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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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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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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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스미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역사를 총망라해서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 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오타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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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잭슨 파이브의 맴버 자격으로 먼저 헌액됐다가 2001년에 솔로 자격으로 또 헌액되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2번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뮤지션 중 한 명이 됐다. 출처1/출처2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후보자격 연도

1998년

후보선정 연도

2001년

}}}


알앤비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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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4년 출처 참조

}}}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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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헌액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 섀도우즈
1960년대: 비틀즈, 롤링 스톤스
1970년대: 밥 말리,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마돈나
1990년대: U2, 로비 윌리엄스

2005년 헌액

핑크 플로이드
유리드믹스
아레사 프랭클린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조이 디비전 / 뉴 오더
더 후
킹크스
블랙 사바스
오지 오스본

2006년 헌액

제임스 브라운
레드 제플린
로드 스튜어트
브라이언 윌슨
본 조비
프린스
더스티 스프링필드

}}}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2년 출처 참조

}}}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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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댄서/무용인이 아닌 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10년 출처 참조

}}}


Dance Heritage Coalition

America's Irreplaceable Dance Treasures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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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C는 전문적으로 을 연구하고 분석하며 역사를 기록하는 각종 단체들이 연합하여 만든 국립 기관으로서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리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의회도서관에 기록될 113가지의 유산을 선정했는데 마이클 잭슨도 포함됐다.

나머지 리스트 보기

}}}


백악관

Artist of The Decade.
데케이드 아티스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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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뮤지션으로서 지난 10년 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악관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데케이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

#00000 '''수상자'''

#00000 '''날짜'''

#00000 '''출처'''

마이클 잭슨

1990년 4월 5일

#

}}}


영국문화원

80 Landmarks in 80 Years: The People and Events That Shaped Ou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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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영국문화원이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실시한 조사. 각계각층의 전문가 25명이 1934년 이후 지난 80년간 일어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80가지를 선정한 후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했다.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과 라이브 에이드 공연 2개가 선정됐다. 출처 참조

48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49위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

50위

라이브 에이드 공연

}}}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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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iller 뮤직비디오는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 영상 보관소에 등재된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뮤직비디오다.

#00000 '''등재자'''

#00000 '''작품'''

#00000 '''등재연도'''

#00000 '''출처'''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3)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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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1980년~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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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 1979년

2000년 ~ 201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빌리 조엘

크리스토퍼 크로스

존 레논 & 오노 요코

토토

마이클 잭슨

52nd Street

Christopher Cross

Double Fantasy

Toto IV

Thriller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폴 사이먼

U2

조지 마이클

Can't Slow Down

No Jacket Required

Graceland

The Joshua Tree

Faith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보니 레잇

퀸시 존스 & Various Artists

내털리 콜

에릭 클랩튼

휘트니 휴스턴

Nick of Time

Back on the Block

Unforgettable... with Love

Unplugged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토니 베넷

앨라니스 모리셋

셀린 디옹

밥 딜런

로린 힐

MTV Unplugged

Jagged Little Pill

Falling into You

Time Out of Mind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


역대 그래미 시상식[2]

올해의 레코드상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Rosanna" - 토토

"Beat It" - 마이클 잭슨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올해의 노래상

제27회
(1985년)

제28회
(1986년)

제29회
(1987년)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We Are the World" - 마이클 잭슨 (with Lionel Richie)

"That's What Friends Are For" - 디온 워윅


롤링 스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100명

34위

35위

36위

닐 영

마이클 잭슨

마돈나















}}} }}}}}}||

Michael Jackson

본명

마이클 조지프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향년 50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홈비 힐스

국적

미국

직업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무용가, 배우, 자선가, 사업가

가족

여동생 자넷 잭슨

별명

King of Pop (팝의 황제), MJ, 마잭, 마이크, Smelly[3]

신체

175cm, 62kg #[4]

종교

여호와의 증인불명[5]

데뷔

1969년 잭슨 파이브 1집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6]

활동연도

1964년 ~ 2009년

로고

서명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3. 영향력
3.1. 영향을 준 아티스트
4. 인기와 평가
6. 공연(투어)
6.1. 대표적인 공연영상
6.1.1. 1987년-1989년 Bad 월드 투어
6.1.2. 1992년-1993년 Dangerous 월드 투어
6.1.3. 1996년-1997년 HIStory 월드 투어
7. 사생활 및 일화
7.2. 언론과 루머
7.3. 어린 시절
7.4. 여자와의 관계
7.5. 가족 관계
7.6. 백반증과 외모
7.7. 타 연예인과의 관계
7.8. 성격
7.9. 한국과의 인연
8. 그 외
8.1. 재산
8.1.1. 사후 수익
8.2. 어록
10. 수상 기록
10.1. 그래미 어워드
10.2. American Music Awards
10.3. 헌액
11.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12. 바깥 고리

1. 개요

마이클 잭슨이 성취한 수준에 대한 명성은 오늘날의 대중문화 영웅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뉴욕타임즈/ After Jackson, Fame May Never Be The Same

King of Pop[7]

미국가수, 작곡가, 무용가, 자선가이자 배우였다.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8] 아버지의 고된 교육을 견뎌내며 가수 생활을 시작했고, 잭슨 파이브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의 메인 보컬에서 팝(대중음악)의 황제로 등극했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며, 음악을 통해 사회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완화시킨 문화 예술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또한 음악사에 전례 없는, 흑인이 음악적 주도권을 잡게 되는 최초의 사례를 만들어 냈고, 동시에 대중음악의 주 장르를 에서 팝으로 변화시켰다. 대중음악 역사상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한 명[9]이기도 하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하나이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Thriller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We Are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루머로 인해 언론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돼 버렸고 실제로 그를 미친 사람(Wacko Jacko)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백반증에 의한 고통과 누명으로 인한 스캔들을 거치며 건강 상태가 악화됐고, 2009년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의 무분별한 프로포폴 사용으로 5월달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과실치사로 사망했다.[10]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고,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스타 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11]이다. 한편, 퀸시 존스는 2001년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평가들이 마이클 잭슨을 음악사에서 지우려는 것 같다며 걱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21세기에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과 음악은 잊혀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남긴 음악과 퍼포먼스가 20세기 대중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경력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영향력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뉴욕타임즈/ A Star Idolized and Haunted Michael Jackson Dies at 50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한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됐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영국 대학 연구팀이 17,000개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들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 롤링 스톤즈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1983년(마이클 잭슨, 더 폴리스, 유리스믹스 등의 팝스타와 신기술의 유행) 1991년(힙합의 황금기)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Thriller 앨범으로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12] 당시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 가장 거대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인기있는 단일현상이라고 보도했고 롤링 스톤은 1983년을 음악의 해로 규정하며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을 흑백 인종의 벽을 부순 흑인음악의 선봉장이라 평가했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존의 흑인음악 스타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흑인이라면 마땅히 소울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하며[13] 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이었다.[14] 허나 뉴욕타임즈의 당시 칼럼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인지 펑크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딱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한 음악이었다. 즉, 흑인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사운드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15] 이는 결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고영탁 음악평론가는 '소울, 펑크, 재즈 등 대표적인 흑인음악과 록, 팝, 발라드 같은 백인음악이 그의 음악에 하나로 녹아있다. 말하자면 흑백 음악의 통합을 이뤄낸 것으로 전례없던 인종대화합의 음악'이라고 평했고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마이클의 음악은 당시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인종적 취향의 벽을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뉴팝'이라고도 불렸고[16]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영국음악의 기세에 줄곧 눌려왔던 미국이 다시 주도권을 탈환하고 세계 음악시장을 선도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17] 동시에 의 시대에서 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다.[18] 또한 각종 주류 장르의 팝(pop)화 현상[19]을 야기하여 당시 소울팝, 알앤비팝이 궤도에 올랐고[20] 심지어 록 음악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1970년대까지 주류음악으로서 위상을 떨치던 헤비메탈이 인기가 시들해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상업화를 추구하여 결국 본 조비, 건즈 앤 로지스팝메탈(LA메탈)로 발전한 것이다.[21]

잭슨이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만든 사운드는 펑크(funk), 올드스쿨 소울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재즈, 디스코 그리고 Beatles-esque 락의 요소도 매끄럽게 혼합되어 있어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운드는 1979년작 Off The Wall 앨범에서도 관찰할 수 있지만 완전히 구현된 것은 흑인음악과 백인음악, 가볍게 즐기기 위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 댄스무대용 음악과 헤드폰용 음악의 경계를 허물며 메인스트림 팝을 완전히 뒤바꾼 1982년 발매된 걸작 Thriller 앨범에서였다.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 / LA타임즈 A performer who kept transcending boundaries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스릴러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 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 (웅진뮤직 기고문)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198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레코드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어 한 해 가장 많은 그래미상을 수상한 뮤지션으로 기록됐다.[22]

비록 시대가 좋아졌다고는 하나 80년대는 인종간의 차별이 여전히 심했을 때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빗 보위는 1983년 MTV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MTV는 백인 중심주의라고 비난했을 정도이다. 1970년대 중반 디스코 열풍으로 한때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 들어 그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잭슨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앨범차트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hot 100 차트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는 아직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1979년과 비교했을 때 1982년까지 핫100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의 비중이 거의 80%나 감소했다며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거의 바닥이었다고 분석했다. 디스코 열풍의 시기에도 물론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에 밀려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황제로 대접받았다. 롤링 스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혔던 문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며,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는데 특히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고 분석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뮤직 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Billie Jean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열어줬다며 감사를 표했다.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앨범을 단 두 장만 발매했음에도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이다.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타이거 우즈버락 오바마 이전에 흑인 뮤지션들이 세계 대중문화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흑인 뮤지션들을 흉내내며 자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같은 엄청난 슈퍼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스는 영미 사회에서 주로 백인들에게 인기를 누렸던 반면 마이클 잭슨은 흑백 사회 모두에서 폭발적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흑백 크로스오버 시대'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 거지요.

가수로 보면 빌리 할리데이, 레이 찰스, 샘 쿡,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마빈 게이, 스티비 원더 등등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흑인 스타가수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스타들이었지만 그들이 미국사회에서 상기한 엘비스 프레슬리,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백인가수들을 누르고 진정한 1등을 차지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때까지 명백히 백이 흑의 위에 있었지요.

흑인가수로서 백인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1등에 오른 인물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백인에서 흑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거지요. 1982년이 대중음악에서 전환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바로 이 해에 백인음악의 대변자이자 상징인 이글스(Eagles)가 해산하고 아프로 아메리칸 스타 마이클 잭슨이 등장했으니까요. 한편으로 미국의 문화유산이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만들어낸 블루스와 재즈라고 한다면, 또 거기에서 로큰롤이 파생했음을 전제하면 흑인문화가 마이클 잭슨에 와서 비로소 본래의 주도적 위상을 탈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 잭슨 9주기 : 영상시대 이끈, 대중음악 현대화의 단일 주체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다시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빌보드/ Michael Jackson's 'Thriller' at 30: How One Album Changed the World

흑인 뮤지션 사상 최초로 MTV에서 헤비 로테이션된[23] Billie Jean 뮤직 비디오의 촬영 중 잠깐 쉬는 장면.

MTV 평생공로상인 마이클 잭슨 비디오 뱅가드 어워드. 1991년부터 마이클의 이름을 따서 시상하고 있다.

또란 마이클은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 마이클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24] 뮤직 비디오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라디오가 여전히 주요 음악소비 매체 중 하나였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익숙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MTV는 초기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좀비 소재를 이용해 최초로 13분짜리 단편영화 콘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마이클의 <Thriller> 뮤직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MTV는 종일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고 덕분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채널이 될 수 있었다.[25]

영구보존작으로 선정돼 현재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자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 비디오 1위, 또 제작 과정 등을 담은 필름 영상만 900만 부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북에 등재된 것이 바로 마이클의 <Thriller>이다.[26] 빌보드는 <Thriller> 뮤비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로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으며 이러한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 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 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의 이와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 비디오와 보는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존 파렐스 음악평론가가 마이클이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엔 댄스 음악, 댄스 가수라는 수식어가 없다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이클과 함께였다.[27]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로봇춤을 유행시켰고 이후 <Beat It>, <Thriller> 등 뮤직 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집단 군무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문워크와 린댄스라는 획기적인 춤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Dangerous>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뉴욕 대학교 공연연구학 교수 타비야 녕오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어떤 댄서도 마이클 잭슨만큼 댄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마이클은 앞서 말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전설적인 댄서들이 이름을 올렸던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2010년 헌액됐는데, 이는 전문 댄서가 아닌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 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특히 Dangerous World Tour가 대중음악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며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으로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Smooth Criminal 공연에서 등장하는 초대형 스크린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MTV와 뮤직 비디오 발전의 1등 공헌자.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MTV와 뮤직 비디오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이 내놓은 싱글들은 대부분 뮤직 비디오를 동반했고,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놀라운 영상 미학을 구현했다. 마이클은 뮤직 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음악 팬들을 MTV 앞으로 이끌었다. 그의 뮤직 비디오는 단순히 뮤직 비디오가 아니라 쇼트 필름이라 말할 정도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은 영화다. 쟁쟁한 영화 감독들을 초빙해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특수효과를 갖춰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고영탁 음악평론가/ 오이뮤직 2003년 3월호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마이클이 처음으로 문워크를 선보인 1983년 모타운 25주년 기념 빌리진 공연의 한 장면. 음악평론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이 공연 이후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28] 이 공연은 2013년 미국 여론조사기관 해리스 폴이 자국 성인 2,0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지난 50년간 일어난 사건들 중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건> 7위에 올랐다.[29]

<Thriller>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던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한편의 단편영화처럼 제작해 뮤직 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30] 참고로 <Thriller>는 오늘날 미국에서 매년 할로윈 시즌만 되면 울려퍼지는 대표적인 할로윈송이 되었다. 2018년에는 빌보드 핫100 차트 31위까지 올랐을 정도...

마이클의 앨범은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 마이클은 사운드에 유난히 민감하고 엄격한 귀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마이클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였던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이 밝힌 일화에 의하면 마이클이 <Billie Jean> 사운드를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무려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31]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마이클의 앨범이 스피커플레이어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마이클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32]

임진모 음악평론가도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마이클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마이클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은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사운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다. 특히 엔지니어들이라면 마이클의 음악은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33]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이준오 영화음악 감독이 아날로그 믹스의 바이블 같은 앨범이라고 칭하기도 한 1991년작 <Dangerous>부터는 사운드에 더더욱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되게 느껴질 수 있다.

사실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은 엄청난 자본이 투여된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다.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것이라 보면 된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다.

ice J 음향엔지니어/ 개인 블로그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Michael Jackson [Thriller]

3.1. 영향을 준 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이 대중문화의 스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잭슨과 견줄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혁신성을 그들 각자의 작품에 적용할 제자들만이 앞으로도 꾸준히 생겨날 뿐이다.

롤링 스톤/ 2009년 7월 '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2010년 AMA(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에서 남자 가수상 수상 소감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 누구도 마이클 잭슨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마무리 했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잭슨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잭슨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잭슨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 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 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 때[34]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 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추모 영상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춤과 노래를 커버한 적도 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대중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 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 Z,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더 위켄드, 테일러 스위프트 등 주요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진영이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을 듣고 자신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고 빅뱅, BoA, 문희준, 박재범, 장우혁 등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4. 인기와 평가

기네스 북 선정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

2018년 영국의 가디언지는 <Best 보이밴드 맴버 Top 30>에서 마이클 잭슨을 1위로 선정했다. 마이클은 11살 때인 1969년, 형제들로 구성된 그룹 잭슨 파이브로 본격 데뷔해서 모타운에서의 첫 싱글 <I Want You Back>을 시작으로 10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4곡의 빌보드 1위 곡을 연속으로 배출했다. 이는 그룹 역사상 최초로 4개의 싱글이 연속으로 빌보드 1위를 석권한 것이었다. 또 13살 때 발표한 솔로 싱글 <Ben>도 1위를 기록하면서 사실상 잭슨에게 무명기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마이클은 차트에서 이전만큼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며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9년 성인이 되고 첫 솔로작인 <Off The Wall> 앨범이 2,000만 장 이상 팔리고 비평적으로도 극찬을 받으면서 마이클은 다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기조는 1990년대 초중반까지 쭉 이어졌다. 1982년 발매된 <Thriller> 앨범은 현재까지 6,600만 장을 팔아치우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35] 1985년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 작사/작곡하고 20명 이상의 미국 레전드 뮤지션들이 함께 부른 <We Are The World> 역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싱글만 2000만 장 이상이 팔려 나갔는데 이는 8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자 현재까지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1987년 발매된 <Bad> 앨범도 3,500만 장의 판매고[36]를 올리고 한 앨범에서 역대 최다 기록인 5곡의 빌보드 1위곡을 배출하는 등 신기록을 세우면서[37] 80년대 마이클 잭슨은 정규앨범을 단 2장만 발표하고도 인기의 최고조를 유지했다. 마이클은 1990년 백악관에서 당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데케이드(decade) 아티스트 상을 수상했고 빌보드는 앨범 판매량, 라디오 에어플레이 횟수 등 상업성 측정 지표들을 종합하여 마이클 잭슨을 80년대 대표 뮤지션으로 산정했다.[38]

1991년 발매된 <Dangerous> 앨범도 3,200만 장 이상 팔리며[39] 마이클 잭슨은 전성기를 이어갔는데 당시 앨범 수록곡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27개국에 동시 방송되어 5억 명 이상의 시청자를 끌어모아 기네스 북에 TV 역사상 가장 많이 본 뮤직 비디오 Premiere등재됐다. 1992년 미국의 유료 케이블 채널 HBO는 마이클의 <Dangerous Tour: Live in Bucharest> 공연을 방송하여 시청률 21.4%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HBO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었다. 1993년 마이클이 게스트로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쇼>는 현재까지도 TV 인터뷰 방송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가 본 방송으로 남아있는데 약 9,000만 명이 본 것으로 집계됐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슈퍼볼 하프타임 쇼도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1993년부터 개념이 정립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이클 이전에는 주로 대학밴드들의 공연이나 디즈니 헌정 공연 등이 하프타임쇼를 메꿨지만 마이클 잭슨의 하프타임쇼가 본경기보다 더 높은 시청률을 보인 최초의 사례가 되면서 이후 U2, 프린스 등 슈퍼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2%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답할 만큼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93년 첫 번째 아동성추행 의혹이 터진 이후로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성추행 의혹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결혼과 이혼의 반복, 백인동경설과 성형중독 의혹 등으로 인해 명예는 계속해서 실추됐다. 음악적 커리어도 하향세를 탄 건 당연했다. 1995년 발매된 <HIStory> 앨범은 2,0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마이클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전작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2001년 발매된 마지막 정규앨범 <Invincible>은 600만 장의 판매고에서 그치며 비평적으로도 실패작으로 취급받는 등 이때가 마이클 잭슨의 음악 커리어 사상 가장 침체된 시기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03년에는 두 번째 아동성추행 혐의로 기소돼 재판까지 갔는데 2005년 미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75%가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있었을 정도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됐다. 같은해 재판 결과가 무죄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반응은 여전했다. 판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재판결과를 믿는다는 응답은 34%에 그쳤고 믿지 않는다는 응답은 48%나 됐다. 아울러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이시절 마이클은 4년 연속 가장 어리석은 미국인 1위 자리에 오르는 불명예도 겪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은 별다른 외부활동을 하지 않다가 2009년 3월 영국 런던의 기자회견장에서 컴백 콘서트를 열겠다고 발표하는데, 당시 이 장면을 CNN, ABC, BBC영미권 주요 언론사들이 정규방송까지 중단하며 긴급속보 체제로 들어서며 생중계했다. 영국 O2 아레나에서 열릴 50회 분량 75만 장의 티켓이 단 4시간 만에 모두 매진되었으며, 이는 신기록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이 6월 25일 갑자기 사망하면서 컴백 콘서트는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대신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21세기 인터넷 산업 역사상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온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CNN, BBC 등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긴급속보 체제로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을 연일 특집으로 보도했고 수억 명의 사람들이 검색 사이트에 'Michael Jackson'을 두드리면서 구글이 트래픽 과부하로 다운됐다. 당시 구글은 자신들이 디도스 공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세계 3대 검색 사이트 구글, 야후, 빙의 연간 인기검색어 1위가 'Michael Jackson'이었다. 아마존 닷컴의 데이비드 셀링거는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같이 인터넷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를 하나로 모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타임즈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별판을 발행했고 미국 의회에서는 재시 잭슨 목사의 주도하에 마이클 잭슨을 기리는 단체 묵념이 있었다. 이후 잭슨의 추모식은 FOX, CNN, BBC 등에서 생중계되어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고 TV 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은 방송 중 하나가 됐다.[40] 마이클은 2009년 그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뮤지션으로 집계됐고[41] 사망 이후 1년간 세계적으로 약 3,500만장의 앨범판매고를 올렸다. 당시 마이클의 폭발적인 앨범판매량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빌보드는 메인차트 중 하나인 <Billboard 200> 차트의 기존 규정을 변경하기도 했다.[42] 2010년 VH1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 1위로 선정했다.

2009년 8월 29일 마이클의 생일에 걸린 구글 로고.

사망 이후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은 기존의 부정적 기류에서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가령 2009년 CNN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51%가 마이클의 팬이라고 응답한 것이나 CBS가 2013년 실시한 '미국인이 가장 다시 살리고 싶은 유명인' 설문조사에서 다이애나비스티브 잡스에 이어 마이클이 3위에 오른 것, 또 2014년 <Yougov>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도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69%가 각종 루머와 가십이 아닌 음악으로 마이클이 기억될 것이라고 응답, 또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 2위로 뽑는 등 실추됐던 명예가 서서히 회복돼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43]

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였고 마이클이 2%였다.

2014년 세계 최대 음악 데이터 분석 업체 <EchoNest>가 무작위로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회원 20만명의 가입정보에서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항목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2000년대 이후 인기가수들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와중에도 마이클이 여성에서 31위/남성에서 13위/종합 21위를 기록했다.[44]

사후에도 인기는 꾸준하다.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대표적인 스트리밍 사이트들에서 마이클은 사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인기 아티스트 Top 100 차트에 거의 항상 이름을 올리며 웬만한 현역 뮤지션들 못지않은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구독자수 또한 상당하다.[45] 디지털 음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RIAA 공식 인증 미국내 디지털 싱글 다운로드에서 4,200만회로 역대 17위이기도 하다. 2010년에 소니와 맺은 레코드 계약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대 레코드 계약금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계약금은 2억 5천만 달러였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장 많이 본 문서 6위는 'Michael Jackson'이며 페이지뷰가 1억 1,600만이 넘는다. 페이스북에서도 마이클은 2018년 기준 약 7,400만 명의 팬을 보유하여 20번째로 팬이 많은 계정이기도 하다. 마이클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 분석 전문 사이트 <Whosampled>에 의하면 가장 많이 샘플링/커버/리믹스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마이클은 각각 8위/5위/5위에 랭크됐다.

빌보드 앨범차트 200 연말결산에서 마이클은 사후 2013년을 제외하고는 2018년까지 매해 70위 안에 들 정도로 앨범 역시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 앨범판매량 집계 사이트 <Mediatraffic>에 의하면 마이클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약 3억 ~ 3억 5,000만장의 판매고로 역대 누적 앨범판매량 3위인데[46], 주목할 만한 점은 성인 이후 사망할 때까지 마이클 잭슨이 30년 동안 발매한 정규앨범은 6장밖에 되지 않지만 그중 5장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0위>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47] 이는 목록에 가장 많은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이다. 2014년에는 사후앨범 <Xscape> 수록곡 <Love Never Felt So Good>이 빌보드 HOT 100 차트 9위까지 오르면서 마이클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 HOT 100 차트 Top10 안에 각기 다른 곡들을 진입시킨 유일한 뮤지션이 됐다. HOT 100 차트 1위곡이 13곡인 마이클은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보유한 뮤지션 5위인데, 사실 잭슨 파이브 경력과 <We Are The World>까지 간접 포함하면 1위곡은 18곡에 달하나 솔로 기록과는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개인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한편 영국에서도 마이클은 인기가 많았는데 <Thriller> 앨범과 <Bad> 앨범은 각각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6위와 9위에 해당하며 또 싱글과 앨범을 합쳐 UK 차트에서 최장기간 머문 뮤지션 순위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마이클이 2019년 7월까지 누적 2115주간 머물러 2위를 유지 중이다. 2011년 NME에서 주관해 1,000만표 이상이 모여 순위를 정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에서 마이클이 1위에 올랐으며 2016년에는 영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가장 좋아하는 남성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4위에 뽑혔다. 또 2018년에는 영국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앨범 Top 40'을 조사한 결과 <Thriller> 앨범이 1위에 올랐다.

1984년 경향신문에서 11~14세 학생 2,39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마이클이 인기가수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2010년 프랑스 TF1 채널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에게 마이클의 공연 영상을 보여주고 누군지 아냐고 물었더니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원 이름까지 대며 안다고 대답했을 정도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의 중심지인 미국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냉전 시대의 막이 내리고, 이후 각 나라에 국한되어 있었던 대중문화는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로 뻣어나가는데, 1980년대를 시작으로 당시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 맥도날드와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 사람들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미국의 상징이 된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미국의 기업가 정신과 인도주의 전형을 대표한다. 그는 당시 미국의 여러 기업이 자회사의 상품을 폭발적으로 수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로 1980년대, 1990년대를 소비한 모든 사람들에게 문화의 상징이자 자본주의의 대명사였다. 이것이 그가 20세기, 21세기에 걸쳐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한국에서의 인기는 어땠을까?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1984년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 다도해 섬에서도 주민들이 마이클의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린다고 나와있다. 동아일보는 '한창 인기가 절정인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음악에는 열광한다'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국민학교 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한 결과 마이클이 에이브러햄 링컨, 레이건, 에디슨에 이어 4위로 나온 적도 있다. 1989년에도 마이클은 국민학생 1,500명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외국가수 1위에 올랐다. 시간이 흘러 마이클은 KBS2 연예가중계가 2015년 전국 성인남녀 무작위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설문조사에서 1위로 선정됐고 2018년에도 같은 조사방식으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댄스가수 부문에서 국내가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로 뽑혔다. 2019년에는 한국인이 가장 다시 보고싶은 별이 된 해외스타 1위에 뽑혔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2006년 이후 지난 12년간 '가장 많이 선곡된 뮤지션' 순위에서도 마이클은 비틀즈, 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김정은이 유학시절 유독 좋아했던 가수가 마이클과 휘트니 휴스턴이었다고 김정은의 동창이 밝힌 적이 있는데 2013년에 방북하여 김정은과 시간을 보낸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밝힌 일화를 봐도 만찬이 끝난 후 김정은 부부와 함께 마이클의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췄다고 하니 어느정도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미국을 미사일로 타격하는 선전영상에서 <We Are The World>를 무단 도용해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력이 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가디언지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역시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공산국가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큰 문제였다. 소련은 국영방송까지 동원해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 흑인의 영혼을 팔았으며 미국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레이건 행정부에 기여하고 있다'던가 '잭슨 열병이라는 바이러스균이 이제는 남미로 남하해 남미의 금을 모두 짜내려 한다'는 등 마이클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마이클의 음악은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것이라며 레코드점에서도 마이클의 앨범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타임즈보도에 의하면 소련에서도 불법 복제된 마이클의 카세트가 암암리에 널리 교환되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마이클은 문호를 개방한 소련의 TV 광고에 등장한 첫 서방 연예인이 됐고 1993년엔 러시아에서 월드스타로서는 최초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러시아 출신 대중음악 연구가 드미트리 바비치에 의하면 당시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는 단순히 대중문화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반에서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마이클 사후 러시아 방송국 프로듀서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러시아인들에게 미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마이클이 바로 그 미국의 왕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1988년 마이클의 서독 베를린 공연을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비상상태였다는 비밀문서도 공개됐다. 슈타지는 베를린에 온 마이클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일일이 행적을 문서로 남겼다. 장벽 인근에서 열릴 마이클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경찰과의 충돌도 불사하며 장벽으로 몰려가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마이클의 공연을 중계하여 이를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장벽으로 몰려든 청년들을 경찰들이 진압하다가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마이클 열풍은 대단했는데 언론들은 마치 태풍이 휩쓴 것 같다 하여 'Typhoon Michael'이라고 불렀다. 한때 '감기에 걸려도 뉴스에 나올 사람이 일본에 세 명 있는데 마이클 잭슨, 욘사마, 고이즈미 수상'이라는 농담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일본 언론들은 며칠간 많은 시간을 마이클에게 할애했고 특히 후지TV는 고정시청률 20% 이상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던 <퀴즈 헥사곤II>의 방송도 취소하고 2시간짜리 마이클 특집 방송을 편성하기도 했다. 정부 수석대변인과 장관들도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19년 후지TV는 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헤이세이 시대 메자마시 TV의 지난 25년간 6,000회 이상의 방송을 분석하여 출연횟수를 기준으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해외 연예인을 발표했는데 마이클이 1위였다.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유독 인기가 있다.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 바이두가 매주 집계하는 서양 인기스타 목록에서 마이클은 2019년에도 거의 매주 1위에 오르고 있다.[48] 한 중국인 사업가는 '80년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개방 시대를 처음 맞은 중국인들에겐 서양 문화를 상징하는 주제곡이었다'고 회상했다.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국영방송 CCTV는 바로 특집으로 소식을 전했고 바이두는 특별 추모 사이트까지 개설했으며 거의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1면을 마이클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는 데에 할애했다. 좀처럼 서양 연예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중국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2009년 6월 27일 중국 주요 신문들의 1면. 마이클이 중국에서 공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보도됐다. 소니 뮤직 남아공 마케팅 디렉터인 던컨 깁본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그동안 깊이 분열됐던 남아공 사회가 통합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말했다. 남아공 라디오는 인종적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으나 마이클의 음악이 처음으로 백인 팝 방송국과 흑인 R&B 방송국에서 동시에 울려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는 마이클의 남아공 콘서트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흑인과 백인, 젊은이와 노인 관객이 모두 한데 어우러지는, 이전에 본 적 없는 광경이 연출됐다. 남아공 방송국 DJ 루피 응카이사는 "마이클은 흑인 가족들이 개인주의와 인종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토론하도록 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문화적 영향력은 단순히 음악 이상의 것이다"라며 마이클을 추모했다.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다.

유럽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방문하거나 콘서트를 하면 뉴스 메인 1면을 도배를 했고 그나라 대통령이나 최고인사들이 마이클 잭슨을 만나곤 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등 남미와 멕시코, 캐나다 등 북미 및 호주에서도 마이클의 앨범들이 역대 베스트 셀링 순위에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49] 특히 남미 최대의 음악시장인 브라질에서 마이클은 외국 뮤지션 중에는 두번째[50]로 높은 판매고를 올렸는데, 마이클의 사망소식에 리우데자네이루 시장은 바로 도시에 동상을 세우며 마이클을 기리기도 했다.[51] 멕시코에서는 2009년 8월 마이클을 추모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약 14,000명이 집결하여 마이클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영상)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 북에도 등재됐다. 이시기 멕시코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의 마이클 헌정 플래시몹 열풍이 불었다.

또 <Thriller> 앨범이 나왔을 당시 이스라엘에 있었다는 S-Curve 레코드사의 창립자 스티브 그린버그에 의하면 마이클은 중동동남아에서도 미국과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사 중 하나인 <Arab News>는 2019년 마이클 사망 10주기를 기념한 기사에서 "잭슨은 중동에도 거대한 팬덤을 가지고 있다. 80년대 걸프 지역에서 처음 라디오가 잡혔을 때 헤비 로테이션으로 들을 수 있었던 최초의 슈퍼스타였다... 아마 잭슨은 본인의 음악이 중동에서 남녀노소 모든 세대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쳤는지, 얼마나 많은 팬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 또 그가 시련을 겪을 때 팬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그를 믿고 견뎌왔는지 몰랐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마이클 사후 필리핀에서는 1,500명의 죄수들이 마이클을 기리고자 감옥에서 마이클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춰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영상)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나 많은 국가 지도자를 만난 아티스트는 마이클 잭슨이 유일하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 “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최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52], 200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53]로 선정했다. 2005년 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100인'에 포함됐고 2011년에는 영국의 음악매체 NME가 독자 1,0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또한 2015년 빌보드는 마이클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문화원이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에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또 같은해 미국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스미소니언 교육재단에서 전문가들이 분석하여 발표한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인'에도 이름을 올렸고 2016년에는 <Consequence-Of-Sound> 매거진 스태프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Top 100' 1위에 선정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선정됐다. 또한 2019년 빌보드에서 선정한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에서 7위, 이후 '빌보드 독자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에서 450만 표 이상을 받아 1위에 자리했다.

인터넷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다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각자의 시대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스탠다드 팝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이 잘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우열을 나누는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 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를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 잭슨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잭슨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4.1. MJ에 대한 말말말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MJ에 대한 말말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재능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재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공연(투어)

마이클 잭슨이 월드투어를 진행한 곳을 표시한 지도.[54]

마이클 잭슨 Dangerous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 일명 토스터 기법으로 많은 가수들이 공연에서 채용하고 있다.

잭슨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15번의 투어[55]에 9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지만 이에 비해 정작 제대로 된 화질과 음질로 남아있는 동영상은 거의 없다. 투어는 아니지만 탤런트 쇼나 스크립트 공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만 합치면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1984년 잭슨스 (잭슨 파이브는 잭슨스로 이름을 바꿈.)의 일원으로 빅토리 투어를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당시가 Thriller 열풍으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마이클 잭슨이 투어를 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별로 공연하지도 않았는데 80년대 가장 좋은 수익을 거둔 투어 7위를 기록한다.

1987부터 1989년까지 1년4개월간 그의 첫 솔로 투어인 Bad 월드 투어가 열렸다. 123회 공연으로 440만 명의 관중들을 불러왔고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50만 4천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배드 투어는 일본을 시작으로 열렸는데 일본에서 당시 잭슨의 공연 표가 매진되는 건 당연하고 암표가 횡행하여 암표상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배드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2012년 발매된 영국 웸블리 공연 DVD가 있다. 1억 2천 5백만 달러[56]를 벌어들여 8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어 2위 솔로 가수로는 1위를 기록했다. 또, 당시 관객들이 잭슨의 공연을 보고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사태는 데인저러스 투어도 마찬가지. 뉴스 보도에 의하면 공연을 열 때마다 3천 명씩 실신해서 실려 갔다고 한다.

1992-1993년에는 Dangerous 월드 투어가 열렸다 마이클 잭슨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부 스케줄이 취소되어 총 69회의 공연으로 3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전 투어와는 달리 퍼포먼스가 더 과감해졌다.[57] 데인저러스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이 2005년 DVD로 발매됐다.

1996년 7월 16일 히스토리 투어 시작전에 브루나이에서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Royal Brunei 공연을 개최하여 6만 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내용적으로 보면 시작은 데인저러스 투어로 하는데 끝은 히스토리 투어로 끝나는 공연이다.

1996-1997년에는 HIStory 월드 투어가 열린다. 35개국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Dangerous 투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김영삼 정부는 근검절약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 바 있었고 이번에도 좌절되는 가 싶더니 겨우 겨우 공연이 성사됐다. 하지만 반미를 외치는 세력들과 개신교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고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다. 심지어는 공연 반대 대책 위원회에서 마이클 잭슨측과 계약을 하고 표를 판매하기로 한 태원예능에게 서점들과 은행 등에서 표를 판매할 경우 해당 서점과 은행의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협박했고 태원예능은 협박에 굴복, 표 판매를 철회하고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고 한다. 더욱이 공연 퍼포먼스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위원회에서 19금 이상의 성인용으로 처리되었고 덕분에 표 판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매진에는 실패했고 관객의 70% 가까이를 채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2회 동안의 총 관중 수는 9만 명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총 2회 공연 중 두 번째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다. 근데 7만 8천명도 당시 잠실 주경기장의 다른 행사의 입장 인원을 생각해 보면 꽤 많이 들어온 거다. 공연이 끝나고 태원예능의 사장님인 정광택씨가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라는 책을 쓴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되어 사지는 못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 정광택씨는 책 뒷면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허가한 공연의 표도 못 팔게 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1999년에는 'Michael Jackson & Friends'라는 자선공연이 우리나라 서울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SBS에서 서울 공연을 생중계 해줬는데 시청률이 최고 42.3%였다.

2001년에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이때 You Rock My World를 공연할 때 어셔와 크리스 터커가 난입하여 함께 공연했다. 또한 휘트니 휴스턴 역시 참가하여 공연했다.

말년에 있던 솔로 투어에서 립싱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히스토리 투어 당시 1-2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립싱크 처리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로 하여 체력 소모가 심하다. 거기다 마이클은 통증까지 앓고 있어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텨왔지만 1993년 재판 이후 급속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거기다 목 상태도 나빠져 히스토리 투어부터는 립싱크 없이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는 가장 최근 시기에 있던 히스토리 투어의 동영상만 많이 풀렸지 그 이전인 데인저러스나 배드 투어는 거의 없어 일부 유출된 소수의 영상과 잭슨 5 시절 공연 영상 밖에 없어 배드 투어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하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마이클 의 사망 3년 이후인 2012년 웸블리 투어 영상이 공개되면서 팬들의 숙원이 어느 정도 풀렸으나 아직도 풀어야 할 라이브 동영상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일부 극성팬들은 해킹을 해가며 투어 동영상을 야금야금 빼오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야 몇 개의 불법적인 공연 동영상이 유출돼 볼 거리가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음질 리마스터나 화질의 개선없이 단지 빼오기만 했을 뿐이라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이클은 월드 투어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투어는 나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다. 한 번 공연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500g이 빠져 나간다." "실컷 공연해 봤자 동영상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를 넘나들며 시차 적응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거기에다 2시간 동안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의 마이클 잭슨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을 거다.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어 참가한 Victory World Tour,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총 관중수를 합치면 1440만 명에 달한다. 거기에다가 로얄 브루나이 공연[58]의 6만 명을 더하면 1446만 명이 된다. 말이 1446만 명이지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수인데 피파 월드컵 중 최다 관중인 3,587,538명을 동원한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관중수에 4배를 곱해도 마이클 잭슨의 월드 투어 관객수보다 작다. 즉 평균관중이 68991명이었던 미국 월드컵 경기를 108번해도 1446만 명이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의 관중 동원 기록보다도 압도적인 수치이다.[59] 또한 마이클은 투어 때 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끌어모았는데[60][61] 아무런 계산없이 합쳐도 3번의 투어 평균수익이 1억 3천만 달러이고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면 3번의 투어동안 평균수익이 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한다. 투어횟수 자체가 적다는것과 21세기들어서 투어를 한적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 총관중 총합과 수익총합 순위에서 밀려났다.[62] 또 가장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미국 본토[63]를 데인저러스 투어때부터 제외하기 시작했는데 투어의 흥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는 마이클 잭슨의 관중 동원 능력이 매우 강력하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유럽이나 아시아, 남미를 대상으로 투어를 해도 항상 전석매진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매진을 기록하지 못한 대표적인 공연은 1997년 서울에서 열린 히스토리 투어인데 이때 18만 명중에 9만 명만 입장했는데도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관중동원기록 1위다.

6.1. 대표적인 공연영상

좋은 공연 동영상은 더 많이 추가바람.

6.1.1. 1987년-1989년 Bad 월드 투어

기네스 북 선정 <가장 거대하고 규모있는 투어>

16개월간 진행된 이 투어는 총 15개국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123번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는 1980년대 진행된 투어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두었으며 단독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었다.

1987년 6월 29일, 잭슨의 매니저 프랭크 디리오가 그의 첫 번째 단독 월드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펩시의 후원하에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600명이 넘는 기자, 카메라맨, 팬들은 잭슨의 일본 도착을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기다렸다. 잭슨의 투어 수행원 132명과 함께 22대의 트럭을 실어 나르는 전세 점보 제트기가 사용되었다. 무대 세트는 700개의 조명, 100개의 스피커, 40개의 레이저, 3개의 거울, 2개의 24x18피트 스크린을 사용했다. 공연자들은 70벌의 의상을 입었는데, 그 중 4벌은 광섬유 조명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14일간의 관객수는 45만 명으로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잭슨은 1988년 5월 23일 플라미니오 경기장에서 그의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은 35000명의 군중 속에 깔려 있는 수백 명의 팬들을 구조했다. 경찰은 6월 2일 비엔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30명의 여성이 실신했다고 보고했다. 6월 17일 잭슨은 코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미망인 오오나 오닐을 만나기 위해 베베이로 여행을 떠났다. 잭슨은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고 방문 후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콘서트 중 하나는 1988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티켓 수요가 150만 회를 넘어섰는데, 이는 72000명의 만석을 20번 채울 수 있는 규모였다. 결국 7번의 콘서트로 504000명의 관객을 수용하였으며 이는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이후 관계자들로부터 특별상을 수상했다. 잭슨은 총 3번의 월드 투어를 진행했는데[64] 그중 15번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했으며 1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로 웸블리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많은 티켓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을 포함한 투어 일정에 포함된 여러 나라의 관객과 팬들은 단지 마이클 잭슨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하였으며 수많은 인파와 기자, 파파라치들로 인해 마이클 잭슨은 정상적인 이동이 불가능했다. 9월 11일 리버풀에서 열린 마지막 유럽 콘서트는 아인트리 레이스 코스에서 열렸다. 약 1550명의 팬들이 125000명 이상의 관중들 사이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이기도 하다.

1988년 런던 웸블리 공연이 DVD로 발매된 상태이지만, 몇 곡을 제외하면 저작권 크리 때문에 유튜브에서 삭제되고 있는 중이다. 런던 공연 말고는 1987년 일본 요코하마 공연이 제일 고화질이고, 1988년 로마 공연도 50프로 풀린 상태이다. 분명 제일 많이 공연된 투어인데 제일 부족하다 심지어 The Way You Make Me Feel과 Man in the Mirror 이 2곡은 런던 공연을 제외하면 고화질 버전이 전무하고, 유튜브에 없는 상태이다.

Wanna Be Startin' Somethin'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Off The Wall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Another Part of Me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Human Nature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잭슨 5 메들리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Rock With You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Smooth Criminal - 이탈리아 로마 1988년

Dirty Diana - 이탈리아 로마 1988년

Thriller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Beat It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Billie Jean - 영국 런던 웸블리 1988년

Bad - 일본 요코하마 1987년

6.1.2. 1992년-1993년 Dangerous 월드 투어

1989년 1월, 성공적으로 Bad 월드 투어를 마친 잭슨은 더이상의 투어를 하지 않고 음악 작업을 하는 데 전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후 1991년 11월 그의 8번째 스튜디오 앨범 Dangerous가 발매된 후, 1992년 2월 3일 뉴욕시 라디오 시티 뮤직 홀에서 Dangerous World Tour를 발표하기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다. 200명이 참석한 이 행사는 잭슨의 스폰서 펩시가 기획했다. 잭슨은 또 한 번 투어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어린이들과 환경을 돕기 위해 새롭게 설립된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크리스마스까지 1억 달러 모금을 목표로 삼았다. 69번의 콘서트에서 4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잭슨의 첫 번째 아동성추행 사건과 진통제 중독으로 인해 투어를 중단하게 된다. Dangerous World Tour부터 잭슨은 이전에 서구 문화의 영향권에 포함되지 않았던 국가나 지역들도 투어에 포함시키는데, 앞서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 마이클 잭슨은 그들에게 있어 최초의 서방국가 연예인이었다. 그에 따른 충격과 인기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92년 6월 당시 세계 최대 운영기였던 러시아 안토노프 AN-124 화물기가 개막 유럽식 다리를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런던으로 설정된 장비와 무대를 운송하기 위해 예약되었다. 그러나 민간 항공기 인증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잭슨은 대신 연방 익스프레스 보잉 747을 사용하게 되었다. 도착 즉시, 그 장비는 65대의 화물차로 유럽을 가로질러 운반되었다. 화물은 조명 1,000개, 전기 케이블 10마일, 비디오 화면 9개, 스피커 168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약 2톤의 의류가 운반되었다. 이 의상은 마이클 부시와 안젤레노스 데니스 톰킨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는데, 그는 잭슨과 함께 그가 원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그의 아이디어를 살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두 벌의 의상은 높이가 9피트, 너비가 7피트, 무게가 각각 40파운드였고, 전산화레이저가 제어하는 광섬유등이 달려 있었다. 한 재킷에는 36개의 스트로보 조명을 켜기 위해 3,000볼트를 발생시키는 배터리 벨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폭발적인 효과를 감추기 위해 플랩을 숨겼다. 유럽에서 온 천 야드의 천 야드의 천 야드의 옷감은 18캐럿 금을 포함한 잭슨을 위한 검은색과 금색 옷을 포함하여 의상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의상에만 200만 달러가 들었다. 이 투어는 57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여 역사상 세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65]이고 이는 솔로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며 90년대 가장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1988년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처럼 1992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연이 DVD 고화질로 발매되었으나, 유튜브로 보는 것은 힘들다. 참고로 이 공연이 수 천 명의 사람들은 기절시킨 그 전설의 공연이다. 앞줄에서 기절한 팬들이 응급구조대원들의 들것으로 실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66] 사실 마이클 잭슨의 콘서트에서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하고 기절하였지만 맑은 화질로 현재까지 볼 수 있는 공연이 극소수이기에 이 공연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Jam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Human Nature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Smooth Criminal - 멕시코 멕시코시티 1993년

잭슨 5 메들리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Thriller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Billie Jean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Beat It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Will You Be There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The Way You Make Me Feel - 일본 도쿄 1992년

Bad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Dangerous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Black or White - 영국 런던 웸블리 1992년

Heal the World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1993년

Man in the Mirror - 노르웨이 오슬로 1992년

6.1.3. 1996년-1997년 HIStory 월드 투어

이 투어는 1996년 5월 29일에 발표되었고 잭슨의 Dangerous 월드 투어 이후 진행된,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월드 투어이다. 총 5개 대륙, 82번의 공연에서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첫 콘서트는 프라하의 레트나 파크에서 공연되었으며, 12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 중 하나였다. 1996년 10월 7일, 그는 아랍에서 처음으로 공연을 했다. 그는 튀니지에서 90000명의 팬들 앞에서 콘서트를 진행했으며 호주 시드니에서 투어를 하는 동안 데비 로우와 비공개적으로 결혼했다. 1997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 잭슨은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로하 경기장에서 35000명의 관중을 동원하여 유일한 두 번의 미국 콘서트를 진행하였으며 경기장을 매진시킨 역사상 최초의 예술가가 되었다. 한편, 이 콘서트를 브루노 마스가 보기도 했다. 약 55000명의 평균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이는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자 Dangerous 월드 투어에 이어 90년대 두 번째로 많은 평균 관객을 동원한 투어이다. 립싱크 논란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90년대 후반, 마이클 잭슨의 목상태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로 투어를 진행해야 했던 잭슨은 퍼포먼스의 비중을 과감히 늘리고 세트리스트의 거의 모든 곡들을 립싱크 처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무리 퍼포먼스를 증가시킨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2차전은 1997년 5월 31일 독일 브레멘의 베서스타디온에서 시작되었다. 세트 리스트 변경사항에는 Blood On The Dance Floor가 추가되었고, 이후 Off The Wall 메들리와 The Way You Make Me Feel의 제거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Blood On The Dance Floor는 1997년 8월 19일 오슬로 콘서트가 끝난 후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잭슨은 39번째 생일을 맞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파켄 스타디움에서 60000명의 팬들과 함께 공연을 했다. 그는 You Are Not Alone 공연 후 무대에서 깜짝 생일 케이크, 행진 밴드,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벨기에 오스텐드의 히포드롬 웰링턴에서의 콘서트는 원래 1997년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웨일스 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9월 3일로 연기되었다. 마이클은 1997년 8월 24일과 26일 핀란드 헬싱키의 올림픽 경기장에서 공연을 했다.

이전 투어들과는 달리 정발된 DVD는 없고, 저화질 VHS 서울 내한 콘서트가 있기는 한다. 하지만 다른 투어들과는 달리 꽤 많은 고화질 영상들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상태라서 여러 공연들을 유튜브에서 감상 가능하다. 특히 독일 뮌헨HD로 촬영되어 풀린 콘서트가 있으나, 잭슨의 목소리 상태가 최악이라서 별로 추천되지 않는다. [67]

Scream/They Don't Care About Us/In the Closet[68] - 브루나이 1996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 덴마크 코펜하겐 1997년

Stranger in Moscow - 덴마크 코펜하겐 1997년

Smooth Criminal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You Are Not Alone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The Way You Make Me Feel - 말레이시아 쿠알라 룸푸르 1996년

잭슨 5 메들리 - 브루나이 1996년

Rock With You/Off The Wall/Don't Stop 'Til You Get Enough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Billie Jean[69] - 브루나이 1996년

Thriller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Beat It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Come Together/D.S.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Blood on the Dance Floor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Dangerous - 핀란드 헬싱키 1997년

Black or White - 브루나이 1996년

Earth Song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Heal the World - 뉴질랜드 오클랜드 1996년

History - 스웨덴 예테보리 1997년

7. 사생활 및 일화

7.1. 아동성추행 논란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아동성추행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2. 언론과 루머

Just because you read it in a magazine or see it on the TV screen don't make it factual"'''

(당신이 잡지나 TV화면에서 봤다고 팩트인 것은 아니에요.)

- HIStory 앨범에 수록된 <Tabloid Junkie> 가사 中

언론과의 관계는 아주, 아주 좋지 않다.

지금까지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는 여전하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마이클 잭슨 같은 빅스타는 서구 언론에서 보도하듯 마이클 잭슨 이후에는 없었으며, 특히 마이클 잭슨은 이전에 서구 문화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던 지역에 유명세를 펼친 첫 번째 대중문화인이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는 타 스타들과 그 강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마이클이 생전에 살아있을 때는 영국의 'The Sun'이 마이클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로 제일 악명 높았으나[70] 사망 이후에는 잠잠해 졌고 이제는 미국의 '레이더 온라인'이 그 바통을 넘겨 받았다. 루머는 주로 폭스뉴스나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나온다. 온라인 인터넷 기사에 '충격, 마이클 잭슨 OO하다.' 이딴 식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전부가 조작됐거나 문제가 있는 주장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안 된다. 타블로이드는 '찌라시'를 뜻하는 데 서양에서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되는 신문들이 가십거리와 루머를 담는 황색 언론들이라 타블로이드라고 하면 찌라시라는 뜻을 지닌다. 요즘은 정론지도 타블로이드 판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종이신문 사업이 뜸해져 인터넷 매체로 많이들 옮겨가 단순히 도구로서의 타블로이드 구분은 희석해 졌지만 전통 때문인 지 해외 가십 매체들은 다 타블로이드라고 부른다. 마이클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 기사는 100% 출처가 폭스 아니면 타블로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도 그렇고 .. 간혹 LA타임즈 같은 데서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와 관련된 글이 올라오는 데 자세히 보면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다더라 라는 식으로 인용 보도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보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로 '돈'이다. 타블로이드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접촉한 사람들에게 돈을 줄 테니 인터뷰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타블로이드 언론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마이클에 대한 이런 저런 가십 이야기를 떠든다. 물론 그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으로 대부분은 교차검증도 받지 않았다.진실 여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해 그들은 내용이 아닌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중요하다며 무분별한 언론의 보도를 비판했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는 2013년 7월 영국의 선데이 피플이라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자신들이 단독으로 입수한 FBI 파일에는 마이클 잭슨이 24명의 어린이들 성추행하고 3500억 원의 돈으로 어린이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기사다. 이미 FBI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혐의 파일을 전부 공개한 적이 있다. 근데 4년 뒤에 선데이 피플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는 지 새로운 내용을 찾은 것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내용을 완전히 왜곡시켜버렸다. FBI 파일 원본을 보면 FBI는 수사 기관의 협조 요청을 받고 필리핀까지 오고가며 마이클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 것도 찾지 못 했으며 합의는 1993년 챈들러 사건 한 건 뿐이라고 나와있다. 아래는 CNN에서 선데이 피플을 까버린 기사

“가격이 올라가니까, 그는 스토리를 점점 자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필립 르마르크에 대해 메저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잭슨 씨의 손이 (맥컬리)컬킨의 바지 속에 있었다고 하면 돈이 더 올라간다고 브로커가 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메저로우는 반대심문 중 이렇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르마르크가 말했다.

“그들을 도왔던 이유는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이었죠.” 바레시는 말했다. “난 누군가를 정의를 위해 끌고 가는 정의의 사도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마이클이 당시에 진짜 죄가 있었던 없었던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죠.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어요, 추가하자면 그들 돈도요.”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의 ‘FBI 파일’에 대한 타블로이드 보도의 신빙성

거짓 FBI 파일과 관련된 내용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선데이 피플의 저 루머로 전 세계적으로 마이클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불타오를 시점 영국의 '미러'라는 타블로이드는 FBI 파일 속에서는 '1984년 마이클이 멕시코 소년 2명을 성추행 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수사를 진행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에게 백악관에서 상을 받기 위해 수사가 집행정지 됐다'는 부분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도 명백하게 보고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으로 1993년 성추행 혐의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의 타블로이드들은 마이클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음과 동시에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계속해서 보도했는 데 그때 나온 루머가 저 내용이다. FBI 파일 원문을 보면 이렇게 써져 있는데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저 내용이 사실이냐고 FBI에게 문의가 접수됐고 FBI가 조사를 벌였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근데, '미러'는 뻔히 자기들의 기사가 거짓임을 알고도 철판깔고 저런 식으로 보도했으니 저널리즘의 가치를 스스로 똥칠하고 있다고 비판당해도 싸다.

2016년 6월에는 레이더 온라인이라는 타블로이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마이클 잭슨의 저택인 네버랜드의 경찰 수색 당시 대량의 아동 포르노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거짓이고, 레이더 온라인은 경찰 보고서를 조작했다. 경찰은 '마이클 잭슨의 저택에는 아동 포르노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 없으며, 불법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썼다. 또한 아동 포르노는 소지 자체가 불법으로 수사기관에 적발시 기소된다. 근데 마이클 잭슨은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기소된 적이 없다. 자세한 전말을 알고 싶으면 마이클 잭슨 아동 음란물 보도의 왜곡과 전말을 참조

2014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前 가정부 3명이 폭로를 했다며 '충격, 마이클 잭슨 집안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 ...' 라는 뉴스가 보도됐었는 데 출처는 뉴욕포스트라는 역시 미국의 타블로이드 언론이였다. 그러나 이 자칭 가정부들은 익명속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어 버렸다. 그래서 어느 가정부가 그런 말을 했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또한 이것은 명백하게 문제점이 있는 증언으로 마이클은 워낙 호들갑을 떨 정도로 깔끔을 챙긴 사람이며 자녀들을 위해 결벽증과 같은 태도를 보였는 데 자신의 저택을 더럽히고 살았다고? 말이 안 된다. 교차검증적으로도 그렇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실 마이클 잭슨은 워낙 거대한 저택에서 살았기에 그의 집에서 일한 사람들은 꽤 많다. 당연히 그 중 몇명의 직원들은 문제가 있었고 일부 가정부는 마음대로 물건을 훔치다 해고 당하기까지 했고 언론에게 돈을 받고 이야기 거리를 판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맥 마 누스' 친척들의 집에서도 물건을 훔치다 법적 분쟁을 일으켰었고 1993년 첫번 째 사건이 터졌을 때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과 함께 돈을 받고 마이클을 음해했었다. 또한 마이클과 친했던 사람들이 사이가 비틀어 지자 나중에는 오히려 언론에 마이클을 비난하고 그랬다. 대표적으로 밥 존스라는 마이클의 홍보 담당자는 언론에 돈을 받고 그를 비난했었다. 그런데 막상 2005년 재판 때는 검찰을 비판하며 마이클을 옹호했다. 검찰은 물론 충격, 마이클에게 안 좋은 말을 할 줄 알고 증인으로 불렀던 건데 ... 데비 로우도 마찬가지이고. 한 가지 더 위 CNN 기사를 쓴 사람은 '알렌 듀크' 기자였는데 그는 CNN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타블로이드 보도를 가장 중립적으로 전체적인 맥락으로 다뤄 마이클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CNN을 모종의 이유로 나가더니 레이더 온라인에 입사했는 데 오히려 이제는 자신이 마이클을 비하하는 전형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콘래드 머레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황당한 것은 머레이에 대해 설명할 때 언론들은 단순히 그를 주치의라고만 묘사하지 마이클 잭슨을 과실치사로 사망하게 하여 감옥에 수감됐다는 말은 안 해준다. 또한 주치의니 마이클의 모든 것을 알 거라는 식의 기사 내용도 문제다. 머레이는 마이클 잭슨 사망 몇 개월 전에 고용된 의사일 뿐 마이클의 나머지 49년 삶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머레이 뿐이 아니라 마이클과 함께 일했던 의사들은 수십 명은 될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당시 과실치사 재판을 통해 판사는 머레이가 반성하는 기미가 없으며 고용자 마이클 잭슨의 신뢰를 크게 배신했다고 판결했다. 또한 머레이의 과거가 가관인데 2009년 5월 기준으로 6명의 여자들로부터 7명의 자녀들을 두는 막장 불륜행각을 보였다, 2002년 캘리포니아에서 파산 신청을 했었고 2008년까지 텍사스와 네바다에서 의료장비와 시술에 쓰인 대여장비 대금 미지급에 대하여 법원으로부터 60만 달러 이상의 과징금이 누적됐으며 자녀들에게 갈 보육비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과 캘리포니아 여성 네니타 말리비란에게 1만 3천 달러의 부채가 있다는 이유로 캘리포니아 의료 자격을 잃기 될 위기에 처해 있기도 했다. 물론 마이클 잭슨 재판 때 징역형은 물론이고 의사면허도 박탈됐고 ... 머레이는 표면적으로는 마이클을 음해하는 타블로이드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7명의 자녀들을 돌봐야 하고 그의 소비벽을 보면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온갖 문제를 일으키지만 마이클 쪽에서는 대처할 수가 없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강한 나라로 사망한 사람의 인격을 지켜줄 방어를 할 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리 막나가는 것. 그리고 언론의 보도 내용은 전후 맥락이나 전체적인 상황을 보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대다수이기에

타블로이드뿐만이 아니라, 기존 주류 미디어와의 사이도 좋지 못 한데,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타임지, 롤링 스톤 등이 추모 특집 판을 찍어냈는데 내용을 보면 잭슨을 까 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왁코 잭코' 라고 특히 타임지는 2면을 크게 할애해서 한 쪽에다 마이클의 굴욕짤을 크게 붙여놨다. 그래서 잭슨의 팬들에게 사진만 좋은 거 나열해놓고 팔아먹으려는 심보냐고 까였다. 하지만 주류 미디어와 타블로이드의 차이점은 적어도 주류 미디어는 타블로이드처럼 잭슨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원천 소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마이클 잭슨 본인 역시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들을 매우 싫어했고 생전에 상처도 많이 받았으며[71] 타블로이드를 모아서 산처럼 쌓아놓고 불태워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언론과 파파라치, 루머들을 대놓고 저격하는 곡들을 발표하기도 하였고[72] 자신이 여자와 다니면 섹스광이라고 보도하고 남자와 다니면 동성애자로 보도하는 통에 자신은 늘 혼자 다닌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수염 없이 말끔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여성호르몬이 과다분비되는거 아니냐는 기사에 대응해서 턱수염을 길렀더니 이번엔 턱에 모발을 이식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고 황당해 했다고.

하지만 파파라치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개별 파파라치들에게는 일일이 미스터라고 불러줄만큼 친절했으며 그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화를 낸 순간은 아동성추행 재판 이후 기자가 마이클의 어머니에게 무례한 질문을 했을 때라고 한다. 이때 마이클은 "내가 마이클 잭슨일 뿐입니다. 나에게 말하세요." "당신의 삶을 소중히 하세요."라고 말하며 화냈다고 한다. 언론사에서는 마이클이 못생기고 괴물같이 나올수록 비싼 값을 불렀고 이 때문에 일부 파파라치들은 마이클이 지나갈 때 온갖 어그로를 다 끌어서 화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오래 따라다닌 파파라치들은 최대한 정중하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73]

당시 추모특집 판 커버 사진

7.3. 어린 시절

[74]

마이클 잭슨이 직접 그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 이 그림을 봐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엿볼 수 있다. <HIStory> 앨범에 실림.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며 어린 나이에 데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잭슨 가는 형제가 9명이나 되었던 가난한 가정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자식들을 밴드로 구성하여 공연을 다니게 했는데, 위에도 언급됐지만 잭슨 파이브시절 확인된 공연만 500회이고 스트립 댄서들이 공연하는 성인 클럽에서 아이들을 노래하게 하는 등[75] 현재로서는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자식들을 가혹하게 굴렸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에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했다고 한다.[76]

또 나머지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맞았으며 싸대기는 기본에 걸핏하면 폭언과 채찍에 맞기도 했다. 또한 성숙되지 않은 초등학생 나이부터 여자들의 누드와 난잡한 성생활에 노출돼 섹스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조지프 잭슨은 본래 부인 캐서린을 냅두고 걸핏하면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해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럼에도 가족 관계를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 심한 고통을 입었다고 한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는 몇 년 다녔으나 잦은 공연 활동과 팬들의 교실 난입 등으로 학교생활이 불가능했고 개인 교사에게 따로 지도를 받아서 정규 교육 코스를 마쳤다.

그가 아동 성범죄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자기 침대에서 재우는 것을 개의치 않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 놀러온 애들에게 자기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거기에 그 어떤 성적인 의미나 행동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2003년 방영된 《마이클 잭슨과의 삶(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동에 대한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묘사가 되어 곤혹을 치렀다.[77]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승화했으며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Childhood' 와 'Heal the World' 등의 노래와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엿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스스로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생전에 장난감을 사 모으거나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놓고 즐기는 등 키덜트적인 면모도 보였다.[78] 잭슨이 2005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79] 절친인 코미디 배우 크리스 터커가 코미디 쇼에 나와 80% 이상을 잭슨 이야기만 한 적이 있었는데[80]러시 아워 2》에 나와서 잭슨 춤을 흉내 내고 잭슨 집에 불려가서 하루 종일 산더미 같이 쌓아둔 피터 팬 동화책만 읽었다고 하며 그런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을 나쁜 짓을 했을 리 없을 거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 잭슨 형제들이 음악 연습을 할 때 잭슨 형제들의 아버지 조 잭슨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벨트채찍처럼 휘두르고 구두 신은 발로 차는 등 온갖 학대를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밤에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게 밤중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어린 마이클 잭슨의 방에 들어왔는데 그 공포에 대한 기억이 큰 충격이 되어 10대 시절 마이클 잭슨이 악몽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 잭슨은 자신의 기타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애들을 두들겨 패는 등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하거나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아버지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으며 유언장에서도 아버지 언급을 전혀 안했고 유산 분배에서도 어머니 캐서린과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만 유산을 상속, 아버지는 제외시켰다.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에서도 어머니만 언급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아버지가 자신처럼 스타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싫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 꺼렸지만 그가 를 성인이 되어서 성형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코가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팬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잭슨 남매들의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은 다 이 사람 손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무시 못 한다. 마이클 잭슨도 인정했듯이 아버지 조 잭슨은 그 자신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을 뿐 부동산 투자니 뭐니 어린이 스타들이 돈 때문에 겪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도 않고 음악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 잭슨은 자식들이 번 돈을 착복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로 인해 잭슨 남매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은 성장하고 나서도 애정 결핍에 자기애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9남매 전부 성인이 된 후 전부 폭력적이고 고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마이클 잭슨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옥스포드 대학 연설 때도 아버지에게 애정을 느꼈던 작은 일화를 언급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긴 부친일지라도 자신의 일생을 부모에 대한 증오를 쏟는 데 낭비하지 말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역설하며 대인배적 풍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도 몇몇 찌질이들이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동정 마케팅이나 한다.' 며 비난을 하지만 사실 잭슨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 시절 얘기를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한 건 두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서전에서 몇 번 언급한 것이나 'Childhood' 같은 자전적인 곡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팬들이 그 부분에 과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인데 정작 본인은 남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물어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2010년 조 잭슨은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업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다고 하는데 결국 아내가 아들의 죽음을 홍보로 이용하는 남편의 행동에 이혼을 요구하였고 결국 부부의 60년 부부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고 알려졌으나 이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 잭슨은 2018년 6월 27일, 아들의 기일 이틀 뒤 별세했다.

7.4. 여자와의 관계

다들 알다시피 잭슨은 여자 같이 곱상한 외모와 여자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또 한 때 잭슨이 80년대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출입했던 사실이 있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나 사람들이 잭슨의 성에 관심이 많았냐면, 우리나라 국내 언론 80년대 보도에도 잭슨이 동정인가와 관련된 보도가 있다. 93년 오프라 윈프리는 잭슨에게 아직도 동정이냐고 물어본다. (Are you a virgin?) 잭슨은 당황하며 (How could you ask me that question?) 자기는 신사(a gentleman)라고 대답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에서 잭슨의 전 매니저 프랭크 딜레오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잭슨은 활발하게 여성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보가 흘러나가면 팬 층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쉬쉬 했다고 한다. 잭슨은 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을 하는데 리사 마리의 친구들은 리사는 남녀 간의 활동에서 성적 만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리사가 잭슨에게 푹 빠진 걸 보면 잭슨이 침대에서는 고수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이 맞다면 역설적으로는 잭슨이 소아 성애자라는 세간의 의혹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주장의 진위여부들은 잭슨 본인만이 알겠지만...

20대 중반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혼전관계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해당 인터뷰 기사에서는 마이클이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적어놨다. 스릴러 뮤비에서 좀비분장을 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파문된 걸로 알려져 있지만 마이클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라서 서른이 넘을 때까지 크리스마스 파티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81]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살았다. 실제로 이 무렵 마이클이 결혼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다이애나 로스와도 동침한 적이 없다는 통화내용이 후에 유출된다.

마이클 잭슨의 첫 여자친구는 흔히 '테이텀 오닐'[82]이 거론된다.

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였는지 돌아다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마이클은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닐이 나를 침대에서 성적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워서 이를 거절했다" 1년 뒤 오닐은 이 주장을 반박하고 "아니다, 잭슨이 나를 유혹했다" 고 주장하는데 ...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 이 또한 본인들만이 잘 알겠지만, 국내에 알려진 테이텀 오닐의 인터뷰 중에는 마이클 잭슨의 키스가 매우 서툴렀다는 내용이 있다. # 오닐은 친구 세서 잭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마이클은 섹스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 그런 애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랑 같이 있을 때 고작 두 마디 정도 밖에 안 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타는 애야. 누군가 이 부분에 대해 걔랑 얘기해봐야 해" 이렇게 까지 말한 오닐을 생각하면 마이클의 말이 맞다고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잭슨이 오닐을 유혹했다는 말은 오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잭슨의 첫사랑은 15살 연상의 다이애나 로스라고 마이클 본인이 여러 곳에서 밝히고 다녔다. 같은 모타운 소속이라서 마이클이 10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두 사람은 78년에 뮤지컬 영화 The Wiz를 찍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각종 시상식이나 행사에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마이클 잭슨의 모친인 캐서린에 의하면 마이클은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 정도는 돼야 진짜 미인이라며 자신의 누나들에게 미인이 아니라고 어그로를 끌었으며, 마이클 본인 역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에게 항상 반해있었다고 말한다. 80년대부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결혼하겠다는 발언도 종종하게 되는데 '에보니 매거진' 인터뷰에서는 다이애나 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인터뷰어가 누나로서 말인가? 라고 되묻자 마이클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 그녀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단언한다. 84년까지도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 결혼할거라는 의사를 밝히지만 85년에 다이애나가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상대는 마이클은 누군지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남자였다고 하며, 다이애나의 결혼식 날 마이클은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다이애나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83] 이후 90년대 초반에 마이클이 친구와 통화하던 녹음본이 유출되는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동침한 적은 없었고, 자신은 다이애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며, 다이애나를 잊는데 엄청나게 긴 시간(a hell of a long time)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다이애나가 결혼한 뒤에도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위한 헌정곡인 Remember The Time을 만들었고 유언장에 자신의 아이들의 2차 후견인[84]으로 다이애나를 지목해 놓는다. 마이클의 첫 여친으로 알려져 있는 테이텀 오닐조차 마이클 사후 출연한 방송에서 마이클이 게이였냐는 질문에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다고 밝혔다.(He was in love with Diana Ross and that was real)

배우자에 대해서는 아래 가족 관계 항목으로.

7.5. 가족 관계

결혼을 총 두 번 했다.

첫 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 리사 마리와 결혼 이전에 세기의 스캔들이 있었기에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유명인의 딸을 이용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까지도 빈민가 출신에서 용 된 흑인 스타라는 이미지가 있던 마이클 잭슨이 남부 출신 백인(정확히는 혼혈)인 리사 마리와 결혼을 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결국 리사 마리와는 9개월 가량의 짧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이혼했다.

이혼 이유는 연애할 때는 몰랐지만 성격 차이가 생각보다 심했고 자녀 문제에 있어 리사는 마이클의 아기를 낳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을 해서 미뤘지만 마이클은 재촉하는 상황으로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다. 마이클이 "너가 아이를 안 낳으니까 데비가 아이를 낳아준다고 했어"라고 말할 때는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둘은 바로 아이를 낳자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전남편과 전아이에게 상처를 준 기억때문에 리사는 둘의 결혼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자녀계획을 미루자고 제안하고 마이클은 밤마다 아이 인형을 들고 다니며 울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짜 사이'는 결코 아니였고 리사와 마이클은 섹스도 하는 정상적인 부부였다고 한다. 이혼 후에도 잭슨에게 투어 공연을 초청받는 등 같이 식사도 하고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리사는 마이클이 "엘비스처럼 죽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는데 실제로 마이클은 엘비스와 비슷하게 죽어버렸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의 친구이자 피부 치료를 돕던 간호사 데비 로우 이며 그녀에게서 연년생 남매 프린스와 패리스를 얻었다. 그러나 로우와도 99년에 이혼했다. 다만 잭슨은 별로 로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며 둘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주변에서 많이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우와의 이혼 후에도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가 성추행 누명으로 소송 중일 때 검사 측을 비판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1997년 2월 13일생 프린스 마이클 잭슨, 1998년 4월 3일생 패리스-마이클 캐서린[85], 2002년 2월 21일생 블랭킷(아명, 현재 이름은 비기 잭슨)[86]이 있다. 생전에 자기 아버지가 9명이나 되는 자녀를 거느렸으니[87] 자기는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참고로 프린스와 패리스는 아이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친자식이 아니다라는 설이 돌았고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실제로 로와 성관계를 한 게 맞냐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사망 이후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두 아이의 어머니 로가 프린스와 패리스는 마이클의 아이라고 인정했고 블랭킷은 루머가 많지만 지인들이 친부가 맞다 고 인정했다. 그런데 최근, 프린스 잭슨이 자신의 SNS에 "계약으로 맺어진 피는 자궁으로 맺은 물보다 진하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해 자녀들이 친자식인지는 다시 미스테리로 빠졌다. 그러나 입양에 대해 열린 생각이었던 마이클이 친생자가 아닌 아이들을 양자로 들이지 않고 친생자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한편 첫번째 아들 프린스 잭슨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 등에서 마이클과 같이 유전병인 백반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이클의 젊은 시절처럼 겨드랑이 부분은 이미 변색이 많이 진행되었고 몸 전체적으로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마이클도 부계에서 이 유전병을 받은 것. 마이클의 형제들도 마이클만큼 심하진 않지만 백반증이 있다. 또한 막내 블랭킷은 클수록 마이클의 외모를 빼닮아 마이클의 아이들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기도 한다.

딸인 패리스가 장성했는데 엄청난 미인이 되었다. 잭슨 일족 최고의 미인이다. 키도 178cm로 매우 크다.

실제로 흑인과 백인의 결혼에서 흑인 우성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예외도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로직을 꼽을 수 있는데, 흑백혼혈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순수 백인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프리즌 브레이크》에 출연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의 경우는 쿼터인데도 거의 완전한 백인 얼굴이다. 게다가 WWE 프로레슬러헐리웃 영화배우 양쪽 모두 성공을 거둔 드웨인 존슨 역시 아버지가 흑인에 어머니가 사모아 원주민임에도 되려 피부색은 미디엄 브라운이고 이목구비는 거의 백인인 외모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연속적으로 아이 셋이 백인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 성장한 패리스 잭슨의 공식 사진을 참고하면 피부 빛이 미디엄 브라운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88] 혈통 상으로 마이클 잭슨도 쿼터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피부 빛이 상대적으로 밝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미국 흑인들은 이민 온지 얼마 안 된 1,2세가 아니고는 백인 혈통이 안 섞인 경우가 거의 없을 만큼 혼혈이 많이 되어 있고, 인종적으로도 백인과 가장 가까운 쪽이 흑인이다. 마이클의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보더라도 백인 혼혈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피부색이 굉장히 밝은 편이다. 마이클 잭슨의 자식들과 라토야 잭슨의 사진 애당초 마이클 잭슨이 순수 흑인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아이들이 모두 밝은 피부색으로 태어나는게 가능했다.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도 아랍인과 결혼해서 백인의 외모에 가까운 아들을 낳았다.

여담으로 패리스 잭슨이 그녀의 고모인 라토야 잭슨의 소싯적 모습과 닮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97년에 첫 아이인 프린스가 태어났을 때 병원 근처에 아기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이 가득했고 헬리콥터까지 동원되는 등 큰 이슈를 끌었는데 그 때문에 아이들의 납치나 범죄를 우려하여 생전에 항상 애들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장례식에서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언론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그의 생전에는 자녀 모두 홈스쿨링을 했으나 사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패리스 잭슨은 음악에 관심이 있는지 가끔씩 노래 부르는 영상을 올리고 있다. 아빠를 닮아 음색이 예쁘다. 자작송 듀엣

패리스 힐튼은 잭슨 사후에 그의 딸 패리스의 이름은 마이클 잭슨이 자기 이름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자기 엄마에게 동의를 얻고 패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냥 헛소리 중 헛소리다. 마이클 잭슨과 패리스의 어머니는 유년 시절에 같은 학교를 잠시 다녔고[89], 힐튼가 사람들은 사적으로도 잭슨의 집에 초대받아서 노는 등 절친한 사이긴 하지만 딸 패리스의 이름은 딸이 태어난 곳이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때 패리스 힐튼은 괜히 잭슨과의 친분이나 부각시키려고 헛소리를 한다며 미국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한 프린스 이름의 유래는 King of Pop 의 아들이기 때문에 프린스라고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저메인 잭슨의 인터뷰에 의하면 실제로는 캐서린 여사의 아버지, 즉 마이클의 외할아버지 이름이 프린스였고 거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물론 마이클 본인이 King of Pop 이라는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던 만큼 중의적인 의미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잭슨 남매들과는 언론에 보여 지는 것처럼 그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큰 형인 잭키[90]와 한 살 터울인 말론과 막내 동생인 자넷 잭슨[91]과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남매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명성과 비교도 안 되게 크게 성공한 형제인 마이클을 질투했다고 하며 형제자매들이 벌이는 사업에 음반 작업에 돈을 대주는 등 80년대 말까지 마이클 잭슨이 형제들을 거의 업어 키웠다. 마이클 잭슨이 90년대 초부터 거의 형제들과 연을 끊고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저메인, 랜디, 라토야가 잭슨 가족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짓을 워낙 많이 했고[92][93] 특히 랜디에게는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마이클 잭슨이 두 번째 성추행 스캔들로 고생하고 있을 때 마이클 잭슨을 협박하여 금전을 뜯어내고 판권을 매각하라고 강요하기도 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마이클 잭슨이 끔찍히 싫어하는 타블로이드지에 마이클에 대한 루머를 뿌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마이클 잭슨이 법원을 통해 친형제를 대상으로 접근금지 신청까지 받아냈다. 그러자 랜디는 마이클 잭슨 자택의 대문을 자동차로 들이받아서 쳐들어왔는데 하도 심각한 막장짓을 해서 랜디를 개인 경호원으로 위협해서 쫓아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잭슨 사후 그의 형제들이 그의 유산을 놓고 육탄전을 벌이거나 잭슨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벌이며 VIP 대접을 받으며 다니는 것에 공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잭슨의 생부인 조셉 잭슨이다.

잭슨 남매의 생년월일이다.

  • 장녀 래비 잭슨 - 1950년 5월 29일 생
  • 장남 잭키 잭슨 - 1951년 5월 4일 생. 이름이 은근히 웃긴데 저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면 잭 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쟈니 존슨(존 존), 엘리자베스 베티(베스 베스) 등이 있다.
  • 차남 티토 잭슨 - 1953년 10월 15일 생
  • 3남 저메인 잭슨 - 1954년 12월 11일 생
  • 차녀 라토야 잭슨 - 1956년 5월 29일 생
  • 4남 말론 잭슨 - 1957년 3월 12일 생
  • 4남 브랜든 잭슨 - 1957년~1957년
  • 5남 마이클 잭슨 - 1958년 8월 29일 생
  • 6남 랜디 잭슨 - 1961년 6월 23일 생
  • 3녀 자넷 잭슨 - 1966년 5월 16일 생

7.6. 백반증과 외모

마이클의 부검 보고서 중 Diagnosis 2번 항목에 백반증(Vitiligo)이 적혀 있다. 마이클이 백반증을 앓고 있었음은 검시관 크리스토퍼 로저스가 2011년 재판에서 직접 증언하기도 했다.[94] 영상(1분 29초부터) 참고.

1987년의 마이클. 파운데이션을 바른 것 같지만 화장을 일절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마이클은 1984년에 피부과에서 공식적으로 백반증을 진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백반증이 악화된 원인으로는 1984년에 펩시 CF를 찍던 중 일어난 화상 사고가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CF를 찍던 마이클은 펩시 측의 장비 부주의로 머리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백반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피부에 큰 자극을 받으면 금방 악화되기 때문이다. 일단 본인이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마이클의 안면 백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형수술로 피부를 하얗게 만들었거나 성형수술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피부를 박피하든 태우든 성형으로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95]피부에서 멜라닌이 점점 사라지는 백반증에 걸렸던 것이다. 백반증은 피부 표면 전체의 멜라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점점 탈색되기 때문에 피부가 표범처럼 얼룩덜룩해진다. 현재도 피부병 환자들이 받는 편견이 심한데 먼 옛날에 백반증을 앓는 흑인들은 동물원에 갇힌 괴물처럼 구경거리로 취급되었다. 백반이 덮은 부위가 넓었던 마이클은 화이트 메이크업을 짙게 하여 변색 부위를 가리고 다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메이크업으로 커버할 수 있었는데 갈수록 백반이 넓게 퍼지면서 파운데이션으로는 커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장 밝은 샤넬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돼서 마이클의 메이크업 담당인 카렌 페이가 다른 연예인의 메이크업 담당들에게까지 파운데이션을 빌리러 갔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마이클을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마이클은 화면에서 본 것 이상으로 백금처럼 하얗다고 했다.

백반증에 걸리면 자외선이 백반을 퍼지게 할 수 있어서 노출 부위는 햇빛을 받지 말아야 한다. 백반증이 악화된 후부터 마이클의 필수품은 양산, 우산, 중절모, 장갑, 선글라스였다.[96] 장갑을 착용한 건 손에 있는 백반을 가리기 위해 1979년부터 착용하였다.

마이클의 백반증은 1993년에 방송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처음 밝혀졌는데, 이로 인해서 그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반증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LA 검시청의 부검에 의해 실제로 백반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97] 하지만 마이클의 몸이 완전 하얗게 보이는 게 오로지 백반증만의 결과는 아니다. 백반증은 피부를 백금처럼 변색시키긴 하지만 치료법이 엄연히 존재한다.[98] 그러나 마이클의 피부과 주치의인 아놀드 클라인은 마이클처럼 백반이 심하게 퍼진다면 치료는 불가능하며 '탈색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탈색법이란 백반증이 심하게 번진 환자에게서 정상적인 피부를 제거해서 아예 하얗게 만드는 방법으로, 마이클처럼 백반이 60% 이상일 때 고려하는 치료법이다.[99] 마이클처럼 전신의 60% 이상을 백반이 덮는다면 전신을 아예 탈색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마이클처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드러나야 하는 인물이라면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백반증이 발병하는 구체적인 원인은 의학계에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마이클과 80년대 중반부터 함께한 아놀드 클라인은 마이클에게 유전력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고 마이클의 아버지 역시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집안에 문제가 있으며 본인의 누나나 여동생도 똑같다며 마이클이 어릴 때부터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클 본인도 1993년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에서 친가에 문제가 있는 걸로 안다고 발언하였고.

잡지 매거진《16》의 표지로 등장한 1972년의 마이클. 손가락 끝이 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의 아내도 2011년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자식들은 남편처럼 피부가 얼룩덜룩해지는 게 싫어서 부분 탈색시켰다고 밝혔다. 마이클의 시신을 부검한 Christopher Rogers는 피부의 일부는 밝고 나머지는 어둡다고 증언하였으며 부검 보고서에도 얼굴, 팔, 가슴, 배에 탈색이 있다고 써있다. 한편 흑인이 심한 백반증으로 탈색 시술을 받은 것은 마이클 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꽤 있었던 사례다. 자세한 내용을 얼고 싶다면 피부 색소를 잃은 흑인 댄서를 참고하자.

마이클의 원래 외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들의 전형적인 외모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히스패닉,,아메리카원주민 혼혈이며 그의 아버지 조 잭슨은 아프리카 노예 후손이지만 푸른눈을 가졌다.한마디로 순수 흑인이 아니라 혼혈이다. 특히 고조부와 증조부 대부터 아메리카 원주민 계통이므로 흑인치고는 광대뼈의 돌출이 도드라지고 흔히 말하는 t존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 되었다. 참고로 아메리칸 원주민생물학적으로 황인에 가장 가깝다. 형제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누나인 라토야만 봐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이며 마이클의 조카 티토의 아들들은 히스패닉계의 특징이 강하다.

마이클 아버지 조잭슨은 마이클이 처음 태어났을때 피부가 형제보다 더 까만편이라 "너 내 아들 맞냐"라고 한 일화가 있다. Black or White나 Smile 뮤직비디오에서는 마이클 외모에서 히스패닉 느낌이 강하다.

참고로 백반증은 흑인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에게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피부가 검은 흑인에게 유독 두드러질 뿐이다. 얼굴 부위에 백반증을 앓은 흑인들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며 대부분은 희게 변한 부위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거나 흰 부위에 맞게 다른 피부를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도 한다. 마이클의 사후에도 피부색 변화에 대해 말이 많자, 마찬가지로 백반증을 앓고 있는 저널리스트인 리 토마스가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에서 민낯을 공개하고 백반증 환자들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마이클을 옹호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굉장히 마른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키가 175cm인데 체중이 가장 많이 나갈 땐 50kg밖에 안 나갔다. 마이클 본인이 평소에도 채식을 즐겼고,[100]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소식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캐서린의 자서전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밥을 잘 안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애나 로스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숟가락을 가져가며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Dangerous 투어 당시에는 체력 증진을 위해 적절한 닭가슴살 섭취와 피트니스를 병행하였다. 그래서 나오미 캠벨과 함께 한 'In the Closet' 뮤직비디오에서는 나름 괜찮은 팔 근육을 만들었다. 물론 이 근육도 사실 마른 근육에 가깝지만 결이 잘 갈라져서 멋있긴 하다.

마이클은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으로 인해 코에 큰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지만 막상 수술의 부작용 때문에 두려움을 겪고 망설이다 1979년 영화《위즈》촬영 당시 무대에서 넘어져 코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처음으로 성형수술을 하였다. 마이클은 자서전에서 2번의 코 성형과 턱에 홈을 파는 성형 1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101] 마이클의 외모 변화는 1986년의 영화 'Captain EO'부터 이뤄졌는데 거의 유러피안처럼 변한 얼굴로 변한 1987년에 'BAD'로 컴백했을 때 그야말로 충격이었는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쟁거리였다고 한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지금도 마이클의 성형은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서히 나타난 백반증 때문에 피부까지 하얘져서 마이클이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 표백을 했다는 등의 낭설이 엄청나게 돌았다. 마이클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형은 3번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마이클을 믿지 못하고 그보다 더 많은 성형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마이클의 어머니 캐서린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성형 중독으로 비칠 정도로 외모에 집착했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외모에 대한 지적을 들었으며 본인 스스로가 내성적이라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이 최종적으로 컴플렉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마이클이 백인이 되려고 한 시도하고 여기는 건 타당하지 않은 낭설이다. 마이클은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성형을 한 것이다. 성형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흑인에게도 열려 있는 것으로 그 누가 성형을 해도 그것이 백인이 되기 위한 수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미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성형 수술이다.

마이클이 인정한 2번의 코 수술. 그러나 2005년에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Bad' 시절의 코로 되돌려 놓는 복원 수술을 하였다.[102]

2008년1988년의 마이클.[103]

사후 마이클을 부검한 결과 눈썹과 이마, 입술에 문신이 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백반증이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백반증은 몸에서 멜라닌이 사라지기 때문에 피부만 하얘지는 것이 아니라 입술과 눈썹은 물론 머리카락도 모두 하얗게 변한다. 사람들이 마이클을 보고 놀랐다고 한 것이 그냥 하얘서 놀란 게 아니라 마치 백금처럼 하얗기 때문이다.[104] 마이클의 후반기 비주얼 변화에는 백반증과 체중 감량이 큰 요인이었는데 1991년 'Dangerous' 활동 시기의 체중은 48kg이었다고 한다. 또한 백반증이 심해지면서 피부에는 하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이나 입술에는 진한 색조화장을 하게 되면서 20대 시절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다.

화장 전.

화장 후.

헤어스타일도 흑인의 전형적인 곱슬머리에서 직모로 변하는데, 펩시 광고를 찍던 중 입은 화상 때문에 두피가 손상되어 가발로 대체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투어 시절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곱슬머리이다. 마이클이 탈모였다는 설은 사후 부검에서 앞머리에 탈모가 있던 것으로 일부 사실이다. 마이클의 팬이라면 90년대 중반과 HIStory 투어가 끝난 공백기 즈음에 예전보다 머리숱이 줄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이브 공연처럼 격렬한 동작을 요하는 퍼포먼스가 필요 없는 공식 석상에서는 가발을 쓰고 나오는 것. 그리고 마이클이 사후 직전에 50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고 놀림거리가 될 이유는 더욱 없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마이클의 외모에 대해서 성형 부작용이라는 가십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사실 자연스러운 노화도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SONY와의 불화, 2년 동안 이어진 소송으로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거식증으로 인한 체중 감소가 성형한 얼굴을 더 안 좋게 부각시킨 측면이 강하다. 이미 마이클이 고인이 된 지금에 와서 그의 외모를 비하하면 고인드립이니 제발 하지 말자.

아이러니한 건 과거에 비해 심하게 변해버린 마이클의 외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마이클을 오래도록 바라본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인종적 특성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 외모와 하이톤의 미성, 탄탄하고 마른 몸매와 멋진 퍼포먼스 실력 때문에 생전에 게이 팬들도 많았다.[105] 마초적인 근육질 외모 대신 마이클의 가녀린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도 정말 많았다. 마이클의 삶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었던 외모가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인 요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7.7. 타 연예인과의 관계

  • 춤의 달인으로 수많은 후배가수들과 댄서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못추는 춤이 없을것이라 생각하지만 뉴 잭 스윙이 열풍이었던 80년대 뉴 잭 스윙의 왕자인 바비 브라운을 자택에 초청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춤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 흑인 음악계의 전설답게 흑인 배우, 뮤지션, 운동선수들과 친분이 있었다. 에디 머피, 어셔, 마이클 조던, 크리스 터커, 제임스 브라운 등 수많은 흑인 스타들과같이 공연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에디 머피의 음반에 "What's Up WIth You?"라는 노래에 피쳐링을 하였고[106] you rock my world 에는 크리스 터커를 출연 시켰다. 후배가수인 어셔는 종종 마이클의 노래 커버를 했고 30주년 콘서트에는 크리스 터커와 어셔가 깜짝손님으로 나왔으며참조 어셔는 마이클의 장례식에도 gone to soon을 불렀다. 마이클 조던은 서로의 전성기 시절 jam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서로에게 농구와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 마이클은 원래부터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고, 나중엔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와도 친분을 맺었다. 처음엔 팬과 멘토 관계로 시작된 둘의 사이는 나이 차이를 초월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동작업자 관계로까지 발전되었으나, 매카트니가 되찾아오려고 벼르던 비틀즈 음악 판권을 마이클이 가져가는 바람에 둘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마이클은 70년대 후반에 직접 매카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만날 기회를 갖기를 원했고 마이클을 직접 만난 후엔 매카트니도 마이클을 마음에 들어했다. 매카트니는 작곡[107]과 음악에 대한 많은 것들을 마이클에게 알려주었고, 마이클의 첫 성인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에 'Girlfriend'란 곡을 만들어서 선물까지 해준다. 또 'say say say' 로 듀엣을 하여 빌보드 6주 1위, 'Thriller' 음반의 'The Girl is mine' 으로 빌보드 2위에 올려놓으며 같이 뮤직비디오도 제작하는등 한창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카트니는 마이클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매카트니보다 더 춤을 잘 추려고 하지 않는 등 상대방이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고... 이처럼 사이가 좋았으나, 후에 잭슨이 비틀즈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매카트니는 판권을 사들이는 것은 훗날 굉장한 재산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고[108], 그 음악들의 사용 허가 권한을 가지고 적절한 곳에서만 쓰이도록 관리하는 일의 보람 등에 대해 설명해줬다.[109] 아직 대중음악 판권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았던 시절에 비틀즈 음악의 판권이 'Northern Songs'에 넘겨졌고 이것이 다시 'ATV'로 넘겨지는걸 그저 지켜봐야했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의 음악 판권은 자기들이 되찾아 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카트니로부터 판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잭슨은 판권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우선 시험삼아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 판권을 몇 개 사게 됐다. 이후 비틀즈의 판권이 있는 ATV가 매각되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비틀즈 판권을 사려고 했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다.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천만 달러씩을 각자 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오노 요코는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구매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그 사이에 잭슨이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인다. 자신들 음악에 대한 권리를 꼭 되찾고 싶었던 매카트니는 이에 매우 실망했고, 그것도 자기가 70년대 후반에 음악적 멘토 역할을 해줬고 나중엔 콜라보도 같이 했던 마이클이 자기가 얘기해준 판권에 대한 조언에 따라 자기 음악의 판권을 사버렸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했다. 요코는 비틀즈 판권을 얻지 못한 것에 자기도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이클 잭슨같이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이클은 이제 자기의 소유가 된 비틀즈의 음악 사용권을 상당히 소중히 여기며 아꼈고, 비틀즈의 음악을 원칙적으로는 다른 매체 삽입곡으로 쓸 수 없도록 하는 엄격한 판권 관리 기본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비틀즈의 노래는 온라인 서비스도 되지 않았고 영화에서조차 삽입곡으로 쓸 수 없었다. 즉 비틀즈 음악 판권을 거액을 들여서까지 산 게 단지 그걸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여기저기 마구 쓸 수 있도록 허가해줘서 막대한 사용권 수입을 얻었을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걸 보면, 단지 재산적 목적을 위한게 아니라 진정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판권 문제 때문에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잭슨 사망 후 매카트니는 "그는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굉장히 재능 있는 젊은이였다. 그와 함께 했던 경험은 행복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라며 조의를 표했다.
  • 전설적인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도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1981년 발매된 퀸의 앨범 the game 수록곡들 중에 마이클은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싱글커트 하라고 자신있게 권유해서 퀸이 그 조언에 그대로 따랐는데 두 곡 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같이 세 곡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연습 데모 수준에서 끝났고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 [110] 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에 의하면 프레디도 마이클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정도로 마이클을 좋아했다고 한다. 퀸 결성 전부터 이미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고..
  • 프린스와 라이벌 관계였다.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가 비슷한 시기에 큰 성공을 거두고 같은 흑인 가수라는 점에 언론은 둘을 라이벌 관계로 몰아넣었다. [111] 어느 무대에선 마이클과 같이 있던 제임스 브라운이 관객석 쪽에 있던 프린스를 무대로 불러들여 둘이 즉흥적인 퍼포먼스 경쟁을 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프린스의 음악성은 인정하였지만 프린스라는 인간 자체는 별로 안좋아한 듯한데, Purple Rain 영화를 시사회 때 본 뒤 수행원에게 "그의 음악은 좋으나 외모가 비열하게 생겼고,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들며, 연기를 잘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마이클은 Bad 때에는 'Bad'의 싱글을 프린스와 라이벌 구도에 맞춘 듀엣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프린스 측에서 노래가 마음에 안들고, 가짜 라이벌 구도 같은 속임수에 연관되길 원치 않는다고 하여 취소 되었다. BAD투어 때 마이클 잭슨의 밴드는 언제나 프린스의 It's Gonna Be A Beautiful Night링크를 연주했다. 마이클 잭슨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콘서트를 마이클 잭슨이 지휘했고 매 공연마다 연주했으니 마이클 잭슨의 의사인 것은 확실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불명이다. 단순히 이 프린스의 노래를 좋아했을지도. 이 외에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은 같이 탁구도 치는 등 교류를 하기도 했고 2000년대에도 만났다는 이야기들이 꽤 있으나 깊은 친분관계는 아닌 듯하다. 마이클의 사망 당시 프린스와 함께 있었다는 미국 토크쇼 진행자 Tavis Smiley에 의하면 마이클의 사망소식을 듣고 프린스는 공연 리허설도 취소하고 밴드 맴버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낸 후 자기도 집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 동안 누구에게도 말도 걸지 않은 채 보냈다고 한다.
  • 퀸시 존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이클 문서를 다 봤다면(적어도 'Bad' 항목) 어떤 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마이클 팬들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는데 사후 종종 이해가 안 되는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백인이 되고 싶다고 주장한다던가 얼굴을 하도 고쳤대던가 급기야 마이클을 용서하겠다는 발언까지. 그러더니 최근에 와서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나는 그가 죽은 후에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많이했다."며 "극한의 사랑 신뢰 존경이 없었다면 마이클과 함께 한 업적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며 뉘우쳤다.
  • 생전 유명했던 절친으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맥컬리 컬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이 있다.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친분으로 유명한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 잭슨에게 큰 힘이 되주기도 했지만 마이클의 재정 상태를 거덜나게 하는데도 한몫했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에게 고가의 선물을 엄청나게 많이 선물했다.[112] 그러나 마이클과 엘리자베스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엄청나게 친했으며 마이클이 1993년 혐의 이후 가장 먼저 마이클을 지지했으며 마이클이 사건을 이겨나가게 하는데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이클이 온갖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를 위한 노래 'Liberian girl' 를 만들기도 했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결혼식을 열게 해주기도 했다. 또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97년 생일에는 직접 무대에 올라 팬들 사이에서 숨겨진 명곡이라고 불리는 Elizabeth I Love You를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다.[113] 엘리자베스는 맥컬리 컬킨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공연에도 참석했다. 2000년대에 Invincible발매 이후에 재판을 겪은 이후로 마이클은 2009년까지 거의 잠적했는 데 이는 1993년 혐의 이후로 HIStory를 발매하고 재기한 것과 대조되는 상황이다. 이에 리사 마리 프레슬리[114]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곁에 없었기 때문[115]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엘리자베스는 마이클에게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였다.
  • 맥컬리 컬킨은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다이빙대 위에서 춤추다가 밀어서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 게다가 성추문 사건으로 힘들어할 때도 언제나 지지해주던 친구였다.[116] 맥컬리는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로 인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마이클을 변호하기 위하여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2001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공연에도 참석했다. 사실 둘 다 어떤 면에서는 동병상련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어린 시절에 이미 유명세를 탔던 것도 그렇고. 잭슨이 죽은 이후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의 대부가 되었다.
  • 다이애나 로스는 상술하였듯이 마이클의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모타운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어렸던 마이클 잭슨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등 멘토로도 지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누나라고 말한다. 유언장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다음 후견인을 그녀로 지목했을 정도라고.
  • 머라이어 캐리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의 일원일 정도로 그와 절친이었다. 실제로 머라이어가 모톨라와 안 좋게 이혼하고 잭슨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 그가 토닥이며 위로해줬었다. 마이클 사후 그의 생일때마다 머라이어는 트위터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 마돈나는 마이클과 동갑인데다 둘의 별명도 엮기 좋은 KING, Queen이고 90년대 초에 둘이 엮이는 일이 많았고 1991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둘이 나란히 연인 느낌을 내며 입장한 적이 있다. 다만 둘의 사이는 자주 만나는 친구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둘은 엄연히 같은 부문에 종사하는 음악인들로 서로 질투 의식을 갖기도 했다고. 한편 마돈나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란 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마돈나의 전기책이다. 이 책은 마돈나가 직접 쓴 건 아니고 마돈나에 대해 자료를 수집한 기자가 집필한 책인데 내용을 보면 마돈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유일하게 성적으로 유혹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마돈나가 직접 집필하거나 말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이 책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 NBC와 마이클의 인터뷰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돈나가 먼저 마이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마돈나가 "난 너와 디즈니랜드 같은 곳에는 안 갈거야."라고 하자 마이클은 "난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돈나가 "그럼 레스토랑에 갔다가 스트립바에 가자."라고 제안하자 마이클은 "난 여자든 남자든 사람들이 옷 벗는 자리엔 안 갈거야."라고 거절했다고. 마이클의 사후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마돈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미소 짓길 바란다.'며 추모하였다. 한편 90년대에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던 만화 달숙이에서는 마돈나와 마이클이 부부인 것처럼 등장한 바 있다.
  • 에미넴과의 악연도 있는데 에미넴의 아동 성추행 문제, 성형수술, 1984년에 펩시 촬영 중 일어난 사고를 머리에 불붙는 장면으로 자신을 비꼰 에미넴의 뮤직비디오가 불쾌하다고 밝혔다. 〈Just Lose It〉의 가사 또한 마이클 잭슨이 당시 걸려있던 법적 문제를 비꼬았지만, 랩의 초반 부분에서 "... and that's not a stab at Michael/That's just a metaphor/I'm just psycho...." ("...마이클 잭슨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그저 은유일 뿐이야/난 그냥 싸이코야...")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이클 잭슨의 팬과 잭슨의 절친한 친구인 스티비 원더는 비디오에 대해 "쓰러져가는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 짓이나 다름 없다"며 "허튼 짓"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불쾌하다는 심경을 드러냈고 스티비 원더도 비판했을 뿐더러 그의 팬들에게도 까였다. 도의적으로 봐도 머리에 불붙은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게다가 성추행 문제는 무죄로 판결되었고 성형문제도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마이클 측은 해당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지 말라고 방송국에게 요청하기 까지 했다. 이외에도 쇼프로에서 마이클과 만나본 적 있냐는 질문을 받자 성적인 만남 말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호텔 창문에서 아이 인형을 던지며 마이클의 아기 흔들기 사건을 모방하는 등 끊임없이 마이클 잭슨을 조롱하고 다녔다. 에미넴은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 "나는 마이클 잭슨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며 뮤비 건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다. 한편 에미넴의 노래 'Just Lose It' 판권을 마이클이 사들였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마이클 잭슨이 에미넴의 노래 몇 개의 판권을 사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마이클은 저작권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에미넴의 노래 포함 12만 5천곡을 4억 달러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Just Lose It'을 사들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 스티비 원더는 bad 앨범의 Just Good Friends에 피쳐링 해주었으며, 만일 자신이 볼 수 있게 된다면[117] 두 가지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첫째가 자신의 딸의 얼굴이며 두 번째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였다고 했다. 또한 스티비는 에미넴이 위에 서술된 사건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비판했다. 마이클 역시 스티비 원더를 베토벤과 동급으로 두고 싶으며 그의 노래를 완벽에 가깝다 칭찬할 정도로 좋아했다.

7.8. 성격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지인들,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매우 소심하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고 증언했을 정도...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초청된 마이클 잭슨의 실제 모습을 보고 너무 수줍어하는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문워크를 보여 달라고 하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에 의하면 마이클은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할 만큼 수줍음을 탔다고 한다.본인의 성격에 관한 인터뷰 남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지인이 자기 앞에서 전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욕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고 전해진다.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다른 연예인을 씹어서 어그로를 끌기도 하는 그쪽 연예계에서도 꽤 신사적이고 쿨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톱 모델 나오미 캠벨마저 인정한 사람. 그래서 에미넴이 자기를 욕하고 다니던 시절에 '뛰어난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욕하지 않는다.'며 불쾌해 했다.

그러면서 의심도 많고 경쟁심도 강했다고 한다. 잭슨의 변호사 존 브랑카 말로는 롤링 스톤즈가 자신이 로스엔젤레스에서 공연했던 공연장보다 더 규모가 큰 공연장을 섭외했다고 하자 미친 듯이 화를 냈다고... 쇼 비즈니스계에서는 영악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들을 만큼 치밀한 사람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의 대인배스러운 성격을 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6년 월드 뮤직 어워드 당시 잭슨이 머물고 있던 숙소 바깥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피자 배달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르르 와서 천 명 가까운 팬들에게 피자를 나누어주며 마이클 잭슨이 전부 계산을 한 거라고 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내며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대신 잭슨이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아서 팬들에게도 콜라 대신 생수와 커피를 배달해줬다고 한다. # 또한 마이클은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이나 거지들을 보면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썼다는 곡 'Stranger in Moscow'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밖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크나큰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때의 마음을 회상하며 쓴 곡이 이 곡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주변에 비즈니스로 맺어진 사람들이 많았고 여자를 만나면 섹스광이라고 대서특필되고 남자를 만나면 동성애자라고 보도되는 통에 거의 혼자 다녔다고 한다. 안습. 그 때문에 진정한 친구가 적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집 밖을 뛰쳐나가 모르는 남자를 붙잡고 '저와 친구가 되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마이클 잭슨이다!'하고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잭슨은 '이걸 원한 게 아닌데'라며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90년대에는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질리도록 대하면서 환멸을 느꼈는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선을 긋게 되었다. 또한 쇼 비즈니스 관련된 쪽으로는 영리했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무대에 열광하고 흥분하는지 명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오랜 연예계 생활로 인해 주변에 예스맨들이 넘쳐났고 이들을 한 번 좋아하면 덮어놓고 믿는 어리숙한 면이 있어서 이로 인해 만만치 않게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자주 봤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1년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이었던 최규선과 유리겔라 같은 사기꾼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前 부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005년 성추행 재판 당시 마이클을 변호한 변호사 토머스 메제로우도 마이클 주위에는 마이클에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접근하는 흡혈귀, 즉 예스맨들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마이클이 도움이 필요할 땐 다들 거절했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의 이러한 어수룩한 면모는 황색 언론의 집중 표적이 되어 오랜 세월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7.9. 한국과의 인연

세계적 스타들 중 한국과 인연이 꽤 깊은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인 최규선과 비즈니스 목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이 대표적인 이유. 최규선은 어린이를 좋아하는 잭슨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본인의 아기를 안고 네버랜드 앞에서 기다렸다고 하며, 나중에는 국악 풍물패까지 동원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IMF 사태가 터지기 전후,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빈 탈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등이 최규선, 잭슨과 가까운 관계여서 한국 투자 건과 관련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때는 1996년.[118] 공연 포함 한국에 온 횟수가 4번이나 된다.(1996년 첫 내한 공연, 1997년 투자 목적으로 방문,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1999년 마이클잭슨과 친구들 공연) 4년간 거의 해마다 온 셈이다. 1996년 첫 내한 당시에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묵었으나 나머지 3번 방문 모두 남산 아래 서울신라호텔에서 묵었다. 대한항공에 탔을 때 먹었던 비빔밥이 생각났는지 서울신라호텔에서 대접받은 비빔밥을 극찬했다. 다만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먹었던 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간장을 넣고 삶지 않은 채소를 넣었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는 이른바 마이클 잭슨 비빔밥을 스페셜 메뉴로 내놓기도 했다. 호텔에서는 잭슨을 위해 최고급 객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내부 장식도 그의 취향대로 풍선을 데코레이션을 해주고 아케이드 게임 머신을 넣어주기도 했다.

내한 중에는 화장실에 가려고 명동 피자헛에 잠깐 들르질 않나, 강남역 타워레코드 본점(현재의 지오다노 자리), 아이의 아동복 쇼핑을 위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등을 깜짝 방문하는가 하면 콘서트 전후에는 소외 아동들을 위해 직접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을 전세 내고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한국 측 인사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그 최규선의 소개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97년 대선 직전에 한국에서 처음 만났고, 이듬 해 취임 직후에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김대중 후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휘호를 손수 써주면서, 이런 어려운 때에 마이클 잭슨 같은 세계적인 부자가 투자했으면 좋겠다며 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아 참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119]하고 곧바로 청와대로 초청해 회동하기도 했다. 1996년 첫 방한 시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만난 적이 있으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에는 투자 목적으로 한국을 극비리에 찾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 측과 인천 매립지(현 청라국제도시)를 둘러보는가 하면 유종근 당시 전라북도지사쌍방울 초청으로 무주 리조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주류 언론 대부분이 그의 루머들을 매번 악의적으로 보도한데다가 보수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내한공연까지 반대하던 일각의 상황을 감안하면 꽤 흥미있는 행보였다. 이후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접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의 공식 애도를 표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 역시 마이클이 사망한지 약 2개월 후인 2009년 8월에 사망했다.

민주당에서도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공식 애도 논평을 내기도 했다. 김유정 대변인은 "전 세계인의 스타였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며 "그를 사랑했고 그의 노래에 함께 감동하고 함께 어깨를 들썩거렸던 세계의 많은 팬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래도록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김 대변인은 "마이클 잭슨은 특히 한국의 통일을 함께 염려하고 기원해 주었던 고마운 벗이었다"며 "짧은 생을 혼신을 다한 뜨거운 열정으로 살다간 마이클 잭슨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

내한할 때마다 앙드레 김이 의상을 제공하곤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전속 디자이너로 섭외를 요청하자 앙드레 김 측에서 정중히 거절한 일화도 있다. 대신 직접 디자인한 의상 몇 벌을 손수 골라 보내주기도 했는데, 2009년 런던에서 열린 기자회견, 즉 생애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입었던 잭슨의 옷이 바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이다.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자 한국 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마이클 잭슨의 '한국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다시 이 곳에 와서 공연을 하고 싶다'라는 발언이 재조명되며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 이방카 트럼프가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K팝을 칭찬하자 문 대통령이 "마이클 잭슨은 한국 내에도 열렬한 팬들이 많았다. 그의 음악이 K팝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줬다고 본다”는 내용의 화답을 하기도 했다.

8. 그 외

  • 음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기로 유명하다. 앨범 내 소책자를 보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도 수록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에 머물렀던 숙소 선반에도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인을 새겨두고 갔다. 호텔에서는 기념으로 그대로 둔 모양이다. 여러 모로 예술적인 면에서는 천재.
  • 영화 <스윙키즈> 강형철 감독에 의하면 한국영화에서 사용할 엄두도 못 내는 3대 가수가 마이클 잭슨, , 비틀즈라고 한다. 곡 사용료도 워낙 비싼데다 원곡 삽입을 허락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출처
  • 2009년 Lunar Republic Society는 13.5 마일 크기의 한 달 분화구에 마이클의 이름을 따 '마이클 조셉 잭슨'으로 명명했다.
  • 2009년 미국 의회에서 마이클을 '아메리칸 레전드'로 추대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여기에 추대되면 마이클은 미국의 역사, 세계사 및 사회 교과서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며 이는 대중문화인으로서는 미국 역사상 최초 그리고 흑인으로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이어 두 번째의 사례가 될 수도 있었다. 공화당의 실라 의원이 실제 법안까지 발의했고 이에 클린턴 부부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전반적인 환영 분위기와는 달리 공화당에서 반대가 심해 결국 통과되지는 못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각종 루머로 인해 추락했던 이미지였다. 공화당의 피터 킹 의원은 "마이클 잭슨은 살아있는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고 아동성추행을 일삼은 페도필리아"라며 유튜브에 영상까지 올려 반대의 뜻을 밝힐 정도였다.
  • 현재도 해외에선 팬이 아주 많다. 페이스 북 팬 페이지 좋아요 수는 7500만개가 넘은 상태.
  • 유튜브 통계에서도 현재까지도 인기가 아주 많다. 보통 유튜브 조회수는 마이클 잭슨과 같이 전성기가 오래전에 끝난 가수들은 매우 적은 편인데 마이클 잭슨은 2017년 현재에도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웬만한 급의 팝가수들과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가수들 중에 40위권 이상에는 항상 들고 있다. 물론 워낙에 옛날 가수다 보니 공식채널에 나와있는 MV들은 조회수가 최신 팝가수들에 비해 매우 적다.[120] 공식채널에 있는 MV외에도 다른이들이 올린 공연 영상등으로 조회수가 많이 분산되어 나오는듯 하다.[121]
  • 동물도 매우 좋아했는데 어머니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는 저녁 식사 중 마이클이 부스러기를 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는데 뭐하냐고 묻자 가 마이클의 셔츠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고. 그런데 그는 살인 쥐가 마을을 조지는 'BEN' 의 주제가를 불렀다 그래도 본인은 쥐가 관련됐다고 좋아했던 듯. 그리고 침팬지 버블스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1983년부터 그를 키운 뒤로 뮤직비디오, 쇼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찌라시 언론들은 마이클이 버블스에게 집안 청소를 시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등의 루머를 뱉어냈고 아이들에게 위험할 정도로 덩치가 커져 결국 헤어졌다.
  • 무대 위에서의 돌발 상황 대처와 순발력이 무척 좋았다. 1996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내한 콘서트 2차 공연 도중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국내관객 김 모 군(19)이 갑자기 관람석에서 리프트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잭슨을 껴안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잭슨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공연을 계속했고 관객들은 그게 무대 연출의 일부 인 줄 알고 열광했다. 이 일로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콘서트를 진행한 백호 기획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잭슨은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 며 김 모 군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면 갑자기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잭슨이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김 모 군이 리프트에서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은 채로 노래를 한다.[122]해프닝 영상. 4분 5초 부터.
  • 96년 내한 콘서트로 마이클 잭슨은 18억원을 벌어갔는데, 여기에 과세 추징을 하느냐 마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내뉴스 링크
  • 그가 을 했다는 몇몇 가지 증거들 중 하나로 최근 공개된 마이클 잭슨의 절친 중 하나인 마술사 유리겔라에 대한 다큐에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유리겔라 항목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이미 흑역사가 되어버린 사기꾼이다.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자기 쇼의 성공을 위해 잭슨과 친구인 척 이름을 팔고 다녔다가 사기인 게 들통이 나고 잭슨의 뒤통수를 골라 치는 거짓말만 치고 다녀서 크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잭슨에게 약을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던데 이 사람은 관심이 떨어질 법하면 매번 잭슨이 약물을 했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녀서 욕을 먹었다. Dangerous 월드 투어 때 남미에서 갑작스레 투어를 중단할 수 없었던 이유로 진통제 과다 복용이라고 하고 있으며 HIStory 월드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5곡 정도의 트랙의 1회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진통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탈진해서 취소됐다는 문헌이 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잭슨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후반에는 루푸스 합병증으로 구강 내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80년대 중반에 화상 사고를 당한 후 치료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두피를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상처를 막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오랫동안 장발을 고수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수술의 후유증이 꽤 심각했는지 90년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통제를 복용했다고 하며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로 불면증이 극심해져 약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때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잭슨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는 팬들은 사이트에서 무조건 강퇴를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잭슨의 건강 문제는 언급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 한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도 했다. 70년대까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양복을 입고 집집마다 가스펠을 전파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는데 1982년 'Thriller'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 내부에서 마찰이 심해서 탈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23] 내한 공연 당시에 개신교 단체에서 깽판을 저질렀던 가장 큰 명분. 다만 잭슨 가 사람들 전부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다.[124] 잭슨의 9남매들은 전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다. 어떤 개신교 교회에서는 팝을 악마의 음악으로 싸잡아 말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이클이라는 이름은 천사장 미카엘을 사칭한 것이다' 고 말하는 짓도 저질렀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집안 영향 때문에 신도였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종교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믿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이라는 말과 기도하는 손 모양을 자주 하고 'Dangerous' 앨범의 'Dangerous' 와 'Heal the world'[125] 에서 성경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과 잭슨의 영적 가치관이 달랐던 것이지 정작 그 자체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그가 스스로 밝혔다(2005년(?)의 인터뷰에서).
  • 생전에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좋아했었고 감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1978년에는 시드니 루멧이 연출하고, 퀸시 존스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오즈의 마법사 뉴욕, 흑인 버전'인 뮤지컬 영화 《위즈 The Wiz》에서 다이애나 로스와 출연해서 허수아비 역할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흥행과 비평 면에서 동시에 실패하면서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 비록 'Bad' 앨범 홍보 차원에서 쓰이긴 했지만 1988년에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문워커》에서도 주연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했다. 훗날 이 영화는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작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 불가. 그 이후로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126]
  • 찰리 채플린의 팬이었다고 한다.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도 채플린이 작곡한 'Smile'이었으며 일상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도 가족과 걸어가며 Smile을 흥얼거리는 모습이 찍힌 적이 있다. 그 유명한 Dangerous 퍼포먼스에서 후반부 골프를 치는 춤동작도 찰리 채플린에 대한 오마쥬.
  • 2001년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오기 전에 발매되었던 국내판 오리지널 'Bad' 앨범에서 강제 개명당했다. Michael Jackson을 Michael Jacksoon이라고 적어두었던 것. 다만 이것은 잭슨 본인도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내한 당시 레코드점에서 이것을 구입했다고 한다.
  • KFC치킨을 굉장히 좋아했다. 농구선수 매직 존슨이 마이클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마이클의 요리사가 매직 존슨의 앞에는 직접 요리한 구운 닭 요리를 내주더니 마이클의 앞에는 KFC 버켓을 주고 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마이클이 정크 푸드의 대표급인 KFC 치킨을 즐겨먹는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 마이클은 원래는 소식이자 채식주의자였으나 건강이 염려된다는 주치의에게서 닭가슴살 요리를 먹을 것을 처방받았고, 이후 KFC를 먹어보고 아침 점심 저녁 매 식단에 KFC를 넣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투어를 다닐 때 KFC 치킨을 구하기 힘들 것을 대비해서 요리사가 레시피를 준비해서 다닐 정도였으며 마이클을 보기 위해 숙소 근처 KFC에 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 노래에 유독 여자 이름이 많이 나온다. 'Billie Jean' 의 빌리 진, 'Dirty Diana' 의 다이애나, 'Smooth Criminal' 의 애니[127], 'Little Susie' 와 'Blood on the dance floor' 에 나오는 수지, 거의 애드리브처럼 쓰는 데비 등등. 일각에서는 사귀던 여자들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본인은 별 뜻 없다고 해명했다. 그저 이 노래에 이름이 거론된 여자들은 좋아했다.
  • 일본과도 인연이 깊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이었다고 말한적도 있으며 가장 큰 대중음악 시장 중 하나인 만큼 현지에서 공연도 매우 많이 했다. 2006년에는 오랜만에 일본을 찾아 빅 카메라를 전세 내서 쇼핑을 하고 코무로 테츠야 같은 음악인들과 만나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인 후지테레비SMAPXSMAP」에 게스트로 깜짝 출연했었다. # 'Beat It' 을 BGM으로 깔고 등장하는 폭풍 간지를 보여줬는데 SMAP 멤버들에게 전부 비밀로 하고 왔던 거라서 멤버 전원이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게스트 근처에 가까이 가서 앉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계속 진짜 마이클 잭슨이 맞냐고 물어봤다. 롯폰기에서 흉내 내는 짝퉁[128]이 온 거 아니냐며 믿지 않는 분위기였으나 곧 그런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어안이 벙벙한 채 마이클을 영접하였다. 자신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이나가키 고로에게도 즐거운 듯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잭슨은 여기서 30분 출연하고 20만 달러를 받아가셨다고 한다. 역대 게스트 중 가장 최단 시간 출연에 가장 많은 돈을 받아갔다고. 그리고 이것이 잭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당시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에게 'hello, budapest!' 라고 인사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수도다. 헝가리하고 루마니아는 이웃나라고 도시 이름도 비슷하다 보니 저지른 실수인 듯[129]. 사실 두 나라의 국민감정으로 보건데 상당한 실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실수였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넘어갔다.
  • 세상을 떠난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와 생전에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그리고 직접 방송에서 나와 예전에 전화 통화도 많이 주고받았었다고 한다. 마이클은 바바라 월터스 쇼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언급했는데 "그분은 너무나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이었어요. 우리 둘다 공통점이 많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할 만한 요소들이 수두룩하다. 둘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또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담으로 마이클은 영국에서 BAD 투어를 하러 왔을 때 자신의 BAD 수록곡 중 하나인 <Dirty Diana>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모욕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어서 리스트에서 빼려고 했지만 정작 놀랍게도 다이애나는 오히려 <Dirty Diana>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직접 마이클에게 말해서 다시 리스트에 넣었다.

  • 사람들로 가득찬 슈퍼마켓에 가서 평범하게 쇼핑해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분이 어디 나타나면 그 일대가 어떻게 되는지 말 안 해도 뻔한 노릇.[130] 그래서 마트를 운영하는 친구가 폐점 후 마이클만을 위해서 비공개로 마트를 열고, 다른 지인들도 와서 마이클을 전혀 모르는척 하는 직원과 손님을 연기하였다. 유투브에서 그가 평범한 손님이 되어 장보기 체험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다. 무려 30년만에 슈퍼마켓에 와 본 것이라고 하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하는 마이클을 볼 수 있다.
  • 2009년에 유튜브 등지에서 마이클 잭슨의 유령이 나타났다며 인터넷을 떠들썩 하게 만든적이 있다. 'Michael Jackson Ghost?(마이클 잭슨, 유령)?'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이 동영상은 미국의 CNN 방송사 래리 킹의 프로그램 중 촬영된 것. 이 프로그램의 한 제작진이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 저택을 방문하여 소개하던 중, 인적이 전혀 없는 네버랜드 복도 안쪽을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가 화면에 나타났고 네버랜드 저택 내부의 복도를 비추는 영상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자는 마이클 잭슨의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사람모양의 형체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당시뉴스 기사
  • 2010년 1월 30일 KBS에서 방송된 연예가중계의 한 코너에서 할리우드 추남 추녀 TOP 7을 소개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성형중독자, 아동성폭행인 것처럼 설명해 시청자들한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후 며칠 뒤 남성 진행자의 멘트로 짤막하게 사과했는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사과였는지 의문스럽단 의견이 많다.
  • 스탠 리에 의하면 90년대 후반에 한때 마블 코믹스를 인수할려고 했다고 한다. 스탠 리는 마이클이 스파이더맨의 역할을 맡고 싶다고 추측했다고 한다. 주변인물 프랭크 카시오의 자서전에 이하면 마이클이 그저 좋은 돈벌이용 사업으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현재 마블 코믹스의 상태를 생각하면 큰 그림을 보신 것일 수도..

8.1. 재산

각종 기관과 매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인생에서 벌어들인 돈이 최소 20억 달러(약 2조 원) 이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잭슨이 빚 때문에 파산한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가 나왔지만 2007년 기준으로 마이클 잭슨의 재산의 순가치가 2억 3,600만 달러(약 2,400억 원)에 달한다고 보고되었다.#

2014년 2월 12일 미국 국세청은 마이클 잭슨의 초상권을 4억 3,426만 달러(약 4,342억 6,000만 원)로 판단하여 마이클 잭슨의 유산을 11억 2500만 달러(2015년 환율 기준 1조 3,690억 원)의 가치로 책정한 뒤 유족들[131]에게 7억 200만 달러(2015년 기준 환율 기준 8,760억 원)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후술할 사후 수익 때문에 그의 유산은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다.

8.1.1. 사후 수익

포브스 사후 수익 발표의 절대 강자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천문학적 수치이다. 즉, 죽은 사람 중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인물이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을 넘어선 경우도 종종 존재한다.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132]에서 발표한 그의 사후 수익은 다음과 같다.[133]

발표 시기

달러 = 한화[134]

순위

2위

2010년 10월

2억 7500만 달러=3000억

1위[135]

엘비스 프레슬리 6000만$=660억

2011년 10월

1억 7,000만 달러 = 187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2년 10월

1억 4,500만 달러 = 1600억

2위

1위 엘리자베스 테일러 2억1000만$=2310억

2013년 10월

1억 6,000만 달러 = 176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4년 10월

1억 4,000만 달러 = 154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5년 10월

1억 1,500만 달러 = 1265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6년 10월

8억 2500만 달러 = 9075억

1위

찰스 슐츠 4800만$=520억

2017년 10월

7500만 달러 = 843억

1위

아놀드 팔머 4000만$=449억

2018년 10월

4억 달러 = 4516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4000만$=449억

2019년 10월

6000만 달러 = 66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900만$=390억

사후 수익 총합 23억 5500만 달러 = 약 2조 6490억 원

사후에 벌어들인 수익이 2012년을 제외하면 모두 1위이며 2010년에는 2~12위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였다. 2위와의 차이도 5000만 달러 가까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현역 뮤지션들보다도 많은 금액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2010년에는 1억 3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현역 뮤지션 수익 1위였던 U2보다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벌어들였고[136], 2011년에는 U2에게는 밀렸지만 2위였던 본 조비의 1억 2,500만 달러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2012년에는 1억 1,000만 달러였던 닥터 드레를 크게 제쳤으며 2013년에는 1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팝의 여왕 마돈나를 3,5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2014년에는 애플에게 회사를 넘기고 3억 달러를 벌어들여 총 6억 달러를 기록한 닥터 드레에게 크게 밀렸다. 2015년에는 월드 투어를 진행한 케이티 페리에게 3,500만 달러 차이로 밀렸지만 2위였던 테일러 스위프트를 2,0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냈다.

2016년에는 생전과 사후를 불문하고 역대 최고액인 8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남은 순위들의 금액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여 사후 수입 총합이 2조 원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마이클 잭슨이 20대 중반에 약 550억을 지불하고 사두었던 ATV 뮤직 판권[137]의 절반을[138] 소니에 약 8500억에 팔면서 벌어들인 수입이다. 사실상 사업가로서 벌어들인 수입이다.

이러한 엄청난 사후 수익은 생전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던 걸어다니는 기업과도 같았던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8.2. 어록

인터뷰를 자주 사양했으나 몇몇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꽤 진지하고 심오한 철학적 어록을 많이 남겼다. 어록을 살펴보면 열정적이다 못해 순수하며 꽤 감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 생각하는 것은 댄서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춤을 출 땐, 춤을 느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사랑이다.
>난 무적이다. 날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날 끌어내려도 다시 일어난다[139]
>나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나의 팬들뿐이다.
>나는 일생 동안 다른 아티스트를 공격한 적이 없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에미넴이 자신을 조롱한 사건에 대해).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너무 의심이 많다. 스스로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내 자신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깨에 드리워진 짐을 가벼워지게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와코 재코(Wacko Jacko)란 말이 대체 뭔가. 타블로이드가 만든 말 아닌가? 나도 가슴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이런 말을 쓸 때 나는 그걸 듣고 느낀다. 좋지 않다. 쓰지 말아 달라. 난 괴짜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세계를 좀 더 멋진 터전으로 꾸미고 싶은 생각이라면 먼저 당신 스스로를 잘 보고 자신부터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당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140]
>인간은 접하고 싶어 한다. 또 그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 한다. 설령 절망이든 기쁨이든 자기가 느끼거나 경험한 것을 살리는 일이 그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계몽의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생존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 오르면 육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굉장한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엄청난 고통도 함께 따라온다.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알 것이다. 내 인생의 첫째는 아이들이고 내가 결코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내가 어딜 가든 나를 45살의 꼬마라고 불렀다.
>왜 당신의 침대를 함께 쓰지 못하는가?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것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다. 사랑하는 이에게 '원하면 내 침대를 같이 쓰자. 여기서 자.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내 친구들에게 내 침대를 내주었다.
>난 매주 리사[141]와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왔으니까. 우주바다 속 변덕스러운 예외라고 부르는 곳. 이름을 뭐라고 못 짓겠네. 태양계를 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으로 유통시키고 다운로드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티스트의 책임이 크다. 나는 지금껏 한평생 음악을 하면서 성인 솔로로서 낸 앨범이 고작 6개밖에 안 된다. 왜 그런 것 같은가? 완벽한 앨범을 만들기 위해 한 앨범을 만들 때마다 5~6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한두 곡의 히트곡을 빼고는 나머지 공간을 시시껄렁한 곡들로 채워넣는다. 하지만 나는 항상 한 앨범의 모든 곡들이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란 말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차를 몰고 레코드점에 가서 앨범을 골라들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는 수고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고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어라.
(그럼 당신의 음악이 불법으로 유포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나의 음악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2003년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 중.)[142]
>나의 집에서는 상이나 트로피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집에 그런 것들을 두지 않는다. [143] 그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 대단한 걸 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것들 좀 봐. 내가 이 정도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정말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난 단 한 번도 '이 정도쯤'에서 만족해 본 적이 없다. (Interview with Geraldo Rivera, 2005)
>세상 전부가 당신에게 반대하고, 당신을 비웃고, 당신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무시할지라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만을 믿어라. 누가 뭐라고 하든. (I don't care a whole world is against you, tease you and tell you're not gonna do it, just believe in yourself, no matter what.)
>Just let a song write itself. (곡을 쓰는 방법을 찾지 마라. 당신이 곡을 쓰지 마라. 곡이 자기 스스로를 쓰게 하라.)
>이 지구 위 어딘가 모든 구석, 모든 골목에 있는 모든 나의 팬들, 모든 인종, 모든 국가, 모든 언어의 나의 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마음 속 깊이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 study the greats, and become greater. (위대한 사람들을 연구하라. 그리고 그들보다 더 위대해져라.)
>If you want to be all-time great, you should study all-time greats. (위대한 반열에 오르고 싶으면, 위대했던 사람들을 공부해라. ㅡ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했던 조언)
>I promise you, the best is yet to come. (2002년 팬들 앞에서 연설을 마치면서, "이것만은 여러분께 약속해요. 나의 진짜 '최고'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고.")
>나는 그 순간 알았어요. 저게 바로 내 남은 평생 하고 싶은 거란걸.[144]
> "Practice more." (지금 아는 모든 걸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냐는 친구의 질문에)
> 나는 내 자신을 단지 '자연의 악기(instrument of nature)' 라고 생각해요.
>만약 한국에 통일이 찾아 오면, 다시 이 곳에 와서 여러분과 함께 그 날을 축하하고 싶다. (1999, Michael & Friends 내한공연 중. *마이클과 친구들 공연은 분단국가인(였던) 두 나라, 독일/한국에서만 열렸던 특별공연.)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 중, 자기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왜 그런걸 궁금해하죠? 그런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난 예술을 사랑하고 특히 미켈란젤로를 존경하죠. 만약 내가 그와 잠시라도 대화할 수 있다면, 난 그에게 무엇이 당신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무엇이 당신을 그런 위대한 예술가가 되도록 이끌어줬느냐고, 너무나 물어보고 싶어요. 그가 어제 밤 누구와 놀러 나갔는지, 왜 햇빛을 피해 머물러 있는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요.
>내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내가 너에게 이야기 해 준 것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If I die tomorrow, never forget what I told you.) ㅡ 딸 패리스 잭슨에게 했던 말.
>전 언제나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그가 얼마나 큰 인기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는지갸 아니라, 그의 명예와 돈으로 무엇을 했느냐 에 결정된다는 것을요. (1999, Speech at Indian Awards)
>여러분을 사랑해요. 정말요.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이것만은 알아 주세요. (I love you. I really do. From the bottom of my heart. You have to know that.) - 2009년 This is it 공연 발표 당시 팬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
> 어린 아이는 막지 말 것. (경호원들에게 당부한 경호 기준)
> (너무 큰 유명세 때문에 겪게 된 불편과 불행에 대해 유명해진 게 후회될 때도 있는지 질문 받자) 아주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만,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런걸 불평하면 안 돼요. 그것도 다 일의 일부인걸요. 팬들이 주는 사랑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에요. (1987, interview with Ebony/Jet)
>모든 예술가는 불멸을 원하잖아요. 전 위대한 예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게 진짜 내 가슴이 의미하는게 아니라면, 전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10살 때 인터뷰, 곡 HIStory 도입부에 나옴.)
> 전 그냥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면 행복해요.
> When I go, this problem world won't bother me. I'll fly away.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문제덩어리 세상도 날 더는 괴롭히지 못하겠지. 나는 날아가겠어. 사후 발표곡 'Xscape' 가사 중)

9. 디스코그래피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수상 기록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인물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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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 1990년대를 중심으로 대중음악 대부분의 시상식을 독점했는데, 여러 앨범상을 비롯하여 10년의 아티스트상, 세기의 아티스트상들도 이에 포함된다. 대표적인 수상 기록으로 그래미 살아있는 전설상과 평생공로상(1993년/201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특별공로상과 세기의 아티스트상(1989년/2002년), MTV 뱅가드상(평생공로상)과 천년의 아티스트상 그리고 레전드상(1990년/2002년/2006년) 등이 있다. 참고로 MTV는 1991년부터 평생공로상의 이름을 "마이클 잭슨 뱅가드 어워드"로 하여 현재까지도 시상하고 있다.

이외에도 1990년에는 백악관에 초청되어 대통령 표창 데케이드 아티스트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맴버 자격, 2001년에는 솔로 자격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됐으며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2004년 영국음악 명예의 전당, 2010년 무용가 명예의 전당(전문댄서가 아닌 팝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 2014년 알앤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2006년에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로 기네스 북에 등재됐으며 스릴러 앨범과 뮤직 비디오는 2008년 역사적/문화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 도서관에 영구 보존작으로 선정됐는데 특히 스릴러 뮤직 비디오는 뮤직 비디오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자세한 수상 기록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메이저 시상식인 그래미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10.1. 그래미 어워드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상 수상자
Grammy Award for Album of the Year
1980년~1999년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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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빌리 조엘

크리스토퍼 크로스

존 레논 & 오노 요코

토토

마이클 잭슨

52nd Street

Christopher Cross

Double Fantasy

Toto IV

Thriller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라이오넬 리치

필 콜린스

폴 사이먼

U2

조지 마이클

Can't Slow Down

No Jacket Required

Graceland

The Joshua Tree

Faith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보니 레잇

퀸시 존스 & Various Artists

내털리 콜

에릭 클랩튼

휘트니 휴스턴

Nick of Time

Back on the Block

Unforgettable... with Love

Unplugged

The Bodyguard: Original Soundtrack Album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토니 베넷

앨라니스 모리셋

셀린 디옹

밥 딜런

로린 힐

MTV Unplugged

Jagged Little Pill

Falling into You

Time Out of Mind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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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그래미 시상식

올해의 레코드상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Rosanna" - 토토

"Beat It" - 마이클 잭슨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올해의 노래상

제27회
(1985년)

제28회
(1986년)

제29회
(1987년)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 티나 터너

"We Are the World" - 마이클 잭슨 (with Lionel Richie)

"That's What Friends Are For" - 디온 워윅


그래미 어워드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4

올해의 앨범

Thriller

1984

최우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

Thriller

1984

올해의 레코드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락 보컬 퍼포먼스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Billie Jean

1984

최우수 R&B 음악

Billie Jean

1984

최우수 어린이 앨범

E.T. the Extra Terrestrial (with Quincy Jones)

1984

올해의 프로듀서 비 클래식

Thriller

1985

최우수 비디오 앨범

Thriller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90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Leave Me Alone

1993

그래미 레전드 상

1996

최우수 단편 뮤직 비디오

Scream

2010

그래미 평생 공로상

그래미 명예의 전당

1999

I'll Be There

1999

I Want You Back

2008

Off The Wall

2008

Thriller

2016

ABC

10.2. American Music Awards[145]

American Music Awards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4

메리트상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Billie Jean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비디오

Beat It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비디오

Beat It

1986

공로상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88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Bad

1989

특별공로상

1993

국제아티스트상

1993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Dangerous

1993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Remember The Time

1996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This Time Around

2002

세기의 아티스트상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Number Ones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Number Ones

10.3. 헌액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4년 헌액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 클리프 리처드 & 섀도우즈
1960년대: 비틀즈, 롤링 스톤스
1970년대: 밥 말리,
1980년대: 마이클 잭슨, 마돈나
1990년대: U2, 로비 윌리엄스

2005년 헌액

핑크 플로이드
유리드믹스
아레사 프랭클린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조이 디비전 / 뉴 오더
더 후
킹크스
블랙 사바스
오지 오스본

2006년 헌액

제임스 브라운
레드 제플린
로드 스튜어트
브라이언 윌슨
본 조비
프린스
더스티 스프링필드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1]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84년 11월 20일

위치

6927 Hollywood Blvd.

11.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 만화 아기공룡 둘리마이콜은 마이클 잭슨의 패러디다. 마이콜은 자기 소개를 할 때 마이클 잭슨은 종씨(...)라고 했다.
  • 미국의 패러디 제왕인 위어드 알 얀코빅은 80년대에 'Beat it'을 패러디한 'Eat it', 'Bad'를 패러디한 'Fat'을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잭슨도 기발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146]
  • 영화 문워커, 캡틴 E.O에 주연을 맡았다.
  • 만화 원피스의 쟝고의 모티브가 마이클 잭슨이다.
  •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시즌3 1화인 <Stark raving dad>에서 목소리 출연을 했다.[147] 다만 어른의 사정으로 크레딧에 본인 이름은 올리지 못했고 John Jay Smith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또한 리사를 위해 만든 노래 및 흥얼거리는 파트는 본인이 아닌 킵 레넌이라는 대역을 썼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인 바트를 위해 노래 'Do the bartman'도 만들어서 불러줬는데 이 역시 소니와의 계약 문제로 대역을 써서 불렀다. 본인이 직접 부른 Happy birthday Lisa. EBS에서 심슨을 더빙해서 방영했을 때 시즌 3부터 시작했으므로 EBS 더빙 판 중에선 최초의 에피소드인 셈인데 더빙 판에서 마이클 잭슨 역할을 담당한 성우는 엄상현. 일단 해당 에피소드의 EBS판 제목은 '쓸쓸한 리사의 생일'이다.[148]
  • 사우스 파크에서도 등장한다. 등장할 때마다 하는 말버릇은 "That's ignorant!"(그건 무지한 거예요!)[149]"Allegedly!"(의혹일 뿐이에요!).
  • "The Jeffersons" 에피소드에서 첫 등장.정확히 이름은 안 나오지만 바꾼 이름이 마이클 재퍼슨이고 흑인인데 백인으로 보이며 하는 기행들을 보면 사실상 확정이다. 사우스 파크 위키에서도 마이클 잭슨이라고 나온다. 나와서 피부가 녹고 코가 떨어지는 등 마이클 잭슨을 까는 거라는 평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까인 것은 어린 시절에 너무 집착해서 양자인 블랭킷에게 아버지가 아닌 친구가 되었다는 정도이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의혹을 경찰들이 그저 부자 흑인이라는 이유로 조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짜가 2004년이란 걸 생각하면 까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150] 그리고 그가 입는 복장들과 부르는 노래들을 신경 쓴 디테일을 보면 제작진이 어느 정도 마이클의 팬이었던 것 같다.
  • 그가 죽은 후 2009년에 방영된 "Dead Celebrities"에서도 등장한다. 아이크 브로플로브스키를 빙의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면서 부정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를 어린 소녀 가창 대회에 참여시키고 나서야 한이 풀려서 영혼이 아이크로부터 빠져나온다... 이때 그가 부르는 노래는 HIStory 앨범에 등장한 <You Are Not Alone>의 가사를 바꾼 것. 여담으로 이 에피소드에서 마이크에게 자신은 죽었다면서 잭슨의 무덤을 파서 증명하려고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 #
  • 2014년 에피소드 "#Rehash"와 "HappyHolograms"에서 등장한다. 정확히는 Xscape에 나온 <Slave to the Rhythm>의 퍼포먼스에서 등장한 마이클의 홀로그램이 탈출하는 모습으로 등장. 투팍 샤커의 홀로그램이 등장해 그를 잡아 온다.[151] 생전 마이클과는 성격차이가 없는 것 같다.
  • 시즌1 7화 "Pinkeye"에선 마을 전체가 좀비로 가득차 개판으로 변하자 셰프와 스탠, 카일, 카트맨이 해결책을 찾으러 처음 증상이 나타난 장소로 향해 혹시 있을 지 모를 증거물들을 뒤지다 좀비들이 난입했고, 난데없이 감염당한 셰프가 Thriller 안무를 추는 장면이 나온다.
  • 세가 메가드라이브용 게임인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를 프로듀싱했고, 게임 내에 주인공 캐릭터로 출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또한 세가의 게임 스페이스 채널5와 그 후속작 스페이스 채널5 파트2에는 잭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 '스페이스 마이클' 이 나온다. 이 캐릭터의 성우는 마이클 잭슨 본인. 프로듀서가 개발 중인 게임을 보여주자 본인이 먼저 참여할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152]
  • 대전게임 엔진인 M.U.G.E.N에도 동인 캐릭터가 존재한다. 베이스는 상술한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의 도트로, 원작의 기술들을 격투 게임 방식으로 잘 이식한 편이다.
  • 게임 소닉 더 헤지호그 3의 BGM에 마이클 잭슨이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후에 프로듀서 브래드 벅서가 사실을 확정지었다. 엔딩 크레딧과 그 안에 있는 일부 효과음 등이 잭슨이 참여한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 격투게임 투신전 3의 중간보스 중 하나인 텐 카운트는 기술들은 라이벌 캐릭터인 카인 아모우와 공유하지만, 생김새나 뉴트럴 포즈등 외관은 Smooth Criminal 버전 마이클 잭슨의 판박이다.
  • 게임 겟앰프드의 액세서리중 댄싱 햇이 출시됐다. 관계자에 말에 따르면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별세 1주기 되기 직전인 5월 3일에 출시했다.
  • 게임 던전 앤 파이터의 던전 플레이 컨텐츠 중 하나인 지옥파티 모드 중에서 천계지역에서 지옥파티 입장시 등장하는 APC 중에 MJ라는 이름의 APC가 등장했었다. 남거너 모션을 이용한 춤사위를 통해 부하(백댄서?)APC들을 지휘하고 원령귀들을 소환하는데다 직접공격으로는 데미지를 줄 수 없는등 매우 강력한 APC였지만 현재는 지옥파티 개편으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다.
  • 게임 식물 vs 좀비에도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댄서 좀비가 있다. 그러나, GOTY 버전에는 고인 드립 관련 문제로 댄서좀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 달숙이에서도 유명 인사 카메오 중 한명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마돈나와 부부 관계라 작중에서는 통칭 마(馬)씨 부부라 불린다. 이 만화가 그렇듯 멀쩡한 캐릭터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그래도 유명인사 계열 출연진 중에 어느 정도의 비중은 있었다.
  • 만화 노노보이에서 마이클 잭슨은 실명으로 등장하는 유명 팝스타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로,[153]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주인공 나동태와 HERO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은인인 동시에 이들이 꼭 넘어야 할 크나큰 벽으로 묘사된다. 자신의 콘서트장 옆에서 무단으로 공연을 벌인 나동태 일행을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재능에 흥미를 갖고 이들이 정식으로 데뷔를 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면서, 한편으론 절대음감을 가진 팝의 제왕답게 나동태에게 세계의 벽의 높이를 실감하게 해주는 한편, HERO가 자신을 뛰어넘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자 박수와 함께 앵콜을 외치는가 하면, 나동태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연 콘서트에도 열 일을 제쳐두고 한국에 내한해서 나동태를 격려하는 등, 여러모로 대인배스러운 인물로 그려졌다.
  • 영화 《무서운 영화》에 패러디한 인물이 등장했다. 다만 한창 성추행 소송 문제로 이미지가 안 좋았던 때라 풍자의 대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3편, 4편 두 번. 4편에서는 외계인의 레이저 빔에 한 번 맞더니 Bad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고 또 맞더니 Thriller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다시 한 번 맞으니까 성형/백반증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 영화 《러시 아워》의 주연 배우인 크리스 터커는 실제로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인데 2편에서는 클럽에서 엉성하게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를 부르는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무대에 난입해서 마이크를 뺏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대사가 '저 명곡을 망친단 말이야!' 이 사람은 영화에서 흑인을 논할 때 잭슨 드립을 자주 친다.
  • 2001년 삼성전자 노트북 센스의 광고에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가수가 김정화와 함께 춤을 춘다.
  • 2009년경에 만들어진 스타크래프트 1 유즈맵 중에 '개인 파이널 디펜스'(일명 개파디)라는 플레이어 6명이 각자 자기의 진영에서 기존의 디펜스 형식으로 게임을 하는 유즈맵이 있는데 이 유즈맵의 많은 요소들이 마이클 잭슨의 작품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배경음악과 효과음도 마이클 잭슨의 주요 히트곡들이 대부분이고 게임 도중에 나오는 적 유닛들의 이름이 'Smooth Criminal', 'Billie Jean' 등 마이클 잭슨의 대표곡들로 명명된 경우가 많다.
  • 2010년 11월 23일에 저스트 댄스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마이클 잭슨의 춤을 즐길 수 있는 Michael Jackson: The Experence 가 출시되었다. 국가별로 내용의 차이가 있는 다른 저스트 댄스와 달리 전세계 버전이 동일한 내용으로 수록되었다. 기종별로는 PS3, Wii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며, XBOX360은 키넥트의 특성상 게임성이 약간 다르다. NDS, PSP, 3DS, PS Vita, iOS 등으로도 발매되었는데, 이쪽은 동작을 감지하는 센서가 없는만큼 단순한 리듬액션게임이며 내용도 전혀 다르다.
  • 카카오톡의 유료 이모티콘 중에 '댄스 스페셜'에서 Billie Jean을 오마주하는 이모티콘이 들어있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에서는 키류 카즈마 파트 서브 스토리 '카무로쵸 좀비워커'를 통해 등장한다. 마이클이나 잭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라클'이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가수로 나오는데, 미라클과 마이클의 영어 철자가 비슷하며, 미라클의 외모나 복장은 어디를 봐도 마이클 잭슨 패러디다. 게다가 서브 스토리 내용 역시 좀비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라는 점에서 'Thriller'의 패러디다. 그리고 이 뮤직비디오 촬영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패러디한 '스피닝'이라는 인물이다. 이 서브 스토리 등장 조건은 스토리 파트를 2장까지 진행하고, 서브 스토리 '키류는 프로듀서?'를 완료해야만 나온다. 이 서브 스토리 두 개까지 완료하고 메인 스토리를 5장까지 진행해 부동산 아일랜드를 활성화한 상태에서 '카무로쵸 좀비워커' 때 보상으로 검은 상자를 골랐다면 '미라클 in 마하라자' 서브 스토리에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는 디스코 배틀을 하며, 완료하면 미라클을 부동산 아일랜드 고용인으로 영입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세가와 인연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노린 서브 스토리.
  • 데빌 메이 크라이 5에 등장하는 단테의 새로운 데빌암인 '닥터 파우스트'는 마이클 잭슨의 상징인 흰색 중절모 그 자체. 이걸 얻으면 단테가 아주 멋드러지게 마잭신의 춤을 추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2. 바깥 고리


  1.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
  2. [2] 그래미 시상식의 가장 중요한 상들로 여겨지는 올해의 앨범상,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노래상, 최고의 신인상만이 기록 돼 있다. 나머지 부문의 상들은 따로 문서 내 수상 목록에 수록해주길.
  3. [3]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 였던 퀸시 존스가 지어준 별명인데, 이유는 마이클이 비즈니스에 관해서 매우 냄새를 잘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 [4] 사망 기준
  5. [5] 본래 부모를 따라 여호와의 증인 모태신앙이었으나 Thriller 이후 탈퇴했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심지어 '이 영상은 나의 종교적 신념과는 무관하다.'라는 코멘트가 삽입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부 여호와의 증인 맹도들에게 격심한 비난세례를 받았다고 한다.#Ebony 1990년 10월 그 후의 종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때 이슬람에 귀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으나 루머로 판명되었다.
  6. [6] 사실 5살때 벌써 보이그룹의 리드보컬로 각종 공연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다.#
  7. [7] #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사이였던 여가수 다이애나 로스가 그를 소개하며 붙였던 별칭으로, 현재에는 그를 대표하는 별명으로 굳어졌다. 번역하면 "팝의 제왕" 정도가 적절하겠지만, 관용적으로 "팝의 황제"로 알려져 있다.
  8. [8] 대략 5살
  9. [9] 전체 앨범 판매량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에 이어 3위에 해당하고, 앨범 한 장당 판매량은 압도적 1위를 차지한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800개 이상의 상을 수상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인물이며, 40년대(1960년대~1990년대)에 걸쳐 빌보드 hot 100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아티스트이다.
  10. [10] 머레이는 체포됐고 2급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11. [11] 공식적으로 39개의 자선단체를 지원하며 생전 3000억 원 가량을 기부하였다. 이는 팝스타가 지원하는 최대의 자선단체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그는 노벨평화상의 후보에 두 번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인도주의적 행적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근 20년간 지속된 언론의 루머가 이를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12. [12] 1982년 말 발매된 스릴러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37주간 1위를 기록하며 1983~84년 두 해 연속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발매 1년 3개월 만에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북에 등재됐고 현재까지도 누적 6,6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스릴러 앨범 발매 전 세계 음반시장은 전례없던 역대 최악의 불황기였다. 미국의 CBS 직원들은 1982년 8월 13일을 검은 금요일이라 불렀는데 이날 대규모 해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릴러가 대박나면서 음반시장은 다시 초호황기를 맞았다. 마이클도 앨범 발매 전에는 200만 장만 팔아도 성공한 것으로 알고 만족하자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고 한다.
  13. [13]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1 페이지
  14. [14]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물론 그럼에도 지미 헨드릭스, 척 베리 등 록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들은 이전에도 드물지만 있었다.
  15. [15] 박은석 음악평론가, 전설이 된 잭슨, 그의 음악과 인생
  16. [16] 박은석 음악평론가, 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누가 마이클 잭슨을 죽였나' 편
  17. [17] 정일서 KBS 라디오 PD('365일 팝 음악사' 저자), ‘X&Y’ 빌보드 3주 연속 1위 … 미국 시장서 선전
  18. [18] 김작가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19. [19]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8 페이지
  20. [20]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마이클 잭슨' 특집
  21. [21] 임진모 음악평론가, 저서 '젊음의 코드,록' 176 페이지
  22. [22] 후에 1999년 산타나도 8개 부문을 수상해 동일 기록
  23. [23] 마이클이 MTV에 나온 최초의 흑인 뮤지션이라는 뜻이 아니다. 1983년 데이빗 보위가 MTV와의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 흑인 뮤지션 중 극소수만, 그것도 주로 새벽시간대에만 방영이 허가되는 등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24시간 언제든 방영될 수 있는 헤비 로테이션으로 마이클이 흑인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길을 냈다는 의미이다.
  24. [24] 임진모 음악평론가,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25. [25] 차우진 음악평론가, 뮤직 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
  26. [26] MTV 선정과 기네스 등재 자료 출처
  27. [27] 임진모 음악평론가,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흑인음악-아프로 아메리칸 뮤직 &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28. [28] 저서 'Present Tense'
  29. [29] 1위는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2위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3위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30. [30] 김작가 음악평론가,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31. [31] 근데 결국 2번째로 믹싱한 사운드가 최종 결과물로 채택된 건 함정..
  32. [32] 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33. [33] 문워크에서 털기춤까지…보는 음악 새 지평 열어 & 저서 '젊음의 코드, 록' 172 페이지
  34. [34] 레이디 가가는 원래 'This Is It' 투어의 오프닝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잭슨이 신인이던 레이디 가가를 보고 자신이 직접 투어의 오프닝을 맡을 가수로 추천했다고 한다.
  35. [35] 미국내에선 RIAA 공식인증 3,300만 장의 판매고로 이글스 베스트 앨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다. 참고로 2006년 기네스 북Thriller 앨범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라는 타이틀을 공식 인증해주면서 판매량을 1억 400만 장으로 발표한 것을 이유로 아직까지도 판매량을 1억 장 이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1억 장 얘기는 신빙성이 없다. 기네스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이후 자신들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량을 6,600만 장으로 수정했기 때문이다.
  36. [36]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
  37. [37] 후에 케이티 페리가 2010년에 발표한 <Teenage Dream> 앨범에서도 5개의 빌보드 1위곡이 나오면서 동일 기록.
  38. [38] 잭슨 파이브도 1970년대 순위에서 6위에 올랐다.
  39. [39]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0위권
  40. [40] 정확한 수치는 사실 모른다. 5억으로 보는 곳도 있고, 10억, 20억, 25억으로 보는 곳도 있다. 닐슨 집계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추모식은 미국내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다이애나비에 이어 세 번째로 TV로 가장 많이 본 추모식이었다.
  41. [41] <Mediatraffic>에 의하면 2009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op 40 순위에서 마이클이 앨범들이 5/6/11/13/19/20/24/25위를 차지했다.
  42. [42] 원래 빌보드는 발매되고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아무리 많이 팔려도 <Billboard 200> 차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 즉 최신 앨범들만 해당차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앨범들, 그중에서도 특히 베스트 앨범인 <Number Ones>가 당시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올랐던 다른 가수의 앨범보다도 더 많이 팔렸음에도 해당차트에 오르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형평성 논란이 일었고 결국 빌보드는 2009년 12월부터 발매시기 제한을 없애게 됐다. 18개월 이상된 앨범은 <카탈로그 차트>라고 해서 별도로 순위를 집계했었는데, 카탈로그 앨범이 <Billboard 200> 차트 1위에 오른 앨범보다 더 많이 팔린 경우는 앞서 말한 마이클 잭슨의 <Number Ones>가 최초였다.
  43. [43] 또 2018년 미국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가장 듣고 싶은 뮤지션' 설문조사에서 마이클은 비틀즈, 이글스에 이어 3위에 올랐다.
  44. [44] 2014년 마이클의 사후앨범 <Xscape>가 나오기 전에 실시된 조사다.
  45. [45] 유튜브가 매주 집계하는 인기 아티스트 차트 그리고 스포티파이 Monthly Listners 항목 참고. 2019년 9월 기준 누적 스트리밍 횟수는 유튜브에서 마이클이 70억 이상으로 40위권대, 스포티파이에서는 59억 이상으로 50위권대에 해당한다. 구독자수는 유튜브 1,600만대로 압도적이고, 스포티파이 1,200만대로 20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뮤지션들 중에는 퀸, 비틀즈와 함께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46. [46] 월드는 3위이나 미국내 판매량은 RIAA 공식 인증 8,400만장으로 7위.
  47. [47] <Mediatraffic>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림 앨범 순위에서 Thriller 앨범이 6,600만 장으로 1위, Bad 앨범이 3,500만 장으로 10위, Dangerous 앨범이 3,200만 장으로 16위, Off The Wall 앨범과 HIStory 앨범이 2,000만 장으로 나란히 70위, 71위에 랭크됐다.
  48. [48] 중국 자국 연예인들까지 포함한 종합 순위에서도 마이클이 100위 안에는 거의 매주 들어가 있다.
  49. [49] 출처 참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캐나다, 호주
  50. [50] 1위는 스페인 가수 Julio Iglesias
  51. [51] 1996년 마이클이 They Don't Care About Us 뮤직비디오를 리우데자네이루 Dona Marta 지역에서 찍었는데 당시엔 마약범죄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마이클이 보여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선행, 그리고 뮤직비디오가 방송에 나간 후 높아진 도시에 대한 관심으로 오늘날 마약범죄에서 자유로운 안전한 도시로 변했고 여기에 마이클의 공로가 컸다고 판단하여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52. [52]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순위는 아티스트들간의 우열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 순위가 아니다. 순위를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순위는 최고가 20위권~30위권대이다. 이 말은 즉슨 80년대와 90년대가 긴 록앤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음악적 영향력이 50~70년대 록앤롤 시대를 만든 선구자 아티스트들보다 낮다는 것으로 롤링 스톤 평론가(엄밀히 말해 다 평론가는 아니다, 롤링 스톤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했다고 소개했었다.)들은 평가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팝의 역사에서 음악 산업을 뒤흔든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 됐지만 그 영향력이 선대 로큰롤 선구자들과 비교하면 로큰롤 음악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낮다고 본 것이다.
  53. [53] 이 외에도 위대한 ~ 시리즈를 몇 차례 더 뽑았는데 롤링 스톤의 이런 순위들은 당연하게도 위의 설명한 것처럼 로큰롤 역사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50~70년대 로큰롤을 확립한 선구자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여기서 SInger는 좀 더 목소리, 보컬로서의 의미를 둔 것인데 가창력 순위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54. [54] 빠진지역이 있다면 추가 바람
  55. [55] 그런데 솔로투어를 보통 10회 전후, 많으면 20회 가까이 가는 다른 아티스들과는 다르게 3번밖에 안했다.
  56. [56] 현재기준으로 1달러를 1100원으로 환산할시 1375억.
  57. [57] 비록 그 때문에 마이클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기에 공연이 중단되었지만.
  58. [58] 1996년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공연. 6만 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59. [59] U2관중 동원 넘사, 롤링 스톤즈에게는 밀린다.
  60. [60]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합산 수익금 총합은 3억9천만 달러로 1달러를 1100원으로 칠경우 4290억 원이다. 그런데 저 수익금들을 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여 계산할 경우 6억4천6백만 달러로 7106억 원이 된다.
  61. [61] 위키피디아의 투어항목을 참조.
  62. [62] 그런데 투어를 4번 밖에 안했음에도 10회 전후를 진행한 다른 아티스트들과 비슷하다.
  63. [63] 보통 다른 아티스트들이 투어를 진행할때는 미국에서만 공연의 40%를 진행한다.
  64. [64] Bad 7번, Dangerous 5번, HIStory 3번
  65. [65] 1, 2위는 각각 U2와 롤링 스톤즈
  66. [66] 다만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67. [67] 원래 이 콘서트도 DVD로 발매할 겸 HD로 촬영되었지만 잭슨이 자신의 퍼포먼스에 만족하지 못해서 취소되었다는게 정설이다. 그리고 이날 감기 걸리렸다는게 팬들의 추측이다.
  68. [68] They Don't Care About Us와 In the Closet 사이에 짤막하게 Dangerous 앨범의 She Drives Me Wild의 비트가 나오기는 한다.
  69. [69] 이 투어 때부터 마이클이 스테이지에 가방을 가지고 나와서 복장, 장갑, 페도라를 입는 퍼포먼스가 추가 되었다.
  70. [70] 항목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더 선은 마이클 잭슨 이외에도 각종 찌라시를 퍼트리기로 악명높은 황색언론이다.
  71. [71] Living With Michael Jackson 다큐를 보면 그런 류의 기사를 대할 때 본인은 어떻냐고 묻자 먹먹한 표정으로 "나도 사람이에요...."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72. [72] 대표적인 곡들이 바로 <Leave Me Alone>, <Why You Wanna Trip On Me>, <Scream>, <They Don't Care About Us>, <Tabloid Junkie> 등등. 영화 문워커를 보면 그를 쫓아다니는 극성팬과 기자,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리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Speed Demon>이 흘러 나온다.
  73. [73] 그러나 진짜로 빡치는 순간도 있었던지 파파라치를 향해 법규를 하는 샷도 돌아다닌다.
  74. [74] 왼쪽의 문장은 마이클 잭슨의 곡 'Childhood'의 가사 중 하나이다.
  75. [75] 유년 시절 이 성인클럽 공연에서 있었던 일은 잭슨의 자서전에도 충격적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76. [76] 실제로 인터뷰에서는 유년 시절 레코드 사 건너편에 공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곡 작업에 매진해야 했다고 한다.
  77. [77] 다행히 잭슨 측에서 따로 영상을 촬영한 것이 남아있어서 대조한 결과 악질적인 편집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잭슨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78. [78] 주변 사람들이 그를 40살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79. [79] 소송 사건 당시 법원에서 병에 들어있는 사탕을 고르는 사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소에 사탕, 껌 등을 단 것을 굉장히 즐겨 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은 사탕이나 과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가수를 안했으면 사탕가게 주인이 됐을 거라고 한다.
  80. [80] 영화 《러시 아워 2》에서 성룡과 더불어 홍콩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 성룡이 '홍콩에서는 내가 마이클 잭슨이고 넌 토토 잭슨이야' 라고 하자 터커가 '토토 잭슨이 아니라 티토 잭슨(잭슨의 형제 이름)이야. 토토는 니들이 저녁에 잡아먹는 개 이름이구' 라는 장면이 나온다.
  81. [81]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마이클을 위한 깜짝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는데 마이클은 생전 처음 해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즐거웠지만 동시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방에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전 종교에 얽매여있는건 아니어서 이후에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홈비디오도 나온다.
  82. [82] 최고의 최루 멜로영화로 대히트를 쳤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남우 '라이언 오닐'의 딸이다. 이들 부녀간의 관계 역시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악명높다.
  83. [83] 이 날 마이클의 표정이 굳어있는게 다이애나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많다. 다이애나 결혼 이후로 마이클은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절친 사이로 지내게 된다. 영상 속 ama 시상식 역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파트너다. 여담으로 노래 시작 전 마이클은 자신의 파트너인 리즈 여사를 챙기지만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
  84. [84] 1차 후견인은 아이들의 할머니이자 마이클의 엄마인 캐서린. 캐서린이 죽게되면 다이애나 로스가 마이클 아이들의 후견인이 된다.
  85. [85] 2017년에 세계적인 모델 에이전시 IMG와 계약을 맺고 모델로 데뷔한 것에 이어 5월에는 영화 출연까지 확정하며 배우 데뷔를 앞두고 있다.#
  86. [86] 호적상 이름은 형과 똑같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언론은 프린스 마이클 2세(주니어), 팬들과 아버지는 블랭킷이라고 부른다.
  87. [87] 원래 낳기는 10명을 낳았는데 말론과 같이 태어났던 쌍둥이 브랜든이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9명이 된 것이다.
  88. [88] 대신 눈은 엄마를 닮아 벽안이다.
  89. [89] 사실 마이클 잭슨은 학교를 얼마 못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이 도시 저 도시로 공연을 다녔던 탓도 있고 들이 교실에 난입해서 사인을 해달라는 통에 초등 과정도 다 못 마치고 개인 교사를 통해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수업과정을 들었다고 한다.
  90. [90] 알고 보면 이름이 굉장히 괴이한데 잭키 잭슨으로 한국식으로 따지면 박 박이나 최 최 같이 굉장히 희한한 이름이 된다.
  91. [91] 자넷과 마이클은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1995년에는 듀엣곡 Scream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자넷은 1993년 라토야가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했을때 인터뷰를 통해 라토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등 남매중에서 유일하게 마이클의 편에 서기도 했다.
  92. [92] 저메인은 잭슨 파이브 당시 마이클처럼 보컬이었으며 마이클이 들어오자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솔로 데뷔를 항상 원했고, 모타운 설립자 배리 고디의 딸과 결혼하며 소원 성취를 한다. 그리고 본인은 잭슨 파이브를 탈퇴한다. 웃긴 건 바람을 피워서 배리 고디의 딸과 이혼했으며 후에 알레한드라라는 여자 사이에서 아이를 보았으나 이후에 이 알레한드라는 랜디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또 가지는 등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동서지간이 되는 개막장 사태가 일어난다. 라토야의 경우는 매니저였던 잭 고든과 연애를 하면서 플레이보이지에 누드 사진을 올리거나(미국에서 유명인의 누드 사진을 보는 시선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장짓을 일삼아 가족들과 척을 졌으며 93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 때 마이클에게 매우 불리한 증언을 언론에 대고 해서 마이클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잭 고든이 사망한 후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잭 고든에게 협박, 폭행을 당해서 한 거라며 마이클과 화해했다고는 하나 당시 인터뷰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라토야는 잭슨 팬들에게 랜디와 함께 주요 까임 대상 중 하나다.
  93. [93] 라토야 잭슨은 마이클의 리즈 시절 아예 스릴러라는 컨셉으로 마이클 잭슨 분장으로 플레이보이 잡지 누드에까지 나왔다. 참고로 최악의 플레이보이 표지로 손꼽힌다.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비디오를 촬영하긴 했으나, 포르노를 찍은 적은 없다. 라토야 잭슨은 앞서 언급된 잭 고든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잭 고든이 그녀를 포르노에 출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으며, 플레이보이 건도 잭 고든에 의해 찍게 된 것이라고 얘기했다.
  94. [94] 콘레드 머레이 재판
  95. [95] 사우스 파크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깜둥이 수술'이라는 수술이 있는데 백인을 흑인으로 바꾸는 수술이라고 나오는데 뒤에 설명에 덧붙여 마이클 잭슨이 했던 '흰둥이 수술'의 반대 판이라고 한다.
  96. [96] 그의 사진을 보면 온몸을 칭칭 감고 있거나 햇빛이 맑은 날에도 양산이나 우산을 쓰고 있는데 신분 은폐를 가장한 자외선 차단법이다. 그런데 그러고 다니면 누구든지 마이클인 줄 안다. 크리스 터커의 말로는 마이클이 스파이더맨 가면을 쓰고 쇼핑몰에 가면 사람들이 '스파이더맨 가면 쓴 마이클 잭슨이다'라고 알아챈다고.
  97. [97] 마이클 잭슨의 백반증은 최규선 게이트의 주인공인 최규선도 수기를 통해 인정한 바 있다. 이 양반의 전적상(...)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불명이나 그 일화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80년대 말, 두 사람이 친분을 쌓은 뒤 마이클이 아예 노메이크업 상태의 맨얼굴을 보여주고 백반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있다고 하자 최규선이 피부에 검은 부분의 면적이 더 넓은데 차라리 거기에 맞춰서 검게 화장하는게 어떠냐고 말하자 마이클이 크게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걸 보고 아차 싶었다고. 그 이후로 둘의 관계가 잠시 서먹했다고 한다. 이때 절교했어야 했는데
  98. [98] 하지만 의사들의 소견에 의하면 백반증은 보통 난치병으로 취급되며 치료가 잘 되는지는 환자마다 복불복이라고 한다.
  99. [99] 전신의 모든 멜라닌 세포를 파괴시킬 수도 있고 노출된 부위의 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100. [100] 다만 아예 육식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이클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KFC 치킨이었다.
  101. [101] 우리가 흔히 엉덩이 턱이라 부르는 턱에 파인 홈은 적당히만 파인다면 서양권에서는 미남의 상징이다. 참고로 턱의 홈은 유전.
  102. [102] 참고로 왼쪽 사진은 2003년이 아닌 2001년이다.
  103. [103] 왼쪽이 2008년이고 오른쪽이 1988년이다.
  104. [104] 90년대에 마이클 잭슨을 만나본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마이클의 실물은 사진보다 훨씬 하얗고 더 말랐으며 수염이 제법 있다고 한다. 화보에 나온 사진 대부분은 포토샵으로 어둡게 처리한 것이 더 많다고 하며 수염은 제거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다가 영상을 보면 비주얼의 차이가 은근히 느껴진다.
  105. [105] 1990년대 초반에 한 기자가 '당신은 게이가 확실한가요?'라고 질문하자 마이클은 '카메라를 끄면 대답할게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기자가 카메라를 끄자 마이클은 '아니요.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 세계에는 나의 팬인 게이들이 많아요. 나를 게이로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그 분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라고 발언하였다. 정말 마이클의 대인배스러움을 볼 수 있다.
  106. [106] 뮤비를 보면 알겠지만 에디머피와 서로 장난을 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어디에서도 볼수없었던 귀여운 마이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조
  107. [107] 이 때 마이클에게 자신이 부를 노래는 직접 쓰는 작곡능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기를 적극 권유했고, 작곡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들도 해줬다고한다.
  108. [108] 그래서 폴 매카트니는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 뮤지션인 버디 홀리의 음악 판권을 통째로 사서 소유했다.
  109. [109]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보면 매카트니가 이걸 설명해줬을때 마이클이 "그럼 내가 당신의 음악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라고 했고 매카트니는 "녀석 농담은"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현실이 되고 만다.
  110. [110]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111. [111] 이러한 라이벌 관계를 마이클 잭슨이 만들어 낸 면이 적잖이 있었고 프린스는 이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112. [112] 90년대에는 그녀에게 줄 향수를 1개 구입하는데 1만달러를 쓰기까지 했다. 다만 받기만 한 것은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마이클에게 코끼리를 선물하는 등의 보답을 한다. 이 역시 의도치 않게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되긴 했겠지만
  113. [113] 이 곡은 마이클잭슨의 의지에 따라 단 한번의 공연만 이루어졌을뿐 싱글컷이나 앨범 음원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직 그 날 공연을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또 불려졌다. 마이클의 오래된 팬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명곡으로 알려져있다.
  114. [114] 마이클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아예 언급을 피하는 등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115. [115]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04년~2005년에 이미 70을 넘겼기 때문에 93년때처럼 마이클을 위하여 힘쓰기에는 너무나도 늙었기에 별 수가 없었다.
  116. [116] 마이클 잭슨 생전 둘은 22살이나 차이났다.
  117. [117] 스티비 원더는 신생아 때 시력을 잃었다.
  118. [118] 내한공연을 반대하던 여론이 있었음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에 미 뉴스위크지 와의 인터뷰에서 꼭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해줬으면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119. [119] 원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가려고 했다가 건강문제로 못 가고 대신 친필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120. [120] 2018년 5월 12일 기준 Thiller의 공식 MV 조회수가 5.1억을 넘었다.
  121. [121] 최신 팝가수들은 저작권료를 중요시하느라 자신들의 공식채널에 있는 MV나 영상 아니면 다른 일반 유저들이 유튜브로 자신들의 노래와 관련된 영상을 업로드하는걸 거의 허용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단일 MV만 놓고보면 이들이 마잭보다 압도적이지만 전체 조회수는 마잭에 비해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게 통계가 잡히는 것이다.
  122. [122] 리프트로 공중 높이 떠서 관객석 위를 지나가며 노래를 하는 퍼포먼스인데, 잭슨은 안전바 안에 들어가 있어서 안전했으나 관객은 그 밖에 있어서 굉장히 위험할 수 있었다. 초반에 보면 팔을 잡아서 안전바를 잡게 해주려고 하지만 관객이 흥분해서 날뛰자 잭슨이 직접 꽉 잡아주는 것을 볼 수 있다.
  123. [123] 'Thriller' 뮤직비디오 시작 전에 '이 영상은 오컬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자신(아마도 마이클)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다' 는 자막이 나온다.
  124. [124] 그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5. [125] Dangerous 가사 및 해석, Heal the world 가사 및 해석.
  126. [126] 작중 주인공의 상관에게 자신을 승진시키겠다는 약속을 안 지키냐고 묻는 순간 상관에게 그대로 무시당하는 역할로 나온다.
  127. [127] 가사에 나오는 'Annie, are you okay?'는 심폐소생술(CPR) 교육 때 교육용 인형 '애니'에게 하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마이클은 CPR 라이선스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8. [128] 짝퉁(?)은 아니지만 실제로 마이코 료(マイコーりょう)라는 예명으로 마이클 잭슨 성대모사 및 퍼포먼스를 네타삼아 활동하는 예능인이 존재하기는 한다.
  129. [129] '부쿠레슈티의' 영어 이름은 Bucharest, 발음하면 '부카레스트' 이다. 부다페스트의 발음이랑 비슷해서 햇갈릴 수 있다.
  130. [130] 직접 쇼핑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백화점을 하루 통째로 빌려서 혼자 쇼핑을 했다고 한다.
  131. [131] 유족들은 마이클의 초상권을 2,105달러로 신고했다.
  132. [132] 이 잡지에서는 매년 사후 수익 랭킹을 10월에 발표한다. 그 외에도 아티스트의 수익 순위 등등 다양한 순위를 발표한다. 또한 축구팬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스포츠 구단의 브랜드 가치 중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위를 했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몇 년 연속 1위를 했니 바르셀로나의 1년 수익이 얼마니 하는 것들도 발표한다.
  133. [133] 출처: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2015년2016년
  134. [134] 1100원으로 단순 환산
  135. [135] 2위~12위까지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많다고 발표했다.
  136. [136] U2는 2011년에 1억 9,500만 달러를 벌어들여서 마이클을 넘는데 성공했다.
  137. [137] 비틀즈, 롤링스톤즈, 앨비스 프레슬리 등 총 4000여곡의 음악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노래를 사용하면 마이클 잭슨에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138. [138] 나머지 절반은 1995년에 소니에 약 1000억 정도를 받고 넘긴 상태였다.
  139. [139] 'Invincible' 앨범 수록곡 'Unbreakable' 의 가사.
  140. [140] 그의 곡 'Man In The Mirror' 의 가사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141. [141] 전 부인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142. [142] 당연하게도 이 발언 이후 'Invincible'은 어찌된 거냐, 당신이 돈 쓸어 담을 땐 냅스터가 없었다는 둥의 각종 비아냥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악성 비난 외에도 이미 4억장을 넘게 팔아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언급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같은 년도 다른 인터뷰에서는 It is wrong to download but the answer cannot be jail 라는 식으로 말을 좀 유하게 하게 되었다. 헌데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전성기 때도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의 유행으로 음반 산업이 장난 아니게 타격을 입은 적이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음반을 잘만 팔았다. 물론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와 현재의 불법 음원 다운로드와는 규모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143. [143] 마이클 잭슨은 공식적으로만 약 197개의 상을 받았음.
  144. [144] 6살때 제임스 브라운을 처음 보고.
  145. [145] 그래미와 달리 AMA는 팬들이 직접 수상자 선출에 관여하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화력은 압도적이었다.
  146. [146] 위어드 알 얀코빅은 1987년 마이클 잭슨의 Liberian Girl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147. [147] 스스로를 마이클 잭슨이라고 생각하는 레온 콤포스키라는 이름의 정신병자라는 설정이었다.
  148. [148] 사실 EBS 홈페이지에서도 심슨 더빙에 관한 연혁을 찾을 수 없고 웹상에서도 '일본탐험'편을 빼면 EBS 더빙 판 심슨 영상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149. [149] 실제로 마이클이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언론사 등을 향하여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깔 때 많이 사용하던 말버릇이었다. 실제 영상
  150. [150] 두 번째 성추행 혐의는 03년도에 불거졌고 첫 공판이 05년도이었다.
  151. [151] 투팍도 사망 후 홀로그램 퍼포먼스가 있었다.
  152. [152] 다만 1편의 경우 너무 참여가 늦어서 딱 한 부분만 출연하고 따로 녹음도 안 해서 상술한 메가드라이브용 게임 문워커의 음성을 재활용했다. 2편에선 비중이 대폭 늘었고 녹음도 제대로 했다.
  153. [153] 마이클 잭슨 이외에 비중이 있는 또 다른 팝스타는 바로 '기타의 신'인 에릭 크랩튼.
  154. [154] 다만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직접 나오지는 않고 외편 소설판인 Another Side: Earthbound에서 언급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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