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먼드 투투

1. 유년 시절
2. 성직자가 되다
3. 투쟁에 나서다
4.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5. 거듭되는 시련
6. 노벨상
7. 충돌
8. 대주교가 되다
9. 아파르트헤이트의 최후의 저항
10. 그 후
11. 어록 및 유명한 연설

<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83 -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1985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

Desmond Mpilo Tutu

1931년 10월 7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성직자, 성공회 대주교.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철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평화 운동가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별로 인지도가 없다.

1. 유년 시절

데즈먼드 음필로 투투는 1931년 10월 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빈민촌 클러크스도프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인 자차리아 투투는 교사로 흑인사회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백인들 눈에는 이 사람도 어디까지나 검둥이에 불과했고 백인 경찰들은 수시로 그가 누구이건 상관도 안하고 길거리에서 함부로 붙잡고 신분증을 요구하곤 했는데 이는 어린 투투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어머니 아레타 투투는 백인 가정의 하인 출신으로 후덕한 인품으로 역시 평판이 좋았고 '학대받는 사람들의 위안자'라는 뜻인 코모초라는 애칭으로 더욱 널리 불렸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이 다 그렇듯이 그들의 가정형편은 매우 불우했고 투투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테니스 공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진 잡동사니 정도였다. 투투는 훗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맨발의 장난꾸러기'라고 표현했다.

1945년 투투 일가는 클러크스도프 인근의 문시빌로 다시 이주했고 그곳에서 투투는 20킬로미터나 떨어진 소피아타운의 마디베인 학교에 기차로 통학하게 된다.

이때 투투는 카드를 배워 탁월한 타짜로 소문이 나게 되었고(...) 그의 총명함에 감탄한 친구들에게 교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와중에 투투는 1936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제시 오언스나 가수 루이 암스트롱같이 유명한 흑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웠다.

그해 투투는 결핵으로 앓아눕게 되었는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평등운동가인 트레버 허드레스턴 신부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투투가 투병한 2년간 매일 찾아오면서 말벗이 되어 주었고 훗날 투투가 종교에 귀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나중에 허드레스턴 신부는 투투와 같이 反아프르트헤이트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2. 성직자가 되다

1950년 투투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극히 얼마 되지 않은 대학과정을 수료한 흑인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았고 결국 교사가 되기로 하였는데 이때 레아 쉔세인 여사를 만나 1955년에 결혼하게 되는데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공부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1].

같은해 투투는 문시빌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의 첫 학생들은 60명 정도였는데 그의 강의는 크게 인기를 끌어 곧 흑인사회에 전체에 투투는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의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 헨드릭 페르부르트 박사(1901~1966. 네덜란드계로서 영어식 독음인 베르워드가 유명하지만 이는 오류다.)의 주도로 남아공 정부는 1958년 반투 교육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는 흑인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는 권리를 사실상 박탈했다.

그해 수상이 된 페르부르트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다음 같은 주옥같은 개소리를 남겼다.

"반투 아이들에게 실제로는 하나도 써먹을 수 없는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현재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 아래에서 그의 일생을 보내게 될것이라고 기대하며 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격분한 투투는 교사직을 때려치고 신학대학인 성 베드로 대학에 입학하여 신부가 된다. 그 와중에 1956년 남아공 정부는 자유헌장을 발표하여 전국민에게 선거권과 부의 재분배를 요구한 연합 의회 의원 156명을 체포하여 반역죄로 기소했고 이중에는 유명한 넬슨 만델라도 있었다. 다행히도 이들은 변호사 베르논 베레제의 열렬한 투쟁으로 1961년 전원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남아공 정부는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병크를 터트린다.

1960년 3월 21일 새 인종차별 법안에 반대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백인 경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69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부상당한 악명높은 샤프빌 학살사건이 터진 것이다.

투투는 같은 해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1년에 성공회 교구 사제가 되었으며 1962년 런던의 영국 왕립 대학에 신학공부를 하게 떠나게 된다. 투투는 런던에서 경찰관을 만날 때마다 신분증을 미리 준비하며 떨었고 백인들이 자기를 밀치고 새치기를 할때마다 순순히 물러섰으나 경찰들이 자신을 백인과 똑같이 대우하고 직원들이 새치기한 백인을 줄에서 쫓아내는 것을 보며 매우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투투는 자신이 얻은 권리가 믿기지 않아 일부러 한밤중에 길거리를 혼자 활보하고 경찰관들에게 일부러 아는 길을 물어보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곤 했다.

또한 런던 하이드 공원의 연설자 코너를 자주 방문하여 영국인들이 거리낌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투투는 5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며 그곳에서도 재치와 유머를 발휘하고 성실함과 훌륭한 인품으로 그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67년 그가 남아공으로 귀국할 때 런던 사람들은 성대한 송별 파티를 열어 주었다.

한편 남아공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시궁창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마침내 대통령이 된 페르부르트 박사는 틀렸어. 이제 꿈도 없고 희망도 없어. 남아공의 일부 지역에서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심히 불쾌해져서 악명높은 고향법을 통과시켰다.

이유인고 하니 더러운 흑인들이 신성한 백인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미친 작자들은 자신들의 개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백인종이 흑인들의 위협에 지대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남아공 전체에 여덟 개의 '고향'을 설정하여 전체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을 국토의 13%로 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강제로 내몰고 흑인들에게 공공장소, 대중교통 등 국토 대부분을 활용할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페르부르트가 고향이랍시고 내몬 곳은 흑인들이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아파르트헤이트 항목 참조.

흑인들의 처지는 시궁창까지 몰렸고 심지어 시민권조차 박탈된체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투투가 학교를 다닌 소피아타운이라고 무사할 순 없어 소피아타운의 흑인 6만 명과 허드레스턴 신부는 소피아타운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2000명의 경찰들이 투입되어 모든 집과 시설을 파괴했고 주민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정신"승리"라는 이름의 백인 마을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페르부르트는 황당한 정책들로 인해 백인들에게도 원한을 많이 받았다. 철저한 금욕주의 정책으로 동성애 금지는 기본에 나라를 망치는 악마의 바보상자라고 텔레비전을 금지해서 그가 죽고난 뒤 10년도 더 지나서야 TV방송국이 생겼었다. 인종 가릴것 없이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황당한 법을 만들기도 했다. 애초에 남아공 백인들 중에서도 실세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계 아프리칸스인들은 대다수가 칼뱅파 청교도 성향이었기 때문. 무엇보다 부유층을 위한 노골적인 농업 개혁정책으로 백인 농민들 원성도 많이 받았으며 1960년에 백인농부 데이비드 프래트가 총으로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 프래트는 농업정책으로 원한을 가졌다고 말했지만 당시 남아공 정부는 당황하면서 프래트(61년에 자살)는 정신이상자라서 같은 백인 수상을 암살기도했다고 어물쩍 공개발표했다. 그러나 결국 페르부르트는 1966년 드미트리 차펜다스라는 그리스계 백인[2]에게 칼에 맞아 암살당했다. 역시 남아공 백인 정부는 차펜다스도 정신이상자라고 발표했지만 세계적으로 뭔 짓하기에 백인 정신이상자들만 죽이려 하냐며 비아냥거렸고 당시 이집트에선 인종차별주의자로서 같은 백인에게 죽어서 행복했을 것이라고 비웃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도 역시 백인이 강압적으로 권력을 잡던 짐바브웨(당시 로디지아)를 빼고 죄다 그의 죽음을 고소해했다.

투투가 귀국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투투는 3개의 학위를 가지고 케이프 주의 앨리스에서 그리스어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투투는 정치적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남아공의 상황은 그를 괴롭혔고 1968년 포트 헤어 대학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550명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점거하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농성했다. 오후 2시, 경찰이 투입됐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정부에 의해 완전히 낙인이 찍혀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며 투투는 "내 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소"라고 1998년에 회고했다.

3. 투쟁에 나서다

3년간의 앨리스 생활 이후 1970년 투투는 레소토에서 대학강사로 일하게 된다. 이미 그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학계와 교회에서 그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972년 투투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부의장이 되어 다시 3년간 런던에서 살게 되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했는데 이때 그의 리더십이 극도로 향상되기 시작했다.

1975년 투투는 요한네스버그 대성당의 수석 사제장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리고 이는 흑인으로써 가장 높은 성직에 오른 케이스였다. 남아공의 흑인들은 흑인이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에 열광했고 투투는 사제장에게 주어지는 백인 지역의 호화 저택을 거부하고 흑인 빈민가 소웨토에서 살기를 고집하며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백인들 중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아공 정부는 반투지역의 흑인 학교에서 백인들의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강요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편 투투는 새 대통령인 존 보스터에게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는 정의의 확립과 인종 박해의 종식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투투는 편지 말미에 인종차별정책이 지속되면 머지않아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존 보스터 대통령은 투투의 편지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투투가 흑인들을 선동하여 소요사태를 일으키려 한다고 비난을 할 뿐이었는데...투투가 경고한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4. 백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1976년 6월, 투투가 보스터 대통령에게 경고한지 두달만에 사건이 터졌다. 남아공 정부는 반투 교육부에서 제의되었던 아프리칸스어 강요법안을 통과시켰고 자신들이 백인들과 뒤질 것이 없다면서 세력을 불리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이 격분하여 이에 맞서게 된 것이다. 1976년 6월 16일 소웨토에서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강요에 맞선 평화시위를 벌였다. 급격히 수가 불어난 그들은 올랜도 중학교에 모여 농성을 벌였는데 경찰들이 경고없이 발포하여 헥토르 페터슨이라는 12세의 소년이 사망했다.

흑인 사회 전체가 뒤집혔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흑인들은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수백명이 넘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봉기는 몇달간 지속되었고 수천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비록 인종 차별 정책 철폐에는 실패했지만 백인정권은 크게 놀라 흑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강경정책으로 나서게 되었다. 군인과 경찰들이 비무장 시위대와 학생들에게 총을 쏘고 개를 풀고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는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세계의 여론은 1982년 사브라, 샤틸라 학살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듯이 크게 나빠졌다.

이런 절묘한 타이밍에 투투는 레소토의 주교로 임명되어 남아공을 떠나야만 했다. 그때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흑인 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던 스티브 비코가 서른살의 나이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그가 고문과 구타로 사망했단 사실이 알려지자 흑인 사회는 다시 한번 들끓었다.

그 소식을 들은 투투 역시 크게 상심하였는데 그 순간 투투는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인종차별이 흑인 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흑인 차별은 장기적으로 백인들의 인간성에게 손상을 주고 백인들에게 손해라는 흑인의 입장에서는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이다.[3]

법무장관 지미 크루거가 "그까짓 검둥이 하나 죽어봐야 그것은 내가 걸린 감기 이상의 고통도 주지 못한다"라는 망언을 함에 따라 투투의 발언은 더욱 부각되었다. 투투는 크루거를 "한 인간의 죽음을 보고 감기 말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크루거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남자라고 불렀다. 오오 대인배.

투투는 한걸음 더 나아가 비코의 장례식에게 인간성을 잃어가는 백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촉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흑인도 인간임을 알게 하자고 주장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렇게 투투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는 흑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는 남아공의 백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은 흑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가 거의 알지 못했는데 흑인들이 백인 구역에 못가듯이 백인들도 흑인 구역에 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모든 언론과 미디어는 정권의 검열을 받았으며 흑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모함하는 온갖 찌라시 선전물들이 판을 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정당이 제1야당(연합당->진보연방당)으로 존재했었기는 했지만 어차피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늘 과반이상을 확보했던지라 별 의미도 없었다.[4]

이것이 얼마나 심했으면 아파르트헤이트가 철폐되기 전까지 남아공 백인들이 본 투투의 모습은 이를 앙다물고 주먹질 하는 모습들 뿐이었고 그들이 들은 투투의 유일한 육성은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간디? 정도였다. 그래서 남아공의 백인들에게 투투는 평화운동가가 아닌 히틀러 같은 미친 선동가 이미지 뿐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모함이었다.

1978년 투투는 다시 남아공의 사제가 되었다. 그는 7년간 일하며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이무렵 흑인 중산층들은 대대적으로 성장했고 정권의 악랄한 차별정책에 맞서 격렬히 투쟁하기 시작했다.

이는 작지만 값진 성과들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흑인이 백인 전용 공원이나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법안이 사라졌으며 흑인과 백인의 시합도 허가되었으며 흑인들이 도시의 호텔을 이용하는 것도 허락되었다.

새 대통령 보타는 "인종 차별은 영구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는 등 변화의 기미가 보였으나 사실 이것은 포르투갈 독재정권 붕괴와 로디지아 정부 교체, 국제제제로 어려움에 처한 남아공 정부가 대외이미지 개선을 위한 연막작전으로 약간의 빵을 주어 흑인 중산층을 만족시키고 해외의 여론을 개선하면서 차별정책의 핵심을 유지하려는 간사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통행법과 집단영역법은 손도 대지 않았으며 이는 흑인 청년층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되었다.[5]

5. 거듭되는 시련

이 무렵 투투는 세계적인 지도자 중 한사람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그의 목숨도 위험해졌다. 그는 끝없이 백인과의 화합을 요구하며 흑백인종이 모두 공존하는 사회를 추구했지만 백인정권의 눈에는 그는 백인들을 멸종시키려는 불순하고도 위험한 야심가에 지나지 않았다. 평화적인 사람에게도 이 정도인데 진짜로 백인들은 적이라고 선동하고 다녔으면 어떻게 됐을지 남아공 정부의 사주를 받은 언론들은 맹비난을 쏟아냈고 공공연히 그를 "안경을 쓴 검은 벌레"라고 조롱하였으며 협박전화, 공갈들이 쏟아져 그의 신변을 위협했다.

투투는 자신이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혔으나, 1979년 투투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서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 일환으로 덴마크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남아공 산 석탄을 보이콧 할 것을 촉구하면서 남아공 정부는 그를 빌미로 최초로 투투의 여권을 압수하였다.(다행스럽게도 캔터베리 대주교를 비롯한 거물급 종교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고 나서자 곧 마지못해서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0년 투투는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지문을 채취당하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81년 투투가 남아공 정권을 '나치 이래 최악의 체제'라 비판하고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인종차별철폐에 관해 논의한 후 귀국하자 남아공 정부는 그의 여권을 다시 압수하여 1년 이상 돌려주지 않았다.

투투에 대해 잘 모르던 대다수 백인들도 투투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흑인들도 그의 투쟁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투투는 지속적으로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청하여 영국, 미국, 서독 등에서 약간의 조치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투투를 공개적으로 매국노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백인정권 뿐만 아니라 국가 자체를 흔들수 있는 이러한 행동에 여론이 악화된 것을 등에 업은 남아공 정부는 투투가 소속된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를 깎아내리기 위해 조사회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흠집도 잡지 못해 뻘짓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은 한순간에 노벨상 수상으로 뒤바뀌게 된다.

6. 노벨상

1984년 10월 15일 투투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인간의 존엄과 우애,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남아프리카의 모든 개인과 단체에게 보내는 세계의 격려"라는 취지와 함께 수상된 노벨상의 여파는 엄청났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영국의 테리 웨이터,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인도의 인디라 간디[6] 등에게서 축하가 쇄도했고 남아공의 흑인 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거기에 기쁨이 겹쳐 투투가 요한네스버그의 사제로 임명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흑인들은 열광 그 자체가 되었다.

오슬로에서 열렸던 노벨평화상 시상식 직전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협박전화가 걸려와 소동이 벌어졌으나 그냥 공갈이었고 쟁기를 만들자는 구약 성서의 구절을 인용한 투투의 연설로 수상식은 감동적으로 끝날 수 있었다.

투투의 노벨상 시상은 단순히 남아공 흑인들의 투쟁에 힘을 실어준 것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하여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세계적인 문제로 급부상되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7. 충돌

1983년 보타 대통령은 1948년 남아공 국민당이 집권한 이래로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한해 투표권을 컬러드(혼혈인)와 인도계들에게까지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으나 문제는 인구의 80%에 달하는 흑인들은 배제시켰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는 흑인들을 남아공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고수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당연하게도 흑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전국각지에서 시위와 집회가 잇달았고 기세는 몇개월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5년 3월 샤프빌 학살 25주년 집회에서 폭발했다. 남아공의 최남단 우이텐 하지에서 경찰이 또다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 스무 명이 숨지고 그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다.

남아공은 그야말로 뒤집혔다.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흑인들은 일손을 놓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정부도 경찰과 군대를 풀어 잔혹하게 진압함에 따라 남아공 전체가 최루가스와 총성에 뒤덮혔다. 유혈사태는 날이 갈수록 악회되어 무장 경찰들이 차량을 타고 돌아다니며 의심가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11살짜리 아이들도 있었고 그 수가 3만 명을 넘었다.

거기에 흑인들끼리의 유혈사태도 속출했다. "동지들"이라 불리는 과격 흑인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백인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흑인들을 체포하여 목걸이형을 선고했다.(목걸이형이란 기름을 채운 타이어를 목에 걸고 불을 붙여 죽이는 잔인한 사형을 말했다.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7]

투투는 흑인들에게 평화를 촉구하며 유혈사태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말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985년 7월 투투는 두두자라는 마을을 찾아 경찰에 살해된 4명의 흑인들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두두자는 최악의 국면에 치닫는 곳이었는데 경찰들이 열명의 흑인들을 살해하고 흑인 지도자들을 체포하자 분노한 흑인들이 경찰과 백인 지도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워버리는 등 보복이 맞물리고 있었다. 투투는 그곳에서 폭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흥분한 군중들에게 그는 실망을 줄 뿐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을 몰아낼 강력하고도 전투적인 지도자를 원했고 투투는 백인들에게 굴복하는 비겁한 작자로 매도되었다.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투투가 두두자를 떠난지 며칠만에 어느 여자가 경찰의 끄나풀로 몰려 드잡이를 당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같은 시각 콰테마 스타디움에서 또다른 14명의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주관하던 투투는 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로서는 백인에게서 자유를 찾아야 하는 명목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계속된다면 나는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보따리를 꾸려서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유를 찾겠다는 동기는 지극히 정당하고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승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적들이 악용할 수도 있는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안됩니다."

흑인들은 누가 탄압을 하고 있는데! 라면서 격렬하게 반발했고 투투가 보타 대통령과 회동하자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

8. 대주교가 되다

1986년에 투투는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이는 어떤 흑인도 올라보지 못한 높은 자리였고 웬만한 나라의 국가원수에 맞먹는 자리였다. 투투의 대주교 즉위식은 2년전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투표권도 없는 사람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라이어널 리치, 스티비 원더, 아서 애시시, 마틴 루서 킹의 아내인 코레타 스콧 킹 등이 초청되었고 성 조지 성당에서 착좌식이 열렸다. 투투는 이곳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다.

"내가 우리 주님에게 매일같이 드리는 기도는 유색인(colored), 흑인, 백인으로 피부색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형제 자매로서 진정한 일체감을 발견하고 또한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투투가 워낙 엄청난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명사가 되자, 남아공 언론들은 더 이상 투투를 노골적으로 비난하기 어려워졌고 주로 '투투가 어디서 어떤 불온한 발언을 하였더라!'라는 식으로 보도하던 신문들에는 '대주교님이 오늘은 외국 손님을 만나셨다', '대주교님께서는 매일 아침 30분씩 조깅을 하신다.' 등의 내용으로 바뀌었다.

또 투투가 대주교가 된 직후에 전설적인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워너브라더스로 이적한 뒤 발표한 첫 앨범의 제목과 타이틀 곡을 'Tutu'로 이름지었고, 여기에 넬슨 만델라에게 헌정하는 'Full Nelson'을 추가해 남아공의 흑인 민권 운동에 지지를 표했다.

한편 그의 케이프타운 대주교 임명이 정치적인 것 뿐이며 사실 투투는 대주교가 될 자격이 없다면서 투투의 대주교 임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성공회 고위층과 투투의 지인들은 투투가 만약 흑인 인권 운동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리쯤 진작에 꿰어찼을 것이며 이번 대주교 임명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는 반응이었다.

9. 아파르트헤이트의 최후의 저항

투투의 대주교 임명에 맞추어 잠시 비상사태를 해제했던 남아공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안정국을 열었고 이는 지난번 비상사태보다도 훨씬 지독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불심검문, 투옥할 권리는 물론 구타, 고문, 사살할수도 있었다. 거기에 백인들 사이에서 아프리카너 위르스탠즈베위깅이라는 극우 정당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하켄크로이츠를 걸고 다니고 나치정치깡패였던 돌격대식 집회를 열면서 흑인들을 위협했다.

이들은 수만 명의 흑인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있는 보타 정권에게 '검둥이들을 너무 풀어준다'면서 지나친 자유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과거 페르부르트 정권의 정책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는데 1987년 총선에서 국민당이 123석(임명 12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고 보수당이 진보연방당을 제치고 제 1야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88년 보타 대통령은 모든 인종차별반대집단을 금지함으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했고 만족한 백인들은 진정되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나나 싶었던 순간 1989년 보타가 권력투쟁에서 밀려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고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대통령이 되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8] 1990년 2월, 클레르크 대통령은 넬슨 만델라를 조건없이 석방했고 만델라는 27년 만에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992년 재보선에서 국민당이 보수당에게 패배하자 바로 국민투표를 시행하며 아파르트 헤이트 폐지를 백인에게 공인받았고, 1994년 4월 처음으로 전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역사적인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압승하면서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었다. 투투가 말하던 승리의 날이 온 것이다.

10. 그 후

인종차별 정책은 사라졌지만 그 앙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풀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만델라 정권은 진실, 화해 위원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당시에 저질러진 모든 종류의 범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고 위원장으로는 투투가 임명되었다.

당연하게도 투투가 위원장이니 만큼 위원회는 흑인들의 피비린내나는 복수판이 되지 않았고 흑인들까지 공정하게 밝혀내며 공정성을 유지했으며 과거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느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를 제시하며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쳤다. 그 후로는 투투는 공식적인 행동을 대체로 삼가고 있으나 미국의 FLAN 게릴라 석방을 호소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10년 7월 22일 그는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11. 어록 및 유명한 연설

  • 우린 불복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있으니까요. - 악법도 법이라면 (현 남아공 체제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법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답하길
  • 당신은 요하네스버그의 거대한 저택에서 그 곳에 사는 단 두 명의 백인들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집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에 당신은 이른 새벽에 당신의 집을 나서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집으로 돌아갈 무렵이면 당신의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어서 당신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 것입니다. 당신의 집은 당신이 조금 전에 일을 마치고 온 그 저택의 거실 하나보다도 작을 것입니다.
  • ...자신의 아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 까요? 인종 차별은 언제나 이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땅바닥에 떨어져 무참하게 짓밟히게 됩니다. - 어릴 적에 자신의 아버지를 경찰들이 'boy(이 녀석,이 새끼)'라고 부르면서 막 대하는 것을 회고하면서
  • 어느 정부 관료는 늙어서 아무 일을 못하는 흑인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생충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입니다.
  • 백인들도 웃고 사랑하고 아이를 키우고 울고 먹고 잠을 잡니다. 그들 역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인간이라면 그들은 왜 흑인들도 웃고 사랑하고 아기를 키우고 울고 먹고 잠을 자는 똑같은 인간이란 생각을 하지 못할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런 일(인종차별)이 앞으로 계속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까요?
  • 백인은 흑인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르더라도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건 간에 백인 소년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8세의 백인 소년은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억압과 착취의 묵인으로 세뇌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백인들이 여러분들을 자학하게 만들고 자기 증오로 가득 채우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백인만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일과 역할을 지시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 여러분의 그러한 자기 증오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커다란 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지금 여러분들은 모두 흑인들이 '백인들은 모두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흑인들이 '우리는 백인을 미워하지 않으며 단지 인종차별을 싫어하고 불의와 억압을 미워할 뿐이다. 우리는 위대한 미래를 향해,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피부 색깔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규정되는 그런 나라로 향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 지금 남아프리카의 상황은 폭력 천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폭력은 바로 인종차별이란 폭력입니다. 그것은 이주를 강요하고 재판도 없는 구금과 경찰에서의 의문사, 또한 아이들에게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강요하는 것을 불러 일으킬 겁니다.
  • 왜 그들은 나를 두려워 하는 것일까요? 나는 남아공에서 선거권도 없는데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흑인 한사람의 말 한 마디, 그것도 사실이 아닌 말을 지껄이고 다니는 사람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요? 그 흑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그들이 나를 공격함으로써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나의 인격을 모독함으로써 내가 비난하고 있는 사악한 체제를 바꾸기라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 이 상(노벨평화상)은 역 앞에 앉아 감자옥수수, 돼지고기를 파는 우리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1년 가운데 11개월을 자녀들과 떨어져 독신 숙박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우리 아버지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보금자리를 산산히 파괴당한 채 수용소에서 비에 젖은 매트에 앉아 우는 아이를 달래며 지은 죄라고는 남편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어머니들의 것입니다. 이 상은 마치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는 이 땅의 350만 흑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상은 우리들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인정해준 것입니다. -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
  • 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나라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란 말인가? - 11세의 소년들까지도 경찰들에 의해 닥치는대로 투옥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한 연설
  • 하느님이 나에게 부여한 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부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좋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 처럼 나는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하느님의 말씀이 내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타올고 있는 이상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죽음은 최악의 것이 아니다. - 남아프리카 교회 협의회를 조사하기 위한 감사위원회에서의 증언
  • 백인들이 우리에게 와서 성서를 주고 기도하라고 했죠. 그래서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성서를 받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백인들은 아프리카를 차지했더군요. 하느님이, 예수님이 참으로 분노할 짓을 하고 그걸 성서로 덮어버렸죠.
  • 만일 당신이 부당한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면, 당신은 박해자의 편을 택한 것이다. 코끼리가 생쥐의 꼬리 위에 자기 발을 올려 놓고 있는데 당신은 '나는 중립을 지킨다'라고 하면, 그 생쥐는 당신의 중립에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1. [1] 성공회 사제는 결혼이 허용된다.
  2. [2] 사실은 흑인피가 약간 섞여서 컬러드로 분류되었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서류상 그를 백인으로 대접해줬다. 다만 페르부르트를 비롯한 진짜배기 아프리카너들은 그를 사적으로 홀대했고 이는 암살 사유들 중 하나가 되었다.
  3. [3]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의 5번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도 이 말이 맞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단 문화적으로 당시 아파르트헤이트와 함께 백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철저한 칼뱅주의적 신정통치에 가까운 금욕주의 혹은 엄숙주의 정책을 병행했기 때문에 백인들 내에서도 상당히 이러한 분위기를 답답하게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일단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어 영국계나 유대인 같은 비-아프리칸스 백인들도 은근히 배제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또한 좌파나 자유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비롯한 극우 매카시즘적인 공안 정국 또한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4. [4] 연합당-진보연방당의 텃밭인 영국계의 쪽수가 보어인들에 비해 상당히 적었던것도 있고 또, 선거구가 연합당-진보연방당에게 불리하게 짜여져 있었던데다가 이들의 주요 지지기반인 컬러드가 1950년대 중반부터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질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 당연히 아파르트헤이트 제도의 폐지논의가 힘을 얻을래야 얻을수가 없었다.
  5. [5] 다만 백인들에겐 효과는 있었는지 일부 연합당 출신 의원(남아프리카 당)들이 국민당에 입당하기도 하고 상당수 자유주의적 백인들의 지지표를 꽤 확보해서 극우파들이 보수당으로 떨어져나간 상황에서도 1987년 총선에서 52.3%라는 득표율을 확보했다 ㄷㄷ.
  6. [6] 공교롭게도 그녀는 2주 남짓 후에 암살된다.
  7. [7] 소위 '목걸이 형'이라 불리는 이 처형방법은 반항적인 흑인이나 흑인에게 동정적인 백인을 살해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남아공의 백인들이 고안했던 것이다.(...)
  8. [8]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때문에 유엔에 의해 무기금수 제재를 받고 있었으며 전 세계가 경제적으로 남아공을 압박하여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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