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스 폴링

< 195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

1953 - 헤르만 슈타우딩거

라이너스 폴링

1955 - 빈센트 뒤 비뇨


노벨평화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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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919년

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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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국제연합아동기금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 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 없는 의사회

김대중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 연합

화학무기 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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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us Carl Pauling

라이너스 칼 폴링

생몰연도: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

1. 인물소개
2. 반핵운동
3. 비타민C
4. DNA에 관련된 일화
5. 준결정
6. 둘러보기

1. 인물소개

오로지 나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미국의 화학자로 노벨화학상노벨평화상을 단독으로 수상한, 그리고 소련 레닌훈장까지 수상한 위대한 과학자이다.[1]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2019년까지 개인으로서 노벨상을 단독으로 2회 수상한 경우는 폴링밖에 없다.[2] 아울러 현재까지 세계에서 유일하게 노벨 과학상과 평화상을 모두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20세기 과학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명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화학결합론의 기초를 구축한 천재 과학자이자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섰던 사회운동가로 굉장히 다대한 활동을 해왔었다. 노벨화학상은 전기 음성도 연구로 탔다.

1901년 미국 오리건포틀랜드 에서 태어나, 1918년 오리건 주립대학교에 입학하여 1922년 화학공학과 학사 수료를 하였다. 그는 당시 학생 신분임에도 강의 조교를 할 만큼 화학에 우수한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칼텍 대학원에 입학해 1925년물리화학수리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28살에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20대에 양자물리학을 복잡한 분자 연구에 응용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랐으며 화학결합에 관한 그의 이론은 현대 과학에 중요한 부분으로 반드시 거론된다.

2. 반핵운동

과학자로서의 업적도 뛰어나지만 이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반핵운동, 평화운동에 앞장나섰던 점이다. 그가 느꼈던 사회와 인류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핵무기 반대와 핵실험의 위험성을 주장하는 데 평생을 헌신케 만들었다. 그 때문에 당시 미국 내에서 매카시즘 열풍이 불었을때, 그는 오펜하이머와 같이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실험 반대 운동을 벌여 전 세계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반대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1963년 미국과 소련의 핵협정이 맺어진 이후, 반핵운동에 활동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3. 비타민C

말년에 '비타민C가 암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해 이게 논쟁의 중심에 있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3]

영장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비타민C를 체내에서 합성이 가능했고 그러한 동물들이 체내 합성해내는 비타민C의 양을 사람의 몸무게를 대입해 계산했더니 상식적인 권장량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양의 비타민C가 인간에게는 필요할 것이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는 메가도스로 비타민C를 매일 매일 과량으로 섭취했다. 그냥 탁자 위에 비타민C 통을 두고 보이는 대로 집어먹었다고 한다. 하루에 수~수십g (mg이 아니다. 보통 일일권장량은 80~100mg = 0.08~0.1g 정도로 책정한다.) (사먹는 비타민C 정제가 보통 한 알에 0.5g~2g이다. 1000mg 짜리 비타민C 정제에는 약 100mg정도의 고형제가 포함되어있다.)을 복용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타민C 효과를 봤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본인은 90이 넘도록 장수했으며 죽기 2주 전까지 대학에서 열성으로 강의를 했다고 한다. 오래 살기도 했지만 건강하게 살았다는 얘기. 그러다가 1994년 8월 19일 95세(만 94세)를 일기로, 전립선암으로 사망한다.

4. DNA에 관련된 일화

거기다 생화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DNA의 구조를 연구했다. 그때 당시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 결합에 대한 이론을 완성시킨 최고의 화학자였으므로 분자구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

...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폴링이 사용한 시료는 손상된 DNA 시료였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된 DNA 구조를 밝혀내지 못했다. 게다가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탓에 외출이 금지되어 해외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할 수 없었고,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인 DNA X선 회절 사진을 볼 수 없었다.[4] 게다가 자기 자신이 세운 이론에 위배되는 구조를 만들고 발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주장하던 DNA는 삼중나선 구조였는데 이 구조로는 염기가 어떻게 정보를 갖는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원자들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다라는 단점(이러면 DNA가 불안정해져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을 가지고 있었다. [5]

결국 DNA 구조를 밝혀낸 공로는 제임스 왓슨프랜시스 크릭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폴링의 DNA 구조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만약 폴링이 그 단서(DNA X선 회절 사진)를 볼 수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실수를 눈치챘을 것이고, 화학상, 생리의학상, 평화상을 수상하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사실 제임스 왓슨도 폴링과 같이 DNA를 삼중나선구조로 생각하였는데 폴링의 가설을 가지고 월킨스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폴링이 못봤던 위의 그 결정적인 단서인 X선 회절 사진을 보았고 이중나선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노벨상도 받은데다가, 그 위대한 폴링이 조롱거리가 되자 겁이 없어졌는지 DNA 구조를 밝히려고 노력한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는 책을 썼는데, 당연하지만 여기에는 폴링도 포함되어있었다. 근데 정작 크릭은 DNA번역을 rRNA가 주형이 된다고 주장하다가 망했다...허나 폴링은 이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일깨워준 둘을 칭송하는 성인군자에 필적하는 마음씨를 선보였다

5. 준결정

생전에 일정한 구조를 이루지만 규칙성은 없는 물질인 준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 부정하였다. 특히 다니엘 셰흐트만[6]이 준결정을 발견하자 '준결정은 없지만 준과학자는 있다.'라는 발언으로 강하게 비난하였다. 쉽게 말해서 과학자 자격도 없다는 것. 폴링을 중심으로 해서 화학계 전체적으로도 셰흐트만 교수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았다. 쉽게 쓰여져 있지만 셰흐트만 교수는 교과서부터 다시 읽으라는 말까지 듣는 등 심각한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수학을 통해 준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셰흐트만뿐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도 잇달아 준결정을 발견하면서 폴링이 죽을 때까지 없다고 우기던 준결정이 마침내 학계에서 인정받았다. 결국 2011년, 노벨화학상수상자로 다니엘 셰흐트만이 선정되면서 사후에 그의 오류로 확정. 현재 준결정이 신소재 개발에서 중요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것을 볼 때 준결정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폴링이 저지른 인생 최대의 실수.

6. 둘러보기


  1. [1] 이와 반대로 소련에서 차르 봄바(...)를 만든 후 반핵운동, 반체제 운동에 투신한 인권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도 유명하다. 이 사람 역시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사후 그의 이름을 딴 평화상까지 만들어졌다.
  2. [2] 사상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인 마리 퀴리의 경우, 첫 수상은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공동으로 받은 것이었다.
  3. [3] 정작 자기자신이 암으로 사망했다. 쇼방 효과없네
  4. [4] 그런데 이에 관해서 최근에는 다른 설이 등장했다. 비록 라이너스 폴링은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회절 사진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조교가 영국에 가서 사진을 보고 왔고, 또한 폴링도 얼마 뒤에 출국 금지가 풀려 영국에 갔다고 한다.
  5. [5] RNA의 일부분에선 삼중나선이 나타날수 있긴 한데 폴링이 생각하던 삼중나선과는 조금 다르다.
  6. [6] 서울대 물리대학원 특강이 이스라엘 대통령 출마로 취소되었다는 그 사건의 주인공이다. 낙선된 이후 다시 서울대에서 특강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