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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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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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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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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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Jackson

본명

마이클 조셉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향년 50세),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엔젤레스 홈비 힐스

국적

미국

직업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무용가, 배우, 자선가, 사업가

별명

King of Pop (팝의 황제), MJ, 마잭, 마이크, Smelly[2]

신체

178cm[3], 54kg #[4]

종교

여호와의 증인 → 불명[5]

데뷔

1969년 잭슨 파이브 1집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

활동연도

1964년 ~ 2009년

로고

서명

링크

공식 홈페이지

1. 소개
2. 경력
3. 영향력
3.1. 영향을 준 아티스트
4. 인기와 평가
5. 재능
5.1. 작사/작곡/프로듀싱/연주
5.2. 보컬
5.3. 댄스
6. 공연(투어)
6.1. 대표적인 공연영상
7. 사생활 및 일화
7.1. 언론과 루머
7.2. 어린 시절
7.3. 여자와의 관계
7.4. 가족 관계
7.5. 백반증과 외모
7.6. 타 연예인과의 관계
7.7. 성격
7.8. 한국과의 인연
8. 그 외
8.1. 재산
8.1.1. 사후 수익
8.2. 어록
10. 수상 기록
10.1. 그래미 어워드
10.2. American Music Awards
10.3. 헌액
11.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12. 바깥 고리

1. 소개

팝의 황제 (The King Of Pop)[6]

문화계의 인종 장벽을 무너뜨리고 대중음악에 큰 혁명을 일으킨 영원한 슈퍼스타이자 위대한 신화를 쓴 전설

마이클 잭슨은 1963년 5세부터 아버지의 고된 교육을 견뎌내며 가수 생활을 시작해 1970년대 잭슨 파이브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의 메인 보컬에서 팝의 황제(King of Pop)로 등극했다. 1991년 발매한 'Dangerous' 앨범의 성공과 슈퍼볼에서 새로운 퍼포먼스 개념을 정립하며 1980년대 못지 않게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팝의 황제로서 명성을 더 높였지만 '커리어' 항목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여러 풍파를 거치며 건강 상태가 악화됐고 2009년 마이클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의 무분별한 프로포폴 사용으로 5월달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 과실치사로 사망했다. 머레이는 체포됐고 2급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갔다.

마이클 잭슨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언론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돼 버렸고 실제로 그를 미친 사람(Wacko Jacko)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퀸시 존스는 2001년 자신의 자서전에서 비평가들이 마이클을 음악사에서 지우려는 것 같다며 걱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이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세계 곳곳에 기억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음악과 퍼포먼스와 뮤직비디오는 일개 1980~90년대의 오락거리가 아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대에게 전승되는 문화의 정수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 상상력은 백반증에 의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2. 경력

2.1. 1958년~1978년: jackson5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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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잭슨 5
THE JACKSON FIVE

멤버

재키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 마이클 잭슨, 티토 잭슨

입성 연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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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연소 빌보드 Hot 100 차트 1위 아티스트 (솔로 아티스트로서 최연소 1위는 12살의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가난한 흑인 집안의 10명의 자식들 중 8번 째로 태어났었다.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소아마비로 영구적으로 절뚝거리는 신체적 불편을 안고 있었고 파트 타임으로 가정부 일을 했으며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특별한 직업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철강 노동자였다. 조지프는 음악에 관심이 있었고 가족의 수입을 보충할 겸 R&B 밴드인 Falcons와 함께 기타를 연주했었다.

조지프는 자신의 자녀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들을 모아 잭슨 브라더스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마이클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초기에는 밴드에 들어가지 못 했지만 마이클이 4살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뛰어난 재능을 과시하는 것을 보고 캐서린이 조지프에게 마이클을 밴드의 멤버로 추천했다. 그 결과 마침내, 마이클도 잭슨 브라더스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후 잭슨 브라더스는 '잭슨 파이브' 로 이름을 바꾼다.

마이클은 밴드에서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1965년 그의 형 저메인과 메인 보컬을 같이 담당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의 음성은 샘 쿡, 재키 윌슨을 연상케 하는 꽉찬 테너의 목소리로 매우 독특했고 테크닉도 대단하여 결국 저메인을 메인 보컬에서 사실상 밀어내게 된다. 마이클의 'Who's Loving You'를 들어보시라 그 조그만 소년이 어떻게 그렇게 슬프고 아름답게 성인들의 사랑을 외치며 불멸이 된 흑인 거장들의 목소리가 분출될 수 있을까? 소녀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잭슨 5에게 특히 마이클에게 녹아 들었다.

아무튼 그들은 열심히 여러 지역 탤런트 쇼,학교 축제,스트립 쇼,칵테일 바 등에서 공연을 했고 인디애나주 개리의 소규모 지역 레코드 사인 스틸 타운에서 최초로 'Big Boy'라는 상업용 싱글을 녹음했다. 빌보드 차트에 의하면 10,000장을 넘게 팔았다고 한다. 물론 여러 방송에서도 송출됐고 가족들은 그것을 들으며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녹음본은 유실된 줄 알았는데 25년후 재발견 되었고 리마스터하여 재발매 했다. 2014년 롤링 스톤은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Big Boy를 최초 보도했는데 굉장히 음질이 좋다. 유튜브

잭슨 5, 가운데가 마이클

명성을 쌓은 보이 밴드는 마침내 1969년 스티비 원더, 마빈 게이, 다이애나 로스 등의 대중음악 역사에 가장 중요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했으며 1961년~1971년 사이 무려 110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Top 10위 안에 진입시킨 흑인음악계의 영원한 전설 모타운 레코드 사와 계약을 체결한다. 모타운은 AM 라디오를 잘 활용했고 대중들이 쉬운 노래를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타운의 특징은 'Kiss (keep it simple, stupid)' 불리는, 간단하고 세련된 멜로디 구조로된 후크 송 위주의 곡들이었다.[8] 잭슨 5는 모타운이 만들어 낸 최고의 상품으로 1970년에만 무려 4곡('ABC','The Love You Save','I'll Be There','I want You Back')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렸다. 'I Want You Back'은 피치포크 선정 1970년대 가장 위대한 곡 2위에도 오를 만큼 여러모로 기념비적 작품으로 200만장 이상이 팔렸다. 잭슨 5가 대성공을 거둔 뒤 모타운에서는 이들을 주요 마케팅 대상으로 선정하여 잭슨 5의 'J5' 로고가 포함된 여러 물건을 믹스해서 판매했고 각종 TV 방송이나 잡지에도 열심히 나왔다.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발매된 'Jackson 5 Christmas Album'도 상업적 히트는 물론 비평가들에게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잭슨 5는 당대 최고의 밴드였던 '비틀즈'에 빗대어 '흑인 비틀즈'로 불릴 정도로 10대 흑인들의 우상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메인 보컬이었던 마이클 잭슨은 특히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마이클은 롤링 스톤 잡지의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었다.

2014년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잭슨 5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 밴드 1위로 선정했다

1971년, 마이클은 최초로 솔로 데뷔를 한다. 이때 빌 위더스의 Ain't no sunshine을 멋지게 커버해서 주목을 받았다. 유튜브 그 다음 해 싱글 발매한 'Be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멋지게 불러 마이클 잭슨의 기념비적인 라이브 영상 중 하나로 남게 됐다. 1971년 ~ 1975년 사이 마이클은 총 4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1집 Got to Be There 2집 Ben 3집 Music & Me 4집 Forever Michael 그러나 1,2집 외에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었다. 그럼에도 전형적인 모타운 풍의 마이클 잭슨의 독특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잘 어울리기에 마이클 팬일 경우 한번 쯤은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잭슨 5의 인기는 영원할 수 없었다. 1972년 마이클 잭슨의 성공적인 솔로 데뷔에도 불구하고 잭슨 5는 차트에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변화하는 음악 산업에 맞춰 'Dancing Machin'이라는 Funk와 Disco가 멋지게 조화된 좋은 앨범을 발매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와중에 모타운 사와 계약 문제가 불거졌고 잭슨 5 멤버들도 나이를 먹게 되면서 자신들의 예술적 자율성을 인정받아 스스로 레코드를 만들기를 원했다. 잭슨 5를 관리했던 매니저이자 아버지인 조지프는 불안해져 갔으며, 모타운은 '너희들은 어려서 아무 것도 못한다!'며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1975년 Epic 레코드사로 좋은 로열티를 받는 대가로 이적하기로 한다. 그러자 모타운에서는 계약 위반이라며 법으로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그들은 '잭슨 5'라는 이름을 쓰지 못 하게 되고 'The Jacksons'로 밴드 이름을 바꾼다. 참고로 저메인 잭슨은 당시 모타운 사의 사장 딸내미와 막 결혼했기 때문에 잭슨즈에 합류하지 못했다. 그래서 잭슨즈부터는 마이클 잭슨 혼자서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1976년 잭슨즈는 이적 후의 첫 정규앨범인 'The Jacksons'를 발매한다. 이 중 'Blues Away,Style of Life'는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작곡한 곡으로 앨범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Soul과 R&B,Funk로 구성됐으며 변성기를 거쳐나가고 있는 마이클 잭슨의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하다. 여기서 싱글 발매된 'Enjoy Yourself'는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6위 'Show You the Way to Go'는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8위를 차지했으며 앨범은 5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발매한 정규앨범 'Goin' Places'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실패했다. 이후 그들은 절차부심하여 1978년 흑인음악의 영원한 걸작 중 하나인 'Destiny'를 발매한다. 1곡을 제외하고는 모든 수록곡들을 잭슨즈의 멤버들이 만들고 프로듀싱 했으며 랜디와 마이클이 공동 작곡한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는 8분이라는 긴 런닝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디스코와 펑크 장르의 명곡이다. 'Destiny'는 마이클 잭슨 본인의 레코드 중에서도 가장 걸작이라는 평을 받으며 무려 미국에서만 200만장이 넘게 팔렸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7위를 차지했다. 한편, 'The Wizard' 영화에 출연한 마이클은 영화 촬영 중 프로듀서 퀸시 존스를 만났고, 같이 음악을 제작하기로 약속한다. 퀸시는 훗날 회고에서 마이클의 첫인상에 대해 지나치게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이라 걱정했다고 한다.

종합하자면 잭슨 5는 70년대 초반 대중 음악에서 가장 큰 현상 중 하나였고 3천만장 이상의 레코드를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97년 대중음악 역사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록 비평가 1000명의 투표에 의해 선정되는 권위있는 시상식인 Rock & Rol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99년에는 VH1이 선정한 록앤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44위에도 선정되었다.[9]

2.2. 1979년~1981년: Off The Wall

솔로 가수 마이클 잭슨, 그 장대한 여정의 서막

마이클은 거대한 야망과 욕심을 지닌 아티스트였다. 그리고 성인이 된다면 자신이 인생을 책임질 줄 알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과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79년 8월 마이클은 한 장의 메모를 작성했다. "MJ는 내 새로운 이름이 될 것이며 더이상 나는 마이클 잭슨이 아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완전히 새로운 모습,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는 잭슨 5 시절 노래를 부르던 꼬맹이로 냅두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가수,배우,댄서가 될 것이다"

퀸시 존스는 여러 거장들과 협업해 일했지만 'Jazz' 전문 프로듀서로 Pop 음악에는 딱히 실적이 없었다. Epic에서는 '너무 늙어서 안 돼 마이클'이라며 퀸시-마이클의 협업을 부정하려 했지만 마이클의 똥고집(..)으로 결국 퀸시와 마이클의 협업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명반 Off The Wall. 이 앨범은 1970년대 말 Disco 열풍[10]에 영향을 받은 Funk, Soul, R&B가 조화된 거대한 블록버스터 Pop앨범으로 70년대 중반의 'Dancing Machin'의 근원을 두고 있었다. 수록곡 'She's Out Of My Life'는 마이클의 발라드 곡 중 그 어느 것보다 정서적인 힘이 강하며 가장 카랑카랑한 시절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녹아내린 곡으로 이 곡을 녹음할 때 정서적으로 압도당한 마이클이 끝 부분에 계속 울었다고 한다. 'Working Day and Night'과 'Get on the Floor'는 댄스 플로어를 기반으로 한 곳으로 강렬한 멜로디와 리듬 훅은 지울 수 없는 독창적인 조화를 선보인다. 제일 강렬한 곡은 싱글 차트 1위에 올랐으며 현재까지도 흑인들의 파티에는 꾸준히 흘러나온다는 댄스 송이자 마이클이 작곡한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로드 템퍼튼이 작곡했으며 처음 듣는 사람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는 마스터피스 'Rock With You'였다. 평론가들은 이 앨범에 엄청난 찬사를 때렸으며 Phil McNeill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가수라고 평가했다.

198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1000만장 넘게 팔려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Off The Wall 앨범으로 마이클은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권위 높은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에서 2개의 후보로 올랐으며 'Best R&B Vocal Performance, Male'을 수상했다. 그러나 마이클은 '앨범도 많이 팔렸고 평론가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는데 고작 상을 1개밖에 타지 못한 것은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음악계에서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며 크게 낙담했다. 본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감이 더욱 컸을 것이다.[11] 얼마나 상심했는지 집에서 하루종일 울었는데 그 모습을 본 가족들은 자신이 미친 줄 알았다고. 마이클은 이에 대해 분함을 느끼고 조금이나마 자신을 알리고 싶어 홍보팀에게 미국의 유명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이 자신의 사진을 커버 사진으로 쓸 수 있는 지 물어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잭슨씨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고 마이클은 "흑인이 잡지의 커버가 되면 잡지가 안 팔린다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었다. 다음에는 결코 이들이 나를 무시할 수 없는, 나한테 한번만 인터뷰 하자고 매달리게 만드는 그런 앨범을 만들겠다"라고 굳게 다짐했다. 복선

1980년 9월 26일에는 마이클 잭슨에게도 중요하며 걸작인 'Triumph' 앨범이 'The Jacksons'의 정규앨범으로 발매된다. 9곡 중 5곡은 마이클이 공동 작곡, 'This Place Hotel' 1곡은 단독으로 작곡했는데 롤링 스톤에서는 이 곡을 마이클 잭슨의 가장 중요한 노래 50곡 중 하나로 선정했었다. 이 앨범은 100만장 이상이 팔렸고 마이클의 신들린 것 같이 미친 것 같은 보컬이 특유의 딸꾹질 창법과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앨범으로 평론가들은 극찬을 했으며 'The Jacksons'가 발매한 정규앨범 중에서는 최고로 평가받는다. 변호사 존 브랑카는 마이클이 1980년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를 받았다고 말했다.

2.3. 1982년~1985년: Thriller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

이 앨범으로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King Of Pop임을 인정받았다.

쇼 비지니스에서 가장 성공한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거대한 야망을 가진, 풋풋한 젊은 흑인 청년이 자신의 모든 바람을 이룬 순간이자 영원한 전설로 올라서게 된 순간이다. 마이클과 퀸시는 총 30곡을 작업했으며 최종적으로 9곡이 수록됐고 75만 달러를 제작비로 소모했다. 이 앨범은 기록과 영향력에 앞서 여러 거물들이 대거 합작한 초거대 블록버스트 앨범으로 'The Girl is Mine'은 폴 매카트니와 듀엣으로 불렀으며 "잠 못드는 밤, 이 도시가 사과일 뿐이라며 한입 깨물어 먹고 싶다, 왜냐고 물어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해줘요."라는 철학적인 가사와 앨범에서 상대적으로 느리며 차분한 'Human Nature'는 유명 록 밴드 '토토'의 스티븐 포카로와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존 베티스가 공동으로 작곡한 곡으로 매력적인 80년 초의 마이클의 음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다소 우울하기도 한 발라드 곡이다. 몽환적이고 현란한 히트곡 'P.Y.T(Pretty Young Girl)'은 1982년 그래미에서 'Best New Artist' 후보에 오른 제임스 잉 그램과 퀸시가 공동 작곡했다.

마이클 잭슨은 Wanna Be Startin' Somethin', The Girl is Mine, Beat It, Billie Jean 총 4곡을 작사/작곡했는데 이 중 'Wanna Be Startin' Somethin'은 피치포크가 선정한 1980년대 가장 위대한 곡 2위에 오르면서 당신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가 될 거라면 이런 거대한 곡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썼으며 비평가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전투적, 활동적이며 최고의 노래이자 앨범에서 가장 신선한 6분대의 펑키한 곡으로 평가한다. 가사는 가십 언론과 아무런 이유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지적하는 곡으로 '빌리 진'이라는 여성을 가사에서 언급하는 데 야채를 먹으라는 독특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특히 이 곡의 하이라이트이자 절정인 '마마세 마마사 마사쿠사'는 마누 디방고의 아프리카 명곡 'Soul Makossa'에서 따온 것으로 전체적으로 리듬과 훅 등도 따와 디방고가 표절로 고소했었다. 디방고는 마이클의 변호사들과 100만 프랑에 합의하여 디방고는 'Wanna Be Startin' Somethin' '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퀸시는 앨범에 강한 비트의 Rock 곡을 포함시키고 싶었고 마이클은 부끄러워 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Beat It'을 둘려줬고 퀸시는 최초 녹음된 데모를 듣고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Van Halen이 기타 리프로 참여한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크로스 오버 명곡으로 'Beat It'의 뮤직비디오는 마이클 잭슨을 국제적인 슈퍼 팝 스타로 만드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저메인 잭슨은 마이클에게 영감을 준 라이벌 갱들간의 설전은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살 때 실제로 봤던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이클의 영원한 상징이 된 'Billie Jean'의 자세한 내용은 문서를 참조하시라.

뉴욕 타임스의 존 로크웰은 오늘날 대중 음악 역사의 가장 거대한 가수 중 한 명이 만든 멋진 팝 레코드로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완벽하게 크로스오버 했다고 평가했으며 게리 멀홀랜드 음악평론가는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했다. '스릴러'는 흑백을 초월해 미국인들의 하나의 생필품처럼 인식돼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Thriller'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1984년에 기네스북에 등재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 참고로 Thriller는 84년 3월 5일 시점에서 CBS 레코드의 집계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3090만장이 팔렸으며 현재 시점에서는 6500만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의 마이클 잭슨.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의 마이클의 잘생긴 얼굴 또한 많은 소녀 팬들을 울린 요소 중 하나였다.

이 앨범은 귀로도 완벽하지만 눈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것은 뮤직비디오다. 이전까지는 대중음악에 있어서 뮤직비디오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홍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따라서 뮤직비디오가 부각되지도 않았고 단순하고 굉장히 촌스러웠다. 그러나 마이클은 역으로 뮤직비디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Billie Jean'과 'Beat It', 'Thriller' 뮤직비디오를 영화계의 스텝들과 연계하여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로 제작하였고 스토리텔링에 맞춰서 현란한 춤을 추는 마이클의 모습은 음악산업을 뒤엎었다. 즉,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어 버렸다. 1983년 3월에는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마이클은 빌리 진을 부르며 나타나서 문워크를 최초로 선보였는데 해당 공연은 녹화돼 5월달에 TV로 전국으로 송출됐으며 미국 전역은 아주 난리가 났다. 뛰어난 음악, 뛰어난 뮤직비디오, 거기다 뒤로 가는 듯한 그의 신비한 춤으로 인해 그는 단번에 미국의 영웅으로 등극했고 마이클의 큰 대중적 성공을 본 뮤지션들과 레코드사들은 이후 음악산업에서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Thriller의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이어졌다. 당시 전 세계의 음반 시장은 퀸시 존스를 비롯하여 Thriller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요즘 음반 시장 상황을 보면 Thriller는 200만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 이라고 할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는데[12] 사람들은 마이클의 음반을 사기 위해 다시 레코드 가게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이 덩달아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사면서 쇠퇴하던 음반 시장을 살리는데 큰 기여를 한 것. Thriller는 일주일 동안 꾸준히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도 당시 음반 업계는 마이클의 성공으로 크게 도움을 봤다고 말했다.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2월 그래미 어워드에서 마이클은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받아간다. 이는 최다 후보/최다 수상이라는 신기록으로 현재까지도 유효한 기록이다. 5월에는 백악관에 가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마약 퇴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상을 받는다. 레이건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이 없다며 놀랄 정도로 수많은 인파들이 상을 받는 마이클을 보기 위해 백악관으로 몰렸다.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있는 단일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2년 뉴스위크는 더이상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와 같은 거대한 인기를 끄며 라디오-방송국을 통합하는 록앤롤 스타는 더 이상 등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고작 몇 개월만에 마이클 잭슨은 뉴스위크의 예측이 틀렸음을 보여줬다. 사실 뉴스위크가 이런 예상을 할 만 했던 것이, 비틀즈 이후로 마이클 잭슨까지 약 12년간 거대한 스타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 후인 1984년 뉴스위크는 마이클 잭슨이 The Jacksons의 멤버로서 여는 'Victory Tour'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비틀즈 이후로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미디어들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으며 (1982년에는 흑인음악이 빌보드 차트에서 소외되고 있었음은 물론 백인과 흑인들간의 음악이 명백히 분리되고 있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마이클의 유명세가 알려져서 인종차별까지 완화됐다고 보도했다. 마이클의 유명세는 대한민국에서도 엄청 났다. 조용필과 비견될 정도였다는 것이 80년대 신문기사에서 확인됐다. 또 1988년 9월 7일자 한겨레 신문 보도에서는 요즘 학생들이 마이클 잭슨의 생일인 8월 29일은 기억하면서 정작 국치일이었던 8월 29일은 잊었다며 학교 선생님이 서글프다고 심정을 토로한 부분까지 있었다!

비틀즈 이래 가장 폭발적인 현상이라 그는 쉽게 분류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시대의 제임스 브라운 같이 현저한(탁월한) 흑인 팝 뮤지션이자, 영혼을 담은 노래와 열정적인 연출기법의 명수이며, 그는 혁신적이면서도 깊은 전통에 흠뻑 젖어 있는 맹렬한 리듬으로 춤을 출 수 있다. 초기 비틀스처럼, 그는 긍정적인 음악 애호가이며, 때로는 가장 인기 있는 팝 스타인 폴 매카트니와 협력하기도 한다. 그는 마치 록 가수들의 우상인 팻 부니처럼 귀엽고, 건강하고, 경건하며 현대 녹음 스튜디오의 거장이면서도 프레드 아스테러와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고풍스러운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어 한다.

뉴스위크 1984년

한편 당시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동화책에 나오는 피터팬과 같다고 언론에게 묘사받았다. 여자같이 곱상한 얼굴과 변성기를 제대로 거친 것 같지 않은 중성의 목소리 그리고 어디서나 얌전하고 수줍어하며 공손한 모습, 또 인터뷰를 하지 않으며 은둔하는 마이클은 마약을 하며 여자들을 후리고 다니고 거침없는 말을 쏟아내는 선배 록스타들과 팝스타들이 보여준 모습들과는 굉장히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 사회학자들은 마이클 잭슨의 이런 보수적인 이미지가 그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도 추측했다.

1984년 6월 2일에는 The Jacksons가 'Victory'라는 정규앨범을 발매한다. 마이클은 8곡의 수록곡 중 2곡은 형제들과 같이 2곡은 혼자서 불렀다. 단독으로 부른 곡 중 하나는 'Be Not Always'로 5분의 긴 곡인데 졸릴 때 자장가로 안성맞춤일 만큼 마이클이 차분하게 노래를 이끌어 가는 데 중간 중간에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상황에 딱 어울리는 곡, 그리고 이 앨범에서 하이라이트는 'State of Shock'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올랐으며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에도 선정됐다. 마이클과 랜디 잭슨이 공동으로 작곡했으며 무려 롤링스톤즈의 보컬이자 작곡가인 믹 재거가 듀엣으로 참여했었다. 믹이 왜 듀엣으로 참여했을까? 마이클의 스릴러가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자 믹은 감탄하며 마이클 잭슨에게 사로 잡혀 그의 인생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고 ... 원래 믹이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흡수하는 뮤지션이기도 하기에 당시 팝계의 선두였던 마이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State of Shock'을 부르기 전 마이클이 목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하자 당연히 응하면서 그를 존중했다고

참고로 빅토리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200만장이 팔렸는데 곡의 퀄리티가 'State of Shock'을 제외하고는 너무 평범하고 그 이전 데스티니, 트라이엄프 앨범과 비교하면 상당히 별로이다.그런데도 그 앨범들보다 미국 내 판매량이 높음은 물론 CBS 역사상 선주문량 최고 기록을 갱신한 걸 생각하면 마이클의 스릴러 성공 덕을 단단히 본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해 7월에는 동명의 투어인 'Victory Tour'가 개최됐다. 그러나 투어 소식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티켓 판매 방식이 너무 상술적이라고 마이클 혼자서 쏟아지는 비난을 다 받았다. 실은 마이클이 티켓 판매 방식에 관여한 게 아니었고 형제들이 한 짓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마이클은 기자회견을 열고 판매 방식을 수정할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얻은 모든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도 기부함으로서 논란은 사그라 들었다. 아무튼 이 투어는 언론에서도 록앤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콘서트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고 마이클은 북미 전역을 누비며 성공적인 콘서트를 마쳤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사실 이 시기 마이클은 형제들에게 독립하고 싶어해서 같이 투어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콘서트 내내 형제들과 말도 안 하고 따로 지냈다고 한다.결국 콘서트 마지막 날 형제들과 한 마디 말도 없이 마이클은 잭슨즈의 투어는 이것이 끝이라고 깜짝 선언하였다. 이러한 형제들과의 불화는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마이클의 이미지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왼쪽)과 영부인 낸시 레이건(오른쪽)과 함께, 레이건은 'Victory Tour'가 워싱턴에 개최될 수 있도록 마이클에게 요청했었다. 왜냐면 당대 최고의 폭발적인 스타의 공연은 지역 사회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1985년 자선과 기부에 관심을 많이 가진 마이클은 We Are The World라는 초대형 자선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마이클은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곡을 만들었고 이 싱글은 1400만장 이상이 팔린다. 'We Are The World'의 작사/작곡은 마이클과 라이오넬 리치가 공동으로 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노래의 두 소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마이클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예상 외로 상당히 빨리 곡이 완성됐다고 한다.

2.4. 1986년~1990년: Bad

가십의 절정, 성공적인 80년대의 마무리

대중들이 생각하는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천재적인 아티스트 혹은 이상한 사람, 그리고 이상한 사람 이야기는 1986년 절정에 달하며 마이클 잭슨을 음악적 이미지에서 밀어내고 가십의 연예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당장 어느 매거진을 가봐도 'Thriller' 시기 까지는 음악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Bad' 앨범의 시작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가십이 80%고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질 않는다.1987년 '타임지'는 마이클 잭슨의 가십 이미지가 음악을 가려버렸다고 썼다. 또 1986년부터 피부색이 하얘지기 시작했고 1987년 발매된 'Bad' 앨범 커버에서 마이클은 마치 백인처럼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당연히 세간의 화젯거리였다.

마이클 잭슨은 엔터테인먼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공격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그의 탁월한 성공을 불쾌하게 여긴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에게서 나왔는데 마이클은 백인 록 음악 평론가들의 우상 모델에 적합하지 않았다. 기타연주와 문학적인 비평 대상이 될 수 있는 노래를 작곡하고 춤출 수 있는 백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선호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대표한다. 이런 전통은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이 알 수 있을 리 없고 이미 세상을 뜬 구세대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ㅡSPIN 매거진 1987년.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가십적 이미지를 가지게 됐을까? 마이클이 1984년 펩시 광고를 찍는 도중 화상을 입고 화상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무렵, 마이클은 산소로 가득 차 있는 챔버를 보게 된다. 마이클과 동행한 의사는 아직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기술이 발전되어서 챔버 안에서 자면 노화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진 마이클은 챔버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요청,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아래가 그 당시의 사진.

하지만 이 사진이 타블로이드로 유출되면서 마이클은 늙고 싶지 않아서 매일 산소방에서 잔다는 루머가 돌게 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샀다는[13] 소문까지 돌게 된다. 심지어는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마이클이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침팬지[14]를 구매한 것도 언론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86년 마이클에게는 Wacko Jacko (괴짜 잭슨) 라는 별명이 탄생했고 이 시기 타블로이드지 <피플>은 팝계 간단퀴즈라며 마이클 잭슨은 이상한 건가? 아닌 건가? 라는 특집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매니저 딜레오를 찾아가 이 일을 당장 그만 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지만 정작 마이클은 즐기고 있었다고 (..) 캐서린 잭슨은 '내 아들 마이클 잭슨'을 집필했었는데 당시 아들 이름이 가십에만 올라와 있어 속상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 잭슨 5 시절 마이클이 성전환을 받고 결혼할 거라는 황당한 보도가 있고 나서 마이클의 소녀팬이 그 기사를 보고 마이클에게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었는데 스릴러 앨범의 대성공과 'Victory Tour'의 표 판매 이후 타블로이드의 거짓 보도[15]가 심하자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마이클 측은 루머에 반박 성명을 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비틀즈 카탈로그 구매 이후에도 아주 심했다고 ... 즉, 항상 심했던 가십이 86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과 양상에서 몇 단계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은 1982년 발매한 'Thriller' 이후 몇 년간 솔로 정규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있기에 Epic 레코드는 물론 팬들도 눈이 빼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이클은 새 앨범 Bad를 위해 60곡을 준비하고 30곡을 녹음하여 트리플 앨범으로 발매하기를 원했지만 퀸시는 상업적 이유나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10곡을 수록한 1LP&1CD를 제안했고 결국 1LP&1CD로 가게됐다. 이 앨범은 마이클이 가장 많은 곡을 혼자서 만들었는데 11곡 중 9곡을 단독으로 작사/작곡했다. 당시 마이클은 퀸시 존스의 영향력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었기에[16] 자신이 앨범의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다.[17]

앨범은 1987년 8월 31일 발매됐고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6주간 1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에서는 900만장, 세계적으로는 3200만장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는 390만장이나 팔려 아직까지도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op 10위 안에 들어가 있다. 마이클 은 'Off the wall'의 기록을 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Thriller'가 깼으니 'Bad'도 스릴러를 깨는 것이 가능하다며 그것을 위해 모든 수록곡이 히트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또, 빨간 마커를 들고 항상 화장실에 갈 때는 100,000,000장을 썼는데 이건 배드 1억장 팔아서 당시 기준으로 4000만장 이상 팔린 스릴러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였다고! 퀸시는 모든 곡이 히트곡이어야 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Bad 앨범은 스릴러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 했다. 'Bad'가 세운 기록도 팝 앨범들을 통틀어봐도 거의 없는 대성공이지만 마이클 잭슨에게는 상당한 실망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월터 예트니코프는 마이클 잭슨이 상당히 경쟁 욕구가 강했다고 하며 "마이클은 자신이 발매한 게 1위를 못 하면 전화를 해서 어떡해요 월터 제가 작업한 게 1위를 못 했어요" 라고 하소연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렇지만 이 앨범에서는 무려 5곡이 빌보드 1위에 올랐는데 한 개의 앨범에서 5곡이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것은 마이클이 최초로 세운 대기록으로 80년대만 9곡의 빌보드 1위곡을 보유하게 됐고 이는 1980년대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가장 많은 1위를 차지한 아티스트였다.

그렇다면 평단에서는 어떤가? 일반적으로 잘 만든 최고의 기술들이 동원된 앨범이라며 긍정적 칭찬을 받았다. 뉴욕타임즈는 스릴러를 보여준 남자가 뭘 보여줄 까 하는 의문을 던지며 수수께끼의 팝 스타가 만든 잘 만들어진 인기 얻기 좋은 댄스 레코드라고 평가했고 LA타임즈는 스릴러의 다음 작품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걸작이라고 USA투데이는 스릴러 이후 최고의 댄스 패키지라고 썼다. 롤링 스톤은 몇몇 곡은 스릴러보다 더 섹시하고 풍부하다고 했으며 Robert Christgau는 수년 동안 본 가장 강력하고 일관성 있는 Black Pop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앨범은 지난 시간 동안 논란이 된 자신을 이야기 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로 가득찬 곡들로 가수는 노래 뒤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았다. 또 몇몇 곡은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는 데 특히 스티비 원더와 듀엣으로 부른 'Just Good Friends' 곡이 꼽힌다.

2012년 Bad 25주년 기념으로 스파이크 리가 Bad 앨범 제작 시절 일화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는 데 마이클 잭슨 갤러리에 자막이 있는 동영상이 있으니 보고 싶으면 이것을 클릭하면 된다.

Bad 앨범 발매 후 곧바로 마이클은 자신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를 시작한다. 일본을 처음으로 시작된 Bad Tour는 총 123회 공연, 440만 명의 관중들을 불러 모으며 80년대 가장 높은 수입을 거둔 투어 2위, 솔로가수의 투어로는 1위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특히, 영국웸블리 스타디움에선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18]을 세웠고 공연 도중 마이클의 공연에 열광한 나머지 기절하는 사람과 부상자가 속출했는 데 Bad 투어 이전에 역시 영국도 마이클의 가십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Bad 투어의 성공적인 마침으로 영국에서는 마이클의 음악 이야기가 다시 주를 이뤘다고 한다.

''잭슨은 너무 독특해지려다 다소 기괴하게 됐지만 잭슨에 대한 기업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잭슨은 늙지도 젊지도 흑인도 백인도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잭슨은 완벽한 마케팅 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ㅡLA타임즈 브리짓 바이른.

1988년 그래미 시상식이 열린다. 마이클은 당연히 'Bad'가 좋은 성공을 거뒀기에 상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상식에 참여했지만 단 한 개의 상도 얻지 못 하는 이변을 겪는다. 당시 시상식 중계를 보면 마이클의 표정이 시종일관 언짢았던 모습이었다.1988년 그래미 시상식 주위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이클은 그래미 시상식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마이클이 상을 하나도 못 받은 이유는 당시 마이클의 지인이 한 말에서 잘 나타난다. "그래미가 산소 체임버 안에서 자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어요?" 또, 당시 경쟁 아티스트들과 작품들이 어마어마 했는 데 휘트니 휴스턴은 물론 대중음악 역사에 남을 걸작인 U2의 'The Joshua Tree'와 프린스의 'Sign o' the Times'가 경쟁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987-1988년은 아티스트들의 경쟁이 아주 치열할 때로 싱글 차트의 경우 1위 자리를 2주 이상 유지하는 게 매우 어려울 정도로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분명히 1980년대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 할 기록을 세웠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인데도 'Wacko Jacko' 논란으로 '기괴함. 즉 잭슨 미친 거 아니야?'라는 이미지를 갖게 돼 음악적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 LA타임즈는 Wacko 이미지가 마이클의 재능을 가려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음악잡지 <롤링 스톤>에서 1988년 실시한 가장 최악의 컴백 가수는 물론 최악이란 수식어가 붙는 조사마다 독자들은 1위에다 마이클을 뽑았을 정도, 논란이 많았지만 인기도 높아 영국 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왕실을 제치고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시기 마이클은 괴짜라는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고,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어떤 가수도 넘볼 수 없는 폭발적인 상업성과 대중성도 소유하고 있었다. '캐서린 잭슨'은 이맘때쯤 마이클이 어땠는 지 회고한 부분에서 마이클이 어느 마을을 갔다고 하면 그 마을 언론사는 하루종일 마이클을 취재하기 위해 극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마이클 얼굴 좀 보려고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80년대를 마무리 하며 1990년 마이클은 41%의 로열티를 받았는데 당시 스타들의 평균 로열티인 12%보다 훨 높았다.

마이클의 친한 친구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1989년 시상식에서 마이클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 칭했다. 이것이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이 된 계기라는 게 지난간의 말들이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다. 'King Of Pop'이라는 칭호는 테일러 이전에도 이미 몇몇 언론에서 마이클을 칭하는 데 사용했던 별명이었다. 근데 이것이 유명 스타에게 관례적으로 붙여주냐 아니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King of Rock And Roll' 처럼 독자적인 것이냐는 거다. 전자의 경우 휘트니 휴스턴 사망 때 한 언론에서 'Queen of Pop is Dead'라고 칭한 것이나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이 사망했을 때 언론에서 'Prince of Pop is Dead'라고 한 것처럼 혹은 국내 언론이 오아시스 같은 밴드에게 브릿팝의 황제다라고 해주는 것처럼 유명인들에게는 관례적으로 써주는 호칭인 것에서 벗어나 언제부터 'King of Pop'이 마이클 잭슨만의 고유한 명칭이 된 것이냐는 의문이다. 마이클의 변호사 존 브랑카는 마이클이 'The Glove One (한 개의 장갑)'이라는 별명이 언론에 많이 쓰였었고 마이클은 자신이 그렇게 대접받는 것에 화를 냈다고 한다. 가령 프랭크 시나트라는 리더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보스로 불리며 엘비스는 왕으로 불리는 데 스릴러로 큰 성공을 거둔 나는 무엇이냐는 거다. 에픽 레코드 임원인 Larry Stessel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Boss','King'과 같은 별명 즉, 자신이 'King Of Pop'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를 원했었고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그의 홍보 담당자 Bob Jones를 이용해 'King Of Pop'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었다고 한다. 'MTV'의 역사를 설명하는 MTV : Uncensored Story of the Music Video Revolution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1991년 초 자신이 King Of Pop으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MTV에게 요청했고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를 방영할 때 모든 방송사에서 그렇게 불리길 원했으며 MTV는 자신들의 회사에 마이클 잭슨이 끼친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고 그가 팝 최고의 슈퍼스타임이 분명하기에 일주일에 2번 이상 'King Of Pop'으로 말하기를 지시했다고 했다. 추가적으로 대만의 프로모터는 Dangerous Tour 를 회고하며 마이클이 'King Of Pop'을 투어 판촉 포스터에 꼭 포함시키길 원했다고 했으니 종합하자면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King'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생각했고 그 바람을 언론이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해외의 마이클 안티들은 이걸 비꼬아 'Self-King Of Pop'이라고 비꼬운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 상' 을 수여한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영예란 영예는 다 누렸으며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만나길 바랐다. 그는 피부색을 초월한 슈퍼스타 였기 때문이다.

Bad를 이름으로 한 모든 캠페인이 마무리 되고 마이클은 더이상 퀸시 존스와 함께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이 퀸시와 더이상 일하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편견 때문이었는 데 앞에서 인용문으로 쓴 1987년 스핀 매거진의 보도에는 사람들은 마이클이 몇 곡을 작곡했지만 뛰어난 작곡가는 아니라며 무시해 버리고 모든 성공을 퀸시의 공으로 돌려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Bad 앨범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퀸시 존스의 사단인 A팀과는 작업하지 않고 자신의 B팀과 1985년 하반기에서 1986년까지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Smooth Criminal 등을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운드에서도 퀸시와 의견 차이가 있었고 Larry Williams 도 확실한 마찰이 있었다고 동의했으며 Michael Boddicker도 마이클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퀸시는 한편 마이클을 힙합- 열풍에 맞춰 음악을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힙합 그룹 Run DMC와 미팅을 열고 Bad 앨범에다 힙합 트랙 Crack Kills[19]를 넣으려고 했는 데 모종의 이유로 결렬됐다. 퀸시는 2010년 가디언과 인터뷰하길 마이클은 퀸시는 사업을 몰라, 랩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또 Smooth Criminal 곡을 앨범에 포함시키길 퀸시가 싫어하여 불만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퀸시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는 많은 시상식들에서 퀸시에 대한 경의를 표했으며 퀸시의 딸과 화보 촬영도 했었고 하지만 마이클이 원했던 것은 완전한 제작의 자유 그리고 성공이 퀸시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에 대해 루머가 퍼졌는 데 마이클이 돈이 없으니 퀸시를 짜르자고 한 걸 우연히 퀸시가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마이클은 퀸시에게 다시 작업해달라고 용서를 빌었다는 스토리로 출처는 1990년 동아일보의 유명 팝 칼럼니스트가 쓴 이야기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없어 팝 음악 정보는 오로지 잡지나 팝 칼럼니스트들에 의지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폐쇄적인 국내의 배경 때문인지 진실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의 팝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책들에는 저 설명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어느 해외 기사에서 나온 소스인 지 알아보기 위해 추적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을 설명하는 해외 매체 그 어디에도 저런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 대표적인 마이클의 루머(..)

2.5. 1991년~1993년: Dangerous

화려했던 전성기의 마침표[20]

1990년 말, 마이클은 지난 18개월 동안 새 앨범 작업을 해 왔으나 여전히 일부 사운드에 만족하지 못했었다. 지금까지 녹음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최고이며 현대적인 무언가를 찾았고 사운드 엔지니어 Bruce Swedien는 마이클이 원하는 건 '젊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지금 인기있을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클은 테디 라일리라는 젊은 프로듀서를 그 사운드를 새 앨범에 가져올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목했다. 테디는 80년대 후반 뉴욕에서 파생된 뉴 잭 스윙 사운드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뉴 잭 스윙은 R&B의 댄스와 힙합의 박자를 섞은 것이다. 마이클은 자신의 여동생 자넷 잭슨의 명반인 Rhythm Nation 1814에서 귀에 띄는 뉴 잭 스윙 사운드와 앨범의 베이스에 감명을 받았었는데 이는 Jimmy Jam과 Terry Lewiw의 전형적인 스타일이었다. 마이클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Rhythm Nation'과 'The Knowledge'을 꼽았고 잼과 루이스가 자신의 앨범에서 작업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자넷과의 우정을 생각 거절했다. 마이클은 1991년 1월을 출시 목표일로 잡았으나 놓쳤고 앨범은 여름으로 밀려났다. 곧 마이클은 테디가 만든 음악을 들어야 했고 사운드 엔지니어 Way도 동석한 상태에서 3명은 스튜디오에서 모여 노래를 재생했다. 전형적인 hard-hitting로 뉴 잭 스윙 스타일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테디와 Way는 마이클이 좋아할까?라며 긴장했다. 그리고 마이클은 곡을 매우 좋아했는 데 이것이 Blood On The Dance Floor였다. 테디는 자신의 작업물이 마이클 마음에 드는 지 알아볼 유일한 방법은 그가 춤을 추냐는 것이었다. 실제 퀸시도 그랬듯 마이클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고 춤에 따라 앨범에 들어갈 곡을 결정하기도 했었다. 프로듀서가 마이클의 음악 트랙을 만들고 있을 때도 마이클은 항상 멜로디를 만드려고 했고 테디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마이클은 갑자기 새로운 앨범에 들어갈 'Remember The Time'의 초석이 될 멜로디와 코러스 훅을 만들었고 테디는 그것에 압도당했다고 회고했다.

1991년 3월 소니 뮤직은 마이클과 15년 동안 6개의 앨범을 발매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를 받았다고 한다. 예트니코프는 거래가 다소 무모한 것이 아니냐 생각했지만 소니의 경영진인 Michael Schulhof는 마이클이 과거처럼 작업을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표는 언론에서는 마이클이 10억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토미 모톨라는 "우리는 마이클에게 결코 10억 달러를 지불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마이클이 10억 달러를 받았다는 보도 자료를 원한다면 우리는 마이클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은 당대의 스타들과 항상 듀엣을 하려 했는 데 이번에도 역시나 였다. 대상은 마돈나였다. 마이클은 1991년 3월~4월 마돈나와 식사를 했고 최소한 3번 만났으며 언론은 그들이 커플이 아니냐는 소문을 냈다. 마이클은 마돈나에게 in the Closet이라는 신곡에 같이 듀엣을 하자고 제안한다. 테디는 'in the Closet'이 될 강렬한 비트를 만들었었고 마이클은 감명을 받았고 멜로디와 가사를 넣었다. 사운드 엔지니어 Rob Disner는 마돈나를 회의에 초청했었는 데 그들은 개인적인 방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었다 , 마이클에게 그녀의 방문에 대해 물어봤는데 그는 마돈나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으며 우리 모두 그녀가 그에게 'Move(아마도 마돈나 특유의 섹스 어필을 뜻하는 것 같다.)'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하지만 ... 마이클은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마돈나는 훗날 인터뷰에서 마이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다시 하고 싶다고[21] 말했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훗날 마이클은 2000년대 지인과의 사석 이야기에서 녹음된 것을 들어보면 마이클은 마돈나를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토로했었다. 아무튼 이 곡은 Grace Kelly와 Stinphanie가 함께 했다.

마이클은 리멤버 더 타임과 인 더 클로짓을 작업했고 테디와 더 작업하고 싶어했는 데 테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CD 샘플을 이용해 'She Drives Me Wild'를 작곡했고 마이클은 가사를 썼는 데 Brad Sundberg은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트랙이 별로라고 생각했으나 마이클은 여러 가지를 추가했고 지루한 트랙에서 음악 작품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Can not Let Her Get Get Away'도 테디의 CD 샘플을 이용했고 제임스 브라운의 사운드를 상기시키는 곡으로 곡의 모든 것을 나 혼자 연주했다며 테디는 자신은 멀티-연주자라고 자화자찬 했다. 또한 테디가 아닌 다른 제작자와 함께 만든 'Jam'과 'Dangerous'도 마이클은 테디가 사운드를 새롭게 하기를 요청했고 테디는 열심히 작업했다. Bruce Swedien는 테디를 매우 전문적이라고 칭찬했다. Epic의 마케팅 담당 Larry Stessel는 'Dangerous'에 대해 평가할 때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은 비틀즈는 리더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을 존경했어, 비틀즈는 다른 모든 일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이 만드는 것을 만들어 왔지 그리고 마이클과 나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 했어" 라면서 테디 라일리를 통해 마이클이 다른 아티스트들의 리드를 따라가려고 한 첫 번째 앨범이었다고 평가했다.[22]

마이클은 일부 트랙에 다소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테디가 몇 달 전에 팀에 합류하면서 앨범의 방향이 바뀌었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Bad 발매 이후 무려 4년이 지난 상태였고 소니는 어떻게든 추수 감사절 이전에 앨범 완성을 목표로 마이클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앨범의 완성이 늦어진 것은 'Bad'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이클은 완벽주의자로 자신의 귀에 맞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시 작업했다. 그의 목표는 남녀노소 피부색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걸작이었다. 즉, 자신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면 레코드 사에 앨범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오프 더 월과 스릴러 제작 때는 매우 빠르게 제작했지만 배드 때부터 음악 제작에 대한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던 것이었다. Thom Russo는 마이클의 완벽주의를 경험하며 보컬도 매우 느리게 하며 그는 완벽주의자이기에 음반사를 좌절 시켰지만 어쨌거나 완벽함이 아니면 아무 것도 그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Way는 마이클은 준비가 될 때까지 보컬을 하지 않았다며 마이클의 편집증과 같은 모습에 동의했다. 9월에는 마이클은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1분의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4백만 달러가 투자됐으며 다시 존 랜디스와 합작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제작비가 든 뮤직비디오 2위였다.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전 세계 27개국에서 동시 방영됐는데 당시 시애틀 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약 5억 명 이상이 동시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고 후에 2015년에는 뮤직비디오 역사상 가장 많은 TV 시청자 수를 기록한 업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Heal The World'는 1989년 가을에 떠오른 아이디어로 'Earth Song'의 창작 의도에 연장선상에 있는데 마이클은 지구 온난화 등에 크게 염려를 했으며 세상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곡들을 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유명한 영장류 학자인 제인 구달 박사는 마이클이 특히, 침팬지[24]의 위험에 영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0월 'Keep the Faith'를 녹음하던 중 처음 두 구절을 부른 후 그는 녹음 부스에서 나와 사무실 구석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 왜냐하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는 손상됐고 높은 음을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스튜디오 직원들은 모든 구성을 변경하여 낮은 음정으로 보컬을 부를 수 있게 했다. 10월 29일에는 마지막 믹싱이 이뤄졌다. Dangerous의 마스터 사본은 전 세계 공장으로 전달됐으며 소니의 추수 감사절 출시일 기준을 잘 준수했었다. Epic의 부회장은 앨범이 놀랍게 팔렸음에도 불구하고 스릴러의 숫자에 접근하지 못했기에 마이클은 행복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제일 첫 번째로 발매된 싱글 'Black Or White'는 팝과 록이 절묘하게 섞인 곡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차지하며 Dangerous의 성공을 촉진했다. 그러나 싱글 차트 성적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전 앨범들에 비해 좋지 못했으나 앨범은 불티나게 팔려나가 1992년까지 1500만장을 팔아치웠고 현재는 3000만장 이상을 팔아치운 것으로 추정되는 베스트 셀러가 됐다. 이 앨범은 미국과 영국에서의 판매량은 전작들에 비해 꽤 낮아졌지만 오히려 유럽 지역과 오세아니아에서 높아졌다.

지나치게 많이 팔린 음악을 듣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앨범은 훅 기법이 너무 이류적이고 그의 보컬 매너리즘은 종종 거슬리지만, [Off The Wall](오프 더 월)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앨범이고 [Bad](배드)에서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Teddy Riley(테디 라일리)는 혼자서 이렇게 불쾌하게 예측불허인 비트를 만들어 낸 적이 없고, 더군다나 그러한 비트를 능가할 가수는 배출한 적이 없다. 만약 10살짜리 아이가 원하는 만큼, 쉽게 다가오는 곡이 아니었다면 언제나처럼 그건 Michael(마이클)이 리듬적인 순간을 타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비틀즈보다 인기있다고 확신하는, 보이지 않는 남자(Invisible Man)의 연애사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그럴듯한 섹스와 로맨스를 외치며 팔고 있다. 'In The Closet(벽장 속에서)'에서 그는 그의 신비의 여인에게 그들의 욕정을 숨길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곧 그는 흥분하거나 예전 모습에 대한 간절한 향수를 재연한다. 그리고 그는 꽉 다문 입술 사이로 'Can't Let Her Get Away (그녀가 떠나게 할 수 없다)'라고 반복하여 내뱉는다.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미국의 음악저널리스트이자 락 비평가 Dangerous 앨범 평점 : A-,1991년, 멜론 번역

평론가들은 전작 'Bad'와 비슷한 평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단점도 뚜렷하다는 것이다. AllMusic은 Bad보다 훨씬 선명하고 오프 더 월과 스릴러의 일관성에 근접하지만 몇몇 곡은 완벽하지 않고 지나치게 러닝 타임(74분)이 길다고 지적했으며 LA타임즈는 앨범의 후반부가 가벼운 리듬의 팝으로 Bad 앨범의 속편 즉, 퀸시와 함께 했을 때의 히트곡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Heal the World는 최악의 곡으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릴 곡이라고 지적하며 Who is it은 빌리 진의 라인을 따랐다고 지적했다. 이는 1992년 1월 9일 롤링 스톤이 마이클 잭슨 컴백 기념으로 보도한 기사에도 지적하는 것인데 Heal The World는 전작 We Are The World를 Who is it은 Billie Jean의 움직임을 고대로 따내 앨범 수록곡의 절반이 이전 작품을 모방한 대중 호소적인 앨범으로 테디를 데려와 최첨단 사운드로 만들어 냈다고 지적하며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마이클에게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한 가지, 마이클은 전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창조하는 유능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끝맺었다. 이런 매너리즘이 비판의 주 이유였으면서도 Dangerous가 잘 만든 팝 앨범인 것은 사실이기에 긍정적인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Dangerous는 다시 마이클 붐을 일으켰고 마이클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1992년부터 'Dangerous Tour'를 진행한다. Dangerous 투어는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붕괴로 동유럽에서도 진행할 수 있었는데[25]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을 미국의 제왕으로 생각해 왔던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은, 마이클이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말하기도 하였다.[26]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진행된 공연은 미국의 케이블 채널인 HBO에서 구매하여 방영되었고 해당 중계는 무려 21.4%라는 시청률을 거두며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부카레스트 공연은 2005년 DVD로 발매되었다. 루마니아 공연 당시 공연티켓 가격이 루마니아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4분의 1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비쌌으나 이마저도 금방 매진됐고 마이클 잭슨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한 고아원에 들릴 때는 루마니아 대통령이 직접 나왔다고. 또, 총리와 여러 정치가들이 공연을 보러 왔으며 공연의 광란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신되고 고막이 파열돼 수술받아야 할 사람이 넘칠 정도였다고 한다. 잭슨의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새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의외로 투표율이 저조한 이유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잭슨 후유증'에 빠져서 그런 거라는 추측도 있었으니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가 많았는 지 알 수 있다. 이때 남미국가들을 투어에 추가시켰는데 멕시코의 아즈텍 스타디움에서 5일간 50만명을 끌어모으는 위엄을 보여줬다.

1992년에는 'Heal The World Foundation' 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해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또 다시 조지 부시에게 'Point of Right' 라는 상을 받는다. 부시 대통령은 마이클을 흑인의 본보기라며 치켜세웠다.

1993년 1월 16일에는 빌 클린턴의 초청을 받고 클린턴갈라쇼의 메인 게스트로 나와 'Gone Too Soon'과 'Heal The World'를 공연했다.[27][28]

1993년 1월 30일에는 미식축구의 결승전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와 역사적인 공연을 선보였는데. 전년도 하프타임에 비해 시청률이 8.6% 상승했다. 마이클이 나온 이후에는 많은 가수들이 홍보를 위해 슈퍼볼 하프타임에 나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후에는 오프라 윈프리텔레비전에서 1시간 이상 인터뷰를 했다.[29] 9천만 명의 이상의 미국인들이 시청하며 시청률은 47.9%로 미국 TV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 9위 (현재까지도)라는 기록을 세운다. 이후 마이클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살아있는 전설 상을 받으며 커리어에서 최절정을 이뤘고, 음악 활동 외에 자신을 모델로 하는 초콜릿 바를 만들어서 수억 원을 버는 등 앞으로도 걱정이 없을 듯싶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하였다.

슈퍼볼에서의 마이클 잭슨

1991년 데인저러스를 발매하고 1차투어를 끝낸 1993년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단순히 팝스타가 아니라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같은 존재였고[31]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절정의 커리어를 이룬상태였다. 마이클은 신격화 된 연예인이었고 미국의 대통령들은 마이클 잭슨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백악관으로 초청하기 까지 했으며 LA 시장 'Tom Bradley'는 마이클 잭슨의 날을 선포할 정도였다.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2.6. 1993년~1994년: 1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첫번째 결혼

약간은 묘하지만 근면하고 도덕적인 그는 80년대 가장 완벽한 '미국적' 성공사례를 창조했다.

로큰롤 스토리의 저자 폴 두 노이어

성추행 혐의 이전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가 어떠했는가? 비록 'Wacko Jacko' 논란으로 괴짜에다 좀 독특하다는 시선을 받았지만 천재들이란 원래 좀 유별나며 연예인의 가십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기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는 게 대중들의 생각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래미 시상식 6개월 이후 13세 소년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과 동시에 형사 수사를 받게 되면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며 마이클 잭슨을 상표로 한 모든 물건들은 백화점에서 파기되는 등 막대한 재정적 손실과 함께 커리어에도 지대한 부정적 영향을 얻게 됐다.

이 사건을 설명하기 전에 기본적인 가족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에반 챈들러는 Beverly Hills에서 치과 진료를 하는 의사로 준 챈들러와 사이에서 1980년 다재다능하며 사람을 재밌게 해주는 능력을 가진 조단 챈들러를 낳았는데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1985년 이혼했다. 챈들러 가족의 친구는 준이 에반을 떠난 이유중 하나는 에반의 성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05년 준 챈들러는 법정에서 에반은 각본쓰기에만 열중하며 가족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에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준과 재혼한 남자인 데이브 슈워츠는 1993년 마이클 사건이 터진 후 에반과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는데 챈들러가 화가 나 데이브를 폭행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데이브는 화가 나 이건 어차피 모두 갈취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에반에게 말했고, 그 순간 에반은 일어나 데이브에게 걸어 가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고, 이것은 에반의 친척 레이 챈들러도 확인해준 것으로 실제 에반이 데이브에게 폭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Geraldine Hughes는 7~8월 사이 에반이 데이브를 몇 차례 폭행했었다고 주장했다. 데이브 슈워츠는 에반과의 전화를 비밀리에 녹음 했었는 데 훗날 에반의 다음 아내인 모나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녀가 칸 영화제에 갈 것인데 빌어먹을 그것은 망할 섹스 파티라며 그녀의 불륜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모나크를 죽일 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을 끝맺었다.

1992년 5월 마이클은 로스엔젤레스에서 운전 중 차 고장이 났고 근처 카센터 직원에게 발견됐다. 그 카센터 사장은 데이브 슈워츠였으며 의붓 아들인 조단이 마이클의 열렬한 광팬임을 알고 있었다.(조단은 펩시 화상 사고로 고생하는 마이클이 있는 병원으로 쾌유의 편지를 보냈고 마이클은 감사 답장을 보냈었다. 또 마이클과의 광고에 출연할 어린이들을 뽑는 오디션에 조단도 참여했지만 뽑히지 않았다.) 당시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아 조단을 이용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단과 통화해주는 대가로 마이클에게 무료로 차를 빌려주겠다고 제시했고 마이클은 승락했으며 조단과 그의 가족 전체가 마이클과 친구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 이후 마이클과 챈들러 가족은 라스베가스 여행,월드 뮤직 어워드를 위한 모나코 여행,디즈니 랜드에도 가며,파리 여행까지 많은 것을 같이 하게 됐다.

마치 그녀가 잭슨에게 그녀의 아들을 억지로 떠안기는 것 같았다,내 생각에 마이클은 자기가 그 아이에게 뭔가 빚을 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거기서 전부 시작되었다.

카센터 직원 그린

1993년 2월 조단과 준 그리고 조단의 여동생 릴리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의 저택 네버랜드를 처음 방문했으며 3월에도 재방문 했다. 6월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조단이 마이클 잭슨의 침실에서 잠을 자도 되냐고 준에게 물었으나 준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조단은 자기 방으로 돌아오기 전인 새벽 2시까지 마이클의 방에서 놀았다

5월 20일에는 조단의 친아버지 에반 챈들러가 마이클 잭슨과 처음으로 만났는 데 에반은 조단과 마이클 간의 관계를 5월 12일 모나코 여행부터 질투하기 시작했었다. 마이클과 조단이 친밀한 관계로 친아버지인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이클과 아들의 관계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슈퍼스타와의 관계를 과시하며 에반의 집에 마이클이 방문했을 때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권장했었다. 마이클은 센추리 시티 콘도에 에반을 초대했고 에반 또한 마이클과 사이가 가까워 진다. 5월 25일 경 '내셔널 인콰이어러'라는 미국 타블로이드 잡지에는 챈들러 가족의 내용을 담은 마이클 잭슨의 비밀 가족이라는 특종이 보도됐는데 이 내용은 챈들러 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여동생이 돈을 받고 판 내용이였다고 한다. 현충일 주말인 5월 28~30일에 마이클은 에반 챈들러의 집에서 그의 모든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는 데 에반은 이때 마이클이 조단을 성추행했다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의심을 가진 이유는 마이클과 조단이 침대 위에 있는 걸 봤을 때마다 옷을 입었지만 30세가 넘는 성인 남성이 13세 소년과 같이 있고 앞에서 말한 친아버지로서의 질투가 겹쳐졌기 때문인 데, 익명의 출처에 의하면 마이클과 조단은 에반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하루 종일 자신들의 작은 세계에서 놀았다고 묘사한다. 조단은 마이클 특유의 복장을 코스프레 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에반은 스스로도 마이클이 성희롱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6월 9일 에반은 조단이 동성애자라서 마이클과 그렇게 가깝게 지낸 것이냐는 의문을 품으며 조단에게 직접적으로 스타 사이의 관계가 성적인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조단은 그것은 역겨운 짓이라며 그렇지 않다고 반발했다. 아무튼 에반과 마이클의 관계는 유지됐으며 펩시 화상 사고로 후유증을 앓고 있던 마이클은 그 통증이 재발해 고생하자 에반은 그가 아는 마취과 의사 Mark Torbiner를 데려와 마이클에게 통증을 완화할 약을 투여하고 마이클의 상태는 다소 헤롱해졌는 데 이것을 기회 삼아 에반은 마이클에게 Sexual에 대해 질문했는 데 마이클은 에반이 자신을 의심하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그 상태에서 에반이 마이클의 하반신 피부 상태를 엿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한다. 이 이야기를 뒤에서 나올 생식기 일치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해 보자.) 어쨌건 에반은 마이클이 자녀들과 같이 있을 수 있게 냅뒀다. 에반은 어느 날 마이클과 조단을 3번 비밀리에 확인했는 데 세 번째 봤을 때 둘은 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마이클이 팔로 조단을 감싸고 한 손은 옷 위의 허벅지에서 가만히 얹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레이 챈들러는 이것이 의심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기간 에반은 변덕스러워지기 시작했고 데이브와 준의 사이도 소원하게 만드는 협박을 하곤 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자연스레 에반과의 전화통화를 녹음했던 것이고 한 전화에서 에반은 데이브에게 "난 마이클과 좋은 이야기를 나눴고 난 그를 좋아했고 존중했다. 그가 나에게 전화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마이클은 에반에게 전화하는 것을 멈췄고 에반과 관계를 유지하기를 더이상 원하지 않아 에반은 화가 났다.) 저번에 방에서 마이클에게 이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것(앞에서도 말했지만, 에반은 각본쓰기를 좋아했는 데 그는 영화 산업에 관심이 많았다. 에반은 마이클과 소니의 거래에서 파트너가 돼 자신의 영화 프로젝트에 필요한 230억원의 돈을 자금으로 대주기를 요청했다. 1993년 8월 28일자 LA Times에서도 영화 산업에 있는 몇몇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마이클과 230억원짜리 영화제작과 자금조달 거래를 추구했다고 증언했었다.)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줬었다." 데이브는 도대체 마이클의 무엇이 에반을 화나게 했냐고 묻자 에반은 "마이클은 내 가족을 깨뜨렸다. 내 아이는 이 남자의 힘과 돈에 유혹당했다"며 주장했다. 그리고 다 준비됐어,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있다, 그들에게 돈을 줬고 계획대로 다 가고 있다. 내가 전화를 하기만 하면 이 사람 (에반의 변호사 베리 로스만)은 그의 시야에 있는 모든 것을 더럽히고 비열하고 잔혹하게 망가뜨릴 것이다. 그리고 난 그에게 모든 지휘권을 주었다, 그리고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난 정말 크게 이길 것이다. 내가 질 리가 없어, 그러도록 확실히 확인하고 내가 원하는 건 다 가질 것이고 그들은 영원히 파괴될 것이다. 준은 아이의 양육권을 잃을 것이고 마이클의 커리어는 끝날 것이다. 데이브는 그것이 아이를 도와주는 일이냐고 물었다. 에반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런 건 상관 없어, 이건 우리 모두를 넘어섰다. 시야에 있는 모두를 파괴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한다면 학살밖에 없다.

베리 로스만은 누구인가? 에반은 로스만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찾은 변호사, 난 정말 제일 비열한 놈을 찾았다,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빠르게 이 모든 걸 대중에게 퍼뜨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는 것이다. 그는 위험하고 똑똑하고 유명해지고 싶어한다. 로스만은 Century City에서 일반법을 전공했고 한 동안 리틀 리처드,롤링 스톤즈,더 후,오지 오스본 등을 위한 음악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전 직원은 로스만을 "끔찍한 성질을 가진 악마"라고 묘사했는 데 에반과 로스만이 오피스에서 나눈 대화를 다이어리에 적어뒀던 로스만의 동료는 로스만이 "이 모든 것을 꾸며냈어,틀림없이, 마이클 잭슨을 향해 혐의를 씌운 것은 그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로스만은 수년 간 너무나도 많은 적을 만들었는 데 수사관 Ed Marcus는 로스만을 향한 소송을 검토하고 그는 사람들의 돈을 떼먹는 것으로 평판이 나 있다며, 전문적으로 돈을 떼 먹는 사람같이 보인다고 증언했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로부터 3개의 사건에 관여해 징계 처분이 내려졌고 1992년에는 변호사 라이센스가 일 년 동안 유예되고 보호 관찰을 받았었고 몇 명의 채권자들로부터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았으며 11월에는 파산 신청을 한 전적이 있다.

이제 에반은 자신의 계획대로 가야 했다. 1993년 7월 7일 양육권을 얻기 위한 서류를 제출했다. 그 다음 따라올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준에게 있는 양육권부터 에반이 가져가야 한다. 그리고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를 공식화 하여 그에게 돈을 받아내거나 민사소송을 시작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조건 당사자인 조단에게 진술을 받아내야 한다. 에반은 7월 11일부터 자신의 집에 머물던 조단을 준에게 되돌려 보내길 거부하며 조단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7월 16일 에반은 조단에게 먼저 "너가 내게 거짓말을 하면 마이클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 기억하지?" 조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당신에게 질문할 것이니 잘 명심해, 마이클을 걱정하니?" 조단은 네라고 말했다. "너는 마이클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니?" 네, "그리고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니?" 조단은 No라고 말했다. 그리고 "좋아, 내가 너의 침실을 도청했다고 한 말 기억나?, 네가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너도 인정할 거야" 그러나 조단은 침묵적인 인상을 유지했고 여전히 마이클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반의 위협은 보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으로 됐다."나는 마이클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줄 거야, 네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 앞에 마이클을 데리고 가겠어, 그리고 마이클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이기 때문에 너 잘못인 거야" 그러면서 "나는 키스와 자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모르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명백하게 에반의 거짓말이다. 도청도 거짓이며 에반은 마이클과 조단의 성적 관계를 입증할 증거는 하나도 없었고 스스로도 목격한 적이 없다고 앞에 썼다. 에반은 덧붙이며 "거짓말 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거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위해 쉬운 질문을 할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하나의 질문을 할 거야, 예 또는 아니오라고 말하면 돼 그게 전부야. 거짓말 하면 마이클은 무너져, 진실을 말해 줘 마이클을 구해줘"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렇게 물었다. "마이클이 당신의 성기를 만졌습니까?" 조단은 주저하면 거의 속삭이는 듯한 말로 "예"라고 했다. 에반은 이제 듣고 싶은 것을 들었다 더이상 물을 필요는 없으며 팔을 뻗어 에반을 꽉 껴안아 줬다. 그리고 에반은 조단과 다시 한번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마이클의 형사 수사 당시 LA 지방검사에게 말했다. 에반에게 세부 사항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 챈들러는 "이미 에반의 마음에서 에반은 진실을 확정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조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클에게 민사소송을 걸기 위해서는 조단의 진술이 필요했다.[32]

여기까지 읽었다면 일부는 왜 이렇게 이야기가 디테일하며 심지어 감정까지 자세하게 묘사된 지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이 중 일부는 고소인 측인 에반 챈들러의 소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건 재판에 가지 않았다. 교차검증도 거치지 않았다. 남아있는 자료는 오로지 주위 증언들 뿐으로 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한 타임라인을 쓴다면 원인이 필요하고 즉, 고소인들의 소스가 믿을 수 있는 지를 떠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소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서도 이야기 하겠지만 챈들러와 마이클 측은 합의를 할 때 이 사건에 대해 외부에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근데 이렇게 자세한 고소인의 내용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앞에서 계속 언급된 레이 챈들러를 주목하자. 책 출판사 일을 했던 Judith Regan은 SiriusXM 라디오에 나와 레이 챈들러가 합의 직후 출판 계약을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공개했었다. 레이 챈들러는 에반의 전화를 받았는 데 에반은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를 자세히 설명할 책을 원했었다. 언제부터? 1993년 8월 말부터 즉, 조단의 진술이 당국에 보고되고 얼마 안 간 때부터 에반은 레이에게 자신의 정보를 전달했다. 캘리포니아의 Shield Law에 의하면 언론인들은 익명의 정보원을 통해 취득한 정보의 기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적 보호를 제공하였고 즉, 마이클 측과의 합의를 회피할 수 있던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합의 이후 조단이 증언을 안 한 이유로 에반은 조단이 삶의 터전으로 나가야 한다며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 안 됐으며 마이클 잭슨의 팬들로부터 몇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다. 근데 왜 에반은 이것을 으로 만들기를 곧바로 원했었고 레이를 이용하려 했을까? 더이상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싫으며 자신의 아들이 정상적인 삶의 터전으로 나가고 마이클 잭슨의 팬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 책은 최종적으로 마이클이 2005년 아동 성추행 혐의 재판을 앞 둔 2004년 9월 발간됐으며 레이는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는 웹사이트도 만들었었다. 그런데 그 웹사이트에 올라온 에반 측의 문서 자료들은 배리 로스만의 법률 비서였던 Geraldine Hughes에 의하면 서명이 틀리는 등 위조품으로 보인다고 추측했었다. 그리고 2005년 마이클의 재판 당시 검찰 측에서는 레이가 증언해주기를 바랐으나 거절했고 심지어 마이클의 변호인도 레이를 증인으로 소환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으나 레이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Shield Law에 의하여 소환을 막았다.(레이가 기자인 지는 논란이 있다.) 왜 그는 조카의 성추행을 법원에 증언하길 거부했을까? 결국 2005년 재판에서 유일하게 소환돼 증언한 사람은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준 챈들러' 뿐이었다.

한편 마이클의 사설 탐정이었던 Anthony Pellicano는 7월 16일 이전인 7월 9일 데이브와 에반의 비밀 전화녹음을 듣고 이것은 갈취 사건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독자적으로 조단을 찾아가 마이클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당했느냐고 몇 번을 물었었다. 그러나 조단은 그런 적이 없으며 우리 아버지는 돈을 원해요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7월 27일자 로스만은 에반에게 부모에게 법적 책임이 없도록 아동학대를 고발하는 법을 조언하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8월 4일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에반 그리고 조단은 Westwood Marquis Hotel의 스위트룸에서 마이클과 Pellicano를 만났다. 마이클을 만나자 마자 에반은 마이클에게 가 그를 다정한 것처럼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를 껴안았으며 이때 에반은 7월 14일경 로스만과 함께 만난 정신과 박사 애브람스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고 (물론 조단과 마이클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애브람스는 '성적 학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문구가 포함된 2통의 편지를 보냈는 데 에반이 그 편지의 내용을 그 자리에서 읽은 것인데 아동 성추행 부분에 다다르자, 조단은 '마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마이클을 쳐다 보았다고 한다. (마치~부분은 Pellicano가 바라본 시점에서 조단의 표정을 해석한 것이다.) 만남이 끝난 후 에반은 마이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널 망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 장면을 목격한 Pellicano는 6개월 후 Vanity Fair에서 인터뷰에서 나같으면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 한 인간은 패죽였을 것인데 에반이 마이클을 죽이지 않았고 또 저런 식으로 대했기에 실제 성추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굳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송을 하지 않는 대가로 마이클에게 2000만 달러를 합의금으로 요구했다. 2000만 달러가 어디서 왔는 지 알 수 있다. 앞에 230억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마이클은 그 후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Pellicano는 처음에 100만 달러를 제안했는 데 에반은 당연히 거절했다. 그 뒤 Pellicano는 35만 달러를 제시했는 데 로스만과 에반은 충격을 먹었다. 협상의 법칙에서 2천만 달러와 백만 달러에서 시작되면 다음은 그 중간 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 데 팍 낮춘 것이다. 결국 당연히 합의는 없었다. 레이 챈들러도 말하길 사건이 공개되기 전 마이클은 에반에게 돈을 지불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고 이는 에반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레이 챈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이클이 1994년 1월이 아닌 1993년 8월에 에반에게 2천만 달러를 지불했다면 다음 10년을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아동 성추행범이 아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으로 보냈을 것이다. 또한 법원은 에반이 조단을 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제 에반에게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였다.

8월 17일 이것은 법원이 조단을 반환해야 한다고 한 설정 기한이다. 합의는 없었기에 에반은 조단을 애브람스 정신과 박사에게 데려갔다. 조단은 처음으로 마이클과 있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한다. 미국 법에 의하면 아동의 성적 문제에 관해서는 곧바로 당국에게 보고해야 하기에 형사 수사를 촉발시키게 됐다. 또 이 주장의 결과로 에반은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조단을 전처에게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 2003년 12월 12일 애브람스 박사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단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판단해야 하기 위해서는 같이 충분한 시간을 지내봐야 하는 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당시 Dangerous 투어 때문에 해외에 있었으며 미국 경찰은 수색영장을 얻고 마이클 잭슨의 저택인 네버랜드와 마이클이 썼던 여러 거주지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성추행을 입증할 의학적 증거도 녹화된 증거도 범죄 혐의를 입증할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8월 27일 LA타임즈는 보도했다. 또 경찰은 거주지 급습 도중 전화번호부를 압수하여 30명에 가까운 아이들과 가족들을 심문하였으나 마이클에게 성학대를 당했다는 아이들은 없었다. 근데 이때 경찰들의 수사 방법은 문제가 있었다. 버트 필즈에게 항의했던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을 해도 경찰관들은 오히려 부모에게 아이들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명백한 말을 했다는 거짓 심문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은 어린 아이들에게 "너의 알몸 사진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겁먹게 했다. 또 한 경찰관인 페데리코 시카드는 자신 또한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며 아이들을 심문했었다.

1993년 타임즈는 이렇게 보도했다. "LA경찰은 거주지를 급습하여 마이클이 찍은 아이들의 비디오와 사진들을 몰수하였다. LA경찰은 그것들이 전부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고한다. 스타인 맥컬리 컬킨을 포함하여 잭슨이랑 친한 아이들은 경찰들에게 심문 대상이었고 그들은 관계는 완벽히 순수하다고 증언하였다. 수백, 어쩌면 수천명의 아이들은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 혐의들은 딱 한 명의 남자아이의 증언에 초점을 맞춘다."

준 챈들러는 마이클을 향한 고발에 대해 갈등을 빚다 8월말 방금 말한 시카드와 로시벨 페루피노를 만났는데 그 경찰들은 오직 피해자라 주장하는 어린이가 조단 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은 마이클이 전형적인 소아성애자의 윤곽에 해당하기에 그가 추행했다고 믿는다고 말했고 준도 에반과 연합하게 된다. 소아성애자들과 근친상간의 피해자들을 치료해온 미네아폴리스 정신과의사 랄프 언더웨이저는 전형적인 윤곽같은 건 없다,그들은 터무니 없는 실수를 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다른 출처에서는 준이 아이를 마이클과 같이 있게 했다는 점에 아동 방치로 고발당할 까 걱정한 것도 에반과 연합한 원인 중 하나였다고 한다. 준의 변호사 마이클 프리먼은 이 모든 것에 지쳐 사직하며 "이 모든 건 엉망진창으로 난 에반이 불편했다. 난 그는 진실된 사람이 아니고 공정하지 않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8월말 마이클 측에서도 갈취로 에반과 로스만을 고소하면서 로스만은 변호사에 사임하고 9월 레리 팰드먼이라는 변호사가 새로 고용된다. 그리고 펠드만은 9월 14일경 마이클에게 3천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그 이전에 데이브와 에반의 녹취록이 언론에게 유출돼 에반이 갈취범이라는 여론이 형성됐었는 데 덕분에 에반과 데이브는 서로를 이 유출 문제로 고소했었다.

마이클은 11월 11일 건강 문제로 Dangerous 투어를 중단하며 11월 16일 에반의 변호사 래리 펠드만은 120일 내에 민사 재판이 시작될 수 있도록 움직임을 부여하는 파일을 제기한다. 대개 이 요청은 14세 미만의 아동들에게 주어지는 데 즉, 에반 측은 형사 수사에 앞서 먼저 민사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고소인들에게 법을 유리하게 적용하고 13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기억력 문제로 이러한 것을 허용해준다. 11월 23일 마이클 측 변호사는 형사 수사에 앞서 민사 소송이 개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사 소송을 연기 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판사는 기각했으며 민사 재판이 시작되는 날은 1994년 3월 21일이었다.

12월 10일 마이클은 미국으로 귀국했으며 20일 스트립 검색을 받는다. 이것은 조단의 마이클 잭슨의 생식기에 대한 설명이 일치하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수사 기관에서 사진 촬영했으며 비디오 테이프를 녹화했다. 그래서 일치했는가? 1994년 1월 공신력 있는 로이터 통신과 USA투데이는 당시 관계자의 말이라며 익명을 통해 일치하지 않았다고 보도했었다. 후에 톰 스네던 지방검사는 2005년 재판에서 마이클의 생식기 사진을 언급하며 조단 챈들러가 설명한 것이 일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톰 스네던 지방검사는 기소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가 있듯 마이클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말을 곧이 곧대로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정황을 보여줄 것들을 더 자세히 검토해 보자. 에반의 변호사 래리 펠드만은 민사 법원에 사진이 증거로 채택될 수 없도록 요청했었다고 1994년 1월 5일 LA타임즈가 보도했다. 생각해 보자, 생식기 사진이 조단의 진술과 일치한다면 변호사는 당연히 사진을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래리 펠드만은 검찰이 자신에게 사진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었다. 하지만 고소인의 주장에 확신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불일치라는 또 다른 징후는 1994년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이 로스 엔젤레스 대배심원 앞에서 증언을 하기 위해 출석했는 데 수사관들은 그녀의 아들이 생식기의 모습을 바꿨는 지를 물었다. 1994년 3월 16일 LA타임즈는 13살의 소년이 말한 설명이 생식기와 일치하지 않도록 마이클이 자신의 신체 외모를 변경하는 짓을 했냐고 물은 것이다. 일치했다면 이런 물음 조차 필요없을 것이다. 또한 일반 사람들도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은 마이클은 사망을 해서 부검을 했는 데 당시 그는 할례 즉, 포경수술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조단은 마이클이 포경을 했다고 한 것이다. 이게 단순히 포경과 비포경의 차이를 몰라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조단은 진술에서 마이클과 벌거벗은 몸으로 있었고 다양한 각도에서 마이클의 성기를 정확하게 봤으며 또한 발기한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또한 만 13세면 한국으로 생각하면 중학교 1~2학년으로 성에 관심이 많을 시기로 굳이 포경수술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 왜 그는 포경수술을 추론했을까? 마이클은 1958년에 태어났고 이 시대에는 많은 미국인 남성들이 종교에 상황없이 포경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조단의 아버지 에반이 유태인이기에 에반은 포경을 했을 확률이 매우 높은데 조단의 저 진술이 에반의 통제 하에 있던 시기라는 것을 염두해 두자.

1993년 12월 22일 마이클은 네버랜드에서 공개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데 무죄추정의 원칙과 결백을 그리고 생식기 일치를 위한 검사를 매우 굴욕적이라고 심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마이클의 변호팀은 다양한 변호사들의 의견 충돌로 불화가 생겨나갔고 필즈는 마이클이 지적 수준에서 간신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클은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로 거의 먹지 못 하여 4kg이 빠졌으며 진통제 중독 치료를 했었고, 이때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그의 첫번 째 아내가 되는 계기가 된다. 또 리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사건의 여파로 불면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그에게 잠을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며 합의를 권유했었다.

1994년 1월 10일 래리 펠드만은 마이클 잭슨의 재무 기록을 알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피부과 주치의 였던 아놀드 클레인의 저택도 수색 당하는 등 마이클과 관련된 모든 사생활 파일이 공개될 수 있게 됐다. 마이클의 변호팀은 몇 가지 상황을 걱정했다. 첫번 째 재판에 가기에는 마이클이 정서적으로 너무 허약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 째 1993년은 인종 문제의 불씨가 남아있을 때로 중상류층 백인이 많은 보수적인 산타바버라에서 증거의 소명 정도가 약한 민사 재판을 한다는 것은 도박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번 째 형사 수사가 완료되기 이전에 이미 민사소송은 시작됐고 앞에서 썼듯 민사재판이 형사재판보다 먼저 시작하게 생겼는 데 즉 마이클의 변호팀은 민사와 형사 2개를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민사 재판이 먼저 시작하면 언론을 통해 온갖 것들이 보도될 것이고 그것은 형사재판의 배심원들에게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피고가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형사 재판에 앞서 민사 재판이 허용되는 것을 막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 즉 형사 사건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피고는 민사 소송을 보류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 쓴 이유로 결국 민사 재판은 미뤄지지 않았다. 또 이 마이클 잭슨 사건은 캘리포니아 법에도 영향을 끼쳐 성범죄 사건의 고소인은 민사 소송을 당장 취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로 2003년 마이클의 고소인 아르비조는 챈들러가 했던 1993년 전략을 쓸 수 없었다.

또한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온갖 루머를 퍼뜨렸었다. 존 브랑카는 12월 10일 마이클이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디어 보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얼마나 적대적이었는 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미국으로 귀국하니 상황이 달랐던 것.

결국 마이클은 1994년 1월 25일 15,331,250 달러를 조단에게,변호인과 에반에게도 5백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에반과 합의한다. 이 합의문은 유출됐고 마이클은 그러나 합의문에서 소년에 대한 불법적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조단은 형사수사에서 언제나 마이클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 로스엔젤레스 지방검사 Gil Garcetti은 합의 이후 "마이클 잭슨의 형사 수사는 진행 중이며 민사 소송 합의에 영향을 받지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래리 펠드만도 피해자의 증언이 언제든 허용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형사 사건에서 증언하지 않았다. 또 에반은 애초에 원하던 돈을 받았기에 수사 당국과 협력하기 꺼려했을 것이다. 민사소송 합의 이후에도 형사 수사는 계속됐고 4월 2일 로스엔젤레스 대배심은 잭슨을 기소하지 않고 해산하며 수사관들은 조단의 증언을 받기 위해 설득하고 있다고 했다. 9월 21일 산타바버라 검찰청은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데 조단이 증언을 거부하여 따라서 마이클에게 혐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하고 지난 18개월 간의 조사에서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다.

합의 이후 마이클과 친분 관계가 있던 taraborrelli는 합의에 대해 실망적이라며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뻔하다고 물었는 데 마이클은 화를 내며 이것은 나의 선택 그리고 내 인생이라고 그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랐다고 한다. (합의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59%는 합의가 혐의를 짙게 할 수 있으며 77%는 고소인이 아들의 복지가 아닌 돈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

시간이 흐른 후 2005년 아르비조와의 재판에서 준 챈들러는 출석해서 증언했는데 지난 11년 동안 조단과 대화를 하지 않았고 1993년 당시 자신은 성추행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검찰은 조단이 재판에 출석해 마이클에 대해 증언하길 요구했으나 조단은 거부하고 잠시 해외로 출국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변호사 Thomas Mesereau는 하버드 대학교에서의 강의에서 이 재판을 언급하며 조단이 개인적으로 아는 지인들에게 자신이 성추행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했고 그들을 안다고 말했다.

2005년 7월 6일에는 에반이 조단을 폭행하고 질식을 시도했다. 조단은 법원에 문제를 제기했고 판사는 인정, 2005년 8월 5일 아버지를 상대로 한 임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사망하고 4개월 만인 11월 5일 에반 챈들러는 권총으로 자신을 쏴 자살했다. 유서를 남기지 않았으며 에반은 질병에 시달리며 양극성 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1994년에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놀랐는 데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인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 마이클과 결혼하는 것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아동 성추행 혐의로 타격을 입은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리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눈초리가 많았다. 이에 대해 리사는 나는 정말로 마이클을 사랑했었으며 우리는 섹스도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고 회고했으며 리사와 마이클은 사건이 터지기 전인 1993년 5월에 같이 영화를 봤다고 ...

2.7. 1995년~2000년: HIStory

최악의 시기였다. 미국에서는 마이클 잭슨 좋아한다고 하면 놀림감이 될 정도로 조롱당했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도 첫 내한이 있었던 1996년 당시 공중파 3사에서는 연일 아동 성추행 혐의를 언급하며 그의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을 때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론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재기할 수 있을까?라며 의문과 호기심을 드러냈다.

히스토리 앨범 커버

새 앨범 작업은 1994년 1월 중순부터 시작됐었다. 스티브 포카로는 이번에도 같이 작업을 했는데 프로젝트는 굉장히 거대하고 값 비싸다고 했다. 나에게 스튜디오와 보조 엔지니어를 주고 방에서 일하는 데 하루에 2,500달러를 지불받았으며 매일 최고급의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의 팀원들이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마이클은 3월에 합류했었고 Dangerous 앨범 제작 도중 만든 'They Don't Care About Us'를 완성하기를 원했으며 'Stranger in Moscow’ 작업을 시작했다. 늦은 봄 그리고 여름 동안 마이클은 더 많은 곡을 작업했다. ‘Money’,‘1993년 10월 데뷔 힙합 앨범을 발표한 샤킬 오닐의 랩이 삽입된 '2 Bad’, ‘D.S' 그리고 ‘Morphine’ 모르핀은 마이클의 처방약 데메롤의 문제와 관련한 것인데 록 밴드 Nine Inch Nails의 앨범 Downward Spiral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한다. 또한 10년 전 작업한 ‘Little Susie’를 꺼내기로 결정한다. 마이클과 Foster는 피아노에 앉아 좋아하는 옛날 노래에 대해 이야기 했는 데 마음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찰리 채플린의 'Smile'이라고 언급했다. 제임스 브라운, 세메 데이비스 주니어, 재키 윌슨 처럼 채플린은 마이클에게 항상 영향을 끼쳤다. 영화 Modern Times에서 나온 채플린이 만든 스마일은 이때만 해도 기악 곡으로 18년후 John Turner와 Geoffrey Parsons가 가사와 제목을 추가할 때 온건히 'Smile'이 됐었다. 마이클은 Foster와 오케스트라 트랙인 ‘Childhood’를 작업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자신의 인생이 경험한 유년 시절에 대한 느낌을 반영한 것으로 네버랜드의 'Giving Tree'에서 작곡했다고 한다. 마이클은 이 노래의 가치가 중요하다며 "당신이 정말로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가 쓴 노래 중 가장 정직한 'Childhood'가 있다며, 사람들은 그것을 경청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Smile과 Childhood 는 모두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다. 'Earth Song'은 1988년 6월 비엔나에서의 Bad 투어 중 호텔 방에서 갑작스레 떠오른 아이디어로 1990년 8월 Bill Bottrell과 작업을 완료했지만 마이클은 만족하지 못했고 2번 째 파트에 기타 리프를 넣는 등 다시 작업했다. 마이클은 "나는 지구상의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며 이 노래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며 창작 동기를 설명했다. 앨범의 원래 출시 목표일은 1994년 6월이었는데 이번에도 놓쳤다. 원래 앨범에는 히트곡 모음집과 5개의 새로운 곡만 포함 시키기로 했는 데 새로운 곡 수는 계속 증가했다.

마이클이 같이 일하기를 바랐던 Jimmy Jam과 Terry Lewis[33]는 이번에는 자넷[34] 에게 동의를 받고 마이클과 같이 작업하며 약 5개의 곡을 만들었는 데 트랙이 자넷 바이브를 가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 중 한곡은 자넷의 마음에 쏙 들었는데 마이클은 그 트랙이 아닌 강렬하고 하드한 다른 트랙을 선택했다. 참고로 자넷이 원했던 트랙은 1년후 녹음됐고 Design of a Decade 앨범에 수록된 'Runaway'다. 'Tabloid Junkie'는 Jam과 Lewis가 가져온 트랙 중 하나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마이클이 좋아하는 자넷 잭슨의 The Knowledge’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곡이다. 마이클은 Jam에게 'HIStory'라는 제목의 곡을 써야 한다며 anthemic song을 원한다고 했다. 노래는 거대한 프로덕션이 됐다. Boyz II Men이 백킹 보컬로 오케스트라,합창단이 동원됐고 역사적인 뉴스 사건과 연설을 녹음한 수많은 테이프도 사용했는 데 160개의 트랙이 하나의 레코드로 믹싱되어야 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은 정말로 앨범 제작에 드는 시간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그 점에서 문제가 있었고 Jam은 마이클이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주변의 제작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이클은 'Bad' 때부터 그 누구도 듣지 못한 소리를 원했으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Bruce Swedien에게 오리지날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만들 수있는 사람을 물었고 Chuck Wild를 제안했다. 마이클은 척에게 인간의 귀가 들어 본 적이없는 소리를 만들고 싶다며 격렬하고 독특하기를 바란다고 요청했고 제작한 것을 팀 멤버에게 배포하여 일부 트랙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 뒤 알 켈리도 합류했다. 마이클 팀은 'Life'와 'You Are Not Alone'의 데모 테이프를 받았는데 라이프는 마이클이 마음에 들어했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은 유얼낫알론으로 Life는 R&B 밴드 K-Ci & Jojo가 녹음했다. 'You Are Not Alone'은 좋았지만 더 많은 작업이 필요했고 마이클은 트랙을 다시 제작, 마지막 부분에 합창단을 추가, 마이클은 이것을 통해 '클라이막스와 구조적 감각'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 앨범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곡은 비틀즈의 히트곡 'Come Together'였다. 마이클 잭슨이 가장 좋아하는 비틀즈의 노래 중 하나로 1986년 Bad 앨범 제작 때 Bill Bottrell과 대략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9년 후 새 앨범에 수록하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은 앨범 제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대다수에 참여했으며 앨범의 주제는 마이클 잭슨의 인생에 대한 것으로 최근 사건에 대한 자신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이것은 곧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가 제기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앨범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Jam은 예술가의 개인적 감정이 음악에 반영되면 다른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말하며 그 앨범은 자신의 생각을 노래하는 매우 적극적이고 개인적인 그 부분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마이클의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앨범은 작품성의 부족으로 혹평을 받았는 데, 실제로 출시 전 앨범이 완성된 후 마이클은 음반사 임원 등을 초대했고 약 30명의 사람들 앞에서 앨범이 첫 공개됐다. 마지막 음이 울린 후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 마디도 없이 박수도 없이 반응도 없이 스튜디오를 떠났다. 당연히 마이클은 충격을 먹었고 .. 히스토리 앨범의 문제점은 좋은 곡과 아닌 곡의 수준 차이가 굉장히 심해 앨범의 응집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었다. 또한 재생 시간이 길었으며 'Little Susie'와 'Smile'을 엔딩곡으로 배치한 것은 너무 엉성하다는 의견도 있으며 AllMusic은 70년대 중반 이후 마이클 잭슨의 가장 약한 앨범이라고 지적했다. 구설수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수록곡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대인을 비하하는 용어였고, 'HIStory' 앨범 홍보를 위한 티저 동영상은 팝 스타의 뻔뻔스러운 자기 우상화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은 'Jew라는 용어는 사회 문제를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이지 결코 인종차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가사를 수정하여 재발매했다. 홍보 동영상은 마케팅을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앨범은 최종적으로 2000만장 이상이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더블 앨범의 경우 실제 판매량에다 X2배를 하는 인증량을 취하기 때문에 7X 플래티넘을 인증받았지만 실 판매량은 350만장 정도다. 앨범의 완성도도 문제였지만 사건의 여파가 상업성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는 2주간 1위를 차지했었고, 첫번 째 공개된 싱글 'Scream'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5위를 'You Are Not Alone'은 발매 첫 주에 1위라는 최초의 '핫 샷' 기록을 세우며 마이클의 상업적 매력이 아직은 나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소니는 이 앨범 홍보를 위해 3,000만 달러를 썼는 데 토미 모톨라가 회고하길 그럼에도 매출이 괜찮았다고 하는 걸 보면 꽤 많은 돈을 만졌나보다.

그리고 이해 12월 HBO와 계약을 하고 소규모 콘서트를 열려고 했던 마이클은 무대에서 연습 도중 공황발작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그동안 누적됐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한번에 터진 듯, 당연히 콘서트 계약은 파기됐다. 그리고 리사 마리와는 그동안 쌓였던 갈등이 터져 결국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으며 이 역시 마이클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1996년부터 'HIStory Tour'가 진행됐고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중 동원으로 관중 수로만 보면 마이클의 커리어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어였다. 그러나 투어의 립싱크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음 해 1월 진행된 하와이에서 있던 2번 공연은 모두 매진됐는데 이는 마이클만이 이룬 기록으로 이전까지는 하와이에서 매진을 기록한 메이저 가수가 없다고 한다. 롤링 스톤즈엘튼 존도 못 했던 기록, 대중들은 여전히 마이클을 조롱감으로 생각하면서도 최고의 팝 슈퍼스타의 공연에는 관심이 있던 것이다. 그리고 투어 도중 호주에서 '데비 로우'와 결혼을 했는 데 데비는 마이클이 진료받은 피부과의 간호사로 마이클의 팬이었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하며 결혼을 하게 된다. 즉, 마이클은 데비와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었다.

1997년 2월에는 그의 첫번 째 자녀이자 아들인 '프린스 잭슨'이 태어났고 마이클은 자녀들도 태어나고 서서히 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후 히스토리 투어의 전반기가 끝나고 세계적으로 500만장 정도 팔린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 다음 후반기 투어를 시작했다. 이 앨범에서는 5개의 신곡과 HIStory 앨범의 수록곡을 리믹스한 8곡을 포함시켰다. 싱글로 발매된 곡은 'Blood on the dance floor', 'Ghosts', 'Is It scary'(잼과 루이스가 만든 곡으로 히스토리에 수록되지 않았다.)인데 Blood On The Dance Floor는 영국, 에스파냐, 뉴질랜드, 덴마크에서 1위를 했다. 자세한 제작 비화를 알고 싶으면 여기를 참조할 것 Blood On The Dance Floor 이야기

1998년에는 '패리스 잭슨'도 출생, 그리고 마이클의 자녀들이 전형적인 흑인의 피부가 아닌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친부 논란이 시작됐으며 언론에서는 자녀 사진을 찍기 위해 병원에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는 연일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보도했고 당연히 마이클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한 불면증을 앓아 Dangerous 투어 시절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진통제중독돼 가며 몸이 망가져 갔는 데 잭슨의 사후, 진통제 중독 문제로 잭슨의 주치의들에 대한 비판이 있자 주치의는 매일 마다 잠을 못 잔다며 울고 도와달라는 잭슨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했다.

2.8. 2001년~2002년: Invincible

30주년 공연 빌리 진 겁나 멋있다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정규앨범으로 남게 된 이 앨범은 그의 명성에 오점과 상처를 남겼던 비운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평가는 마이클잭슨의 솔로 정규앨범으로서는 최저의 판매량을 기록했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 저조한 판매량이라는 숫자마저 전세계 800만장에 해당하는 양으로, 비운이라는 말은 오직 마이클잭슨에게만 허용되는 표현이었다. 

6년여의 준비기간동안 마이클잭슨은 21세기라는 새로운 환경을 선도할 실험적이고 의욕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앨범의 제작라인을 쇄신하고 다양한 프로듀서 라인을 가동시켰다. 당시 24세의 나이로 천재 프로듀서 계열에 오른 로드니 저킨스를 전면에 등용하고, 'Dangerous'앨범 이후부터 퀸시존스를 대신한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도 동행했다. 그 밖에 R&B 보컬리스트 베이비페이스와 소울보컬리스트 R.켈리와의 공동 프로듀싱으로 다양한 음악스타일을 흡수하고자 했다. 애초에 이 앨범은 1999년2000년의 전환점에 발매될 계획이었으나 1년이 지연되었다. 

소니뮤직은 밀레니엄 첫번째 크리스마스 시즌에 앨범을 발표시키기 위해 마이클잭슨을 재촉했으나, 완벽을 기하는 그는 여전히 녹음실에 머물렀다. 제작비 2천만달러를 투자한 제작사의 조바심은 결국 마이클잭슨과 소니의 사장 토미 모톨라 간의 불화로 이어졌다. 소니는 손익분기점인 7백만장 이상의 판매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이클잭슨이 제작비 전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강압적으로 내세웠고, 이에 마이클잭슨은 이 앨범이 소니뮤직에서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대응하면서 맞부딪혔다. 

이에 소니뮤직은 예정된 싱글곡의 발매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리고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의 홍보와 마케팅을 서둘러 마무리시켜버렸다. 마이클잭슨은 앨범의 흥행실패를 소니뮤직의 의도적인 홍보와 마케팅 축소에 원인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를 지시한 사장 토미 모톨라를 '악마',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앨범의 실패 뒤 마이클잭슨과 대립했던 토미모톨라는 해임되었다.

다소 저조한 판매량과 마케팅 실패를 둘러싼 공방, 평단의 엇갈리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Invincible'은 마이클잭슨의 앨범중 가장 다채롭고 풍성한 음악적 내용으로 충만한 역작임은 분명하다. 

앨범을 위해 100여곡의 후보곡을 준비했다는 뒷이야기와 수록곡 'Butterflies'의 완결을 위해 200번 이상의 녹음을 시도했다는 사례는 그가 이 앨범에 쏟았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짐작케 한다. 강렬한 기타 솔로를 덧입힌 'Privacy'에서 그는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파파라치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고, 인더스트리얼 록과 힙합을 배합한 '2000watts'에서는 역동적인 보컬 에너지를 쏟아냈다. 

베이비페이스의 달달한 R&B스타일을 잘 소화해낸 'You Are My Life'와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The Lost Children'은 마이클잭슨 특유의 미성과 부드러움을 빛내주는 곡이다. 절친한 동료인 배우 '크리스 터커'와의 대화로 시작되는 'You Rock My World'에서는 짜임새있는 구성과 열정적인 가창이 돋보인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와 흥겹게 어울린 라틴스타일의 'Whatever Happens'도 앨범의 다채로운 면면을 채우며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2.9. 2003년~2005년: 2차 아동 성추행 혐의와 무죄

2003년 2월 3일에는 영국의 기자 마틴 배셔가 마이클을 240일 동행하며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 프로그램이 ITV 방송국을 통해 최초 방영되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프로그램 속의 마이클이 지나치게 수줍어하며 유아같이 행동했고 일반 사람들의 상식과는 굉장히 동떨어진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측에서는 마틴이 악의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편집한 것이라며 즉각적으로 성명을 발표하고 FOX와 자체적으로 따로 프로그램을 제작해 반박 방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틴에게 보여준 마이클의 모습은 이상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이클 측의 성명에 공감하지 못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 프로그램 속에 마이클은 내가 알던 마이클이 아니다. 실제 마이클은 그 프로그램에서 방영된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이 찍힌 시기에 마이클은 약물에 심하게 중독된 것 같다. 그래서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 같다. 또 마틴 배셔가 악의적으로 편집을 했을 것이다." 2월 6일에는 미국에서 방영됐고 그리고 이 날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한 합의 문건이 유출되며 다시 마이클에 대한 혐의 여부가 미디어를 통해 불이 타올랐다.

제일 문제가 된 것은 프로그램 후반부 장면에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과 함께 한 것으로 마이클과 개빈은 친밀했으며 마이클은 한 방에서 같이 잤다고 말했다.(한 방에서 같이 잤다는 것을 뒤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기자가 왜 40살 가까이 남자가 소년과 자냐고 의문을 제기했고 "아이들과 자는 게 왜 이상한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라며 항변했다. 맥컬리 컬킨의 아버지는 마이클의 침실에 대해 말하길 그곳은 언제나 개방적이고 열려있는 곳으로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소년들 뿐 아니라 다 큰 성인들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동 성추행 혐의 재판을 몰고오는 원인이 됐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온스타일이 수입하여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했는 데 개빈과의 만남은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라는 법적 문제가 있어서 삭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튜브에 가면 개빈이 나오는 장면을 실컷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마이클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 해 보인다며 산타 바버라의 어린이 보호당국과 LA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고 서신을 보냈다. 결국 산타 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개빈과 그의 가족들과 접촉하여 마이클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개빈은 결코 마이클과 성적인 행위 같은 건 없었다고 말했으며,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고, 개빈의 누나 '데블린'은 마이클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었다. 개빈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아비조'는 마이클 덕분에 자신의 아이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동복지국은 이 같은 조사 결과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다. LA의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국 또한 마이클에게는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훗날 이번 사건으로 마이클을 기소한 검사인 톰 스네던은 아동복지국과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를 엉터리라며 무시하고 은폐했다. 심지어 '톰 스네던'[35] 검사는 개빈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 또한 톰 스네던 검사는 마이클을 'Wacko Jacko'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는 데 왁코 잭코는 마이클 잭슨을 경멸하는 단어의 비하 용어로 스네던은 사건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시종일간 미소를 보였다. 공격적인 조사 방식도 유명해서 Mad Dog(미친 개)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한다. 2003년 언론에서는 스네던이 마이클 잭슨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었다.

그렇다면 1993년 혐의를 설명할 때 처럼 먼저 아르비조 가족들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개빈 아르비조는 신장과 비장에 영향을 끼치는 암에 걸린 소년으로 2000년 여름 병원에서는 신장과 비장 중 하나를 제거하며 화학 요법을 시작했다. 개빈은 코미디언들의 열렬 팬이었고 코미디언 Jamie Masada가 소유한 할리우드의 코미디 클럽인 Laugh Factory에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왔다. 개빈은 거기서 연예인도 포함된 가족들과 사귀었고 그 중 한명은 개빈이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병원에 방문했었다. 딱한 개빈의 사정을 안 친구는 개빈이 특정 연예인을 만나고 싶다고 3명을 썼는데 그 3번 째가 마이클이었다. 그 요청을 받은 Masada는 자신들의 인맥을 통해 개빈의 요구를 마이클에게 알려줄 수 있었고 마이클은 병원에 20번 정도 방문했으며 개빈과 그 가족들이 네버랜드에 와도 된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가족 전체가 네버랜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첫 방문에서 개빈과 마이클은 한 방에서 잤다. 그렇다면 어떻게 잠을 잤는가? 그 방에는 개빈과 마이클만 있던 게 아니었다.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 그리고 마이클의 자녀들인 프린스와 패리스 또 성인 친구인 프랭크 카시오. 성인인 마이클과 카시오는 바닥에서 어린 아이들은 침대에서 잤었다. 그렇다면 개빈은 왜 마이클과 한 방에서 같이 잤는가? 그 아이들은 엄마가 괜찮다고 했다며 마이클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애원했다. 또한 그들의 어머니인 자넷 아르비조도 괜찮다고 발언했고 마이클은 이 일로 그녀가 아이들을 내게 밀고 있는 것 같다고 친구에게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틴 배셔는 마이클과 개빈이 같이 잠을 잤다는 사실을 전후 맥락 없이 마이클과 개빈이 침실에서 단 둘이서만 잤다는 식으로 묘사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 때문이었을까? 2005년 개빈은 재판에서 증언할 때 마틴 배셔의 다큐멘터리가 촬영된 2002년 9월까지 마이클은 그들 가족과 별로 접촉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마틴 배셔는 마이클이 암에 걸린 소년들을 도와준다는 것을 촬영하고 싶었고 그래서 마이클이 개빈을 불러 촬영한 것 같다.) 그들은 네버랜드에 가기 위한 허락을 받았고 가족들은 7~10번 방문했는 데 마이클은 거의 없었고 있었을 때는 아르비조 가족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는 것이다. 또 개빈의 화학 요법 치료가 4회정도 시행됐을 때 마이클은 전화 번호를 바꿨는데 이를 알리지 않아 개빈은 화를 냈고 산타 바버라 보안관에게 진술할 때는 마틴 배셔 사건이 있기 전까지 마이클을 보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더 구체적으로 마이클이 자신을,가족을 버린 것 같다고 마이클과 접촉을 잃지 않기 위해 아르비조 가족들은 편지와 카드를 보내기 시작한다. 2000년 10월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들에게 흰 색의 밴을 선물한다. (마이클은 자신들의 지인들에게 항상 값비싼 선물을 했었다.) 그리고 개빈을 위한 혈액 공급을 위해 네버랜드에 있는 모든 직원들이 혈액을 기부하도록 조치했었다. 2001년 여름 마이클이 선물한 밴이 고장나 마이클에게 돌려보내지고 그 이후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에게 그 어떤 선물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2001년 9월 24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JC 페니 백화점에게서 합의금을 받았다. 무슨 일인가?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300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다며 진단했다. 재닛을 직접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그녀는 불안장애우울증을 앓고 있지만 망상증은 없었다고 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구금 당시에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며 또 다시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사건은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종결된다. 이후 백화점 측을 변호했던 톰 그리핀 변호사는 개빈 가족이 마이클을 고소 한 것에 대해서 "재닛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아무 생각 없이 주위에 지껄이는 경향이 있고 이번에는 아예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며 이를 갈취사건 제2부"라고 의견을 표했다.

2002년 봄 아르비조 가족들은 며칠 동안 네버랜드에 있었는데 마이클의 친구였던 'Christ Tucker'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마이클은 그 곳에 없었다. 9월에는 앞에서 말한 마틴 배셔의 촬영을 위해 마이클도 있었고 2003년 2월에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마이클이 이미지의 타격을 입자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을 지원하기 위해 마이애미에서 마이클 측과 기자회견을 하려고 했고 'Christ Tucker''도 참여했었다. 근데 기자회견은 취소됐고 2월 7일 마이클과 아르비족 가족들은 마이애미에서 비행기로 타고 네버랜드로 돌아왔으며 아르비조 가족은 3월 12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2003년 2월 7일부터 3월 12일까지가 아르비조 가족들이 아동 성추행 혐의를 만든 중요한 시기이다. 아르비조는 2003년 2월 7일부터 마이클이 개빈을 성추행 했다고 주장했었으며 이는 2003년 12월 18일 검찰의 초기 고발문에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2월 7일 비행기를 타고 LA로 돌아올 때 마이클이 잠자는 개빈의 머리를 핥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넷 아르비조는 그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말했듯 2월 3일과 2월 6일은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 측에서 난리가 났을 때였고 마이클은 Fox와 'Michael Jackson, Take Two: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라는 반박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했을 때였다. 그리고 2월 20일 아르비조 가족들은 그 프로그램을 위해 촬영을 했고 그들은 마이클을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마틴 배셔의 촬영 방식이 불쾌하다고 언급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동복지국도 방문하여 그들을 조사했으며 마이클과 그 어떠한 부적절한 관계도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그때 촬영된 비디오는 지금도 유튜브에 업로드 돼 있으며 훗날 수사 중 Moslehi's의 집을 수색할 때 검찰에 의해 발견됐다.

여기서 굉장한 의문이 몇 가지가 있다. 아르비조 가족의 주장이라면 마이클은 2000년과 2003년 2월 6일까지 성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왜 프로그램 방송으로 마이클이 소아성애자라는 여론이 들끓었을 때인 2월 7일 갑자기 왜 그는 성추행을 시작했다는 것인가? 더군다나 아르비조 가족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사람인데 그리고 아르비조는 2월 7일 핥은 것을 보고도 왜 네버랜드에서 마이클과 같이 지내며 방송 촬영이나 아동복지국과의 조사에서 웃고 떠들면서 마이클을 기쁘게 칭찬했는가 그리고 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야기를 바꿔야 했다. 2월 7일이 아닌 2월 20일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아르비조 가족들은 전체 이야기를 바꾼다.

또 마이클이 협박을 했고 납치를 해서 우리는 네버랜드에 억류됐고 아르비조 가족은 마이클을 무서워했고 그래서 촬영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나 개빈은 2005년 재판의 증언에서 반박 비디오를 촬영했을 때 마이클이 여전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네버랜드를 좋아했고 거기 있던 모든 시간이 행복했었다고 증언하는 모순되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재판에서 나온 또 다른 흥미로운 정보가 있다. 이 기간 동안 마이클과 아르비조는 거의 같은 시간,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2월 25일~3월 2일까지는 아르비조는 네버랜드가 아닌 Calabasas에 있는 호텔에 머물렀으며 3월 초 마이클은 Kenneth Morgan이라는 익명을 쓰며 다른 호텔에 적어도 3월 7~8일까지 머물렀다는 것인데 3월 6일에는 네버랜드에 아르비조가 있었다. 또한 전화 기록을 바탕으로 하면 2월 20일 마이클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턴 베리 아일 리조트에 있었으며 Azja Pryor도 마이클이 2월 20일 네버랜드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협박과 납치와는 동떨어져 있는 행동을 했다. 2월 21일 자녀들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동안 자넷 아르비조는 민사 사건 변호사 William Dickerman을 만났고 2월 25일 다시 만났다. 이 방문 중 어느 한번도 자넷은 변호사에게 네버랜드에서 납치되었다는 발언은 물론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자넷은 Dickerman을 만난 이유를 프로그램에서 자녀의 초상과 사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났다고 한다. 2월 25일~3월 2일까지 아르비조 가족은 몇 차례 쇼핑도 했으며 2~3월 동안 개빈과 스타의 치아 문제로 치과 의사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2월 25일 개빈은 아까 마이클과의 만남을 주선한 Masada를 만나기도 했다. 3월 11일에는 자넷은 폭력 때문에 헤어진 남편 데이브 아르비조와의 아동 양육권 문제로 법원에 출두했고 변호사인 Michael Manning도 동행했다. 아르비조 가족들은 법원,변호사,의사,친구 및 상점 직원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말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 그들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납치된 사람들이 그리 자유롭게 넘나들며 심지어 변호사까지 만날 수 있다는 말일까? 또한 3월 1일 아르비조는 브라질로 휴가를 떠날 계획을 잡았다. Azja Pryor도 재판에서 증언하길 자넷 아르비조는 카니발을 보고 싶다며 브라질로 갈 것이라고 우리 같이 가자고 언급했다고 한다. 당시 검사 톰 스네던은 이 증언을 막기 위해 이의제기를 했으나 판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또 납치 시기에 자넷은 한화 700만원의 무단식사를 하고 마이클 측에 대신 내달라고 요구했었다.

2003년 3월 24일 자넷 아르비조는 William Dickerman를 민사 사건 변호사로 정식으로 고용했으며 Dickerman은 마이클의 변호사 Mark Geragos와 가구, 옷, 서류 등 여러 물품의 반환 문제로 서신을 보냈었다. 아르비조는 여기에서 아동 성추행 혐의나 납치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Dickerman은 자넷에게 변호사로 래리 펠드만을 추천한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 때 챈들러의 민사소송을 대표한 변호사였다. Dickerman은 자신이 래리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고 그가 캘리포니아 최고의 변호사 중 한 명이기에 마이클 잭슨과 관련한 문제라면 잘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르비조에게 추천한 것이다.

2003년 5월 펠드만과 자넷은 만나고 6월 펠드만은 심리학자 박사 스탠리 카츠(카츠는 펠드만에 의해 1993년 조단 챈들러를 만났었다.)에 개빈을 보낸다. 카츠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McMartin 사건에 관여했으며 Children 's Institute International (CII)에서 전문 교육 담당 이사를 지냈었다. McMartin 사건에서 CII의 인터뷰 기술이 강압적이고 조작인 것이어서 아동이 성적 학대에 대한 거짓 진술을 할 것으로 비판을 받아온 것으로 카츠는 그 재판에 참여했다. 여기서 명심할 것은 개빈은 2005년 재판에서 자신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한 첫번 째 사람이 카츠 박사라며 펠드만은 물론 그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6월 13일 래리 펠드만은 산타 바버라 보안관의 사무실에 개빈의 주장을 보고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많은 모순이 있다. 2003년 11월 17일 검찰 수사부의 진술서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2003년 9월까지 경찰이 성추행 사실을 알릴 때까지 개빈의 혐의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개빈이 아동 학대 전문가인 심리학자에 보내졌고 며칠 후 변호사는 보안관의 사무실에 보고했으며 자넷은 2003년 2월 7일 마이클이 개빈의 머리를 핥고 있다고 주장했는 데 9월까지 자넷이 그 혐의에 대해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CNN의 유명 MC 래리 킹은 사적 자리에서 래리 펠드만을 만난 적이 있는 데 펠드만이 단지 그들은 돈을 원하며 자넷을 'Whacko(미친 사람이라는 뜻)'라고 느꼈다며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며 마이클의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었는데 펠드만은 재판에서 킹의 발언을 거부했다.

1993년 혐의를 다룰 때 챈들러가 민사소송을 먼저 걸었고 그 영향으로 성폭력 사건은 형사 수사에 앞서 민사 재판이 먼저 시작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동 성범죄와 같은 악질적인 범죄의 경우 형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동일한 사실의 민사 소송에 걸린다면 결론은 뻔하다. 마이클이 이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아르비조는 민사에서 그 유죄 판결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마이클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아르비조가 그것을 근거로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남은 유일한 쟁점은 부자였던 마이클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받느냐 하는 것이다.

2003년 11월 18일 개빈 아르비조의 주장에 근거한 마이클 잭슨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당시 마이클은 라스베가스에 있었는데 체포 소식을 듣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300만 달러의 보석을 내고 석방됐다. 같은 날에는 마이클이 부재한 가운데 70명의 보안관들이 네버랜드 목장의 집에 수색 영장을 신청했다. 당시 검찰은 "사춘기 소년인 개빈에게 끊임없이 전화하고 부적절하게 만지며 키스하고 핥고 껴안았고 납치했으며 브라질에서 거주하게 만들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앞에서 봤듯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피하려고 했었고 마이클에게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한 것은 아르비조 가족이었으며 성범죄 혐의는 교차검증을 통해 이것을 확증해 줄 증인은 없으며 증언도 모순됐다. 또한 마이클은 아르비조 가족을 브라질에 억류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고 자넷 아르비조 스스로가 브라질로 카니발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하려 했음이 드러났다.

2004년 4월 3일 대배심은 검찰 측의 이야기를 듣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며 4월 21일 검찰은 구체적 혐의를 특정지었다.

2005년 2월 28일부터 6월 3일까지 재판이 열렸다. 앞에서도 말했듯 마이클의 모든 것은 수색 대상이었고 네버랜드를 다 수색했지만 마이클의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4월 13일 재판에서 자넷 아르비조는 마이클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는 등 수많은 증언들을 했다. 그런데 주장들이 너무나도 황당해서 당시 공판을 직접 본 기자들의 대다수는 잭슨이 무죄라고 생각했다고, 또한 앞에 썼듯 고소인들의 증언은 많이 모순됐기에 배심원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이었으며 한 가지 더 이야기 할 것은 아르비조 가족들은 마이클이 자신들에게 성인용 포르노 잡지를 보여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성인용 포르노 잡지에서 발견된 마이클과 아르비조의 지문은 동일한 페이지가 아닌 떨어져 있는 다른 페이지에 있었으며 아르비조는 네버랜드에 마이클이 없을 때도 그의 침실에 무단으로 들락나락 거렸었다. 재판에서 드러난 것을 보면 아르비조는 치과 의사의 사무실에서도 Vernee Watson Johnson의 집에서도 마음대로 들락나락 거리며 물건을 만졌었고 아르비조는 성인 포르노에 순진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는 데 네버랜드의 직원 Julio Avila는 개빈의 동생 스타 아르비조가 포르노 잡지를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기에 그것을 어디에서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고 증언했으며 Maria Gomez는 스타 아르비조의 배낭에서 포르노 잡지가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즉, 개빈과 그의 동생이 마이클의 방을 뒤지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포르노 잡지를 만졌을 확률이 높다.

무죄 판결을 받고 법정을 빠져 나오는 마이클. 그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36]

결국 2005년 6월 13일 마이클 잭슨은 무죄 판결을 받는다. 당시 배심원은 백인 7명 히스패닉 4명 아시아인 1명으로 흑인은 없었다.

마이클은 무죄를 받았지만, 일반 대중들은 마이클의 무죄 판결을 신뢰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 1위에 뽑히는 등 엄청나게 까였다. 또한 마이클이 돈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말하며 이 사건을 O. J. 심슨 사건에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O.J심슨의 경우는 재판에서 배심원 중 흑인이 9명이고 백인이 2명에다 이 재판이 흑백 인종 대결로 옮겨갔으나 마이클의 배심원은 백인이 다수에 당시 여론조사에서도 흑인의 50%는 마이클을 유죄라고 생각할 만큼 인종 불문 (백인은 75%가 유죄 13%가 무죄라고 응답)하고 유죄라는 여론이 형성돼서 흑백 인종 대결도 없었다. 또한 마이클의 변호사 Thomas Mesereau도 재판을 담당할 때 인종카드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었다. 또한 O.J심슨은 증거나 정황들이 유죄를 가리키고 있던 반면 마이클 재판의 경우 증거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모든 정황,증언들은 교차검증의 대상이었고 고소인들은 신뢰성이 없었다. 즉, 모든 것들이 무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체 재판 과정에 대한 내용은 관심이 없으며 안티팬들은 재판 과정에서 검찰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와 마이클을 유죄로 만드는 짓을 아직도 인터넷에서 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언론도 문제가 컸는 데 미국의 언론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만 보도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유죄라고 생각했기에 변호단에 있던 한국인 변호사는 그런 편견에 맞서 싸우는것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마이클 잭슨이 죽고 나서 2009년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마이클이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증언을 얻지 못해서 검찰에게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했다. 또한 FBI는 검찰이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가지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진행 했고 실제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는 개연성과 증거가 없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마이클과의 재판 이후 자넷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생계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2.10. 2006년~2009년: 마지막

그의 마지막 고난이자 두번째 재기시도

재판 이후 마이클 잭슨은 시상식에 여러 차례 등장한 것과 일본의 한 TV 프로그램에 나온 것 외에는 눈에 띄는 활동은 하지 않았고 레코드사에서 몇 차례의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을 뿐이었다. 또 자주 휠체어를 타는 모습을 보여줘 건강 상태 문제가 심한 거 아닌 가, 마이클 잭슨은 이제 미국에서는 끝났다라는 반응도 많이 나왔었다.

재정적인 문제도 심각해졌는데 마이클 잭슨은 상당한 부채를 감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네버랜드 랜치를 관리하는 직원들에게 제때 돈을 주지 못 하기도 까지 해서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네버랜드가 강제로 폐쇄되는 등 큰 곤란을 겪었다. 이때 마이클이 파산한 거 아니냐는 소리가 상당히 나왔는데 일단 마이클이 심한 재정적 문제를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채는 마이클 잭슨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다 팔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파산까지 가지 않았다. 다만 바로 사용 가능한 현찰이 66만 달러 [한화]수준 밖에 안 돼 문제가 됐다.

그러다 2007년부터 마이클 잭슨은 슬슬 컴백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일단 몇 차례의 잡지 화보를 찍었고, 'Thriller'의 발매 25주년을 기념하여 'Thriller'의 기존 수록곡과 Akon, Will.i.am 등과 재작업한 곡들을 함께 담은 'Thriller 25'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2009년 3월, 팬들과 취재진 앞에서 컴백을 발표하는 마이클 잭슨[38]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영국 런던 O2 아레나에서 열릴 'THIS IS IT' 콘서트 발표로 컴백을 선언한다. "이번이 정말로 내 마지막 공연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한 마이클은 See you in July! (7월에 봅시다!)'' 라는 말을 남겼다.[39]

이맘때쯤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악성 보도가 있었다. 슈퍼 박테리아나 피부암에 걸렸다는 것인데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보도가 있고 난 뒤 얼마 안 가 사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짜인 줄 알고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주요 언론들도 기본적인 사실 확인없이 마이클 잭슨이 슈퍼 박테리아, 피부암에 걸렸다는 허위 보도를 한 바 있다.

이와 별개로, 마이클 잭슨의 컴백 발표 후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This is it' 공연은 2009년 기준으로 역사상 가장 빨리 매진된 공연으로 기록될[40]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첫 컴백 무대의 표를 못 산 사람들이 이베이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2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표를 구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팬들의 엄청난 반응에 마이클은 10회로 예정되었던 공연을 50회[41]로 늘리겠다고 했으며 백댄서와 코러스, 무대효과, 의상 등의 공연을 준비하는 모든 부분에 직접 관여하는 열정을 보이고 3D특수효과와 특별마술을 요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매우 열심히 공연을 위해 노력했는데...

사망하기 전날 새벽에 마지막으로 리허설한 노래. HIStory 앨범에 수록된 <Earth Song>이다. 리허설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손가락에 테이프를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2.11. 팝의 황제, 떠나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인해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로 발견되어 로스앤젤레스의 현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50세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결국 팬들도, 그리고 마이클 잭슨 자신도 기다려왔던 무대 복귀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사망했다.[42]

그 뒤 이미 발권된 런던 공연에 대해서는 환불이 진행되었는데 대다수는 런던 공연의 티켓을 잭슨의 유품으로 여기며 환불하지 않고 소장하여 회수율이 매우 낮았고 오히려 이 티켓은 이베이 등지에서 원래 가격의 10배가 넘는 비싼 값에 거래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모차르트 등과 비교하며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마이클이 불면증을 호소하며 프로포폴을 찾았다. 그러나 난 거부했는데 사망 4일 전 마이클의 직원 한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이클이 지금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데 그 뒤에서 마이클이 '몸 한쪽이 아주 뜨거운데 다른 한쪽은 춥다. 매우 춥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곤경에 처해 울부짖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간호사, 셰릴린 리

마이클 잭슨의 사망 전 건강 상태는 50대 미국인에 비춰봤을 때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으로 인한 약물 문제가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약물은 마약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이클 잭슨은 절대 마약을 하지도 않았고, 오직 합법적으로 구할 수 있는 것만 구했다고 한다.

2009년 6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후 수많은 빚이 있었다는 말이 나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사실 그는 소니EMG의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이클 잭슨 본인의 것은 물론 75만개의 노래에 대한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러한 지분과 저작권의 현 시가만 해도 5억 달러 그 이상에 이르며 수많은 부동산, 세계 각국의 건물과 성을 소유하고 있으니 돈으로 환산한다면 실제로 빚이 있었더라도 갚고도 남는다. 실제로 빚이 있다는 언급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그의 재산은 빚을 제외하더라도 1조 5천억 원 정도가 남을 거라는 기사가 나왔으며 2010년 3월에선 이제 잭슨이 지고 있던 빚은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의 사후 미국 의회에서는 잭슨을 기리고자 정치인 출신이자 목사인 재시 잭슨의 주도하에 국회의원들의 단체 묵념이 있었고 CNN을 비롯한 몇몇 해외의 유명 언론들이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긴급 속보 체제에 돌입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면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엔터테이너' 이라는 타이틀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더불어 사망 소식 이후 음반 판매량 1~5위까지 잭슨이 석권할 정도로 당시 1위였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앨범보다 많이 팔렸으나 빌보드에서는 발매 된 지 2년이 지나면 차트에 집계하지 않아 빌보드 앨범 200 차트에 마이클이 올라가지 못 했다. 이에 대해 말이 많자 빌보드는 결국 아무리 오래 전에 발매됐어도 언제든 성적만 좋다면 200 차트에 올라갈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했다. 세계적 음반체인점 HMV는 잭슨의 사후 음반판매가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1980년 비틀스의 존 레논이 사망했을 때의 반응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임즈에서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특집판이 발매됐고[43] 2010년에는 VH1 선정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순간에 잭슨의 사망이 1위에 올랐다.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

그때 사상 최초로 사람들이 다 함께 인터넷을 무너뜨렸어요.

내셔널 지오그래픽 <세계적 문화 아이콘, 마이클 잭슨의 사망> 데이비드 셀링거(아마존 닷컴)

팝의 황제로 놀라운 명성과 영예를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사람. 여러 가지 구설수가 있었지만 아까운 사람이 죽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의 춤과 음악은 영원히 남으리라.

그리고 사망 이후 그의 인격적인 측면이 지인과 자녀들을 통해 증언되고 과거에 있었던 몇몇 추문들의 진실들이 밝혀지며 본국인 미국에서도 영웅적인 이미지를 많이 회복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사후 유튜브에 그의 공연 영상들이 마구 업데이트되어 잭슨에 대한 미국 10대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의 10대 팬 층도 상당히 증가했다. 덕분에 2009년 말 미국 여론조사에서 미국 10대, 20대들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1위에 마이클 잭슨이 올라갔었다.

팝의 황제답게 '이 모든 것이 쇼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라는 팬들의 극성적인 말들이 나오기도 했으며 그 덕분에 한동안 영문판 위키백과에서는 죽었다 안 죽었다 가지고 수정전쟁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미 현지 시각으로 2009년 7월 7일 마이클 잭슨 추모식이 열렸고 약 3만 명이 그 자리에 참여했다. 가수 한 명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이러한 행사가 열릴 정도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 이 추모식은 미국에서만 3100만명이 시청했는 데 역대 추모식 시청률 3위라고 한다.[44]

그의 생일인 2009년 8월 29일에는 뉴욕, 베이징, 도쿄, 서울, 파리, 런던, 베를린, 상파울루 등등 전 세계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Beat it' 플래시몹이 벌어졌으며 2014년인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 예정이다.

2009년 7월 11일, LA 경찰에서 타살 설을 제기했고 15일에 잭슨의 사망을 미국 법상 살인으로 결론지었다. 의도적인 살해는 아닐지언정 치료과정 중 과다한 약물투여로 인한 2급살인(=과실치사)라는 듯. 참고로 미국 법의 1급 살인이 우리나라의 살인죄(고의 있음)이고 2급 살인은 우리나라의 과실치사(의도 없음)에 해당한다. 즉, 미국 법에는 '과실치사'라는 용어가 없고 일단 사람을 죽였다면 살인이며 그 고의 유무에 따라 1급과 2급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2011년 9월 28일부터 미국에서 잭슨의 주치의이자 천하의 개쌍놈인 콘래드 머레이(Conrad Murray)에 대한 공판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잭슨의 사망 직후의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고 있다. 머리는 공판에서 잭슨이 자의에 의하여 불면증 치료제인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을 통해 잭슨 스스로는 주입할 수 없는 것이 밝혀졌다. 사진과 함께 사망 전의 음성 녹음파일도 공개되었다.# 결국 2011년 11월 7일 # 과실치사(involuntary manslaughter) 유죄로 판결이 내려지고 2013년 출소했다.

'사람들이 이 쇼를 떠날 때, 사람들이 내 쇼를 떠날 때 나는 사람들이 '내 생애에 본 적이 없는 최고의 쇼 였어.' 라고 말하기를 바란다.' 는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언론에서도 '약물에 취한 것 같은 목소리' 라고 말하며 잠정적으로 그의 약물 남용 설을 미는 눈치다. 슬프게도 육성 속 고인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마지막 공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잠시 느낄 수 있다.

2.12. 사후

2009년 7월 6일 마이클 잭슨이 한때 머물렀던 대저택인 ´네버랜드´에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카메라에 포착됐다.영상 1분 20초 부터[45] 얼핏보면 셰도우 맨과 흡사하다. 일부 팬들은 "그림자는 잭슨의 영혼일 것"이라며 "마이클 잭슨이 애착을 갖고 있던 네버랜드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팬들은"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능성이 존재하는 만큼 억측은 금물"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후 이 그림자의 행방은 알 수 없다.

2009년 10월 12일 신곡 'This is it' 의 음원이 공개되었다. 또한 'This is it' 은 개봉하지도 않은 상황인데도 갖은 기록을 세웠다.

사망 직전 준비 중이던 런던 투어의 리허설 영상과 인터뷰 영상이 포함된 다큐멘터리 영화 'This is it' 이 2009년 10월 29일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영국에선 당일 가장 빨리 매진된 영화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미국에서만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사망 직후 국내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반 판매량은 133배 이상 급증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나온 지 수년이 지난 그의 베스트 앨범이 갑자기 앨범판매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오래된 앨범들은 당시 빌보드 차트 정상에 위치했던 블랙 아이드 피스의 [The E.N.D.]보다도 많이 팔렸는데, 이런 현상은 빌보드 사상 최초였다. 오래된 앨범은 빌보드 메인 차트에 랭크될 수 없는 룰이 있었지만 이를 계기로 이후 12월 5일부터는 과거의 앨범들 또한 랭크될 수 있도록 변경됐다. 마이클 잭슨이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11월 8일 선보인 'Breaking News'가 공개되었다. 잭슨이 완성하지 못한 노래를 소니에서 완성시킨 것. 미국의 팬들은 빌보드 TOP 200 데뷔 1위를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46] 결국 이번에도 발매하자마자 1위를 찍어버린 위용을 자랑했다. 은 마이클 잭슨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2010년 12월에는 앞서 공개한 'Breaking News' 가 수록된 첫 번째 사후앨범 'MICHAEL'을 발매했다. 전 세계적으로 150만장이 팔렸다. 앨범에 수록된 곡 중 몇 곡이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냐 는 논란이 있었다.

2012년 Bad 앨범 25주년 기념으로 미공개곡과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1988년 배드 투어 공연 영상을 수록한 배드 25가 발매됐다.

2013년 6월 마이클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자살을 기도한 것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유산 싸움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여러 고달픔이 크다고 한다. 기사.

2014년 5월 14일에는 2번째 사후앨범 'Xscape'가 발매됐다. 전작 'Michael'이 평론가들과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인 반면 'Xscape'는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고,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차트에서 9위를 하며 마이클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연속으로 빌보드 TOP 10안에 든 유일한 가수가 됐다. 18일에는 미국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2014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Slave to the Rhythm'를 공연했다.[47] 기사.

2015년 사망 6주기 기념으로 소니에서 드디어 음원을 스트리밍으로도 들을 수 있도록 공개했다! 12월에는 Thriller 앨범이 미국 내에서 최초로 30X 플래티넘 (3000만장 판매)을 인증받으며 또 다시 기록을 세웠다.

2016년 2월 1일 'Thriller' 앨범은 미국 내 32X 플래티넘 (3200만장 판매)을 인증 받았다.

뒤이어 2017년 2월 16일 'Thriller' 앨범의 미국 내 판매량 33X 플래티넘 (3300만장 판매) 을 인증 받았다.

2017년 9월 29일에는 모음집인 Scream이 발매되었다.

3. 영향력

스릴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음악 형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롤링 스톤/ THE 40 MOST GROUNDBREAKING ALBUMS OF ALL TIME

마이클 잭슨의 대표적인 업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흑인으로서 인종적인 장벽을 허물고 흑인음악의 저변을 넓혔다.

2.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 음악 산업의 격변을 이뤄냈다.

영국 대학 연구팀이 1만 7천개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롤링스톤즈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1983년(마이클 잭슨,더 폴리스,유리스믹스 등의 팝 스타와 신기술의 유행),1991년(힙합)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영국 연구진 발표…1964년·1983년 포함해 모두 3차례 혁명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 롤링 스톤1983년을 음악의 해로 규정하며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이 로큰롤 역사에서 흑백 인종의 벽을 부쉈으며 'Billie Jean'이 특히 큰 역할을 해냈다며 잭슨을 흑인음악의 선봉장이라 평가했다. 또 LA 타임스의 앤 파워스 음악평론가는 펑크, 소울, 재즈, 록, 디스코 등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 팝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경계를 완벽히 허물며 팝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놨다고 평가했다.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가 새로운 사운드로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2009년 KBS 인터뷰)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2009년 한겨례 기고문)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뉴팝을 발명했다'라는 평을 받거든요. 여기서 뉴팝이란 것은 당시 팝음악계 내부에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인종적 취향의 벽 자체를 아울렀다는 얘기거든요.(2010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박은석 음악평론가

인종 부분만 보더라도 정말 그 당시 백인들은 흑인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심지어 흑백차별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스릴러는 광풍을 일으켜 "잭슨이 아파트헤이트의 갭에 다리를 놓아주었다(1984년 타임즈 기사)"는 말까지 나왔다.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이것이 바로 크로스오버의 정확한 의미이기도 하다. 크로스오버라는 어휘가 중요성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 그만큼 인종에 따라, 세대에 따라, 성에 따라, 국가에 따라 각각의 음악이 구별되어 있기 (또는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흑인들의 음악이 있고, 백인들이 즐기는 음악이 있다. 백인, 흑인의 음악 영역은 사라지고.. 잭슨은 인종분리 구획을 훌쩍 뛰어넘으며 크로스오버 물결이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크로스오버의 경향은 90ㄷ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제 그것은 새로울 것도 없다. 한마디로 지금은 지겨울 정도로 크로스오버 음악이 판치는 세상이다.(웅진뮤직 기고문)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남아공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통했던 것입니다. 당시 마이클의 음악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 등장했던 펑크 음악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흑인이라면 흑인음악인 솔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마땅한데 마이클은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마이클 음악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 크로스오버에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음악 형태를 창조하였습니다. 마이클의 영향으로 당시 대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음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먼저 프린스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마돈나도 빼놓을 수 없고 비록 계열은 다르지만 스탠다드 팝의 휘트니 휴스턴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유산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유리스믹스, 웸과 같은 뮤지션이 해당됩니다. 이들은 모두 백인이었음에도 흑인음악의 색깔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보이 조지의 컬쳐 클럽도 마이클의 크로스오버 열풍의 편린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은 음악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입니다. 마이클과 함께 소울팝, R&B팝이 궤도에 올랐고 프린스, 라이오넬 리치, 휘트니 휘스턴은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바로 직전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음악 장르는 컨트리 팝이었지만, 마이클이 우뚝 솟으면서 완전히 음악의 양태가 바뀌었습니다. 마이클의 등장으로 인해 세련된 흑인음악, 재즈나 가스펠의 영향을 받은 음악마저도 등장을 한 것이라고 봅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잭슨의 노래는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 스릴러 앨범의 편곡은 록인지 펑크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규정짓기 힘든 리듬을 갖고 있으며 실제 사운드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강력한 조합과 어우러져 그의 하이톤 목소리에 딱 들어맞는다.

1984년 뉴욕 타임스/ MICHAEL JACKSON AT 25: A MUSICAL PHENOMENON

앨범의 모든 수록곡은 지금 발표되는 곡들과 섞어 틀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는 펑크, 포스트 디스코와 같은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록의 어프로치를 붙여 넣었으며, 동시에 퍼커션 운용으로 곡의 특색을 키우고 자신의 창법과 음색으로 전체를 아우르며 팝 음악을 새롭게 정의했다고 해도 될 정도의 성과를 이뤄냈다. 음악 자체의 결 또한 다양한 장르를 섞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결로 완성해냈다.

박준우 음악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록큰롤이라는 음악이 흑인에게서 백인에게 전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은 록을 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흑인음악인 소울과 R&B를 바탕으로 백인음악인 팝과 록이 완벽히 결합된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비틀즈 이후 영국 뮤지션들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던 미국의 대중 문화계에 미국적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고... (생략) 인종적 경계와 장르를 통합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그동안 흑과 백으로 나뉘었던 미국의 대중문화가 흑백의 구분없이 함께 화합하여 세계 시장을 선두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박광순 문화평론가/ 벅스뮤직 추천앨범 리뷰 'Thriller'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로 1980년대와 1970년대에 명확한 선을 그으며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경계선마저 무너뜨렸던 셈이다.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잭슨 집안은 흑인 사회의 케네디가이며 흑인 가수들을 주류 TV쇼에 출연시켜 인종에 관계없이 대중에게 표를 팔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제임스 워커 연예계 전문 변호사/ 2009년 CNN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스릴러 발표 훨씬 이전에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 1972년 영화 Ben을 상영했던 극장의 상당수는 흑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잭슨은 백인들이 장악했던 할리우드의 영화 주제곡 'Ben'을 불렀다.

워싱턴 포스트 2009년

가수가 되고 나서 마이클 잭슨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느꼈다. 아무래도 마이클 잭슨에게 영감을 안 받은 가수가 없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음악을 듣고 자라서 중간에 들어가는 추임새 등 창법이 비슷하다.

박재범, 2014년 9월 2일 정규 2집 <EVOLUTION> 쇼케이스 현장에서

로큰롤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의해서 대중화됐습니다. 그런데 로큰롤 뮤직은 흑인의 음악에서 출발했어요. 리듬 앤 블루스라고 하는. 디스코 음악 역시 흑인의 펑크, 소울 음악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음악을 가지고 대중적 스타가 된 뮤지션들은 다 백인들이었어요. 1950년대 선(Sun) 레코드의 샘 필립스 사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죠. "로큰롤 음악은 너무 젊은이들에게 사랑받을 음악인데 그래서 흑인의 목소리를 가진 백인 청년 한 명만 있다면 단번에 대중들의 스타가 될 텐데.." 그때 등장한 게 엘비스였습니다. 1970년대 이 디스코 음악에 수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대표했던 밴드는 비지스라고 하는 백인 3인조 형제 밴드였죠. 그리고 앞서서 '토요일 밤의 열기'(디스코 영화) 영화의 한 장면을 보셨습니다만 흑인들은 등장하지 않아요. 백인들끼리 모여서 춤을 춥니다. 그 시대의 스타들은 이미 흑인들 쪽에도 준비가 돼 있고 백인들 쪽에서도 준비가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흑인들의 스타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흑백의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했던 미국 사회에서 백인들이어야만 아주 폭넓은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80년대 이 스타의 등장한 한 시대를 가르는 혁명적인 등장이며 또한 완전히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점이 됩니다. 누굴까요? 마이클 잭슨입니다.

김태훈 음악평론가/ TVN 어쩌다 어른 '시대가 요구한 스타'

비록 시대가 좋아졌다고 하나 80년대는 인종간의 차별이 심했을 때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대놓고 MTV는 백인 중심주의라고 씹었을 정도 ...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King Of Pop으로 대접받았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빌리 진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게 잭슨의 'Beat it' 뮤직비디오를 주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MTV는 한 때 마이클을 거부했지만 MTV와 마이클이 뗄 수 없는 사이가 됐고 1991년부터는 평생공로상인 'Michael Jackson Video Vanguard Award' 상까지 만들어 현재까지도 시상하고 있는걸 보면 참 묘한 셈.

그 이후 나온 흑인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 덕분에 MTV에 자연스럽게 비디오가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마이클의 후광 효과를 본 거죠.

ㅡ바브 슬레이드 Kiss FM 뉴스 국장/ 2009년 CNN 인터뷰

1980년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중음악계에서 흑인들은 항상 2인자였다. 흑인 노예들의 음악인 블루스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로큰롤은 물론이고, 스탠더드 팝, 포크 음악, 하드 록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백인들이 주류를 점했다. 소수의 흑인 가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주류에 전면 등장하면서 흑인들의 정상 등극도 활발해졌다.

ㅡ안재필 음악평론가/ Pop's World '혁명을 노래하는 흑인 여가수 트레이시 채프먼'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항상 흑인 스타는 있었어요. 그런데 그 흑인 스타가 1등은 못했어요. 항상 백인한테 뒤졌죠. 그런데 마이클 잭슨에 와서 흑인이 제대로 톱이 된 겁니다.(2015년 JTBC 인터뷰) 마이클이 왜 중요하냐, 마이클이 등장한 83년에 드디어 서러움 당하던 흑인음악이 진짜 1등으로 올라섰거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마이클은 이곳저곳에서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의 흑인들의 정서를 온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도 사실 마이클에게 채무자다 이런 표현을 써요. 마이클이 없었으면 미국 흑인들이 무슨 희망을 갖고 살았겠어요. 그니까 마이클은 흑인음악이 제대로의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고 어떻게 보면은 미국에 적어도 음악에 관한 한 계급 질서를 바꾼 거죠. 댄스음악이 세계적 주도권을 갖게 된 것도 마이클과 함께라고 볼 수 있고요.(2017년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그는 또한 음악적 현상을 넘어 사회적 현상이었다. 그의 슈퍼스타덤에는 백인지배사회에서 신음한 흑인들의 비상 욕구와 자긍심이 저류하고 있다. 그와 같은 흑인스타들의 분발로 설움과 차별에 시달려온 흑인들은 자신감을 획득했고 그 결과 우리 생애 어려울 것 같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보게 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생전이던 사후던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와 같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의 음악사적 위상이 견고하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1980년대의 음악계는 마이클 잭슨의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백인들의 사랑을 받은 흑인은 없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

임진모 음악평론가

당시 음반 시장은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음반 판매량은 5,000만장이나 감소했다. 1980년대 들어 디스코 시대가 저물면서 흑인음악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크게 맞추는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점점 자취를 감춰 갔다. 차트에서 흑인음악의 후퇴는 얼마나 드라마틱했던가? 1982년까지 빌보드 Hot 100 차트에서 흑인음악의 비중은 거의 80%나 감소했다. 이것은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이 거의 바닥이었음을 말해준다. 확실히 흑백 사이에는 깨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벽이 존재했는데 특히 아이들은 서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MTV와 라디오 채널은 철저히 백인음악 위주로 편성됐다. 하지만 MTV가 마이클과 함께 성공하면서 다른 흑인 음악가들의 비디오도 빠르게 방영되기 시작했고 팝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췄던 흑인음악도 다시 들리기 시작해 대중들은 이제 흑인 음악가와 백인 음악가의 비디오를 같은 채널에서 보고, 그들의 음악을 같은 라디오에서 듣는 데에 익숙해지게 됐다. 스릴러 시대에 흑인음악은 차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프린스의 싱글 '1999'조차도 1982년 처음 발표됐을 땐 라디오에서 아웃됐다가 1983년 중반에 재발표된 후 MTV에 모습을 보여 팝 라디오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마이클과 MTV의 조합은 실로 거대한 파워 그 자체였으며 레이건 시대 초기 쪼개져 있던 대중문화를 재통합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흑인음악은 주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빌보드/ Michael Jackson's 'Thriller' at 30: How One Album Changed the World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당시(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은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가장 큰 영향력은 마이클이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는 거다. 뮤직비디오와 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2014년 기사에서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를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Dangerous World Tour 때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빌리 진과 비트 잇,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춤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비트 잇과 스릴러 뮤직비디오에서 집단 군무는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최초의 집단 군무로 소개되고 있으며 잭슨 파이브의 멤버일 때는 로봇 춤 등을 유행시켰고 문워크라는 획기적인 춤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 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데인저러스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국회에 등재돼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비디오가 마이클의 스릴러! 마이클의 이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비디오와 보는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즉, 마이클이 음악 산업에서 뮤직비디오를 독립적인 상품으로 내놓은 첫 주자였고 대중음악을 연예사업으로 돌린 주인공인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 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3년 5월 16일, 모타운 창립 25주년 기념식에서 그의 넘버원 싱글 Billie Jean 공연을 선보였다.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ㅡ 앤서니 디커티스 음악평론가/ 저서 'Present Tense'

잭슨이 역사상 처음으로 춤을 추는 팝 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팝 스타를 댄서로서 규정한 최초의 아티스트였다. 도나 섬머는 디스코의 여왕이지만 아무도 그녀의 무브를 신경쓰지 않았고 베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Billie Jean 이후 댄싱은 팝 스타들의 일부가 되었다. 심히 춤에 재능이 없는 스타라도 모두 그들의 히트곡을 부를 때 대중들 앞에서 댄스를 선보여야만 했다. 휘트니 휴스턴도 라이오넬 리치도 심지어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말이다.

ㅡ롭 셰필드 음악평론가 / 2009년 롤링 스톤 'A New Kind of Hollywood Musical'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누구도 잭슨만큼 댄스라는 예술 형식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ㅡ타비아 닌고 문화평론가 / 2009년 NY Daily News

MTV가 처음 개국했을 때 뮤직비디오는 가사를 그대로 드라마처럼 옮기거나 콘서트를 스튜디오에서 재현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많은 사람이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며 음악을 듣기 위해 MTV를 틀었다. 하지만 마이클은 좀비들과 함께 춤을 추는 ‘스릴러’를 10분이 훌쩍 넘는 단편 영화로 제작해 뮤직비디오의 개념을 바꿨다.

ㅡ 김작가 음악평론가/ 시사IN 기고문 '모든 것을 초월한 음악을 남기고'

1981년 8월 1일, MTV가 개국하면서 본격적으로 뮤직비디오 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방송 초기에 MTV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이었다. 1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히고 있었지만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MTV가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지게 된 건 1983년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뮤직비디오를 통해서였다. 수많은 기록을 세운 이 곡의 오리지널 비디오는 13분짜리 단편영화의 컨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최초의 뮤직비디오였고 MTV를 비로소 대중적인 채널이자 광고 효과가 높은 채널로 자리 잡게 만든 1등 공신이었다.

ㅡ 차우진 음악평론가/ 네이버 뮤직 매거진 '뮤직비디오, 보는 음악으로의 시대를 열다'

MTV와 뮤직비디오 발전의 1등 공헌자. 마이클 잭슨이 이룩한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MTV와 뮤직비디오를 통해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가져온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이클이 내놓은 싱글들은 대부분 뮤직비디오를 동반했고,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놀라운 영상 미학을 구현했다. 마이클은 뮤직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음악 팬들을 MTV 앞으로 이끌었다. 그의 뮤직비디오는 단순히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쇼트 필름이라 말할 정도로 방대한 스케일의 작은 영화다. 쟁쟁한 영화 감독들을 초빙해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특수효과를 갖춰 웬만한 영화 못지않은 뮤직비디오를 탄생시켰다.

ㅡ고영탁 음악평론가/ 오이뮤직 2003년 3월호

스릴러 앨범이 팝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면 확실히 Dangerous 투어는 팝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ㅡ한상철 음악평론가/ 인터파크 '댄저러스 투어 Live In Bucharest' 리뷰

현대화된 댄스 팝을 거론할 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걸쳐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케이팝의 경우 무대 구성이 매우 중요한데, 노래와 안무 등을 통해 얼마나 화려한 무대를 연출하느냐에 있어서는 마이클이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랩을 하면서도 동시에 비보잉을 해야 하는 게 케이팝의 특성.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때부터 그랬는데 이들이 아크로바틱한 댄스를 한 것도 마이클의 영향이 크다. 이후에 나온 유승준, 비 등 솔로 남자가수들도 마찬가지다.

ㅡ김성환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또 다시 마이클 잭슨 세상'

마이클 잭슨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비주얼 댄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1980년대 중·후반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의 댄스가수가 속출했다. 서태지도 어릴 적에 마이클 잭슨을 동경하면서 댄스음악의 무한 파괴력을 가슴속에 담아뒀을 것이다. 한국도 이전엔 댄스음악, 댄스가수라는 수식이 없다가 마이클 잭슨 시대를 맞아 일반화됐다.(2009년 위클리 공감 기고문) 마이클 잭슨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매체 환경의 변화입니다. 마이클이 등장하기 이전 유력 매체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을 알게 된 것은 뮤직비디오에서였습니다. 당시 마이클의 뮤직비디오는 미국의 유선방송인 MTV에서 상영했습니다. 개국 당시 MTV는 '뮤직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그룹 버글스의 노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연일 틀었습니다. 이 곡을 통해 이제는 뮤직비디오 시대임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이러한 MTV의 의지외 욕구는 1982년 마이클에 와서 마침내 실현됩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어떤 밴드를 좋아한다 해도 얼굴도 모르고, 밴드의 리더가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가수 얼굴도 모르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고문이죠. 이와 같은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출하고 주도한 사람이 바로 마이클입니다. 마이클 덕분에 마돈나, 컬쳐 클럽도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음악의 주요 매체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MTV로 확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얼굴을 다시 확인하고 뮤직비디오가 얼마나 멋있게 만들어졌나를 통해서 음악을 접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다매체 시대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마이클이 처음 시도하여 대중적으로 흐름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저서 '젊음의 코드, 록)

임진모 음악평론가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이전 1980년~1982년 사이 음반 시장은 망해가고 있었고, CBS 에픽의 1982년 8월 13일은 직원들의 주요 해고가 있던 날로 검은 일요일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모든 걸 바꾸었다.

빌보드 2009년

마이클의 앨범을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레코드 업계는 상업 침체로 크게 망해가는 분위기였는데 잭슨의 충공깽한 앨범 판매량이 이들에게 도움이 됐다. 사람들은 잭슨의 앨범을 사면서 다른 뮤지션들의 앨범도 사갔고 타임지는 레코드 업계 최호황인 78년 이후 최고의 호황기를 맞았다고 설명했으니 참고로 'Dangerous' 앨범 발매 당시 레코드 업계에서는 건스 앤 로지스의 앨범을 사는 소비자들은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을 사가지 않지만 마이클의 앨범을 사는 소비자들은 다른 아티스트도 사간다고 말했었다.

이 외에도 잭슨이 입는 옷도 불티나게 팔렸고 'Thriller 25th' 기념 앨범에 포함된 동영상에 잘 나와 있는데 스릴러가 한참 유행일 때 개나소나 잭슨이 비트 잇 때 입은 레드 자켓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일부 학교에서는 잭슨의 복장을 금지하기도 했고 이런 현상을 보고 매체는 그 어떤 톱스타도 잭슨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버클과 지퍼가 많이 달린 그의 옷 덕택에, 한국의 지퍼 생산 업체가 전에 없던 수출 대박을 맞았다는 기사가 당시 국내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마이클은 사운드 측면에서도 극찬을 받았는데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잭슨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엔지니어들은 반드시 잭슨의 음악을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Ice J 음향엔지니어는 잭슨의 앨범 사운드를 현대 음악의 기준, 레코딩 기술의 결정체,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끌어올려서 녹음/믹스다운/마스터링한 팝 레코딩의 교과서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1991년 Dangerous 앨범부터는 사운드에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됐다.

당시 최고 인물들을 앨범 작업에 참여시킨다는 원칙은 지금까지도 여전한데, 그래서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당대에 기술적으로 가장 앞서간 사운드로 여겨진다.

장호연 음악평론가/ 웹진 weiv, Thriller 앨범 리뷰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 음색과 음원을 찾을 때까지 스튜디오 작업에 매달렸으며, 코러스만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녹음기술만으로 볼 때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이었다.

고영탁 음악평론가/ 웹진 izm, 아티스트 리뷰 '마이클 잭슨'

음반을 들으면 이건 소리가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마이클의 음반은 스튜디오에서 들으면 사운드가 다른 음반과는 다릅니다. 정말 보통 소리가 아닌거죠.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 유행을 선도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음악과 함께 전 세계를 끌어안은 자원봉사자이자 흡입력 있는 넘버원 뮤지션은 잭슨 이후에는 만나보기 어려울 거에요. 중학교 때 방구석에 처박혀 며칠을 밤새며 들었던 앨범인데, 사운드 퀄리티에 가장 많이 놀랐어요. 거의 신기에 가까운 믹싱 실력이라고 할까요. 퀸시 존스와 결별한 잭슨이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와 만나 최고의 앨범을 탄생시킨 셈이죠. 전곡이 모두 타이틀곡 같은 느낌에다 한발 앞선 음악 기술을 통해 1990년대 팝계에 도장을 찍어버린 앨범이라고 생각해요. 이로써 90년대 팝 시장이 정립된 게 아닐까라는 추측도 해보죠. '음악은 가장 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 명반이에요.

가수 데프콘/ 네이버 뮤직 매거진 '나를 노래하게 만들어 준 음악들' Dangerous 앨범

국내 가요의 역사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뉘듯이 팝 음악의 역사는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앨범이 나오기 전과 나온 이후로 나뉜다는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판매량과 더불어 마이클 잭슨의 '팝의 황제' 등극, 팝 음악의 흑백 장벽 붕괴, 심지어는 음반 산업과 카세트테이프 제조업의 호황 등등으로 이어질 만큼 수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음반이기에 오히려 이 음반의 녹음 상태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제가 들어본 1980년대 앨범 중에서 이 앨범만큼 녹음 품질이 좋은 앨범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녹음 품질이 대단히 뛰어납니다. 예를 들어 'Thriller'를 들어보면 도입 부분에서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열리면서 무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마룻바닥을 걸어가는 구두 발자국 소리가 마치 영화처럼 그려지죠. 지금 2017년에 녹음된 앨범들도 이 정도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앨범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전 세계의 모든 청소년들을 뒤로 걷게 만들었던 'Billie Jean'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이 곡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녹음하기 어려운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요. 대중음악에 쓰이는 악기 중에 가장 듣기 어려운 악기가 베이스 기타라는 건 누구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이 곡은 곡 전체에 흐르고 있는 베이스 라인이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곡이기 때문에 그 베이스 기타 소리가 묻히면 안 됩니다. 여기에 마이클 잭슨이 입으로 내는 소리지만 음표에는 그려지지 않는 소리, 이를테면 바람 소리나 딸꾹질 소리 등의 소리가 정확히 표현되어야 하죠. 게다가 어느 정도 해상도를 보장할 수 있는 모니터 계열의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좁은 녹음실에서 녹음을 한 후 믹싱 과정에서 리버브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넓은 공간에서 자연스러운 잔향이 남게 녹음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eat It'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어보면 후렴구로 반복되는 'Beat It' 이라는 가사가 한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자리를 옮겨가며 소리가 나서 여러 명이 코러스를 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앨범이 발매된 시기가 1982년임을 감안하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또 다른 감상 포인트는 이 곡의 기타입니다. 이 곡에는 메인 리프를 치는 기타와 펑키 리듬과 솔로를 치는 두 대의 기타가 있는데요. 헤비메탈처럼 보컬보다는 기타의 볼륨이 큰 장르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마이클의 앨범처럼 보컬이 중심이 되고 기타 연주는 반주가 되는 음악에서는 기타 소리가 엉키거나 묻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곡에서는 리듬 기타와 리드 기타가 크지 않은 볼륨에서도 선명하게 잘 들립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연주가 너무 훌륭하고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곡의 메인 기타와 베이스 기타는 Toto의 스티브 루카서가, 기타 솔로는 에디 반 해일런이 연주했습니다) 믹싱을 잘 한 덕이지요. 그리고 그 뒤에는 전설적인 프로듀서가 아니라 그냥 전설인 퀸시 존스가 있습니다. 비단 [Thriller] 앨범뿐만이 아닙니다. 퀸시 존스와 결별하고 테디 라일리와 작업한 첫 번째 앨범인 [Dangerous] 앨범은 마치 이문세 4집처럼 거의 모든 곡이 싱글 커트된 앨범이죠. 이 앨범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학생 시절이라 변변한 오디오도 없이 그냥 싸구려 이어폰으로 들었는데요. 그래서 이 앨범이 그렇게 녹음 상태가 좋은 앨범인지 몰랐습니다. 한참 후에 오래된 CD를 정리하다가 이 앨범이 눈에 띄어서 CD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가만히 눈을 감았는데요. 그렇게 감은 눈은 1분도 안 돼 동그랗게 떠졌습니다. '아니 이 앨범이 이렇게 녹음이 잘 된 앨범이었나?' 하는 생각에요. 저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고 지금도 음악과 오디오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먹고 사는 사람이지만 마이클 잭슨의 앨범을 들을 때면 아직도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이클 잭슨의 감성과 메시지가 완성도 높은 사운드 품질 덕에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마이클 잭슨의 앨범은 다른 가수들의 그것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의 음악은 후배들에게 교본이 되고 있습니다... 팝의 황제라는 명성에 가려진 그의 음악과 놀라운 사운드 퀄리티는 멜론 Hi-Fi의 무손실 음원을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한지훈 음향엔지니어/ 멜론 뮤직스토리 '그가 팝의 황제인 이유'

3.1. 영향을 준 아티스트

마이클 잭슨이 팝 스타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산소와 중력의 영향력을 말하는 것과 같다.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이룬 Thriller 이후 잭슨의 영향력은 너무나도 방대하고 광범위해져 이후 잭슨의 성공 공식을 따라하지 않은 아티스트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 잭슨과 견줄 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잭슨의 혁신성을 그들 각자의 작품에 적용할 제자들만이 앞으로도 꾸준히 생겨날 뿐.

롤링 스톤/ 2009년 7월 'Michael Jackson's Indelible Pop Legacy'

현 세대의 모든 팝 뮤지션들이 마이클에게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롤 모델이자 우상은 마이클 잭슨이라고 직접 밝혔다. 2010년 AMA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에서 남자 가수상 수상 소감으로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 누구도 마이클 잭슨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소감을 마무리 했다. 마이클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를 끈 것은 음악이 다양하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니 내 목표도 마이클 처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활력을 주어 모두와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다. 또 마이클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깨끗한 삶 때문이기에 자신도 마이클 잭슨을 본받아 깨끗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했지만 현실은... 인성 흐레기한편 최근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이클의 노래는 'Dirty Diana'라고 밝혔다.

레이디 가가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옷,장신구들을 대량으로 구매하여 마이클 잭슨 박물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극성적인 팬이다. 한번도 마이클을 안 좋아했던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그녀의 곡 'Love Game'에 등장하는 지하철 역이 바로 마이클의 노래 'Bad'의 촬영장소이고, 마이클이 죽었을때[48] 백댄서들과 함께 울었다고 한다. 2016 미 대선 당시, 힐러리 지지 연설에 마이클 잭슨이 Bad 시절에 입던 나폴레옹 자켓을 입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셀린 디온은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아이돌이었다고 말했다. 15살 때 tv에서 마이클을 보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으며 마이클 때문에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노래 부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추모 영상 이 시절 그녀의 방 천장에는 마이클 잭슨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살 무렵에는 마이클의 복장까지 챙겨 입고 Bad의 춤과 노래를 커버한 적도 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은 그 어떤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력을 남겼고 마법이었고 우리 모두가 꿈꾼 존재라며 추모했다. 비욘세는 마이클 잭슨의 'I Wanna Be Where You Are'을 커버한 적도 있고 2016년 슈퍼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복장을 오마쥬하고 나왔다.

어셔는 마이클 잭슨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 (30주년 공연)에 대해 감사하며 그는 음악으로 경계를 무너뜨렸고 그가 남긴 음악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마이클 잭슨이 'Invincible' 앨범을 발매하기 전 현재 팝 음악계의 흐름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이 둘의 팝 뮤지션과 미팅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브리트니와 저스틴이 마이클에게 'Thriller' 뮤직비디오의 대성공 등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칭찬하자 마이클이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브리트니는 마이클 잭슨 사망 이후 그는 내 평생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으며 저스틴은 천재를 잃었다고 말했다.

마돈나는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을 직접 공연 중 선사한 바도 있고 그녀의 히트곡 'Like a Virgin'도 빌리 진과 흡사하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뒤 '마이클에게서 영감을 받지 않은 아티스트를 모른다, 모두가 마이클 잭슨을 경외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그린 데이, 브루노 마스, 크리스 브라운, 칸예 웨스트, Jay Z, 머라이어 캐리, 마룬 5, 더 위켄드, 테일러 스위프트 등 주요 팝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박진영이 마이클 잭슨의 'Off The Wall'을 듣고 자신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했고 빅뱅, BoA, 문희준, 박재범, 장우혁 등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4. 인기와 평가

마이클은 대중 문화에 끼친 영향력 측면에서 엘비스, 비틀즈, 프랭크 시네트라의 계보를 이어요. 21세기에 댄스팝, 알앤비 혹은 소울을 선보이는 그 누구든 마이클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셈이죠.

ㅡ짐 데로가티스 음악평론가/ 2009년 NPR 인터뷰

만약 마이클 잭슨이 세상에 기여한 혁신적인 업적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음악과 예술은 아마 지금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ㅡL.A Reid 에픽 레코드 CEO/ 2014년 Xscape 앨범 발매 공식 논평

오늘날 마이클 잭슨의 신화는 그 자신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이 함께해 얻은 결실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미 그는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며 최고 음악인이 되기 위한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았다. 결국 최고의 가창력을 갖게 되었음은 물론 최고 수준의 댄스로, 전 세계 춤과 음악계 판도 모두를 바꾸었다. 어셔, 저스틴 팀버레이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등 수많은 팝스타들이 현재까지도 그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 등에 비견할 만한 이 팝음악사에 길이 빛날 걸출한 음악인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음악계의 큰 손실이다.

ㅡ조성진 음악평론가/ 조성진의 음치불가 '마이클 잭슨' 편

팝의 황제이자 아이콘이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말하자면 농구계의 마이클 조던 같은 인물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수식으로는 모자란, 그 분야 자체를 상징하는 거대한 존재 말이다. 마이클 잭슨은 ‘천재가 노력도 하고 성실함까지 갖추면 이렇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이다. 동시에 그가 지닌 여러 재능이 어쩌면 고루 온전하게 평가받지 못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그가 무대에서 완벽한 퍼포먼스를 구사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퀸시 존스 같은 위대한 프로듀서와 작업한 최고의 재능을 지닌 ‘댄스 가수’를 넘어 이미 그 자신이 뛰어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능이 재능을 가렸다고 할까. 불세출의 뮤지션..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요절로 인한 신화화’ 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물론 요절로 인한 신화화로 인해 자신이 지닌 음악적 능력보다 과대평가된 뮤지션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ㅡ김봉현 음악평론가/ 시사저널 기고문 '마이클 잭슨, 세계를 열광시키다'

북유럽 신화의 많은 신들이 마지막 날에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멸망하는 사건을 가리키는 '신들의 황혼'이라는 단어는 바그너에 의해 사용된 후 위대한 시대의 종언을 가리키는 관용구로 자리잡았다. 지난주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한 후 바로 이 표현이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죽음이 단순히 한 아티스트의 죽음이라기보다 세계 음악시장 쇠락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평론가 강명석 씨도 지적했듯이 지금도 '우리는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오직 마이클 잭슨만이 '팝의 제왕'(King of pop)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거대하게 느껴지며 그의 부재는 엄청난 상실감을 남기는 것이다.

ㅡ방시혁 작곡가/ 일간스포츠 기고문 '새로운 마이클 잭슨을 기다리며'

그 완벽한 사운드 안에서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에 지금의 그 어떤 팝 앨범보다 현대적인 음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흑인음악의 원초적인 비트와 그루브를 백인의 팝 안에 정제시켜 융화했고, 그것을 록의 다이내믹으로 폭발시켰다. 그가 곡의 도입부에서 선보이던 독특한 창법은 그대로 어셔와 저스틴 팀버레이크, 비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수많은 댄스 가수들은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보며 퍼포먼스를 구상한다. 그는 모든 장르가 가장 쾌락적인 형태로 융합하는 팝음악을, 가수의 춤이 단순한 몸짓을 넘어 거대한 무대와 합일 되는 새로운 퍼포먼스의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King of Pop’의 서거는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시작이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지구의 모든 뮤지션들이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지만, 정작 마이클 잭슨 개인은 그 업적으로부터 격리됐다.

ㅡ강명석 음악평론가/ 텐아시아 기고문 '우리는 지금도 마이클 잭슨이 만든 시대에 살고 있다'

제왕 마이클은 인종차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백인 주류 사회의 총아로 등장했다. 전 세계 수억 명의 팬을 사로잡는 무기는 다름 아닌 마이클의 팝 음악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우리는 이미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고, 비틀스, 레이 찰스, 밥 말리 등 대중음악의 시대별·장르별 전설을 목격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이클 잭슨을 “내 생애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레전드 중 레전드”(T 윤미래의 말)로 만들었을까? 그의 음악은 모타운의 유명 흑인 스타들을 자랑하던 디트로이트 R&B의 정수의 경계를 뛰어넘어 록과 재즈, 포크와 발라드 등 여타 장르의 장점을 모두 모은 정제된 작품이었다. 가장 많은 리스너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팝의 틀 속에 용해하는 절제력과 완성도를 추구했다는 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힙합을 비롯한 흑인 아티스트들이 MTV 등 주류 방송 매체로 진출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이라는 사실을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은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ㅡ서병후 음악평론가/ 맥심 코리아 2010년 6월호

도대체 잭슨은 팝 음악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어떤 면에서 그가 팝 음악 그 "자체"를 정의하는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한다. 팝이 무얼까? 잭슨이 "Off The Wall'로 본격적인 Epic 레코드 시절을 열어가기 이전에 팝이란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주류 중산층 청취자 타겟의 보수적이면서 듣기 편한 이지 리스닝 재즈/팝의 변용 내지는 빅 밴드 음악의 한 갈래에 불과했다. 틴 팬 앨리가 그랬고 스윙이 그랬다. 락앤롤, 트위스트, 디스코, 훵크 등 흑인들의 음악으로 출발한 주류 대중음악도 결국 백인 주류 문화로 변형, 도입, 흡수되거나 아니면 저질 음악으로 낙인 찍혀 조기에 사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중 인기가 높았던 모타운은 확실히 광범위한 청자를 확보했지만 록에 비하면 저질스러운 싸구려 음악이라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고 그나마도 그 뒤를 이은 디스코와 훵크는 7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제대로 꽃피우기 전에 또 하나의 깜둥이 음악으로 낙인 찍히며 '블랙뮤직에 기반한 주류 팝 음악'이라는 미션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 잭슨은 정확히 이 모든 한계를 뛰어넘었다. 다른 방식으로. 그는 메인스트림인 팝을 자신만의 블랙뮤직 속에 녹이며 백인들의 지배적인 팝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 결과 MTV가 열광한 첫번째 스타는 허여멀건한 금발의 청년이 아닌 검은 잭슨의 춤사위였고 백인 중산층 청자들의 보수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AOR(Album Oriented Rock) 라디오 스테이션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것도 그의 음악이었다. 재즈에서 훵크까지 모든 음악을 꿰뚫고 있던 프로듀서 퀸시 존스, 그리고 클래식부터 록앤롤까지 모든 장르의 음악을 스승으로 송 라이팅을 공부한 잭슨의 어프로치는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했다. 그들은 정확히 장르나 형식으로 규정되지 않는 어떤 다채로운 사운드의 모음을 향해 질주했고, 이런 독창적인 방향 설정은 정확히 엘피 시대를 지나 씨디 시대로 향하는 첨단 현대 대중 음악의 취향을 정확히 포착해 내고 있었다. 장르 아티스트가 아닌 팝 아티스트의 영역, 타협적이지만 자유롭고 실험적인 한 곡 한 곡,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과 송 라이터, 엔지니어들이 총 출동, '곡에서 곡'을 향하는 거시적인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한 음에서 한 음으로' 집착해대는 음악 만들기를 실험한 결과 잭슨이라는 걸출한 아이콘이 탄생된 것이다. 뻔한 수치조차 들먹일 필요가 없다.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그는 전 세계 팝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이며, 미국 밖에 알려진 그 어떤 이들보다 더 '유명한' 미국인 엔터테이너였다. 음악성, 지명도, 상업적 성공 등을 모두 종합해 볼 때도 그의 업적을 능가하는 솔로 가수나 밴드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 대중음악에만 시선을 고정, 시대적인 상징성만으로 명인들의 계보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40년대의 프랭크 시나트라, 50년대의 엘비스, 60년대의 비틀즈, 70년대의 레드 제플린을 잇는 80년대의 진정한 아이콘은 마이클 잭슨임에 틀림없다. 잭슨의 삶, 퍼스낼리티, 그리고 그의 음악은 오로지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평생을 달려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음악, 다른 세대, 다른 지역, 다른 문화와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려 환호하고 즐거워하고 장난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퓨어 팝의, 한때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 원대한 꿈을 그는 잠깐이나마 이뤘고, 그 담대함이 가져다준 성공은 큰 대가를 치렀지만 결국에 그 업적들이 오늘날 킹 오브 팝이라는 그의 위상을 선사했다. 21세기 팝이 낳은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 잭슨은 잠재력 있는 천재 소년 가수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예술의 경지를 탐하며 그의 모든 것을 꾸준히 연마해 나갔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프로페셔널리즘과 예술과 음악에 대한 그치지 않는 욕심은 그가 떠난 무대에 미국 팝의 정수라 부를 만한 여섯 장의 레코드로 똑똑히 증언된다. 그리고 팝의 전당에, 음악의 전당에, 대중의 전당에 마이클 잭슨의 별명 킹 오브 팝은 영원히 결번 아닌 결'별명'(retired nick name)되어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팝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 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이 가수의 인기는 1960년대 비틀매니아를 연상시킨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다. 그는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1984) 대중음악의 피터팬이자, 성장하기를 거부한 소년인 세계적인 팝 스타 마이클 잭슨은 컴백을 시도했으나 목요일 오후 UCLA에서 사망했다. 잭슨 씨는 50살 인생 중 40년을 대중들의 시선에서 보냈고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와 마찬가지로 잭슨이 음악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이클의 커리어 중 절정에 달했을 때 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스타였으며 7억 5천만의 레코드[49]를 판매했습니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국은 그의 죽음에 반응하며 노래를 마라톤처럼 송출하고 마이클 잭슨의 혁신적인 뮤직비디오의 결과로 성공한 MTV는 그의 히트곡을 보여주고 있습니다(2009).

뉴욕타임즈 1984년 그리고 2009년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최고의 연예인입니다. 여태까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충격적인 공연은 모타운 25주년에서 마이클이 문워크로 무대를 가로질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보다 미치지 못 하는 것은 한 단계 아래라는 것을, 마이클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즈가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그 위인들과 함께 합니다. 빌리 진은 상업적 성공과 음악적 깊이가 함께 한 그가 만든 가장 중요한 레코드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은 어떤 노래보다 빌리 진은 가장 훅(hook)이 많았습니다. 빌리 진은 기억하기 쉬우며 빌리 진 안의 모든 악기는 각기 다른 훅을 연주합니다. 당신은 거기서 12가지의 음악적 조각들로 나눌 수 있고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롤링 스톤 2004년 선정 Rock N roll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35위 'Michael Jackson' 설명문

잭슨은 20세기 대중문화의 진정한 아이콘이었다. 1980년대 잭슨신드롬 이후 그 어떤 가수가 그보다 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일찍이 전설이 된 엘비스와 비틀스를 빼놓고 대중적 파급효과를 따진다면 잭슨을 능가하는 가수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지구상 모든 인류가 열광한 가수는 잭슨이 유일했다. 그의 음악 앞에선 피부색을 떠나 모든 인종이 하나가 됐다. 매번 그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세션 연주자들을 초빙, 빈틈 없는 마술 같은 스튜디오 레코딩을 창조했다. 'Billie Jean' 'Man in the Mirror' 'Black or White' 등 그렇게 탄생된 잭슨의 음악은 지구촌 수억 인구에게 감동과 전율, 눈물과 환희로 다가왔다.

ㅡIZM 2009년, 김獨 기고

마이클 잭슨은 한동안 팝의 황제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팝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등장하기 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비틀스가 있었다. 하지만 잭슨 뒤로는 아무리 기교가 좋고 인기가 높은 팝 스타라고 해도 갈수록 분화되는 음악 팬들의 다양한 맛을 맞추지 못했다. 커트 코베인,퍼피,머라이어 캐리,셀린 디온,비욘세,라디오헤드도 '아니올시다'였다. 그의 가장 치열한 경쟁자였던 마돈나마저 그의 수준엔 못 미쳤다...(생략)... 사실 잭슨보다 재능이 뛰어난 연예인이 결코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전설적 댄서인 프레드 아스테어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춤을 칭찬했고 가수로서도 잭슨은 지나치리 만큼 카멜라온이었다. 부드러움과 거침,감칠맛 나는 비통함까지 너무도 다양했다... (생략) ... 특히 음악을 개념화한 뮤지션으로는 아마도 제임스 브라운만이 잭슨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을 듯하다. 잭슨과 선견지명 있는 그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디스코, 소울, 팝을 혼합했다. 사실 그런 음악은 많은 가수가 만들어내 매일 매시간 모든 팝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들린다. 하지만 잭슨의 노래만 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니 뮤직 사장을 지낸 토미 모톨라는 잭슨을 “음악 사업 전체의 주춧돌이 됐던 존재”라고 말했다. 안에서 느끼는 그의 삶이 뭐든 간에 밖에서 볼 때 그의 삶은 분명히 천재가 빚어낸 작품이었다. 대성공이라고 하든 기묘한 서커스라고 하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술적 창의성에서나 예술적인 자기 개조에서나 마이클 잭슨 같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뉴스위크 2009년

마이클, 네 솔로 앨범을 내가 만들고 싶은데 말야.” 나는 그의 눈에 비친 호기심 어린 놀라움에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우리가 미개척지를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즈 음악가인 나로서는 소름 끼치는 모험이었지만 말이다. 마이클과 당시 그의 매니저였던 프레디 드맨, 론 와이스너는 에픽 레코즈사를 찾아가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에픽 레코즈는 내가 너무 재즈풍이라고 여겨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이클은 사업 수완이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과소평가한 그의 특성 중 하나였다. 마이클은 잭슨 파이브 활동으로 음반 사업을 오래 지켜봐 온 터라 음반사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음반사 측에 솔로 앨범을 내게 맡기겠다고 우겼다. 결국 음반사가 두 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프 더 월(Off the Wall)’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이클은 부끄러움이 많았다. 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으면 그는 뒤에서 나를 등지고 앉아 노래를 불렀다. 보컬 코치인 세스 릭스가 그를 혹독히 훈련해 음역을 넓혔다. 우리는 마치 전투를 치르듯 앨범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는 그처럼 성공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이클은 그 앨범(Off The Wall)을 계기로 10대용 버블 검 팝에서 벗어나 1980년대 팝음악의 심장에 자신의 깃발을 확고히 꽂았다. 그때부터 나는 마이클을 “내 작은 동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처럼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뛰어난 아티스트는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음반업계의 기록을 경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리라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음악 산업을 영구히 바꿔 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클이 나를 떠났단 말인가? 그는 내 영혼의 일부였다.

ㅡ퀸시 존스 2009년

마이클이 2009년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음악은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최대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인 유튜브가 2016년 2월부터 서비스를 선보인 아티스트 통계 자료에 의하면 잭슨은 월 평균 1억 2,0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꾸준히 기록하여 주간 인기 아티스트 Top 100 순위에서 서비스가 실시된 이래 2018년 4월까지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114주 연속 머물렀다. 또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도 2016년 소울 장르에서 최다 스트리밍을 기록했고 2018년 4월까지도 월 평균 1,600만 이상의 리스너를 기록하면서(잭슨5/잭슨즈까지 포함하면 2,300만 이상) 월간 최다 스트리밍 아티스트 Top 100 순위에 이름을 계속 올렸다. 또 빌보드 연말 결산 자료에 의하면 마이클은 '앨범차트 Top 200'에서 그해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아티스트 순위에 2013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70위 안에, 그리고 발매되고 18개월 이상된 앨범 중 '앨범차트 Top 200'에서 밀려난 앨범들을 대상으로 판매량을 집계한 카탈로그 결산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아티스트 Top 10 순위에 2012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이름을 올렸다. 또 앨범/싱글 판매량, 라디오 에어플레이, 스트리밍 등을 종합한 순위로서 2014년에 처음 생긴 '아티스트 100 차트'에서는 2018년 4월까지 누적 기준 165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다. 한편 세계 음반 판매량 정보 사이트 'Chartmasters'에 의하면 마이클은 디지털과 스트리밍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대 가장 많이 다운로드/스트리밍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각각 18위/26위를 기록했다. 여기에 위키피디아 최다 검색어 순위에서도 마이클이 1억 100만 페이지뷰로 미국, 트럼프, 오바마, 인도, 2차 세계전쟁 다음으로 6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앨범 순위에서도 1,400만 페이지뷰로 Thriller 앨범이 1위 그리고 칸예 웨스트, 테일러 스위프트의 앨범과 함께 600만 페이지뷰로 Bad 앨범이 공동 29위에 랭크됐다. 마이클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다른 뮤지션들에 의해 많이 차용되고 있는데 실제로 음악 분석 전문 사이트 'Whosampled'에 의하면 마이클은 가장 많이 샘플링/커버/리믹스된 아티스트 순위에서 각각 9위/6위/4위에 랭크됐다. 이외에도 구글 트렌드 통계 자료를 보면 마이클은 인물 전체를 통틀어 매달 미국에서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 50위 안에도 꾸준히 들고 있는데 올해 3월에는 22위를 기록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시대를 산 사람들이 증언하길 산골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할아버지들도 알 정도였다고 말했다. KBS 연예가중계가 2015년 전국 성인남녀 무작위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남성 팝 아티스트 부문에서 1위로 선정됐고 2018년에도 같은 조사방식으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댄스가수 부문에서 국내가수들을 모두 제치고 1위로 선정됐다. 일본에서는 태풍 마이클이 별명이라고 한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김정은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고 MBC가 보도했는 데 어린 시절을 유럽에서 살았으니 이상할 거는 없다. 그러나 가디언의 보도를 보면 찰스 젠킨스라는 한국전쟁 포로는 2004년에 탈출해서 2008년 기자와 인터뷰 할 때 90년대 이전에 그가 접한 한국음악 이외의 유일한 음악은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민족주의 노래 뿐이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밀수입된 마이클 잭슨의 카세트 테이프가 그의 손에 들어오게된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마이클 잭슨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 것을 보면 북한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되었고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춤을 따라 하고 있다니 아프리카의 빈민촌에도 그의 이름은 유명했었으며 물론 당대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소련은 마이클을 백인에게 영혼을 판 악마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었다. 가만..러시아인들도 사실상 거의 백인 아닌가.. 아마존 주민들도 마이클 잭슨은 알아본다.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시몹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게다가 잭슨은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파파라치들을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급 경호 대접을 받았다.

이런 뜨거운 인기를 얻었지만,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에는 부정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후반 Wacko Jacko 논란으로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적은 있지만 그건 당시까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65%가 마이클 잭슨을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할 만큼, 93년 성추행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마이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긍정적이었지만, 93년 사건 이후 그리고 결혼과 이혼의 반복과, 후에 있었던 또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2005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40%는 마이클이 더 이상 음악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응답했고 70%나 마이클을 부정적이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반전됐는데 2014년 Yougov라는 기관에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의 60%가 잭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으로 2위로 뽑는 등 실추된 명예가 회복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신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긍정적/부정적이십니까?

2003년 갤럽 조사 - 긍정 18% 부정 65%

2014년 Yougov 조사 - 긍정 61% 부정 32%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로큰롤 뮤지션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출처 :

1위 엘비스 프레슬리 36%

2위 마이클 잭슨 21%

3위 존 레논 9%

참고로 2002년 'ABC'에서도 같은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결과는 엘비스가 40% 였고 마이클 잭슨이 2% 였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하였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하였으며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매체에서 선정하는 최고의 아티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에 위치해 있다.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무순위)에 마이클이 포함됐고 2010년에는 VH1에서 200명의 음악전문가와 현역 가수들을 상대로 한 투표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2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은 2004년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특집 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마이클을 35위로[50], 2008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100'에서는 25위[51]로 선정했다. 또한 빌보드는 마이클을 2015년 편집자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알앤비 아티스트 Top 35'에서 1위 그리고 2016년에는 12명의 브라질 음악평론가들이 선정한'역사상 가장 완벽한 아티스트 Top 50'에서 2위에 랭크했다. 2014년에는 영국 의회가 설립 80주년을 기념하여 각계각층의 저명한 전문가 25명이 선정하고 전 세계 10,000명의 성인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순위를 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Top 80'에 9.11 테러, 컴퓨터 발명, 핵 개발 등의 사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음악의 영향력이 49위에 뽑혔다. 2017년에는 ThoughtCo 매거진의 마크 에드워드 네로 음악평론가가 작성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울&amp;알앤비 아티스트 20인'에서 1위에 선정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음악전문가 81명과 청취자 1,556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팝 아티스트'에서 전문가와 청취자 모두 마이클이 3위에 올랐다.

간혹 인터넷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마이클 잭슨'이란 말의 의미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 데 이 3명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단순히 음악적 경계를 떠나 하나의 대중문화 Icon이 된 전설 3인방(추가적으로는 프랭크 시나트라도 여기에 드나, 한국에서는 시나트라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에 언급 조차 안 된다.)을 뜻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그런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정의하자면 로큰롤의 태동 시기인 50년대,60년대와 팝의 시대인 80년대는 비교하기에는 대중음악은 사회-정치적 문화와도 긴밀히 연관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마이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많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논란이 되는 사생활 문제와 'Wacko Jacko' 이미지 때문에 평단이나 미디어들, 대중들에게 하도 까여서, 지난날의 명성들이 먹칠을 당했지만 그러나 마이클이 사망하고 나서는 그의 음악적 커리어를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04년 쓰인 롤링 스톤의 마이클 잭슨 바이오 그래피를 보면 내용이 가관인 데 첫 줄에 천재라고 썼으면서도 뒤에는 괴물이라고 마이클을 디스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내용에서 음악 이야기는 거의 하지도 않고 이게 가십 기사인 지 헷갈릴 지경. 그래도 최근 나온 바이오 그래피는 그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최종적으로 여러 비평 사이트와 미국 언론들의 마이클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면 이렇다. '1970년대 Jackson 5 시절부터 뛰어난 가창력으로 인기 아이돌이 됐으며 Thriller 앨범의 대성공으로 80년대의 팝 음악계의 음악 산업을 뒤흔들었고 지금까지 팝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으며 우리 대부분이 공유할 수 있는 마지막 팝 스타로 그의 음악은 굉장히 유비쿼터스하다.[52] 아마 오늘날의 대중문화 영웅들은 성취할 수 없는 수준(유명세,팝적 인기)이자[53] 제임스 브라운 이후 그의 음악과 춤은 흑인음악의 가장 강력한 절정 중 하나이다.[54] 그러나 역설적으로 감당치 못 할 수준의 엄청난 성공과 재능은 그를 은둔 생활로 몰았으며 사생활 문제는 그를 너무 멀리 보냈다.[55]'

5. 재능

5.1. 작사/작곡/프로듀싱/연주

댄스와 비디오 같은 비주얼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잭슨은 보컬리스트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엄청난 능력을 간과당한다.

ㅡ조셉 보겔 음악평론가/ 저서 'Man In The Music'

마이클은 자서전 문워커에서 사람들이 나를 댄스 가수로만 알고 나의 작곡 능력을 몰라본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사람들이 "이 곡 누가 만들었어?"라고 물을 때마다 슬프다고, 편견과 달리 마이클은 자신의 빌보드 1위 13곡 중 8곡은 단독, 1곡은 공동으로 작곡했고 2002년에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어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대표적인 단독 작사/작곡 곡으로는 Billie Jean, Beat It, Smooth Criminal, Heal The World 등이 있고 공동 작사/작곡으로는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한 We Are The World, 폴 매카트니와 함께한 Say Say Say 등이 있다. 현재 미국저작권협회 BMI에 등록돼 있는 잭슨의 단독/공동 작곡 곡들은 총 200곡이 넘는다.

마이클이 작곡을 하는 방식은 떠오른 선율들을 비트박스로 표현하여 테이프로 녹음한 뒤 이를 다른 뮤지션을 시켜 악보로 옮겨 적게 했다고 한다. 사실상 작곡과 동시에 편곡도 어느정도 체계가 잡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입으로 음음거리면서 베이스 라인을 녹음하고, 그 위에 비트를 빌드업시키고 멜로디를 얹는 방식으로 데모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미디가 없던 시절 입으로 프로그래밍을 한셈. 이런 방식은 대중음악 업계에서도 매우 독특하다고 소문이 나있는데 보통 아티스트들은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악기를 이용하며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부터 작곡을 공부했다며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로 차이코프스키를 언급했고 그의 호두까기 인형 앨범에서 큰 영감을 받았는 데 대부분의 팝 앨범들이 몇몇 곡만 좋지, 나머지는 Side-B면에 넣는 형편없는 곡들로 채워 넣었다며 자신은 호두까기 앨범 처럼 모든 곡들이 히트할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어 한다며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낸 최초의 곡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였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기타 연습을 위해 만든 손가락 연습곡을 바탕으로도 새로운 곡을 만들어 냈고, 최고의 작곡 훈련을 받은 뮤지션들도 마이클을 보고 종종 놀랐다고 한다. 드림윅스 레코드사의 존 맥클레인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작곡가 중 한명으로 마이클을 뽑았다. Invincible 앨범 작업을 함께한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도 마이클은 음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말했다. 2015년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100인에 마이클이 조지 해리슨, 엘튼 존, 빌리 조엘, 마빈 게이,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 등을 제치고 34위에 선정됐으나 리스트를 보면 실제 전문 작곡가들은 소외됐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들이 주로 구성되어 있어 인지도가 고려된 것으로 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명단은 아닌 것 같다.

마이클 잭슨은 대단한 멜로디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요. 제가 백만년이 지나도 절대 생각할 수 없을 것들을 떠올릴 수 있죠.

ㅡ그룹 토토의 맴버이자 작곡가 스티브 포카로/ 1987년 피플 매거진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정확한 음악적 직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의 머릿속에는 곡이 앞으로 어떤 레코딩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것들이 다 담겨 있었죠. 이건 정말 흔치 않은 작업 방식인데, 보통의 경우에 사람들은 기타리스트를 고용하면 "여기 코드가 있습니다. 이렇게 소리가 나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요청을 하죠. 그러면 기타리스트가 나중에 사운드를 구상해서 가지고 옵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아니에요. 마이클은 모든 리듬과 음, 코드를 전부 입으로 표현해요. 근데 그게 너무 기가 막혀요. 어떤 사운드가 나와야 하는지 아주 정확히 표현하죠.

ㅡ프로듀서 빌 보트렐/ 2004년 SoundOnSound 매거진 인터뷰

엔지니어들과 프로듀서들은 마이클이 곡을 스튜디오에 가지고 오면 함께 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들조차도 마이클의 천재성에 놀라곤 했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롭 호프만은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어느날 아침 마이클이 밤새도록 작곡한 곡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는 기타리스트를 불렀고, 마이클은 각 코드의 모든 음을 그에게 노래로 들려주었습니다. "여기가 첫번째 코드고 첫번째 음입니다. 두번째 음, 세번째 음.. 또 여기는 두번째 코드의 첫번째 음, 두번째 음, 세번째 음..." 그리고 우리는 마이클이 음향조정실의 SM57 마이크를 가지고 가장 감동적이고 깊이 있는 보컬을 들려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이클은 우리에게 곡의 전체 현악 배치와 모든 파트를 노래해 들려주곤 했습니다. 한번은 마이클이 작업실에서 현악기 파트를 노래하는 것을 본 스티브 포카로가 저에게 직접 그것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여덟 마디를 반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마이클의 머릿속에는 곡의 하모니를 포함한 모든 구성 요소가 다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곡의 전체 구성을 미니 카세트에 녹음해 두곤 했습니다.'

NME/ 2014년 4월 'The Incredible Way Michael Jackson Wrote Music'

악보와 악기에 의지하지 않는, 다소 변칙적이지만 직관적인 마이클 잭슨의 작곡 스타일은 특히 90년대 이후 컨템포러리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규 음악 교육 대신에 뒤늦게 작곡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기초적인 화성 진행을 통해 이론적으로 구현되는 멜로디 구성에는 능숙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부적인 멜로디 메이커 중 한명이었다. 엘튼 존이나 폴 매카트니와 같은 초강력 멜로디 머쉰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대신 창의적인 전천후 멜로디 메이커였고, 뛰어난 연주자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기에 동시에 능해 머릿속으로 구상한 소리들을 구현함에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만 화성이나 코드진행의 정격성보다는 입으로 불러진 자유로운 멜로디 구성에 훨씬 능했는데, 이것은 다분히 그가 스승으로 모셨던 폴 매카트니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여기에 리듬과 편곡이라는 요소를 더욱 적극 활용함으로써 "작곡->편곡->프로듀싱"이라는 관습적인 녹음 방식을 사실상 해체시켰다. 그와 작업한 프로듀서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 잭슨은 때때로 머릿속에서 편곡이 완성된 곡을 입으로 직접 불러내어 스튜디오에서 즉흥적으로 녹음으로 적용시켜 내기도 했으며, 특히 댄스 곡들의 경우 특별히 정해진 악곡 구성이나 화성의 진행이 없이 리듬과 즉흥적인 멜로디의 연결만으로 훌륭한 곡을 완성시키곤 했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프로듀서로서도 재능을 보였는데 잭슨스 시절부터 형제들과 함께 앨범을 프로듀싱하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성인 이후 첫 솔로작인 1979년 Off The Wall 앨범부터는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잭슨은 1982년 Thriller 앨범까지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Billie Jean, Beat It 등 본인이 작곡한 곡들에 한해, 1987년 Bad 앨범은 작곡 여부와 상관없이 전곡을 퀸시와 함께 공동으로 프로듀싱했다. Bad 앨범을 마지막으로 퀸시와의 모든 작업을 마무리한 잭슨은 그 뒤 1991년 Dangerous 앨범에 빌 보트렐과 뉴 잭 스윙의 창시자인 테디 라일리, 1995년 HIStory 앨범에는 테리 루이스와 지미 잼, 데이비드 포스터 그리고 2001년 Invincible 앨범에서는 로드니 저킨스, 베이비 페이스와 같은 프로듀서들을 기용하여 함께 앨범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앨범의 모든 곡들에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트랙을 프로듀싱하면서 앨범의 전체적인 제작을 총괄하며 최종 OK 사인을 내린 것은 잭슨이었고 일정 트랙에서만 저들과 함께 작업했기 때문에 앨범 크레딧을 보면 이전 Bad 앨범까지는 퀸시가 이름을 올렸던 메인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항목에 Dangerous 앨범부터는 잭슨의 이름만 단독으로 올라가 있다.

잭슨이 단독으로 프로듀싱한 곡들로는 They Don't Care About Us, Stranger In Moscow, D.S, Money, Little Susie, Morphine, Superfly Sister, Speechless, The Lost Children 등이 있는데 특히 롤링 스톤스믹 재거와 함께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오른 State Of Shock은 잭슨이 작곡, 편곡, 프로듀싱까지 혼자 다 한 곡으로 직접 들어보면 잭슨만의 사운드를 느껴볼 수 있다.

마이클과 함께 빌리진을 믹싱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이클을 정말 좋아해요. 너무나도 재능이 많고 또한 굉장히 공손합니다. 같이 일하기에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죠. 마이클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브루스, 사운드가 완벽해요. 하지만 한 번만 더 해볼 수 있을까요?" 저는 흔쾌히 다시 믹싱을 했고 우리는 그렇게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했습니다.

ㅡ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 2012년 세일 대학교 강연

마이클은 자신이 원하는 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또한 그것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마이클은 아주 실천적이어서 믹싱을 할 때에도 항상 함께하고, 세밀한 레벨조정 등의 작업에도 함께합니다. 항상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보컬 녹음에도 완벽주의여서 트랙의 사운드 퀄리티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음이 되느냐 하는 방법론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예를 들면 펀치가 부족한 음이 있는 경우에 어떤 이펙트 처리가 필요한지를 금방 압니다. EQ의 주파수 포인트까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우리들에게 맡겨 버리고, 한번 노래를 부르고 나면 다시는 스튜디오에 오질 않습니다. 믹싱은 소리만 좋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지만 마이클은 몇 시에라도 매일 반드시 스튜디오에 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마이클의 곡의 믹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은 밤 10시부터 작업을 시작하게 되서, 마이클은 "믹스를 들을 수 있는 있는 건 몇 시쯤이 될까?"라고 물어보길래, 난 "아마 새벽 3시 정도일 것 같은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이클은 놀랍게도 새벽 3시 정각에 스튜디오에 나타나 "자, 들어봅시다"라고 하더군요. 그는 음악에 대해서는 진지합니다. 그래서 그의 앨범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고 다른 아티스트의 앨범보다도 좋은 소리를 내는 것일 겁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내고 싶은 새로운 사운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죠. 우리들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진지하게 작업을 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음에 따라갈 수가 없어요. 어중간한 자세로는 어림도 없죠. 마이클이 원하는 바로 그 음이 아니면 OK되질 않습니다. 그게 그의 방식입니다. 믹스에 관해서도 항상 완벽함이 요구됐습니다. 상당히 큰 공부가 되었죠.

ㅡ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 2002년 음향 잡지 Sound & Recording 인터뷰

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단짝이면서 잭슨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가 된 레코딩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의 손으로 마무리 된 MJ의 강렬한 레코딩 사운드는 그 모든 음악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한때 잭슨의 'Dangerous'는 거의 모든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레퍼런스 소스로 쓰였으며 'Bad'의 경우에도 스피커나 플레이어의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잭슨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 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녹음실과 장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마스터링 엔지니어는 수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도 동시에 작업한다. 그런데 왜 유독 MJ의 음반은 자주 최고의 레코딩으로 거론되곤 하는가? 그의 음반에는 유독 다른 가수들이 쓰지 않는 새로운 테크닉과 장비들이 동원되기라도 하는걸까? 여기서 우리는 현대 대중음악에서 좋은 '사운드'란 단지 마스터링 엔지니어들의 개인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디지털 소스나 프로그램 반주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최근의 음악들은 이미 음원의 선택과 조합 과정에서 그 음의 특색이 상당부분 정해지며 여기서 잘 조화된 음악들이 결국 믹싱이나 마스터링 공정을 통해서 완전히 가다듬어지게 되게 마련이다. 흔히 우리가 "음질"이라고 생각하는 상당부분 역시 결국 "음원의 선택"이나 "균형감 있는 편곡"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많으며 다시 말해 좋은 사운드를 가진 최종 결과물이란 좋은 소리를 구분해 조합하는 최전방 전선의 뮤지션과 프로듀서의 안목이 선행 되어 만들어지는 작업일 때만이 가능해 진다는 것. 음에 관한한 오디오 마니아 수준의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잭슨의 '좋은 귀'가 이런 소소한 설정을 가능케 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한 악기, 한 효과음의 선택에도 직접 관여했고 특히 그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퀸시 존스가 떠난 이후 만들어진 'Dangerous', 'HiStory', 'Invincible'에서 그의 역할과 영향력은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음반의 메인 프로듀서 위치로까지 격상되었다. 물론 레코딩 마스터 스웨디언의 비중은 과소평가되어선 안된다. 그는 믹 구저스키, 알 슈미트, 제프 에머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대 다섯명 안에 꼽을 레코딩/믹싱의 장인이며 잭슨의 앨범으로만 세번의 그래미를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HiStory"와 "Invincible" 등 후기의 앨범들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까지 겸하기도 했다. Acusonic Recording Process 이라 불리는, 악기 하나 하나에까지 스테레오 사운드로 녹음해 최종 믹싱 과정에서 다양한 공간감과 효과를 이끌어 내는 특유의 녹음 및 믹싱방식은 악기 장르와 인종의 장벽을 넘나들기를 원했던 마이클 잭슨의 파워풀한 댄스 뮤직에는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테크닉이었다. 필 콜린스, 핑크 플로이드, 토토, 피터 가브리엘, 마돈나, 스틸리 댄.. 팝 음악을 소리의 예술로 승화시키곤 했던 80년대의 거장들의 이름 몇몇을 더 기억해 낼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유독 언제나 그 흐름과 경향을 리드하는 몇 안 되는 프론티어였다. 그는 멜로디와 가사로 전달되는 대중음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이 최상의 결과물로서 빛나게 할 수 있도록 편곡, 프로듀싱, 녹음, 마스터링 등 일련의 후반 작업과 부가 작업에는 누구보다도 많은 돈과 시간을 소비했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한편 마이클이 악기를 잘 다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이를 증명할 만한 확실한 자료가 없다. 단 한 번도 마이클이 공식 무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앨범 크레딧에 있는 곡 정보와 주변인들의 발언을 바탕으로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먼저 'Earth Song'에서 기타, 퍼커션, 키보드, 신디사이저, 드럼 연주에 공동으로 이름을 올렸고 'Morphine'에서는 드럼 단독, 기타는 슬래쉬와 공동, 퍼커션은 브라이언 로렌, 브래드 부서와 함께 연주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Unbreakable', 'You Rock My World', 'Threatened'에서는 로드니 저킨스와 함께 그리고 'Break Of Dawn'에선 로드니 저킨스, 닥터 프리즈, 테디 라일리와 함께 모든 악기를 연주했다고 나와 있다. 또 사운드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브루스 스웨디언은 'Don't Be Messing Around'에서 마이클이 피아노 연주를 아주 잘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스파이크 리 영화 감독도 배드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마이클이 실제로 피아노를 잘 쳤다고 밝혔다. 또 아일랜드의 음악 사업가 패디 던닝은 마이클이 2006년 아일랜드에서 본인의 집에 잠시 머물렀을 때 비틀즈의 곡들을 드럼, 피아노, 기타를 치며 들려줬는데 실력이 매우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물론 단순히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거나 주변인들의 목격담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앞서 말했듯이 마이클이 수준급의 연주자였는가를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와는 별개로 일단 마이클이 여러 악기에 두루 능했다는 것만은 명확한 사실로 보인다.

5.2. 보컬

마이클 잭슨의 어릴 때 미성은 흉내내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 예쁘고, 멋있고, 훌륭해요. 어린 나이에도 그런 성숙한 표현력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라워요.

ㅡ가수 김범수/ Playdb 뮤지션's 취향

마이클은 제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에요. 사람들은 주로 마이클의 경이로운 솔로 커리어를 말하곤 하는데... 물론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마이클이 천재성을 가장 유감없이 발휘했던 시기는 어린 시절이에요. 아이였지만 제임스 브라운이나 아레사 프랭클린, 그 어떤 위대한 보컬리스트와도 같은 재능과 소울 그리고 깊이를 가지고 노래했죠.

ㅡ가수 레니 크래비츠/ 2011년 CNN 인터뷰

그는 제임스 브라운과 재키 윌슨처럼 노래하고 춤췄으며, 인간의 슬픔과 열정을 담아 스모키 로빈슨의 'Who´s Loving You'를 불렀다. 그의 실력은 놀라웠다. 마이클은 스모키보다 더 뛰어났다. 나는 스모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마이클이 그 노래를 잘 알고 있더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모타운 창립자 베리 고디/ 마이클 잭슨 자서전 'Moonwalker' 서문

제가 처음 가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의 첫 프로듀서는 제가 마이클의 'Who's Loving You' 라이브 퍼포먼스를 계속 보게 했어요. 몇 시간이고 계속 반복해서 저에게 보여줬죠. 프로듀서가 원했던 건 제가 마이클의 소울을 느끼길 바랐던 거에요. 정말 그걸 느낄 수 있었죠. 마이클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어린아이였지만 베테랑이었어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다 큰 성인들보다도 더 감정을 잘 표출했죠. 그건 너무나도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것이었어요. 마치 신이 주신 것 같았죠. 마이클은 제게 때로는 테크닉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을 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내가 느낀 감정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걸 가르쳐 줬어요. 마이클은 정말 저를 변화시켰어요. 덕분에 오늘날의 비욘세가 있게 됐죠.

ㅡ가수 비욘세/ 2012년 비욘세 공식 사이트

어린 시절의 마이클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정도의 발성 기술이 필요하다. 복성부터 두성, 빠른 발음과 팔세토, 거기에 High G에서 High A까지 자유롭게 넘나드는 보컬 톤.. 마이클은 확실히 보컬의 모든 면에서 천재적이었다. 마이클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음역대를 이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방법으로 발성 운동과 결합시켰다. 거의 오페라 가수 수준으로. 마이클은 무엇보다도 감정표현에 탁월했다. 저음역대로 노래를 부르다가도 초고음 팔세토로 순식간에 넘어가곤 했는데 이럴 때에도 그의 감정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완벽하게 유지되었다.

ㅡ레온틴 해스 보컬 트레이너/ Voicecouncil 'Teaching Voice to Michael Jackson'

실제로 변성기 이전의 소년 마이클 잭슨은 고음역의 풍부한 성량을 바탕으로 다이아나 로스식의 물 흐르는 듯한 보이스 테크닉을 결합한 독특한 보컬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잭슨 파이브가 1970년대의 포문을 여는 최초의 스타 팝 밴드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보컬리스트로서 마이클의 천재적 역량은... (생략) 특히 'I’ll Be There'는 순수하면서도 혼란스러운 10대의 감성을 마이클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통해 육화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후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아우르며 무수히 양산되는 ‘1970년대식 틴 팝’을 위한 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모타운 시절의 잭슨 파이브를 단순히 10대 취향의 팝 그룹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흑인음악 자체의 맥락에서 평가하자면, 잭슨 파이브는 당시 보컬을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오로지 비트만을 강조하던 디스코의 대세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유일한 뮤지션이었다. 마이클의 보컬은 주류 디스코 사운드에 대한 대안일 뿐 아니라 흑인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아프로-아메리칸 가스펠/발라드 전통의 급락을 위한 촉매제 역할까지 하였다.

ㅡ양재영 음악평론가/ 웹진 weiv 'Jackson 5 The Ultimate Collection' 앨범 리뷰

신이 내린 미성과 그루브

천재적인 보컬리스트로 매우 유니크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가창력을 가진 신동으로 극찬받았으며 11살의 어린 나이에 4 싱글 연속으로 빌보드 1위라는 기록을 달성한다.[56] 밴드 가수 나얼스티비 원더와 함께 본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으로 뽑기도 했고 '너무 독보적, 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보컬'이라며 특히 잭슨스 시절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또 가수 알리휘트니 휴스턴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보컬리스트로 잭슨을 뽑았고 배우 겸 가수 임창정잭슨은 태어날 때부터 99점을 타고나 조금만 연습해도 100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Bad' 투어 당시 춤추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Dangerous' 투어 당시 부카레스트 라이브를 보면 사람이 아닌 수준으로 날라다닌다. 인간 리듬머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애초에 마이클 잭슨은 그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아 모타운과 에픽 레코드에서 아주 좋은 대접과 높은 로열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가창력이 20대에서는 뛰어난 작사/작곡/댄스의 재능과 결합돼 팝의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흑인인지 백인인지 구별히 힘들 정도의 맑고 개성 있는 미성을 가졌으며 4옥타브의 음역을 넘나들며 특유의 억!(...)이라는 딸꾹질을 추임새로 자주 사용한다.[57]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실제로 불러보면 알겠지만 일반 남성의 파사지오에 해당하는 음역부터 여성의 고음역때까지 걸쳐져있는 경우가 다반사라 다수의 일반인들은 제대로 소화하기는 매우 벅차고 음을 따라가도 밋밋한 느낌이 나기 쉽다. 원곡의 느낌을 내기 위해서 딸꾹질 창법 이외에도 강한 악센트, 가성(Don't Stop Till Get Enough), 스타카토(Smooth Criminal), 바이브레이션(Human Nature) 등의 다양한 창법까지 넣어야 하며, 거기다가 마이클처럼 고난도의 춤까지 춰야 한다고 하면... 프로 가수들도 마이클의 노래를 많이 커버했지만 대부분 원곡의 느낌을 살리지는 못한다는 평이다.

다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다른 감성을 초라하게 만드는... 너무 대단한 목소리이기에...

ㅡ2004년 가수 나얼의 싸이월드 中

마이클 잭슨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흑인임에도 노래하는 성향은 지극히 백인적이라는 것이다. 흑인은 그들이 장기로 하는 R&B적 성향의 독특한 창법을 기반으로 노래해 누가 들어도 흑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마이클은 그 표현법이 R&B보다는 록의 창법에 더 가깝다. 보이스 자체가 이렇다 보니 그가 흑인임에도 우리 귀에는 백인에 더 가깝게 들리는 것이다. 또 흑인은 고음으로 올라갈 때 가성을 사용해 악절을 좀 더 부드럽게 연출하는 '흑인만의' 특징을 보인다. 하지만 마이클은 고음으로 올라가는 와중에도 가성을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어택이 강한 창법을 구사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저음에서 중음, 고음역대로 올라갈 때에도 소리가 한 치의 흔들림이 없다. 발음 또한 정확하다. 어택이 강하고 분명한 자기 표현력을 보이고 있음에도 소리를 구사할 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극히 자연스럽다. 융합하기 힘든 이러한 상반성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것도 마이클이 지닌 실로 '놀라운' 능력이다. 스릴러는 그의 최전성기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이 당시의 그의 노래는, 마치 소리가 날이 시퍼렇게 서 살아있듯이 생생하게 꿈틀거리는 가운데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창법에서 접할 수 있는 테크닉의 화려함이나 높은 수준도 감탄할 만하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만큼 출중한 기량과 음악성을 키웠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으론 상상이 안 될 정도다.

ㅡ조성진 음악평론가/ 조성진의 음치불가 '마이클 잭슨' 편

그 어떤 테너도 마이클 잭슨과 같은 수준으로 데시벨이 올라간 적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정말로 질투를 느끼는 부분은, 전대미문의 케이스로, 빠르게 노래하는 동시에 안정적으로 High C를 유지하는 그의 천재성이에요.

ㅡ오페라 테너 네일 쉬코프/ 1984년 피플 매거진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선천적인 미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스릴러 앨범부터 강한 액센트를 사용하고 비브라토를 강하게 사용하는 창법을 유지했다. 이런 창법이 상당히 고난이도인데 지르지 않고 강하게 발음하는 것은 그냥 서서 부르기만 해도 숨이 찰 것이다.

ㅡIce J 음향엔지니어/ 개인 블로그

마이클은 타고난 고음과 함께 굉장한 음역대의 소유자다. 팔세토에도 능한데 이런 종류의 남성 싱어를 카운터 테너(Counter Tenor)라고 한다. 초고음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테너들이 팔세토를 쓰지만 마이클은 같은 음에서도 팔세토를 쓰든 쓰지 않든 자유자재로 이를 구사할 수 있다. 최저음부터 최고음까지 마이클은 그의 목소리(Vocal Instrument)를 완전히 활용한다. 아티스트로서, 그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순전히 마이클 본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생략) 앞으로 미래 세대에게 카운터 테너라는 용어는 주로 비클래식(Non-classical) 음악과 관련이 깊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바로 그들에게 마이클은 분명 최고로 여겨질 것이다.'

ㅡSimon Ravens (Tudor Consort 합창단 지휘자)/ 저서 'The Supernatural Voice'

마이클 잭슨은 베이스, 바리톤, 테너 모두 가능했지만 대부분 테너로 노래했다. 마이클이 낼 수 있는 최저음은 베이스 성부의 Low C(가온 도보다 2옥타브 낮은 도, C2)였으며 비브라토까지 섞어서 깔끔하게 High C를 넘어 High G(남자의 3옥타브 솔, G5)까지 낼 수 있었다. 이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3옥타브 반을 넘는 것이었다. 한번은 유럽에 있을 때 마이클에게 전화가 왔는데 마이클은 완벽한 바리톤 음성으로 'Hello~'라고 인사했다. 나는 그래서 왜 그런 목소리로 곡을 만들지 않냐고 했더니 마이클은 '저음은 싫습니다, 고음이 좋아요'라고 답했다.(2012년 Bad 앨범 발매 25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만약 누군가 나에게 그와 함께한 시간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나는 피아노에 앉아 있었고 그는 피루엣(발레의 턴 동작)을 하며 High C를 소리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며 지금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마이클은 피루엣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아니 그것보다 방금 High C를 내지 않았냐고 어떻게 한 것인지 놀라서 물었다. 그때 마이클은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해보라고 해서..'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2009년 Urban Spin 인터뷰)

ㅡ보컬 트레이너 세스 릭스

'I Want You Back'과 'I'll Be There' 같은 히트곡들에서 마이클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감성을 파고든다. 지금 듣기에도 여전히 경이로울 정도로. 그러나 그가 기가막힌 팔세토를 완벽하게 마스터하면서 보컬의 천재성을 확립한 것은 바로 성인 시기로서, 그의 쌍둥이 걸작들인 'Off The Wall' 앨범과 'Thriller' 앨범에서였다.

ㅡ앤디 허먼 음악평론가/ LA Weekly, 'The 20 Best Singers of All Time'

마이클 잭슨의 진면목은 역시 그의 탁월한 보컬에서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그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볍고 가녀린 고음이면서도 힘을 지녔다. 그리고 팔세토를 넘나들 때에도 자유롭지만 정확하고 명쾌하게 음을 짚어내는 보이스 테크닉을 과시한다. 대부분 소년 시절의 절창들이 성인이 되면서 목소리의 매력과 테크닉을 상실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보컬리스트로서 마이클의 눈부신 진화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물론 마이클의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이 극대화되는 곳은 댄스 트랙들보다 앨범의 또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R&B팝과 발라드의 영역이다. 특히 온갖 감정을 쥐어짜는 듯한 여리게 떨리는 그의 보컬을 전면에 내세운 절대적 발라드 “She’s Out Of My Life”는 이 앨범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스티비 원더가 함께 작곡한 “I Can't Help It'이나 폴 매카트니가 제공한 “Girlfriend”에서 마이클은 건반과 베이스 라인을 따라 숨가쁘게 날아다니는 리듬감 넘치는 보컬을 과시한다.

ㅡ양재영 음악평론가/ 웹진 weiv, Off The Wall 앨범 리뷰

마이클은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무엇보다도, 보컬적인 면에서 마이클은 항상 저의 영감이 되었죠. 나도 노래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앨범이 바로 'Off The Wall'이었는데 이 앨범을 통해 나의 팔세토를 찾았어요.

ㅡ가수 더 위켄드/ 다큐멘터리 'Journey from Motown to Off The Wall'

춤만이 사람들을 홀린 것은 아니었다. 천재적인 감정표현과 비트감각에다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생략) 이 모든 영광은 춤이 아니라 천부적 음악재능, 즉 가창력이 동반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비트감각이 요구되는 빠른 댄스곡에도 능했지만 풍부한 감정표현과 정확한 음 구사능력으로 발라드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임진모 음악평론가/ 위클리 공감 기고문 '팝의 제왕.. 전설이 되다'

현란한 댄스 때문에 보컬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이클은 분명 탁월한 가수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비트감각, 정확한 음표현, 어색하지 않은 기교, 대단한 음역... 왠만한 높이를 갖고 있는 사람도 마이클의 노래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거의 소프라노 급이니까요.

배철수 DJ/ 2009년 배철수의 음악캠프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를 단 몇 마디로 정의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때로는 카렌 카펜터즈처럼 맑고 다이애나 로스처럼 명랑하고 제임스 브라운처럼 격정적이며 로저 워터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가 소울 앤 알앤비라고 어중간하게 정의된 앨범으로 그래미에서 락 보컬상을 수상한 것과 알앤비 보컬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이 어쩌면 정답일지도 모른다. 그는 악보가 있어서 부른다기보다는 악보를 이정표 삼아 자신의 감성대로 드라마틱하게 온갖 복잡한 장르를 비웃으며 어느 경계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노래들은 비평하기가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마이클 잭슨이라는 브랜드의 음악인 것이다. 그를 알앤비 또는 소울 또는 락이라는 영역 내에서 바라본다면 그건 정말 위험한 착각이다. 그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그런 문자화된 장르 안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ㅡ제인 맥길리언 음악평론가/ Village Voice' 92년 3월호

팝의 역사를 살다간 그 수많은 명인들 중에 단 몇 사람만을 꼽아 '역대 몇 위' 같은 등수놀이를 하는 것이 건강한 취미는 아닐지 모르지만 잭슨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아주 쬐금 과장을 보태면) 흑백을 통틀어 역대 팝 보컬리스트 중 열 명 안에 꼽아 억울할 게 없는 인물일 것이다. 알앤비 가수로서 잭슨의 소울풀함은 아레사 프랭클린, 스티비 원더나 브라이언 맥나이트의 사기적인 성량에 이은 무한 테크닉에는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그들에 능히 필적하는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다. 'Who's Loving You'를 거짓말같이 맛깔나게 불러제낀 어린 시절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성인이 되어 발표한 일련의 곡들, 이를테면 'Human Nature'나 'I Just Can't Stop Loving You', 'Man In The Mirror'에서처럼 선율의 기본을 맛깔스럽게 훑어내면서도 때때로 소울풀하게 내지르는 테크닉은 흑인 가수로서 그의 본령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팝 발라디어로서의 능력이라면 더욱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평생 댄스 음악을 달고 다녔던 가수로서는 정말 드물게, 아니 거의 유일하게, 그의 발라드 능력은 동급 대비 최강의 감미로움을 더한다. 'Heal The World'에서처럼 각 소절을 각각 다른 느낌으로 미세하게 바꿔 부르는 능력, 'She's Out of My Life'나 'Gone Too Soon', 'Childhood'에서 들리는, 가사의 한 결 한 결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전달능력은 가히 동시대의 명가수 라이오넬 리치나 조지 마이클, 카렌 카펜터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다. 게다가 그 독창성과 카리스마라는 면을 보탠다면 역대 지존이라 불릴 고참들인 프랭크 시나트라나 냇 킹 콜, 엘비스의 유려함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없다. 록커 잭슨? 코웃음부터 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동시대를 살다간 록의 거장들조차 잭슨의 보컬의 위대함은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태생은 소울 가수였지만 그의 보컬은 수준급의 록 보컬리스트를 뺨치는 댐핑함과 샤우팅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릴러 앨범으로 록/팝/소울 부문을 모두 휩쓴 것은 이미 전설이 되버린 기록일 뿐더러, 'Dirty Diana'나 'Come Together'의 러프한 샤우팅은 당대 탑 메탈 보컬리스트들이라도 좌절감을 느꼈을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다. 'Smooth Criminal'의 기가막힌 팔세토, 'Beat It'이나 'Jam' 등이 들려주는 속도감에 위협받지 않는 탄력적 딜리버리도 록커 잭슨의 포텐셜을 증명한다. 발라드, 댄스, 록을 모두 잘 부르는 가수는, 내 기억이 맞다면, 마이클이 유일하다. 그리고 그 수준은 그 어느 장르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정도였다. 의심할 바 없이.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주 장르인 팝 뿐만 아니라 발라드, 댄스, 리듬 앤 블루스 등의 장르와 그 외의 여러 장르를 결합시킨 음악들도 무리없이 보컬로 소화한다. 깔끔하게, 거칠게, 맑게, 허스키하게, 까랑까랑하게도 부르는 등 곡 해석력 또한 다양하다. 이러한 보컬능력은 Invincible 앨범에서 잘 표현되었지만 앨범이 부진하면서 묻혔다. 안습... 1984년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스릴러, 빗잇, 빌리진의 3곡으로 각각 최고의 팝 보컬, 락 보컬, R&B 보컬로 보컬 부문에서만 3개의 그래미상을 휩쓸어 갔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의 라이브 보컬로서의 실력은 한국 인터넷 상에서는 꽤나 저평가를 받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위 '공연'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이클 잭슨의 공연 동영상으로 그의 목소리가 매우 상했으며 대부분이 립싱크로 진행됐던 'HIStory 투어' 동영상이 광범위하게 많이 퍼졌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라이브 보컬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영상물은 거의 풀리지 않았으며 그나마 풀린 영상조차도 화질이 매우 좋지 않다. 마이클 잭슨은 5살 때부터 각종 지역행사와 밤무대를 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12살 때부터는 프로가수로서 투어를 돌기 시작하고[58] 성인이 된 후로는 격한 춤까지 추며 올라이브를 고집하여 목을 혹사시킨 탓에 다른 가수들보다 목이 빨리 상하게 된다. 서른까지는 모든 투어를 부분 립싱크도 없이 100% 라이브로 소화했고, 투어 중 라이브를 했던 비율이 립싱크에 비해서 훨씬 많지만[59] 라이브로 했던 공연은 60~80년대 자료라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립싱크 가수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마이클의 80년대 시절 화려한 라이브 보컬로서의 실력을 보고 싶으면 라이브 앨범인 'The Jacksons: Live (1981년)'을 필히 들어보길 바란다. 가장 카랑카랑 했을 때의 음색 그리고 댄스의 개입이 적었을 때라 마이클 잭슨의 화려한 가창력을 맘껏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Bad Wembley Tour'도 필수적이며 이 2개가 잭슨 측이 공식적으로 발매한 유일한 라이브 앨범물이다. 화질은 썩 좋지 못 하지만 그래도 나름 보고 들을 만한 수준으로 나돌아 다니고 있는 Victory Tour (1984년) 시절 영상도 봐보자. 켄자스 시티와 달라스,뉴욕에서의 공연이 괜찮다. 반면 캐다나 토론토 투어 영상은 화질 음질이 도저히 볼 수준이 아니다. Bad Tour는 일본에서 87년에 한 공연들이 100% 라이브라 감상하기 좋다. 요코하마 공연이 가장 유명하며, 나레이션의 방해가 심하긴 하지만 Bad 투어 2일차 맛보기 영상도 전성기 시절의 보컬을 들어보기 좋다.

80년대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도 마이클의 가창력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관객들이 마이클 잭슨을 세계 최고의 댄서라고 생각할 때 그는 발라드 노래를 흐느끼며 열창한다. 그러면 나는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그를 꼭 껴안아주고 싶다"라고 썼을 정도다.

각종 매체에서 전문가들이 뽑은 최고의 가수 리스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2003년 <Cove 매거진>이 뽑은 'Top 100 보컬리스트' 3위에 선정됐고 2015년에는 보컬 전문지 <Voicecouncil>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성 보컬리스트 Top 5' 2위를 차지했다. 또 2016년에는 <Consequence-Of-Sound>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 Top 100' 1위, 같은 해 <LA Weekly>가 선정한 '베스트 싱어 Top 20'에서 8위에 선정됐다. 한편 2003년 <MTV>와 <Blender 매거진>이 공동으로 실시한 '가장 훌륭한 목소리 Top 22' 독자 대상 온라인 투표에서는 11위에 선정됐으며 2011년에는 <NME>가 독자 1,0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장 위대한 가수 Top 20' 온라인 투표에서 1위에 올랐다. 하지만 가창력이라는 것에 객관적 기준을 적용하기란 상당히 모호하고도 힘든 일이므로 마이클을 포함하여 어느 가수든 선정하는 매체마다 순위 변동이 심하다. 고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어쨌든 마이클이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만 알면 충분할 듯하다.

한편 가수로 데뷔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변성기가 안온 것 마냥 여리고 가는 목소리를 유지했는 데 이 때문에 그가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 거 아니냐, 고자냐는 루머가 퍼졌다. 그러나 변성기가 안온 건 아니고 실제로 오긴 왔고 그래서 70년대 후반에는 예전처럼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는 없었다.

친어머니 캐서린 잭슨에 의하면 잭슨 집안은 선천적으로 고음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마이클의 형제 재키 잭슨의 목소리도 들어보면 60대 남자답지 않게 목소리가 되게 얇다. 모든 남자들이 변성기가 온다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차이는 성대의 차이인데 마이클 같이 극소수의 남자들은 변성기가 와도 여자 수준까지 자라고 멈춘다.

세스 릭스와 리사 마리 프레슬리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의 실제 목소리는 'You are not alone'이나 'Heal the World'에서 듣는 만큼 매우 고음은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목소리보다 좀 더 낮았다고 한다. 그 예로 HIStory 투어에서 in the closet 나레이션 부분이나 This is it에서 리허설 중의 일상 대화들을 들 수 있다.

5.3. 댄스

댄서로서 전문적으로 판단해볼 때, 잭슨은 탑이다. 당신은 댄스의 거장을 볼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은 동작을 동작 그 자체를 위해 사용하는 무용의 달인, 아방가르드 무용가다. 그의 댄스는 추상적이며, 세계적인 현대 무용가 머스 커닝햄처럼 그는 우리에게 동작이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거의 팝 스타들과는 달리 잭슨은 미리 딱딱 짜여진 대로 춤을 추지 않는다. 즉흥적인 춤으로 대중들과 소통한다. 잭슨은 위대한 일루셔니스트이자 진정한 마임가이다.

ㅡ안나 키셀코프 무용가/ 1988년 뉴욕타임스

전문댄서가 아니면서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

댄스에 있어서는 펑크의 제왕 제임스 브라운과 영화배우이자 전설적 춤꾼으로 유명한 프레드 어스테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유년 시절에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의 스텝을 연구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완벽주의 적 성향과 결부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꽤나 춤의 달인이었다고도 하며 그와 함께 작업했던 다이애나 로스는 그가 춤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댄서들이 따라갈 수 없다며 불평했다는 회상을 했다. MTV를 통해 전 세계를 강타했던 'Thriller' 뮤직비디오의 안무도 직접 했다(마이클 피터스와 공동 안무).

재키 윌슨은 마이클 잭슨이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모두 익혔다고 했으며 잭슨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웠다고 인정했다.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그는 빌리 진 무대를 선보였는데 프레드 아스테어가 그것을 보고 마침내 자신의 후계자를 찾았다며 매우 기뻐하여 잭슨의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전화까지 걸었다. 프레드는 잭슨에게 "네가 진짜 춤을 보여줬어" 라며 분노의 댄서라고 잭슨을 평가했다.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인 세스 릭스는 당시 장면을 회상하며 잭슨이 너무 흥분하여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프레드는 직접 잭슨을 만나 문워크를 배운다.

1983년 최초의 마이클 잭슨 문워크 영상

문워크는 그가 전부를 직접 개발한 것은 아니다. 문워크와 비슷한 스텝은 1930년대부터 존재했고 마이클은 캐스퍼라는 한 소년에게서 백 슬라이드 스텝을 배운 뒤 이를 체계화된 현재의 문워크로 발전시켜 'Billie Jean' 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공연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500개의 순위 중 202위를 차지했으며 미국인들이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장면 7위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후일담에 의하면 본인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공연이 끝나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60] 그런데 지나가던 소녀가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줘서 그제야 기분을 풀었다고. 문워크의 뜻은 마치 을 걷는 듯 유연하게 미끄러진다며 붙어진 이름으로 초반에는 그저 미끄러지듯 뒤로 걷는 동작이었지만 87년 'Bad' 앨범 때 이후로는 옆으로 가는 문워크나 제자리 문워크, 마지막에 회전하는 문워크 등 몇 가지 변형 동작이 추가되었고 조금 더 복잡해졌다.

'Smooth Criminal'의 안무로 유명한 Lean 동작(30도 가량 비스듬히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동작)을 무대에서 보이기 위한 장치를 고안해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다른 스텝들과 공동 특허). 이 Lean 댄스는 특수 신발과 무대 고정 장치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댄서 개인도 몸이 똑바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과정에서 지구력과 추진력이 필요하기에 한때 아킬레스건이 남보다 2배는 길다느니(...) 재미있는 루머들이 난무했다. 장우혁2006년에 'Mr. 잭슨' 이라는 곡을 내면서 오마주한 적이 있다.

스텝에 있어서는 가히 기예와 같은 실력을 발휘한다. 발끝으로 서는 동작은 마이클 잭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 그의 '빌리 진' 퍼포먼스는 83년 초연 이후 다른 스텝과 동작이 추가되었는데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때를 보면 거의 발이 무대에서 날아다닌다. 문워크야 지금은 웬만한 댄서들이야 다 하는 동작이지만 원조는 원조인지라 잭슨 같은 유연함, 스피드, 능수능란한 테크닉을 재연하는 것은 힘들다. 발동작이 매우 빠르고 가벼운데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 뒷부분을 보면 뛰어난 스텝을 감상할 수 있다. 이렇게 현란한 스텝을 밟으면서도 온 비트가 정확하며 정지된 동작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 대중의 호응을 유도해내는 것이 특징인데 어느 평론가는 '잭슨은 춤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멈춤에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했다.

참고로 마이클 잭슨을 대표하는 의상 중 하나인 검은색 바지-하얀 양말-검은색 구두는 마이클 잭슨의 안무를 보고 무대 기획자가 공연을 직접 보러 온 관객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현란한 스텝을 멀찌감치 서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 제안했다고 한다. 비록 꽤나 촌스럽고 격식에 안 맞는 조합이 될 것임에도 마이클 잭슨은 흔쾌히 허락했다.

스핀 실력도 수준급인데 그의 팬이 편집한 스핀 짜깁기 영상만 봐도 무지 어지럽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스핀을 실컷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바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 응용도 있는데 뱅글뱅글 돌다가 순식간에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 동작이다.[62]

로봇 댄스에도 능숙했다. 16살에 발표했던 Dancing Machine의 로봇 댄스 모음

그의 댄스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사타구니 잡는 동작은 87년 'Bad' 뮤직비디오 촬영 때 처음 나온 것이라고 한다. 춤을 추다가 우연히 했던 동작인데 그게 느낌이 좋아서 계속 하게 되었다고. 사실 지금이야 댄스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익숙해서 그렇지 사실 굉장히 섹슈얼한 동작이다. 적당히 사타구니를 잘 쥐어잡은 채로 각을 잡고 엉덩이를 유연하게 튕겨줘야 하는데 이게 내공이 없는 일반인이 하면 똥마려운 포즈로 보이거나(...) 개그 요소가 될 수 있는 등 은근히 난이도를 필요로 한다. 사실 저 동작을 잘못 추면 그게 바로 저질 댄스가 된다...

현란한 스텝을 보여주고 있지만 디테일한 면에도 신경 쓴다. 'Dangerous' 퍼포먼스에서 볼 수 있듯이 손에 감은 밴드 등으로 시각적인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영상을 찾아보면 미묘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을 볼 수 있는데 한때 신화이민우가 오마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잭슨은 군무보다는 독무를 좋아한다. 이유는 군무는 에어로빅 같아서 힙합 음악은 좋아하지만 힙합 댄스는 에어로빅 같아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비보이들의 대부분은 잭슨을 좋아하겠지

마이클의 이러한 능력은 공연 때 마다 발휘되었으며 마이클이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여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이클은 저의 댄스 커리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아마 전문 댄서들 대부분은 저와 똑같이 말할 겁니다.

ㅡ댄서 셰릴 버크/ 2009년 'Dancing With The Stars' 인터뷰

마이클은 춤과 안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아이콘을 넘어 춤과 안무의 아버지를 잃었어요.

ㅡ댄서 카리나 스미르노프/ 2009년 'Dancing With The Stars' 인터뷰

(마이클 잭슨의 춤이 본인에게 미친 영향?) 마이클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작과 음악성이 잠재해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마이클의 습관이 배였던 것 같아요.. 저에겐 스승이었고 음악이나 춤, 우상이나 마찬가지였죠.

ㅡ가수 박남정/ 2009년 KBS 인터뷰

마이클 잭슨은 나의 정신적 스승이었고, 앞으로도 나를 비롯해 전 세계 모든 댄스가수들의 교과서로 남게 될 것이다.

ㅡ가수 / 2009년 마카오 패션쇼 인터뷰

댄스가 스킬이 아닌 예술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댄서 잭슨의 성적은 A+ 학점을 주어도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댄서들이 살다 갔지만 그 중에 자신만의 시그니쳐 무브를 만들어 낸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누구나 춤은 기억하지만 댄서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지만 잭슨은 우선 저 유명한 '문워킹'이라는 시그니쳐 댄스를 남겼다. 빌 베일리의 탭 댄스에 제임스 브라운의 그루브를 자연스레 접목시킨, 이를테면 재활용 댄스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파워풀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잭슨의 동작은 선배들과는 전혀 새로운 감흥을 안겨주었다. 그는 테크니컬한 관점에서도 훌륭한 댄서였다. 굉장히 안정적인 자세에서 가볍고도 강렬하게 이루어지는 라킹이나 파핑 등 그가 공연에서 즐겨 추는 브레이킹 무브들은 춤에 어느정도 통달한 사람들만이 자연스레 모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한편 그는 최신 댄스 팝을 50년대 이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과 결합시키면서 새로운 경향을 창조해 내기도 했다. 프레드 아스테어나 진 켈리가 보여준 뮤지컬 특유의 낭만적인 몸짓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길거리 흑인 음악의 정수인 그루브함과 역동성을 부여해 그 이전 시대의 팝 아티스트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안무들로 승화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다. 그가 최고의 춤꾼들과 함께 고안해낸 'Thriller', 'Smooth Criminal', 'Dangerous'의 흥미로운 군무와 그 짜여진 동작 하나하나들의 디테일은 결국 팝 음악에서 안무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팝이 낳은 가장 위대한 댄서의 반열에 오를 MJ. 그가 무대 위를, 아니 달 위를 걸었던 불과 10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은 앞으로 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계속 회상되고 이야기 되고, 감탄사를 자아낼 것이다.

ㅡ김영대 음악평론가/ 음악취향Y '마이클 잭슨' 특집

6. 공연(투어)

마이클 잭슨이 월드투어를 진행한 곳을 표시한 지도.[63]

마이클 잭슨 'Dangerous' 투어의 시작을 알리는 부분. 일명 토스터 기법으로 많은 가수들이 공연에서 채용하고 있다.

잭슨은 자신의 생애에서 총 15번의 투어[64]에 900회에 가까운 공연을 했지만 정작 남아있는 동영상은 거의 없다.

투어는 아니지만 탤런트 쇼나 스크립트 공연에서 노래를 부른 것만 합치면 횟수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1984년 잭슨스 (잭슨 파이브는 잭슨스로 이름을 바꿈.)의 일원으로 빅토리 투어를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당시가 스릴러 열풍으로 팝 역사상 최강의 괴물인 잭슨이 미국 전역을 돌며 투어를 한다는 데 사람들이 안 보고 못 빼길 수가 있나. 별로 공연하지도 않았는데 80년대 가장 좋은 수익을 거둔 투어 7위를 기록한다.

1987부터 1989년까지 1년4개월간 그의 첫 솔로 투어인 Bad 투어가 열렸다. 123회 공연으로 440만명의 관중들을 불러왔고 영국 웸블리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50만 4천명과의 관중들과 만났다. 배드 투어는 일본을 시작으로 열렸는데 일본에서 당시 잭슨의 공연 표가 매진되는 건 당연하고 암표가 횡행하여 암표상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배드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2012년 발매된 영국 웸블리 공연 DVD가 있다. 1억 2천 5백만 달러[65]를 벌어들여 80년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투어 2위 솔로 가수로는 1위를 기록했다. 또, 당시 관객들이 잭슨의 공연을 보고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런 사태는 데인저러스 투어도 마찬가지. 잭슨의 말에 의하면 공연을 열 때마다 3천 명씩 실신해서 실려 갔다고 한다.

1992-1993년에는 Dangerous 투어가 열렸다 마이클 잭슨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부 스케줄이 취소되어 총 69회의 공연으로 350만 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전 투어와는 달리 퍼포먼스가 더 과감해졌다.[66] 데인저러스 투어의 라이브 영상으로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이 2005년 DVD로 발매됐다.

1996년 7월 16일 히스토리 투어 시작전에 브루나이에서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Royal Brunei 공연을 개최하여 6만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내용적으로 보면 시작은 데인저러스 투어로 하는데 끝은 히스토리 투어로 끝나는 공연.

1996-1997년에는 HIStory 투어가 열린다. 35개국 82회 공연 450만명의 관중들과 만났다. 이때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했다. 마이클 잭슨은 1993년 Dangerous 투어 당시에도 우리나라에 오려고 한 적이 있는데 김영삼 정부는 근검절약 분위기에 맞지 않다고 거절한 바 있었고 [67] 이번에도 좌절되는 가 싶더니 겨우 겨우 공연이 성사됐다. 하지만 반미를 외치는 세력들과 개신교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마이클 잭슨 공연 반대 대책위가 꾸려지고 잭슨 내한 공연 반대 운동이 매우 격렬하게 펼쳐졌다. 심지어는 공연 반대 대책 위원회에서 마이클 잭슨측과 계약을 하고 표를 판매하기로 한 태원예능에게 서점들과 은행 등에서 표를 판매할 경우 해당 서점과 은행의 불매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협박했고 태원예능은 협박에 굴복, 표 판매를 철회하고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밤낮으로 돌아다니며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고 한다. 더욱이 공연 퍼포먼스가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심의위원회에서 19금 이상의 성인용으로 처리되었고 덕분에 표 판매는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매진에는 실패했고 관객의 70% 가까이를 채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2회 동안의 총 관중 수는 9만명. 총 2회 공연 중 두 번째 공연은 매진을 기록했다. 근데 7만 8천명도 당시 잠실 주경기장의 다른 행사의 입장 인원을 생각해 보면 꽤 많이 들어온 거다. 공연이 끝나고 태원예능의 사장님인 정광택씨가 당시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마이클 잭슨이 어쨌다구요?' 라는 책을 쓴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되어 사지는 못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다. 정광택씨는 책 뒷면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허가한 공연의 표도 못 팔게 한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있습니까?"

1999년에는 'Michael Jackson & Friends'라는 자선공연이 우리나라 서울독일 뮌헨에서 열렸다. SBS에서 서울 공연을 생중계 해줬는데 시청률이 최고 42.3%였다.

2001년에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이때 You Rock My World를 공연할 때 어셔와 크리스 터커가 난입하여 함께 공연했다. 또한 휘트니 휴스턴 역시 참가하여 공연했다.

말년에 있던 솔로 투어에서 립싱크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배드 투어 때는 체 세트리스트 중에서 3곡을 립싱크 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지만[68]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과감한 퍼포먼스가 추가돼 라이브 비중이 60% 정도로 줄었다. 문제는 히스토리 투어인데 당시 1-2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립싱크 처리했다. 마이클 잭슨의 댄스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로 하여 체력 소모가 심하다. 거기다 마이클은 통증까지 앓고 있어 데인저러스 투어부터는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텨왔지만 1993년 재판 이후 급속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면증 거기다 목 상태도 나빠져 히스토리 투어부터는 립싱크 없이는 공연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는 가장 최근 시기에 있던 히스토리 투어의 동영상만 많이 풀렸지. 그 이전인 데인저러스나 배드 투어는 거의 없어 일부 유출된 소수의 영상과 잭슨 5 시절 공연 영상 밖에 없어 배드 투어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하라는 요구가 많았는데 마이클 의 사망 3년 이후인 2012년 웸블리 투어 영상이 공개되면서 팬들의 숙원이 어느 정도 풀렸으나 아직도 풀어야 할 라이브 동영상은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일부 극성팬들은 해킹을 해가며 투어 동영상을 야금야금 빼오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야 몇 개의 불법적인 공연 동영상이 유출돼 볼 거리가 더 많아진 것이다. 하지만 음질 리마스터나 화질의 개선없이 단지 빼오기만 했을 뿐이라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이클은 월드 투어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투어는 나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다. 한번 공연을 하고 나면 몸무게가 500g이 빠져 나간다" "실컷 공연해 봤자 동영상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를 넘나들며 시차 적응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거기에다 2시간 동안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의 마이클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었을 거다.

마이클 잭슨이 성인이 되어 참가한 Victory World Tour,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총 관중수를 합치면 1440만명에 달한다. 거기에다가 로얄 브루나이 공연[69]의 6만명을 더하면 1446만명이 된다. 말이 1446만명이지 이는 엄청나게 많은 수인데 피파 월드컵 중 최다 관중인 3,587,538명을 동원한 1994년 미국 월드컵의 관중수에 4배를 곱해도 마이클 잭슨의 월드투어 관객수보다 작다. 즉 평균관중이 68991명이었던 미국 월드컵 경기를 108번해도 1446만명이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 어떤 팝 아티스트의 관중동원 기록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다.[70] 또한 마이클은 투어 때 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돈을 끌어모았는데[71][72] 아무런 계산없이 합쳐도 3번의 투어 평균수익이 1억 3천만 달러이고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면 3번의 투어동안 평균수익이 2억 1천 5백만 달러에 달한다. 투어횟수 자체가 적다는것과 21세기들어서 투어를 한적이 없다는 점 때문인지 총관중 총합과 수익총합 순위에서 밀려났다.[73] 또 가장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미국본토[74]를 데인저러스 투어때부터 제외하기 시작했는데 투어의 흥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75]

6.1. 대표적인 공연영상

좋은 공연 동영상은 더 많이 추가바람.

1969년 Who's Loving You 에드 설리번쇼. 비욘세 데뷔 초에 프로듀서가 이 영상을 몇시간이나 틀어주며 그의 소울을 보고 배우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11세)

1970년 I want you back + ABC 에드 설리번쇼 (11세)

1973년 Ben 아카데미 시상식 (14세)

1975년 One Day In Your Life 멕시코 시티 공연 (17세)

1979년 Destiny 탑 오브 더 팝스 (20세)

1981년 Rock With You 다이애나 로스쇼 (22세)

1983년 모타운 25 마이클 잭슨을 운명을 바꾸었던 공연. 흑인음악으로 유명했던 마이클이 과거의 히트곡들을 부르다가 처음으로 빌리진을 선보이며 댄스가수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이 공연으로 마이클은 슈퍼스타가 됐고[76] 이 날 선보였던 춤과 의상은 영원히 마이클 잭슨의 상징으로 남게 된다. (24세)

1988년 그래미 어워드 축하 공연 The Way You Make Me Feel + Man In The Mirror (29세)

1993년 Gone Too Soon 클린턴 대통령 취임 축하 공연 (34세)

1995년 Dangerous mtv 시상식. 한국 아이돌들도 여러번 따라한 유명한 군무곡 (37세)

빌리진

1983년 모타운25 빌리 진 최초의 빌리 진 공연과 최초의 문워크! 참고로 당신이 보고 있는 모든 장면은 마이클 잭슨이 직접 카메라 위치를 선정하여 촬영한 것이고 편집한 것이다.!

1984년 캐나다 토론토 빌리 진

1987년 일본 요코하마 빌리 진

1988년 영국 웸블리 빌리 진

1992년 부쿠레슈티 빌리 진

1996년 로얄 브루나이 빌리 진 공식적으로 확인된 마지막 라이브 빌리진이다.

1999년 서울 공연 빌리 진

Bad 투어

1987년 Wanna Be Startin' Somethin' Bad 투어 오프닝곡

1987년 Beat It

1987년 Heartbreak Hotel smooth criminal 도입부에 나오는 호텔 실루엣의 시초. 88년 공연부터 호텔 실루엣은 smooth criminal이 들고가게 된다.

1988년 The Jackson 5 Medley

1988년 I Just Cant Stop Loving You

1988년 Rock With You

1988년 Thriller

1988년 Dirty Diana

1988년 Another Part Of Me

1988년 The Way You Make Me Feel

1988년 Smooth Criminal

1988년 Man In The Mirror 유럽에서의 공연 장면들을 모아 만든 뮤비.[77] Bad 투어 당시 공연장을 채웠던 어마어마한 인파를 볼 수 있다. 영화 문워커에 수록되어 있다.

1992 Dangerous 투어

1992년 Jam Dangerous 투어 오프닝곡

1992년 Beat it

1992년 Smooth Criminal

1992년 Man in the Mirror

1997 HIStory 투어

히스토리 투어 오프닝 Scream + They Don't Care About Us + In The Closet

히스토리 투어 어스송

히스토리 투어 스무스 크리미널

히스토리 투어 스릴러

히스토리 투어 Beat it

히스토리 투어 You Are Not Alone

2000년대 추천 공연 동영상

2001년 30주년 공연 영상

2002년 Danger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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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생활 및 일화

7.1. 언론과 루머

언론과의 관계는 아주, 아주 좋지 않다.

지금까지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는 여전하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마이클 잭슨 같은 빅스타는 서구 언론에서 보도하듯 마이클 이후에는 없었기 때문으로 언론의 관심도는 타 스타들과 그 강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마이클이 생전에 살아있을 때는 영국의 '더 선'이 마이클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로 제일 악명 높았으나[78]사망 이후에는 잠잠해 졌고 이제는 미국의 '레이더 온라인'이 그 바통을 넘겨 받았다. 루머는 주로 폭스뉴스나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나온다. 온라인 인터넷 기사에 '충격, 마이클 잭슨 OO하다.' 이딴 식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전부가 조작됐거나 문제가 있는 주장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안 된다. 타블로이드는 '찌라시'를 뜻하는 데 서양에서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되는 신문들이 가십거리와 루머를 담는 황색 언론들이라 타블로이드라고 하면 찌라시라는 뜻을 지닌다. 요즘은 정론지도 타블로이드 판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종이신문 사업이 뜸해져 인터넷 매체로 많이들 옮겨가 단순히 도구로서의 타블로이드 구분은 희석해 졌지만 전통 때문인 지 해외 가십 매체들은 다 타블로이드라고 부른다. 마이클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 기사는 100% 출처가 폭스 아니면 타블로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도 그렇고 .. 간혹 LA타임즈 같은 데서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와 관련된 글이 올라오는 데 자세히 보면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다더라 라는 식으로 인용 보도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보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돈'이다. 타블로이드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접촉한 사람들에게 돈을 줄 테니 인터뷰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타블로이드 언론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마이클에 대한 이런 저런 가십 이야기를 떠든다. 물론 그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으로 대부분은 교차검증도 받지 않았다.진실 여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해 그들은 내용이 아닌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중요하다며 무분별한 언론의 보도를 비판했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는 2013년 7월 영국의 선데이 피플이라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자신들이 단독으로 입수한 FBI 파일에는 마이클 잭슨이 24명의 어린이들 성추행하고 3500억 원의 돈으로 어린이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기사다. 이미 FBI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혐의 파일을 전부 공개한 적이 있다. 근데 4년 뒤에 선데이 피플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는 지 새로운 내용을 찾은 것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내용을 완전히 왜곡시켜버렸다. FBI 파일 원본을 보면 FBI는 수사 기관의 협조 요청을 받고 필리핀까지 오고가며 마이클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 것도 찾지 못 했으며 합의는 1993년 챈들러 사건 한 건 뿐이라고 나와있다. 아래는 CNN에서 선데이 피플을 까버린 기사

“가격이 올라가니까, 그는 스토리를 점점 자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필립 르마르크에 대해 메저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잭슨 씨의 손이 (맥컬리)컬킨의 바지 속에 있었다고 하면 돈이 더 올라간다고 브로커가 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메저로우는 반대심문 중 이렇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르마르크가 말했다.

“그들을 도왔던 이유는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이었죠.” 바레시는 말했다. “난 누군가를 정의를 위해 끌고 가는 정의의 사도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마이클이 당시에 진짜 죄가 있었던 없었던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죠.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어요, 추가하자면 그들 돈도요.”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의 ‘FBI 파일’에 대한 타블로이드 보도의 신빙성

거짓 FBI 파일과 관련된 내용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선데이 피플의 저 루머로 전 세계적으로 마이클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불타오를 시점 영국의 '미러'라는 타블로이드는 FBI 파일 속에서는 '1984년 마이클이 멕시코 소년 2명을 성추행 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수사를 진행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에게 백악관에서 상을 받기 위해 수사가 집행정지 됐다'는 부분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도 명백하게 보고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으로 1993년 성추행 혐의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의 타블로이드들은 마이클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음과 동시에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계속해서 보도했는 데 그때 나온 루머가 저 내용이다. FBI 파일 원문을 보면 이렇게 써져 있는데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저 내용이 사실이냐고 FBI에게 문의가 접수됐고 FBI가 조사를 벌였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근데, '미러'는 뻔히 자기들의 기사가 거짓임을 알고도 철판깔고 저런 식으로 보도했으니 저널리즘의 가치를 스스로 똥칠하고 있다고 비판당해도 싸다.

2016년 6월에는 레이더 온라인이라는 타블로이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마이클 잭슨의 저택인 네버랜드의 경찰 수색 당시 대량의 아동 포르노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거짓이고, 레이더 온라인은 경찰 보고서를 조작했다. 경찰은 '마이클 잭슨의 저택에는 아동 포르노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 없으며, 불법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썼다. 또한 아동 포르노는 소지 자체가 불법으로 수사기관에 적발시 기소된다. 근데 마이클 잭슨은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기소된 적이 없다. 자세한 전말을 알고 싶으면 마이클 잭슨 아동 음란물 보도의 왜곡과 전말을 참조

2014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前 가정부 3명이 폭로를 했다며 '충격, 마이클 잭슨 집안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 ...' 라는 뉴스가 보도됐었는 데 출처는 뉴욕포스트라는 역시 미국의 타블로이드 언론이였다. 그러나 이 자칭 가정부들은 익명속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어 버렸다. 그래서 어느 가정부가 그런 말을 했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또한 이것은 명백하게 문제점이 있는 증언으로 마이클은 워낙 호들갑을 떨 정도로 깔끔을 챙긴 사람이며 자녀들을 위해 결벽증과 같은 태도를 보였는 데 자신의 저택을 더럽히고 살았다고? 말이 안 된다. 교차검증적으로도 그렇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실 마이클 잭슨은 워낙 거대한 저택에서 살았기에 그의 집에서 일한 사람들은 꽤 많다. 당연히 그 중 몇명의 직원들은 문제가 있었고 일부 가정부는 마음대로 물건을 훔치다 해고 당하기까지 했고 언론에게 돈을 받고 이야기 거리를 판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맥 마 누스' 친척들의 집에서도 물건을 훔치다 법적 분쟁을 일으켰었고 1993년 첫번 째 사건이 터졌을 때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과 함께 돈을 받고 마이클을 음해했었다. 또한 마이클과 친했던 사람들이 사이가 비틀어 지자 나중에는 오히려 언론에 마이클을 비난하고 그랬다. 대표적으로 밥 존스라는 마이클의 홍보 담당자는 언론에 돈을 받고 그를 비난했었다. 그런데 막상 2005년 재판 때는 검찰을 비판하며 마이클을 옹호했다. 검찰은 물론 충격, 마이클에게 안 좋은 말을 할 줄 알고 증인으로 불렀던 건데 ... 데비 로우도 마찬가지이고. 한 가지 더 위 CNN 기사를 쓴 사람은 '알렌 듀크' 기자였는데 그는 CNN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타블로이드 보도를 가장 중립적으로 전체적인 맥락으로 다뤄 마이클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CNN을 모종의 이유로 나가더니 레이더 온라인에 입사했는 데 오히려 이제는 자신이 마이클을 비하하는 전형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콘래드 머레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황당한 것은 머레이에 대해 설명할 때 언론들은 단순히 그를 주치의라고만 묘사하지 마이클 잭슨을 과실치사로 사망하게 하여 감옥에 수감됐다는 말은 안 해준다. 또한 주치의니 마이클의 모든 것을 알 거라는 식의 기사 내용도 문제다. 머레이는 마이클 잭슨 사망 몇 개월 전에 고용된 의사일 뿐 마이클의 나머지 49년 삶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머레이 뿐이 아니라 마이클과 함께 일했던 의사들은 수십 명은 될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당시 과실치사 재판을 통해 판사는 머레이가 반성하는 기미가 없으며 고용자 마이클 잭슨의 신뢰를 크게 배신했다고 판결했다. 또한 머레이의 과거가 가관인데 2009년 5월 기준으로 6명의 여자들로부터 7명의 자녀들을 두는 막장 불륜행각을 보였다, 2002년 캘리포니아에서 파산 신청을 했었고 2008년까지 텍사스와 네바다에서 의료장비와 시술에 쓰인 대여장비 대금 미지급에 대하여 법원으로부터 60만 달러 이상의 과징금이 누적됐으며 자녀들에게 갈 보육비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과 캘리포니아 여성 네니타 말리비란에게 1만 3천 달러의 부채가 있다는 이유로 캘리포니아 의료 자격을 잃기 될 위기에 처해 있기도 했다. 물론 마이클 잭슨 재판때 징역형은 물론이고 의사면허도 박탈됐고 ... 머레이는 표면적으로는 마이클을 음해하는 타블로이드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7명의 자녀들을 돌봐야 하고 그의 소비벽을 보면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온갖 문제를 일으키지만 마이클 쪽에서는 대처할 수가 없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강한 나라로 사망한 사람의 인격을 지켜줄 방어를 할 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리 막나가는 것. 그리고 언론의 보도 내용은 전후 맥락이나 전체적인 상황을 보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대다수이기에

타블로이드뿐만이 아니라, 기존 주류 미디어와의 사이도 좋지 못 한데,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타임지, 롤링 스톤 등이 추모 특집 판을 찍어냈는데 내용을 보면 잭슨을 까 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왁코 잭코' 라고 특히 타임지는 2면을 크게 할애해서 한 쪽에다 마이클의 굴욕짤을 크게 붙여놨다. 그래서 잭슨의 팬들에게 사진만 좋은 거 나열해놓고 팔아먹으려는 심보냐고 까였다. 하지만 주류 미디어와 타블로이드의 차이점은 적어도 주류 미디어는 타블로이드처럼 잭슨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원천 소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마이클 잭슨 본인역시 이러한 말도 안되는 개소리들을 매우 싫어했으며 언론과 파파라치, 루머들을 대놓고 저격하는 곡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79]

하지만 파파라치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잭슨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개별 파파라치들에게는 일일이 미스터라고 불러줄만큼 친절했으며 그들에게 한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화를 낸 순간은 아동성희롱 재판 이후 기자가 마이클의 엄마에게 패드립을 쳤을 때라고. 마이클은 "내가 마이클 잭슨일 뿐입니다. 나에게 말하세요." "당신의 삶을 소중히 하세요." 라고 말하며 화냈다고 한다. 언론사에서는 마이클이 못생기고 괴물같이 나올수록 비싼 값을 불렀고 이 때문에 일부 파파라치들은 마이클이 지나갈 때 온갖 어그로를 다 끌어서 화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오래 따라다닌 파파라치들은 최대한 정중하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1 2 3

당시 추모특집 판 커버 사진

7.2. 어린 시절

[80]

마이클 잭슨이 직접 그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 이 그림을 봐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엿볼 수 있다. 'HIStory' 앨범에 실림.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다고 생각한다.' 며 어린 나이에 데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을 보면 그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잭슨 가는 형제가 9명이나 되었던 가난한 가정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자식들을 밴드로 구성하여 공연을 다니게 했는데, 위에도 언급됐지만 잭슨 파이브시절 확인된 공연만 500회이고 스트립 댄서들이 공연하는 성인 클럽에서 아이들을 노래하게 하는 등 지금으로 봐서는 아동학대 수준으로 자식들을 굴렸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에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했다고 한다.[81]

또 나머지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맞았으며 싸대기는 기본에 걸핏하면 폭언과 채찍에 맞기도 했다. 또한 성숙되지 않은 초등학생 나이부터 여자들의 누드와 난잡한 성생활에 노출돼 섹스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조지프 잭슨은 본래 부인 캐서린을 냅두고 걸핏하면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해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럼에도 가족 관계를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 심한 고통을 입었다고 한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는 몇 년 다녔으나 잦은 공연 활동과 팬들의 교실 난입(...) 등으로 학교생활이 불가능했고 개인 교사에게 따로 지도를 받아서 정규 교육 코스를 마쳤다.

그가 아동 성범죄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자기 침대에서 재우는 것을 개의치 않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 놀러온 애들에게 자기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거기에 그 어떤 성적인 의미나 행동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2003년 방영된 《마이클 잭슨과의 삶(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동에 대한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묘사가 되어 곤혹을 치렀다. 천하의 개쌍놈들[82]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승화했으며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Childhood' 와 'Heal the World' 등의 노래와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엿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스스로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 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생전에 장난감을 사 모으거나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놓고 즐기는 등 키덜트적인 면모도 보였다.[83] 잭슨이 2005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84] 절친인 코미디 배우 크리스 터커가 코미디 쇼에 나와 80% 이상을 잭슨 이야기만 한 적이 있었는데[85]러시 아워 2》에 나와서 잭슨 춤을 흉내 내고 잭슨 집에 불려가서 하루 종일 산더미 같이 쌓아둔 피터 팬 동화책만 읽었다고 하며 그런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을 나쁜 짓을 했을 리 없을 거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 잭슨 형제들이 음악 연습을 할 때 잭슨 형제들의 아버지 조 잭슨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벨트채찍처럼 휘두르고 구두 신은 발로 차는 등 온갖 학대를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밤에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게 밤중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어린 마이클 잭슨의 방에 들어왔는데 그 공포에 대한 기억이 큰 충격이 되어 10대 시절 마이클 잭슨이 악몽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 잭슨은 자신의 기타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애들을 두들겨 패는 등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하거나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아버지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으며 유언장에서도 아버지 언급을 전혀 안했고 유산 분배에서도 어머니 캐서린과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만 유산을 상속, 아버지는 제외시켰다.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에서도 어머니만 언급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아버지가 자신처럼 스타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싫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 꺼렸지만 그가 를 성인이 되어서 성형하게 된 이유중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코가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팬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잭슨 남매들의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은 다 이 사람 손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무시 못 한다. 마이클 잭슨도 인정했듯이 아버지 조 잭슨은 그 자신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을 뿐 부동산 투자니 뭐니 어린이 스타들이 돈 때문에 겪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도 않고 음악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 잭슨은 자식들이 번 돈을 착복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로 인해 잭슨 남매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은 성장하고 나서도 애정 결핍에 자기애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9남매 전부 성인이 된 후 전부 폭력적이고 고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마이클 잭슨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여전히 껄끄러웠는지 끝내 앙금을 풀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도 몇몇 찌질이들이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동정 마케팅이나 한다.' 며 비난을 하지만 사실 잭슨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 시절 얘기를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한 건 두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서전에서 몇 번 언급한 것이나 'Childhood' 같은 자전적인 곡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팬들이 그 부분에 과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인데 정작 본인은 남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물어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2010년 조 잭슨은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업을 자랑스럽게 홍보했다고 하는데 결국 아내가 아들의 죽음을 홍보로 이용하는(...) 남편의 행동에 이혼을 요구하였고 결국 부부의 60년 부부 생활은 종지부를 찍었다.[86]

7.3. 여자와의 관계

다들 알다시피 잭슨은 여자 같이 곱상한 외모와 여자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또 한 때 잭슨이 80년대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출입했던 사실이 있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나 사람들이 잭슨의 성에 관심이 많았냐면, 우리나라 국내 언론 80년대 보도에도 잭슨이 동정인가와 관련된 보도가 있다. 93년 오프라 윈프리는 잭슨에게 아직도 동정이냐고 물어본다. (Are you a virgin?) 잭슨은 당황하며 (How could you ask me that question?) 자기는 신사(a gentleman)라고 대답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에서 잭슨의 전 매니저 프랭크 딜레오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잭슨은 활발하게 여성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보가 흘러나가면 팬 층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쉬쉬 했다고 한다. 잭슨은 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을 하는데 리사 마리의 친구들은 리사는 남녀 간의 활동에서 성적 만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리사가 잭슨에게 푹 빠진 걸 보면 (...) 잭슨이 침대에서는 고수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이 맞다면 역설적으로는 잭슨이 소아 성애자라는 세간의 의혹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주장의 진위여부들은 잭슨 본인만이 알겠지만...

20대 중반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혼전관계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해당 인터뷰 기사에서는 마이클이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적어놨다. 스릴러 뮤비에서 좀비분장을 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파문된 걸로 알려져 있지만 마이클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라서 서른이 넘을 때까지 크리스마스 파티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87]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살았다. 실제로 이 무렵 마이클이 결혼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다이애나 로스와도 동침한 적이 없다는 통화내용이 후에 유출된다.

마이클 잭슨의 첫 여자친구는 흔히 '테이텀 오닐'[88]이 거론된다.

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였는지 돌아다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마이클은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닐이 나를 침대에서 성적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워서 이를 거절했다" 1년 뒤 오닐은 이 주장을 반박하고 "아니다, 잭슨이 나를 유혹했다" 고 주장하는데 ...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 이 또한 본인들만이 잘 알겠지만, 국내에 알려진 테이텀 오닐의 인터뷰 중에는 마이클 잭슨의 키스가 매우 서툴렀다는 내용이 있다. # 오닐은 친구 세서 잭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마이클은 섹스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 또 그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는 나랑 같이 있을 때 고작 두 마디 정도 밖에 안 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타는 애야. 누군가는 이 부분에 대해 그 애랑 이야기를 해봐야 해" 이렇게 까지 말한 오닐을 생각하면 마이클의 말이 맞다 고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잭슨이 오닐을 유혹했다는 말은 오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잭슨의 첫사랑은 15살 연상의 다이애나 로스라고 마이클 본인이 여러 곳에서 밝히고 다녔다. 같은 모타운 소속이라서 마이클이 10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두 사람은 78년에 뮤지컬 영화 The Wiz를 찍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각종 시상식이나 행사에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마이클 잭슨의 모친인 캐서린에 의하면 마이클은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 정도는 돼야 진짜 미인이라며 자신의 누나들에게 미인이 아니라고 어그로를 끌었으며, 마이클 본인 역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에게 항상 반해있었다고 말한다. 80년대부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결혼하겠다는 발언도 종종하게 되는데 '에보니 매거진' 인터뷰에서는 다이애나 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인터뷰어가 누나로서 말인가? 라고 되묻자 마이클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 그녀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단언한다. 84년까지도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 결혼할거라는 의사를 밝히지만 85년에 다이애나가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상대는 마이클은 누군지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남자였다고 하며, 다이애나의 결혼식 날 마이클은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다이애나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89] 이후 90년대 초반에 마이클이 친구와 통화하던 녹음본이 유출되는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동침한 적은 없었고, 자신은 다이애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며, 다이애나를 잊는데 엄청나게 긴 시간(a hell of a long time)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다이애나가 결혼한 뒤에도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위한 헌정곡인 Remember The Time을 만들었고 유언장에 자신의 아이들의 2차 후견인[90]으로 다이애나를 지목해 놓는다. 마이클의 첫 여친으로 알려져 있는 테이텀 오닐조차 마이클 사후 출연한 방송에서 마이클이 게이였냐는 질문에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다고 밝혔다.(He was in love with Diana Ross and that was real)

배우자에 대해서는 아래 가족 관계 항목으로.

7.4. 가족 관계

결혼을 총 두 번 했다.

첫 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 리사 마리와 결혼 이전에 세기의 스캔들이 있었기에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유명인의 딸을 이용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까지도 빈민가 출신에서 용 된 흑인 스타라는 이미지가 있던 마이클 잭슨이 남부 출신 백인(정확히는 혼혈)인 리사 마리와 결혼을 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결국 리사 마리와는 9개월 가량의 짧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이혼했다.

이혼 이유는 연애할 때는 몰랐지만 성격 차이가 생각보다 심했고 자녀 문제에 있어 리사는 마이클의 아기를 낳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을 해서 미뤘지만 마이클은 재촉하는 상황으로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다. 마이클이 "너가 아이를 안 낳으니까 데비가 아이를 낳아준다고 했어"라고 말할 때는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둘은 바로 아이를 낳자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전남편과 전아이에게 상처를 준 기억때문에 리사는 둘의 결혼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자녀계획을 미루자고 제안하고 마이클은 밤마다 아이 인형을 들고 다니며 울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짜 사이'는 결코 아니였고 리사와 마이클은 섹스도 하는 정상적인 부부였다고 한다. 이혼 후에도 잭슨에게 투어 공연을 초청받는 등 같이 식사도 하고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리사는 마이클이 "엘비스처럼 죽을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는데 실제로 마이클은 엘비스와 비슷하게 죽어버렸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의 친구이자 피부 치료를 돕던 간호사 데비 로우 이며 그녀에게서 연년생 남매 프린스와 패리스를 얻었다. 그러나 로우와도 99년에 이혼했다. 다만 잭슨은 별로 로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주얼 상으로도 둘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주변에서 많이 의문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우와의 이혼 후에도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가 성추행 누명으로 소송 중일 때 검사 측을 비판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1997년 2월 13일생 프린스 마이클 잭슨, 1998년 4월 3일생 패리스-마이클 캐서린[91], 2002년 2월 21일생 블랭킷(아명, 현재 이름은 비기 잭슨)[92]이 있다. 생전에 자기 아버지가 9명이나 되는 자녀를 거느렸으니[93] 자기는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참고로 프린스와 패리스는 아이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친자식이 아니다라는 설이 돌았고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실제로 로와 성관계를 한 게 맞냐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사망 이후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두 아이의 어머니 로가 프린스와 패리스는 마이클의 아이라고 인정했고 블랭킷은 루머가 많지만 지인들이 친부가 맞다 고 인정했다. 그런데 최근, 프린스 잭슨이 자신의 SNS에 "계약으로 맺어진 피는 자궁으로 맺은 물보다 진하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해 자녀들이 친자식인지는 다시 미스테리로 빠졌다. 그러나 입양에 대해 열린 생각이었던 마이클이 친생자가 아닌 아이들을 양자로 들이지 않고 친생자라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한편 첫번째 아들 프린스 잭슨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 등에서 마이클과 같이 유전병인 백반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마이클의 젊은 시절처럼 겨드랑이 부분은 이미 변색이 많이 진행되었고 몸 전체적으로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마이클도 부계에서 이 유전병을 받은 것. 마이클의 형제들도 마이클만큼 심하진 않지만 백반증이 있다. 또한 막내 블랭킷은 클수록 마이클의 외모를 빼닮아 귀엽다 마이클의 아이들 중 가장 관심을 많이 받기도 한다.

실제로 흑인과 백인의 결혼에서 흑인 우성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예외도 많다. 《프리즌 브레이크》에 출연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의 경우는 쿼터인데도 거의 완전한 백인 얼굴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연속적으로 아이 셋이 백인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 성장한 패리스 잭슨의 공식 사진을 참고하면 피부 빛이 미디엄 브라운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94] 혈통 상으로 마이클 잭슨도 쿼터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피부 빛이 상대적으로 밝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이클의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보더라도 백인 혼혈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피부색이 굉장히 밝은 편이다. 마이클 잭슨의 자식들과 라토야 잭슨의 사진 애당초 마이클 잭슨이 순수 흑인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아이들이 모두 밝은 피부색으로 태어나는게 가능했다.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도 아랍인과 결혼해서 백인의 피부색에 가까운 아들을 낳았다.

여담으로 패리스 잭슨이 그녀의 고모인 라토야 잭슨의 소싯적 모습과 닮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97년에 첫 아이인 프린스가 태어났을 때 병원 근처에 아기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이 가득했고 헬리콥터까지 동원되는 등(...) 큰 이슈를 끌었는데 그 때문에 아이들의 납치나 범죄를 우려하여 생전에 항상 애들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장례식에서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언론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그의 생전에는 자녀 모두 홈스쿨링을 했으나 사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패리스 잭슨은 음악에 관심이 있는지 가끔씩 노래 부르는 영상을 올리고 있다. 아빠를 닮아 음색이 예쁘다. 자작송 듀엣

패리스 힐튼은 잭슨 사후에 그의 딸 패리스의 이름은 마이클 잭슨이 자기 이름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자기 엄마에게 동의를 얻고 패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냥 헛소리 중 헛소리다. 마이클 잭슨과 패리스의 어머니는 유년 시절에 같은 학교를 잠시 다녔고[95], 힐튼가 사람들은 사적으로도 잭슨의 집에 초대받아서 노는 등 절친한 사이긴 하지만 딸 패리스의 이름은 딸이 태어난 곳이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때 패리스 힐튼은 괜히 잭슨과의 친분이나 부각시키려고 헛소리를 한다며 미국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천재들 주변에는 항상 똥파리들이 꼬인다.

잭슨 남매들과는 언론에 보여 지는 것처럼 그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큰 형인 잭키[96]와 한 살 터울인 말론과 막내 동생인 자넷 잭슨[97]과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남매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명성과 비교도 안 되게 크게 성공한 형제인 마이클을 질투했다고 하며 형제자매들이 벌이는 사업에 음반 작업에 돈을 대주는 등 80년대 말까지 마이클 잭슨이 형제들을 거의 업어 키웠다. 마이클 잭슨이 90년대 초부터 거의 형제들과 연을 끊고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저메인, 랜디, 라토야가 잭슨 가족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짓을 워낙 많이 했고[98][99] 특히 랜디에게는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마이클 잭슨이 두 번째 성추행 스캔들로 고생하고 있을 때 마이클 잭슨을 협박하여 금전을 뜯어내고 판권을 매각하라고 강요하기도 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마이클 잭슨이 끔찍히 싫어하는 타블로이드지에 마이클에 대한 루머를 뿌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마이클 잭슨이 법원을 통해 친형제를 대상으로 접근금지 신청까지 받아냈다. 그러자 랜디는 마이클 잭슨 자택의 대문을 자동차로 들이받아서 쳐들어왔는데(...) 하도 심각한 막장짓을 해서 랜디를 개인 경호원으로 위협해서 쫓아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잭슨 사후 그의 형제들이 그의 유산을 놓고 육탄전을 벌이거나 잭슨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벌이며 VIP 대접을 받으며 다니는 것에 공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잭슨의 생부인 조셉 잭슨(...). 아들이 죽고 나니 드러나는 본심

잭슨 남매의 생년월일이다.

  • 장녀 래비 잭슨 - 1950년 5월 29일 생
  • 장남 잭키 잭슨 - 1951년 5월 4일 생. 이름이 은근히 웃긴데 저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면 잭 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쟈니 존슨(존 존), 엘리자베스 베티(베스 베스) 등이 있다. 동양사에도 이런 인물들이 꽤 있는데 조선이이삼국지조조, 이이 등이 있다.
  • 차남 티토 잭슨 - 1953년 10월 15일 생
  • 3남 저메인 잭슨 - 1954년 12월 11일 생
  • 차녀 라토야 잭슨 - 1956년 5월 29일 생
  • 4남 말론 잭슨 - 1957년 3월 12일 생
  • 4남 브랜든 잭슨 - 1957년~1957년
  • 5남 마이클 잭슨 - 1958년 8월 29일 생
  • 6남 랜디 잭슨 - 1961년 6월 23일 생
  • 3녀 자넷 잭슨 - 1966년 5월 16일 생

7.5. 백반증과 외모

1987년의 마이클. 파운데이션을 바른 것 같지만 화장을 일절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마이클은 1984년에 피부과에서 공식적으로 백반증을 진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백반증이 악화된 원인으로는 1984년에 펩시 CF를 찍던 중 일어난 화상 사고가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CF를 찍던 마이클은 펩시 측의 장비 부주의로 머리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백반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피부에 큰 자극을 받으면 금방 악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이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마이클의 안면 백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형수술로 피부를 하얗게 만들었거나 성형수술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피부를 박피하든 태우든 성형으로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100]피부에서 멜라닌이 점점 사라지는 백반증에 걸렸던 것이다. 백반증은 피부 표면 전체의 멜라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점점 탈색되기 때문에 피부가 표범처럼 얼룩덜룩해진다. 현재도 피부병 환자들이 받는 편견이 심한데 먼 옛날에 백반증을 앓는 흑인들은 동물원에 갇힌 괴물처럼 구경거리로 취급되었다. 백반이 덮은 부위가 넓었던 마이클은 화이트 메이크업을 짙게 하여 변색 부위를 가리고 다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메이크업으로 커버할 수 있었는데 갈수록 백반이 넓게 퍼지면서 파운데이션으로는 커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장 밝은 샤넬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되서 마이클의 메이크업 담당인 카렌 페이가 다른 연예인의 메이크업 담당들에게까지 파운데이션을 빌리러 갔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마이클을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마이클은 화면에서 본 것 이상으로 백금처럼 하얗다고 말한다.

백반증에 걸리면 자외선이 백반을 퍼지게 할 수 있어서 노출 부위는 햇빛을 받지 말아야 한다. 백반증이 악화된 후부터 마이클의 필수품은 양산, 우산, 중절모, 장갑, 선글라스였다.[101]장갑을 착용한 건 손에 있는 백반을 가리기 위해 1979년부터 착용하였다.

마이클의 백반증은 1993년에 방송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처음 밝혀졌는데, 이로 인해서 그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반증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LA 검시청의 부검에 의해 실제로 백반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마이클의 몸이 완전 하얗게 보이는 게 오로지 백반증만의 결과는 아니다. 백반증은 피부를 백금처럼 변색시키긴 하지만 치료법이 엄연히 존재한다.[102]그러나 마이클의 피부과 주치의인 아놀드 클라인은 마이클처럼 백반이 심하게 퍼진다면 치료는 불가능하며 '탈색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탈색법이란 백반증이 심하게 번진 환자에게서 정상적인 피부를 제거해서 아예 하얗게 만드는 방법으로, 마이클처럼 백반이 60% 이상일 때 고려하는 치료법이다.[103]마이클처럼 전신의 60% 이상을 백반이 덮는다면 전신을 아예 탈색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마이클처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드러나야 하는 인물이라면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백반증이 발병하는 구체적인 원인은 의학계에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마이클과 80년대 중반부터 함께한 아놀드 클라인은 마이클에게 유전력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고 마이클의 아버지 역시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집안에 문제가 있으며 본인의 누나나 여동생도 똑같다며 마이클이 어릴 때부터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클 본인도 1993년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에서 친가에 문제가 있는 걸로 안다고 발언하였고.

잡지 매거진《16》의 표지로 등장한 1972년의 마이클. 손가락 끝이 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의 아내도 2011년 다큐멘터리에서 자신의 자식들은 남편처럼 피부가 얼룩덜룩해지는 게 싫어서 부분 탈색시켰다고 밝혔다. 마이클의 시신을 부검한 Christopher Rogers는 피부의 일부는 밝고 나머지는 어둡다고 증언하였으며 부검 보고서에도 얼굴, 팔, 가슴, 배에 탈색이 있다고 써있다. 한편 흑인이 심한 백반증으로 탈색 시술을 받은 것은 마이클 뿐믄 아니라 예전에도 꽤 있었던 사례다. 자세한 내용을 얼고 싶다면 피부 색소를 잃은 흑인 댄서를 참고하자.

마이클의 원래 외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들의 전형적인 외모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히스패닉,,아메리카원주민 혼혈이며 그의 아버지 조 잭슨은 아프리카 노예 후손이지만 푸른눈을 가졌다.한마디로 순수 흑인이 아니라 혼혈이다. 특히 고조부와 증조부 대부터 아메리카 원주민 계통이므로 흑인치고는 광대뼈의 돌출이 도드라지고 흔히 말하는 t존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 되었다. 참고로 아메리칸 원주민생물학적으로 황인에 가장 가깝다. 형제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누나인 라토야만 봐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이며 마이클의 조카 티토의 아들들은 히스패닉계의 특징이 강하다.

마이클 아버지 조잭슨은 마이클이 처음 태어났을때 피부가 형제보다 더 까만편이라 "너 내 아들 맞냐"라고 한 일화가 있다.

Black or White나 Smile 뮤직비디오에서는 마이클 외모에서 히스패닉 느낌이 강하다.

참고로 백반증은 흑인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에게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피부가 검은 흑인에게 유독 두드러질 뿐이다. 얼굴 부위에 백반증을 앓은 흑인들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며 대부분은 희게 변한 부위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거나 흰 부위에 맞게 다른 피부를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도 한다. 마이클의 사후에도 피부색 변화에 대해 말이 많자, 마찬가지로 백반증을 앓고 있는 저널리스트인 리 토마스가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에서 민낯을 공개하고 백반증 환자들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마이클을 옹호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굉장히 마른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키가 175cm인데 체중이 가장 많이 나갈 땐 50kg밖에 안 나갔다. 마이클 본인이 평소에도 채식을 즐겼고,[104]다른 사람들보다 더 소식하였다고 한다. 어머니인 캐서린의 자서전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밥을 잘 안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애나 로스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숟가락을 가져가며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Dangerous 투어 당시에는 체력 증진을 위해 적절한 닭가슴살 섭취와 피트니스를 병행하였다. 그래서 나오미 캠벨과 함께 한 'In the Closet' 뮤직비디오에서는 나름 괜찮은 팔 근육을 만들었다. 물론 이 근육도 사실 마른 근육에 가깝지만 결이 잘 갈라져서 멋있긴 하다.

마이클은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으로 인해 코에 큰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지만 막상 수술의 부작용 때문에 두려움을 겪고 망설이다 1979년 영화《위즈》촬영 당시 무대에서 넘어져 코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처음으로 성형수술을 하였다. 마이클은 자서전에서 2번의 코 성형과 턱에 홈을 파는 성형 1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105]마이클의 외모 변화는 1986년의 영화 'Captain EO'부터 이뤄졌는데 거의 유러피안처럼 변한 얼굴로 변한 1987년에 'BAD'로 컴백했을 때 그야말로 충격이었는지 당시 전 세계적으로 격렬한 논쟁거리였다고 한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지금도 마이클의 성형은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서히 나타난 백반증 때문에 피부까지 하얘져서 마이클이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 표백을 했다는 등의 낭설이 엄청나게 돌았다. 마이클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형은 3번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마이클을 믿지 못하고 그보다 더 많은 성형을 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마이클의 어머니 캐서린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성형 중독으로 비칠 정도로 외모에 집착했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외모에 대한 지적을 들었으며 본인 스스로가 내성적이라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이 최종적으로 컴플렉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마이클이 백인이 되려고 한 시도하고 여기는 건 타당하지 않은 낭설이다. 마이클은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성형을 한 것이다. 성형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흑인에게도 열려 있는 것으로 그 누가 성형을 해도 그것이 백인이 되기 위한 수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미적 욕망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성형 수술이다.

마이클이 인정한 2번의 코 수술. 그러나 2005년에 너무 부자연스럽다고 'Bad' 시절의 코로 되돌려 놓는 복원 수술을 하였다.[106]

2008년1988년의 마이클.[107]

사후 마이클을 부검한 결과 눈썹과 이마, 입술에 문신이 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백반증이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백반증은 몸에서 멜라닌이 사라지기 때문에 피부만 하얘지는 것이 아니라 입술과 눈썹은 물론 머리카락도 모두 하얗게 변한다. 사람들이 마이클을 보고 놀랐다고 한 것이 그냥 하얘서 놀란 게 아니라 마치 백금처럼 하얗기 때문이다. 마이클의 후반기 비주얼 변화에는 백반증과 체중 감량이 큰 요인이었는데 1991년 'Dangerous' 활동 시기의 체중은 48kg이었다고 한다. 또한 백반증이 심해지면서 피부에는 하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이나 입술에는 진한 색조화장을 하게 되면서 20대 시절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다.

화장 전.

화장 후.

헤어스타일도 흑인의 전형적인 곱슬머리에서 직모로 변하는데, 펩시 광고를 찍던 중 입은 화상 때문에 두피가 손상되어 가발로 대체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투어 시절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곱슬머리이다. 마이클이 탈모였다는 설은 사후 부검에서 앞머리에 탈모가 있던 것으로 일부 사실이다. 마이클의 팬이라면 90년대 중반과 HIStory 투어가 끝난 공백기 즈음에 예전보다 머리숱이 줄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이브 공연처럼 격렬한 동작을 요하는 퍼포먼스가 필요 없는 공식 석상에서는 가발을 쓰고 나오는 것. 그리고 마이클이 사후 직전에 50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고 놀림거리가 될 이유는 더욱 없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마이클의 외모에 대해서 성형 부작용이라는 가십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사실 자연스러운 노화도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SONY와의 불화, 2년 동안 이어진 소송으로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거식증으로 인한 체중 감소가 성형한 얼굴을 더 안 좋게 부각시킨 측면이 강하다. 이미 마이클이 고인이 된 지금에 와서 그의 외모를 비하하면 고인드립이니 제발 하지 말자.

아이러니한 건 과거에 비해 심하게 변해버린 마이클의 외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마이클을 오래도록 바라본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인종적 특성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 외모와 하이톤의 미성, 탄탄하고 마른 몸매와 멋진 퍼포먼스 실력 때문에 생전에 게이 팬들도 많았다.[108]마초적인 근육질 외모 대신 마이클의 가녀린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도 정말 많았다. 마이클의 삶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었던 외모가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인 요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7.6. 타 연예인과의 관계

  • 춤의 달인으로 수많은 후배가수들과 댄서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못추는 춤이 없을것이라 생각하지만 뉴잭스윙이 열풍이었던 80년대 뉴잭스윙의 왕자인 바비 브라운을 자택에 초청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춤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 흑인 음악계의 전설답게 흑인 배우, 뮤지션, 운동선수들과 친분이 있었다. 에디 머피, 어셔, 마이클 조던, 크리스 터커, 제임스 브라운 등 수많은 흑인 스타들과같이 공연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에디 머피의 음반에 "What's Up WIth You?"라는 노래에 피쳐링을 하였고[109]you rock my world 에는 크리스 터커를 출연 시켰다. 후배가수인 어셔는 종종 마이클의 노래 커버를 했고 30주년 콘서트에는 크리스 터커와 어셔가 깜짝손님으로 나왔으며참조 어셔는 마이클의 장례식에도 gone to soon을 불렀다.마이클 조던은 서로의 전성기 시절 jam 뮤직비디오에서 만나 서로에게 농구와 춤을 가르쳐주었다.
  • 전설적인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110]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 [111]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 프린스와 라이벌 관계였다.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가 비슷한 시기에 큰 성공을 거두고 같은 흑인 가수라는 점에 언론은 둘을 라이벌 관계로 몰아넣었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Purple Rain)에 대해 천재성을 감탄한 발언을 했었고 마이클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프린스를 신경쓰긴 했을 것이다. 거기다 마이클은 항상 당대 최고의 스타를 초빙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구성해왔는데 Bad 때에는 'Bad'의 싱글을 프린스와 듀엣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누가 더 멋지지?" 라는 노래 가사처럼 뮤직비디오도 마이클 잭슨 VS 프린스로 스토리를 짜놓고, 실제로 프린스를 만나 듀엣에 대해 제의했는데, 이를 곁에서 본 퀸시 존스는 '둘은 아무것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BAD투어 때 마이클 잭슨의 밴드는 언제나 프린스의 It's Gonna Be A Beautiful Night링크를 연주했다. 마이클 잭슨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지만 콘서트를 마이클 잭슨이 지휘했고 매 공연마다 연주했으니 마이클 잭슨의 의사인 것은 확실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불명이다. 단순히 이 프린스의 노래를 좋아했을지도. 이 외에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은 같이 탁구도 치는 등 교류를 하기도 했고 2000년대에도 만났다는 이야기들이 꽤 있으나 깊은 친분관계는 아닌듯하다.
  • 퀸시 존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이클 문서를 다 봤다면(적어도 'Bad' 항목) 어떤 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마이클 팬들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는데 사후 종종 이해가 안 되는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백인이 되고 싶다고 주장한다던가 얼굴을 하도 고쳤대던가 급기야 마이클을 용서하겠다는 발언까지. 그러더니 최근에 와서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나는 그가 죽은 후에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많이했다."며 "극한의 사랑 신뢰 존경이 없었다면 마이클과 함께 한 업적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며 뉘우쳤다.(...)
  • 생전 유명했던 절친으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맥컬리 컬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이 있다.엘리자베스 테일러와의 친분으로 유명한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마이클 잭슨에게 큰 힘이 되주기도 했지만 마이클의 재정 상태를 거덜나게 하는데도 한몫했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에게 고가의 선물을 엄청나게 많이 선물했다.[112] 그러나 마이클과 엘리자베스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만 엄청나게 친했으며 마이클이 1993년 혐의 이후 가장 먼저 마이클을 지지했으며 마이클이 사건을 이겨나가게 하는데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이클이 온갖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를 위한 노래 'Liberian girl' 를 만들기도 했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결혼식을 열게 해주기도 했다. 또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97년 생일에는 직접 무대에 올라 팬들 사이에서 숨겨진 명곡이라고 불리는 Elizabeth I Love You를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다. [113] 엘리자베스는 맥컬리 컬킨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공연에도 참석했다. 2000년대에 Invincible발매 이후에 재판을 겪은 이후로 마이클은 2009년까지 거의 잠적했는 데 이는 1993년 혐의 이후로 HIStory를 발매하고 재기한 것과 대조되는 상황이다. 이에 리사 마리 프레슬리[114]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곁에 없었기 때문[115]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엘리자베스는 마이클에게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였다.
  • 맥컬리 컬킨은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다이빙대 위에서 춤추다가 밀어서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 게다가 성추문 사건으로 힘들어할 때도 언제나 지지해주던 친구였다. 맥컬리는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로 인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마이클을 변호하기 위하여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2001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공연에도 참석했다. 사실 둘 다 어떤 면에서는 동병상련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어린 시절에 이미 유명세를 탔던 것도 그렇고. 잭슨이 죽은 이후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의 대부가 되었다.
  • 다이애나 로스는 상술하였듯이 마이클의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모타운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어렸던 마이클 잭슨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등 멘토로도 지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누나라고 말한다. 유언장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다음 후견인을 그녀로 지목했을 정도라고.
  • 비틀즈의 전 멤버 폴 매카트니와도 애증의 관계가 있다. 마이클은 70년대 후반에 직접 매카트니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작업하기를 원했고 처음엔 귀찮아 했지만마이클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매카트니는 작곡[116]과 음악 비즈니스에 대해 많은 것을 마이클에게 알려주었고 마이클의 첫앨범 Off The Wall에 'Girlfriend'란 곡을 선물한다. 또 'say say say' 로 듀엣을 하여 빌보드 6주 1위, 'Thriller' 음반의 'The Girl is mine' 으로 빌보드 2위에 올려놓으며 같이 뮤직비디오도 제작하는등 한창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린스와의 관계와 다르게 매카트니는 마이클보다 더 노래를 잘부르려 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매카트니보다 더 춤을 잘추려고 하지 않는 등 서로가 돋보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그러나 후에 잭슨이 비틀즈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당시 매카트니는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판권을 사들이는 것이 훗날 굉장한 수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친했던 잭슨에게 저작권 판권을 통해 앞으로 얻을 이득을 설명해 줬다.[117]매카트니는 이 개념들에 대해 모르던 시절 비틀즈의 판권을 원치않게 'Northern Songs'에 넘겼고 이것이 다시 'ATV'로 넘겨지는걸 그저 지켜봐야했기 때문에 마이클에게 알려준것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게 불화의 씨앗이 된다. 잭슨은 이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들의 판권을 몇 개 사게 됐다. 이후 비틀즈의 판권이 있는 ATV가 판매되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부동산 부자들 그리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천만 달러를 각자 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오노 요코는 가격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리자고 했고 두사람은 우물쭈물하게 된다. 그 사이에 잭슨이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인다. 매카트니는 이에 대해 분개해 하며 자신의 곡들이 싸구려 CF CM송으로 쓰이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매카트니도 따지고 보면 다른 가수들의 판권을 샀고 CF CM송으로 쓴 적이 있다... 요코는 이에 대해 잭슨같이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이클은 비틀즈의 곡을 꽤 아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비틀즈의 노래는 온라인 서비스도 되지 않았고 영화에서조차 삽입곡으로 쓸 수 없었다! 90년대 초반 저작권 수입 문제가 불거져 매카트니와 잭슨 사이에 고소까지 갈 뻔 했는데 당시 잭슨은 자신의 변호사에게 "고소를 할 거면 하라고 하세요. 폴은 이미 5억 달러 이상의 자산이 있었으면서 자신의 노래에 4750만 달러도 투자하지 못 했어요. 전 정정당당하게 낙찰 경쟁에서 이겼습니다." 사실 이 문제를 법적으로 보자면 폴이 마이클에게 화를 내거나 열을 낼 이유가 전혀없다. 이 문제와는 별도로 매카트니는 잭슨 사망 후 "그는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굉장히 재능 있는 젊은이였다. 그와 함께 했던 경험은 행복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며 조의를 표했다.
  • 머라이어 캐리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의 일원일 정도로 그와 절친이었다. 실제로 머라이어가 모톨라와 안 좋게 이혼하고 잭슨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 그가 토닥이며 위로해줬었다. 마이클 사후 그의 생일때마다 머라이어는 트위터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준다.
  • 마돈나는 마이클과 동갑인데다 둘의 별명도 엮기 좋은 KING, Queen이고 90년대 초에 둘이 엮이는 일이 많았고 1991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둘이 나란히 연인 느낌을 내며 입장한 적이 있다. 다만 둘의 사이는 자주 만나는 친구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둘은 엄연히 같은 부문에 종사하는 음악인들로 서로 질투 의식을 갖기도 했다고. 한편 마돈나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란 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마돈나의 전기책이다. 이 책은 마돈나가 직접 쓴 건 아니고 마돈나에 대해 자료를 수집한 기자가 집필한 책인데 내용을 보면 마돈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유일하게 성적으로 유혹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마돈나가 직접 집필하거나 말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이 책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 NBC와 마이클의 인터뷰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돈나가 먼저 마이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마돈나가 "난 너와 디즈니랜드 같은 곳에는 안 갈거야."라고 하자 마이클은 "난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돈나가 "그럼 레스토랑에 갔다가 스트립바에 가자."라고 제안하자 마이클은 "난 여자든 남자든 사람들이 옷 벗는 자리엔 안 갈거야."라고 거절했다고. 마이클의 사후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마돈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미소 짓길 바란다.'며 추모하였다. 한편 90년대에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던 만화 달숙이에서는 마돈나와 마이클이 부부인 것처럼 등장한 바 있다.
  • 에미넴과의 악연도 있는데 에미넴의 아동 성추행 문제, 성형수술, 1984년에 펩시 촬영 중 일어난 사고를 머리에 불붙는 장면으로 자신을 비꼰 에미넴의 뮤직비디오가 불쾌하다고 밝혔다. 〈Just Lose It〉의 가사 또한 마이클 잭슨이 당시 걸려있던 법적 문제를 비꼬았지만, 랩의 초반 부분에서 "... and that's not a stab at Michael/That's just a metaphor/I'm just psycho...." ("...마이클 잭슨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그저 은유일 뿐이야/난 그냥 싸이코야...") 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이클 잭슨의 팬과 잭슨의 절친한 친구인 스티비 원더는 비디오에 대해 "쓰러져가는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 짓이나 다름 없다"며 "허튼 짓"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불쾌하다는 심경을 드러냈고 스티비 원더도 비판했을 뿐더러 그의 팬들에게도 까였다. 도의적으로 봐도 머리에 불붙은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게다가 성추행 문제는 무죄로 판결되었고 성형문제도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마이클 측은 해당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지 말라고 방송국에게 요청하기 까지 했다. 이외에도 쇼프로에서 마이클과 만나본 적 있냐는 질문을 받자 성적인 만남 말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호텔 창문에서 아이 인형을 던지며 마이클의 아기 흔들기 사건을 모방하는 등 끊임없이 마이클 잭슨을 조롱하고 다녔다. 에미넴은 마이클 잭슨이 죽은 뒤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 "나는 마이클 잭슨을 존경하고 좋아한다"며 뮤비 건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다. 한편 에미넴의 노래 'Just Lose It' 판권을 마이클이 사들였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마이클 잭슨이 에미넴의 노래 몇 개의 판권을 사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마이클은 저작권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에미넴의 노래 포함 12만 5천곡을 4억 달러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Just Lose It'을 사들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 스티비 원더는 bad 앨범의 just good friend에 피쳐링 해주었으며 ,만일 자신이 볼 수 있게 된다면[118] 두 가지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첫째가 자신의 딸의 얼굴이며 두 번째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였다고 했다. 또한 스티비는 에미넴이 위에 서술된 사건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비판했다. 마이클 역시 스티비 원더를 베토벤과 동급으로 두고 싶으며 그의 노래를 완벽에 가깝다 칭찬할 정도로 좋아했다.

7.7. 성격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지인들,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매우 소심하고,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고 증언했을 정도...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초청된 마이클 잭슨의 실제 모습을 보고 너무 수줍어하는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문워크를 보여 달라고 하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에 의하면 마이클은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할 만큼 수줍음을 탔다고 한다.본인의 성격에 관한 인터뷰 남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지인이 자기 앞에서 전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욕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고 전해진다.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다른 연예인을 씹어서 어그로를 끌기도 하는 그쪽 연예계에서도 꽤 신사적이고 쿨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톱 모델 나오미 캠벨마저 인정한 사람. 그래서 에미넴이 자기를 욕하고 다니던 시절에 '뛰어난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욕하지 않는다.'며 불쾌해 했다.

그러면서 의심도 많고 경쟁심도 강했다고 한다. 잭슨의 변호사 존 브랑카 말로는 롤링 스톤즈가 자신이 로스엔젤레스에서 공연했던 공연장보다 더 규모가 큰 공연장을 섭외했다고 하자 미친 듯이 화를 냈다고... 쇼 비즈니스계에서는 영악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들을 만큼 치밀한 사람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의 대인배스러운 성격을 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6년 월드 뮤직 어워드 당시 잭슨이 머물고 있던 숙소 바깥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피자 배달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르르 와서 천 명 가까운 팬들에게 피자를 나누어주며 마이클 잭슨이 전부 계산을 한 거라고 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내며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부럽다 대신 잭슨이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아서 팬들에게도 콜라 대신 생수와 커피를 배달해줬다고 한다. # 또한 마이클은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이나 거지들을 보면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했다고 한다. #

사적으로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썼다는 곡 'Stranger in Moscow'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밖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크나큰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때의 마음을 회상하며 쓴 곡이 이 곡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주변에 비즈니스로 맺어진 사람들이 많았고 여자를 만나면 섹스광이라고 대서특필되고 남자를 만나면 동성애자라고 보도되는 통에 거의 혼자 다녔다고 한다. 안습. 그 때문에 진정한 친구가 적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집 밖을 뛰쳐나가 모르는 남자를 붙잡고 '저와 친구가 되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마이클 잭슨이다!'하고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잭슨은 '이걸 원한 게 아닌데'라며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하지만 90년대에는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질리도록 대하면서 환멸을 느꼈는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선을 긋게 되었다. 또한 쇼 비즈니스 관련된 쪽으로는 영리했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무대에 열광하고 흥분하는지 명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오랜 연예계 생활로 인해 주변에 예스맨들이 넘쳐났고 이들을 한 번 좋아하면 덮어놓고 믿는 어리숙한 면이 있어서 이로 인해 만만치 않게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자주 봤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1년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이었던 최규선과 유리겔라 같은 사기꾼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前 부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005년 성추행 재판 당시 마이클을 변호한 변호사 토머스 메제로우도 마이클 주위에는 마이클에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접근하는 흡혈귀, 즉 예스맨들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마이클이 도움이 필요할 땐 다들 거절했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의 이러한 어수룩한 면모는 황색 언론의 집중 표적이 되어 오랜 세월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7.8. 한국과의 인연

세계적 스타들 중 한국과 인연이 꽤 깊은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인 흑역사 최규선씨와 비즈니스 목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이 대표적인 이유. 최규선과 가까워진 계기가 참 안습(...)인데 어린이를 좋아하는 잭슨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본인의 아기를 안고 네버랜드 앞에서 기다렸다고 하며, 나중에는 국악 풍물패까지 동원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IMF 사태가 터지기 전후,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빈 탈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등이 최규선, 잭슨과 가까운 관계여서 한국 투자 건과 관련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때는 1996년.[119] 공연 포함 한국에 온 횟수가 4번이나 된다.(1996년 첫 내한 공연, 1997년 투자 목적으로 방문,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1999년 마이클잭슨과 친구들 공연) 4년간 거의 해마다 온 셈이다. 1996년 첫 내한 당시에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묵었으나 나머지 3번 방문 모두 남산 아래 신라호텔에서 묵었다. 대한항공에 탔을 때 먹었던 비빔밥이 생각났는지 신라호텔에서 대접받은 비빔밥을 극찬했다. 다만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먹었던 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간장을 넣고 삶지 않은 채소를 넣었다고 한다. 당시 호텔에서는 이른바 마이클 잭슨 비빔밥을 스페셜 메뉴로 내놓기도 했다. 호텔에서는 잭슨을 위해 최고급 객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내부 장식도 그의 취향대로 풍선을 데코레이션을 해주고 아케이드 게임 머신을 넣어주기도 했다.

내한 중에는 화장실에 가려고 명동 피자헛에 잠깐 들르질 않나, 강남역 타워레코드 본점(현재의 지오다노 자리), 아이의 아동복 쇼핑을 위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등을 깜짝 방문하는가 하면 콘서트 전후에는 소외 아동들을 위해 직접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을 전세 내고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한국 측 인사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그 최규선의 소개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97년 대선 직전에 한국에서 처음 만났고, 이듬 해 취임 직후에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김대중 후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휘호를 손수 써주면서, 이런 어려운 때에 마이클 잭슨 같은 세계적인 부자(...)가 투자했으면 좋겠다며 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아 참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120]하고 곧바로 청와대로 초청해 회동하기도 했다. 1996년 첫 방한 시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만난 적이 있으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에는 투자 목적으로 한국을 극비리에 찾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 측과 인천 매립지(현 청라국제도시)를 둘러보는가 하면 유종근 당시 전라북도지사쌍방울 초청으로 무주 리조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주류 언론 대부분이 그의 루머들을 매번 악의적으로 보도한데다가 보수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내한공연까지 반대하던 일각의 상황을 감안하면 꽤 흥미있는 행보였다. 이후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접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의 공식 애도를 표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 역시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지 약 2개월 후인 2009년 8월에 사망했다.

내한할 때마다 앙드레 김이 의상을 제공하곤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전속 디자이너로 섭외를 요청하자 앙드레 김 측에서 정중히 거절한 일화도 있다. 대신 직접 디자인한 의상 몇 벌을 손수 골라 보내주기도 했는데, 2009년 런던에서 열린 기자회견(그러니까 생애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입었던 잭슨의 옷이 바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이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사실상 종전 선언이 나오자 국내 팬들이나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그리워 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 당시 "약속할게요.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이 평화로워지는 날이 오면 서울에 다시 오겠습니다." 라고 멘트를 했었기 때문.

하지만 정확히 10년 후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 후로 9년이 더 지나서야 그의 바램이 이루어졌다.

8. 그 외

  • 음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리기로 유명하다. 앨범 내 소책자를 보면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도 수록하기도 했다. 내한 당시에 머물렀던 숙소 선반에도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인을 새겨두고 갔다. 호텔에서는 기념으로 그대로 둔 모양이다. 여러 모로 예술적인 면에서는 천재.
  • 현재도 해외에선 팬이 아주 많다. 페이스 북 팬 페이지 좋아요 수는 7500만개가 넘은 상태.
  • 유튜브 통계에서도 현재까지도 인기가 아주 많다. 보통 유튜브 조회수는 마이클 잭슨과 같이 전성기가 오래전에 끝난 가수들은 매우 적은 편인데 마이클 잭슨은 2017년 현재에도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왠만한 급의 팝가수들과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유튜브에서 가장 조회수가 많은 가수들 중에 40위권 이상에는 항상 들고 있다. 물론 워낙에 옛날 가수다 보니 공식채널에 나와있는 MV들은 조회수가 최신 팝가수들에 비해 매우 적다.[121] 공식채널에 있는 MV외에도 다른이들이 올린 공연 영상등으로 조회수가 많이 분산되어 나오는듯 하다.[122]
  • 동물도 매우 좋아했는데 어머니 캐서린 잭슨의 자서전에는 저녁 식사 중 마이클이 부스러기를 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는데 뭐하냐고 묻자 가 마이클의 셔츠에서 얼굴을 내밀었다고. 그런데 그는 살인 쥐가 마을을 조지는 'BEN' 의 주제가를 불렀다(...) 그래도 본인은 쥐가 관련됐다고 좋아했던 듯. 그리고 침팬지 버블스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1983년부터 그를 키운 뒤로 뮤직비디오, 쇼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찌라시 언론들은 마이클이 버블스에게 집안 청소를 시킨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등의 루머를 뱉어냈고 아이들에게 위험할 정도로 덩치가 커져 결국 헤어졌다.
  • 무대 위에서의 돌발 상황 대처와 순발력이 무척 좋았다. 1996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마이클 잭슨의 내한 콘서트 2차 공연 도중 잭슨이 무대 중앙 9m 높이의 리프트에 올려진 순간 국내관객 김 모 군(19)이 갑자기 관람석에서 리프트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잭슨을 껴안는 해프닝이 일어났었다. 잭슨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공연을 계속했고 관객들은 그게 무대 연출의 일부 인 줄 알고 열광했다. 이 일로 경호상의 책임을 놓고 대한경호협회와 콘서트를 진행한 백호 기획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정작 잭슨은 '우리도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었던 기막힌 쇼였다' 며 김 모 군에게 감사를 표했다. king of 대인배! 당시 상황이 담긴 영상을 보면 갑자기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잭슨이 상당히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김 모 군이 리프트에서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은 채로 노래를 한다.해프닝 영상.왠지 자연스러워서 연출이라고 착각할 만하다
  • 96년 내한 콘서트로 마이클 잭슨은 18억원을 벌어갔는데, 여기에 과세 추징을 하느냐 마느냐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내뉴스 링크
  • 그가 약을 했다는 몇몇 가지 증거들 중 하나로 최근 공개된 마이클 잭슨의 절친 중 하나인 마술사 유리겔라에 대한 다큐에서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약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유리겔라 항목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람은 이미 흑역사가 되어버린 사기꾼이다.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자기 쇼의 성공을 위해 잭슨과 친구인 척 이름을 팔고 다녔다가 사기인 게 들통이 나고 잭슨의 뒤통수를 골라 치는 거짓말만 치고 다녀서 크게 비난받은 적이 있었다. 잭슨에게 약을 하지 말라고 본인이 얘기했다던데 이 사람은 관심이 떨어질 법하면 매번 잭슨이 약물을 했다고 사방팔방 떠들고 다녀서 욕을 먹었다. Dangerous 월드 투어 때 남미에서 갑작스레 투어를 중단할 수 없었던 이유로 진통제 과다 복용이라고 하고 있으며 History 월드 투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25곡 정도의 트랙의 1회 공연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진통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면서 탈진해서 취소됐다는 문헌이 있는데 겉보기와는 달리 잭슨의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후반에는 루푸스 합병증으로 구강 내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고 80년대 중반에 화상 사고를 당한 후 치료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두피를 팽창시키는 방식으로 상처를 막았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이 오랫동안 장발을 고수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수술의 후유증이 꽤 심각했는지 90년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진통제를 복용했다고 하며 93년 성추행 사건 이후로 불면증이 극심해져 약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때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잭슨의 건강 문제를 거론하는 팬들은 사이트에서 무조건 강퇴를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잭슨의 건강 문제는 언급이 금기시되어 있었다.
  • 한때 여호와의 증인 신도이기도 했다. 70년대까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양복을 입고 집집마다 가스펠을 전파하러 다니기도 했다고 하는데(...) 1982년 'Thriller'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 내부에서 마찰이 심해서 탈퇴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23] 내한 공연 당시에 개신교 단체에서 병크를 저질렀던 가장 큰 명분. 다만 잭슨 가 사람들 전부가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다.[124] 잭슨의 9남매들은 전부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다. 어떤 개신교 교회에서는 팝을 악마의 음악으로 싸잡아 말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이클이라는 이름은 천사장 미카엘을 사칭한 것이다' 고 말하는전세계 마이클 의문의 이단행 병크도 저질렀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집안 영향 때문에 신도였지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후에 종교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믿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종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신의 축복을' 이라는 말과 기도하는 손 모양을 자주 하고 'Dangerous' 앨범의 'Dangerous' 와 'Heal the world'[125] 에서 성경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여호와의 증인과 잭슨의 영적 가치관이 달랐던 것이지 정작 그 자체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그가 스스로 밝혔다(2005년(?)의 인터뷰에서).
  • 생전에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T.》를 좋아했었고 감독과도 친분이 있었다. 1978년에는 시드니 루멧이 연출하고, 퀸시 존스가 음악 감독을 맡은 '오즈의 마법사 뉴욕, 흑인 버전'인 뮤지컬 영화 《위즈 The Wiz》에서 다이애나 로스와 출연해서 허수아비 역할로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흥행과 비평 면에서 동시에 실패하면서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연기에 대한 열정이 있었는지 비록 'Bad' 앨범 홍보 차원에서 쓰이긴 했지만 1988년에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문워커》에서도 주연을 맡아서 연기하기도 했다. 훗날 이 영화는 게임으로도 만들어졌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지만 실제로 영화가 제작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 불가. 그 이후로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126]
  • 찰리 채플린의 팬이었다고 한다.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도 채플린이 작곡한 'Smile'이었으며 일상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도 가족과 걸어가며 Smile을 흥얼거리는 모습이 찍힌 적이 있다. 그 유명한 Dangerous 퍼포먼스에서 후반부 골프를 치는 춤동작도 찰리 채플린에 대한 오마쥬.
  • 2001년 리마스터링 버전이 나오기 전에 발매되었던 국내판 오리지널 'Bad' 앨범에서 강제 개명당했다(...). Michael Jackson을 Michael Jacksoon마이클 잭순마이클 잭곧이라고 적어두었던 것. 다만 이것은 잭슨 본인도 신기하게 생각했는지 내한 당시 레코드점에서 이것을 구입했다고 한다.
  • 노래에 유독 여자 이름이 많이 나온다. 'Billie Jean' 의 빌리 진, 'Dirty Diana' 의 다이애나, 'Smooth Criminal' 의 애니[127], 'Little Susie' 와 'Blood on the dance floor' 에 나오는 수지, 거의 애드리브처럼 쓰는 데비 등등. 일각에서는 사귀던 여자들이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본인은 별 뜻 없다고 해명했다. 그저 이 노래에 이름이 거론된 여자들은 좋아했다.
  • 일본과도 인연이 깊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이었다고 말한적도 있으며 가장 큰 대중음악 시장 중 하나인 만큼 현지에서 공연도 매우 많이 했다. 2006년에는 오랜만에 일본을 찾아 빅 카메라를 전세 내서 쇼핑을 하고 코무로 테츠야 같은 음악인들과 만나 파티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인 후지테레비SMAPXSMAP」에 게스트로 깜짝 출연했었다. # 'Beat It' 을 BGM으로 깔고 등장하는 폭풍 간지를 보여줬는데 SMAP 멤버들에게 전부 비밀로 하고 왔던 거라서 멤버 전원이 보고도 믿기지 않은 듯 다들 얼떨떨한 얼굴로 게스트 근처에 가까이 가서 앉지도 못하고(...) 근처에서 계속 진짜 마이클 잭슨이 맞냐고 물어봤다. 롯폰기에서 흉내 내는 짝퉁이 온 거 아니냐며(...) 자신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이나가키 고로에게도 즐거운 듯이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잭슨은 여기서 30분 출연하고 20만 달러를 받아가셨다고 한다. 역대 게스트 중 가장 최단 시간 출연에 가장 많은 돈을 받아갔다고. 그리고 이것이 잭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 1992년 루마니아 공연 당시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 발코니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에게 'hello, budapest!' 라고 인사하는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128] 헝가리하고 루마니아는 이웃나라고 도시 이름도 비슷하다 보니 저지른 실수인 듯. 사실 상당한 실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실수였지만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넘어갔다. 루마니아인들 입장에서는 맨날 차우셰스쿠가 서있던 자리에 마이클 잭슨이 서있으니 구경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져서 굳이 시비 걸 기분이 안 든 걸지도 모른다
  • 세상을 떠난 영국의 故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와 생전에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그리고 직접 방송에서 나와 예전에 전화 통화도 많이 주고받았었다고 한다. 마이클은 바바라 월터스 쇼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언급했는데 "그분은 너무나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이었어요. 우리 둘다 공통점이 많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도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할 만한 요소들이 수두룩하다. 둘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이들을 사랑했으며 또 아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여담으로 마이클은 영국에서 BAD 투어를 하러 왔을 때 자신의 BAD 수록곡 중 하나인 <Dirty Diana>가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모욕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어서 리스트에서 빼려고 했지만 정작 놀랍게도 다이애나는 오히려 <Dirty Diana>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 직접 마이클에게 말해서 다시 리스트에 넣었다.

  • 평범하게 쇼핑해보는 것을 원했지만 이분이 어디 나타나면 그 일대가 어떻게 되는지 말 안 해도 뻔한 노릇. 그래서 마트를 운영하는 친구가 폐점 후 마이클을 위해서만 비공개로 마트를 열고 다른 지인들은 직원과 손님을 연기하였다. 유투브에서 그가 평범한 손님이 되어 장보기 체험하는 영상을 찾을 수 있다.
  • 2010년 1월 30일 KBS에서 방송된 연예가중계의 한 코너에서 할리우드 추남 추녀 TOP 7을 소개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성형중독자, 아동성폭행인 것처럼 설명해 시청자들한테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후 며칠 뒤 남성 진행자의 멘트로 짤막하게 사과했는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사과였는지 의문스럽단 의견이 많다.

8.1. 재산

각종기관과 매체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인생에서 벌어들인 돈이 10억달러(1조) 이상이라고 추정하고있다. 일각에서는 마이클이 빚 때문에 파산한 것이아니냐는 헛소리가 나왔지만 2007년기준으로 마이클 잭슨의 재산의 순가치가 2억3600만달러에 달한다고 보고되었다.# 2014년 2월 12일 미국 국세청은 마이클잭슨의 초상권을 4억 3426만$로 판단하여 마이클 잭슨의 유산을 11억2500만 달러[129]의 가치로 책정한 뒤 유족들[130]에게 7억200만$[131]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명령했다. 후술할 사후수익 때문에 그의 유산은 천정부지로 늘어나고 있다.

8.1.1. 사후 수익

세상을 떠나서도 살아있는 가수들보다 더 많은 수익을 거두는 아티스트

포브스 사후 수익 발표의 절대 강자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들이는 금액은 천문학적 수치인데 미국의 경제지 포브스[132]에서 발표한 그의 사후 수익은 다음과 같다.[133]

발표 시기

달러 = 한화[134]

순위

2위

2010년 10월

2억 7500만 달러=3000억

1위[135]

엘비스 프레슬리 6000만$=660억

2011년 10월

1억 7,000만 달러 = 187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2년 10월

1억 4,500만 달러 = 1600억

2위

엘리자베스 테일러2억1천만$\2310억

2013년 10월

1억 6,000만 달러 = 176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4년 10월

1억 4,000만 달러 = 1540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5년 10월

1억 1,500만 달러 = 1265억

1위

엘비스 프레슬리 5500만$=550억

2016년 10월

8억 2500만 달러 = 9075억

1위

찰스 슐츠 4800만$=520억

사후 수익 총합 18억 2000만 달러 = 2조 75억 원

사후에 벌어들인 수익이 2012년을 제외하면 모두 1위이며 2010년에는 2~12위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였다. 2위와의 차이도 5000만 달러 가까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현역 뮤지션들 보다도 많은 금액을 벌어들이고 있는데 2010년에는 1억 3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현역 뮤지션 수익 1위였던 U2보다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벌어들였고[136], 2011년에는 U2에게는 밀렸지만 2위였던 본 조비의 1억 2,500만 달러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2012년에는 1억 1,000만 달러였던 닥터 드레를 크게 제쳤으며 2013년에는 1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팝의 여왕 마돈나를 3,5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2014년에는 애플에게 회사를 넘기고 3억 달러를 벌어들여 총 6억 달러를 기록한 닥터 드레에게 크게 밀렸다. 2015년에는 월드 투어를 진행한 케이티 페리에게 3,500만 달러 차이로 밀렸지만 2위였던 테일러 스위프트를 2,000만 달러 차이로 밀어냈다.

2016년에는 생전과 사후를 불문하고 역대 최고액인 8억 2,500만 달러를 벌어들여 남은 순위들의 금액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을 벌어들여 사후 수입 총합이 2조 원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Xscape앨범 으로?

이러한 엄청난 사후 수익은 생전에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던 기업과도 같았던 잭슨 파워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8.2. 어록

인터뷰를 자주 사양했으나 몇몇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꽤 진지하고 심오한 철학적 어록을 많이 남겼다. 어록을 살펴보면 열정적이다 못해 순수하며 꽤 감상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 생각하는 것은 댄서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다. 춤을 출 땐, 춤을 느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사랑이다.
>난 무적이다. 날 다치게 할 수도 없고 날 끌어내려도 다시 일어난다[137]
>나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나의 팬들뿐이다.
>나는 일생 동안 다른 아티스트를 공격한 적이 없다. 위대한 아티스트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에미넴이 자신을 조롱한 사건에 대해).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너무 의심이 많다. 스스로 자기를 의심하면 최선을 다할 수 없다. 스스로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 주겠는가? 작업에 들어가면 나는 내 자신을 100% 믿는다. 나의 혼을 그 작업에 불어넣는다. 그러다가 죽어도 상관없다. 그것이 나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어깨에 드리워진 짐을 가벼워지게 돕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와코 재코(Wacko Jacko)란 말이 대체 뭔가. 타블로이드가 만든 말 아닌가? 나도 가슴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당신들이 이런 말을 쓸 때 나는 그걸 듣고 느낀다. 좋지 않다. 쓰지 말아 달라. 난 괴짜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세계를 좀 더 멋진 터전으로 꾸미고 싶은 생각이라면 먼저 당신 스스로를 잘 보고 자신부터 개선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당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부터 먼저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138]
>인간은 접하고 싶어 한다. 또 그 진실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 한다. 설령 절망이든 기쁨이든 자기가 느끼거나 경험한 것을 살리는 일이 그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이와 같은 계몽의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생존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 오르면 육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굉장한 기분이 들지만 그만큼 엄청난 고통도 함께 따라온다. 정말 엄청난 고통이다.
>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진실을 알 것이다. 내 인생의 첫째는 아이들이고 내가 결코 아이들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은 내가 어딜 가든 나를 45살의 꼬마라고 불렀다.
>왜 당신의 침대를 함께 쓰지 못하는가?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것은 사랑의 표현 중 하나다. 사랑하는 이에게 '원하면 내 침대를 같이 쓰자. 여기서 자.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내 친구들에게 내 침대를 내주었다.
>난 매주 리사[139]와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왔으니까. 우주바다 속 변덕스러운 예외라고 부르는 곳. 이름을 뭐라고 못 짓겠네. 태양계를 넘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불법으로 유통시키고 다운로드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 아티스트의 책임이 크다. 나는 지금껏 한평생 음악을 하면서 성인 솔로로서 낸 앨범이 고작 6개밖에 안 된다. 왜 그런 것 같은가? 완벽한 앨범을 만들기 위해 한 앨범을 만들 때마다 5~6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한두 곡의 히트곡을 빼고는 나머지 공간을 시시껄렁한 곡들로 채워넣는다. 하지만 나는 항상 한 앨범의 모든 곡들이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란 말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적어도 사람들이 차를 몰고 레코드점에 가서 앨범을 골라들고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는 수고를 생각하라. 그리고 그 수고를 감수할 가치가 있는 앨범을 만들어라.
(그럼 당신의 음악이 불법으로 유포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나의 음악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이다.(2003년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 중.)[140]
>나의 집에서는 상이나 트로피를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집에 그런 것들을 두지 않는다. [141] 그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무언가 대단한 걸 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이것들 좀 봐. 내가 이 정도야.'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정말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난 단 한 번도 '이 정도쯤'에서 만족해 본 적이 없다.(Interview with Geraldo Rivera, 2005)
>세상 전부가 당신에게 반대하고, 당신을 비웃고, 당신이 하지 못할 것이라고 무시할지라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만을 믿어라. 누가 뭐라고 하든. (I don't care a whole world is against you, tease you and tell you're not gonna do it, just believe in yourself, no matter what.)
>Just let a song write itself. (곡을 쓰는 방법을 찾지 마라. 당신이 곡을 쓰지 마라. 곡이 자기 스스로를 쓰게 하라.)
>이 지구 위 어딘가 모든 구석, 모든 골목에 있는 모든 나의 팬들, 모든 인종, 모든 국가, 모든 언어의 나의 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마음 속 깊이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 study the greats, and become greater. (위대한 사람들을 연구하고, 당신도 위대해져라.)
>If you want to be all-time great, you should study all-time greats. (위대한 반열에 오르고 싶으면, 위대했던 사람들을 공부해라. ㅡ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했던 조언)
>I promise you, the best is yet to come. (2002년 팬들 앞에서 연설을 마치면서, "이것만은 여러분께 약속해요. 나의 진짜 '최고'는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고.")
>나는 그 순간 알았어요. 저게 바로 내 남은 평생 하고 싶은 거란걸.[142]
> "Practice more." (지금 아는 모든 걸 가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뭘 하고 싶냐는 친구의 질문에)
> 나는 내 자신을 단지 '자연의 악기(instrument of nature)' 라고 생각해요.
>만약 한국에 통일이 찾아 오면, 다시 이 곳에 와서 여러분과 함께 그 날을 축하하고 싶다. (1999, Michael & Friends 내한공연 중. *마이클과 친구들 공연은 분단국가인(였던) 두 나라, 독일/한국에서만 열렸던 특별공연.)
>(오프라 윈프리와 인터뷰 중, 자기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왜 그런걸 궁금해하죠? 그런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난 예술을 사랑하고 특히 미켈란젤로를 존경하죠. 만약 내가 그와 잠시라도 대화할 수 있다면, 난 그에게 무엇이 당신을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무엇이 당신을 그런 위대한 예술가가 되도록 이끌어줬느냐고, 너무나 물어보고 싶어요. 그가 어제 밤 누구와 놀러 나갔는지, 왜 햇빛을 피해 머물러 있는지 그런 것들이 아니라요.
>내가 당장 내일 죽더라도, 내가 너에게 이야기 해 준 것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If I die tomorrow, never forget what I told you.) ㅡ 딸 패리스 잭슨에게 했던 말.
>전 언제나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그가 얼마나 큰 인기와 명예를 가지게 되었는지갸 아니라, 그의 명예와 돈으로 무엇을 했느냐 에 결정된다는 것을요. (1999, Speech at Indian Awards)
>여러분을 사랑해요. 정말요.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입니다. 이것만은 알아 주세요. (I love you. I really do. From the bottom of my heart. You have to know that.) - 2009년 This is it 공연 발표 당시 팬들에게.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팬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세지.)
> 어린 아이는 막지 말 것. (경호원들에게 당부한 경호 기준)
> (너무 큰 유명세 때문에 겪게 된 불편과 불행에 대해 유명해진게 후회될 때도 있는지 질문 받자) 아주 가끔은 그럴 때도 있지만,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런걸 불평하면 안되요. 그것도 다 일의 일부인걸요. 팬들이 주는 사랑은 결코 당연한 게 아니에요. (1987, interview with Ebony/Jet)
>모든 예술가는 불멸을 원하잖아요. 전 위대한 예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믿어요.
>그게 진짜 내 가슴이 의미하는게 아니라면, 전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아요. (10살 때 인터뷰, 곡 HIStory 도입부에 나옴.)
> 전 그냥 사람들이 웃는 걸 보면 행복해요.
> When I go, this problem world won't bother me. I'll fly away. (내가 떠나고 나면, 이 문제덩어리 세상도 날 더는 괴롭히지 못하겠지. 나는 날아가겠어. ㅡ사후 발표곡 'Xscape' 가사 중)

9. 디스코그래피

10. 수상 기록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등재 앨범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003년 등재

프랭크 시나트라, <Songs for Young Lovers> (1954)
마일스 데이비스, <Kind of Blue> (1959)
밥 딜런, <The Freewheelin' Bob Dylan> (1963)

2004년 등재

로버트 존슨, <The Complete Recordings> (1936-1937)
베니 굿맨, <Carnegie Hall Jazz Concert> (1938년 1월 16일)
글렌 굴드, <Goldberg Variations> (1955)
엘라 피츠제럴드, <Ella Fitzgerald Sings the Cole Porter Song Book> (1956)
델로니어스 몽크, <Brilliant Corners> (1956)
찰스 밍거스, <Mingus Ah Um> (1959)
주디 갈란드, <Judy At Carnegie Hall> (1961)
비틀즈,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조니 캐시, <At Folsom Prison> (1968
캐롤 킹, <Tapestry> (1971)
마빈 게이, <What's Going On>
브루스 스프링스틴, <Born to Run> (1975)

2005년 등재

존 콜트레인, <Giant Steps> (1959)
제임스 브라운, <Live at the Apollo> (1963)
비치 보이스, <Pet Sounds> (1966)
존 윌리엄스, <Star Wars> (1977)
퍼블릭 에너미, <Fear of a Black Planet> (1990)
너바나, <Nevermind> (1991)

2006년 등재

뮤지컬 '쇼보트(Show Boat)' 앨범 (1932)
데이브 브루벡, <Time Out> (1959>
비비 킹, <Live at the Regal> (1965)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Are You Experienced> (1967)
프랭크 자파 앤 더 마더스 오브 인벤션, <We’re Only In It For the Money> (1968)
스티비 원더,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소닉 유스, <Daydream Nation> (1988)

2007년 등재

피트 시거, <We Shall Overcome> (1963)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urnin'> (1973)
사라 본, <Live in Japan> (1973)
폴 사이먼, <Graceland> (1986)

2008년 등재

조니 미첼, <For The Roses> (1972)
허비 핸콕, <Head Hunters> (1973)
마이클 잭슨, <Thriller> (1982)

2009년 등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7)
더 후, <My Generation> (1966)

2010년 등재

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59)
빌 에반스 외,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7월 25일 녹음)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2011년 등재

캡틴 비프하트, <Trout Mask Replica> (1969)
스틸리 댄, <Aja> (1977)
데 라 소울, <3 Feet High and Rising> (1989)

2012년 등재

부커 T. 앤 더 엠지스, <Green Onions> (1962)
러브, <Forever Changes> (1969)
프린스, <Purple Rain> (1984)

2013년 등재

사이먼 앤 가펑클, <Sounds of Silence> (1966)
핑크 플로이드,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라몬즈, <Ramones> (1976)
비지스 외, <Saturday Night Fever> (1977)

2014년 등재

아트 블래키, <A Night at Birdland(Volumes 1 and 2)> (1954)
본 미더, <The First Family> (1962)
린다 론스태드, <Heart Like a Wheel> (1974)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리지널 캐스팅 앨범 (1979)
U2, <The Joshua Tree> (1987)

2015년 등재

조안 바에즈, <Joan Baez> (1960)
더 도어스, <The Doors> (1967)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Stand!> (1969)
라디오헤드, <OK Computer> (1997)
로린 힐, <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 (1998)

2016년 등재

존 콜트레인, <A Love Supreme> (1964)
산타나, <Abraxas> (1970)
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2017년 등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People> (1964)
데이빗 보위,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이글스, <Their Greatest Hits (1971–1975)> (1976)
토킹 헤즈, <Remain in Light> (1980)
N.W.A, <Straight Outta Compton> (1988)

2018년 등재

메를 트래비스, <Folk Songs of the Hills> (1946)
해리 벨라폰테, <Calypso> (1956)
사운드 오브 뮤직 사운드트랙 (1965)
스티브 라이히, 리처드 맥스필드, 폴린 올리베로스, <New Sounds in Electronic Music> (1967)
플리트우드 맥, <Rumours> (1977)
Run-D.M.C., <Raising Hell>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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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수상 기록으로 그래미 살아있는 전설상과 평생공로상(1993년/2010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특별공로상과 세기의 아티스트상(1989년/2002년), MTV 뱅가드상(평생공로상)과 천년의 아티스트상 그리고 레전드상(1990년/2002년/2006년) 등이 있다. 참고로 MTV는 1991년부터 평생공로상의 이름을 '마이클 잭슨 뱅가드 어워드'라 하여 현재까지도 시상하고 있다.

이외에도 1990년에는 백악관에 초청되어 대통령 표창 데케이드 아티스트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맴버 자격, 2001년에는 솔로 자격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됐으며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2004년 영국음악 명예의 전당, 2010년 무용가 명예의 전당, 2014년 알앤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2006년에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스릴러 앨범과 뮤직비디오는 2008년 역사적/문화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 도서관에 영구보존작으로 선정됐다.

자세한 수상 기록은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메이저 시상식인 그래미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수상 기록은 다음과 같다.

10.1. 그래미 어워드

그래미 어워드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4

올해의 앨범

Thriller

1984

최우수 남성 팝 보컬 퍼포먼스

Thriller

1984

올해의 레코드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락 보컬 퍼포먼스

Beat It

1984

최우수 남성 R&B 보컬 퍼포먼스

Billie Jean

1984

최우수 R&B 음악

Billie Jean

1984

최우수 어린이 앨범

E.T. the Extra Terrestrial (with Quincy Jones)

1984

올해의 프로듀서 비 클래식

Thriller

1985

최우수 비디오 앨범

Thriller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90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Leave Me Alone

1993

그래미 레전드 상

1996

최우수 단편 뮤직 비디오

Scream

2010

그래미 평생 공로상

그래미 명예의 전당

1999

I'll Be There

1999

I Want You Back

2008

Off The Wall

2008

Thriller

2016

ABC

10.2. American Music Awards[143]

American Music Awards

연도

수상부문

선정대상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0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1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Off The Wall

1984

메리트상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Thriller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Billie Jean

1984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비디오

Beat It

1984

가장 인기있는 락/팝 비디오

Beat It

1986

공로상

1986

올해의 노래

We Are The World

1988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Bad

1989

특별공로상

1993

국제아티스트상

1993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Dangerous

1993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싱글

Remember The Time

1996

가장 인기있는 락/팝 싱글

This Time Around

2002

세기의 아티스트상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남성 아티스트

2009

가장 인기있는 락/팝 앨범

Number Ones

2009

가장 인기있는 소울/알앤비 앨범

Number Ones

10.3. 헌액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1]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2001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

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84년 11월 20일

위치

6927 Hollywood Blvd.

11.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창작물 콘텐츠

  • 만화 아기공룡 둘리마이콜은 마이클 잭슨의 패러디다.
  • 미국의 패러디 제왕인 위어드 알 얀코빅은 80년대에 'Beat it' 을 패러디한 'Eat it', 'Bad' 를 패러디한 'Fat' 을 음반으로 내놓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도 상당히 재미있는데 잭슨도 기발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144]
  • 영화 문워커, 캡틴 E.O에 주연을 맡았다.
  • 만화 원피스의 쟝고의 모티브가 마이클잭슨이다.
  •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시즌3 1화인 <Stark raving dad>에서 목소리 출연을 했다! [145] 다만 어른의 사정으로 크레딧에 본인 이름은 올리지 못했고 John Jay Smith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또한 리사를 위해 만든 노래 및 흥얼거리는 파트는 본인이 아닌 킵 레넌이라는 대역을 썼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좋아하는 캐릭터인 바트를 위해 노래 'Do the bartman' 도 만들어서 불러줬는데 이 역시 소니와의 계약 문제로 대역을 써서 불렀다. 본인이 직접 부른 Happy birthday Lisa. EBS에서 심슨을 더빙해서 방영했을 때 시즌 3부터 시작했으므로 EBS 더빙 판 중에선 최초의 에피소드인 셈인데 더빙 판에서 마이클 잭슨 역할을 담당한 성우는 엄상현. 일단 해당 에피소드의 EBS판 제목은 '쓸쓸한 리사의 생일'이다.[146]
  • 사우스 파크에서도 등장한다. 등장할 때마다 하는 말버릇은 "That's ignorant!"(그건 무지한거에요!)"Allegedly!"(의혹일 뿐이에요!).
    • "The Jeffersons" 에피소드에서 첫 등장.정확히 이름은 안 나오지만 바꾼 이름이 마이클 재퍼슨이고 흑인인데 백인으로 보이며 하는 기행들을 보면 사실상 확정이다. 사우스 파크 위키에서도 마이클 잭슨이라고 나온다. 나와서 피부가 녹고 코가 떨어지는 등 마이클 잭슨을 까는 거라는 평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까인 것은 어린 시절에 너무 집착해서 양자인 블랭킷에게 아버지가 아닌 친구가 되었다는 정도이고,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의혹을 경찰들이 그저 부자 흑인이라는 이유로 조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 에피소드가 방영된 날짜가 2004년이란 걸 생각하면 까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147] 그리고 그가 입는 복장들과 부르는 노래들을에게 신경 쓴 디테일들 보면 제작진이 어느정도 마이클의 팬이였던 것 같다.
    • 그가 죽은 후 2009년에 방영된 "Dead Celebrities"에서도 등장한다. 아이크 브로플로브스키를 빙의하고, 자신은 죽지 않았다면서 부정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를 어린 소녀 가창 대회에 참여시키고 나서야 한이 풀려서 영혼이 아이크로부터 빠져나온다... 이때 그가 부르는 노래는 HIStory 앨범에 등장한 <You Are Not Alone>에 가사를 바꾼 것. 여담으로 이 에피소드에서 마이크에게 자신은 죽었다면서 잭슨의 무덤을 파서 증명할려고 있는 장면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 #
    • 2014년 에피소드 "#Rehash"와 "HappyHolograms" 에서 등장한다. 정확히는 Xscape에 나온 <Slave to the Rhythm>의 퍼포먼스에서 등장한 마이클의 홀로그램이 탈출하는 모습으로 등장. 투팍 샤커의 홀로그램이 등장해 그를 잡아 오는 것으로 등장한다(...).[148] 생전 마이클과는 성격차이가 없는 것 같다.
  • 세가 메가드라이브용 게임인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를 프로듀싱했고, 게임 내에 주인공 캐릭터로 출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 또한 세가의 게임 스페이스 채널5와 그 후속 작 스페이스 채널5 파트2에는 잭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 '스페이스 마이클' 이 나온다. 이 캐릭터의 성우는 마이클 잭슨 본인. 프로듀서가 개발 중인 게임을 보여주자 본인이 먼저 참여할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149]
  • 대전게임 엔진인 M.U.G.E.N에도 동인 캐릭터가 존재한다. 베이스는 상술한 마이클 잭슨의 문워커의 도트로, 원작의 기술들을 격투 게임 방식으로 잘 이식한 편이다.
  • 게임 소닉 더 헤지호그 3의 BGM에 마이클 잭슨이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후에 프로듀서 브래드 벅서가 사실을 확정지었다. 엔딩 크레딧과 그 안에 있는 일부 효과음 등이 잭슨이 참여한 부분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 게임 스타크래프트 2해병히드라는 채팅창에 /춤을 입력하면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
  •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이트 엘프 남성 캐릭터는 /춤을 입력하면 마이클 잭슨의 춤을 춘다.
  • 게임 오버워치솔저: 76 스킨 중 불멸자 스킨이 Thriller 복장이다.
  • 게임 던전 앤 파이터의 던전 플레이 컨텐츠 중 하나인 지옥파티 모드 중에서 천계지역에서 지옥파티 입장시 등장하는 APC 중에 MJ라는 이름의 APC가 등장했었다. 남거너 모션을 이용한 춤사위를 통해 부하(백댄서?)APC들을 지휘하고 원령귀들을 소환하는데다 직접공격으로는 데미지를 줄 수 없는등 매우 강력한 APC였지만 현재는 지옥파티 개편으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다.
  • 게임 클로저스의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제이도 채팅창에 /춤을 입력하면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춤을 춘다.
  • 게임 식물 vs 좀비에도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댄서 좀비가 있다. 그러나, GOTY 버전에는 고인 드립 관련 문제로 댄서좀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 게임 블레이블루: 크로노판타즈마에서 하자마(블레이블루)의 컬러링중 Smooth Criminal의 복장과 매우 유사한 컬러링이 있다. 이때문에 외국에서는 [Smooth Hazama]라는 밈이 생기기도 했다.
  • 영화 《맨 인 블랙 2》에 요원 M으로 본인이 직접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1편을 보고 반해서 2편에 에이전트로 출연 요청을 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카메오로 출연. 영화 속에서는 승진 약속한거 언제 해주냐고 상사한테 묻는데 상사한테 그 말이 완전히 씹혀버리는 안습한 인물로 나온다(;;).
  • 달숙이에서도 유명 인사 카메오 중 한명으로 나왔다. 어째서인지 마돈나와 부부 관계라 작중에서는 통칭 마씨 부부라 불린다(...) 이 만화가 그렇듯 멀쩡한 캐릭터라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 그래도 유명인사 계열 출연진 중에 어느 정도의 비중은 있었다.
  • 영화 《무서운 영화》에 패러디한 인물이 등장했다. 다만 한창 성추행 소송 문제로 이미지가 안 좋았던 때라 풍자의 대상으로 나왔다. 그것도 3편, 4편 두 번(...)
  • 영화 《러시 아워》의 주연 배우인 크리스 터커는 실제로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인데 2편에서는 클럽에서 엉성하게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를 부르는 사람을 보고 분노하여 무대에 난입해서 마이크를 뺏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대사가 '저 명곡을 망친단 말이야!' 이 사람은 영화에서 흑인을 논할 때 잭슨 드립을 자주 친다.
  • 2001년 삼성전자 노트북 센스의 광고에 마이클 잭슨을 패러디한 가수가 김정화와 함께 춤을 춘다.
  • 2009년경에 만들어진 스타크래프트 1 유즈맵 중에 '개인 파이널 디펜스'(일명 개파디)라는 플레이어 6명이 각자 자기의 진영에서 기존의 디펜스 형식으로 게임을 하는 유즈맵이 있는데 이 유즈맵의 많은 요소들이 마이클 잭슨의 작품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배경음악과 효과음도 마이클 잭슨의 주요 히트곡들이 대부분이고 게임 도중에 나오는 적 유닛들의 이름이 'Smooth Criminal', 'Billie Jean' 등 마이클 잭슨의 대표곡들로 명명된 경우가 많다.
  • 2010년 11월 23일에 저스트 댄스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마이클 잭슨의 춤을 즐길 수 있는 Michael Jackson: The Experence 가 출시되었다. 난이도가 헬게이트급이겠군 국가별로 내용의 차이가 있는 다른 저스트 댄스와 달리 전세계 버전이 동일한 내용으로 수록되었다. 기종별로는 PS3, Wii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며, XBOX360은 키넥트의 특성상 게임성이 약간 다르다. NDS, PSP, 3DS, PS Vita, iOS 등으로도 발매되었는데, 이쪽은 동작을 감지하는 센서가 없는만큼 단순한 리듬액션게임이며 내용도 전혀 다르다.
  •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엔 그의 춤을 추는 챔피언이 네 명 있다. 탈론은 'Billie Jean' 의 문워크, 워윅좀비 브랜드는 'Thriller' 의 춤을 아지르는 Remember The Time의 춤을 춘다.
  • 카카오톡의 유료 이모티콘 중에 '댄스 스페셜'에서 Billie Jean을 오마주하는 이모티콘이 들어있다.
  • 게임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에 등장하는 해골왕 레오릭으로 /춤 을 입력하면 Thriller의 안무를 춘다.
  • 게임 용과 같이 제로에서는 키류 카즈마 파트 서브 스토리 '카무로쵸 좀비워커'를 통해 등장한다. 마이클이나 잭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라클'이라는 이름의 세계적인 가수로 나오는데, 미라클과 마이클의 영어 철자가 비슷하며, 미라클의 외모나 복장은 어디를 봐도 마이클 잭슨 패러디다. 게다가 서브 스토리 내용 역시 좀비가 나오는 뮤직비디오라는 점에서 'Thriller'의 패러디다. 그리고 이 뮤직비디오 촬영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를 패러디한 '스피닝'이라는 인물이다. 이 서브 스토리 등장 조건은 스토리 파트를 2장까지 진행하고, 서브 스토리 '키류는 프로듀서?'를 완료해야만 나온다. 이 서브 스토리 두 개까지 완료하고 메인 스토리를 5장까지 진행해 부동산 아일랜드를 활성화한 상태에서 '카무로쵸 좀비워커' 때 보상으로 검은 상자를 골랐다면 '미라클 in 마하라자' 서브 스토리에서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는 디스코 배틀을 하며, 완료하면 미라클을 부동산 아일랜드 고용인으로 영입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이 세가와 인연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노린 서브 스토리.

12. 바깥 고리


  1. [1]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함.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주길.
  2. [2] 마이클 잭슨의 프로듀서 였던 퀸시 존스가 지어준 별명인데, 이유는 마이클이 비즈니스에 관해서 매우 냄새를 잘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 [3] 5피트 10
  4. [4] 사망 기준
  5. [5] 1987년 여호와의 증인에서 탈퇴하였으나 이후의 종교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실이 알려진 바 없다. 기독교(개신교)라는 주장도 일부의 추측일 뿐 확인된 바 없으며 그저 그의 이후 종교적 언행을 바탕으로 추론한, 말 그대로 설(說)일 뿐이다. 말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한다는 설이 있었지만 루머로 밝혀졌다.
  6. [6] 링크
  7. [7] 로큰롤 명예의 전당의 5가지 헌액 카테고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이자 공신력이 인정되는 '공연자(Performers)' 명단에 한하여 기록하도록 한다. 나머지 부문의 헌액자들은 따로 문서 내 헌액명단에 수록해야 한다.
  8. [8] 모타운 레코드 시기에 마이클은 사장 배리 고디를 유심히 관찰했었고, 성인 시절에도 항상 고디의 원칙을 사용했었다. 마이클은 훗날 인터뷰에서 "배리는 완벽함과 세심함을 요구했었다, 오늘까지 나는 같은 원칙을 사용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이클의 자율성이 확대된 Bad 앨범 제작부터 가장 잘 드러난다.
  9. [9] 2010년에 재선정 할 때는 탈락했지만 ...
  10. [10] 엄밀히 정의하자면 오프 더 월이 발매된 1979년은 록 음악 팬들과 백인주의자들 때문에 다소 열풍이 가라앉았을 때였다.
  11. [11] 훗날 이 앨범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2. [12] 여담으로, Thriller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마이클에게 200만장만 팔려도 잘 팔린 것이라고 하자 마이클은 "당신들 지금 뭔 말 하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열심히 같이 제작한 것이라구요"라며 화를 내고 기분이 불쾌해져서 앨범 발매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레코드사 사장인 길 프리슨이 마이클에게 전화하여 겨우 타협을 해서 Thriller 앨범이 발매되었다고 한다.
  13. [13] 정확하게는 엘리펀트 맨의 뼈이다. 엘리펀트 맨은 심한 기형에 의해 서커스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19세기의 영국인이다. 물론 마이클이 이것을 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루머이다.
  14. [14] 약물 실험용 침팬지였으며, 이름은 '버블스'이다
  15. [15] 특히 특유의 목소리, 성형, 섹스할 것 같지 않은 무성애 이미지에 집중하며
  16. [16] 마이클은 1984년 그래미 시상식 때 퀸시가 한 개의 상도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CBS의 사장 월터 예트니코프에게 말했었다.
  17. [17] 다른 사람들은 결코 하지 못했던 퀸시 존스의 테이프에서 마음대로 가져가 수정하는 행동을 마이클이 했었다고 한다.
  18. [18] 이 기록은 후에 영국의 테이크 댓이 웸블리 8회 연속 매진에 성공하며 갱신된다.
  19. [19] 사비에서 'Demerol' 부분이 Morphine과 흡사하다.
  20. [20] 뒤에 나올 아동 성추행 논란으로 그의 이미지가 타격을 많이 입었고 음악적으로도 실패했다.
  21. [21] 마이클 잭슨의 특유의 코스튬을 다시 하고 싶다는 말
  22. [22] 아마도 비틀즈는 항상 대중음악의 선구자로 음악 산업을 이끌었다면 마이클은 Dangerous 앨범부터 다른 아티스트들이 이끄는 흐름에 참여하려 했다는 뜻인 듯
  23. [23] 버블스
  24. [24] 아마 자신이 키우는 애완동물 침팬지[23]와 관련된 것 같다.
  25. [25] 대표적으로 추가된 국가가 루마니아, 러시아.
  26. [26] CNN에 나온 한 러시아 PD의 증언.
  27. [27] 이때 곤 투 순은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화재였던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는 의미로 짧은 연설을 하고 불렀다.
  28. [28] 또한 이날 대통령부부가 공연내내 마이클잭슨에게 엄청나게 느끼한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29. [29]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가 잭슨에게 타블로이드 내용들과 연관 있는 무례하고 성의없는 질문을 하거나 도중에 대화를 중단을 하는 등의 뜻밖의 행동을 취해서 대단히 논란이 많은 토크쇼였기도 했다.
  30. [30]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펩시가 코카콜라의 판매율을 이겼다.
  31. [31] 펩시는 마이클 잭슨으로 인해 청량음료 시장에서 2%의 몫을 더 증가[30]시켰는데 이 가치가 무려 당시금액으로 1조원에 달하는 9억 4천만 달러였다.
  32. [32] 한국어 위키백과나 나무위키 이전 서술에는 조단이 Sodium Amytal라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마취제를 투여받고 거짓 기억이 심어져 성추행을 진술했다는 언급이 있으나, 이는 7월 16일 조단의 최초 진술 이후와 뒤에 있는 Pellicano의 8월 4일 상황에 대한 증언을 보면 모순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챈들러 측의 마크 토비너에서 치과 치료를 위해 마취제를 사용했음을 인정했다. 마크 토비너는 치과 치료에 모르핀 등을 사용하는 이상한 의료 방법 때문에 논란이 있었는데, 조단이 이를 빼기 위해 마취를 사용했다는 것은 드문 일이기에 가능성은 약간 남아있다.
  33. [33]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동생 자넷 잭슨의 프로듀서이다. 86년부터 06년까지 자넷 앨범 프로듀싱을 하며 이른바 자넷의 시대를 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34. [34] 당시 자넷은 반대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마돈나와 함께 Queen of Pop이라 불리며 투톱을 유지했을정도.
  35. [35] 아주 나쁜 새x이다. 하지 않아도 될 알몸 검사를 실시하고, 시종일관 마이클에게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하였다. 후에 마이클 잭슨은 히스토리 앨범의 'D.S'라는 노래로 톰 스네던을 비판한다.그런데 그 비판 내용도 "그는 냉혈한이야"가 전부다.
  36. [36] 참고로 그의 뒤를 부축해주는 노년의 흑인남성은 마이클의 아버지 조지프 잭슨이며 오른쪽의 여성은 누나 라토야 잭슨 그 뒤에 절뚝거리는 노년여성은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이다
  37. [한화] 37.1 약 7억원
  38. [38] 이 때 입은 옷은 앙드레 김이 보내준 것으로 원래 그를 전속 디자이너로 원했으나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소신이 있기에 거부한 대신에 매년 맞춤복을 보냈다고 한다. 소프트파워 그 자체인 인물의 전속 디자이너라는 것이 오히려 대한민국이란 소프트파워를 더욱 빛나게 하는데, 권력이라 본 것 아니냐란 의견도 있다.
  39. [39] 몇몇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이클 잭슨이 아닌 줄 알고 있다. 거친 목소리, 커진 어깨 등을 근거로 내새우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40. [40] 4시간
  41. [41] 마이클은 공연을 15번 정도로만 늘리려 했는데, 주최측에서 마이클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임의로 50회로 늘려버렸다.
  42. [42] 참고로 그의 사망일은 한국에서 2번째 공연을 가진 지 딱 10년이 되던 날이었다.
  43. [43] 뉴욕 타임즈는 9.11테러 같은 일이 아니면 1면에다가 대문짝만한 사진을 올리지않는다.
  44. [44] 1위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2위는 다이애나 비 그러나 레이건 시절에는 인터넷 중계가 활발하지 않았고 다이애나 시절에는 인터넷 중계가 없어서 1대1 비교는 무리라고 한다. 추모식 당일 미국 언론들의 인터넷판에 상당한 트래픽이 몰렸다고 인터넷 생중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45. [45] 래리 킹도 나왔다.
  46. [46] 다만 이번 신보는 제이슨 말라카이라는 목소리가 비슷한 짝퉁 마이클 잭슨을 가지고 대리 녹음을 했다니, 가족들은 단 한 번도 못 들어본 노래라니 등 여러 가지 증언들이 겹쳐서 잡음이 엄청나게 끼어있다.
  47. [47] 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공연 영상을 보고 마이클이 아니다, 춤을 못춘다 등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48. [48] 레이디 가가는 원래 'This is it' 투어의 오프닝을 맡기로 되어 있었다. 마이클이 신인이던 레이디 가가를 보고 자신이 직접 투어의 오프닝을 맡을 가수로 추천했다고 한다.
  49. [49] 음반 판매량은 정확한 집계가 절대 불가능하며 마이클의 음반 판매량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추정치 5억장이기에 7억 5천만은 뉴욕타임즈에서 잘못 보도한 것이다.
  50. [50]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순위는 아티스트들간의 우열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한 순위가 아니다. 순위를 보면 80년대와 90년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의 순위는 최고가 20위권~30위권대이다. 이 말은 즉슨 80년대와 90년대가 긴 록앤롤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음악적 영향력이 50~70년대 록앤롤 시대를 만든 선구자 아티스트들보다 낮다는 것으로 롤링 스톤 평론가(엄밀히 말해 다 평론가는 아니다, 롤링 스톤은 업계 관계자들에게 투표하라고 했다고 소개했었다.)들은 평가했다는 것이다. 즉 마이클 잭슨이 80년대 팝의 역사에서 음악 산업을 뒤흔든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 됐지만 그 영향력이 선대 로큰롤 선구자들과 비교하면 로큰롤 음악사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낮다고 본 것이다.
  51. [51] 이 외에도 위대한 ~ 시리즈를 몇 차례 더 뽑았는데 롤링 스톤의 이런 순위들은 당연하게도 위의 설명한 것처럼 로큰롤 역사 관점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50~70년대 로큰롤을 확립한 선구자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할 확률이 높다. 여기서 SInger는 좀 더 목소리,보컬로서의 의미를 둔 것인데 가창력 순위는 절대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52. [52] 유명한 록 평론가 robert christgau의 마이클 사망 이후 글에서 발췌
  53. [53] 뉴욕타임즈
  54. [54] 빌리지 보이스
  55. [55] 거의 모든 언론에서 언급
  56. [56] 최연소 빌보드 1위의 기록이지만 솔로가 아닌 그룹으로 낸 곡이기에 공식기록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코러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마이클 잭슨이 모든 곡을 혼자 다 불렀다.
  57. [57] 사실 이 추임새는 보컬의 리드미컬한 전개를 돕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들숨의 양을 확 늘이기 위해 사용하는 걸로 알려져있다
  58. [58] 어린 시절에 데뷔하는 아이돌 가수들은 소속사에서 목보호 차원에서 변성기 때만은 립싱크 공연을 시킨다든지 보컬 연습까지 자제시키는 경우가 흔하지만 마이클은 12세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한해도 쉬지 못하고 세계 각지로 라이브 투어를 돌았다. 미성년자 시절에 했던 콘서트만 해도 300회 정도고 프로 데뷔 이전(5살~10살)에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한 숫자까지 합치면 끝이 없다.
  59. [59] 100% 라이브 공연이 약 550회, 85% 라이브 공연이 약 100회(Bad 2차), 절반 가까이 립싱크로 진행했던 공연이 69회(Dangerous), 대부분 립싱크였던 공연이 83회(HIStory). 투어가 아닌 방송에서는 종종 립싱크를 했다.
  60. [60] 위의 영상(3분 30초 부분)을 보면 문워크도 다소 마무리가 버벅 거리고, 스핀 후 발끝으로 버티려다가 무게중심이 무너져서 비틀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처음부터 완벽하진 않았던 셈.
  61. [61] 음악은 'The way you make me feel'.
  62. [62] 대부분 실제 공연이나 뮤직비디오에선 바지 속에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한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니까 문제없이 잘해낸 것이니 일반인이 함부로 따라하지 말자.
  63. [63] 빠진지역이 있다면 추가 바람
  64. [64] 그런데 솔로투어를 보통 10회 전후, 많으면 20회 가까이 가는 다른 아티스들과는 다르게 3번밖에 안했다.
  65. [65] 현재기준으로 1달러를 1100원으로 환산할시 1375억.
  66. [66] 비록 그 때문에 마이클의 진통제 중독으로 후반기에 공연이 중단되었지만.
  67. [67] 이 당시 마이클 잭슨이 개런티로 제주도를 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도를 본 후 작은 섬 하나를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확인된 바는 없다.
  68. [68] 1차투어에서는 100% 라이브 공연을 하였다.
  69. [69] 1996년 브루나이 국왕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기념공연. 6만명의 관중을 무료로 받았다.
  70. [70] 락그룹들에게는 밀린다.
  71. [71] Bad World Tour, Dangerous World Tour, HIStory World Tour의 합산 수익금 총합은 3억9천만달러로 1달러를 1100원으로 칠경우 4290억원이다. 그런데 저 수익금들을 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여 계산할 경우 6억4천6백만달러로 7106억원이 된다.
  72. [72] 위키피디아의 투어항목을 참조.
  73. [73] 그런데 투어를 4번 밖에 안했음에도 10회전후를 진행한 다른 아티스트들과 비슷하다.
  74. [74] 보통 다른 아티스트들이 투어를 진행할때는 미국에서만 공연의 40%를 진행한다.
  75. [75] 이는 마이클 잭슨의 관중동원능력이 매우 강력하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유럽이나 아시아, 남미를 대상으로 투어를 해도 항상 전석매진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매진을 기록하지 못한 대표적인 공연은 1997년 서울에서 열린 히스토리투어인데 이때 18만명중에 9만명만 입장했는데도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관중동원기록 1위다.
  76. [76] 정확하게는 이날의 빌리진 공연의 뒤를 이어서 Beat it 뮤비, Thriller 뮤비까지 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다.
  77. [77] 원작 뮤비는 따로 있는데 중간중간 나오는 영상들이 원작 뮤비의 영상이다.
  78. [78] 항목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더 선은 마이클 잭슨 이외에도 각종 찌라시를 퍼트리기로 악명높은 황색언론이다.
  79. [79] 대표적인 곡들이 바로 <Leave Me Alone>, <Why You Wanna Trip On Me>, <Scream>, <They Don't Care About Us>, <Tabloid Junkie> 등등
  80. [80] 왼쪽의 문장은 마이클 잭슨의 곡 'Childhood'의 가사중 하나이다.
  81. [81] 실제로 인터뷰에서는 유년 시절 레코드 사 건너편에 공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곡 작업에 매진해야 했다고 한다.
  82. [82] 다행히 잭슨 측에서 따로 영상을 촬영한 것이 남아있어서 대조한 결과 악질적인 편집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잭슨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83. [83] 주변 사람들이 그를 40살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84. [84] 소송 사건 당시 법원에서 병에 들어있는 사탕을 고르는 사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소에 사탕, 껌 등을 단 것을 굉장히 즐겨 먹었다. 정작 자기 아이들한테는 절대 못 먹게 했다는 것이 함정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은 사탕이나 과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가수를 안했으면 사탕가게 주인이 됐을 거라고 한다.
  85. [85] 영화 《러시 아워 2》에서 성룡과 더불어 홍콩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 성룡이 '홍콩에서는 내가 마이클 잭슨이고 넌 토토 잭슨이야' 라고 하자 터커가 '토토 잭슨이 아니라 티토 잭슨(잭슨의 형제 이름)이야. 토토는 니들이 저녁에 잡아먹는 개 이름이구' 라는 장면이 나온다.
  86. [86] 이혼은 안한것으로 밝혀짐
  87. [87]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마이클을 위한 깜짝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는데 마이클은 생전 처음 해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즐거웠지만 동시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방에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전 종교에 얽매여있는건 아니어서 이후에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홈비디오도 나온다.
  88. [88] 최고의 최루 멜로영화로 대히트를 쳤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남우 '라이언 오닐'의 딸이다. 이들 부녀간의 관계 역시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악명높다.
  89. [89] 이 날 마이클의 표정이 굳어있는게 다이애나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많다. 다이애나 결혼 이후로 마이클은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절친 사이로 지내게 된다. 영상 속 ama 시상식 역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파트너다. 여담으로 노래 시작 전 마이클은 자신의 파트너인 리즈 여사를 챙기지만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
  90. [90] 1차 후견인은 아이들의 할머니이자 마이클의 엄마인 캐서린. 캐서린이 죽게되면 다이애나 로스가 마이클 아이들의 후견인이 된다.
  91. [91] 2017년에 세계적인 모델 에이전시 IMG와 계약을 맺고 모델로 데뷔한 것에 이어 5월에는 영화 출연까지 확정하며 배우 데뷔를 앞두고 있다.#
  92. [92] 호적상 이름은 형과 똑같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언론은 프린스 마이클 2세(주니어), 팬들과 아버지는 블랭킷이라고 부른다.
  93. [93] 원래 낳기는 10명을 낳았는데 말론과 같이 태어났던 쌍둥이 브랜든이 태어나자마자 죽어서 9명이 된 것이다.
  94. [94] 대신 눈은 엄마를 닮아 벽안이다.
  95. [95] 사실 마이클 잭슨은 학교를 얼마 못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이 도시 저 도시로 공연을 다녔던 탓도 있고 들이 교실에 난입해서 사인을 해달라는 통에 초등 과정도 다 못 마치고 개인 교사를 통해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수업과정을 들었다고 한다.
  96. [96] 알고 보면 이름이 굉장히 괴이한데 잭키 잭슨으로 한국식으로 따지면 박 박이나 최 최 같이 굉장히 희한한 이름이 된다.
  97. [97] 자넷과 마이클은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1995년에는 듀엣곡 Scream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자넷은 1993년 라토야가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했을때 인터뷰를 통해 라토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등 남매중에서 유일하게 마이클의 편에 서기도 했다.
  98. [98] 저메인은 잭슨 파이브 당시 마이클처럼 보컬이었으며 마이클이 들어오자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솔로 데뷔를 항상 원했고, 모타운 설립자 배리 고디의 딸과 결혼하며 소원 성취를 한다(...). 그리고 본인은 잭슨 파이브를 탈퇴한다. 웃긴 건 바람을 피워서 배리 고디의 딸과 이혼했으며 후에 알레한드라라는 여자 사이에서 아이를 보았으나 이후에 이 알레한드라는 랜디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또 가지는 등(...)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동서지간이 되는 개막장 사태가 일어난다. 라토야의 경우는 매니저였던 잭 고든과 연애를 하면서 플레이보이지에 누드 사진을 올리거나(미국에서 유명인의 누드 사진을 보는 시선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장짓을 일삼아 가족들과 척을 졌으며 93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 때 마이클에게 매우 불리한 증언을 언론에 대고 해서 마이클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잭 고든이 사망한 후 인종 차별주의자였던 잭 고든에게 협박, 폭행을 당해서 한 거라며 마이클과 화해했다고는 하나 당시 인터뷰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라토야는 잭슨 팬들에게 랜디와 함께 주요 까임 대상 중 하나다.
  99. [99] 라토야 잭슨은 마이클의 리즈 시절 아예 스릴러라는 컨셉으로 마이클 잭슨 분장으로 플레이보이 잡지 누드에까지 나왔다. 참고로 최악의 플레이보이 표지로 손꼽힌다. 게다가 라토야는 마이클의 인기를 이용해서 포르노까지 찍었다. 마이클 잭슨의 친누나가 촬영한 포르노라는 컨셉. 그리고 계속 그 컨셉으로 포르노 배우 짓을 하고 있으니 마이클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보통 심하게 하는 게 아니다.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비디오를 촬영하긴 했으나, 포르노를 찍은 적은 없다. 라토야 잭슨은 앞서 언급된 잭 고든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잭 고든이 그녀를 포르노에 출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으며, 플레이보이 건도 잭 고든에 의해 찍게 된 것이라고 얘기했다.
  100. [100] 사우스 파크라는 미국 애니메이션에서 '깜둥이 수술'이라는 수술이 있는데 백인을 흑인으로 바꾸는 수술이라고 나오는데 뒤에 설명에 덧붙여 마이클 잭슨이 했던 '흰둥이 수술'의 반대 판이라고 한다.
  101. [101] 그의 사진을 보면 온몸을 칭칭 감고 있거나 햇빛이 맑은 날에도 양산이나 우산을 쓰고 있는데 신분 은폐(...)를 가장한 자외선 차단법이다. 그런데 그러고 다니면 누구든지 마이클인 줄 안다. 크리스 터커의 말로는 마이클이 스파이더맨 가면을 쓰고 쇼핑몰에 가면 사람들이 '스파이더맨 가면 쓴 마이클 잭슨이다'라고 알아챈다고(...).
  102. [102] 하지만 의사들의 소견에 의하면 백반증은 보통 난치병으로 취급되며 치료가 잘 되는지는 환자마다 복불복이라고 한다.
  103. [103] 전신의 모든 멜라닌 세포를 파괴시킬 수도 있고 노출된 부위의 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
  104. [104] 다만 아예 육식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마이클이 좋아하는 것 음식 중 하나가 KFC 치킨이었다.
  105. [105] 우리가 흔히 엉덩이 턱이라 부르는 턱에 파인 홈은 적당히만 파인다면 서양권에서는 미남의 상징이다. 참고로 턱의 홈은 유전.
  106. [106] 참고로 왼쪽 사진은 2003년이 아닌 2001년이다.
  107. [107] 왼쪽이 2008년이고 오른쪽이 1988년이다.
  108. [108] 1990년대 초반에 한 기자가 '당신은 게이가 확실한가요?'라고 질문하자 마이클은 '카메라를 끄면 대답할게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기자가 카메라를 끄자 마이클은 '아니요.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 세계에는 나의 팬인 게이들이 많아요. 나를 게이로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그 분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라고 발언하였다. 정말 마이클의 대인배스러움을 볼 수 있다.
  109. [109] 뮤비를 보면 알겠지만 에디머피와 서로 장난을 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어디에서도 볼수없었던 귀여운 마이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조
  110. [110] 실제로 1981년 발매된 퀸의 앨범 the game 중 “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를 싱글커트 하라는 마이클 잭슨의 권유를 따랐는데 두 곡 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11. [111]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
  112. [112] 90년대에는 그녀에게 줄 향수를 1개 구입하는데 1만달러를 쓰기까지 했다. 다만 받기만 한 것은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마이클에게 코끼리(...)를 선물하는 등의 보답을 한다. 이 역시 의도치 않게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되긴 했겠지만
  113. [113] 이 곡은 마이클잭슨의 의지에 따라 단 한번의 공연만 이루어졌을뿐 싱글컷이나 앨범 음원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직 그 날 공연을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또 불려졌다. 마이클의 오래된 팬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명곡으로 알려져있다.
  114. [114] 마이클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아예 언급을 피하는 등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115. [115]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04년~2005년에 이미 70을 넘겼기 때문에 93년때처럼 마이클을 위하여 힘쓰기에는 너무나도 늙었기에 별 수가 없었다.
  116. [116] 이 때 마이클에게 자신이 부를 노래를 직접 쓰는 게 레전드가 되는 길이라는 걸 알려줬다고한다
  117. [117]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보면 매카트니가 이걸 설명해줬을때 마이클이 "그럼 내가 당신걸 가질수도 있겠군요?"라고 했고 매카트니는 "녀석 농담은"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118. [118] 스티비 원더는 신생아 때 시력을 잃었다.
  119. [119] 내한공연을 반대하던 여론이 있었음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에 미 뉴스위크지 와의 인터뷰에서 꼭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해줬으면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120. [120] 원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가려고 했다가 건강문제로 못 가고 대신 친필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121. [121] 가장 조회수가 많은 영상이 5억이 채 되지 않는다였으나 2018년 5월 12일 기준 Thiller의 공식 MV 조회수가 5.1억을 넘었다.
  122. [122] 최신 팝가수들은 저작권료를 중요시하느라 자신들의 공식채널에 있는 MV나 영상 아니면 다른 일반 유저들이 유튜브로 자신들의 노래와 관련된 영상을 업로드하는걸 거의 허용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단일 MV만 놓고보면 이들이 마잭보다 압도적이지만 전체 조회수는 마잭에 비해 그렇게까지 대단하지 않게 통계가 잡히는 것이다.
  123. [123] 'Thriller' 뮤직비디오 시작 전에 '이 영상은 오컬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은 자신(아마도 마이클)의 종교적 신념과 무관하다' 는 자막이 나온다.
  124. [124] 그의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5. [125] Dangerous 가사 및 해석, Heal the world 가사 및 해석.
  126. [126] 작중 주인공의 상관에게 자신을 승진시키겠다는 약속을 안지키냐고 묻는 순간 상관에게 그대로 씹혀버리는(...) 안습한 역할로 나온다.
  127. [127] 가사에 나오는 'Annie, are you okay?'는 심폐소생술(CPR) 교육 때 교육용 인형 '애니'에게 하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마이클은 CPR 라이선스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8. [128] 부다페스트헝가리의 수도다
  129. [129] 2015년 기준 한화 1조 3690억원
  130. [130] 유족들은 마이클의 초상권을 2105달러로 신고했다(...)
  131. [131] 2015년 기준 한화 8760억원
  132. [132] 이 잡지에서는 매년 사후 수익 랭킹을 10월에 발표한다. 그 외에도 아티스트의 수익 순위 등등 다양한 순위를 발표한다. 또한 축구팬들이라면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스포츠 구단의 브랜드 가치 중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위를 했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몇 년 연속 1위를 했니 바르셀로나의 1년 수익이 얼마니 하는 것들도 발표한다.
  133. [133] 출처: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2015년2016년
  134. [134] 1100원으로 단순 환산
  135. [135] 2위~12위까지의 수익을 합친것보다 많다고 발표했다.
  136. [136] U2는 2011년에 1억 9,500만 달러를 벌어들여서 마이클을 넘는데 성공했다.
  137. [137] 'Invincible' 앨범 수록곡 'Unbreakable' 의 가사.
  138. [138] 그의 곡 'Man In The Mirror' 의 가사가 이러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139. [139] 전 부인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140. [140] 당연하게도 이 발언 이후 'Invincible'은 어찌된 거냐, 당신이 돈 쓸어 담을 땐 냅스터가 없었다는 둥의 각종 비아냥에 시달리게 되었다. 위의 악성 비난 외에도 이미 4억장을 넘게 팔아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언급하기에는 부적절한 말이었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같은 년도 다른 인터뷰에서는 It is wrong to download but the answer cannot be jail 라는 식으로 말을 좀 유하게 하게 되었다. 헌데 마이클 잭슨의 80년대 전성기 때도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의 유행으로 음반 산업이 장난 아니게 타격을 입은 적이 있긴 했었다. 그럼에도 이 양반은 음반을 잘만 팔았다(...) 물론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와 현재의 불법음원 다운로드와는 규모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141. [141] 마이클 잭슨은 공식적으로만 약 197개의 상을 받았음.
  142. [142] 6살때 제임스 브라운을 처음 보고.
  143. [143] 그래미와 달리 AMA는 팬들이 직접 수상자 선출에 관여하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화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144. [144] 위어드 알 얀코빅은 1987년 마이클 잭슨의 Liberian Girl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145. [145] 스스로를 마이클 잭슨이라고 생각하는 레온 콤포스키라는 이름의 정신병자라는 설정이었다.
  146. [146] 사실 EBS 홈페이지에서도 심슨 더빙에 관한 연혁을 찾을 수 없고 웹상에서도 '일본탐험'편을 빼면 EBS 더빙 판 심슨 영상에 대한 정보가 거의 나타나질 않는다.
  147. [147] 두 번째 성추행 혐의는 03년도에 불거졌고 첫 공판이 05년도이었다.
  148. [148] 투팍도 사망 후 홀로그램 퍼포먼스가 있었다.
  149. [149] 다만 1편의 경우 너무 참여가 늦어서 딱 한 부분만 출연하고 따로 녹음도 안 해서 상술한 메가드라이브용 게임 문워커의 음성을 재활용했다. 2편에선 비중이 대폭 늘었고 녹음도 제대로 했다.
  150. [150] 다만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직접 나오지는 않고 외편 소설판인 Another Side: Earthbound에서 언급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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