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콘

Nikon의 카메라

F 마운트

Z 마운트

1 마운트

S 마운트

DSLR

렌즈

SLR 카메라

미러리스

미러리스

RF 카메라

쿨픽스

기타

스트로보

액세서리

소프트웨어

Nikon Professional Services

1. 개요
2. 역사
2.1. 일본광학의 설립
2.2. NIKKOR의 탄생
2.3. 민간 시장 진출
2.4. SLR 시대
2.5. 디지털 시대
2.5.1. 특허전쟁의 마무리
3. 니콘의 카메라
3.1. 필름 SLR 카메라
3.2. 필름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
3.3. DSLR 카메라
3.4. 미러리스 카메라
3.5. 컴팩트 카메라
3.6. 특수 카메라
5. 참고 문서

한국 홈페이지

일본 홈페이지

1. 개요

니콘 창립 90주년 기념 홍보 동영상.

니콘 창립 100주년 기념 홍보 동영상.

일본의 광학기기 회사.

Nikon.# 카메라 업계 최대 라이벌인 캐논이 카메라 뿐 아니라 비디오 카메라나 복사기, 프린터 같은 사무용 기기 등 여러 방면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과는 달리 니콘은 회사 이름답게 카메라, 현미경 등의 실험용 광학장비, 안경 렌즈, 쌍안경, 스코프, 반도체의 노광장치 등 광학 부문 사업만 하고 있다.

2. 역사

2.1. 일본광학의 설립

이름의 유래는 전신이던 일본 광학(日本光学, 니폰 코우가쿠)을 줄여서 따왔다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 독일의 광학회사인 차이스 이콘(Zeiss ikon)이라는 브랜드 이름 자체를 벤치마킹하여 Z를 뒤집어서 니콘(Nikon)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일본광학 독음 중에 마지막 'n'을 설명할 부분도 없다. 가끔 외국에선 '나이콘'이라 부른다고 '반드시' 나이콘'이라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그냥 'NIKON'이라는 영문 표기를 미국 영어식[1]으로 발음해서 그런 것일 뿐, 니콘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일본어이며 본사가 일본에 있으므로 일본식으로 니콘(ニコン)으로 발음해야 옳다.[2] 또한, 니콘의 한국 법인인 니콘이미징코리아가 한국어 표기를 '니콘'으로 하고 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은 독일의 사례를 보고 강한 군사력을 위해서는 뛰어난 광학 기술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일본 해군은 이를 위해 당시 거대 군수기업인 미츠비시에 광학 기술 관련 기업을 만들 것을 요청하게 되고, 1917년 미츠비시의 자회사인 '일본광학공업주식회사'가 니콘의 시초가 된다. 현재도 미츠비시 산하 회사이며, 이 때문에 전범 기업이라며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군부의 요청으로 생긴 회사라 초기에는 카메라는 만들지 않고 망원경, 라이플의 스코프, 잠망경 등 군사 목적 광학 기기만 생산했다.(현재도 쌍안경, 라이플 스코프 등은 생산 중) 야마토급 전함에도 주포인 18.1인치 3연장 포사격통제장치로 일본 광학의 15m 측거의가 장착되었다. 이런 광학 기기는 잘 훈련된 견시들의 손에 쥐어져서 태평양 전쟁 초기 야간전에서 일본 구축함들의 악명을 떨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인 연합군 측은 광학 기술 뿐 아니라 레이더를 이용한 초장거리 포격이나 함재기 운용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2.2. NIKKOR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광학은 1932년, 사진 렌즈의 브랜드 이름을 'Nikkor'[3]라 명명하게 된다.

2.3. 민간 시장 진출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전으로 끝나고, 군수기업이던 일본광학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다. 결국 1945년 19,000명의 종업원[4]을 거느린 회사가 1,700명 남짓한 규모로 축소되었다. 생존을 위해 일본광학은 민간 시장 진출을 결심했고, 1946년 회사의 이름을 '니콘'으로 바꿨다. 1948년 니콘 최초 카메라인 35mm 필름 대응 레인지파인더식 카메라(RF카메라) 'NIKON I'이 발매되었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니콘은 카메라 개량에 착수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라이카용 호환 렌즈들이 호평을 받게 된다. 미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이 한국전쟁을 취재하면서 자신의 라이카 카메라에 니콘 렌즈를 장착해 썼는데, 이 일로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반열에 오른 던컨이 니콘 렌즈의 뛰어난 성능을 극찬하면서 인지도가 확 올라간 것. 1950년 12월 10일뉴욕 타임즈에도 니콘 카메라에 대한 호평이 실려 있다.[5] 허나 당시 카메라는 RF카메라, 특히 라이카가 꽉 잡고 있던 시절이었다. 목측식은 말 할 것도 없고, 미러만을 사용한 TLR도 성능으로는 RF 카메라에 비견할 수 없어서 펜타프리즘을 장착한 완성형 SLR이 나오기 전까지 다른 메이커는 전부 죽을 쑤고 있었다. 니콘도 SP, S3 같은 RF 카메라를 만들었지만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때 만든 S3은 2000년에 실버 크롬 버전이 8천대, 2002년에 블랙 페인트 버전이 2천대 한정판으로 복각되었으며 SP도 뒤이어 2005년에 2500대 한정 발매되게 된다.

2.4. SLR 시대

1953년 카메라계에는 RF의 걸작 Leica M3가 등장한다. 포토키나에서 M3를 손에 쥔 니콘의 기술진은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극심한 좌절감에 빠지는데, 그동안 니콘이 해결할 수 없었던 RF의 7대 난제가 모두 해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들은 RF에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겠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니콘은 RF를 중지하고 SLR에 사활을 걸겠다는, 카메라 역사의 중요한 분기가 되는 결정을 내린다.

1959년 니콘은 자사 최초의 SLR 카메라 NIKON F를 발매한다. 이것이 바로 니콘 F 마운트의 시작이다. 비록 세계 최초의 SLR은 아니었으나[6] 그동안 SLR의 문제점이라고 하는 부분들을 상당수 해결하여,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최초의 카메라로서 기자들의 많은 환영을 받았다. SLR은 찍힐 사진의 프레임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점이 대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RF를 시장에서 몰아내게 된다.

플래그십 모델인 니콘 F그레이드, FM시리즈, FA 등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특히, 니콘의 세번째 플래그십 모델인 F3에 가서는 니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니콘의 인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카메라의 대명사로 국내신문사 기자들의 십중팔구가 F3를 애용하였으며, 이는 1987년 대통령선거 유세사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후보자들 주위에 도열해있는 신문기자들 모두가 F3로 촬영하고 있다[7]) 또한 각종 매체에도 자주 쓰이는 소품이 된다. 유명 애니메이션인 에어리어88 OVA 에서 NP통신의 종군기자로 나오는 무츠기 고(일명 록키)라는 인물이 사용하는 카메라로 모터드라이브가 장착 된 F3가 등장한다. 록키가 격추당하고 결국 탈출하지 못한 채 사막에 떨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사막위에 덩그라니 놓여진 F3가 홀로 찰칵찰칵 소리를 내는 장면이 클로즈업 될 때 니콘매니아들은 말못할 감동을 느낀다고카더라. 유승준스티브유의 히트곡인 열정에 나오는 카메라 셔터소리도 F3에 모터드라이브를 장착한 녀석의 샘플링 사운드라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 등 각종미디어에서 접하는 카메라 셔터사운드는 모두 F3에 모터드라이브 장착 된 녀석의 사운드 샘플링이라 내는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참고로 부산의 지역언론매체인 국제신문 사옥 1층 로비에 F3가 유리전시대 안에 보관되어 전시되어있기도 하다.

80년대부터 새롭게 떠오른 화두인 자동초점(Auto Focus, AF)에 대응하는 카메라 회사들의 선택은 두 종류가 있었다. AF에 최적화된 새로운 마운트로 바꾸거나, 아니면 AF를 기존 마운트에 맞춰 개발하는 것이었다. 캐논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전자의 방식을 선택하였지만 니콘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단순히 마운트 결합이 맞는 것뿐만 아니라 렌즈-바디 작동의 상하위 호환성을 갖는 AF마운트를 개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니콘의 엔지니어들은 그야말로 애로사항이 꽃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그대로 개발 지연으로 이어져, 세계 최초의 실용화된 AF시스템 출시의 영예는 미놀타에게 돌아갔다.[8] 사실 최초의 AF SLR 카메라 발매의 족보가 좀 꼬이는게 세계 최초로 시판된 AF SLR카메라는 1981년 발매된 펜탁스 ME F였다. 그러나 이 카메라는 전용의 SMC AF 35-70 f/2.8렌즈[9]가 없으면 AF가 동작하지 않는 반쪽짜리 AF SLR 카메라였다. 다만 다른 K마운트 렌즈를 장착하면 초점이 맞았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초점 인디케이터의 지원은 얻을 수 있었다. 니콘 엔지니어의 회고에 따르면 "그런 식이라면 더 빨리 내놓을 수 있었지만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런 물건을 시장에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10] 니콘은 1983년 F3AF를 발매하는데, 결국 원통형의 렌즈 안에 모터를 집어넣는데 성공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니콘은 이 방식을 버리고[11] 바디에 모터를 넣는 방식으로 선회하여 F501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 일본정부는 일본 카메라 회사들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강제로 기업들간의 기술을 공유시키고 해외 기업체가 일본 카메라 업체로부터 해당 라이센스를 사는 것을 막았다. 당시 대한광학 이라는 국내 카메라 업체도 미놀타와 AF 기술 제휴를 하려다 이에 가로 막혀서 목측식 카메라라는 시대에 수십년은 뒤떨어진 제품을 내놓았어야 했다.[12][13]

AF 기술은 플래그십에도 적용되어 1988년 F4가 발매되었는데, 보도=니콘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며 대박을 쳤다. 당시 한국에서도 시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는 카메라가 F4인지를 보고 기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정도였다. 그 전 해인 1987년 캐논은 EF마운트로 전환하기 위해 FD마운트를 버렸기 때문에 큰 원성을 사고 있던 차였다. 기존의 MF렌즈군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니콘의 인기는 엄청났고 이것은 F5로도 이어졌다.

2.5. 디지털 시대

1999년에는 최초의 실용적 디지털 SLR인 D1을 내놓으며 보도사진계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D1은 니콘 DX 포맷을 비롯 오늘날 DSLR의 여러 기술적 측면을 정한 기념비적인 모델이다. 물론 디지털에서의 최초는 아니었고[14]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여러 불편사항들이 있지만[15] 충분히 실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많은 문제점을 해결한 최초의 실용적인 DSLR이었던 것이다. 필름을 본사로 보내 현상 후 쓸 수 있는 쪽과 디지털로 바로 송고하는 쪽은 보도 속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진기자들의 어깨띠는 그야말로 니콘의 물결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듯 디지털에의 대응도 빨랐던 니콘이지만, 그 다음 플래그십 모델을 실기하면서 그 위상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니콘 D1의 성공 이후 캐논이 야심차게 내놓은 1D는 D1을 크게 상회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렌즈와 주변장비를 구입한 언론사들로서는 다시 비용지출을 감수하며 캐논으로 넘어가기보다 니콘의 후속기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 년 후에 발매된 D2h는 캐논1D에도 성능이 크게 미달하는 망작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캐논이 언론사의 니콘 장비를 되사주는 마케팅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결정타였다.[16] 그 결과 거의 모든 언론사가 캐논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이렇게 한번 바뀐 마운트는 비슷비슷한 성능인 채로는 바뀌지 않으므로 니콘은 D3가 나올 때까지 10년 가까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걷게 된다.

플래그십에서 밀려버리자 중급기와 보급기에서의 싸움도 쉽지 않았다. D100에 이어 보급기 D70, D50이 성공하고, D200과 D80 역시 인기를 얻는 등 개별 모델은 분전을 펼쳤지만, 캐논에 비해 발표 간격이 긴 것이 약점이었다.[17] 마치 티거 전차를 비롯한 독일군 무기의 성격과 비슷했다. 더구나 2000년대 캐논은 또다른 이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EF마운트로 전환한 후 고급 렌즈를 먼저 현대적인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였기 때문에 같은 시기 리뉴얼되지 않은 구형의 니콘 고급 렌즈보다 화질이 좋았던 것이다. 가령 화질에 민감한 웨딩사진업계는 90년대부터 이미 보케가 예쁘게 나오는 캐논으로 넘어가 있었다.

반격의 시기는 2007년에 돌아왔다. D2h에서 자체 개발 센서 LBCAST로 쓴 맛을 보았던 니콘이지만, 자체 개발에의 의욕을 버리지 않고 또다른 센서팀을 가동하고 있었다.[18] 이들은 굉장히 절묘한 밸런스의 센서를 만들게 되는데,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비교적 낮은 화소수로 안정적인 저노이즈를 달성한 것이다. 당시까지 디지털은 높은 화소수에 따른 처리속도가 병목이었기 때문에, 플래그십은 화소수가 낮지만 연사속도가 빠른 보도용 카메라와 연사는 느리지만 화소수가 높은 스튜디오용 카메라로 이분되고 있었다.[19] 이 이분법을 받아들인 캐논은 1.3x 크롭사이즈와 중간 화소수의 고속연사 1D 모델과 35mm 풀사이즈 및 높은 화소수의 고화질 1Ds 모델을 내놓고 있었다. 즉 센서를 35mm 풀사이즈로 하는 한 화소가 많아져 보도사진에 쓸 만큼 고속연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D3의 센서는 그 허를 찔러 35mm 풀사이즈이면서도 화소수를 확 낮춰버려 고속연사와 저노이즈 고화질을 달성, 보도사진에서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밸런스를 달성한 것이다.

D3에 비하면 1D는 크롭화각과 화질에서 떨어지고, 1Ds는 연사속도에서 떨어졌다. 캐논 입장에서는 대응 제품이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20] 일선 기자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면서 다시 니콘으로 넘어가는 언론사들이 나왔고, 니콘은 점유율을 상당 부분 탈환할 수 있게 되었다. 국내의 경우 스포츠 사진기자들은 거의 전부 니콘으로 넘어갔고 일반 사진기자들도 반 가까이 니콘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웨딩 사진에 있어서도 최고급 스튜디오들은 니콘으로 넘어갔다. 물론 동네사진관들이나 결혼식장 사진관들은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정도 일반화되기 시작한 시기에 DSLR을 구입한 곳들이고 기변의 필요성이 적기 때문. 다만 최고급 웨딩사진에서 선호도는 한일 차이도 조금 있는데, 일본은 우치다 사진관 등이 여전히 캐논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급기 시장에서도 D300은 플래그십에 맞먹는 고성능을 집어넣어 히트를 쳤다. 캐논의 두자릿수 바디는 가격을 좀 더 낮추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D300이 더 우위를 가져갔다.

또한 이 시기에 즈음해서 과거의 렌즈들을 현대 컴퓨터 설계로 리뉴얼하고 있다. 새로 나온 14-24는 터무니없이 압도적인 성능으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 발표 당시의 "해당 화각의 어떠한 단렌즈보다 우수하다"라는 발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캐논의 24mm 단초점 L렌즈보다 훨씬 선명한 사진을 보여주어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리고 렌즈의 리뉴얼에 따라 Nikkor 브랜드를 NIKKOR 브랜드로 변경했다.(…)

2008년 전 세계 DSLR 시장의 35~40%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으며, 전체 카메라 시장의 점유율은 6~8%. (오타가 아니다!)

DSLR이 아닌 소위 똑딱이 디카의 여명기(2000년대 초반)에는 쿨픽스 시리즈로 시장을 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쿨픽스 900에서 시작하여, 950, 990, 995 등으로 진화했던 렌즈부와 본체가 수납시에는 일체형이다가 촬영시 90도 회전하는 형태의 900 시리즈들은 당시 우수한 화질로 호평을 받았다.

유사한 컨셉이지만 소형 경량으로 휴대성을 중시한 쿨픽스 2500의 경우, 셀프 사진을 중시하던 당시 취향에 잘 부합하여 한때 국민디카로 사랑받았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DSLR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쪽에는 투자할 여력이 없었는지, 현재의 쿨픽스 시리즈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듣보잡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하위 기종들은 OEM 생산품이라는 의혹이 매우 짙다.

하지만 파나소닉의 하이엔드 광각줌렌즈의 LX-3 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다시 똑딱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러레스 카메라가 시장에 폭풍을 일으키자 니콘도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P7100 같은 하이엔드 똑딱이를 내놓더니 결국 2011년 9월 미러리스 카메라 마운트를 정식 발표했다. 자세한 내용은 Nikon 1 참조. 하지만 지금은 1년 넘게 신제품이 발매되지 않으면서 니콘이 버리지 않았는지 의심이 들 정도.

2017년 기준 니콘이 최대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부도 위기인데, 일단 연초에 희망 퇴직으로 1,000명을 퇴직시켰고 변화하는 시장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많은 유저들이 이탈해 버리는 등 심각하다. 가장 큰 원인은 캐시카우였던 DSLR의 시장이 쇠락 중인데 이를 대체할 제품군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소니올림푸스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버리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시그마나 캐논처럼 기존 렌즈 라인업을 활용한 미러리스를 만들기에 F 마운트는 너무 낡았고 기술적 난이도도 캐논과 시그마의 전자식 접점에 비해 상당히 높다. 마운트를 미러리스로 전환한다 쳐도 라이브 뷰나 동영상 기술이 타사보다 몇 년씩 뒤지는지라 향후 라인업에 상당히 먹구름이 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CP+에서 다른 회사들이 여러 신제품들을 공개할 때 니콘은 단순히 100주년 기념 바디 및 렌즈만 공개할 정도.[21] 더군다나 자이스와의 특허 전쟁 때문에 미국에서 카메라를 못 팔 수도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특허 전쟁에 진다면 막대한 적자는 물론 자칫하면 사업을 접어야 할 수 있다. 아예 후지필름이 니콘 지분을 구입해서 니콘을 살리려고 한다는 기사가 나온 상황이니 얼마나 힘든지 잘 알 수 있다.#

2018년 지금으로서는 D850이라는 유래없는 스펙의 괴물 DSLR을 만들어내서 어느정도 먹고살고는 있다. 또한 니콘 Z시리즈를 발표함으로서 드디어 미러리스 시장에 제대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앞으로의 행보는 지켜봐야알것이다. 물론 Z 7이 니콘 미러리스 과도기 물건답게 미래리스가 되어버렸다는거는 둘째치고...

2.5.1. 특허전쟁의 마무리

반도체 공정에 핵심적인 액침노광 특허를 침해했다면서 네덜란드의 ASML를 고소하여 오랜 법정다툼 중에 있었다. 위에 언급된 자이스와의 공방도 그 맥락이다. 거슬러올라가면 2001년부터 관련된 법정공방이 시작되었는데, ASML과 특허공유로 합의하였으나 2009년 특허공유가 만료된 이후에도 ASML이 계속 자사의 기술을 남용한다며[22] 다시 소송을 낸 상황이다. 그러나 원천기술을 가진 니콘은 이미 시장에서 거의 도태된 것이 현실이며[23], 2018년에는 ASML, 자이스와의 소송에서 패한 것도 모자라 특허도 무효가 될 상황에 처했다. 반면 ASML은 반도체공정 미세화에 힘업어 독점 수준으로 시장을 장악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중.

그러다가 2019년 1월, 자이스-ASML-니콘 3사간의 10년짜리 특허공유 계약이 합의되면서 일단 특허전쟁은 막을 내린 상황이다. 자이스와 ASML이 니콘에 약 1900억원을 일시금으로 지급하고, 이후 3사는 10년동안 해당 기술이 들어간 제품 매출액의 0.8%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서로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이며, 이로써 관런된 모든 국제소송들과 고발들을 취하하게 되었다. 결국 원천기술을 가진 니콘에게 어느정도 유리하게 협상이 이뤄진 셈. 쌍방 로열티라는 애매한 합의에도 그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니콘의 시장 점유율이 낮아서 ASML에게 낼 돈보다 받을 돈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EUV로의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며 ASML은 근 25년간 니콘의 기술로 돈을 벌만큼 번 반면 니콘은 EUV 시장에 안착을 실패했기 때문에 승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그냥 최근 소송에서 패소하는 등 암울한 상황에 비춰볼때 생각보다 선방했다는 정도가 맞을 듯하다. 물론 액침노광 기술이 근시일 안에 구식기술로 전락할 것 같지는 않지만.

3. 니콘의 카메라

3.1. 필름 SLR 카메라

3.2. 필름 레인지 파인더 카메라

  • 니콘 S1
  • 니콘 S2
  • 니콘 S3
  • 니콘 S4
  • 니콘 SP

3.3. DSLR 카메라

3.4. 미러리스 카메라

3.5. 컴팩트 카메라

3.6. 특수 카메라

1970년대 후반부터 NASA와 계약하여 스페이스 셔틀용, 우주정거장용, 탐사용(!) 등 특수 목적 우주 카메라를 공급했다. 여기에는 강한 내구성뿐만 아니라, 작동 중 미세한 불꽃을 일으키거나 가스를 발생시키면 안 되는 등 까다로운 제약도 충족하고, 렌즈는 태양광을 직접 쬐어도 플레어를 억제해야 한다는 요구에도 대응한다. 이 중 디지털백을 부착한 F4 NASA 버전은 세계 최초 DSLR이기도 하다. 니콘으로 수많은 멋진 EVA 사진들이 촬영되었으며 오늘날 ISS에서도 니콘 카메라를 사용한다. 척박한 환경에서 쓰는 군용 카메라도 니콘제가 많다. 이들 역시 베이스는 F3.

*Nikon S-100 : 니콘 슈퍼 8 기종 기반으로 한 비디오 카메라.

*Nikon QV-1000C : 니콘 SVC 프로토타입 이후 나온 기종. 스틸 이미지 카메라이며 대략 200대 정도밖에 생산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아남정밀을 통하여 필름전송기 NT-2000A와 같이 들여왔다.

4. 전범기업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군수물자를 납품하고 식민지민들을 징용한 전범기업이며, 2010년대까지도 전범행위를 인정 및 사죄하지 않고 우익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12년 8월 29일)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에서 니콘과 소속 그룹인 미쓰비시그룹이 일제강점기 때 강제징용과 군품 납품에 앞장선 것을 확인하였고 이후로도 사과하지 않고 인정도 하고 있지 않기에 전범기업으로 확정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 10만여명을 강제 징용했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군 군부들 에게 쌍안경, 저격용스코프 잠망경 야마토급 전함의 조준경 등의 군수 물품을 납품하였다.

니콘이 노골적으로 우익기업임을 드러낸 사건이 있다. 사진작가 안세홍은 2012년 6월 오사카에서 위안부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기 위해 니콘의 전시장인 '니콘 살롱'을 사용하기로 2011년 12월 계약했었으나 니콘이 소속된 전범기업 미쯔비시 그룹의 지시(추정)로 사진전 불과 한달 전인 12년 5월 위안부 사진전에는 장소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 이에 안씨는 소송을 걸었고 (15년 1월 22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니콘이 사진전 장소 제공을 약속했다가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은 표현활동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며 니콘은 안씨에게 110만엔(약 107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계약을 이행하라는 재판부의 결정에 오사카 전시회는 니콘이 끝내 거부하지 못하게 되자 기존에 1대였던 CCTV를 10대로 추가 설치하고 입구에 보안검색대를 설치했으며 직원 6명을 배치해 언론사의 출입을 막는 등 온갖 방해공작을 펼쳤다. 되려 어그로를 끌어주는격

5. 참고 문서


  1. [1] 영국에서는 니콘으로 발음한다.
  2. [2] 캐논은 반대로 일본식 발음인 '캬논'과 해외식 발음인 '캐넌' 둘 다 옳은 발음이다. 캐논은 초기 자사명을 관음(觀音)을 뜻하는 일본어인 '칸논(かんのん)'을 설립 당시의 표기법인 'KWANON'으로 적고, 이후에 세계에서도 통용될 명칭으로 일부 변경을 시도하면서 '성전', '규범', '표준'을 의미하는 'canon'과 비슷한 발음인 '키야논(キヤノン)'으로 정하고 영문 표기도 'canon'으로 정하였다. 발음을 일본어 관음에서 따왔으며 영어 canon의 의미를 빌려오기도 했으므로 두 발음 모두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3. [3] 이는 현재의 DSLR 렌즈 이름에도 쓰이고 있다. 1960년대에 일본광학은 국제시장에 렌즈를 출시하는데 이미 렌즈를 팔고 있던 차이스 이콘과 이름이 비슷해 Nikkor이라는 이름을 썼고 이게 지금까지 굳어졌다. 한국 이용자들 중에는 NikKOR이라 그런지 '니콘 코리아'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 듯.
  4. [4] 위안부, 징용 등을 포함하면 25,000명 가량 된다고 한다.
  5. [5] 당시 던컨에게 니콘 렌즈를 소개한 사진 작가는 미키 준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사람은 LIFE 지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진을 실은 일본 보도 사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니콘의 아마추어 사진 작가전의 '미키 준 상'이 그의 이름을 딴 것.
  6. [6] 최초는 펜탁스. 비공식은 소련의 스뽀르뜨(스포츠)
  7. [7] 물론 F2, FA등도 있다. 외신보도는 주로 F3P를 많이 사용했고.
  8. [8] 1985년 α-7000 발매
  9. [9] 렌즈측에 모터가 탑재되었으며, 렌즈 아래로 전원부가 툭 튀어나온 그야말로 못생긴 형태.
  10. [10] 실제로 니콘은 렌즈에 박스가 붙은 AF렌즈의 프로토타입을 1971년에 선보인 적이 있다.
  11. [11] F3AF와 함께 발매된 전용 렌즈는 2종으로, 추가 렌즈를 발매하겠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즉 로드맵을 변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12] 코비카로도 알려져 있다. 셔터 부분(마미야와 제휴)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산화 시킨 기종이기에 의미가 있다. 수출을 고려하여 초기형에는 테사 렌즈를 장착한 기종도 있다.
  13. [13] 최초의 100% 국산화 기종은 삼성 퍼지줌 10-50.(발매 당시가 55만원)
  14. [14] 세계 최초의 DSLR은 니콘 F3기반 코닥 DCS-100. 후지필름과 이후 x1.3배 크롭 센서로 출시한 기종이 E시리즈이다.
  15. [15] 색공간이 NTSC로 고정되어 있는 점 등.
  16. [16] 또한 캐논은 이렇게 되사들인 니콘 장비들을 중고시장에서 헐값에 풀어 니콘 중고시세를 폭락시켰다.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기였다.
  17. [17] 캐논은 코닥이 만든 CCD 계열에 대항해 CMOS 기술을 자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CMOS는 노이즈가 심해 화질이 중시되는 분야에는 CCD보다 불리하다고 여겨지고 있었지만, 노이즈 처리 기술을 정립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하였다. 자체 공장을 통해 원하는 사양의 센서를 원하는 시기에 조달할 수 있는 캐논은 제품발표 시기에서 유리한 입장이었다.
  18. [18] LBCAST 개발팀은 전원 해고. 한편 소니가 센서를 개발하고 니콘이 받아 쓴다는 식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니콘-소니 공동개발로 진행되는 것과 니콘 독자 설계로 진행되는 것 두 종류가 있으며, 전자의 경우 니콘의 기여가 있기 때문에 독점공급기간 이후 타사(미놀타 등)에 공급되면 니콘이 로열티를 받는다. D3의 센서는 니콘의 독자 설계이다.
  19. [19] 이러한 구분법을 먼저 제창한 것도 니콘이다. 비록 D2h가 망해버렸지만…
  20. [20] 이 상황은 1Dx가 나오는 2012년에야 해결된다. 거의 5년이 지나서야 화소수를 낮추면서 니콘의 콘셉트에 대응할 수 있게 된 것.
  21. [21] 그것도 성의 없이 100주년 마크만 붙여 놓은 게 고작이라 니콘과 타 유저들 모두 어이없어 했다.
  22. [22] ASML 측은 니콘이 부르는 값이 너무 크다며 연장을 거부.
  23. [23] 90년대까지는 마땅한 해외 경쟁사가 없을 지경이었고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업계 점유율 40%대로 1위였으며 ASML은 캐논에도 뒤져 3위였으나 점점 뒤지기 시작하더니 EUVL로의 전환에 실패해서 이제는 저가 장비시장에서나 일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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