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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

1. 개요
2. 구성
3. 편찬 배경
4. 특징
5. 편집본
5.1. 통감강목
5.2. 통감절요
5.3. 통감기사본말
6. 한국어 완역본
7. 기타
8. 바깥고리

1. 개요

중국어 위키문헌에 수록된 ≪자치통감資治通鑑≫ 전문(全文)[1]

표준 중국어로 번역된 ≪자치통감전역資治通鑑全譯≫ 전문(全文) pdf[2]

임금이 되어 자치통감을 모르면 정치를 잘 하려 해도 잘 다스릴 수 있는 근원을 알지 못하게 되며, 혼란스러움을 싫어하면서도 그런 혼란을 막는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하된 자가 자치통감을 알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을 섬길 줄 모르고 아래로는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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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성(胡三省, 1230~1302)[3]

11세기 중국 북송대의 정치가 사마광이 주체가 되어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1065년부터 1084년까지 약 20년간 작업하였다.

≪자치통감≫이라는 제목은 '다스림(治)에 도움(資)이 되고 역대를 통하여(通) 거울(鑑)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원 제목은 통지(通志)였으나, 송신종이 사마광을 치하하며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4]

2. 구성

총 294권, 우리나라에서는 중앙대 명예교수 권중달 교수가 완역하고 주석을 단 역주본이 있는데 총 32권이나 된다. 역주본에 대해서는 아래 해당 문서 참조.

각 나라마다 분량 배분은 다음과 같이 하였다.

400여 년 통일 왕조를 이어간 (漢)과 300년 통일 왕조를 이룩한 (唐)의 분량이 총 141권으로 ≪자치통감≫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고, 특히 당 왕조가 한 왕조보다는 유지된 시기가 짧았음에도 당 왕조를 설명하는 데 많은 비중을 투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저 둘이 통일왕조라서 그런 듯 하다., 서하 그리고 몽골에 쥐어터지던 송의 입장에서 보면 흉노 상대로 기병 10만을 동원하던 한 왕조나 돌궐, 고구려 등과 싸워 이긴 당 왕조 시절이 중국 역사상 가장 손꼽히는 리즈시절이었으니[7]

3. 편찬 배경

영종은 그간 정리되었던 역사서들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느껴 사마광에게 편찬을 명해, 1065년 통지 8권을 저술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1084년까지 19년에 걸쳐 전국시대의 시작인 (周)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8]에서 시작하여 송이 건국되기 바로 전에 존재했던 후주의 세종 6년(959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1362년의 역사를 294권 분량의 편년체로 기록했다. 대개 동양 역사책 중 기전체의 대표는 ≪사기≫, 편년체의 대표는 ≪자치통감≫으로 통한다.

송 영종이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고 명한 데에는 당시 지나치게 격화되어 있던 구법파와 신법파의 갈등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구법파라고 보수적이고 꽉 막혔다고 볼 수 없고 신법파라고 검증된 확실한 방법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송 영종은 어느 한쪽을 완전히 척살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일단 구법파의 필두인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파의 신료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형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정계에서 영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이다.[9] 그리고 잠시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다고 사서 편찬이 꼭 구법파에게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구법파가 사서를 통해 과거의 가치와 방법을 고수하자는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자치통감≫은 전체적으로 과거의 가치ㆍ윤리ㆍ도덕ㆍ사회제도를 옹호하는 관점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편찬은 송 영종의 절묘한 정치적 타협안이었던 샘이다.

4. 특징

사마광 개인이 모두 편찬한 것은 아니다. 시대별로 나눠서 다른 학자들이 편찬하기도 했고, 북송의 영종도 편찬국까지 설립해 지원해주는 등 정부의 도움도 받았다. 간단히 말해 ≪자치통감≫은 국가가 주도해 편찬한 ≪삼국사기≫와 사마천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된 ≪사기≫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사마광이 지어 올렸던 통지(通志) 8권을 기초로 하여 ≪구오대사≫를 따라서 ≪춘추≫의 규범을 모방하였으며 ≪춘추좌씨전≫의 서법을 따라서 완성했다. 정사를 비롯한 물론 실록(實錄), 야사(野史), 묘지류(墓誌類) 등의 사료 322종의 각종 자료를 참고했다고 한다. 사마광이 ≪자치통감≫ 편찬에 ≪춘추≫ 필법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음은 상당히 명교적인 선택으로서 그의 문집에 남은 여러 글들이나 당시의 저명한 ≪춘추≫전문가였던 유창과의 편지 교환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역사가들이 전문 분야를 맡아서 정리했다는 부분은 사서 편찬에 있어서 선구적인 방식으로서 한대 파트는 유반, 삼국 시대 - 남북조 시대는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유서가 맡고[10] 당대 파트는 사마광의 제자 범조우가 맡았다.[11] 고군분투하여 ≪사기≫를 저술했던 사마천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저술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마광 본인이 "내 정력을 이 책에 다 쏟았다." 할 정도로 내용에 열과 성의를 들였다. 중국의 명역사서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으며, 지금은 산일되고 없는 사마광 당시까지 전해지던 사료를 적지 않게 수록했기에 유력한 사료라고 주목받는다. 중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사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필수자료이다.

주요 사건들에 대해 '신광왈(臣光曰, 신 사마광은 말한다)'이라 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탈고한 후에도 스스로 '이건 따로 고증이 필요하겠는걸' 이라고 생각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사료 고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통감고이(通鑑考異) 30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자치통감≫ 연표 30권도 존재하고 사마광 본인이 본편의 목록과 범례를 정리한 통감목록(通鑑目錄) 30권이나 통감석례(通鑑釋例) 1권도 있다. 계고록(稽古錄) 20권은 본편에서 사마광 본인이 '이 부분은 좀 부족하지?' 싶은 내용을 보충한 것이다.

삼국시대조위를 정통으로 보지 않은 역사서라는 점에서 삼국지(삼국시대)를 다룬 사료에서는 특기할 만하다. 물론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 위진의 연호를 채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위만 정통으로 내세우고 촉한손오를 무시한 것은 아니다. 특히 촉한에 대해선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서 촉으로 칭한 것을 본래 국호였던 한으로 표기하였다. 즉, 사마광이 위진에 치우친 서술을 했다는 것은 세간의 오해이다.[12] 통감을 읽다보면 사마광이 이 부분에 있어 공정성에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사마광이 '무통설(無統說)'로 입장을 정하면서 조위정통론촉한정통론의 대립을 어느 정도 일단락시킨 점과 조씨와 본인의 조상인 사마씨가 나라위나라의 황위를 찬탈하고 위나라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점에서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다.[13] 게다가 정사 삼국지 번역이 김원중역이 하도 안 좋은지라 삼국시대를 보는 데 있어 이 책이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위 정통론을 주장한다고 착각하는 촉한의 팬들과, 이 책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무리들 때문에 자치통감의 무통설이 퇴색된 감도 있다. 참고로 대략적으로 삼국지의 시대로 잡는 황건적의 난부터 삼국통일까지의 기간을 다루는 부분은 한기(漢紀) 부분인 58권 초반부터 진기(晉紀) 부분인 81권 초반까지 대략 23권쯤 되는 분량이다.

사마광은 본인부터가 이미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정치가였고 따라서 ≪자치통감≫은 사마광 시대까지의 역사서를 단순 요약한 것이 아니라 옛 사료들을 정치적 이성으로 재해석하여 새롭게 편집한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사마천의 ≪사기≫에 실린 '상산사호(商山四皓)'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는 장량이 "유방이 얻지 못한 은거 선비들인 상산사호를 얻으면 태자의 위치가 확고해진다"며 여후에게 권했고 유방이 그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보고 태자를 바꾸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마광은 유방이 폐태자하려다가 뜻을 바꾼 일에 대해 전설 같은 '상산사호' 이야기를 사료로 채택하지 않았고, 그렇게 성질이 사나운 유방이 은거 선비들 몇몇이 말린다고 뜻을 꺾었을 리 없다며 당시 장량을 비롯한 조정의 세력 있는 대신들이 태자 편이었기 때문에 태자를 바꾸지 않았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증명했다. 사마천의 사기가 '문학가가 지은 역사서'라면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지은 역사서'임을 보여주는 예이다.[14]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천하는 모두의 것이고(天下爲公)[15]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以人爲本) 자세가 가장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백성이 고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라는 맹자의 민귀군경(民貴君輕)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천하위공의 자세는 "대저 관직은 폐하의 관직이 아니라 천하의 관직입니다"란 말이 그 실체를 잘 말해준다. 이는 관직이란 현명하고 유능한 적임자에게 수여하여 사회와 국가를 함께 다스리는 공공 도구이지 위정자나 통치자가 사사롭게 총애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사마광은 역사의 여러 사례를 통해 문화와 교육을 통해 개인의 품성으로 내면화한 명분과 도의의 덕성은 부단한 수신 과정에서 일상 속의 자기절제력으로 승화되고, 더 나아가 매우 현실적인 검약과 겸양의 가풍으로 확장되며, 궁극적으로는 명분과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기풍으로 보편화하는 것을 역사를 통해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 기풍은 법이나 규제로 지탱되는 강제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실천과 참여로 유지되는 느슨한 구속력이다. 하지만 이 느슨한 구속력은 명예와 염치와 도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체 분위기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어떤 강제적 구속력보다 더 끈질기고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사마광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정치가'답게 중국 정치사에 있어 중요한 과거의 사례들을 돌이켜보면서 사료들을 엄밀히 선별하고 검증하여 ≪자치통감≫이 명저가 되게 하였다.

이후의 역사서 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자치통감≫ 이후 ≪자치통감≫을 전례를 따른 역사서가 많이 나왔지만, ≪자치통감≫ 이상의 역사서는 나오지 않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학자들은 물론 공부를 좋아하는 군왕들의 No.1 필독서이자 애독서였다. 주석 가운데는 송말 원초의 문인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의 주석인 이른바 '호주(胡註)'가 가장 유명한데 본편의 기사를 보정하고 새로운 사료를 덧붙이는 등 훌륭한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다만 호삼성 본인의 평론은 다분히 흥망에 대한 감개가 많이 담겨 있다는 평가도 있다.[16]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중국으로 사신들이 떠날 때면 임금님들이 꼭 통감 한 질 챙겨오라고 당부하거나, 의 황제들이 조공 답례품으로 쏘는 기사도 자주 보인다.

특히 세종대왕은 명실공히 통감덕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애독하여 경연에서 ≪자치통감≫을 강하게 했고 스스로 해설서를 붙여 간행하기도 했으나, 이 책의 분량이 분량인 만큼 세종의 시력이 악화되는 원인이 되는 데도 일조했다. 집현전의 인재들을 총동원해 펴낸 이 주석서가 바로 '≪자치통감≫훈의'로, 이것을 간행하기 위해서 세종은 전국을 수소문해 호삼성이 음주를 단 ≪자치통감≫ 일부를 간신히 구해내는 데 성공했고, 이걸 바친 사람은 훗날 그 덕분에 연좌제에서 벗어나기도 했다.세종 17년 3월 5일

5. 편집본

5.1. 통감강목

과거에도 분량이 엄청난게 사실이라서 보통 주자가 정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총 59권)이 더욱 퍼졌다. 약어로는 ≪강목≫. 야사에서 홍국영정조를 구하기 위해 영조아킬레스건인 책을 잘랐다니, 가렸다니 하는 책이 이 책. 편년체인 통감과는 달리 ≪춘추≫의 체재에 따라 사실에 대해 큰 제목인 강(綱)을 따로 세우고, 사실의 목(目)으로 구별하여 강목체로 작성되었다. 지금 보기엔 ≪강목≫도 분량이 엄청나고, 잘라먹은 부분도 꽤 되지만 원본을 읽은 사람들의 평으론 꽤나 성공적인 편집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나온 남송 무렵엔 첨삭된 부분이 많다고 비판도 많았던 모양으로[17] 이후 남송 말기부터 점점 중요시되어 명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중요한 책으로 취급되었다 한다.

사실 사마광조차도 ≪자치통감≫ 294권은 양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80여 권 정도로 더 축약하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주자가 60권 이내로 ≪자치통감≫을 축약했으니 주자가 사마광이 본래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주자 역시도 생전에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문인 조사연(趙師淵)이 번천서원(樊川書院)에서 이어 편찬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이거 때문에 장태렴(章太炎)같은 사람은 "≪강목≫은 ≪자치통감≫을 모본으로 하는데, 회암(晦庵, 주자)이 몸소 지은 것이 아니고 그 제자 조사연이 지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춘추≫를 지으실 적에는 그 적을 것은 적으시고 뺄 것은 빼버리심에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무리가 감히 한마디 보탤 수가 없었다. 회암은 곧 제자가 지은 것에 이름만 의탁한 셈이다."라고 까기까지 했다. 어쨌든 분량에 압도된 사람들은 이거라도 시도해보자. 다만 주자가 ≪강목≫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춘추필법을 통해 오리지널 통감의 무통론을 까면서 촉한 정통론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조선에서도 ≪강목≫을 많이 접하면서 촉한에 동정적인 여론이 널리 퍼지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역시 세종대왕의 애독서로 세종은 ≪강목≫에도 훈의를 달아 ≪자치통감강목훈의≫를 간행했다. 한편 청의 강희제는 ≪강목≫을 비판하고 강희 46년(1707) 송락(宋犖) 등에게 명하여 사료를 거듭 새로 모아 편집한 것을 교각하여 ≪어비통감강목전서(御批通鑑綱目全書)≫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는 총 190권. 기껏 축약했더니 다시 내용을 늘리시는 천고일제. 그만큼 강희제의 학문 수준이 높고 통감에 관심이 많았다 하겠다.

5.2. 통감절요

성백효 역본 통감절요 보러가기

한국에서는 고려 원 지배기 때 유입된 ≪소미가숙 통감절요(小微家熟通鑑節要)≫ 약칭 ≪통감절요(通鑑節要)≫가 조선 말기까지 더 많이 읽혔다. 이 책은 강씨의 가숙(家塾)에서만 전해지다가 주자(朱子)가 높이 평가하면서 알려졌다. 북송 휘종 때 사람인 강지(江贄)가[18] 집안 애들 전용 교재로 편집한 버전이었는데 편찬 자체는 주희의 ≪통감강목≫보다 이전에 편찬되었지만 출간은 더 늦은 1237년에 간행되었다.

≪통감절요≫는 ≪자치통감≫ 294권의 내용을 절요하여 편집한 것이다. 〈주기〉 5권을 2권으로, 〈진기〉 3권을 1권으로, 〈한기(漢紀)〉 60권과 〈위기(魏紀)〉 10권을 22권으로, 〈진기(晉紀)〉 40권을 5권으로, 〈송기〉 16권과 〈제기〉 10권을 1권으로, 〈양기〉 22권을 1권으로, 〈진기〉 10권을 1권으로, 〈수기〉 8권을 1권으로, 〈당기〉 81권을 14권으로, 〈후량기〉 8권과 〈후한기(後漢紀)〉 4권을 1권으로, 〈후주기〉 5권을 1권으로 줄여, 전체 50권 15책으로 추린 것이다. 이 중 〈한기〉 22권과 〈당기〉 14권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한과 당 시기 위주로 엮어졌으며, 육조(六朝)와 오대에 있어서는 큰 사건 정도만 열거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때문에 강용(江鎔)의 서문에 "양한(兩漢)과 수·당에 있어서는 정화(精華, 정수(精髓)가 될 만한 뛰어난 부분)가 다 구비되었고 육조와 오대에 있어서는 본말(本末, 중요한 부분과 중요하지 않는 부분)이 모두 나와 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간행되었을 때는 이미 ≪강목≫이 퍼진 뒤라 중국에서는 인지도가 형편없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는 중국에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판본이 나타났지만, 조선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는 못한 듯하다. 연경(燕京)에 간 박차수(朴次修)가 서점가에서 ≪사략(史略)≫과 ≪통감절요(通鑑節要)≫를 찾아보았으나 볼 수 없었고, 그곳의 유명 선비들도 무슨 책인지 모른다 하였다고 전하였다. 그에 비해 유독 조선에서는 통감과 ≪강목≫을 처박아두고 이것만 읽는 선비들이 많아서 통감이라고 하면 ≪자치통감≫ 원본이나 통감≪강목≫보다 이 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통감절요≫에 비판적인 조선 학자들은 ≪통감절요≫는 완전하지 못한 책으로. 내용의 주객이 바뀌고 왕적(王賊)이 전도됨으로써 의리에 온당치 못하고, 기타 착오와 사실의 와전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논란할 필요조차 없다고 평하였다. 실학자 이덕무정약용은 원전을 놔두고 축약본에 매달리는 이런 세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19]

조선시대 학자들은 '사서(史書)의 자세하고 간략함이 모두 구비된 것은 이 ≪통감절요≫보다 나은 것이 없다.' 칭찬하였는데, 조선에서 ≪통감절요≫의 유행은 당시 도덕사관을 위주로 한 주자의 정통론이 크게 유행한 관계로 ≪자치통감≫보다 ≪통감강목≫이 더 많이 읽힌 것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조선시대에 와서 주자학이 절대적으로 숭봉됨에 따라 ≪자치통감≫은 정통론에 어긋난다 하여 점차 소외되고, 대신 ≪통감절요≫를 많이 읽게 되었다. 특히 주자를 절대 존숭하던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교본적 차원 내지 역사 지식 습득의 차원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선비로서 이 책을 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무장(武將)들에게도 병서의 일종으로 애독되었다. 이 책은 역대 사서의 편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실린 역대 인물들의 언행이나 고사는 공령문(功令文)의 제작은 물론, 일반 문장을 작성할 때도 필수적인 전거로 활용되었다.

다만 조선 후기에 ≪자치통감≫ 원본보다 ≪통감절요≫가 더 널리 읽히게 되는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재정 문제다. 이후 조선의 문물이 초토화되면서 그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치통감≫과 ≪강목≫을 인쇄할 만한 재정이 뒷받침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강목≫을 인쇄하는 데 소요된 종이의 양만 해도 959첩이라는 기사가 있는데, 16세기 기준 종이 한 첩이 20장이었으니 ≪강목≫ 한 질을 완간하는 데만 거의 2천 장이 소요된 셈이다. 물론 간행 과정에서 버려지는 양은 제외한 것. 편집본인 ≪강목≫도 이 정도인데 전 294권이나 되는 원전 통감을 인쇄하는 데 드는 물자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거기에다가 책을 값싸게 구할수있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리 민간에서 자치통감을 발행한다해도 민간에서는 천석꾼, 만석꾼 소리 들을 정도로 집안이 부유하지 않는 이상 자치통감 전권을 사는데 드는 부담이 몹시 컸다. 이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또 하나 ≪통감절요≫가 널리 읽힌 이유로는 서당이나 가숙에서 아동이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는 기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 판 성문종합영어인 셈이다. 더구나 이런 경우 완질을 다 읽지 않고 제7권 '양태부가의상소(梁太傅賈誼上疏)'까지만 읽히고 이때 문리가 트이면 재능이 있다고 여겨 다른 책으로 들어가고 여기까지 배우고도 문리가 트이지 못하면 가난한 집안 아이의 경우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여겨 공부를 중단했다. 그리고 문리가 트여도 ≪통감절요≫를 더 읽지 않고 다른 경서로 넘어갔다. 어차피 축약이 심해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더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5.3. 통감기사본말

남송원추가 자치통감의 기사를 모아서 42권 분량으로 편집한 편집본. 사건 중심의 역사 서술체인 기사본말체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6. 한국어 완역본

워낙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전권을 읽기 어려웠으나 중앙대학교 명예 교수 권중달 교수가 무려 14년에 걸쳐 완역하여 출판했다.[20] 출판사가 힘들어져서 관둔 적도 있었으나 ≪자치통감≫을 완역 출간하겠다는 열정이 엄청나, 끝내 자신의 사재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 후 받은 퇴직금을 털어 ≪자치통감≫ 하나만 출판하기 위한 출판사를 스스로 설립하고 2009년에 완간. 총 32권으로 삼화 출판사에서 출판 중이다. 총 32권의 정가가 90만 원에 육박하는 가격의 압박이 있으나 수십 년 노력과 집념이 깃든 완역본이라 그런지 권중달 교수 찬양글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북(eBook)으로도 나왔다. 총 295권. 종이책 한 권을 10권으로 나눈 듯[21]. 가격은 리디북스 세트가 58만 원. 단권을 다사면 82만 원. 전자책이 출간되면서 일부 전자 도서관에서 대여해 볼 수 있으며, 앞으로 지원되는 도서관의 수를 늘려나갈 것이라고 한다. 지원된다면 이용해 보자.

참고로 ≪자치통감≫ 완역은 번역계의 선두주자인 일본도 아직 못 이뤄낸 일이라고 한다. 다만 통감 원문만을 완역했다는 것이지, 호삼성이나 세종대왕이 달아놓은 주석까지 번역한 것은 아니라서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편.[22] 그래도 원문만으로도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이를 홀로 완역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호삼성 주석은 권중달 교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에만 조금씩 달려있다.

다만 가끔 번역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 삼국시대를 예로 들면 촉한의 재상 비의를 불의(...)로 번역한다든가 주석에 습착치의 '한진춘추'를 '진한춘추'로 잘못 기재한다든가 하는 등.

사기는 완독한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지만, ≪자치통감≫은 식자층 중에서도 완독한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분량도 사기보다 훨씬 방대하고 사기보다 번역 작업 및 대중화가 덜 된 측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리고 사기보다 사건 묘사가 너무 무미건조해

2015년 10월에는 권중달 교수가 2009년 완간본을 보완한 '평설 ≪자치통감≫'을 새로 출간하고 있다. 원문과 번역을 나란히 실어 바로 원문대조가 가능하도록 하고,[23] 역사 지도와 권 교수의 평설을 함께 실었다고 한다. 현재 8권(진 시대)까지 출간 중[24]. 평설≪자치통감≫의 경우 1권이 원본 1권과 같은 내용. 다 출간하려면 294권이 나와야 한다. ㅎㄷㄷ

여담으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자치통감≫의 저자인 사마광은 둘 다 성이 똑같고,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의 이름인 중달은 사마광의 선조인 그분의 자. 친척 같아보이지만 완전한 남남. 사마씨야 조상 하나에서 갈라지기는 하지만 사마천은 사마씨 시조의 첫째 아들 계통이고 사마광은 차남 계통이다.

≪자치통감≫의 요약본인 ≪통감절요≫와 ≪강목≫ 역시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 중이다. ≪통감절요≫는 3가지 완역본이 존재하는데, 2015년 충북대 김정화 교수가 번역한 충북대출판부 판본과 2006년 ~ 2010년 한학자인 성백효 선생이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 판본, 1987년 고려대 철학과 김충렬 교수가 다른 다섯 명과 함께 공역한 삼성출판사 판본이 있다. 김정화역본은 총 4권, 성백효역본은 총 9권, 김충렬역본은 총 3권이다.[25]

≪통감강목≫은 2015년부터 전통문화연구회를 통해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고 있는데, 2018년 3월 15일 시점까지 10권까지 출판되었다. 1권, 2권은 성균관대 신승운 교수가 책임 번역자로 참여하였고, 3권 ~ 5권까지는 한학자 성백효 선생이 책임 번역으로 참여하였다.[26] 참고로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으로 바로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주석이 달린 ≪강목≫의 국역본이라는 뜻.

2019년 4월에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 소장이 번역한 올재 클래식스 30차 세트(총 30권 계획 중 1차분 10권)가 출간되었다. 올재 사무국의 말로는 3차에 걸쳐서 전 294권을 새로 완역 출간한다고 한다.# 그러나 번역자로 나선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장이 2019년 4월 25일 별세한 터라 향후 계획은 불투명해졌고, 결국 2019년 8월 12일 나머지 2/3 분량은 출간이 불가함을 공지하였다.#

7. 기타

마오쩌둥이 무려 17번이나 완독했다고 한다. ㅎㄷㄷ 읽으라는 공산당 선언은 안 읽고![27] 특히 자세한 뜻을 알기 위해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 권 놓고[28]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꼼꼼히 읽었다고. 대장정 도중에도 마오쩌둥은 자치통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베개 밑에 두고 잤으며, 때문에 페이지 곳곳이 너덜너덜해져서 투명반창고 투성이였다고 한다. "읽을 때마다 수확을 얻는 책"이라는 것이 자치통감에 대한 마오쩌둥의 평가였다. 심지어 마오쩌둥 자신이 ≪자치통감≫의 독후감격인 ≪자치통감평석(資治通鑑評釋)≫을 쓰기도 했다.

중국의 한 다큐에선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충칭 회담을 진행 중 우연히 아침에 후원에 나와 책을 읽고 있던 장면을 보여주었다는데 서로를 발견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둘 다 들고서 읽고 있던 책을 내려 놓은 것을 클로즈업하니 그 책이 바로 똑같이 ≪자치통감≫이더라는 의미심장한 연출을 보여 줬다고 한다. ≪자치통감≫이 동아시아 통치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책인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 시대에는 이 책을 자통감(資理通鑑)이라고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고려의 제6대 임금인 성종의 휘가 치(治)였기 때문에 피휘를 했기 때문. 이는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기록을 인용한 부분의 원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말엽 급진 개화파의 리더로 유명한 김옥균홍종우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에 읽었던 책도 바로 이것. 김옥균은 방에서 ≪자치통감≫을 읽고 있다가 홍종우에게 총탄 3발을 맞고 절명했다.

<속자치통감>이란 것도 있다. 송나라 때부터 원나라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2018년 2월부터 권중달 교수가 번역본을 출판한다고 한다.

우병우가 옥중에서 완독했던 책이라고 한다. 2018년 3월 20일 기준으로 한 번 완독하고 이제 2독(讀)째라고... ###

8. 바깥고리


  1. [1] 당연하지만 한문 원문이다. 한문에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보자.
  2. [2] 2002년 귀주인민출판사에서 펴낸것으로 표준 중국어에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보자.
  3. [3]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아 자치통감음주(資治通鑒音注)을 저술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4. [4] 권중달 교수도 '자치통감'이란 이름을 하사한 황제는 송 신종이라고 설명한다.#
  5. [5] 단 연호만 위로 썼을 뿐 세 나라 가운데 누구도 정통은 아니라 하였다. 촉한도 원래의 국명인 한(漢)으로 표기한다.
  6. [6] 이 역시 진나라 시기 화북에 수많은 나라가 난립했으므로 연호를 진나라를 기준으로 두었다. ≪자치통감≫은 수나라의 중국 통일 때까지 남조의 연호로 표기한다.
  7. [7] 사실 또 이는 당나라가 비교적 최근에 존재했던 왕조인 감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료도 더 많을테고
  8. [8] 진을 멸망시킨 대부들이 자신들을 제후로 승인해달라고 낙양에 사신을 보내자 위열왕이 이를 승인해 조ㆍ위ㆍ한이 건국되는 기사로 ≪자치통감≫의 첫 부분은 그 배경인 (趙)ㆍ(魏)ㆍ(韓)의 대부들이 진의 제후인 지백을 없애고 (晉) 땅을 갈라먹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실권은 없었지만 그래도 중원의 오래된 왕조로서 도덕적인 명분이나 혈연적 정통성을 근거로 중원의 제후들을 분봉하고 그들의 종주국이라고 자처했던 주 왕조가 그토록 강조해 오던 도덕적 명분이나 정통성이 아닌 실제적인 힘을 기준으로 그들의 주인이었던 진을 멸한 대부들을 어엿한 제후국으로 인정한 것이기에(쉽게 말해 미국이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제5공화국을 합법적 정권인 양 묵인한 상황과 같은 뉘앙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주변 국가에 끼친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
  9. [9] 이는 송태조가 남긴 송나라의 통치 기조인 석각 유훈 때문이기도 하다. 송태조는 이를 통해 사대부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유훈을 자손들에게 남겼다.
  10. [10] 특히 남북조 파트의 완성도가 대단해서 사마광 본인이 "나는 이걸 그냥 받기만 하면 되겠는걸."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11. [11] 특히 수당 부분은 ≪신당서≫ 이후 새로 수집한 자료도 써서 사서의 정밀도가 높아졌다는 평가.
  12. [12] 그러나 이런 평가는 통감이 나온 이후부터 종종 있어왔던 듯 하다. 당장 주자부터가 촉한을 정통으로 내세우면서 강목을 지었고 조선의 성대중이라는 학자는 사마광을 비판하며 위진을 정통으로 내세웠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사마부가 사마광의 조상이니 위진에 곡필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의 시선도 있다. 예컨데 위나라의 입장에서 촉한이나 오의 침입을 침구(침탈)라고 적었다던가. 위나라의 군주는 황제로 적고 촉한과 오나라의 군주는 각각 한주, 오주로 적는다던지...그러나 이는 오해로, 25사의 선구주자인 사마천의 사기도, 삼국시대 매니아들이 흔히 보는 진수의 정사 삼국지도 갖고 있는 한계다.
  13. [13] 만약 사마광이 조상의 영향을 받아 위진정통론 신봉자였다면, 그 전신인 조조의 황위찬탈 과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사마씨의 황위찬탈 과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미화했을 것이다.
  14. [14] 이는 두 사람의 사서 서술 당시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경우엔 혼자서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전해지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서술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마광은 유서와 범조우를 비롯한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조정의 지원을 받아 많은 사료들을 수집하여 고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 [15] '천하위공'이라는 4자로도 알려졌다. 20세기 초에 중국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제를 출범시킨 쑨원의 좌우명이 되기도 했다.
  16. [16] 아닌 게 아니라 이 사람은 한족의 송 왕조가 몽골족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 엄청난 시대의 풍파를 목도했던 사람이다.
  17. [17] 애초에 강목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이 중국 본국에서조차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역사가의 주관이 지나치게 개입되고 기록의 원문이 역사를 집필하는 사람에 의해 임의로 깎이거나 바뀌거나 하다가 원래 뜻이 바뀌기도 한다는 단점이 있어서다. 당대의 실록 및 관련 기록을 거의 복붙해 짜맞추다시피 한 ≪구당서≫가 후대에 문장면에서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원문을 여러 가지로 첨삭했다고 알려진 ≪신당서≫보다 사료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
  18. [18] 소미는 강지의 호다.
  19. [19] 사실 이런 세태는 요즘도 비슷하다(...)
  20. [20] 권중달 교수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치통감≫에 관심을 갖고 출판하기 전까지 번역하기 위한 작업 기간까지 합치면 40년 세월을 ≪자치통감≫과 함께했다고 한다. 진정한 '의지의 한국인'. 참고로 원저자인 사마광의 집필 기간은 19년이고 권중달의 번역 기간은 14년이다.
  21. [21] 원본 구성에 따른 294권 + 별책 1권이다.
  22. [22] 안타깝게도 중국 역사서를 번역할 때 주석이 홀대받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처지가 가장 나은 사기만 봐도 번역자들이 삼가주를 날려 먹어서 그 주석들에 반영된 여러 사료 비판, 참고 자료, 주석자의 부연 설명들에 대해서는 번역서를 읽는 사람이 알 길이 없게 된다. 그 다음으로 사정이 괜찮은 정사 삼국지는 역자가 배주에 대해 아예 대놓고 좋지 않은 소리를 했었고.
  23. [23] 단순히 ≪자치통감≫ 원문만 실은 것이 아니라, ≪강목≫과 ≪통감절요≫의 원문도 실어 놓았다.
  24. [24] 이전 문서에는 5권 이후 출판 계획이 없다고 적혀 있었지만, 2017년 11월 6권 ~ 8권이 동시에 나왔다. 꾸준히 작업 중인 듯.
  25. [25] 전통문화연구회에서는 1995년, 한학자 김도련 선생이 번역하여 ≪통감절요≫ 1권을 출간한 적이 있다. 아마 완역을 목표로 하였던 것 같지만 아쉽게도 후속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2년 김도련 선생이 타계하면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김도련 선생이 아세아문화사를 통해서 ≪통감절요≫의 전통 방식으로 한문(한자가 아니라 한문이다) 주석(두주)을 달았던 적이 있었던 만큼 ≪통감절요≫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 이 외에도 완역은 아니지만, 1996년 홍신문화사에서 출간된 조수익 번역의 ≪신역통감≫이 있는데, 일부만 번역한 것이므로 역시 제외.
  26. [26] 공동 번역자도 있는데 교체가 많은지라 주석에 달아두었다. 1권 ~ 3권은 서정문, 4권은 이종덕, 윤은숙, 5권은 이난수, 윤은숙 등이다. 6권은 이종덕, 윤은숙, 7권은 윤은숙, 이목용, 8권과 9권은 윤은숙이 맡았고, 10권은 이목용이 맡았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추가 바람.
  27. [27]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의 원본을 상대적으로 적게 읽은 편이었다. 공산당 초기 시절 보구에게 책을 빌려 읽었지만, 보구는 그가 농촌 출신임을 들어 시골 촌놈이 마르크스 서적을 읽어 뭐 알겠냐고 뒤에서 비웃었다고 한다.
  28. [28] 사실 한문은 현대 중국인도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고대 한자를 읽는 수업까지 따로 있을 정도로 한문은 수없이 많고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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