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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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사건의 배경
3. 전개
4. 논란
4.1. 필체 감정 논란
4.2. 강기훈, 김형영을 허위 감정 혐의로 고발
4.3. 당시 국과수 필적 감정한 김형영의 토지 사기건
5. 진실화해위 심사 및 법원 재심확정
6. 법원 재심 결과

1. 개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대한민국 검찰, 경찰, 검증인 모두의 흑역사. 물론 여기서 사법부도 예외일 수 없다.

자살 사주, 이른바 자살방조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가운데 실제로 죄로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으나 결국 무죄로 판명되었다.[1] 재심을 통한 대법원 무죄 판결 이전까지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작성되었으나 최종 무죄가 나온 시점부터는 지금과 같은 문서명으로 변경되었다.

2. 사건의 배경

1990년 3당 합당 직후 성립된 여당인 민주자유당6월 항쟁 이후의 개혁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은 보수적 정치격변이었다. 이에 대해 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재야세력, 야당(평화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80년대식의 거리시위가 재연되었는데, 1991년 3월 22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시위는 더더욱 확산되었다. 이로부터 두달간 연쇄적으로 분신자살이 일어난다. [2]

이렇게 계속 분신자살이 일어나자 당시 서강대 총장인 박홍 신부는 "분신을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파장을 일으켰고, 검찰은 이에 호응하여 분신 조장 세력을 밝혀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3. 전개

1991년 5월 8일,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연합(통칭 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했다. 그런데 그의 친구인 강기훈(姜基勳)이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국민들은 연속되던 분신자살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하는 회의까지 들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를 도와 자살하게 했다는 사건이 터지자 운동권의 도덕성,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국민들이 등을 돌린 학생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강기훈과 그의 주변인들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검찰에 의하여 자살방조죄로 기소된 강기훈은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이 확정되었다.[3]

姜基勳씨 공소사실 요지(1991년 7월 12일),<姜基勳씨 수사> 검찰 발표문(1991년 7월 12일),姜씨사건수사 姜信旭부장검사와의 일문일답(1991년 7월 12일)

여기까지만 보자면 운동권의 흑역사로 기억될 줄로만 알았지만(...)

4. 논란

4.1. 필체 감정 논란

日필적감정인, 韓國 법정서 증언 용의(1991년 7월 22일)

국과수 감정과는 달리, 피고인측이 제시한 제3기관의 문서감정 결과는 필체가 다르다고 결론내렸다. 분신한 金基卨씨의 유서를 감정했던 일본인 감정인 오니시 요시오(大西芳雄)씨는 22일하오 도쿄都내 日本기독교교회협의회(JNCC)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金씨의 유서는 姜基勳씨의 필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밝히고 『韓國법정에서 요청이 있으면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유서필체는 姜基勳씨 것과 달라"(1991년 11월 28일)

검찰은 이에대해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획수,필법등에 대해 감정이 잘못됐다며 오니시씨를 집요하게 추궁,오니시씨로부터 "한글을 몰라 감정당시 재일한국인의 도움을 받았으며 특정 자음이나 모음의 수를 잘못 계산했음을 인정한다"는 진술을 받아내기도 했다.

"큰 누나에 대한 언급없어 의심들었다"진술(1991년 10월 9일) 金基卨씨 아버지, 姜基勳씨 사건 3차공판서,遺書대필 사건 일지(1992년 7월 24일)

4.2. 강기훈, 김형영을 허위 감정 혐의로 고발

그로 인해 감옥에 갔다가 명예를 잃고 나온 강기훈은 그를 허위 감정으로 고발한다. 독재 정권의 주구가 되어서 유서를 허위로 감정했다는 것이다!

국과수 前문서분석실장 金炯永씨 피소(1995년 1월 29일)

그렇지만 국과수 간부 김형영은 무혐의 판정을 받는다. 사실 이것은 어느정도 예상되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검찰이 자신들의 주장을 허물어뜨릴수도 있는 국과수 증인을 유죄로 판단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검찰,김형영(金炯永)前국과수실장 무혐의 결정(1995년 6월 2일),前(전)국과수 문서실장 검찰 무혐의처리(1995년 6월 4일)

서울지검 형사 6부 유국현 부장검사는 3일 지난 91년 발생한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에서 허위로 문서를 감정한 혐의로 고발된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60)를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결정문에서 "관련기록과 증인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김씨가 감정서를 허위로 작성했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4.3. 당시 국과수 필적 감정한 김형영의 토지 사기건

훗날 김형영은 토지 사기 사건때 토지문서를 허위로 감정해줬다고 콩밥을 먹는다. 강기훈은 김형영 = 사기꾼들과 짜고 허위감정하는 나쁜 사람 = 그래서 유서 사건도 허위로 검정했을것이다. 나쁜 사람이니까라고 주장하면서 재심을 청구하게 된다.

유서대필 사건 姜基勳씨, "재심 청구"(1998년 2월 11일)

姜基勳씨(35.큐빅테크 직원)는 11일 前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 金炯永씨가 사기범들과 짜고 토지문서를 허위감정해준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유서대필사건 당시부터 이같은 사태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서대필 사건 당시 필적감정을 맡은 金씨의 증언으로 유죄가 확정돼 3년여에 걸친 감옥살이를 했던 姜씨는 "당시 재판과정에서 金씨가 대규모 토지브로커들과 연계했던 사실이 일부 드러나기도 했지만 사법기관은 국가 공신력의 훼손을 위해 결국 金씨의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김형영은 그 토지사건도 무죄 판결받는다.

토지사기 연루 전國科搜실장(강기훈 필적 감정한) 무죄(1998년 7월 3일)

5. 진실화해위 심사 및 법원 재심확정

그러나 이런 반전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재조명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재의뢰했다. 국과수는 이 사건을 맡아 5명의 감정인으로 재감정했고, 2007년 11월 이들은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내어 1991년 당시의 감정을 뒤집었다. 또한 진실화해위에 출석한 1991년의 김형영 감정인도 "감정인에 따라 판정이 다를수 있다"고 말하여 자신의 감정이 틀릴수도 있음을 시인했다.

진실화해위에서는 강기훈씨가 무죄를 주장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고, 2009년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이강원)는 강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서울고검은 다음날 즉각 항고했으나, 2012년 대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6. 법원 재심 결과

2012년 12월 20일부로 재심이 시작되었으나#, 강기훈 씨는 현재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 재심 청구 와중에 부모님이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신도 암투병중. # 일요신문 그러나 여전히 인터뷰는 꺼리는 편이다. # 경향신문

2013년 12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유서의 필적은 김기설 본인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기사

2014년 2월 13일 서울고등법원의 재심에서 강기훈씨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를 결정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속내가 있다는 분석이 있다.

마침내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24년만에 강기훈 씨가 유서를 조작하고 자살을 방조하였다는 내용에 대해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기사 (대법원 재심 판결문(2014도2946))

이후 변호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금 청구와 국가배상 청구 등과 관련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

2015년 5월 30일에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그리고 두주전 "팟케스트방송 이이제이"를 통해 다시한번 재조명되었는데 강기훈씨는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고 마지막 남은 생을 조용히 마감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강기훈씨와 함께한 가족, 강기훈 씨의 주치의, 변호인들을 비롯한 여러 법조인들은 안타까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취재하기도 했다. 강기훈씨의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강기훈씨는 계속되는 재판으로 인해서 트라우마를 반복해서 겪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관계자들은 아직까지도 이에 대해서 사과는켜녕 1:1 비겼다라는 기도 안차는 말을 해댔다. 그것도 2015년 현재(...)

검찰은 이 사건에서 강기훈이 유서를 조작하지 않았을 뿐 유서가 조작된 것 자체는 사실이라 주장하고 있다.


  1. [1] 재심 이전부터 대부분의 형사법 학자들도 강의나 수업시 이 사건을 언급할 때는 조심스러웠다. 재심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아 더이상 본 사건은 자살방조가 성립될 수 없지만, 판결 이전, 즉 2015년 5월 이전에 출판된 형법서적에는 아직까지도 자살방조죄의 대표판례로 남아있다. 따라서 전공자들은 유죄판결의 사실을 제외한 자살방조죄의 법리만을 걸려서 이해하면 된다.
  2. [2] 당시 상황은 조금만 더 악화되었다면 거의 제2의 6월 항쟁 수준까지 갔을거라는 분석까지 있을 정도다.
  3. [3] 강기훈씨 유죄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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