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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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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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2]

연호

영락(永樂)

성씨

고(高)

담덕(談德)[3] / 안(安)[4] / 평안(平安)[5]

황태자

고거련(高巨連)

태자

고승천(高升千)[6]

부왕

고국양왕

출생지

국내성 - 이련의 잠저[7]

묘지

국강상(國罡上)[8]

생몰연도

374년 ~ 413년 음10월 (38-39세)[9]

재위기간

391년 음5월 ~ 413년 음10월 (23년)[10]

1. 개요
2. 명칭
2.1. 명칭의 의미와 이름 진위 논란
5. 태왕릉
6. 동명성왕과의 관계
7. 기타
7.1. 사료적 측면
7.2. 오늘날의 광개토대왕
7.3. 야사
7.4. 기타 학설
7.4.1. 기년 수정론
7.4.2. 유사역사학

1. 개요

태왕의 은택이 황천에 두루 미쳤고, 태왕의 위무가 사해에 떨치셨다(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광개토왕 본기』

고구려 왕조 제 19대 임금. 삼국사기 기준으론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13세손이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엔 17세손으로 기록되었다. 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져있다. 17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할 때까지 23년간 고구려와 이웃한 거의 대부분의 세력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여, 그저 그런 산골짜기 국가였던 고구려를 동북방의 패권국[11]으로 변모시킨 한국사에서 돋보이는 정복군주이다.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주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부르는 군주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12]

과장 좀 보태 일생을 전쟁만 하다 갔는데, 그 중 위기라곤 신라 구원전 때 후연모용성이 공격해오자 협공으로 곤란해진[13] 한번 정도로, 이도 얼마 안가 극복했다. 결점 아닌 결점이라면 96세까지 살았던 아들 장수왕에 비해 당대 기준으로도 단명했다는 것.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유사한데전쟁 한번 할때마다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나보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는 달리 자신이 세운 국가가 사후 분열되거나 약해지지도 않았다.[14]

광개토대왕은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과 더불어 주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많은 평가를 받아왔다. 때문에 그의 생애가 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정복활동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시켜줬는지에 초점이 더 맞춰진 측면도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식민지 경험 등으로 상처 입은 민족적 자부심을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 활약상으로 조금이나마 회복하려 했던 것.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 각종 작품은 민족주의로 떡칠되는 경우도 많은데, 되레 그 때문에 빠가 까를 만든다고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에 따라 민족주의에 대해 반감이나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려는 모습을 종종 비판하기도 한다.[15] 어찌보면 광개토대왕 본인으로선 원치않게 빠와 까를 양산하게 된 셈이니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

2. 명칭

광개토왕의 공식 명칭은 당대에 쓰여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광개토왕이라 표기하였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인 표기가 바로 '광개토 대왕'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을 줄인 '광개토 태왕'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하는 역사서와 비석에서 대왕을 칭하는 이름들이다.

시호

출처

시기

비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태왕릉비문

고구려
414년

고구려 공인 시호. 고구려 역대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한 시호가 전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광개토태왕릉비문

고구려
414년

능비문 1면에서 위의 공인 시호를 한번 표기한 뒤, 4면에서는 이렇게 축약해서 표기하고 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명 그릇

신라 / 고구려[16]
415년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 중 하나.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지'로 바뀌었다.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모두루묘지명

고구려
5세기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대개토지'로 바뀌었으며, '호태왕'이 더욱 강한 의미인 '호태성왕'으로 확장되었다.

왕호

출처

시기

비고

광개토왕
廣開土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고구려 역대 국왕의 왕호가 《삼국사기》에 일괄적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다른 국왕들과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주로 쓰인다. 시호의 '국강상'과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로 축약되었으며, '호태왕'이 '왕'으로 축소되었다. 가장 축약된 형태.

개토왕
開土王

해동고승전

고려
1215년

《삼국사기》 연표의 광개토태왕 사망 기사에도 개토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광개왕
廣開王

삼국유사

고려
1281년[17]

《삼국유사》 왕력에 광개토태왕의 왕호가 광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출처

국가

비고

담덕
談德

삼국사기

고구려, 고려

《삼국유사》에도 본명 담덕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안
平安

광개토태왕릉비

고구려 왕조(?), 중국 왕조

중국 학자 장복유가 주장하는 이름. 《진서》, 《양서》, 《자치통감》 등 중국 사료들이 이 평안을 안(安)으로 줄여 썼다. 《고려도경》에도 안으로 나와있다.

호칭

출처

국가

비고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

대한민국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왕'이라는 최대한 축약된 호칭에서 나아가, 광개토대왕을 영웅시하는 현대인들의 정서상 이를 다시 대왕으로 존칭하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며, 이따금 학계에서도 사용되곤 한다.

호태왕
好太王

광개토태왕릉비문

중국, 일본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 광개토대왕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호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전반부의 장지 명과 업적 부분을 전부 생략하고 간단히 남긴 것으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2.1. 명칭의 의미와 이름 진위 논란

이하는 광개토 태왕 시호의 뜻이다.

시호

비고

국강상
國罡上

일반적으로 임금의 묘지 장소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 이전의 태왕들과 통일된 명칭을 부여하자면 '국강상왕' 이라고 하는게 맞다[18]. 국강상 지역의 정확한 위치비정은 아직 확실한 것이 없음.

광개토경
廣開土境

임금의 시호 즉 영토를 크게 개척하셨다는 임금의 업적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지(廣開土地), 대개토지(大開土地) 같은 시호도 보인다. * 시호 중의 한 조각

평안
平安

역시 나라를 안정 시켰다는 임금의 업적(시호), 임금의 본명이라는 해석이 있다.

호태왕
好太王

임금의 미칭. 고구려만의 칭호로 추정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어 그 비문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학자 장복유가 해석한 그 비문은 광개토태왕릉비와 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본명이 평안이라는 기사를 적어두었다. (국강상태왕 호평안) 또한 다른 중국 왕조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안'이라고 칭하는걸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집안고구려비의 진위를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평안'이 임금의 진짜 본명이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많은 반론이 있다.

집안고구려비는 그 문서에 서술 된 것처럼 중국 당국이 이 비석으로 동북공정을 시도했고, 강화했으며 이에 다른 유물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이 비석만 공개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전 문서에서 추모왕, 유리왕 대주류왕 등의 이름을 시호에 전하는데 광개토 대왕의 이름은 시호에 전하지 않는다는건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처음 고구려가 세워 졌을 땐 중국식 시호 제도나 고구려식 시호 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초기엔 그저 이름만으로 전해지다가 이후에 가서야 묘지의 장소를 기입한다든지 초기와 다르게 발전했을 수도 있고, 그렇기에 '평안"은 이름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평안'이 임금의 이름인 것처럼 단정하는 서술은 잘못 됐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임금들의 이름은 대부분 순 우리 말인데 이 이름들은 중국 왕조에서 기록 될 때 많은 음차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삼국사기에선 '추모'라고 하는 이름을 전하는데 중국에선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던지, 백제 임금의 성은 부여씨로 복성인데 중국에선 여씨로 단성으로 표기했다든지 잦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중국 사서가 집안고구려비와 비슷하다고 무작정 교차 검증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개토 태왕의 이름이 평안이라는 것은 그저 주장이 될 수 밖에 없다.

3. 생애

해당 문서 참조.

4. 평가

해당 문서 참조.

5. 태왕릉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확실하진 않으나 집안시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추정된다.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으나 어쨌든 광개토왕비문이 다른 곳에 있던 걸 뽑아다 박아놓은게 아니고서야 광개토왕비문 주변에 왕릉이랄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장군총이나 태왕릉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9].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호태왕이 일반명사인지 광개토대왕을 특정한 용어인지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사실만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태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동아시아 광역 편년 체계 속에서의 시간적 위치, 그에 따른 적석총 형태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태왕릉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교적 소수론이지만 태왕릉을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태왕릉 묘실이나 봉토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태왕릉의 능원 내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굴되었던 시점에 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태왕릉에 있었던 의례행위의 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근본적이 한계가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왕비』를 고려(왕건이 세운)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괴랄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6. 동명성왕과의 관계

지안현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옛적 始祖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이하 중략)... 顧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世孫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를 永樂이라 하였다.

는 구절이 있다.

김부식삼국사기일연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이 된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만약 신채호처럼 차대왕,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본다 해도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 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왕을 유리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재사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설을 채택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6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는 주몽의 뒤를 여달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이 잇고 여율의 뒤를 막래가 이었다고 하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여달을 유리명왕으로 보고, 위서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본다면 어떻게든 세대가 맞게는 된다.

7. 기타

7.1. 사료적 측면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들 중 그 내용이 비교적 온전히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당대 역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 가장 기본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한국 고대사로 한정한다면 무척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 기록보다 많고, 고고학 발굴 성과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있다는 점이 크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다가 구한 말에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고 나서야[20] 업적이 재조명되었고, 이때 조선이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 때문에 당연히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진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면서 그 특징으로 싸움 좀 했다거나 땅 좀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역사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건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이다. 14세기에 권근삼국사절요에서 '삼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평했고[21][22] 반대로 18세기 안정복은 '고작 22년밖에 지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병림픽이잖아

7.2. 오늘날의 광개토대왕

단락이 길기 때문에 따로 분리한다. 자세한 내용은 광개토대왕/기타/오늘날 항목 참고.

7.3. 야사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환단고기》에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중국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환단고기는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단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제주도)가 항복했다는것 말고는 새로운 게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 한 줄 더 추가한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7.4. 기타 학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 것 같다...' 라는게 근거다.[23]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당시 유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데다가 유연과 고구려 사이를 북위가 가로막고 있던지라..

현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곤 한다. 한 편 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소수맥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첬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수맥은 수백년전인 유리왕 때 격파되고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토벌한 비려는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광개토대왕 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로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있던 곳에 있었으니...

다만 이걸 딱히 실증할만한 또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것같고 거란의 부족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것.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24],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 염수 등의 위치를 고증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 염수가 고유 명사일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나서 붙은 이름일수도 있는데 만주 지방에 소금이 나는 곳이 한둘인가... 부산 같은 경우도 고유 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 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 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던 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고 어딘가였던것 같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비리국일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이상한건 정작 고구려는 없다.)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하다. 광개토대왕 대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긴 했다만...

비려의 인구는 35만 정도로 추정된다.[25] 기껏 3개 부락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온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 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라...

영락 6년에 점령한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곤 하니 문제.

7.4.1. 기년 수정론

대주류왕께서 국가의 기초를 이어받으신 후 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2·9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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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신묘년이라 하고 있다. '영락 5년 을미(395년)', '영락 6년 병신(396년)'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 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는 데다가 앞서 수정론의 오류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알아서 판단하자 차후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 - 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 - 실성 귀환(10년 신축)'를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7.4.2.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고 나서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미나모토 요시츠네 = 칭기스 칸 설이랄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여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 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토욕혼이 고구려의 원수인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 = 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은 판독자에 따라 백신토곡도 되는데 신자를 어거지로 란자로 판독해서 백란 정벌설을 내세우면 꽤나 그럴싸한데 아직까지 그런 괴인은 안보인다.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 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 만큼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1. [1] 일랑 이종상, 1977년. 실제 초상화는 아니고 상상화이다.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이 그림은 갑옷이 고증오류가 심해 문제가 있다. 삼국 시대 갑옷 고증이 제대로 된 케이스로 예를 들면 이사부 표준영정이 있다.
  2. [2] 罡은 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두 글자는 이체자 관계이다. 명칭 자체도『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기 전에는 단지 광개토왕으로만 전해져 내려왔었다. 기타 광개토대왕과 같은 현대의 호칭은 '명칭' 항목 참조.
  3. [3]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등 국내의 기록.
  4. [4] 진서와 북사 등 중국 측 기록.
  5. [5] 이름 진위 논란 참조. 광개토태왕비문에서 보이는 명칭인데, 통설에서는 단순한 시호로 보았으나, 이를 왕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소수설도 있다.
  6. [6] 문자명왕의 종숙이라고 삼국사기에 기술됨. 진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지는 의심스러움.
  7. [7]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때는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으로, 아버지 고국양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다.
  8. [8] 태왕릉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으나 어디까지나 설일뿐 확실하지는 않다. 장군총도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9. [9]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준, 『광개토대왕릉비』의 향년을 적용. 위키에서 생일표기는 만나이가 기준이다.
  10. [10]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기준.
  11. [11] 광개토대왕 이후로는 중국의 남북조가 중국의 동쪽 지역은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식으로 나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는 남조와 북조의 분열기로 중원 대륙의 패권이 분산되었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광개토대왕이 인접한 모든 방향의 지역 세력들을 대부분 복속시키거나 제압한 영향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후연, 백제, 동부여, 패려 등 당시 만주와 한반도권에 자리잡은 거의 대부분의 주요 세력을 이겼다.) 다만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당시 중화권 제국 영토보다 절대 크진 않았다.
  12. [12] 물론 이런 칭호 자체가 시대나 사회성 등으로 인한 주관성이 강한 칭호긴 하다. 대중적으론 2명이 유명하지만 행사 등에서 성덕대왕, 현종대왕, 문종대왕, 정조대왕처럼 대왕 칭호를 쓰는 예는 얼마든지 있고, 업적이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부족해 대왕 소리 못듣는 군주도 있다. (사실 고구려 시기로만 따져도 장수왕이나 당대 최강국 수나라를 격퇴한 영양왕 등이 있다.) 반대로 개인의 사상이나 신념에 따라 대왕 칭호가 오글거리는 등의 이유로 그냥 안붙이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애초에 광개토왕부터가 광개토대왕비가 발견된 구한말 이전까지만 해도 크게 주목받는 왕이 아니었다.
  13. [13] 후연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고구려로 이주한 것을 빌미로 삼았다. 당시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와의 강화를 위반하고 가야, 와 동맹을 결성했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삼국 동맹을 격파하는 데 상당한 기간이 걸려 군사들을 한반도 남부에서 신속히 철수시킬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신성과 남소성이 고스란히 후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14. [14] 물론 정복의 넓이로만 보면 알렉산드로스넘사벽이긴 하다.
  15. [15]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보자면, 반전과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정복군주를 과하게 띄우는게 맞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해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는 '이웃을 침략한 적 없는 평화민족? 좋은데, 그럼 광개토대왕은 뭐냔 말이야!'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정복군주는 칭송합니다.
  16. [16]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으나,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17. [17] 편찬 시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다.
  18. [18] 다만 삼국사기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19. [19] 무엇보다 비문 옆에 있는 위치도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 크기는 곧 왕의 위상을 지칭하기도 때문에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비문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면 무덤도 대대적인 공사를 할 가능성이 높다.
  20. [20] 이렇게 된 이유로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던 압록강 이북의 경우에는 발해 멸망 이후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이민족 국가의 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봉금령으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금나라 황제가 세운 비 정도로 여겨졌다. 사실 또 우리가 잘 아는 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오해받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진흥왕 순수비가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저 있기도 했다.
  21. [21] 다만 광개토대왕은 어차피 어릴 적에 백제에 이 박박 가는 큰아버지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을 보고 자랐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성리학 따위가 있을 리도 없었던데다 유교 개념 자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도 않았다. 요즘 관점으로 과거사를 이해하면 안되듯이 권근도 똑같은 잘못을 한 셈. 고대의 인물에게 성리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물론 평가는 평가하는 이의 잣대가 기준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1000년 가까이 전인 인물에게 저런 잣대로만 잰 것은 문제다.) 막말로 저 시대에 삼년상이 뭔지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물론 당시 고대 국가에서 장례 기간이 길었음을 감안하면 정말로 광개토대왕이 장례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소수림왕고국양왕은 이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실도 못 보고 죽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보면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하긴 했다. 현대 관점에서 보면 삼일상만 치루고 바로 전쟁해도 상관없다.
  22. [22] 그런데 어떻게 보면 조선 중기 이후의 유학자들이 저 말을 들었다면 되레 헛방귀를 꼈을지도 모른다. 주자는 "복수는 5대까지는 해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권근의 말은 주자의 말과 완전히 대비되므로 어떻게 보면 영구까임권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듯. 여기에 그냥 권근이 살던 조선 건국 시기에만 봐도 말도 안되는 주장인데 3년상은 고행이 뒤따라서 권근은 3년상을 안 치르고 전쟁하냐고 비판했지만 정작 조선 왕들 중에서 제대로 3년상 치른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적국으로 포위당해있던 고구려 사정상 3년상이고 뭐고 당장 살아가는게 급할 지경이었다. 당장에 광개토대왕 즉위 1년 전 백제의 진사왕이 쳐들어오기도 했으니..
  23. [23] 원문 : #
  24. [24] 애시당초 ㄱ(ㅋ)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오랑캐 즉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 왕조 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있다.
  25. [25]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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