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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의 전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여주인공에 대해서는 이순신(최고다 이순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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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영정 (장우성 作, 1953년)[1]

성명

이순신(李舜臣)

출생

1545년 음력 3월 8일
(율리우스력 4월 18일)[2]

사망

1598년 음력 11월 19일
(그레고리력 12월 16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이씨

시호

충무(忠武)

여해(汝諧)

기계(器溪), 덕암(德巖)

평가

성웅(聖雄)

비고

사후 영의정 추존

1. 개요
2. 직위
3. 어록
4. 외모
5. 일대기
5.1. 연표
5.2. 사망과 논란
5.2.1. 면사첩 논란
5.2.2. 해상저격 논란
5.2.3. 유명 수군 도독 수여 시기 논란
6. 전투 관련
6.1. 참전 목록
6.2. 전술
7. 인격
8. 평가
8.1. 한국에서
8.2. 일본에서
8.3. 북한에서
8.4. 그 밖에
8.5. 인터넷상에서
8.6. 능력에 대한 저평가와 반박
9. 그 밖의 이야깃거리
9.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9.2. 대중문화에서
9.3. 파시즘과의 관계?
9.4. 역성혁명?
9.5. 화폐의 인물
9.6. 이순신체
10. 관련 문서
10.1. 인물
10.2. 사건
10.3. 같이 보기

1. 개요

성웅(聖雄)

"역대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를 따질때 반드시 등장하는 불세출의 명장.

한반도의 역사를 통틀어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

이순신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자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지휘관. 는 여해(汝諧)이며, 시호충무공(忠武公)이다. 전쟁의 (이순)신

충무라는 시호는 나라의 수호에 큰 공훈을 세운 이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호인데, 촉한제갈량, 남송악비, 조선김시민등이 이 시호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현대 한국에서 성웅(聖雄)[3], 명장, 군신이라는 수많은 최고급 수사들을 이름 앞에 보유하고도 그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보기 드문 위인이기도 하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 설문조사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늘 1, 2위를 다툰다.

여러 사람들의 모함과 질시, 부모와 자식의 죽음, 비인간적인 처우, 극한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 등 온갖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초인에 가까운 정신력과 전술, 전략적 능력을 발휘하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해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다.[4]

또한 함대의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5] 적국이었던 일본에서조차 사후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외국에서는 넬슨 제독과 비교되기도한다. 그러나, 아무리 놓고 봐도 이순신과 넬슨은 비교되기 어렵다. 일단 정부에서 주어지는 지원부터 달랐고, 넬슨은 명량해전만큼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투까지는 겪은 일이 없다. 따라서 서양의 전쟁사에서 충무공과 가장 유사한 활약을 한 존재를 그나마 찾자면 넬슨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 당시에 맹활약한 미 해군 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 함과 그 함에 배속된 모든 승조원 정도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6]

2. 직위

유명수군도독[7] 조선국 증[8]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9] 대광보국숭록대부[10] 의정부 영의정[11]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12] 덕풍부원군 (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13][14] 정헌대부[15]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兼 三道水軍統制使)

[16] 충무공 이순신 (諡 忠武公李舜臣).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이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받은 뒤[17], 해군 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해군 원수와 무임소 장관직 및 명예 부통령직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무임소 장관직과 명예 부통령직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되며, 대내외적 인정을 받기에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는 동급으로 취급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받은 최고위 계급과 유사한 국무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

조선시대에 이 충무공을 장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큰 실례였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당시에는 수군절도사, 나아가 정3품 이상의 무관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굳어지게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18]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제독으로 부르는 편인데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12번 문단에서 서술한다.

3. 어록

三尺誓天 山河動色 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19]


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주득쌍룡검 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 맹산서해의 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戰船雖寡 微臣不死則 不敢侮我矣 전선수과 미신불사즉 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 必生則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20]

- 명량 해전을 개시하면서.


此讎若除 死即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 願天必殲此賊 금일고결사 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마라.

-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21]


4.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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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서 세워진 이순신 동상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5. 일대기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5.1. 연표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기재되어 있다.

5.2. 사망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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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극적이게도, 7년을 넘게 끌었던 전쟁과 이순신의 삶은 함께 끝났다. 이 타이밍의 극적 효과로 인해, 마치 반대급부처럼 자살의도설, 사망위장 후 은둔설 등 여러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현재까지 어떤 설에도 근거는 없다. 특히 자살의도설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행장(行狀)에 "免胄(투구를 벗다)"란 표현이 있어, 이순신이 죽기 위해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으나, 胄는 갑옷 전체가 아니라 투구만을 일컫는 말이며, 더욱이 "免胄"란 어휘 자체가 《좌전》을 출처로 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란 의미를 갖는 관용어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되었다. 물론 행장의 지은이가 두 가지 뜻을 모두 담아서 이 단어를 골랐을 수도 있겠으나…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는 '사망위장 후 은둔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이순신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고 하여, 음모론 주장자들의 심정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바 있다.

그런데 자살설은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널리 퍼져있긴 했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좌전》에 나오는 관용구의 의미를 몰라서 자살하였다는 이야기가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순신 생존'에 대한 정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당대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31]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서 말이 많다보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중간에 부하장수인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전사하자,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덮어주고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지휘하는, 그러니까 눈에 확 띄는 모습으로 지휘를 하다가 저격당해 죽는다. 이도저도 아닌 뭔가 어중간한 느낌인데, PD가 자살설과 전사설을 절충한 것이라고 한다.[32]

당시 선조가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이순신을 견제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선조의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는 부분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정을 하면서 나름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음에도, 선조가 이를 모른 체 하고 이순신을 한양으로 잡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시에야 몰랐다 하더라도, 이순신이 추포되고 국문한답시고 고문[33]이 가해지기 전까지도 몰랐을까? 아무리 전시상황이라고는 하나,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정보망도 없었을까?

어쨌든 선조가 알고 모르고의 여부를 떠나서, 어차피 칠천량 해전 이후에도 이어지는 선조의 병맛스러운 행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 행보의 아래에는 민심의 중심이 되는 전쟁영웅들에 대한 피해망상과 자격지심이 극대화된 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초본 《징비록》에 의하면, 선조는 원균의 패전 이후 그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이순신을 재기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하자 말없이 회의석상을 나가버리고, 남아 있던 대신들이 의결을 해서 통제사 복직이 결정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예. 이처럼 선조의 존재를 자살설의 주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순신이 노량해전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을 알고, 자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심과 시기심을 의식해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단, 선조는 당시 이순신을 죽이라는 주변 신료들의 주장에 유배형으로 감하려는 조치를 취한 적도 있는 만큼 선조가 이순신을 경계한 것은 사실이나 죽이려고 들었다고 보기엔 무리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거기에 노량해전이 마지막 해전이라는 것은 전쟁 전반을 놓고 보았을 때 그랬던 것일 뿐 아직 부산과 울산 등에서는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즉, 노량해전이 마지막 해전이어서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노량해전 자체부터가 명나라에서는 거부한 작전이었고, 진린이 참여한 것은 순전히 이순신과의 의리 때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자. 그리고 진린이 전사한 등자룡과 함께 명나라 군선이 아니라 조선의 판옥선(板屋船)을 타고 출진했던 것은 의리 때문이 아니라, 명군 측의 전선(戰船)이 워낙 부실[34]했던 탓이다.

또한 행록을 비롯한 "이순신 주변 인물들의 문집을 보면, "오늘 저 적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식의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은 평소에도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쳐부수는 것을 주장했던 셈. 이런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수를 갚기 전엔 (너희 왜적들은) 날 죽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시위와도 같은 것이다. 즉, 이순신은 적보다 먼저 죽을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던 것이다.

5.2.1. 면사첩 논란

종종 자살설의 요소로 면사첩(免死帖)이 쓰이는데, 이것은 창작물과 실제 역사를 혼동한 데서 오는 오류다. 우선 소설 《불멸》과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가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이 있고 원균 명장설을 철저하게 부정했으며 고증에도 어느 정도 신경 쓴 소설 《칼의 노래》에도 면사첩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면사첩을 선조가 이순신에게 '너를 죽여야 하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선조가 자신의 명의로 면사첩을 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명나라 경리 양호가 초유문(招諭文)[35]과 함께 면사첩을 보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이우각이 쓴 《통곡》, 《이순신 실록》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해서 조선에서 발문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공식적으로 이런 기록은 없다.

사실 면사첩 자체부터가 원래 조선왕조의 제도가 아니었다. 면사첩의 기록은 왕조실록에서 선조와 인조시기 딱 19건 정도만 나오고, 조선의 국제인 《경국대전》에도 없다.[36]

여기서 집중적으로 면사첩이 나타난 《선조 실록》의 12건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면사첩을 처음 가져와서 배포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황응양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선에서 면사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인데, 인조의 경우 면사첩이 발급된 이유가 이괄의 난이 직접적이기 때문에, 임진, 정유년 경우와 동일시 할 수 없다.

면사첩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현재 이순신 역사 연구회와 같은 학술 단체에서는 면사첩 자체가 이순신에게 부여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방 장수에게 면사첩을 내려 보내 적을 회유하게 한 적이 없으며,[37] 결정적으로 《난중일기》나 기타 《징비록》 등 조선의 장수나 문인들의 기록에서 조선군이 왜란 당시에 면사첩을 배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선조 30년 12월 23일의 기록에서 선조가 말했듯이, 이미 군문(軍門)과 경리(經理) 대인의 분부에 따라 면사첩 3만 장을 인출하였다는 데서 면사첩 자체에 대한 권한은 조선군이나 정부가 가진 것이 아니라, 명의 소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 경리들이 조선군의 일선 사령관에게 면사첩을 보낸 사례도 오직 하나, 이순신에게 나간 것이며, 이순신이 이후에 이것을 배포했다든지 하는 내용이 행록이나 기타 문집, 야사 등지에서도 없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적인 사례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38]

특히 이후 인조 시기에서 면사첩이 군율을 위반한 자에 대한 면사권(비변사 등록)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양호가 내려 보냈다고 해도 썩 이상할 게 없는 맥락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순신이 면사첩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아무튼 선조가 이순신에 대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무능한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이는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다. 여러 사료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선비로서 국가에 충성하는 유교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 만약 당대의 누군가가 이순신을 두고 '왕을 혐오하고, 백성들을 위해 싸운다'라고 공식적으로 발언했다면, 이순신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5.2.2. 해상저격 논란

하지만 자살설을 부정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전투중에 저격을 당했다면 대장선이 함대의 전열 맨 앞에서 지휘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살상거리가 40m~50m, 유효 타격거리가 70m~80m 이하였는데, 이는 이순신을 정확히 저격하기 위해서는 대장선에서 30m~40m 거리에서 쏘아야 했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 흔들리는 배 위인만큼 더 가까운 거리에서 쏴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저격이 아니라 단순히 눈먼 총탄이였더라도, 어찌됐든 50m 내에서 쏘아야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군이 조총이 아닌 활을 사용하여 먼 거리에서 저격한것이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류성룡의 징비록에선 명확하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39]

또한, 이순신-왜군 조총수의 거리가 40~50m 또는 이내의 거리라면 선박-선박간의 거리는 더 좁혀지므로(이순신이 대장선의 가장 뒷쪽, 왜군 조총수가 세키부네의 가장 뒷쪽에 있는경우, 이순신-왜군 조총수의 거리는 40미터라고 해도 선박끼리는 붙어있는 상태가 가능하기때문이다.) 저격만이 문제가 아니라 배끼리 들이받고 백병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더욱이 대장선은 대장기까지 달고 있어 눈에 띄기 때문에 주요 타겟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의 판옥선[40]은 왜군 세키부네의 빠른 기동성에 역공을 당해 결국 백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의 판옥선은 불타고 말았다. 물론 이순신의 함대가 포위된 진린의 대장선을 구원하기 위해 근접거리에서 포격전을 수행하였고 야간[41]이었기에 평소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진린을 구하는데 성공한 이후부터 이순신의 함대는 진린의 함대와 연합해 포위진을 펼쳐 거리를 두고 왜군에 포격을 가한다.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한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이미 진린을 구하고 왜군 함선들과 거리를 벌려둔지 꽤 지난 시간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순신이 전사할 때쯤엔 이미 왜군 함선 200척이 분파되고 150척이 파손을 입어 퇴각하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사천 해전 당시 어깨에 탄환을 맞고 부상을 당한 이후, 이순신의 대장선은 항상 전열 앞이 아닌 후방에서 지휘를 했고, [42] 이순신은 조선군이 왜군과의 백병전에서 명백하게 열세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백병전이 들어갈 만한 상황은 연출하지 않았다. 즉, 노량 해전 후반은 명량 해전때 처럼 난전도 아니고 단순히 도망치는 왜군 함대를 추격하는 상황이었는데, 대장선이 함대의 선두에서 적선과 50m 이내의 거리를 유지하며 쫒는, 누가 봐도 다소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말이 된다. 정리하자면, 이순신이 기록대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라고 했을 때, 대장선은 왜군 함선들과 50m 안팎의 거리만을 두고 백병전을 각오한 채 전투에 임했으며, 이미 조명 연합함대가 승기를 잡은 뒤 잔적을 소탕하는 중에 평소와는 다르게 대장선을 무리해서 왜군 함선들 바로 앞까지 끌고 가서 싸웠다는 말이 된다. 사실상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

다만 위의 주장을 요약해서, '조총의 사거리가 50미터 남짓인데 어떻게 이순신을 저격하는 게 가능한가? 함포를 쏘면서 전투를 하면 조총의 사거리는 한참 밖 아닌가, 그러면 대장선이 앞서서 백병전을 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써 뭔가 의심스럽다는 말에서의 조총의 사거리가 50미터다 뭐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수도 그 안에서 쏘면 적에게 맞을 수 있다.[43]

그리고 조총의 특성상 노리고 맞추긴 어려워도 충분한 살상력을 유지한 채 한참은 더 날아간다.[44][45] 즉 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다가,[46] 당시 전황은 추적섬멸 중인 상황이었기에 적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수군이 쓰는 함포는 대부분이 현자총통이나 황자총통으로, 이것은 지자나 천자와 같은 화포들에 비하면 사정거리가 상당히 짧은데다 해전 특성상 화포의 유효 사거리는 더 짧아졌을 것이다.[47][48] 즉 조선 수군의 포격이란 게 원거리에서 함포만 쏘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느 정도 근접해서 때리는 것이 중요했던 것.[49]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의 적은 사력을 다해 퇴각 중인 상황, 즉 말 그대로 적이 죽자사자하는 추격전 상황에서 지휘관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다, 이순신에게는 '진린'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당장 순천 왜교성 전투 때도 진린이 혼자 정신줄 놓고 돌격하다가 왜군 수급으로 전락할 뻔 한 전적이 있다. 왜군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또는 궁지에 몰린 쥐라고 생각하고 선두에 서서 몰아붙이던 진린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이순신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다 총탄에 맞은 것일 수도 있다. 진린은 이순신의 사망을 전해듣고 "어른께서 나를 구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오!"하면서 울어댔다. 즉 진린 구출의 과정에서 이순신이 초기에 사망하고, 이후 송희립 등이 전투를 맡아 진린을 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진린의 대장선을 구하려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별도로 없다는 점과 노량해전에서 진린을 두 번째로 구한 시각이 이순신이 사망한 시각과 대략 서너 시간 가량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전투 상황과 결과를 장계로 올려야할 사람이 사망했으니 전황 기록이 세세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전투 이후 선조가 진린과 접견례를 했을 때[50] 진린이 이순신 장군의 공을 모두 가로채, 이순신이 들러리 포지션에 있다 어이없게 전사한 "휘하 장수 1"처럼 묘사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어쨌거나 이 때문인지 이순신 생존설#도 만만찮게 퍼져있는데, 그 근거로 이순신은 선조 임금과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하고 도주 후 은둔했다는 설이 있다. 근거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1613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800m 정도 이장되었는데, 이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충무공의 삶이 당시에는 물론 현대의 인식으로도 매우 극적이였기에[51] 이러한 떡밥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5.2.3. 유명 수군 도독 수여 시기 논란

이 부분이 뜬금없이 들어간 것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유명 수군 도독이란 단어 자체가 명나라 품계 정1품으로, 이순신이 생전에 도독직을 수여받았다면 선조와 동급으로 명에서 취급하였다는 뜻이다. 이를 처음 문학작품에서 대중적으로 두드러지게 인지시킨 김경진(소설가) 역시 유명한 국뽕임에도 반대 이유-정작 수여를 했던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현충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 를 무시할 수 없었다. 허나 원균 명장설이란 잡소리 대응이다보니 당시에는 대부분 관심도 없었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명 도독직 수여 자체가 병자호란 후 어느 시기에 조선 측에서 만든 조작일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반론으로는 황제의 명을 조작하는 것은 실록에 기록할 정도로 이를 열거한 군주 혹은 이를 자기 멋대로 넣었을 사관이 자기 기반을 부정하는 대역죄에 가까운 점이니 조작은 이뤄질수 없고, 도독직 수여가 명 내에서 조선을 분열시키기 위한 비밀 공작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 이를 알았기에 조선조정이나 이순신 둘 다 내색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지만, 명 멸망 후 반청숭명 사상에 의해 이런 일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있다. 헌데 자기 조상이 되는 해당 군주를 엿먹이려는 아주 강력한 도발이나 다름없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독인 등 팔사품 자체가 명 조정의 하사품이 아니라 진린의 개인적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단, 이 가설을 정설로써 채용하면 정조를 비롯한 후대의 조선임금들은 이순신을 높이고자 자기 조상인 선조를 깎아내린 패륜을 저질렀다는 평가를 피할 수가 없다.[52] 또 사관이 썼다고 해도 이것을 명에서 몰랐을까란 반문을 던지기 쉽다.더욱이 위 연구도 비연구자라 해도 쉽게 이의가 나올만한 것이 진린의 개인적 선물이란 것이 명을 그냥 우습게 본다라는 말도 된다는 셈이다. 오히려 선조로서는 좋은 먹이감인데, 이를 방관할까? 직접은 아니더라도 명조정에 이를 고발하고, 동시에 역적 가문으로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는 셈이다. 당장 심유경이 어떠한 일로 처형되었는가? 그리고, 실록에 그 기록을 남겼다는 정조(조선) 자신도 심환지한테 비밀편지를 보내, 사실상 이들도 이용했다는 것이 드러난 사실이다.

즉, 이 논란은 끝나지 않은 생명을 현재 지닌 셈이다.

6. 전투 관련

6.1. 참전 목록

출전

년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4년)[53]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54]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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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56]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57]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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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출전[58]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59]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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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출전[60]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61]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명 전사[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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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출전

1593년
(선조 25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63]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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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64]

피해 없음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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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선조 26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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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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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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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65]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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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66]

적선 50여척 격침[67]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68]

조선수군 130여명 사상,[69]
명나라 전선 30여선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000여명 전사

적선 30여척 격침,
11척 나포,
3,000여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수군 10명 전사,[70]
300여명 부상
명 수군 500여명 사상

적선 200여척 격침,
100여척 나포,
150여척 반파,[71]
2만 ~ 3만명의 사상사(추정치)

6.2. 전술

요약하자면,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다만, 드물잖게 제기되곤 하는 정자전술(丁字戰術)과 학익진의 연관성은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체계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스페인 연합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 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어쨌든 조선 수군은 당시 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이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싸워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는 전술을 썼다.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하는데그럼 지는 전장을 택하라 이거냐? 신립 의문의 1패, 사실 저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서 최고의 칭찬이자 명장이 되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이기는 전장만을 선택한다'는 게 말이 쉽지,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상대가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게 해 줄 이유가 없다. 적장이 원균이라면 언제든 가능하다. 어? 원균 적장 맞잖아? 어쨌든 전투라는 것은 적군과 아군 양측이 맞붙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위치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전장상황이란건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순간순간 변화하기에 이기는 전장을 만드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고금의 명장들조차 이런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분루를 삼겨야 했던 기록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게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이순신이 아무리 유리한 전장을 선택해 봤자, 왜군이 그걸 무시해버리면 전투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당연히 승전도 없다. '전장선택'은 병법의 기본이자, 상대로 하여금 불리한 전장을 유리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기는 전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적장들을 마음대로 속여 넘기고 유린할 수 있다'라는, 군대 지휘관에게는 최고의 극찬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거기에 전장상황이란건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순간순간 변화하기에 이기는 전장을 선정할수 있다는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당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신립이 전장 선택 한번 잘못 했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보면 일목요연하다. 따라서 '유리한 전장만을 선택해서 싸웠으니 당연히 이기는 거 아님?' 이라는 이유로 지휘관의 능력을 폄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병법에 어두운 탓에, 최고의 칭찬을 욕인 줄 알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승리하기 거의 불가능했던 명량 해전에서 승리했으니 저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서 가장 큰 승리 다음으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 하고 적군을 물리치는 가장 이상적 논리를 따랐을 뿐"이고 어느 전투나 전장에서도 안전하고 승리가 보장이 되는 전투는 없을 뿐더러 전투 개시가 되면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무조건 이기려는 작전을 펼지지 않는가? 반대로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무식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소리다. 원균하고 연대를 했을 때도 이순신은 원균이 제안한 작전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지휘관이자 장군이라는 직책이 있는 자가 병법이나 전술, 전략을 모르고 부하와 병사들을 무의미하게 많이 희생시키고 승리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군은 계속 북쪽으로 북진하고 있으며, 조선 육군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연이어 패배하고, 심지어 용인전투에서 일본군의 2천 명도 안 되는 병력에, 조선군 4만여 명이 패배를 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 또한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나 국운이 달린 해전이고 조선조정에서도 이러다할 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서, 소모전을 벌이면 일본군한테 결국은 밀리게 되는 양상이라, 국가적 입장에서도, 이순신 입장에서도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이순신은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지휘관이 중도에 전사해 혼전 양상이 된 노량 해전을 제외하고, 그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력을 거의 완전하게 보전하기까지 했다. 거의 모든 승리가 손실이 거의 없는 완전 승리였으며, 이것은 그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해서 신중하게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에 적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었고, 육지에서 싸우는 왜군이 보급이 부족해져, 전쟁수행능력을 꺾을 수 있었다. 바다에서만 이긴 게 아니라,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런 식으로 이겨준 덕택에 조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선조가 요구한 것처럼,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전장에서 무리하게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옥포, 한산도(견내량), 명량 해전 등 몇몇 전투[73]를 제외하고는 접전 당시에는 항상 조선수군이 왜군보다 수적 우위를 유지했으며, 거의 모든 전투가 왜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나, 유인 후 매복공격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해전들은 전쟁의 판국을 뒤집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싸움을 피한 적은 없다. 도리어 전술로 전략적인 정국을 뒤집은 것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왜국 장군들은 그 스스로가 다이묘이면서도 해군 쪽에 있던 이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수십 년간 해적질을 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인데다가 절대 바보가 아니란 사실이다. 이런 왜장들이 스스로 불리한 지형까지 줄래줄래 기어들어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이다. 이는 아무리 폄하하려 해도, 이미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초월자의 능력에 가까운 일이다. 손자나 육도삼략, 오자 모두 이것을 역설했지만, 이를 실전에서 시행해낸 이는 역사적으로 전무했고, 이순신이 그나마 이 이상과 가깝게 실제로 구현해낸 것이다. 왜군으로 봐서는 전과 별로 다를 게 없이 전투를 했는데, 그저 자기편만 줄줄이 죽어나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이는 용맹과 위용을 과시하여 맹장이라는 호칭을 듣는 게 최고의 명예인 줄 아는 일개 무부 따위로서는 이해불가의 영역일 뿐 아니라, 언감생심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이다.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상황과 지형으로 이끌어 싸우게 만든다는 것은, 상대방 스스로 하여금 스무 집을 제하고 두는 바둑이요, 차, 포에 마까지 떼게 하고 두는 장기이다.

또한 정찰과 첩보를 이용한 철저한 정보수집을 무척 중시해서,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왜군이 어설프게 기습이나, 야습을 기도하다 조선수군의 매복에 걸려 역으로 관광타기 일쑤였다.[74][75] 특히 처음으로 그와 맞붙은 도도 다카토라가 제일 많이 당했다.

도도뿐만 아니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 다른 일본 수군의 장수들도 전부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고 심지어는 막판에 노량 해전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 마저 이순신에게 두들겨 맞고 도주하였다. 결국 왜군은 계속된 참패로 본거지 부산마저 위험해지자, 아예 요충지마다 진지를 쌓고 해전을 극력 회피하는 우주방어로 나오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로 가혹했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았다. 게다가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死傷者)를 합하여(사망자가 아니다. 전사+부상) 100여명밖에 안 되는 숫자다. 아군 사상자보다 적선 격침수가 더 많은 조선의 기묘한 장군 오히려 역병으로 죽은 이가 더 많다. 사실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그 시대 전쟁의 특징이지만, 특히 조선 수군은 그 정도가 심했다. 애초에 전사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판에 병사자는 만 명을 넘는 수준이다. 전사자와 병사자 비가 1:100에 가까운 군대라니, 최전선의 군대가 이렇다는 걸 현대인들 중에서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한 것을 구실로, 이순신을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순신 본인에 대한 신뢰야말로, 그가 실질적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다. 단순히 엄격한 군율을 강조하기만 하는 이였다면, 다른 해전은 몰라도 명량 해전의 승리는 나올 수가 없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도박과도 같은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명량 해전 당시 조정에서는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부정적인 전망뿐이었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암담한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하거나, 항명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특히 오늘날같이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입 싹 닦는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의 돌격명령을 병사들은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군율에 대한 무서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건 휘하 병사들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 외에는 없다. 당장 고금을 통틀어 부하들의 항명, 프래깅이나 참전거부(파업)을 당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장비처럼 병사들을 엄격한 군율로 혹독하게 대했다던가 알렉산드로스 3세루쿨루스처럼 휘하 병사들의 신뢰를 잃어 군대가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상황에서도 싸우길 거부한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순신의 병사들은 엄격한 군율과 어떻게 봐도 살아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없는 상황에서도 상관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않으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붕괴해 도망치곤 하는, 그러니까 이길 만한 싸움을 셀프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

즉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인 장군들은 모두 첩보와 병사들의 조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군대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순신의,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사실이 폄하될 수 없는 근거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수많은 장수들이, 그 호전성이나 아집으로, 혹은 전공을 더 쌓기 위해서 아군을 희생시키거나 학살을 자행하는 등 불필요한 전투를 치른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항상 최소의 희생으로 최선의 효과를 취하였으니, 오히려 칭송하고 찬양하여 마땅한 일이다.

특히 전술적인 면에서 이순신은 항상 왜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한산도 전투에서 유인한 뒤 포위하여 적을 묶어놓은 것이나, 명량 대첩에서 좁은 길목으로 유인해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유도하여 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투 시 조선수군의 집중된 화력과 함선의 높은 내구성 같은 장점은 극대화되었으며, 일본 수군의 수적인 우세와 뛰어난 근접 전투력, 기동성은 봉쇄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철저한 첩보 능력,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과 기동 능력, 그리고 전투 개시의 타이밍,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전투 시 발휘되는 뛰어난 통솔 능력 등을 본다면 이순신의 군사적 재능은 인류역사상 최고라고 볼 수 있다.

이 조건들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상적인 승리의 조건과 동일하다.(싸우기 전에 이긴다.) 특히 정보에 있어서 우월함은 《손자병법》이 제일 강조한 조건인데, 이순신은 정보를 수집하고 다루는 데에 있어 교과서적인 모범을 보였다. 이렇듯 《손자병법》이 제시한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지휘관은 한국 역사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찾아봐도 몇 되지 않는다.

비록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는 하나, 경상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지휘능력, 전략/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여러 부분에 있어 욕을 먹는 선조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까지의 인사행정만큼은 최적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경상우수사로는 원균을 임명했다.[76][77]

가장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전공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전쟁이었지, 국가 간의 전면전이 아니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78]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천량의 참사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함으로라도 싸우려 한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의 끝에 수많은 전투기록과 경험이 쌓이고, 그 결과 모범답안을 들고 나오는 인물이 등장하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했을 뿐인데다가 심지어 꽤나 늦깎이로 입대한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천재적인 전략가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7. 인격

어릴 적부터 이어진 류성룡과의 우정이 유명하며[79] 그 탓에 정치적으로는 애초에 어디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이었음에도, 동인, 그 중에서도 남인 계열로 취급받았다. 단, 남인 계열로 취급받기 시작한 건, 전라좌수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의 전투로 주목받은 이후이다.

가족으로는 어머니 변씨 부인과 아내 방씨, 첩 2명과 아들인 이회, 이열(이울), 이면 등이 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80]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지,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81]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이순신은 상주(喪主)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고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다른 인물이라면 순수하게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고기를 먹고 몸을 추스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물론 세종이면 빨리 복직하란 거겠지만(…) 근데 진짜 당시 왕이 세종이였으면? 왜군은 지옥을 봤겠지 하필 그 선조(…)인데다, 《난중일기》의 기록도 "주상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나와 있다.(정유년 12월 5일)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선조가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를 했고, 이를 눈치 챈 이순신이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썼다는 해석도 있다.

아내인 방씨는 무관 출신인 방진의 딸이었는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진의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씨가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를 쏟아내며,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서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82]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83]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응?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84]를 받았으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 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읍현감으로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이나 조카들의 행동은 정읍 주민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또한 이순신의 셋째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 이리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1597년 10월 14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1597년 10월 16일) 참고로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85]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상당히 엄격해서 아무리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이율곡이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 하는 병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였다. 보통 친인척이 이런 장관이라면 출세길 열렸다며 당장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병조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 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는 자신의 친인척도 마찬가지여서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 이러니까 부하들에게 엄격하게 해도 끽소리도 못하지 조카 이완의 경우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열심히 까댄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순신 다운 현안이였다.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小有違令 卽當軍律 소유위령 즉당군율)

- 명량 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상당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 참고로 고려시대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하는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시대 내내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이순신의 입장에선 나라와 백성들의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당연히 그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난중일기》 기사에, 한산도 대첩 출진 하루 전에 군졸인 황옥현(黃玉玄)이 군영을 탈영해 도주하다 붙잡았는데, 이순신은 이 황옥현을 그대로 참수했다. 사실 군졸뿐만 아니라 장수들도 많이 도주한 사례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기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소개된 또 다른 일화로는, 아전 하나가 소를 데리고 군량을 가지고 오던 중, 강가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술을 반주로 걸쳐 먹었는데, 그 사이에 소가 멋대로 강에 빠져 죽었고 군량은 모두 못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전은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이순신의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든 군량을 쪄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물을 먹은 쌀은 군량으로서 가치를 상실했고, 이 때문에 못쓰게 된 쌀과 물을 먹고 죽은 소는 그날 병사들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다.

명량 해전 전(前) 이순신은 수군을 수습하러 다녔는데, 이때 훔친 소를 끌고 가던 절도범들이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왜적이 온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이들의 목을 벤 일이 있다. 이를 가지고 이순신의 유일한 실수라는 비판이 있지만, 칠천량의 수군 궤멸로 가장 안좋은 시기임에도 범죄를 숨기고자 백성에게 왜적이 쳐들어온다고 유언비어를 말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해당 범죄자들을 곱게 대해줄 이유가 없다는게 중론이다. 거기에 조선시대 소 절도범은 중죄인으로, 당시의 소 한 마리의 가치는 오늘날의 집 한 채에 맞먹을 정도였다.[86]당장 임금조차 우유를 평생 한번 볼까말까한 수준이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외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 무장과 병력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는데, 무기에 녹이라도 슬어있으면 기본이 곤장 80대였다. 다만 곤장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고, 휘하 병력들이 평시에 잘 관리하면서 할 거 다 한 후, 시간이 남아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상을 주기도 하는 등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한, 그야말로 완벽한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상당한 완벽주의자로 가차 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라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들었고, 후손에게까지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에 따라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친족 대신 끌려온 사람을 면제코자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 그런데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육군보다는 믿음직하고 부유한 충무공 휘하의 수군이 복무하기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을 처형하고 형을 가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87]

또한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공급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쓰는 등,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대부분 군기위반, 탈영, 군용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이탈이나 군무회피 알선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정상적인 원리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하지만 가혹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88]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고 전해진다.

짧게 줄여서 말하자면 제대로 FM 육사 이다. 그래서 존경은 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빡세다고 평을 하기도.# 능력이 엄친아 급이니 보통사람은 절대 따라 해선 안 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신경 쓰는 섬세한 성격 탓인지 굉장히 자주 아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縮) 있었다"거나 "밤새 토사곽란으로 고생했다", "혼절해 있었다" 등의 서술이 많다.[89] 실제로 《난중일기》 중에 "아팠다"는 기록만 찾아도 수십 차례가 넘는다. 이는 삭직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에,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이나 치료가 없었던 점 등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그래도 사람 다스리는 재주는 상당해서,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도독첨사 였던 진린하고 연합을 한 적이 있는데, 상대가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성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 주저 없는 그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하고 같이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이대인(李大人)'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막장 진린도 이순신이랑은 사이좋게 지냈는데, 도대체 원균은 얼마나 막장인 거냐!! 이순신이 수급을 양보해 공을 돌리기도 하고 명 수군의 행패를 이유로 병력 철수를 하려 하는 등 완급 조절을 통해 진린을 잘 주물렀다. 이러한 점에 유명수군도독이 부여된 여러 정황 중 하나가 아닌가란 말도 있다. 그러나, 명량대첩에서 보인 행동들은 지위를 떠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해 왔다는 절대적인 증거이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인적자원 관리와 인사행정을 절대적이 아닌 사람이 무리를 이루는 그 디딤돌과 같은 사람간의 예의를 무시한 것이란 씁쓸한 지적을 몇백년 전 성웅이 몸소 그 역량을 보여 증명한 셈이다.

이순신의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은 활쏘기와 음주[90], 그리고 조선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놀이를 즐겼다. 《난중일기》를 보면 의외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승경도놀이를 즐기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난다. 현대로 치면 4성 장군이 부하 장수들과 보드게임을 돌렸다는건데, 이순신이 마냥 무서운 사람이였으면 불가능했을것이다. 이 역시 이순신이 풀어줄땐 풀어주는 유연성을 갖춘 인물이였음을 보여주는 일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겼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 중 10~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 개인의 무예는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32살에 무과시험 합격했을 때도, 그렇게 뛰어난 성적이 아니었고 중간성적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이 정도 기록이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때는 활덕후의 시대 조선시대. 거기다 무장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잘 쏘는 편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장수로서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못 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장수들이 모여서 대결을 해보면, 대충 40발 초반이 꼴찌를 기록했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특별히 잘 맞히셔서) 기록해 놓으신 것이 43발이었다." 잘 쐈다 못 쐈다는 게 보통 10여발 까지 차이는 나지 않고, 당시의 평균수명과 나이를 생각할 때, 엄청나게 못 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장수들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수준으로 보인다.[91]

8. 평가

8.1. 한국에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고 명색이 충무공 리더쉽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시간에 날조된 칭기즈 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데 명랑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그야말로 발로 만든 한심한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 있다지만, 충무공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인물 이순신이나 조선수군사를 연구하는 데는 쥐뿔도 관심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8.2. 일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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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고 장비를 생각한다면 지는 거다.

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입장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 있는 방천화극. 《징비록(懲毖錄)》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에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순신은 Sun-죄를 혼자 타고 Hulu 도둑을 부러 Cholla에 군인의 문제의 병사 해군 Jiedushi는 tortoiseshell의 배를 만들어 타다오 크라운 닭고기 숲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100]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101]의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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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讚)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102]

1908년 발행된 일본 해군의 사토 테츠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Throughout history there have been few generals accomplished at the tactics of frontal attack, sudden attack, concentration and dilation. Napoleon, who mastered the art of conquering the part with the whole, can be held to have been such a general, and among admirals, two further tactical geniuses may be named: in the East, Yi Sun-sin of Korea, and in the West, Horatio Nelson of England. Undoubtedly, Yi is a supreme naval commander even on the basis of the limited literature of the Seven-Year War, and despite the fact that his bravery and brilliance are not known to the West, since he had the misfortune to be born in Joseon Dynasty. Anyone who can be compared to Yi should be better than Michiel de Ruyter from Netherlands. Nelson is far behind Yi in terms of personal character and integrity. Yi was the inventor of the covered warship known as the turtle ship. He was a truly great commander and a master of the naval tactics of three hundred years ago.(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몇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서 태어났기에 서양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진왜란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상급의 지휘관이다. 누구든 이순신과 비교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보다는 뛰어나야한다. 호레이쇼 넬슨은 인간성과 성실성 측면에서 이순신만 못하다.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뚜껑 덮인 배를 발명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A Military History of the Empire (Japanese: 帝國國防史論), p. 399, by Admiral Tetsutaro Sato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군 해군사관생도들이 방문했는데, 한 후보생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장군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당연히 그 후보생은 넬슨을 생각했겠지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하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103],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로,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04]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사적(私的)으로 도고 역시도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수상이지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게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인에게도 엄청나게 존경 받는 인물로 러인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에 대한 일본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105]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전쟁에서 일본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106]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107]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108]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논문도 아닌지라 출처표기나 사료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문헌 목록같은 믿을만한 근거는 적혀있지 않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일뿐이며 한국인 실업가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매우 낮다. 실제로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추앙했다는 일화들은 전부다 출처가 불분명 하며 전해들은걸 옮겨 적은 "카더라"수준이다. 일본에서는 역사적 사실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며 반일 프로파간다에 의한 이순신 띄우기를 위한 창작 정도로 보고 있다.도고가 이순신을 실제로 존경했다 해도 일본우익과 혐한 때문에 일본에서 이순신에 대한 왜곡은 쉽게 사라지지않아 별 이득볼건 없다

8.3. 북한에서

리순신 장군은 량반 출신으로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109]

그럼 당시의 일본은 봉건국가가 아니란 말이냐

간단히 요약해 돼지새끼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며 쩌리취급이다. 미친놈들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명장으로 크게 우대받았으며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1967년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 좋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시작되었다.쉽게 말해 현대판 원균같은 놈들 그래서 나온 게 위에 나온 여러 망언들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이순신이 희대의 애국자요, 천재적 지략가로 세계해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만 못하다고 할 뿐이지(...) 아래는 1967년 이전 이순신에 대한 북한의 평가이다.

임진조국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전쟁에서의 리순신 장군의 역할의 평가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하여야 하겠다. (...) 당시 최대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천재적인 군사지휘관인 리순신 장군의 임진조국전쟁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그가 임진전쟁을 조국보위의 인민전쟁으로 인식하고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의 역량을 발휘시키고 인민의 역량을 굳게 결집하여 적을 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임진조국전쟁 과정에서 리순신 장군의 활동을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전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이며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리순신 장군의 투쟁은 애국인민의 산 표본으로 되었으며 그가 군사예술의 우수한 정수로 되었으며 그의 전략전술은 애국투쟁의 영광스런 상징으로 되었다.

리청원, 임진조국전쟁 1592~1598(1955년)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탁월한 전략전술가였던 리순신 장군에 의하여 우리 수군 연합함대가 지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순신 장군은 전쟁 전부터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함선건조, 함선수리 특히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 무기의 제작, 군량 준비, 병사들의 훈련 등 모든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백방으로 군비를 강화하였다. (...) 장군은 또한 탁월한 전략가로서 적아간의 력량 관계를 정확히 타산하고 이에 립각하여 격멸전을 용감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전반적 전국에 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원쑤들을 우리 강토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한 잘 알고 시기적절한 대책을 취하곤 했다. 이와 같은 리순신 장군을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모신 우리 수군 병사들은 장군을 무한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전체가 단결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원쑤들을 격멸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었다. 제 아무리 우수한 무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휘관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와 같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길성, 임진조국 전쟁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위의 학자들은 유물사관을 신봉하였단 이유로 반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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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파마머리 독재자가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민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여담이지만,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선 이순신은 훌륭한 장수였지만 "김일성이 아니라 봉건왕조인 조선에 충성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한계라고 공식적으로 가르친다.'' 물론 김씨왕조의 완벽한 헛소리.

8.4. 그 밖에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ㅡ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pp. 66-67.[111]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8.5. 인터넷상에서

8.5.1. 일본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전국사와 관련된 연구자/학자들 중 본좌급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찬양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실과 달리 인터넷상에서는 우익 경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큰데,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8.5.2. 한국

반일감정이 높은 편인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쪽은 정반대로 출처가 불분명한 사료나 검증으로 왜군의 피해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식. 한국어 위키백과도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꽤 보인다.

불멸의 이순신》 등,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극에서도 일본군의 규모를 늘리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상기한 위키백과의 '명량 해전에서의 일본군 1만 사상' 기재는 다름 아닌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나레이션이 출처였다.

영화《명량》에서는 적선을 일반적인 역사학계에서 정설인 133척이 아닌 330척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이는 드라마 제작진만의 잘못은 아니다. 한산도해전 8,980명, 명량 18,000명 사상 등등의 과장된 자료출처는 옛날 일본 선박이나 함대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을 때, 대선-아다케, 중선-세키부네, 소선-고바야로 잡고, 일괄적으로 200명, 100명, 40명씩 대입해서 계산한 것으로, 제법 그 역사가 긴 설이고, 여러 반론들이 있었지만 이 설이 가장 널리 퍼져서, 되려 넷상에서는 정설 비슷하게 취급되게 된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를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이순신역사연구회가 발행한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내용을 인용해, 명량 해전일본군 사망자를 "일본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라 기술하고 있다. 90명씩 승선하는 대 세키부네는 존재하지만, 기함용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혹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 것이 대다수고, 이 시기에는 승무원 50~60명 내외의 세키부네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100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희생자 수를 2배로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큰 이유들 중 하나는,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함대규모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접전지역에서는 자신의 병력을 적군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 따라서 이순신이 항상 '압도적인 열세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라는 과장은, 오히려 이순신의 주된 장점을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 인터넷 상의 자료에도 왜곡된 부분이 있으며, 이는 해당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역사상의 인물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기록에 따른 올바른 사료 검증이지, 무의미한 과장과 미사여구는 아닐 것이다.

8.6. 능력에 대한 저평가와 반박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글링 10마리로 골리앗 5부대를 이긴 격이다

이순신의 승리에는 당시 조선의 기술과 무기(화포 등)의 영향이 컸으므로, 이순신의 전투에서의 공적이 모두 이순신의 능력에 의해서였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라는 억지의견(?)도 있다.[113] 기본적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기반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잘 활용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의 능력이다. 당장 가장 리즈시절의 조선 해군을 지닌 원균이 저지른 삽질만 봐도 단순히 템빨로만 이겼다고 보는건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밑에도 자세하게 나올 것이지만, 당시(16세기 말) 함포와 같은 무기가 갖는 우세는 아주 절대적이진 않았다. 유럽의 예만 보아도, 레판토 해전이나 칼레 해전등등에서 함포 같은 화약무기가 어느 정도 활약한 것은 맞지만, 두 전투에서 모두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포격을 가하면서 접근한 뒤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함포가 해전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유럽에서의 배는 크게 범선갤리선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당시 범선은 함포를 탑재하기 유리했던 반면, 갤리선은 기껏해야 뱃머리 쪽에 다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포격전에 불리했다. 만약, 당시 함포가 정말 엄청난 우세를 가져다주는 무기였다면, 갤리선은 함포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5~16세기경까지만 해도 갤리선은 범선에 비해 아주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으며,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었다. 즉 16세기 당시의 대포는 유럽에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 무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이순신의 승리를 기술과 무기의 덕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動搖)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 보다 함상에서의 화약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천자총통(天字銃筒)에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발사할 경우, 탄도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 때 사거리는 152m, 10도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射角)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 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 시, 계산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시 대장군전 비행 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 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고도 자체가 50~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射角)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차이는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일 때는 그 절반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박혜일 교수는 천자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총통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 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射角)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것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힐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砲架)는 사각(射角)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諸元)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무기 운용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무기 운용상의 제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接舷戰)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接舷) 시에 하향사각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사격 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砲架)의 형태가 동거(童車)라고 가정한다면, 초단거리 하향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接舷)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疾藜砲筒)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投射)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몇 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114],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하여 명중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몇 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이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지, 이순신의 존재가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엄청난 왜곡이고 오류라는 것이다.[115]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순신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화포는 거들 뿐이었다. 결코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졸라 짱쎈 조선 화포가 크아아아하고 울부짖자 일본 전선들이 터져나간 것이 아니다.그리고 화포 운용의 측면이 강조되다 보니 아예 이순신이 화포를 주력으로 활용해서 이겼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116] 이순신에게는 화포를 마구 쏴도 될 정도로 물자가 넘치질 않았으므로 원거리 포격으로 왜적을 때려잡은 장군님!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난중일기의 전투 기록들에 적힌 전과에서 '얼마를 불태우고 적 얼마를 죽였다'라는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 함대의 주된 화력 투사 방식은 궁시와 소구경 화포[117]의 사격을 통한 인명 살상 및 화공의 형태였다. 게다가 위에서도 서술했듯 목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포격만으로 적선을 깨부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화공을 펼치는 게 훨씬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만 보아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선상 백병전을 가능한 피하고,[118] 조선군의 전통적 강점이었던 사격전을 적극적으로 벌여 적군을 압살한 훌륭한 전술가라는 점이 드러난다. 어떤 면에서는 해상 포격을 선보인 전술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당대에 활용할 수 있었던 해전 전술을 극한으로 연마해서 선보인 완성형 전술가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전쟁에는 군량이 필수인데, 한산도 진영을 잡을 때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선조정에 건의까지 하였다. 결국은 어렵사리 한산도 군량 생산 승인을 얻었다. 백성들은 이순신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백성들은 편히 농사를 짓고 그런 군량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9. 그 밖의 이야깃거리

9.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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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의 평균적인 키가 164라는 결론이 나와서,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키가 컷다는 이야기와 6척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0위너다전후로 보인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의 장검은 쌍수도로, 이 검의 태생은 척계광에 의해 중국에 도입된 칼로 그 뿌리는 왜구들이 쓰던 노다치이다. 조선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는 일본인들도 잘만 쓰던 칼인지라 이 검을 사용했다고 해서 거인일 리는 없다. 물론 이 장검은 이순신 장군의 실전용 검이 아닌 단순히 장식용 검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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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촬영된 쌍용검.

그리고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칼인 쌍룡검의 행방은 며느리도 모른다. 근 100년째.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실전에서 사용한 검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세종,문종 참조), 도검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조선 전기)나 등패수(조선 후기)로 한정되어있었고,[124] 전반적으로 보병은 장창(長槍)과 당파(钂鈀)로 무장하거나[125] 철퇴(鐵槌)나 도끼같이 쉽게 익힐 수 있으면서 갑주를 입은 상대에게도 위력적인 둔기류를 많이 사용했고[126], 기병에게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장창과 월도(月刀)와 같이 리치가 긴 무기나, 마편곤(馬鞭棍) 같은 기병용 타격병기[127]였다. 때문에 들어가는 쇠의 양과 제작에 걸리는 시간에 비해 위력은 한정적인 참마도 같은 비효율적인 물건은 만들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고, 애초에 도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도검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인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우리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 버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문종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를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즉 이순신 장군의 장검은 그냥 장식용 검이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도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전시 물자 확보를 위한 핑계였다고 볼 수밖에.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과, 수전(水戰)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본도는 그리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降倭)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太阿劍)처럼 장식용~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돼있으므로 요주의.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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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9.2. 대중문화에서

참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9.3. 파시즘과의 관계?

일설에는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국민들을 단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된 바가 있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시즘 성향의 국가가 과거의 전쟁영웅이나 위인을 프로파간다로 악용한 사례는 상당히 흔하고, 한국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듣보잡은 아니어도 생각만큼 유명하진 않았는데, 과거 군사정권이 이순신을 띄우는 프로파간다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정치색 다분한 왜곡된 주장을 한다. 잔 다르크?[128]

당연한 말이지만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이 경우, 이순신 장군의 명성에 군사독재정권이 편승하려 한 것이지, 이순신 장군은 이 페이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임진년 첫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줄곧 한국사 내내 칭송받던 위인이다.

어디까지나 이미 널리 퍼져있는 이순신의 명성에 군사정권이 편승해서 더욱 부풀리고 다른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멸사봉공과 충성의 이미지만을 강조해서 국민교육의 이름하에 이용한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에 이를 이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이 존경받던 인물이 아니거나 유명한 인물이 아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멸사봉공이란 문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전체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129] 하지만 이것은 이순신이 파시스트라서기보단 당시 충효사상을 강조하던 유교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적인 한계라고 보는것이 맞다.

군사정권 시대에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사용했을 때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사상적 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국가와 조직에 대한 충성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파시즘적인 형태로 유사된거지 16세기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파시즘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9.4. 역성혁명?

간혹 이순신이 역성혁명을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성혁명은 유교의 핵심 사상이긴 하나, 이순신은 선조에 의해 부당하게 벌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는데도 변명 한 마디 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다 받았다. 이렇게 충직한 이순신에게 역성혁명이란 꿈도 못 꿀 일이다. 심지어 이순신이 새 왕조를 열었다면 300년 뒤의 식민 지배도 없었을 거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건 지나친 확대해석. 더구나, 자살설이 만일 명량 해전이후에 명으로부터 수군도독을 받았다는 점이 물증으로 확인된다면, 정치적 분열을 바란다는 의도를 무력화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해석되어 자살설이 높아진다. 그렇기에 더더욱 역성혁명은 꿈꾸기 힘든 형국이다.

만약 이순신이 역성혁명을 일으킬 인물이었으면 녹둔도 사건 직후 이일이 장계를 올리기 전에 미리 이일을 암살한 뒤 조정에는 자신과 이일이 같이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이일이 전사했다는 식으로 장계를 날조해서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명백한 이일의 모함임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주는 벌을 달게 받았다.[130] 그리고 그 벌 조차 또다른 군공으로 사면받았다.선조의 휘하로 썩기엔 아까운 장수다.

허나, 이순신 생애를 본다면, 데자뷰적 상황이었다. 국지전이든 전면전이든 인사행정이 엉망이었음을 인정하는 이들이 하나도 없었고, 왜란 초반 패퇴를 만든 원인 제공자들이 그 앞이든 그 뒤이든 이순신과 무수히 악연을 맺었다. 심지어, 성웅의 남자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안위는 왜란 전에는 정탁. 재란 이전에는 이원익과 악연인데, 이 두 노대신이 이순신을 그나마 끝까지 비호한 점에서는 위 확대해석에 반기를 들 수도 있다.

만약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이순신이 새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면 오늘날 '후대에 전공이 부풀려지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전공이나 용력이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100%다.

이 가정을 다룬 이순신의 나라라는 대체역사소설이 출간된 바 있다.[131] 저자는 봉황의 비상, 내가 히틀러라니 등을 집필한 이글루스 블로거 슈타인호프. 단 이 소설에서도 이순신 본인은 단지 선조의 퇴위와 광해군의 옹립을 목표로 반정을 일으켰는데 여러 상황이 꼬여 결과적으로 역성혁명이 되고 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9.5. 화폐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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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이 퇴출되자 500원권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00원이 지폐이던 시절에는 500원권 지폐의 인물로, 100원이 동전이 된 현재에는 100원 동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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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 동전

인물화가 좀... 그리고 타이어 교체주기 측정도구[132]로 쓰이고 있다..

9.6. 이순신체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만들어 배포한 서체. 난중일기의 서체를 분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서체의 유래가 유래라 그런지 무엇을 쓰든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서체로, 트위터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제 진지해야 할 때는 이순신체를 우선 이 문단을 이순신체로 만드는건 어때?다운로드 사이트

10. 관련 문서

10.1. 인물

10.2. 사건

2015년 8월 현재 이순신 관련 고서 중 하나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해당 고서가 없어진 장계별책인가 아니면 다른 책인가로 논란이 되고 있다. *

5대손 이봉상의 경우 워낙 무능해서[133]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이인좌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피살되었는데 이를 보아 충무공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忠愍[134])공으로 추존되고 조상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제수되었다.

참고로 장계별책을 도둑질한 범인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인 덕수 이씨 15대 종부[135]인 최 모씨는 2009년 사기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고, 같은 해에 사채업자 전모씨에게 현충사 소장 유물을 팔아넘기려다 사채업자가 어이가 없어 거부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인 전력이 있고내가 아무리 더러운 일 하고 살아도 그렇지 이건 못 받아!!,[136] 양자와 유산 문제로 법정다툼을 벌이는 여러모로 유명하다. 이것 외에도 한 때 충무공 고택 터가 경매에 나가기도 했지만 다행히 후손들이 되찾았다. 참고로 이게 경매에 나가게 된 것은 종부 최모 씨가 충무공의 유물과 종가 재산을 담보로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덕수 이씨판 오노 요코

10.3. 같이 보기


  1. [1] 물론 상상화이니, 실제 얼굴이라 생각하지 말자.
  2. [2]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2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직 서양에서도 그레고리우스력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4월 28일이다. 참고할 기사는 #
  3. [3] 1931년 이윤재 작인 《성웅 이순신》이란 전기작품에서 처음 이순신을 성웅(거룩한 영웅)으로 칭했다.
  4. [4] 김유신 문서를 가보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인 이순신이랑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 그리고 김유신의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당시 삼국시대의 기록이 부족했던 터라 김부식이 김유신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을 추려서 옮긴 것이기 때문에(원래 행장록은 무려 10권에 달한다고) 실제 역사와 교차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을 보면 김유신이 나갔다고 하면 승리를 거두지만, 실제 당시 신라는 오히려 수도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등의 조선측 기록을 포함해 일본 측 기록들도 풍부해, 상호 교차검증된 것들도 많아, 사실로 인정된다.
  5. [5] 더구나 이순신은 식량, 병력 등의 중앙정부의 지원은 단 한 번도 받지 않고 군대를 운용했으며, 오히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고 여러 필수적인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해진 중앙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또한 한산도 일대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청어를 잡아 이를 군비로 활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모든 이들이 기피하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뛰어다녀 강제징집을 시전해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 뿐이었다. (반대로 원균에게는 5천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참패하였다.) 즉, 이순신은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자급자족의 수단을 찾아 자체 보급을 했고, 그렇게 보급한 병력으로 왜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6. [6] 이외에도 참 비슷한 점이 많은데 기습적인 선빵을 맞고 (어느정도 예측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란 점)전쟁을 시작했다는점, 제대로 된 반격을 했다는 점 방어군이 절체절명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끝끝내 방어에 성공했다는 점, 전쟁 끝까지임무를 수행했다는 점, 전후 갑작스럽게 퇴장했다는 점, 사후 의 전설이 되었다는 점 등... 결정적으로 둘 다 공격자가 일본이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7. [7]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1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도독 벼슬은 '정1품'이다. 명나라에서 친왕급인 선조와 동급. 의전상으로는 황족 대우를 받는 선조보다 밀릴 수는 있어도 품계는 똑같다. 다만, 품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도독직 수여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록되어있으나 정작 수여를 했던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현충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달라 이 도독직 수여가 과연 사실인지는 현재 논란 중이다. 거기에 물증으로 명이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는 이들은 심지어 왜란 직후란 평까지 나온다면 역적으로 몰 수 있는 기반이란 것을 부정하고 하는 통에 논란이 가라앉기 힘들다.
  8. [8]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
  9. [9]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 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공신을 받은 사람은 딱 세 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치 않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신료들이 단호하게 이순신을 상기 등급 공신으로 봉하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선조가 양보한 셈인데, 이는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0. [10] 정1품의 품계.
  11. [11]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12. [12]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영의정이 겸직하는 관직중에 세자시강원의 세자사(世子師)도 있지만 무관인지라 빠진 듯 하다.
  13. [13] 이하는 전사 직전의 관직.
  14. [14] 과거 본 문단에는 이 行자를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실제 받은 품계보다 낮은 직위에 임명될 경우에 붙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증직이 되었을 경우 살아있을 때 지냈던 가장 높은 실제 관직 앞에 行자를 붙인다. 행수법에 따라 行자를 쓸 경우 이는 관계(官階)가 아니라 관직명 앞에 붙어야 한다. 즉 정헌대부 행삼도수군통제사의 식이다.
  15. [15] 정2품의 품계. 과거 설명에는 이를 문관 품계라고 하여 조선이 무반을 천시한 것이며 이순신에게 무반의 품계인 '장군'을 주지 못하고 문반 품계인 '대부'를 준 이유도,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종2품부터의 품계는 문반과 무반을 구분하지 않으며 다만 이들이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대신(大臣)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순신뿐만 아니라 무반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종2품 이상의 대부에 오른 자들의 예도 많다. 애초에 무반으로 병마절도사가 되려면 종2품 가의대부/가선대부를 받아야만 한다.
  16. [16] 시호.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
  17. [17] 실제로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으로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다.
  18. [18] 다만 무반의 경우, 종4품부터 장군이라 불렸다. 특히 선조는 두 번째 백의종군 이후 복직하는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 자리를 주면서 정3품 절충장군의 품계를 주어 장군이라 부르며 깎아내렸다.
  19. [19]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20. [20] 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 장군의 명대사로 이걸 꼽았다. 정말 대단한 것은 이런 각오로 임한 명량 해전의 사망자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
  21. [21] 이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시면서 하는 말씀 중에 적에게라는 단어는 한글로나 한자로나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후세의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상으로 추가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의 말에 적에게란 말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22. [22]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다른 급제자들과 비교하면 빠르진 않지만 늦지도 않은 딱 평균적인 나이에 급제하였다.
  23. [23] 일종의 임시 검열관
  24. [24]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
  25. [25]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만호 이대원 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26. [26]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 수 없다.
  27. [27] 만포 첨사는 특별히 정3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다.
  28. [28] 연산 2년(1496) 11월 13일(병진) 2번째기사 정언 조원기가 이윤종을 만포 첨사로 제수하지 말 것을 건의하다, 연산 2년(1496) 12월 9일(임오) 2번째기사 가자, 김효강, 노사신 부자 등의 일로 구치곤 등이 경연에서 아뢰다, 연산 3년(1497) 1월 22일(갑자) 4번째기사 만포 진장에 무신으로 당상관인 재주있는 자를 보내기를 의정부가 청하다, 명종 12년(1557) 1월 12일(병인) 3번째기사 조광원·이명·목첨·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등의 실록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를 당상관으로 보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9. [29] 경상도의 다대포진의 경우도 특별히 수군 첨절제사를 당상관으로 보임하는 자리였다.
  30. [30] 13척이라는 설이있다.
  31. [31] 2001년에 칼의 노래를 발표한 소설가 김훈도 그의 여행기 《자전거 여행》 2권에서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 내지 '위장된 자살'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정황 증거로만 따지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며, 평소 자신의 주장(예를 들어 자기 지휘권 바깥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중앙의 관리들과도 선이 닿아 있는) 지방 수령과 아전의 무능한 작태나 군납비리, 부정부패의 실상을 낱낱이 적어 조정에 올리고 이들을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조정에서 공개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지 않고 살았더라도 임진왜란 이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정치적 여백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32. [32] 다만 세간에서 인간 이순신을 연구한다는 취지 아래에 무작정 죽기 무서워서 자살한 척 했다는 설보다는, 전란을 끝내겠다는 신념 아래에서 전란을 길게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로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쪽바다에 묻어버린 자신에 대한 속죄로 적탄에 스스로 맞은 것처럼 묘사하는 설도 있다. 중요한 대사는 바로 이 바다는,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물론 이런 설이 있다는 것이지, 자살설이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후술.
  33. [33] 소설《불멸》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정말 그랬는지는 의문이지만, 각종 매체의 이순신의 고문장면은 선조의 병맛스러운 생각에 왠지 단순히 주리를 트는 걸 넘어 하드하게 묘사된다. 특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고문장면은 역대 한국 사극 고문장면들 중 가장 잔혹하기로 손에 꼽힐 정도…
  34. [34] 실제 명군의 주력 전선인 호선(虎船)과 사선(沙船)은 그 크기가 일본 측 전선인 세키부네보다도 작은 배라, 화포조차 제대로 탑재할 수 없었다.
  35. [35] 반란 폭도들이나, 적, 혹은 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해온다면,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해 주겠다는 포고문.
  36. [36] 다만 순조 19년 《승정원일기》에서 다시 면사첩이 언급되기는 한다.
  37. [37] 울산성 전투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설득하기 위해서 명나라 경리 야불수가 직접 영기와 상공기, 면사첩 등을 함께 사람을 시켜 보냈다. 그리고 선조 26년에 황응양이 강화에 있을 때에 면사첩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면사첩의 배포 자체는 조선군 독단으로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38. [38] 이 때문에 선조가 면사첩을 보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임진~정유년 당시 현장 지휘관으로서 면사첩을 받은 장수는 오직 이순신 한 명뿐이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39. [39]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징비록 기준으로는 탄환이 이순신 장군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쓰여져 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체(자살설을 부정하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히 갑옷을 입고 있었을 테니)를 뚫고 나갔다는 것을 보면 유효 타격거리도 아닌 살상거리 안팎에 있어어야만 가능하다.
  40. [40] 노량 해전 당시 진린을 포함한 명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함선의 구조적 문제로 판옥선에 타고 있었다.
  41. [41] 12월의 어두운 새벽(전투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42. [42] 이순신의 대장선이 조총의 살상거리 안에 들어가 싸운 전투는 사천 해전, 명량 해전, 노량 해전이 유일하다.
  43. [43] 당시 총기는 규격화가 안 되어 있어 총마다 성능이 제각각이기도 했다.
  44. [44] 이를 유효 사거리, 최대사거리를 언급하며 부정하기도 하나 에초에 조총의 유효사거리가 짧은 이유는 이 시대 총포는 규격화가 안 돼 있고 강선이 없어 탄도 자체가 엄청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상 가능 거리는 총에 따라, 그리고 화약 양에 따라(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당시 조총은 규격화가 안돼있어 사수가 화약 양을 눈대중으로 넣는다!) 충분히 더 길어질 수 있다.
  45. [45] 그러나 당연히 총열이 버틸 수 있는 이상의 화약량은 총이 터져버린다. 다만 이 때는 제식이 없는, 말 그대로 총마다 성능차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때인지라 평균치도 못 버티고 터지는 경우나 평균치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조총 유폭사고는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46. [46] 조총과 같은 초기 총포는 탄도가 현대와 같이 일정치 않아 사수의 실력에 크게 좌우된다.
  47. [47] 황자총통의 경우 지자나 천자보다 짧은 것이지 당시의 조총보다 짧지는 않다. 황자총통은 최대 사거리가 500보였고, 이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포들 중 가장 짧았던 축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현자총통의 경우 최대 사거리가 2000보에 달했고 이는 지자총통(800보)이나 천자총통(1300보)을 상회하는 긴 사거리였다. 보 단위는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략 1.2m에서 1.82m정도 되는데, 전자인 1.2m로 환산해도 현자총통의 최대 사거리는 2,400m에 이른다. 즉 유효 사거리는 대략 300~400m 정도였다.
  48. [48] 하지만 해전에서 화포의 유효사거리는 보통 지상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육지 사거리의 절반 거리에서 포격해야 '그나마' 유효한 수준의 명중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조총은 들고 쏘기 때문에 그나마 이러한 선체 움직임의 영향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교전 중 조총 사거리 내로 들어가는 것이 생각만큼 무리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란 소리다. 판옥선은 단순 장거리 포격뿐이 아닌 조총에 대한 대응방어와 적함에 대한 유효한 포격, 근접전을 어렵게 하는 선체전고 등 구조적 우위를 활용한 전투를 주로 하였으며 지근거리 교전도 분명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점이 있는데 원거리 포격 만으로 함선을 '격침'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후 전열함 시대만 하여도 충분히 가까운 근접 포격에도 격침되지 않고 중파나 대파에 머무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49. [49] 천자총통 문서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근접사격을 주력 전술로 삼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근접사격만을 주력 전술로 사용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주 전술 중 하나로 쓰였을 가능성까지 부인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50. [50] 선조 109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2월 7일(정사) 1번째기사
  51. [51]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으시고 종래에는 적탄에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의 삶은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을 만큼 극적이다. 그야말로 영웅소설이 현실세계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52. [52] 다만 숙종도 사육신을 충신으로 인정한 바 있는데 사육신이 뭘 했는지 알면 이것 역시도 패륜적이라는 말을 피할 수 없다. 허나 비슷하다고 해도 위 문제는 직계 조상 중 성군인 세종의 장자 계승에서 가장 적합한 장손인 단종을 따른 이였다. 즉 가문 내에 있던 조상과 다르게 여기는 모계와 부계에 혈연적으로 엮인 조상에 의해 지시를 받던 신하가 상국한테서는 동급 직위를 받았다. 이 단어가 여기에서만 등장되었다.
  53. [53] 1592년 한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1706쪽.
  54. [54] 임진장토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
  55. [55] 적선이 모두 격침되었다.
  56. [56]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
  57. [57]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
  58. [58] 7월 6일 출전.
  59. [59] 할복 자살했다.
  60. [60] 8월 24일 출전.
  61. [61] 녹도만호 정운 포함.
  62. [62]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수의 적함을 날려버리는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
  63. [63] 총 5번의 교전이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
  64. [64] 정작 난중일기 5월2일조에는 전투기사가 없다. 확인요
  65. [65] 양측 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 다 없었다. 참고로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
  66. [66]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정도 피해면 조명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적선 50여척을 격파했다는 식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 절이도 해전에 대해 취급했으나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67. [67]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
  68. [68]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군과의 연합 전투다.
  69. [69] 이때 조선군의 피해는,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의 무리한 단독 작전으로 왜군에게 쫓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고, 그 때문에 입은 피해다.
  70. [70]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
  71. [71]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300~500여척의 전선 중 50여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
  72. [72] 어떤 의미로는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른 해전은 군율이나 사전 준비 등의 다른 요소들로 가려질 수도 있지만, 명량 해전은 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당장 이곳 나무위키에서도 명량 해전에 대해 말할 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뢰를 언급 할 정도. 한동안 이를 인식하는 기류가 너무 적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자체가 이러한 가치를 짓밟는 기류가 절대적이었다는 평가로 해석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73. [73] 수적으로 불리했던 이 해전들 중 옥포해전은 기습으로, 한산도 해전은 유인 후 포위. 전술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한 해전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저 명량 해전조차 좁은 물길과 빠른 유속으로 유명한 명량을 끼고 싸웠을 정도로 이순신의 전술적 식견은 대단했다. 물론 최근의 연구를 빙자한 이순신 흠집 만들기인지 이순신 신격화 인지 모를 자료에서는, 명량의 물결이 오히려 전투 초반에 조선군의 기동을 방해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명량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아예 싸울 수조차 없었다. 전술적으로 보자면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포위를 피하고 그나마 유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는 전략면에서도 통한다. 전략적으로 보자면 서해진출에 반드시 필요한 요지인 명량이었기에 일본군이 싸울 생각을 했던 거지, 다른 곳이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74. [74]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밤에 일어나서는 기습이 있을 것 같다고 준비를 하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 휘하 장군들은 (이순신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아닌가 했다고….
  75. [75]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명량해전전에 이순신 장군이 부하장수들에게 왜적들이 기습에 능한데다가 오늘밤 달이 밝지만 간교한 왜적들이 이를 이용해서 오히려 기습을 해올수가 있으니 정신바짝차리고 기습에 대비하라 명령했다고한다. 그리고 이런 그의 예언(?)대로 왜군들이 기습을 걸어왔으며 명량해전전 칠천량해전후의 상태여서 우왕좌왕할 때 역시나 이순신 장군이 몸소 나가 쫓았다는일화가 난중일기에 직접 나와있다.
  76. [76]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 우수영 모두 합쳐 함선이 최대 50척에 불과했는데 반해, 경상우수영은 단독으로 최소 75척~최대 1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경상도가 일본에 접해있는 최전선이기 때문.
  77. [77] 1년 만에 정5품 호조정랑에서 정3품 광주목사로 발탁된 권율도 특기할 만한 선조의 인사행정이다.
  78. [78] 당장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도 명량 해전의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했을 정도로 재해권과 그로 인한 이득에 대해 무지했다.
  79. [79] 유성룡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파직될 때,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80. [80]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의 기거지라는 뜻.
  81. [81]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
  82. [82]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
  83. [83] 이에 대해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씨가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84. [84]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85. [85]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이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슬픔도 있었겠지만, 이면이 이순신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86. [86] 소 5~6마리의 값은 상태가 양호한 호랑이 가죽 1장과 가격이 비슷한데 호랑이 가죽이라는 물건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진상하는 용도로밖에 안 쓸 정도로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87. [87]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횡령, 적전(敵前) 도주는 현대에서도 심하면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는 중죄이다. 다음은 한국 군형법 기준 탈영: 제27조(지휘관의 수소 이탈) 지휘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수소를 이탈하거나 배치구역에 임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2. 전시, 사변 시 또는 계엄지역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 물자횡령: 제75조(군용물 등 범죄에 대한 형의 가중) ① 총포, 탄약, 폭발물, 차량, 장구, 기재, 식량, 피복 또는 그 밖에 군용에 공하는 물건 또는 군의 재산상 이익에 관하여 「형법」 제2편제38장부터 제41장까지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1. 총포, 탄약 또는 폭발물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그 밖의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 적전도주: 제30조(군무 이탈) ① 군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부대 또는 직무를 이탈한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적전인 경우: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88. [88] 권율의 경우 탈영병을 즉결 처분했다 하여 일시 해임되기도 했다.
  89. [89] 현대의 학자들은 만성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90. [90] 의외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난중일기》에서 누가 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은걸 보니, 음주스타일만큼은 두주불사.
  91. [91]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
  92. [92]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등등. 심지어는 세종대왕만 해도 장영실에 대한 석연찮은 숙청이라든지, 화폐 사용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려다 많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나, 팔만대장경을 왜나라에 주려고 한 일, 백성들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면서 본인은 매 끼니 고기를 먹었다는 등의 자잘한 오점(汚點)이 있다.황희정승을 죽을때까지 단물 쪽쪽 빨며 부려먹었다거나…
  93. [93] 사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 연구해서 박사 학위 받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전반 혹은 선조시기 정치사(政治史)와 연관 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쉽 센터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은 경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유명수군도독이 어떠한 의미인지, 20세기 내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94. [94] 얼마나 허술했는지 장부상 오차에 화살이나 군량 정도가 아니라 군함(!!)이 비는 수영(水營)도 있었다!!
  95. [95]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이 자신을 장군이라고 부른 부하에게 개념 없다면서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굉장히 고증이 잘 된 장면.
  96. [96]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
  97. [97] 보통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
  98. [98] 사실 무속 신앙에서는 정말 별의별 인물들을 다 신으로 모신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남이 같은 인물들도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셔진다. 이 외에도 맥아더관우 같은 외국인도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다만 관우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도입된 까닭도 있다..), 하여튼 무언가 대중에 이름이 알려질만한 군인이면 신으로 모셔진다. 맥아더 장군은 아직 죽지않았을 시기 당시에도 신으로 섬겨졌다.
  99. [99] 임진왜란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
  100. [100] 원 한문 텍스트 옆의 일본어 구두 표시(한국의 구결에 해당됨)까지 옮겨 일본어 어순으로 재배열한 것.
  101. [101]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링크된 루리웹 댓글 중에 '계림은 조선을 낮춰 부른 말이다'란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다발을 그냥 고려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그리고 우리도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왜라고 불렀다.
  102. [102]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
  103. [103] 다른 유명한 일화로 러일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했다는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川田功이 쓴 《砲弾を潜りて》(博文館, 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소설이다.
  104. [104]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라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회복 서명운동의 실시를 도모함과 동시에, 한일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듯.(#).
  105. [105] 사실과 다르다. 위의 내용을 읽오 보았다면 알겠지만 명량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이순신 장군은 대부분 왜적보다 우세한 병역으로 전투에 임했다.
  106. [106] 이 부분도 정확치 않다.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당시 203고지등에서와 같이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억지로 인원을 투입하여 겨우 우세를 차지했을뿐 실상은 러시아에 비해 훨씬 많은 전사자를 보이는등 상처뿐인 영광이였다.
  107. [107]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 장군은 보급을 현지에 둔전들을 개척해 스스로 조달하였기 때문에 보급이 끊긴다는것은 근거지를 뺏기는경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당연 무패의 이순신장군은 보급량이 부족할지언정 끊긴적은 없다.
  108. [108] 출처: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이종락 지음, 선인 출판, 2010년, pp.27~28
  109. [109] 출처: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89
  110. [110] 아예 책으로도 나왔다. 여기에는 김유신도 소개되어 있다.
  111. [111]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112. [112] 예컨대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입장 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있고, 교차검증 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
  113. [113] 용장 문서 수정 역사만 봐도 억지가 심하다. 명량 해전 때 단 한 척으로 수 백 척에 맞서 싸운 장수가 어째서 용장이 아니라는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과거에 문무겸비 문서에서 이순신을 빼 버리는 만행도 저지른 전과가 있어 뭇 사람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보내게 만들기도 했다. 전생이 일본인이였는듯
  114. [114] 누차 강조하지만, 당시의 포탄은 말 그대로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포탄처럼 명중순간 포탄이 폭발하는 그런 게 아니다.
  115. [115] 우리는 아주 훌륭한 반대 예시 하나를 이미 알고 있다.
  116. [116] 이 경우 이순신은 근대적 해전을 실전에서 가장 먼저 보인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
  117. [117] 화약 사용량 대비 사거리가 길고, 약한 화력은 산탄을 장전해서 인명 살상용으로 쓸 수 있다.
  118. [118] 물론 해야 한다면 마냥 피하지도 않았다. 아예 일부러 적선에 갈고리를 걸어 접근한 후 근접전을 펼치기도 했다.
  119. [119] 조선군이 백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건 아닌데, 백병전으로 이행하면 순식간에 전투력이나 사기 면에서 밀리며 패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는 몇 배, 어떤 경우는 스무 배가 넘는(용인전투: 왜군 2,000명 미만 VS 조선군 4만여명) 수적 우위의 병력으로도, 왜군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조선의 육지전투에서 증명된다. 100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말 그대로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베고, 쏘아 죽이면서 훈련된 것이 당시의 왜군이었다. 그런 왜군을 상대로, 농사짓다가 끌려와서, 변변치 못한 무기로 어영부영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로 군량도 부족해,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조선의 군사들을 백병전으로 싸우게 하면 어떻게 될 거 같은가?
  120. [120] 실제로 《난중일기》에 병사들이 상륙해서 배 만들 목재를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21. [121] 이 행위는 왜군들도 자주 했다. 전장에서 자원을 모아서 무기를 만들어 싸우는, RTS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임진왜란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엄연히 보급로가 시원찮아 보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지, 국가에서 보급을 안 해줬던 게 아니다.
  122. [122]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를 묘사했다. 극중 군졸인 대만이 도성으로 보내는 공물을 보면서,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거 그냥 확 불 질러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자, 영갑이, '누가 아니래냐? 총알에, 화포에, 피해가면서 전쟁하는 놈들 애쓴다고 곡물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둔전소에서 곡식 나오는 족족 도성으로 보내라, 명나라 놈들한테 보내라, 참말로(…)'라 대답한다. 그에 호응하는 군졸들이나 백성들은 덤. 실제로도 수군 간부/병사들이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
  123. [123] 실제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지휘관의 역량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무기라는 것 자체는 그 나름의 특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 완벽하게 모든 면에서 상대방의 무기를 상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즉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 그 예로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는 미국전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은 포의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장갑에서 뛰어났던 것이지, 속도나 양산능력, 신뢰성, 정비성에선 미국에 한참 밀렸다. 그래서 독일의 높은 포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두꺼운 장갑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장거리전투나, 매복전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반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물량이 많고 보급이 빵빵한 미국에 비해 불리했다. 당시 독일의 명장이라 불린 장군들은 이런 독일전차의 특성에 맞게, 상대방을 자신에게 유리한 장거리전이나 장애물이 많아 매복하기 좋은 곳으로 이끌거나, 상대방이 지나갈만한 길목에 매복부대를 배치해두는 등, 자신의 무기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에 비해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운용하고, 독일무기의 진가를 발휘할 상황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높은 전과를 올렸고 명장으로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무기의 성능이 앞선다는 것만으로는, 수적으로 독일을 압도하는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전차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받던 미국전차도, 미국의 명장인 조지 패튼이 미국전차의 우월한 기동성을 활용, 상대방의 주력부대를 만나면 우회해 다른 길로 새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독일군 전선 깊숙이 들어가서 전선을 교란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운용함으로써,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버린 것을 보면, 무기는 그 자체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적과 아군의 무기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증명해준다. 실제로도, 한체급 떨어지는 T-34전차 한대로, 비숙련 인원들이 모는데다 첫 출전이라서 전차의 특성도 파악이 안된 티거 2전차 세대를 박살낸 소련군의 알렉산드르 오스킨 중위의 사례나, 저 위 패튼의 창끝이라고 불리며 역시 한체급 아래인 셔먼 전차들을 이끌고 중전차대대 수준의 전적을 내고 다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의 경우를 봐도 유능한 지휘관의 가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조선군의 무기가 비록 뛰어났을지라도 전쟁준비가 잘 갖춰진 일본군은 더 많은 물량이 있었고, 여러모로 일본수군이 조선수군보다 조건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유념해야할 필요가 있다.
  124. [124] 하지만 등패수(籐牌手) 의 경우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후,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
  125. [125] 당파로 적의 창을 잡으면 장창병들이 찌르는 방식
  126. [126] 도검과 방패를 사용하는 팽배수가 많이 활동하던 조선 전기 오위진법에서도 공식적으로 철퇴나 도끼로 도검을 대체할 수 있었다.
  127. [127] 특히 마상무예에서 검을 쓰는 것은 기예 수준으로 취급되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참조.
  128. [128] 참고로 이순신 장군과 마찬가지로 잔 다르크도 무조건 프로파간다로 띄어진 인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일부 오류가 있다. 문서 참조.
  129. [129] 애초에 '멸사봉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길들이기에 자주 사용하면서 등장한 단어로써 멸사봉공이라는 단어에서의 '공'이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가리킨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일본측 위키피디아 설명에서는 <전국책>의 진책에서 따온 단어로 패전 이전까지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교육으로써 도입됐으며, 일본 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기업 내 (마치 봉건 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관계나 다름없는) 상하관계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하고, 과도하게 강조될 경우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출처: 이윤옥 저 <오염된 국어사전> 27쪽~32쪽 및 일본어 위키피디아 '멸사봉공' 설명)
  130. [130] 이 사건이 무관들 사이에 널리 퍼져서 당시의 군관들 치고 이순신이 이일에게 모함당한 사실을 모르는 군관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으며, 그래서 선조가 이일을 상주로 내려보낼때 서로 이일의 부장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바람에 선조가 어쩔 수 없이 장기군관을 이일에게 배속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131. [131] 구칭은 큰칼 짚고 일어서서.
  132. [132] 머리 쪽을 타이어 주름에 넣어서 관모 양쪽의 장식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바꿔야 한다.
  133. [133] 오죽하면 한번은 탄핵 이야기까지 나온 적도 있다(...). 다만 이는 이봉상이 잘못을 저질러서라기 보다는 그냥 워낙 무능해서(...) 그런 것이다.
  134. [134] 충성 충 애쓸 민 으로, 충성심은 높이 사나 딱히 뭘 한 것은 없기에 그냥 '절개를 지키려 애썼다'는 뜻이다...
  135. [135] 宗婦. 가문의 종손의 부인을 일컫는 말.
  136. [136] 다만 이 경우 사채업자의 입장에서 현금화하기 어려워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는 현금화하기 어려운 재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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