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이름

전태일(全泰壹)

출생

1948년 9월 28일,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1]

사망

1970년 11월 1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향년 22세)[2][3]

학력

서울 남대문국민학교[4](전학)
대구 청옥 고등국민학교(중퇴)

종교

개신교(감리교)

부모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

형제자매

남동생 전태삼
첫째 여동생 전순옥
막내 여동생 전순덕[5]

인척

첫째 매제 크리스토퍼 조엘
둘째 매제 임삼진
조카 전여진, 전동준, 전동명[6]
외조카 임지안, 임지강[7]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평화시장에서의 노동운동
2.3. 저항과 죽음
2.4. 그의 죽음이 미친 영향
3. 저술
3.1.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3.2. 모범업체 계획서
3.3. 수기
4. 전국노동자대회
5. 다양한 의견들에 대한 반박
5.1. 근로기준법은 급진적이었다?
5.2. 노동착취는 없었으며 문제는 낮은 노동생산성이다?
5.3. 전태일은 고임금을 받는 근로자였다?
5.4. 전태일의 행동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5.5. 전태일은 신변비관으로 자살하였다?
5.6. 전태일은 살해당했다?
5.7. 기타
6. 관련 단체
7. 미디어
8. 참조링크

1. 개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분신자살 당시 외친 말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깎아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려야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적혀진 유서[8][9]

대한민국노동자, 노동운동가. 대구광역시(당시 경상북도 대구시) 태생. 1960년대 평화시장의 봉제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 권리를 위해 노력하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알리고자 22세의 나이로 근로기준법 법전과 함께 분신자살하였다. 후술하지만,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상태의 전태일 열사의 뒤에 있던 익명의 친구가 불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전태일은 분신에 대해 미리 언급하였으니 이는 곧 분신자살이다.[10][11]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노동운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며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시민 전체가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과 당사자 집단인 노동자 계층 전체, 즉 노동자 사회전체가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계기로 각성하게 되었으며, 이후 노동계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노태우 정부 이후부터 급격한 처우 개선과 임금 상승이 병행하게 된다.

그 덕분에 한동안 지니계수가 서유럽 국가 수준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가치가 떨어지고 2010년대에는 열정페이라는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신조어가 등장하며 전태일 열사의 간절했던 당시의 외침을 무의미하다는 듯 씹고 있다. 물론 6, 70년대의 노동 환경과 비교하면 기본적인 조건들은 이런 노력들로 인해 훨씬 나아진 게 맞다.

그의 사망 후 그의 가족들은 모두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고, 모친 이소선 여사는 '청계천 노동자들의 어머니'[12]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으며, 그의 동생들 역시 노동운동가[13]로 여러 고초를 겪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은 연간노동시간 2,000시간 이상으로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하기 전에는 무려 3,000시간에 달했다. 현재는 일간노동시간이 평균 8시간이었으나 저 당시에는 11시간이 넘었고, 만약 주 5일제로 이 3,000시간을 채울려면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을 해야 할 정도의 가혹한 노동시간이다.

전태일의 희생으로 사람들은 노동자 인권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전태일은 그래도 대한민국의 연간노동시간을 1,000시간 가량 줄여준 매우 큰 공로가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경제난과 노동운동의 침체로 인해 그에 대한 인식이 점차 옅어지고 있는 듯하다.[14]

2. 생애

2.1. 어린 시절

1948년 9월 28일,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아버지 전삼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다정다감한 성격에 특히 불의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기질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단사였던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부산으로 이사갔다가서울로 이사온 후 아버지가 봉제공장을 차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생활을 영위한 적도 있지만 4.19 혁명 직후 거액의 사기를 당하는 통에 온 가족이 다시 가난의 구렁텅이로... 어렸을 때부터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 밥을 제때 못 먹는 일은 그야말로 약과에 불과했으며 이는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시절까지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2.2. 평화시장에서의 노동운동

다니던 초등학교마저 중퇴하고 17세 무렵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점에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 재단사로 일하던 중 재단보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박봉, 질병(폐렴 등)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며 그러한 노동 현실의 타파와 개선을 위한 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근로기준법'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그 내용을 독학하려 하였으나 기준법 전문이 국한문혼용인지라 도통 내용을 알 수 없어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한탄[15]했다고 한다.[16] 『전태일 평전』을 통해 알려진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현실 참여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해설서를 구입하여 밤낮을 안 가리며 읽었다. 말이 해설서지 여전히 법률 용어 투성이였기에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전태일에겐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그래서 같은 동네에 살던 '광식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나이 든 대학생을 자주 찾아가 용어의 뜻을 묻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해설서 한 페이지 읽는데 하루를 꼬박 새운 적도 있다고. 그렇게 읽어낸 근로기준법상의 내용과 현실의 괴리를 절감한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2.3. 저항과 죽음

1970년 재단사로 취직이 돼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이전 바보회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을 규합하여 '삼동친목회'를 조직, 한층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주목을 받은 후 사업주들과 협의를 벌이기도 했으나 현실의 장벽에 막히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로 정·재계는 그들의 활동에 사회주의 조직이라 빨간 딱지를 붙이고 노동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당시 한국에는 비록 그럴싸한 근로기준법은 있었으나 너무도 형식적이었으며 감독관청도 전혀 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17] 이에 깊은 좌절과 비애를 느낀 전태일은 결국 죽음으로 그 뜻을 알리는 길을 택하게 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경찰과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패거리들에 의해 찢겨지고 짓밟히자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사전에 자신의 친구 김개남에게 자신의 몸에 성냥을 그어 달라고 말했던 것에 따라,[18] 익명의 친구는 뒤에서 불을 붙였고, 이 사회에서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 을 갖고 자신도 그 불에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19]

전태일은 그의 손에 들린 근로기준법전과 자신을 태우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라고 외쳤다. 그리고 부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이미 엉덩이를 제외한 전신에 3도 중화상을 입은 상태인데다 병원측에서도 환자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응급치료 이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근로 감독관마저 치료를 위한 (돈) 보증을 거부했다. 후에 모 대학의 한 교수님이 술회하길 정말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당시 사회상이...[20]

결국 그는 명동성모병원[21]으로 옮겨졌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당일 밤 10시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유언은 "배가 고프다..." 였다. 전태일은 12일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라면을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삶 자체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2.4. 그의 죽음이 미친 영향

그의 죽음에 한국 사회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정치적 의미에서의 반독재, 민주화만을 염두에 두던 대학생, 지식인들은 비참한 노동자들의 현실에 충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삶의 문제들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들 중 일부는 야학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교육시키고 권리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거나 공단에 직접 취업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의 대학생은 지금보다 훨씬 수도 적고 그야말로 엘리트로의 길이 보장된 고급 두뇌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들이 공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22] 한편으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이용해 정부나 제도권 언론에서는 이들을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장하는 불온한 위장취업자[23]'로 호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노동자들 스스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주적으로 노조를 세우려는 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70년대 중에 청계피복노조 이외에도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반도상사, 원풍모방, YH무역(YH 사건의 그 회사)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이 세워져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운동한다. 이렇게 70년대에 세워진 민주노조는 대부분 공단 지역의 영세 노동집약적 사업장 위주로 세워졌으며 남성에 비해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7년 6월 항쟁의 영향으로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현대그룹, 대우그룹대기업 남성 노동자 중심의 사업장에서 노조가 대거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주도적인 흐름을 형성하였다.

전태일은 모범업체라고 하여 요즘의 '사회적 기업' 과 같은 개념의 기업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 및 직공들의 근로여건 등을 개선시켜 평화시장에 있던 업체들에게 직공들의 근로여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발점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자본금이 부족하여 좌절되었다. 사업기획서까지 만들어 두고 작업장 배치와 근로조건 등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워두었다.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여사

이후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은 아들 전태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들, 딸들의 말을 지켜주기 위한 어머니의 삶으로 바뀌게 된다. 한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로서 이소선은 아들의 유지를 이어받아 청계피복노조 등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민주화운동 유가족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오랜 기간 활동했다.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같은 해 9월 3일 작고하였다. 그녀의 말년의 삶을 다룬 영화로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 가 있다(아래의 영화 '어머니' 와는 다른 작품). 태준식은 노동운동 영상 제작 그룹인 '노동자뉴스제작단'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쌍용자동차 공장 점거 파업과 그 이후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당신과 나의 전쟁' 등이 대표작이다.

전태일의 여동생인 전순옥 박사도 오빠의 뒤를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어 19대 국회의원직을 활동했으며,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의 29번, 15번째 주자로 연설했다. 남동생 전태삼 씨도 역시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전태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모란묘지공원에 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묘지도 전태일의 바로 근처에 있다. 모란 묘지공원에는 그 외에도 문익환, 조영래, 박종철(가묘) 등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운동가들의 묘지들이 모여 있다.

3. 저술

3.1.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24]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

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25]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22살 된 청년입니다. 직업은 의류계통의 재단사로서 5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읍니다.[26] 저의 직장은 시내 동대문구 평화시장[27]으로써 의류전문 계통으로썬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것으로 종업원은 2만 여명이 됩니다. 큰 맘모스 건물 4동에 분류되어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기업주가 여러분인 것이 문제입니다만 한 공장에 평균 30여명은 됩니다. 근로기준법에 해당이 되는 기업체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 할 수 없읍니다. 전부가 다 영세민의 자녀들로써 굶주림과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고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발전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의 공통된 형태이겠지만 이 동심들이 자라면 사회는 과연 어떻게 되겠읍니까? 근로기준법이란 우리나라의 법인 것을 잘 압니다.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곧 우리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마치 무슨 사치한 사치품인양, 종업원들에겐 가까이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식입니다.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읍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읍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읍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읍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3.2. 모범업체 계획서

3.3. 수기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1969년 겨울의 일기 中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태일의 수기에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작 완전에 아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년 8월 9일, 삼각산에서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1969년 12월 31일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1970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다지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1969년 9월의 수기에서

4. 전국노동자대회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에 민주노총 주관 전국노동자 대회가 열린다. 11월 13일이 주말이 아닌 평일이면 11월 13일 직전의 주말에 열린다. 예를들어 2014년 11월 13일이 목요일이기 때문에, 2014년 노대회는 11월 8일 토요일에 전야제, 11월 9일 일요일에 본대회가 열린다. 한국 최대 노동조합인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총대회를 전태일 열사 기일에 여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매년 노동현안에 대한 의제가 기조로 설정되며, 전야제는 주로 문화제 형식으로, 본대회는 집회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열사에 대한 추모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다.

5. 다양한 의견들에 대한 반박

5.1. 근로기준법은 급진적이었다?

이에 대해 보수 측에서는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뜻은 좋았지만, 당시의 경제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고 얘기한다. 우선 1970년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253달러에 불과했고, 265달러인 파푸아뉴기니보다도 못한 빈곤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무리 근로기준법이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지켜지기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초적으로 근로기준법(개별적 노동법)이라는 것 자체가 노동자들이 매우 열악한 처지에서 살고 있을 때 그것을 개선하려고 나온 법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자체가 이미 먹고 살 만한 때 나온 것도 아니고, 그 때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산업혁명기 영국 같은 생지옥에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당시 노동법은 이승만 대통령 때, 한국전쟁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전신이 양대 노동법을 이루었다. 이때 노동법이 미국이 일본에 반강제로 심어놓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무척이나 진보적인 노동법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50년대에 만들어진 법에 생리휴가가 이미 들어가 있었다는게 그 예시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공무원들은 일본 법전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 실제로 이는 사실이기도 하다. 민법조차 제정되지 않아서 의용민법(일제시대 때의 민법)이 그대로 사용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형법은 한국전쟁 중에 제정되어 비교적 빨리 제정되었지만.

근로기준법이 급진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 당시의 노동법이 지금보다도 진보적일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지금 21세기에도 한국의 노동법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비추어 봐도 보수적이고 뒤떨어져 있는 면이 크다는 것이 더 정확한 분석이다. 그리고 노동법을 시대와 경제력에 따라 적절히 조정하고 싶다면, 최저임금이나 근로시간 등의 기준을 조정하면 되지, 그러한 제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은 노동법 존재의 의미를 형해화시킨다. 그리고 예로 든 생리휴가 같은 경우는 여성들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제도이다. 생리중에도 일을 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보는 게 아니라면, 딱히 복지라고 할 수준도 못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맥아더에 의해 일본에 수입된 미국 노동법이 주로 영향을 미친 것은 근로기준법이 아니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집단적 노동법)이다.[28] 오히려 근로기준법은 민법과 마찬가지로 일본, 그리고 독일 법의 영향을 받은 면이 훨씬 크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헌법, 민법, 형법, 행정법 등은 일본, 독일, 미국, 프랑스, 기타 서구의 법을 베껴온 것이 아닌가? 엄연히 현대 한국법은 외국에서 수입한 법체계이며 모든 법은 자체적으로 서구의 논리와 철학과 문화와 역사를 담지하고 있다.

또한 체제경쟁을 위한 명목상의 입법일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지키지도 못할 법을 입법한 것은 문제지만, 국가 초기의 입법적 한계였다는 것.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명목상의 입법이 아니었다. 진짜로 명목상의 입법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독재화가 된 이후의 북한과 비슷한 행태일 뿐이니 북한을 합리화할 수 없다면 이것도 합리화할 수 없다. 게다가 근로기준법은 전진한이라는 우파 정치인이 자신의 사상을 담아서 고심 끝에 만들어낸 작품이다. 관심있는 사람은 이흥재 교수의 '노동법 제정과 전진한의 역할'을 참조. 따지고 보면 헌법도 체제경쟁의 산물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제헌 헌법은 이익균점권 등 지금보다 급진적인 조항들이 많았다. 특히 해방직후에는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많았고 그런거 모르더라도 우파 관리들에 대한 불신에 빨치산을 더 지지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던 시절이다.[29]

5.2. 노동착취는 없었으며 문제는 낮은 노동생산성이다?

경제성장기의 노동자 임금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있다. 학술논문 박기성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경제성장기의 노동자 임금은 당시의 한계노동생산성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것은 노동자의 생산성에 따라 노동자 임금이 지급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기존에는 마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로부터 착취당하고 자신의 생산성에 못 미치는 적은 임금을 받아 왔다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이것이 완전히 뒤집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노동자들의 삶이 열악했던 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낮아서 삶의 수준 또한 낮았던지, 아니면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고참 노동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착취가 노동자들의 삶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박기성 교수의 주장일 뿐이다. 비판과 반론도 존재하니 참고하자. 박기성 교수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야 통설이 뒤집히겠지만 대한민국에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박사만 해도 천 여명이 넘어가고 기존 통설이 뒤집어진 적은 없다. http://blog.naver.com/bschun55/60017633438

윗 문단은 어폐가 있다. 우선 박기성 교수의 주장은 박 교수만의 독특한 이론이 아니라, 생산요소시장 이론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계생산성 이론의 일부이다. 이 이론은 딱히 노동에 한정지어진 이론도 아니고, 자본과 노동을 포함한 모든 생산요소를 대상으로 한다.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이자로 나타나듯이, 노동의 한계생산성도 임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며 주류 경제학의 일부로 단단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기존 통설이 뒤집어진 적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왜냐하면 박 교수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전태일 시대 임금노동자의 한계생산성에 대해 비슷한 주제로 다룬 학자가 없기 때문이다. 박 교수의 논문을 반박하려면 “사실 박 교수가 측정한 것보다 당시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은 높았고, 그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라는 반박논문이 나와야 하나, 그러한 논문은 없다.

위에 걸려있는 교수신문의 반론 링크 또한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반론들이다. 우선 한계자본생산은 70년대 케임브리지 논쟁으로 불가능함이 증명되었다고 하는데, 2019년 현재에도 모든 주류경제학 교과서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살아있는 이론이다. 또한 한계노동생산을 논하는데 한계자본생산을 가져오는 것도 생뚱맞다. 노동과 자본의 성질은 다르기에 설령 자본에서 성립될 수 없는 모델이라 해도 노동에는 들어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이론이 그렇듯이).

더욱이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렇게 분석할 경우 자본 불변을 가정해야 하는데 이는 비현실적 가정이다” 라고 한 부분이다. 경제학 모델 분석의 기본은 ceteris paribus, 즉 다른 모든 조건은 같다고 놓은 상태에서 분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는 사실 경제학 뿐만 아니라 모든 회귀분석의 기본이다. 내가 알고싶은 변수의 영향력을 측정할 때는 다른 모든 조건은 같다고 가정한 상황에서 그 변수의 양만을 변화시켜 결과를 측정한다. 논문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인데 저런 반론이 교수신문에 실리다니 매우 의아스럽다.

이를테면 당시에도 많은 부유층, 자본가, 기득권층들은 부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들의 부는 어디서 온 걸까? 이들이 노동자들보다 수십, 수백배 이상의 생산성을 발휘했는가? 오랫동안 임금기금설 따위의 사이비 이론이 고학력의 학자들을 통해 자본가들의 논리로 쓰였던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득권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생각하는 집단이라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윗 문단 또한 생산성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가지고 있다. 한계생산성은 그 생산요소를 한 단위 투입했을 때 아웃풋에 얼마나 변화가 있는가를 측정하는 개념이다. 로다주가 일반 배우보다 수천배로 연기를 잘 하지는 않지만, 수천배의 연봉을 받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로다주를 투입하지 않고 일반 배우를 쓸 때 보다 로다주를 투입했을 때 벌리는 수익이 수천배는 더 크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일반 병사보다 수백배 잘 싸우지는 못하고, 일반 장교보다 수백배로 전술을 잘 다루지는 못하지만 이순신 한 단위를 투입하고 안 하고는 수백배의 아웃풋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것이 CEO들의 ‘생산성’ 이며 따라서 윗 문단의 생산성에 대한 서술은 맞지 않다. 무조건 상대편을 ‘기득권’ 을 옹호하는 사이비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경제학 기본 이론과도 맞지 않는 이야기로 증오를 쏘아붙이는 것은 문서를 읽는 사람들의 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처음부터 다른 것을 뜻하는 용어를 갖고 이를 호도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낮다고 했을때 상당수 언론에서는 "근로자들이 게을러서 그런 것"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노동생산성이란 것은 노동자 개인의 노동에 따른 생산성 자체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명목 GDP를 취업자수로 나누어 산출하는 방식이다. GDP가 개인이 열심히 한다고 올라가는 것인가? 미국 사람들은 하루 20시간씩 노동해서 GDP가 그렇게 높고 북한 사람은 하루 1시간도 노동하지 않나 보다 즉, 노동생산성은 한 나라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아니라, 그 나라의 생산효율성과 기술수준에 더 민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생산성이 높은 미국은 단순히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술수준과 새로운 장비 등에 투자를 많이 해 효율성이 늘어난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보자. 100명의 공장노동자들이 각자 백개씩, 하루에 만개의 상품을 만들어낸다고 했을때, 이들을 죽도록 혹사시켜서 하루에 1만3천개를 만드는 것, 초기비용은 들지만 기계를 도입해 같은 근로자들이 하루에 2만개를 만드는 것 중 뭐가 생산성이 높겠는가?

즉, 당시 한국은 기술수준이 매우 떨어져서 생산성이 낮은 국가였음에도 그 낮은 생산성을 저임금의 노동자들을 갈아넣어 커버한 것이지[30], 노동자 개인의 생산성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노동력=생산력인 초기 농경사회도 아니고, 생산성의 개념을 개인의 노력 차원으로만 보는 건 말도 안된다. 산업사회에서 생산성에는 노동력 못지 않게 자본이 큰 영향을 준다.

위 두 문단도 생산성에 대한 전형적인 오독이다. 박 교수가 말하는 생산성은 ‘한계생산성’ 으로, 위 두 문단에서 말하고 있는 단순히 노동 총 시간으로 나눈 생산성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평균과 한계 개념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즉 위 두 문단은 논문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잘못된 주장과 반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가로 위에서 당시 부유층, 기득권층의 부 얘기를 했지만 단순히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나라 전체적으로도 박정희 시대는 엄청난 경제성장의 시대로 불린다. 그러나 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당시 노동자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임금을 적게 받은 것은 팩트이다.[31] 만약 그 쥐꼬리만한 임금 수준의 노동생산성만을 발휘했다면 나라의 산업 자체가 개판이었다는 소린데, 이딴 생산성으로 어떻게 성장을 한단 말인가? 즉, "노동생산성"은 한 나라의 산업이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지 각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나, 일을 잘하나와는 상관이 없다. 특히 당시 한국은 전반적인 산업 자체가 경쟁력이 낮았고, 이를 커버하기 위해 인건비를 후려쳐서 가격경쟁력을 확보해 수출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위 문단 또한 한계생산성이란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온 말이다. 물론 박 교수는 생산성 개념을 오독하지는 않았다 ( 애초에 그정도 오독은 피어 리뷰도 통과하지 못한다). 추가로 저기서 나온 노동생산성이 한 나라의 산업의 경쟁력을 나타낸다는 말 또한 틀렸다. 윗 문단의 작성자는 한계생산성이란 개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생산성이 낮은데 어떻게 성장을 하나?” 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말 자체도 틀렸다. 솔로우 모델을 배워보면 생산성이 고정된 상태에서도 자본투입만 증가해도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에 성행하던 노동자 간 착취의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단점으로 들기도 한다. 그 당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고되게하고 옥죈 것은 바로 '오야지'(일본어로 '아버지')라 불리는 숙련공들이었다. 당시 이들은 회사의 방침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견습생들로부터 웃돈을 받거나 그들의 임금을 가로채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이를 근거로 전태일 본인도 재단사였으므로 동료 재단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한편, 오늘날의 노조에서도 이러한 악/폐습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알고보면 말도 안된다. 전태일 열사의 행동은 그 동안 금기시되어왔던 노동문제를 수면위로 떠올리게 했다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당시 한국에서 존재하던 모든 노동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건 전지전능한 신에게나 할 소리다. 전태일이 처음 재단사가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재단사 등의 숙련공들이 임금 문제 등에서 주인과 타협하여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를 방조하는 상황을 적어도 자기만은 막아 보려고 했던 데에 있다. 이것을 보면 소위 '노동자간 착취'의 문제를 '주인'과 그에 협조하는 '상위 노동자'들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혼자 시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전태일은 절친한 동료들과 함께 동료 재단사 조직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노동운동에서 시종일관 지속되었던 가장 큰 요구 중의 하나가 바로 '시다'의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이다. 이쯤되면 '당시 존재하던 모든 노동문제'를 '꺼내지 않은 것'이 맞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 쪽 주장의 경우에는 현재의 노조들과 노동 운동을 비난하기 위해 당시의 노동 운동까지 소급해 책임을 물으려 하는 불순한 저의가 담겨져 있다. 이는 전형적인 물타기론의 하나로, 혐한, 일본 우익, 또는 역갤러들이 일제시대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삶이나 일본군 위안부 매매는 조선인들끼리의 착취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최대한 귀족노조를 비난하면서 자본가들의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논리일 뿐이다.

5.3. 전태일은 고임금을 받는 근로자였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전태일은 16세 되던 1964년 봄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해 만 3년 만인 19세 되던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고, 같은 기간 그의 월급은 1,500원에서 1만 5000원으로 정확히 10배 올랐다.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이 이로부터 다시 3년 후 1970년이 되면서 재단사 월급 2만 3000원을 받았음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태일의 월급은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 동안 무려 15배 이상 상승한 셈이다. 전태일의 월급 2만 3,000원에 12달을 곱해 연봉으로 환산하면 27만 6000원이 된다. 1970년 한국의 일인당 국내총생산은 8만 7000원이었으므로 연봉 27만 6000원은 당시 일인당 국내총생산의 3.2배였는데 이를 현재(2016년) 가치로 환산하면 매달 780만 원, 연봉으로 따지면 9,4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링크

위안부 망언으로 논란이 되었던 류석춘 교수의 주장이다. 그러나 반박기사 링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또한 망언에 불과하다.

일단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나라 총소득을 전체 인구로 나눈 수치인데 그 당시에는 출산율이 높아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았던 데다가 실업자가 많아 일 안하는 사람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즉, 1인당 국민소득은 전체 소득을 이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해 1인당 평균으로 낸 것이기 때문에 전태일의 급여를 국민 전체가 아닌 근로자 평균 임금과 비교하는 것이 맞다.

류석춘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실제로 전태일이 받던 월급을 시급으로 나누면 지금 기준으로 매우 저임금으로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일당으로는 짜장면 한 그릇을 사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매우 열악한 노동 환경속에 한달에 2일밖에 쉬지 못하고 하루 14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렸으니 그런 걸 전혀 계산 안 한 무식한 계산에 불과하다. 실제로 1970년 재단사 전태일이 받던 월급(23,000원)을 2019년 가치로 환산했을 때 시급1,237원 월392시간 월급484,932원으로 최저임금의 7분의 1에 불과했다.(2019년 최저시급8,350원 월209시간 월급1,745,150원)

5.4. 전태일의 행동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심지어는 전태일의 행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이 부분은 명백히 틀린 것이 전태일의 죽음 이후 1971년도에 전년도 대비 10배 넘는 노동운동이 집계되어 노동청이 실태 조사부분 개정을 하기도 했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도 전태일을 거론하며 제도 혁신 등을 이야기한 바가 있다. 거기다 전태일 이후에도 비슷한 분신 시위 사례가 나왔고, 이를 언론이 취재하면서 "한 사람의 죽음"으로 폄하하는 게 불가능해졌으며, 종교계에서도 직간접적인 지원과 미사를 드리는 등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봐도 이 사건이 우리나라 노동 환경에 대한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걸 인정하기 껄끄러워하는 사람들은 선동이네 특정 세력에 이용당하는 거네 하며 폄하하기 바쁘지만...

설령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어도 일제 강점기를 맞았는데 우리는 안중근을 존경하지 않는가? 그럴지언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죽어버렸던 한국 노동운동을 혼자서 다시 살린 전태일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전태일은 상징으로서 존재하며 수많은 불공정 노동 실태에 저항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일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노동법의 부실함을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최저시급이나 아동착취라는 개념조차 정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5.5. 전태일은 신변비관으로 자살하였다?

이 밖에도 또 다른 현실타협적 관점에서, 당시 전태일의 어려운 경제상황과 생활고를 고려했을때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지, 노동자 인권이라는 거대하고 높은 목표에 대한 열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분신 이전 전태일의 행동, 이를테면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서적을 찾아가며 공부했다는 것과 재단사들 사이에서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었다는 것 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주장은 전태일의 행적이나 자세한 정황을 파악하지 않은 채 그 당시 어려웠던 사회상을 모든 인물에게 대입해 확대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전태일은 재단사였다. 단순 신변비관을 했다면 재단사란 위치를 이용해 사업주와 타협하여 당시 다른 상위 노동차 처럼 적당하게 시다들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수 있는 선택이 가능했다. 하지만 전태일은 어린시절 착취당한 세월을 잊지 않고 하위 노동자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다.

5.6. 전태일은 살해당했다?

극우파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전태일은 종북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해 노동운동을 해왔으며, 분신도 전태일을 의식화시킨 종북주의자들이 "몸에 기름을 뿌리고 분신한다고 위협하며 1인 시위를 하라. 진짜로 분신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지시한 다음 '익명의 친구'가 전태일 곁에 있다가 불붙은 성냥을 던져 전태일을 살해하고 본인의 의지로 분신자살했다는 거짓 선전을 해왔다는 주장. [32]

하지만 이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이,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전태일은 분신 자살을 할 때 당황하며 불을 꺼달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전 열사는 불에 타들어가며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결정적으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라[33]고 외쳤다. 스스로 희생한다는 걸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소리. 특히 몸이 불타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상식적으로 본인의 의지가 아닌 상태에서 불탄다면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불을 꺼보려고 땅바닥을 미친듯이 굴러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 상황에서 구호를 외쳤다는 건 말그대로 초인적인 정신력이며, 당연히 본인의 의지로 분신했기에 할 수 있는것이다. 분신하는 상황에선 고통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하므로, 미리 준비하고 연습해온 행동을 하는 것 말고 추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해설은 정황증거든 실증이든 단 하나의 증거도 없는, 어떻게든 전태일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폄훼하려는 억지에 불과했었고, 이후에도 이러한 주장은 간간히 고개를 들고있다.

5.7. 기타

전태일 열사의 추모곡으로는 그 유명한 그 날이 오면이 있다. 또한 민중가요 불나비도 그의 추모곡이다. 한편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대의 드라마 OST에 가사만 바꿔서 「전태일 추모가」가 불러졌는데, 의외로 싱크로율이 좋다.

가사

지금도 가슴 속에 파고드는 소리

전태일 동지의 외치던 소리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헛되이 말라

외치던 그 거리에 젊은 가 흐른다

내 곁에 있어야 할 그 사람 어디에

다시는 없어야 할 쓰라린 비극

사실 직접적으로는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보수 성향을 띠며 자유시장 경제를 표방하는 인터넷 언론 매체들 중에서는 은연중에 전태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도록 선동, 조장하는 기사도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심지어 이 기사의 경우 초등학생에게 전태일, 마오쩌둥, 마르크스 등 좌익에 대한 책을 읽도록 한다며 비판한 내용이다. 거기에 더 얹어서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좌파의 활동기라며 까고 문화와 예술은 항상 불온하고 전복적이며 체제 타격적이라는 궤변까지 늘어놓는다. 이쯤 되면 프로파간다 수준(...).# 5.18 민주화운동처럼, 보수세력이 볼 때 무척 껄끄러운데도 공식적으로 비난하기 어려운 존재가 전태일인지라 학문적 고찰을 통해 비판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듯하다.

2013년 1월에 올라온 이마트에서 직원 및 퇴직자들에 대한 내부사찰을 했다는 폭로 기사에 의하면, 내부 문건에서 불온 도서로 지목된 서적에 전태일 평전이 있었고 책을 갖고 있던 계약직은 해고되었으며, 다른 이마트 지점에서도 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청계천에 위치한 전태일 다리에는 큼직한 두상이 자리하고 있다. 청계6가와 5가 사이에 위치한 다리다.

민주노총의 노동운동가요 기계를 멈춰의 가사에 나오는 열사가 꿈꾸던 세상에서의 열사가 바로 전태일을 뜻한다.

죽여주는 이야기에서 마돈나(자살 의뢰인)가 전태일의 자살은 아름답지 못했느냐고 살인을 의뢰받는 사람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아름답지 못한 죽음이었다고 대답.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아름다운 자살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전태일의 죽음을 폄하하려고 만든 장면이 절대 아니다. 이 연극의 장르가 블랙 코미디라서 그런 것.

야구선수 김원석이 SNS 에 그를 비하하는 글을 올렸다가 한화 이글스에서 방출당했다(...). 물론, 전태일 열사만 비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어그로를 끌어서 문제가 커지긴 했다.

중화권 노동운동계에서도 전태일은 꽤나 알아주는 인물인데, 중국이나 대만, 홍콩 내 사회운동가들이 전태일 평전 번역본을 직접 돌려가면서 교본으로 삼을 정도라는 말이 나올정도이다. 다만 중국이나 대만이나 홍콩이나 현실은 시궁창이라서 노동운동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6. 관련 단체

7.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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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품상

제15회
(1994년)

제16회
(1995년)

제17회
(1996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축제

8. 참조링크


  1. [1] 출생당시에는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이였다.
  2. [2] 양대 노총이 주관하는 전국노동자대회나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주관하는 민중총궐기 집회가 매년 11월 13일을 즈음해서 열리는데 이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아버지로 꼽히는 전태일 열사의 기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랫 부분의 '전국노동자대회' 문단 참조.
  3. [3] 분신자살하였다.
  4. [4] 남대문초등학교의 전신
  5. [5] 현재 전태리로 개명.
  6. [6] 남동생 전태삼의 자녀들.
  7. [7] 막내 여동생 전순덕의 자녀들.
  8. [8]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2004, 303~304쪽
  9. [9] 이 유서는 이후 광주문화방송에서 제작한 5.18 38주년 다큐멘터리에서 그 동창들중 한명인 전원섭씨에게 48년만에 전해지게 되었다.
  10. [10] 수 많은 자살 방법 중에 분신은 분노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강하다.
  11. [11] 다만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여준 익명의 친구는 자살방조, 교사를 한 죄가 적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12. [12] 훗날 노동운동으로 여러번 감옥에 가기도 한다.
  13. [13] 친동생 전태삼도 어머니와 노동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갔었고, 실질적으로 어머니가 노동운동에 투신한 전태일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며 고생을 했다. 참고로 전태삼이 밝힌 바로는, 전태일에게는 본인 말고도 6.25 전쟁 때 태어난 남동생이 1명 더 있긴 했는데 아기 때 죽어서 2남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14. [14] 더욱이 취업난이 겹치며 젊은이들의 아픈 곳 중 하나인 취업과 정부, 언론, 사회의 보이지 않는 노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심화되고 있다.
  15. [15] 훗날 장기표나 김문수 등 서울대학생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의 사망후 그의 모친 이소선을 찾아오자 "아이고 우리 태일이가 그래 서울대 댕기는 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캤는데 이제사 찾아왔나." 하고 오열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6. [16] 현재는 법률 전문을 한글로 열람 가능하다.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근로기준법 항목이 있다. 그래봤자 예나 지금이나 법률 용어라는 것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무척 힘든 말로 꼬아놔서 알아듣기 힘들다.
  17. [17] 증언에 의하면 전태일 일행이 찾아가자 "알았으니 며칠만 기다려라"라고 해서 며칠 뒤에 다시 갔더니 "감사가 끝났으니 이젠 알아서 해라 이 빨갱이 새끼들아"라는 기가 막히는 답변을 들었다고...
  18. [18] 평전에 따르면 그 전날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보여주자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시점에서 자살을 결심한 것.
  19. [19] 여기서 김개남은 본명이 아니다. 이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태일 평전에서 이 사람을 묘사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 중 한사람인 김개남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20. [20] 현재는 돈이 없어도 전국민 의료보험이 있으니 일단 치료부터 하고 나중에 청구하는데, 당시는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전이었다. 공무원, 군인 등 극히 일부에만 의료 혜택이 주어졌던 시대이다. 그야말로 돈 없으면 응급 환자도 안 받아주어 그냥 죽던 시절.
  21. [21] 명동성당 앞에 있던 병원. 1986년 여의도로 옮겨졌다(現 여의도성모병원). 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은 가톨릭회관으로 개조되어, 각종 가톨릭 단체 사무실 및 성물점 등으로 쓰이고 있다.
  22. [22] 이러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YH 사건, 부산·마산 민주 항쟁, 인천 5.3 운동,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보답받게 된다.
  23. [23] 기업 측에서 아예 이런 대학생들의 취업을 막아버렸기에 위장취업을 해야 했다.
  24. [24] '저희들의'라는 의미의 낱말로 추정된다.
  25. [25] 지금의 도봉구. 이 당시는 쌍문동 일대가 도봉구로 분구되기 전이었다.
  26. [26] 탄원서 작성 당시 '읍니다'가 맞다.
  27. [27] 실제 평화시장의 주소지는 중구 을지로6가이다. 평화시장은 설립 이래 한 번도 주소가 동대문구에 속한 적이 없다. 그러나 동대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 때문에 동대문구 평화시장이라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28. [28] 부당노동행위제도는 미국 노동법의 특징이다.
  29. [29] 물론 나중에는 북한의 막장 운영에 치를 떨며 남한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30. [30] 위의 가정으로 따진다면 기계를 들일 돈이 없거나 있더라도 쓰기 아까워서, 혹 기계가 없어서 그냥 노동자들을 갈아넣은 것.
  31. [31] 애초에 박기성 교수의 주장은 자료를 오독한 것으로, 저기에서도 1970년대 유신 이후를 보면 임금이 상승이 아니라 하락한 것으로 나온다.
  32. [32] 해당 주장에서 종북주의자 내용이 빠지고 익명의 친구가 전태일의 자살을 도왔다는 점은 진보 매체 오마이뉴스에서 나온 전태일 자서전에서는 익명의 친구로 '김개남'이라는 캐릭터가 나와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돕고 도망친 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장면이 나와 극우파만의 주장은 아니게 되었다. 이 후 해당 발언으로 논란이 생기자 해당 자서전에 대한 기록을 최대한 정리하고 있다.
  33. [33] 다만 해당 말들은 매체마다 서로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검증이 필요하다.
  34. [34] 여담이지만 분신 장면을 촬영할 때 그래픽이 안 좋아서 몸에 직접 불을 붙여서 촬영했다고 한다.(워터젤이라는 걸 몸에 바르고 불을 붙이는 기법으로 훗날 한국 화재 재난 영화에 적잖이 사용하게 된다. 실제 화재 사고에서는 사람의 몸에 땀이 생각보다 많이 나지 않지만, 화재 영화에서 주인공이 땀을 많이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온몸에 바른 워터젤 때문. 그러나 완벽하게 안전한 게 아닌 기법으로, 워터젤을 온 몸에 바르자마자 바로 찍지 않고 몇분만 지체되어 촬영하면 워터젤이 금새 말라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그나마도 소방관 등 화재현장 속 사람을 찍는 건 사람과 불의 거리가 있지만, 전태일 영화처럼 자기 몸에 불을 붙이는 경우는 매우 위험하다.) 5번 연속으로! 마지막 신으로 온몸이 불타면서 거리를 질주하는 전태일의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나오는데, 이때 비춰지는 홍경인의 눈빛은 그야말로 전율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촬영으로, 전태일 열사의 강인한 정신력과 놀라운 의지를 최대한 보여준 명장면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35. [35] 사이트에 입장하면 크롬 기준으로 멀웨어가 있다고 표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