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정치인)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민주당 대표

초대
강신성

제2대
김민석
·박준영[1]

합당
(더불어민주당)

이름

김민석(金民錫)

출생일

1964년 5월 29일 (53세)

출신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본관

경주 김씨

종교

무교

학력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행정학 석사
칭화 대학교 중국법 석사
럿거스 대학교 법학 박사

가족

슬하 1남 1녀

소속 정당

더불어민주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5, 16

현직

민주연구원 원장

1. 개요
2. 생애
2.1. 학생운동권 시절
2.2. DJ키즈로 정치권 데뷔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2.4. 김민새 그리고 노무현
2.5. 정치는 계속
2.6. 복귀
2.7. 2017년
3. 가족관계
4. 선거이력

1. 개요

민주당 역사상 최고의 정치공학자이자 책사로 인정 받았지만, 정치공학에 파묻혀 정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던 문제적 캐릭터.

대한민국의 정치인. 대한민국의 제15대~16대 국회의원이었으며, 2018년을 기준으로 소속 정당은 험난한 여정을 거쳐 겨우 돌아온 더불어민주당이다.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수장을 맡고 있다.

정치와 왠지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단어인 공학이 들어간 '정치공학'[2][3]이라는 개념을, 국내에서는 사실상 가장 먼저 주류 정계에 끌어오기 시작한 정치인이며, 한때는 386세대의 명실상부, 확고부동한 원톱이라 불렸고, 민주당의 차기 대선 주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 할 정도로 촉망 받는 정치인이었다.

김민석과 같은 정치 진영뿐만 아니라 상대 한나라당 의원들끼리도 '김민석은 10년 안에 대선 한 번은 나올 거다'라고 생각했던 수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민석 자체의 정치적 실무능력과 계획능력에 대해 엄청 경계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386 운동권 출신 중 중앙 정치계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던 인물이다. 미남이고 언변이 뛰어나고 의정 활동도 잘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정말 컸던 원인은 야권의 절대적 권위자인 김대중의 선택을 받아 정치계에 본격 입문하여[4] 그의 총애를 받았던 점이었다. 김대중의 남자 출신[* 물론, 김대중이 영입하던 시기 당장 그를 무조건 후계자로 키우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그의 뛰어난 두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정치판을 짜는 데 쓰기 위해 일단 국회의원을 만드려고 했던 것이 크다. 그러나 엄연히 그것은 그에게 정치인으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인정한 것이었기에, 김대중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아무리 정치활동 초중반에 김대중의 후광이 있었더라도, 대권은 후에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부분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었겠으나, 김대중에게 직접 선택받고 중용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진영에서 그 어떤 훈장보다 클 것이었기에, 대권행보를 택할 상황이 왔다면 그에게 상당히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없었고, 그래서 야당이건 여당이건 정계에서 다들 그를 차기 대권주자로 생각한 것이다. 2002년에 망하지만 않았다면]

2000년대 초반까지 젊고 참신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졌으며, 더군다나 서울대 졸업 + 하버드대 석사 출신이라는 넘사벽급의 학력도 지녔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많은 표를 끌어모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또한 호남에서도 DJ와의 인연으로 많은 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고향이 경상남도 사천이란 점도 메리트로 받아들여졌다.[5] 사실상 지금의 이재명김경수 등 유력 대권 주자들을 합쳐 놓은 포지션이라는 말까지 있다.야당 완전체[6]

그러나 2002년 16대 대선에서 갑자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후보의 휘하로 들어가는 바람에,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 후 10여 년간 나름대로 재기를 시도해왔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당대표로 있었던 원외 민주당추미애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에 흡수통합되고, 그 덕에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민주당으로 복귀하면서 겨우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모양새다. 민주당에 복귀한 뒤 추미애 대표의 특보단장으로 일하다가 2017년 5월 15일 추미애 대표에 의해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2.1. 학생운동권 시절

1964년 5월 29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3형제 중 막내로[7]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 시절 재일교포 출신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으며 그의 두 형은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며,[8] 4학년 때인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였다. 위 사진이 좀 그렇게 나왔지만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에 학생운동 시절에 미남으로 이름을 날렸고, 서울대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대학에서 여대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며, 여장도 꽤 어울렸던 모양인지(...) 경찰의 추적을 상당 기간 피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9]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및 삼민투[10]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3년간 복역하였고, 1988년 사면으로 출소했다.

수감 중 작은형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하루 귀휴 조치되어 조문객으로 찾아온 김대중을 만났고, 이때를 계기로 민주당계 정당에 합류하게 된다. 당시 김민석의 어머니가 재야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 회장을 맡았던 인연 때문이다.

2.2. DJ키즈로 정치권 데뷔

1990년 3당 합당 이후 이기택 등이 주도한 `꼬마 민주당'[11]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에 입문하였다. 이후 민주당과 김 대통령의 `신민주연합당'이 합당한 `민주당'에 참여했다.

민주꿈나무 시절

당시 민주당 당수이던 DJ에 의해 상품성을 높이 평가 받아, 약관 28살의 나이로 1992년 총선에 제1야당 공천을 받았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던 것. 김대중의 전폭적 지원 하에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00여 표차로 안타깝게 낙선하면서 나름 화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14대 총선에 실패한 뒤인 1993년 KBS 아나운서인 김자영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 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95년 귀국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조순(趙 淳)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의 기획실장 및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 후 김대중의 정계 복귀로 인한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김대중을 따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제14대와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최영한(최불암) 의원을[12] 꺾고 마침내 초선의원이 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청문회 때는 돋보이는 논리와 질문으로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됐다. # 김대중 대선광고 (김민석 의원 연설) # 다른 광고 1999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 대변인으로서 창당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같은해 외곽 지원조직인 `젊은 한국'을 결성, 차세대를 의식한 행보를 계속해왔다. 1999년 10월에는 영문 시사주간지 `아시아위크'에 의해 아시아의 새천년 젊은 지도자 2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며 386세대의 대표주자 위상을 확보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돼 주목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순풍에 돛단 듯한 행보였다.

2.3. 정치적 역풍과 첫 실패

그러나 그때쯤 그에 대해서 "지나치게 정치, 권력 지향적"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5·18 전날 새천년 NHK 사건으로 도덕성에 흠집이 생겼고, 사건의 사후 처리도 잘못하여 인격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었다. 게다가 2000년 12월 `권노갑 2선 후퇴' 요구를 계기로 민주당이 쇄신 파문에 휩쓸렸을 때, 당내 주류편에 섰는데, 이에 대해 너무 속 보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정동영, 천정배, 신기남 등 소장 개혁파 의원들에 대해 "방법론상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는데, 그때 명분은 누가 보더라도 소장개혁파에게 있었기 때문. 이는 김민석이 당시 당내 기득권에 더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잘 생긴 외모와 뛰어난 언변 덕분에 새천년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체로 인기가 좋아서 2001년 당내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13]까지 오르며 유력 대권 주자로 주목 받았다. 그 결과,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이상수를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가 될 수 있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 2위인데 왜 대선 대신 서울시장에 나섰냐면, 2002년 기준 만 38세라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4]

사실 이 선거는 원래 당시 민주당은 현직 시장이었던 고건을 경선도 없이 추대하는 상황이었는데, 고건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유력했던 홍사덕도 고건이 나오면 필패라고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상대를 홍사덕이라고 생각하고, 민주당은 정동영이 앞선 상황에서 동시에 거론되던 인물이 김근태, 노무현 등이었고, 다크호스라는 인물이 김민석과 추미애였다. 주간한국 당시 기사 그런데 결과는 홍사덕을 밀어낸 이명박과, 민주당 후보가 된 김민석의 대결이 된 것.[15] 김민석은 당시로선 낯선 개념인 "생활정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선거 초반 여론 판세와 토론 시의 반응과는 다르게 2002년 월드컵의 영향을 제대로 받아버리는 통에(...) 이명박 후보에게 10%가 넘는 큰 차이로 패배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상황을 덧붙이자면, 초반에는 오차범위 내의 박빙을 보였으나, 월드컵의 위엄으로 유례없는 낮은 득표율과 우세했던 강북의 저조한 투표율로 인해 온갖 불리한 요소를 받으면서 큰 차이로 패배하였다. 그리고 당선된 분서울시장을 계기로 승승장구하며 대통령까지 올랐음에 반해, 김민석은 이때를 기점으로 내리막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김민석은 국회의원을 사퇴했고, 그 결과 한나라당 권영세에게 지역구인 영등포 을 지역구를 내줘야만 했다. 이후 민주당 계열은 10년 이후인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민주통합당 신경민MBC 앵커가 당시 현역인 권영세에 승리하면서 영등포 을 지역구를 다시 되찾아 왔다.

2.4. 김민새 그리고 노무현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여겨졌지만, 서울시장 선거 패배 이후 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2002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정몽준 캠프로 이적하는 바람에 철새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때의 행적 하나가 지금까지도 김민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다[16].

2.4.1. 김민석은 어떻게 김민새가 되었나

김민석은 더불어민주당 복당으로 민주진영에 돌아온 뒤인 2016년 김어준의 파파 이스 115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에 대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오로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몽준한테 갔으며 그렇게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단일화를 만들어내어[17] 그렇게 이회창 후보에 대해 승세를 굳혔으나 다만 유세 마지막 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때문에 대선 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해명했다.

즉, 사람들이 이후 기억과 달리 김민석은 당시 노무현 후보 흔들기 핵심인 후단협과는 무관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지극히 정치공학적 행보와 타이밍 때문에 결과적으론 후단협을 주도한 철새 이미지가 고정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지지 철회는 노무현 승리의 큰 역할을 하게 됐다[18] 심지어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에 항의해 분신 자살하기 전까지는 명예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파파 이스에서 "왜 정몽준에게 갔느냐"는 질문에 "정몽준에게 가서 단일화를 시켜도 대선에 이기면 이후에 잘 해석될 거라 생각했다"[19], "단일화가 없으면 반드시 질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20][21]는 당위성의 해명 답변 위주로 하고, 동기(모티브)에 대한 답변은 많이 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면 해명 초반에 노무현의 자서전 이야기를 하며 "그분(노무현)도 저에게, 저도 그분에게 서운한 것이 있었다."고 짧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이 아마 선거자금으로 감정이 상한 이야기였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또한 당시 서울시장 선거 패배 후 정치적으로 수개월~1년쯤은 쉬려고 하다가 급하게 결심하고 뛰어든 상황이었다고도 한다.

그의 발언을 정리하자면, 서울시장 선거 이후 노무현에게 서운한 감정(선거자금)이 있는 채로 휴식기를 가지려다가 여론조사를 보니 한나라당이 대선에 너무 유리했고, 한나라당이 대통령 되는 건 죽어도 싫으니 대선 판에 개입하기로 결심했고, 민주당이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안 하면 망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신이 하는 거 외에 방법이 없으니 "어차피 내가 가서 욕을 먹더라도 단일화시켜[22] 대통령만 만들고 복당하면 더 이상 욕 안 먹겠지"라고 생각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 하루 전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선언을 한 것 때문에 정몽준과 함께 움직이던 본인도 복당을 하지 못하고 완전히 휩쓸려 갔다는 것이다. "단일화 이후에는 왜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당시 단일화 이후에도 노무현과 잘 협력하던 정몽준에게 너무 미안했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대선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단일화 전까지 아무런 정이 없다가 단일화 이후에 상심하면서도 노무현의 선거를 돕던 정몽준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움이 느껴져서 하루는 성당에서 "정몽준도 앞으로 정치적으로 잘 되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지지철회만 안 했으면 그랬을지도 결국 새누리당

2.5. 정치는 계속

결국 "가출했던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했지만, 이후로 출마하는 선거마다 고배를 마셨다. 당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진화 후보가 당선되었고 열린우리당 김명섭 후보에게도 밀리면서 3위로 낙선하는 수모를 당했다. 2008년에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2위로 당선되며 부활하는 듯 했다. 민주당 최고위원 2위는 한동안 힘들다는 전설이 있지 하지만 곧바로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발목을 잡았다. 억울함을 주장하며 당사에서 한 달간 농성을 벌였지만 끝내 구속되고 말았다.

이후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뜬금없이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선언했지만 경선에서 김정길대한체육회장에게 밀렸다. 결국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강신성이 창당한 원외 민주당에 들어가 의장 및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아예 당대표로 취임했다.[23] 참고로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당명을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돌고 있는 상황인데, 먼저 쓰던 '민주당'이란 이름은 김민석이 선점해버리는 바람에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결국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존의 '민주당' 대신 더불어민주당(약칭 더민주)으로 개명하였다.

2.6. 복귀

하지만 총선에서는 군소 정당의 한계로 결국 단 한 석도 얻지 못했고, 결국 고육지책으로 원외 민주당더불어민주당에게 사실상 흡수되면서 도로 더불어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그래도 명실상부한 제1야당으로 복귀한 덕에 다시 제대로 된 재기를 노려볼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이를 통해 언론 및 방송에서 더불어민주당을 '민주당'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정식 명칭이 바뀐 것은 아니고 줄여서 부르는 약칭으로 쓴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민주당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을 줄여서 부르더라도 민주당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고 '더민주', '더민당' 우리가 더 민주주의야 등이 최대한이었는데 이런 약칭을 실제로 조금 쓰긴 썼으나, '더불어'와 '더'라는 단어가 뜻 자체가 꽤 차이가 있는 단어라 어감에 의한 오해의 소지가 있어 억지로 정식 명칭을 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만드는 민주주의 당'과 '더 민주주의적인 당'이라는 이 두 가지 말의 어감은 전자에 비해 후자가 유치해보이고 좋지 않으므로

더불어민주당으로 사실상 복당한 뒤에는 추미애 대표의 특보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아직도 김민석에게 악감정이 많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도 많다. 오죽했으면 험지 중의 험지를 찍어 출마시켜서 자력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라는 악담까지 나올 정도다. 사실 아래 사건 때문에 이 항목이 급갱신된 것만 봐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2.7. 2017년

2017년부터 인터넷 방송 채널 '민주종편'의 '뉴스파'라는 프로그램에 진성준, 최재성과 함께 출연하고 있다.[24] 19대 대선 때에는 더불어민주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상황본부장으로 뛰었고,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 뒤에는 민주연구원의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17년 10월, 주갤 여신 이언주의 탈당으로 공석이 된 민주당 광명시 을 지역위원장에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강신성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 회장이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김민석의 차기 출마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3. 가족관계

1993년 서울대 동창인 KBS 김자영 아나운서와 결혼했다. 방송인 김자영의 젊은 시절도 화려하긴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이었던 그녀는 1987년 KBS 공채 14기 아나운서가 됐고 입사 직후부터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각종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두각을 나타냈다. 결혼할 당시 `운동권과 제도권의 결합', '한국의 케네디-재클린 커플' 한마디로 운동권 엄친아와 방송인 엄친딸간의 결합이라며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 사이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다가 2014년 12월에 이혼했다.

4.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민주당

48,151 (40.9%)

낙선 (2위)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새정치국민회의

49,657 (48.9%)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을)

새천년민주당

50,438 (60.4%)

당선 (1위)

2002. 5. 25 사퇴
(서울시장 선거 출마)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새천년민주당

1,496,754 (43.0%)

낙선 (2위)

이명박 후보 당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영등포 갑)

새천년민주당

21,033 (20.9%)

낙선 (3위)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번)

민주당

-

낙선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김민석 문서의 r246 판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1. [1] 박준영 공동대표 탈당
  2. [2] 30년 민주화 투쟁으로 유명한 야권의 거목 김대중과 엘리트 출신 여권 거물 이회창이라는 두 정치 거물이 붙었던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당들이 점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분야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가 가진 정치공학적 역할이나 13대 대선에서 양김의 출마로 인한 노태우 승리 영향성 등에 대한 분석들을 하기 시작. 결과를 계산적이고 이성적으로 상세히 분석하고 미래의 결과도 계산하는 공학적 정치를 주류에서 조금씩 시작한 게 이 시점. 더 압축적으로 줄인다면, 선거에서 지지자의 표를 더 얻기 위해 후보를 정리하고 선거 전략을 짜는 개념 전체를 말한다. 김민석이 한 일은 마치 초한지범증 같은 책사 위치에서 정치 판세를 분석하고 누구에게 누구 상대를 붙이면 선거에서 이기거나 진다는 가상 대진을 짜 후보를 배치하고 조정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이는 정치인과 지지자를 일개 장기말 취급하는 행보로 보이기 딱 좋고 새누리건 민주당이건 90년대까진 김영삼, 김대중 등 당 총재들이 김민석 같은 책사들의 책략을 받아서 행하는 상명하복식 정치공학이 흔했으며, 이 때문에 공천심사위원회가 열리는 장소에 낙천에 불만을 품은 정치인이 난동을 일으키는 일도 흔했다. 보수당 혹은 집권당 쪽에서는 공천 때마다 나오는 낙천자들의 난동 및 이적행위(무소속 출마 팀킬) 등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남은 4년 동안 공기업 사장이나 각종 이권이 있는 자리를 주고 달래서 주저앉히는 보은인사를 많이 했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는 그런 걸 할 만한 권력이나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물론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지만) 대규모 탈당 후 창당 같은 팀킬 사태가 상대적으로 잦은 편이다.
  3. [3] 김민석은 그 방식대로 노무현이면 어떻고 정몽준이면 어떠냐 이회창만 이기면 그만이지라는 마인드로 정몽준 측에 서서 단일화를 지휘해 노무현을 장기말 취급했고, 이 역린을 건드린 댓가로 민주 진영 지지자들조차 노무현 당선에 공이 없는 건 아닌 거 같지만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저런 X가 이 당에 있으면 언젠가 내가 장기말처럼 버려질 거야라는 트라우마를 지금도 남겨두고 있다. 때문에 친노를 중심으로 집결한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애초에 친노와는 거리가 있는 DJ가 발탁한 운동권 엘리트라는 출신성분의 배신자인 김민석의 현장 복귀 및 외부 행보에 대해 거부 반응은 지금도 상당한 편.
  4. [4] 30대도 아닌 무려 20대 후반에 국회의원 공천을 받았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큰 신뢰를 얻고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5. [5] 영남의 민심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출생지만 경남일 뿐 실은 안철수처럼 서울 토박이로 봐도 무방하다.
  6. [6] 이재명처럼 개혁적인 성향을 가진 젊은 주자인데다 안희정처럼 기반이 탄탄한 편이었다. 더불어 김경수처럼 민주당의 유력 인물에게 총애를 받은 점이 있다. 김경수처럼 동안 속성이 있는 것도 덤
  7. [7] 작은 형은 1987년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8. [8] 더불어민주당은수미 의원과 같은 과, 같은 학번의 동기이기도 하다.
  9. [9] 마찬가지로 임종석도 학생운동 시절에는 미남으로 꽤 이름을 날렸으며 여장을 하고 도주한 것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100분 토론에서 자신이 여장했으면 진작에 잡혔을 것이라고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10. [10]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위원회. 약칭 삼민투이다.
  11. [11] 노무현, 이철 등도 있었고, 후일 유명해진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유명한 야구선수 최동원도 입당하여 선거에 나갔을 정도. 심지어 현재 새누리당인 조경태도 한때는 이곳에 있었다.(...)
  12. [12]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정주영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이 낙선하면서 사실상 국민당이 해체되자 민주자유당으로 이적했던 것. 이때는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해도 국회의원직 유지가 가능했다.
  13. [13] 1위 이인제, 3위 한화갑, 4위 노무현
  14. [14] 우리나라 헌법에서 대통령 출마의 자격은 만 40세 이상에게만 주어진다.
  15. [15] 김민석에 의하면 민주당 판단 내에선 이명박을 이기는 후보가 김민석밖에 없어서 자의반 타의반 나갔다고 한다.
  16. [16] 본인도 여유있게 "새들도 저에게 피해를 많이 봤다."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신문에 자기 머리에 새 몸통인 장면이 나왔다고.
  17. [17] 당내 주류 중에 단일화를 적극 주장한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고 한다.
  18. [18] 여기엔 이론이 많다. 여론조사를 토대로 노무현이 더 크게 이길 수 있었는데 정몽준의 사퇴로 2~3%가 빠진 값이란 견해도 있다.
  19. [19] 정몽준에게 가기 전까지 김민석은 사적으로 정몽준과 만나본 적이 한두 번밖에 없어 전혀 친분이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정치적 존경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정몽준을 보고 선거대책위원회로 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정몽준 측에 가서도 정몽준과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거나 친해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당연하지 오고 나서 단일화를 노무현으로 만들었으니 무서워서 직접 말도 별로 못 걸었다고. 여론조사 결과로 정한 건데? 여론조사건 뭐건 미운건 미운거다
  20. [20] 한나라당 이회창이 대통령 되는 꼴을 죽어도 보기 싫었다고 한다. 이회창이 되면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거나 단절된다는 정치적 공포가 있었다고.
  21. [21] 이외에도 서울시장 낙선 이후 북한에 유학생을 보내는 사업을 하려 했다는 발언 등을 볼 때 북한에 유화적이고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은 듯 하다.
  22. [22] 단 정몽준은 무조건 안 되고, 단일화 후보가 노무현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했다.
  23. [23] 현존하는 정당 중 당명이 중복되지 않기에 문제될 것은 없는 사항이다. 일례로 새누리당의 당명 변경 후 군소 정당 한나라당이 창당했으니...
  24. [24] 정치관련 뉴스들에 대해 대화하고 토론하는 방송이다. 진성준이 진행자 역할이고, 최재성과 김민석이 주로 의견을 내는 형태의 방송. 참고로 모두 전직 국회의원이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st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