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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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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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후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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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역사

구스쿠 시대
삼산시대

류큐 왕국

오키나와 현 (일본 제국)

류큐국
琉球国

국기

가몬

[1]

1429년~1879년

위치

오키나와
아마미 군도(~1609).

수도

슈리[2]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언어

류큐어
(특히 오키나와어 슈리 방언)

종교

류큐 신토, 불교, 유교, 신토

주요사건

1429년 류큐 통일
→류큐 왕국으로 건국
1609년 사츠마 번의 침략
에도 막부아마미 군도를 빼앗김
1872년 일본제국이 속령으로 선언
1879년 일본제국에 강제병합되어 멸망

성립 이전

삼산시대

멸망 이후

일본 제국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 참고

한자(정체자/신자체)

琉球國/琉球国[3][4]
琉球王國/琉球王国[5]

일본어

琉球国(りゅうきゅうこく)[6]
琉球王国(りゅうきゅうおうこく)[7]

오키나와어

琉球国(るーちゅーくく)

표준중국어

琉球國(Liúqiúguó)
琉球王國(Liúqiú Wángguó)

한국 한자음

유구국, 유구왕국

영어

Ryukyu Kingdom[8]

1. 개요
2. 역사
2.2. 삼산 통일
2.3. 제1 쇼씨 왕조
2.4. 제2 쇼씨 왕조
2.4.1. 류큐의 전성기
2.4.2. 사츠마의 침공
2.4.3. 근세 류큐
2.5. 류큐 처분과 멸망
3. 해외 교류
3.1. 에도노보리
3.2. 한국과의 관계
4. 종교
5. 문화
6.1. 류큐 왕가의 이후
7. 언어
8. 류큐의 상징들
9. 관련 문서

1. 개요

守禮之邦 예의를 지키는 나라[9]

中山世土 중산이 다스리는 땅[10]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여 왕정 체제를 꾸렸던 국가.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琉球國)으로 기재되어 있다. 현재는 일본오키나와 현으로 합병돼 있으나 여전히 그 일대를 류큐라고 부른다. 짧게 류큐국이라고도 한다.

원래 류큐는 독립 왕국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조선에도 간간이 조공을 바치거나 표류한 어민들을 송환하는 등 동아시아 세계의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을 맡고 있었다. 현재는 일본의 일부인 오키나와 현으로서 편입되었다. 원래 류큐 왕국의 최대 영토는 현재 가고시마 현에 소속된 아마미 군도까지 포함됐었다. 하지만 이후 사쓰마 번이 류큐 왕국을 침공, 결국 류큐 왕국이 아마미 군도의 지배권을 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마미 군도 문서를 참고할 것. 2차대전 직후 미군은 류큐를 일본에서 떼어내고 미국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는데, 오키나와 현과 아마미 군도는 물론이고 한 번도 류큐의 지배에 들어간 적이 없는 도카라 열도까지 류큐에 포함시켰다가 1950년대 초에 도카라 열도와 아마미 군도를 차례로 일본에 반환했다. 그래서 미국이 세운 류큐 정부의 관할 범위는 오키나와 현으로 축소되었고, 이후 1972년에 오키나와 현도 일본에 반환된다. 수도슈리(首里)였는데, 미국 통치기 이후 오키나와 현의 수도인 나하의 일부가 되었다. 왕궁은 슈리성이다.

한국으로 치면 탐라국과 다소 비슷한 점이 있지만, 지리적으로 제주도에 비해 본토에 훨씬 멀리 떨어져 있고, 제주도의 경우보다 훨씬 늦게 본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독자성이 더 강하다. 그리고 탐라국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조선 초기에 완전히 중앙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왔고, 그 이전부터도 이미 국권이 사실상 넘어간 자치지역 수준으로 남은 데 반해 류큐 왕국의 일본 흡수는 근대 일제에 의한 합병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분리주의 운동이 잔존하고 있다.

2. 역사

2.1. 구스쿠 시대

규슈와 타이완 사이의 태평양에 점점이 펼쳐있는 류큐 군도의 섬들에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의 형태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섬에는 저마다 아지(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족장의 지위는 서로 평등하였고 이들은 평화로운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1~12세기 경부터 오키나와 섬 각지와 주변 섬들에 구스쿠라는 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대륙과 일본의 철기가 도입되고 정착 농경문화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인구도 많이 증가했다. 이 시기 농업은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대지에 를 심고, 주변 저지대는 으로 개간하는 형태였다.[11]

구스쿠와 함께 구스쿠를 다스리는 족장 혹은 영주인 아지(按司)[12]라는 존재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의 경쟁과 충돌에 의해 구스쿠시대는 전국시대와 같은 양상을 보였다.

2.2. 삼산 통일

구스쿠 시대 후기인 1187년 슌텐 왕이 첫 왕조인 슌텐 왕조를 개창했다. 2대 왕 슌바준키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슌텐 왕조는 3대 기혼왕 때 망하고, 왕위를 찬탈한 신하 에이소가 에이소 왕조를 세우고 남송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5대 만에 망한다.

그 후 14세기 말 경 류큐 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조가 탄생하였다. 류큐의 삼산시대 또는 ‘삼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삼국지 삼국 중에는 오키나와 섬 가운데 위치한 중산왕국의 국력이 최강이었고 북산왕국이 최약체였다. 류큐의 삼국시대에는 류큐 군도 북부의 아마미 제도와 남부의 사키시마 제도는 미개한 상태였다. 세 왕국이 치고 박고 싸우던 중 오키나와 섬 남부 사시키(佐敷)[13]아지[14]인 쇼 하시(尚巴志)가 등장하였다. 그는 1406년에 중산을 무너뜨려 아버지 쇼 시쇼(尚思紹)를 중산왕으로 옹립했다. 이 때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는데, '왕을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고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이 죽고 세자인 쇼 시쇼가 뒤를 이었다.'고 보고했다. 이 즈음에 수도를 우라소에에서 슈리로 옮기고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았다.

1416년에는 북산왕 한안지(攀安知)에게 불만을 품은 북산의 여러 아지들과 힘을 합하여 북산의 수도 나키진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한안지는 자결하고 북산은 멸망하여 중산에 흡수되었다.

1421년에 쇼시쇼 왕이 붕어하자 쇼하시가 중산왕에 즉위했다. 1425년에는 명나라의 영락제가 보낸 책봉사가 도착하여 쇼하시의 중산왕 즉위를 인정했다.

1429년, 쇼하시는 산남을 멸망시켜 삼산을 통일했다. 이듬해 쇼하시는 명나라의 선덕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우리 류큐국은 세 왕이 다스리기를 백여 년, 싸움이 그치지 않아 백성들이 허덕였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제가 두 왕을 토벌했습니다. 이제 류큐는 태평세가 되어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선덕제는 "내 마음에 맞는 사업이다. 자만하지 말고 나라를 안정시켜라."라고 유지를 내렸다. 저 잘했쪄? 쓰담쓰담[15]

2.3. 제1 쇼씨 왕조

삼산이 통일된 1429년부터 제1 쇼씨(尚氏) 왕조가 시작되어 1470년까지 이어졌으며, 이때부터 류큐 왕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중산이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류큐의 왕은 삼산 시대에 책봉 받은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의 칭호를 훗날 류큐가 일본에 합병돼 나라가 망할 때까지 사용한다. 명나라청나라로부터 대대로 그 칭호로 책봉 받았고 조선 등 다른 나라에 국서를 보낼 때도 이 칭호를 썼다. 또한 중산은 류큐의 별명이 돼서 류큐 역사서 제목에 들어가기도 했다. 《중산세감(中山世鑑)》, 《중산세보(中山世譜)》 등이 그 예이다.

일단 오키나와 섬은 겉으로는 통일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쇼하시가 죽고 나서 왕족들 사이에 잦은 내분이 일어났다. 쇼 하시 이후 제1 쇼씨왕조의 왕들 가운데 재위기간이 10년을 넘긴 경우가 없었다. 특히 1453년, 5대 왕 쇼 킨푸쿠(尚金福) 사후 왕위를 놓고 벌어진 싸움인 시로·후리의 난(志魯・布里の乱) 때에는 슈리성이 불타기도 했다.

1458년에는 고사마루·아마와리의 난(護佐丸·阿麻和利の乱)이 일어난다. 당시 고사마루(護佐丸)와 아마와리(阿麻和利)는 나카구스쿠구스쿠(中城城)와 카츠렌구스쿠(勝連城)를 거점으로 한 아지들로, 류큐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의 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아마와리는 야심찬 인물로, 그를 경계한 고사마루가 만일을 대비하여 군사를 키웠다. 아마와리는 이를 역적모의라고 쇼 타이큐 왕에게 보고했고, 왕명을 받은 아마와리는 고사마루를 쳤다. 고사마루는 임금의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없다며 자결하였다. 이윽고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지자 아마와리는 슈리를 공격하여 류큐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했으나 실패하여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류큐 왕국의 왕권이 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4. 제2 쇼씨 왕조

2.4.1. 류큐의 전성기

1470년 쇼 토쿠(尚徳) 왕이 죽은 직후 궁정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신하였던 카나마루(金丸)가 세자를 살해하고 왕족들을 추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쇼 엔(尚円)이라 하며 중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부왕이 죽어 세자인 제가 뒤를 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이 장면 어디서 봤는데?

1477년 즉위한 왕조의 3대 왕 쇼 신(尚真)은 류큐 왕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여겨진다. 우선 제1 쇼씨 왕조의 혼란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쇼 신 왕은각지의 구스쿠에 할거해 있던 아지들을 슈리에 모여살게 했다. 아지들을 대신하여 왕부에서는 아지웃치(按司掟, あじうちい)라는 관리들을 파견하여 지방을 다스렸다. 또한 관위와 신분별로 착용하는 관의 색깔과 비녀의 재질을 규정하였다.

쇼 신 왕은 적극적인 군사 활동 또한 펼쳤다. 1500년에는 미야코지마야에야마에 전함들을 보내 평정하여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522년에는 요나구니까지 영역을 넓혔다.

쇼 신 왕은 류큐의 종교도 정비하였다. 류큐 신토에는 노로(ノロ)라고 하는 신녀들이 있는데, 쇼 신 왕은 이들의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자신의 누이를 최상급 노로인 키코에오오키미(聞得大君)로 취임케 하였다. 불교 또한 숭상하여 슈리성의 옆에 엔가쿠지(円覚寺)를 세웠다. 또 왕릉인 타마우둔(玉殿)을 조영했다.

2.4.2. 사츠마의 침공

전국시대 당시 규슈를 거의 통일할 뻔 했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패한 사츠마시마즈 가문임진왜란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다. 게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 편에 붙는 바람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미운털이 박힌 도자마 다이묘가 되었다. 사츠마 번은 이러한 곤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큐를 노렸다.

사실 이전부터 사츠마 번은 류큐국에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준비할 무렵에도 류큐에 군량미를 내놓아라, 나고야성(名護屋城)[16] 축조 비용을 분담해라 등등 여러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류큐국에서는 이 요구들을 다 받아주지는 않았지만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하여 일부만 받아주었다.

1608년, 시마즈 타다츠네[17]는 사신을 보내 에도 막부에 조빙(통교)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류큐 조정에서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 그 와중에 삼사관(三司官, 재상)의 하나였던 쟈나 웨카타 리잔(謝名親方利山)[18]이 깽판을 부려 사신을 모욕했고, 사츠마는 류큐 침공을 결심했다.

1609년 3월 4일 사츠마에서 무장 카바야마 히사타카(樺山久高)와 3000명의 병사가 출발했다. 7일에 아마미 제도의 아마미오오시마가 떨어졌으며, 3월 25일에 나키진의 운텐항(運天港)에 도착, 27일에 나키진구스쿠(今帰仁城)를 함락시켰다. 이후 우라소에 구스쿠(浦添城)를 불태우고 슈리성 앞까지 진군해나갔다. 류큐국은 저항을 시도했으나 사츠마군의 맹렬한 조총 세례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4월 1일, 사츠마군이 나하에 도착하자, 류큐국과 사츠마는 류큐의 왕자와 삼사관을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5월 15일, 사츠마는 쇼네이 왕과 100여명의 신하들을 가고시마로 데려왔다. 결국 이들은 사츠마에 충성의 맹세를 한 후, 에도까지 끌려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쟈나 웨카타 리잔은 끝까지 거부하였고, 결국 끓는 물에 던져져 죽임을 당했다.

2.4.3. 근세 류큐

사츠마는 류큐 왕국을 아예 멸망시키지는 않았는데, 류큐 왕국이 중국의 조공국가로 존재하면서 생기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치품들이나, 중개무역 수익 등이었다. 류큐는 중국과 사츠마, 그리고 에도 막부에 이중삼중으로 복속되는 신세가 되었다.

류큐를 속국으로 삼은 사츠마는 우선 류큐에서 아마미 군도를 뜯어갔다. 그리고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또 나하에 류큐재번봉행(琉球在番奉行)이라는 관리를 두어 류큐를 감시하였다. 이 당시 엄청난 조공액을 감당하기 위해 류큐 왕국에서는 야에야마 등지의 먼 섬에 무거운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이게 너무 무거웠던 나머지 주민들은 사람을 죽여 세금을 줄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이 이어졌다. 17세기에는 쇼 쇼켄(向象賢)[19], 18세기에는 사이온(蔡温)[20]이라는 명재상들이 등장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다. 마헤이코(麻平衡)[21]는 중국에서 고구마설탕 제조법을, 일본에서 목화를 들여와 오키나와의 경제 발달에 기여하였다.

1853년에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에도 막부에 개항을 요구하러 가는 길에(흑선내항) 류큐에 내항하여 개항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 유미수호조약(琉美修好条約)을 맺었다.

2.5. 류큐 처분과 멸망

메이지 유신이 이뤄져 폐번치현 등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일본 신정부는 1872년 류큐를 번으로 강등하고 '유구국 중산왕' 쇼 타이(尚泰·상태)를 '유구번왕(琉球藩王)'으로 만듦으로서 류큐가 일본의 속령임을 확실히 선언했다. 이것을 '제1차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22] 쇼 타이는 이 조치에 반발하여 청나라에 계속 '유구국 중산왕'의 명의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아 왔는데,[23] 그러다가 대만 섬에 상륙한 류큐인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로 청나라를 떠보기 위해 1874년 대만 섬에 출병하였다. 청나라는 자기 영토인 대만 섬에 일본군이 상륙하였으니 반발하긴 했으나 류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일본은 이로써 청나라가 류큐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합병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끝냈다.

마침내 1879년, 일본 정부는 500여 명의 군경을 파견해 류큐 번을 없애고 가고시마 현에 잠시 편입시켰다가 오키나와 현을 설치했다. 이와 동시에 쇼 타이 왕을 도쿄에 압송하였다. 이를 '제2차 류큐 처분'이라 부른다. 쇼 타이는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이로써 1429년 오키나와 섬 통일 이래 450년에 이르는 류큐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당시 세계여행 중이던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이 소식을 접하고 청나라에 도착해서 조정 내 실력자인 이홍장을 만나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했는데 정작 이홍장은 시큰둥했다고 하며, 그랜트가 계속 설득하자 "정 그렇다면 당신이 한 번 일본과의 교섭을 주선해 보시구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그랜트가 주선한 청일 간 교섭 과정에서 다음 제안이 있었다.

  • 류큐 3분안(그랜트의 중재안)
류큐를 셋으로 쪼개서 서남부의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는 청이 먹고, 동쪽의 아마미 군도 일본이 먹은 다음에(어차피 아마미 군도는 이미 일본이 실질 통치해 온 지 오래였다), 중부의 오키나와 본섬은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간 공동 관리 하에 두자는 제안이었다.
  • 류큐 2분안(이토 히로부미의 제안)
류큐를 둘로 쪼개서 서남부는 청이 먹고 나머지는 일본이 먹는 반띵 방안.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그래서 결국 그대로 일본 영토로 확정되고 말았다. 당시 청나라가 해양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큐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세한 내용은 이 기고문에서 볼 수 있다.

그래도 어쨌든 일본의 류큐 병합은 청나라가 조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게 된 동기를 제공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을 방문하여 강화도조약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중국에 의지했던 류큐가 한 방에 일본에 넘어가자 베트남이나 조선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류큐는 일제시대에 법률적으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內地), 즉 본토로 취급되었다.하지만 실제 취급은 그냥 식민지

류큐의 강제병합은 주변국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유운동(일본 유학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24]을 주도한 것으로 곧잘 언급되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반부주)는 '유구혈루신서(琉球血淚新書)'를 써서 류큐의 망국사를 언급하며 독립이 왜 중요한가를 자국민들에게 깨우치기 위한 사례로 언급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류큐가 강제병합되어 일본의 한 현으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는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을 참조할 것.

3. 해외 교류

통일 류큐 왕국의 건국 직후에는 동남아시아, 일본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에는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류큐의 중요한 밥줄 가운데 하나였다. 명나라에서도 류큐를 우대하였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베트남은 3년에 1회, 일본(무로마치 막부)는 10년에 1회 조공을 바칠 수 있었는데, 류큐는 2년에 1회씩이었다. 1470년대 이전까지는 1년에 1회씩이었으나 이후부터는 2년에 1회씩으로 제한된다.[25] 이는 명나라에 매년 4회씩의 조공 무역을 한 조선 다음으로 잦은 횟수이다. 류큐는 조공을 바친 대가로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획득하였으며 명나라의 상품을 수입하여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수출하였고 조선과 일본, 동남아시아의 물산을 수입하여 명나라에 수출함으로써 해상중개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3국의 해양의 요충지에 위치한 류큐는 지정학적 우위를 살려 활발한 무역을 전개함으로써 찬란한 번영을 누렸다.

15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위협이 커져서 조선과 교류하기 힘들어지자, 류큐국은 방침을 바꾸어 일본의 상인을 통한 간접 무역으로 조선과 교류했다.

아시아 북단과 남단의 한가운데에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16세기까지 아시아 지역의 해양 허브국가로 상업을 진흥시켰다. 이후 유럽의 해양 진출과 맞물려 포르투갈스페인, 네덜란드 상인과도 교류할 정도로 번성했다. 당시 중계무역으로 뻗어나가는 류큐국의 자신감을 반영한 유물로는 슈리성 만국진량의 종(1458년)에 적힌 명문(銘文)이 있다. 만국진량의 뜻 자체가 '세계의 여러나라를 잇는 가교'라는 뜻. 이 명문엔 주변의 나라들에 빗대 류큐를 미화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흥미롭게도 삼한(三韓), 즉 조선을 명나라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다. 명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琉球國者, 南海勝地, 而鍾三韓之秀, 以大明爲輔車, 以日域爲唇齒, 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 異産至寶, 充滿十方刹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에 위치하여 삼한(三韓=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명나라)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봉래도이다. 선박을 통해 만국의 가교가 되고, 이국의 산물과 보배가 온 나라에 가득하다.

류큐의 주요한 무역 상품 가운데 토산품으로는 , 나각(螺角, 소라껍질)[26], 해파(海巴, 조개껍질)[27], 소가죽, 유황[28], 파초포(芭草布, 파초 잎 섬유로 만든 천)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도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아, 주석, 향신료 등을 가져와서 중개무역을 펼쳤다. 일본 홋카이도산 말린 다시마는 약재로서[29] 중국에 많이 팔렸다. 17세기 이후 사탕수수 농사가 시작되면서 흑설탕 매매는 류큐 왕실의 돈줄을 책임지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울금도 돈이 꽤 되었다는듯. 물소도 길러서 물소뿔도 생산되었는데 조선에서 각궁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편 왜구가 납치한 조선인들을 사고 파는 노예시장이 나하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하의 쿠메촌(久米村)에는 쿠메삼십육성(久米三十六姓)이라 불리는 복건성 계통의 도래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은 류큐의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6세기에 들어서, 포르투갈스페인 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고, 일본의 상인들이 직접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한데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락하여 류큐의 해외무역도 힘을 잃고 만다. 류큐와 동남아시아와의 교류는 1570년 시암(태국)으로 배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조공 무역과 일본과의 무역은 계속되어 류큐를 먹여 살렸다.

3.1. 에도노보리

사츠마의 침입 이후, 류큐에서 에도 막부로 보내던 사절단을 에도노보리(江戸上り) 또는 류큐사절(琉球使節)이라고 한다. 1634년부터 1850년까지 18회 보내졌다. 류큐 국왕 즉위시 보내는 사은사(謝恩使)와 새로운 쇼군 습직시 보내는 경하사(慶賀使)로 나뉜다.

당시 야마토(일본 본토)에서는 류큐를 다른 나라로 여기고 있었으며, 류큐에서 올라온 에도노보리의 행렬은 조선통신사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한 관심을 끌었다. 또 일본의 지식인들 가운데 류큐를 통해 중국의 사정을 듣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에선 류큐의 사신단을 공물을 바치러 온 조공단으로 선전하여 권위를 널리 높였다.

3.2. 한국과의 관계

류큐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아 배를 타고 바다를 돌며 해상무역을 생업으로 삼는다. 서쪽으로는 동남아시아 및 중국, 동쪽으로는 일본 및 우리나라와 교류하고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상선들도 나하에 모여든다. 류큐 백성들은 수도 주변에 가게 등을 차려 장사를 한다.

신숙주, 해동제국기

한국의 선우영준이라는 교수는 울릉도에 있었던 우산국의 주민들이 류큐 일대로 이주해 와서 지배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며, 2007년엔 고려삼별초가 류큐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건설했다는 학설과 그에 상응하는 역사 증거들이 발견됐다. #, 또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류큐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근거는 없어 믿기 힘들다. 고려의 기와가 발견된 걸로 보아 고려의 문물과 영향력 전파는 사실로 보이나, 아직까지는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다.

수백년 동안 지속된 우호국가로서 시작은 류큐에서 먼저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의 강제합병 이전까지 양국은 교린을 하던 관계였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에는 유구국(琉球國)이라고 나온다.[30] 꾸준히 사신과 예물을 보내면서 교린하였지만[31] 유구국이 사쓰마 번에 정복된 뒤에는 교류가 줄어들어서 거의 없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과 류큐 쪽 자료를 근거로 조선과 유구의 상호교류와 상호 인식을 시대순으로 분석한도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해도 좋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에 제주도 사람들이 류큐로 표류하거나 반대로 류큐 사람들이 제주도로 표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과 류큐 양국 간에 이런 사람들을 상대국에 돌려 보내는 일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광해군 시절에는 류큐 왕자가 보물을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하기도 했는데, 당시 제주도의 탐관오리들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태도 있었다.[32] 그래서 나중에 이 사실이 한양의 조정에 알려져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다가 흐지부지 됐었던 듯.[33] 지금도 이에 관련하여 제주도에는 설화가 전하고 있기도 한다.

조선에서는 1416년에 이예(李藝)를 사신으로 류큐에 파견하였고, 왜구에게 잡혀 끌려갔던 조선인 44명을 구해서 돌아왔다.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당시 일본과 류큐국에 대한 자료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류큐 일대가 현재는 일본에 소속돼 있지만 과거에는 별도의 나라를 이루었던 점 때문에 한국의 제주특별자치도(옛 탐라)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종교

류큐에서는 전통적으로 류큐의 전통 신앙인 류큐 신토를 믿어왔다. 류큐왕국 정부는 신녀인 노로(ノロ)의 조직을 관리하였으며, 최상위 노로인 키코에오오키미(聞得大君)는 왕족 여성이 임명되었다. 노로 이외에도 개인이나 마을을 위해 일하는 무당인 유타(ユタ), 남성 점쟁이인 토키(トキ)도 있었다. 17세기 무렵에는 유타 및 토키가 반란을 일으키자 류큐 왕국에서 탄압하였다.

불교는 13세기에 전해졌으며, 슈리성 옆의 엔가쿠지(円覚寺)에서는 조선에서 받아온 팔만대장경 인본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사츠마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신토 또한 건너왔는데, 신사가 절 옆에 부속되어 지어진다던가 하는 영향을 주었다. 일부 신토의 신들은 오키나와의 신들과 동일시 되기도 했다. 류큐 왕국 시절에 세워진 여덟개의 주요한 신사를 류큐팔사(琉球八社)라고 한다.

유교는 왕실에서의 영향력이 있었다. 나하에는 시세이뵤(至聖廟)가 세워져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메이린토(明倫堂)에서 유교 경전을 교육했다.

도교는 정확히 전해지는 시기를 알 수 없지만 18세기에 부뚜막 축제를 열리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류큐 토착 민간 신앙과 융합하여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믿기도 했다.

5. 문화

17세기에 편찬이 완료된 오모로소시(おもろさうし)는 류큐에 전해지던 신가(神歌)들을 모은 가요집이며 1554수가 수록되어있다.

류큐 왕국에서는 류큐어로 짓는 정형시류카(시)가 유행하였다. 현재에도 많은 류카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본토에서 전해진 와카도 유행하였으며, 특히 이름난 오키나와의 와카 시인들을 모아 오키나와 삼십육가선(沖縄三十六歌仙)이라 부른다. 또 한시도 지어졌다.

류큐의 궁정음악으로는 실내악인 우자가쿠(御座楽)와 행진에 쓰인 루지가쿠(路次楽)가 있다. 류큐의 전통악기로는 산신(악기)이 유명하다.

류큐의 전통 연극으로는 쿠미오도리(組踊)가 전해진다. 17세기에 타마구스쿠 웨카타 쵸쿤(玉城親方朝薫)이 일본 본토의 , 가부키등을 참고하여 만들었으며, 중국의 책봉사를 위한 연회에서 상연되었다. 타마구스쿠가 만든 다섯 개의 쿠미오도리 작품은 쵸쿤고반(朝薫五番)이라고 불린다. 쿠미오도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고, 지금도 우라소에 시의 국립극장오키나와에서 공연되고 있다.

6. 역대 국왕

오키나와어로 류큐의 왕을 이르는 칭호는 우슈가나시(御主加那志) 또는 수이틴가나시(首里天加那志, 슈리의 임금님)였다. 가나시(加那志, がなし)는 '님'에 해당하는 존칭인데 구개음화로 인해 쟈나시(じゃなし)로 발음되기도 한다. 한문으로 써진 역사서 구양(球陽)에서는 주상(主上), 왕상(王上), 성상(聖上) 등의 칭호도 쓰였다. 대외 외교에 있어서는 유구국 중산왕(琉球國中山王)을 사용했다.

6.1. 류큐 왕가의 이후

제2차 류큐 처분(1879) 이후 쇼타이 왕은 강등돼서 후작에 봉해졌다. 일본 본토 다이묘들의 고쿠다카(石高)와 비교하면 쇼 왕조는 백작에 불과하지만 '국왕'에 대한 예우로 한 등급 올려주었다 카더라. 귀족 작위는 1947년까지 존재했다가 폐지되었으므로, 그때까지 쇼 타이의 후손들이 후작 작위를 세습했다.[34] 이후에는 별도의 작위가 없이 후계자들이 쇼 씨 가문을 계승하고 있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옛 황제의 후계자를 지정해 옛 전통과 문중 재산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현재 제2 쇼 씨 왕조의 계승자는 쇼 타이 왕의 고손자(현손)인 1950년생 쇼 마모루(尚衞·상위)# 씨이다.

한편 제2차 류큐 처분 당시 우둔(御殿)[35]은 28개 가문(왕자(王子, 직계왕족) 가문 2, 아지(按司, 방계왕족) 가문 26)이 있었다. 일본은 왕자 가문이던 나키진우둔(今帰仁御殿)의 당주(쇼타이 왕의 동생 쵸부(朝敷))와 오랜 세습 가문인 이에우둔(伊江御殿)의 당주에게 남작 작위를 주었고, 쇼타이 왕의 차남 쇼인(尚寅)[36]과 4남 쇼준(尚順)에게도 남작 작위를 주었다. 하지만 아지 가문들에게는 사족(士族)으로 지정했을 뿐 작위를 주지는 않았다. 왕공족제도의 프로토타입

7. 언어

류큐 왕국은 류큐어를 써왔다. 하지만 류큐어는 지역별로 편차가 커서 오키나와어, 쿠니가미어, 미야코어 등의 방언 혹은 개별 언어들로 나뉜다. 이 가운데 류큐 왕국의 표준어의 역할을 한 것은 오키나와 섬 중부 및 남부에서 쓰인 오키나와어, 그 가운데에서도 슈리에서 사용된 슈리 방언이었다.

중국 측에서는 류큐와 중국의 민족적, 언어적 연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 환구시보는 "과거 오키나와 주민 대부분은 중국 대륙의 푸젠 성, 저장(浙江)성, 대만 섬 출신이며, 언어와 제도도 중국대륙과 같았다"는 중국의 연구자의 주장을 싣기도 했다.[37] 류큐의 지정학적 위치상 역사적 중국에서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고 많은 인적 교류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류큐 민족의 주류일본계와 근연관계로써 중국계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고고학적 발굴과도 맞지 않는 것인데, 중국대륙이나 대만과 언어적으로 공통점이 있을 수도 있는 시기는 선사시대~고중세 뿐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의 선조가 선사시대에 중국 남부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후 태평양 곳곳으로 퍼져 나갈 때에 오키나와에도 진출한 적이 있기는 한데, 이 시기의 중국 남부-대만-오키나와의 공통점이나 유사성은 현재 중국 대륙의 해당 지역에 있는 한족이나 비오스트로네시아계 소수 민족과는 관련이 적다. 이는 삼국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남부에 살던 오스트로네시아계 종족들이 죄다 한족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류큐에는 중국 쪽에서 건너간 것 이상으로 일본에서 건너간 사람들도 많다. 만약 문화적 영향력 그 이상의, 민족적 동질성을 나타낼 수준의 강력한 교류가 있었다면 중국 대륙과 가까운 사키시마나 그보다 더 대륙과 가까운 대만 섬에는 이미 중세 이전부터 왕성한 문명 활동이 있어야 했겠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다. 그래서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토 분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8. 류큐의 상징들

오키나와 현의 상징이나 류큐 독립 운동의 상징은 여기에 수록하지 않았다.

류큐 왕가의 문장인 휘쟈이구문(左御文). 히다리 미츠도모에(左三つ巴)의 일종이다.

19세기 중에 제정돼 1875년까지 사용된 류큐왕국(유구국)→류큐번의 기.

1875~79년에 사용된 류큐번의 기.

9. 관련 문서


  1. [1] 위 지도에서 아마미,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야마 도서군(島嶼群)이 류큐 왕국의 영토였다. 이 중 아마미 군도(현 가고시마 현 소속)는 1609년 일본의 사쓰마 번에 빼앗겨, 대외적으로만 류큐 영토인 척을 하고 실질적으로는 일본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이 지배하는 땅이 된다.
  2. [2] 지금의 나하 시 동부
  3. [3] 류큐 '왕국'과 같은 표기는 현대의 명칭이다.
  4. [4] 류큐 왕국이 명나라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에는 어원 불명의 유구(流求)로 기록되었으나, 이 표기가 쓰였던 당시에는 현재의 오키나와가 아니라 대만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는 게 다수설이다.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이 빈약하여 대만과 오키나와를 구분하지 못하다가 명나라 초기에 유구(流求)(흐를 유, 구할 구)의 표기를 좀 더 그럴 듯하게 고친 유구(琉球)(유리 유, 공 구. 유리공 유리 구슬)를 오키나와 일대의 왕국의 이름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5. [5] 국명과 정치체제를 붙여 불르는 것은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의 표기. 당대에는 '왕국'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6. [6]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こく
  7. [7] 옛 표기법으로는 りうきうわうこく
  8. [8] Ryukyu의 과거 표기로는 Lewchew, Lew Chew, Loochoo 등이 있는데, 표준중국어 발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9. [9]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몬(守禮門)의 현판에 적힌 글귀이다.
  10. [10] 슈리성 정전 중앙에 걸린 현판에 적힌 글귀이다. 쑨원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11. [11] 현재 오키나와의 특산물이 된 사탕수수는 17세기가 되어서야 전해진다.
  12. [12] 이외에 요노누시(世の主, '세상의 주인'), 테다(てだ, '태양')라고 불리는 지배자들도 있었다.
  13. [13] 지금의 난죠 시에 있다
  14. [14] 按司, 구스쿠를 다스린 류큐의 호족들
  15. [15] 명나라 황제의 입장에서는 딱히 누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류큐 지역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 받고 하면 조공을 받는데 차질이 생길까 봐 싫었을 뿐이다.
  16. [16] 아이치 현의 대도시 나고야에 있는 성이 아니라, 사가현 가라쓰 시에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중심 후방 거점이었다.
  17. [17] 島津忠恒. 사실 1606년에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로 이름을 고쳤는데, 숙부 시마즈 이에히사와 이름이 한자까지 똑같아서 헷갈리기 쉽다.
  18. [18] 류큐 왕국 사람들은 류큐/일본식 이름인 야마토나(大和名)와 중국식 이름인 카라나(唐名)를 함께 사용했다. 쟈나 웨카타 리잔의 카라나는 테이도(鄭迵)였다.
  19. [19] 야마토나는 하네지 아지 쵸슈(羽地按司朝秀)
  20. [20] 야마토나는 구시챤 웨카타 분쟈쿠(具志頭親方文若)였다.
  21. [21] 야마토나는 기마 웨카타 신죠(儀間親方真常)
  22. [22] 이전까지 유구국(琉球國)이라는 이름은 외국의 이름이었고 발음을 전부 음독(音讀)으로 읽어서 류큐코쿠(りゅうきゅうこく,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こく)라고 읽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유구국(琉球國)을 '류큐 번' 일대에 설치된 일본 국내의 쿠니(國)처럼 간주하게 되었다. 쿠니는 고대에 율령제가 도입될 때 일본 전국에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당시에는 형식화된 행정구역이었다(실질 행정구역은 '번'이었는데, 본토는 폐번치현을 실시한 뒤 번 대신 '현'으로 대체). 이 때부터 유구국(琉球國)은 이전처럼 '류큐코쿠'로 읽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훈독(訓讀)으로 바꿔서 '류큐노쿠니(りゅうきゅうのくに, 당시의 가나 표기대로는 りうきうのくに)'라고 부르기도 했다.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행정구역으로서의 국(國)들은 국(國) 부분을 대개 '~노 쿠니(~のくに)'라고 읽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오키나와에 대해 류큐노쿠니라는 쿠니를 설치했다고 명시한 적이 없고,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례를 유추하여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쿠니를 사용하는 일이 사실상 없어지고 새로운 행정구역에 적응해서 큰 의미는 없다.
  23. [23] 일본의 관점에서는 류큐는 일개 번에 불과하니 류큐의 조공 무역이 '밀무역'으로 간주되었다(...).
  24. [24] 이 운동은 결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은 일본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났다.
  25. [25] 간혹 조공을 일방적으로 한쪽이 바치기만 하는 걸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공을 받는 측에서 그와 맞먹거나 그보다 많은 하사품을 주게 되어 있다. 조공을 받는 대국이 받기만 하면 쪼잔해 보이잖아. 그래서 조공 무역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26. [26] 이게 무슨 토산품이냐고 하겠냐만, 야광조개를 가공해 만든 가공품들은 고대 신라, 가야 고분에서도 출토된다. 신라 고분의 경우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등의 왕릉급에서, 가야고분도 마찬가지로 대가야 왕릉인 지산동44호분에서도 이 류큐열도 특산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나왔다
  27. [27] 소라껍질과 마찬가지로 청자고둥 조개 껍데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청자고둥을 이용한 공예품은 수도없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금관가야와 신라지역에 청자고동조개를 가공한 말 띠 장식 등이 출토된다
  28. [28] 오키나와 제도의 화산섬인 이오토리시마(硫黄鳥島)에서 채굴했다. 위치상으로는 아마미 군도에 더 가깝지만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차질이 갈 것을 고려하여 사츠마 측에서 류큐의 영토로 남겨두었다.
  29. [29] 특히 갑상선 질환에 특효로 알려졌다.
  30. [30] 당시 공식 표기가 이거였다. 류큐 왕국이니 하는 명칭은 현대에 이 나라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동아시아에서 제국, 왕국, 공국, 민국/공화국 같은 표현들을 국호의 일부로 포함시키기 시작한 것은 서양의 관례가 동아시아에 유입·정착되면서 이뤄진 것이다.
  31. [31]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유구왕 찰도가 조선에 臣을 칭한 적도 있고 조공을 먼저 바치거나 광해군에게 명나라에 왕작을 받은 것을 알리며 조선은 형, 유구는 동생이라고 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32. [32] 류큐가 아니라 베트남 선박이라는 설도 있다.
  33. [33] 조선왕조실록기록이 있다.
  34. [34] 쇼타이(1885~1901) → 쇼텐(尚典, 1901~20) → 쇼쇼(尚昌, 1920~23) → 쇼 히로시(尚裕, 1923~47)
  35. [35] 원래는 류큐 왕족의 저택을 일컫는 말인데, 그 집 주인에 대한 존칭으로도 쓰였다. 우둔하다의 우둔이 아니다. 우둔의 불꽃 같은 거 없다 현대 일본어 표준어에서 단독으로 '두' 발음을 나타내는 가나 문자가 없는 관계로(본래 고어에서는 づ가 이런 발음을 나타냈지만 현재는 발음이 변함) 외국어, 외래어, 방언에서 쓰이는 '두' 발음을 どぅ('도' 다음에 작은 글씨로 '우') 형태로 적는다. 따라서 '우둔'은 うどぅん이라고 적는다.
  36. [36] 기노완우둔(宜野湾御殿)의 시조
  37. [37]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398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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