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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 I D , R H 

    1. 소개
    2. 역사적 기록
    2.1. 평가
    3. 기타사항

    1. 소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1653년 상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난파되어 제주도(켈파르트 섬)에 표류하고 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해서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고된 여정을 기록한 책.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원래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산업재해 보고서이며, 이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해당 책은 네덜란드에서 1668년에 출판되었으며, 프랑스 번역가 미누톨리 (Minutoli)가 1670년에 주석을 달고 프랑스에서 출판했다. 미누톨리가 번역한 프랑스 번역판 하멜 표류기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는지 영국인 철학자 존 로크가 직접 이름을 서명한 복사본이 존재한다.

    2. 역사적 기록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찬〔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1]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 제주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2]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 여행이 금지된 곳. 한양)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3]

    효종실록(1653년 8월 6일 조 기록)

    제주도에 표류하게된 하멜과 일행 38명은 권극중과 노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하멜 일행중 두사람(생존 선원들 중 최선임자인 1등 항해사와 포술장이었다)이 청나라 사신의 행차에 뛰어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으로 그 둘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일행 전원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가 귀양으로 끝났다.[4] 게다가 하멜이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그들이 남만인인[5] 줄 알고있었다가 나중에 하멜을 심문했던 일본 측의 통보를 받고서야 네덜란드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정세, 국제 관계, 나라 상황 등 국가현안뿐 아니라 문물, 풍습과 같은 부수적 분야를 포함한 총 54여개 항목에 대한 조사를 단 하루만에 진행하였고[6]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고향 말조차 거의 잊고 조정에서도 불려다닐 정도로 자리잡은 벨테브레이(박연)와 길거리에서 끌려다니면서 거의 신기한 '생물' 수준의 구경거리가 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헌데 박연은 "여기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말아라."라는 식으로 말하니... 사실 하멜 일행도 몇 번씩 탈출 시도를 하고 몇 번씩 또 실패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것을 알고 길막한 뒤 단체로 호소를 하거나, 아는 어부를 회유해 배를 구입하거나...

    그렇다고 섣불리 일본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것이 효종은 북벌을 추진 중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었고 효종은 가뜩이나 약점이 잔뜩 잡힌 판국에 또 조선 사정을 알게 된 외국인이 들어왔으니 유용하게 부려먹을지언정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었고[7] 거기에 더해 당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 사람, 대만 사람, 유구국 사람들이 기독교도라고 마구 참수되는 일이 적잖았고, 심지어 유럽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너 배교할래 죽을래?"라는 선택을 받고 순교하거나 배교하던 시절이었다. 본국으로 귀환? 그런거 없었다.[8]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모두 기리시단이라고 일본말로 진술한 바가 있어 조선에서는 얘들 보냈다간 다 죽는다면서 잡아두자고도 했다. 실제로 하멜이 데지마로 간 이후 그가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일본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자신이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풀려났는지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라고 해서 풀려났는지는 추가 바람

    아마 당시 데지마에서는 후미에라는 방법으로 키리시탄을 가려냈었고, 칼뱅파 개신교도며 이미 본토에서 성상 파괴 운동이 진행됐었던 네덜란드인은 후미에를 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2.1. 평가

    하멜 표류기가 서구 중심적이며, 조선에서 잘해줬는데도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는 하멜 표류기에는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이다. 타르타르(청나라)가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그들은 피를 싫어한다. 전투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라는 구절과 "한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다가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9]라는 구절이 있고 당시 조선의 사회상과 형벌, 민족성을 하멜이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멜이 서양인이니 서구 중심적으로 서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실제로 조선이 하멜과 그의 일행에게 한 대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라서 좋은 감정이 들리가 없었다. 첫 탈출 실패 이전의 대접은 융숭했긴 했지만 억지로 잡혔고 본국으로 가지도 못하고 억류시키니 벗어나고 싶은 건 이상한 게 아니다. 특히 아무리 잘 대해준다 한들 고향 가고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창창한 22세부터 36세가 되도록 10년 넘게 고향에 못 돌아가게 강제로 막고 감금시켜 각종 부역에 동원하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험난한 삶을 살게 한 조선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멜 표류기를 읽어보면 그 내용이 상당히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데다가 '저 더러운 야만인 이교도들이 우릴 괴롭혔어염.' 하면서 징징대는 구절은 없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나? 십수 년간 고생한 얘기를 쓰면서 뭐 이리 밋밋해?' 라면서 마치 영수증을 보는 것 같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사실 밀린 임금 타내려는 보고서니 영수증 맞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다라는 걸 회사에 강조해야 임금이나 보험금을 많이 받을 수 있으니까 의도적으로 노린 감도 있다.[10] 하지만 표류 직후 우리는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도로서 무색해질 정도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다. 더불어 평생 미혼이었다는 점이라든가를 볼때 그 나름대로 조선인 처와 자식에 대한 생각이 있지는 않았을까 추측할 수도 있다. 특히 하멜 표류기에서 이상하게 감정이 실려있는 부분이 있는데 전라도 유배 시에 순천, 나주 등으로 이배할 것을 명받은 직후다. "어떻게 우리가 기반을 마련했는데 떠나라니!" 하면서 흑백화나 요금 청구서 같은 메마른 내용이라 평하는 하멜 표류기에서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실어 저술한 부분이 있는데 이를 미루어 볼 때 하멜이 처자식을 두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11][12]

    위 문단에도 나왔듯이 '내가 이 이교도들에게 받은 대접은 어떤 기독교도에게 받은 대접보다 좋았다'라는 구절이라든지 조선인들은 정이 많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한 부분도 많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여 같이 교류한 승려들이나 전라수사 이도빈, 제주목사 이원진[13] 등의 경우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뭐 자신들 좋게 봐준 사람을 나쁘게 써서 뭐하려만은.... 그리고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하멜이 좋게 서술한 수사들은 대개 조정에서 공이 크다면서 서울로 불러 높은 벼슬을 줬고 하멜이 깐 수사들이나 병사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무능하고 탐욕한 탐관오리라고 역시 디스를 해서 그의 사람 보는 안목도 제법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는 하멜이 자신의 고생을 강조하려고 경험을 과장하거나 없는 사실을 지어내거나 혹은 일본에서의 경험담을 마치 조선에서 경험한 것처럼 표류기에 적었다는 일부 주장이 있고, 반일감정의 시류에 편승하는 미디어에서는 이것이 사실인듯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하다. 조선에서 13년, 일본에서 1년을 있었으면서 두 나라의 경험을 착각한다는 것은 사뭇 이해하기 어렵고, 똑같이 조선에서 동고동락한 주변 동료들이 한둘이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 하멜의 경험이 조선의 일인지 일본의 일인지는 일본과 숱하게 무역 거래를 해 온 같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무역상들이 있기 때문에 하멜이 의도적으로 기록을 날조 왜곡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멜이 회사로부터 온전하게 체납 임금을 받은 것을 보면 회사 자체적으로 그의 기록에 대한 사실 검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3. 기타사항

    • 이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제주도라서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는 하멜을 기리기 위해 커다란 범선 형태의 건물이 세워져 있다. 다만 조성된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 이말년씨리즈에서 맛깔나게 패러디를 했다. 보러가기 믿고 보는 이말년 당연히 작가의 화풍 특성상 재미를 위한 왜곡이 많으므로 본래 하멜이 저런 인물이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 특이하게도 1670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인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andois, Sur la Coste de l'Isle de Quelpaerts: Avec la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Traduit du Flamand; Par Monsieur Minutoli"라는 책에 존 로크가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존 로크의 서명을 해당 책의 앞부분에 확인 할 수 있다. 1670년대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을 존 로크가 읽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 [1] 네덜란드어에서 '예', '그렇다'를 뜻하는 'Ja'(야)라고 한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으로 보인다.
    2. [2] 당시 나가사키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외국인의 체류가 인정된 인공섬 데지마가 있었다.
    3. [3] 실제로 네덜란드의 전통 춤에는 스텝을 밟으며 발을 흔드는 춤의 종류가 많다.
    4. [4] 여담으로 전 항목에는 단순히 가뭄이 들어서 귀양보내 부려먹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면 벨테브레이나 수많은 명나라 귀순 병사들은 왜 남겨두고 얘들만 보냈겠냐는 의문이 생긴다.
    5. [5] 남만은 동이-서융-남만-북적, 중에서 남쪽 오랑캐, 즉 동남아쪽을 의미한다. 동남아를 거쳐오긴했으니 그냥 뭉뚱그려 남만이라 칭한 것. 즉 그냥 이런 하얀 놈들 사는 어떤 동네. 그들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딴 식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는 아예 모르고 얘들은 남만인 중에서도 화란인이다 라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서야 그런 나라도 있구나 했다.
    6. [6] 이게 어떤 의미냐면 하멜 일행은 일본에 통보를 하고 정식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방문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단 하루만에 일목요연하게 끝냈다. 이는 이런 상황에 대비한 가이드 라인이나 정책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7] 정작 다른 왕 때 들어온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청나라로 보내버렸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들의 국적을 '미리견'으로 표현했는데, 이를 현대 표준중국어로 읽으면 '메이리젠(Měilìjiān)' 정도가 된다. ㄱ계 구개음화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메이리곈'. '아메리칸'에서 '아'는 슈와, 이른바 약한 어 모음이므로 '메리칸' 정도로 들렸을 것이고 이게 '메이리곈'으로 음차된 것으로 추측.
    8. [8] 대표적으로 크리스토방 페레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 같은 경우가 있었으며, 이들은 배교후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카쿠레키리시탄의 색출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9. [9] 이런 처형 방식은 에도시대의 6가지 처형 방식 중 하나인 노코기리비키(鋸挽き)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하멜이 일본에서 목격한 것을 조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다. 노코기리비키는 그 특유의 잔혹성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행된 최고 형벌이다. 다이묘의 시녀와 간통한 사람이나 강도, 기독교인들을 이 방식으로 처형하기도 했다. 참고로, 조선은 대명률에 따라 처벌했는데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 참형, 남편이 아내를 죽인 경우 교형에 해당한다
    10. [10] "조선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다"라는 행복한 이야기도 제외하였다, 다른 선원이 다른 곳과 인터뷰한 내용에서는 있었다.
    11. [11]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선교사가 전라도에서 백인의 모습을 한 조선인을 본 적이 있다고 기술한 적이 있다
    12. [12] 다만 이들은 하멜의 후손이 아니라 하멜 일행의 후손으로 보고있으며 있으며 본디 병영 남씨로 가계를 이어오다가 의령 남씨 족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13. [13] 이분은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스승이자 성호 이익의 당숙이고,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제주도의 풍습을 기록한 책 ‘탐라지’를 썼는데 오늘날에도 조선 중기 제주도의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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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st modified 2020-02-12 09:5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