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미카사노미야의 문장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일본어]])三笠宮崇仁親王; みかさのみや たかひと しんのう] (1915년 12월 2일 ~ )[1]

일본 황실의 개념인. 하지만 아들 셋을 모두 자기 보다 먼저 보낸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 개요
2. 출생과 종전 전까지의 삶
2.1. 군인 생활
2.2. 츠노다 사건
2.3. 전후의 삶
2.3.1.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대한 태도
3. 사생활
3.1. 결혼과 가정
3.2. 가족
4. 약력

1. 개요

일본의 황족. 고대 오리엔트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미카사노미야(三笠宮)라는 이름은 1935년 다카히토 친왕이 성년식을 거행했을 때, 나라에 있는 미카사 산(三笠山)의 이름에서 따서 지은 것이다.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막내). 어린시절의 칭호는 스미노미야(澄宮).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부이다. 2014년 현재 황위계승순위는 5위. 본래 후순위로 그의 아들들이 있었지만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현재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없다. 2016년 현재 생존한 황족 가운데서 가장 연장자이다.

2. 출생과 종전 전까지의 삶

큰형 히로히토 덴노와는 14살, 바로 위의 셋째 형 노부히토(宣仁) 친왕하고도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서 형들과 달리 덴노 부부가 궁정에서 직접 길렀다.[2] 이리하여 3명의 형들과는 나이 차가 있는데다, 황위계승 가능성도 낮았기에 비교적 행동반경이 자유로웠다. 훗날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얻는 배경이 된다.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있어서 '동요의 왕자님(童謡の宮さま)'으로 불렸다. 다이쇼 시대의 시 작품에는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레코드로 취입한 적이 있었을 정도. 1957년에는 아내인 유리코 비와 함께 <첫눈(初雪)>이라는 하이쿠 모음집을 내기도 앴다.

2.1. 군인 생활

육사 생도 시절에는 츠지 마사노부(辻政信)가 자원하여 교육을 맡았다고 하며, 후에 중일전쟁 중에 중국파견군[支那派遣軍]에서 같이 근무했다. 이 시절의 일화도 있는데 무타구치 렌야 항목을 참조하자. 당연하지만 츠지 마사노부보다 훨씬 똑똑했다. 츠지가 근성론을 부르짖으면서 "어쨌든 전쟁이란 의지가 센 쪽이 이긴다"라고 하자 "그럼 적들마저도 의지가 강하다면 어쩔 텐가?"라고 되물어 츠지가 횡설수설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731부대에서 중좌계급으로 고등관으로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생체실험에 대해 알게 된 다카히토 친왕은 야외실험을 하겠다는 명목으로 포로들을 공항으로 데려간 뒤, 포로들에게 중국 또는 중립국 행 비자를 발급해주어 포로들을 탈출시켰다. 이때 포로들에게 "오늘 실험은 귀관들이 중립국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다."라고 했다고. 731부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마루타를 탈출시키는 것은 중범죄로 여겨져, 731부대의 내규 상 사형 또는 그에 준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카히토 친황은 덴노가문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1계급 강등 처분만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존경받으실 친왕 [출처 필요]

2.2. 츠노다 사건

지나파견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와카스기 참모의 정체는 극비에 부쳐져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가 황족임이 거의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이때 중국통이었던 통역 기무라 다츠오(木村辰男)로부터 중국어와 관련 정보를 배워둬서 지금도 중국에 대한 이해가 깊다. 이후 대본영 참모로 전출되면서 귀국한다.

귀국한 뒤 전쟁종결을 모색하는데 동료인 츠노다 도모시게(津野田知重) 소좌와 함께 도조 히데키 내각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츠노다 사건)을 세웠다. 이 쿠데타 계획의 골자는 '주전파'로 분류된 도조 히데키 이하 일본군 장교들을 처단한 뒤 다카히토 친왕이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기시 노부스케이시이 시로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삼대오물들은 제 명에 못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데타 계획의 과격함에 놀란 다카히토 친왕은 헌병대에 자수해버렸고, 그에 따라 츠노다 소좌도 체포되어 쿠데타 계획은 미수로 그친다.

다카히토 친왕이 이 사건에 관여한 것은 분명했지만 불문에 붙여졌다. 1944년 9월에는 다카히토 친왕이 육군기갑본부로 전출되었고, - 본인의 지원이었다 - 츠노다를 비롯한 관련 장교들도 가벼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러한 까닭인지 1945년 4월 큰형인 히로히토 덴노와 면담을 요청했을 때는 '뭔 말을 하려는 건가??'라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고.[3] 패전 당시 계급은 육군 소령으로 항공총군 참모직에 있었다.

그리고 훗날 이걸 안 기시 노부스케

이 천하의 역적놈들!! 내가 네놈들[4]교수대에 올려주마!

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풋, 그러셔? 만약 전하께서 묵인만 했다면 너와 너의 친구들은 그 자리에 없었어.

라는 츠노다 도모시게의 조롱만 들었을 뿐,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못하였다. 하긴 지도 찔렸겠지

츠노다 도모시게는 전쟁 후 일본 과학기술진흥재단에 일하게 되었는데 미군이 레이더망으로 쓰던 주파수 대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허락이 떨어지자 그 대역에다 TV방송국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이 방송국이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긴급 방송 없이 기어코 정규 방송을 내보내고야 마는 걸로 유명해지는 용자 방송국 TV 도쿄가 된다.

2.3. 전후의 삶

동경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하여 고고학, 중동 역사, 셈어 계통 언어(Semitic languages)를 공부하였다. 특히 아나톨리아 고고학 전문 역사학자로서 알려졌다. 오랫동안 도쿄여자대학 등에서 고대 중동역사의 강의를 담당하면서 '왕자님 강사(宮さま講師)'로 불렸다. 사단법인 일본 중동 역사 학회 설립에 관여했으며, 학회장을 맡았다. 이 학회에서는 미카사노미야 오리엔트 학술상을 수여하고 있다. 이외에 오카야마 시립 오리엔트 미술관 명예고문이기도 하다. 재단법인 중근동 문화센터의 설립에도 진력하여, 센터의 총재로서 터키에서 카만 칼레후유크 유적의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최근에는 현지에서 상설연구기관으로서 아나톨리아 고고학 연구소의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2.3.1.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대한 태도

1950년대 후반부터 기원절(紀元節)의 부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학자적 입장에서 진무 덴노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이때 ≪일본의 새벽(日本のあけぼの)≫라는 책을 간행했다. 그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이때이다. 극우파들은 다카히토 친왕을 극렬 비난하면서 그를 황적에서 파낼 것을 대놓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우익 단체가 미카사노미야 저택 앞에서 면담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행위에 대해 한국중국에 사과해야 한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2차례 가량 하였다. ≪동방학 회상(東方学 回想) VIII. 학문의 추억 3.≫이란 책에서 모리 마사오(護雅夫), 나카네 치에(中根千枝) 등 다섯 학자들과의 좌담회에서 지난 전쟁 시기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1943년 1월 나는 중국파견군 참모로서 난징에 있는 총사령부에 부임해서 1년간 근무했다. 그 사이 나는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알고 말았다.", "성전(聖戰)이라는 대의명분이 사실과 한참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 내용이 정의의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겉으로는 성전이라고 강조할 수밖에 없던 게 아니었을까.", "이렇게 성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상실한 나로서는 오직 평화만을 바랄 뿐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3. 사생활

군복무 시절 지나파견군에 재직했기에 1972년 중일수교 직전에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은 바 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서 중국어히브리어를 구사할 수 있다. 학술관계의 업무에 있어서 다른 황족과 동석하는 기회도 많았다. 1970년과 1989년에 부부동반으로 영친왕 부부의 장례식 참석차 한국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참고로 광복 이후 일본 황족이 한국을 공식방문한 것은 그의 3남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부부가 유일하다.

2014년 현재 아키히토 덴노의 삼촌뻘 되는 황족 가운데 생존자는 다카히토 친왕뿐이다. 또한 옛 제국헌법 하에서 귀족원 의원을 지낸 사람들 가운데서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3.1. 결혼과 가정

화족 가문의 딸인 다카기 유리코(高木百合子)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유리코는 1923년생으로,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과 부인 다카기 구니코(高木邦子)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이다. 유리코가 여자 가쿠슈인 본과[5]를 졸업한 해인 1941년에 결혼했다. 유리코 비의 친정아버지 마사나리는 패전 후 신적강하로 화족의 신분과 재산을 잃고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자살했다. 한편 유리코 비의 외삼촌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6]는, 유리코 비의 큰시아주버니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낸 바 있다.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일기가 유명하다.

둘째 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秩父宮雍仁) 친왕[7]과 셋째 형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高松宮宣仁) 친왕[8]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난 데 비해, 미카사노미야는 큰형 히로히토 덴노의 직궁가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여럿 두었다. 그래서 패전 후 미카사노미야는 재산이 가장 적었는데도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 꽤 힘들게 지냈다고.[9]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다카히토 친왕의 자식대에 이르러서는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현행 황실전범상으로는 미카사노미야 가문도 머지않아 단절될 예정이다. 또한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 비 부부는 함께 장수했지만, 그의 세 아들들은 건강상의 문제로 모두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2. 가족

1966년 장남 토모히토 친왕의 만 20살 성년식 때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첫째 고노에 야스코, 넷째 센 마사코, 셋째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어머니 유리코 비, 막내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둘째 토모히토 친왕,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

  • 장녀 : 야스코(甯子) 내친왕(1944년 4월 26일 ~ ):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인 고노에 타다데루(近衛忠煇)의 부인. 1970년 타다히로(忠大)를 낳았다(1남). 가쿠슈인 초등과,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일본적십자 직원이던 타다데루와 결혼하여 황적에서 이탈했다. 훗날 남편 타다테루는 일본적십자사 사장이 되었다. 외아들 타다히로는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하여 자녀 3명을 낳았다. 게이코의 아버지는 구니 아사다케(久邇朝建)로, 고준황후의 큰오빠인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차남이다.
  • 장남 : 토모히토(寬仁) 친왕(1946년 1월 5일 ~ 2012년 6월 6일): 아소 노부코(麻生信子)[10]와 결혼하여 1981년 장녀 아키코(彬子) 여왕과 1983년 차녀 요코(瑤子) 여왕을 낳았다(2녀).
  • 2남 : 요시히토(宜仁) 친왕(1948년 2월 11일 ~ 2014년 6월 8일) - 가츠라노미야. 독신. 1988년 쓰러진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2008년 패혈증이 발병하여 2014년 죽을 때까지 눈을 편안히 감지 못했다고 한다.(그렇지만 오른쪽 눈은 당뇨병 합병증으로 실명한 상태인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 2녀 : 마사코(容子) 내친왕(1951 ~ ) - 센 소시츠(千宗室)의 부인. 1984년 장남 아키부미(明史), 1987년 장녀 마키코(万紀子), 1990년 차남 다카부미(敬史)를 낳았다(2남 1녀). 언니 고노에 야스코와 마찬가지로 가쿠슈인 초등과, 여자 중등과, 여자 고등과를 졸업했고,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상이 일본에까지 들려오는 바람에, 어머니 유리코 비가 크게 걱정하여 프랑스까지 직접 찾아갈 정도였다고 한다.[11] 귀국하여 가쿠슈인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외국어를 활용한 왕실 외교와 공무 등을 했다. 1983년에는 다도(茶道)로 유명한 센 가문[12]의 아들 소시츠와 결혼하였다(참고로 소시츠는 마사코보다 무려 5살 연하).
  • 3남 : 노리히토(憲仁) 친왕(1954년 12월 29일 ~ 2002년 11월 21일) - 다카마도노미야. 돗토리 히사코(鳥取久子)와 결혼하여 1986년 장녀 쓰구코(承子) 여왕, 1988년 차녀 노리코(典子) 여왕, 1990년 3녀 아야코(絢子) 여왕을 낳았다(3녀). 노리히토 친왕은 2002년 스쿼시 경기 중 의문사했고, 그의 아내 히사코 비는 여전히 활동 중이다.[13]

3남 노리히토 친왕이 타계한 뒤에 찍은 사진
  • 친손녀 5명, 외손자 3명, 외손녀 1명, 외증손 3명이 있다. 생존한 황족들 가운데서 증손을 본 것은 미카사노미야 부부뿐이다.

4. 약력

  • 1915년 12월 2일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으로 탄생
  • 1936년 가쿠슈인(学習院) 초등과와 중등과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48기로 기병장교로 임관
  • 1941년 10월 22일 화족 다카기 마사나리(高木正得) 자작의 차녀 유리코(百合子)와 결혼하여 이후 3남 2녀를 두었다.
  • 1943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코드네임 '참모 와카스기(参謀・若杉)'로 난징의 지나파견군(支那派遣軍)총사령부에서 근무
  • 1944년 9월 육군기갑본부로 전출
  • 1947년 4월 도쿄대학 문학부 연구생이 되어 고대 오리엔트사를 전공
  • 1955년에는 도쿄여자대학 강사. 이후 여러 대학의 역사학 강좌를 맡은 바 있음
  • 1979년 중근동문화센터(中近東文化センター)를 설립하고 총재를 맡음
  • 1991년 프랑스의 비문문예(碑文・文芸)아카데미 외국인 회원
  • 1994년 영국 런던대학 동양-아프리카 연구원 명예회원


  1. [1] 2016년 시점에서 100세 불사약이라도 드셨나 착한일 해서 그렇다
  2. [2] 당시 관습상으로는 양육계를 따로 두었다.
  3. [3] 근데 도조나 기시한테는 알리지 않았다.
  4. [4]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다카기 소키치, 츠노다 도모시게, 히라바야시 모리토(다카히토가 헌병대에 자수할 당시 헌병 사령관.)
  5. [5] 현(現)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여자 고등과에 해당.
  6. [6] 스게마사의 이모 야나기하라 뱌쿠렌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으로, '다이쇼 시대 3대 미인' 중 하나이자 문학적 재능과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7. [7] 부인 세츠코(勢津子) 비(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로,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는 한번 임신하였지만 2.26 사건 당시 유산한 뒤, 다시는 임신하지 못했다.
  8. [8] 부인 키쿠코(喜久子) 비(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자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외손녀)는 한번도 임신하지 못했는데, 이는 노부히토 친왕에게 게이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9. [9] 하지만 여기서 꽤나 훈훈한 일화가 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전우회(특히 TV 도쿄)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10. [10] 아소 다로의 여동생이다.
  11. [11] 조카 쓰구코 공주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자세한 것은 쓰구코 공주 항목을 참조.
  12. [12] 센 가문이 왜 다도로 유명한가 하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에게 다도를 가르쳐준 스승이자 일본 다도의 기초를 만드는 등의 공헌이 커 지금도 다도의 원조라 불리는 센노 리큐의 가문이기 때문이다. 정작 센노 리큐는 히데요시에게 밉보여 자결하고 말았으나, 후손들은 별 제약없이 계속 다도를 수련해 이러한 다도를 일본 전역으로 퍼트리게 된다.
  13. [13] 아베 신조의 아내 아베 아키에(安倍昭惠) 여사와 함께 방한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5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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