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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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경성제국대학

국립타이완대학

경성대학으로 개칭 후 서울대학교로 재구성.
다이호쿠제국대학의 후신.

京城けいじょう帝國ていこく大學だいがく
경성제국대학
Keijō Imperial University


교표[1]

분류

제국대학 (국립)

개교

1924년 6월 12일 (다이쇼 13년)

개칭

경성제국대학
(1924년 6월 12일~1945년 10월 16일)
경성대학[2][3]
(1945년 10월 17일~1946년 8월 22일)

폐교

1946년 8월 22일

국가

일본 제국
(~1945년 8월 15일)
미군정
(1945년 9월 8일~)

소재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동숭정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경성제국대학의 교정

1. 개요
2. 역사
2.1. 연혁
2.2. 설립 및 운영
2.3. 광복
2.4. 해체 및 재구성
3. 대학 예과
3.1. 입학 시험
4. 학부
4.1. 박사 과정
5. 학과 교과과정 및 이수규정
5.1. 법문학부 법학과
5.1.1. 개설과목
5.1.2. 이수규정
5.2. 법문학부 문학과
5.2.1. 개설과목
5.2.2. 이수규정
5.3. 의학부
5.3.1. 개설과목
5.4. 이공학부
5.4.1. 개설과목
6. 유명 교원
6.1. 조선인 교수
7. 유명 동문

1. 개요

경성제국대학[4][5]은 1922년 발효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1924년 일본 제국 정부에 의하여 경기도 경성부[6]에 세워진 고등교육기관으로, 이는 제국대학령에 근거하여 설립된 9곳의 제국대학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고 학부였다.

광복 뒤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폐교된 뒤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에 인수되었으며, 따라서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9개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에 속한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은 일본이 대륙[7] 지역에 세운 유일한 제국대학으로[8], 식민지 및 피점령지 교육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2. 역사

2.1. 연혁

1922년 2월 4일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1923년 12월 15일 제국대학교사 준공
1924년 5월 12일 제1기 신입생 입학
1924년 6월 12일 예과 개교식
1926년 5월 1일 본과 개설(법문학/의학)
1938년 4월 15일 이공학부 개설
1945년 8월 16일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설립
1945년 9월 8일 미군정 인수
1945년 10월 17일 경성대학으로 개칭
1946년 8월 22일 학제 폐지(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 공포)

2.2. 설립 및 운영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대학 진학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으나 식민지 소재 대학이 한 곳도 없다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주로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들이 이런 불만을 제기했다[9].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식민지 대학 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10]

식민지 대학을 제국대학의 형태로 설립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몇 가지 잡음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칭을 둘러싼 갈등이 있는데, 원래 식민지 대학의 이름은 '조선제국대학'이 될 예정이었다. 앞서의 제국대학들이 도호쿠(東北), 큐슈(九州), 홋카이도(北海道) 등 도시가 아닌, 지역의 이름을 따왔고 총독부 당국이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11], 이렇게 되자 새 대학의 이름이 '조선제국이라는 나라의 대학'으로 들린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나왔다. 그래서 도쿄(東京), 교토(京都)처럼 식민지 제국대학 역시 지역 이름이 아닌 도시 이름인 경성을 따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기존의 경성의학전문학교제국대학으로 승격시킬지의 여부, 설치할 학부의 종류 등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12]

1924년 개교와 함께 예과가 설치되었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학부의 본과가 설치되었다. 이공학부는 1920년대 말의 불황 및 총독부의 무관심 등의 이유로 설치가 무산되었다가, 전쟁 중인 1941년에 들어서야 설치될 수 있었다. 이공학부에 진학할 예과생은 1938년부터 모집하였다.

입시에는 조선인 차별이 암묵적으로 존재하였다.[13] 조선인은 정원의 1/3 가량으로 선발하고, 1/3은 재조선 일본인, 1/3은 내지인으로 선발하는 쿼터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선발 인원뿐만 아니라 입학 전형 자체가 차별적이였다. 뭐 시험과목이 일본어인 것은 당연하니 응시자들도 그러려니 했지만, 조선인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입시과목 선정에다 무엇보다 지원자 전원에게 형사, 순사가 찾아와서 신분조사까지 했다. 동아일보 1924년 3월 13일자 참고. 이 때문에 오히려 조선인 합격생의 수준이 대체로 일본인 합격생의 수준보다 높았다는 회고가 많다.[14]

일본 열도 본토가 아닌 식민지에 처음 생긴 대학으로, 4년 뒤 1928년 또 다른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 타이베이다이호쿠제국대학(臺北帝國大學)의 설립에도 영향을 주었다[15].

2.3. 광복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익일 조선인 교직원[16], 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교문 앞에 붙은 경성제국대학 명판의 '제국'을 지우고 경성대학으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이후 각 전문학교에 근무하던 명망있는 조선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945년 9월 미군은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여 진주하면서 맥아더 포고령을 통해 일본제국조선총독부가 행사하던 모든 정부 권한을 접수하였으며, 미군정청은 업무개시와 동시에 학무국을 두고, 구 경성제대의 행정 사무를 접수하였다.

1945년 9월 10일에는 경성제국대학 명의의 마지막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玆)에 차(此)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17]에 효력을 생함

1945년 10월 16일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

1945년 10월 16일 반포된 법령 제15호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을 서울대학으로 변경하였다. 경성대학이 아니라 서울대학이라고 표현하여 혼동의 여지가 있지만 사실상 이 법령의 취지는 교명에서 ‘제국’을 제외하는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왜냐하면, 당일 시행된 임명사령 제16호[18]를 비롯하여 11월 28일 학무국장의 담화 등등과 1946년 8월 21일 법령 제102호에도 ‘경성대학’이라는 교명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서울대학'으로 해석할 경우, 1946년 '경성대학'을 폐지하고 국립서울대학교에 통합하는 법령과 충돌한다. 폐지 대상인 '경성대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군정하에서는 법령의 해석상의 문제가 있을 경우 영문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영문으로는 서울이든 경성이든 둘 다 Seoul이라 생긴 혼동으로 봐야 한다. 당시 신문에서도 '경성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보도된 기사가 대부분이며, '서울대학'이라고 쓴 기사는 매우 드물다.

1945년 10월 미군정은 경성대학의 총장과 학부장을 임명하여 학부별로 점차 수업을 개시하였다. 이에 앞서, 9월부터 미군정 학무국은 대학교수 희망자의 서류를 접수하여 인선에 들어가 법문학부는 12월에 한국학자 26명이 교수, 조교수로 확정되었다.

1945년 말에는 경성대학 명의로 예과 신입생을 모집하였는데, 경성대학 명의로 입학한 처음이자 마지막 세대이다. 정원식국무총리가 경성대학 예과 46학번이다.

1946년 8월 22일 군정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되면서 경성대학은 폐지되었다.

2.4. 해체 및 재구성

1946년 미군정의 국대안에 따라 경성대학은 해체되고, 서울대학교로 캠퍼스와 기자재들이 이관되었다. 의학과의 윤일선 박사 등 학교에 남은 조선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교수 인력 전원이 일시에 교체되었다. 1974년에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는 캠퍼스의 연속성도 사실상 사라졌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물적 유산으로는 경성제대 시절의 장서가 이관된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방대한 구간서고를 들 수 있다.

서울대학교는 공식적으로는 경성제대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애시당초 국대안 자체가 경성제대와 서울대학교의 연결성을 부정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구 문리대, 즉 인문대, 사회대(경제학부 제외), 자연대를 제외한 각 단과대학은 경성제국대학보다는 서울대 개편시에 병합된 전문학교를 전신으로 본다. 특히 법대는 아예 대한제국 시절의 법관양성소를 기원으로 삼고 있다. 또 다른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국립타이완대학이 일제강점기 대북제국대학의 후신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19] 오히려 경성제대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월북해서 세운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이 학제나 학풍 상으로는 경성제대와 가장 유사하다.[20]

하지만 서울대학교의 입장이 어떻든 간에, 역사적으로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가 경성제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간에서도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대라는 인식은 확고하며, 경성제대 출신 학생들도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원래 경성제대 출신자들은 서울대학교를 모교로 인식하는데 굉장히 부정적이었다. 경성제국대학이 조선 유일의 최고 학부였던 데 비해, 국대안으로 통합된 서울대학교에는 전문학교구제중학교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21] 또한, 서울대학교의 경우 제국대 역사에 든다는 것의 초기 출발이 법학과 의학인데, 의학은 연세대학교와 충돌하는 제중원에서 찾고 있는 다소 무리한 실정이다.[22] 1924년에 세워진 경성제국대학에 관해서는 지금도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만, 일부 단과대는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건너뛰지 않는 경우도 있다.[23]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은 구 한국 법관양성소의 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통합되어 출범하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24]

종합대학으로서 '서울대학교'라는 정체성은 사실상 1974년 관악캠퍼스 조성까지는 굉장히 미약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이런 과도기가 지나고 '서울대학교'라는 한국식 위계질서의 정점이 수립되고, 경성제대 출신자들도 모교를 사실상 서울대학교라고 여겨도 본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종합대학으로서의 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경성제대를 부정하면서도, 조선 유일, 최고학부라는 상징성은 놓치고 싶지 않은 서울대학교의 이런 이중적인 태도는 은근슬쩍 서울대학교의 '개학연도'를 끌어올리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3. 대학 예과

예과 교표.

예과 교사.

당시 일본의 학제는 소학교-중학교(구제)-고등학교(구제)/대학 예과-대학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는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이나 관립 의대에 진학이 가능했다. 대학 예과 역시 졸업하면 대학 학부 진학이 가능하였으나, 정해진 대학 학부에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진학하게 된다는 점이 고등학교와 다르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본토 대학 진학을 억제하고 식민지 조선의 우수한 인재를 식민지 소재 대학인 경성제대에 묶어두기 위해 고등학교 대신 예과제를 채택하였다[25]. 예과는 2년제로 출발하였다.[26] 이 때문에 경성제대 예과의 수준이 그에 상응하는 본토 고등학교의 수준보다 한 수 낮다는 인식이 있었고, 1930년대에 접어들어 대학 교수들의 요구에 의해 대학 예과의 재학연한이 고등학교와 같은 3년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늘어난 예과의 재학연한은 전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1943년에는 다시 2년제로 회귀하였다.

예과는 문과, 이과로 구성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문과는 법학과 진학반, 문학과 진학반으로, 이과는 단일반으로 구성되었는데, 문학과 진학반에서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이 법학과에 진학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예과의 재학연한이 3년제로 늘면서 이와 같은 구분 대신, 학과 진학과 무관하게 외국어(영어, 독일어)로 반을 구분하였다. 30년대 말 이공학부 설치가 결정되면서, 이과도 이공학부 진학반과 의학부 진학반, 2개의 반으로 분리되었다.

예과 건물은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1동 235번지, 청량리역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1966년까지 서울대 의예과 건물로 사용되었다. 1975년 서울동산병원에 매각된 후 1999년 병원이 폐원하면서 상가 건물로 쓰였으며, 2007년부터 한림대 의대가 강의실, 세미나실로 이용하였으나 결국 2015년에 철거되었다.링크[27] 붉은 벽돌과 아치형 입구가 인상적인 예과 본관 건물은 철거 때까지도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3.1. 입학 시험

입시 문제는 오늘날의 수능처럼 신문에 공개되었다. 역사과 문제 일부만 전재하면 아래와 같다.

  • 1925년

문1.(총점 100)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정책에 대해 쓰시오.

2) 동주시대의 미술·공예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藏人所[28]

- 藤原隆家(후지와라노타카이에)

문2.(총점 100)

4) 송대의 유학에 대해 쓰시오.

5) 다음 사항에 대해 아는 대로 쓰시오.

- 鄭和(정화)

- 尼布楚條約(네르친스크 조약)

  • 1930년

(총 100점)

1. 메이지 시대 조약개정 문제의 경과에 대해 쓰시오.

2. 헤이안 시대의 미술과 공예에 대해 쓰시오.

3.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존왕한 일들에 대해 쓰시오.

4. 에도 시대 번주를 뽑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쓰시오.

  • 1931년

(총 100점)

1. 파리강화조약 이후 산동문제의 교섭과 해결 과정에 대해 쓰시오.

2. 지나(중국)의 약도를 그리고, 아래 지명을 표시하시오.

- 낙양, 장안, 건강, 함양, 개봉, 임안, 연경, 무창

3. 명대의 기독교 동진(東進)에 대해 쓰시오.

4. 다음 각 항에 대해 쓰시오.

A. 개원의 치

B. 迦膩色迦 王(카니슈카 왕)

C. 고증학

D. 임칙서

  • 1934년

국사(일본사) 총 100점

1. “건무중흥”에 공을 세우고 근왕한 여러 장수들에 대해 쓰시오.

2. 세계대전에서 우리나라(일본)의 전투경과에 대해 쓰시오.

3. 다음 항목들에 대해 설명하시오.

A. 豊受大神(도요우케 오카미)

B. 臨濟宗(임제종)

C. 本朝通鑑(본조통감)

4. 학부

법문학부는 크게 법학 계통과 문학 계통으로 구분된다. 법문학부라는 단과대학 형태를 갖게 된 것은 각 학문 분야 교수들의 파벌주의를 막고 학부 졸업생이 자기 전공 분야에 편중된 지식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당시에는 도호쿠제국대학에서 최초로 법문학부 형태의 단과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설립 초기 법문학부에 법률, 정치, 문, 사, 철 다섯 학과를 두었으나, 학부 개설 이듬해인 1927년 법률학과와 정치학과를 법학과로 통폐합하여, 결과적으로 법학과,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네 학과가 법문학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법학과는 법률, 정치, 경제 관련 학문을 담당하는 학과로 본토 도쿄제국대학교토제국대학의 법학부 법률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세부전공 없이 단일 학과로 운영되었고 졸업생 모두 법학사 학위를 수여하였으나, 1935년부터 전공이수코스를 제1류(순수법학, 사법학), 제2류(정치학, 공법학), 제3류(경제학)로 구분하여 운영하였다. 이 경우에도 역시 학위는 법학사로 똑같이 나왔다.

문학 계통에 해당하는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는 세부전공을 개설하였다. 세부전공으로는 국어학/국문학(일어학/일문학에 해당), 조선어/조선문학, 지나어/지나문학, 영어/영문학, 국사학(일본사학에 해당), 조선사학, 동양사학, 철학/철학사, 종교학/종교사, 미학/미술사학, 윤리학, 교육학, 중국철학 등이 존재하였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에는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를 문학과로 통폐합하였고, 세부전공으로 사회학을 새로 개설하였다. 이들 학과는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목적으로 언급한 조선학 연구와 만선사관의 확립을 담당한 학과이다.

의학부는 문학과 등과 같은 세부전공은 없었으나, 생리학 등 교실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문학 계통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풍토병, 기생충학 등이 의학부의 주 연구대상이었다. 의학부가 본토에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제대의 타 학부에 비해 의학부는 본토 출신 일본인 입학생이 많은 편이었다.

이공학부는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른 군수산업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세부전공으로 물리, 화학, 전기, 기계, 응용화학, 광산야금, 토목 등이 존재하였다. 타 학부와 달리 교사가 경성부 밖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29]에 설치되었는데, 서울대학교 토목동창회보에 따르면, 해방 당시 공과대학에서 조선인 학생의 구성비는 60여명으로 이는 총 정원 중 1/3에 달하는 수치라고 한다. 또한 1943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이 중 조선인은 14명이고 그중 7명이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사용하다가,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사용하고 있다.

다만, 설립시기가 다소 늦었기 때문인지 실제로 일제강점기동안 당시 조선인의 고등공업교육을 담당하고 일제의 수요 충당에 부응한 것은 1917년에 개교한 조선총독부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30]로 해방 이후에도 국내 공업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고[31]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공과계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재탄생한 뒤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들이 전원 일본으로 돌아가 공석이 되어버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교수진을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들이 책임졌다. 위치는 현재의 동숭동이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본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공학부를 제외한 각 학부들은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캠퍼스에 자리잡았다. 의학부는 바로 옆의 연건동 대한의원[32] 자리에 자리잡았다. 이 캠퍼스가 훗날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이며 대학로의 기원이다.

4.1. 박사 과정

제국대학령 제3조는 제국대학에 대학원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따라서 각 제국대학에는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만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들을 규율하는 대학령은 제3조 제1항에서 "학부에는 연구과를 설치한다."고 규정하고 제2항에서 "수개의 학부를 설치한 대학에 있어서는 연구과 간의 연합협조를 위하여 종합하여 대학원을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구제 관립단과대학에는 연구과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든 제국대학에는 대학원이 있었고 경성제국대학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이에 따라 경성제국대학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두었는데 당시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다[33].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아 박사 과정에 등록해야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 등록 중인 사람을 '연구생'이라 불렀다. 연구생 자격은 대학 졸업자뿐만 아니라 전문학교 졸업자도 쌍방 추천[34]을 받으면 얻을 수 있었다[35]. 다만, 대학 졸업자와 전문학교 졸업자의 연구생 신분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는데 대학 졸업자는 부수(副手)에 임했지만, 전문학교 졸업자는 부수보(副手補)에 임했다.

이렇게 박사 과정에 등록하면, 무보수 연구생으로 셔틀공부를 했는데,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보통 5~7년 가량 소요되었다. 이러한 박사 과정을 통해서 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각 학부마다 매해 5에서 60명 정도를 보였다. 그런데 조선인의 경우에는 각 학부 별로 1~5명 정도가 박사 학위를 받았고 10명이 넘는 해는 드물었다.

참고로, 의학부의 박사 학위 논문 대부분은 현재 한국의사학(醫史學)회에 소장 중이며, 특정 절차를 거쳐 열람할 수 있다. 201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논문들은 학부 레포트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지만, 당시 일본 본토 의학계에서 주목한 논문도 있었다. 오늘날의 잣대가 아닌 당시의 학문 발달 수준의 기준에 볼 때 상당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관련 통계를 찾다보면 1945년에 유독 많은 박사 졸업자를 볼 수 있는데, 이때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해방 박사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일제 패망 이후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편되고 미군정 교육 당국이 학교를 접수했지만, 학교 내에서 중요한 업무를 취급하거나 학교에서 중요 보직을 담당하고 있는 일본인 교직원들은 여전히 출근하면서 조선인 교직원들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11월 5일 대학의 모든 일본인 교직원을 파면하였는데, 이 파면 직전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사람들에게 모두 학위를 내어 줘버렸다. 일본인 교수들이 이제 일본으로 아예 돌아가야 하는 마당에 지도하던 학생들에게 학위나 주고 가자고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당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논문의 형식만 갖추어 제출하면 요식적인 디펜스 토의 과정을 거치는데 내용의 질적 수준과 관계 없이 논문이 바로 통과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의학부의 경우에는 논문 심사에서 탈락한 이들까지 소급해서 학위를 주었기 때문에 조선인 75명을 포함해서 156명에게 박사 학위를 남발했다[36].

이 당시 해방 박사 학위를 받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건국대학교를 설립한 유석창인데, 본인 스스로 자신의 학위는 선물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높게 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한 바도 있다. 실제로 당시 해방박사 학위를 받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박사 학위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해도, 어디서 언제 박사 학위를 받았는지 잘 밝히지 않는 경향이 있다.

5. 학과 교과과정 및 이수규정

1943년 기준. 단 이공학부는 1941년 기준.

5.1. 법문학부 법학과

5.1.1. 개설과목

  • 헌법/행정법1; 총론/행정법2: 각론/
  • 민법1: 총칙/민법2: 물권법/민법3: 채권총론/민법4: 채권각론/민법5: 친족법, 상속법/
  • 상법1: 총칙, 상행위법/상법2: 회사법/상법3: 어음법, 수표법/상법4: 보험법, 해상법/
  • 민사소송법 1: 총칙, 판결수속/민사소송법2: 집행, 집행보전수속/파산법/
  • 형법1: 총론/형법2: 각론/형사소송법/사회법/국제공법1: 평시법/국제공법2: 전시법/국제사법/
  • 법철학/동양법제사/서양법제사/로마법 1:사법/로마법2: 공법/법의학/
  • 정치학/정치학사/정치사/외교사/
  • 재정학/경제원론/경제학사/경제사/화폐금융론1: 화폐론/화폐금융론2: 금융론/
  • 경제정책1: 농업정책/경제정책2: 상공정책/사회정책/통계학

5.1.2. 이수규정

  • 법학과 제1류 이수규정
    • 전공필수 19단위
      • 헌법/민법1~4/상법/민사소송법/형법/형사소송법/법철학/로마법1/경제원론/강독연습 1단위/연습 또는 특강 1단위
    • 선택과목 다음 과목 중 8단위
      • 행정법/민법5/파산법/사회법/국제공법/국제사법/동양법제사/서양법제사/로마법2/법의학/정치학/재정학/화폐금융론1 또는 2/경제정책 1 또는 2/연습 또는 특강 1단위
  • 법학과 제2류 이수규정
    • 전공필수 19단위
      • 헌법/행정법/민법1~3/형법/국제공법/정치학/정치사/외교사/재정학/경제원론/경제정책1 또는 2/사회정책/강독연습 1단위/연습 또는 특강 1단위
    • 선택과목 다음 과목 중 8단위
      • 민법4/민법5/상법/사회법/법철학/동양법제사/서양법제사/로마법/정치학사/화폐금융론1 또는 2/경제정책(단 전공필수로 이수한 것은 제외)/통계학/연습 또는 특수강의 1단위
  • 법학과 제3류 이수규정
    • 전공필수 19단위
      • 헌법/민법1~4/상법1~3/정치학/재정학/경제원론/경제사/화폐금융론1 또는 2/경제정책/사회정책/통계학/강독연습 1단위/연습 또는 특강 1단위
    • 선택과목 다음 과목 중 8단위
      • 행정법/민법5/상법4/형법/사회법/국제공법/국제사법/법철학/동양법제사 또는 서양법제사/정치학사/정치사/외교사/경제학사/화폐금융론(단, 전공필수과목에서 이수한 것은 제외)/연습 또는 특강 1단위

5.2. 법문학부 문학과

5.2.1. 개설과목

  • 일본사학/일본어학/일본문학/조선사학/조선어학/조선문학/중국철학/중국어학/중국문학/동양사학/서양사학/영어학/영문학/철학/철학사/심리학/윤리학/교육학/미학/미술사/고고학/사학개론/지리학/언어학/문학개론/조선어/중국어/동양어/러시아어/희랍어/라틴어

5.2.2. 이수규정

  • 일본사학전공
    • 일본사학 강의 및 연습
    • 조선사학/동양사학/서양사학 각 1단위 이상 포함하여 이수
    • 사학개론/고고학/지리학/문학과에 속한 과목
  • 일본어일본문학전공 이수규정
    • 일본어학 일본문학 강의 및 연습
    • 언어학/문학개론/문학과에 속한 과목
  • 조선사학전공 이수규정
    • 조선사학 강의 및 연습
    • 일본사학/동양사학/서양사학 각 1단위 이상 포함하여 이수
    • 사학개론/고고학/지리학/문학과에 속한 과목
  • 조선어조선문학전공 이수규정
    • 조선어학 조선문학 강의 및 연습
    • 언어학/문학개론/문학과에 속한 과목
    • 담임 교수에게 조선어 학습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는 조선어 3단위를 학습할 것.
  • 중국철학전공 이수규정
    • 중국철학 강의 및 연습
    • 중국문학/중국어/문학과에 속한 과목
  • 중국어중국문학전공 이수규정
    • 중국어 중국문학 강의 및 연습
    • 중국철학/중국어/문학과에 속한 과목
  • 동양사학전공 이수규정
    • 동양사학 강의 및 연습
    • 일본사학/조선사학/서양사학 각 1단위 이상 포함하여 이수
    • 사학개론/고고학/지리학/문학과에 속한 과목
  • 영어영문학전공 이수규정
    • 영어학 영문학 강의 및 연습
    • 영어(전공자용)/희랍어, 라틴어 중 택1/언어학/문학개론/문학과에 속한 과목
  • 철학철학사전공 이수규정
    • 철학 철학사 강의 및 연습
    • 희랍어, 라틴어 중 택1/문학과에 속한 과목
  • 심리학전공 이수규정
    • 심리학 강의 및 연습/심리학 실험연습
    • 생리학/정신병학/문학과에 속한 과목
  • 윤리학전공 이수규정
    • 윤리학 강의 및 연습
    • 문학과에 속한 과목/문학과에 속한 과목 11단위 중 3단위를 별도로 정한 바에 의하여 법학과 과목으로 채울 수 있음.
  • 교육학전공 이수규정
    • 교육학 강의 및 연습/심리학 실험연습
    • 생리학, 정신병학 중 1/문학과에 속한 과목/문학과에 속한 과목 9단위 중 별도로 정한바에 의하여 법학과 과목으로 채울 수 있음.
  • 종교학종교사전공 이수규정
    • 종교학 종교사 강의 및 연습/문학과에 속한 과목
  • 사회학전공 이수규정
    • 사회학 강의 및 연습
    • 문학과에 속한 과목/문학과에 속한 과목 12단위 중 6단위에 한하여 별도로 정한 바에 의하여 법학과 과목으로 채울 수 있음.
  • 미학미술사전공 이수규정
    • 미학 미술사 강의 및 연습
    • 문학과에 속한 과목.

※영문과 학생은 영어를 제외한 독어, 불어 중에서 하나를, 타 전공 학생은 영어, 독어, 불어 중 하나를 택하여 이수해야 한다.

5.3. 의학부

5.3.1. 개설과목

  • 해부학: 계통해부학/조직학/해부학실습/조직학실습 및 현미경사용법/태생학/국소해부학
  • 생리학: 생리학/생리학실습
  • 의화학: 의화학/의화학실습
  • 미생물학: 미생물학/기생충학/미생물학 기생충학 실습/면역학 및 실습
  • 약리학: 약리학(처방학 포함)/약리학 실습
  • 병리학: 병리총론/병리각론/부검시설/병리조직학실습/병리해부실습
  • 위생학예방의학: 위생학 예방의학
  • 법의학: 법의학
  • 내과학: 진단학 및 실습/내과각론 및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외과학: 외과학총론/붕대실습/외과각론 및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외래수술 실습
  • 정형외과학: 정형외과학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산부인과학: 산과학, 부인과학/산부인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산과모형 실습
  • 피부비교기과학: 피부과학/비뇨기과학/피부과, 비뇨기과 임상강의/피부과, 비뇨기과 외래환자 임상강의
  • 안과학: 안과학/안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검안법 및 시기검사법실습
  • 이비인후과학: 이비인후과학/이비인후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이비인후검사법 실습
  • 소아과학: 소아과학/소아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종두실습
  • 신경정신과학: 신경과학, 정신과학/신경과, 정신과 임상강의/외래환자 임상강의
  • 방사선의학: 방사선의학/방사선의학 임상강의
  • 치과학: 치과학 및 임상강의
  • 과외 강의: 의학사/의사법제/사회의학/비교해부학/인류학/유전학/의심리학/특별강의

5.4. 이공학부

5.4.1. 개설과목

  • 공통 개설과목
    • 수학1~2/수학특강/수학연습1~2/수학특강연습/
    • 응용역학/응용역학개론/응용역학연습/응용역학개론연습
    • 응용물리/응용물리학연습1~2/응용열역학1~2/
    • 광물학/지질학/광물학실험/지질학실험/지질실습/
    • 분석화학1~4/분석화학실험1~2/
    • 기술학1~2/화약학 및 실험/화학병기학/건축학개론/조병학개론/공업경제/철학개론/
  • 물리학과 개설과목
    • 물리실험학1~2/역학1~2/물성론 및 열학/전자기학/광학1~2/상대론물질구조학1~2/통계역학/양자론/고체론 및 액체론/핵물리학/항공역학/지질학/기상학/천문학/지구물리학/천체물리학/역학연습1/물리학연습1~2/이론물리학연습/물리학실험1~2/물리학논강/물리학연구/물리학연습
  • 화학과 개설과목
    • 무기화학1~2/무기화학실험/무기화학특강
    • 물리화학개론/물리화학개론실험/물리화학 1~2/물리화학실험/물리화학특강
    • 유기화학1~2/유기화학실험
    • 콜로이드화학/생물화학/콜로이드화학실험/화학특별문제연구 및 논강/화학외국어 연습
  • 토목공학과 개설과목
    • 석공학/철근콘크리트/철도공학1~2/도시철도/교량공학1~2/하해공학1~2/상수도공학/하수도공학/수리학/토목재료/측량학1~2/시공법/도시계획/교량미학/관개배수/도로가로/토목행정법/토목공학개론/토목기계/발전수력/세균학 및 수질시험법/방재공학/토목공학제도/석공학제도/철근콘크리트제도/철도계획/교량계획1~2/하해공학계획1~2/상수도계획/하수도계획/토목재료시험1~3/측량학실습1~2/하해공학실습
  • 기계공학과 개설과목
    • 기계역학/기계공작법/공작기계/실험기계공학/수력학 및 수력기계/수차/펌프/열기관 일반/증기터빈/내연기관/기계설계개요/기계설계1`2/유체역학/내연기관특강/자동차공학/항공기 일반/선박용 기관/철도차량/조중기/소웅기 및 압축기/냉동기 및 냉동법/방적기계/난방 및 환기/원동소설계/기계제도개요/기계제도1~2/기계공작법실습/재료강약실험/기계공학실험1~2/기계공학실습/기계공학논문논강
  • 전기공학과 개설과목
    • 전기자기학/교류이론/전기회로이론/전기계기 및 측정법/방전현상/고전압공학/일반전기공학/전기기계기구1~2/전기기계설계법/전기공학시험법/발전공학/전력전송/전력분배/전등조명 및 전열/전기철도/유선통신/반송통신/전자공학/무선통신1~2/전기재료/음성공학/전기응용공학 및 논강/전기법규/전기공학실험1~3/전기공학연습1~2/전기기계제도/일반전기공학실험
  • 응용화학과 개설과목
    • 응용화학1~5A/응용화학1~5B/화학공업1~2/응용화학실험1~5/응용화학계획제도/응용화학논강
  • 광산야금학과 개설과목
    • 채광학1~2/광산기계학/선광학/전광학/광상학/광산측량학/광산위생학/광산법규/재료운반/야금학개론/야금학/철야금학1~2/야금기계학/합금학/제조야금학1~2/금속조직학/금속재료/채광학실험/선광학실험/광상학실험/광산측량실험/광산실습1~2/야금학실지연습1~2/금속조직학실험/시금학실험1~2/야금학실험1~4/야금학계획 및 제도

6. 유명 교원

  •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0): 왠지 '소창진평'이라는 한국식 음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일본어 및 한국어를 전공한 언어학자. 만요가나이두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역사상 최초로 향가 해석의 시도를 완료한 사람인데, 문제점들이 많이 지적되어 양주동이 크게 뜯어고쳤다. 그리고 또 한국어 사투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1899~1982): 경제학자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강국에게 독일 유학을 주선해주기도 했으며, 1934년 이재유일본 경찰에 의해 쫓기고 있을 때 자신의 관사 다다미 바닥 밑에 은신처를 만들어 숨겨주었다. 이 일로 시카노스케는 교수직을 잃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2~1935):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였으며,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와 교토제대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였고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찬위원회(1922) 및 조선사편수회(1925)에서 편찬위원/편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고대사(주로 신라사)를 연구하여 여러 연구 논저를 내놓았고, 조선에 대하여 큰 애착심을 가져서 자신의 아들 중 하나에게는 김춘추(신라태종 무열왕 맞다!)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하였고 장례식 역시 조선의 전통 장례 방식으로 치룰 정도였다. 하지만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단군에 대해서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며 부정했다.[37]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서도 연대가 일부 앞당겨 졌다고 보았고(초기기록 불신론)[38]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긍정하는 등 일제 시기 식민사학자로서의 한계성이 명확하다. 한편, 이마니시는 당대에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등을 위시로 한 만선사관(滿鮮史觀)론자들과 달리[39], 고구려를 한국사로 보았다.
  • 모리 다메조: 항목 참고
  • 다카하시 토오루: 항목 참고
  • 하나무라 요시키: 항목 참고

6.1. 조선인 교수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거의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대부분 강사나 조수로 근무하였는데 정식으로 교수로 임명된 조선인은 전 기간을 통틀어 단 4명에 불과하고 재임 기간도 매우 짧다[40].

  • 윤일선(尹日善): 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3월 30일 ~ 1929년 4월 18일 재임.
  • [고영순(高永珣): 오사카 의과대학을 나왔다. 1928년 12월 24일 임명되었으나 이틀 만에 사표를 내고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였다. 임명재[41], 심호섭[42]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으며, 해방 후에 윤일선과 함께 '건국의사회'에 참여한 바 있다.
  • 윤태동(尹泰東):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나왔다. 1934년 7월 25일부터 1934년 11월 17일까지 재임하면서 예과에서 독어를 가르쳤다. 나중에 만주국 간도성장 역임.
  • 김종원(金鍾遠): 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이공학부에서 강사로 있다가 1945년 7월 13일자로 정식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당시 유일한 조선인 교수. 해방 후 경성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경성대학이 1946년8월22일 국립서울대학교에 흡수돼 국립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1월 급환으로 별세하였다[43].

7. 유명 동문

  • 고형곤 - 법문학부 철학과(서양철학) 예과 5회(1928년), 1933년 졸업. 서양철학 1세대 연구자이자, 고건 전 총리의 부친.
  • 김원룡 - 법문학부 사학과(동양사) 예과 17회(1940년), 1945년 졸업.
  • 김증한 - 법문학부 법학과, 전 서울대 교수.
  • 모윤숙 - 법문학부 문학과(영문) 선과 2년 수료 (1935년)
  • 민복기 - 법문학부 법학과, 1938년 졸업. 전 대법원장. 사법살인으로 유명하다
  • 박문규 - 법문학부 법학과 예과 2회(1925년), 1930년 졸업.
  • 신석호 - 법문학부 사학과(조선사), 1929년 졸업, 조선사편수회 수사관 역임, 고려대학교성균관대학교 교수, 영남대학교 대학원장, 국사관(현 국사편찬위원회) 관장 역임.
  • 신현확 - 법문학부 법학과(2류) 예과 15회(1938년), 1943년 졸업. 전 국무총리.
  • 유진오 - 법문학부 법학과 예과 1회(1924년), 1929년 졸업. 전 고려대 총장.
  • 이강국 - 법문학부 법학과 예과 2회(1925년), 1930년 졸업.
  • 이임학 - 이공학부 물리학과 예과 16회(1939년), 졸업(1944년).
  • 이효석 - 법문학부 문학과(영문) 예과 2회(1925년), 1930년 졸업.
  • 최용달 - 법문학부 법학과 예과 2회(1925년), 1930년 졸업. 전 보성전문 교수, 북한 헌법 기초자.
  • 현석호 - 법문학부 법학과, 전 내무부, 국방부 장관, 전 국회의원.
  • 현승종 - 법문학부 법학과, 전 국무총리, 전 성균관대 총장.
  • 홍진기 - 법문학부 법학과(1류) 예과 11회(1934년), 1940년 졸업. 前 중앙일보 회장, 이건희의 장인.
  • 황산덕 - 법문학부 법학과, 전 법무부,문교부 장관, 전 서울대, 성균관대 교수.
  • 홍익표 - 법문학부 법학과
  • 아무로 레이 - 파일럿부 모빌슈트과 항목 참고
  • 마에다 토시카즈 - 초대 주한대사
  • 유홍렬 - 법문학과 문학과(사학) 1935년 졸업, 서울대 교수


  1. [1] 책 '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이충우·최종고/푸른사상/2013)에서 그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휘장의 글자는 大(대)와 學(학)이다. 흔히 위키피디아에서 인용된, 3장의 잎사귀 안에 宀(면)과 務(무)자가 쓰여진 것을 교표로 소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런 오류가 생긴 연원을 추적한 결과, 경성제대 예과 교표를 보고 여기에 전서체로 쓰인 大(대)를 宀(면)으로, 豫(예)를 務(무)로 오인하여 어떤 위키피디아 기여자가 이를 svg 파일로 제작하여 올린 것에서 유래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 다른 제국대학과 사립대학 교표를 보더라도 모두 전서체로 大學이라 쓰여 있고 주변부 문양만 다르다. 예과 교표에는 學(학) 대신에 豫(예)로 쓰여 있다.
  2. [2] 해방 직후 조선인 교직원들에 의해 구성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에 의해 간판의 '제국'을 가렸지만 공식적인 행정 절차는 아니었으며 공식적인 졸업장에도 경성제국대학 명의로 나왔다.
  3. [3] 법령에는 '서울대학'으로 표기하였지만 사실상 '경성대학'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 상술되어 있다.
  4. [4] 京城帝國大學(けいじょうていこくだいがく/けいじやうていこくだいがく(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의한 표기. 일제강점기에는 지금과 가나 표기법이 달랐다.)
  5. [5] 일본어 발음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게이조 제국대학"이다.
  6. [6] 京城(けいじょう/けいじやう), 현재의 서울특별시이다.
  7. [7] 타이완 섬을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을 말한다.
  8. [8] 이 때문에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면서 경성제대는 대륙 유일의 제국대학이라는 점에서 내지와 외지의 가교의 역할을 자임했으며, 그래서 경성제대에서 만주학이나 몽골학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고 한다. 다만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9. [9] 껄끄러운 사실이지만 당시의 조선인들은 대학은 커녕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도 드물었으니...
  10. [10] 종전에는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정준영 등의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 이전부터 독자적으로 조선에서의 대학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의 최고학부인 '제국대학'을 식민지에 이식하기로 결정한 데 있어서는 다소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르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대학 설립의 주된 원인이라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앞에서 서술한 대로 조선 이주 일본인들의 불만이 설립 이유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일본인만의 학교로 구상했다.
  11. [11] 현재도 일본은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부른다.
  12. [12] 일본의 국립대학은 의학전문학교를 바탕으로 대학으로 개편한 사례가 많다.
  13. [13] 이 글을 보면 경성제대 설립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다.
  14. [14] 당시 일본인 합격자들은 큐슈지역 출신이 많았다.
  15. [15] 지금의 국립타이완대학이다.
  16. [16] 해방 당시 경성제국대학에 근무하던 전임교원은 김종원 1인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공학부 강사였던 김종원이 패망 직전인 7월13일 강사에서 교수로 승진 임명(조선총독부관보5544호)되고 하계 방학 중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비전임 교원인 강사 중에는 조선인들이 약간명 있었으며, 조수나 연구생들 중에도 조선인들이 상당수 있었다. 직원 중에서는 중상위직은 일본인들이 담당했지만 말단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17. [17] 야반은 본래 삼경(三更), 즉 자시(子時)로 밤 11시~1시를 가리키며 그 가운데가 자정(子正)이다. 여기서는 10월16일 24시, 즉 10월17일 0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8. [18]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임명사령 제16호 좌기(左記) 각인(各人)을 경성대학 의학부 별기(別記) 관직에 임명하고 기(其) 직권행사를 명함"
  19. [19] 타이완대학 홈페이지에서는 제국대학 당시 총장까지 소개하고 있다.
  20. [20] 대표적인 예로, 1946년 경성제국대학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면서 일문과를 폐지하고, 90년대 중반까지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최근 인문대학에서 아시아언어문명학부를 개설하고 이 학부에서 담당하는 것 중 하나로 일본학이 있다. 중어중문학과는 원래 있었으니까 중어중문 이외의 여러 아시아권을 묶어 놓은 거라고 보면 될 듯 하다.
  21. [21] 실제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들이 주류였던 문리과대학에서는 서울대학교 초창기 경성사범학교에서 비롯된 사범대학을 폐지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22. [22] 제국대 설립당시 포함되려다 놔둔 경성의학전문학교도 해방이후 다른 단과대와 같이 서울대에 포함된 점만 보더라도 스페인 독감을 당한지 몇 년 안 되는 상황에서 의료체계 확충을 위한 규모 불리기. 즉, 통합도 없었다는 점에서 출신자 중에서도 제국대학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그러한 역사를 부정할 가능성이 높다.
  23. [23] 이는 각 단과대에서 인정하고 있는 전신격의 학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로, 서울대학교 자체가 미군정의 국대안으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한 서울의 여러 전문학교를 합쳐놓았기 때문이다.
  24. [24] 이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는데, 학교 기물 일부와 시설이 박살나는 사고를 겪었다. 국대안 파동 당시의 좌우익, 전문학교-학부 간 충돌은 단순한 마찰 수준이 아닌, 테러 수준이었다. 증언을 들어보면 시설은 꽤나 좋았던듯하다.
  25. [25] 반면 대만의 경우, 구제고등학교가 존재하였는데 앞서의 문제가 그대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대북제대에도 예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참고로 대북제대가 4년 더 늦게 개교되었다.
  26. [26] 이는 3년제인 본토 구제고등학교와는 다른 것이다.
  27. [27]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청량한 느낌을 줬다는 교사 뒷편의 소나무숲은 아파트 단지로, 정문 자리는 치과, 안과, 부동산, 비만클리닉, 고시학원 등이 밀집한 복합상가로, 운동장 자리는 세무서로 변모했다.
  28. [28] 일본의 옛 관청 이름
  29. [29]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그 당시에는 경성 밖은 완전한 농촌이므로 교통에 애로사항이 있었고 그 때문에 경춘선 개통 당시 경성제대 이공학부 앞을 지나가도록 역U자 모양으로 휘어가게 노선을 잡았다. 구 경춘선 노선이 성북역에서 바로 화랑대 방면으로 가지 않고 신공덕역으로 우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30. [30] 본래는 1906년 '공업전습소'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었으나 설립 초기에는 일본의 직공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여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다고 한다.
  31. [31] 이들이 단순 기술자인지 아니면 전문적인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전문적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는 논자들은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들은 일본계 공장에 관리자로 취업하고 조선총독부 기수(技手, 정식명칭은 판임관(判任官)이라 하며 관료 중 말단을 형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기술고시 합격하여 부임한 5급 공무원 수준) 등으로 진출한 것으로 봤을때 무조건 단순 기술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단순 기술자로 보는 논자들은, 당시 일본이 실업적 공 교육과 학문적 공 교육을 아주 엄밀히 구분하고 있어 공업전문학교에서는 실업 교육을 바탕으로 하고, 대학에서는 학문적인 공학 교육을 행했으므로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들이 실무적 측면에는 어느 정도 밝을지 몰라도 기술적 통찰력은 크게 부족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성고공을 졸업하고 바로 창업을 하거나 건축 사무실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공장과 같은 산업체나 기수와 같은 기술관으로 나가서 별도의 기술 수련을 받는 식이었다. 실제로 경성고공 출신의 근대 건축가들 모두가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건축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토목회사나 조선총독부의 영선과 말단에서 구르면서 경력을 상당 부분 쌓은 다음에 자신의 사무실을 내었다. 이 논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인적자본 축적과 관련해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32. [32]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총독부의원, 1926년에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병원으로 바뀌었다.
  33. [33] 유럽, 특히 독일의 영향으로 보인다. 독일의 경우 유럽연합의 볼로냐 프로젝트에 따라 EU가맹국가와 대학학제를 통일하기 이전에는 9년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3~4년 연한의 학부를 졸업한 뒤 마기스터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대학원 박사학위과정으로 진학하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독일의 학제를 모방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 석사학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참고로 마기스터학위 자체가 영미에서는 석사학위에 상당하는 학위로 취급되었다.
  34. [34] 졸업한 전문학교의 교수와 입학할 제국대학의 교수
  35. [35] 그런데 당시 조선 내에서는 관립 전문학교와 제국대학 교수진 간에 인적 이동이 잦았고, 학교들도 같은 동네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가 상당히 강했다. 덕분에 관립 전문학교 출신이라면 경성제국대학 박사 과정에 등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36. [36] 의학부가 유독 학위 남발이 심했는데, 가장 심한 케이스는 연구생으로 들어온 지 10년이 넘도록 논문을 쓰지 못해서 이름만 걸어 놓고 개업의로 일하고 있던 사람한테도 지도 교수가 불러다 놓고 갈궈서 보고서 수준의 논문을 급조하게 한 뒤 박사 학위를 준 점이다.
  37. [37] 그러나 이는 현재에도 민족주의 등 정치적 요소를 모두 배제하고 순수 학술적으로는 부정되는게 중론이다.
  38. [38] 현재에도 거의 정설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긍정론은 이미 학계에선 여러차례 논파된 논리다. 애당초 중국 등 다른나라 사서와 우리나라 금석문들과 전혀 교차검증이 안되는데다가 삼국사기는 삼국통일 직후에 지어진 일본서기보다도 400년 가까이나 뒷시대에 지은 기록인데다가 사건들 자체도 그러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연대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물론 일본서기도 자국 역사에 대해서는 왜곡이 상당히 심한건 사실이지만 삼국통일 직후의 저술인만큼 삼국시대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사료다.
  39. [39] 이들은 고구려조선사에서 분리시켜 만주사로 분류하였다.
  40. [40] 조선총독부관보와 경성제국대학일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일람에는 본적지도 나와 있어 창씨개명을 했어도 조선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음.
  41. [41]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
  42. [42]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43. [43] 제자였던 장세헌 서울대 명예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지질답사를 갔다가 식중독에 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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