으로 진입하였고, 한때 그 식민지였던 남한도 지역강국이자 선진국에 도달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도(아직 1인당 소득 수준은 많이 낮지만) 엄청난 인구를 바탕으로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중화권의 부속 지역인 홍콩이나 대만은 선진국 못지 않은 소득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북한의 경제력은 같은 동아시아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놈의 선군정치 때문에 치안이 안정적인데다 급변사태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매일같이 쿠데타가 일어나고 정부군, 반군, 민간인을 구분조차 못할 수준의 극빈국들의 경제사정과 나란히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에나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한 중국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한보다 몇발 빠르게 경제성장을 시작했으며, 심지어 일본이나 대만과 비교해서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시기가 그리 늦지 않았고, 교육수준은 비교적 높고 인프라도 일찍히 갖추웠던 편이었고 이 때문에 1970년대까지는 동아시아권에서는 나름대로 잠재력이 있던 국가로 손꼽혔다.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너무도 일찍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90년대 중후반에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기까지 하면서 후발주자인 중국에게도 월등히 밀려버렸다.

북한 경제의 심각성은 누구나 다 알지만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다소 모호한데, 예를 들어 CIA WORLD FACTBOOK(2013)에 따르면 북한의 1인당 GDP는 약 1200달러로 파키스탄(1300), 카메룬(1200)과 비슷한 수준이며, 캄보디아(1000), 아프간(700)보다 위라고 나오는 반면, IMF(2013)의 자료를 보면 북한(583), 아프간(678)로 아프간이 위이다. 이 같은 오차는 북한 경제의 불투명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다만 그렇다고 해도 조사기관 모두가 공통적으로 북한이 세계적인 최빈국이라는 점은 뜻을 같이하고 있고 특히 북한이 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저 비교 대상으로 꼽히는 국가들은 보통 주변이 정치적이나 민족적,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쿠데타나 내전 혹은 전쟁이 밥먹듯이 일어나는 불안정 지역(서남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인데,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로는 단 한번도 전쟁이나 반란같은 것도 없었고 주변 국가들이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나같이 최소한 먹고 살 만한 수준은 되고 그만큼 안정적인 이웃들을 두었음에도 저런 파탄국가들과 비교를 당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할 수 있다.

해당 문서를 작성하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간혹 북한의 문화에 대해 어설프게 배운 사람들 중에는 "북한은 특성상 자본주의 국가를 지향하지 않고 극장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북한을 가난한 국가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다른 국가들의 사례는 전혀 연구하지 않았을 때나 할 수 있는 주장이다. 현재 지구에는 북한 외에도 투르크메니스탄이나 바누아투 등 "극장국가"로 분류되는 국가들이 몇 곳 더 존재하지만 이들 중에서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일반적인 착취의 수준을 넘어 완전히 방기하고 매년 아사자가 속출하는 단계까지 온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

당장에 이런 극장국가들 중 초대 대통령의 온갖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던 투르크메니스탄만 해도 $8000 정도의 소득으로 굳이 극장국가로서의 특수성을 배제하더라도 이미 중진국으로는 분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극장국가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는 바누아투의 경우도 문서 상으로는 $2000 정도 소득의 빈국으로 분류되지만 만일 바누아투 내에서 성행하는 물물교환식 경제를 포함한다면 실제로는 이미 중진국이 맞다는 것이 중론이다. 결국 북한의 상황은 다른 극장국가들과 비교하더라도 압도적으로 문제가 많은 상황이며, 국가 설계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그냥 국가 경영 자체가 실패한 상태로 보아야 한다.

2. 역사

해방 직후 당시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공업화의 수준이 월등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 비록 전쟁을 거치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1950-60년대에는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고 남한을 능가하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70-80년대부터 경직된 계획 경제 체제의 단점이 드러났고 80년대 후반-90년대 전반 들어서는 서서히 주춤거리더니 1990년대 중반에 고난의 행군을 선포, 순식간에 배급도 안 나오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이는 그 후 자생적인 시장(일명 장마당)이 발전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사정이 그나마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1. 1940년대

북한 경제의 태동.

한반도 북부에는 일제 강점기 이래 일본 산업재벌로부터 막대한 중화학 공업 투자가 이루어졌었다. 1918년 일본제철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였고, 1930년대에는 일본질소비료[3]에 의해 당시, 그리고 광복 무렵까지도 아시아 최대의 화학비료 공장이었던 흥남비료공장이 세워진다. 또한, 일제는 압록강에 여러 수력 발전소를 건립해서 만주국한반도에 전력을 공급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수력 발전소는 다름 아닌 수풍수력발전소였다.

하지만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일본은 그동안 생산해놓은 막대한 양의 전략 및 보급 물자, 그리고 이것들을 생산하던 공장들을 고스란히 남겨놓은 채[4]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그대로 접수한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러한 경제적 배경을 내세워 토지 개혁을 밀어 붙이는 데 성공한다.

한편 남한은 농업이나 경공업 분야로만 철저하게 발달되어 별다른 중공업지대나 심지어 발전소(!)조차 변변찮아서[5] 북한으로부터 받아 쓰는 형편이었다.[6] 이 만성적인 전력 부족 현상은 미 해군의 발전선이 인천에 정박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7]. 심지어 이 당시 남한은 일제의 패전으로 엔화 블록이 박살이 나면서 그나마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던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이 크게 휘청거렸다!

또한 북한은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일본인들 중 기술자들을 1948년까지 억류해 그들의 노하우들을 강제로 전수받았고, 이와 동시에 일본이 만들어 놓은 군수공장에서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과 같은 기초 병기와 탄약들을 생산해 남침 준비를 하였다. 물론 남한에도 조병창들이 몇몇 있었는데 이조차도 암암리에 불법 화기를 생산할 것을 우려한 미군정이 철저하게 없애버려 이러한 기초 화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한 시기는 무려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가능해졌다.

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해방 직후 북한에 남은 일제 시절 설비들이 당시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서 대규모로 반출, 약탈 당한 과거가 있다. 1945년 12월 소련 외무부 극동 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에 그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보고서는 ‘북조선의 군수중공업 공장들은 붉은 군대에 대항해 싸운 일본군을 위해 봉사했고 또 붉은 군대의 엄청난 희생으로 쟁취한 것이므로 전리품으로 보아야 한다’고 규정했으며, 소련은 북한 주민들의 생필품까지 모두 공출해갔다. 1947년 미국의 앨버트 웨드마이어 육군 중장이 대통령 특사로 방한했을 때 북한에서 넘어와 서울에서 활동하던 조선민주당 인사들이 전달한 ‘북조선실정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45년 말까지 소련이 북한으로부터 빼앗아간 물품은 7억∼8억달러에 이르며, 거기에는 쌀 250만섬, 소 15만마리, 돼지 5만마리 외에 북한주민들의 은행예금 까지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 거기다 이 보고서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3대, 원산 석유회사 및 청진 제철공장과 제련소의 모든 기계, 함흥 화학회사의 6만kW짜리 변압기도 소련이 가져갔다고 적고 있다. 실제 수풍발전소 발전설비 철거는 미-소간에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는데, 1945년 11월 미국이 항의각서를 전달하자 소련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수풍발전소에 남아 있던 일본인 기술자는 수풍발전소 발전기 제3, 4, 5호기가 철거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출처 당시 소련군이 자행한 북한 지역에서의 산업분야 물자 및 산업시설에 대한 약탈 목록.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북한 또한 일제의 물적 유산들을 통한 근대화 덕은 거의 못 봤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2.2. 1950년대

잿더미, 그리고 부활.

그런데 이러한 산업적 기반은 한국전쟁 당시에 박살이 나고 만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화학 콤비나트였던 흥남 지역은 미군의 온갖 포화로 거의 초토화되었으며, 황해도 송림 지역에 있던 겸이포 제철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때문에 맨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경제적 지원은 2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동유럽권 국가들을 원조하기 위한 소련몰로토프 프로그램[8]이었으나, 북한도 이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지정받는다.[9]

사실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치하에서 신화적인 공업화를 이룩한 바가 있기 때문에, 당시 소련과의 교류는 북한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한의 많은 인재들이 소련에 유학을 하면서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워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초토화된 북한의 산업 기반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재건했으며, 특히 흥남질소비료공장의 경우에는 이전 시기보다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다. 당시 북한의 산업화 정책은 초기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유사한 선중화학공업 노선이었기 때문에 북한은 심지어 국방비를 줄이면서까지 돈을 들여[10] 제철소, 조선소, 화학 공장 위주의 산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경제발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조금 뒤의 일이지만 이때는 "한국의 기적"이 남한의 경제발전 과정을 뜻하는 말이 아닌 북한의 경제발전 과정을 뜻하는 말이었을 정도였다. 오히려 당시 남한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가난한 농업국가였다.

더불어 인민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도 이루어졌는데 이는 때가 아직 "농민과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 지상락원"의 선전선동이 사람들에게 먹혀들던 시절이었는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단기적으로는 꽤 효과적이었다.

2.3. 1960년대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건설.

1950년대 후반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자, 북한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양쪽과 적절히 거리를 두며 양쪽 모두로부터 꿀을 빠는 외교 정책을 구사한다. 선진 기술과 산업을 갖춘 소련으로부터는 설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공업이 아직 발전하지 않은 중국으로부터는 원자재나 식료품을 들여오게 된다. 또한, 50년대에 기초를 닦은 중화학 공업의 기반을 바탕으로 경공업 발전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까지는 북한 정권 내에서 선군노선이니 군수공업이니 하는 소리를 하는 세력이 그렇게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순수한 민간 경제 부문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50년대까지는 소련 중심의 원조를 받게 된다면,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원조 국가의 다변화가 이루어진다. 동유럽 지역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재건되면서 이들의 지원이 시작된 것. 60년대부터 북한은 기초 과학 분야[11]와 최신 산업 기술들을 단순히 전수받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술로 체화하는 과정을 들어서게 되었다. 남한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 과학 기술 인재의 싹을 육성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을 생각한다면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빠른 것이었다.

북한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광풍이 불고 있는 당시 우회적으로 이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였고 66년에는 사상적인 독립을 꾀하고, 69년 중소 국경 분쟁 때는 어느 쪽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을 택하면서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만 챙기는 정책을 택한다.

2.4. 1970년대

황금기이자 전성기. 그러나 몰락의 단초가 착실히 쌓이던 시기.

북한 스스로도 이 시기를 황금기라 칭한다. 1960년대 닦아 놓은 경공업 기반을 바탕으로 어느정도 생활을 할 수 있었고, 1970년대 초반부터는 농업 기계화를 추진하게 된다. 사실 이 농업 기계화는 소련에서 1950년대 중반 부족한 식량 생산을 극복하고자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초원 지대를 대규모 농토로 개간한 것에서 기인한다. 북한도 이에 자극 받아 농업 기계화를 추진한 것이다. 본래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각종 농기계의 생산을 위한 기술 이전을 받으려 했지만 소련이 1960년대 중반부터 기술 유출을 통제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선회하면서 기술 이전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농기계 생산을 자력갱생하려고 했고 수년 간의 노력 끝에 조선형 뜨락또르(트렉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같은 농업 기계화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농업 생산량도 북한 내의 수요를 충족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고, 또 어획량도 상당히 많아서 명태를 무상 배급할 정도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광물을 수출하고 받아온 꽤 고급스러운 동유럽제 상품들이 제한적으로나마 풍족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스웨덴에서 볼보 자동차도 들어왔을 정도[12].

이러한 북한의 경제 발전으로 1973년까지는 남한보다 1인당 GNP가 높았다. 다만 구체적인 추월 년도는 지표마다 다르다. 가령 이헌창의 한국경제 통사에서는 60년대 후반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소득분배나 사회보장은 북한이 좀 더 오랫동안 우위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1973년에 남한보다 1년 일찍 평양 지하철을 개통시켰고, 1974년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하기도 했다.

아시아에선 컬러 TV 방송을 일찍히 한 국가는 당시 경제가 많이 좋은 편이던 일본필리핀이었다. 여담으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처음 시작된 것은 미국이지만 방송 전부를 컬러로 송출한 것은 소련이 처음(1968년)이었다. 소련은 인테르비데니에(Интервидение)라는 소련-동유럽권에 이르는 거대한 컬러 텔레비전 표준을 제정하고 컬러 텔레비전을 그야말로 찍어내면서 컬러 텔레비전의 보편적 일반화는 사회주의권에서 먼저 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1970년이 되기 전에 정규 컬러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고 적어도 70년대 초반에는 컬러 방송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74년도부터 전면 컬러 방송을 시작했는데, 사회주의권 사이에서는 너무 늦었다고 까일 정도였다. 실제로 남북 적십자회의 당시 평양에 파견되었던 남한 대표단들은 귀국해서 '평양이 서울보다 좀 발전한 것 같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허나 북한 역시 7. 4. 공동성명 등 대남 문제로 고위급 인사들을 여럿 남한에 파견했는데, 이들 역시 남한의 경제 발전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남한은 원래 경공업은 꽤 발전한 편이었고, 중공업도 슬슬 시동을 걸었던 시기였다. 특히 북한 경공업 제품의 질은 오히려 남한보다 떨어졌다. 생활의 질은 경공업에 좌우되는 바가 큰데, 남한은 북한보다 1인당 소득이 떨어졌던 그 옛날부터 경공업은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공업 구조는 한국전쟁 이전의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의 남농북공 정책에 기인한다. 1920년대 후반 폭발하는 공업 수요가 일본 본토를 넘어, 당시 조선 반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력(수력 발전)과 지하 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북부 지방에 중화학 공업 시설을 집중시키고, 남부 지방에는 농업과 중화학 공업 시설을 뒷받침 해 줄 경공업 시설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불균형한 공업 구조는 해방 이후 20여 년간 계속되어 왔다.

남한의 경우에는 이렇다 할 중화학 공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차관이나 투자금을 유치해서 중화학 공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경우에는 이미 남아 있던 시설과 인력이 당시 소련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과 결합되어 빠른 속도로 중화학 공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경공업만큼은 우위를 점하여 산업적 영향력을 독점하려는 소련의 공업 정책 탓에 경공업은 잘 발전하지 못했다. 경공업품은 일반인들의 단순 소비품이기도 하면서 중화학 산업의 1 · 2차 원료이기도 해서 경공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중화학 공업에서의 기득권 역시 함께 쥐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의 이러한 공업 정책으로 많은 계획경제권 국가들은 그 국가의 역량 이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전했으나, 경공업은 중화학 공업보다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경공업 제품이나 생필품(비누나 샴푸 등)의 질이 떨어지거나 공급이 일시적으로 부족해지는 현상은 북한 뿐 아니라 동구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계획경제 국가들이 겪었던 문제이긴 했다. 60-70년대 들면서 여타 동구권 국가들도 경공업부분에서의 부진문제를 해결할려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1972)에 북한의 국가주석이 최용건에서 김일성으로 교체되어, 김일성의 일인 독재 체제가 확립되었고, 이 과정에서 민간 경제와 당 · 군 경제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즉, 한 국가의 경제 내에 군수 산업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군수 산업이 아예 따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의 등장 이후 이러한 경제 분리는 더욱 가속화 되어, 잠재적인 경제 성장의 배경을 저하하게 된다. 하지만 70년대의 경제 성장이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둔화의 조짐이 지표 상으로는 나타났을지라도 실제 주민들의 피부에는 와닿지 못하였다.

실제로 이 시기까지는 2017년 현재의 북한 상황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정도 삶이 보장되었으며, 이 시기를 살아온 경험이 있는 탈북자들은 이 시기에 실제로 인민락원이 왔다거나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었다 한다. 곧이어 폭망할 거라는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나 많은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음식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버리는 수준이었으며 교육, 의료, 의식주 등 거의 모든 부분을 국가가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았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은 그때 흥청망청 돈써서 지금 이렇게 못 산다고 불만을 터트린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상대적 의미가 아닌 절대적 의미에서 잘 살았다고 볼수는 없다. 아시아에서 제일 잘 살았던 일본조차도 1970년대에서야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고려하면 북한의 삶은 제3세계에서야 선두에 있었지 실제로는 서방세계는 물론이고 동유럽과 비교해도 국민소득은 매우 떨어졌다.

음식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한정적인 이야기로, 위에서도 언급된 명태 이야기다. 당에서 매해 생산량을 책정하고, 해가 바뀌면 또 반드시 그보다 많은 양을 목표로 잡아 주었는데 이는 성장 지표를 강제적으로 할당하여 외부에 과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걸 진짜 따라가고 아예 초과생산까지 가능했던 게 명태. 풍어였던데다가, 러시아에선 명태 소비가 별로 없어서 러시아 해역에서도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많이 잡아 오라고 하니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엄청난 양이 쌓이게 된다. 그러나 저장설비도 부족했거니와, 국가가 계획적으로 자급자족을 하는 게 목표였던 당시에는 '남는 걸 저장한다' 라는 것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가=당이 필요 생산량을 잘못 책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많이 잡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던 게 그렇게 많이 잡으면 목표 초과달성이 되고, 이런 것이 곧 김일성의 은혜로 풍어가 왔네 주민들의 충성으로 힘들어보이던 목표도 초과달성이 가능했네 어쩌네 하며 당의 선전에 필수적인 부분이었기 때문. 그리고는 그렇게 초과생산된 양을 목표량으로 잡고 그걸 또 강요하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걸 또 다 나눠준다. 하도 나눠주다보니 명태를 삽으로 퍼서 준다, 북조선엔 명태와 처녀가 넘쳐난다 라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나눠줘도 창고에 쌓이는 양이 더 많아 썩어버리는 일도 있어 그런 건 또 창고 단위로 꺼내다가 썩은 걸 분류하고 남은 걸 강제할당해서 분배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명태를 주는 대로 받아가야 다른 배급품을 주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할 정도. 다만 이 덕분에, 당시에는 명태 등으로 젓갈을 담아 판매하는 지금 남한으로 치면 반찬가게 비스무리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아직 소련도 팔팔했고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도 살아있던 시기였다.

게다가 이 시기 북한의 경제는 착실하게 몰락의 원인들이 쌓이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주체농법이라는, 90년대 고난의 행군에 기여한 사이비 좆문가 농법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이며 80년대 북한 3대 흑역사 중 하나인 비날론 같은 국력 낭비용 넝마짝의 개발과 양산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 막장경제의 한 축인 당과 군의 경제가 분리되는 정책도 이 시절에 수립되어 80년대에 가속화 된 것이다. 결국 70년대 북한의 경제는 미래를 저당잡아 단기적인 과시용 성과를 올리는데 급급한 것으로서, 동시기 대한민국이 철강,조선,자동차,전자기기,원자력 발전소 등 수십년 내내 먹거리가 되어줄 산업의 씨앗을 뿌린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산업들이 위기와 침체를 겪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주체농법이나 비날론처럼 국민을 나락으로 처넣을 정도의 부작용을 낸 적은 없다. 또한 애당초 태생부터가 개뻘짓이라 위기에 빠진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 북한의 정책과 달리 대한민국에 뿌려진 산업씨앗은 위기에 빠져도 적절한 개선을 통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가능성과 내공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수십년 동안 이런저런 부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을 먹여살리고 있다. 여기에 다른 새로운 산업이 시작될 수 있는 파생기술과 자본을 벌어다 준 건 덤이다. 요약하자면 북한의 70년대 경제는 더도 덜도 말고 딱 '날빌'이라고 보면 된다. 초반 저글링 올인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어쨌든 이제 이 짧은 '지들 나름대로의 전성기'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하는데...

2.5. 1980년대

서서히 막장테크로 들아가던 시기.

70년대 부터 진행된 당 · 군 경제의 분리는 더욱 가속화되어 민간 경제의 비율이 축소되었다. 북한이 투입할 수 있는 상당수의 자원이 당 · 군 경제에 투입되면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인 독재 체제의 강화로 사회적 분위기 또한 대단히 빠른 속도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사회주의의 종주국인 소련도 계획경제의 한계에 따라 경제적 활력이 떨어지면서 사회주의권이 전반적인 불황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석유파동[13]과 이자율 급증에 따른 외채 문제[14]는 이들 국가들의 경제적 부담을 부채질하였고, 이와 함께 북한의 대외 교역이 둔화되면서 경제적 대외 지표가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한다. 더구나 1968년 1월 23일 발생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으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이 '경제국방병진노선'을 천명하면서 국가전체예산 중 50%를 군수산업으로 전용하기 시작하면서 민간경제에 불안감을 끌어들였다. 이는 김일성이 소련의 원조를 기본 전제로 해서 예산의 비율을 이렇게 조정한 것인데, 앞서 말한 경제의 불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의 영향으로 소련이 제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만 전념한 나머지 북한에 대한 지원이 소홀해진 결과 북한의 경제는 그대로 구렁텅이행이 되고 말았다.

이 시기부터 이미 파탄의 씨앗이 뿌려지던 북한 경제의 기반이 본격적으로 위태롭게 된다. 대규모 정책 실패로 엄청난 경제적 자산을 날려버리게 된다. 특히, 북한의 고위 관료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특히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직격탄이었다는데, 북한은 1988 서울 올림픽보다 큰 국제 행사를 유치해야 한다는 강박을 받았는지 엄청난 규모로 행사를 열었다. 1988년 대한민국의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자 북한은 노골적으로 올림픽 개최 취소를 위해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방법을 바꿔 남북한 공동개최를 주장하는 등 대한민국의 올림픽 개최 방해공작을 많이 일으켰고, 결국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어 22,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초청 형식으로 동원했다. 이는 북한 측이 이들의 체류 비용, 항공권 비용 등을 모두 현금으로 일시납했음을 뜻했다.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에 대규모 정책 실패와 군비의 과도한 확장 등이 겹쳐진 결과 북한의 경제적 황금기는 종식되었다. 당장 일반 주민들에게 큰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 것은 아니었지만, 70년대의 나름 괜찮았다는 생활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북한의 경제 관료들은 축적된 외화를 이용해서 해외에서 원료나 상품을 구입해왔기 때문에 배급제가 정상 유지되었다.

당시 북한이 디폴트를 선언했다고 하지만 상당수 제3세계 국가들이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와 같은 다른 동구권 국가와 다르게 사실 경제적으로나 큰 혼란이 오지는 않았다. 정전이 일어나거나 하는 일은 아직은 벌어지지 않았다.

2.6. 1990년대 초반

폭풍전야.

이 시기에는 북한으로서는 여러 가지 불길한 징후가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소련의 붕괴는 물론이거니와 그에 따른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대혼란을 거치게 되서 북한이 의존할 대외시장이 거의 허물어졌을 뿐 아니라 중국마저 덩샤오핑의 노력으로 개혁개방이 실질적으로 체감이 되기 시작한 시기였다.[15]

1989년에 폴란드 첫 자유총선에서 자유노조가 압승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이루어지면서 북한 경제는 침체기에 빠진다. 다만 이 시기에도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외화로 원료나 상품을 해외에서 구입해 오는 정책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생활난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주요 교역국들이었던 사회주의 국가들(진즉 개방의 길을 걷던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사회주의를 고수한 쿠바 등은 제외)이 경제 · 사회적 이행을 거치면서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역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산업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의 수입[16]과 생산재의 수출[17]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연히 수많은 공장들이 멈추었고, 북한은 외화를 획득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김일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식량 배급은 반드시 지속해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에 단순하게 먹는 문제는 없었다. 다만, 화석 연료의 부족으로 정전이 발생하고 열차가 지연되는 등 경제난이 체감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과 동시에 북한이라는 국가 전체가 마비되면서 '계획경제'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부터는 본격적으로 현세의 지옥도가 열리게 되었다.

2.7.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국가가 마비상태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1995년 북한 지역에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말 그대로 현세에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 수립 당시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보다도 더욱 더 참혹한 수준으로 장대한 퇴보를 이룩하게 되었다.[18]

사실 1995년 북한에 발생한 자연재해는 전근대 시대의 국가가 아닌 이상 현대의 공공정부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19] 그러나 문제는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의 역량이 김일성 신격화, 김정일 우상화, 당의 결속과 정치적 숙청 등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는 붕괴되버리고, 중국은 문호를 개방한 시점에서 북한이 택한 세습 독재정치는 이미 고립된 북한의 외교적 입지마저 더더욱 악화시켰다.

김일성 생전에도 이러한 외교적 문제를 타개하고 싶었던 것인지 남북 정상회담을 거의 다 진행시켜놓았는데,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없던 일이 되버린다. 실제로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에 남한과의 대화를 원치 않았던 김정일이 김일성을 도발하여 뇌출혈이나 급성 심장마비를 유도했다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20][21]

내부적으로는 그나마 생산된 양곡을 배분하고 수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멈춰 선 것이 가장 타격이 컸다. 실제로 1996년 남포항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곡물이 산 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전력 공급이 중단되어 철도로 이 곡물들을 운송할 수 없어 항구 하역장에서 상당수가 썩어 나갔다. 1995년 황해남도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년보다 좋은 작황을 보여서 쌀 수확이 매우 많았는데, 이 쌀을 타 지역으로 보내고 타 지역에서 다른 물자를 들여올 교통 수단이 마비되어 몇 달동안 말 그대로 쌀만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해주시같은 경우는 오히려 쌀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은 쌀을 갖고 있음에도 아사자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또한, 김일성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집권한 김정일이 이러한 경제적 위기를 오히려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활용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은 더 커지게 되었다. 보통 경제적 위기가 닥치면 집권자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 보통인데 김정일은 식량을 자신이 직접 통제하면서 자신에게 충성하는 계층이나 자신의 정권을 보위할 군 위주로 배급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정일의 권력은 공고해졌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1994년 6월까지만 해도 1인당 쌀 배급량은 600g 내외로, 한 사람이 최소한의 영양을 섭취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에는 쌀 배급량이 500g 내외로 줄더니 1995년 3월에는 350g 가량으로 급격히 줄어들며, 그 이후에는 아예 배급이 중단되었다. 어느 정도의 인명피해가 있었는가 하면 심화조 사건 문서에도 서술했지만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였다.

이처럼 식량, 에너지, 원료 등의 공급이 거진 붕괴된 결과 노동력의 총량이나 질도 급감하여 전반적인 산업 활동이 저하되었고, 1997년에 이르러서는 군수 산업이나 당에서 직접 관리하는 경제 조직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경제 단위는 조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가령 1990년-1998년 북한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4.1%에 달했으며 동 시기 공장 가동률은 20%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일부 군수공업이나 김씨왕조가 관여한 특수 산업 등을 제외한 기존의 경제 전체가 거의 무너져 내린 수준. 북한 경제의 동향은 이곳 참조

단지 경제적인 면에서만 기능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 거의 국가 기능이 마비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탈북자들은 평양 주변 지역에서도 굶어죽는 사람들의 시체를 제대로 치울 인력조차 부족하여 발에 채이는 시체를 그냥 두고 걸어다녔다고 증언할 지경. 당시 북한에는 연료나 곡물을 수입할 수 있는 외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오죽했으면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는 북한을 권력유지를 위해 주민들을 일부러 굶기는 나라(…)로 분류한 바 있다. 2008년 북한 전역에 파견된 UN조사단의 인구통계학적 조사에 의하면 이 시기 아사자는 30~40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일찌기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시기 300만의 아사자가 나왔다고 발언한 적이 있었고 일부 언론에서도 100만명 이상의 인구손실을 주장하였지만, 통계청의 인구학적 분석을 통한 추정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 실제 평소보다 많이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33만명으로 추산되어 UN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지지하고 있다. 출처 보통 2~3%의 인구가 감소할 때, 그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고 5%이상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정권이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실제로는 1%만 감소해도 현세에 헬게이트가 열린 듯한 혼란이 벌어진다. 그런데 2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을 따른다면 북한의 인구는 10%이상이 감소하게 된다. 즉, 실제로 그만큼의 인구가 감소했다면 북한 정권은 진작에 무너졌어야 한다는 의미. 인구 감소와 국가 존망의 위기와 관련해서는 경신대기근 참고. 다만 아사자는 대개 고령층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아사자가 200만이라고 해서 당장 생산인구에서 그만큼의 공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가 있다.

다만 고난의 행군 등으로 인한 중장기적인 인적 자원 손실은 300만은 가볍게 넘길 수도 있다. 실제로 2015년 들어 북한은 아슬아슬하던 군 입대 시 신체 조건 중 키 항목을 폐지해버렸다. 또한, 이 시기 이후에 태어난 북한인들의 체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만일 당시 북한 정권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외화를 활용하여 일시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넘겼다 하더라도 이미 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되어 자본주의로 이행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를 고수한다면 또 다른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쿠바도 1990년대에 소련이 붕괴한 후에 상당한 경제난을 겪었으며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은 2000년대에 중남미에 좌파정권이 들어서고 중국이 급부상한 뒤의 일이다.

2.8. 2000년대

거듭해서 이어지는 고난.

2000년 북한 당국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일 뿐 실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난 직후에도 북한의 경제는 그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는 커녕 왜곡된 시장 경제 체제의 도입으로 오히려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

특히 북한의 경제 정책은 오히려 퇴보하여 GDP의 30% 가량을 군사 부문에 몰빵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 부문에 대한 투자는 어떤 경제적 부가가치가 창출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돈을 날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군이 강군이 된 것도 아니며, 사회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만 기형적으로 커져 사회적 안정성을 저해하고 있다.

90년대 말 집권한 김정일은 사회주의권이 없어진 대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혹은 적응한다는 선택지를 아예 배제한 채) 기존의 철권통치를 계속 유지해 나가며 국제 사회의 여러 압박을 겪게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국의 대북 압박이 심해지고 경제 제재가 가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봉쇄 조치의 목적은 김정일 정권의 목을 죄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시 북한 권부는 중국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이러한 제재를 교묘하게 빠져나갔으며, 제재의 피해는 북한 경제의 일반 부문과 하위 계층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이러한 제재로 인해 일반 교역이 상당한 타격을 받으며, 북한 내에서 생산된 제품이 해외로 수출되는 것이 원천봉쇄되었고 해외에서 돈을 주고 곡물을 반입하려고 해도 상당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시장 경제는 북한 내부의 주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일단 장마당과 같은 의사자본주의(擬似資本主義)적 요소를 통해 북한 주민들은 배급 이외의 방법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곧 북한 주민 개개인이 경제적 활동을 해야 함을 의미했다. 본래 사회주의 국가는 개인마다 국가에서 지정한 직장이 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가 외형 상 유지되는 가운데 주민들의 실질적인 생계 수단이 변경되면, 직장에서도 일을 해야하고 다른 생계수단에도 종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

사실 동유럽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상당수가 자본주의로 이행될 때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가 직장 지정 제도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러한 것은 곧 사회주의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인 북한에서 자신들의 정권의 골간을 이루는 체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정권의 포기와 다름 아니기 때문에 외형상 기존의 체제를 고수했던 것이다.

2.9. 2010년대

장마당의 발흥과 '돈주'들의 대두.

2011년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느리지만 확실한 변화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면, 김정은은 뭐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단적인 예로 김정일 시기 내각총리로 개혁개방을 추진했다가 군부의 반발로 실각한 것으로 알려진 박봉주가 김정은 시기 들어와서는 2013년부터 3년째 내각총리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김정일은 여러 차례의 핵실험과 한국에 대한 도발로 국제 사회의 지원이 완전히 끊겼음에도 알아서 먹고 살아라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심지어는 간헐적으로 장마당도 통제하여 더 먹고 살기 어렵게 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김정은은 사실상 시장 경제 체제를 인정하고, 장마당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제도권 아래로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또한 김일성, 김정일 시기 때는 일반인은 물론 간부들까지도 외화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했었는데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외화 사용 제한 조치를 거의 해제했다. 더해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비교적) 풍부한 부존자원과 노동력을 싼 값에 해외에 넘겨서라도 북한에서 필요로 하는 곡물이나 경공업품을 들여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또한, 김정은 집권 이후 큰 자연 재해도 없어서 북한 내 식량 사정도 김정일 때보다는 큰 폭으로 개선되고 있다.# 특히, 흥남비료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해서 비료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농업 기반이 워낙 심각한 수준으로 붕괴되어 아직 자급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확실시 김정일 시대보다는 식량 사정이 나아지고 있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4년에는 묵은 쌀이 아닌 햅쌀이 풀릴 정도로 작황이 좋았다.# 그러나 2015년 북한은 라선시가 쑥대밭이 될 정도의 자연재해로 인해 WFP에 의하면 식량수확고가 대략 전년 대비 17% 정도 감소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지속적인 관찰과 업데이트가 요구되는 부분임을 부가해둔다. 심각한 경제난과 기아로 인해 자연환경도 거덜난 상황이라[22] 홍수나 가뭄 등에 극히 취약한 상태라 일시적인 풍작을 결코 희망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상황인 것.

이와 함께, 김정일 시기의 개발 투자는 평양 및 수도권에 국한되었으나,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평양권뿐만 아니라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방 개발에도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발표된 지방 13개 경제개발구 지정과 2015년 원산공항 현대화 재개장이며, 특히 원산은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 지정, 원산공항 현대화, 송도원지구 정비 등 김정은과 김여정의 출생지라는 추측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투자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원산에 대한 이러한 투자는 김정은이 어릴 때 살았던 지역이기 때문에 김일성이나 김정은처럼 자신의 우상화 일환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김정은은 자신의 고향을 양강도 삼지연군으로 날조하려 한다고 한다(...). # # 아무래도 그놈의 '백두혈통' 선전을 위해서인 듯.

여기에 자율경영관리조치를 도입하여 독립채산제를 강화하는 조치로 김정일 시대에 완전히 멈춰섰던 지방의 공장들도 다시 가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즉 과거에는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가장 중앙 통제가 심했던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기업들이 원자재의 수급과 생산물의 유통에 엄청난 제약을 받았으나, 자율경영관리조치로 각 산업체가 자율적으로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치와 함께 공장에서 출고하는 상품의 단가를 국정 가격이 아닌 시장 가격에 출고할 수 있도록 하게 되면서 급료공시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었다.#

한편, 김정은 시기에 들어 외화[23] 갖고만 있다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외화 상점 등을 평양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에 만들고 있다. 이러한 외화 상점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평양에 있는 해당화관으로, 거의 호텔 아케이드 수준을 보인다. 평양 이외에 지방 도청 소재지나 국경 무역도시에도 이런 고급 외화 상점을 계속 개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외화 상점의 개설은 그동안 북한 내 부유층이 쟁여두고 있던 외화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로써 외화가 시장에 돌아 경기가 활성화되고, 가장 결정적으로 국가는 그 외화를 회수할 수 있다. 현재 북한 내부 부유층의 소비생활에 대한 증언.

또한, 국가 주도로 건설 붐을 일으키고 있다. 김정은은 그동안 중하위권 대학으로 인식되던 평양건설건재대학을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승격하고 자신이 스스로 이 대학의 명예 총장까지 하면서 대대적인 건설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건설 활성화는 개발독재기의 남한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북한처럼 낙후된 국가에서는 경기 부양에 매우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다. 김정은의 지시로 평양에는 수십 층[24]짜리 아파트가 계속 들어서고 있고, 여명거리 신도시나 위성과학자지구같은 신도시도 생겨나고 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건설 경기 부양은 지방에도 파급되어 주요 대도시를 중심으로 새로운 아파트들이 지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주택 거래를 암묵적으로 허용하여 부동산 시장까지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 김정은이 려명거리 같은 건설사업을 벌이는 비법

2016년 연초에 4차 핵실험에 따른 제제 논의 중 이를 비웃듯이 광명성 4호를 발사하는 어그로를 끌면서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와 중국의 뒤통수 마저 때린 것이 역린으로 작용하여 매우 강력한 제제가 실행되었으며 이로 인해 붕괴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경제적 부담감을 떠앉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적어도 북한의 -4%의 성장률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었으나, 오히려 근래 들어 가장 높은 3.9%의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억압되있던 시장을 그나마 자유롭게 풀어준 효과로 보인다.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최가 예정되어 있다. 김정일 시대 사실상 정지되었던 조선로동당 내 회의기능을 되살려 자신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김정은의 방식을 감안하면, 이번 제7차 당대회에서는 경제부문에서 중요한 강령이 언급,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핵-경제 병진노선'이라는 초병맛 방침을 제시한 북한이 제7차 당대회를 앞두고 제4차 핵실험이라는 엄청난 이벤트를 열면서 주민들에게 '강대국의 위상'을 선전한 만큼, 김정은은 7차 당대회를 통해 경제 부문에서도 기존에 비해 진일보해 보이는 정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인 상황이지만, 북한에서는 이를 얼마든지 '악랄한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의 잘못으로 돌린 후 꼭두각시 언론을 통해 업적만 떠벌리고 체제만 유지시키면 되는지라 추후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과 갱신이 요구된다.

다만, 이러한 경제 상황 개선은 어디까지나 현 북한의 체제를 유지시켜나가기 위한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김정일 시기 경제정책은 주로 시장에 대한 통제가 주를 이루었으나, 2009년 화폐개혁이라는, 그야말로 시장에 대한 완패를 경험한 뒤 김정은 시기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장경제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마당 정책을 통해 이러한 변화의 단면을 살펴보자면, 김정일 시기 북한은 수시로 장마당에 대한 폐쇄, 거래금지 등을 반복해왔으나, 김정일 시대 말부터는 국가에서 아예 장마당 구역을 지정하고 상인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구역을 경쟁 입찰로 임대하며, 정기적으로 상세를 받는 등 시장 경제를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가져왔다. 또한, 자유로운 외화 사용을 허가한 것은 북한 내의 기득권 층이 장롱 속에 숨겨두고 있던 외화를 유통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 외화를 국영 상업체에서 사용하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국가가 외화를 회수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정은의 이러한 시도 역시 그렇게 긍정적인 결과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데, 일차적으로는 결국 인민들과 간부들의 주머니에서 외화를 끄집어내서 국고로 돌리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김정은이 외화 금지를 풀어주기 전에도 이미 북한돈은 북한 내부에서도 가치를 거의 상실한 상태였으며, 이를 풀어준 것은 단지 외화를 시장에 더욱 노출시켜 국가가 긁이들이기 쉽게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이에 대해 위조지폐 등의 문제로 중국도 골머리를 앓고 있으며, 자금세탁에 쓰일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인한 외부 압박으로 결국은 다시 달러고 위안화고 외화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차적으로는 이것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과연 향상시켰는가에 대한 의문인데, 장마당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형편이 나아진 계층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공식적인 장마당은 여전히 간부들에게 자릿세와 상납금, 거기에 더해 뇌물을 찔러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여전히 비공식적 장마당과 '불온한' 물품들[25]이 거래되는 메뚜기 장 등은 존속되고 있으며 이런 곳에서 장사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도리어 더욱 내몰리게 된다는 것. 김정은 이후의 탈북자들은 오히려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할 것 없이 탈북욕구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남한에 대한 정보가 펴져나가는 것은 물론 체제에 대한 불만도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이라고.

[image]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북 주민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장사밑천을 뺏겼을 때 체제에 반감에 가장 많이 난다고 대답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인권정보센터는 "2000년대 이후 생존권, 교육권, 건강권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은 북한이 시장을 통한 식량과 필수 생활용품 구입이 용이해져 국제인권 A규약(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분야에서 상당한 인권개선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피의자와 구금자의 권리, 이주 및 주거권, 재생산권과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유권, 신념 및 표현의 권리에 대한 사건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것은 북한 주민들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국제인권 B 규약)는 여전히 심각한 침해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야기했다.#

북한의 시장경제 비율이 전체의 28%를 차지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2016년 10월부터 전력난으로 혜산-평양 철도 시간이 열흘 이상 걸려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에 들어서면서 돈주들이 나타나면서 100억 원대 자산을 가진 돈주만 100명을 넘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북한 경제 중심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로 개인수공업의 생산규모가 국가의 생산규모를 넘어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동진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에 따르면 북한의 월 평균소득의 격차는 월 평균소득을 기준으로 상위계층의 소득이 하위계층의 약 18배에 달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2013년 소득 상위 20%의 월 평균 근로소득이 하위 20%의 9배 정도였다.북한의 빈부격차가 대한민국보다 2배 심하다는 기사

2016년에는 북한이 동·서해 조업권을 중국에 팔아서 판매대금 7천500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정보당국은 "판매대금이 김정은의 통치자금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동·서해에서 조업하는 중국 어선 수는 실제 조업권을 부여받은 어선보다 더 많고, 마구잡이, 싹쓸이식 조업으로 동·서해 어족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북한 동·서해 조업권을 중국에 팔아

2017년에는 시장경제가 확산됨에 따라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2000년대 초 평양에서 좋은 집은 미국 달러 수천달러 정도이면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같은 집을 사는 데 최소한 10만 달러 이상은 주어야 한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부자들은 주식을 사거나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얻는 등 다양한 투자 방법과 수익을 얻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북한은 주식시장이 존재하지 않고, 은행에 맡기게 되면 찾을 수가 없어서 예금할 수도 없다. 결국 북한, 특히 평양에서는 부동산에 지나치게 많은 돈이 몰려들 수밖에 없다. 평양의 부동산 거품 또, 암호 화폐가 본격적으로 떠오르면서 2018년에 암호 화폐 거래소 해킹 가능성을 제시했다. 북한은 이미 대북제재로 받으면서 암호 화폐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화폐로 바꾸면 핵, 미사일 자금으로도 매력적이기 때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한다. 이미 2014년에 국내에서의 해킹 시도가 있다는 것이다.# 또, 암호화폐 해킹으로 최대 2억원 벌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내에서 고리대와 사채 빚을 둘러싸고 주민들 간 난투극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대북제재 등의 영향으로 북한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자를 제때 갚지 못하는 주민들이 늘고 있는 것에 따른 영향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통상적으로 채무관계를 정리하는 연말이 가까워지며 이런 갈등이 폭발하는 양상이다. 이런 상황이 최근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양강도에서도 고리대 업자들의 횡포로 주민들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현지 소식통은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고리대와 이자 돈을 빌려준 주민들이 돈을 빌려간 주민들의 집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으며 이자를 갚으라고 협박하는 실정이다. 북한 전역 고리대와 사채 빚으로 몸살

3. 북한의 국내총생산 (GDP) 현황

[image]

출처

근래에 북한의 경제성장률의 증가를 강조하는 기사들이 많아 북한 경제에 대한 희망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위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의 경제는 근래에 와서야 겨우 1989년도의 상황으로 복귀한 것이다. 즉 2011년까지만 해도 북한은 20년전의 자신들보다도 못 살았다. 최근의 소위 말하는 북한의 경제성장이란 결국 고난의 행군으로 망가진 경제를 20년에 걸쳐서 원상복귀시키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의 남한의 경제성장은 다음과 같다.

[image]

출처

2016년 전년대비 남한의 GDP 증가는 약 28.49 USD billon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최근 정체되었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국민 총생산의 증가폭은 북한 전체의 국민 총생산을 가볍게 능가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괄목할만한 예외라 볼 수 있으니 쿠바를 예로 들어보자. 같은 공산주의를 표방했고, 미국에게서 더 직접적이고 더 오래 경제 제재를 받아온 쿠바의 국민총생산은 다음과 같다.

[image]

출처

남한만큼의 경제성장은 겪지 못하고, 오래 경제 제재를 받아왔으며, 같은 공산주의 체제로 시작해 소련 붕괴의 영향 또한 피할 수 없었던 쿠바지만, 소련 붕괴의 충격도 상대적으로 휠씬 완만하게 피하고 오히려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보여오고 있다.

4. 산업 구조

북한/산업 문서 참고.

5. 북한/지하자원

매장량

단위

남한

북한

천톤

0.032

1~2

천톤

1.175

3~5

구리

천톤

41

2,155

연()

천톤

305

6,000

아연

천만톤

0.044

1~2

억톤

0.202

20~40

중석(텅스텐)

천톤

99

200~300

몰리브덴

천톤

10

1~3

망간

천톤

123

100~300

니켈

천톤

-

10~20

흑연

억톤

1,837

6,000

석회석

천톤

44.65

1,000

고령토[26]

천톤

69,281

2,000

활석

천톤

5,540

600

석면

천톤

511

13

형석

천톤

344

500

중정석

천톤

711

2,100

마그네사이트

억톤

-

30~40

무연탄

억톤

3.5

117

유연탄

억톤

-

30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6.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

북한/경제제재 문서 참고.

7. 북한국채 문제

[image]

OECD는 1998년 이후 추정치로라도 통계를 내는 것을 포기했다(…). 미국 재무부의 조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북한의 채무 규모는 30개국에 140억 달러 정도라고 한다.#

국가

액수(미국 달러)

중국

69억 8000만

러시아

11억

일본

8억

스웨덴

3억 3000만

이란

3억

독일

3억

프랑스

2억 8000만

태국

2억 6000만

오스트리아

2억 1000만

시리아

1억 4000만

스위스

1억

대만

8600만

정확한 액수는 북한 정부만 알고 있다. 동무는 지금까지 먹은 밥알의 개수를 일일이 기억합네까? 밥알이 뭡네까? 그나마 북한의 경제 규모를 통해 대략적인 채권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의 국채 문서 참고.

8. 북한의 경제 개혁,개방

8.1. 개요

서술한 필요가 있음

8.1.1. 중국식 개혁, 개방

서술한 필요가 있음

8.1.2. 베트남식 개혁, 개방

서술한 필요가 있음

8.1.3. 쿠바식 개혁, 개방

서술한 필요가 있음

8.1.4. 사회주의 포기후 러시아, 동유럽식 개혁, 개방

서술한 필요가 있음

9. 특징 및 문제점

[image]

9.1. 대한민국과의 차이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있었다. 그는 다른 부잣집에 높고 웅장한 3층 누각이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가 가진 것은 돈뿐이었으므로 곧 목수를 불러 똑같은 모양으로 3층 누각을 지어 달라고 했다.

목수는 기초를 다지고 벽돌을 쌓아 1층부터 지었다. 그것을 바라보다 의심이 생긴 부자가 달려가 목수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집이오?"

목수가 대답했다. "당신의 분부에 따라 짓는 3층 누각이 아니오?"

그는 급히 목수를 제지하며 말했다. "내게 집을 지어 주려면 내 생각에 따라야 하오. 나는 1층이나 2층 같은 건 필요 없소. 3층만 있으면 되니 3층을 지어주시오."

알고 보니 부자가 부러워했던 집은 집의 가장 위층인 3층 뿐이었고, 그가 지으려는 것도 그것뿐이었다.[32]

-백유경(百喩經) 中

김일성 집권기 북한은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개발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어? 대한민국(이하 남한)도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펼치지 않았었나? 그런데 남한은 적어도 선진국 말석에라도 올랐는데 북한은 왜 이 모양이지?"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 문단에서는 남한과의 차이가 벌어진 이유를 남북간 비교를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요약하면, 남한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세계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한 반면 북한은 경직된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살았기에 국가를 운영할 방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자본주의를 도입할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다가 소련 해체 이후 망한 거라고 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9.2. 중국의 원조

중국,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에 6억 위안 무상원조[33]

사실 중국이 손 놔버리면 북한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대로 무너진다. 그만큼 북한의 경제난이 극에 달해 있다. 김정은이 결국은 시진핑에게 복종해야만 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 물론 김정은이 떼를 쓰는 식으로 시진핑에게 한두번 개겨보긴 하지만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김정은시진핑의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중국북한에게 국가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나마조차 김정은네 집안 식구들 및 자칭 귀족이라는 핵심계층에서 거의 뜯어먹고 나면 나머지는 참으로 처참하다. 김정은시진핑이 적선해주는 물자들을 북한이 무너지지 않는 최소한의 선에서 자기가 먹어치우고 있는 상황이다.

기름도 정말 최소한만 지급되는데 그나마도 기갑부대에서 그걸로 전차를 굴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을 넘어서 목구멍이 상감마마인지라 그 기름을 착복해 팔아먹어서 하루하루 연명한다. 이러니 연쇄작용으로 전차를 못 굴린다. 공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형국으로 항공유를 해먹고 있어서 북한군은 소티가 아예 없는 형국이다. 한마디로 북한군공군은 빈 깡통이다.

다른 물자들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해서, 중국에서 정말 목숨만 연명할 정도로 최소한의 지원을 해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도 핵심계층에서 계속 해먹는 바람에 동요계층적대계층은 그야말로 하루하루 연명하기 위해 산과 들판을 떠돌며 식량이 될 만한 동식물을 박박 긁어모으든가 노략질을 하든가 하면서 힘겹게 살고 있다. 특히나 건설자재는 거의 다 착복해서 북한에서 뭔가 건물을 건설하면 거의 쓰레기 건물로 지어지고 그게 결국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흉물로 전락하고 만다.

10. 평가

사실 북한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이 정도까지 망할 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못해도 남한보다는 상황이 좋았고 소련, 중국같은 든든한 지원국이 있었다. 대개 냉전 붕괴로 인한 필연이었느니 하는 주장이 많고 외국의 제재 탓이라고까지 하지만 이들의 주장대로면 자력갱생한다는 나라가 외부 제재의 영향을 받았다는 모순이 성립된다.

당장 북한의 유일한 우방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조차도 개혁, 개방을 전혀 하지 않는 북한 정권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식의 발언을 많이 한다.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덩샤오핑이 "중국은 개혁, 개방으로 이렇게 발전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북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힐난했다가 김정일이 당장에 북한으로 돌아가 중국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리고 냉전의 종식은 1990년대의 일인데 이후 공산권 국가들은 모두 그럭저럭 제 갈 길을 찾았다. 우선 미국의 제재는 1993년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 개발에 착수한 뒤에야 시작되었고 경제제재가 있었지만 중국은 항상 교류했으며 한국과 일본도 상황에 따라서 경제 교류가 있었다. 따라서 북한은 경제 발전을 하고자 한다면 주변국의 지원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며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장 미국 본진 앞에 있어서 냉전 이후 외국과 교류가 다 끊긴 쿠바보다는 사정이 수십 배는 나았다. 하지만 쿠바는 경제발전은 미미했지만 적어도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할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북한의 몰락 원인은 100% 북한 자신에게 있다. 90년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자본주의 체재로 돌아선 것을 보고는 "우리 식대로 살자!"라고 더더욱 자력갱생에 열을 올렸다. 거기에다 북한은 소련이나 동구권의 자본주의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열악한 경제사정을 TV화면으로 주민들에게 보이며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시켰다. 사실 화면에 나온 것은 말 그대로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진 이른바 성장통이었음에도.

북한은 정말 허허벌판이었던 남한과 달리 서방 국가들과 비교해 봐도 상당한 수준의 공업력을 자랑하는 경제 대국이었고, 이는 1970년대 당시 서방 국가들로부터 대량의 돈을 빌리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을 정도다. 북한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가 운영했던 공장들도 상당수 있었기에 남한보다 더 경제적 성장이 수월했었다. 한국전쟁으로 산업 기반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는 하지만 전후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다 복구하고도 계속해서 많은 지원을 받아먹었으니 변명거리가 못 된다. 그에 비해 남한은 그만한 산업기반조차 없어서 당장 있는 것은 죄다 내다 팔 정도의 수준이었다.

물론 한국전쟁으로 한 차례 날아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보다 여전히 앞서 있었고, 여기에 내부 출혈까지 감수하는 공산권의 적극적인 지원은 그런 북한이 빠르게 전후 복구를 마치고 다시 살아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결과는 그 엄청난 삽질에도 불구하고 남한에게 1인당 GDP로 1970년대 중반까지 추월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1960년대 초 통일 운동의 내용을 보면 남한의 쌀과 북한의 철을 교환하자는 내용도 있을 정도.

북한의 성장이 빨랐던 이유는, 노동력 부족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1958년까지 주둔하면서 해결해 줬고, 경제적 지원은 같은 시기 남한의 두 배였으며 대부분이 생산 시설 등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것 들 뿐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남한미국에게서 생산 시설이나 그 기반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고, 밀가루 한 포대라도 더 얻어내려고 별의별 쇼를 다 했으며(그 유명한 반공십자군 파병 주장도 실상은 원조물자 뜯어내려는 노력의 일환), 일본과도 구상권 청구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게다가 미국은 원조를 어떻게든 줄이거나 없애려 안달이었고[34], 그 결과는 1950년대 말의 경제위기와 이승만 정부의 몰락이었다.

따라서 북한이 김씨왕조의 정신나간 자력갱생, 총력군비 정책 같은 걸 때려치고 라오스, 베트남처럼 현실적인 대외 무역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라도 세우는 한편 어차피 한-미가 북한을 선제 공격할 일은 없으니 방어 위주로 전력을 전환하여 군비를 크게 감축했더라면 오늘날 북한은 최소한 동남아의 개발도상국이나 쿠바 수준은 되었을 지도 모르며, 그게 아니라도 최빈국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북한만큼의 배경과 지원을 받고 있던 국가들 중에 오랜 삽질 끝에 가난한 처지로 전락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최빈국까지 떨어진 경우는 북한이 유일무이하다. 당장 밑의 한국만 봐도 역시 비판이 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국가의 공업화, 근대화나 외교 문제에 적극적이었거나 하는 등 나름의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이 무시못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북한의 지도층은 오직 자기 배 불리기에만 열중하고, 외교 문제에서도 줄타기를 통해 (국가가 아닌 지도부), 군사력 몰빵으로 협박질이나 하며 자신들 이익 챙기기에만 몰두했다.'

북한이 얼마나 답이 없는 집단인지를 알고 싶으면 이 글을 참조.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한 경제가 과거에 비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북한에 왕래하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이나 통계상으로도(북한의 통계를 정확히 얻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수치는 추정치임.) 확인되는 사실. 김정은이 2012년 6월 28일 기업의 자율성을 허용하고 시장을 확대하는 내용의 '6·28 조치'와 2014년 5월에는 기업 경영 자율권을 더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개혁, 개방에 무게를 실어 주고 있는 데다 중국과의 교역등에서 이익을 얻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실제로 2011년 이후 중국에 석탄 수출로만 50억 달러를 벌었다고 하며, 민간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의 신창훈·고명현 연구위원은 북한 정권이 북한 주민들을 해외에서 강제 노동을 시켜 연간 12억~23억 달러(약 1조3000억~2조6000억원)의 수익을 거둬들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 애초에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경제 규모에서 한강의 기적급의 초고속 성장이 아닌 이상 성장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그 성장이라는 것이 추정치지만 GDP 대비 1% 성장 안팎이다 현재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들의 7% 이상의 고도 성장은 당연히 아니며 경제가 포화상태인 선진국들 또한 압도적인 GDP 1~3%대 성장으로 차이를 벌리니 사실상 의미가 없다.

현재의 북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말은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하고 있다"와 동의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김씨 왕조 스스로가 나라의 성장판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으니 최빈국 신세를 벗어날 만한 성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장마당 묵인 등 이전보다 다소 개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차피 막지 못하는 걸 그냥 방치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변화는 하부에서의 극단적인 빈곤 상황을 면하고 보여주기 식으로 임시방편으로만 행해지고 있을 뿐 중앙 권력에는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김씨 왕조를 외부에서 붕괴시키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이 변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11. 하위 문서

12. 관련 문서


  1. [1] 뒤에 류경 호텔이 보인다
  2. [2] 지금은 폐쇄된 개성공단
  3. [3] 현재의 JNC. 명목상 본사는 도쿄에 있는데 핵심 제조거점은 쿠마모토미나마타시에 있다. 그렇다, 그 악명높은 공해병인 미나마타병의 원인을 제공한 회사다! 게다가 2차대전 당시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들을 착취한 전범기업.
  4. [4] 물론 이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것들을 최대한 반출하려 했으나 당시 소련 군정이 불허했다. 그런데 그 소련군이 대신 설비들을 대규모로 반출해갔다.(...)
  5. [5] 당인리화력발전소가 당시에도 서울 마포구에 있었기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남한 자체적으로 무연탄을 꾸준히 공급할 수단이 없었기에 제대로 된 발전은 불가능했다.
  6. [6] 때문에 1948년 즈음 북한이 요금 미납(...)을 이유로 일방적 단전(!)을 강행하여 남한에는 그대로 전력난이 발생했다. 격세지감이 정말로 느껴지는 부분.
  7. [7] 그 말은 한 국가의 전력 수요가 발전선 하나로 제법 해소가 가능할 만큼, 산업 및 관련 인프라가 심각하게 부실하여 전력 수요가 낮았다는 뜻이다.
  8. [8] 몰로토프 칵테일로 유명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계획한 원조프로그램이자 미국마셜 계획에 대응하는 것으로, 소련이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에 무제한적인 물자·기술 지원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문화적인 교류와 학술 교류도 이루어졌다.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은 국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소련의 강력한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9. [9] 중국은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았다.
  10. [10] 이상우, '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358
  11. [11]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돈이 안 되는 학문의 육성에 인색하지 않은 것은 과학 분야에서는 장점이라고 한다. 특히 방위산업 기술 이전과 직접생산면에서 한국이 미국에게 받은 대우와는 정반대.
  12. [12] 그런데 북한 정부는 2018년 현재까지 이 볼보 차량들에 대한 대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다(...). 스웨덴 측에서는 고지서를 보내기는 하지만 별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카더라(...).
  13. [13] 석유 수출국이었던 소련은 이때 재미를 꽤 보았다지만, 나머지 국가들은...
  14. [14] 윗 문단에도 잠시 언급되었지만, 이 시기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많은 외채를 지고 있었는데, 그 부담이 커진 것.
  15. [15] 사실 북한의 주된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가 일본 물품을 사서 중국에 파는, 일종의 밀수 혹은 중개무역이였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하는 강명도교수가 한 일이 바로 이런 일로 일본 중고차를 사서 중국에 파는 일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문호를 열면서 돈줄은 돈줄대로 줄어들고 정치적 입지도 정치적 입지대로 곤란해진 것. 심지어 중국은 남한과도 1992년 한중수교를 맺으며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다.
  16. [16] 특히 석유 수입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는데, 이는 북한이 석유의 대부분을 소련으로부터, 그것도 국제 시세보다 훨씬 싼 '우호 가격'에, 심지어 저급한 북한제 상품을 대금으로 하여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공중분해와 함께 중앙 정부의 지시(그리고 보조금)가 사라지자 러시아의 석유 회사들은 국제 시세에 따른 경화(현금) 결제를 요구했지만, 망조가 들은 북한으로서는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지금까지도 북한은 이 시절의 석유 수입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17. [17] 말이 좋아 수출이었지, 사실상 일부 광물이나 저질의 북한 상품을 떠넘기고 소련과 동구권에서 각종 제품을 받아오는 수준이었다고(…). 당시 북한 무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
  18. [18] 이건 농담이 아니다. 철도 운영만 놓고 봐도, 일제 강점기에는 1분 단위, 심지어는 30초 단위의 정교한 철도 운영이 이루어졌으나,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에는 정시 운영은 커녕 평양에서 청진까지 열차로 1달이 넘게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평균수명이나 1인당 GDP는 아직 북한이 일제보다 더 높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퇴보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9. [19] 북한학 전문가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의 '자연재해'가 바로 밑의 남한에 끼친 영향은 "배추와 양파 값의 소폭 상승뿐(...)"이었다.
  20. [20] 놀랍게도 실제로 전화 통화를 한 뒤 급격한 응급상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평양에서 수송헬기를 띄우는 등 응급처치가 고의적으로 지연된 것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정황도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21. [21] 김일성이 죽은 후 그 해 여름에 폭우가 끊이지 않아 홍수가 났고,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의 발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는데, 당시 현지에서는 이를 ‘김일성의 저주’로 불렸다고...... 김일성이 후계자이자 아들인 김정일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북한에 재앙을 불러왔다는 괴담이었는데 이러한 설은 주민들 속에 큰 공포를 불러왔다고 한다. 죽을 때도 곱게 안 가고 인민들을 끝까지 괴롭히는 혹부리 영감님의 위엄
  22. [22] 산에 나무가 없어 비가 오면 그대로 다 흘러내리고 저장이 안된다.
  23. [23] 달러, 유로, 위안 등. 다만 대한민국 원은 눈치가 보여서 아직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24. [24] 20~30층짜리가 아니다. 만수대에 새로 건설된 아파트들은 기본이 40층, 가장 높은 건물은 60층이 넘는다.
  25. [25] 주로 북한 당국에서 소지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외제품들. 특히 남한 물품.
  26. [26] 알루미늄이 함유되어 있으며 도자기의 원료이기도 하다.
  27. [27] 자력갱생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제다. 선진국 중에서도 1, 2, 3차 산업을 전부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나라는 정말 몇 없다. 한국만 하더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론상으로는 외부와의 무역이 중단되면 경제가 며칠 안에 바로 마비된다(…). 단, 여기에서도 우리 나라, 즉 남한은북한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데, 남한은 그런 와중에서도 전시 비상경제체제를 통해 굶어죽거나 얼어죽는 국민이 없게끔 최소한의 통제는 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는 온 공장과 회사가 죄다 멈춰서겠지만, 국내 비축된 우라늄과 탄광 채굴을 재개하고, 이를 통해 화력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를 다시 긴급 재가동해서 난방과 조명, 식량보존, 필수 공공 서비스와 국방, 교육시설 그리고 의료시설을 위한 전력을 자체적으로 재공급하고, 당장은 불필요한 중공업을 전부 셧다운 시킨 채 경공업에 부족한 에너지를 일부 돌려주는 식으로 생필품을 만들고, 전기차와 하이브리드를 제외한 대다수의 내연기관 도로교통은 정지하겠지만 전기철도를 통해 물자를 응급수송하고, 식량과 생필품을 배급제로 돌려가며 부동산과 증권시장을 동결시키는 식으로 일단은 상당한 수준의 장기간 월급은 끊겨도 비상경제 응급배급물자는 나오는 상태로 경제와 GDP는 시망해도 굶거나 얼어죽지 않고 모두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다. 하지만 북한은 어떠한가? 이미 다수의 국민들이 굶거나 얼어죽었었고, 현재도 굶어죽고 얼어죽는 중이다.
  28. [28] 특히, 대소의존은 북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공통된 문제로 소련의 막대한 잉여 공업 생산력+천연자원과 당시 미국에 필적하던 과학기술력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유고슬라비아, 중국 등 소련과 단절된 일부는 제외)을 먹여 살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경제적 파동을 겪으면 6개월에서 2년 후에 사회주의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29. [29] 덕택에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보리스 옐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최악이며, 타 동구권 국가에서는 그보다 사정은 나은 편이지만 1995년 폴란드 대선에서 레흐 바웬사가 재선에 실패하고 공산당이 재집권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30. [30] 다만 동시에 대외무역이나 장마당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는 계층, 일명' 돈주'들의 발흥으로 경제적 불평등도 동시에 심화되고 있다는 듯.
  31. [31] 임금의 70~90%를 중앙에서 떼어먹는단다. 이건 개성공단도 비슷했다.
  32. [32] 여기서 다른 부잣집을 기존 선진국들, 부자를 북한(내지는 김일성), 3층 누각을 중화학공업이라 보면 얼추 들이맞는다.
  33. [33] 중국은 북한에게 주기적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는데 저 6억 위안이 역대 최고 액수의 금액이다.
  34. [34]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원조라는 것도 사실상 자국민들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원토록 해줄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정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의 눈밖에 난 뒤였다.

분류

CC BY-NC-SA 2.0 KR(일반 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