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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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소리치며 굽은 길 곧게 하는 그 이름은 예언자

홍현설[1] 작사, 감리교신학대학교가 中

감리교신학대학교 監理敎神學大學校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교훈

경건, 학문, 실천

분류

사립대학

개교년

1887년

총장

이후정

국가

대한민국

소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문로 56 (냉천동)

교색

MTU PURPLE

웹 사이트

1. 개요
2. 개관
3. 건물
4. 특성
5. 역사
5.1.1. 배재학당에서의 신학 교육
5.1.2.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신학반, 신학회)
5.2. 감리교협성신학교 시대(1907년~1923년)
5.2.1. 감리교협성신학교(남성 신학 교육)
5.2.2.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여성교육)
5.2.3. 3.1 운동과 감리교신학교
5.3. 감리교 신학교 시대(1931년~1945년)
5.3.1. 아빙돈 주석 번역
5.3.2. 삐라 사건과 폐교
5.4. 광복 후 감리교 신학교 시대(1945년~1959년)
5.5.1.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변·홍 사건 1991년)
5.6.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1993년~현재)
6. 주변 교통편
6.1. 버스
6.2. 지하철역
7. 신학부
7.1. 신학전공
7.2. 기독교교육학전공
7.3. 종교철학전공
8. 대학원
8.1. 일반대학원
8.2. 신학대학원
8.3. 목회신학대학원
9. 비판 및 논란
9.1. 학내사태
9.2. 성추행 추문
9.3. 총학생회 단톡방 성희롱 사건
10. 둘러 보기

1. 개요

  • 監理敎神學大學校
  •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2] Mouth Training University[3],

개교년: 1887년

소재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독립문로 56길)

교육이념: 경건 학문 실천

교육목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즘, 평화주의

홈페이지

2. 개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학대학교.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1887년 배재학당에서 신학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신학 교육은 1907년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리교협성신학교[4]로 공식 출범하였으며, 이는 후일 여자 신학생을 육성하던 감리교협성신학교와 1925년 통합하여 '감리교신학교'가 되었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휴교(사실상 폐교)되었다가 해방 후 복교, 1959년에 '감리교신학대학'으로, 1993년에 '감리교신학대학교'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칭은 '감신대' 또는 '감신'이다.

3. 건물

  • 종합관: 학생들이 제일 많이 움직이는 곳 거의 감신의 모든 수업은 여기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1982년 10월 30일에 준공된 종합 강의동으로 지상에는 강의실, 지하에는 체력단련실, 매점, 한길서점, 평생교육원 교학처, 옥상에는 하늘정원등이 위치하고있다. [5]

-지상/지하 : 5F/1F

-연면적 : 5546.46m2

-건축면적 : 1087m2

  • 웨슬리 채플: 학생들이 매주 한번 씩은 들르는 곳, 위, 아래 층 까지 합쳐서 약 천 명 정도를 수용 할 수 있다고 한다. 기숙사인 장천 생활관을 제외하고서 학교 건물 중에는 꽤 신식 건물이다. 외관도 꽤 준수한 편. 2003년 10월 25일에 준공 하였고, 총건편은 9백여평으로 소회의실 3개와 1260명을 수용할수있는 대강당으로 구성되어있으며, 6억 상당의 독일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함으로써 교계 신학교 중에 가장 현대적인 설비를 갖춘 대강당으로 주목받고있다.[6] 강의실과 소예배실이 위치 하고 있다. [7]
-지상/지하 : 2F/1F -연면적 : 2916.3m2-건축면적 : 1562.33m
  • 학생회관(김영옥 학장 기념관): 2층에 총학생회,총여학생회,신학전공 학생회,기독교교육학과 학생회,종교철학전공 학생회, 대학원 학생회 등 학생자치기구와 다수의 동아리연합회소속 동아리들이 자리잡고있다. 또한 1층에는 Grazie (그라지에와 계약이 만료되고 2017년 부터 카페드림과 새로 계약함) 커피전문점과 약5개 정도의 회의실과 스터디룸이 자리하고 있다. [8]
-지상/지하 : 4F/1F -연면적 : 1764.04m2 -건축면적 : 448.23m2
  • 교수회관: 1956년 준공된 교수회관은 교직원 식당(만나홀)과 교수연구실이 위치하여있다. [9]
-지상/지하 : 3F/1F -연면적 : 635.21m2 -건축면적 : 202.92m2
  • 백주년기념관: 좁디 좁은 학교에서 그나마 제일 큰 건물... 다른 학교로 비하면 '본부동' 격이다. 건학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서 199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총장실을 비롯한 대학본부가 자리잡고있으며 국제회의실과, 도서관,열람실등이 위치하고 있다. 교수 연구실 또한 5~7층에 입주하여 있으며 3~4층은 도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별히 3층에는 소예배실이, 4층에는 복사실이 있고 1층에는 총무처와 경건처,교무처 와 법인사무처등 학내 주요 행정기관이 몰려 있다. [10]
-지상/지하 : 7F/3F -연면적 : 9998.19m2 -건축면적 : 1254.13m2
  • 대학원(청암기념관): 1960년 준공된 청암기념관은 리모델링 시기를 한번 거치고 현재 대학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대학원 경건처와 교무처 그리고 강의실
등이 입주해 있다. 학생회관 건물과 바로 옆 건물이라 학생회관 고층 복도에서 대학원쪽 창문을 열면 대학원생들이 강의 듣는 모습이 보일 정도... 머릿돌에 요한복음 21장 17절 말씀 ‘내 양을 먹이라’가 새겨져 있다.특이한 것은 1층 로비에는 3.1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감신 출신 생들의 동판을 새겨 놓았는데 이중에 친일파가 있다는 것이 함정...
-지상/지하 : 7F/3F -연면적 : 9998.19m2 -건축면적 : 1254.13m2
  • 장천생활관(기숙사): 감신의 제일 최신형 건물 장천생활관(Jang Cheon Dormitory)은 2005년 입사한 신축생활관으로서 지상 7층, 지하 2층, A동, B동 2개 동 건물에 총면적 1,643평 규모로, 150개의 학생 방과 250석 규모의 식당, 예배실과 개인기도실, 체력단련실, 세탁실, 휴게실, 컴퓨터실 등이 완비된 학업, 교제, 예배의 장이다. 다른 학교가 여자 기숙사, 남자 기숙사 가 다른 건물에 있는 것과는 달리 여기는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다... 그러나, 층층 마다 으로 남기숙사, 여기숙사 로 나누어 놔서 우려하는 일들은 대체로 없는 편이다(...신학교 인데)[11] 기숙사에 입주하면 매일 아침 7시 새벽기도회[12]를 의무적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시험기간 전후 2주동안은 새벽 예배가 없다고 한다. 지하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다.

-지상/지하 : 7F/2F

-연면적 : 5381.22m2

-건축면적 : 1024.3m2

  • 역사 박물관: 학교에서 그냥 방치하다 싶이 해놓고 있는 건물, 근로생 이나 조교를 뽑아 관리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없고 그냥 문을 잠궈 놓는다고 한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개교 120주년을 기리며 2007년 개관한 역사박물관(History Museum)은 1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본교 출신 선배들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소장 자료 중에는 한말에서 일제말기까지 발간된 도서가 천여 권에 이르며 이들 중에는 유일본, 희귀본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지상/지하 : 2F/1F

-연면적 : 357.03m2

-건축면적 : 119.01m2

  • 운동장: 굉장히 좁다고 한다.. 11대 11 풀코트 축구는 고사하고 8대8풋살을 해도 좁아 터질 지경(하긴.. 덩치큰 남자들 16명이 뛰어다닌 다고 생각해 봐라..) 게다가 준설시 땅 을 제대로 안다져 놨는지 울퉁불퉁 하며 한 귀퉁이에는 쓰레기장이 있다... 운동을 하고 있으면 쓰레기 장으로 비둘기 떼가 날라와서 만찬을 즐긴다고.. 하여간 굉장히 특이한 학교인 것은 분명하다.

4. 특성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직영 신학대학교 [13]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개신교 신학대학교이다. 또, 현재까지 종합대로 전환하지 않은 신학대학교로 유명한데[14]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학교이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신학적 입장은 진보적으로 성서비평,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즘 등에 개방적이며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다. 감신대만의 독특한 신학적 전통은 '토착화 신학'으로서 서구의 신학을 그대로 읊조리는 신학이 아닌, 한국의 문화와 현실에 맞게 적응된 신학을 하는 것이 바로 토착화 신학이다. 이 토착화 신학 전통은 개교 직후 최병현 목사로부터 시작되어 윤성범, 변선환, 유동식, 이정배 교수에게로 이어져 지금은 3세대 토착화 신학자인 장왕식 교수 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국 개신교 신학, 특히 조직신학 분야를 선도하는 신학대이며 오랜 역사 속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도 많이 한 대학이다. 감신대의 또 다른 신학적 특징으로는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진보적 신학을 수용하는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는 1930년대 조직신학자 정경옥 교수의 영향으로 신앙에서는 보수주의, 신학에서는 자유주의 의견을 취하면서 신학의 현대화와 신학의 향토화를 추구하는 방향이다. 경건적 신앙실천을 바탕으로 보수적 신학전통과 함께 진보적인 신학도 함께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5. 역사

5.1. 신학회 시대(1887년~1907년)

5.1.1. 배재학당에서의 신학 교육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 설립 당시 고종 황제마태오 복음서 20장 26-28절을 인용,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는 당훈을 지어주었다. 이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87년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 연도로 볼 수 있다.

5.1.2.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신학반, 신학회)

1888년에 '영아소동'이 일어났다. 이는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수구세력들은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눈을 뽑아 사진기의 렌즈로 만들고 을 빼내어 약으로 쓴다는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무고한 서양인들을 폭행하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배재학당이화학당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고, 종교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재학당 내에서 이루어졌던 신학 교육도 상단 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88년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육은 1893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이는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실려 있는 한국 선교의 통계에서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893년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보고편지를 보면 지속적으로 한국인 전도자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크랜턴189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1893년에야 비로소 규칙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 안에 이러한 취지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킬 한 반을 개설해 장차 우리 사역자로 양성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신학교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돌아오면 이 학교를 출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로 12명이 선발되었는데, 그들은 1주일에 2~3일 정도 오후마다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과목은 성서, 설교학, 구원론, 성서개론 등입니다."

즉 공식적인 신학교 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12명의 학생들이 정기적인 수업을 받고 있었으며 교과 과정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1893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에 시작된 '신학반'이 1899년 2월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전체 수업은 유쾌하고도 유익한 것이었으며 전 수업 기간을 통해 그 관심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들(21명 참석자)은 이 반을 신학회로 부르기로 투표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매번 서울에서만 모일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도 모이며 음력 설날 어간이 가장 좋은 시기임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 교육 모임의 명칭이 '신학회'로 한국인투표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 모임은 '신학회'란 명칭을 결정한 것과 함께 모임 장소를 서울특별시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도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시켰다. 신학교육의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자 그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교수진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 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

5.2. 감리교협성신학교 시대(1907년~1923년)

5.2.1. 감리교협성신학교(남성 신학 교육)

http://cms.mtu.ac.kr/user/mtu/images/pop/34.jpg

1910년대 감리교협성신학교의 전경. 지금의 캠퍼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1887년부터 시작된 신학회 교육은 미 감리회의 신학 교육 과정이었다. 당시 미국감리회남북전쟁 이후로 미 감리회, 남 감리회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 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남 감리회는 별도의 신학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1899년부터 미 감리회의 신학회에 학생과 1903년 무스, 하운센 등을 교수로 보내, 미 감리회에 위탁 교육을 시키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신학회는 초기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뒤로도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독자적인 조직과 선교 통로를 지니고 있던 두 감리회한국에서는 연합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후 초교파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두 감리회의 일치와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신학 교육에서도 나타나, 1905년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회 안에서 제기되고 마침내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감리교협성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 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고, 그 결실이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1907년 감리교협성신학교가 설립된 후, 1910년 4월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에서 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시켰다.

5.2.2.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여성교육)

http://cms.mtu.ac.kr/user/mtu/images/pop/24.jpg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모습. 학교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이어서 건물의 모습은 러시아풍이었다. 이런 이유로 광복 후 반공 영화나 일반 영화에서 소련 건물로 많이 등장하였다.

1907년 개교한 감리교 협성 신학교는 남성 교육 기관이었다.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15]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의 신학교육은 1890년 무렵부터 개인 교습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국인 전도 부인들을 모아 성서와 기도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정식 <여자 성경 학원>으로, 다시 1911년 <부인 성경 학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전도부인이란, 남녀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한국의 당시 상황 속에서 여성 전도에서 어려움을 겪던 남성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기초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전도하던 부인들을 일컫는다. 그녀들은 대우가 좋지 못했지만,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라는 긍정적인 정체성 때문에 열심히 전도하여 감리교회를 양적으로 발전시켰다.

남 감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여자 성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회의 성서학원이 통합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 부지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8번지에 마련하였다.

5.2.3. 3.1 운동과 감리교신학교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서 감리교신학교 재학생 중 7명이 독립선언 33인 중에 참여하였다. 곧 박희도(朴熙道),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신석구(申錫九), 신홍식(申洪植), 정춘수(鄭春洙)였다.

5.3. 감리교 신학교 시대(1931년~1945년)

1920년대부터 남북 감리회가 협동으로 운영하는 남녀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리하여 2년간 실험 교육을 거친 후 마침내 1925년 4월 두 학교를 '감리교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는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남녀 통합 교육 기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교'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 구조가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남성이 함께 복음을 배우는 신학 교육의 장이 되었다. 1925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와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통합된 후, 1931년 12월 14일부터는 전문학교령에 준하여 4년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빌링스(B. W. Billings)가, 부교장은 구 협성여자 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체틴(A. B. Chattin)이 맡았다. 이후 1935년 4월 5일에는 대학령에 따라 5년제(예과 2년, 본과 3년)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5.3.1. 아빙돈 주석 번역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에 한국의 개신교에 신학적인 갈등이 찾아오게 된다. 이는 감리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아빙돈 성경 주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은 미국유럽의 유수한 성서 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서는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를 주석하였다. 아빙돈 주석서는 성서비평학의 활용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을 밝혀주어 미국 개신교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었던 책이었다. 이러한 ‘아빙돈 주석서’를 감리회 주축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당시 감리회가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빙돈 성경 주석’은 감리회류형기가 번역과 편집 책임을 가지고 출판한 것으로, 번역자로 감리회에서는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16], 장로회에서는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회령, 윤인구 등 53명이 참여했다.

5.3.2. 삐라 사건과 폐교

감리교 신학교는 이렇게 번역으로나마 한국인의 손으로 각주서를 발행할 만큼 신학적으로 성숙해갔지만, 아울러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어느 날 감리교 신학교 교정에 “일본인 학교에 조선 사람 보내지 말라.”, “일본인 상품을 보이콧하라.”, “창씨개명하지 말라.”,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었다. 그로 인해 몇몇 학생들이 조사를 받고 변홍규 교장과 정일형 교수가 구속되었다. 결국 그 해 10월 당시 감독이었던 친일파 정춘수가 무기한 휴교(사실상 폐교령)를 선언하여 학교가 폐교되었다.

5.4. 광복 후 감리교 신학교 시대(1945년~1959년)

1945년광복을 맞자 바로 전에 형성(1945년 7월 19일)되었던 기독교 조선교단의 지속 여부에 대해 논의가 일어 같은 해 9월 8일새문안교회에서 교역자들이 “남북 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의견은 비록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하나가 되긴 했지만 교파 통합이 바람직한 만큼 통합 교단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된 것이니 각 교단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엇갈린 의견 속에서 회합에 참여했던 감리회 교역자들 중 이규갑, 변홍규, 김광우 목사 등이 조선교단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북 대회"는 회의 끝에 단일 교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38도선으로 북측 교회가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이름을“조선 기독교회 남부대회로 고쳤다. 남부대회는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남부대회는 여러 교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46년 해체되고, 각 교파가 환원되었다.

한편 새문안교회에서 퇴장했던 감리회목사들은 재건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다시 1945년 12월 17일조선 감리회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고 역시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삼았다. 위원회는 전국에 연락을 취해 1946년 1월 14일흥인지문 교회에서 연합회(중부장: 이규갑, 동부장: 변홍규, 서부장: 이윤영)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중도파와 선교사들의 중립적 자세에 의한 화해를 종용으로 미루어져 오다가 4월 6일에서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감리교 신학교의 재건을 결의하고 교장에 변홍규 목사를 추대하였다. 그렇게 1946년 3월에 감리교 신학교가 다시 개교하였다. 이어 4월 5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감리회 중부 및 동부 연회가 연합으로 개최되고 1939년의 감리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재건파에 의해 어렵게 다시 개교한 감리교 신학교는 1948년에 45명, 1949년에 40명, 1950년에 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 1951년 민가를 구입, 판잣집을 지어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에 1951년에 43명, 1952년에는 6명, 1953년에는 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휴전 후, 1954년 3월 13일 부산에서 마지막 졸업식을 끝내고 4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환도 이후로는 정상적으로 매해 30여 명에서 50여 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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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5일부터 부산에서 사용한 임시 교사. 1954년까지 사용되었다.

학교 재건 후 다시 교장에 오른 변홍규 박사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33년부터 감신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에 빌링스에 이어 감신의 6대 교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어서 1941년김인영 목사가 교장을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변홍규 목사가 맡았고, 1948년부터 1951년까지는 유형기 목사가 맡았다. 1952년부터 25년간은 홍현설 목사가 교장 직을 수행하였다.

5.5. 감리교신학대학 시대(1959년~1993년)

1959년 감리교신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은 같은 해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 연합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은 과거 수십 년 간 우리의 숙제였던 대학 승격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금년 4월 1일부터 정규 대학의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할 것입니다.”

1959년 4월 1일 이후 학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고 홍현설 교장이 제 1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웰치 감독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이 있기 두 달 전인 1960년 2월 21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새 본관 공사에 착수하였고, 10월 31일 새 본관(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1969년 선교 대학원이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고,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어 부설 연구소를 두었다. 부설 연구소에는 기독교 교육연구소(소장: 은준관 교수)와 한국교회 선교 문제 연구소(소장: 홍현설 교수) 등이 있었다.

1977년홍현설 학장이 정년 은퇴했다. 1977년 6월, 그 뒤를 이어 윤성범 교수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윤성범 교수부터 학장을 4년 임기제로 하였다.

1980년 2월 11일 윤성범 학장에 이어 김용옥 교수가 제 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옥 학장은 학장 재임 기간인 1980년 3월 15일 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1981학년도 입학정원 증원 및 기독교교육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신학대학원(Th. M. 과정, M.Div. 과정)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도서관을 신축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김용옥 학장은 도서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간염으로 돌연 소천하였다. 김용옥 학장의 뒤를 이어 1981년 2월 14일 박봉배 박사가 제 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7월 15일에 도서관이 준공, 개관되었는데,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학장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982년 6월 29일에는 종합관이 준공되었고, 충정로 3가 구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종합관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종교철학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종합대학화 계획과 학장 종신제 추진 등의 이유로 1982년, 1985년 두 번의 학내 사태가 일어났다. 두 번의 걸친 사태 후 박봉배 학장이 학장직을 사임하고 퇴진하였다. 1987년에는 이사회가 퇴진하기에 이른다. 1985년 박봉배 학장이 사임한 후 송길섭 박사가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30일에 기독교교육과를 기독교교육학과로 개편하였다.

감리회 신학의 토착화 전통은 변선환 교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학문적 전통에 대한 교단의 일부 세력이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교단과 학교 간에 학문적인 갈등이 야기되었다.

1982년 6월 26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 모임에서 변선환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가 일어났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감리교 부흥단은 변선환 교수사도신경과 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부인했다는 일종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고 변선환 교수의 감리회 정회원 자격 정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오경린 감독회장이 변선환 교수로 하여금 해명서와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도록 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를 아예 뿌리뽑을 수 있는 주장이라서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주장을 크게 경계한다.

5.5.1.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변·홍 사건 1991년)

1988년 8월 10일, 변선환 교수가 제 6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91년 변선환 학장은 다시 이단 시비에 휘둘렸다. 1990년 변선환 학장은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다음 해에 홍정수 교수가 ‘부활의 메시지를 다시 조명한다’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변선환 교수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잘 드러나 있었는데, 변선환 교수의 신학은 이웃종교를 사탄이나 우상으로 적대하거나 개종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이웃 종교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교와의 공통된 내용을 찾아 대화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홍정수 교수의 글에는 포스트 모던 신학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 공존과 상호이해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당연한 것이라서 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변선환 목사의 주장은 "교회가 기독교의 경계를 허물어야 하고 타종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17]는 해석의 여지가 있었고 근본주의[18]자이자 금란교회 담임목사인 3도(김선도,김홍도,김국도) 중 메인 김홍도 목사가 주동한 교리 수호 대책 위원회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은 두 교수의 사상이 ‘이단 사상’, 내지는 ‘기독교 신앙과 감리회 교리에 배치되는 신학 사상’으로 ‘선교에 특히, 7천 교회 2백만 성도 확장 운동에 막대한 장애 요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총회 차원에서도 받아들여져 두 교수는 출교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정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고, ‘교단 정치의 싸움으로 전락되었다’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고, 특히 감신 학생들의 많은 저항을 받았다.

반면 감리회 내 복음주의, 정통주의 진영에서는 감신의 복음주의, 정통주의적 기풍이 살아났다고 평가하며 변선환과 홍정수 교수가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려 했으므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평가하였다. 개신교의 뿌리인 가톨릭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고 고백을 하지, 타종교에 대한 온전한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실 변선환 학장의 주장도 온전한 구원을 이야기 했다기보단, 타종교 와 대화를 통해 타종교 와 기독교 간의 공통 분모를 찾고 그 과정에서 구원론에 관한 사상을 공유 한것일 뿐이지 불교 도,이슬람교도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직접적 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옹호론도 있다.

또 다른 시각은 다음과 같다. 변선환 목사를 비롯한 종교간의 이해에 문제에 있어 시각에 따라 급진적으로 비춰질수있는 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애큐메니컬,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 큰 피해를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 [19] 이런 주장은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으니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고 역사적으로도 기독교의 뿌리를 흔들수 있어서 기독교계에서 크게 경계받는 주장이었다[20], 결국 변선환 목사의 무리수로 진보진영이 싸잡혀 욕을 먹게되면서 극단적 보수진영으로부터 "진보적 신학 = 배교자" 라는 잘못된 공식이 성립되었다. 김홍도목사가 금란교회라는 감리교의 손꼽히는 대형교회 목사라는 사실에서 보여지듯 감리교회 안에서도 진보적 신학을 아니꼽게보는 시선이 학계와 별개로교회현장에서는 다수 존재했다. 이런 이유들로 진보주의 신학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정통주의, 개혁주의, 보수적 신학의 부흥을 가져왔다.감신의 진보적 성향은 이때 큰타격을 입었다.

5.6.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1993년~현재)

1992년 7월변선환 학장이 종교재판의 후유증 속에서 정년 은퇴와 동시에 임기 만료로 퇴임하게 되고 이어 구덕관 교수학장직을 승계하였다(1992년 8월 10일). 1993년 3월 1일에는 교명이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되고, 학장총장이 되었다. 구덕관 총장은 취임사(1992년 9월 10일자 학보)에서 학교의 후진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발전 계획에 대해 밝혔는데, 오해가 다분한 발언들로 학생들의 큰 불만을 샀다. 변선환 학장 시절인 1990년 3월 12일에 이사회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제 2캠퍼스를 개발하기로 가결하였었는데, 이 계획이 이때 알려져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구덕관 총장 퇴진 운동으로 이어져 구덕관 총장은 결국 1994년 10월 퇴진하였다.

이때 감신대 제 2캠퍼스 계획이 엎어지자 음성군은 1995년에 개혁신학교를 유치했는데 재밌게도 개혁신학교는 파행운영과 내분으로 1년만에 폐교된다. 감신대 학생들이 앞날을 내다본건가. 그후로 음성군은 신학대학을 결코 유치하려 하지 않는다(...)

구덕관 총장이 퇴진한 후, 이종수 감독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1998년의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백주년 기념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종전에 각종 집회가 열리고 학생들의 담소 공간이었던 아레오바고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7층, 지하 3층의 규모로 계획되어 1999년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교수 연구실과 김용옥 학장 기념관에 있던 도서관 등이 백주년 기념관으로 이동하였다.

이종수 감독이 약 2년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고 1997년 염필형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0년김득중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03년에 웰치 채플을 헐고 그 자리에 웨슬리 채플을 지었다. 웨슬리 채플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1,5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웨슬리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들어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웨슬리 채플이 완공된 후 같은 해부터 장천 김선도 감독의 헌금으로 새 기숙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2004년,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하였다. 신입생은 과 배정 없이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신학, 기독교교육학, 종교철학 세 전공으로 나뉘는 체제로, 2004학번부터 적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또 다시 학생회와 학교가 큰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학부제 실시로 인해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에 김외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비아돌로로사가 건립되고, 2005년에 주차장이 완공되었다. 또한 새 기숙사가 완공되어 '장천생활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김외식 총장은 감신의 국제화를 내세워 여러 외국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외국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International Church Leader Program, 약칭 I.C.L.P. 후에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약칭 I.G.S.T.로 개칭)을 신설하였다.

2008년에는 김홍기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김홍기 총장은 취임사에서 300억을 모금하여 감신의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혔고 실제로도 모금에 들어갔으나.. 현실은 시궁창...

2012년에 박종천 교수(조직신학)가 감신대 1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5년에는 감신사태가 벌어졌다 송성진교수가 K교수의 논문 표절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사회에 단독으로 들어가 K교수의 승진탈락과 재임용을 탈락시키는 만용을 부렸다. 이와중에 법인처 직원K와 기독교윤리 L교수가 이사장 권력을 등에 엎고 고속 승진출처을 했다. 당시 이규학 이사장은 교수들을 줄을 세워 관리해야한다는 망언과 여자 목사들은 불독같이 생겼다는 막말출처을 해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법인처를 점거하고 농성했다. 이때 이규학이사장 퇴진요구를 했다.

2016년, 13대 총장이었던 박종천 교수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이사회의 거듭된 파행으로 후임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였다.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자 교무처장인 이환진 교수가 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사회가 파행된 이유는 한국 감리회의 자유주의신학(종교다원주의)세력과 복음주의세력이 각자 지원하는 총장 후보가 각기 달랐고, 서로 간에 심각한 공격이 자행되어 이에 반발을 품은 일부 이사들이 총장 선출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총장 선출은 정족수가 미달되어 선출되지 못한 것이다. W교수가 논문표절로 총장이 될 수 없어서 후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자유주의신학(종교다원주의)세력들이 W교수를 밀어주면서 총장선출에 난항이 계속되었다. 특히 광림교회 김정석목사는 2015년 대자보를 붙이면서 이규학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었고 김정석목사는 자유주의신학(종교다원주의)세력을 계속 밀어주었다. 하지만 결국 W교수는 총장후보에서 논문표절 때문에 탈락했다.

2017년 10월 10일 개최된 2017년 제 10차 이사회에서 영등포중앙교회 김진두 목사가 제 14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날 임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이사회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사회의 일부인 9인 이사회와 학생비상대책위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현재 김진두 총장은 여전히 직무를 수행 중이며 새로 보직교수도 임명하여 학교 일을 꾸려가고 있다. 또 12월 14일 열린 감신 총동문회가 개최한 2017 송년의 밤에서 김진두 총장과 학생비대위장이 감신 정상화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인줄알았으나 총장의 돌연 사임으로 학교가 다시 시끄러워졌다.출처 오늘도 평화로운 감리교 신학대학교

6. 주변 교통편

근처에 1호선 서울역 과 2호선 충정로역 5호선 서대문역, 3호선 독립문역 등이 위치해 있고 금화초등학교 앞에서 버스 한번만 타면 서대문구의 젊음이 가득한 신촌 까지 10분 이면 도착, 2호선 충정로 역 에서도 홍대까지 가는데 얼마 걸리지도 않는데, 작은 학교 건물과는 달리 교통편이 굉장히 좋은 곳에 위치해있다.

6.1. 버스

6.2. 지하철역

1호선 서울역 (서대문역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5분 이면 도착한다.)

2호선 충정로역

3호선 독립문역

5호선 서대문역 (학교에서 제일 가깝다.)

7. 신학부

2004년 이전까지 학과제를 운영하여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 세 개의 학과가 있었다. 2004년 이후부터는 학과제가 폐지되고 학부제가 실시됨으로써 1학년은 전공 배정 없이 신학부에 있다가 각 전공에 지원하여 배정된다. (하지만 사실 신학대의 특성상 목회자 양성이 우선순위이고 따라서 목회자 양성 과정인 신학전공이 주력인지라.. 배정은 성적순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원해서 신학전공 외 다른 전공으로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1. 신학전공

1887년 개교 당시부터 존재해온 학과로,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대표하는 학과이다. 정원은 120명으로 이 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2년 과정을 마치면 감리회 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2004년부터는 학부제 실시로 '신학전공'으로 개편되었다. 교육 목표는 '감리교회 교역자 양성', '민족과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 양육', '세계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 양성'이다. 전문적인 교역자 양성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교육목표인 ‘성서적 체험적 신앙의 양육’, ‘기독교 에큐메니칼 전통의 확립’, ‘신앙공동체를 위한 지도력 함양’과 연결된다. 성서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철저히 교육받고 양육받은 학생들은 교인들의 영적 성숙을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전통을 배움으로써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건전한 목회를 할 수 있다.과연? 또한 신앙 공동체를 위한 지도력 함양을 부단히 연마 받은 자만이 건전하고 능력 있고 성숙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민족과 사회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를 양육하는 것은 건전하고 능력 있는 민족과 사회의 지도자가 되려면 내면적 경건수련의 기도생활과 깊은 학문적 탐구와 수많은 실천의 경험이 요청된다. 이에 부응하며 대학의 교육목표인 ‘전통문화와 간학문적 대화’, ‘사회, 민족, 국가, 세계를 위한 봉사’, ‘종파, 인종, 계층, 성을 초월한 평화와 생명구현'의 목적에 부합하는 교육과정을 마련하고 있다. '세계를 섬기는 영적 지도자 양성'이라는 목표에 따라 신학과는 교육과정에 어학과정과 해외 목회 등에 대한 과목을 배정하고 있다.

한때 한신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와 더불어 대표적인 진보 성향 개신교 대학교로 손꼽혔던 감신대도 김홍도(목사)의 영향으로 정통주의로 학풍이 변해가고 있다.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의 성향상 신앙을 이성으로 공격해서 신도들의 반발으로 교세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 자유주의 신학도 요즘엔 신정통주의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7.2. 기독교교육학전공

기독교교육학과는 1980년대 인가를 받아 1981년에 설립되었다. 기독교교육학과는 기독교 교육 분야에 소명을 받은 이들에게 신학 및 교육학의 이론과 실천을 배우고 익히게 하여 교회와 사회현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과 노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함양시키는 기독교 교육의 전문지도자 양성 학과이다. 토한 기독교교육의 이론적 토대를 근거로 교회 및 사회단체 등 각종 현장에서 기여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학과이다. 기독교교육학과를 졸업하면 교육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교육목회자, 교육 분야를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교육사, , 종교계 학교, 그리고 일반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 활동을 담당하는 종교 교사가 될 수 있다. 이 중 종교 교사의 양성을 위해 기독교교육학과의 정원 중 10%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직 과정을 이수할 수 있게 한다.최근엔 교직과정이 날라갔다 한다(...)

7.3. 종교철학전공

종교철학과는 1982년에 설립되었는데, “종교철학과”라는 이름으로는 학부에 관한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인 것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학과 중의 하나이다. 종교철학과는 오늘의 세계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직시하면서, 그런 요구에 부응하는 교회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종교철학과는 영성과 인성은 물론 철학적 교양의 폭을 넓히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 목회자 및 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하고 있다. 종교철학과의 교과과정은 우선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초적 소양을 닦도록 꾸며져 있다. 종교철학과 교과과정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교회라는 작은 터전에서 기독교 신학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서 기독교 바깥의 학문의 도전에 기독교적으로 응답하는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고등 종교들, 즉 유교와 불교, 이슬람과 유대교 등에 대해서 종교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물론, 오늘의 실용학문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과학이나 문화의 제반 학문영역과 유기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동시에 때로는 그들의 학문적 도전에 기독교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적합한 이론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동시에 병행한다. 진로는 목회자, 교수, 선교사 등이 있다.

하지만 아직도 감신 내에서는 신학전공 배정에 떨어진 학생들이 오는 곳 이라는 인식이 팽배 하다... 내 돈 내고 들어와서 원하는 과를 못가는 기이한 학교 하지만 이 과가 좋아서 이 과를 선택한 경우가 있는데 그 중에 굇수들이 많다...

8. 대학원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전문대학원으로 나뉘어 있다. 전문대학원에는 신학대학원과 목회신학대학원이 있다.

일반대학원에는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이 있으며 신학대학원은 신학석사와 목회학석사 두 과정으로 나뉘어 있고 목회신학대학원에는 목회학석사과정 밖에 없다.

8.1. 일반대학원

  • Th.M(신학석사 과정)

타 신학대와 달리 신학석사(Th.M)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학석사 과정은 4학기제로, 감리회 직영 신학교(감신대, 협성대, 목원대) 신학과 출신이 들어갈 수 있다. 2년 과정이다.

  • Ph.D(철학박사 과정)

신학석사/목회학 석사 취득자가 들어갈 수 있다. 역시 2년 과정.

8.2. 신학대학원

  • Th.M(신학석사 과정)

신학대학원에도 신학석사 과정이 개설되어 있으며, 과정은 일반대학원의 신학석사 과정과 거의 같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과정은 전공을 선택하지 않고 학위 논문을 쓰지 않아도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는 것이 차이이다. 신학대학원 신학석사 과정도 감리회 직영 신학교 신학과 출신이 들어갈 수 있다. 2년 과정이다.

  • M. Div.(목회학석사 과정)

목회학석사 과정은 본교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 출신이나 타 대학 출신들이 들어갈 수 있다. 즉 학사 학위만 있으면 전공 불문하고 다 들어갈 수 있다. 목회학석사 과정도 전공 선택하지 않고 학위논문을 쓰지 않아도 학위 취득이 가능하다. 단 선택시에는 쓸 수 있다. 3년 과정이다.

8.3. 목회신학대학원

  • M.Div.(목회학석사 과정)

목회신학대학원은 주로 직장인을 위한 대학원이다. 야간 과정이며, 3년 과정이다. 일반 학사 학위자는 들어갈 수 있다.

9. 비판 및 논란

9.1. 학내사태

2014년, 인사비리로 인해서 학내사태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하는 등 학내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2015년 이사장의 막말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총여학생회장이 웨슬리 채플 종탑에까지 올라갔었다. 결국 이규학 이사장이 사퇴하고 마무리 되는 듯 했으나.. 14, 15, 16학번들 지못미..

이후, 2016년 박종천 총장이 임기만료로 총장직에서 물러나지만 이후 이사회 내부 갈등으로 인해 2017년까지 총장이 선출되지 않아 "이환진" 교수가 총장 직무 대행 으로 선출 된다.

2016년 12월, 재단법인 이사회중 과반수 이상인 10명의 이사가 김인환 이사장에 대해 불신임을 결의하고 최헌영 이사를 신임 이사장으로 선출하는 것으로 결의하였으나, 김인환 이사장은 이에 불복하여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였고 법원은 김인환 이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의 의견은 이사장 불신임건 과 관련하여 사전통보 없이 처리하는 것은 10명의 이사가 명백한 "불법" 이라는 것으로 이로 인해 신임 이사장의 선출을 인정할수 없으며 김인환 이사장의 직무는 계속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김인환 이사장이 업무에 복귀한 이후 전임 이사장이었던 "이규학 전 이사장"을 직무대행으로 선출 하였다(...)

9.2. 성추행 추문

조직신학 전공 교수가 연구실에서 논문을 지도하던 여제자를 상습적으로 추행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에 학교측은 기사가 날 때 까지 즉각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고, 기사가 난 후 교단측에서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이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https://www.facebook.com/mtuchonghak/posts/778894768913140|총학생회의 성명 #1]] / 총여학생회의 성명 #2)

9.3. 총학생회 단톡방 성희롱 사건

2016년 총학생회 "길벗" 은 임원(부장단) 단체 카톡방에서 한 학우를 향한 성희롱 적인 발언을 일삼았다고 한다. 내용인 즉슨 A학생이 성추문이 있었던 교수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아재서요?" 라는 희롱적 발언을 남긴 것을 총학생회 길벗 임원중 한명이 단톡방에 캡쳐해서 올린후 "니껀 묻혀서 안서잖아 ㅋㅋㅋㅋ" 라고 희화화했다. 물론 원인제공을 한 A학생이 분명히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가 학우를 향해서 성적인 희롱을 했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또한 가을축제를 준비하는 오프라인 임원회의에서 총학생회 임원중 세명이 "디스코 팡팡 치마입은 사람들, 그게 디팡의 매력이지" 라는 발언을 했고, 이후 총학생회 임원중 내부고발자에 의해 공개적으로 논란이 생기게 된다. 총학은 사과문을 게재하고 학교당국의 징계절차를 받겠다고 공언했으나, "성폭력 강의 이수" "사회봉사" 등의 학교측의 안일한 태도가 더욱 논란을 증폭시킨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학생들이 총학생회의 사퇴를 요구하자 총학생회는 "학교당국의 징계를 이수 하였으므로 사퇴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퇴 하지 않아도 된다" 며 사퇴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하지만 학생자치기구 중 집행기구, 감사기구에 해당하는 대의원회가 여성신학회,인권동아리 등 학생들의 요구를 정면으로 수용, 비상총회를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대의원회 대의원 중 두명이 대의원회가 의도적으로 총학을 사퇴시키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려는 사실이 있다며[21] "대의원 양심선언문"을 게재 하는 우여곡절 끝에 "학생비상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하지만 총학생회는 이 비상총회 자체가 일부 대의원회에 의한 불법적인 회의, 정치적이고 음모론적인 총회 라며 총회 도중 퇴장 하였고 이후 논란은 걷잡을수 없게 커졌다. 2017년 1월 현재 후임 총학생회가 당선됨에 따라 2016년 "길벗" 총학생회의 논란은 흐지부지 하게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잘못은 인정하나 학우들의 사퇴요구를 정면으로 비판한 학생회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0. 둘러 보기

대한민국의 감리회 산하 대학교*

{{{#!folding 대학교 목록 【펼치기 · 접기】

대한민국의 감리회 산하 대학교

기독교 대한 감리회
(기감)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

협성대학교

** : 연세대학교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이 공동 운영한다.

감리회 계열
초교파
***

배재대학교

배화여자대학교

안산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인덕대학교

^*** : 재단이 감리회 계열이지만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어있지 않은 대학이다.^

}}}


* :감리회 신앙 고백을 따르는 감리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가지지 않아 기재되지 못한 교단의 신학교를 보려면 이 링크로 가라.


  1. [1] 감신대 초대 학장
  2. [2] 영문명은 2008년 이전까진 신학교를 의미하는 Seminary를 썼으나 2008년부터는 University로 바꿨다. 이유는 세계 타 대학과의 교류시 격이 떨어지는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고...
  3. [3] 감신대에 가서 느는 게 말빨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별명
  4. [4] 여기서 '협성(協成)'은 영어 Union의 번역어이다. 영어권 신학교의 경우 Union으로 시작하는 학교가 많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남.북 감리회로 갈라져 한국에서도 각기 선교를 들어온 두 교단이 신학교 운영만큼은 합력하여 운영한다는 의미에서의 협성이다. 현재 협성대학교와는 관련이 없다. 협성대의 '협성'도 이런 전통과 의미에서 온 것이지만 감신대와의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다는 의미다.
  5. [5] 리모델링을 한번 한 건물이라고 한다. 원래 리모델링 이전에는 이곳의 지하 건물들이 기숙사 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의 지하는 진짜로 지하 반지하도 아니고... 빛도 제대로 안들어오고 습기도 자주 차고 있어 이곳에 입주 해있는 동아리원 들의 원성이 자자 하다고 한다...
  6. [6] 그럼 뭐해.. 채플 장비 관리가 안 이루어지고 있다. 스피커는 트위터가 나가서 먹먹하고 의자는 체형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7. [7] 사실 이곳 파이프 오르간은 그 어느 학교에 비해도 뒤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동문 들이 여기서 결혼식을 자주 올린다고 한다. 특별히 여기 동문에게는 이 채플 대여료 50%를 감면해준다고 하니 사실 그것이 제일 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채플 용도로 지어진 건물 인지라 결혼식 하객들이 들어가기 에는 정말 비좁다... 너무 비좁다...)
  8. [8] 이곳도 몇번 리모델링을 거친 곳이다. 2016년 리모델링 이전에는 학생회실 등이 1층에 있었고 커피숍과 한길서점이 2층에 있었으나, 동아리방 확대와 회의실 신설등으로 인해 지금의 구조를 갖게 되었다 (아직도 창문에는 "서점" 이라고 스티커가 붙어 있다..)
  9. [9] 현대식으로 준공된것은 1956년 이고, 그 이전에 교수회관 건물은 '관회수교' 라고 불렸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현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던 습성 때문으로 추정한다.
  10. [10] 2층에 있는 이사장실총장실은 있으나 마나... 어차피 출근도 안하시고 해봤자 손님 접대나 그게 아니면...점거 의 경우가 다반사
  11. [11] 허나 2019.3.30 놀랍게도 일이 생겼다
  12. [12] 원래 아침 6시였지만 현재 아침 7시로 바뀌었다.
  13. [13] 그래서 그다지 크지 않은 학교 규모에 비해, 실제로는 감리회 제1의 신학대학으로서 위상이 높은 학교다. 거기에 동문파워도 막강한 것도 유명하다.
  14. [14] 한신대학교,총신대학교,서울신학대학교,성공회대학교,백석대학교,목원대학교,협성대학교,가톨릭대학교 등 시초가 '신학대학' 으로 출발한 다수의 학교들은 종합 대학으로 전환 하였으나, 감신대는 장신대와 더불어 신학과를 비롯한 3개 학과만 갖고 있다.
  15. [15] 이화학당삼일소학당의 설립자.
  16. [16]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일상 생활에서도 경건주의 원리를 철저히 실천하여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는 평가가 남아 있다. 학생들이 변홍규를 성인이라는 뜻의 "세인트 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17. [17] 보수, 진보 진영을 떠나서 기독교계에서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근본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기독교계에서 극도로 경계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이런 다원구원론을 지칭한다. 극단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매도와 다르게 기독교계는 종교의 공존과 상호이해를 긍정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을 뿌리채 흔드는 이런 주장을 극도로 싫어한다.
  18. [18] 정통주의에 가까운 근본주의이지만 세대주의적인 주장을 하기도 해서 정통주의 진영에서도 곱게보지 않는 목사이다.
  19. [19] 사실 팀킬이라고 애매한게 같은 진영으로 묶으라면 묶을수 있지만 진보적 신학, 애큐메니컬 신학의 스팩트럼이 아주 다양하다,
  20. [20]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예수만 구원자라고 설파하며 다른 사상과 변론하면서 성립한 종교다(!). 간혹 경계해야 한다는 태도를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아주 금진적인 시각도 있지만 주의해야 무조건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것은 소위 보수진영의 다양한 스팩트럼을 무시한 마치 분홍색,주황색등을 빨간색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이다. 자세한건 정통주의참조
  21. [21] 하긴 했다. 총학생회실을 뒤져 나온 영수증을 찍어 총학생회 차장인 척 하고 대의원회에 고발했으나.. 별 문제가 없는 영수증이었기에 묻힘. 사실과 다름, 대의원중 2명이 '양심선언'을 하고 사건을 조작하려하는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것은 총학 성추문 사태와 관련하여 여성신학회 등이 주최한 비상총회 개최를 위한 서명이 과연 학칙에 의거해서 "실제로 비상총회 개최에 효력이 있느냐" 에 관한 부분 으로 대의원회 내부에 분란이 있었고, 당시 대의원회 의장이 비상총회 개최를 강행했기 때문 이지, 영수증을 찍어 총학생회 차장인척 하고 대의원회에 고발한 내용과는 관련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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