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5세

프랑스 국왕(부르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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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이 드 프랑스
(Louis de France)

출생

1710년 2월 15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74년 5월 10일 (64세)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재위

프랑스 왕국의 왕

1715년 9월 1일 ~ 1774년 5월 10일

배우자

마리 레슈친스카 (1725년 결혼 / 1768년 사망)

자녀

루이즈 엘리사베트, 앙리에트, 마리 루이즈, 루이, 필리프, 마리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테레즈, 루이즈

아버지

부르고뉴 공작 루이

어머니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형제

루이

1. 개요
2. 인생과 통치
2.1. 어린 왕
2.2. 섭정(1715년-1726년)과 채무의 해결
2.3. 플뢰리의 대신직
3. 평가
3.1. 리더쉽의 부재
3.2. 심각한 부채
3.3. 사생활
4. 개인사
5. 가정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8. 참고 문헌

1. 개요

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5세,[1] 이아생트 리고, 1715년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2] 알렉시 시몽 벨, 1723년

프랑스 왕국의 국왕. 부르봉 왕조의 4대 왕이다.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때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였던 펠리페 5세의 조카다.

2. 인생과 통치

2.1. 어린 왕

증조부 루이 14세가 1715년 9월 1일 사망하자, 당시 앙주(Anjou) 공작이었던 루이 15세는 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이런 상황을 예견했던 루이 14세는 촌수가 가까운 남성 왕족이자 루이 15세의 증조할아버지이자 고모부할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이 섭정할 것을 비밀리에 유언한다. 섭정자가 권력을 독점할 것을 우려해서였는지, 적출로 인정한 두 서자 멘의 공작 루이 오귀스트와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가 함께 어린 국왕을 보필할 것이라 유언한다. 어머니나 삼촌을 포함해 가까운 친척들이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이다.

오를레앙 공이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선언해 고등 법원은 이를 일차적으로 무효화시키고, 친국 후 오를레앙에게 섭정[3]을 전임한다는 안을 통과시킨다. 고등 법원은 이런 협조의 대가로 건의권(remontrance)[4] 을 인정받는다. 게으르지만 영리하고, 교양있고 야망도 크지만 방탕한 오를레앙 공은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근처 왕궁에 자리잡아 루이 15세을 감시한다.

루이 15세가 즉위하던 시점은 왕가의 비극이 넘쳐날 때였다. 왕세자인 할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 왕세손인 아버지 프티 도팽 루이와 세손빈인 어머니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가 모두 천연두로 연달아 사망했으며, 1712년에는 그 형인 브르타뉴 공작 루이와 루이 15세마저도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다. 이때 형 브르타뉴 공작이 과도한 사혈치료[5]로 죽자 이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방타두르 공작부인은 루이 15세가 있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혈법 시술을 강력하게 반대해 그의 목숨을 구했다(...).

2.2. 섭정(1715년-1726년)과 채무의 해결

오를레앙 공에게 주어진 가장 큰 당면과제는 루이 14세가 안겨준 엄청난 부채였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 금융과 세율을 조정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우선 화폐의 재주조, 관직의 축소, 기준금리의 인하를 통한 통화량의 늘림 등 일시적인 방편들을 사용한다. 은행과 금융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장기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던 오를레앙 공은 스코트랜드 출신 금융전문가 존 로(John Law)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1716년 5월, 로는 종합 은행(Banque Générale)이란 사립은행을 설립한다. 이는 여타 은행과는 다른 특별한 기관이었는데, 바로 예금된 돈을 담보로 일정 양의 금화/은화와 동일한 가치를 갖는 어음을 발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지폐다. 동전보다 뛰어난 실용성 덕분에 이 어음은 점차 동전과 동일한 화폐로 함께 혼용되고, 정부도 이를 화폐로 인정한다. 이런 새로운 화폐는 한편으로는 돈의 순환을 촉진시키고, 금과 은의 생산량에 얽매이지 않고 재정 관리를 유동적으로 할 수 있게 했다. 또, 과거에는 금화/은화 보유량에 세금을 매겨 소득세의 계산이 복잡했지만, 수명이 제한돼 있는 지폐를 사용함에 따라 소득세를 토지에만 한해 통일할 수 있게 했다.

그 다음 해, 로는 '미시시피'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해, 아메리카 루이지애나 지방을 개간하고 자원을 이용한다.[6] 이렇게, 화폐로 경제를 활성화하는 한편, 식민지 회사로 생산성을 극대화시켜, 오를레앙 공 치하의 프랑스는 어느 정도 부채를 해소하고 재정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후일, 종합 은행은 점차 왕립 은행 (Banque royale)이 되고, 미시시피 회사 (다른 이름: 서양 회사 Compagnie d'Occident)는 다른 식민지 회사들을 인수해 동인도 회사(Compagnie des Indes)로 변모한다.

또 로는 처음으로 증권을 발행, 첫 금융 거래소를 설립한다. 하지만 아직 초창기라 금융 거래에 미숙한 탓이었는지, 동인도 회사의 주가는 500리브르에서 18000리브르까지 치솟게 되고, 결국 1720년 2월 버블이 터져 유래없는 혼란을 (Krach de février 1720) 야기하게 된다. 채무자들을 피해 존 로는 1720년 12월 브뤽셀로 도피한다. 이런 결과는 마냥 나쁘지 만은 않았는데, 정부는 직접적으로 투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는 투기에 실패한 개인, 기업들의 피해이고, 국민들의 지폐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존 로의 경제적 정책을 통틀어 로 시스템 (Law system, Système de Law)라 칭한다.

하지만 오를레앙의 인기는 가시적인 경제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오를레앙 공은 1718년부터 집권 초기에 약속했던 고등 법원의 건의권을 축소시킨다. 또 왕에게 건의해, 1723년 수상직을 받는데 성공하는데, 대신들을 등한시하고 권력을 독점해, 불화를 야기한다. 이후 오를레앙 공은 지속적으로 나빠지는 건강 때문에 1723년 49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2.3. 플뢰리의 대신직

1726년 성년 (16세[7])가 된 왕은 공작을 면직시키고 가정교사였던 주교 에르큘 드 플뢰리(André Hercule de Fleury)를 추기경으로, 또 수상으로 보직한다. 이 17년은 루이 15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번성했던 기간으로 기록된다. 야심가였고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던 전대 리슐리외 추기경과 마자랭 추기경과는 달리 플뢰리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으로 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힘쓴다. 콜베르 경제장관의 정책을 다시 적용하고, 얀센주의와의 긴장 상태를 완화하는 한편, 폴란드 계승 전쟁이 발발했을 때 (1733년) 신속히 문제를 정리하고 전쟁을 끝맺는데 노력한다. [8] 하지만 1743년 플뢰리의 죽음으로 급작스럽게 많아진 정무에 익숙치 않던 루이 15세가 어려움을 겪는데 기조가 된다.

루이 14세와도 같이, 플뢰리의 죽음 후 루이 15세는 앞으로는 수상 없이 통치하겠노라 선언한다. 왕은 당시만 해도 1744년 'Le Bien-Aimé'란 이명을 얻을 정도로 인기가 굉장히 좋아 이 선언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1749년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으로 경제 문제는 다시 떠오르게 된다. 재무 장관 격이었던 마코 다르누빌(Machault d'Arnouville)은 이를 위해 새로운 세금을 도입한다. 방티엠(Vingtième)이라 일컬어지는 이 세금은 지금까지 세금이 면제되었던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과세되는 세금인데, 자연스럽게 이 두 계층의 반발을 사게 된다. 고등 법원을 이에 거부권을 이용해 베토를 던지고, 성직자들의 회의도 소리를 높인다. 왕에 적대적인 얀센주의자들을 상대로 주교령의 지지 없이 홀로서야 할 것을 두려워 한 왕은 황급히 성직자에게 방티엠을 면제한다.

1757년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이라는 남자에게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이 남자는 결국 앙리 4세 암살범인 라바이약 때와 마찬가지로 능지형거열형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정책을 성공적으로 끌어내지 못한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애첩의 조언을 따라, 인기가 떨어질데로 떨어진 마코 다르누빌을 해임하기로 결정한다.

3. 평가

인성도 나쁘지 않고 지식과 문화적 감각, 심지어 잘생긴 외모까지 가졌지만 리더쉽의 결핍으로 우유부단한 모습만 보이다 프랑스를 파국으로 이끈 암군.

오를레앙 공작의 섭정기는 루이 15세 치세의 절정기로 평가되며, 프랑스가 18세기에서 가장 강대했던 시기였다. 성품도 무난하고 머리도 좋았기에 신하들과 국민들은 루이 15세가 성인이 되면 좋은 국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이 15세는 섭정기를 플뢰리 주교에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를 추기경으로 세우고 재상으로 임명하여 전권을 맡기게 된다. 플뢰리 추기경은 유능하여 그가 1743년에 사망하기까지 프랑스에는 이 전성기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인생사에서도 보았듯이 보는 각도에 따라 참 비극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삶이다. 여러 이익단체 (고등 법원, 성직자와 귀족)사이에 한쪽 편을 들어주면 다른 쪽을 잃는, 권력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사로잡힐 딜레마에 평생 시달리며 살았다. 인기와 시선을 너무 의식해 결국 인기를 완전히 빼앗기게 된, 영리하고 온화했지만 왕이 될 재목은 아닌 안습한 사람이라 볼 수 있다.

3.1. 리더쉽의 부재

허나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루이 15세의 국정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었다. 일단 그는 그의 증조 할아버지와는 달리 알맞은 리더쉽을 보여주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원체 성품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루이 15세는 가정교사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결정력을 키우라는 간언을 받는다. 7세부터 왕의 교육을 전담한 발로이 장교는 "대신들의 조언을 듣되, 결정을 하세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그가 정사에 관심이 있었고, 정치판을 읽는 능력도 있는 것을 시사하는데, 극심한 우유부단함과 약간의 불안증세 때문에 대다수의 정책을 끝까지 추진하지 못하게 된다. 국민과 주위의 시선을 너무 의식해 필요한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만의 정책을 추진하기보다는, 그의 환심을 산 자들에게 장관직을 쥐어주고 알아서 하게 했는데, 문제는 이들을 세워놓고는 지지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부의 정책이나 개혁들은 리더쉽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더러, 그들이 추진한 정책 및 개혁들이 실패하거나 왕의 눈 밖으로 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정치판은 파벌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치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했을 뿐더러, 정적들은 권력을 빼앗기 위해 서로의 정책들을 일부러 실패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기까지 했다.

섭정자 오를레앙공이 지지를 대가로 고등법원에게 약속한 고등법원들은 정부에서 만든 법들을 자신들의 관할 아래에서는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부권 때문에 루이 15세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9], 루이 14세는 이들을 힘으로 짓눌러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했지만 루이 15세는 이마저도 강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 고등법원들은 대부분 귀족들로 이루어졌으며 정부에서 자신들의 특권에 반하는 것들을 모두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여론을 이용하여 정부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도록 함으로서 안그래도 침체된 정부의 운영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부차적인 문제지만 루이 15세의 애첩인 부르주와 출신 마담 드 퐁파두르의 정치적인 간섭[10]도 문제를 일으켰다. 물론 마담 드 퐁파두르는 이 시대의 로코코 문화 및 계몽주의가 꽃피게 해주는 등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상관 없이 심지어 장관들까지도 끌어올리고 내릴 수 있는 그녀의 영향력은 안 그래도 문제 많은 프랑스의 정치판에 더욱 더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간섭은 1746년부터 관계가 끝나게 된 1750년 4년뒤에 종결된다.

결국 루이 15세 시대의 신하들은 리더쉽의 부재 및 쓰이지 않는 절대 권력 + 파벌과 암투에 둘러싸인 정치판 + 특권들을 지키기 위해 정치판에 개입하는 귀족들의 사법부 + 정치에 간섭하는 애첩이라는 사중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나라 전체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3.2. 심각한 부채

하나 이보다 어쩌면 더 큰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잦은 전쟁과 이로 인한 부채다. 프랑스는 안그래도 루이 14세때의 전쟁들로 인한 으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루이 15세 때 더욱 더 불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으로 인해 더욱 더 심각한 빚을 떠안게 되었을 뿐더러 7년 전쟁 떄 대부분의 국외 식민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의 개혁 및 중앙 은행의 제도화를 통해서 빚을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한 영국과 같은 나라와는 달리 프랑스는 그런 개혁을 이룰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었고,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의 이자를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더욱 더 심해져서 결국 루이 16세의 대에 이르러서는 정부 수입의 43%가 이자를 내는데 사용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말년에는 직접 국사를 돌보며 사법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노쇠한 국왕은 국정 능력이 너무나 떨어졌고, 고등법원들을 폐지하는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이긴 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루이 16세 즉위한 이후에 다시 되돌려지게 된다.

3.3. 사생활

그리고 문란한 사생활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신하들과 백성들의 인기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는 1774년 5월 10일 천연두에 걸려서 사망할 당시엔 숱한 스캔들로 인해 임종시 사제고해성사 집전을 거부했을 정도였다.[11] 게다가 천연두에 걸린 것도, 천연두에 걸린 시골집 소녀를 예쁘다고 사냥길에 무작정 강간하여 전염되었다는 비방문이 퍼질 정도로[12] 인기가 없었다. 이러다 보니 그의 장례 행렬은 축제와도 다름없었으며, 백성들은 모두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손자 루이 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를 환호했다. 하지만 루이 15세 시기의 실패들의 대가는 뒤를 이은 손자 부부가 몽땅 뒤집어 쓰게 되었다. 루이 14세부터 개판되긴 했겠지만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야사에 의하면 그런 와중에도 툭하면 "나 죽은 뒤에 도팽(왕세자)이 알아서 잘 하겠지. 나 죽은 다음에는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이라는 엄청난 말을 하고 다녔다 카더라. 임종할 때마저도 "아프레 무아, 르 델뤼주"(Après moi le déluge, "내가 죽은 다음에야 될 대로 되라지...)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걸 생각해 보면... 사실 루이 15세가 실제로 저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당대에 널리 퍼져있던 비방문들에 적혀 있었던 것이지만 그의 평판이 워낙에 나빴기 때문에 모두가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실제로 될 대로 되기도 했고

4. 개인사

루이 15세, 이아생트 리고, 1730년

지식과 교양도 상당했고 두뇌도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가정교사 방다투르 부인의 엄격한 교육 탓에 어렸을 때는 에티켓과 배려에 세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7세때 빌로이 장교에게로 넘어가면서, 끝없는 공식적 행사와 소심함을 감추는 능력 등과 미학, 정치학을 배우는 등 제왕 교육을 받는다. 문화적인 안목도 상당해서, 루이 15세의 치세에 로코코 문화가 등장했다. 로코코 문화는 다음 대인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에 절정기를 맞이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

굉장한 미남으로 당시 '유럽 제일의 미남자'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였다.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13][14]이었으며, 유명한 그의 애첩인 마담 드 퐁파두르베르사유의 장미에도 등장하는 뒤바리 부인 등 많은 여자들을 섭렵했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탓인지 가슴 크기에 집착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소녀를 밝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며느리를 고르는 것에서도[15] 가슴을 보지 않은 신하에게 푸념을 한 적이 있다.

인성은 나쁘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자상하고 관대한 성격으로, 아침 일찍 일어날 때면 시종들을 깨우기가 미안해서 손수 커피를 타서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또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해서 대신 한 사람을 자르려고 불렀는데 눈치를 못챈 그 신하가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바람에 끝내 구두로 사직을 명하지 못하고 글로 써서 그 신하의 사무실로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16]

또한 일찍이 파르마로 정략결혼[17]을 보낸 장녀 엘리사베타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이 있는데다가, 2녀와 3녀가 연달아 요절한 탓에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끔찍했다. 자녀들이 아파서 치료받느라 비명을 지르면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특히 딸들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었고, 결국 이 딸들은 프랑스를 떠나기 싫다며 모두 독신으로 남았다. 하여튼 딸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면서 시집도 안 보내고 끼고 살아서 그랬는지 시중에는 왕과 그 딸들이 근친상간(...)의 관계라는 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이건 앙리 4세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부르봉 가문의 문란함도 있고 왕실에 대한 민중의 불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참고로 생 제르맹 백작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5세의 나이로 7살 연상인 폴란드의 마리 레슈친스카 왕녀[18]와 결혼했다. 하필 나라도 없는 공주인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로 선택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은 대대로 자식이 많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를 빨리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 공주들이 심사위원들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떨어져나간 반면 그녀는 권력이 없다보니 이해관계와도 무관했고,[19] 나라도 없는 공주를 왕비로 만들어주면 나중에 은혜를 갚을 거라고 기대했던 심사위원들의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대하던 대로 레슈친스카는 10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2명만이 아들이었고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루이 페르디낭 뿐이었다. 초반에는 금슬이 좋았다고 하지만 얌전하고 순종적인 왕비에게 질린 모양인지 루이 15세는 오래지 않아 정부를 들였고 종국에는 왕비도 바람둥이 남편과 항시적인 임신에 짜증나서 완전히 별거 상태가 되었다.

총평하자면, 개인으로서의 성품은 좋았지만 정치를 하도 안하다보니 국정 운영 감각이 떨어지고 일반 민중의 삶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평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가 욕을 대신 먹어줘 크게 까이진 않았다. 6개국어의 소유자에 철학과 음악,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5. 가정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와 2남 8녀를 두었다. 다만 그 중 2명을 제외하고는 일찍 죽거나 장수했어도 혼기를 놓치고 결혼하지 못했다.

  • 루이즈 엘리자베트(루이사 엘리사베타)[20]
1727년 ~ 1759년. 쌍둥이 중 첫째로, 루이 15세의 딸들 중 유일하게 결혼한 딸이다. 결혼하기 전에는 '마담 루아얄 엘리자베트'로 불리었다. 야심만만하고 지적인 성격으로 스페인으로 시집갔으며, 딸 이사벨라가 요제프 2세의 첫째 부인이 된다. 남편인 펠리페(파르마의 필리포 1세)와는 정략결혼이었으나 금슬이 좋았고, 펠리페가 파르마의 공작이 되자 소심한 남편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파르마를 통치했다. 친정 프랑스에 자주 방문했으며, 아버지의 애첩 퐁파두르 부인과도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맞아 친하게 지냈다. 결국 젊은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베르사유 궁에서 죽는다. 프랑스 혁명 중 무덤이 파괴되었다.

  • 안 앙리에트
1727년 ~ 1752년. 쌍둥이 중 둘째로, 루이 15세가 가장 사랑한 딸이다. 주로 '마담 앙리에트'로 불린다. 12살 때 언니가 스페인으로 시집간 것으로 크게 상심했으며, 음악으로 마음을 달랬다.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였던 샤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 1세와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루이 15세는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했으나, 만일 왕세자에게 후손이 없다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세력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에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독신으로 살았다. 어머니, 남동생인 왕세자와, 다른 여동생들과 친했으며, 어머니가 버림받은 것이 애첩들 때문이라고 생각해 루이 15세의 애첩들을 미워했다. 특히 퐁파두르 후작부인를 가장 싫어했으며, 그 때문에 언니인 엘리자베트가 퐁파두르 후작부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다만 1748년 이후로는 퐁파두르 부인과 매우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1752년 천연두에 걸린 상태에서 무리하게 아버지의 사냥에 동행했다가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3일만에 요절했다, 생 드니 대성당묻혔으나, 프랑스 혁명파괴되었다.

  • 마리 루이즈
1728년 ~ 1733년. 왕세자를 바랐던 루이 15세를 실망시켰다. 아이가 자라기 전까지는 세례성사를 주지 않는 프랑스 왕실을 따라 죽기 직전까지는 이름이 없었고, 셋째라는 뜻의 '마담 트루아지엠(Madame Troisième)'으로 불렸다. 5살의 나이로 당시 유행한 감기에 걸려 위독할 때 급하게 세례성사를 받았고, 그 후 요절했다.

  • 도팽 루이 페르디낭
1729년 ~ 1765년. 왕세자(Dauphin)였으나 폐결핵에 걸려 루이 15세보다 먼저 죽었다. 자녀로는 5남 3녀 중 3남 2녀가 살아 남았고, 그 중 세 아들[21]은 모두 다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둘째 부인인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22]가 두 딸들과 그 후손들의 황위 계승권이 박탈당한,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를 미워했고, 그것이 남편 루이 페르디낭과, 그의 누나 3명 등의 측근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이후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영향을 끼쳤다.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애첩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 앙주 공작 필리프
1730년 ~ 1733년. 3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 마리 아델라이드
1732년 ~ 1800년. 주로 '마담 아델라이드'로 불린다. 콩티 공작 루이 프랑수아 2세나 작센 공작과 혼담이 오갔으나 왕위 계승자와 결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결혼할 적당한 남자들이 없어 평생 미혼으로 살았다. 말을 잘 타서 루이 15세와 같이 승마를 자주하고, 고리 돌리기 노래, 사냥 나팔을 부는 것을 좋아하는 등 다른 공주들과는 다르게 털털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사냥의 여신 디아나로 빗대어 그린 그림이 많다. 아버지인 루이 15세, 오빠인 왕세자, 조카인 루이 16세에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했다.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애첩들을 좋아하지 않아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적대적이었고, 베르사유의 장미에도 나오는,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여동생인 빅투아르, 소피와 같이 뒤바리 부인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했고, 결국 뒤바리 부인이 이기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베르사유에 나쁜 소문을 퍼뜨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빅투아르와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다가 베르사유로 도로 돌아오고, 가톨릭을 반대하는 혁명법 때문에 오빠인 왕세자의 딸인 마리 클로틸드(마리아 클로틸데)가 있던 사르데냐로 탈출했다. 이후 토리노나폴리를 거쳐 코르푸 섬에 도착하나, 거기서 빅투아르가 암으로 죽고, 코르푸 섬을 떠난 지 1년 후에 로마에서 죽는다.

  • 마리 루이즈 테레즈 빅투아르
1733년 ~ 1799년. 주로 '마담 빅투아르'로 불린다.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았으며, 15살 때 베르사유로 돌아온 후 어머니와 친하게 지냈다. 스페인페르난도 6세[23]의 왕비가 병에 걸리자 후처로 고려되나 왕비가 5년 동안 버티고, 그 사이 페르디난도 6세가 죽어서 결혼할 적당한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애첩들을 좋아하지 않아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적대적이었고, 베르사유의 장미에도 나오는,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아델라이드, 소피와 같이 뒤바리 부인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했고, 결국 뒤바리 부인이 이기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베르사유에 나쁜 소문을 퍼뜨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아델라이드와 함께 프랑스를 탈출하다가 베르사유로 도로 돌아오고, 가톨릭을 반대하는 혁명법 때문에 오빠인 왕세자의 딸인 마리 클로틸드(마리아 클로틸데)가 있던 사르데냐로 탈출했다. 이후 토리노와 나폴리를 거쳐 코르푸 섬에 도착하나, 거기서 암으로 죽는다.

  • 소피 필리핀 엘리자베트 쥐스틴
1734년 ~ 1782년. 주로 '마담 소피'로 불린다.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았으며, 베르사유로 돌아온 후 결혼할 적당한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루이 15세를 닮아 미인인 언니와는 달리 못생기고 수줍음이 많았고, 천둥을 무서워했다. 아델라이드와 빅투아르와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15세의 애첩들을 좋아하지 않아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적대적이었고, 베르사이유의 장미에도 나오는, 시집 온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아델라이드, 빅투아르와 같이 뒤바리 부인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했고, 결국 뒤바리 부인이 이기게 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베르사유 궁에 나쁜 소문을 퍼뜨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고, 혁명 중 무덤이 파괴되었다.
  • 마리 테레즈 펠리시테
1736년 ~ 1744년. 주로 '마담 시지에므(Madame Sixième)'로 불린다. 8살의 나이로 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

  • 루이즈 마리
1737년 ~ 1787년. 주로 '마담 루이즈'로 불린다.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서 살았으며, 수녀원에 있던 중 루이 15세가 보니 제임스 2세의 손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결혼을 시키려 했으나, "나는 예수 외에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해서 무릎이 불편했다. 베르사유로 돌아온 후 20여 년을 살다가 애첩을 둔 아버지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으로 수녀가 되기를 결심하고는 루이 15세에게 수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뒤 조카와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결혼식을 본 후 생 드니의 수녀원에 입회하여 '생 오귀스틴의 테레제 수녀'라는 수도명을 받는다. 그리고 1년 후에는 종신서원[24]을 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선종했고, 혁명 중 무덤이 파괴되었다. 1873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가 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

만화 슈발리에에 등장하는 프랑스 왕이 바로 이 사람이다. 왕비인 마리와 애첩 퐁파두르 부인도 함께 등장한다.

만화/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온다. 성우는 카츠타 히사시. KBS판은 이종구, EBS판은 임채헌.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1938)의 온화한 할아버지를 역할 했다. 물론 고증은 똑같다.

영화 뒤바리(1917-1919-1931-1934)에 미천한 신분 뒤바리와 사랑에 빠지는 노년의 연기를 했다. 시리즈는 다르지만 비추는 모습은 똑같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립 톤. 밤에 뒤바리 부인과 침대 위에서 하는 고양이 놀이 장면이 깨알같다.

영화 공주들의 교환에서 13살의 어린 루이 15세가 등장한다.

프랑스 다큐멘타리 '호색한으로 불리는 남자'에서 루이 15세의 국왕으로의 즉위와 죽을 때까지의 모습이 나온다.

드라마 아웃랜더에서 무능하지만 여인들을 탐하는 격정적인 국왕으로 등장한다.

만화 이노센트에도 나온다.

웹소설 베르사유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7. 기타

여담이지만 현재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6세의 먼 선조가 된다. 정확히는 그의 장녀 엘리사베타의 딸이자 외손녀 마리아 루이사의 아들 페르난도 7세의 후손이다.

제보당의 괴수가 바로 이 시기에 출몰했었다. 다른 나라에 있던 프랑스 대사관에서 "프랑스가 짐승 하나 못잡고 쩔쩔맨다고 놀려효 ㅜㅜ"라고 해서 루이 15세가 빡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8. 참고 문헌

LEBRUN François, L'Europe et le monde, XVIè-XVIIIè siècle, Armand Colin

MARIN Solange, « LOUIS XV (1710-1774) - roi de France (1715-1774) », Encyclopædia Universalis en ligne, consulté le 17 janvier 2020. URL : http://www.universalis.fr/encyclopedie/louis-xv/


  1. [1] 초상화가 그려진 당시 5세
  2. [2] 초상화가 그려진 당시 10세
  3. [3] 섭정은 부르봉 가 역사에 총 네 번 이루어지는데, 1560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샤를 9세에 대한 섭정, 1610년 마리 드 메디시스의 루이 13세에 대한 섭정, 안 도트리슈의 루이 14세에 대한 섭정과 1715년 오를레앙 공의 섭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마지막 섭정이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것이, 전대 섭정들과 달리 섭정자가 야심 많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섭정 기간 동안 왕이 죽으면 남성 섭정자는 왕이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다.
  4. [4] 왕의 칙령에 베토(반대, veto)를 던질 수 있는 권리
  5. [5] 중세 의학이론에서는 신체에 4가지 체액(피, 점액, 흑담즙, 황담즙)이 존재하고 질병은 이 체액의 균형이 깨져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때문에 환자의 피를 뽑는 것으로 신체 균형을 회복해 병을 치료한다는 사혈치료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문제는 이게 한두방울 뽑는 수준이 아니라 몇 리터씩 뽑아내는 게 다반사였다는 것. 이러니 과다출혈로 죽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6. [6] 미시시피는 프랑스 최초의 식민지 회사가 아니다. 1614년 설립된 Compagnie de Rouen 를 시조로, 프랑스 식민지 회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7. [7] 하지만 프랑스 법상 왕의 성년은 만 13세이다.
  8. [8]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정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강인한 리슐리외 추기경과 마자랭을 기억하고 동경하는 반면, 안정만을 중시했던 플뢰리 추기경은 그저 준수했던 통치자로 보고 있다. 위키백과 문서도 플뢰리가 독보적으로 짧다...
  9. [9] 물론 왕들은 이 거부권을 무시할 수 있는 특별 칙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루이 15세는 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10. [10] 이는 루이 15세가 처음이 아니고, 앙리 4세 등 다수의 왕이 애첩에게 권력을 준 적이 있다.
  11. [11] 좀 더 정확히는 정부를 내보내야 고해성사를 해주겠다고 했다.
  12. [12] 물론 헛소문이다.
  13. [13] 15살에 결혼했는데 7살 연상인 왕비와 첫날밤 8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 [14] 공식적으로 일종의 자매덮밥을 실천하기도 있다. 2명도 아닌 3자매... 참고로 이들은 넬 후작의 딸들로 모두 5자매였는데 이 중 3명은 '공식적'이었고 나머지 2명에 대해서도 추문이 제기된 바 있다.
  15. [15] 참고로 첫 번째 며느리는 삼촌인 펠리페 5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인데 루이 15세와 16살이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이고, 두번째 며느리인 마리아 요제파는 에스파냐의 사촌 동생 카를로스 3세의 처제(...)다.
  16. [16] 덕분에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곁에 같이 있다가 왕의 안색을 살펴서 적절한 선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자르고 내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일개 애첩에게 말이 잘린 귀족들은 화가 났지만 별 수 있나...
  17. [17] 같은 보르본 왕조인 스페인-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자기 사촌 동생에게 시집보낸다
  18. [18] 다만 이 시점에서 그녀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는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상태였다.
  19. [19] 그러나 이는 결국 장인이 나라 없는 왕이란 사실이 본인의 체면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한 루이 15세가 폴란드 왕위를 두고 전쟁에 개입하면서 안좋은 쪽으로 작용한다.
  20. [20] 남편인 파르마 공작인 필리포 1세는 작은할아버지인 펠리페 5세의 아들이니 5촌 아저씨다
  21. [21] 루이 오귀스트,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 샤를 필리프.
  22. [22] 언니인 마리아 아말리아는 그녀의 시아버지의 사촌 동생인 카를로스 3세의 아내다.
  23. [23] 루이 15세의 삼촌인 펠리페 5세의 아들이니 루이 15세와 사촌, 마리에게는 5촌 당숙(!)이다
  24. [24] 죽을 때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서약. 자세한 것은 수도자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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