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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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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193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94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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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1938

이오시프 스탈린
1939

윈스턴 처칠
1940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1

이오시프 스탈린
1942

조지 C. 마셜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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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Joseph Stalin)

생몰년

1878년 12월 18일 ~ 1953년 3월 5일

출생지

러시아 제국 그루지야 고리

사망지

소련 모스크바

정당

소련 공산당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종교

없음(무신론)[1]

배우자

에카테리네 스바니제,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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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이콘

엄지에 힘은 빼시죠 십자가로 숙청할 기세 오른쪽 그림은 무슨 상황을 표현한거지? ? [2]

스탈린 찬양영화 "스탈린의 영광"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회담 같은 사진같이 서방기자들이 찍은것을 제외하고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여러 이유로 뽀샵질로 처리된 것이 많지만 이 동영상은 해상도가 낮아 조작이 어려워 그나마 가공이 안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중들이 지루해서 턱을 괴고 있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스탈린의 연설을 들으려 귀에 이어폰을 대기 위해서임이 영상에서 확인된다. 소련이 다민족국가라서 소수민족 언어로도 번역해서 들려 준 것인지, 걍 음량 좀 더 키워서 들려 준 것인지(…)는 불명. 엄청난 연설능력을 가졌던 레프 트로츠키아돌프 히틀러[3]와는 달리, 스탈린의 연설은 매우 평이하게 원고나 읽는 수준이었다.[4] 일단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어모국어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말이 없는 성격이었다. 이렇기에 더 무섭다 말이 없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듯 하면서 무심한듯 시크하게 숙청을 내리는 강철의 대원수 클라스 러시아어를 조금 아는 사람은 눈치채겠지만 스탈린의 연설에는 러시아어 특유의 억양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1. 이름
2. 개요
3. 생애
4. 업적에 대한 평가
4.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
4.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4.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4.4.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
4.5.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5. 대인관계
6. 가족사
6.1.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6.2. 차남 바실리 스탈린
6.3.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6.4. 아내들
6.5. 사생아
7. 믿거나 말거나
8. 의심과 불안
9. 이야깃거리
10. 평가
10.1. 현재 러시아의 평가
10.1.1. 긍정적 입장과 평가
10.1.2. 부정적 입장과 평가
10.2.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
10.3. 성 스탈린?
10.4. 한국북한에서의 평가
11. 미디어믹스
12.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
13. 어록

1. 이름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5]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아버지의 이름인 베사리온. 따라서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라는 이름의 영어 표기인 조지프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영미권 국가에서 만든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도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사람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주인공은 말하자면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었다. 스탈린의 친구였다가 후에 숙청된 부하린은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6][7].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도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스탈린을 이렇게 부르던 사람들은 훗날 어떻게 됐을지는...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 수많은 가명과 별명, 필명이 있다. 하지만 대체로 동네 친구나 어머니와 같은 가족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등등...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칭은 항목명과 같은 스탈린.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는데, '스탈린'이란 '강철 사나이'라는 의미이다. 쇠돌이? 아이언맨? 맨 오브 스틸?성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며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측근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8] 수없이 많은 가명들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정말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쓰고나서 부터이다.

2.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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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후진국이었던 소련을 동시기 강대국에 필적하는 위치에 올려놓고[9] 나치 독일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지도자인 동시에 수많은 인민들을 학살하고 숙청한 독재자인간분쇄기이자 공산주의를 타락시킨 원흉

철의 장막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하여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을 건국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레닌 사후 교묘하게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권력을 장악한 이후 독재를 벌이며 정적과 반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명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10] 한편,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낙후된 농업 사회 기반의 소련을 우크라이나 대기근등의 피해를 보고도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학공업 위주로 급속도로 발전시켜서 초강대국이 되는 발판을 놓았다.

세계에 전운이 감도는 와중, 나치 독일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독일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개시되며 연합국에 가입,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대숙청으로 말미암은 소련 내부의 혼란을 비롯한 여러 문제로 초기엔 큰 피해를 입었지만, 2천만을 훌쩍 넘기는 인명을 견뎌내며 끝끝내 승전하였고, 인민을 희생해 이룩한 공업화는 소련을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자리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캅카스조지아 출신이다. 그래서 빡친 캅카스 주민들이 스탈린을 죽이려고 만들어낸 것이 바로 캅카스 룰렛이라 카더라[11] 러시아 출신이 아닌데도 그는 평생 러시아의 내셔널리스트였다.[12] 그의 반대 선상인 극우에 서있던 아돌프 히틀러 역시 독일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역사 속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3] 1913년에는 캅카스 민족들은 우월한 러시아 문화에 머리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스탈린을 가리켜 볼셰비즘을 러시아-슬라브 민족주의로 바꾸었다라고 평가한게 결코 틀린 말 아니다. 현재 학자들까지도 히틀러의 평가가 일리있다고 본다.[14] 더욱 흥미있는 점은, 볼셰비키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스탈린은 당 내에서 대표적인 민족문제(특히 소수민족 문제) 전문가라는 평판을 얻었다는 점이다. 실제 스탈린 선집에는 민족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논문이 들어있기도 하다.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자로 지구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권력자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다. 스탈린이 실시한 대숙청 및 기타 숙청 작업에 의해 죽은 숫자만 약 60만명 정도로 추정되며, 굴라크에 끌려갔다가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사망자는 좀 더 많아진다. 한편 서방 쪽에서는 대체로 200만 정도로 측정하며,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재자들>의 저자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180만 정도로 추산했다.[15]

흔히 대숙청이 1937~1938년 대숙청 기간에만 진행되었다고 오해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1945년을 제외하고는 대숙청 기간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소련인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사회 전반에 대한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에 더 강해진 면이 있다.

후퇴하는 비겁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70호(1941년 8월.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16]와 악명높은 형벌 부대를 만든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227호(1942년 7월 형벌 부대 창설명령) 등이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그의 피비린내나는 똘기 예술적(?) 사상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이다. 붉은 군대 내 방첩부의 이름을 지을 적의 일화를 보면 그의 예술적 똘기가 잘 나타나는데, 그가 직접 제안하여,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들을 따서 스메르쉬(СМЕРШ)로 지었다. 이것이 그냥 별명이 아니라 공식명칭이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간첩사살"을 기무사령부 공식명칭으로 한 셈.[17]

멋있는 카이젤 수염을 기른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으나[18] 사실 공식 사진 대다수가 곰보자국을 지운 편집판. '인민의 뽀샵질'이 아니라 '인민의 에어브러시'질이 이루어졌다. KGB의 검열기구 내에 이를 위한 특별팀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레닌 시절부터 에어브러시질은 소련 정권의 필수품이었다. 한 사람이 숙청되면 곧바로 공식 사진에서 그 사람 얼굴을 날려버려야 했으니까. 이것이 소설 1984의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뽀샵질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레닌의 연설에 모인 사람들을 수십배로 뻥튀기한 사진 등이 있다. 혹시 포토샵은 KGB 출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아닐까? 스탈린은 어린시절에는 아버지의 상습적 폭행과 천연두를 앓은 관계로 그렇게까지 미남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자라면서 많이 잘생겨졌다.긁지 않은 복권? 그렇지만 마차 교통사고로 왼팔을 제대로 쓰지못해 병역도 면제될 정도였다. 키도 163cm 정도였는데[19], 그당시의 키로서는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김정일과는 달리 높은 구두깔창를 신어서 키를 커보이게 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사람은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재자들과는 달리 권력 자체에만 탐닉했을 뿐, 허세를 부리거나 사치를 일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독소전쟁 전까지는 군복이 아니라 그냥 인민복 차림으로 다닐 정도.

3. 생애

문서 참조

4. 업적에 대한 평가

4.1. 공업화의 신화적 성공

속도를 늦추는 것은 낙오다. 낙오자는 두들겨 맞는다. 하지만 우리는 두들겨 맞지 않는다. 결단코 맞을 수 없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낙후되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짓밟혀온 기록이었다. 몽골의 칸이, 투르크의 총독이, 스웨덴의 왕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가,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가, 일본 군벌이 끊임없이 우리를 짓밟아왔다. (중략) 우리는 자본주의 열강에 한세기에서 반세기 이상 뒤처져 있다. 10년안에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의 미래는 없다. 그들을 따라 잡을 것인가 그들에게 잡아 먹힐 것인가. (1931년의 연설)[20]

하여간 결과로만 봐서는 후진 봉건 사회였던 러시아를 미국과 맞먹는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다. 원래부터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을 표방했으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생산력을 들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생산력을 증가시키는게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생산력 증가에 올인했다. 특히 철강과 전기 생산이 중점적으로 강조되었다.

스탈린은 1928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하여 산업화[21]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22]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소련은 스케일이나 범위, 강도에서 독일과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스탈린도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심지어 체포당일 처형되던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는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훨씬 편한 전용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이 케이스. 물리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이름인 레프 란다우(196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는 서슬퍼렇던 대숙청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스탈린이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더욱 경이적이었다. 그 결과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에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당시 영국 식민지 인도제국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던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미국까지 넘보는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못해도 5강(20세기 초반까진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함께)에는 꼭 드는 나라였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그 덩치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율은 90%에 육박했지만,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4]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5.8%.[25]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26] 이후 만주국을 비롯한 신생 국가들의 산업화 모델이 되었고, 특히 만주국과 연관성이 있는 박정희가 "5개년 계획" 등을 벤치마킹했다.[27] 김일성도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말 그대로 망했어요.[28]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29]

4.2.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상당부분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30]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31]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 [32]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33]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34]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35]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을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최소 700만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라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선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36]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0~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1000~1100만명 정도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37]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결국 이런 삽질들은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2~23%,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38]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39]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소련 농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농업 계획을 수립할수립할수립할.

그러나 어쨌든 당시의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의 반밖에 안되는 경제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소련은 북한과 같은 막장국가는 아니었다.[40]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41]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박노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소련의 붕괴에는 미국 부자들처럼 엄청난 부를 손에쥐고 살고 싶어했던 소련 "높으신분들"의 욕심도 작용했다고한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이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스탈린 시절 잠시였고, 잘하나 못나다 똑같은 봉급을 받으니 게으름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 덕택에 1960년대부터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일뿐이었다. 어차피 일을 대충 대충한다해도 대놓고 봉급이 크게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저서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사회주의를 좀먹는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급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치밀한 계획없는 시장경제 도입은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인민의 삶은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막장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것. 여기에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들이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간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명약관화. 그러나 옐친 대에는 애써 모은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임금수준이나 사회보장제도가 소련대에 비해 형편없이 뒤떨어지면서 많은 러시아인들은 저임금빈곤층으로 굴러떨어져나갔고, 많은 러시아인들은 적어도 삶의 질의 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 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4.3.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급진적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42] 이게 꼭 소련의 경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하니까...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43] http://ko.wikipedia.org/wiki/영국의_농업_혁명을 보면 알듯이 영국의 산업 혁명은 원래 농업 혁명부터 시작된 것이며 한국의 저곡가 정책 역시 흔히 왜곡되는 것과는 달리 농업 보조금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자유롭지는 않아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크게 발흥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무자비한 식량 수탈은 다 이런 맥락에서 온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일본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일본 농민들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이촌향도 현상은 원래 농촌에 있던 실업자들이 새로 일자리가 생긴 도시로 떠나는 현상이며 농촌이 가난해지거나 착취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44]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45]를 야기했으나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허상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쳐발리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46] 실제로 1920년대에 투하쳅스키가 붉은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하간 이런 닥치고 밀어붙이는 스탈린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탈린과 대척점에 선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IS(국제 사회주의. 이슬람 국가아니다) 등의 소수 시각인데, 일리가 없는 시각도 아니지만[47] IS 자체는 좌파내에서도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될 정도로 급진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한/했던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을 정부가 자본가인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마찬가지 이유로 북한도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친북이 아닌 반북이 된다.

여하간, 적어도 수성, 발전의 측면에선 스탈린이 트로츠키보다 나은 인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2차 대전의 이후 잭팟으로 전지구의 상당부분이 공산화되지 못 했을 것도 사실이다.

4.4. 외교적 승리와 초강대국이 된 소련

또한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는 얄타 회담에서의 외교적 승리가 있다. 얄타 회담을 통해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불안함을 이용하여 대일전 참전을 약속하는 대가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확장을 보장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만주 작전을 통해 70만의 관동군을 2만의 사상자만으로 제압하는 위업을 달성하여 한반도의 북쪽의 38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과의 합의가 없었다면 아마 한반도 전체는 소련군이 점령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유럽 각국에 공산정권을 세워서 소련과 서방의 완충지대를 마련했다. 2차대전에서 폴란드 침공의 결과 독일과 국경을 맞대었다가 독소전쟁 초반에 거의 나라가 망할 지경이었음을 상기하면 스탈린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희생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같은 경우는 수백만의 일본군을 대륙에 잡아놓는 대가로 약 2천만 가량의 인명을 희생당하고도 전후 처리에서 6주만에 참패한 프랑스보다 떡고물을 못 얻은 것을 보면 스탈린이 외교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은 명백하다.[48]

2차대전이 끝난 이후의 스탈린은 인류란 종족의 정점에 올랐다고도 평할 수 있다. 미국의 대통령은 스탈린과 정치적으로는 대항점에 있었지만, '짧은 임기'를 지닌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한계 상 국가 전체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인 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4.5.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독일의 소련침공 초기 대숙청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독소불가침조약을 믿었던 점과 히틀러를 과소평가해 독일의 초기침공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점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가십거리에 오르내리기 좋으나, 국가총력전의 형태로 흐른 당시의 전쟁에서 미하일 투하쳅스키계열의 게오르기 주코프세묜 티모셴코등을 등용했다는 점과 미국의 랜드리스를 받아 투하쳅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을 해냈다는 점이 특기할만한데, 사실 이 부분에는 히틀러가 무능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이전문단에서도 나오다시피 스탈린은 초반의 충격을 털어낸 채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정을 챙겼는데, 군사적능력이 전무한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정치장교로 시작했던 스탈린의 능력보다는 대규모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주코프와 같은 고위 군장교들 보다는 무리가 있었고, 작전의 대부분을 주코프에게 맡기고 본인은 행정을 맡아 전시의 행정을 처리해나갔는데, 이는 히틀러와 대비되는 점이었다. 즉흥적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이에 관여한 히틀러와는 달리 스탈린은 철저한 분석과 현실적인 안목을 통해 주코프와 일선 야전사령관들의 업무에는 그다지 개입하진 않았다.[49]

공업화정책을 통해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전쟁지휘능력과 대숙청, 정치장교제도를 빼고본다면 스탈린이 관료로써의 능력이 제법 괜찮았음을 알 수 있는데, 혁명기부터 행정분야를 도맡아 처리한 점과 권력을 잡고 난 뒤에는 의욕적으로 중공업에 대한 투자를 한 점이 독소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했다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5. 대인관계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서기장은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는 자리였으며, 특히 개인 숭배가 절정을 이루었던 스탈린 집권기에는 단순한 독재자를 넘어 황제와 유사한 지위에 있었다. 때문에 스탈린과 당대 주요 열강 지도자들 간의 대인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 정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아돌프 히틀러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나치당의 리더인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예나 지금이나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태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비록 2차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기도 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독재 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히틀러는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고 말하기도 했고,[50]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51]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한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봤지, 히틀러 그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말하며 대숙청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딸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 '히틀러와 함께 했으면 무적이었을텐데' 하는 식의 넋두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비슷해보이는 행적으로 라이벌로 보이는 히틀러와 스탈린[52][53] 사실 실제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스탈린의 통치술은 히틀러보다는 훨씬 치밀하고 정교했다. 일반 행정측면만 봐도, 스탈린은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행정에 무능이 아니라 아예 무관심에 가까웠을 정도이다.[54]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히틀러는 괴링, 히믈러, 보어만, 슈페어, 괴벨스 등의 수많은 2인자들의 전횡을 방치했고,[55]이들의 불화 때문에 제3제국은 국력의 낭비가 심했다. 반면 스탈린은 당내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한 뒤 대숙청 기간에 자신의 측근들 사이에서 다툼이 난 것도 모조리 교통정리했다. 또 둘의 차이는 외교적 측면에서 보아도 극명한데, 히틀러가 계획 없이 지르고 보는 성향이 강하다면[56] 스탈린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정도로 철저하게 계산해가며, 어떻게 보면 소심하다고 할수 있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증거는 많다.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던가, 한국전쟁을 허락받으러 온 김일성을 수십차례 쫓았다던가, 한국전쟁 참전조차도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한다던가.

여담으로 스탈린과 히틀러가 직접 만난 적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없었으나 한 때 같은 도시에 머문 적은 있었다. 1913년 빈에서 스탈린이 기거할 때 히틀러도 거기 있었던 것. 심지어 그 때는 티토도 빈에 살았다고 한다.

5.2.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루즈벨트, 스탈린, 처칠은 연합국의 세 주축인 미국, 소련, 영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전시의 전략적 결정 및 전후처리를 위해 여러 차례 회동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인상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도리가 없지만, 루즈벨트는 파시즘에 대해서는 강경했던 반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유화적인 입장이었고, 때문에 전쟁중에 이루어진 몇 차례 회담에서도 루즈벨트와 스탈린은 상반되는 이념에 비해서 다소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라는 불편한 동맹국 지도자의 호의를 철저히 이용할 능력과 의도가 충분한 현실주의자였고, 국제연합이나 자유선거 등 미국의 다소 이상적인 전후 구상에 장단을 맞추어주는 대신[57] 동유럽중앙아시아 등지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공인받는 데 성공했다. 당시 소련의 절망적인 상태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자본과 공업력이 건재한 데다 렌드리스를 통해 사실상 연합군의 전쟁물자를 대부분 책임진 미국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는 전후 냉전의 주도권을 내줄 뻔 한 루즈벨트의 대표적인 실책이자 스탈린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이쯤되면 진짜 루즈벨트에게 전승훈장 줘야할 기세

그러나 루즈벨트가 소련에 유화적이었다는 것을 실책으로 보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본 것이고, 당시 시점으로 보면 루즈벨트도 스탈린에 휘둘린건 아니다. 미국도 전통적인 고립주의자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전후처리를 두고 소련과 아웅다웅하기는 힘들었고, 스탈린은 이를 잘 이용한 셈이었다. 또한 루즈벨트가 단순히 스탈린에게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대일전 참전 약속은 받아냈으며, 이는 사실 2천만명 넘게 희생한 소련을 다시 큰 희생이 요구되는 다른 전쟁으로 끌어들인 것은 매우 큰 소득이었다.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군의 관동군 궤멸로 일본이 쉽게 GG친 것처럼 보여서 사실 소련의 대일전참전은 가볍게 여겨지고 있지만,미국은 일본 본토 점령전에 거의 100만이 넘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일본과 중립조약이 되어 있는 소련을 여기 끌어들이기 위해 유럽에서 대폭 양보를 한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인해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소련 역시 몰락 작전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을 것이다. 그만큼 소련군에게도 이득이 있긴 있었겠지만(이를테면 한반도, 일본 북부) 독소전쟁에서 이미 연합군 최고의 피해를 입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5.3. 윈스턴 처칠

루즈벨트와는 달리 처칠은 전후에도 떠오르는 미소의 도전을 뿌리치고 대영제국의 영광을 유지하려는 입장이었다. 제국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고 철저한 반공주의였던 처칠이 각국의 반제국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강철의 독재자인 스탈린과 친하게 지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럽 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해온 영국으로서는 19세기 그레이트 게임 시절부터 늘 그래왔듯이 안보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전후 패권국으로 부상할 것이 자명한 소련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견제해야 했으며, 이는 제2전선 문제나 자유 폴란드의 전후 처리, 독일 분할 문제 등의 사안을 두고 양국의 첨예한 대립과 의심으로 이어졌다. 처칠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복고를 비롯하여 구질서 회복을 외치기도 했지만 구 오헝 제국의 영토를 자기 배당금으로 받아야 할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조차 탐탁치 않아 했다. 그러나 쇠퇴해 가는 대영제국의 힘만으로 소련에 맞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처칠은 독일의 항복 후에 잔존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뒤통수를 벌이기에는 미국이 여기에 매우 소극적일 것 같고,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건 매우 여론이 안좋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영국군 참모부가 유럽전선에 전개된 소련군이 서방 연합국에 비해 3배 많아서 이기기 힘들다는 평가를 내려 취소했다.[58] 처칠의 반소련 정책은 미국의 미온적인 반응과, 결정적으로 처칠 자신이 종전 직후에 실각하면서, 처칠과 스탈린의 대결은 스탈린의 판정승으로 돌아가게 된다.

5.4. 해리 S. 트루먼

종전을 얼마 앞둔 1945년 첫 집권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어리벙벙하고 무능력해 보였고, 그가 친했고, 또한 존경한 루즈벨트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고까운 존재였다. 물론 트루먼은 빠르게 새로운 직위에 적응했고, 반공주의자이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트루먼의 입장에서 미소간의 대규모 첩보전이나 베를린을 둘러싼 갈등, 동유럽 및 제3세계의 연이은 공산화 등 일련의 시대적 흐름은 스탈린과 소련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게 했으며, 스탈린의 입장에서도 서방 연합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벌어진 공산주의에 대한 탄압이나 마셜 플랜 등으로 대놓고 소련을 견제하며 적성국 취급하는 미국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미국이 전쟁 동안 보여준 압도적인 생산력과 핵무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을, 미국은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저항정신과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기갑전력을 각기 두려워했고, 양국 모두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물론 이건 아예 본진이 털린 소련이 훨씬 더 심각했지만 또다른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다행스럽게도 미소간 전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이 만주 작전으로 만주를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폭풍처럼 밀고 내려오면서 38선을 경계로 미소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고, 급기야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의 첫 포화를 알리게 된다. 다만 스탈린은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히틀러처럼 과대망상증 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고,(일부 반공소스가 주장하듯이) 미국과의 세계대전을 꾸미려는 인물은 아니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군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어쩔수 없이 공군을 참전시키면서도 미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엄청나게 신경썼다.

5.5. 마오쩌둥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역전하여 승리하자 "승자는 비난받지 않는다"고 말하며 마오쩌둥을 인정하고 중공 정권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하고, 기술고문을 파견한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에 나온 마오쩌둥의 후기저작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즉, 스탈린은 기술과 생산력을 사회주의로 가는 가장 큰 요소로 보았는데, 마오쩌둥은 그 반대로 인간의 의지를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스탈린의 사상을 비판한것. 마오는 스탈린이 70퍼센트의 위업과 30퍼센트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평했다.[59] 중소관계가 최악이었던[60] 1969년 10월 1일 국경절에 톈안먼 광장에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세웠다.

5.6. 김일성

한마디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빵셔틀이자 히다바리였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오만방자한 김일성이 유일하게 무서워한 사람이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으며, 히틀러와 맞먹는 똘끼를 자랑하는 개쌍또라이 김일성이 유일하게 정상인이 될때가 바로 스탈린과 만날때였다고 한다.미친놈은 자기보다 더 미친놈을 무서워하는 법 소련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북한의 지도자가 된 만큼 김일성이 비정규직 청소부라면 스탈린은 대기업 회장 관계로 스탈린이 살아있는 동안 김일성은 스탈린 눈치를 항상 살펴야 했다.

마오쩌둥에게조차 강요해서 6.25 전쟁을 지원받기로 약속받았던 그 김일성은 오직 스탈린에게만 굉장히 무서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으나 무려 48번이나 빠꾸를 먹고 쩔쩔맸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2118018

그럼에도 김일성은 그 전쟁만은 무조건 일으켜야 했기 때문에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머리 터지게 말을 만들어냈고 결국 애치슨 라인을 열심히 설명해서 스탈린에게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계속 설명해서야 간신히 전쟁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았어도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 중에서 육군은 아예 내주지 않았고 극소수의 공군만 지원했다. 물론 그 뒤 인민군이 깨져서 패주하는 꼴을 쳐다만 봤다. 심지어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이 시종일관 수세에 몰리고 있는 와중에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기도 했다. 소련은 세계대전을 우려해 공군의 참전조차 감추었지만, 미국도 이를 인지하고서도 문제삼지 않았다. 미국도 전쟁의 확대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북한군이 점령지에서 대대적인 인민재판을 통한 학살로인하여 점령지에 민심을 잃고있다는 소련군 보고를 듣고 " 김일성 그놈은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왜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북한에서 김일성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어 그냥 둔것일뿐.

하지만 죽기 1년 전 간이 부었는지 노망이 들었는지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고 지껄이기도 했다. 지옥에서 '친구'에게 쪼인트 까였을 듯

6.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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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결혼하여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사생아 아들이 세명 더 있다'는 설이 있다.[61] 사실 가족에게도 냉혹한 성격으로 처자식조차 믿지 않았다. 야코프 자신도 이런 저런 일로 자살 기도를 한 적이 있었고, 스탈린은 그 소식을 듣고 그 놈은 총도 제대로 못 겨누는 군인이라고 했다.

6.1.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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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주가시빌리(Яков Джугашвили, 조지아어로는 이아코브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는 첫 결혼에서 탄생한 아들이며 그루지야에 남겨져 조모에게 길러지다가 아버지인 스탈린이 최고권력자가 되자 모스크바로 와서 살게 되었다. 2차대전 당시에는 포병장교로서 군에서 복무하다 독일군에 포로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신이 직접 명령으로 '독일에 투항하면 반역자로서 취급하고 그 가족들도 피해를 받게 하라.'라고 항복을 못하게 강력히 지시해놓은 상황이었는데, 스탈린은 실제로 아들의 가족을 투옥시켜버렸다. 그 가족 중 애비는 당연히 열외로 하고[62] 게다가 '내 아들이라 하더라도 반역자는 가만 놔둘 수 없다.'라고까지 하는 등 완고했는데, 아들은 결국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

이래서 그런지 "스탈린은 가족에게도 냉정했던 철면피다."면서 그를 비난하기도 하는데 전시 지도자로서는 솔선수범을 했다고 봐야 한다.어느 나라 정치인들과는 비교된다. 스탈린의 두 아들은 모두 제2차 대전에 참전해서 최전선에서 사지를 넘기는 근무를 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할만하다.[63]

스탈린은 며느리를 반역 행위로 수감했지만, 야코프는 그래도 포로생활을 의연하게 했다고 한다. 독일 측이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지닌 야코프를 전향시키려고 했는지, 독일의 거지같은거대한 군수공업을 보여주었지만,[64] 야코프는 소련측이 최후에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독일 측은 다시 야코프를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그런데 기밀 해제된 그 측근들의 증언 등에 따르면 스탈린은 가끔 아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들을 했으며, 여러 번 야코프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포로협상과 구출작전도 계획하고 실행도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구출작전에 대해서는 스탈린에게 '감히' 언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게오르기 주코프가 구출작전 이야기를 물어보긴 했다고 한다. 스탈린 역시도 동의하고 구출작전을 지시했으나, 실질적으로 구출작전을 실행할 방법이 없었다. 야코프는 매우 불확실한 정황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비밀해제된 러시아의 자료로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초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원래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전쟁 전에 자살기도를 했으나, 총을 제대로 못쏴서 상처만 입었다.

한편 독일 측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야코프를[65] 바꾸자고 소련 측에 제의했으나, 스탈린은 "모든 소련군 포로와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야코프는 전우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라며 거절했다. "중위랑 원수를 바꾸자니 뭔 개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고도 한다. 모범적인 지도자구먼. 한편, 파울루스 원수는 "아니, 원수 씩이나 돼서 상병 나부랭이[66] 따위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웃기는 소리지."라 말하며 그대로 소련에 투항했다.

여담으로 스탈린은 거꾸로 장제스에게 비슷한 제의를 한 적이 있었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자로 모스크바에서 유학하고 있었는데 장제스가 상하이 사건을 일으켜 공산당을 쓸어버리고 소련과 단교하면서 장징궈는 장제스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맹비난하고 소련에 잔류했는데 사실상 스탈린이 잡고 있는 볼모 신세나 다름 없었다. 스탈린은 장제스에게 중화민국에 억류된 공산주의자와 장징궈를 맞바꾸자고 제안했는데 장제스는 국가의 이익을 사사로운 개인의 정과 바꿀 수 없다고 역시 단호히 거부했지만 자신이 못난 아버지라고 수없이 자책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맨 처음 야코프를 얻었을 때 매우 기뻐했으며 아기가 울지만 않는다면 키스하고 코를 간질이며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하지만 야코프가 울면 일에 방해가 된다고 짜증을 내곤 했다.

6.2. 차남 바실리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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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군 소장 예복을 입은 바실리 스탈린. 얼굴 생김새가 아버지의 유년기와 매우 비슷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요즘 관점에서도 훈남으로 보인다.[67]

둘째 아들인 바실리 스탈린(Василий Сталин)[68]은 지상공격기 IL-2 조종사였는데, 26번 출격한 공로로 물론 아버지 후광도 있었겠지만 20대에 공군 장성까지 되었다. IL-2는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손실율도 엄청났기 때문에 위험한 임무를 수행한 것임은 틀림없다. 둘째 아들은 전후까지 생존하였는데, 모스크바에서 승전기념 에어쇼를 하다 충돌사고가 일어나자 스탈린이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고 정말 아들 강하게 키우시네요 스탈린 사후 아버지가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술에 쩔어 살다가 41세로 요절했다. 흐루쇼프가 제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아버지를 모독한 것에 대한 회한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가 없는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자기를 찢어죽일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한다.

라리사 바실리에바의《크레믈린 여인들》에 따르면 부하린이 어느 때 스탈린을 만나러 갔을때 스탈린은 갓난 아기였던 바실리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아기가 콜록거리며 우는 걸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아, 괜찮아. 애한테 좋은 일이라구. 연기를 뿜어주면 이 놈이 강해진단 말이오!"라고 했다. 흠좀무[69].

6.3.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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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미국에서 인터뷰를 하는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는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머리는 꽤 좋아서 러시아어는 물론,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에도 매우 유창했고, 최고 명문대인 모스크바대학을 나와서 번역자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두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딸에 대해서도 그다지 특전은 주지 않았고, 분가 후 생활은 서민처럼 했다고 한다. 첫번째 결혼에서 대학시절 만난 교우와 결혼했다가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그 이혼이 스탈린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혼 이후 스탈린이 자신의 관저 옆에 그녀의 집을 만들어 놓고 그녀를 사실상 감금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유대계 시나리오 작가 알렉세이 카플레르를 스탈린이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여러 차례 총살시키려고 했었으나, 결국 굴라그로 보냈는데, 스베틀라나가 이 때문에 스탈린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스탈린이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씨였던 스탈리나(Сталина, 스탈린의 여성형 성씨)를 그녀의 어머니이자 스탈린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의 성씨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심복인 즈다노프의 아들과 두번째로 결혼했다가 자식낳고 얼마안가 이혼하고, 다시 결혼은 하지 않고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 이주하여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피터스 라는 성은 미국에서 재혼한 세번째 남편 건축가 윌리엄 피터스의 성을 딴 것. 그와의 사이에서도 딸을 한 명 낳기도 하였다.

1984년에는 두명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하여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소련 당국의 강요였는지, 자의에 의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라며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년도 채 못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소도시 리치랜드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며 극도로 폐쇄된 생활을 했다. 그 후,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스탈린이 내 인생을 망쳤다. 어딜 가던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언제까지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 전에 소련에 있을 당시에는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스탈린은 도덕적, 정신적인 괴물이다."라고 공개비판하기까지 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도조 히데키의 딸과는 비교되는 부분, 망명 후에 미국에서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것이 소련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다. 당연히 소련에서는 금서. 그러나 그녀는 이 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녀의 망명 당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소련 정부는 그녀의 망명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으며, 오히려 그녀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그 가족들의 명예가 실추되길 내심 기대했었고, 당시 미국에서도 그녀에게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었다는 주장도 있다.

6.4. 아내들

아내들에게는 좀더 다른 태도를 보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첫 아내가 결혼 2년도 못채우고 병사하자 몇 달 동안 상복을 입은 채로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70] 심지어 아내 장례식 때 아내의 관을 묻을 때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구덩이로 뛰어들려고 했다고. 친구들이 다시 붙잡고 산 사람은 앞으로도 살아야지 이랬다지만...친구들: 저승 가서도 숙청질하게? 흠좀무한 건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제국 정보부인 오흐라나의 정보원이 장례식에 끼어있는 걸 간파하고 장례식 중간에 슬쩍 도망갔다는 사실 무슨 첩보소설 쓰세요?[71]두번째 아내가 자살한 직후에는 정치국에 사표를 내고 서기장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랬으면 역사는 달라졌…으려나? 근데 스탈린이라면 자기가 물러나는 것에 찬성 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숙청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첫 아내의 사인은 원래 허약한 아내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이곳저곳 도피생활을 반복하다 생긴 영양실조가 원인이 된 티푸스였고 두번째 아내의 자살 원인은 스탈린이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생긴 우울증이라고 보고 있으니[72]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6.5. 사생아

앞서 말하듯 유배 시절 사생아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흥미로운 케이스가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인 유리 다비도프. 노보쿠즈네츠 지역 건설기술업자인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로 자신의 부친 알렉산드르가 태어났으며 출생 후, 아버지인 스탈린은 곧 떠났고 어머니는 한 마을에 살았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다비도프란 성으로 자랐으며 차후,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동의하지 않았다."

사생아인 아버지가 1941년 독소전쟁에서 모스크바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하여 다시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유리 다비도프가 태어난 경위는 그의 아버지가 적군으로서 "한반도(조선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여했으며 1948년 4월 22일에 조선(북한)에서 아들을 보았다는 것이며,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7. 믿거나 말거나

신빙성이 희박한 루머이긴 하나 사모님과 비서, 자신해서 3P플레이를 시도하려 했다가 사모님에게 퇴짜를 맞은 적이 있다 한다. 사모님은 당연히 울고불고 뛰쳐나가고, 실망한 스탈린은 비서 하나를 더 불러서 소원을 성취했다 한다. 흠좀무. 그리고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어린이를 사랑해서 같이 자기까지 했다는 소문도 있다. 진실이라면 페도필리아. 그가 로리콘이란 설은 있다. 그의 딸 스베틀라나의 기록에 의하면 스탈린은 사망 직전 병적으로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고 전한다.[73]

또 다른 루머로는 스탈린의 자살한 두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나디아)가 실은 자신의 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나데즈다의 어머니와 스탈린이 내연관계였다는 에 기초한 것이다. 스탈린은 나데즈다의 아버지의 집에 자주 피신을 왔는데, 이때 어린애였던 그 딸과 친해졌고, 혁명 후에 그 애와 결혼을 했다. 결혼할 당시 나데즈다는 18세, 스탈린은 40세로서, 아무리봐도 정상적인 결혼은 아니었다. 나데즈다가 자살한 이유는 스탈린이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나 충격받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정말 엘렉트라 돋네요. 아니면 의 딸들이냐[74]

또는 항상 민심을 탐방하던 나데즈다가 스탈린 앞에서 농업정책 실패와 대숙청을 비난하자, 이를 듣고 스탈린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끝에 부인을 사살하고 자살로 위장했다는 썰도 있다.[75]

하지만 냉전 이후 공개된 KGB의 사건 조사서 및 의학 기록 등의 문서 자료에 의하면 나데즈다는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는게 정설, 계속되는 두통과 발작, 빈혈, 생리불순(폐경기도 아니었지만 3년 넘게 하지 못했다.) 등등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했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여러 사람들과 모인 파티 직후에 충동적으로 방에서 총으로 쐈다는 것이 오늘날에는 결론으로 정립되었다. 게다가 둘째 아내와는 결혼생활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디아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내조를 원했던 것. 소련은 원칙적으로 양성평등 표방 국가가 아니었나?

아내들의 끝도 좋지 않았지만 처가 식구들의 끝은 더 좋지 않았다. 부하린이나 과거 다른 볼셰비키들과의 친분도 있었지만, 스탈린은 자신이 인격적인 모습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스탈린 관련 포스터를 보면 스탈린을 마치 부동자세를 취한 고요한 신처럼 그리고 있는데, 군중들 속에 섞여 있거나 캐리커쳐로 바뀌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레닌 포스터와는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자신의 인격적인 모습을 알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출판까지 한 처가 식구들은 스탈린의 눈에 좋기 보일 리가 없었고, 아내도 죽었기 때문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제목부터 '믿거나 말거나'인데 이걸 진짜로 받아들이면 심히 골룸하다. 냉전시대때 서로 물고뜯는 사이었는데 상대방을 좋게 평가할리가 만무하다.

8. 의심과 불안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스탈린을 비롯한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개로 밖에 생각 안 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다 조져버리는 것이 맞았던 것. 상부의 통제를 안 받으려고 하니까 각종 비리가 횡행한 것은 덤이었다.

한편으론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소련의 진시황?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했다니,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못한 히틀러는 결국...

한편,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그러고 나서도 또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머리는 상당히 명석한 편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심지어는 윈스턴 처칠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머리가 나쁘면 독재자를 하기도 힘들다. 반대로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이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죽어버렸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올라서기까지의 고통은 누구라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항상 그 당시를 이야기 하는데 영하 -10도인 상황에 몸만 던지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땅굴을 파서 겨우겨우 살아 남은게 현재 고려인이다. 홍범도 장군도 이 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빈곤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잠시 묵념.

또한 1941년 독소전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소수민족 탄압은 소수민족 출신이 잘하죠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돼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 근거 없이 숙청한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숙청을 단행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구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자료들이 비밀 해제되자 라브렌티 베리야가 독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그 베리야도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이 외에도 흐루쇼프와 말렌코프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심지어 저 3명이 공범이었다는 얘기도 있다.[76]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심지어는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KGB(NKVD의 후신)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베리야였다.[77]

9. 이야깃거리

"어머니,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니,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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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역사학계에서도 이 사람은 인용하지 않거나, 인용하는 경우에도 매우 비판적으로 인용한다. 이 사람은 원래 소련군 장성 출신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소련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사상전향하고 소련과 공산당을 디스하는 책을 많이 펴냈다. 이런 책들이 옐친에 이로움을 줬음은 물론이다. 한국 뉴라이트들의 역사관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의 역사관이 대충 그림이 나온다. (태생적으로 반공적인) 영미학계에서는 이사람 소스를 인용하여 스탈린 체제나 동유럽 체제를 비판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사람은 원래 옐친 정권에서 대통령 보좌관을 했던 사람으로, 특히 옐친 정권 하에서 정권의 입맞에 맞는 역사서를 펴내서 러시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람이다.

10. 평가

10.1. 현재 러시아의 평가

스탈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입장은 크게 '조국을 부강하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와 '수많은 인민을 숙청한 잔혹한 독재자'로 나뉘어진다. 전반적으로는 국가적인 관점에서 스탈린이 남긴 업적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94]

10.1.1. 긍정적 입장과 평가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러시아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아이작 도이처-[95]

러시아 국영 TV채널과 러시아 역사연구소가 진행한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발하는 프로젝트에서 스탈린은 조지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3위에 올랐으며, 특히 소련 성립 이후의 모든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96] 또한 2006년 말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47% 가량이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반면 부정적인 답변은 29%에 불과했다.[97] 2007년에 러시아의 10대 청소년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다른 투표에서도 절반 이상이 스탈린의 긍정적인 면을 우위로 평가했으며, 46%는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라는 견해를 부정했다.[98]

현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의 경우, 구 소련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꺼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종종 표명하곤 했다. 일례로 푸틴은 1937년의 대숙청을 '공포의 역사'라고 표현하면서도 "타국이 우리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소련과의 단절을 선언한 일부 러시아 정치가들을 비판하며 연속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푸틴 집권기 러시아 교과서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봉착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계층의 부상을 유도했으며, 뛰어난 추진력과 지도부에 충성하는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99]

이러한 인식은 주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회, 경제적 혼란과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에 기인한다고 평가된다. 소련 붕괴이후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도입이 러시아인들을 부유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이 한 동안 빈민층으로 내려 않게 만들었고, 그나마 나아진건 2000년대 들어와서부터인데다가 이 당시에 심각해진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으며 민주주의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소련 말기의 노멘클라투라들이 여전히 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인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은 피와 편집증, 잔혹함보다는 승리와 영광, 무사무욕, 민족의 존재이유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러시아 청년들에게 스탈린은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과 함께 전세계를 양분하던 시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100]

러시아 내에서 스탈린의 비인간적인 대숙청 학살극 같은 많은 혹평에도 스탈린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이유는 스탈린 정권이 적백내전 전후 혼란스러웠던 소련의 안정을 빠르게 수습하고 성공한 공업화및 경제개발정책으로 신생국소련을 몇십년만에 2차대전의 승리국으로 이끌어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으로 기반을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동유럽국가를 공산화 시켰고 이 계기로 공산주의는 전세계에 퍼져나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간단히 요약하면냉전 한축인 제2세계로 확장시켰다셈. 결국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자면은 스탈린이 소련에 공산주의 이념을 변질하거나 수많은 사람을 숙청했지만 끝내 결과적으로 초강대국 기반으로 끌어올려 그후 공산주의를 전세계로 확장하고 냉전 한주축세력 중심국으로 이끌었다는것이 긍정적으로 러시아내에 평가되는 주된이유다.

10.1.2. 부정적 입장과 평가

''스탈린은 천하의 악당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독재자이다'' -흐루쇼프[101]-

"스탈린이 악한이라는 표지는 그가 마음대로 도덕을 전복시켰다는 점에 있다. 선이 악이 되었고, 악이 선으로 둔갑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이 모든 진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사람이였다." -미하일 고르바초프[102]-

한편,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개혁을 주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나,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옐친그 옛날 흐루쇼프처럼 스탈린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전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2009년 크렘린의 공식 비디오 블로그에서 스탈린을 "재평가"하자는 모든 움직임들을 비판하며, 스탈린의 대숙청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103]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에 소련을 "암울했던 시기"로 묘사하며, 강한 국가보다는 경제적 자유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강조하기도 했었다.[104][105] 근데 지금 러시아는 소련 시절만도 못할텐데…

이외에도 대다수의 자유주의 정치가들이나 인권운동가들 역시 스탈린에 부정적이다.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이 저지른 엄청난 학살은 당대에도 지속적으로 서구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미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 내부로부터도 자성의 목소리가 일어서 한 동안 스탈린이 묻혀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의 일부 인권운동가들에게도 이어져서,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인명경시풍조 및 정치적 부패와 결부되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9년,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는 대숙청을 두고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학살자"로 묘사한 노바야 가제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106] 패소하였다. 노바야 가제타는 스탈린의 손자로부터 피소됐다는 사실을 공표한 뒤 사설을 통해 "진실은 가끔 위험한 것"이라며 "무시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범죄를 숨기는 것은 공범이다. 스탈린은 2차대전 초기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였다."고 지적했다.[107][108]

또한 스탈린이 저지른 대숙청과 일당독재를 넘어선 일인독재, 인민 학살등을 봤을때 스탈린은 성공한 개발독재자가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성공한 공산주의자가 될수는 없다.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들이 공산주의 조국의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위해서 아무리 악한 일이라도 필요악으로 여기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미 그들 자신들이 그토록 비방했던 자본주의의 돼지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이러한 인간백정을 찬양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흐루쇼프 이후의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이름은 사실상 말해서는 안될 자 취급을 받았다. 흐루쇼프는 물론이요 브레즈네프 시절 수상을 지닌 알렉세이 코시긴 역시 이 시절을 암울한 시기로 묘사했으며 안드로포프 역시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스탈린을 비판했다. 이렇듯 소련 공식 역사에서 스탈린은 공산주의를 타락시킨 독재자,학살자의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옐친이 이끈 러시아의 암흑기에서 오히려 스탈린은 반동으로 찬양받게 되었으니(…)

10.2. 구 소련 가맹국들의 평가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국가들은 민족 억압책을 편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을 지켜낸 것만큼은 높이 평가한다.[109]

다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문에 아직까지도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 설문조사에서도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 우세하며, 2010년에는 우크라이나 법원이 대기근과 대량 학살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을 기소한 적도 있었다.[110] 뿐만 아니라 2010년 봄에 스탈린 기념 동상이 건립되자, 당해 12월 말에 머리가 잘리더니 급기야는 폭발로 파괴되었다고 하니...민족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111] 아르메니아의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38%가 '스탈린과 같은 리더가 필요하다'고 답한 반면, 72% 가량은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112]둘 다 찬성한 10%는 뭐지? 조국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 스찍탈

단 스탈린의 출생지인 조지아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조지아의 역사 교과서는 스탈린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을 종식시키고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113] 스탈린 동상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곳도 조지아였고…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에서도 조지아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많은 전리품을 챙겼으나, 스탈린 기념관과 동상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포로로 잡힌 조지아군 병사가 자신의 스탈린 문신(!)을 보여주자 러시아 병사는 그를 바로 석방했을 뿐만 아니라 보드카까지 줘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러시아와 조지아에서의 스탈린의 평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10.3. 성 스탈린?

[image] 쩔어주는 기럭지를 자랑하는 8등신 강철의 대원수님 근데 사실 실제로 스탈린의 키는 그리 크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160대 초중반 정도... 스탈린 관련 동영상을 봐도 다른 측근들과는 달리 좀 작아 보이긴 한다. 나폴레옹과는 다른게 나폴레옹은 억울한 오해?로 인한 것이고(나폴레옹이 살던 그 시대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지금이야 키 170~180cm가 그리 놀랄것이 아니지만 옛날 사람들은 키 160만 넘어도 괜찮은 편이었거나 장신축에 들었으니...) 스탈린의 경우는 그보다 더 현대에 가깝던 시대를 살다 간 인물이고 대체로 서양인들(디테일한 민족 구분 않고 서구쪽에 사는 양인들을 통틀어 포함)의 경우 동양인들 보다 평균 신장이 컸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은건 맞다. 물론 내뿜는 포스만큼은 키큰 자도 스탈린 앞에서는 접고 들어갈 만한 인물이었겠지만

무시무시하게도 정교회 성인들이나 그리는 이콘에 나오기도 했다.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던 성녀 마트로나(Матрона)와 비밀리에 만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사실상 도시전설이지만, 지독한 반그리스도교 정책으로 일관하던 스탈린이 갑자기 러시아 정교회와 파트너를 자처한데에는 그녀의 덕이 컸다고 한다. 마트로나는 맹인으로 당시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었는데, 스탈린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코 앞까지 진군했을때 몰래 그녀를 만났고, 마트로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러시아군이 승리할 것이니 모스크바를 떠나지 말고 굳건히 지키라."는 조언을 했다 한다. 그리고 다른 도시전설에 의하면 스탈린이 꿈에서 "교회가 다시 열리면 러시아는 이긴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말로 많은 성당을 다시 열었고, 신학교도 다시 열렸다.

어쨌든 독소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어느정도 부활되었고[114],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퍼레이드에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초청되기도 했다. 뭐 그 뒤인 흐루쇼프 시절 다시 정교회는 탄압당하긴 하는데…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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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너무 무시무시하게도 스탈린만의 이콘이 있다!!! 이렇게 러시아에는 스탈린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세력도 있다. 그 이유는 독소전쟁 이후 러시아 정교회를 부활시켰기 때문에. 흠좀무.

뭐, 애시당초 스탈린부터 정교회 신학교 출신이긴 했으니... 신학교가 아니라 SIN학교

10.4. 한국북한에서의 평가

당연히 한국에서는 카를 마르크스, 김일성, 마오쩌둥, 블라디미르 레닌 등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빨갱이들의 두목, 소련의 독재자라는 평가가 있었으며 특히 1950년 6.25 전쟁소련북한에 밀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하였고 남침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전쟁 이후에는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6.25 전쟁의 원흉[115][116]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한국군의 주적론에 나오는 6.25 전쟁 주역 중에도 당연히 김일성, 마오쩌둥과 함께 포함되었다.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의 체제를 개발동원체제라 평했는데, 비스마르크 정권과 스탈린 체제가 박정희 정부와 같은 성격의 체제라고 평가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을 도와주었던 영웅으로 손꼽혔으며 김일성을 북한 주석자리에 앉히고 지금의 북한을 세우게 하였던 간접적 인물(...)로서 남한과는 달리 호의적이고 영웅적인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이제는 대한민국에서도 반공정서가 사그라들고, 밀덕들[117] 및 소빠들이 대거 늘어남에 따라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스탈린은 가장 성공한 독재자이며, 그의 대숙청한고제홍무제, 광종, 태종 등이 벌인 국가를 위한 숙청이라고 평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젠 나름 한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셈.

11. 미디어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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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1세와 스탈린의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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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스탈린주의

스탈린은 그 특유의 독재정치로 인해 '스탈린주의'라는 독자적인 사상을 낳았고, 이는 오랫동안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현실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보급되었다.

12.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

이들 지명 중 대부분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이후 원래 이름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13. 어록

다만 여기에 기록한 말 가운데 정말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말이 많다. 스탈린은 러시아어에 서툴렀고, 유창한 언변을 구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쓴 글은 대부분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형식의 문장이 많다.(예를 들어, "자본가들을 왜 타도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기 때문에[129][130] 가끔은 다른 작가들의 말(아래에도 있는 레마르크)이나, 창작물 속에 등장하는 스탈린의 말이 스탈린이 한 말로 둔갑한 경우가 많다. 단, 복잡한 내용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쓰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중요한 외교전문은 초안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131]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바로 그렇게 다뤄야 해!!"

ㅡ 1934년 돌격대 숙청(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132]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나만 빼고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그리고 나또한 인민이니 영원불멸

ㅡ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133]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134]


"감사하는 마음나 앓는 질병이다."[135][136][137]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138]


"가장 큰 기쁨은 적을 골라 세심하게 한 방 먹일 준비를 하고 무자비한 복수의 갈증을 충족시킨 뒤 집에가서 자는 거야."[139]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140]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141][142][143][144]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145]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ㅡ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ㅡ 당시의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146]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이다."

ㅡ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와의 인터뷰.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

ㅡ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147]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수치에 불과하다."[148]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고로 악인을 하자?


[anchor(모조리 죽여라)]"모조리 죽여라. 죽음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인간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149]


"답이 없는 문제도 있기 마련이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150]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151]본격 인간 연료설, 혹은 떨어질 인민은 떨어진다. 뭔가 나무 뭉쳐서 꺾어보라는 일화도 생각나고…


"사단시장에서 파는 게 아니라서 지원을 못 해주겠다."

강철의 대원수도 시장에서 사단을 사오진 못했나 보다. 아니면 사단이 다 떨어졌거나, 사단을 만들 재료가 다 떨어졌거나...[152]


"포병은 현대전의 신이다."[153] 그 교리를 착실히 따른 어떤 군대가 있다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154]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155]


"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156]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157]


" 자의가 아니더라도 적을 돕는 자는 적, 그리고 그 적을 공격안하는 자도 적 그러니 감상주의에 빠지지 말고 쏴라[158]


  1. [1] 신학교를 다니긴 했는데 비단 러시아 뿐만아니라 서구에서는 가난한집 수재들은 학비가 면제되기 때문에 신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2. [2] 스탈린의 최후에 관한 음모론 중 하나로, 스탈린이 자는중에 측근이 (보통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흐루쇼프NKVD의 수장 베리야가 꼽힌다. 또는 흐루쇼프를 위시한 관료들과 군부가 짜고 그를 암살하고 NKVD의 독주를 막기위해 베리야에게 덮어씌웠단 썰도 있다. 단, 어디까지나 음모론.) 베게로 스탈린을 질식시켜 암살했다는 설을 차용한것으로 보인다.누군지는 몰라도 강철의 대원수를 암살할 생각을 했다니. 배짱이 대단하다.
  3. [3]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별 것 없다. 그는 몸짓, 말의 톤과 투 특히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통해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말의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난게 아니라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 실제로 말이 지리멸렬하고 중구난방하며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선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그러하다. 오히려 연설능력 자체가 뛰어났던 인물은 그의 친구 중 하나인 베니토 무솔리니.
  4. [4]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스탈린의 연설능력이 떨어졌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그는 젊은 시절에도 대중 앞에서 많은 연설기회를 가졌고, 그때마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연설의 대상인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때때로 멘셰비키나 지식인들의 달변에도 불구하고 연설 내용에 대해 어려워하거나 쉽게 흥미를 잃었는데, 그럴 때쯤 등장하여 지식인들의 달변보다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운 평이한 연설을 통해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스탈린의 장점이었다.
  5. [5]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에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리샤(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
  6. [6]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
  7. [7]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메드베데프 알랙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
  8. [8] 여담으로 몰로토프는 구리라는 뜻이 있다. 강철과 구리라, 이름만 들어도 마구 공업화할 것 같은 듀오다.
  9. [9]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의 경제성장률만 놓고 봐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10. [10] 보통 숙청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생명만 끝장내고, 귀양이나 투옥, 수용소행이라는 온건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11. [11] 조지아의 고리(Gori) 시에 스탈린의 생가와 박물관이 있다. 고리 시의 중심부 스탈린 광장에는 거대한 스탈린 동상이 스탈린 격하와 구소련 붕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근까지 서 있었지만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2010년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스탈린 박물관 안쪽에 동상이 남아 있다.
  12. [12] 그가 젊은 시절에는 당 내에서 수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조지아 민족주의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13. [13] 단 아예 계통이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출신인 스탈린과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언어ᆞ민족이 같은 나라이므로 히틀러도 분명히 독일 민족이며 독일인 우월론을 펼치는 데 명분적인 문제는 없었다. 물론 금발벽안의 순혈 아리아인은 아니었지만 사실 독일인 중에서도 금발벽안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다.
  14. [14]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15. [15] 허나 이보다 더 많을수도 있음은 결코 부정할수 없다. 서구의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기준에 비춰 보면 이쪽은 그나마 기록 검증, 증언 등을 교차해서 생각보다 높은 정확도를 컷트라인으로 잡아서 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실제 수치보다 낮을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만 해도 이 걸 지네들 공적으로 삼아 그럭저럭 쉽게 잡혀 1100만이 정설이지만, 확인안되는 것 까지 따져 1700만까지도 되잡힌다.하물며 스탈린의 학살은 정치적 이유가 주된 모토였다 보니까 생기는 은폐성이 너무나도 강했던 면이 있으니 정확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를것이다.참고로 히틀러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매우 부러워 했으나 따라하지는 못했다.게다가 대숙청과 홀로도모르를 제외해도 스탈린 36년 집권기간 동안 장기적으로 이루어진 숙청,소수민족 강제이주,강제적인 집단농장화로 인한 아사 등을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갈려나갔을지는.....
  16. [16] 여담이지만 장제스도 이와 비슷한 명령을 했는데 효과가 상당했다.
  17. [17] 하지만 한국도 이같은 방법으로 부서이름을 작성한다. 기무사의 전이름이었던 방첩부의 이름도 방어할 방 과 첩자 첩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다만 한국어는 한자를 채용해 쓰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뿐이다. 스메르쉬와 유사한 한국어 예시는 사첩또는 사간이다.
  18. [18] 서구권 사회주의자들 중에선 스탈린의 용모를 두고 어떤 아이가 스탈린의 자애로운 얼굴을 보고 안기지 않겠는가 하는 오글거리는 찬양을 남기기도 했다.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에 나오는 대목.
  19. [19] 당시 20세기 초의 동부유럽인 평균키가 160cm대 초반이었다.
  20. [20] 정확히 10년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10년간의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로 나치독일에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21. [21] 특히 중화적 공업화.
  22. [22] 그리고 이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국이 모방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의 5개년 계획도 사실 원조는 소련이다.
  23. [23]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게 1870년대였다. 1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의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
  24. [24]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바가 없었다. 스탈린 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가장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초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신세계에 쳐박힌 듣보잡국가였고... 현재 냉전시절 소련의 위치를 가질 수 있는 나라로 가장 먼저 꼽히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
  25. [25]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한다.(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 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달러 ~ 2만달러였다.
  26. [26]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선진국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대전 이후 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 성장률이 쩔었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
  27. [27] 기타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정우 교수의 이 글 #을 참고할 것.
  28. [28]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 사실 남한이 그러했듯 북한 역시 "닥치고 광물이나 파내시고 내수나 잘 돌리시죠"라는 식으로 소련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에 중공업화 자체는 타당하긴 했는데...중공업화 자체는 좋은데 원조 없이는 살 수 없던 경제였던지라 망했어요. 실제로 소련이 망하고 북한은 싸게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급처와 물건 사주는 판매처가 없어져 찰지게 망했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29. [29] 김일성 당시에 경제막장의 이 보이긴 했지만 김일성이 사망하는 1994년까지는 북한 경제가 그런대로 돌아가긴 했다. 적어도 김일성 시절에는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인 1994년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에선 커다란 식량난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지 황장엽을 포함한 나이가 지긋한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천하의 개쌍놈으로 욕하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그다지 비난의 강도가 심하지 않다.
  30. [30]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
  31. [31]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란 소리도 나왔다.
  32. [32]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
  33. [33]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
  34. [34]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35. [35]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
  36. [36]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
  37. [37]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이란 소리도 나왔다.
  38. [38]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그 해 러시아 농사가 흉작크리가 겹쳐서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39. [39]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
  40. [40] 사실 북한이 이상할 정도로 막장인거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그런데로 무난하게 사는 편이었다. 문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공산국가는 북한인데 북한이 워낙 막장이라서 소련같은 다른 나라도 죄다 경제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근데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닐텐데?
  41. [41]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42. [42]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저렇게 생각하며, 푸틴도 저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
  43. [43]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의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
  44. [44] 브리태니커에 "Disguised unemployment"를 검색해도 나오지만, 전근대 농촌의 경작지들에서는 사실상 일손이 남아도는 바람에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된 이들까지 해당 경작지에 소속된 농민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아서 공식적으론 실업자가 아니지만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는 아무런 기여가 없는 인구가 많고 이를 한자어로는 "위장실업"이라 한다.
  45. [45]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고선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약 70만) 정도 사람이 희생 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46. [46]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사실 독일군과의 교환비로 치면 소련군이 대부분 열세였기에 아주 부당한 평가까지는 아니지만, 뭐 어쨌든 상대 전차에 전차 물량으로 밀어붙이려면 나도 전차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닐까.
  47. [47] 스탈린 시기에 도입된 노동영웅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서 쓰는 우수사원 모범사원제도와 비슷하다.
  48. [48] 다만 그 당시 중국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으로 나뉘어 일본군이 침공하는 가운데서도 내전을 벌이고 정부가 각 당의 수뇌부로 이원화 되어있으며 국민당이 나치 독일과의 밀월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심하게 손실을 본 이유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값도 못하고 6주만에 캐발린 다음 국민 다수에 의해 비시 프랑스까지 수립되고 독일의 속국화되어 전범짓을 하는 가운데(이를테면 홀로코스트협력 등) 자유 프랑스와 소수의 레지스탕스만이 대독전선을 형성했던 프랑스보다 외교적 혜택을 못 받은건 좀 너무한 처사이긴 하지만서도...
  49. [49] 다만 당시 정치장교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야전에서의 작전능력은 현저히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50. [50]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51. [51]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
  52. [52] 실제로 서구나 아시아나 스탈린vs히틀러 라는 의식은 매우 넓게 퍼져있다. 실제로 지정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숙적이라는건 사실이고.
  53. [53] 일부 정신나간 놈들은 이런식으로 스탈린과 히틀러를 비교하며 히틀러를 실드치기도 한다. 답이 없다.아마 스탈린이 알았다면 굴라그로 끌고갈듯
  54. [54]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55. [55] 스탈린은 전형적인 1인 원톱 체제를, 히틀러는 2인자들의 박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 권력의 강대화를 노렸던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2인자들의 박터지는 충성경쟁을 통한 1인자의 권력 강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용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게 화가 되어 암살당하지만... 하지만 히틀러가 그것을 계산하고 충성경쟁을 유도했다기엔 히틀러는 너무 무능했다. 행정이나 군사나 그냥 거의 정줄놓에 가깝기도 하고...
  56. [56] 특히 프랑스 침공과 관련된 책만 봐도 알수있다. 전격전의 전설이라던가..
  57. [57] 알다시피 국제연합불과 5년 뒤에 그 한계가 드러났고, 동유럽에서의 자유선거 약속은 말뿐이었으며 철의 장막 너머에는 죄다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58. [58] 이 언싱커블 작전은 90년대 비밀이 해제되면서 수면에 나왔지만, 소련은 당시 스파이망을 동원해 이런 처칠의 의도는 대충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스탈린 자신도 처칠을 매우 안좋게 생각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
  59. [59] 이런 평가는 덩샤오핑이 훗날 마오에 대해 그대로 다시 써먹는다.
  60. [60] 당시 중앙아시아와 만주접경에서는 중소 양군 수백만이 일촉즉발의 태세로 대치중이었다.
  61. [61] 이런 사생아 설은 서구의 야사적인 전기작가들이 발굴한 것인데, 공식 역사학계에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밝혀졌다고 보기 보다는 설이라고 쓰는게 합리적이다.
  62. [62] 손자 예브게니 쥬가슈빌리 역시 예외였다.
  63. [63]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이 가족에게 냉혹했다고 비난하는 주장은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권의 반공진영에서 나온다. 일단 이런 나라들은 직접적인 전쟁위협을 덜 느끼는 편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역시 징병제나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이라서...(서유럽 중도우파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건 유명하니까) 아무리 전쟁이라도 어떻게 아들을 버릴 수 있느냐는 감성을 가지기 쉽지만, 징병제를 유지하는 한국 입장에서 이런 감성에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듯. 또한 이 당시 소련은 독소전쟁에 인민을 백만 단위로 갈아넣고 있었는데 자기 아들에게 안전하고 편한 보직을 주거나 아예 군 입대를 막았다? 이건 정치적으로 자살행위이다.
  64. [64] 스탈린의 아들이 전향한다면 아마도 소련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65. [65] 파울루스를 구하기 위해 제안한 게 아니라 잡아다 처형하려고 포로 교환을 요구했다.
  66. [66]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의 계급.
  67. [67] 실제 스탈린 젊었을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관점에서도 굉장한 훈남이다. 오죽하면 2차 대전 연합국 지도자 중에서 젊었을 시절이 2번째로 잘생겼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니. 참고로 젊었을 시절이 가장 잘생겼다는 사람은 처칠이다. 늙어서 머리가 벗겨지고 몸이 불어버리는 바람에 달마 스타일이 되었지만.
  68. [68] 주가시빌리(Джугашвили)라는 조지아식 성을 붙여준 첫째아들과는 달리 두번째 아들은 자랑스럽게 "스탈린"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69. [69] 2000년대 이후로는 천하의 개쌍놈이나 할 막장짓이지만 사실 우리나라도 90년대까진 이랬다. 그땐 극장에서 영화보며 담배피고, 택시기사가 손님 태우고 운전하며 담배피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승객들이 담배피고, 강의실에서 교수가 강의하며 담배피던 시절이라...
  70. [70] 이에 관하여 한 말이 앞서 보듯이 "나는 첫 아내를 묻으며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묻었다."
  71. [71] 실제로 이 시기의 청년 스탈린을 다룬 전기 '젊은 스탈린'은 그야말로 어지간한 첩보물 뺨친다
  72. [72] 자주 도는 일화는 두번째 아내가 아는 사람이 굴라그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스탈린의 아내를 통해서 줄을 놔서 추방을 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강철의 대원수는 추방될 사람과 아내에게 줄을 놓는데 가담한 사람 전원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냉전 때 돌던 이야기니 신빙성은 얼마나 있을지?
  73. [73] 스탈린이 치매에 걸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년에 치매에 걸리면 증상 중 하나로 갑자기 페도필리아 증세를 보일 수 있다고 한다. 당신들의 조국의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가상역사소설 아크엔젤이 스탈린의 어린이 사진 수집을 중요한 플롯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페도필리아설의 신빙성이 낮은 것이, 아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격심한 미국이나 서유럽에서 누군가에 대한 흑색선전을 하면 꼭 나오는 것이 아무개는 페도였다는 이야기라서...스탈린 페도설, 베리야 페도설, 마오쩌둥 페도설이 다 있는데, 뭐 공산당이 무슨 페도당도 아니고?
  74. [74] 문제는 이 설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건 스탈린이 나데즈다의 부모와 처음 알게 된게 나데즈다가 3살때였다는 것이다. 어머니와의 내연설은 사실 당대부터 있지만 나데즈다가 딸이라는 건 조금만 봐도 성립되기 어려운 일.
  75. [75] 김일성도 비슷한 이야기가 도는 걸 보면 냉전시 흑색선전은 어디나 비슷하다. 혹시 정말 아냐?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나데즈다가 자살한 방에서 나온 문건이 당시 감옥에 있던 고위 볼세비키 당원이 퍼뜨렸던 스탈린 흑색선전에 대한 문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비밀 서류도 아니었고 스탈린이나 기타 당원들도 사건 자료의 목적으로 보던 문건이었고 무엇보다도 스탈린 자신이 읽다가 만 것이었다!
  76. [76] 실제로 스탈린은 죽기전 베리야, 흐루쇼프,말렌코프를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7. [77] 전 버전에서 농아를 숙청했다고 잘못 기술된 레닌그라드 사건(1950)은 농아학교의 교사진이 연루되어 숙청된 사건이다.
  78. [78] <스탈린>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족을 남겼다.
  79. [79] 실제로 이후에도 조, 혹은 조 아저씨는 소련의 상징이 된다. '샘'과 '조'는 냉전기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특히 수학자 폴 에어디쉬는 자신의 수수깨끼같은 말버릇 중 하나로 이런 말을 애용했다.
  80. [80] 카이로인지, 테헤란인지, 포츠담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카더라통신이니 그렇겠지만.
  81. [81] 리처드 오버리의 저작에 따르면, 실제로 이런 과부하가 걸려서 철도 수송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는 곧장 숙청당했고 바로 신입이 들어와서 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신입도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숙청당했다.
  82. [82] 유서 숨긴데 이유가 있었구만
  83. [83] 원래 성이 브론슈테인으로, 전형적인 유대인 성이다.
  84. [84] 초창기 이스라엘의 무기들은 체코제가 많았다.
  85. [85]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있다.
  86. [86] 이와 함께 조지아의 스탈린 기념관도 반독재 기념관으로 바꾼다고 했다.
  87. [87] 크레믈린 앞의 상은 동상이 아니라 석상이니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88. [88]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89. [89] 사실 미국은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일부러 모른척 했다고 한다.
  90. [90]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소련은 의외로 연좌제가 느슨했던 듯.
  91. [91] 우리나라도 의외로 예외는 아닌데 왕이 이러기도 했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
  92. [92]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
  93. [93] 독소전쟁 초반의 병크대문에 매우 비판을 받지만, 일반적으로 그때만을 제외하면 스탈린의 전쟁수행 지도는 모범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군사적인 면은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민간부분에서 독재권력을 이용하여 모든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도했는데, 군사작전에 개입하여 말아먹거나 혹은 행정을 팽개친채 괴링이나 히믈러 등의 중간보스들의 전횡을 방치하여 국력을 낭비한 히틀러와 비교하면 스탈린의 성과는 분명하다.
  94. [94] <왜 러시아는 여전히 스탈린을 사랑하는가(Why Russia Still Loves Stalin)>
  95. [95] 아이러니 하게도 이사람은 트로츠키주의자이며 트로츠키와 같은 유대인이다. 그리고 이사람이 쓴 트로츠키 전기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악하고 교활한 스탈린이 착한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 암살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면에에서는 스탈린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96. [96] <스탈린, 러시아인들의 영원한 우상>. 심지어 러시아 공산당은 스탈린이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97. [97]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98. [98] <러시아 청년들: 스탈린에는 긍정적, 이민자들은 나가야: 설문조사(Russian youth: Stalin good, migrants must go: poll)>
  99. [99]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100. [100] <스탈린시대 러시아는 존중 받았다>
  101. [101]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연설中
  102. [102] 고르바초프는 스탈린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반대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스탈린과 달리 소련을 무너트렸지
  103. [103] <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의 옹호자들을 비난하다(Medvedev blasts Stalin defenders)>
  104. [104] 다만, 메드베데프는 당선 직후 푸틴에게 통수권을 넘겨받으면서 72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을 기념한다는 내용의 축사를 남겼는데, 이는 스탈린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6년을 기점으로 한다는 점에서 정통성을 인정했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치 독일 시절부터 통수권 위임식이 시작된 독일에서 만일 총리가 비슷한 전통의 기념 운운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하면...
  105. [105] <핵심 질문: 왜 스탈린은 잔혹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러시아에서 추앙받는가?(The Big Question: Why is Stalin still popular in Russia, despite the brutality of his regime?)>
  106. [106] 스탈린 장남의 아들로 스탈린에게 매우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했던 것. 만약 장남 야코프가 살아있었다면 야코프와 함께 아버지를 디스했을 것이라고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기는 하지만, 스탈린이 자기 아버지를 죽게 만드는데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는것을 뻔히 아는데도, 소송을 제기한것을 보면...(물론 야코프랑 예브게니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그리고 야코프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것과는 다르게, 스탈린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이 아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라서, 관계가 소원해 보였지만, 둘이 부모자식으로써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자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주코프에게 비밀리 명령을 하달하고, 아들도 아버지를 위해 적에게 투항해서 편하게 사는것을 포기하고 포로로 살다가 죽은것을 보면 알수 있다.
  107. [107] <스탈린 손자, 조부 명예훼손 소송 패소>
  108. [108] 그리고 이걸로 폴란드에서는 입국금지도 먹었다.
  109. [109] 독소전쟁 초기 동유럽 국가들은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겼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건 이유 불문의 잔혹한 학살뿐이었다.
  110. [110] <우크라이나 법원, 대기근 제노사이드에 대해 볼셰비키의 죄를 묻다(Ukraine court finds Bolsheviks guilty of Holodomor genocide)>
  111. [111] <우크라이나, 스탈린에 비판적인 입장 고수(Ukraine stands by its view of Stalin as villain)>
  112. [112] <스탈린을 사랑하는 민주주의자들(Democrats who love stalin)>
  113. [113] <스탈린 닮아서 행복한 사나이>
  114. [114] 1940년까지 20여년동안 스탈린 동무가 죄다 죽인건 아니지만 4만명의 성직자중에 3만 6천명을 때려잡았다고 한다. 다 때려잡지 않았으니 성인은 성인인듯
  115. [115] 물론 직접 개입한 적은 없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스탈린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라는 의견도 많이 있었고 징징거림에 못견뎌서 전쟁을 승인해준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은 미국과의 전쟁을 우려해서 김일성을 말리기는 했고 개입도 중국과 북한의 징징거림에 어쩔 수 없이 소수의 조종사들을 투입하는 선에서 그친만큼 원흉이라고 보기는 조금 애매하다.
  116. [116] 이 스탈린 원흉설은 한국에서 극우, 종북 모두가 잘 써먹고 있다. 극우진영에서는 빨갱이 두목이라서, 종북진영에서는 김일성이 그랬을리가 없어! 라는 논리로..
  117. [117] 특히 독소전쟁에서 말아먹은것도 많지만소련이 승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서 나치의 패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에 주목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118. [118] 스탈린은 전시 당시에도 전선시찰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건 흡사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 오프닝 장면 같다.
  119. [119] 사실 무속(무교(巫敎))에선 '죽은 사람 중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으로 삼아 숭배나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데, 인지도나 파괴력을 봤을 때엔 스탈린 역시 신으로 섬겨질 여지가 있다.
  120. [120] 다만 문제는 송아람이 과학 사이드에 서서 스탈린을 스탠드로 소환, 신령을 박살낸 것인데 신령이라는 초과학현상을 부정하는 주제에 그에 버금가는 초과학현상인 스탠드를 부려대며(스탈린 뿐만 아니라 찰스 로버트 다윈도 스탠드로 등장한다.) '과학도로써 유물론에 역행하는 것들은 묻어버리겠다.'는 모순이 개그포인트. 또 이 장면을 곱씹으면 우스운게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는 정도만 제외하면, 그 학문적 맥락이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사실상 상통한다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바닥에 깔린 사조가 앞의 송아람의 대사에서 언급된 유물론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무속, 사회사상, 과학론 등을 절묘하게 연관시켜 만든 개그포인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냥 숙청에서 스탈린을 따온 것 같기도 하지만.
  121. [121] 그것도 6번이나 해먹는다. 참고로 1944년부터는 아예 자기 혼자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기염까지도 토한다.
  122. [122] 이때의 소련 서기장은 레프 트로츠키, 심지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여기서는 트로츠키그라드 전투로 나온다.
  123. [123] 연방대법원에서 관련 법안 몇 개를 위헌이라고 하자 에드거 후버를 시켜 판사나 정치인 몇몇을 나치 독일 스파이로 몰아 숙청하고, 알래스카굴라그를 설치해서 사회주의자나 반대파 인사들을 나무 거름으로 만들어 버린다.
  124. [124] 올림픽 작전실제로 시행한다. 다만 핵은 Steele의 독재에 회의를 느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보내지 않아서 유럽전선 종전 후 개발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중에 발각되자 아인슈타인을 포함해서 애꿎은 유대인 과학자 여럿만 골로 보낸다.
  125. [125] 배우는 건 하나같이 스탈린의 철학과 연설문, 저서뿐이다.
  126. [126] 이 VK 기술을 연구하던 혈십자 군단이 히틀러와 나치당을 제거하고 나치즘이 덜했던 장성들로 독일을 이끌게 하였다.
  127. [127] 소련 당시 소련의 최고봉이자 유럽 최고봉 이었다.
  128. [128] 테헤란 회담을 기념해 이름붙었으며 자매품(?)으로 루즈벨트 거리, 처칠 거리도 있었다. 스탈린 격하 바람에도 살아남았지만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 후 개명되었다.
  129. [129] 사실 기독교 교리문답식의 자문자답 문장은 스탈린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이후의 혁명가들이 굉장히 선호하던 형식이다. 일단 기독교문화권에서 교리문답은 대중들한테 상당히 익숙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한테도 따라 읽기도 좋고, 외우기도 좋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기 쉬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구전으로 퍼트리기엔 최적의 형식이다. 사실 공산당 선언마르크스가 싹 정리해서 새로 쓰기 전의 초안은 '공산주의자의 교리문답' 형태로 쓰여졌었다.("당신은 무슨 주의자입니까? 저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는 무엇에 반대합니까? 공산주의자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반대합니다.)
  130. [130]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이유 중 하나가 트로츠키처럼 말 많은 혁명가들을 혐오하는 러시아 인민들의 성향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131. [131] 이어야한다가 아니다.
  132. [132]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133. [133]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
  134. [134]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
  135. [135] 웃기게도 스탈린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면, 늘 감사하다면서 인사를 했으며, 사소한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럼 스탈린은 개? 개 만도 못하잖아 당연히 의례상 하는 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36. [136]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
  137. [137] 이 어록은 "예의배려나 앓는 질병이다." 라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138. [138]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een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
  139. [139] 1923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잡담 중.Trotsky's Diary in Exile, 1935, p. 64.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
  140. [140]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스탈린과 회담하다가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거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1차 출처 2차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 . 야사로 이 발언에 대해 교황은 "그(스탈린)는 우리의 군대를 저 위(하늘 나라)에서 보게 될 것이오."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1. [141] 1943년, 몰로토프와의 대화에서.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
  142. [142] 스탈린 다음으로 집권한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작정하고 까내렸지만, 세월이 흐른 21세기 러시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 쪽이 우세하다. 이 말은 정말로 사실이 된 것이다.
  143. [143] 여담으로 인간백정 라이벌로 자주 비교되곤 하는 마오쩌둥은 "살아서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을 것이다."라는, 비슷한 듯 하면서 다른 말을 한 적이 있다. 웃기는 것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의 말이 현실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의 말 또한 마오쩌둥 사후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마오를 평한 '공7과3'이 현재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사실상의 공식적인 견해이며, 현대 중국인들도 3의 과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있다.)
  144. [144] 그런데 쿠바피델 카스트로 또한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너희들이 현재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라는 말인데... 역사의 최종 평가는 독재자들의 로망인 걸까
  145. [145]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
  146. [146] 출처: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
  147. [147] 출처 -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
  148. [148] 이 말은 원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저술한 레마르크의 말이다. 스탈린이 한 말은 아닌데, 스탈린도 테헤란 회담 때 1번 했다는 이야기는 있다. 채플린의 살인광 시대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다.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된다. 전인류를 몰살하면 신이 된다.
  149. [149] Anatoly Rybakov의 소설 Children of the Arbat (1987)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스탈린이 한말로 한국웹상에서 잘못 알려져 있다.
  150. [150] 스탈린의 부하들이 별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스탈린의 명령에 따르자, 그것을 부러워한 처칠이 스탈린에게 비결을 물어보자 스탈린이 답한 대답이라고 한다.
  151. [151]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을 말한다면 낙엽(인민(국민들))을 적당히 탄압하거나 한두명만 못살게 굴면(밟으면) 국민들은 저항하지만(바스락거리지만) 군중 다수를 싹 모아 불을 붙이면(집단 학살, 대숙청) 매우 잘 탄다.(죽이는 족족 잘 죽을 뿐더러 대중들은 공포에 겁을 먹게 되어 찍소리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152. [152] 은하영웅전설암릿처 성역 회전에서 라인하르트양 웬리 함대에 털린 비텐펠트에게 하는 말로 패러디 되었다.
  153. [153] 현대전에서 포병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그 문구이다. 이를 두고 포병 병과에 복무했던 스탈린이 남긴 일종의 자뻑이란 의도도 있었다는 설이 한 때 있었으나, 스탈린은 기병 병과의 정치장교였다. 오히려 기병으로서 포병의 무서움을 정확히 체험하고 이 발언을 남긴 것에 가깝다.
  154. [154]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155. [155]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간부가 결정권을 전부 갖는다는 뜻이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인 상승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이야기이다. 대숙청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소련 정권은 수준미달인 중견간부들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156. [156] 그의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젊은 스탈린, 496p
  157. [157] 1928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에서, 대대적인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전에.
  158. [158] 독소전쟁 초기 독일군이 소련인 포로를 인간방패로 삼아 공격하자 차마 동포를 쏘지 못하게다는 항의가 늘어나자 스탈린이 공격하지 않는 병사는 모두 즉결처형을 명령하면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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