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노벨문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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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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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쉴리 프뤼돔

테오도르 몸젠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이 에이사기레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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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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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에 카르두치

러디어드 키플링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

셀마 라게를뢰프

파울 폰 하이제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모리스 마테를링크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수상자 없음

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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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920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수상자 없음

카를 슈피텔러

크누트 함순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아나톨 프랑스

하신토 베나벤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조지 버나드 쇼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그라치아 델레다

앙리 베르그송

시그리드 운세트

토마스 만

싱클레어 루이스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존 골즈워디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수상자 없음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유진 오닐

로제 마르탱뒤가르

펄 벅

프란스 에밀 실란패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윌리엄 포크너

버트런드 러셀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프랑수아 모리아크

윈스턴 처칠

어니스트 헤밍웨이

할도르 락스네스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살바토레 콰시모도

생존 페르스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이보 안드리치

존 스타인벡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장 폴 사르트르
(수상 거부)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사뮈엘 베케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파블로 네루다

하인리히 뵐

패트릭 화이트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에우제니오 몬탈레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솔 벨로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체스와프 미워시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엘리아스 카네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윌리엄 골딩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클로드 시몽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월레 소잉카

조지프 브로드스키

나기브 마푸즈

카밀로 호세 셀라

옥타비오 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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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나딘 고디머

데릭 월컷

토니 모리슨

오에 겐자부로

셰이머스 히니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다리오 포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가오싱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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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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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

임레 케르테스

존 맥스웰 쿳시

엘프리데 옐리네크

해럴드 핀터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오르한 파묵

도리스 레싱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헤르타 뮐러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모옌

앨리스 먼로

파트릭 모디아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6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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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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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가즈오 이시구로

수상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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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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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 Robindronath Ţhakur)

국적

인도 제국

출생

1861년 5월 7일, 인도 제국 벵골캘커타[2]

사망

1941년 8월 7일 (향년 80세), 인도 제국 벵골캘커타

직업

시인, 철학자

1. 생애
2. 한국과의 관계
3. 기타

1. 생애

인도시인.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দে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17~1905)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মহর্ষি,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까지 얻은 인물이었다.

영국의 명문 대학이자 간디가 졸업한 런던 대학교 그룹 소속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을 전공했으나 중퇴하였다.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8살 때부터 벵골어로 시를 썼고 16세에는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시집 《기탄잘리》(গীতাঞ্জলি, 신께 바치는 노래)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기록이다. 이는 직접 수상한 노벨 문학상 부문을 기준으로도 마찬가지.

또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별명을 지어 준 인물이기도 하다.

2. 한국과의 관계

타고르는 대한민국을 소재로 한 시, 《동방의 등불》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었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에 기고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 기고라는 것이 처음 4행만 메모 형태로 기고되었고 나머지 11행은 누군가가 타고르의 다른 작품인 '기탄잘리 35'의 글귀를 짜깁기해 이어붙이고 마지막엔 출처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라는 문구가 붙여진 물건이라고 한다. # 이런 걸 좋다고 숭상하고 인용하고 교과서에 실어온 사람들은..

타고르의 또 다른 작품인《패자(敗者)의 노래》는 최남선의 요청에 따라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에 타고르 자신이 번역미국에서 발간한 시집인 '채과집(Fruit-Gathering)'에 실린 것을 그냥 보낸 것이다. 최남선이 이를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쓴 창작물로 오해한 것. 거기다 문구도 원문과 비교하면 오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

거기다 위의 시들로 인해 한국을 우대한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된 자포네스크적 기질의 인물로 '일본은 시심을 자아내는 나라'라든지 '일본은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이 해 뜨는 나라에 감사한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일본을 5차례 방문하고 러일전쟁에 일본을 숭상하는 시를 써 기고하기도 했으며 군국주의를 밀어주던 일본 우익의 거물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3]

다만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이 나라(일본)는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라고 하거나, "일본이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4] 굶주린 그들은 지금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고 있다"라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으니 대놓고 일빠는 아니다. 오히려 일본은 정신면에 많이 낙후되었다고 비판하여 극우 일본인들에게 크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가 중시한 건 바로 마음과 정신이었다.

어쨌든, 타고르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참 관심없는 국가였을 뿐이었다.

3. 기타

한편 타고르의 고향은 지금의 인도 영토인 콜카타이고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인들도 타고르를 열렬히 사랑한다. 사실 종교만 힌두와 이슬람으로 다를 뿐 엄연히 방글라데시와 같은 벵골인이니 이상할 것은 없는 일이다. 그리고 타고르는 벵골인인 것도 그렇지만 실제로 방글라데시 지역에서 살기도 했었으니[5] 방글라데시와 아주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여튼 방글라데시인들의 타고르 사랑은 타고르의 모국이라 할 인도마저도 능가할 정도라 심지어 타고르가 죽은지 35년이나 지난 1976년, 방글라데시에서 타고르에게 명예 시민권을 추서하기도 했고, 타고르 박물관 8곳 중 5곳이 방글라데시에 있을 정도이며, 방글라데시의 국가인 "나의 황금빛 벵골"도 타고르가 작사한 것이다. 그리고 인도의 국가인 자나 가나 마나 역시 타고르가 작사 , 작곡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공적으로 영국으로부터 191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 학살사건에 대한 항의로 작위를 반납했다.


  1. [1] 벵골어식 발음은 로빈드로나트 타쿠르
  2. [2]인도 서벵골콜카타.
  3. [3] 아마 일본의 힘이 커졌으니 일본이 (인도를 포함한) 대다수가 식민지로 전략해있는 아시아의 주권을 위해 서양의 제국주의와 맞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실제로 당시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제법 많았었다.(아시아주의) 인도 독립운동을 한 찬드라 보스라든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도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 담겨있기도 했다.
  4. [4] 사실 일본이 인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그 기원이 꽤 오래되었다. 이미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복한 다음에 중국 명나라도 점령하고 그 다음으로 인도에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1882년 12월 일본의 극우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는 글을 남겼는데출처, 이는 중국과 인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62년이 지난 1944년, 일본은 실제로 인도를 침략하기 위해 임팔 작전을 벌였다. 타고르의 안목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알 수 있다.
  5. [5] 가문이 소유한 토지를 관리하는 일로 10여년간 현재의 방글라데시 쿨나 주에서 살았었다. 여기서도 작품을 상당히 많이 썼는데, 타고르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기탄잘리 역시 이곳에서 쓴 작품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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