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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제14대
이원형

제15~17대
이재오

제18대
문국현

제18대
문국현[1]

제18·19대
이재오

제20대
강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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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이재오(李在五)

출생일

1945년 1월 11일 (75세)

출생지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부곡리[2]

본관

재령 이씨[3]

종교

개신교(장로회)

가족

배우자 추영례, 슬하 1남 2녀

학력

영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농촌사회개발학 / 제적)
중앙농민대학교 (농업경영학 / 학사)
중앙대학교 (경제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학 / 석사)

소속 정당

의원 선수

5

의원 대수

15, 16, 17, 18, 19

현직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약력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민중당 사무총장
제15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한나라당 원내총무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한나라당 원내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
제2대 국민권익위원장
제18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제2대 특임장관
제19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늘푸른한국당 대표

외부 링크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1. 개요
2. 생애
3. 정치인 생활
4. 여담
5. 선거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출신 5선 국회의원.

이명박 정부 초반 이명박을 가장 옆에서 보좌했던 인물로, 대운하4대강 정비 사업 때문에 진보(더불어민주당, 정의당) 진영에서 지금도 상당한 비판[4]을 받는 인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적대적이어서 친박 진영에서도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1945년 1월 11일,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성장해 영양고등학교,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학생 시절이던 1964년 6.3 항쟁에 참여하였다.[5]

이후 대성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를 역임하였는데 당시 가르친 제자 중 한 명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국회의원이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였다. 1979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가, 현장에 박정희의 방생기념탑은 크게 선 반면 안동댐 건설 공사로 숨진 노동자들의 위령탑은 초라하게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10월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면서 1989년 창립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박정희 ~ 전두환 시절에는 5차례에 걸쳐[6] 자그마치 10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제6공화국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사찰을 당했다! 이런데 군부독재의 후예로서 독선, 권위적인 박근혜에게 절대 호감을 느낄 리 만무하며,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에서는 여러모로 새누리당 내에서도 박근혜친박에게 계속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제대로 주장했던 편.

아버지는 독립군 활동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친일법을 통과시키려고 했는데, 당시 친일법 대상을 촘촘히 해야 한다고 발언했던 김희선 의원의 부친이 만주국 공안국 특무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김일련이었고 당시 독립군이었던 이재오의 아버지를 김일련이 잡아넣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3. 정치인 생활

김문수와 함께 정치성향이 크게 변화한 인물 중 한 명이다.[7]

1990년 진보정당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 김문수, 이우재 등과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이원형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후 같은 선거구에서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다섯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원내총무)를 지냈다.

3.1.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과는 대학시절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6.3 항쟁)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6.3동지회의 전임회장과 후임회장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고, 15대 국회에서 같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이명박이 15대 국회 첫 질문에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언급한 것에, '형님 진짜 그거야말로 나라를 바꾸는 거다. 그러면 이걸하려면 형님이 대통령 해야 되니깐, 국회는 내가 할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시오'라고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MB 캠프’의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캠프 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인사(人事)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해 이명박 후보의 경선 승리를 가져온 1등공신으로 대활약했다.

하지만 계파 갈등[8] 속에 치러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창조한국당문국현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가, 문국현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자 이후 치러진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원외 신분이던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국민권익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친이계 실세라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친이계 좌장으로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였고, 실제 친이계가 당권을 잡은 18대 총선에선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있다.[9] 당연히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는 등 박근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자신을 제외한 측근들이[10] 모두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11]

3.2. 박근혜 정부 시절

비박계와 손잡고 19대 국회 내내 친박계와 박근혜를 비판하다,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당직인 파동까지 벌이며 은평 을에 대해 무공천 선언하며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이재오 의원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정의당김제남 의원이 더불어민주당강병원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강병원 후보의 당선으로 이재오 의원의 6선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고 최병국 전 의원과 함께 중도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2016년 말 박근혜 정부 최악의 오점으로 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박근혜 까기에 한층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11월 20일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자, 21일 박근혜 대통령의 검찰수사 전면 거부와 관련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와 의무도 있지만, 범죄자인 대통령끌어내릴 권리와 의무도 있다"며 맹디스를 날렸다. 그러면서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받들고 그 하수인이 된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더 이상 당이 존립할 근거가 없다.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날, 이명박"참담한 심정이다. 박근혜는 민심에 따라 당장 퇴진해야 한다."라며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3.3.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였다.[12] 정운찬을 늘푸른한국당 대선주자로 세우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2017년 3월 20일 본인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

[image]

대선 후보 등록 후 2017년 4월 17일 사진처럼 복면을 하고 나와서 대선 후보간 복면 토론을 제안하였다. 이재오가 친이계 및 정치계의 중진급 인사이기는 하나 아직 늘푸른한국당이 원외 정당인 데다가 역대급의 사태가 터져 보수계열 정당의 당선 확률 자체가 희박한 만큼 차차기 친이계 재건 및 대권을 노린 대선 출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월 24일 군소후보 토론회에서는 그래도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답게 9명 중 제일 정상적이라는 평가[13]를 받고 있다. 오영국 같이 정말 허황된 공약들을 내세우는 군소후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짜인 공약들+진보적 통일관은 그가 괜히 5선 의원에 특임장관까지 역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 토론에서의 승자는 이재오라는 게 중론이다.[14] 다만 특유의 쉰 목소리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점.

신6자회담, 남북자유왕래, 한반도평화조약 등 놀랍게도 참여정부 내지 정의당[15]급 정도 되는 진보계에서나 나올 법한 통일관이야말로 이재오 특유의 노련미가 돋보였고 이것 덕분에 마이너 토론회에서 이재오가 제일 정상적이었다는 반응이 나왔던 것. 오히려 일부 극우인사들은 이재오의 통일관은 종북수준이라는 말도 안 되는 논평을 내기도 하였다(...). 즉 종박 무리들이 문재인 이상으로 이재오를 종북, 빨갱이 등으로 취급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긴 새누리당스럽지 않은 진보적 통일관으로 인해 극우 인사에게 종북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그러나 개표 결과 1만 표도 얻지 못하며 12위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낙선한다. 꼴찌는 허황된 공약을 내세우고 토론도 트롤링 수준으로 했던 오영국. 정치 경력을 감안하면 사실상 꼴찌나 다름없다. 심지어 광주와 제주에서 오영국에게 패했다. 5선 의원과 장관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과 72세라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를 생각하면 정치인생에 치명타란 평가 또한 있지만, 이번 대선은 어디까지나 일반 대중들에게 신생정당인 늘푸른한국당을 알리기 위해 출마한 것에 가깝기 때문에 정치생명에 큰 타격은 없을 거란 평가도 많다.[16]

여담으로 투표권이 없는 10대들이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의 주최하에 대선 모의 투표를 했는데 60,075표 중 13표를 획득하며 꼴찌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3.4. 문재인 정부 시절

2017년 12월 5일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서 이명박에게 매우 적대적인 기자인 주진우와 만나서 약 1시간 반가량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방송 듣기 또한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 공격수로 가장 유명한 정봉주[17]와도 두 차례에 걸쳐 살벌한 설전을 벌였다. 처음(47회)에는 정봉주가 '의리는 좋지만 이젠 떠나실 때 됐는데' 라고 말하자 이재오는 '없는 사람들끼리 의리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라며 되받았고, 두 번째(56회)에는 김백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유용건이 걸려들면서 이명박이 궁지에 몰리자 이재오도 궁색한 발언으로 일관하여, 이재오를 상대하던 정봉주와 진중권은 눈을 질끈 감거나 어이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는 모습을 보였다.

이명박 前 대통령에 대해 수사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통합을 명목으로 늘푸른한국당을 해체하고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복당하면서 이명박에 대한 수사를 정치보복이라며 비난하였고#, 2018년 12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2019년 10월 3일엔 조국 법무부장관 규탄 집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을 세웠으나, 정작 자유한국당 대표인 황교안에게도 자유한국당은 집회에서 빠지라는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친이 좌장의 입장에서 황교안 대표로 대변되는 친박과 갈등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2019년 12월 23일, 소설가 이문열, 송복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보수계열 시민단체인 국민통합연대를 출범시켰는데 이곳에는 친이 , 비박 , 친홍 계열 정치인들도 여럿 왔다. 이에 대해 직접, 정치인 여러분들은 개인적 친분 때문에 온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자리에는 전광훈 이 참석해 축사를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4. 여담

[image]

5.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민중당

21,716 (17.42%)

낙선 (4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신한국당

48,146 (43.63%)

당선 (1위)

초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한나라당

53,121 (51.04%)

당선 (1위)

재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한나라당

53,107 (45.25%)

당선 (1위)

3선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한나라당

38,164 (40.81%)

낙선 (2위)

2010

201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8대 국회 서울 은평구 을)[27]

한나라당

48,311 (58.33%)

당선 (1위)

4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새누리당

63,238 (49.51%)

당선 (1위)

5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구 을)

무소속[28]

34,318 (29.52%)

낙선 (2위)

2017

제19대 대통령 선거[29]

늘푸른한국당

9,140 (0.02%)

낙선 (12위)

[30]


  1. [1] 의원직 상실
  2. [2]강원도 동해시 부곡동. 후술하듯 출생만 동해에서 했지 이후 쭉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자랐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향은 영양군이다.
  3. [3] 경주 이씨의 분파이나 갈라져 나온 게 고려시대로 오래 되었다.
  4. [4] 다만 다른 사람에 비해서 강한 비판은 받지 않는데 운동권의 전설이었던 과거와 여전히 버리지 않은 개혁적인 성향, 그리고 친박세력과 적대적이라는 점 때문인 듯하다.
  5. [5] 이 때 이명박, 손학규와도 친분이 생겼다. 또한 6.3항쟁에서 중앙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대학 선배 서청원과도 친분이 생겼는데 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2000년대 중반 한나라당 내 친이-친박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서 적대관계로 변했다.
  6. [6] 그 중 3차례를 박정희 시절에 겪었다고 한다.
  7. [7] 물론 김문수와 같은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다. 19대 대선 공약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개혁적인 성향을 버리지 않았고 친박 진영에 대한 비판도 거침없이 한다. 쉽게 말해 우파 성향이 짙은 안철수라고 보면 된다.
  8. [8] 이거 때문에 친박계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게다가 친박계는 이명박의 오른팔 중 하나인 이방호를 밀어내기 위해 아예 대놓고 강기갑을 팍팍 밀어주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했다.
  9. [9] 그래서인지 박사모가 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이재오, 이방호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0. [10] 진수희 등.
  11. [11] 다만 이때는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 때 친박 중진들이 대거 학살당한 것과는 달리 19대 때는 친이계 중진들은 거의 다 공천을 받았고, 친이계 초재선이 대거 컷오프됐다는 차이점이 있다. 말년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이명박이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12. [12] 이명박 대통령이 창당대회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여론 동향을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
  13. [13] 조원진 vs 김선동병림픽, 오영국의 특이한 기행+제비족 내지 트로트 가수를 연상시키는 복장 등과 대비하여 그렇다는 얘기. 대통령 임기 6개월만에 개헌하고 3년만에 하야하겠다는 주장은 정말 뜬금없는 소리라는 평을 받았다. 6개월 이내 개헌도 말이 안되고, 3년만에 하야하면 3년만에 대선을 다시 치뤄야 한다.
  14. [14] 당시 19대 대선 후보자 토론-비초청 영상
  15. [15] 한반도평화조약은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
  16. [16]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이재오와 늘푸른한국당의 행보는 대통령 당선에 중점을 두지 않고, 늘푸른한국당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선 출마에 가까웠다. 애초에 속칭 제3지대가 축소되고 친박의 의석 빼고는 친이계 및 제3지대의 의석이 적어서 제3지대에서 대통령을 당선시킬 변수 자체도 적었고.
  17. [17] 참고로 정봉주는 진중권이나 주진우를 능가할 정도로 이명박을 가장 맹렬하게 공격했던 인물이다.
  18. [18] 이재오의 제안은 "대통령이 비상대권과 외치(국방, 외교, 통일)"를 맡고, 국회에서 이루어진 "총리 내각이 내치(경제, 사회 등)"를 맡는 방안이다.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다 보면 되겠다.
  19. [19]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 & 노동 변호사 시절인 1987년 구속당한 적이 있다.
  20. [20]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도 노무현에 대해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식대로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만나보면 타인이 바라는 것도 (납득만 시키면)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오히려 자기 식대로인 건 문재인 쪽이라고 하는데 경청은 잘 하지만 하는 건 자기 마음대로라고 평했다.
  21. [21] 실제로 친이계는 자유보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다.
  22. [22] 다만 정운찬 역시 친박과 박근혜를 매우 싫어하기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없다. 당장에 친이계 인사이자 이재오와 함께 차기 친이계의 대권주자로 손꼽혔던 정운찬이 박근혜와 친박에게 호감 자체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23. [23] 19대 대선 때 이재오 또한 김종필을 예방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늘푸른한국당도 보수색을 가진 정당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4. [24] 하지만 정치경력 차이는 많이 난다. 2014년 19대 국회 시절 서청원은 본인이 15대 국회 4선째 때 이재오가 초선으로 등원했기 때문에, 이재오와 싸울 군번이 아니라고 했었다.
  25. [25] 아래 조선일보 링크의 기사에 따르면, 2003년 당대표 경선에서 바로 앞문장에 썼듯이 계파가 큰 틀에서 같기 때문에 지지층이 겹쳐서 표가 갈라져 이재오가 독자출마를 하지 않았으면 충분히 이겼을 최병렬에게 경선에서 져서 대표직을 내주고 최고위원이 된 것에서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26. [26] 잘 알려졌듯 이명박도 6.3 항쟁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이 때문인지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는 사이었으나, BBK, 도곡동 땅, 최씨 가족, 문고리 3인방 등의 소재가 전부 다 나온 대선 경선 과정의 그 유명한 공방을 거친 2007년 이후로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부터 이명박이 상대 박근혜 진영의 서청원을 콕 찝어서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예상대로 시원하게 떨어졌지만 친박연대 창설 및 친박 무소속 연대로 18대 국회에 생환했다.
  27. [27] 전임자 문국현 의원직 상실
  28. [28] 단 소위 옥새런 사건의 결과로 새누리당 후보의 은평구 을 무공천이 합의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새누리당 후보로 봐도 무방하다.
  29. [29] 전임자 박근혜 탄핵 인용에 따른 파면으로 인한 궐위에 의한 선거
  30. [30] 2018년 2월 9일 늘푸른한국당 해산,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 복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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