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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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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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 · 31대 국무총리
김종필
金鍾泌 | Kim Jong-pil
[1]

출생일

1926년 1월 7일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사망일

2018년 6월 23일(향년 92세 총 33771일)

사망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묘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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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김해 김씨 안경공파 16세손[2]

부모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3]

형제자매

6남 중 5남

배우자

박영옥

자녀

김예리, 김진

학력

육군사관학교 졸업(8기)[4]

병역

육군 준장 예편(중앙정보부)

혈액형

A형

취미

수필, 그림, 서예

운정(雲庭)

약칭

JP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6, 7, 8, 9, 10, 13, 14, 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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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 여담
6. 매체에서
7. 선거 이력
8. 저서

1. 개요

흐르는 물처럼(上善若水, 상선약수)[5]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전직 군인.

약칭은 JP. 일본유학시절 일본인들이 발음이 어려워서 붙여준 별명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별명으로 굳어졌다.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공빈 김씨의 아버지이자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부원군(海寧府院君) 김희철(金希哲)의 12대손이다.[6]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정(雲庭)이다. 40년 이상 정치가로 활동하며 여러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6년 반을 지냈다. 헌정사 최장인 정일권과 더불어 6년 이상 총리로 재직하였다.

한고제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고 이방원에게 하륜이 있었듯, 박정희에게는 김종필이 있었다 할 정도로 5.16 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깊이 관여하면서 군사정권을 만드는 데 일조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박정희와는 인척이자 최측근이자 "제2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으나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견제를 당하기도 한 미묘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이른바 삼김시대3김 중 한 명으로 대표되는 거물급 정치인이자 3당합당, DJP연합 등 2000년대 초반까지 중앙 정치계 주요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고, 삼김 중에서는 제일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김대중이 2009년, 김영삼이 2015년에 서거한 후에도 3년을 더 살았다. 2018년 사망 당시 향년 92세.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사건사고/논란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사건사고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종필/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

  • 김 중 유일하게 90대까지 장수하다 작고했다. 다만 나머지 삼김 멤버들도 80대 중반 후반에 별세했기 때문에 살 만큼 살았다고 볼 수는 있다.
  • 5.16 쿠데타의 경우, 김종필이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박정희를 밀어주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은 전적으로 김종필의 설계대로 흘러갔다. 박정희는 굳이 여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창당과정에서 일본의 사례를 최대한 참고했다고 한다.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서 직선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적도 있었지만 1980년 이후로 대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원 내각제를 추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까닭은 김종필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의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내각제 쪽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7] 위에도 나와있듯 그와 연대한 다른 정치 세력 모두 자신이 당선된 후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현행 대통령제의 개선 방향으로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결합한 이원집정부제나 순수 의원내각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김종필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듯. 장도리 같은 만평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매번 김종필을 속이고 뒤통수를 때리는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부인 박영옥의 묘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의원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8]
  •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들의 정치 시대를 삼김시대라고 부른다.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지만,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장기간 정권의 핵심에 있기도 했으며, 김영삼 및 박준규 등과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9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9] 그래서 1990년도 말에서 2000년 초만 해도 "3김이 그 사람 빼고는 다 대통령 했는데 이제 그 사람 차례 아니겠는감?"이라고 나이드신 어른들이 말하면 비교적 나이가 어린 중년이나 젊은 층에서 "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요?"라고 반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다만, 당시에도 이러한 김종필 대망론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김종필 대망론 자체가 실제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삼김시대 라는 조어에 의한 착시현상을 통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삼김시대라는 표현 못지 않게 양김시대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김종필 자체가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동등한 지지기반이나 영향력을 가진 대선 수권후보였던 적이 없다는 것. 실제로 3김과 노태우가 대격돌하여 전체 표의 99.8%를 나눠가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김종필은 득표율 8.1%로 득표율 0.2%의 신정일 후보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는 4위를 기록했고, 이는 각각 28%, 27%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양 김의 경우 민주화 운동 지도자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여 단일화를 거쳐 지지기반을 통합할 경우 안정적인 1위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던 데 비해, 김종필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여 13대 대선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캐스팅보터로써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하였으나 결국 자민련(과 그 후계격인 정당들)이 사실상 몰락하여 거대 양당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한다. 즉, 세 명의 대권 수권후보를 묶어 3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수권후보였던 양김과 수권후보는 못 되지만 캐스팅 보터의 역할을 하던 김종필을 묶어 3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같이 묶여 불리는 김종필까지도 나머지 둘과 같은 주요 수권 후보라는 착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김종필은 박정희 집권 시기 2인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3김 중에서는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 인물이다. 하지만 YS, DJ와 달리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1960년대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보다 인지도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훨씬 높은 편이었고, 1970년대 국무총리 사임 이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 잠재적 라이벌로 보일 정도로 영향력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26 사건 이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로 올랐으며, 10대 대선에 출마와 함께 포스트 박정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당도 아닌 야당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해온 김영삼, 김대중이 5.17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삼김시대가 확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5공화국 시절에 김영삼, 김대중 양 김은 여전히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김종필은 미국에 있으며 어쩌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을 지 모르는 민주화 참여를 거부하면서 완전히 3김이긴 하나 레벨 떨어지는 급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 실질적인 권력에서야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권력이 박정희 정부로부터 탄압 당한 김대중, 김영삼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고, 5.16 군사정변을 통해 단숨에 정권의 핵심에 진입한 김종필이 3김 중에서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YS와 DJ 역시 야당의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경쟁을 했고, 김영삼은 그 제7대 대선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과 결선투표까지 가는 팽팽한 대결을 벌인 바 있다. 즉 제3공화국 후반기 시점부터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당의 지도자급 인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김영삼의 양김씨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바 있는데, 조갑제는 "그때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확고한 상징성을 확보했다. 10.26 사건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JP는 강제 정계은퇴를 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은둔생활을 보냈는데, 이에 반해서 1983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한 바 있으며, 1984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전두환정부에 대항하였다. 제5공화국기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활동은 제한적이고 전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계파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박정희와는 정말 친했고 군 복무도 같이 했으며 심지어는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다.[10] 그리고 상당한 애처가였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정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같이 한 자리에 묻히겠다고 하면서 현충원 안장을 거부하기도 했다.
  • 이회창의 선배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 다만 이회창과의 관계는 냉랭했던 편. 그리고 김종필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실세 총리로 꼽히는 3번의 국무총리 중 2번을 그가 역임했다. [11]
  • 일본어에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12]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출연일본어로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13]
  •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로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그림을 그렸고[14] 만돌린, 아코디언 등을 연주했다. 또한 서민친화적이어야 하는 한국의 정치판에서 패셔니스타[15]이자 미식가로 알려져 체스타필드 맞춤 양복을 입고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겼다. 미식가라고 해서 늘 사치스러운 산해진미를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90년 대 초반에 한 끼 20만 원어치의 중식정찬을 즐겨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럿이서 먹은 거라 테이블당 계산 가격은 백만 원이 넘었고 술도 두주불사였는데 발렌타인 17년 산을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 아래 단락에도 나오지만 취미도 부유층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는 골프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외환위기 상황이였음에도 꿋꿋하게 골프를 쳤는데 그럼에도 JP가 워낙 거물이다보니 감히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고.[16] 우스갯소리로 JP는 고급 취향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 조갑제의 증언에 의하면 JP는 만남이 기다려지는 인물로 사석에서 만났을 때 정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예술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부드럽고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는 인물로 정치가라기보다는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아무래도 일본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상류층 사회에서 중시하는 풍류[17]가 체화된 것 같다는 평. 일례로 박관용 前 국회의장은 야당 의원이던 시절 국무총리였던 JP에게 항의를 하러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JP가 국무총리실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독거리는 바람에 끝내 항의를 못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 2015년 아내가 숨졌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 그리고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이 사망하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도 사망함으로서 이제는 3金의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되었지만, 2018년 6월 23일에 그도 세상을 떴다. 이로서 3金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하하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한창 잘 나가던 아버지가 귀국한 건 김종필이 불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해외유학 간 인재들을 귀국시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동훈이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박명수가 얼핏 옹호했다가 네티즌에게 욕을 먹은 경우도 있었다.
  • 초록색을 좋아한다.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당 색이 초록색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김종필이 1968년 잠시 정계를 떠났을 당시, 정부로부터 현대의 서산시 지역의 토지를 불하받아서 ‘삼화목장주식회사’라는 대규모 축산 농장을 개발하였다. 그런데 제5공화국 시절 신군부에게 부정 축재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제 헌납할 때 이 농장도 포함된 것. 그리고 농장의 부지 및 설비는 한우 종자를 개량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바뀌었다. 민주화 이후 소송을 통해 개인 재산으로 돌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하였다.[19]
  • 골프를 매우 좋아했는데, 1999년 국민의 정부에서 총리를 맡으면서도 계속 골프를 쳤다. 당시 외환위기 상황임에도 아무래도 정치적 끗발이 대단하신 분이라 여기에 대해서 토를 달기 힘들었던 듯. 특이한 점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산 골프채의 성능 및 품질수준은 조악했는데, 당시 김종필 총리는 드라이버 및 페어웨이 우드는 국산 랭스필드 제품만을 고집했다. 당시 랭스필드는 국내에서도 낮은 브랜드였는데, 김종필의 비서를 통해 국산 골프채 사용을 촉구하면서 자사의 최고급 골프채를 협찬한 후 한동안 "김종필 골프채"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종필은 혼마 회장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5스타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20], 아마도 당시 국산을 장려하는 풍조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 * 또 98년 7월 US 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를 격려하기 위해 그녀의 부모, 동료 프로골퍼들을 함께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으로 초청해서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 축구계와도 의외로 인연이 있는데 1966년도에 자신의 약칭을 따서 JP컵 쟁탈 한중일 축구대회라는[21] 축구대회를 만든 적도 있었다. 당시 한국, 대만, 일본의 실업축구 우승팀이 맞붙어서 치르는 대회였다. 하지만 JP의 약칭을 딴 축구대회에 대해 박정희가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람에 대회는 딱 한 번만 개최되고 그 이후로 열리는 일이 없었다.
  • 김종필의 사망일인 2018년 6월 23일에는 서울특별시 공개경쟁 임용시험이 치러졌는데, 그 중 9급 한국사 과목에서 김종필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어 우연의 일치로 화제가 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해 김종필이 먼저 일본에 특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를 이후락으로 바꾼 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험을 끝내고 휴대폰을 켜니 김종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날 시험문제 때문인 줄 안 수험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하였다.# 여담으로 무궁화 대훈장 추서란 오보가 퍼졌었는데, 이는 정진석 측에서 낸 이야기였다.
  • 평생의 한이 하나 있다. 박정희쿠데타대통령이 되었기에 김종필 본인이 깨끗하게 지도자가 되어 이를 만회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기에 전직 장성급 장교라는 신분, 그리고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는 김종필에게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고, 대선 때마다 당락을 좌우하는 킹메이커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나 끝내 킹은 되지 못하고 80살을 넘겼다.[22] 평소 선거제도 개편과 개헌을 통한 양원제, 다당제, 내각제의 확립을 주장했고 그러면 본인도 수상(首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근본적으로 국민들이 내각제에 부정적이라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아내 박영옥의 사촌인 박근혜가 51.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지만 평소 박근혜는 대통령 자질 문제로 인해 항상 논란을 야기했고그럼에도 아버지 고향인 경북과 어머니 고향인 옥천에서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유지했다는게 함정. 결국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된 뒤 이듬해인 2017년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받고 탄핵당했다.
그러나 2018년, 모교 공주고등학교흉상설립계획이 다시추진되고 있다, 학교뒤편 장학동산에 동상을 세우는데 교사와 학생 90%이상이 반대하는 가운데 11월 24일에 제막식을 열 계획이다.

6. 매체에서

  • 이정길제2공화국 이래 여러 차례 이 역할을 소화하여 간판 연기자로 꼽을 수 있다[23], 단 제4공화국에서는 한인수가 맡았는데, 이정길이 동시기의 라이벌 드라마인 코리아게이트에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인수의 경우 체격도 목소리도 너무 중후해서, 이 시기보다는 노년기의 JP에 더 닮았다. 이정길은 이후 제5공화국에서 다시 한번 김종필 역으로 출연한다.
  • 야인시대에서 등장한 청년기의 김종필은 배우 한창호가 맡았다. 다만 실존인물과는 외모에서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평가다.
  • 삼김시대에서는 정동환이 맡았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배우 특유의 허무주의적 인텔리 느낌을 지우지 못해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24]
  • 영웅시대에서는 정재곤이 맡았는데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박정희의 참모 역할로 나왔다. 너무 젊은 느낌이라 별로 닮아보이진 않았다.
(이정길이 연기한 김종필, 드라마 제5공화국 당시.)(한인수가 연기한 김종필, 드라마 제4공화국 당시.)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이인임은 김종필의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대놓고 이인임이 '원조보수' 드립을 치는 장면도 있다. 줄타기의 명수였다는 것도 공통점.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

민주공화당

45,999 (68.2%)

당선 (1위)

초선[25]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

민주공화당

58,156 (91.2%)

당선 (1위)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5,460,581 (48.8%)

당선 (1번)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유신정우회

-

당선

4선[26] [27]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

민주공화당

42,946 (66.6%)

당선 (1위)

5선[28]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신민주공화당

1,823,067 (8.1%)

낙선 (4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신민주공화당

53,967 (81.9%)

당선 (1위)

6선[29]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민주자유당

42,358 (72.5%)

당선 (1위)

7선[30]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자유민주연합

35,292(66.4%)

당선 (1위)

8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자유민주연합

1,859,331 (9.8%)

당선 (1번)

9선[31]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자유민주연합

600,462 (2.8%)

낙선 (1번)

[32]

오랜 정치경력을 자랑한 정계의 거물답게 대부분이 당선으로 도배되어있다. 낙선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정계은퇴의 계기가 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2번 뿐. 역시 제 13대 대통령 선거와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고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과 비슷하다.

8. 저서

  • <새 역사의 고동>, 서문당, 1987년 8월 1일 #
  • <J.P.화첩>, 서문당, 1987년 10월 1일 #
  • <JP 칼럼>, 사공, 1997년 4월 9일 #
  • 공저, <신문인 방우영 : 미수 문집>, 21세기 북스, 2016년 1월 28일 #
  • <김종필 증언록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와이즈베리, 2016년 3월 4일 #
  • 저서,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스노우폭스북스, 2018년 7월 2일 #

  1. [1] 泌은 '샘물 흐르는 모양 필', '분비할 비' 두 가지 훈음이 있다. '비'는 완성형에서나 입력이 되고, '필'로 입력해서 변환해야 유니코드에서 호환이 된다.
  2. [2] 조부 김현택(金顯澤), 아버지 김상배(金相培), 그의 형제가 각각 경파(京派) 20세손, 21세손, 22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
  3. [3] 전북 군산 출신.
  4. [4] 당시에는 군사학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5. [5] 김종필 총재의 좌우명
  6. [6] 방계가 아닌 직계다. 참조.
  7. [7] 내각제는 국회의 다수당이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고, 그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다. 3당 합당 이전만 해도 한 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JP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집권 여당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20대 총선 전후로 호남 정가를 중심으로 내각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8. [8] 재밌게도 본인이 군사정변으로 전복시킨 2공화국은 내각제였다. 내각제를 무너뜨린 사람이 훗날 내각제를 추진하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 한 셈
  9. [9] 그 가운데 1회는 유신정우회로 임명직에 가까웠다. 전술했듯이 17대 총선에서 10선에 필사적으로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10. [10] 법적으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다.
  11. [11] 박정희 정부, 김대중 정부. 다른 한 명은 이해찬
  12. [12] 한일협상의 기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역시 일본어로 적혀 있다.
  13. [13] 다만 이때의 인터뷰를 보면 나이탓인지, 유창하게 곧바로 회화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14. [14]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유화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좀체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15. [15] 실제로 1995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가 선정한 베스트드레서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16. [16] 한나라당 의원들도 선배 정치인인 JP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언론에서 종종 수군거리기는 하였으나 "내가 근무시간에 골프 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칠십 넘은 사람이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몸져누우면 대신 앓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간섭하느냐?"고 받아쳤다고 한다.
  17. [17] 그냥 멋스럽게 즐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희노애락 전반을 뜻한다.
  18. [18] 笑而不答. "웃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다"는 의미로, 당나라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
  19. [19]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서산 근처에서 갑자기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다.
  20. [20] 2000년 당시 가격으로 약 2천만 원 수준의 채였다. 현재는 7백만 원 ~ 1천 2백만 원의 가격대
  21. [21] 당시 한국에서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했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고 해서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2. [22] 이는 드라마 제 5공화국에서도 연출되는데 10.26 선언 이후 정계에 복귀한 JP에게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모두 접촉을 시도한다. YS를 대통령의 자리에 밀어올린 3당 합당도 처음부터 JP가 노태우에게 먼저 합당을 제의했고 이후 JP와 YS의 골프회동 끝에 YS가 합당에 합류하였으며 JP가 YS를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YS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존의 4당 체제에서 YS가 대통령이 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DJP 연합은 DJ가 직접 JP의 자택으로 찾아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번만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성사되었으며 DJP 연합 덕분에 충청권의 표를 대거 흡수하고 그동안 DJ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사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TK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탈당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이를 두고 유시민은 "꼭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해야만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JP는 DJ의 당선 이후 헌정사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실세 총리로 활동했다. 물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와 대선 주자로 격돌하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 레벨이었기 때문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아서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즉 변수로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한계 역시 뚜렷했던 것. 다만 김종필의 위력이 양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두 번이나 부활하여 할거하며 YS와 DJ를 권좌에 밀어올린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래서 후일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는 말이 많다.
  23. [23] 한일회담 때 언저리 사진을 보면 많이 닮은 편이다.
  24. [24] 야인시대의 최동열 역할을 생각해 보면 참고가 될 듯
  25. [25] 현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
  26. [26]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27. [27]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한다. 김종필은 1기와 2기 모두 선출되었다.
  28. [28] 충남 부여, 보령, 서천 일대. 유신 시절인 9대 국회부터 5공화국 12대 국회까지 중대선거구제였다.
  29. [29]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
  30. [30] 1995년 자민련 창당
  31. [31] 최다선(9선) 타이. 9선을 기록한 인물은 같은 3김 중 하나였던 김영삼박준규 前 국회의장이다.
  32. [32] 0.2% 차이로 10선 도전 실패, 정계은퇴. 탄핵정국 당시이다. 10선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깨기 힘든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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