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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I D , R H 

1. 설명
2. 내용
3. 박현채의 영향
4. 대중참여경제론

1. 설명

7대 대선 시기에 김대중이 주장한 경제 개념이다. 시장 경제의 활성화와 복지의 중시를 골자로 한다.

2. 내용

관치금융 배제, 자율적인 시장경제 진흥, 중소기업 육성, 독자적인 외환정책, 복지 확대, 대중들의 적극적인 경제 참여를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저서는 1971년 출간된 '김대중 씨의 대중 경제 100문 100답', 1985년 출간된 '대중경제론(영어판)', 1997년 출간된 '대중참여경제론'이 있다.

3. 박현채의 영향

김대중이 대중경제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969년 '대중경제론을 주창하다' 라는 신동아 기고문을 통해서다. 그리고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출판된 '김대중 씨의 대중 경제 100문 100답'은 ‘대중경제연구소’을 편역자로 내세우고 있는데, 당시 김대중의 참모들이 박현채를 포함한 여러 재야 경제학자들의 글을 취합해서 다듬은 것이며, 대중경제론이란 이름은 김대중 후보의 이름과 같다는 홍보효과를 노리고 붙인 것이라고 한다. 기사

본격적인 대중경제론이 출판된 것이 1985년, 대중경제론 증보판은 1996년, 대중참여경제론이 출판된 것은 1997년이다. 김대중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나는 대선을 준비하면서 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대중경제론을 내걸었다.' 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1] 이러한 본인의 구상을 '김대중 씨의 대중 경제 100문 100답'이라는 책으로 담아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해당 저서에 박현채 교수가 깊이 관여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박현채는 1960년대 말부터 오랜 기간 김대중에게 경제정책을 조언했으나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박현채는 김대중이 뉴DJ플랜을 내걸면서 연성화 노선을 채택하자,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수용 조짐이 보인다면서 실망했다고 한다. [2][3]

김대중도 1997년에 낸 대중참여경제론 서문에서 대중경제론(1985)의 탄생에는 박현채가 아니라 유종근 전 전북지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유종근 전 전북지사는 기존의 대중경제론이 너무 진보적이었기에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정책으로 보였고, 그 결과 시장경제 위주의 대중경제론으로 탈바꿈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기사 71년 대선에서의 대중경제론이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을 뼈대로 했다면, 이후의 대중경제론은 유종근 전 지사의 '시장위주 정책담론'이 중심이 된 것이다. 이런 변화에 실망한 박현채가 김대중의 곁을 떠난 것이다.

이런 변화는 특히 1992년 대선 패배후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마가렛 대처의 정치노선을 연구하면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를 기점으로 김대중은 보수 성향의 경제관료와 기업인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오른쪽으로 치우치게 되고, 실제 선거를 앞두고 정책과 공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가, 재야민주화운동가 출신들은 점점 배제되기 시작한다.

즉 똑같은 대중경제론이라고 하지만 1970~80년대의 내용과 90년대 이후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일례로 1990년대를 넘어가면 박현채가 중요시했던 민족자립경제, 식량의 자급자족 같은 부분은 완전히 사라진다. [4][5]

4. 대중참여경제론

역대 정부의 주요 정책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역사바로세우기

햇볕정책/대중참여경제론

햇볕정책/비전 2030

대중경제론과 대중참여경제론의 차이는 김대중 본인이 설명하기로는 대중경제론보다 대중참여경제론이 민간의 경제 참여를 더욱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논지와 세계관은 같다.

1990년대 이후 대중경제론, 대중참여경제론을 전반적으로 보면 일관되게 정부의 시장개입, 관치경제를 배제하고 자유경쟁 시장을 확대하려는 기조가 발견된다. 책 본문에 그런 요약, 대강도 또박또박 기술되어있다.


  1. [1] 김대중 자서전(삼인출판사, 2010) 221쪽
  2. [2] 하지만 김대중은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 초반에는 부동층과 중산층을 노리고 뉴DJ플랜이라는 연성화 전략을 보여주다가, 정작 선거운동 막판에는 전국연합과 95개조 공동공약을 채택하고 선거연합을 선언하면서 진보층을 공략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3. [3] "1992년 여름 박현채 선생이 저를 서교호텔로 불렀습니다. 'DJ하고 손 끊었다.' 72년 대선 때 '대중경제론'을 쓴 이래 줄곧 숨어서 정책을 보좌했던 인연을 끊은 겁니다. 이유는 92년 대선 때부터 이미 김대중 후보가 '뉴DJ플랜' 같은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 정태인의 회고담.
  4. [4] 박현채는 박정희식의 외국 차관에만 의존하는 경제발전은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로 결국은 외채위기를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를 강하게 했다. 이때문에 차관도입을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해서 불필요한 사치재나 소비재 분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신 해외차관은 국영기업 중심의 중화학공업 육성에만 투입하고, 경공업은 중소기업에 전담시키는 방식의 국가통제를 주장했다.
  5. [5] 사실 해외차관 의존형 성장에 대한 우려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언론이나 경제학계에서도 외채망국론이라고 해서 많이 다루던 주제다. 특히 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이 외채위기로 완전히 박살났기 때문에 종속이론과 함께 많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소위 3저호황으로 엄청난 경상수지 흑자를 내기 시작하자 쑥 들어가버린다. 다만 이떄부터는 오히려 외채문제에 대해서 다들 무감각해져서 1994년부터 이어진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에 대해선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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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20-03-20 1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