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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alon/Vinylon

1. 개요
2. 특성
3. 역사
3.1. 리승기의 개발
3.2.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
3.3. 대 흑역사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3.4. 부활?
4. 이용
5. 비날론 남북합작?

1. 개요

비날론, 혹은 비닐론(일본명)[1] 1939년 북한의 리승기 박사가 당시 일본제국 교토 제국대학(현 교토대) 다카츠키(高槻) 화학연구소에서 사쿠라다 이치로, 카와카미 히로시 등과 함께 만든 세계 두번째 합성섬유다.

1935년 개발되어 1938년 발표한 나일론에 자극을 받아 나일론 발표 1년만에 폴리비닐 알코올(Poly Vinyl Alcohol; PVA)에서 개발했으며, 가볍고 질기고 화학약품에 강하면서 천연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이름은 김일성이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2. 특성

북한의 풍부한 석탄석회석[2]을 원료로 하는데다, 부산물로 각종 화학원자재가 나오기 때문에 공업과 연계되고, 자체발명 & 자체생산이라는 점이 체제선전에 좋아 김일성의 구미를 당겼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상징인 "주체섬유". 자매품으로 주체과 주체비료가 있다고 한다

“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김일성

풍부한 원료? 사실은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북한에 석탄과 석회석이 풍부한 것 자체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걸 제대로 활용할 능력의 상태가...

하지만 단점도 당연히 만만치 않았다. 대규모 생산시설을 필요로 했고, 제조단가도 너무 비쌌고, 제조 과정에서 원자재 못지 않게 많은 폐기물이 나왔다. 특히 생산과정에서 전기를 막대하게 소모했는데 수력발전만으로도 전기가 남아돌던 1950년대 ~ 60년대에는 그야말로 전기를 물 쓰듯 써도 괜찮았으니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는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학약품에 강한 특성답게 염색이 잘 되지를 않았다. 단순한 색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고 그나마 젖은 상태에서 다리미로 다리면 탈색되었다(...). 게다가 비날론 옷은 뻣뻣하여 착용감이 영 좋지 않으며, 너무 번들거리고, 쉽게 줄어든다.

좀더 화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디가 문제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비날론은 폴리비닐 알콜(PVA)을 베이스로 만든 섬유다. 여기서 문제는 PVA가 수용성이라는 것이다. 즉 처음 약품을 녹여두는 액체로 무기용매인 물을 쓴다는 것인데, 물은 산업용 용매들 중 상당히 건조 조건이 나쁜편에 속한다. 당장 신나와 물 중 어느쪽이 빨리 건조되는지만 생각해봐도...[3] 여러소리 필요 없이 물을 말리는 시간과 돈이 깨진다는 소리.

PVA는 수용성이라는 대부분의 여타 화학약품과 반응하지 않는다. 이 특성을 이용해 다른 용매에 저항성을 가지는 용도의 코팅이나 각종 공정에 유용하게 사용되지만 역설적으로 수용성이라는 범용수지로 쓸 생각을 해보면 시망이다. 근데 이걸 섬유[4]로 만들겠다고 했으니 실용성이 저 세상으로 가는 건 당연하다.

3. 역사

3.1. 리승기의 개발

1939년, 당시 리승기 박사는 '합성1호'라는 시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과학잡지‘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조광’(朝光)도‘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공학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에 12명에 불과했으며, 일본에서 제국대학 박사를 딴 인물은 2명 뿐이었으니 정말 드문 일이긴 했다.

그러나 비날론은 상용화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가 이미 중일전쟁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전쟁통이었기 때문이었다.

[image]

리승기 박사는 광복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나,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 담양으로 내려와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북한 산업성 부상 리종옥의 설득으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 출신 제자들까지 전원 같이 데리고 아이고오 월북을 해버렸다. 북한에는 아직 일제 당시의 산업 설비가 남아 있었고, 전력도 풍부했으며,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해주겠다는 마당에, 남한은 연구 지원을 해 줄 사정조차 안 되었으니 안 올라가는 게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당시 남한의 안습한 처지를 알 수 있는 대목.[5]

3.2.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

리승기는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 1960년 북한 과학원(평양)의 첫 번째 분원인 함흥분원을 설립해 함경남도를 산학협동, 비날론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

1950년대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1951년 첫 공업화, 1958년 공장 건설이 결정되었으며, 1961년 5월 드디어 양산화(연간 2만톤)에 성공한다.[6]

당시 1961년 흥남 비날론 공장은 4월 1일에서 5월 6일까지 36일만에 건설되었다. 또 이 건설을 독려하기 위해 돌격대를 조직했는데 이른바 ‘8·28돌격대’, ‘4·1돌격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때 벌어진 "비날론 속도", 속도전 운동은 하루 계획 목표의 3,500%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비날론 속도’라고 불렀다(...) 거꾸로 대입하면 35*36 = 1260일, 3년 반 동안 지어야했을 공장을 36일만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비날론 공업화의 반대는 1950년대부터 꾸준했다. 니트론(아크리라)이나 나일론을 만들어야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폴리염화비닐(PVC)을 지지하며 비날론은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한 려경구 박사[7]가 '귀족적인 섬유'를 지지했다며 사상검토를 받고 1977년 사망[8]으로써 결국 비날론의 승리로 끝났다. “비날론은 면(棉)에 가까워 아이들의 옷으로부터 어른들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섬유”라는 김일성의 논리였다.

황당한 점은, 비날론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목표는 주로 나일론과 나일론이 대체하고자 했던 실크(비단)나 양모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면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비날론이 원료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주체"적인 섬유(...)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슷한 예로 비스코스(인견, 레이온의 일종)가 있다. 목재나 갈대 같은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섬유이기에 역시 북한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역시 비스코스도 수분의 침투가 쉬워 자체 무게의 무려 13%나 흡수한다고 한다. [9]

3.3. 대 흑역사 -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그렇게 북한 높으신 분의 지시에 따라 기존 함흥에 있던 2·8비날론연합기업소의 2배 규모나 되는 평안남도 순천시의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를 1983년 4월부터 건설하며 경제성 없는 양산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니……. 경제사정 악화와 전력난, 자재 부족으로 인해 결국 이 공장은 1989년 1단계 공사를 끝낸 뒤 건설이 중단, 거대한 고철더미로 전락했다. 김일성이 승인했다는 이유로 겨우 실험실 규모에서만 성공시킨 ‘산소열법’공법을 수많은 과학자의 반대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대형 공업화한 것이 대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매몰비용만으로도 3대 흑역사 가운데 가장 컸으며, 가장 큰 100억달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경제성보다 사상을 앞세우는 북한이라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이었다.

노동집약적 증산을 위해 산을 무리하게 개간했고, 전력난과 연료난으로 역시 산을 무분별하게 벌목하는 바람에 90년대 들어서는 민둥산에 대홍수가 끊이지 않게 되자,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연이은 대홍수로 석탄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 건설이 중단된 순천공장 안의 설비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부터 중국에 고철로 몰래 팔렸다(…).

리승기 박사는 상당히 오랜 세월 후인 1996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향년 91세. 북한 망한 것까지 다 보고 사망했네[10]

3.4.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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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2000년 이후 10년 만에 재가동에 들어갔다.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은 인민들 입을 걱정이 없어졌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변이고 사회주의의 대승리"(...)라고 한다. 북핵문제처럼 보도해줄까 2010년대인 지금도 "주체섬유"란 이름으로 CNC 등과 북한 공업의 핵심으로 주장되고 있다(...).

비날론은 김정일이 주도한 실패작이다. 결국 이런 지시는 실제로 경제개발이나 인민의 삶에 생각이 있다기보다는 "변화는 없다. 개방은 없다"라는 상징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를 이어받은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

물론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결국 고철 상태로 방치 되다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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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철거하는데만 20년 가깝게 걸렸다

4. 이용

그래도 초기 주민들의 반응은 괜찮았는데, 그 전에는 조차 부족해서 갈대로 만든 조잡한 섬유로 만든 옷이 지급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남한같으면 한 트럭 거저 줘도 걸레짝으로밖엔 쓸 데가 없어서 안 가질 옷을 북한 주민들은 괜찮게 받을 정도면 북한 주민들의 의생활 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북한의 총 섬유의 60%가 비날론이라고 한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부산물로 폐기물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점. 결국 친환경 공정 산업으로도 불합격. 사실상 석유가 부족하고 석탄과 석회석이 남아도는 북한같은 환경에서나 만들 가치가 조금이나마 있는 섬유.

이제는 정작 그 북한에서조차 비날론을 걸레짝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농담이 아니고 수용성이라 수분 흡수가 좋아 정말 좋은 걸레짝(...)이라고 한다. 한 번 빨면 줄어들고 이물질이 묻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나. 그런데 옷으로 만들면 땀 흡수가 안 된다고 하니 아이고 참(...) 거기에 보온성도 없다고 한다. 이걸 어찌 해야합니까... 정말 북한같은 섬유네.

2010년대에 탈북한 사람의 입으로

"저도 북한에서 살면서 비날론으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셔츠나 동복이 나오는데 너무도 번들거리고 주름이 많이 가서 탄광이나 광산 같은 데서 노동자들이 작업복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산사업소들에서 배를 견인하는 밧줄로 많이 사용하였고 청소용 밀대를 만들 때 썼습니다."

라니 이미 버려진 것 같다.

5. 비날론 남북합작?

그런데도 여기에 가치가 있다고 투자하는 남쪽 사업자들이 있었다. 2001년 코리아 비날론의 경우인데, "비날론은 폴리비닐알코올 합성섬유 중에서 유일하게 물에 녹는데다 인체에 무해해, 인공 장기·건축자재·치료 등에 이용될 수 있는 미래형 소재”로 "완제품과정을 거쳐 액정표시장치(LCD)나 석면 대체용 고강력사 등의 소재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인공뼈 항암제 등 생명공학제품용으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여하간 섬유로 쓰진 않을 것 같다.

결국 북한에 우호적인 언론들에서도 후속 기사는 없었고, 당시 37살의 나이의 사장은 6년 뒤 고양시의원이 되었다(...) "남북한 간의 협력사업은 상당히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북한과 사업을 하면서 우리와 다른 시스템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회사 자금도 상당히 지출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을 보아 사업에 성공하지 않은 것 같다. 실패해서 빚더미에 안 빠진게 어디냐 국가도 말아먹게 하는 마당에

2001년 당시의 발언으로 재확인 해보자.

하지만 북한의 박사급 인력이 많아봤자 산업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사실이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쿠라시키 레이온, 닛신방적 등의 기업을 통해 유사한 섬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쿠라라이Kuraray사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일본의 비날론, 아니 비닐론은 석탄이 아닌 석유로 만든다. 그게 에너지 소비가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11]

다만 북한은 석탄 생산량이 높은 데다가 석유를 수입할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효율성 최악인 석탄으로 비날론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신문의 기자분은 비날론의 발명자나 비날론 공장이 북한 핵개발의 모태라고 알고 있는데……. 그런 거 없다. 이건 리승기 박사 개인의 행보를 오해한 것이며, 이북쪽으로 친다면 포항 제철소나 울산 석유 화학단지 등을 남한 핵개발 본부로 잘못 알고있는거나 마찬가지의 일. 우리도 이휘소 박사가 핵개발 한줄 아니까


  1. [1] 비날론이란 이름은 북한과 한국에서나 쓰이고, 일본이나 서양권등에선 비닐론이라고 한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항목명도 비닐론.
  2. [2]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얻은 카바이드.
  3. [3] 화학에 배경이 없는 위키러라면 알코올과 물을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주사를 놓기 전에 알콜솜으로 바른 알코올은 금방 증발되기 때문에 우리가 시원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양의 물이 그렇게 금방 쉽게 없어지던가?
  4. [4] 별거 아닌 듯 보여서 그렇지 화학섬유를 뽑는건 상당한 양의 수지가 가공되는 작업이다
  5. [5] 이때 월북한 박사 출신으로는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교) 공업박사 최삼열, 동경제대 농예화학 학사, 화학과 박사였던 김량하 등 111명이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 대부분이 월북 과학자였다.
  6. [6] 같은 해 리승기는 1961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까지 수상했으며, 1967년 부터는 영변 핵개발 연구소로 북핵 개발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화공과 출신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했을만한 일이었다. 물론 소장이니 직접적인 일은 안했겠지만. (여담으로 핵개발은 공학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며, 핵개발 낭설이 도는 이휘소 박사의 핵물리학 분야와는 오히려 관련이 적다. 항목 참조.)
  7. [7] 여운형의 5촌조카. 역시 와세다 대학교 화학과 박사로, 광복 직후에 경성대학(서울대) 교수로 있었으나, 여운형의 딸 려연구 씨의 증언에 따르면 여운형의 권유에 따라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월북했다. 다만 이 증언의 신빙성이 적다는 의견도 있다. 려경구 역시 리승기의 월북을 몇차례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리승기의 과학원 원사 바로 다음 급인 과학원 후보원사를 지냈다.
  8. [8] 자살설이 있다. 여담으로 나일론의 발명자 월리스 캐러더스(Wallace H. Carothers, 1896 - 1937)도 자살했다.
  9. [9] 그래서 비스코스는 때수건 원단으로 쓰인다(...).
  10. [10] 이거 상당히 비참한 건데, 결국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었던 비날론이 북한을 대차게 말아먹는 것에 크게 일조한 것과 자신이 등진 남한이 북한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성장한 것까지 전부 목도하고 가버린 것이다. 쌤통이다
  11. [11] 이는 2차 대전 이전 유럽-일본의 석탄 중심 전력 고소비형 화공업에서 미국의 석유 중심 화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당시 남았던 노구치의 흥남비료공업의 설비는 물론이고, 리승기 박사도 2차 대전 이후로 새로운 산업기술 업데이트가 안되었을테니(...) 업데이트가 되었다고 "수령님"이 들어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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