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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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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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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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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1980년~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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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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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조엘

크리스토퍼 크로스

존 레논 & 오노 요코

토토

마이클 잭슨

52nd Street

Christopher Cross

Double Fantasy

Toto IV

Thriller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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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폴 사이먼

U2

조지 마이클

Can't Slow Down

No Jacket Required

Graceland

The Joshua Tree

Faith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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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레잇

퀸시 존스 & Various Artists

내털리 콜

에릭 클랩튼

휘트니 휴스턴

Nick of Time

Back on the Block

Unforgettable... with Love

Unplugged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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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베넷

앨라니스 모리셋

셀린 디옹

밥 딜런

로린 힐

MTV Unplugged

Jagged Little Pill

Falling into You

Time Out of Mind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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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선정 위대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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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로버트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0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가렛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빗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라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런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루스

에드워드 엘가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존 로널드 루엘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차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러시아인, 위대한 독일인, 위대한 프랑스인, 위대한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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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88년 9월 30일

위치

1752 Vine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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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MBE

[image]

이름

John Winston Ono Lennon (존 윈스턴 오노 레논)[2]

국적

영국 [3][image]

출생

1940년 10월 9일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사망

1980년 12월 8일 (향년 40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신체

179cm, 67kg, O형

학력

캘더스톤스 스쿨[4] (졸업) (-1957년)
리버풀 칼리지 오브 아트 (중퇴) (1958년)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I Am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2.2. 예술가로의 변모
2.3.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3.1. 오노 요코와의 만남
2.3.2. 비틀즈가 무너지다
2.3.3. 솔로 활동
2.4.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2.5.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3. 논란 및 비판
3.1. 어두운 면모
3.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3.3. 양성애자?
4. 사용했던 장비
5. 레논 벽
6. 여담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1. 빌보드 1위
7.2.2. 빌보드 2위
7.2.3. 빌보드 3위~10위
7.2.4. 빌보드 11위~20위

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전 세계 대중음악계의 상징적 인물 중 한 명이다.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 비틀즈의 일원이다. 또한 폴 매카트니와 함께 대중음악사 사상 가장 혁신적인 파트너십으로 유명하다.

부인 2명과 낳은 아들 2명이 있는데 한명은 신시아 레논[5]과의 사이에서 낳은 줄리안 레논[6], 그리고 오노 요코와 결혼하여 낳은 션 레논이 있다.[7]

2. 생애

2.1. I Am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image]

초기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8]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편이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9]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10]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Glass Onion에서는 폴이래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11]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된 존은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12] 맨날 같이 학교를 뒤집어놓던 친구들과 함께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13] 밴드 결성 직후, 퀴리맨의 멤버 아이반 본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14]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조지가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만취한 경찰관이 운전하던 경찰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그 경찰관은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점. 그때 당시 여론과 시민단체에선 사실상 살인이자 뭐든지 술만 먹으면 다 감형해주냐면서 경찰과 법원을 강하게 비난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말도 안되는 재판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그때까지만 해도 존은 어머니에게 배운 밴조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 레논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15]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image]

왼쪽이 폴 매카트니, 오른쪽이 존 레논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16] 그러나 'Rubber Soul'에서부터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In My Life'[17],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

2.2. 예술가로의 변모

사실 'Rubber Soul' 녹음 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18]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Rooftop Concert'의 영상은 남겨졌지만. 이 'Rooftop Concert'는 폴이 멤버들에게 제안해서 성사된 42분 길이의 즉흥적인 연주였고, 당시 'Rooftop Concert' 녹음에 참여한 Alan Parson(우리가 아는 알란 파슨즈 프로젝트의 리더)은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고, 대단한 날이었다"고 후에 이야기했다. 비틀즈 팬들에게는 말기의 비틀즈 공연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영상이다.

[image]

1966년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한 존 레논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Paperback Wri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19]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20]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폴 매카트니가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존 레논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image]

Strawberry fields forever 뮤비에서의 모습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21], 'I Am the Walrus'[22]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2.3.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3.1. 오노 요코와의 만남

[image]

비틀즈로 데뷔하기 직전인 1962년, 존은 리버플 미술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신시아 파웰[23]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태어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기획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를 받은데다가(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미국 진출 이후에야 밝혀졌다.), 비틀즈가 대성공을 거두자 인기에 취해서 신시아와 줄리안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가 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였는데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공신 중 한명이다보니(...) 달갑게 보기 힘들었던 것.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24]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한 인물이 바로 요코였다. 다수의 팬들 입장에 그녀는 어느날 갑툭튀해 존의 옆자리를 차지한 외부인이었고 음악에 간섭해서 그렇기에 굴러들어온 돌이 깽판친다는 인상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세운 공(?) 이상으로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2.3.2. 비틀즈가 무너지다

[image]

비틀즈 해체 직전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25]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26]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자신의 동거녀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 매카트니 문서로. 물론 이 갈등의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27]

[image]

화이트 앨범 제작 시즌에 찍은 사진. 머리 스타일이 변해서 그렇지 데뷔 초기에 비해 외모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화이트 앨범에서, 그는 인도 여행('Dear Prudence',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28]에서 보고 느낀 것들과 극심했던 우울중('I'm So Tired') 등, 무척 개인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폴과 조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비틀즈 해체의 기미는 이때부터 분명 존재했다. 각종 소음을 집대성한, 전위예술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Revolution 9'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존의 곡이다. 음악 수행시간에 이곡을 불러본다면?!?

Let It Be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체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들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훗날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McCartney 주도작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결국 비틀즈 해체 직후, 이들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29] 그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잘 나타나있다. 물론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대인배 링고 스타[30]의 중재로 그만두긴 했다.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끝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 어느 정도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미 1974년 경에는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으며[31]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었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 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32]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70년대 후반 저술한 전기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폴도 그랬지만)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 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는 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

[image]

1969년 3월, 'Bed-In for Peace' 시위 도중 인터뷰를 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여튼 그렇게 60년대 후반쯤부터 존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한다. 요코와 함께 며칠 동안 섹스하며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든가[33], 솔로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는다든가. 앞 뒷면 전부.(…)

2.3.3. 솔로 활동

[image]

솔로 시절의 존 레논[34]

비틀즈 해체 직후 폴이 왕성한 솔로 활동을 한 것과 달리 존은 우울증에 빠져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줄어들어갔다. 지금은 상상이 어렵겠지만 비틀즈 해체 후 존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았다(특히 미국에서). 실제로 존이 솔로 발표한 곡 중 그의 생전에 미국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곡은 단 하나 뿐이며("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년 11월 16일에 1위 달성), 사망 후에 1위를 한 곡("(Just Like) Starting Over")까지 합해도 빌보드 1위에 오른 존의 솔로 곡들은 단 둘 뿐이다.[35] 그의 부진한 인기를 입증하듯, 그가 당시 인기있는 신인들이었던 셰어 보노+소니 보노 부부와 불화를 일으킨 후 미국 모든 라디오 방송국들에 "셰어+소니의 곡을 방송하려거든 내 음악을 일체 방송하지 말라"고 통보하자, 방송국들은 존의 음악을 방송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어렸을 때의 애정 결핍과 여러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플라스틱 오노 밴드(John Lennon/Plastic Ono Band).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앨범의 수록곡인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eve in Beatles"라 외친다. 그 외에도 히틀러, 케네디, 예수, 만트라, 성서, 마술 등등을 믿지 않는다며 절규한다

이외에도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이 시기의 존을 자세히 묘사했다.

비틀즈 해체되고 나서 존은 'John Lennon/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을 냈다. 이때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대표되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해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해당 지식인.

그러다 베트남전이 종결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았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 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말년에 존이 보인 가정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션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줄리안에게는 죽을 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36] 이런 줄리안을 가엾게 여긴 폴은 비틀즈 시절부터 줄리안을 돌봐주었고 줄리안도 폴을 더 따랐다고 한다. 비틀즈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인 'Hey Jude'도 가정의 붕괴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줄리안에게 폴이 힘내라고 써준 곡이다.

2.4.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image]

중년기의 존 레논[37]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질환자에게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38구경 리볼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었다. 그러나 비록 채프먼의 아내가 동양인이긴 했지만 오노 요코와는 정반대로 순종적인 타입의 여성이었다.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또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며 오히려 철저한 안티로 돌아섰다. 채프먼은 법정에서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지껄이며 신성모독이나 저지르고, 노래 Imagine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정작 본인은 수백만달러짜리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38] 물론 관심병 탓도 아주 없진 않다. Court TV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한번도 주지 않아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레넌이 아버지처럼 보여서 죽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39]

이 사건으로 마크 채프먼은 현재 30년 넘게 교도소에 갇혀 있다. 2년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다는데, 2014년 8월 22일 그의 여덟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사실 석방돼도 마크 채프먼 입장에선 불안한 것이, 여전히 존의 몇몇 팬들이 마크 채프먼을 죽여 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출소일 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다는 카더라가 있어서…뭐 카더라라기엔 당연한 사실이지만.

여담으로 마크 채프먼은 존에게 총을 쏘기 직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에게도 끈질기게 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인을 거의 해주지 않는 스티븐 킹도 그 끈질김에 질려 결국 사인을 해줬다는데, 만일 킹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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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마크 채프먼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히고 5시간 후 존은 살해당했다.[40]

예, 말씀드려야만 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것은 단지 풋볼 경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방금 뉴욕의 ABC 뉴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와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유명 그룹 비틀즈의 존 레논이 뉴욕 시의 서쪽에 있는 아파트 건물 근처에 두 차례에 걸쳐 총을 맞아 급히 인근 루즈벨트 병원으로 향했으나 도착 즉시 숨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식 이후에는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네요.

Yes. we have to say it, remember this is just a football game, no matter who wins or loses. An unspeakable tragedy confirmed to us by ABC News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outside of his apartment building on the west side of New York City, the most famous perhaps of all The Beatles, shot twice in the back, rushed to Roosevelt Hospital. Dead on arrival. Hard to go back to the game after that news. - 존 레논 암살 당시 중계 도중에 전한 속보 전문 -

이때, ABC 방송이 미식축구 중계 도중 암살과 관련하여 당시 스포츠캐스터인 하워드 고스넬 씨가 속보를 전했다.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은 존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당신 존 레논이죠?"("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네..."("Yes...")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무언가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존 레논의 유골은 화장 후 요코가 보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가 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41]

사실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 = 마오쩌둥이라고 까기도 했다. 그래도 좌우 가리지 않고 골고루 까며 모두까기 인형을 시전하셨다.

2.5.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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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죽은 날." - 타임 지[42][43]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과 수많은 명곡들,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인지, 존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폴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요즘 세대야 지금도 활동하는 폴을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존은 많은 음악 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존재다. 그러나 막상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All You Need Is Love, Across The Universe 같은 것만 빼면 사실상 전부 폴이 만든 노래다. 심지어는 Imagine이 비틀즈 노래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알려진 노래가 폴이 만든 곡이 많은 것뿐 존 레논도 수많은 곡을 만들고 기여했으며 존 레논 특유의 감성이나 작곡을 좋아하는 팬들도 꽤 있었다.

생전에는 대중적인 곡을 주로 작사,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았던 폴과는 달리, 존은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의 인기는 폴에게 밀렸지만 세상을 떠난 뒤 수많은 대중,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3. 논란 및 비판

3.1. 어두운 면모

시간이 흐른 후, 존 레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방향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의 사생활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존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및 질투심에서 비롯된 소유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존이 폴을 밴드에 받아들인 것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취향이면서도 기타 연주를 자신보다 잘 하기 때문이었고 신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중산층 출신에 자신과는 다른 얌전한 무리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로 비판을 받는 부분은 1.전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가정폭력, 2.아들 줄리안 레논에 대한 아동 방임, 3.사회적 약자 비하, 4. 야스쿠니 신사 방문 같은 언행불일치로 요약된다. 이외에도 비틀즈 관련 서적에서 드러나는 학창시절 존 레논의 행실은 생양아치 그 자체였다(...).[44] 그의 어두운 면이 다시 알려지면서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전파하던 이면의 사생활은 매우 폭력적이라며 존 레논에 대한 실망스러운 의견이 많아졌다. 1960년대만 해도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어느정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미국과 특히 영국에 만연했기 때문에 당시엔 별로 논란이 되지 않던 부분이 오늘날 다시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 단체에서 존 레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늘었다. Rubber Soul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가사에 대한 반발을 대표적인 예시로 볼 수 있다.

그가 전처 신시아 레논에게 때때로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신시아 본인의 인터뷰에서 언급된다.[45] 신시아는 존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했다고 말했다. 폭력이 계속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외도를 비롯해 존은 그녀에게 결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신시아는 예술가적 성향이 강한 존과 자신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혼 이후 그에 대해서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은 신시아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식인 줄리안 레논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줄리안에게 존은 관심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후 존은 잃어버린 주말[46]을 시작으로 줄리안과 시간을 보냈지만 그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으로 남았다. 줄리안은 아버지가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서 외도로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다고 비판하다가도 그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비틀즈 초기 시절에 무대 위에서 중증 장애인을 비하한 일도 자주 언급된다. 동영상 링크[47]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만남을 가지고 정신적 성숙을 거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이때를 시작으로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를 많이 발표했다. 이 시절 그는 원초적 외침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를 통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Plastic Ono Band 전반에 그런 치유의 과정이 나타나며 이후 그가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존은 외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결혼도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존과 오노의 관계는 일반적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들어 존과 메이 팡의 관계.

또한 영국의 맬컴 X 추종자로 역시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이클 X를 도와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노 요코와 함께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 경매에 부쳐서 그의 보석 비용을 마련했을 정도. 뱅크 잡을 보면 알겠지만 마이클 X는 맬컴 X와의 비교조차 실례일 정도로 막장이었다. 적어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던 맬컴과는 달리 마이클은 강도, 살인, 납치 등을 저지른 범죄자로 1972년 할레 킴가(본명 게일 벤슨)라는 여성 구성원을 생매장해 죽여서 1975년 교수형을 당했다. 이 때도 존 레논이 그를 도우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명백한 범죄자를 타당한 이유도 없이 도와주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이 여전히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결국 그가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불안정한 내면을 치유하고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로 커리어에서 이런 면이 돋보이며 '비틀즈의 아이돌'에서 '고독한 뮤지션'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였다. 주변 인물들과 과거의 나쁜 기억을 풀기 시작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폴과 화해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또한 두 번째 아들 션에게는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의 천재적 재능의 이면에 늘 부족했던 일반적인 행복도 어느정도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3.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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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의 영향인지 1971년야스쿠니 신사에 방문해 남긴 사진이 남아있어 비판받고 있다.

토리이 앞에서 촬영된 사진만 존재해서 관광 차원에서 단순 방문인지, 실제로 참배까지 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말도 있다.[48]

다만,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일본의 국가주의 프로파간다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신사를 방문하였다는건 모순적인 행위라는 점은 변하지 않고 이점은 당연히 비판받는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반전주의와 평화를 노래하던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인지 몰랐다면 일본의 전쟁범죄 내지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증거이기 때문.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해 무지한 것은 존 레논 외에도 여러 서구권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점으로 꼽힌다.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시킨 것은 1978년이라 주장하며 1971년에 방문한 것은 큰 문제가 없다는 팬보이들의 옹호도 있다. 그러나 일제 시절부터 야스쿠니에서는 침략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며 국가주의적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어 왔다.

아들 션 레논이 2019년 8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여자친구가 욱일기 문양이 새겨진 셔츠를 입은 사진을 게시함과 동시에, 이를 비판하는 글에 조롱 및 비난 댓글을 다는 등 막장 행각을 벌이면서 재조명되었다.

3.3. 양성애자?

1963년 게이인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49]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 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라며 소문을 부인했다. 몸을 섞지 않았을 뿐이지 성행위를 한 적이 없는 건 아니다.[50]

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엡스타인과의 외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적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4. 사용했던 장비

존 레논은 시기 별로 자주 사용하는 기타가 있다. 존 레논이 사용한 악기들 중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악기를 열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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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enbacker 1958 325

Rickenbacker 1963 325

비틀즈 초기에 사용한 일렉트릭 기타. 함부르크 시절 구매해서 65년까지 무대에서 사용한 기타이다. 58모델은 원래 내츄럴 피니쉬인데 레논이 검정 페인트로 리피니쉬 해서 사용하다가 리켄베커에서 깜댕이 모델로 재생산하여 준것이 63모델이다. 리켄베커 325는 다른 전기기타와 다르게 넥과 스케일이 짧다. 이런 특징은 리듬 기타인 존 레논에게 코드를 빨리 변환할 수 있어 용이한 기타였다. 숏스케일 기타는 리듬 연주시 코드 잡는데 편하다.특히 손가락이 짧은 사람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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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켄베커에서 트리뷰트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 픽가드에 싸인이 있으며 리미티드로 출시.오노 요코의 시그니처

http://www.gibson.com/Images/Products/AcousticGuitars/Round-Shoulder-Dreadnaught/Gibson/70th-Anniversary-John-Lennon-J-160E/Gallery-Images/RSJLMSNH1-Finish-Sho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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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딩하고 남은 기타줄에 담배를 끼고 튜닝을 하고 있는 존 레논)

Gibson J-160E

깁슨의 엔도서로 조지와 함께 받은 기타. 분실된 기타가 최근에 경매에 붙여졌다. 깁슨과 에피폰에서 시그네춰가 나왔으며 특징은 픽업으로 P90 픽업이 달린 것. 일렉기타 픽업이 달린 탓에 볼륨 노브와 톤 노브가 있다. 70주년 기념 모델도 출시. 위 기타는 70주년 모델이다.

레넌은 빈티지 선버스트 제품을 사용하다가 분실후 해리슨과 함께 다시[52] 구매하고 후에 사이키델릭풍으로 페인팅하고 픽업을 뒷쪽으로 놓아 사용하다가 내츄럴 상태로 밀고 픽업을 원래 자리로 재위치한 다음 사용하였다. 3색으로 구성된 트리뷰트 모델은 상판을 라미네이티드가 아닌 솔리드로 구성하여 소리가 약간 다르다. 라미네이티드로 만들면 피드백이 줄어들고 소리가 약간 변한다. 마지막 행보는 요노와 같이 자신들의 그림을 각각 그려 침대에서 사용한것이다. 최근 다시 발견되어 경매에서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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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phone 1965 Casino

Revolution Casino

비틀즈 중기, 후기, 솔로활동까지 애용된 기타. 처음 에피폰 카지노를 쓴 것은 스튜디오 녹음용으로 구매한 폴 매카트니이다. 이것을 보고 조지와 함께 샀으며 조지는 다른 기타도 사용했지만 존은 Imagine 녹음까지 사용한다. 처음엔 빈티지 선버스트에 픽가드가 달렸으나 중간에 뒷판을 회색 페인트로 칠했다가 인도에서 수행후 돌아와 1966년부터 픽가드를 제거하고 네츄럴 색상으로 리피니쉬한다. 어떻게 저걸 만들었냐면, 존은 1966년 인도수련중 어떤 사람에게 '악기의 도색을 벗겨내면 좋은 소리가 난다'라고 들어서 1968년에 직접 사포로 바디 도색만 벗겨냈다. 한때 에피폰에서 존 레논 시그니처 기타를 한정 판매했었다. 소리가 일반 카지노보다 날카로운 것이 특징. 메이드 인 제펜, USA, 차이나 3개로 나뉘며 차이나 빼곤 거의 구할 수 없다. 현재 일반버전은 3가지로 나뉘며 차이나에서 만드는 카지노와 일본에서 만드는 5ply 1965 Elitist 메이플 바디 카지노 그리고 3ply의 메이플 바디로 만드는 제펜 Elitist 1955 빈티지 아웃핏 등이 있다.(중간 중간 발매한 리미티드 버전은 제외, 빈티지 아웃풋은 현재 일본 내수용이며 직구로 구매하여야 되고 현재 생산이 중단된 상태로 보인다.)

시그너처를 총 3번 발매하였다. USA, Japen(내수용),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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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son Les Paul Jr

뉴욕 공연에서 들고 나온 적이 있으며, 특이점은 넥 픽업이 찰리 크리스천 모델이라는 것과 픽업 셀럭터가 있단 점. 브릿지는 일반 P90이다. 깁슨 커스텀 샵에서 한정판매 되었다.[53]

5. 레논 벽

존 레논의 이름을 따온 민주화 운동 성지. 중국 홍콩체코 프라하 이렇게 2군데 있다.

5.1. 홍콩 레논 벽

[image]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홍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2. 프라하 레논 벽

[image]   자세한 내용은 레논 벽(프라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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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하사의 실제 사진. 그는 1968년에 한국에 배치되어 근무했고, 그 시절의 전투복을 레논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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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의 좌측 인물은 촬영을 위해 해당 상의를 대신 입은 라인하트 하사의 형제 앤드류(Andrew) 라인하트이다.

군알못이라 부대마크 읽을 줄 모르던 존 레논은 이것이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것이라고 믿고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베트남전 시기에 퍼져있던 반전의 메세지라는 분석도 있다. 당연히 이 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 소속이라 베트남에 간 적은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 반전, 평화 메세지를 전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부대이긴 하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107, 혹은 디자인이 거의 같아 대용품으로 쓰이는 OG-507[56]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어째서인지 전투복 상의인데 야전상의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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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에 노란 칠을 하고 여기에다 현란한 아프리카 토속 문양을 그려버렸다. 말 그대로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격. 이 자동차는 이후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하였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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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도 쯤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1. 빌보드 1위

7.2.2. 빌보드 2위

7.2.3. 빌보드 3위~10위

7.2.4. 빌보드 11위~20위


  1.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
  2. [2]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였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한 뒤 개명했다. 미들네임윈스턴윈스턴 처칠에서 따온 이름인데, 존 레논은 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존은 진보성향의 인사인데 윈스턴 처칠은 보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개명하면서 이를 없애려 했으나 기각되어 결국 빼지 못했다.
  3. [3] 후에 미국에서 살긴 하지만 국적이 아닌 영주권자다.
  4. [4] 당시에는 쿼리뱅크 고등학교였으며 쿼리멘의 이름을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5. [5] 최근까지 노엘 찰스와 결혼하여 살다가 2013년 3월 11일 사망.
  6. [6]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똑같이 생겼다.
  7. [7] 수염을 기르면 비슷한데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다.
  8. [8] 국내에서는 안경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이 분못지않은상당히 미남이다.
  9. [9] 존 레논은 좋게 볼 수 없는 사람. 존의 유년시절 그를 떠난 것도 모자라, 훗날 비틀즈의 인기에 힘입어 어느 소녀팬과 결혼(!)한다.
  10. [10] 노래제목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여기에서 나온것이다.
  11. [11] 록엔롤 명예의 전당에서 폴이 연설하는걸 들어보면 벤조가 아니라 우쿠렐레라고 한다. "존의 어머니 줄리아 레논은 빨간머리의 우쿠렐레를 치는 멋진 예쁜 여성이였어요. 그런 여성은 처음 봤어요. 존은 어머니에게 우쿨레레 코드를 배워 치는데 저에게 처음으로 기타코드를 배웠지요."
  12. [12] 존은 이모 미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미미가 보수적이어서 존의 삶을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고. 심지어 다른 가족들과 관계를 끊으면서도, 미미하고는 죽을때까지 매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미미는 존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10년을 더 산 뒤 1991년 타계했다.
  13. [13] 대학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
  14. [14] 이 당시 존은 폴이 기타를 왼손잡이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상적이었고, 특히 폴이 자작곡을 만드는 것과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15. [15] 본래 미술학도였던 자신의 정체성과 독일인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으로.
  16. [16] 존 레논은 폴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을 폴 매카트니는 존의 노랫말을 쓰는 실력을 높이샀다고 한다.
  17. [17] In My Life의 경우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곡인데, 존의 생전 그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곡이라며 주장하고 나온 것. 사실 폴은 존이 죽기 전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비틀즈 시절 그들이 쓴 모든 곡들은(심지어 Yesterday처럼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인 경우에도) Lennon-McCartney로 표기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작사가는 존이라는 것이 중론. 일부 팬들은 메인 보컬이 존이라는 것과 특유의 서정적인 스타일 등을 근거로 들며 존의 곡임을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폴이 괜히 거짓말까지 해가며 200곡들 중 한 곡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했겠냐며 반론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기도 하고. http://cafe.naver.com/thebeatlemania/76433 같이 읽어보면 좋을 포스팅.
  18. [18] 근데 어째 사과 내용도 예수쟁이들을 비꼬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예수 발언 항목으로.
  19. [19] 이 백마스킹에 근거해 '비틀즈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숭배적 메시지가 관측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마스킹이 화제가 된 또다른 노래로는 Revolution #9이 있다.
  20. [20]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가 쓴 미완성 곡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노래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은 앨범 안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두 곡을 쓴 경우로, 존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폴의 Penny Lane이 있다.
  21. [21]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Penny Lane'은 사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항목으로.
  22. [22]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Was Paul'이라면서 폴을 까기도 했다.(해당 구절의 내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한 등장인물로 나온다고 알고 있던 Walrus가 사실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폴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당이다'라는 의미. 곡 자체도 폴을 까기 위해 만든 곡이다. 폴이 평소에 자신의 노랫말을 짓는 실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존 레논이 "폴이 만든 가사는 '유리 양파'라는 단어처럼 뭔가 그냥 있어보이는 단어를 붙여놓았을뿐 사실 아무런 의미없는 가사일 뿐이다."라면서 폴을 디스하는 내용)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해마)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일단 폴 매카트니 사망설 자체가 아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23. [23] 2015년 4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
  24. [24] 사망한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대신할 비틀즈의 후임 매니저 선정에 대한 멤버들의 이견 불일치를 말한 것으로 현재 시점에서 비틀즈 해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25. [25] 해당 사진은 Abbey Road 앨범 자켓 촬영 당일인 1969년 8월 8일에 찍힌 것이며, 비틀즈의 공식적인 해체 발표는 1970년 4월 10일이지만, 밴드 멤버 네 명이 마지막으로 모인 건 1969년 8월이었다. 이후 넷이 한꺼번에 모이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사진의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사실 험악해보이는 분위기와 다르게 다른 사진을 보면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다. 애비 로드를 마무리할 당시에는 멤버들이 이제 끝이 왔구나 생각해 꽤나 허심탄회한 분위기였다.
  26. [26] 오노 아줌마가 와서 비틀즈 리허설때 기타는 어떻게 치고 여기서 이렇게 쳐라 노래 맘에 안든다 다시해라 라고 하는 잔소리꾼 역할에 기타 앰프에 앉아서 자신의 행위예술까지 했으니 빡칠만 하다. 존이 Oh! Yoko 녹음 현장 녹화한 영상을 보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지 좋아서 노래까지 만들어주는데 존이 빡칠때까지 다시하라 한다
  27. [27] 원래부터 존은 자의식이 강했는데 밴드 성향 때문에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멜로디가 폴의 방향으로 바뀌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예로 Help!의 오리지널 템포는 엄청 느리고 우울한 멜로디이다. 존 내면을 들어내는 가사들을 가지고 폴이 멜로디를 가볍게 입혀 만든 작품중 하나. 본인이 비틀즈 활동시 발매한 노래들은 대부분 극혐이라고 한적도 있다.
  28. [28] 비틀즈 문서로. 사실 존의 인생사와 우여곡절 자체를 비틀즈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29. [29] 해체 직후인 1971년 존은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Lennon Remembers)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이미 옛날에 끝났다라는 등,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라는 등등...당시 인터뷰 존의 성격답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어조가 깊기는 하지만, 존이 당시에 얼마나 쌓인게 많았는지 알 수 있다.
  30. [30] 상기된 인터뷰에도 나와있지만, 그 천하의(...) 독설가이자 직설화법을 자주 구사하던 존도 링고만큼은 욕하지 않았다.
  31. [31] 이 녹음을 담은 부틀렉이 존재한다. 제목은 "A Toot and a Snore in 74"로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레코딩의 질 보다는 역사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 부틀렉이다.
  32. [32] 이후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폴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꼭 찾아 들었다던가, 오노 요코가 폴에게 '존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참 싸우는 와중에도 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33. [33] 일명 베드인 사건. 반전 시위의 일환이었다.
  34. [34] 사실 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심한 근시를 갖고 있었으며, 비틀즈 초기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엘비스처럼 터프가이가 되고 싶은데 안경쓰면 범생이 스탈이라... 그러다가 1966년 무렵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오히려 안경 쓰고나서 터프가이가 되었다.
  35. [35] 이는 다른 어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1위곡 기록보다 적은 수이다. (폴 9곡, 조지 3곡, 링고 2곡. 링고는 존과 동점이라 생각되겠지만 링고의 1위곡들은 모두 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1위에 올랐으며, 존 사망 직후 그의 곡들에 관심이 쏠리며 1위에 올라간 스타팅 오버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36. [36] 다만 존이 오노 요코의 알선으로 메이 팡과 동거하던 시기에 줄리안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주고 부자간의 정을 쌓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물론 존이 요코와 화해하면서 모두 끝나버렸지만...
  37. [37] 그 옆은 아내 오노 요코
  38. [38] 주간조선 2010-10-18 《존 레넌 탄생 70년·암살 30년 아직도 눈물 흘리는 뉴욕!》
  39. [39] 중앙일보 2002-02-23 《존레넌 살해범 '범행 이유는 애정결핍'》
  40. [40] 총에 맞은 당일 하루 전날, 레논은 자신의 이모인 미미에게 어린아이같은 말투로 "내일 만나요 미미, 집에 갈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미미는 그 다음날 일어나서 방송에서 레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보면 슬픔에 가득한 눈으로 인터뷰하는 미미를 볼 수 있다.
  41. [41] 미국 정부는 당시 헨드릭스의 집에 이사했던 것을 찝어서 마약문제와 여려가지 자잘한 것들을 시비 걸면서 이민을 거부하였다. 사실 이민을 거부한 이유는 존 싱클레어의 자유를 보장하라 라는 사회운동을 하며 젊은이들이 정부에 반감을 가지게 해서 높으신 분들이 맘에 안들어 했다는 것이 누가봐도 정설이다. 하지만 전남편이 미국인이였던 요코는 미국 이민이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날까지도 레넌은 이민을 하려고 변호사와 상담을 하며 애썼다. 그전에 했던 마약들을 문제 삼았기에 요코와 헨드릭스가 죽은 집에서 대청소를 했다고 인터뷰한다.
  42. [42] 돈 맥린의 아메리칸 파이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실제로는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
  43. [43] 공교롭게도 39년 뒤 이날 어느 신인 래퍼가 요절한다.
  44. [44] 이에 관한 건 다른 사람이 아닌 존 레논 본인이 밝힌 바이다.
  45. [45] 사실 오노 요코에게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다.
  46. [46] Mind Games 녹음을 시작하고 존과 오노가 이별하기로 결정하면서 오노는 존에게 비서 메이 팡을 소개시켜준다. 메이 팡은 존에게 폴이나 줄리안 같은 사람들과 나은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존은 그녀의 말을 납득한다. 이후 존이 다시 오노와 화해하면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주말은 끝나게 된다.
  47. [47] 참고로 이 공연 이전에 사전에 알지도 못한 채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가졌었다고 한다.
  48. [48] 야스쿠니 신사가 도쿄의 노른자 땅인 치요다 구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역사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도쿄의 명소 정도로 생각하고 방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비틀즈 시절 공연했던 일본무도관을 방문하면서 길 건너편에 있는 신사를 같이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49. [49] 아예 이 소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까지 있을 정도.#
  50. [50] 폴 매카트니의 말에 따르면 둘이서 자기 위안 행위를 하여 누가 더 오래 참는 지 내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51. [51] 숏스케일 기타는 펜더사에선 재규어 머스탱 같은 모델들이다. 일반적인 프렛간격이 아닌 더 짧은 간격을 사용함으로 특유의 짧은 서스테인 그리고 작은 장력이 주는 소리 등이 특징이다. 위해서 서술했다 싶이 본인이 리듬기타 파트인데 손가락이 짧다면 숏스케일 기타를 고려해보는것도 좋다.
  52. [52] 맞는지 모르겠음 확인 부탁.
  53. [53] 쥬니어 모델은 원래 1픽업 1볼륨 1톤이다. 스페셜처럼 되어있다는점이 특별하다.
  54. [54] 국군 공식 번역 및 계급 대치에 따르면 육군 병장이지만, 실제 역할 및 지위를 고려하면 육군 하사에 더 가깝다.
  55. [55] 195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까지 사용된, 미군이 채택한 전군 공용 민무늬 작업복.
  56. [56]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부터 80년대까지 쓰인, OG-107의 후신인 미군 최후의 민무늬 작업복. 이후 채택된 것이 그 유명한 위장무늬 전투복인 BDU다. OG-107은 폐지된 지 오래된데다 베트남 전쟁 때 소모된 게 많고 재현자들 위주로 많이 사갔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순면 재질이라 합성섬유가 들어간 507보다 광택이 덜하고 후줄근해 보여서(대신 흡습성과 속건성, 방염성은 107이 더 높다.), 대용품으로 507이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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