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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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부터 7세기경까지 존속한 고대 국가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한국의 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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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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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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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고대국가의 비교

고려와 조선의 비교

고려 | 高麗

의장기[1]

국새


공민왕 23년(1374년) 고려 영토
,각 시대의 강역은 아래 역사 단락 참고,

918년 7월 25일 ~ 1392년 8월 5일
(474년 11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태봉

조선

위치

한반도 대부분[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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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태조 고려 건국
936년 후삼국 통일
993년 ~ 1019년 여요전쟁
1108년 동북 9성 축조
1170년 ~ 1270년 무신정권
1231년 ~ 1259년 여몽전쟁
1232년 ~ 1270년 강화도 천도
1270년 ~ 1351년 간섭기
1356년 쌍성총관부 탈환
1359년 ~ 1362년 홍건적의 침입
1388년 위화도 회군
1392년 왕조 멸망

}}}

수도

철원 ,(918 - 919),[3]
개경 ,(919 - 1232, 1270 - 1392),[4]
강도 ,(1232 - 1270),[5]
서경 ,(921 - 1136),[6]

종족

고려인[7]

언어

고려어

문자

한자, 구결

국교

불교[8]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군정(1170~1270)

국가원수

대왕(大王)(천자)[9]
대왕(大王)(제후)[10]

국성

개성 왕씨 (開城 王氏)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1. 개요
2. 국호
5. 행정
5.1. 중앙 행정
5.2. 지방 행정
5.3. 형벌 제도
6. 군사
6.1. 초기
6.2. 과도기
6.3. 전기
6.3.1. 중앙군
6.3.2. 지방군
6.4. 후기
6.5. 해군
6.6. 병력 동원력
6.7. 전쟁 참전 목록
7. 경제
9. 외교
10. 고려는 천자국인가?
10.1. 개요
10.2. 역사기록
10.2.1. 금석문
10.2.2. 서적
10.2.2.1. 외국
10.2.2.1.1. 중국
10.2.2.1.2. 일본
10.2.2.2. 한국
10.2.2.2.1. 고려사
10.2.2.2.2. 동국이상국집
10.2.2.2.3. 동인지문사륙
10.2.2.2.4. 동문선
10.2.2.2.5. 보한집
10.2.2.2.6. 신증동국여지승람
10.2.2.2.7. 제왕운기
10.2.2.2.8. 조선왕조실록
10.2.2.2.9. 평거란송
10.2.3. 기타
11. 평가
11.1. 최초의 자력 통일
11.2. 단일국가관 정착
11.3. 고구려 계승
11.4. 무장의 나라
11.5. 한국사 발전
11.6. 한민족 왕조 비교
11.6.1. 이전 국가와의 비교
11.6.2. 조선과의 비교
13. 고려사 연구의 난관
14.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
15. 같이보기
15.1. 정치
15.2. 행정
15.3. 군사
15.4. 경제
15.5. 문화
15.6. 건축
15.7. 고려를 다룬 사서
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5.9. 기타
16. 둘러보기

1. 개요

고려(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의 중세 시절 동안 한반도 지역에 위치했던 전제군주정 국가이다.

통일신라의 분열 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936년에 통일하였고, 이후 약 474년 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여 1392년까지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였다.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막아내며 동아시아에서 나름 위세를 뽐냈으나, 중기 이후 내부적으론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금나라(여진족)의 부흥에 요와 북송이 차례로 털리고 금이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질서의 사대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11] 이후 몽골제국과 30년간의 처절한 항쟁 끝에 결국 항복하여 간섭기엔 심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된다.[12]

다만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 수십여개 국들이 몽골 제국에 쓸려나가는 동안, 고려는 끈질긴 저항과[13] 적절한 외교술로[14] 나라 자체가 멸망하진 않고, 이후 몽골의 부마국으로 존속하다 고려 후기 원이 쇠퇴하자 외교적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15]

2. 국호

언어별 명칭

한국어

고려(高麗)[16], 고려 왕조(高麗王朝)

중국어

高麗[17]/高麗王朝(정체), 高丽 /王氏高丽 (간체)

일본어

[ruby(高麗,ruby=こうらい)](고라이), [ruby(高麗,ruby=こま)](고마)[18] )

베트남어

Cao Ly

몽골어

Солонгос[19], Kuryo[20]

러시아어

Корё

영어

Goryeo, Koryŏ, Korea

국호는 고(구)려의 국호를 그대로 이었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것.[21]

고구려의 국호는 초기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가지로 불렸는데 장수왕 대부터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식 역사서가 편찬될 만큼 한문학이 발달된 시기라 후연, 후당, 후조 같이 자국을 고려(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후고려(後高麗)"라고 표현한 기록이 종종 발견된다.[22]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후라는 앞글자는 건국한 땅의 옛국가에서 따온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 없는 표현.

현대에 고구려를 당대에 널리 사용되던 고려 대신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역시 개국 당시의 국호는 고려였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긴 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라고 호칭된다. 때문에 한국의 외국 이름인 'C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고려시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왕사

  자세한 내용은 고려/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고려/역대 왕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행정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은 계급 참조. 고려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별되고, 다시 양인을 왕족 - 귀족,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하급 장교), 양인(백정, 양수척, 향 소 부곡민)으로 3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천인(공노비, 사노비)과 더불어 4계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신량역천[양천제(良賤制)의 신분제하에서 양인신분을 갖지만, 그 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사회계층]이었던 향 / 소 / 부곡은 구분이 엄격하였으나 신분 상승(특히, 향 / 소 / 부곡의 현 승격에 따른 공동 신분 상승)은 가능했다.

5.1. 중앙 행정

고려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당의 3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23] 이에 태봉의 내의성, 내봉성, 광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제도를 결합하였다.

  • 내의성 → 내사문하성 → 중서문하성이되었으며,
  • 내봉성 → 상서성으로,
  • 광평성 → 어사도성 → 상서성으로 이어졌다.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중서문하성 소속,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상서성 소속,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중서문하성 소속 재신 (5재, 8인)
    • 문하시중 - 이상 종1품, 수상(총재), 실질적인 최고 관직
    •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아상(이재) / 정2품
    • 참지정사 - 3재
    • 정당문학 - 4재
    • 지문하성사 - 5재 / 종2품
  • 중추원 소속 추신 (6추, 8인 )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 충렬왕 때 추가

이상 5재 6추 16명을 양부 재상이라 부르며 이들이 고려 재추회의 (재상회의)에서 국정을, 도병마사 (후기에는 중추원)에서 군정을 주도하였다.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 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간관, 성랑)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 이하 지문하성사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정3품 6부 상서를 추신(추밀)들이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재추에 문벌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한 관료재신들이 있었으며 또한 6부 판서를 모두 재신이 겸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실제로는 왕권이 강했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상서성에는 상서령(尙書令: 종1품) 1명,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 종2품) 1명,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명,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종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정6품) 각 1명, 도사(都事: 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기관(記官) 20명, 산사(算士) 1명, 직성(直省) 2명이 있었다.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추원(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24]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 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공민왕 5년(1356년) 반원 자주 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하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 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 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 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5.2. 지방 행정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고려사』 권56, 지제10, 지리(地理)1 서문

12군의 위치.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州가 붙은 도시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 (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문종대에는 서울특별시 역시 남경으로 승격해 삼경의 한 축을 이루었다. 다만 서경의 지위는 동경, 남경과 같은 '부수도'가 아닌 개경에 버금가는 '제 2의 수도', 혹은 '또 다른 수도'였다. 원나라의 대도-상도의 이중 수도 시스템에 비슷했다.[25] 하지만 1136년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그저 그런 '부수도' 지위로 격하된다.[26]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27], 교주[28], 서해[29]이며 양계는 북계[30]와 동계[31]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32]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해 수도로서의 서경을 존중하였지만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을 설치했다. 그러나 동경이 잦은 반란으로 강등되어 실제로는 그대로 3경 체제였다.

그렇지만 남경으로 지정되었다 하더라도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한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은 이때까지는 어디까지나 개경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600년 전통의 대도시[33]가 될 줄은 이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서경, 남경, 동경은 각각 삼국시대 삼국의 수도였던 곳과 대략 일치한다[34]. 애초에 동·서경은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지정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남경은 백제와 무관하게 터가 좋아 나중에 지정한 것이지만... 어차피 서울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던 건 개로왕 때까지만이었으니 백제를 고려해서 현재의 서울 일대를 남경으로 지정할 리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의 행정 구역 밖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고려 시대 남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초기에 수도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 지었다가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이남으로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 보통 풍납토성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 일대로 보고, 하북 위례성은 유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도봉구에 있었다는 추정이 있다. 이 추정이 맞다고 치면 위례성 일대가 현재의 서울로 편입된 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남경 = 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 곤란하고 단지 현재의 서울특별시 일대가 옛날부터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백제 때 수도가 있었고 고려 때 부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고려사 지리지 남경 부분에 백제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대충 남경 부근에 백제의 옛 수도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 것으로 보인다. 추가적으로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고려가 삼경 중에서 특별히 서경을 우대했지만 개경-서경 사이에는 또 선을 그었다는 사실이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내세워 삼국을 모두 계승하였지만 개중에서도 고구려를 더 특별 취급을 해주었고, 그럼에도 본인들은 또한 삼한일통에 기반한 초월적인 정체성을 내세우며 이전의 고구려와 또 미묘하게 차별화를 시도했다는 점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35] 사실 애초에 고려 왕실이 노린 바일 수도 있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신라가 고려보다 엄청나게 중앙 집권 체제가 강했던 건 아니었고 한국사에서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게 이루어졌던 나라는 오로지 조선뿐이었다. 그 이전 국가들은 시대적, 지리적 한계상[36] 재지 세력들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연맹왕국 단계를 넘어서도 봉건제적 요소가 꽤 남아있었다. 이건 철저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 집권 체제의 선두국이었던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이상할 건 없다. 물론 그 중국 또한 각 왕조의 말기에 가면 통제를 잃고 지방에서 반란 터지고 난리 나는 건 똑같았다. 조선의 경우도 몽골군의 침략과 고려말의 대혼란으로 한반도 지방 세력들의 사회 공동체가 와해되고 기반이 완전히 박살난 뒤였기에 중앙 집권 체제가 수월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37]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 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다.[38]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39]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 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시기가 매우 짧아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려 초기의 행정 구역. 성종 때의 10도 구역.

고려 5도 양계천리장성

고려 후기의 행정 구역.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 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동계의 영동 지방과 교주도가 '교주강릉도'로 통합되고, 서해도의 상당 부분과 양광도의 남경(한양), 양주, 부평, 인주 등 서북부 지역이 경기에 편입됐다. 이로써 이어지는 조선8도와 유사해졌다.

5.3. 형벌 제도

고려사 '혹리열전'의 서문을 보면 '고려는 나라를 관대하게 통치해 참혹한 형벌이 없었으나, 변란이 잦아진 이후로 일 처리에 밝은 관리를 임용하면서 잔혹(殘酷)한 풍조가 비로소 일어났다.'라고 밝히고 있고, 또 고려사 권 84, 지제 38, 형법(刑法)1의 서문을 보면 고려왕조 5백년 동안의 형법 제도에 '그러나 그 폐혜를 살펴 보면, 법망을 제대로 펴지 못해 형벌이 느슨하고 사면이 잦은 까닭으로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법망을 빠져 나와 제멋대로 행동해도 이를 금지할 도리가 없었으니,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폐해가 극심해졌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어서 고려의 형벌제도가 고려왕조 5백 년 기간 내내 매우 너그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종실록 중종 13년(1518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권벌이라는 신료가 '또 전조(前朝)에서는 가법(家法)이 아름답지 못하여 동성(同姓)과 결혼하여 기강(紀綱)이 없었지만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취할 만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해 고려왕조가 형법과 사형에서 너그럽고 훌륭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고려 인종 당시에 1개월간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문화 제도들을 설명한 책인 고려도경을 쓴 송나라 사신 서긍도 '고려도경' 제16권 관부(官府) 영어(囹圄)편에서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 대에서 열 대까지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라고 말해 우리나라를 오랑캐라고 대놓고 비하하는 짓을 했어도 고려가 형법과 사형 집행에서 매우 너그러운 사실은 분명히 인정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서 고려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결박하여 앉힌 다음에 등을 계속 세게 눌러 가슴과 넓적 다리가 계속 닿게 해서 피부가 터진 다음에야 그만둔다.'라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고려사에 적힌 형법의 종류에서 이런 형법은 없었고, 또 서긍이 자신의 책에서 우리나라를 대놓고 '오랑캐'로 비하하는 것을 모두 감안하면 이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극에서도 흔히 나오는 주뢰, 압슬, 낙형 같은 조선시대에 비로소 나왔던 혹형이 나오는데 이 역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려사 형법지 '형장의 규격' 부분을 보면 고려시대 고문의 방법은 등에 때리는 곤장과 엉덩이에 때리는 곤장, 또 얇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는 태형, 이 3가지밖에 없는 것으로 나오고, 압슬의 경우 두산백과에서는 조선시대 때 시행된 고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흔히 단근질로 이야기되는 낙형의 경우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낙형 편을 보면 조선시대때 시행된 고문으로 나올 뿐이다. 고려사 지의 '사형의 두 종류' 편을 보면 교수형과 참형밖에 없다고 나온다.

6. 군사

6.1. 초기

고려는 지방의 무인 출신 호족들이 건국 주체였기 때문인지 초기엔 상무(尙武)적 기질이 강했다. 그러나 호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과 제도를 신설하지 않는 등 건국 초기부터 무신들의 지위를 일부러 낮추었다. 절도사 출신인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한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듯.[40]

지역 호족들의 권력은 매우 강했는데, 중앙정부가 사병들을 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초기 고려군 편제는 확실한 형태가 잡혀 있지 않았다. 일리천 전투 당시 고려군 편제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 고려 태조 소속 국왕군 + 고려호족 소속 사병[41] + 친고려성향호족 소속 사병[42]을 합쳐 약 75,000명이었고 중립 성향 호족 사병이 15,000명이었다. 즉 고려왕실 입장에선 왕실에 소속된 호족과 친고려 성향을 가진 호족들을 계속 달래야 되는 입장인데다가 중립을 지키던 호족들까지 신경써야했다. 여기에다 복속시킨 이민족 부대가 약 10,000 명, 후백제 군대가 최소 70,000 명 이상인걸 감안하면 고려 왕실 입장에선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서 및 금석문에 나타나는 직위는 마군장군(馬軍將軍)과 대장군(大將軍), 우장군, 장군, 대장, 내사제군사, 군부서사, 호기위 등이 있다. 나오는 편제론 국왕 친위대인 내군, 북벌 군단인 개정군, 일리천 전투 당시의 좌강 - 중군 - 우강 삼군 체제, 보천군, 우천군 등 다섯 천 자 돌림 부대가 있었다.

6.2. 과도기

왕실 vs 호족은 잠시 휴전했는데, 거란의 고려 침공 계획이 고려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제3대 국왕 정종은 300,000 대군을 조직해 광군이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각 지방의 호족 사병들로 채워져 예비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실제 전투보단 노역에 투입된 것이다. 이는 느슨했지만 어쨌든 호족들을 묶어낸 것으로 의의가 있다.

정종 및 4대 광종 대에 엄청난 정쟁이 터졌고, 호족들은 큰 피해를 입는다. 6대 성종 대엔 드디어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호족 사병들을 통솔하기 위해 12주목 절도사 군단을 만들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북 황주와 남 양주에 좌우신책군을 만들고 각 지역의 대도시에 절도사를 파견해 각 군단을 맡겼다.

이렇게 점차 군권이 통일되다가 성종이 2군 6위 및 주진군, 주현군을 계획하였고, 7대 목종이 6위를, 8대 현종이 2군을 만들어 중앙군을 완성시키고 목종이 절도사 부분 폐지, 현종이 완전 폐지함으로써 지방군 체제까지 완성시키자 드디어 고려 군 편제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6.3. 전기

고려 전성기 때의 군대 체제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기록이 많고 체제가 잘 잡혀있기 때문에 보통 고려군 편제를 논할 땐 전기 체제를 기준으로 한다.

6.3.1. 중앙군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二軍六尉)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별도로 조직한 특수부대가 있었다. 군인은 보병과 기마병이 주종을 이루었다. 보병은 기본적으로 방패와 칼, 활을 갖추었고, 기병은 칼과 창을 갖추었다. 이러한 무기는 전근대 전투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했으므로 특별하지 않다.[43]

고려의 중앙군은 국왕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방위 부대인 6위로 나누어 진다:

2군은 응양군(鷹揚軍)용호군(龍虎軍)이었는데 국왕의 직할 친위 부대였으며 6위보다 서열이 높았다. 또한 2군 내에서도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서열이 높았다. 응양군은 1령, 용호군은 2령이다.

6위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 여섯 개의 부대를 일컫는 것으로 평시에는 수도인 개경의 방위를 담당했으며 전시에는 3군[44] 혹은 5군[45]으로 재편되어 야전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여몽전쟁 당시 동선역 전투에서 몽골군을 야전에서 격파한 주인공이 고려의 3군이다.

6위 중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46]는 주력 전투부대로 모두 합쳐 32령[47]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6위 전체 병력의 약 76%를 차지하였다. 금오위(金吾衛)는 개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부대로 7령으로 구성되었고 천우위(千牛衛)는 황실의 의장, 시종 등을 맡아보는 부대로 상령(常領) 1령과 해령(海領) 1령으로 편성되었다. 마지막으로 감문위(監門衛)는 도성의 성문을 경비하는 부대로 예하에 1령만 편성되었다.

상비군이라 할 수 있는 2군 6위의 총 군사 수는 44령으로 44,000 명이었다.

전시 상황에선 6위 체제가 아닌 5군 편제로 바꾸어 전투에 임했다. 5군은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전군(前軍), 후군(後軍)으로, 임시 편제로 전후 다시 원 소속 부대로 돌아갔다. 5군 편제는 천자는 6군, 제후는 3군 편제를 쓴다는 전통적 편제를 독자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문벌귀족이 가장 강성했던 의종 대에 문관들의 견제로 3군으로 축소된다. 허나 무신정권이 시작되며 다시 5군으로 돌아오지만 3군과 혼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무신 정변을 일으킨 군사 집단이 이 중에서도 국왕 직할 친위인 2군이었다. 군인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군반씨족설, 부병제설, 절충설 등이 나오고있다.[출처]

2군과 6위의 직렬은 동일했다. 모든 부대가 동일한 직함을 사용했으며 소속 부대로 직함간 상하를 구분했다. 가령 같은 상장군이라도 좌우위 상장군 > 금오위 상장군인 것. 2군의 직렬엔 추가로 근장, 친종을 붙여 2군 소속임을 확실히 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직렬에 섭직, 가직을 추가해 격차를 늘렸다. 그래서 형식상 9 직위가 있지만 실제론 더 많은 직위가 있었다. 검교직이 있어 명예직으로도 수여했다.[49]

2군 직함은:

  • 근장상장군(近仗上將軍) 정3품
  • 근장대장군(近仗大將軍) 종3품
  • 친종장군(親從將軍) 정4품
  • 근장중랑장(近仗中郞將) 정5품
  • 근장낭장(近仗郞將) 정6품
  • 근장별장(近仗別將) 정7품
  • 근장산원(近仗散員) 정8품
  • 근장위(近仗尉) 정9품
  • 대정(隊正) 무품

6위 직렬은:

  • 상장군(上將軍) 정3품
  • 대장군(大將軍) 종3품
  • 장군(將軍) 정4품
  • 중랑장(中郞將) 정5품
  • 낭장(郞將) 정6품
  • 별장(別將) 정7품
  • 산원(散員) 정8품
  • 위(尉) 정9품
  • 대정(隊正) 무품

6위엔 추가로 비전투인원인 행정업무 처리 담당자들이 있었다. 이들도 무반 대우를 받았다.

  • 장사(長史) 종6품
  • 녹사(錄事) 정8품[50]
  • 사(史) 무품
  • 기관(記官) 무품

고려는 총 8명의 상장군과 8명의 대장군이 있었다. 16명의 상, 대장군은 모여 군부를 구성했는데, 이 것을 중방(重房)이라 불렀다. 중방회의의 의장은 반주(班主)란 직함을 따로 받았으며 응양군 상장군이 역임했다.

고려의 태자 또한 호위대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문종 대에 상정된 것이다. 8부(府)로 구성되있었다.

  • 시위상장군(侍尉上將軍)
  • 시위대장군(侍尉大將軍)
  • 각 부의 솔(率)
  • 각 부의 부솔(副率)

6.3.2. 지방군

지방군은 5도 지역의 군대는 주현군(州縣軍), 양계 지역(북계와 동계)의 군대는 주진군(州鎭軍)으로 분리 운영되었다. 양계 지역은 북쪽 지방의 북계와 동계로써, 여진족이나 거란족(요)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51]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주였던 데 반해, 주진군은 군역이 당연히 주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주현군과 주진군은 모두 고려 초기 호족들의 사병이었던 광군(光軍)이 중앙집권화가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국가의 상비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고려군 편제에 관한 기록은 미비한 편이라 지방군의 편제는 깊이 알기는 어렵다. 서경군을 예시로 보자면 서경엔 좌영과 우영 두 부대가 있었고, 그 밑으로 감군(監軍)이 있었다. 감군 밑엔 또 맹군(猛軍)과 해군(海軍)이 있었다고 한다.

6.4. 후기

그러나 무신정변 이후 전기 고려의 군사체제는 퇴색되고, 도방, 삼별초 등의 사병 집단이 생겨나 이들이 실질적인 정규군의 역할을 했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는 충용위를 설치해 국왕친위대를 담당했다. 총 4위였고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위장(尉長), 대장(隊長) 직이 있었다. 중앙군 및 지방군으론 정예군인 신흥 무인들의 사병과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을 주축으로 운영됐다.

공양왕 대에는 유명무실한 2군6위를 8위로 합쳤다.

6.5. 해군

거함 거포(?)에 심취해서 고려의 대포와 배는 대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수 있다"고 평가했으며, 일본은 몽골군을 격퇴한 뒤 설욕을 위해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려를 침공하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배로는 상륙하기도 전에 고려 해군에 다 박살날 처지라 포기했다고 한다. 관련 블로그 그러나 이 말이 무색할 정도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선 심각한 약세를 보였다. 그러나 말기의 고려 수군은 유명무실화 된 경향도 큰 편이었다. 일본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당시에는 고려 수군이 아직 건재한 편이었다. 과거 주적이었던 여진족 경우만 해도 기마민족이라는 타이틀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고려 시대에 여진족들은 해적질도 심했고 이 때문에 여진정벌 당시에도 고려는 수군을 이용하여 양방향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송에서도 이 여진족에 대한 평가 중 하나가 물에 들어가면 수달 같다고 평가를 내렸을 정도로 수군이 뛰어났다.[52] 그리고 여몽항쟁 때는 수운을 이용하여 세금을 거둬들이고 반대로 빼앗던 삼별초 덕분에 수군이 다시 활약(?)하기도 했다.

6.6. 병력 동원력

고려의 병력 동원력은 전근대 한반도 왕조로서는 이례적으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사서에도 고려가 외침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여러 차례 동원한 사례가 진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려의 군제와 동원체제는 병력 동원에 꽤나 효율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해군
    • 정종 시기에 예성강의 함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 삼별초의 난 시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며 징발한 함선은 1천여척이나 되었다. 정부군이 탐라정벌을 위해 동원한 함선은 160척이다.
    • 원나라의 일본원정의 시기에 고려수군은 함선 900척[58]을 동원하였다. 이 많은 함선을 고작 4개월 동안 3만 5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제작하였다.
    • 1366년 전라도도순문사 김유는 전선 100척으로 탐라의 목호를 정벌하려하였고 1374년 목호의 난 정벌시에는 병선 314척을 동원하였다.
    • 이작도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80척을 동원하였다.
    • 최무선진포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동원하였다.
    • 제1차 대마도 정벌에 전선 100척을 동원하였다.

이런 병력동원력은 당대에 엄청난 것이었다. 이 정도 병력은 심지어 중국에서도 대군으로 취급받았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수십만, 백만대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수만 병사가 적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59] 하지만 중국 역사를 통틀어 진짜 백만대군은 수양제고구려 침공때와 비수대전전진이 동원한 병력 딱 두 번 뿐이었고 중국 기준으로도 수십만 병력은 대군이 맞았다. 당대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도 본토와 먼 곳에 원정을 보낼 때는 3만~5만 명 선에서 병력을 파견하였다. 다른 국가의 병력 동원 사례와 비교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위나라의 군세가 80만 대군이라고 호통쳤지만 실제로는 24만명 정도였고 거기에 맞선 오나라유비의 연합군이 끌어모을 대로 모은 병력이 5만 남짓이었다. 비수대전에서 부견의 백만대군에 맞서 동진이 국력을 최대한 쥐어 짜내서 모은 병력이 8만 남짓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소정방의 군대가 13만이고 신라가 5만명, 여당전쟁기의 당나라 군세는 1차가 30만, 2차가 4만 4천 명에 주필산 전투에 참여한 고구려군은 15만 명, 건안성과 신성에 10만 명[60], 국내성에서 4만명 이었다. 3차에 동원된 당나라군이 50만 명이었고 금산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은 20만 명이었다.

사이메이 덴노가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전토에서 긁어모은 병력도 661년의 1차 원군의 수는 5천여명이었고 663년 2차 원군은 그 수가 2만 7천여명이었다. 통일신라는 839년에 일어난 달벌전투에서 신라 정부군이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봉기군에 대항해 10만 명을 동원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에 동원된 일본군이 47만여 명이었고 조선군이 18만 8천여 명, 명군이 22만여 명이었다. 이는 양국이 엄청나게 무리해서 쥐어짜낸 병력이었다.

물론 원정군과 방어군 등 여러 조건의 차이도 감안해야 하지만, 고려의 동원력은 고려의 국가 규모 하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절대 왕정이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 유럽 국가들도 이 정도 동원은 어려웠다. 임진왜란보다 조금 뒤에 벌어진 유럽의 30년 전쟁(1618년 - 1648년)에서 가장 많이 병력을 투입한 합스부르크 가문(스페인 + 오스트리아)이 30만을 동원했고, 그 뒤를 이어 스웨덴군프랑스군이 각각 15만 정도를 동원했다.

고려의 동원력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는 많다. 일리천 전투 때는 아직 후삼국 통일조차도 이루어지기 전이었는데도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소집했고, 그 중 기병만 약 5만이어서 건국 초기부터 무시무시한 동원력을 보여주었다. 3차 여요전쟁에서 동원한 20만명은 2차 여요전쟁 시기 동원한 강조의 30만 군대가 통주 전투로 궤멸당한뒤에 소집한 병력이다. 무엇보다도 여진정벌 시기의 별무반 17만은 방어전도 아닌 정복에 동원된 원정군이었다. 홍건적의 난 때의 병력 20만은 피폐해진 고려 후기의 상황에서도 남부지방 일부에서만 모집한 병력의 수였다.

송나라의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보다도 고려 때에 병력이 2배는 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절요에는 1268년 4월에 고려에서 이장용이 사신으로 몽골에 왔을 때 쿠빌라이 칸이 이장용에게 볼모 영녕공 왕준에게 듣기로는 고려에 강병 5만명 있다고 들었는데 1만 명만 남기고 나머지 전부는 원병으로 보내달라고 한 기록도 있다. 원순제 시절 어사 최유원나라의 반란 진압을 위해 고려에 병사 10만 명을 요구한 적도 있다. 왜구가 극성일때 최영은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23년(1374년)에는 명나라가 임밀과 채빈 두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북원을 치는데 필요하니 군마 2천 필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런 대군을 한 번도 아니고 빈번하게 동원한 고려군의 동원력은 후대의 조선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이었다. 조선도 임진왜란 때 18만명을 동원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예종은 우리 조선은 삼국을 합친 나라인데 왜 병력은 더 줄었냐고 한탄까지 했었다.[61]

다만, 이런 병력 동원력의 차이가 고려와 조선의 우수성을 비교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사력은 한 국가를 평가하는 여러가지 요소 중 단 한 가지일 뿐이다. 무엇보다 고려와 조선의 동원력 차이는 양국의 안보적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명/청 제국이 주변 세력을 대부분 토벌하여 패권국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전란이 없는 안정기였다. 반면, 고려시대에는 대륙이 중원의 송나라 외에도 서하/요/금/몽골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도 역동적으로 일어났고 그에 따라 전쟁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다. 따라서 고려는 국력을 쥐어짜내서 대군 소집해야할 필요성이 조선에 비해 훨씬 높았다.

또한, 두 왕조의 체제가 지닌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고려의 병력 동원력은 각 지방에 사병이 존재하던 지방분권적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이와 달리 조선은 지방의 사병을 혁파하여 중앙집권을 이루었다. 이는 조선이 내정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사 동원력을 어느 정도 희생한 것이다. 결코 조선의 행정체계가 고려보다 후진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양자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서 고려를 치켜세우고 조선을 폄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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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전쟁 참전 목록

고려는 잦은 외침으로 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상대도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호전성이 강한 전투민족들이 많았다. 거기에 상대편의 병력도 대군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 순서는 연대순대로 전쟁명, 상대명, 상대편의 병력순으로 기재함.

  • 여요전쟁
    • 상대세력: 거란족
    • 상대병력
      • 1차: 8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6~8만명으로 본다.)
      • 2차: 40만명(거란측의 주장이며 실제로는 20만명으로 본다.)
      • 3차: 10만명
  •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의 침입
    • 상대세력: 원나라
    • 상대병력: 불명
  • 고려 말 왜구의 침입
    • 상대세력: 왜구
    • 상대병력
      • 1350년 제1차 순천부 침입: 100여척
      • 1350년 제2차 순천부 침입: 66척
      • 1350년 합포 침입: 22척
      • 1351년 자연도, 삼목도 침입: 130여척
      • 1352년 합포 침입: 50여척
      • 1363년 수안현(守安縣)[65] 침입: 213척
      • 1364년 갈도(葛島)[66] 침입: 200여척
      • 1364년 진해 전투: 3천여명
      • 1374년 합포 전투: 350여척
      • 1376년 부령현(扶寧縣) 침입: 50여척
      • 1377년 제주도 침입: 200여척
      • 1377년 하동군 침입: 40여척
      • 1377년 김해 침입: 130여척
      • 1379년 진주 침입: 보병 2천여명, 기병 7백여기
      • 1380년 홍주 침입: 100여척
      • 1380년 진포 해전: 500여척
      • 1383년 관음포 전투: 120여척
      • 1385년 함주(咸州)[67] 침공: 150여척
  • 여진족 장수 호발도(胡拔都)의 침입
    • 상대세력: 여진족
    • 상대병력: 불명

7. 경제

고려는 창업군주 왕건부터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경서경, 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69]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 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에 입각해 상업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이슬람 상인들까지도 거쳐갔다고 한다.

고려는 벽란도와 같이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는데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潮來復潮去 來船去舶首尾衡相連

아침에 여기서 떠나면 한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朝發此樓底 未午棹入南蠻天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에서

또한 고려사절요에는 배들이 수없이 들어와 값진 보배가 넘쳐나서 중국과 교역하더라도 얻을게 없을 정도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70]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 때 '려'로 불렀다.[71]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대의 신라에 비해 최소한 사서에서 나타날 정도로 공사에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특히 원나라 때에 와서는 공무역적인 사례는 아예 없어지고 사무역이나 외국인 거주 역시 사실상 없어지는 수준이 되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제2계급으로 광저우 등 황해 지방 도시의 지방관으로 자주 임명되었음에도 원의 시박사에서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절강성, 복선성 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고려 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고려의 반대로 각장 무역이 폐지되었기에, 양국의 무역에서는 조공 무역의 비중이 컸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 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으나,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거란 때와는 달리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상술했듯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대식국, 大食國)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 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슬람쪽과는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 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 중국조선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다.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72]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에 속함으로서,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8. 문화

  자세한 내용은 고려/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외교

고려가 자리잡았던 10~13세기는 동북아시아 제국에 다원적 천하질서가 자리잡았던 시대였다.[73] 이에 송, 요/금, 서하, 고려, 일본, 대월, 대리국 등 모두 자국의 군주를 천자나 그에 준한 존재로 자신들을 칭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국제관계는 각 나라의 독자성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에서 국가 간의 질서가 다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국가 간의 차등적인 위상이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다. 실례로 송과 요는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대적국의 위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상호 형제국으로 송이 형, 요가 아우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대가로 송은 요에게 공물의 성격을 지난 막대한 세폐를 요에 헌납해야 했다. 이에 형식적 위상은 실제 힘의 차이에 따른 관계와 괴리되어 있었다.

요나라와의 관계로는 만주를 포함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고려가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친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했다.[74]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 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75] 고려의 해동천자, 해동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 있다.

고려와 송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외교의 단절 및 통교의 주도권은 항상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를 저지할 힘도 명분도 부족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으며 때로는 일본 상인이 팔관회에 참석하여 해동천하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76]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까지 준수되었다.[77] 그러나 한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78]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발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에 영향을 미쳐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79]

10. 고려는 천자국인가?

10.1. 개요

먼저 '천자란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천자라 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세계를 통치하는 군주를 말한다. 고로 무엇보다 천자를 중심으로 한 세계(천하)가 있어야 하며 이런 관념에 근거해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하늘의 법칙을 담은 역법을 제정, 연호를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자를 따르는 제후들은 천자의 명 아래 각각의 제후국을 통치하며 천하의 질서에 일조한다.

칭제가 반드시 천자국의 필수요건인 것은 아니다.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의 통일중국이 천자=황제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냈지만 중국의 과거 사례를 봐도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여 시황제가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내기 전까진 황제라는 칭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상나라부터 주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라는 칭호만으로도 천자국을 표방하기엔 충분했다. 오호십육국시대에도 유목민족의 침투 왕조들은 자신들의 세력에 비해 칭제는 너무 과하다 싶은 경우 그냥 '천왕(天王)'이라는 칭호 등으로 퉁치고 천자국을 표방했다. 한국에서도 고조선이 칭왕을 하여 천자국을 표방한 사례가 있으며 삼국시대에도 황제라는 칭호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은 그냥 칭왕을 유지하면서도 천자국을 표방하곤 했다.[80] 조선 말기에도 중화세계에서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면서 대군주를 선포할 때에도 관제를 천자국에 준하게 하면서도 칭왕은 유지했던 사례가 있다. 즉 수직적인 질서가 자리잡았던 동양이라도 반드시 왕국=제후국(번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중국에서 개나소나 칭제를 너무 남발해서 그렇지 왕이라는 칭호의 격이 오등작급으로 낮은 것이 아니다.

고려의 경우 중화세계 고유의 중화천하관과는 또 다른 고조선 - 삼국 - 남북국 - 후삼국을 거쳐 내려온 해동세계 고유의 해동천하관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후삼국을 통일하며 내부의 호족들을 내번으로 상정하고(도호부 설치)[81] 북방의 여진족, 남방의 탐라 등을 외번으로 규정하여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를 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요전쟁의 승리(1019년) 이후 북방의 통할력을 획득함으로서 고려만의 해동천하를 완성하였다.

고려가 천자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드러나며 당대에 환구단을 세워 천제를 지내고 군주의 복식을 황색으로 삼는가 하면 군주의 행차시 황토를 깔고 경칭을 폐하라 하였으며 태자에 대한 경칭을 "전하", 왕족에게 삼공의 직위를 부여하고 "제왕"이라 통칭하며 왕족 및 훈신들에게 오등작을 수여하였고 특히 공, 후의 반열은 종친의 경우 "영공 전하", 훈신의 경우 "영공 저하"로 경칭하는 등 예법의 수준이 천자국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의 외교 정세를 살펴야 이해가 가능하다. (외교 편 참조)

10~13세기의 동아시아는 다원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중국 대륙에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 907년 당의 멸망 이후 1271년 원의 성립까지 약 3세기 반에 걸친 시기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송, 요/금, 서하, 고려, 일본, 대월, 대리국은 각자의 천자를 갖는 각각의 천하관을 지녔었다. 다만 힘의 논리와 형식상의 의례가 일치하지는 않았다. 고려의 경우 후삼국 통일 이후 몽골 제국에 항복하기 전까지(936년~1270년) 340여년 간은 그들의 해동천하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대요 관계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북방의 제번에 대한 통할력을 획득하였으며 형식적으로 사대를 취함으로서 양자간의 화친관계를 수립하였고, 대금 관계의 경우도 비록 과거 번국으로 삼았던 여진을 상국으로 섬겨야 하는 고려 내부의 딜레마에 빠졌으나 대체로 전조(요)와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였다.[82] 원간섭기(1270년~1351년)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던 시기로서 최근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에는 쿠빌라이 칸의 세조구제에 따른 고려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팍스 몽골리카 체제의 일원으로 독자성과 문화의 다양성, 세계화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상기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 고려는 제후국으로 남번(탐라), 북번(여진) 등을 거느린 해동천하의 천자로서 군림하였으며 이 시대의 자부심은 당시의 금석문이 고려 국왕을 "황"으로 표현하는 등의 모습으로 비춰준다.

물론 유교적 질서에 따라 요, 금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제적으로 황제를 칭하지 않은 한계는 있으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미 오등작의 공후백자남이 아닌 왕이라는 칭호만으로도 천자국의 격을 갖추기엔 충분하며 고조선 이래 삼국, 남북국, 후삼국을 거쳐 내려온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을 이었기에 해동천자를 훌륭히 (조선의 시각에서) 참칭한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2. 역사기록

※ 순서는 금석문이나 서적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기재함

10.2.1. 금석문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 (1214년)

광종대왕(光宗大王)[83]황위(皇位)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1025년)

황제 폐하(皇帝 陛下)[84]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황제 폐하(皇帝 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엎드려 황제 폐하(皇帝 陛下)[85]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1044년)

황제(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965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1053년)

황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1186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979년)

혹시라도 어느 날 그대가 궁전의 섬돌에 서서 천자(天子)[86]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논쟁하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또한 달게 여길 것입니다

염경애 묘지명

여진은 본래 아조(我朝) 사람의 자손이기에 신복(臣僕)이 되어 누차 조천(朝天)[87]해왔고, 그 호적이 모두 아조(我朝)에 올라와 있는데 어떻게 거꾸로 우리가 신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윤언이 묘지명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식묘지명(1156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1061년)

무릇 우리 황제(皇)[88]의 아들들은 모두 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1077년)

황제(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981년)

공이 황후(皇后)[89]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1117년)

(거란의) 천자는 공(公)[90]이 우리 황제(皇)의 친족이고 또한... 칙명으로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주니, 거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최의묘지명(1223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91]이다.

최충헌묘지명(1219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92]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1060년)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 석불을 금상황제(今上皇帝)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를 기원합니다.[93]

태평2년명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977년)

만승(萬乘)[94]의 높은 위치에 계시면서 사총(四聰)을 타고 나셨으니 삼교(三敎)의 지극한 가르침을 한 마음에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95]

현화사비문(1017년)

10.2.2. 서적

10.2.2.1. 외국
10.2.2.1.1. 중국

왜국은 일본국이다.

본래 이름인 왜를 부끄러워 했는데, 극동에 있어서 스스로 일본이라 부른다.

지금 고려에 신하로서 속하고 있다.

도화견문지[96]

그 나라에서 신민(臣民)들은 그 임금을 성상(聖上)이라고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嚴公)이라고도 불렀으며, 후비(后妃)를 궁주(宮主)[註241]라고 불렀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

10.2.2.1.2. 일본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수좌기[97], 조랴쿠 4년(1080년)

10.2.2.2. 한국
10.2.2.2.1. 고려사

"내(余) 덕은 박한데 부담은 중하니, 병이 날로 심해진다. 생각컨데 왕위(王位)[98]는 오래 비워 놓을 수 없다.

내(予) 원자(元子)[99]는 덕이 위까지 알려질 정도니 자리를 이어받도록 명한다.

너희 관료와 부서는 사왕(嗣王)의 령을 듣도록 하되 사왕(嗣王)이 떠나있을 기간 동안은 군국(軍國)의 임무는 태손(太孫)[100]이 처리하라.

산릉의 제도는 검소하게 하고 제사는 삼일안에 끝내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고종, 임금의 마지막 조령(詔令).[101]

왕의 생일을 천춘절(千春節)이라 했으니, 절일(節日)[102]의 명칭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以王生日爲千春節, 節日之名, 始此.

고려사, 세가, 성종 원년(982) 여름 6월 中.

짐(朕)은 덕이 없지만 대업(大業)을 이어 수호하니 만사(萬事)를 통치했다. 그러니 하루도 편안히 있지 않고 몸을 숙여 정치를 펼치니 밤을 센지가 10여 재(載)이다. 생각컨데 중외(中外)의 사람과 같이 인수지역(仁壽之域)[103]을 모험했으나 질병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천명(天命)은 알기 힘들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그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허나 방기(邦基)[104]는 지중(至重)하니, 전하는 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왕태자(王太子)[105]는 인의(仁義)를 알고 효우(孝友)를 안다. 태어날 때부터 똑똑했고, 따뜻했고, 자애롭고, 온화하니 백성의 소망을 채울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묻히기 전 얼른 군위(君位)를 잇도록 하라. 모든 군국대사(軍國大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방진주목(方鎭州牧)[106]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오호라(於戲)! 시작과 종말의 시기를 아니 죽는 자는 아무 후회가 없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산 자는 오래 살도록 하라. 이제 고굉대신(股肱大臣)[107]백벽(百辟)[108]과 경사(卿士)들은 왕실(王室)[109]을 보좌하고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도록 도와라.

그리한다면 짐(朕)은 눈을 감더라도 마음은 족하다. 국내(國內)에 선포하여 짐(朕)의 뜻을 알리도록 하라.

고려사 세가 숙종의 유조(遺詔)

짐(朕)은 군부(君父)의 유언(遺言)을 받들어 방가(邦家)의 중기(重器)를 손에 쥐었다. 매사에 조심하여 부탁받은 권한을 조심히 살폈다. 군공(群公)과 장구(長久)의 책략을 세우고, 조종(祖宗)의 경사를 누리고, 조상의 공로를 빛나게 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을 치루던 중 너무나 슬퍼하니, 걱정이 병이 되었다. 때가 흘러 계속 누적되니,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으니 이번 겨울 초에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바람 앞 등불같은 몸이 어떻게 환기(幻期)를 견더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직의 도(社稷之圖)는 반드시 예속에게 이어져야한다. 지금 모제(母弟)인 수태사(守太師) 중서령(中書令) 국원공(國原公) 운(運)[110]은 다능하고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다. 성덕(盛德)이 날로 갈수록 커지고 농사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형정(刑政)의 이로움과 병폐를 마음 깊히 알고 있으니, 구오지존(九五之尊)[111]에 오른다면 억조(億兆) 명의 소망을 채울 것이다. 그러니 구소(柩所) 앞에서 군권(君權)을 가지도록 하라. 무릇 국조(國朝)의 상벌대사(賞罰大事)는 모두 사군(嗣君)의 뜻을 따르라. 밖에 있는 주진(州鎭) 관원(官員)들은 본군(本郡)에서 거애하고 자신의 관사를 떠나지 마라. 상복의 제도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오호라(於戱)! 생에는 굴곡이 있으니, 아무리 험난해도 대의를 좇아야 한다. 사람 중 누가 사라지지 않는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삶이 짧다는 것이다. 오로지 몇몇 고굉(股肱)과 중외(中外)의 문무(文武)들이 충력(忠力)을 다하여 내 친왕(親王)[112]을 보좌하고, 보력(寶曆)이 무궁(無窮)하도록, 환구(環區)[113]를 잇는다면 짐(朕)이 눈을 감아도 어떤 유감이 있겠는가?

고려사 세가 순종의 유조(遺詔)

짐(朕)이 부덕하니 하늘이 벌을 내렸다. 질병이 낫질 않으니 어떻게 신민(臣民)의 위에서 군국(軍國)을 총괄하겠는가.

태자(太子)가 비록 어리고 작으나 덕행이 이미 완성됐으니 제공(諸公)[114]이 모두 마음을 합쳐 보좌하여 그가 다치지 않게 하라.

내(予) 질병이 커져 형세가 회복되지 않을 것 같구나. 이에 중임(重任)을 풀어 너(汝)[115]에게 전해 돌려주마.

내 평생(平生)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득소실다(得少失多)하니 따르려 하지 말거라. 단지 옛 성현(聖賢)의 길을 따르고 우리 태조의 교훈(我太祖之訓)을 따르거라. 자리(位)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영원히 서민(庶民)을 품거라.

(朕)은 천지(天地)의 경명(景命)을 이끌고 조종(祖宗)의 유기(遺基)를 받들었다. 그렇게 삼한(三韓)을 가진지 18여 재(載)가 지났다.

쇠락한 자를 돕고 피폐한 자를 구했다. 만민(萬民)과 같이 생각하고 같이 쉬었다. 옷을 대충 입고 식사를 대충했다. 하루도 잠시라도 게을러진 적이 없었다. 근심이 심하고 누적되니 질병을 요양할 시기를 놓쳐 결국 크게 심해졌다.

권국사(權國事) 해(楷)는 그 명철한 성격이 하늘이 내린 것이며 그 원랑(元良)[116]의 자질이 인망(人望)을 채울 수 있다. 내 명이 끝나기 전에 왕위(王位)[117]를 이어라. 모든 군국중사(軍國重事)는 일체 사군(嗣君)의 처분(處分)에 맞긴다.

상례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을 검소하게 만들어라. 방진주목(方鎭州牧)[118]은 제 자리에서 애도하되 자리를 비우지 말라. 

오호라(於戲)! 죽음과 삶은 늘 있는 길이니 사람이 도망치기 힘들다. 시작과 종말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어지니 짐이 유감이 있겠는가. 묘(廟)[119]와 사(社)[120] 덕분에 저지(儲祉)[121]를 세웠으니 신린(臣隣)들은 사군(嗣君)을 같이 보좌하여 왕실(王室)을 영원히 밝혀라. 우리 국조(國祚)가 무궁(無窮)하게 하라.'''

아(咨)! 너희(爾) 여러 나라(多方)[122]들아, 내 의지를 받들라!

- 고려사 세가 예종의 유조(遺詔)

[123]은 강안전(康安殿)[124]에서 즉위했다. 관정(灌頂)[125]한 뒤 경령전(慶寧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강안전에 가 백관(百官)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후에 황의(黃衣)[126]를 입고 남쪽을 바라보며 용상(龍床)에 앉았다. 속리대(束里大)와 파투(波透)[127]는 강안전에 들어와 동쪽을 바라보며 앉았다. 태손(太孫)[128], 공(公), 후(侯), 백(伯)[129], 재추(宰樞)[130]와 고위 문무양반(文武兩班)은 강안전 앞뜰에 순서대로 들어왔고, 하위 양반은 강안전문 밖에 서서 표문(表文)[131]을 올리고 만세(萬歲)[132]를 외쳤다.

- 고려사, 세가, 원종 순효대왕 재위 원년(1260년) 4월 中.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133]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궁전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수를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대궐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 같이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천하의 나라들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신하들의 자리에 오셔서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쪽 금나라 사신은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동쪽 일역(日域) 사절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만승(萬乘)[134]과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고려사, 세가, 의종 24년 1월 1일.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겸손이 첫째이다. 이 때문에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왕(王)ㆍ공(公)은 자칭하기를 고(孤 아비가 없다는 말)ㆍ과(寡 덕이 적다는 말)ㆍ불곡(不穀 착하지 못하다는 말)이라 한다.' 하였고, 한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이)글을 올릴 적에 성(聖)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고 덕을 찬미함에 있어 용어가 너무 지나치니, 심히 합당하지 않다.

지금부터는 무릇 장(章)ㆍ소(疏)를 올리거나 공용 문서에도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사, 세가, 인종(仁宗) 16년 2월 中.

짐(朕)은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며 열성(列聖)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지 35년이 되었다. 오늘이 되어 일이 많아 부담이 쌓이니 질병이 누적되어 치료가 소용이 없어 대참(大漸)에 이르렀다.

오호라! 성철의 도(聖哲之道)[135]는 존망을 아는 것이며 불로의 말(佛老之言)[136]은 생사를 알라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치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돌아가는 자는 변화에 순응해 남지 않고, 남아있는 자는 슬퍼하며 효를 드러내는 것은 천하의 도이다.

아! 너 왕태자(王太子) 현(晛)[137]은 충효(忠孝)의 미덕을 갖추고 타고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 덕업(德業)이 융성하여 인망(人望)을 갖추었다. 이에 마땅히 왕위(王位)[138]에 오를 수 있도다. 제사는 하루를 달로 계산하고 산릉의 제도는 검약하게 하라. 성현의 철칙을 깊게 생각하고 조종의 영광을 저버리지 말라.

문무백료(文武百寮)는 다 같이 협력하여 국정을 이끌어 나가고 왕가(王家)[139]를 보우하라. 중외(中外)에 이를 포고해 짐의 뜻을 알게하라.

고려사, 세가, 인종, 인종의 유조(遺詔)

다루가치가 따졌다.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리 참람할 수 있습니까?'"

왕은 검의중찬 김방경, 좌승선 박항을 보내 해명했다. "참람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이 오래토록 전해 왔으니 바꾸길 겁냈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140]를 유(宥)[141]로, 주(奏)[142]를 정(呈)으로 바꾸었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 재위 2년 3월 中.

짐(朕)과 신라(新羅)는 피를 나눈 동맹(同盟)이다. 그리하여 양국(兩國)이 영원히 서로 잘 지내며 각자 사직(社稷)을 지키고자 했다.

이제 나왕(羅王)이 굳이 칭신(稱臣)을 원하고, 경등(卿等)도 그것이 옳다고 한다. 짐(朕)은 마음이 아프지만 중의(衆意)가 원하니 받아들이겠다.

고려사, 세가, 태조 재위 18년(935년 12월), '천덕전에서 고려 - 신라 합방이 선포되다.'

承 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 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

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 爾有衆 奉纂丕圖.

當 退居後宮, 獲全殘命.

은 선고(先考) 유업(遺業)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대위(大位)에 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니 방국(邦國)의 권한(權)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사민(士民)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문(權門)에서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난신(逆賊亂臣)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고려사, 세가, 헌종, 양위 조서.

생각컨데 황숙고(皇肅考)[143]께선 의와 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구가의 임무[144]가 나에게 왔는데, 위엄있는 영혼이 마치 신과 같습니다.

경기(慶基)를 중흥(重興)시키니 뛰어난 갑옷을 남기셨습니다. 종과 북을 두들겨 때에 맞추어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아름다운 황고(皇考)[145]께선 청명하시고 하늘의 법을 지켰습니다.

도를 위해 존경하고 근면하셨으니 그 마음이 연못을 채울 수 있습니다.

뛰어난 계획과 신령한 판단은 바람을 불게하고 천둥을 울리게 합니다.

제가 그 덕을 잇고 싶으니, 부디 축복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사 악지 숙종 태묘 악장

해동천자(海東天子)인 지금의 황제(帝)께서는 부처님과 하느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음은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물다네.

고려사, 악지, 풍입송의 도입부 中.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講和, 非兵馬使所得專, 宜遣公兄等, 入奏天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146] 등을 천정(天庭)[147]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

고려사, 열전, 윤관,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다. 中[148]

황후(皇后)께서 입궁하실 때부터 늘 태자를 낳길 원했습니다. 결국 성인(聖人)[149]께서 태어나시니, 영원히 사시라고 하늘에 비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점이 없었습니다. 천지귀신이 제 지성을 알텐데 오늘날 적신을 믿어 골육을 해치려 하시다니요.

고려사, 열전, 이자겸,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하며

고려는 종실사람으로서 친존(親尊)한 이를 책봉하여 공(公)이라 하였고, 그 버금 가까운 이를 후(侯), 비교적 촌수가 먼 이를 백(伯), 어린이를 사도(司徒)·사공(司空)이라 했으며, 이들을 총칭하여 제왕(諸王)이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 종실서문 中.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그대와 함께 같은 날 황기(皇畿)를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의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150]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

고려사 열전 태조 왕자 안종 왕욱(王郁) 中 헌정왕후에게 안종이 바치는 시.

곤면(袞冕)을 내리니 제도가 구장(九章)에 미쳤다.

고려사, 열전, 종실[152]

… … 성황(聖皇)께서는 고귀한 분이 되실 줄을 미리 아시고 후궁(後宮)에서 양육하게 하셨습니다. 상황(上皇)께서 … …

고려사, 열전, 희종 후비 中.

… … 올리는 모든 표문에서는 성상폐하(聖上陛下)라 칭하고

전(箋)에서는 태자전하(太子殿下)라 칭하며, 제왕(諸王)은 영공(令公)이라 하고 … …

고려사, 지, 공문서를 주고받는 규정 中.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 조양필(趙良弼)이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고려가 작은 나라라고들 일컫지만 산과 바다가 가로 막혀 지세가 험한 까닭에 우리나라가 정벌에 나선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한 실정입니다. 고려 태자 왕전(王?)이 입조해 체류한지가 이태나 되었지만 마침 황제께서 서방 정벌에 나가 계신 관계로 대접이 소홀해 우리를 진심으로 따르지 못했으니 한 번 제 나라로 귀국해 버리면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그 숙소와 음식을 번왕(藩王)에 어울리게 격상시켜 주어야 마땅합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부친이 죽었다고 하니 우리가 그를 국왕으로 임명해 귀국시켜 준다면 필시 은덕에 감격해 신하의 직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힘들게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한 개 나라를 얻는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고려사, 세가, 원종 즉위 원년 中.

10.2.2.2.2. 동국이상국집

臣伏覩聖上陛下某月某日朝享大廟。某日御儀鳳樓大赦。於是內外白衣諸生。序立闕庭。各進謠頌。仰歌聖德。臣以右拾遺扈從。親覩盛禮。臣本諸生。擬諸生所進。謹成聖皇朝享大廟頌一篇。但慙赧惶恐。不能自獻。庶有以達于天聽者。臣無任戰懼隕越之至云云。其詞曰。

於穆聖皇...荷天眷命...我聖皇之代...百辟卿士...嗣孫萬壽...民咸曰我聖皇是民之父母...

신이 감히 보기로는, 성상폐하께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태묘(大廟)[153]에 조향(朝享)하였습니다. 모일에는 의봉루(儀鳳樓)에 나가셔서 대사(大赦)[154]를 내리셨습니다. 이와 같으니 백의(白衣), 제생(諸生)이 궐정(闕庭)에 서립(序立)하여 각각 노래와 찬송을 올리어 성덕을 찬양 노래하였습니다. 신은 우습유(右拾遺)로서 호종(扈從)하여 성대한 예식을 직접 보았사오며, 신은 본래 제생(諸生)이옵기에[155] 제생으로서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한 편을 만들었습니다. 다만 부끄럽고 황공하여 제가 직접 올리지 못하겠지만 감히 천청자(天聽者)[156]에게 드리니 신은 떨리고 황송합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 아름다우신 성황이시어...천명[157]을 받으셔서...나의 성황의 시대에...많은 제후와 경사들은...사손의 만수[158]다...만 백성이 말하길 나의 성황은 백성의 부모다...

동국이상국집, 19권, 성황조향태묘송(聖皇朝享太廟頌)

… … 짐(朕)이 보건대, 종실(宗室)이나 제후(諸侯)의 아들들은 비록 옷을 못이길 정도로 어려도, 으레 사공(司空)을 제배(除拜)한 지 오래이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신하로서 큰 공을 세워 제후(諸侯)의 반열에 있는 사람은 사세가 종실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그 아들이 사공(司空)되는 것을 참용(參用)함이 매우 의리에 합당하니 … …

동국이상국집, 33권, 최구(崔球)가 수사공 주국(守司空柱國)을 사양한 데 대한 불윤 中.

10.2.2.2.3. 동인지문사륙

(생략)...신하들이 사사로히 왕을 성상(聖上), 황상(皇上)이라 했으며, 임금을 요(堯), 순(舜)으로, 나라를 한(漢), 당(唐)으로 표현했다.

왕은 스스로를 짐(朕), 여일인(予一人)[159]이라 칭하고, 명령을 조(詔), 제(制)라하고, 유경내(宥境內)를 대사천하(大赦天下)[160]로 표현했으며, 관부 제도는 모두 천조(天朝)와 같게 했으니, 이들은 너무나도 참람하다....(생략)

동인지문사륙, 서문 中.

10.2.2.2.4. 동문선

"제(帝)가 진(震)을 나와 하늘(乾)을 탄다."는 단지 때에 맞추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허나 왕께서 호경(鎬)에 가 술을 드신다는 건 바로 여러 사람과 같이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봄을 부러워하니 식(式)이 즐거워집니다. 물고기 때와 같이 움직이니 시가(詩歌)를 부르니 인애롭게 취합니다.

민(民)이 생긴 이래 금일과 같은 흥성함이 없었습니다. 상제(上帝)가 돌보아 만년을 갈 상스러움이 나타나 새로운 장관(壯觀)을 보았습니다. 사방에서 환희의 소리가 들립니다.

엎드려 황상(皇上)을 생각컨데 슬기로우시며 거룩하십니다. 능통하시며 신령스러우십니다. 도량이 크시며 겸손하십니다. 당고(唐高)[161]의 성덕(盛德)을 지니셨지만 그것을 뽐내시려하지 않습니다. 늘 문왕(文王)의 마음가짐을 가지려 하시니 정치가 고쳐지고 폐단이 보수됩니다. 현명하고 충성스러운 자를 고르시고 못난 자를 떠나 보내셨습니다.

땅이 어찌 (왕을) 사랑하고 아끼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귀한 금덩이가 동도(東都)[162]에서 나왔습니다. 하늘이 성명(成命)을 내리니 신새(神璽)가 서주(西州)[163]에서 나왔습니다.

(생략)

벼락을 두른 금여(金輿)를 타고 하늘(天)[164]이 보좌(寶座)에 오시니 실가(室家)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생략)

만국(萬國)에서 옥(玉帛)을 들고 조회하려 옵니다.

신 등도 법을 배우고 민요(民謠)를 채집해 천안(天顔)을 받들고 구호(口號)[165]를 외칩니다.

옥련(玉輦)이 서순(西廵)한지 여섯번째 봄이 왔네.

주방(周邦)은 오래됐지만 천명(命)은 새롭네.[166]

건원(乾元)[167]께서 아홉 용을 부르시니,

사방의 나라들이 제후가 되고자 하네.

제소(帝所)[168]는 이미 즐거움이 퍼졌고,

노루가 군신(群臣)을 반겨주네.

대평(大平)하니 부로(父老)들이 앞다투어 축하드리고자 하고

오색 구름(五色雲)이 북진(北宸)[169]을 바라보고 있네.

즐거움과 의범이 있으니 구름들이 모이네,

순수하며 윤택하니 운율의 조화가 들린다.

진엄(辰嚴)[170]을 받들어 공사(工師)들이 같이 노래를 부른다.

동문선 104권 이인저 작 서경 대화궁 대연 치어

아랑위야, 들보 남쪽을 쳐다볼세, 천중만중 얽어 놓은 빛나는 궁궐은 그 형세가 깊숙도 하구나. 금니(金泥)로 글을 써서 봉선(封禪)[171]할 가기(嘉期)가 가까웠으니, 숭악(嵩嶽)이 응당 만세 삼창을 할 것이다.

동문선 108권 연경궁 정전 상량식

10.2.2.2.5. 보한집

본국에 장차 환란이 일어날 것 같고, 이미 나라의 운세가 다했나이다. 그러나 다행이 천자의 빛나는 모습을 뵙게 되었으니 바라옵건대 신하의 예를 갖추고자 합니다.

보한집,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바친글 中.

10.2.2.2.6. 신증동국여지승람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中.

10.2.2.2.7. 제왕운기

용수산(龍首山) 고을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남산(南山) 고을 남쪽 3리에 있다. 고려조의 문종(文宗)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서, 친왕(親王)과 재추(宰樞)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3권, 황해도 해주목 中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大金) 황제(皇帝)는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中.

10.2.2.2.8. 조선왕조실록

公乎公乎! 三韓再造, 在此一擧。 微公, 國將何恃?

공(公)이여! 공(公)이여![172] 삼한(三韓)이 다시 일어난 것은 이 한번 싸움에 있는데, 공(公)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173]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권, 총서 66번째 기사 #

동지사 김종직이 《동국여지승람》의 묘호를 시호로 고치지 말 것을 아뢰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신 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교정하였는데, 태조(太祖) 이래로 모두 묘호(廟號)를 일컬었는데, 이제 시호(諡號)로 고쳐 쓰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고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대로 두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이 중국 조정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자못 많아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나, 이는 책에 써서 만세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경의 말이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김종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서적(書籍)에 마땅히 휘(諱)할 것이 많은데, 어찌 능히 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新羅) 무열왕(武烈王)을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당(唐)나라 무후(武后)가 보고서 꾸짖기를, ‘천자(天子)가 태종(太宗)이라고 일컬었는데, 너희가 어찌하여 참람되게 일컫느냐?’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무열왕(武烈王)이 어진 신하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얻어서 삼국(三國)을 통합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일컫습니다.’라고 하니, 무후가 그대로 두고 묻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前朝)에서는 중국 조정에 크게 휘(諱)할 것을 거리낌없이 일컬었으니, 이것이 어찌 옳겠는가?"

하니, 김종직이 아뢰기를,

"전조 때에는 혹은 연호(年號)를 일컫기도 하고 혹은 황제(皇帝)라고 일컫기도 하였으니, 이는 모두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18년 2월 10일 中.

"우리 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참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지내면 우리 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2년 2월 23일 中.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변계량의 상서문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고 제후(諸侯)가 산천(山川)에 제사지내는 것이 제도이니, 비를 하늘에 비는 것은 참람(僭濫)하지 않은가?’고 하나,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천지(天地)에 제사지내는 것은 상경(常經)이요, 하늘에 비를 비는 것은 비상(非常)의 변(變)에 대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을 좋게 말하는 경우에는 사람에게 징험이 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인사(人事)로써 이를 밝혀서>>사람을 여기에 두도록 청합니다. 그 일을 소송하고자 할 때 형조(刑曹)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헌사(憲司)에 가게 되는데, 형조와 헌사에서 그 일을 올리는 것은 나라의 제도입니다. 일이 급하고 사정이 지극할 경우에는 직접 와서 격고(擊鼓)하여서 천총(天聰)에 아뢰는 자도 있는데, 무엇이>>이와 다르겠습니까? 대저 5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보리가 없어지고, 10일 동안 비가 안 오면 벼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10여 일이 되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아직도 하늘[天]에 제사하기를 의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비록 하늘에 비를 빈다고 하더라도 또한 기필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제 빌지도 아니하고 우택(雨澤)이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나라의 제도가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교사(郊祀)243)를 폐지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東方)에서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도리가 있었으니,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청컨대, 그 설(說)을 조목별로 말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 청감(淸鑑)244)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245)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246) 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임금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燦然)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禮)의 대체(大體)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노(魯)나라에서 교천(郊天)247)한 것은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큰 공훈(功勳)이 있다 하여 내린 것이고, 기(杞)·송(宋)이 교천(郊天)한 것은 그 선세(先世) 조종(祖宗)의 기운이 일찍이 하늘과 통하였기 때문이다. 기(杞)나라가 기(杞)나라 됨은 미미한 것이지만 선세 때문에 하늘에 제사지냈고, 노(魯)나라는 비록 제후(諸侯)의 나라라 하더라도 천자가 이를 허락하여서 하늘에 제사하였다. 이것은 예의 곡절(曲折)이 그러한 것이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하건대, 고황제(高皇帝)248) 가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여 이하(夷夏)249) 를 혼일(混一)하고, 제도를 창시하며 법을 세울 때, 옛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것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현릉(玄陵)250) 이 귀부(歸付)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밝은 조서(詔書)를 내려, 우리 조정(朝廷)의 일을 두루 말하기를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자세하게 갖추 말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는 것이 일월(日月)이 조림(照臨)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일도 또한 반드시 알고 있었을 것은 의심이 없습니다.

그 뒤로 곧 의식은 본속(本俗)251)을 따르고 법은 구장(舊章)252)을 지키도록 허락하였으니, 그 뜻은 대개 해외(海外)의 나라이므로 처음에 하늘에서 명(命)을 받았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제사하는 예법은 심히 오래 되어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은 제사(祭祀)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제사의 예법은 교천(郊天)253)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법은 옛 전장(典章)을 지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이것에서 말미암아 말한다면, 우리 조정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선세(先世)에서 찾게 되니, 1천여 년을 지나도록 기운이 하늘과 통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고황제(高皇帝)가 또 이미 이를 허락하였고, 우리 태조(太祖)께서 또 일찍이 이에 따라서 더욱 공근(恭謹)하였으니, 신이 이른바 우리 동방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이치가 있어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6년 6월 1일 中.

10.2.2.2.9. 평거란송

우리 성황(聖皇)의 받으신 명은 실로 하느님이 주신 것이로다. 하느님이 우리 성황(聖皇)을 위하여 달단(韃靼)[174]을 빈손으로 만든 것이다.

평거란송(平契丹頌)[175] 中.

10.2.3. 기타

  • 경순왕은 고려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을 밝혔다.
  • 숙종은 넷째 딸 복령궁주의 묘지명에서 천자(天子)로 불렸다. 아들 '왕효 묘지명'에서 예종이 숙종을 '선제(先帝)'로 불렀다.
  • 성종은 태묘를 도입하면서 제후식의 5묘제를 쓰기는 했지만 천자국의 법식도 사용했는데 그것은 사당의 이름을 종묘가 아닌 태묘로 지었고 또한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쳤다. 그리고 선왕들에게 묘호를 바치는 것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다.
  •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만년천자(萬年天子)[176], 지존(至尊)[177], 성황(聖皇)[178], 아황(我皇)[179], 제(帝)[180] 등으로 불리었다.

11. 평가

11.1. 최초의 자력 통일

고려는 신라와 달리 외세의 개입 없이 통일을 이루어냈다. 순수하게 한반도 내의 세력들에 의해 건설된 통일국가라는 점에서 고려왕조는 큰 의미를 갖는다. 통일신라와 비교해서 고려의 통일에 보다 정통성을 부여하는 이들이 중요한 근거로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물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다. 부족한 국력을 극복하기 위해 당대의 국제정세를 잘 판단하고 치밀한 외교적 협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든 것도 하나의 능력이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을 불러온 부작용 때문에 신라는 삼국을 멸한 뒤에도 한 차례 대규모 전쟁을 치루어야했다. 무엇보다 후대까지도 통일의 당위성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많기까지 하다.

반면, 왕건의 고려는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거란을 비롯한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의지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국제정세도 고려에게 비교적 수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반도 주변 세력들이 모두 제앞가림하기도 바빠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지정학적으로 밀접한 당나라만주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에 처해있었다. 해양 세력인 일본도 천황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려와 달리 통일기 고려의 주적이었던 후백제는 외교에 꽤나 공을 들였다. 후백제는 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삼면에서 고려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이 후백제에 도움을 줄만한 세력들이 제앞가림하기도 바빴기 때문에 의미있는 외교적 협력을 받지 못했다.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고려 해역을 피해 먼 바다로 항해하다보니 풍랑을 만나 몰살당했다.

11.2. 단일국가관 정착

고려에 이르러서야 한민족으로서의 의식적인 통합이 이루어지고 단일한 국가관이 정착했다. 이는 한국사에서 고려의 통일이 지니는 매우 중요한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이전 신라의 삼국 통일도 삼국 유민을 단일한 왕조에 의해 통치받는 상태로 만들기는 했다. 이는 한반도의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체로서 물리적으로 합쳐놓는 데는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와 달리 신라는 그들의 의식까지 통합시키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신라 조정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흡수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신라가 유독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박해했던 것은 아니다. 기존 신라인들에게도 적용되었던 골품제를 비롯한 여러 신분제와 차등 대우들이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에게 기존 신라인들보다 더 큰 박탈감을 주었다. 이런 박탈감 때문에 신라 백성들의 통합된 국가관이 생성되지 못했다. 결국 200년이 지나 신라의 통치력이 쇠약해지자 신라는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에 비해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국임을 자처하면서도 모순적이라면 모순적이게도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도 이어받았다. 그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신화와 역사의식의 개변이 이루어졌다. 패서지역 기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은 삼국 이전부터 한반도 모든 민족의 시조였던 것으로 격상되었다. 단군과 기자[181]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였다. 이런 의식적인 개변 덕분에 마침내 한반도에 사는 민족들이 단일 공동체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려시대에 형성된 역사의식과 단일 공동체 관념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한민족 의식의 원형이 되었다. 고려의 통일 이래 한국은 천년 이상 단일국가를 유지했다. 한반도에 사는 동일한 모국어 문화를 공유하는 한민족이라는 민족 관념의 틀은 고려가 완성시킨 셈이다. 그러므로 한국사에 고려가 지닌 영향력과 가치는 그야말로 상당하다.

11.3. 고구려 계승

신라구층탑을 만들어 일통지업을 달성했으니, 지금 개경에 칠층탑을, 서경구층탑을 만들 것이다.

그 현공을 빌려 군추를 없애 삼한(三韓)을 일가(一家)로 모으려 하니 경은 날 위해 소를 지어달라.

- 고려사 최응 열전 중 발췌.

..."최근 서경(西京)을 세우는 것을 끝내고 민(民)을 옮겨 그 곳을 채우니, 이는 지력(地力)을 빌려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그 곳에 도읍하려 함이었다"...

- 고려사 태조 세가 재위 15년(925년) 5월 중 발췌.

이제현이 찬하여 말하길: "충선왕께서 늘 이르셨다: '...(생략)... 우리 태조께서 즉위하신 후, 김부가 아직 방문하지 않고 견훤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시어 북방을 친히 순시하시니, 그 뜻은 동명구양(東明舊壤)[182]을 오가청모(吾家靑氈)[183]로 여기시어 반드시 석권하시려 함이었다. 을 다루고 오리를 잡는데에 멈추려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184]...(생략)...

- 고려사 태조 세가 논평 중 발췌.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중략)...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생략) 태종(太宗)이 만국(萬國)을 신하로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려하니 장군(將軍)에게 장수들을 통제하게 해 우리 고려(我高麗)를 침범했소. 장군은 불행히도 이겨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우리나라(我國)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생략)

-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 중 발췌.[185]

고려의 국가 정체성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고려는 문화적으로 고구려의 역사와 유산을 크게 중요시하여 많은 부분에서 이를 계승했다. 국호부터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명이었던 고려를 그대로 이어서 썼고[186],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의 본기에 고구려를 포함시켰으며, 잊혀질 뻔했던 동명성왕을 시조로 공인해[187]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지배층은 민족적으로도 스스로가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신라와 달리, 고려는 왕건을 포함한 개국 세력부터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가 고구려에 대해서만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계승 의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도 있었고 꽤나 복합적이어서 구삼국 중 하나만을 선택했다고 특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고려 중기에 편찬된 국가 공식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옛 삼국은 동등했고, 그 중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먼저 한반도의 통일 왕조가 되었으나 나중에 그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가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관념이 드러난다. 고려 중기부터는 의외로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다. 이는 고려 초기에 비해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일통 의식이 고구려 계승 의식만큼이나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고구려 계승 의식이 완전히 삼한일통 의식으로 대체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초에 고려는 국호에서부터 고구려의 것을 계승했고 국가적 시조를 동명성왕으로 두고 숭배할 정도로 국가의 뿌리를 고구려로부터 찾았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삼한일통 의식이 강해진 이래 사서에는 명목 상 삼국 간에 차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국 중에서도 고구려는 분명 좀 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려가 삼한일통 의식을 형성하는 와중에도 고구려 계승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고려의 존속 기간 내내 중시되었다. 특정 한 나라에 치우치지 않고 삼국을 대등하게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는 조선이 통일신라나 고려와 달리 삼국을 초월한 정체성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 요동을 고토로 보던 당시 고려 조정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188]

고구려의 후신임을 단순히 표방한 것을 넘어 고구려의 국제적 지위와 지정학적 유산을 계승하는 것을 국가적 과업으로 삼고 추진하기도 했다. 고려는 국제적으로 자국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내세워 고구려의 고토였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꾸준히 주장했다. 당연히 이를 수복하기 위한 실제적인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비롯해 내외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수 차례나 북방원정이 추진되었다. 이는 모두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하고 계승하기 위한 시도였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천명하여 이를 인정받으려고 한 대표적인 사례는 서희의 담판이었다.

이런 고려의 노력 덕분에 고려는 당대에 국제적으로도 고구려의 적자로서 인정받았다. 오랜 기간 고려의 주적이었던 요나라는 물론이고 고려와 긴장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는 고려사 문종 세가 11년 3월조에 있는 요나라의 고려에 대한 책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책봉문에는 요나라 황제가 문종이 주몽의 나라를 이었다고 써놓았다. 한참 뒤에 나타난 기마민족 국가인 몽골 제국도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았다.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고려가 항복 사절단을 보내왔을 때 당태종도 무너뜨리지 못한 나라를 자신이 굴복시켰다고 말하며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에서 저술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를 아예 고구려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라고 기록해놓았다.

하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보는 시각은 발해와 비교해 적다. 이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고려 사이에 통일신라라는 또다른 통일왕조가 존재했던 데다가 무엇보다 고려의 영토가 고구려에 비해 협소했기 때문이다.[189] 즉, '만주를 정벌한 강대국 고구려의 계승국이 소국인 고려일 수는 없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입장인 것이다. 단순히 영토의 크기에서 고구려와 맞먹는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고려의 정통성과 역사적 성과를 엄청나게 폄하한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영토적 유산을 발해 이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고토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중심지였던 패서지역이다. 이곳을 차지한 고려는 발해에 비해 고구려의 알짜배기땅들을 더 많이 차지한 셈이었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사회문화적 유산을 계승하고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도 발해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영유하고 있었던 것은 고려 스스로도 고구려의 정통 후계국임을 내세우는 강력한 근거였다. 이런 정통성과 더불어 고려의 강력한 계승 의식 덕분에 당대에 국제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으로서 훨씬 널리 인정받은 것도 발해가 아닌 고려였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토의 크기와 만주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만주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요동이나 만주 벌판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시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적절한 견해라고 보기 힘들다. 고구려의 중심지는 대중이 그렇게 좋아하는 만주가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인 패서지역과 평양성 일대였다.[190] 요동 일대는 분명 군사적 방어선이자 농업 요충지라는 측면에서 고구려에게 중요한 땅이었지만 고구려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현대 한국에서 군사적 요충지인 강원도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중요한 땅이라고는 해도 중심지라고는 결코 부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흥미롭게도 고려의 계승 의식과는 별개로 고려의 지정학적 조건도 신라보다는 고구려와 유사했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에는 대륙세력으로부터 유리되어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는 당나라와 발해 같은 안정된 제국들이 이민족들로부터 통일신라의 완충지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신라와 달리 해양국가적 속성은 줄고 고구려처럼 대륙세력과의 역학관계가 부각되었다. 이는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과 같은 북방의 강력한 기마민족들과 완충지대 없이 직접적으로 인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중요한 해상 교류 국가였던 일본은 동시기에 고립을 선택하면서 덩달아 고려의 해양 교류 빈도도 크게 줄었다. 그로 인해 고려사는 해양세력과의 교류보다는 대륙세력과의 투쟁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발해와 고려 모두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한국판 촉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양쪽 간에는 상당히 공통점이 많다. 일단 창업군주인 왕건이나 황제인 유비가 나라를 세울 때 각지의 세력을 모아 나라를 건국했고 게다가 촉한 고려 모두 촉한은 한나라이주민+강족+남만족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세워졌고 고려 역시 고구려계유민+신라유민+후백제유민 +발해유민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살았다. 촉한과 고려 모두 조상나라들의 부흥을 내걸었던 점도 비슷한데, 촉한은 국시로 한나라 부흥을 내세웠고 고려는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다. 양쪽 모두 조상의 광대한 영토는 잃었지만 그 중 알짜배기 땅들은 어떻게든 지켜내서 그 핵심지들을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11.4. 무장의 나라

※출처 :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님 블로그

후삼국 통일전쟁이라는 전쟁의 최종승자가 됨으로서 자리잡은 나라고 500여년의 역사동안 평화로웠던 적이 별로 없었던 나라라 무장들의 활약상이 눈에 많이 띈다. 절대 좋기만한게 아니다. 역사에 이름을 뚜렷히 남긴 무장들이 많다는건 그냥 전란과 내란이 끊이지 않았단 말과 다르지 않다. 건국기엔 후삼국 통일전쟁, 성종~현종대까지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 왕조의 최고 전성기인 현종 중기~인종 시기에는 숙종-예종 양대에 걸친 거국적인 여진전쟁과 1년 이상 지속된 인종시기 서경반란(묘청의 난)이 있었으며 무신정권기 조위총의 난을 이후부턴 내란과 외침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수백년간 평화가 지속된 조선과 확연히 비교되는 부분.

이처럼 외부 세력의 침입과 내전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군인의 수요가 컸고, 후대 조선 시대에 비해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약한 편이었으며 격구수박(무술)과 같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이었을 정도. 무신정권까지 있던 나라라 그런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보인 전설적인 무인들이 꽤나 많다.

이같은 무장세력의 구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수조지인 군인전을 기반으로 한 군반씨족설과 중앙군과 면세 혜택을 준 농민병들을 활용하는 부병제설로 나뉘었다. 고려 시기 군제에 대한 소략한 기록이 두 가지에 모두 걸쳐있었기 때문인데 최근에는 경외군 혼성제설이라 하여 두가지 모두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비율은 알 방법이 없다.

  • 개국공신 중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는 활약을 보였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 전쟁 때 활약한 무인으로, 방에 자객이 난입하자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 여요전쟁 때 양규는 1천여 명의 병력으로 6천 명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다시 말해서, 6배가 넘는 적이 지키는 성을 함락해 버렸다는(...) 뜻이다. [191] 이후 소수 병력으로 기습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히며 3만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있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 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당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 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여진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출처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
  • 여진전쟁 때 활약한 한국사 최강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두경승수박의 고수였으며 궁궐에서 주먹으로 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어서 죽이고, 조위총을 토벌하던 전투 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적진으로 돌진해 적군을 물리쳤다.
  • 경대승은 약관(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는데,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당시에는 (위에서 서술되어 있는 용력의 소유자인)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 해서 경주로 내려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 김경손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고 돌아왔다.
  • 승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저격 사살했다. 후에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쏜 게 아니며,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 합단적이 침입할 때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 즉 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 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앗는 놀라운 전과를 보여준다.
  •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 때 7명의 궁병과 함께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더불어, 옆에 있는 장수 흥원창판관 조신은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합단적은 물러간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은 후,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는데 손을 다쳤으나 그 부상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적들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자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렸고, 그 적장을 움켜잡아 베어 죽이고 장창에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고.
  • 최영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에게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고 국내에선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전투를 벌여 그대로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 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 이성계의 궁술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며, 활만 잘 쏜 것 뿐만 아니라 전략과 무력도 뛰어났고, 훌륭한 야전 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약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조선 태조인 이성계를 띄워주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기 때문. 하지만, 허나 여러 민족의 외적과 싸우면서도 이성계의 무패의 기록과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이외에 원사, 일본사에도 이성계의 초월적인 활 솜씨가 기록되어 있다. 국내 기록에도 시종일관 신적인 내용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활의 극한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11.5. 한국사 발전

그리고 고려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가 편찬되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한국사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존재가 그나마 역사학계에서 큰 도움이 되고있는 셈이다.

11.6. 한민족 왕조 비교

11.6.1. 이전 국가와의 비교

11.6.2. 조선과의 비교

12. 인물

  자세한 내용은 고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고려사 연구의 난관

고려 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조선시대에 비해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고려 초는 더 심해서, 몇백년 전인 7세기 삼국통일 당시보다도 사료가 적다.[192]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 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이 중요 사료로 꼽힌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다. 고려에도 고려실록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대몽항쟁기 등의 전란 때 소실, 남아있는 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축약본이다.

그 외 3가지 사료 모두 편파성이 있다. 일단 조선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와, 북송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 스스로 역사를 서술한 예는 드물다. 고려 시대에 삼국을 바라본 예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이다. 이 두 역사서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지만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한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써서 편파성을 줄인 고려사와 그런 거 없는 고려사절요는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집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홍보 요소가 제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여러 모로 비판을 받고있다. 거기다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때 너무 부족하다.[193] 이는 고려가 겪었던 여러 전란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려도경의 경우는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 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이 세 사료 모두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내에 짐, 외왕내제 등 조선 시대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단어가 가감없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고려 사람의 시각에서 고려시대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또 고려도경은 중국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라본 사서고 그 시기 또한 한정적이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이 있지만 고려 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사 연구자 대부분은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담으로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194]에서 2017년 5월 22일 고려의 천리장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5월 26일 관련 학술 대회를 열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 # 그러나 학술 대회를 반복적으로 열 뿐, 정식 논문으로는 단 한 차례도 제출된 바 없으며, 통용되어 쓰이는 압록(鴨錄)과 압록(鴨淥)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리적으로 문제가 많다. 다만 러시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고려시대 유적이 나왔다고 하니...# 일단은 두고 봐야할 듯 싶다. 조선시대 유적도 나옴으로서 고려-조선 시기의 국경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조선과 달리 고려 유적지 접근에 대한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195]

14.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

  자세한 내용은 고려/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 같이보기

15.1. 정치

15.2. 행정

15.3. 군사

15.4. 경제

15.5. 문화

15.6. 건축

15.7. 고려를 다룬 사서

15.8.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5.9. 기타

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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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

신진사대부

고려의 궁궐

만월대

수창궁

강화 고려궁

후삼국통일전쟁 주요전사

889년

899년

901년

903년-914년

916년

920년

924년

925년

927년

원종·애노의 난

비뇌성 전투

제1차
대야성 전투

나주 공방전

제2차
대야성 전투

제3차
대야성 전투

제1차
조물성 전투

제2차
조물성 전투

제4차
대야성 전투

원종
애노군

신라

궁예

양길

신라

백제

태봉

백제

신라

백제

백제

신라

고려

백제

고려

백제

고려

백제

927년

928년

928년

929년

929년-930년

932년

933년

934년

936년

서라벌기습전
공산전투

삼년산성
전투

제5차
대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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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사진속 벽봉기는 조선시대의 것이다. 고려역시 벽봉기는 사용하였으나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2. [2] 부속도서는 우산국, 탐라국 등. 단, 공민왕 때는 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요동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그리고 일부 역사서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학계가 설정한것도 있다. 고려 영토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 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비정이 달라질 수 있다. 당대에 고려의 동계가 전대의 고구려보다 더 동쪽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3. [3] 본궐은 태봉국 철원성.
  4. [4] 전반부에는 본궐은 만월대. 임시로 연경궁, 수창궁이 쓰였다. 후반부에는 본궐은 만월대를 흡수한 연경궁. 공민왕 대엔 수창궁. 다만 우왕과 공양왕 대에 일시적으로 남경(지금의 서울)이 수도였다. 기간은 1382~83년, 1390~91년.
  5. [5]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 본궐은 고려궁지.
  6. [6] 본궐은 장락궁.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기간 동안 서경의 지위는 고려의 '부수도'가 아닌 '또 다른 수도'였다. 다만 묘청의 난 이후에는 수도가 아닌 부수도로 격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지방 행정 부분 참조.
  7. [7] 말갈족은 대부분이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 때 들어왔다. 이후에도 여진족이나 거란족 중 일부가 고려인으로 통합되었다. 통일신라기에는 후삼국으로 분열할 만큼 종족 정체성이 유동적이었으나, 이르면 고려 전기, 늦어도 고려 후기에 고려인, 신라인, 가야인 등의 독자적 정체성이 완전히 소멸한 것으로 보인다.
  8. [8]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9. [9] 모든 고려국왕의 공식 존호는 '대왕(大王)'이었다. 광종 대성대왕 재위 중 몇년 간 황제(皇帝)호로 바뀌었다가 대왕호로 돌아왔다. 고려국왕은 외왕내제 체제 하에 천자로 군림했다. 고려국왕은 만승(萬乘), 성황(聖皇), 황왕(皇王), 신성제왕(神聖帝王) 등 천자국 예법에 맞는 미칭을 사용하였다.
  10. [10] 원 간섭기로 인해 천자의 제후가 됐으며 성립 후 명 천자의 제후임을 천명했다. 공민왕 재위 중 몇년 간 외왕내제 체제 하의 천자로 돌아가고자 했다.
  11. [11]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12. [12] 말이 좋아 항쟁이지 3차 침입 이후부터는 국토의 대부분이 쓸려나가는 동시에 육지의 백성들이 몽골군에게 참혹하게 도륙당하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시기였다. 한편 당시 권력자 집단이었던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숨어 호위호식하고 있었다.
  13. [13] 고려에게 운이 좋게도 쳐들어온 몽골군은 최정예군은 아니었다. 당시 몽골 최정예군은 중국 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여진족 장수로서 혼성 부대를 지휘한 오야르 등의 군대나 혹은 예구 대왕의 동방 왕가 병력으로 볼 때 '타마(보조 경기병대)'로 추정되는데 타마의 주 역할은 전장에서의 보조 지원 및 정복지에 대한 치안 관리 및 유지였다. 또한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왕영조가 이끈 부대가 한군(漢軍)인데 한군의 주 역할은 몽골군이 접수한 요새나 고을을 지키는 주둔병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고려의 저항이 끈질기긴 했던 모양(정확힌 베트남 등까지). 더군다나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14. [14]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 참조.
  15. [15]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16. [16]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르는 것.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했다. 조선 전기의 한글 문헌에서는 '고려'로 발음이 언급되는 바,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고려라고 불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훗날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지게 된다.
  17. [17] 현대의 발음은 '가오리'지만 당송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까우례(kɑu liᴇ) 또는 까우레이(kɑu lei)다.
  18. [18] 고구려 역시 고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마 신사(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유민들이 세운 신사. 현존하고 있다.), 코마가와역 등.
  19. [19] Solongos, 중세 몽골어로는 ᠰᠣᠯᠤᠩᠭᠤᠰ, Solungɣus. 현대 몽골인들은 한국을 설렁거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른다. Solongos는 몽골어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 국립 할하 몽골어 학회에서는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근거없는 낭설이다.
  20. [20] 현대 몽골어로는 현대 한국과 구별하여 고려를 Kuryo라고도 한다.
  21. [21] 다만 중국과 국내 일부 재야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조건 어거지로만 보기도 뭐한 게 중국 쪽 일부에서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인식은 단순히 동북공정의 여파가 아닌 오래전부터 있던 인식이었기 때문. 실제로 고려 서희와 요나라 소손녕과의 회담에서도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통일 신라가 지배한 적이 없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의 영토 획득에 고려는 정당한 권리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다. 하나 이에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니 거란이야말로 동경(옛 고구려의 땅)을 정당한 권리도 없이 점거한 것이라고 반론하여 소손녕의 인식을 지적한 바 있다. 소손녕 또한 서희의 말에 수긍한다. 다만 소손녕은 유목민족인 거란족이었기 때문에 비록 거란족의 요나라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걸 보편적인 당대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화북은커녕 연운16주 같이 화북의 북쪽 매우 일부만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애초 삼국이 현존하던 당나라대 중국에서는 삼한이라고 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족속으로 퉁쳐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당장 중국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지 비문만 봐도 요동삼한인이라고 지칭해놓은 게 상당하다. 게다가 요나라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정통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지식인인 소식은 정작 고려를 비칭할 때 고구려를 까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어인 맥적(맥족 도적)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송의 서긍이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는 고씨 왕조가 망했다가 왕씨 왕조가 들고 일어난 걸로, 즉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그 외 원이 새로 일어난 명에 달달 털려 북원으로 전락하던 시기에도 "북원의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고려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라는 기록도 있다. 요양성은 옛 요동성을 가리키는데, 이에 의하면 원나라 장수와 고려 정부 모두 요동이 옛날에는 고려의 땅이었다고, 즉 '고구려=고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는 형태였지만 당시엔 대부분 망하고 없었다). 한편, 좀 더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자면 계승 의식은 고구려를 표방했지만 실질적 세력권은 신라 영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신라(+백제)를 다 품은 것. 이는 한족이란 개념이 하상주나 진이 아닌 한나라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22. [22] 예를 들어 태자사낭공대사비나 대각국사문집.
  23. [23]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은 3성 6부제가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기도 하다.
  24. [24] 승선은 조선시대의 승지로 이해하면 된다.
  25. [25] 서경의 수도로서의 확고한 지위는 훈요십조, 분사제도, 서희의 발언, 서경별곡의 가사 등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개경보다 왕이 머무는 기간이 짧았고 주요 정쟁도 개경에서 벌어졌으며 고려왕릉 한 기도 평양 근교에 없기 때문에 '제 1 수도' 개경의 지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개경에 비한 은근한 차별의 결과가 바로 그 유명한 묘청의 난.
  26. [26] 이 역시 다르게 생각해보면 동경, 남경보다 여전히 우월한 서경의 지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동경과 남경에서 반란이 날 경우 반역향으로 찍혀 3경에서 아예 탈락하고 후대에나 재승격을 기대해야 하지만 서경은 숱한 반란에도 불구하고 '부수도' 미만으로 격하당한 적이 없다. 묘청의 난 당시에도 따지고 보면 왕에게 대놓고 반기를 드러낸 사건임에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사이에 선을 긋는 수준에 그쳤지 서경을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7. [27] 양주시, 광주시.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28. [28]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
  29. [29] 오늘날의 황해도.
  30. [30] 오늘날의 평안도.
  31. [31]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
  32. [32]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33. [33] 다만 한성백제의 역사를 포함하면 천년을 넘는다.
  34. [34] 서경 - 고구려, 남경 - 백제, 동경 - 신라.
  35. [35] 고려는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 국명 '고려'를 그대로 따왔지만 정작 본인들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는 고구려를 고려라 하지 않고 이전 국명인 고구려로 명명해 본인들과 또 미세한 선을 그었다. 게다가 신라본기가 더 앞에 온다는 점은 덤.
  36. [36] 알다시피 한반도는 산지가 70%를 넘는 지형이라 지리적 구분이 상당히 공고했다. 괜히 삼국이 수백 년을 싸워도 당나라가 개입하기 전까진 결판이 안 났고 그 와중에 가야, 마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잔존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37. [37] 조선을 세운 전주 이씨 왕가도 원래는 전주 지역의 호족 가문이었으나 몽골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박살이 난 뒤에는 강원도로 이주했다가 함경도 끝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등 광범위한 이동성을 보인다. 고려 초중기 때만 해도 본관은 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분과 세력을 드러내는 등 지역과 가문이 극도로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는데 몽골군에 의해 대혼란이 찾아온 뒤로는 그러한 개념은 무너져 버린다.
  38. [38] 하지만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
  39. [39] 다만 위에서도 설명했듯 고려 전기의 서경의 지위는 부수도라 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40. [40] 허나 이 정책이 계속되며 무신들의 불만을 사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원인이 되었다.
  41. [41] 유금필, 홍유, 배훤경 등등.
  42. [42] 공훤, 왕순식, 박수경 등등.
  43. [43] 출처: 고려의 무비(武備)와 전투, 한국콘텐츠진흥원
  44. [44]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
  45. [45] 3군에 전군(前軍), 후군(後軍)을 포함한 것
  46. [46] 이 셋을 합쳐 3위라 일컬었다
  47. [47] 1령은 1000명으로 32령은 32,000명
  48. [출처] 48.1 역사비평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 비평사, 2009년, p188 - 189
  49. [49] 가령 척준경의 아버지 척위공은 예종에게 검교대장군 직을 받았다. 진짜 2군6위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명예 대장군인 것이다.
  50. [50] 유명한 척준경이 이 녹사 직을 위임했었다.
  51. [51] 양계 지역에는 주진군 뿐 아니라 3위인 좌우위(左右衛), 흥위위(興威衛), 천우위(千牛衛) 병력도 주둔하였다.
  52. [52] 사료에 의하면 여진족 해적들은 울릉도, 심지어는 일본의 규슈지역까지 약탈했다고 한다. 이걸 일본에선 도이의 입구라고 부르는데 이 여진 해적들을 쓰러트린 게 고려 수군이다.
  53. [53] 이때의 통주 전투는 고려군 30만명과 거란군 20만명이 싸워 도합 50만 대군이 전투를 벌임으로서 한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로 기록된다. 하지만 결과는 고려군의 참패로 고려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
  54. [54] 유명한 귀주대첩에 동원된 군사수로 고려군 20만명과 거란군 10만명이 격돌해 도합 30만 대군이 싸운 회전이었다. 거란군은 배수진을 치며 용맹하게 싸웠으나 포위섬멸되어 전멸했다.
  55. [55] 공험진 전투 기준
  56. [56] 갈라수 전투 기준
  57. [57] 공험진, 갈라수 두 전투의 군대가 별개라고 가정했을 시의 규모이다.
  58. [58]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다.
  59. [59] 심지어 원나라 시기 토크토아장사성의 난 진압군은 호왈 800만명이라고 한다!
  60. [60] 장손무기왈, 출처
  61. [61] 다만 조선도 초기인 태종 ~ 문종 한정으로는 군사력이 제법 견실해서 병력 동원력이 만만치 않았었다. 세조 때는 잠재적인 병력만 30만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62. [62] 유민 9만명이 넘어 왔다고 한다. 9만명 전부가 군인은 아니라해도 엄청난 숫자이니 실 병력도 수만은 되었을 것이다.
  63. [63] 대체적으로 5만 이하의 병력으로 침입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64. [64] 1차 원정에서 몽골군의 지휘관 훈둔이 말하길,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65. [65] 현 김포시
  66. [66] 현 하동군
  67. [67] 현 함흥시
  68. [68]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잔당
  69. [69] 조선의 경우엔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
  70. [70] 하지만 고선지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군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 이후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
  71. [71]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처럼.
  72. [72] 이전버전에는 이것을 빌미로 외국에서는 조선과 조선반도라고 쓰지 한국과 한반도라고 쓰진 않는다고 글의 맥락과 맞지도 않는 억지글을 이 부분에 삽입했다.
  73. [73]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다원적 천하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며 1227년 서하의 멸망, 1234년 금나라 멸망, 1270년 고려의 출륙과 개경 환도, 1271년 원의 건국으로 4세기에 걸친 다원적 질서는 종말을 고한다.
  74. [74]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다.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기술되어 있다.
  75. [75]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
  76. [76]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갈려나가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
  77. [77] 금도 고려의 칭신사대가 꽤나 필요했었다. 당시 요, 송 등 중원에 자리잡은 왕조들을 그야말로 때려 잡고 잘나가던 시기에도 고려 전선에서는 꽤나 고전했었으니 고려에 대한 공포심이 생각보다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오죽하면 금의 황제가 부하들로 하여금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거나 사사로이 공격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정도. 물론 고려에 대한 공포심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그보단 한반도에 개입하고 싶지 않은 금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금의 관심은 언제나 중원에 쏠려있었고, 만주 쪽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불과했다. 원의 발흥으로 위기가 시작되었던 때에도 끊임없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남송과 혈전을 벌였을 정도니.
  78. [78] 묘청의 난
  79. [79] 다만 조선도 철저한 사대관계를 따르기는 했지만, 왕의 묘호에 '조'나 '종'을 사용하는 등 소극적으로는 표시했었다.
  80. [80] 한자 지식이 완숙하지 못하던 시기에는 왕(王)과 황(皇)의 구분이 엄밀하지 않았다. 당시 비(非) 중국문화권이었던 삼국과 일본에서는 표기만 王이라 해놓고 개차, 건길지, 마립간, 오키미 등 자신들 고유의 단어로 군주를 가리켰다. 그러다 한자 문화권에 점점 깊이 포섭되면서 마침내 그러한 고유 칭호는 사라지게 된다.
  81. [81]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함경남도 안변군이 고려 때 설치되었던 안동도호부와 안변도호부의 흔적이다.
  82. [82] 고려사 예지에는 요, 금을 북조라 표현. 이 시기 사신을 맞는 예가 후대의 명청과는 다르며 예지에도 북조와 고려 말엽 명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서술되어 있다.
  83. [83] 광종을 가리키며 묘호인 종(宗)을 썻다.
  84. [84] 광종을 가리킨다.
  85. [85] 정종을 가리킨다.
  86. [86] 인종을 뜻함
  87. [87] '조천'은 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쓰는 표현으로 '하늘을 받든다.'란 뜻이다.
  88. [88] 문종을 가리킨다.
  89. [89] 명의태후를 뜻한다.
  90. [90] 최의를 가리킨다.
  91. [91] 신종(神宗)이라고 묘호인 종(宗)을 썻다.
  92. [92] 만월대를 가리킨다.
  93. [93] '태평'이 여기에서 나오는 금상황제인 경종의 연호라는 주장이 있다.
  94. [94] 탈 승(乘)자는 수레를 의미하는데 주나라 천자는 전차 1만승(乘)과 6군을 거느린다고 했으며 제후는 전차 1천승과 3군을 거느린다고 한것이 출전이다.
  95. [95] 현종을 두고 한 찬사다.
  96. [96] 1080년경에 송나라곽약허가 지은 책
  97. [97] 미나모토노 토시후사 저작
  98. [98]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였다.
  99. [99] 원종을 뜻한다.
  100. [100] 여기서 태손은 충렬왕을 뜻하며 태손의 태(太)와 같이 '태'자가 들어가는 태자, 태손, 태후, 태위, 태사, 태묘 등등의 어휘는 천자국만 쓸 수 있다. 그래서 조선왕조 같은 경우에는 세자, 세손, 대비, 종묘로 하고 태위, 태사 같은 벼슬은 두지 않았다.
  101. [101] 내용 중에는 왕위(王位)나 사왕(嗣王)같은 제후국의 표현도 나오는것으로 보아 용어의 정함이 엄밀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있다.
  102. [102] 천자국에서는 황실에 속한 사람들의 생일을 여기서 나온 '천춘절(千春節)'같이 'xx절'이라 부르며 특별히 기념한다. 이것이 절일이다.
  103. [103] 서경을 뜻한다. 서경에 갔다 병이 났기 때문이다.
  104. [104] 왕좌를 뜻한다.
  105. [105] 예종을 말하는 것으로 제후국의 왕과 천자국의 태자를 혼용하였다.
  106. [106] 방(方)은 천하, 제후를 의미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지방 행정단위이다.
  107. [107] 고굉은 팔이란 뜻인데 고굉대신은 팔 같은 신하, 즉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
  108. [108] 辟은 임금 벽 자다. 백벽은 백 명의 임금, 즉 다시말해 백명의 제후를 말한다. 숙종이 황제로서 제후들에게 말하는 상황에서 나온 단어다.
  109. [109] 왕이라는 용어도 혼용에서 쓰는 고려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10. [110] 태사와 중서령, 공작 모두 천자국의 제도이다.
  111. [111] 구오지존은 주역의 이치에 따라 황제의 지위를 이르는 말이다.
  112. [112] 친왕황제의 황자에게 내리는 제후 왕작이다.
  113. [113]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을 뜻한다.
  114. [114] 모든 공작이라는 뜻이다.
  115. [115] 인종을 뜻함
  116. [116] 원자란 뜻이다.
  117. [117] 왕이란 용어도 혼용함을 알 수 있다.
  118. [118] 방(方)은 나라 방 자로 쓰인 것으로 천하 혹 제후들을 지칭한다. 진(鎭), 주(州), 목(牧)은 고려의 행정단위이다.
  119. [119] 태묘를 뜻함
  120. [120] 사직을 뜻함
  121. [121] 태자의 다른 말이다.
  122. [122] 方은 나라 방 자이기도 하다. 즉 多方은 많은 나라, 천하란 뜻이다.
  123. [123] 왕도 혼용해서 사용했다.
  124. [124] 강도(江都) 고려궁지에 있던 본궐의 편전.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
  125. [125] 밀교의 세례식이다.
  126. [126] 황제는 황색옷을 입는다.
  127. [127]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파견한 관리들.
  128. [128] 제후식으로는 세자다. 당시 태손은 충렬왕이다. 아직 태자로 승급하지 못한 상태이기에 태손으로 불렸다.
  129. [129] 황제만 봉작 할 수 있는 제후의 등급들이다. 고려의 봉작제는 이분화되어있었다. 신하의 오등작, 왕족의 삼등작인데 여기선 왕족의 삼등작을 지칭한 것이다.
  130. [130] 고려 양대 최고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을 지칭한다.
  131. [131]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다.
  132. [132] 제후왕식으로는 천세이다.
  133. [133] 만월대 본궐에 있던 전각.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으나 중기부터 제 2정전으로 밀려 났다.
  134. [134] 천자를 뜻하는 말로 대부의 나라는 백승지국(百乘之國), 제후국은 '천승지국(千乘之國)', 천자국은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부른데서 연원한다.
  135. [135] 유교를 뜻한다.
  136. [136] 불교를 뜻한다.
  137. [137] 고려의 애매한 법식을 나타내는 단어로 왕과 태자를 붙여 사용했다. 의종을 뜻한다.
  138. [138] 역시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고 있다.
  139. [139] 역시 왕이라는 단어도 혼용하고 있다.
  140. [140] 천자가 천하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사(赦)한다고 표현한다.
  141. [141] 제후가 자기 경역에 온정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142. [142]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는걸 주(奏)라고 한다. 제후가 천자에게 아뢰는 것도 주(奏)라하기 때문에 다루가치가 불평한 것이다.
  143. [143] 고는 족보상 아버지를 의미하고 숙은 숙종의 묘호, 황은 황제를 의미한다. 즉 황숙고는 내 아버지인 숙종 황제란 뜻이다.
  144. [144] 태묘에 제사지내는 군주의 임무를 의미함.
  145. [145] 황제의 아버지.
  146. [146] 여진의 관리들
  147. [147] 천자의 조정, 즉 고려의 조정을 의미한다.
  148. [148] 1109년, 윤관이 화친하자는 여진 장수 오사에게 전한 말이다.
  149. [149] 인종을 의미함.
  150. [150] 성종을 뜻한다.
  151. [151] 이종서, 고려 국왕과 관리의 복식(服飾)이 반영하는 국가 위상과 자의식의 변동.
  152. [152] 예종(1105~1122)이 대방공 왕보(王俌)를 책봉한 글에 보이는 기록으로 대방공 왕보는 숙종의 아들로서 인종에게는 동생이 되어 중국의 제도에 따르면 친왕(親王)에 해당한다. 그런데 예종은 왕보를 책봉하면서 9류관과 9장복으로 구성된 제복을 사여하였다. 이는 당과 송에서 친왕에게 적용되는 등급이다. 따라서 예종을 포함한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태묘 제사 등의 국내 의례에서 12류관과 12장복으로 구성된 제복을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151]
  153. [153] 제후국 법도로는 종묘라 해야 한다.
  154. [154] 제후의 법식으로는 '유경내'(宥境內)라고 해야한다.
  155. [155] 겸양의 표현으로 수많은 서생 중 하나라는 뜻이다.
  156. [156] 하늘로서 듣는자, 다시말해 천자를 뜻한다.
  157. [157] 하늘과의 소통은 인간 중에서는 오직 천자만의 특권이다.
  158. [158] 후대가 만대로 간다는 뜻으로 제후는 만(萬)이 아닌 천(千)을 써야 한다.
  159. [159] 주문왕의 자칭.
  160. [160] 이 대사천하란 표현은 고려사에서 최대한 과거의 표현을 직서하고자 한 세종대왕까지도 꺼려했다. 결국 뒤의 천하를 빼버려 직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161. [161] 요 임금. 피휘를 위해 요를 고라고 하였다.
  162. [162] 경주를 가리킴
  163. [163] 평양을 가리킴
  164. [164] 인종을 가리킴
  165. [165] 즉석에서 만들어 부르는 시.
  166. [166] 망한 주나라의 천명이 고려에 왔다는 뜻이다.
  167. [167] 하늘의 근원인 황제를 이른다. 반대로 황후는 땅의 근원, 곤원이라 한다.
  168. [168] 황제가 있는 장소.
  169. [169] 북진은 천자, 임금을 상징하는 별자리다.
  170. [170] 인종을 이른다.
  171. [171] 황제가 태산에서 행하는 의식
  172. [172] 여기서 공은 이성계를 부르는 것이다. 오등작은 제후국에서는 쓸수 없는 칭호다.
  173. [173] 최영이성계한테 한 말이다.
  174. [174] 거란
  175. [175] 거란을 평정한 것을 칭송함
  176. [176] 만대가 지속할 천자
  177. [177] 1인자
  178. [178] 성스러운 황제
  179. [179] 나의 황제
  180. [180] 황제의 줄임말.
  181. [181]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고고학이고 뭐고 없었던 고려-조선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봤다는 것이다.
  182. [182] 직역하면 '동명성왕의 옛 땅.' 고구려의 옛 영토를 의미한다.
  183. [183] 직역하면 '우리 가문의 푸른색 비단 이불.' 즉 고려의 가보란 뜻이다.
  184. [184] 태조 즉위 설화 중 하나인 '왕창근의 거울'에서 인용한 것이다. 닭은 계림(鷄林), 즉 신라를 비유하고 오리는 압록(鴨綠), 즉 압록강을 의미한다.
  185. [185] 소정방은 백제 - 나당연합군 전쟁에서 일정 성과를 끌어냈지만, 고(구)려 - 나당연합군 전쟁에선 대패하여 겨우 도망쳤다. 즉 제문과는 다르게 고구려에서 죽진 않은 셈.
  186. [186] 고려사열전에서 윤관의 여진정벌 부분에서는 아예 고구려를 '구고려'라고 칭한다.
  187. [187] 동명성왕의 사당은 서경(평양)의 장락궁에 위치했다.
  188. [188] 다만 이것이 고려가 조선보다 무조건 높이 평가받을 만한 요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세한 것은 고려/조선과의 비교원정 항목 참고. 그리고 조선 역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189. [189] 하지만 영토의 넓이와 별개로 영토의 질과 생산력은 고려가 고구려를 압도했다. 전근대에는 고구려의 북쪽 영토보다 한반도 남부인 삼남 지방이 비옥했는데 고구려는 삼남 지방을 차지하지 못했고 경기도 일대도 꼴랑 76년밖에 지배하지 못했다.
  190. [190] 이 지역들은 현재 북한의 사회문화적 중심지들이기도 하다.
  191. [191] 거란군의 규모가 과장되었거나 안에서 고려 백성들이나 잔존 병력의 내응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어떻게 봐도 대단한 전공임에는 틀림없다.
  192. [192] 이 시기는 한중일 3국이 모두 엮여서 기록이 적은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그나마 기록이 풍부한 시기다.
  193. [193] 물론 비교 대상이 너무 먼치킨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
  194. [194] 참 골때리는 게, 역사 학술 연구소를 표방하면서 정작 연구소장인 김연성 교수는 역사학 비전공자(경영학부)이다. 그나마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가 사학 전공이지만 학계의 주류 학설과는 다르다.
  195. [195]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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