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조던

마이클 조던의 주요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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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NBA 올해의 신인상

랄프 샘슨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1988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1991년 ~ 1992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1996년 NBA 정규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8년 NBA 정규시즌 MVP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칼 말론

통산 5회 NBA 정규시즌 MVP 수상.

1991년 ~ 1993년 NBA 파이널 MVP

아이재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1996년 ~ 1998년 NBA 파이널 MVP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팀 던컨

통산 6회 NBA 파이널 MVP 수상.

1987년 ~ 1993년 NBA 올해의 득점왕

도미니크 윌킨스

마이클 조던

데이비드 로빈슨

1996년 ~ 1998년 NBA 올해의 득점왕

샤킬 오닐

마이클 조던

앨런 아이버슨

통산 10회 득점왕 수상, 역대 득점왕 횟수 1위
(1987년~1993년 7년 연속 득점왕, 1996년~1998년 3년 연속 득점왕 기록.[1])

1988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마이클 쿠퍼

마이클 조던

마크 이튼

1988년 NBA 올해의 스틸왕

앨빈 로버트슨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1990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앨빈 로버트슨

1993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네이트 맥밀런

통산 3회 NBA 올해의 스틸왕 수상.

1988년 NBA 올스타 MVP

톰 챔버스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6년 NBA 올스타 MVP

미치 리치먼드

마이클 조던

글렌 라이스

1998년 NBA 올스타 MVP

글렌 라이스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
팀 던컨[2]

통산 3회 NBA 올스타 MVP 수상.

1987년 ~ 1988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스퍼드 웹

마이클 조던

케니 워커

통산 2회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조 몬타나

마이클 조던

아서 애시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써몬드

네이트 아치볼트

데이브 빙

데이비드 로빈슨

데이브 코웬스

돌프 세이즈

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

릭 베리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모제스 말론

밥 페팃

빌 러셀

빌 셔먼

빌 커닝햄

빌 월튼

샤킬 오닐

샘 존스

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

얼 먼로

엘빈 헤이즈

엘진 베일러

오스카 로버트슨

웨스 언셀드

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

월트 프레이저

제리 루카스

제리 웨스트

제임스 워디

조지 거빈

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

존 하블리첵

줄리어스 어빙

카림 압둘 자바

칼 말론

케빈 맥헤일

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

패트릭 유잉

피트 마라비치

하킴 올라주원

할 그리어

찰스 바클리

밥 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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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신발은 AIR JORDAN XX3

샬럿 호네츠 구단주

마이클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생년월일

1963년 2월 17일

국적

미국

출신지

뉴욕 주 브루클린

출신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타 힐스 (1981~1984)

신체

198cm, 98kg

포지션

슈팅 가드/스몰 포워드[3]

드래프트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역대 소속팀

시카고 불스 (1984~1993)
버밍햄 배론즈 (1994)
시카고 불스 (1995~1998)
워싱턴 위저즈 (2001~2003)

등번호

23번[4], 45번[5], 9번[6] 12번[7]

수상내역

NBA champion 6회 (1991-1993, 1996-1998)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1992, 1996, 1998)
NBA Finals MVP 6회 (1991-1993, 1996-1998)
NBA All-Star Game MVP 3회 (1988, 1996, 1998)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1회 (1988)
NBA All-Star 14회 (1985-1993, 1996-1998, 2002-2003)[8]
All-NBA First Team 10회 (1987-1993, 1996-1998)
All-NBA Second Team 1회 (1985)
NBA All-Defensive First Team 9회 (1988-1993, 1996-1998)
NBA Rookie of the Year (1985)
NBA All-Rookie First Team (1985)
NBA Slam Dunk Contest champion 2회 (1987-1988)
NBA scoring leader 10회 (1987-1993, 1996-1998)
NBA steals leader 3회 (1988, 1990, 1993)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1984 LA 올림픽 금메달
명예의 전당 헌액

1. 개요
2. 상세
2.1. 조던의 제왕적 면모
2.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3. 생애
3.1. 어린 시절과 데뷔
3.2.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악연 그리고 극복
3.3. 첫 번째 3연패, 전설의 시작
3.4.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3.5.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3.6.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3.7. 명예의 전당 헌액, 그 이후
4. NBA에 미친 영향
5. 기록
6. 플레이 스타일
7. 관련 일화
8. 이것저것
8.1. 넘사벽 인기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9]

No. 23

마이애미 히트 영구결번

No. 2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마이클 조던

헌액 연도

2009년

1988년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 선보인 자유투 라인 덩크[10]

1. 개요

{{{#FFFFFF “From North Carolina, at guard,

6'6" Michael Jordan!” }}}

The Greatest Of All Time[11]

120년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미국의 前 NBA 농구 선수로 포지션은 슈팅 가드. 現 NBA 팀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 겸 사업가.

2. 상세

별명은 Air, His Airness[12], MJ[13], Black Cat[14], GOAT[15] 등. 한국에선 농구황제, '그분', 마사장, 쪼잔왕, 미카엘 요르단, 역사상 최고의 소인배, 신발장수 아저씨(...) 등으로 불린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번.[16] 워낙 그가 유명해서 농구의 23번 하면 99.9% 조던.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넘버라고 부르기도 한다.[17] 농구인들 끼리는 암묵적으로 23번이 축구에서 10번의 상징 그 이상으로 여겨 지거나 아예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조던이 아무 의미 없던 특정 백넘버[19]에 이 정도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로는 에어 조던이 있다.

지금도 NBA를 비롯하여 전세계 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 스타.[20] 농구 그 자체 이상을 대표한다. 이걸 부정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부모님께 외국 농구 선수 한 명만 대 보라고 해 보자. 누가 나오나. NBA는 잘 몰라도 조던은 아는, 아니 NBA를 아예 몰라도 조던은 아는 그런 존재가 조던이다. NBA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두 인물 중 하나로, 나머지 한 명이 커미셔너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턴임을 감안할 때, 선수인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봐도 좋다.

미국에서는 NFL에 대적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농구도 조던이 선수로서 뛰던 시절엔 그 관심도에서 밀리지 않았고, 그를 실질적으로 NBA라는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만든 인물이다. 통산 게임당 득점이 30.1점으로 올 타임 1위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였으며[21],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 역시 역대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for the love of the game) 돈을 받지 않고 뛰어 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결과적으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불린다.

조던은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인 1990년 초에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NBA 대표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 당시부터 위성 방송으로 라이브 경기를 세계에서 비교적 싼 값에 송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들로 활발히 정보교환이 되는 시기도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에 더욱 편리한 시대였기도 했다. 매직 존슨이나 줄리어스 어빙 같은 그 이전 세대의 NBA 간판이었던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 굉장히 잘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실력.[22][23]

2.1. 조던의 제왕적 면모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24][25]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 잭슨 - 1989~1998년 시카고 불스 감독

"어떤 팀이든 간에 우열순서의 확립은 필수적이야. 우리 팀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어. 우리에겐 마이클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거지. 물론 그건 리더가 없을 때에는 상당히 어려울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NBA에서 가장 위대한 아니,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가 있었어. 모두가 그를 절대자로서 인정했고, 데니스도 마이클에게 대들지 않았어.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

스티브 커 - 1993~1998년 시카고 불스 포인트 가드

실제로 조던 본인은 제왕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소심 쪼잔왕 조던 시대의 시카고 불스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수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2014년부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스티브 커는 "연습 때 마이클이 하도 지독하게 갈궈대서 경기때는 긴장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경기보다 연습이 더 힘들었으니까. 사람들은 데니스 로드먼이 마이클한테 대들다가 쫄아서 얌전히 지낸 줄 아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애초에 로드먼은 마이클에게 대들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26][27]어떤 경기에서는 스카티 피펜이 4쿼터에 조던과 필 잭슨의 지시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포지션에서 슛을 던졌는데, 조던이 그 즉시 타임아웃을 부르고 면전에서 피펜을 호되게 질책했던 일도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 필 잭슨은 감독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감독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김수겸? 드물게도 스티브 커가 보기와는 다르게 조던에게 상당히 개긴 케이스.[28] 스티브 커 외에 스카티 피펜 역시 조던을 상대로 쫄지 않고 도전을 하는 선수였는데, 비록 조던과 피펜이 사적으로 친한 것은 아니지만 조던은 피펜을 존중했다고 한다. 반대로 성격이 유순한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이 제법 힘들게 굴었다고.[29] 1차 쓰리핏의 주전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도 라커룸에서 그간 조던한테 워낙 갈굼을 당하며 쌓인 것이 폭발해 조던의 면전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30]

2.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나는 농구를 시작한 이래 9,000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나는 거의 300번의 경기에서 졌다. 나는 26번의 경기를 결정짓는 위닝샷을 놓쳤다. 나는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광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그의 강심장)이 그의 최고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그의 강함의 비결은) 그의 정신 속에, 그의 마음 속에 있다.

You're gonna have to cut Michael Jordan's heart out to beat him. Because, people don't understand that's his greatest talent. It is in his inner gut, it is in his inner heart,

조지 칼 1992~1998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물론, 천부적인 재능과 하늘이 내린 육체가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엄청난 노력을 더했다.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천재가 노력까지 해서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특히, 이런 노력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있었다. 타인의 비난이나 태클에 지독할 정도로 집착해서 그걸 앙갚음을 해주는지라...

숱한 사례가 있었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 93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가드 제럴드 윌킨스가 경기 전에 "누구도 조던을 막을 수는 없지만, 내가 그나마 좀 잘 막았다." 라고 인터뷰한 것에 대해 43득점을 퍼부으며 친히 화답한 적이 있다. He can't guard me!
  • 1995시즌,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경기에서 그리즐리스가 4쿼터 시작 후 11:2로 앞서나가자, 그리즐리스 선수 데릭 마틴(Derrick Martin)이 마이클 조던에게 “우리가 오늘 널 박살낼 거라고 했지?(I told you that we’re gonna beat you tonight.)”라며 조롱했다. 이 말을 듣고 빡친 조던은 4쿼터 6분동안 19득점 꽂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는데, 위의 영상 3분 50초쯤 보면 경기 중 덩크를 성공시키고 밴쿠버 벤치로 가서 "입 닥쳐, 이 X만한 개자식아.(Shut up, you little bitch.)"라고 말하는게 나온다.
  • 1988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도중 훗날 불스에서 재회했으며, 절친한 사이였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가드 론 하퍼가 "그(조던)는 나를 상대론 50점을 넣은 적이 없다"며 가벼운 신경전을 벌이자 다음 경기인 2차전에서 하퍼를 상대로 무려 55점을 퍼붓기도 했다.[33]
  • 그 외에도 무톰보와의 일화로는 어느 날 라커룸에서 무톰보가 조던 면전에서 "마이클은 내 앞에서 덩크를 성공시킨 적이 없다."고 도발한 일이 있었다. 조던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하자 무톰보는 "그럼 스카티한테 물어보든가"라며 조던의 속을 긁어 놨고(...), 조던은 이를 기억해두고 있다가 92/93 시즌에 무톰보에게 인 유어 페이스 덩크를 성공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평소 무톰보가 즐겨하던 까딱까닥 세레머니를 역으로 먹이는 등 쪼잔함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 1997년 당시 시애틀 감독인 조지 칼이 조던에게 "나이 먹고 이젠 그냥 평범한 점프슈터네!" 했더니 다음 경기에서 드라이브인 하나 없이 점퍼 하나로 40점 이상 박아버린적이 있다. 특히 1쿼터 막판의 하프코트 버저비터 샷은 그야말로 압권. 사실 이 내용은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는데 조지 칼의 발언 원문은 다음과 같다. You've got michael out there looking like he could get hurt. he looks like he's protecting himself more than he has in the past 조던이 과거에 비해 부상을 경계한다는 뜻인데 안좋게 받아들이면 몸 사리네 정도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다만 어떻게 들어도 평범한 점프슈터라고 이야기 했다는 건 왜곡이다. 그리고 드라이브 인 없이 점퍼로만 40점 이상 넣었다고 하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KdNuTG1ARzo 이 영상을 보도록 하자. 레이업이 한번도 아니고 3번 이상 나온다. 즉 조던은 절대 일부러 점퍼만 쓰지 않았다. 즉, 당시 조던 플레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차 복귀 이후 기본적으로 포스트업, 페이드어웨이를 최우선으로 가져갔는데 당시 다른 경기들과 거의 비슷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20년 전의 짤막한 에피소드가 또 조던 하이라이트를 만들었다. 역대 그 어떤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이런 스토리가 정말 많다.

마음만 먹으면 꼭 그 플레이를 실현한다는게 조던 최대 강점이다. 실제 조던이 포인트가드를 보던 시즌에는 (3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 1블락) 모든 부분 초과를 찍었을 정도였다. 만약 당시 어떤 기자, 타구단관계자가 '시즌 트리플더블은 조던 이라도 무리' 라고 말했다면 분명 어렵지 않게 시즌 트리플더블을 만들었을 것 이다. 하지만 르브론, 웨스트브룩 유형의 선수들과 달리 조던은 득점력 자체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본인도 잘 알기에 무리해서 다른 부분 스탯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35][36]

이런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너무 지나쳐서 병적일 정도였다는 평까지 듣는데, 심지어 플레이오프 중간중간 쉬는 날에 도박이나 골프, 여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승부근성을 불태웠다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도박 중독(…)에 가까워 보이고, 이런저런 루머[37][38]도 무수히 많았지만 스포츠 도박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자기 자신의 본업이나 생활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 [39]

그리고 이러한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클러치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상대팀은 몇 초가 남건 2점차건 3점차건 경기 종료 직전 그가 볼을 잡았다 하면 에워싸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스스로가 클러치 타임의 플레이를 설명할 때조차 "그 순간은 나 스스로가 가장 유리하다고 느낀다" 라고 할 정도.

그의 클러치 능력이 가장 빛났던 곳은 플레이오프와 파이널 무대였다. 실제로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의 레전드들부터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현대의 위대한 선수들까지 역대급 선수들도 거의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의 팀보다 낮은 전력의 팀에게 패배하는 "업셋(upset)" 경험이 한두번씩은 있다. 그러나 조던은 1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동안 단 한번도 업셋당한 적이 없다. [40]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수비가 치열해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득점이 정규시즌과 대비해 그대로거나 떨어지는 반면, 조던은 정규시즌->플레이오프->파이널로 가면 갈수록 평균 득점이 쭉쭉 상승하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였다. 98시즌엔 정규시즌 득점이 풀시즌 기준으로 신인시절 이후 최악인 28점대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선 32.4점, 파이널에선 무려 33.5점을 기록했다.

사실 정규시즌 득점기록은 윌트 체임벌린이 대부분 앞서지만, 플레이오프에선 윌트조차 비교가 안된다. 플레이오프 득점기록을 보면 말 그대로 조던의 독무대다. 역대 플레이오프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보면 1위, 공동 3위를 포함해 상위 10위까지의 기록중 딱 절반인 5개가 조던의 기록이다.[41] 플레이오프때60점을 넘긴 유일한 선수가 조던과 엘진 베이러뿐이며 [42] 현대 50점을 넘긴 횟수만 봐도 조던 8회, 윌트 체임벌린 4회, 앨런 아이버슨 3회, 제리 웨스트 2회이다. [43] 누적기록의 경우 조던이 179경기밖에 뛰지 않아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진 않다. 2017 플레이오프에 르브론 제임스가 조던을 제치고 역대 1위에 올랐을 정도. 하지만 평균에선 33.4점으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역대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평균이 30점이 넘는 선수로 다른 정상급 득점원들(제임스 28.4점, 제리 웨스트 29.1점, 케빈 듀란트 28.8점 등)과는 말 그대로 '''단위가 다르다. 게다가 듀란트, 제임스 등은 현재 커리어 중반이라 은퇴할 때쯤 되면 평균이 더 떨어질 게 확실시되므로... 사실 현 상위 5인 중 210경기 미만으로 뛴 유일한 선수가 조던일 정도로 적게 뛴 선수였음에도, 20년 가까이 통산 기록 1위를 기록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평균이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외로 NBA 파이널 1경기 역대 1위는 조던이 아닌 엘진 베일러가 갖고 있는 61점 기록이다. 조던은 55점으로 릭 베리와 함께 공동 2위. 그러나 다른 기록들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그가 93파이널에서 기록한 평균 41점은 당연히 역대 1위이고, 연속 20점 이상 경기 (35경기)와 연속 40점 이상 경기(4경기)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연속 30점 이상은 엘진 베일러가 보유)위에 언급됐듯 조던은 4경기 연속으로 40점을 넘겼는데, 그 외에 한번이라도 연속 40점을 기록한 선수는 웨스트와 샤킬 오닐 뿐이다.

조던의 플레이오프 통산 평균은 33.4점, 파이널 평균은 33.6점으로 다른 선수들이 근접조차 못하는 압도적인 1위이다.

이러한 경쟁심과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서 상대 선수와 팬들의 기를 압도적인 플레이와 트래쉬 토킹으로 죽여버리곤 했다. 일례로 애틀랜타 호크스, 마이애미 히트 등에서 뛰었고, 1994 캐나다 농구월드컵 드림팀 2기의 일원이었던 스티브 스미스와 매치업 했을 때, 조던이 경기중 갑자기 '38'(Thirty eight)을 흥얼거렸다. 스티브는 영문을 몰라 "너 뭐하냐?" 했는데 곧 '36'... '34'... 그렇다, 그날 조던의 목표 득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달성했다.[44]그 외에 "나 오늘 50점 정도 넣을 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어 낄낄"(...) 실제로 조던은 당대 최고 트래쉬 토커였던 게리 페이튼과 버금가는 트래쉬 토커였다.[45][46] 이렇게 보면 정말 어그로 투성이인 인물이지만, 실력이 너무도 아득해서 상대팀 팬들조차도 욕을 퍼붓다가 그가 플레이를 펼치면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지와의 악연도 유명한데 자기 야구선수 시절 악평을 했다고 93년부터 지금까지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50세 생일날 표지는 허락했지만 인터뷰는 거부했다고(...).

2013년 2월 17일 50세 생일을 맞아서 이런저런 칼럼이 전 세계에서 폭주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면 조던의 경쟁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애환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던의 모습을 보고 싶은 팬이라면 추천.1편2편3편

3. 생애

3.1. 어린 시절과 데뷔

NCAA우승을 확정짓는 위닝샷을 날린 UNC신입생 마이클 조던[47]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소도시인 윌밍턴[48]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보냈다.[49] 그는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이 되어 1군팀(Varsity)에 뽑히기를 기대했으나 당시 178cm의 그리 뛰어나지 않은 선수였던 조던은 1군 선수 선발에서 탈락했고, 코치는 201cm의 키를 가진 동급생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를 주전선수로 발탁했다.[50] 그리고 조던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당한 좌절감과 질투심에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라고도 전해진다. 결국 1년을 기다려 선발된 그는 점차 키가 커지고 실력이 늘기 시작, 결국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들어간다.[51] 참고로 고교 시절 조던을 탈락시킨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 후로도 심심찮게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내가 탈락시킨 것은 지금의 조던이 아니었다.. 특히 키가.." 를 시작으로 왜 탈락을 시켰는지에 대해 변명해야 했다. 지못미. 참고로 리로이 스미스는 NBA에선 뛰지 못했지만 프로 농구선수로서 여러 리그에서 뛰었다. 다만 프로 경력자체는 그리 길지 못했다.

재미있는 점은 조던이 원래 가고 싶어했던 대학은 UNC가 아닌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NC스테이트 울프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NBA에서 내로라하는 덩커였던 데이빗 '스카이워커' 톰슨을 좋아하던 조던은 그의 모교인 NC스테잇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조던에게 NC스테잇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 조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딘 스미스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한 덕에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조던의 입학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당시 조던이 사인한 입학 서류를 대학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로 마이클 조던이 졸업 후 몇년 뒤인 1988년에 모교 체육관을 찾아서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순찰 중이던 체육관 직원이 조던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신입생이던 1982년 그는 패트릭 유잉이 뛰고 있던 조지타운 대학을 상대로 한 NCAA 결승전에서 결승 점프슛을 터트려 일거에 전국구급 스타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올해의 대학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때의 추억이 가슴 깊이 남았는지, 그는 프로진출 후에도 저지 밑에 UNC시절 입었던 스패츠를 같이 입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럼 한 벌을 해질 때까지 입는거냐'고 생각하는데(실제로 '스페이스 잼'에 출연했을 때 벅스 바니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때 입었던 스패츠를 계속 입은 건 아니고 프로 데뷔 후 스스로 부진하다고 느꼈을 때 학교에 가서 왕창 구매해서 계속 돌려 입었다고. 조던이 가진 몇 안되는 징크스중 하나. UNC museum의 조던 관의 비디오를 보면 조던이 "I've always worn UNC shorts, I can't go anywhere whithout having them on, No matter how successful I become, you know, it all started at UNC"라고 말하는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1984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참가, 3순위로 시카고 불스의 지명을 받아 시카고 불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해 마이클 조던은 신인왕과 ALL-NBA 세컨드팀에 뽑혔다. 1984 LA 올림픽 농구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때 1위는 휴스턴 로키츠가 지명한 센터 하킴 올라주원 이었고, 2위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지명한 샘 보위라는 센터였다. 당시 포틀랜드는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레전드 슈팅 가드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드를 지명할 생각이 없었던 포틀랜드의 지명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법 했으나,[52] 그 후 샘 보위가 부상으로 몇 해 뛰지 못하고 은퇴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역사에 손꼽히는 바보같은 결정 순위에서 항상 1순위로 꼽히고는 한다. 일명 Sam bowie Picks. 안습. 그리고 포틀랜드는 23년 후 비슷한 짓또 한다. 참고로 1984 LA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인디애나 대학의 바비 나이트 감독이 포틀랜드 프론트에게 조던을 추천했는데 우리는 센터를 뽑을꺼라고 하니깐 "조던을 센터로 쓰면 된다"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던과 드렉슬러가 커리어 동안 보여주었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두 선수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드렉슬러는 큰 키로 인해 SG라기 보다는 SF에 더 가까운 선수였고 두 선수 모두 득점은 물론이고 리딩, 리바운드, 수비까지 수준급 이상이었던 선수고 (물론 수비같은 경우 차이가 많이 난다) 조던은 89시즌엔 포인트 가드로 출장하며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두 선수의 엄청난 실력과 겹치는 스타일을 생각하면 동시에 기용하는게 낭비기 때문에, 만약 이때 조던이 뽑혔다면 훗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코비 브라이언트 케이스처럼 드렉슬러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바보같이 조던 트래이드하고선 나중에 후회하거나

다음해엔 발바닥 부상을 당해 대부분을 날렸지만 이후 조던은 독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질로 거듭났다. 그리고 플레이오프때에 복귀하여 래리 버드가 버티고 있던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혼자 63점을 퍼붓는 기록을 남겼다.[53] 63점은 역대 플레이오프 1경기 최다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아무리 막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잡아 끌어도 슛을 성공시키는 조던의 플레이에 질린 래리 버드는 경기 후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다(I think it's God disguised as Michael Jordan)"라는 농구계에 길이 남는 명언을 남겼다. 1차전때 49득점, 2차전때 63득점을 넣었고 게다가 그 과정이라는 게 위에 썼듯이 못 막을 움직임을 통해 따돌리고 넣는게 아니라 아무리 막고 잡아당겨도 결국 뿌리치고 슛을 넣으니...(더군다나 당시 86년 셀틱스 팀은 그 해 NBA 챔피언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팀 중 하나로 길이 회자되는 팀이었다) 경기 자체는 2차 연장 접전 끝에 135-131로 보스턴이 이겼지만,[54] 조던이 보스턴 측이나 농구계 전반에 준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조던이 3차전에는 77득점을 올리는게 아니냐하는 반농담성 예측까지 하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이상하게도 버드의 해당 코멘트가 비꼬는 말이거나 정신승리라는게 국내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마치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그런 시각이 전혀 없다. 참고로 당시 버드의 인터뷰 전문은 "마이클이 우리한테 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가 막힌 선수였습니다. 그냥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았습니다."이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으면 여기서 확인해보자. 앞뒤 문장을 살펴봐도 비꼬는 발언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런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기 팀이 이겼으니, 김응용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구의 신"이라고 불렀다는 얘기처럼(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 항목 참조.) 결과적으로 자기 팀을 띄우는 발언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이 때 버드의 인터뷰는 순수하게 조던의 엄청난 기량에 감탄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참고로 이때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대해 얘기하면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는데, 1년 후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 패하고 "매직은 내가 본 최고의 선수였다"고 할 때도 이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뷰했다. 버드가 이빨이 상당히 신랄하기로 유명한 선수긴 했지만 그렇다고 융통성 없는 양반은 아니었다.[55]

당시 매직vs버드 라이벌리를 통해 NBA의 양대 왕조로 군림하던 셀틱스나 레이커스를 포함해 대부분 농구인과 관객들 대부분이 스타플레이어 1명의 득점보다는 전체적인 팀 밸런스를 맞추는 공격과 수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득점왕은 이기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셀틱스나 레이커스나 스타플레이어 집합소였다는건 일단 제끼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그랬었지만 조던의 우승 전까지 매번 나오는 말 또한 "득점왕은 우승할 수 없다"였을 정도. 물론 조던은 이런 인식을 박살내고 양자를 공히 독식함으로써 그를 따라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조던을 죽입시다 조던은 나의 원수 실제로 조던 이후로도 득점왕과 챔피언을 독식한 건 샤킬 오닐 1명, 그것도 한 시즌뿐이다.

계속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을 겪으며, "혼자만 아는 선수이고, 득점왕은 팀을 우승시키지는 못한다"는 악평을 많이 듣던 중 1988년 필 잭슨감독과 텍스 윈터스 코치를 만나고, 그들이 도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로 인해 그의 공격 부담이 줄고 조던도 그 영향을 받아 팀플레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필 잭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1989년이고 (그 전에 1년간 코치로 재직.) 텍스 윈터가 코치로 부임한 것은 1985년이다. 잭슨 이전에 불스의 감독은 덕 칼린스였는데 당시 그는 윈터와 팀전술을 두고 의견충돌이 있어서 윈터가 사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스 구단은 오히려 윈터의 사임을 만류하고 칼린스를 해임하면서 잭슨을 감독으로 올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격방식은 좋게 말해 스윙 오펜스, 나쁘게 말하면 '조던에게 공을 줘!'. 실제 배드 보이즈 라고 불리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승리한뒤에 덕 칼린스는 "우리의 전술은 하나다. 조던한테 공 주고 다 꺼져(...)" (그래서 조던 룰 만나니 쩔쩔...) 물론 에이스 대접은 당연했고 그 때문인지 조던은 처음에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도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일단 반강제로 조던을 납득시킨 후[56] 시켜보니, 자신이 집중견제를 덜 받고 부담이 덜 가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즉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반강제로 도입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던과의 합의하에 도입한 것이다. 필 잭슨의 첫번째 자서전 Sacred Hoops를 보면 당시 조던이 본인의 공격부담을 줄일 수 있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흥미를 가졌다고 나와있다. 막말로 당시 조던의 팀내 입지는 윈터 코치나 잭슨감독보다 훨씬 높았다.[57] 서구권 프로스포츠, 특히 미국 프로스포츠의 경우 유난히 그런 경향이 강하다. MLB에서도 선수가 감독에게 고성을 지르는 경우는 흔한 수준.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선수가 감독보다 훨씬 돈을 많이 받으니 입김이 센 것도 이상하진 않다. 지금도 선수와 감독이 트러블을 겪을 시 웬만한 거물이 아닌 이상에야 감독이 짤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초짜 감독과 지금만큼의 명성은 없었던 윈터 코치를 조던이 싫어한다? 광속으로 짤렸을 것이다. 동양권에서야 감독 권한이 절대적인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감독은 가차없이 날려버린다. 감독이 뭐라고 하자 추신수가 면전에서 받아쳐서 논란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듯. 뭐 축구화로 베컴 머리를 맞춘 퍼거슨 같은 케이스도 있지만, 퍼거슨은 거물 중의 초거물인데다[58] 베컴이 흥분해서 퍼거슨한테 욕을 해 벌어진 일이다. 루니도 퍼거슨이 심하게 갈구면 화나서 받아쳤다고 하니, 확실히 문화가 다른 것. 우리나라에서 선수가 감독한테 욕을 하거나 말대답을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

3.2.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악연 그리고 극복

당시 조던과 신생강호로 거듭나고 있던 불스를 가장 괴롭힌 것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이른바 배드 보이즈였다. 강력한 팀워크와 수비, 거친 플레이로 악명과 명성이 동시에 높았던 디트로이트는 조던 외에는 사실상 별볼일 없던 1980년대 후반까지의 불스를 상대로 이른바 "조던 룰"을 적용해 불스를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스는 1989년에 이 해 우승을 차지한 피스톤즈에게 2패를 안기며[59] 선전했고, 90년에는 7차전까지 끌고 갔지만, 알 수 없는 두통으로 슛 10개 쏴서 1개 성공시킨 피펜과 17개 던져서 3개 넣은 그랜트 덕분에 아쉽게 패하는 등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에도 썼듯이 조던 룰이란 맨투맨을 가장한 사실상의 지역방어로한 선수에 대한 집중 수비로[60], 역사상 가장 더티하고 악명이 높은 수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술은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는 선수가 조던이 공을 잡고 중앙으로 돌파해오도록 유도하면, 주변의 수비수들이 조던을 둘러싸면서 거칠게 막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비슷한 전술로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정환을 상대로 한 4대1 전술, 그리고 200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가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한 걸 들 수 있는데, 이 전술들보다 조던룰이 더 극악했던 것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BA는 신체접촉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수비수가 핸드체킹(손으로 밀고 당기면서 공격수를 견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2000년대 농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도를 지나친 신체접촉에 주는 파울로 플래그런트 1을 두번 받으면 퇴장, 2를 받으면 즉시 퇴장이다. 90년대에 도입.)을 받을 만한 것도 그냥 파울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한 팀이 작정하고 한 명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막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른 선수들은 프리가 된다. 그렇지만 1989년까지의 불스의 안습한 선수진으론 어차피 도움이 안됐기 때문에 조던만 막은 것.

조던 룰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1989년으로, 이듬해에는 본격적으로 성장해 위협이 되기 시작한 스카티 피펜까지 거친 수비의 대상이 된다.[61] 조던룰이 얼마나 효과가 좋았는지는 수치로도 증명이 된다.

1989년 당시 조던은 정규시즌에서 32.5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와 필드골 성공률 53.4%를 기록했다. 또 플옵 1, 2라운드에서는 37.5점 8.3어시스트 7.8리바운드 53.4% 성공률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즌을 치르는 동안에 소모된 체력과, 플레이오프에서 더 강력해진 상대의 수비 때문에 기록이 정규시즌에 비해 떨어졌던 반면에, 조던은 커리어 대부분의 기간동안 플옵에서 정규시즌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해 피스톤즈를 상대로는 29.7점 6.5리바운드 5.5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특히 필드골 성공률이 46%에 그쳤다.

또한 1990시즌에는 더 심한데 정규시즌에는 33.6점 6.3어시스트 6.9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2.6%를 기록하고, 플옵 1, 2라운드에서는 40.2점(!) 7.2어시스트 7.2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4.4%를 기록한 괴물이 피스톤즈 전에서는 32.1점 6.3어시스트 7.1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46.7%에 그친다. 근데 플옵 시리즈 내내 32점 넣고 실망스럽다는 말도 조던 아니면 안나오지.[62]

디트로이트의 피지컬한 수비에 지친 조던은 1989년 패배 이후 개인 트레이너 팀 그로버를 고용해 벌크업에 나선다. 그 전까지 조던은 근육을 늘리면 스피드가 떨어질까봐 근육 트레이닝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스톤즈의 거친 플레이에 맞서 파워를 키울 필요성이 워낙 커졌고, 이에 그로버는 파워를 늘리면서도 운동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조던을 설득했다. 실제로 90시즌 이후에도 조던의 운동능력은 리그 최정상급을 유지했다.

이런 조던의 개인적인 노력에다가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 등이 본격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더해지면서 결국 아이재아 토마스를 필두로 한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들의 집요한 견제를 가장한 폭력을 특유의 근성으로 헤쳐나간 결과 결국 그는 90-91시즌 디트로이트를 4:0으로 스윕하고 결승전에 진출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 시카고가 플레이오프에서 디트로이트를 맞아 2승 4패 - 3승 4패 - 4승 0패로 성적이 한 계단씩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준 점이다. 조던이 지금까지 신화적인 선수로 남아있는 데는 결국 자신의 힘을 키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는데, 배드 보이스는 분명 그 어려움 중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조던은 훗날 피스톤즈에 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언제까지 악의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없잖아요. 어쨋든 디트로이트에서 그 커다란 벽을 넘치 못했으면 여섯 번의 우승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던데 피스톤즈가 큰 영향을 주었음을 인정하였다.[63]

여담으로, 4차전은 디트로이트에서 펼쳐졌는데 경기가 기울자 토마스 등 디트로이트 주전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기장을 빠져나가버렸다. 대개 지는 팀에서 주전선수를 벤치에 앉히더라도 경기종료 후 상대방 팀을 축하해 주는 것이 매너인데, 심지어 상대방 팀 벤치 앞을 가로질러서 가버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를 까는 사람들이 있으며 아이재아 토마스도 "저때 저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랬다."고 항변하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어쨌든 바른 행동(high road)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64]

이외에도 조던이 처음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때 토마스가 같은 팀원들과 작당해 "조던에게 공을 주지 말자."고 따돌렸다는 풍문도 있으며[65], 꼭 그 설이 아니더라도 조던과 토마스는 원수까지는 아니라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이는 결국 드림팀 1기가 조던을 주축으로 꾸려지게 되면서 토마스가 드림팀에 승선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3.3. 첫 번째 3연패, 전설의 시작

“Bulls First Three-peat”

90-91년 시즌 매직 존슨이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4:1로 꺾고 불스에 우승컵을 안겨주며 MVP에 오르게 된다. 락커룸에서 우승컵을 소중히 껴안고 펑펑 우는 조던의 모습이 공중파를 타며 모두가 '저놈도 인간이었군' 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66]그런데 파이널에서 중요한건 그 유명한 포인트 가드 매직 존슨과의 대결이었는데, 조던은 득점욕심만내는 선수가 아니라는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진 모르겠지만 평균1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물론 그래놓고 득점은 평균 31점이나 했으며[67] 수비에선 매직 존슨의 주 매치업이었다. [68]

첫번째 우승. 91-92시즌에는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끈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4:2로 꺾고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 경기 1차전에서 조던은 3점슛 6개를 성공시켜 결승전 기록을 남겼다. 여섯 번째 3점슛을 성공시키고 본인도 믿을 수 없다는 듯[69][70]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어깨를 으쓱하는 장면이 이 시리즈의 대표 장면이었다.

92-93시즌에는 그 해 최고승률을 세운 찰스 바클리피닉스 선즈를 4:2로 꺾었다. 이 시리즈에서 조던은 평균 41점을 기록했다. 특히 4차전에서는 55점을 기록했다(아래 영상 항목에 하이라이트가 있다). 6차전 4쿼터에서는 질식수비로 막힌 팀의 모든 득점(9점)을 넣으며 팀을 끌고 갔고, 마지막에 조던-피펜-골밑의 그랜트-외곽의 팩슨으로 이어진 패스를 통해 역전에 성공했다. 이 장면은 슬램덩크권준호의 과거회상(...) 3점슛이 오마주했다는 의견도 있다.

또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미국 농구 대표팀, 소위 말하는 드림팀의 제 1회 멤버로 참여, 상대팀과 평균 점수차를 40점 내면서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는 세계 농구계가 지금처럼 평준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대표팀은 문자 그대로 넘사벽. 상대편 선수들조차 기념촬영에 더 의미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경기 종료 직전에 기념촬영을 위해 타임아웃을 부르기도 했다나. 또한 경기 도중에 매직 존슨에게 파울을 한 선수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3.4.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그러나 93년, 그의 멘토였던 아버지가 노상강도를 만나 사망한 후 조던은 크게 상심하여 농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조던의 제2의 인생으로 결정한 것은 야구였다. 원래 유년기에 농구와 야구를 두고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을 정도였고, 사별한 아버지 역시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조던에게 야구선수로서 소질이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1994년 2월 1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스프링캠프 훈련에 참가함으로써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왜 하필 화이트삭스냐 하면 불스와 구단주가 같았기 때문.

그러나, 은퇴 전해에 조던은 고액의 도박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또 마피아들이 피닉스 선즈에 돈을 걸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엮여 그의 아버지가 분노한 마피아에게 보복살해 당했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다만 이것은 리그 최고의 선수가 최전성기에 갑자기 은퇴하는 너무나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71] 때문에 떠도는 음모론에 가깝다. 현실적으로 보면 조던 아버지의 살해 사건은 범인들도 명확히 드러났고 이들은 모두 형사처벌을 받을 정도로 단순한 (사건 구성면에서만 보면) 사건이었다. [72] 결정적으로 조던이 만약 협박 때문에 은퇴한 것이었다면 이들이 조던이 은퇴 후 복귀하는 것을 묵인했을까? [73]

당시 조던은 도를 지나친 미디어의 광란에 가까운 관심, 자신에 대해 높아지는 기대감, 이미 리그 최고의 자리에서 몇년간 지난 매너리즘에 지쳐 아버지 사망 전부터 필 잭슨과 은퇴에 대해 논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자신의 멘토인 아버지[74]가 사망하자 충동적으로 은퇴해버린 것이다.[75] 은퇴하자마자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즐기던 야구를 하기 시작한 것만 봐도 이 결정이 감정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쉽게 말해 조던은 다른 사람들이 중년에 겪는 mid-life crisis를 모든 것을 이룬 직후인 30세에 겪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2014년 9월 14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유명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짐싸, 마이클!"편 표지. [76]

어쨌든, 마이너리그에서 뛰게 된 야구선수 조던을 취재하기 위해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250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훈련 후 화이트삭스 산하의 더블A팀인 버밍햄 베론스로 배정됐다. 여담인데 당시 베론스 감독이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었다. 그 당시에는 듣보잡 감독이었지만 알다시피 훗날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 되어 2004년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버리며 전설이 된 그 감독이다.

조던의 마이너리그 데뷔전에 1만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마이너리그 치고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경기성적은 좋질 못했다. 첫 경기에서 삼진 2개와 파울플라이 1개를 기록했고, 다음 경기에서도 여전히 안타는 없었고 수비 에러까지 나왔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저조한 성적이 계속되자 "에어 조던이 아니라, 에러 조던", "짐 싸, 마이클!" 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농구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조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썼다.[77] 노력의 결과인지 4월에는 1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7월엔 생애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시즌의 마지막 3주 동안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을 마친 뒤 애리조나에서 가을 리그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타율은 .251로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로, 조던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샘 스미스는 메이저리그 구단 관계자들을 인용하며 조던이 다음 시즌에 메이저로 콜업될 확률이 높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실제로 저 나이까지 마이너에 있는 유망주들의 경우 사실상 메이저 진출 확률이 없어지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조던의 경우 고등학교 이후 안하던 야구를 다시 한 지 1년도 안되어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기 때문에 특유의 운동신경과 승부근성, 노력을 생각하면 추후 성장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조던을 영입하면서 얻게 될 어마어마한 마케팅 특수를 생각하면...

1994년 마이너리그 시즌 결과

경기

타율

출루율

장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볼넷

도루

도루자

삼진

에러

127

.202

.289

.266

88

17

1

3

51

51

30

18

114

11

이때까지만 해도 희망적인 분위기로 다음 시즌을 기대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졌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파업은 232일이나 지속됐으며 90년만에 월드시리즈조차 치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로 치닫고 만다. 결국 1995년 3월 5일 조던은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년 26일만에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이때 조던은 단순한 파업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종의 캐스팅보트를 쥔 선수이기도 했는데, 95시즌 개막 전에 연방법원으로부터 승인된 대체선수(replacement player)의 존재 때문이었다. MLB 선수 노조가 시즌 참가를 거부하자 리그는 마이너리그 및 다른 리그 선수들을 동원해 스프링캠프와 정규시즌을 치르려고 했고, 당연히 노조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실제로 백명이 넘는 마이너 선수들이 대체선수로 콜업되었다[78]

그런데 마이너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었다. 조던은 메이저 경험이 없는 노땅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Harris Poll의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전 종목을 통틀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고 웬만한 메이저리그 스타들은 씹어먹는 티켓파워를 자랑했다. 이 때문에 조던은 대체선수 1순위였다. 실력 자체도 메이저를 노려볼 정도로 올라왔는데, 인기는 다른 마이너 선수들과 넘사벽이니 당연했다.

그러나 조던은 선수노조 편에 서겠다고 말하고는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프링 캠프를 이탈해버린다.[79] 조던은 단순한 마이너리거 중 하나로 여겨지길 바랬지만,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운동선수였던 만큼 이는 불가능했다. 선수노조와 구단주 양측에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 마당에 조던이 원래 목표했던 것처럼 순수히 자기 실력으로 얻어낸 메이저리그 진출은 불가능해졌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대체선수로서 메이저리그에서 뛰며 구단주들의 광고판으로 활용되거나 2.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에 동참하며 신체적 전성기를 하릴없이 보내거나.

결국 조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 것.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가 활약하던 시절 마이너리그는 조던을 보고자 관중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가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 받은 연봉은 겨우 1만 달러였다고. 하지만 그는 배런스 구단에 당시 최고급 버스까지 사다주었는데 버스에는 바텐더 석까지 달려있고 티브이만 6대나 달려있었는데 56만 달러를 주고 사와선 팀에 아예 기부해버렸다.[80]

그리고 한통의 팩스가 도착한다.

마이클 조던의 “I‘m back” 팩스 화면 [81]

전세계의 농구팬들은 열광했으며, 그렇게 조던은 농구판을 떠난지 정확히 2주년만에 농구 코트에 복귀했다. 단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유니폼 등번호는 ’23번‘이었다며, 조던은 이를 기리기 위해 더이상 23번 유니폼을 입지 않기로 결심했다면서 45번을 달았지만...

그리고 1995년 3월 19일, 조던은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했다. 비록 복귀전에서 조던은 19점(FG 7/28, 25.0%)으로 부진했지만, 복귀 후 다섯 번째 경기에서 55점을 폭발시키며 팀 승리를 주도, '농구황제'의 부활을 알렸다. 그래도 그간의 연습 부족과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아[82] 결국 동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올랜도에게 패배한다. 상대 선수가 조롱조로 "23번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자 몰래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까지 했다. 45번 유니폼을 무진장 찍어내었던 리그에서는 재고를 떠안는 사태를 막기 위해[83] 매 경기마다 천만원대의 벌금을 물렸지만 조던은 꿋꿋이 그걸 입고 나왔다. 하긴 뭐 돈이 모자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떡실신당했다. 닉 앤더슨에게 마지막에 중요한 스틸을 당했고, 현역때처럼 마지막 슈팅 찬스를 맡겼지만 손발이 맞지 않아 날려버렸다.

3.5.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복귀 후 치른 플옵 시리즈에서 올랜도에 패배를 당한 이후 와신상담한 조던은 신인시절보다 더 빡센 트레이닝을 거쳤다. 당시 연습에 대해 "전쟁이었다"는 후문이 전해질 정도. 95-96 시즌, 팀은 FA로 이적한 호레이스 그랜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시 감독과의 불화로 팀에서 겉돌고 있던 샌안토니오 스퍼스데니스 로드먼을 영입한다. 당시만 해도 로드먼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걱정과 주전 라인업이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냐 하는 우려가 많았지만, 이 해 이들은 72승 10패라는 당시 NBA 역대 최고 승수를 기록[84]하였다. 조던이 득점왕, 로드먼이 리바운드왕에 토니 쿠코치가 식스맨상을 수상했고,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조던, 피펜, 로드먼 세 명이나 올라가기도 했다.

이 해 파이널에서 만난 것은 숀 켐프게리 페이튼이 이끌던 시애틀 슈퍼소닉스였는데, 당시 조던은 등 부상을 입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으며 평균 득점도 가장 낮았다.[85] 그럼에도 3연승 이후 두 경기 내주고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 우승한다. 조던이 우승을 결정지었던 파이널 6차전은 아버지의 날에 펼쳐졌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공을 껴안고 코트에 쓰러져 흐느끼는 조던의 모습은 그의 하이라이트 중 빠지지 않는 장면.[86] 관중들이 MVP 챈트를 하는 가운데 조던은 "아버지께서 보고 계실 거다. (이 승리를) 아버지께 바친다(I know he's watching. This is for dad)"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96-97시즌에도 69승 13패라는 고승률을 거두며[87] NBA 파이널에 진출, 1997 NBA 파이널에서 칼 말론존 스탁턴이 이끄는 유타 재즈를 상대하였다.

불스 홈에서 열린 1차전부터 양 팀은 박빙의 접전을 벌였는데, 4쿼터 종료 직전 82-82 동점상황에서 칼 말론이 중요한 자유투를 얻게된다. 이때 칼 말론의 절친한 친구 스카티 피펜이 슬며시 다가와 말론의 별명이 우편배달부이고 경기가 열리는 날이 일요일이라는 점을 이용해 "우편배달부는 일요일에 배달하지 않는다고~(The mailman doesn't deliver on Sundays)"라는 트래쉬 토크를 날렸고, 거기에 흔들렸는지 말론은 자유투 2구를 모두 놓치며 동점 상황이 유지되었다. 그리고 불스의 작전타임 후 마지막 공격에서 조던은 간단히 미들 점프슛 게임위닝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며 팀에게 승리를 안긴다. 버저비터 성공 직후 당연하다는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오른주먹을 불끈 쥐는 장면은 많이 회자되고 있다. 2016년 현재 기준으로 NBA 파이널에서 게임 위닝 버저비터가 나온 것은 이 경기가 마지막이다. 이후 불스가 2차전 홈 경기마저 잡으며 2:0으로 앞서가지만 재즈 홈으로 장소를 옮긴 3,4차전에서 재즈가 반격에 성공하며 시리즈 스코어 2:2로 균형이 맞춰졌다. 역시 재즈 홈에서 열리는 5차전이 시리즈의 분수령이 되는 상황.

이 해 파이널 5차전은 일명 Flu Game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던이 유니폼도 제대로 입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독감에 걸린 채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88][89][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록은 38득점, 7리바, 6어시, 3스틸, 1블록에, 동점 상황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슛까지 성공시켰다. 아픈 인간이 웬만한 농구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하기 힘든 기록을 냈다. (...) 더욱 더 대단한 것은 기사나 경기 전 영상에는 조던의 컨디션이 분명 개판인 게 눈에 보였고, 플레이 중 쉬는 시간에는 분명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때 플레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몸이 확실히 무거워 보인다. 공격할 때도 날카로운 돌파보다는 중, 장거리슛에 의존하는 성향도 있었다. 실제로 조던의 평상시 파이널 평균인 33.6점에 비하면 이 경기 기록은 그냥 평타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필드골 성공률도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조던은 투혼을 불사르며 경기를 승리로 이끈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만약 다른 선수가 결승전에 38-7-6에 위닝샷을 성공했다면 역대급 MVP 활약이라고 칭송받았을 정도의 기록인데, 이것을 명백히 아파 보이는 선수가 하니 다들 감동한 것. 어찌되었건 당시 조던은 경기 시작 전부터 땀을 비오듯 흘리고 벤치에 앉기만 하면 수건을 덮고 정신을 못 차리는 등 최악의 컨디션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5차전 승리로 우세를 잡은 조던과 불스가 6차전까지 따내며 우승반지를 차지한다. 6차전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조던은 스티브 커에게 "나에게 더블 팀을 들어오면 패스할 테니 준비해라"라고 말하고, 말한 그대로 경기종료 8초 전 커를 막고 있던 스탁턴이 조던에게 더블팀을 들어오자 조던이 커에게 패스, 커가 자유투라인에서 점프 슛을 성공시킨다. 둘의 사이가 상기한 대로 썩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이 된 97-98 시즌, 1998년 파이널 상대는 유타 재즈였지만, 선수들의 노쇠화와 필 잭슨 감독과 제리 크라우스 GM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홈 코트 어드밴티지는 유타 재즈의 것이었다.[91] 평균연령이 리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들던 불스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래리 버드 감독과 레지 밀러가 이끈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만나. 4차전에서 레지 밀러에게 역전 3점슛을 얻어맞고 지는 등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올라왔다. 반면 상대였던 유타 재즈는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4-1,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4-0으로 승리를 거두고 푹 쉬어 체력 충전까지 완전히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92]

결국 1차전을 연장 끝에 88-85로 패해 체력소진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가 했지만, 이후 내리 3연승을 거두며 오히려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왔다. 특히 3차전은 상대의 득점을 54점에 묶었는데 이는 결승전 최소득점 기록. 그러나 홈에서 우승을 차지하려는 계획이 말론의 39점 활약에 힘입어 막히고 마지막 6차전을 유타 홈에서 치르게 된다.

마지막 파이널 6차전은 체력이 한계에 달할 대로 달한 데다가 게임 초반에 스카티 피펜이 등 부상을 입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역시 조던이 경기를 캐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던은 45점을 득점했는데, 팀 전체 득점의 절반 이상일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다득점자인 토니 쿠코치는 15점에 그쳤을 정도. 박스스코어만 보면 원맨팀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피펜 역시 상기한 대로 경기 초반에 덩크하다 등을 삐끗해 평상시 강력한 수비를 보여주지 못했고, 다른 선수들은 존 스탁턴을 필두로 젊고 빠른 가드들이 포진한 유타의 수비에 고전했다.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역시 클러치로 유명한 존 스탁턴에게 3점슛을 얻어맞고 3점 뒤지고 있던 상황, 시간은 40여초 남아있었다. 조던은 작전타임 후 혼자 공을 몰고 레이업[93] - 칼 말론의 공을 스틸 - 당연하다는 듯이 결승 점프슛 성공 을 통해 혼자 4점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비를 밀친 따돌린 후 점프슛을 한 조던의 슛폼은 유난히 여운이 남는 장면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결국 3-peat을 두 번째로 달성하고, 정점에서 다시 은퇴한다.

The Last Shot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굉장히 말이 많고,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아이재아 토마스도 "팔로 허벅지를 밀었지만 심판이 못 봤다. 조던은 저런 작은 테크닉도 부리는 선수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논란거리이다. 이에 당사자인 브라이언 러셀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심판은 파울을 부르지 않았고,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농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플레이의 한부분으로 남을수 있어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사실 NBA에서 돌파하는 선수가 손을 슬쩍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조던은 물론이고 코비, 르브론, 웨이드 등 슈퍼스타들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손장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하필 왜 이슈가 되느냐면 이 샷으로 인해 우승이 결정났기 때문이며 수십, 수백번이나 슬로모션으로 반복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뒤에서 보지 않고 풀샷으로 보면 조던의 손이 분명 러셀의 엉덩이에 닿았지만 러셀은 이 손에 밀려 넘어진게 아니라 조던의 돌파를 따라가다 그가 갑작스레 멈춰서자 똑같이 방향을 전환하다가 미끄러졌다. 조던이 밀어서 넘어졌다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앵클 브레이킹"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던이 샷을 성공시킨 직후 유타는 타임아웃을 불렀지만 러셀을 포함한 유타 선수들 누구도, 감독인 제리 슬로언도 심판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NBA선수들은 심판에 대한 항의가 일상화된 양반들이다. 오죽하면 2000년대 중반에 심판판정에 심하게 어필하면 자동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주도록 규정을 바꿨겠는가. 어떤 선수들은 항의하다가 실점하기도 하고, 특히 이처럼 타임아웃이 불린 상태에서는 급히 수비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벤치로 가면서 억울하다는 제스쳐와 함께 항의하는 것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착 밀쳐진(?) 당사자조차 심판에게 어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도 자기가 미끄러진 이유가 조던 때문이라고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당시 은퇴는 첫 번째 은퇴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NBA가 파업으로 치닫고 있었고, 조던과 필 잭슨의 계약이 만료됨으로 인해 공공연하게 3-peat 후의 정점에서 은퇴할 것이란 추측이 이미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94] 실제로 조던은 농구에 대한 의욕과 승부욕, 상승욕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3년 연속 우승 후에, 은퇴해서 다른 일 하고 왔음에도, 또 다시 3년 연속 우승을 이룬 이라면, 당연히 찾아올 더 이상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권태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특히나, 병적일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던 그라면 권태감은 더 심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팀 내부 분위기에서도 제리 크라우스 단장과 필 잭슨의 대립이 절정에 달하는 등 '이 시즌이 우리의 마지막이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좋은 예로 필 잭슨이 시즌을 시작하며 선수단에 나눠준 다이어리에는 Last Dance라고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은퇴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한 것과는 다르게, 두 번째 은퇴에 관해서는 팬이나 농구관계자, 스폰서 모두가 정점에서 멋지게 퇴장하는 그를 위해 박수를 보내주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심지어 MBC에서 그의 은퇴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 방영할 정도였다면 그 분위기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혹은 우리나라에서 뛴 적 한번 없는 운동선수의 은퇴기념 다큐를 공중파에서 제작 방영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 3-peat → 은퇴 → 3-peat이라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쌓은 그는, 더 이상의 기록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이 그렇게 떠났다.

다만 이때 당시 조던은 선수로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굳힌게 아니고, 시카고 불스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 닉스로 팀을 옮기는 방안과 선수 은퇴 두가지 방안중에 고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97-98시즌 초반 피펜이 부상으로 거의 시즌 반을 날려먹고 로드맨도 자주 결장하면서 팀 성적이 이전 2시즌보다 많이 하락하던 와중에 뉴욕 닉스와 루머가 떴다.[95] 뉴욕 닉스패트릭 유잉 항목에도 있듯 조던은 근 10여년간 닉스를 가로막은 장본인이었지만 뉴욕 팬들은 97 - 98시즌 조던의 MSG 마지막 경기에서 자기 팀을 박살내고 나가는 조던에게 기립박수를 쳐줄 정도로 조던에게 굉장히 우호적인 팬들이었고 조던 본인도 브루클린 출신인데다가 패트릭 유잉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닉스행을 고려했지만 조던이 시가를 자르다가 오른손 손가락 힘줄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으며, 무엇보다도 97 - 98시즌이 끝나고 선수 노조 파업으로 인해 다음 시즌이 어떻게 될 지 불투명해지면서 그냥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던이 명확히 밝힌 바는 없다.

그리고 닉스와의 루머와 상관없이 애초에 조던이 1차 복귀할 때부터 3시즌만 뛰고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그 약속을 그냥 지킨거라는 말도 있다. 단적으로 앞서 언급된 98시즌 MSG 원정에서 조던은 프로 초창기 이후 처음으로 데뷔 시즌의 에어 조던 1을 신고 출전했었다. 뉴욕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부분인데, 당시 미디어들과 팬들은 이걸 보고 조던이 은퇴 전 마지막 뉴욕 원정을 기념하고 뉴욕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신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데뷔 당시의 신발이라 작기도 하고, 쿠셔닝도 없어서 불편한데도 신고 경기에 출전한 것인데, 누가 봐도 작별인사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이런 퍼포먼스를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지가 6개~[96]

3.6.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화려한 농구인생을 정점에서 마무리한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의 주식을 매입해 주주로서 있다가, 구단주의 권유로 우리 나이로 마흔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가 복귀한 사실에 대해 팬들은 당시 떨어져만 가던 NBA의 인기를 회복시키고자 데이비드 스턴이 복귀를 종용했다 어쨌다 말이 많았고, 후에 조던 또한 자의로 복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로 이를 어느정도 긍정했다.

당시 위저즈는 강팀이 아닌지라 복귀 후 플레이오프 진출 정도를 목표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게다가 더 이상 실력도 예전의 그만큼은 아닌지라 팀내에서는 조던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에 대한 불만도 꽤 많았다고 한다. 다만 반론을 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던은 젊은 선수들의 서포트에 충실하겠다며 스스로 식스맨을 자처하고 나섰는데, 시즌이 지나가다보니 이건 뭐 경기력이 일정 수준은 돼야 식스맨을 뛰지...결국 스타팅으로 어쩔 수 없이 출격. 그래서 막상 팀 성적을 좀 끌어올리고 보니 어린 선수들은 "노친네가 욕심도 쩌시네영ㅋ" 이딴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조던도 빡칠 노릇. 게다가 당시 멤버들 보면 조던 말고 딱히 득점할 사람도 없었다. 끽 해야 아직 신인이였던 리차드 해밀턴, 후에 트레이드되어 온 제리 스택하우스 정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나 나이 마흔에 몇 년씩 딴짓을 해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20점-5리바-5어시라는 리그 엘리트 스윙맨의 지표급의 활약을 보여주어 열심히 그를 따라잡으려 하는 후배들의 목표를 한층 상향시켜 주었다. 조던으로 키배가 벌어지면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 "그 정도 성적은 얘도 찍을 수 있다능!" "2년 쉬다 복귀하고 마흔넘어서 저 성적 찍어보든가?" "…"

조던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에 높아서 그런지 가끔 이 시절을 흑역사라든지, 하지말았어야되는 복귀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물론 전성기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이 때 조던만 해도 리그를 주름잡는 슈퍼스타들과 대등하게 매치업하던 스타였다. 02시즌의 경우 초반엔 리그 득점 3위까지 올랐으며 20여경기를 소화할때만 해도 평균 25점을 상회했다. 또한 탁월한 기본기로 저하된 스피드를 커버했으며, 수비에서도 전성기처럼 수비왕급은 아니라도 준수한 수준을 유지했다. 득점 뿐 아니라 게임리딩과 리바운드 능력도 수준급이었으며, 무릎문제로 고생하면서도 02시즌엔 34.9분, 03시즌엔 전 경기를 뛰면서 무려 37.1분을 뛰는 등 체력도 준수했다. 사실 조던이니까 둔하다, 점프력 낮아졌다 소리 듣는 거지 이때만 해도 웬만한 30대초반 슈퍼스타 스윙맨급 운동능력이었다.

개인능력보다도 더욱 뛰어났던 것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었다.

이때 위저즈 팀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는 조던이 팀에 합류하기 전후의 성적을 보면 나온다. 조던이 합류하기 전 워싱턴은 19승밖에 못 하던 팀이었다. 그러나 조던 한 명의 합류로 워싱턴은 01-02, 02-03 양 시즌 동안 위저즈는 각각 37승씩을 기록했다. "젊은 선수들이 성장한 결과인 것 아니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가 떠난 직후에 팀성적이 25승으로 무려 12승이나 떨어졌다. 심지어 이때 조던만 떠난기 아니라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에서 새로운 에이스 길버트 아레나스를 공수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떨어졌다. 아레나스 영입이 없었다면 얼마나 떨어졌을지 모르는 일.

즉, 바닥을 기던 팀이 조던 하나의 합류로 팀성적이 거의 두배로 뛰면서 플레이오프 경쟁에 합류했고, 조던이 떠나자 또 다시 성적이 추락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워싱턴 시절 조던은 노쇄해도 MVP급던 시카고 시절만큼 못해도 당시 리그를 주름잡던 스윙맨들, 즉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빈스 카터, 레이 알렌, 알렌 아이버슨, 폴 피어스와 비교해 말석 정도는 충분히 차지할 만했다.

한편 단짝이었던 피펜과 서로 포틀랜드-워싱턴의 저지를 입고 만나는 명장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친정팀인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는 개인통산 3만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멋진 기억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던 팬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기위해 전국 모든 경기장으로 모여들면서 매 경기가 farewell 세레모니화되는 재밌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지막 유나이티드 센터 방문과 시즌 고별경기는 그 중 백미. 마이클 조던/영상 문서를 참조.

이 유나이티드 센터 마지막 경기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NBA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장내 아나운서가 각 팀의 선발 출전선수 소개를 할 때, 자기네 팀 선수에 대해서는 조명을 끄고 레이저 쇼를 벌이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하지만, 원정 팀 선수에 대해서는 그냥 담담한 톤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조던은 이 곳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만 이 때는 시카고 불스 입장에서 조던이 원정 팀 선수였고, 때문에 구단 측에서는 아나운서에게 보통 원정 팀 선수들과 똑같이 소개하라고 일렀지만 아나운서는 이를 거역거부하고 조던을 불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흥분된 목소리로 소개했고 당연히 시카고의 팬들은 열광하였다. 문제는 조던을 괘씸해하던 구단측에서 이걸 빌미로 아나운서를 해고시켜버린 것.[97] 이후 그의 마지막 경기였던 식서스 전에서도 원정팀이었지만 식서스는 친히 잘렸던 불스 아나운서 레이 클레이까지 초청해서 레이저쇼에 제대로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조던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 현저한 능력 저하를[98] 보임에 따라 팬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그의 운동능력과 센스는 그가 누구였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99]

3.7. 명예의 전당 헌액, 그 이후

2003년 은퇴 이후 6년이 지나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었고, 09년 4월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09년 9월 12일 헌액식을 가졌다. 명예의 전당 헌액 시 보통 파트너를 지목할 수 있는데, 여기에 피펜이다 필 잭슨이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조던이 지명한 것은 어릴 적 우상인 데이빗 톰슨[100]이었다. 데이빗 톰슨마저도 "너님 나한테 전화한 거 맞음?" 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편 이때의 연설은 시카고[101]의 팬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고 전체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를 무시, 비아냥한 사람들을 하나씩 이름 들어가면서 까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조던은 감동적인 분위기에 처음에는 울먹거리기도 했고 북받쳐서 연설을 수 차례 멈췄다 이어가기도 했는데, 그 후에 이어진 내용이 저런 내용이었으니까.

사실 대놓고 욕한 건 아니고 가벼운 디스 수준이었고, 유머를 곁들인 비아냥, 즉 평상시에 하던 트래쉬 토킹에 가까웠다. 악의가 있다기보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가볍게 긁는 농담에 가까운 것. 위에도 나와있지만 조던의 트래쉬 토킹은 인격 모독이라기 보다는 살살 약올리는 수준이고 따라서 트래쉬 토커로서 조던의 악명을 익히 알던 많은 NBA 팬들과 같이 뛴 선수들은 "Michael being Michael"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사이가 좋지 못했던 제리 크라우스 당시 시카고 GM을 연설 도중에 "누가 저 사람을 여기 불렀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아니거든요."라고 까는 등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좀 거슬릴 발언이 포함되어 있어 "좋은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길 하냐?" 하는 지적도 있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인데다 마이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다 보니, 그런 과거사들을 모두 웃으며 포용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기대가 깨진 데서 오는 실망감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조던은 현역시절 이미지메이킹에 철저한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을 것. 그간 그의 지랄맞은(...) 성격을 몰랐던 사람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 조던의 악명 높은 승부욕과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가 굉장히 많은지라 스포츠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엄청나게 공격적이며 집요한 성격이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던에 대해 광고나 이미지로만 접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의 성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결국 그만큼 경쟁심이 강한 이유가 소심하고 공격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드러났고 나이키나 NBA가 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얼마나 쉬쉬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버린 경우. 물론 농구 실력과는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성격 덕에 그렇게 농구를 잘했다는 말이 되기는 한다. 오죽했으면 이 때부터 우리나라 커뮤니티에서는 '세계 최고의 소인배'라는 별명이 하나 추가됐을 정도.

단, 이때 명예의 전당 연설 도중 중간중간 울먹였던 그 표정은 이후에 'Crying Michael Jordan'이라는 인터넷 이 된다. 현역 은퇴 이후 구단주로서 활동 중이다. 은근히 굴욕도 자주 당한 편이고, 현역 때의 황제다운 이미지가 와장창이 된 기폭제다보니 농구 관련 밈에서 누가 망신을 당하거나 안습크리를 맞을 때 자주 합성되는 편. 크라잉 마사장 제조기도 있다. 가장 최근 크라잉 마사장 사건으로는 2016년 모교 노스 캐롤라이나가 오랜만에 NCAA 파이널에 진출해서 기쁜 마음으로 직관을 왔다가 모교가 빌라노바 대학교에 지는 걸 지켜보면서 그 안습하고 무기력한 관중 마사장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합성 되는 것이다. (...)

이후 워싱턴의 구단주로 복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102] 이후 고향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고팀인 샬럿 밥캣츠를 한국 돈으로 3120억 원에 이르는 값을 치러 사들이는 데 성공하며 구단주가 되었다. 간간히 선수들과 연습도 함께 하는 듯. 그리고 선수들을 농락하고 있다[103] 다만 조던이 50세에 복귀하겠다고 나섰을 때, 거의 농구계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그가 복귀할 수 있느냐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이 이뤄졌던 점을 생각하면, 이때 조던은 풀경기는 몰라도 짧은 연습경기에서는 현역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ESPN의 전문가들인 스티븐 A 스미스와 스킵 베일리스는 이를 갖고 치열한 토론을 했는데, 조던빠 성향을 지닌 베일리스는 조던이 복귀하면 코비같은 선수들을 위협하는 스타급 활약을 할 거라고 다소 오버스런 분석을 했고, 스미스는 나이가 나이니만큼 크게 활약하기는 힘들거라고 주장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모두 만 50세였던 조던의 복귀가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이러한 전제 하에서 얘기를 했다는 점.[104]

50살 생일인 2013년 2월 17일을 전후로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현재 샬럿 밥캣츠의 유망주인 마이클 길크리스트를 상대로 1on1을 해서 승리를 거뒀다는 기사가 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접대농구겠지만, 이 분은 아무래도 상식이 안 통하는지라...또한 한국과 달리 미국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접대하면서 농구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당장 미국의 교육부 장관 Arnie Duncan만 하더라도 무려 장관인데도 NBA올스타 번외경기 격인 Celebrity Game(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이 하는 경기)에 몇번이나 출전하면서 개그맨, 가수들과 동등하게 부대끼면서 농구를 했다.[105]

우리나라에서 장관급 공무원이 올스타전에서 뛰는 걸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어보면 짐작하겠지만 조던이 어떤 성깔의 인물인데 감히 까마득한 애송이가 자기를 봐주면서 하는 걸 용납하겠는가? 위의 훈련 영상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아무리 50세라고 해도 봐주면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만약 대놓고 봐주면서 했다면 박살이 났을 것이다.[106] [107] 조던의 개인 트레이너 역시 지금 당장 복귀해도 "평균 20득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4. NBA에 미친 영향

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그가 경력을 통해 쌓은 실적과 기록, 그리고 아직까지도 채 식지 않은 인기로 증명되고 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아직까지도 NBA에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 NBA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역대 NBA를 지배했던 것은 조지 마이칸 -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 - 카림 압둘 자바로 대표되는 빅맨들이었고, 실제로 저 3인은 NBA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을 때 조던 다음의 3인방으로 흔히 꼽히고는 한다. 그 이후로도 리그를 대표하는 각 팀의 중심 선수들을 꼽으라면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그리고 샤킬 오닐 등의 센터 포지션이 꼽힌다. 그런데 조던이 가드로서 팀의 중심이 되어 저 센터들과의 대결에서 모조리 승리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시대를 지배하였다. 조던 이전은 고사하고 이후에도 리그를 지배한 것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 조합과 팀 던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센터포지션 중심의 NBA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108] [109][110]
이후 대표적인 조던 키드인 코비 브라이언트 및 이후 세대에서 조던을 보고 자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 경기 양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일각에서는 빅맨들의 플레이가 차츰 포스트업이 아닌 페이스업 위주로 변화한 것조차 조던의 영향을 받은 세대들의 등장 때문이라고 주장할 정도. 흠좀무. 물론 예전처럼 포스트를 장악할 수 있는 자원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 또한 있다. 실제로 현재의 NBA는 공수전환 속도가 매우 빠르고 모션 오펜스가 널리 쓰임에 따라 센터들이 골밑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없고 스크린과 픽앤롤 등으로 계속 움직여야 하며, 그렇기에 예전처럼 센터-파워 포워드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해져 "빅맨"으로 묶어서 부르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다. 그 변화의 시발점이 조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 핸드체킹룰의 변화 또한 그의 간접적 영향. 빅맨 중심의 농구라면 지향할 수 없었던 룰의 변화는 조던의 은퇴 후 조던과 같은 스타를 양성하기 위해 상대적인 이득을 스윙맨에게 부여함으로써 경기의 재미를 극대화하고자 했던 NBA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정작 이 룰은 조던의 1차 은퇴 후에 도입되었다. 물론 2차 복귀 후에는 예전보다 하락한 운동능력에도 nba를 지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11]
  • 마이클 조던 이전까지는 리그가 양웅 대립의 구조로 대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라이벌리가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 매직 존슨래리 버드. 자연스럽게 NBA의 마케팅도 이런 구조로 이뤄져 왔다. 그런데 마이클 조던 이후 1인 독재의 파괴력을 체감한 NBA는 포스트 조던 만들기에 골몰하게 되었다. 결국 2000년대에 조던을 잠시 복귀시켜야 할 정도로 혼선을 겪기도 했으나,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의 지배적인 플레이어가 발생하며 각 팀의 중심 선수가 되었다.
  • 강팀이 아닌 약팀의 선수로 데뷔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 팀의 수준을 끌어올리면서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6번의 우승을 이끌고, 왕조를 건설한 후 프랜차이즈 스타로 정점에서 은퇴하는 업적을 이룩하여, 이후 NBA 스타가 이뤄내는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끝없이 상향시켰다. 단적으로 그의 업적을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르브론 제임스마이애미 히트더 디시젼 쇼와 함께 이적하자 마자 나온 얘기가 "조던 되기는 글렀다"였다.
  • 스타 한 명이 소속팀과 리그를 넘어선 독보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아래 넘사벽 인기 항목의 토니 파커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NBA의 세계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사실 드림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처음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NBA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처음에는 데이빗 스턴이 막으려 했다. 처음에는 마이클 조던도 비시즌 + 84년에 한 번 나갔는데 또? 라는 이유로 미온적이었지만 스폰서인 나이키의 설득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두 선배가 자진해 드림팀에 합류한 뒤 마이클 조던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결국 드림팀이 완성되었고, 마침 그 시기에 절묘하게 미디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이미 올림픽에 합류하기 전부터 조던을 포함한 드림팀은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 시내에 건물 전체를 덮는 조던의 나이키 광고사진이 걸려 있었을 정도. 게다가 드림팀이 보여준 충격과 공포의 퍼포먼스 덕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관심을 갖게 된다.[112] 이것에 자극을 받은 NBA는 마이클 조던을 앞세워 세계에 NBA를 홍보했고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경쟁자인 리복, 아디다스 등 세계적 스포츠용품 메이커가 여기에 편승해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고, 그 덕에 농구가 지금의 국제적인 겨울스포츠이자 하계올림픽의 대표적인 시청률 제조기라는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 그가 끼친 영향력이 농구를 넘어서 세계 곳곳에 끼친 영향력은 정말로 지대해서 ESPN 에서 조사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포츠인에서 그 유명한 베이브 루스나 무하마드 알리등을 제치고 1위를 했다. [113]

5. 기록

※ 모든 기록은 10위 이내 입상 기록만 기재함.


  • 단일시즌 자유투 득점 역대 3위(1986-87시즌, 833점)
  • 통산 자유투 득점 역대 5위(7,327점)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자유투 득점 역대 3위(1989년 플레이오프, 183점), 역대 4위(1998년 플레이오프, 181점) 등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자유투 득점 역대 1위(1,463점)
  • 통산 NBA 파이널 자유튜 득점 역대 6위 (258점)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어시스트 역대 10위(1,022개)
  • 통산 NBA 파이널 어시스트 역대 7위(209개)

  • 단일시즌 스틸 역대 8위(1987-88시즌, 259개)
  • 통산 스틸 역대 3위(2,514개)
  • 통산 NBA 플레이오프 스틸 역대 3위(376개)
  • 통산 NBA 파이널 스틸 역대 6위(62개)
  • 단일시즌 경기당 스틸 역대 9위(1987-88시즌, 경기당 3.16개)
  • 통산 경기당 스틸 역대 5위(2.35개)
  • NBA 역사상 첫 200스틸, 100블럭 성공(1987-88시즌)

  • 단일시즌 경기 당 득점(PPG) 역대 5위(1986-87시즌, 37.09점), 9위(1987-88시즌, 34.98점) 등등
  • 단일시즌 플레이오프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1986년 플레이오프, 43.67점), 역대 9위(1990년 플레이오프, 36.69점) 등
  • 통산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30.12점)
  • 통산 NBA 플레이오프 경기 당 득점 역대 1위(33.45점)
  • 통산 NBA 파이널 경기 당 득점 역대 2위(33.60점)

  • 단일시즌 PER 역대 3위(1987-88시즌, 31.71), 역대 5위(1990-91시즌, 31.63), 역대 9위(1989-90, 31,18), 역대 10위(1988-89시즌, 31.14) 등등.[115]
  • 통산 PER 역대 1위(28.35)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PER 역대 5위(1991년 플레이오프, 32.17)
  • 통산 NBA 플레이오프 PER 역대 1위(28.76)

  • 단일시즌 WS 역대 9위(1987-88시즌, 21.23)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WS 역대 6위 (1998년 플레이오프, 4.81), 역대 8위(1991년 플레이오프, 4.77) 등
  • 통산 WS 역대 4위(214.02)
  • 통산 NBA 플레이오프 WS 역대 2위(39.76)

  • 단일시즌 WS/48 역대 6위(1990-91시즌, .3211), 역대 9위(1995-96시즌, .3174, 역대 10위(1987-88시즌, .3077)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WS/48 역대 4위(1991년 플레이오프, .3325) 등
  • 통산 WS/48 역대 2위(.2505)
  • 통산 NBA 플레이오프 WS/48 역대 1위(.2553)

  • 단일시즌 VORP[116] 역대 1위(1988-89시즌, 11.98), 역대 2위(1987-88시즌, 11.81), 역대 8위(1989-90시즌, 10.12) 등
  • 단일시즌 NBA 플레이오프 VORP 역대 7위(1990년 플레이오프, 2.79), 역대 9위(1991년 플레이오프 2.75) 등
  • 통산 VORP 역대 2위(104.44)
  • 통산 NBA 플레이오프 VORP 역대 2위(22.85)

6. 플레이 스타일

동부컨퍼런스에서 감독으로 일하다 보면 누구나 능력이 향상된다. 마이클 조던을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고민과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前 뉴욕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조금은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을 때 기자와 조던의 대화 내용[117]

스킬은 만렙에 강골인 피지컬을 타고 났으며 어마어마한 승부욕에 압박감을 견디는 멘탈까지 甲인 농구 완전체

플레이 스타일은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블랙캣이라 불리던 초창기 시절에는 NBA 역사상 슈팅 가드 초일류로 분류되는 타고난 운동능력을 위주로 한 페인트존 닥돌과 그에 이은 득점 및 파울겟 능력, 풀업 점퍼를 기반으로 점수를 따내는 식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점퍼가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원체 사기유닛인지라 인사이드를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갔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사기에 가까운 운동능력으로 붙잡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돌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던의 점프슛이 안좋았던것은 아니다. 조던은 데뷔 이후부터 항상 점퍼와 자유투가 좋은 선수였다. 다만 그가 슛 매커니즘을 완성시킨 89년 이후부턴 막을 수 없게 된 것일 뿐이다.)[118]

블랙캣 시절의 조던은 돌파에 있어 티맥, 그랜트 힐 등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퍼스트스텝을 지닌 스윙맨이었으며(베이스라인 포스트업으로 시작되는 스핀무브 퍼스트스텝은 가히 대적할 자가 없다), 그의 최대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말체력과 바디밸런스는 간결한 무브와 미세한 페이크만으로도 쉽게 수비를 제치고 공중에서 빅맨들과 맞부딪히면서도 안정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도 경기당 40분씩 82경기 꼬박꼬박 뛰던 양반이.[119] 젊었을 때 조던은 정말 말도 안되게 빨라서 어께를 움찔하는 것만으로 수비수의 타이밍을 뺏고 순식간에 돌파해버리곤 했다. 젊은 시절 조던의 사기적인 민첩성에 대해선 다음 영상을 참고하자. https://www.youtube.com/watch?v=oG4gU_RiJ2c 이때문에 일부 팬들은 드리블 실력이 다른 특급 스윙맨에 비해 떨어진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페이크 하나만 하고 돌파할 수 있는데 쓸데없이 잔드리블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애초에 조던은 드리블을 하면서 최고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선수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시절 조던이 점퍼가 평균 이하였던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농구가 돌파로 모든 득점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120] 그랬다면 루키 시즌에 28점씩 때려박을 수 있을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의 고감도 점퍼의 타점은 당시부터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다만 슈팅 매커니즘이나 폼에 있어서 약간 어설펐던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은사인 딘 스미스 또한 루키 시즌 이후 조던에게 점퍼를 보완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뭐 그 이후에는 다들 아시는 대로... 완전체가 되었다. 90년대 초반 첫 번째 쓰리핏 시절을 보면 운동능력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합된 농구의 신을 볼 수 있다.

미친듯한 돌파와 비교적 거리가 짧은 중거리 점퍼를 주무기로 했던 80년대에는 조던의 야투 성공률이 대단히 높았는데, 평균 32점을 53.9%의 확률로 넣고, 그 전 시즌에는 평균 35점을 53.5%의 확률로 넣은 적도 있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55.1%의 야투율을 기록한 적도 있지만, 보통 야투율은 슛을 많이 던질수록, 그리고 팀원들이 약할수록 (수비가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원맨팀에서 저 스탯을 찍은 조던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알 수 있다. 르브론의 경우 저 미친 야투율을 찍을때 평균득점이 27점이었으며 클리블랜드 원맨팀 시절에 생애 유일한 득점왕(평균 30점)을 찍었을 때 야투율은 48.1%였다. 심지어 조던은 악질 수비로 유명한 "배드보이즈" 피스톤즈를 상대로 야투율 77%로 59점을 넣은 적도 있다![121]

2년차 시즌에 큰 부상을 당한 이후 복귀하고 블랙캣 시절 리그 최강의 슬래셔로서 NBA를 씹어먹은 후,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신체 능력에 상당히 의존하는 플레이의 약점을 보완하고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포스트업을 기반으로 해 페이드어웨이를 주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원래 이름이 트리플 포스트 플레이일 정도로 포스트 플레이가 핵심인 작전이었다. 때문에 포스트 업으로 공간을 잡아먹어줄 수 있는 수준급 빅맨이 반드시 필요했는데,[122] 불스는 수준급 빅맨이 없는 대신, 조던의 포스트업이 탑 레벨의 센터급으로 뛰어난 덕에 효과적인 전술 수행을 해낼 수 있었다. 조던은 슈팅 가드로서도 장신인 198cm의 키에 웨이트로 다져진 엄청난 근육 덕분에 웬만한 포워드 수준의 피지컬을 지녔고, 그덕에 어마어마한 근력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상대방 가드포워드들, 심지어 센터까지도 농락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123]

거기다 2차 3연패 시절의 완성도는 이전보다 더욱 상승해 더블팀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점수를 자동 헌납하는 수준까지 이르었다. 특히 뒤로 돌아 포스트업을 하면서 상대 수비를 밀어내며 갑자기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구사하는데, 본디 페이드어웨이 자체가 적중률이 떨어지고 거기다 수비가 붙으면 한없이 낮아진다. 게다가 림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된 턴어라운드 슛이라면 가장 적중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조던은 이런 슛 적중률이 뛰어났다! 우리나라 농구 팬들은 이 말도 안되는 슛을 사기더웨이[124]라 부른다. 그럼에도 상대가 외곽만을 경계하는 순간엔 자비없이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여지없이 더블 클러치나 더블 클러치로 안되면 트리플 클러치 덩크를 꽂아대서 나이를 의심케 만들었다.

조던을 상대해본 선수들이나 조던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은 예외없이 "조던이 현재 뛰면 훨씬 많은 득점을 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 현재룰에서 조던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일단 지역방어가 허용된 현재 센터들의 포스트업을 막는게 더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125] 조던의 포스트업은 센터들처럼 골밑이 아니라 중거리슛 지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수비 범위를 좁혀서 막기가 힘들다. 지역방어로 골밑을 견제할 수 있는 이유가 1. 골밑에 수비가 몰려서 외곽이 비어도 외곽슛은 성공확률이 낮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고 2. 센터들은 더블팀 당했을때 오픈된 선수에게 빼줄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조던이 포스트업하는 중거리 지역으로 수비가 집중되면 1. 골밑이 비어버리고 조던은 포인트가드급 시야를 가진 선수라 외곽이든 골밑이든 오픈된 동료들에게 빼줄 수 있다. 실제로 지역방어 허용 이후에도 코비 브라이언트 등 외곽선수들의 포스트업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즉, 조던의 포스트업은 룰 변화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두번째는 돌파. 조던은 특히 젊은 시절에 돌파가 주무기인 선수였으나 당시는 현재보다 훨씬 더 거칠게 막을 수 있었고, 특히 공격수를 손으로 견제하는 "핸드체킹"이 가능해 돌파=엄청난 체력소모였다. 이 때문에 조던은 돌파만 주구장창 한게 아니라 오히려 초창기부터 대부분의 득점이 점프슛이었다. 핸드체킹은 94년에 1차 개정, 2004년에 2차 개정되었는데 특히 결정적인게 이 2차 개정으로 공격수의 진행방향에 지장을 전혀 못 주게 되었다.

자, 조 듀마스와 데니스 로드맨이 밀고 당기고, 골밑에서 빌 레임비어와 릭 마혼이 구타를 하는데 시리즈 평균 32점을 넣던 조던이[126], 돌파하는데 아무도 건드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돌파로 몇점을 넣겠는가? 추가로 당시엔 4대센터를 위시한 우수한 센터들이 골밑에 우글거렸다. 그러나 현재는 블럭을 평균 3,4개씩 할 정도로 높이가 대단한 센터가 없다. 지역방어? 수비3초룰이 있기 때문에 센터가 골밑에 짱박혀있지 못한다.

공격페이스 자체도 80년대만큼 빠른데, 80년대처럼 두들겨 맞지 않고 돌파하는데 아무도 손을 못 간다댄다? 조던이 평균 40점을 훌쩍 넘길 것이라는 예측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망이다. 아니, 조던이 실제로 평균 37점을 넣었다는 걸 생각하면[127], "제발 돌파해주세요"라고 하는 듯한 룰에서 평균 3점만 올라갈 것이라는게 오히려 보수적인 예측이다.

이 정도는 해야 올타임 No. 1[128]

말년의 워싱턴 시절에 이르러서는 몸을 한층 더 불려 3번 포지션에서도 뛰었다. 스피드와 탄력은 사라졌지만, 특유의 강골에서 나오는 강력한 파워와 슛터치를 이용한 포스트업-사기더웨이로 마지막 시즌까지 평균 20득점을 기록했다.

본래 신체가 NBA 선수 중에서도 특출난 강골이고,[129] 점프력이 압도적이고 순발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실제로 경기를 보고 있으면 '농구 참 쉽게 하는구나' 싶다. 팀 던컨과는 다른 의미로 실제로 그가 슛을 쏘는데 다른 선수들이 점프조차 못 하고 바라보거나[130] 포스트업에 퉁퉁 밀려나가는 꼴을 보면 담합인가 싶지만 진실은 그저 사기유닛.

그렇다고 그가 공을 독점하는, 속칭 '볼호그'도 아니었다.[131] 기본적으로 오프 더 볼 무브로 상대 수비를 제치는 능력 또한 최강이라 선수들이 그의 기민한 움직임에 속아 애초에 매치업 자체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수비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왕창 발생시켜서 상대팀 수비를 초토화시키곤 했다. 시카고 시절 경기를 보면 분명 공도 안 가진 조던의 컷인에 상대팀이 우왕좌왕 거리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조던은 유유히 점프슛을 던지는 상황이 끝도 없이 연출되었다. 더욱이 이 시절은 지역수비가 금지라 공 잡았을 때만 더블팀, 아니면 맨투맨만 해야 하는 시절인데도 조던의 움직임을 팀 전체가 예의주시해야 했고 결국 팀 전원이 조던 한명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를 연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초기 조던과 혈전을 벌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아예 조던을 막기 위한 수비인 조던 룰을 고안해냈는데, 거의 지역수비나 마찬가지인 수비전략이었다.[132][133]

"조던 룰"은 단순히 지역수비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조던을 막아야 해!" 라는 사고의 산물이었다.

수비력도 최강이었다. 87~88 시즌 DPOY(수비왕)을 수상한 것은 물론[134]이고 이때부터 1차은퇴 시즌과 복귀시즌을 제외한 9시즌 연속(87~93 6연속, 95~98 3연속)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가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격언도 있었다. "조던을 막는 것만을 걱정하지 마라. 조던이 너를 막는 것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드가 갖춰야 하는 모든 수비 방법 모두 전부 다 잘했다. 낮고 안정적인 수비 자세는 기본이요 사이드 스텝도 소위 미쳤었다. 단순 스텝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거리, 속도를 고려해 크게 스텝을 한 번 밟음으로써 돌파를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스텝을 잘 밟았다. 또한 수비시에도 압도적인 퍼스트스텝과 말체력은 똑같아서 퍼리미터 디펜스 능력 또한 역대급이었다. 스틸 능력 또한 일품. 볼을 운반하는 가드들을 특유의 아우라와 운동능력으로 압박하고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스틸해냈다. 피펜/조던의 수비 콤비에게 가드가 공을 빼앗긴다면 이어지는 것은 두 마리 야생마들의 속공 후 가벼운 2점 헌납...[135] 이러한 도박적인 수비가 먹힐 수 있던 것은 스틸 실패시 보이는 빈틈도 앞서 말한 스텝을 활용함으로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버했기 때문이다. [136]또한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막는 것에 대해 절대 포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드 주제 블락샷이 1개 넘는 수치가 그것을 증명한다. 1차 은퇴 전에는 경기 당 1개씩 기본 성공. 가드에게 평균 블락 1개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드웨인 웨이드의 별명이 왜 동부 센터였는지 생각해 보자. 공격을 주도적으로 하는 선수라 수비할 때의 체력을 관리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조던은 그런 거 없었고, 항상 최선을 다해 수비를 했다. 그런데도 40분 이상 꼬박꼬박 82 풀경기 소화... 혹자는 이렇게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모든 힘을 쏟아 넣고도 경기력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끝없는 체력이 그의 실력의 원천이라고들 한다. 동시대에 찰스 바클리나 도미니크 윌킨스같은 라이벌들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좋은 수비를 보여주지만 시즌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점을 보면 진정한 괴물. 손이 빠른 덕분에 스틸 또한 경기 당 2개 이상씩 꼬박꼬박 성공시켜 통산 스틸 3위, 플옵 통산 2위일 정도.

2차 3연패 당시 조던은 체력적 안배를 위해 상대방 에이스에 대한 수비를 전담하지 않고 론 하퍼, 피펜 등의 선수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하는 경우가 많았다.[137] 그 여파로 이때의 수비력이 과소평가받을 때도 있는데, 이때도 조던의 수비력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이 영상은 98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7차전에서 조던이 레지 밀러를 막을때의 모습인데, 밀러는 이 게임에서 22점을 넣었지만 조던이 막고 있을 때는 필드골을 단 한개 성공시키는데 그쳤다.[138] 게다가 밀러는 경기 내내 론 하퍼와 조던이 돌아가며 막다가 4쿼터에 들어가면서 조던이 전적으로 막기 시작했는데, 큰 경기에 강하기로 유명한 밀러가 4쿼터에 단 한 점도 넣지 못했다.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최고조로 이끈 상황에서는 이런 수준의 플레이[139]를 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뉴욕 닉스와의 '92~'93 시즌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7차전인데, 경기를 시종일관 불스가 압도하였으며 특히 링크된 영상은 그의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어떤 수준인지, 그가 어떻게 경기를 지배하는지 증명하는 매우 유명한 시퀀스이기도 하다.

이 영상에서는 앨런 아이버슨이 루키 시즌 당시 경기도중 조던과 잠깐 매치업이 되었던 것을 회상하는데 (이때 아이버슨은 포지션이 포인트 가드라 주로 론 하퍼가 막았다) 이때 아이버슨이 조던을 크로스오버로 제치고 득점을 한 장면이 있었다. 당시 "황제가 애송이에 농락당했다"고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아이버슨은 20여년이 지나고 이를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기술을 제대로 먹였는데 조던이 슛을 거의 블럭할 뻔했다"며 이를 두고 crazy하다고 감탄했다.[140]

워싱턴 시절에는 운동능력이 엄청나게 떨어진 지라 더 이상 일류수비수는 아니었지만, 이때조차 특유의 높은 농구 이해도와 센스를 이용해 기가 막힌 수비를 펼친 적이 있다. 이 글과 영상은 조던의 복귀 첫 시즌 당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이던 빈스 카터와 첫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이 영상을 보면 전반에 조던은 카터를 상대로 좋은 수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사기적인 운동능력에 밀려 23점을 헌납하는 등 탈탈 털린다.[141] 그리고 후반에 조던은 작정한 듯 카터를 마크하는데, 공을 아예 못잡게 하는 디나이 수비를 이용해 카터가 공을 못 잡거나 어렵게 잡도록 한다. 또한 발은 느려졌지만 스크린을 뚫고 지나가는 대신 상대 공격의 흐름과 카터의 움직임을 예측해 스크린을 피해 돌아가는 등 센스로 운동능력 저하를 커버한다. 이에 카터는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경기를 망치고 결국 후반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3점슛의 성공률이 슈팅 가드로서는 낮은 편이다. 실제로 루키시즌과 3번째 시즌까지는 3점슛 야투 성공율이 15%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전매특허인 돌파에 이은 앤드원 플레이(득점 인정 반칙)가 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게임당 평균 30점을 넣어주는 선수인데 3점 좀 못 넣은들 뭐가 대수겠냐만. 그리고 3점도 평소엔 그저 보통의 가드 수준이다가, 누가 3점이 안좋다고 입이라도 벙긋하면 불타오른 승부근성으로 전반에만 3점 6개를 넣기도 했다. 그것도 파이널에서. 사실 3점슛 성공률이 낮은 이유는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배우던 학창시절에는 3점슛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년배에도 이후 3점슛을 장착한 슈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조던 입장에선 굳이 플레이스타일을 바꿔가면서까지 3점슛을 익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조던의 첫 세번의 파이널과 르브론의 12~14 파이널을 비교하면 (르브론이 폭망한 07,11파이널이 빠져서 오히려 르브론에 유리한 비교이다.) 조던은 세번의 파이널에서 삼점슛 57개를 던져 24개를 성공 (성공률 42.1%)시켰고 르브론은 77개를 쏴서 29개를 넣었다(37.7%). 물론 두 경우 모두 단축라인이 아닌 정상적인 삼점라인. 즉 중요한 순간에는 3점이라도 쏠쏠하게 넣어줬다. 때문에 이는 크게 약점이었다고 보긴 힘들다.

넘사벽의 운동능력, 기술 때문에 많이 부각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그의 가장 무시무시한 점 중 하나는 그의 끝을 모르는 체력이었다. 그는 만 35세였던 97-98시즌까지 평균 38.8분, 만 40세를 넘긴 마지막 시즌엔 전경기 출장에 평균 37분을 기록했는데, 이 정도 출장시간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드물다.

단순히 오래 뛰는 것 외에도 그는 체력소모 자체가 엄청나게 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는데, 공격에서 그는 골밑돌파를 적극적으로 시도해 자유투를 많이 얻어내는 선수였으며 볼이 없을때 스크린을 타고 돌아나오는 움직임도 많았다. 또한 수비에서는 자기 마크맨을 집요하게 괴롭힐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도움수비를 통해 상대팀을 견제했는데, 당연히 이런 식의 수비는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공격부담이 큰 선수가 이렇게 수비까지 큰 부담을 안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이유가 체력소모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수겸비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나이가 들며 수비력이 크게 줄었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에도 만 30세이던 2014년 이후 수비팀 선정 이력이 없다. 그럼에도 조던은 만 35세이던 98시즌까지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142]

그가 유독 플레이오프와 큰 경기에 강했던 것도 따지고보면 이와 관련이 있는데, 플레이오프 후반쯤 되면 왠만한 말체력이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던은 이런 체력이 있으니 파이널 최후반까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에 부딫혔던 98년 파이널같은 경우에도 슈팅부진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스틸에 이은 결승점을 넣었으니 체력 뿐 아니라 정신력과 집중력도 역대 최고였다고 볼 수 있다.

조던이 은퇴한지 어느덧 20년을 향해가는 중이지만 조던의 플레이들은 영상과 움짤로 꾸준하게 현시대의 NBA팬들에게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조던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를 찬양하려는 일부 팬덤들[143]조차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 본격적으로 NBA와 미디어가 상호작용을 보이기 시작한 90년대를 지배했던 선수이니만큼 영상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과대평가 논란조차도 없는 선수다.[144]

7. 관련 일화

  • 마이클 조던/어록 참조.
  • 마이클 조던/영상 참조. 유투브에 가면 플레이오프, 파이널 전 경기를 찾을 수 있고 정규시즌 경기들도 많이 있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선수들, 90년대 선수들 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영상이 존재한다. 참고로 현역선수들은 NBA 리그패스 저작권으로 풀 경기는 볼 수 없다.
    • 마이클 조던 관련 일화 : ##
    • 마이클 조던 관련 일화와 전설들 : ##

8. 이것저것

  • 그의 경력 중엔 영화출연도 있다. 벅스 바니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함께 나와 농구를 하는 영화였다. 워너브라더스의 스페이스 잼. 이 이후로 농구 선수들이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다만 평가는 필두였던 조던부터 이미 최악.
  • EA의 유명한 농구게임 NBA 라이브 시리즈에는 시카고 불스 23번의 이름이 Roster Player였었다.[145] 이는 EA가 마이클 조던 개인의 초상권료가 원체 고가라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6년도에 조던이 나온 최신 농구게임을 하려면 NBA 라이브가 아닌 스페이스 잼 게임[146]을 사야 했다. 결국 학생들은 스카티 피펜과 패스를 주고받고 패트릭 유잉 위로 슬램덩크하는 조던 대신 벅스 바니와 패스하고 외계인 위로 팔이 미친듯이 늘어나 덩크하는 조던의 안습한 모습을 봐야만 했다...[147] 그래도 은퇴 후 NBA 라이브 2000부터 조던에게 초상권료를 지불, 2004년까지 게임에 나오게 했다. 허나 그 이후 계약이 결렬되었고 그간은 아예 올스타 팀에서 빠지거나 하다가, NBA 2K 시리즈로 유명한 테이크투에서 조던의 초상권을 획득, 드디어 최신 시리즈인 NBA 2K11에서 실명 마이클 조던과 그의 얼굴을 가진 캐릭터를 다시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NBA 2K11와 2K12의 표지모델은 마이클 조던. 죽은 조던이 산 르브론 제임스이겼슴다.
  • 다만 위에 언급된 스페이스 잼이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는 첫 번째 게임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PC용 고전 게임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EA의 "Lakers versu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PC용 1989년 출시, 메가드라이브용 1991년 출시)에도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며, 이 게임이 바로 NBA 인증을 받은 첫 번째 게임이다. 이외에도 아예 조던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건 물론이고 조던을 직접 게임 제작에까지 참여시킨 PC 게임인 "Michael Jordan in Flight"(1993)도 있었고[148], 북미 NES용으로 나온 "Jordan vs. Bird: One on One"(1991)이라든지... 스페이스 잼이나 NBA 라이브 시리즈 이전에도 조던을 정식으로 등장시킨 게임은 꽤 여럿 존재했다. 게임 속에서 등장한 조던의 변천사는 https://www.youtube.com/watch?v=Ozr4zV4g24E 이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80년대 게임들에서 조던의 그래픽과 모션게다리 스텝이 참 안습하다.
  • 본인은 위대한 선수였지만 선수보는 눈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많다. 전설의 망한 1픽 콰미 브라운이라든가 당뇨병 환자 애덤 모리슨[149]이라든가.[150]
  • 마이클 조던은 코트 밖에서 매너에 대해서도 좋냐, 좋지않냐 여러 설이 있다. 일례로 흑인 래퍼인 Chamillionaire가 동영상으로 자신이 왜 마이클 조던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동영상이 있는데 한마디로 팬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2년 드림팀에 코치로 있었던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 감독은 이와 반대로 마이클 조던이 매너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슈셉스키는 조던이 매우 유명한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드림팀이 첫 훈련을 마친 직후, 조던이 아주 정중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함께 훈련하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는 것. "그는 '코치님', '부탁드립니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는 나름 저를 편하게 (making me comfortable)해주려고 노력한 듯 했습니다."라고 슈셉스키는 말했다. 참고로 이 인터뷰가 나온 것은 2010년이고 조던의 병적인 승부욕 등에 대해 이미 다 까발려진 상태였고, 슈셉스키는 조던과 개인적 친분도 없는지라 쉴드쳐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위에 나온 래퍼와 정반대로 슈셉스키는 조던과 대표팀 생활을 몇주간 하면서 조던의 성격에 대해 상세히 경험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자.다만 사람의 성격이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조던같은 스타의 경우 사람마다 일화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듯 하다. 일단 조던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 사람에게 잘해줬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얘기도 아닐 것이기에 카밀리온에어와 슈셉스키의 경험담을 두고 마이클 조던의 성격을 알기는 힘든 것. 그리고 슈셉스키는 감독으로서 조던을 만난 것이고 카밀리온에어는 별로 관련이 없는 타인으로서 만났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Chamillionaire랑은 딱 한번 만난 것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 한 증언만 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조던 성격이 정말 별로인지,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Chamillionaire이 무례하게 대한 것이던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을 한 두 번의 일화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조던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이런저런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자.##
  • 여담이지만 정말 심각한 골초다. 은퇴하고 골프와 사업등을 병행할 때 언론에서 농구공을 든 조던은 이제,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어 골프채와 시가를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현역시절부터 시가 잘만 펴댔다. 구글링 조금만하면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를 맛나게 빨고 있는 조던의 사진이 바로 나올 정도...
이러면 '어? 그렇게 연습벌레에 웨이트하고 몸 신경쓰는 사람이 담배라고?' 하며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시가 문서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듯이 시가는 궐련 담배 피우듯이 폐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담배가 아니라 입으로만 피우며 연기를 맛보는 담배다. 물론 구강암 등의 위험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조던의 운동 능력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을 것... 이기도 한데, 오프시즌 당시 시가를 자르다가 손가락 인대를 베인 사건도 일어난 걸 보면, 좀 많이 악영향을 받은 건 맞다.NBA 스페셜 기억에 남을 NBA 최악의 부상들
  • 어렸을 때 수영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서 물이라면 질색을 한다고 한다. 친한 친구랑 수영하다가 파도에 휩쓸렸는데 그 친구가 물 속 깊숙히 빠질 때 자신을 꽉 붙잡는 바람에 같이 익사할 뻔했다고 한다. 자신은 겨우 뿌리쳐내고 목숨을 건졌으나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파도에 휩쓸려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151]
  • 50세에 본인이 연 농구캠프에서 여전히 덩크슛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농구팬들을 경악케 했고,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과의 매치업에서 포스트업을 무차별로 시전하여 득점을 하시는 여전한 승부욕을 보여주셨다고(...) 승부욕엔 어른이고 아이고 얄짤없으신 우리의 마사장님
  • 2013년에 2K 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농구게임인 NBA2K14의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하여 한 발언이 이슈를 몰고 왔다. 자신이 최전성기의 기량이라는 전제하에 현재 NBA 리그의 최전성기를 찍고 있는 에이스들과의 대결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등의 선수들에게 전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근데 "코비 브라이언트한테는 장담까진 못하겠다" 라는 사족을 붙여 화제가 됬다.
유독 코비만을 제외한 이유는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보고 훔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발언에 현재 리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에이스들이 보낸 답변도 가지가지인데, 르브론 제임스는 "매치업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누구도 확신은 할 수 없다. 게임 홍보에 도움은 되겠다" 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반면, 코비는 "내가 그의 플레이를 훔쳤지만, 지금 세대들은 내 플레이를 훔치고 있다" 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도 지금 너님 명성만큼 올라왔음.이 기사에 네티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인데, 베플만 몇 가지 꼽아보자면 '코비가 1:1은 잘 하지. 근데 팀 우승은 못 시키지' 라든가 'MJ가 이긴다에 내 손모가지와 전 재산 건다', '확실히 코비가 조던의 페이더웨이를 따라할 수 있으니 조던의 말이 맞긴 하네', '조던은 너무 코비를 예뻐해~'라는 반응 등등. 40세에 복귀한 걸 빼고 최전성기에서 은퇴한지 17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이런 이슈를 몰고 온다는 것은 그만큼 맨 윗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그가 아직도 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증명하는 일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 여기까지 찬찬히 쭉 읽어보면, 위에서 그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소인배'(…)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패배는 절대 잊지않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결국 최후의 승리자로 올라선 그의 향상심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듯. 혹자는 만약 누군가 그의 평득 같은 기록을 깬다면, 축하멘트를 날린 조던이 다음 날 은퇴번복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 미국의 유명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최다 표지 모델을 장식하기도 한 인물이다. 해당 표지는 그의 50세 생일인 2013년 2월 17일 표지로, 이것으로 그는 표지모델로 50번째 등장하게 된다. 벌써 은퇴한지 10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152]
  • 조던시대에 없었던 2차스탯이 생기면서 재평가가 되고 있는데 평가가 더 올라가고 있다(...) 대표적인 2차 스탯인 Player Efficiency Rating의 경우, 스탯괴물로 유명한 윌트조차 제치고 역대 1위다!! 이는 이 스탯이 효율성을 따진 스탯이라 매번 풀타임 가까이 뛴 윌트가 손해봤기 때문이기도 한데,아무리 그래도 커리어 30-20 기록한 양반을 제친다는 건... 게다가 다음의 I love nba 란 커뮤니티에서 역대 우승 팀 중 PER 1-2위의 격차가 가장 크게 나는 팀 10걸에 대한 자료가 올라왔는데, 이중 조던의 불스가 네 차례나 올랐으며 1992-93 불스의 경우 역대 2위로 조던과 팀내 2위였던 호레스 그랜트와 차이가 13.1에 달한다. 물론 이 자료는 수비공헌도를 거의 나타내지 못하는 만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지만[153], 조던의 팀공헌도가 다른 팀 동료에 비해 넘사벽으로 높았다는 건 확실히 보여준다. 조던의 수비 공헌도도 피펜 못지 않기 때문에...[154]
  • 의외로 지나치는게 쉬운 기록인데 한해에 올해의 수비수와 득점왕을 동시에 한 유일한 선수이다.[155] 역대로만 따져도 데이비드 로빈슨 외엔 없다. 참고로 로빈슨은 1994년에 생애 유일한 득점왕을, 1992년에 올해의 수비수가 되었다. 올해의 수비수가 될 때 득점순위는 전체 8위(23.2점)
  • 목차에 나온거 처럼 형인 래리 조던도 농구를 했지만 키가 5.8ft(약 175cm)밖에 안되어서 농구를 포기했다. 하지만 저 키에 덩크슛을 하는등 꽤 운동신경이 뛰어나다.[156]
  • 한국팬들 사이에서 "애매하면 조던" 이라는 얘기가 있다. 스포츠 관련 커뮤니티에 "어느팀이 이길까?"류의 vs 글이 나오면 조던이 포함된 팀을 고르면 된다는 의미이다.
  • 2016년 11월 22일 오바마 대통령에 의하여 '대통령 자유 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157]을 수여 받았다.
  • 현재 르브론 제임스의 세러모니로 알려져 있는 "경기 시작 전 파우더 뿌리기"의 원조이기도 하다.[158] 여기에 쓰이는 파우더는 선수들이 경기 전에 공이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뿌리는 talcum powder인데[159] 르브론이 파우더를 양손으로 하늘을 향해 환호하듯 뿌렸다면 조던은 파우더를 해설자, 그 중 시카고의 레전드 해설자이자 전직 NBA선수 겸 잠깐 불스의 감독이기도 했던 조니 "레드" 커에게 장난삼아 뿌렸다. 발단은 조던이 프로로 데뷔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경기 시작 전에 파우더를 그와 친하던 커에게 장난삼아 뿌리면서였다. 너그러운 성격이었던 커는 이 젊은 슈퍼스타의 짓궂은 장난을 웃으며 받아들였고 [160] 이는 곧 홈경기 때마다 매번 하는 전통이 되었다. 조던은 커가 라디오 중계를 할 때도 굳이 그를 찾아가 파우더를 뿌리곤 했으며, 심지어 커의 동상이 유나이티드 센터 앞에 세워질 때도 제막식에서 이 세러모니를 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 팬들 사이에서는 친한 선수와 해설자들이 장난스럽게 투닥투닥하던 세러모니를 제임스가 허세스럽게 포즈를 잡는 걸로 바꿔놓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조던의 세러모니를 더 충실히 따라한 사람은 케빈 가넷이다. 가넷은 조던과 마찬가지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시절 친한 해설자들에게 파우더 테러를 하곤 했는데, 조던이나 르브론만큼 엄청나게 인기 많은 선수는 아니기 때문에 생각만큼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는 상대적이다. 가넷의 세레모니도 유명했고 동시에 은퇴한 코비, 던컨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레전드 선수이다.
  • 조던과 인연이 있는 팀들
- NBA 시카고 불스 - 영구결번- NBA 워싱턴 위저즈- NBA 마이애미 히트 - 영구결번-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 / 버밍햄 베론즈- NBA 샬럿 호네츠 - 구단주
  • 그의 자녀는 모두 5명. 2006년 이혼한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고, 후에 16살 연하의 모델 출신과 2014년 결혼하여 쌍둥이 딸을 두고 있다.

  • 그가 시카고에 살 당시 살던 거대한 저택은 그 자체로 시카고의 명소가 됐는데, 방 9개, 화장실 15개, 시가 룸, 골프장, 야외 농구장, 실내 체육관, 헬스장, 카드를 칠 수 있는 방 등과 23번이 새겨진 현관문, 거대한 마당으로 말 그대로 궁궐 규모의 집이다. [161] 그는 1990년대부터 살던 이 집을 2012년에 14,855,000달러에 팔려고 내놓았는데, 원래 2천9백만 달러 가치의 집을 거의 반값에 내놓았음에도 5년 동안 안 팔리고 있다고 한다. [162] 이 집이 위치한 동네가 시카고 고급주택가긴 해도 베벌리 힐스처럼 유명인사들이 찾는 위치는 아니란 점, 워낙 유명해 구경꾼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집, 집 자체가 오직 조던만을 위해 지어진 집이다 보니 그의 흔적이 너무 크다는 등 여러 이유가 있다.[163]
  • 마이클 조던하면 떠오르는 트레이드 마크가 바로 스킨헤드다. 사실 마이클 조던이라고 처음부터 스킨헤드를 했던것은 아니다.

이게 바로 마이클 조던의 20대 때 모습이다. 이때부터 이미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이유가 머리가 훤히 벗겨지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플옵진출 시즌 : 시카고 불스 재적 전시즌 플레이오프 진출 [164] (14시즌, 1984-1993, 1995-1998)
마이클 조던이 플옵에서 이긴 팀과 횟수 : 뉴욕 닉스 5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4회, 마이애미 히트 3회, 유타/샬럿/필라델피아/애틀랜타 2회, 밀워키/시애틀/레이커스/피닉스/뉴저지/디트로이트/워싱턴/포틀랜드/올랜도/인디애나 1회마이클 조던이 플옵에서 패한 팀과 횟수 : 디트로이트 3회[165], 보스턴 2회, 올랜도/밀워키 1회

8.1. 넘사벽 인기

  • NBA에서 뛰는 다른 선수들과도 차원이 다른 인기를 자랑했다. 보통 스타급 운동선수라고 해도 비슷한 레벨의 가수/연예인들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데[166] 조던만은 예외였다. 유명한 일화로 불스 선수들이 "누가 더 유명인사를 많이 알고 있나" 내기를 할때 재닛 잭슨에게 전화 걸어 "재닛한테 MJ[167]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딱 한마디 해 그녀의 전화를 순식간에 받아내기도.[168]
  • 현역시절엔 무려 9번이나 올스타 투표 전체 1위에 올랐다. 2위는 빈스 카터와 줄리어스 어빙으로 각각 4회, 3위는 코비, 야오밍 등으로 2회다.
  •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인 Harris Poll의 자료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조던은 1993년부터 2005년까지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1위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설문이 시작된 게 1993년이다! 즉, 이 기록이 더 길수도 있었단 말.[169] 게다가 이 기간중 상당부분 은퇴한 상태였는데 (1993년 1차 은퇴, 1995년 복귀, 1998년 2차 은퇴, 2001년 복귀, 2003년 최종 은퇴)그럼에도 불구하고 1위를 놓치지 않았단 말. 그러나 2006년부터는 타이거 우즈에게 1위를 뺏기는데 우즈는 2010년까지 1위를 하다가 스캔들로 몰락하고 조던은 2013년에 기어이 1위로 복귀한다.(...) 2014년엔 2위로 내려앉았는데 은퇴한지 11년이나 지난 양반이 아직도 최고의 인기선수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게... 참고로 조던 외에 1위를 한번이라도 차지해본적이 있는 농구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2010년에 우즈와 공동 1위), 르브론 제임스(2014년에 처음으로 1위)뿐이다.[170]
  • 넘사벽의 인기 덕분에 광고 수익 역시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선수들이 자기 이름을 딴 신발을 출시하는 트렌드를 본격적으로 만든게 조던과 에어 조던 브랜드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에어 조던만큼 성공, 아니 근접하기라도 한 시그니쳐 슈즈(선수 본인의 이름을 단 신발)는 지금까지도 없다. 에어조던이 워낙 인기가 많자 나이키는 조던 관련해 신발, 의류 등을 종합적으로 판매하는 조던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조던은 커리어 통틀어 연봉을 1억달러도 못 받았는데 1998년 은퇴 당시 그의 재산은 5억달러에 달했다. 1998년에는 그동안 박봉에 보상하는 의미로 시카고가 연봉을 3천3백만달러나 쥐어줬지만 그가 번 광고수익은 4천만달러도 넘었다. 은퇴 후에 그 수익은 더욱 늘어나는데 (...) 포브스에 따르면 조던이 2014년에 번 돈은 무려 1억달러에 달한다(!!!) [171] 은퇴 후 1년동안 광고 계약으로 번 돈이 그가 커리어 15년동안 받은 연봉보다 많다는 소리.
  • 참고로 2014년에 조던의 이름을 건 신발은 르브론의 시그니쳐 슈즈보다 8배 많이 팔렸다! 르브론이 현역 중 어떤 선수보다도 많은 신발을 팔아치웠음을 생각하면 충공깽...또한 조던 브랜드는 2014년 미국 농구화 시장의 5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2013년의 53%보다 더 늘어난 것이다. 나이키 전체로는 미국 농구화 시장의 95.5%를 차지하고 있는데, 넘사벽이란 말도 모자란다. 조던이 처음 나이키와 계약할 때 나이키가 아디다스나 컨버스에 비해 훨씬 작은 기업이었단 걸 생각하면 조던의 영향력이 시장 전체를 움직일 수준이란 말이 된다. 비교를 한번 해보자면, 나이키는 에어조던 11의 새로운 레트로 버젼을 나이키 홈페이지에서 3시간만에 매진 시켰으며 발매 첫 주만에 8천만달러 어치를 팔아치웠다. 반면 아디다스, 언더아머, 리복, 그리고 그외 모든 브랜드들은 2014년 내내 1억9천만달러 농구화를 팔았다. 즉, 에어조던 농구화 하나를 1주일 동안 판 실적이, 미국내 나이키/조던 브랜드를 제외한 모든 브랜드가 농구화를 팔면서 낸 1년 수익의 40%가 넘는다는 소리다. 다시 강조하지만 수많은 에어조던 시리즈 중 단 한종, 이걸 1년 52 주 중 단 1주일동안 판 것만으로 미국내 다른 브랜드들이 1년동안 수십, 수백 종류의 농구화를 팔면서 번 돈의 절반에 가깝게 번 것이다.
  • 나이키에서는 거의 매달 마다 조던 레트로가 나오는데 특히 시카고 불스 시절 신은 1~8,10,11~13 그리고 1998 NBA 파이널 몇 몇 경기에서 착용한 검/빨의 오리지날 색상들은 사실상 농구화의 범주를 넘어선 모델로 일상화로서 폭넓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실제 플레이용으로는 추천하지는 않는다.
  • 유튜브에 불스시절 조던의 경기들은 대부분 있다. 플레이오프, 파이널은 전부 있으며, 정규시즌 주요경기도 상당히 많은데 여기서도 조던의 위엄을 느낄수 있다. 리그패스의 도입 전의 1980, 90년대 선수들의 영상은 비교적 한정되어있고 파이널 혹은 주요 플레이오프 경기만 올라와있는데 반해 조던은 너무나도 쉽게 원하는 경기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덩크모음, 페이더어웨이, 풋워크, 리벤지 플레이, 블락, 플레이오프 및 파이널에서의 모든 득점, 심지어 조던이 블락을 당하는 플레이까지 편집된 하이라이트 등 다양한 주제로 편집된 영상들이 수시로 업데이트 되고 있다.
  • NBA 카드에서도 특별하다. 한국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시점까지 NBA카드 수집이 매우 인기있었다. 현재는 '파니니' 라는 카드 제작사가 NBA와 독점 라이선스로 공급 중 인데 과거 레전드 중 조던만 나오지 않고 나올수 도 없다. 현역 선수들은 당연히 전체계약으로 카드가 나오지만 은퇴한 선수들의 경우는 카드사가 선수별로 계약을 맺어 나오는데 매직, 버드, 오닐, 드렉슬러, 말론, 키드, 피펜, 페니, 맥그레디 등 대부분의 과거 레전드 선수들도 만날 수 있으나 조던은 현역시절 다른 카드제작사인 '어퍼덱'과 계약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1980-90년대에도 플리어/스카이박스, 탑스 등 다른 제조사에서 공급한 일반 카드에도 조던은 등장했지만 특수한 카드들(유니폼 조각이 들어간 카드, 직접 싸인한 카드)에서는 조던을 발매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과거 어퍼덱에서만 제작한 유니폼 패치카드, 싸인 카드들은 현재 이베이에서 엄청난 고가로 매매가 되고 있고 약 20년 전의 카드이지만 디자인과 퀄리티는 지금의 것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무엇보다 실제 경기에서 착용한 유니폼을 잘라 카드안에 집어 넣고 소량생산이기에 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그 희소성을 인정받고 있다.
  • 동명이인으로 배우 Michael Bakari Jordan이 있다. 이 배우도 2015년 판타스틱 포의 휴먼 토치로 나오는 등 나름 유명한 젊은 (1987년생) 배우지만 농구선수 조던이 워낙 넘사벽으로 유명한지라 마이클 조던이라고 하지 않고 꼭 미들네임까지 넣어[172] 마이클 B. 조던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구글에선 연관검색어로 "마이클 B. 조던과 마이클 조던과의 관계"가 아직도 뜰 정도(...) 재밌게도 마이클 B. 조던도 농구실력이 상당해서 매년 NBA에서 올스타 주간에 개최하는 연예인 농구대회에 단골로 참가한다. 참고로 인기를 몰아 NBA 2K17에 마이커리어에 출연하게 됬고, 오렌지쥬스 듀오로 출연하여 게임 내에서 서로 플레이 할 수 있다.
  • 1997/98 시즌 시작 전 프리시즌으로 유럽에서 유럽클럽팀과 경기한 적 이있다. 상대팀은 PSG Racing(프랑스 축구클럽 PSG의 산하에 있는 농구팀인듯.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으로 조던이 공만 잡아도 엄청난 환호가 나왔다.
  • 여담으로 보안업체 SplashData에서 발표한 최악의 패스워드 리스트에서 27위에 랭크되어, 인간 이름 고유대명사 중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즉, 마이클 조던 23은 사람들이 비밀번호로 너무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 이름을 사용한 비밀번호 중에서 가장 보안성이 나쁘다는 의미다. 그의 명성의 위상이 어떤 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다. 참고로 등번호 23번을 뗀 그냥 '조던'은 33위 였다. 혹여나 로그인 비밀번호로 jordan23 이나 jordan을 사용하고 있다면 비밀번호로 고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처 기사
  • 마이애미 히트의 마이클 조던 영구결번식은 조던의 최종은퇴시즌인 2002-03시즌에 이뤄졌는데 공식적으로 영구결번의 이유는 "마이클 조던의 위대한 업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론 조던의 인기로 좀 득보려는 게 아니었나 하는 시각도 많다. 실제로 당시 히트는 25승으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으며, 결국 팻 라일리는 감독 자리에서 내려왔다.
  • 생일이 2월 17일이라 그 즈음에 NBA 올스타전이 열리기 때문에 겸사겸사 생일 축하를 받곤 한다.

  1. [1] 루키시즌인 1985년, 부상으로 시즌을 접다시피한 1986년, 1차 은퇴시기인 1994~1995년을 제외하면 1998년 2차 은퇴시기까지 한 해도 득점왕을 놓친 적이 없다. 2위가 저 유명한 윌트 체임벌린의 7회인데 마사장은 그걸 연속으로 하고도 한 번의 은퇴 번복 후에 3번을 더 연속으로 했다. 충격과 공포. 워싱턴 시절 포함 시즌 평균 득점 30.1점 /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33.4점으로 1위
  2. [2] 샤킬 오닐과 팀 던컨은 1999년의 MVP가 아니고 2000년의 MVP다. 1999년에는 파업으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았다.
  3. [3] 2차 은퇴까지 커리어의 대부분을 SG로 뛰었지만 수비시에는 상대방의 PG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맡은 역할은 가드보다는 포워드에 가깝긴했지만 수비는 주로 상대 가드를 막았으니까.) 3차 은퇴 이전인 워싱턴 시절에는 주로 SF로 뛰었다. 1988-89 시즌에는 포인트 가드로도 뛴 적이 있었는데, 89년 3월 25일 경기를 시작으로 11경기 동안 트리플 더블 10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시즌 평균은 32.5득점 8리바 8어시. 사람이 아니다
  4. [4] 23번을 단 이유는 매우 유명한데, 조던과 그의 형 래리는 마당에 있는 골대에서 주구장창 1대1을 했는데, 어린 시절 마이클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고 한다. 그러자 "형의 반이라도 됐으면..."하는 마음에 형 번호인 45번의 절반 정도인 23번을 택했다고...
  5. [5] 첫번째 복귀 당시 달았던 번호, 잠시 야구로 외도했을때 달았던 번호이기도하다.
  6. [6] 올림픽 출전 당시 달았던 번호
  7. [7] 1990년 올랜도 원정에서 누군가가 23번 유니폼을 훔쳐가는 바람에 급한대로 남아있던 12번 유니폼을 입었다. 원정팬의 유니폼을 빌려입으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작았다고 한다. 이 경기의 사진을 찾아보면 등번호는 있는데 이름 마킹이 없다.
  8. [8] 1986년엔 팬투표로 선발이 됐으나 부상 때문에 뛰지 않아 실제 출전은 13회.
  9. [9] 해당사진은 조던이 1차 은퇴를 하고 난 후인 1994년에, 새롭게 1994-95 시즌을 맞아 개장한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치러진 영구결번식 행사이다. 당시 현역이던 그의 동료들과 필 잭슨 감독을 포함해 그의 대학 은사인 딘 스미스, 1984년 올림픽 감독이자 레전드 대학 감독인 바비 나이트, 스파이크 리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했으며, 래리 버드, 매직 존슨, 그의 절친이자 레전드인 찰스 바클리 등이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사회를 맡은 조던의 친구이자 방송인 아마드 라샤드는 행사 도중에 조던이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재밌는건 당시 잭슨 감독은 조던이 복귀할 것, 그리고 40살까지 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 사실 조던이 워낙 젊었고 실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조던이 복귀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당시 꽤 많긴 했다. 여담이지만 1999년에 시카고에서 2차로 은퇴선언을 했을때 (98-99시즌은 직장폐쇄로 99년이 될때까지 시즌개막을 안 했기에 99년 1월이 되어서야 은퇴 기자회견을 했다)는 별도의 영구결번식을 진행하지 않고 그냥 결번만 되었다.
  10. [10] 80년대 덩크 컨테스트는 현재처럼 독특한 아이디어보다는 덩크의 완성도를 보는 성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똑같은 덩크를 매년 보여줘도 감점 요소가 되지 않았으며, 도미니크 윌킨스의 파워풀한 투핸드 윈드밀, 마이클 조던의 자유투라인 덩크는 그들이 컨테스트에 나올 때마다 매번 선보이는 "필살기"급 덩크였다. 실제로 조던은 1985, 87, 88년 세번 출전하면서 매번 자유투라인 덩크를 선보였는데, 85년엔 준우승, 87년과 88년엔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똑같은 자유투라인 덩크라도 신인이던 85년엔 다소 뻣뻣하게 팔만 쭉 뻗어서 덩크를 한 반면, 87년에는 좀 더 공중동작이 가미되었고, 아예 팔다리를 접었다가 펴면서 역동적으로 덩크를 한 88년도의 덩크는 역대 최고의 덩크 중 하나로 꼽힌다.
  11. [11] 그래서 애칭이 이 것의 약자 GOAT다. 염소가 아니다. (...)
  12. [12] His Highness + Air. 참고로 소유대명사 + Highness는 왕족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우리 말로 하면 전하 혹은 폐하.
  13. [13]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기도 하다. Mary Jane
  14. [14] 젊은 시절에 한시적으로 불리웠던 별명.
  15. [15] Greatest Of All Time의 약자이다. goat는 염소라는 뜻도 있어서 종종 언어유희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쪼잔한 양반
  16. [16] 조던은 그의 형 래리 조던과의 1:1 농구시합에서 항상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래리 조던의 학교 선수 시절 등번호는 45번이였는데, 마이클은 형의 반만큼만이라도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45번의 2분의 1인 23번을 선택한 것. 아래에 서술되지만, 1차 복귀 이후에는 잠시 45번을 달기도 했었으나, 그 시즌 도중에 23번으로 돌아갔다.
  17. [17]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등번호 7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조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23번을 선택하기도 했다. 두 레전드의 선택을 받은 농구 외 스포츠에서도 상징적인 번호.
  18. [18] 유잉을 존경해서 선택한 번호이다.
  19. [19] 현재까지 23번을 주로 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조던 외에는 프랭크 램지캘빈 머피 뿐이며, 훗날 헌액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해봐야 네 명이다. 게다가 램지는 50년대 선수였고 램지와 머피 둘 다 NBA를 주름잡던 선수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번호 자체의 상징성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오히려 NBA에서 전통적으로 레전드들이 많이 달았던 번호는 33번으로 카림 압둘 자바,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스카티 피펜, 그랜트 힐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달았고, 샤킬 오닐조차도 원래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다가 [18] 프로 입단 이후엔 33번을 누가 이미 달고 있어서 32번으로 바꿨다. 레이커스로 이적해서는 레전드 카림 압둘 자바 때문에 33번이 결번되어 있어 34번을 선택했는데 34번 역시 결번되었다.
  20. [20] 이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2K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2K12에서는 전설의 농구선수 18명의 팀을 플레이 하여 플레이한 선수들의 팀을 해금해서 그 팀과 선수들로 통상경기에서 게임을 즐길수 있는 그레이티스트 모드가 있다. 여기서 버젓이 1번, 즉 맨 앞에 위치하고 계신다. 참고로 2번은 매직 존슨, 3번은 래리 버드.
  21. [21] 워싱턴 복귀 이후 상당히 떨어진 수치이다. 그 전까지는 31.5득점.
  22. [22] 실제로 그 이전에 시대를 지배한 러셀과 체임벌린의 경우 서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70년대 최고 선수인 카림은 이때 우승이 한번에 불과하며, 매직과 버드도 실적은 매직이 좋지만 둘 역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2000년대에 두각을 나타낸 샤킬 오닐, 팀 던컨,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누가 압도적으로 최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조던은 90년대 독보적인 원톱으로 나머지 슈퍼스타들을 전부 콩라인으로 만들 정도였다. 팀성적 + 개인성적의 조합으로 이처럼 압도적인 선수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기 면에선 시대를 잘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실력 면에선 이미 역대 최고라 인정받는 마당에 딱히 태클을 걸 건덕지가 없는 것.
  23. [23] 사실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말하기가 좀 애매한게, 조던 수준의 실력과 인기를 지닌 선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매직, 버드나 어빙, 후대의 르브론 등이 최소한 리그 내에서 입지가 조던과 비슷한데 노출도의 차이로 조던이 압도적인 상품가치를 갖게 되었다면 시대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조던만큼의 입지를 가진 적이 없다. 특히 조던의 경우 현재 스타들에 비해 노출도에서 훨씬 떨어진다. 이득이 되는건 오직 이미지 메이킹 하나 때문인데, 사실 조던은 본인의 소심하고 지독하기까지 한 승부근성이 다 까발려진 이후인 201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농구선수들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밑의 기타 항목의 Harris Poll참고) 또한 지금도 그가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걸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종합해보면 노출도면에서 선배들보다 유리했을지는 모르나, 까놓고 말해 후배들보다 이득을 본 부분은 없다. 조던이 압도적인 농구황제로 추앙받는건 르브론 등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퇴선수들은 현역선수들에 비해 선수평가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조던의 역대 1위자리는 요지부동이다.
  24. [24] 실제로 조던은 본인의 무시무시한 승부욕과 연습량 때문에 나태한 선수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나태하진 않더라도 움직임이 둔하거나 해서 팀 연습을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들은 무섭게 몰아세웠는데 이 희생양이 된 선수가 바로 빌 카트라이트였다. 지못미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절친인 찰스 오클리를 보내고 받은 선수란 것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노장이었고 건강이 안 좋던 카트라이트는 둔한 움직임 때문에 공격에서 총알같이 빠른 조던의 패스를 놓치기 십상이었고 부족한 공격 기술 때문에 공격 기회를 날려먹곤 했다.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라는 책에 따르면 조던은 팀 동료들에게 카트라이트에게 패스하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
  25. [25] 그러나 마찬가지로 책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1년간 갈등을 겪고 난 뒤 조던은 카트라이트가 수비에서 해주는 공헌, 그리고 부드러운 리더로서 팀 동료들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했다고 한다. (물론 친하진 않았다. 이후에 3연패 기간 동안 둘은 공동주장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이 책이 92-93시즌에 나왔는데 당시 기자들이 조던과 카트라이트가 1년 뒤 화해하고 우승할때는 큰 갈등이 없었다는 건 쏙 빼놓고, 앞의 자극적인 부분(패스 금지, 공개적 갈구기)만 크게 보도해서 마치 불스의 팀 케미스트리가 아직도 개판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선수단은 크게 분노했으며, 93시즌 내내 이어진 조던의 도박 스캔들 관련 조사와 더불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데 한 몫 했다.
  26. [26] 실제로 로드맨은 아이제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등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리더를 좋아했다. 불스로 온 계기가 코트 위에서 신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유순한 데이비드 로빈슨의 성격이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다고 느껴서 이다.
  27. [27] 로드맨은 찰스 바클리, 찰스 오클리, 알론조 모닝, 드마커스 커즌스등 에 비하면 오히려 얌전한 선수이다. 요란한 염색과 코트 밖에서 기행이 이미지를 만든 것이지 농구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했고 감독, 리더의 말에 잘 따른 선수이다.
  28. [28] ESPN Sports century의 조던 편에서 두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습 경기 중 커와 조던이 매치업되었는데 (조던 주장에 따르면) 심판들이 커에게만 유리하게 불렀다고. 그러자 조던이 슬슬 열이 뻗치면서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트래쉬 토크까지 시도하자 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고. 결국,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조던이 주먹으로 커를 가격했고, 이후 연습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두 선수의 체격, 운동능력, 힘 차이를 생각하면 커가 대단한 것. 조던은 이후 커에게 전화해서 사과를 했으며 이후 커의 승부 근성을 높게 평가해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커와 조던은 서로 잘 지냈다. 은퇴 전까지 쭉 한 팀에서 지내면서 96-97 파이널 샷을 패스해주기도 했다. 비록 사적으로 친한 건 아니었지만(...), 위에 언급된 싸움에 대해 커는 인터뷰에서 "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나를 정말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조던이 자신에게 쥐여사는 동료보다 자신에게 덤빌 수 있는 동료를 더 존중한다고 한 바 있다. 츤데레?
  29. [29] 다만 그랜트는 ESPN의 빌 시몬스가 진행하는 b.s. report에 출연해 조던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또 그랜트는 여기서 조던을 높게 평가했는데, 본인이 뛰었던 2000년대 초 레이커스와 1990년대 초 불스와의 비교에서 불스의 손을 들어주며 "마이클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다."라고 평한 바 있다.
  30. [30] 다만 조던이 빌 카트라이트를 유독 못살게 굴었던 것은 당시 시카고의 보디가드이자 팀 내에서 얼마 안 되는 조던의 절친이기도 했던 찰스 오클리를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를 시키고 데려온 선수가 빌 카트라이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조던의 분노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구단주의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이나 시위를 할 정도였다고. 내 친구 돌려줘 힝? 그리고 상술되어있듯 둘은 화해하며 갈등을 봉합한다.
  31. [31] 유타 재즈 구단주였음.(!)
  32. [32] 영상 3분 20초,
  33. [33] http://cafe.daum.net/ilovenba/7n/245200 영어 원문기사: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88-05-01/sports/8803130519_1_bulls-domination-craig-ehlo-solitary-confinement 사실 하퍼로선 좀 억울할 만한 것이, 해당 멘트는 기자들과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나온 말일 뿐이었고 정작 하퍼와 조던은 바로 전 주에 같이 식사를 할 정도였기에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던의 거의 편집광적인 승부욕의 피해자. 여담이지만 하퍼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시카고 시절에도 조던을 포함해 다른 팀원,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런 하퍼의 리더십, 원만한 성격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문에 필 잭슨이 레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은퇴하려던 하퍼를 만류하고 자기 팀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
  34. [34] 서태웅이 풍남전에서 한 쪽을 다치자 두 눈 감고 던진 장면은 이 부분을 참조했다. 무톰보 신인시절은 91-92시즌이고, 전국대회연재는 1996년도 이다.
  35. [35] 르브론은 A 패스욕심과 폭탄돌리기 패스에서 커리어 내내 비판을 받았고 웨스트브룩의 리바운드는 거품 그자체로서 상대방 마지막 자유투시 OKC 빅맨 2명 스크린을 걸고 웨스트브룩이 수비리바운드를 잡는 방식 및 수비리바운드 양보로 인한 취득 등 많은 헌신으로 시즌 트리플 더블을 완성했다. 물론 MVP도 받았다.1라운드에서 0-4로 힘 한번 못쓰고 하든에 밀려 탈락했다
  36. [36] 89시즌 당시 트리플 더블이 무서웠던 이유는 조던은 원래 트리플더블에 목메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조던은 89시즌 이전까지 통산 트리플더블이 네 시즌동안 5번, 이후론 10시즌동안 8번에 불과했다. 이 시즌에 65경기를 소화한 시점까지 그는 32.6어시스트 7.6어시스트 7.6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트리플더블은 5개. 그러나 트리플더블 얘기가 나오자 마지 시위를 하듯이 나머지 16게임동안 10개의 트리플 더블을 찍었다. 말 그대로 원하면 원하는 대로 스탯을 찍은 것. 무서운 건 그 기간동안 득점은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11경기 중 10개를 하던 (그 중 7개 연속) 기간에는 33.6점 11.4어시스트 10.8리바운드,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가 모두 올랐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격과 리바운드 관련 스탯만 본 것이다. 당시 그는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
  37. [37] 조던이 은퇴하고 야구에 도전한 이유가 사실 조던이 자신이 출전한 경기를 포함해서 NBA 경기들에 돈을 걸다가 걸린 걸 조던의 상품성 때문에 징계를 주지 않고 참던 NBA 수뇌부가 폭발한 것이라거나, 심지어 아버지가 살해당해서 늪에서 발견된 것도 도박빚이 원인이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38. [38]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정도 건이라면 그건 상품성과 무관하게 언젠가 터져버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안고 가려야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버리지 않고 상품성을 보존한답시고 징계 대신 다른 스포츠, 그것도 프로에 도전하게 내버려 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일부 농구팬들의 생각과 달리 야구는 어깨와 무릎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스포츠다. 그나마 조던이라 2년 동안 이런 뻘짓을 하고도 농구하는게 가능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고, 은퇴 후 몇 년을 딴 짓하다 복귀해서도 여전한 지배력을 보여주며 성공한 사례는 그만이 유일하다.
  39. [39] 조던은 98년 은퇴 당시 5억 달러였던 재산을 2014년 기준으로 10억 달러까지 불렸다. 조던이 도박빚에 시달릴 정도로 재산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파산했어야 정상인데, 실제로 연봉으로만 2억 달러를 번 아이버슨을 포함해 상당수 NBA 선수들이 은퇴 후 재산관리를 못해서 파산했다. 즉, 실제로 조던이 도박중독이었다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봤자 지금쯤 다 날렸을 것이다. 조던이 도박을 즐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도박과 아버지 살해건, 야구 도전을 연결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가십성 음모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기사는 주류 언론에서는 다루지도 않으며 가십성 인터넷 언론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이런 매체들의 신뢰도는 그야말로 찌라시 수준.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NBA 사무국이 조던의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도 하는데 NBA 사무국이 이 정도 사건을 저지르고 묻어버릴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NBA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꼴. 참고로 NBA 사무국의 최정점에 있는 총재의 연봉이 800만 달러로, NBA 선수 중에서는 평균(5~600만)보다 약간 많고, 스타팅 멤버급의 선수의 연봉도 되지 못한다. NBA는 구단주들의 돈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그리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NBA 총재는 리그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구단주들이 뽑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결코 절대권력자가 아니다.
  40. [40] 오히려 89시즌엔 결승 상대인 LA 레이커스조차 스윕해버린 압도적 전력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패배(2패)를 안길 정도로 강팀들을 물고 늘어졌다. 참고로 배드 보이스는 백투백 우승 시즌에 플레이오프에서 7경기 패배했는데 이중 5경기가 조던 불스에 의한 패배였다. 비록 연장 접전 끝에 패하긴 했지만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이자 당대 최강의 수비팀인 86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기록인 63점을 세운 것도 그의 강심장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41. [41]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National_Basketball_Association_single-game_playoff_scoring_leaders.
  42. [42] 베일러가 전성시절 활약할때는 공격해서 득점하기가 현대 농구 보다 훨씬 쉬운편이었다.
  43. [43] 50점을 2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이들 뿐이며, 찰스 바클리(56점),레이 알렌(51점), 코비 브라이언트(50점), 빈스 카터(50점), 칼 말론 (50점), 도미니크 윌킨스(50점) 등도 한번씩 넘겨본 적이 있다.
  44. [44] 목표 득점을 정하고 뛰는 선수이니 정말 차원이 다른 선수이다. 조던에게 1차, 2차 개인스탯 따위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선수이다. 참고로 2차 스탯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단순 참고용으로 해석해야 한다. 공을 많이 소유하는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에 레지 밀러, 클레이 탐슨유형의 슛터에게는 낮게 측정된다.
  45. [45] 페이튼이 상대를 인격적으로 도발하는 입발이었다면, 조던은 상대방을 실력으로 무시해서 살짝 비꼬는 입발. 혹자는 우아하다고도 표현했지만 달리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고 짜증나는데, 근데 틀린 말도 아니고 이기지는 못하겠고. 사람 환장하게 하는 트래쉬 토킹의 소유자였다.
  46. [46] 물론 조던도 페이튼의 트래쉬토크에는 넌더리를 치면서 '그의 아가리에 농구공을 쳐넣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47. [47] 참고로 조던은 항상 이 때를 회상하며 자기 인생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순간이였다고 한다. https://youtu.be/dudyYrAb4HY
  48. [48] 델라웨어 주의 최대도시와 명칭이 같다.
  49. [49] 조던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아직 아기였을 때 아이들을 조용한 곳에서 키우고 싶었던 그의 부모 (제임스, 들로리스 조던)는 윌밍턴으로 이사갔다. 조던은 같은 주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까지 쭉 그곳에서 살았다.
  50. [50] 이 이유는 조던이 당시 3개의 스포츠 (야구/농구/풋볼)을 동시에 할 정도로 농구는 취미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던이 가장 좋아하고 열심히 한 스포츠는 아버지 제임스도 좋아했던 야구였다. 그러나 탈락 사건 이후 바로 풋볼을 그만두고 야구도 1년만 더 하다 그만두면서 농구에 올인한다. 뒤에 서술되는 급격한 실력 향상은 이 덕분. 여담이지만 조던은 농구에 올인하기 시작한 이후 2군(Junior Varsity) 소속이면서 1군 연습까지 뛰었으며, 1군에 올라간 이후에도 1군/2군 연습에 전부 참가할 정도로 독하게 연습했다고 한다.
  51. [51]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pel Hill. UNC, 채플힐 또는 운동부 마스코트인 타힐스(Tar Heels)라고 한다.
  52. [52] 실제로 유망주의 잠재력에 대한 기대치로 보면 슈팅 가드는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낮은 편이다. 지금도 선호도가 높은 포지션은 센터(현재 거물급 센터가 없는 것은 유망주 풀이 고갈된 것에 따른 것이 크며 2007년에 정통센터인 그렉 오든이 등장했을때는 객관적인 실력과 대학에서 활약에서 그와 동갑인 케빈 듀란트가 훨씬 앞섰음에도 오든이 압도적인 1순위 후보로 꼽혔다.)와 포인트 가드이며, 그 다음이 포워드 포지션이고 마지막이 슈팅 가드이다. 조던이 드래프트되던 84년에는 NBA역사가 이미 40년에 가까웠음에도 모든 포지션 중 슈팅 가드만 유일하게 MVP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그 이전까지 팀을 우승으로 이끌던 리그 최고수준의 에이스들은 센터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PG나 SF, 이들보다는 적게 파워 포워드도 있었지만 슈팅 가드는 없다시피 했다. 제리 웨스트의 경우 커리어 랭킹 등에서 슈팅 가드로 주로 분류되고는 있으나, 게임리딩을 팀에서 가장 많이 했으며 플레이스타일상 공격형 포인트 가드나 듀얼 가드에 가까웠다. 실제로 백코트 파트너도 슈팅 가드였던 게일 굿리치였다. (굿리치는 웨스트 곁을 떠난 이후 리딩가드로 변신한다.) 그외에 레전드로 꼽히던 슈팅 가드를 보면 길거리 출신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자랑하던 얼 먼로, 윌트 체임벌린 이후/마이클 조던 이전까지 가장 압도적인 득점기계였던 조지 거빈, 현란한 볼핸들링과 패스/강력한 득점력을 겸비한 피트 매러비치 등을 꼽을 수 있으나 개인기량에 비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은 다른 레전드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평가받은바 있다. 실제로 조던 이전까지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A scoring champion doesn't win championships)"란 속설이 있었고, 이를 깬 선수는 역사상 조던 외에 조지 마이칸, 카림 압둘자바, 샤킬 오닐 뿐이었으며 모두 센터였다.(여담이지만 이 셋이 득점왕+우승 콤보를 이뤄낸 횟수를 모두 합쳐도 조던이 혼자 해낸 횟수보다 적다) 실제로 ESPN의 포지션별 랭킹을 보면 (http://www.espn.com/nba/story/_/page/nbarankSGs/ranking-top-10-shooting-guards-ever) 역대 톱10중 조던시대 이전 선수는 단 두명, 웨스트와 거빈 뿐이다. 사실 ESPN 랭킹이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미국 언론의 평가도 조던 이후 슈팅 가드들이 조던 이전 슈팅 가드들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높다. 게다가 웨스트의 경우 위에 언급된 것처럼 포인트 가드로 주로 뛰었었고, 거빈도 후대에서나 슈팅 가드로 분류되지 실제론 스몰 포워드로 거의 출장했다. 이런 상황이니 비록 부상이 있다고는 하나 최고의 대학 센터 중 하나였던 보위를 제치고 조던을 뽑을 팀이 있을리가 없었다. Jordan Rules를 써냈으며 "조던 전문 기자"로 유명한 샘 스미스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 조던을 드래프트한 불스의 로드 쏜 단장도 조던을 뽑고선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http://www.nba.com/bulls/news/jordanhof_prequel_090824.html/ 당시 불스는 "올해의 대학선수" 조던 대신에 모든 팀들이 그랬듯이 센터를 원했으며, 쏜이 조던을 뽑고 나선 "그(조던)가 매우 뛰어난 공격수이지만 압도적인(overpowering) 공격수는 아닙니다. 그는 이 팀을 확 바꿔놓진 못할 겁니다"라고 했으며 "그가(조던이) 7피트였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센터가 없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라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 조던은 신인시절에 총득점 1위/평균득점 3위를 기록하며 87시즌은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시즌 3000점을 넘기는 등 NBA역사상 최고의 공격수가 된다. 또한 NBA의 전설적인 감독인 척 데일리는 당시 드래프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갖고 있었으며 센터를 원한다던 자신의 친구인 NBA 단장에게 (인터넷에선 포틀랜드란 설이 돌고 있으나 데일리는 구체적인 팀을 밝힌 적이 없다.) "조던을 뽑아서 걍 센터로 써"란 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다큐로 가면 드래프트 당시 198cm/85.5kg이던 조던이 센터로 뛰는 건 불가능했으나 그만큼 그의 실력이 대단했다는 말.
  53. [53] 바로 이 경기.#49초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이다.조던이 크로스 오버 연타로 래리 버드를 농락하며 점퍼를 집어넣는 모습은 17초부터 나온다.
  54. [54] 참고로 두 팀의 전력을 생각하면 2차연장까지 몰고 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86셀틱스는 래리 버드 시절 셀틱스 중 단연 최고 전력이며 당시 기준으로 역대 4위의 승률을 자랑하던 팀이었다. 17시즌 기준으로 역대 7위로 떨어졌지만, 정규시즌 승률이 팀 전력을 100%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 (67승이나 하고 1라운드 탈락한 07매버릭스나 73승하고 우승실패한 16 워리어즈 등) 아직도 87셀틱스, 96불스 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팀을 논할 때 거론된다. 게다가 이 시즌에 셀틱스는 정규시즌에 홈에서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아있는 40승 1패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단 1패도 하지 않았다. 즉, 86보스턴을 홈에서 꺾는다는 건 레이커스를 센세이셔널하게 꺾고 올라온 트윈타워의 휴스턴 로키츠도, 슈퍼스타 도미니크 윌킨스가 이끌었고 배드보이즈를 제압했고 올라왔던 애틀란타 호크스도, 수비의 달인이던 폴 프레시와 시드니 몽크레프, 20-10에 가까운 기록을 내던 빅맨 테리 커밍스 등이 버티며 4년 연속 동부 결승에 오른 밀워키 벅스 등 강팀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근데 이걸 플레이오프에 턱걸이로 올라온 불스가 거의 해낼 뻔한 것이었다. 86불스는 이해 조던의 공백을 이겨내지 못하고 30승에 그쳤다. 당시 우승권 팀은 동부가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0승 이상이 서부는 2팀, 동부는 4팀) 중위권 이하 팀부터는 동부가 약세를 보였는데, 시카고가 기록한 30승은 서부 꼴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와 동급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23팀 중 16팀이나 포스트시즌에 나가는 널널한 기준이었다. 즉, 바닥에 가까운 전력의 팀이 압도적인 최강의 팀과 붙었는데, 한 선수가 미친듯이 날뛰어서 역대급 업셋을 이뤄낼 뻔한 것이다.
  55. [55] 무엇보다 버드는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말과 함께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개는 걸 즐기는 선수였다. "내가 저기서 공을 잡아서 저기로 이동해 위닝샷을 넣을거야"라고 친절히 알려준다음에 그대로 실행한다던지... 비록 저 상황에서 셀틱스가 이기긴 했지만 당시 모든 포커스는 조던에게 있었고, 게다가 역대 최강의 팀이자 역대 최강의 수비팀 중 하나가 2년차 가드에게 플레이으포 한 경기 역대 최다득점을 내준상태에서 67승이 30승 팀을 이기는 건 전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위에 언급된 파이널 패배 이후 인터뷰처럼 버드는 상대방을 인정해야 할 경우 시원하게 인정하는 편이다.
  56. [56] 당시 조던은 "노마크에서 동료가 던지는 것보다 내가 수비를 하나 둘 달고 던지는 게 성공률이 높은데 왜 내가 볼을 돌려야 하나?"라고 반발했다고 한다. 틀린 말만은 아니다
  57. [57] 당시 시카고 불스의 구단주조차 조던한테는 한 수 접어줬다. 조던의 절친한 동료였던 찰스 오클리를 트레이드시키려 하자 조던이 구단주 사무실까지 처들어와(...) 따지기 시작했고 이에 구단주는 조던을 달래느라 쩔쩔 맸다고. 당시 조던의 상품가치를 생각하면 구단주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외에 사족이지만 사실 조던은 시카고 구단주인 제리 라인스토프를 상당히 싫어했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제리가 버스에 올라탈 때마다 짐승 울음소리를 흉내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명전 연설에서는 제리를 지목하면서 저 양반은 내가 안 불렀는데 왜 왔냐고 까기도 했다. 너무한다. 물론 조던만 구단주와 사이가 개판이었던 건 아니고... 스카티 피펜 역시 항목에 언급되어 있듯이 연봉 관련해서 짠돌이 구단주와 대립한적이 있고 필 잭슨도 구단과의 마찰이 심해 두번째 쓰리핏을 달성한 후 반강제로 나가버렸다.
  58. [58] 퍼거슨 경은 NBA로 치면 포포비치 수준의 위치를 맨유 안에서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59. [59] 이때 피스톤즈가 플옵에서 당한 패배는 불스에게 당한 2패가 유일하다. 결승에서 붙은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조차 전패를 당했다. 다만 당시 레이커스의 일방적인 패배는 매직 존슨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얼마 뛰지 못한 점이 컸다.
  60. [60] 일종의 지역방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요소가 다르다. 지역방어는 각 선수가 한 지역을 맡아 수비하고 공격수가 자신의 지역에 근접하면 견제하는 정도이다. 실제로 지역방어는 NBA급으로 운동능력과 돌파가 뛰어난 선수들이 있으면 막는데 거의 효과가 없으며, 지역방어 도입 전후로 앨런 아이버슨같은 단신 돌파형 선수들의 득점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조던룰은 오직 한 선수인 조던만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다른 선수들에 대한 수비를 상당부분 포기하면서까지 조던 한명만 막으면 된다는 전술이다. 후술되듯이 돌파할 때마다 더티하기로 유명한 피스톤즈 선수들에게 한대씩 돌려맞는건 기본이다.
  61. [61] 물론 주된 대상은 당연히 조던이었다. 조던이 받는 견제와 피펜이 받는 견제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피펜은 돌파만 견제하면 됐지만, 조던은 공 잡기 전부터 물고 늘어져야 했다.
  62. [62] 당연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활약이다. 다만 그 전까지 조던은 대괴수급 활약을 펼쳤는데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한 점. 또한 플옵에서 안 그래도 그닥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닌 동료들이 단체로 버로우한 것(피펜은 이때 첫 올스타에 오르긴 했지만 우승을 노리는 팀의 2옵션으로는 많이 모자란 감이 있었다.)을 생각하면 저 정도로 디펜딩 챔피언을 꺾긴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이 시즌 우승한 피스톤즈를 7차전까지 물고 늘어진 유일한 팀이란 점에서 불스가 피스톤즈에게 얼마나 버거운 도전자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63. [63] 실제로 위의 설명처럼 다소 가벼운 몸을 가지고 있었던 조던은 이 이후로 근육을 본격적으로 불리면서 포스트업 등 힘을 쓰는 면에 있어서 더 강해졌고, 정신적으로도 디트로이트의 거친 수비를 이겨냈기에 더욱 강해질수 있었다.
  64. [64] 물론 피스톤즈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건 아이재아 토마스 항목 참조
  65. [65] 사실 확증이 없어서 그렇지 매직 존슨을 비롯한 당시 NBA 선수들이나 몇몇 관계자들이 이걸 사실인 양 지금도 이야기하는 것이나 토마스가 이를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 걸 생각하면 풍문이 아니라 거의 정설 수준이다. 여기엔 또 뒷얘기가 있는데 덩크 콘테스트 참가자들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공개연습에 참가하게 되며 이 때는 각자 소속팀의 연습장비를 착용하는게 불문율이다. 그러나 신인이라 물정을 몰랐던 조던은 스폰서 나이키의 요청대로 순진하게 나이키 물품을 차고 나섰다. (당시만 해도 나이키는 지금같은 독보적인 1위 기업이 아니라 컨버스, 아이다스, 리복과 비슷한 선에서 경쟁하던 회사였기 때문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선호했다.) 게다가 덩콘은 이때 2회에 불과해 더욱 조던이 상황을 몰랐던 것. 이에 조던이 건방지다고 생각한 선배들이 작당해 그를 왕따시켰다는 설이며, 이는 현지에서 'Freeze-Out' 사건이라 불린다. 실제로 조던이 이때 슛을 다섯번밖에 못 쐈다. 게다가 토마스는 볼분배를 책임지는 포인트 가드다. 이 경기 직후 불스와 피스톤즈가 붙게 되는데, 이 경기서 조던은 무려 49점을 넣으며 디트로이트를 박살내는 "복수"를 한다. https://m.youtube.com/watch?v=gANrj2LehiQ
  66. [66] 그전까지 "득점왕은 우승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실제로 71년 카림 압둘자바(당시 이름은 루 앨신더) 이후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차지한 선수는 조던 전까지 20년동안 없었으며 NBA 역사 전체로 확장해봐도 조지 마이칸(2회), 압둘자바 (1회), 조던 (6회), 샤킬 오닐 (1회) 뿐이다. 조던 역시 자기만 잘한다는 오명을 썼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에 래리 버드나 매직 존슨보다 못하다"는 소리도 단골로 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러한 편견과 속설을 깨고 우승한 것이니 눈물이 나올 수밖에. 다만 표현상 득점왕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피트 매러비치나 조지 거빈 등 센터가 아닌 선수 중 득점이 주특기인 선수(즉, 조던과 유사한 스타일이던)는 우승을 못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확률높은 공격을 하는 센터가 아닌 이상, 득점왕을 할 정도로 한 선수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팀은 공격성공률이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으며 (수비 또한 집중되므로) 이런 팀의 전력엔 한계가 있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센터 득점왕들은 우승을 조던 이전에 이미 했었고. 근데 이 의미로 보면 아직까지 유일한 예외는 조던으로 남아있다. 조던과 가장 유사한 선수인 코비 브라이언트조차 득점왕에서 거리가 멀어진 이후에야 우승했다.
  67. [67] 왠만한 선수의 커리어하이라고 할법한 수치고, 실제로 5회나 파이널을 밟은 코비 브라이언트는 이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한 적이 딱 한번 뿐이지만 정작 조던은 6번의 파이널 중 두 번째로 낮은 평균득점이다.
  68. [68] 2차전에서 조던이 파울 트러블에 걸리자 불스가 피펜을 매직에게 붙히고 그가 훌륭히 막은 것 때문에 주 매치업이 피펜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스카티 피펜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2차전을 제외하고 매직을 막은건 거의 조던이었다.
  69. [69] 추후 인터뷰 시 "3점슛이 마치 자유투 같은 느낌이었다"고...
  70. [70] 사실 조던은 이미 90시즌에 삼점슛을 37%의 확률로 경기당 한 개 이상 성공시키며 어느 정도 옵션으로 추가했지만, 본인이 워낙 삼점을 좋아하지 않아 (확률이 낮다고...) 경기당 시도수가 한개 정도 일때가 많아 성공률이 들쭉날쭉했다. 이에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조던에게 의도적으로 공간을 주면서 삼점슛을 유도하는 수비를 했는데, 이에 빡친 것인지 조던은 연달아 삼점포를 쏴서 적중시킨다. 이때 조던의 삼점슛 성공률은 10개를 쏴 6개를 넣어 60%였는데, 더 임팩트가 컸던 것은 6개를 연속으로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처음 두개를 쏴서 연달아 놓치자 해설자들이 "마이클이 외곽포를 연달아 쏘고 (bombing away) 있는데 평상시와 다르네요"라고 하다가 삼점을 하나하나 성공시키면서 결국 당시 NBA 기록이었던 한 경기 6개 성공과 타이를 이루자 해설자가 외쳤던 "조던이 삼점이라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Three pointers for Jordan!! What in the world is going on!?"은 유명한 멘트다. 여담이지만 이때 파이널을 앞두고 언론이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가 누군지 가리는 무대"라고 했는데(실제로 두 선수는 해당시즌 MVP투표에서 나란히 1,2위를 했다) 자존심이 상한 조던은 맹활약을 하고 나서 "그들이 (나와 드렉슬러의) 차이를 알았겠죠"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자존심과 무시무시한 승부욕을 볼 수 있는 장면
  71. [71] 은퇴 당시 농구계, 아니 전 세계의 반응은 위의 잡지 표지와 같았다. "....왜??" 당시 조던은 NBA에서 딱 9년을 뛰었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올해의 스테픈 커리나 12-13시즌에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며 MVP/우승/파이널 MVP까지 거머쥔 르브론 제임스가 갑자기 은퇴한다고 생각해보자. 게다가 조던은 이미 "역대 최고의 선수"론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평가가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였다.(한국 팬덤에서는 실력 외에 업적을 두고 선수 평가를 하는 성향이 있어 아무리 뛰어나도 커리어가 낮으면 낮게 평가받지만, 미국은 "해당 선수가 얼마나 뛰어나고 리그 내에서 지배력을 발휘하느냐"를 두고 평가하기 때문에 겨우 9년 뛴 조던이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것이다. 게다가 빌 러셀 이후 최초로 3연패를 달성했는데, 빌 러셀의 경우 개인으로선 체임벌린에 밀리지만, "팀의 힘"으로 우승을 거뒀다는 평인 반면 조던은 개인으로서도 팀으로도 완벽히 최고였기에 "영웅"에 환장하는 미국인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최고였던 것. 물론 이후 복귀하면서 업적 면에서도 조던이 역대 최고로 인정받기 부족함이 없게 된다) 또한 여전히 낮은 연봉과 별개로 천문학적인 광고수익으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던 시점. 일과 돈, 명예 모두 거머쥔 상태에서 난데없이 은퇴하니 당황스러운 것.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렇게 이미 절정에 있었기에 더 뛸 동기를 찾기 어렵기도 했다. 이미 역대 최고선수 평가를 찍은 시점에 MVP를 타봤자, 우승해봤자 본전일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조던은 너무나 엄청난 인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받고, 그의 말 하나하나가 기사화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지긋지긋해 때려칠까 싶던 참에 존경하고 사랑하던 아버지까지 사망하니 결정타가 된 것.
  72. [72] 또한 만약 마피아가 보복살해했다면 당연히 이들은 경고를 위해 살해 이후 조던에게 메시지를 남겼을 텐데,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가 실종된 지 며칠동안 조던 가족은 실종신고를 했고 경찰도 실종사건으로 처리했을 정도로 이들은 제임스가 살해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73. [73] 협박론도 부정론도 각자의 추측일 뿐이고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위에 언급된대로 정황상 마피아 협박론은 억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식의 억지스런 설까지 "밝혀진 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슈퍼스타들에 대한 온갖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엘비스가 외계인이라거나 투팍이 살아있다거나)에 대해서도 "밝혀진건 없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애초에 "협박이 없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한 단 말인가? 명백한 사실은 "협박론"에 대한 실증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 뿐이다.
  74. [74] 조던이 집중할 때 혀 내미는 버릇은 아버지를 따라하다 얻은 것이다. 실제로 제임스 조던은 조던의 친구들 모두와 친분이 있을 정도로 조던과 각별한 사이였으며, 정신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75. [75] 필 잭슨은 조던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그가 떠날수도 있겠구나라고 불현듯 생각했다고 하며, 조던이 은퇴하겠다고 하자 그의 마음을 돌릴려고 애썼다고 회고했다.. "신은 자네에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주를 주셨는데 이렇게 떠나는 건 무책임한 일일세."하면서. 하지만 결국 조던의 은퇴를 막지는 못했다.
  76. [76] 조던은 이때 실린 비난기사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이후 SI표지 모델로 서는것을 거부했다. 이후 SI의 50주년 기념커버는 수락했지만 특집 인터뷰는 거절했다고.
  77. [77] 매일 200~800회의 스윙연습을 했다고 한다.
  78. [78]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jor_League_Baseball_replacement_players.
  79. [79] "조던은 선수들이 피켓을 들고 있는 선을 지나고 싶지 않아했다, 또한 그는 구단주들이 티켓을 팔기 위한 방법으로서 "대체선수"로 여겨지고 싶지 않아했다. http://hangtime.blogs.nba.com/2014/08/12/mlbs-worst-stoppage-in-1994-brought-jordan-back-to-his-day-job/. "조던은 화이트삭스에 대체선수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http://www.nydailynews.com/sports/baseball/milestones-1994-major-league-baseball-strike-killed-article-1.2747085.
  80. [80] 자기 전용비행기도 쓸 수 없고 팀원들과 함께 낡고 좁은 버스로 이동해야 하니까 빡친 조던이 아예 자기 돈으로 버스 두 대를 샀다. 한 대는 앞에서 얘기한대로 선수용이고 나머지 한 대는 바와 음식 조리실까지 갖춰진 자기 전용(....). 나중에 자기 전용버스도 야구를 그만둘 때 구단에 기부했고, 그 덕분에 한동안 배런스는 모든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꿈의 구단이었다(...).
  81. [81] 사진= ’더 스코어‘ 공식 트위터. 정확히 말하면 해당 자료는 조던의 에이전트인 데이빗 포크가 운영하는 페임사가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인데, 이를 통해 조던이 직접 밝힌 말은 단 한 마디이다. "I'm back".
  82. [82] 이떄 불스의 로스터 중 조던과 오래 뛴 선수들은 스카티 피펜과 B.J 암스트롱, 월 퍼듀 정도였고 나머지는 그냥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피펜이나 암스트롱, 퍼듀는 조던과 1차 스피릿을 함께했기 때문에 조던에 대해 잘 알았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조던의 경기만 봐왔지, 함께 뛴 적은 없었으므로 팀이 막상 위기에 닥쳤을때 조던만 바라보았다고 회고했다. 물론 조던도 새로운 동료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에 위기상황때 이들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파악할수 없는 상태였다.
  83. [83] 물론 이건 당시의 사태일뿐. 조던이 23번으로 복귀하고 더 이상 발매되지 않게된 45번 유니폼들은 이후 미친듯이 프리미엄이 붙었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하려면 가격대는...
  84. [84] 15-16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73승 9패로 이 기록을 경신하였으나 우승은 하지 못했다. 95-96 시카고 불스가 플레이 오프 포함 87승 13패를 했으나 15-16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는 화려한 정규시즌에 비해 플레이 오프에서는 88승 19패를 하였다.
  85. [85] 이 시리즈 평균 득점이 27.3점. 그런데 이것만 해도 파이널 평균 득점 통산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긴 하다. 조던의 파이널 평균 득점은 33.6점.
  86. [86] 여담이지만 이때 함께 공을 껴안고 있는 브라운이란 선수가 함께 공을 꽤 오래 잡고 있었는데, 상황을 파악하고 공을 놔줬다. 만약 놓지 않았다면 보싱와 취급을 받을 뻔 했다.(...) 자세히 보면 한 정장 입은 남자(얼굴은 안 나왔지만 팀 관계자로 추정)가 비키라고 브라운의 등을 계속 치는 걸 볼 수 있다.
  87. [87] 95-96 시즌 그들이 최고 승률 기록을 세우기 전의 기록인 윌트 체임벌린의 LA 레이커스와 동률의 기록이다.
  88. [88] 그런데 훗날 조던의 트레이너였던 팀 글로버에 따르면 감기가 아니고 식중독이었다고 한다. 유타 원정을 떠나 유타 원정때 늘 이용하던 Park City라는 소도시의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밤에 배가 고파서 룸서비스를 시켰으나 9시가 지난 시각이라 룸서비스는 종료된 후였다. 그래서 야식으로 피자를 시켰는데 피자 한판 배달하는데 배달부가 다섯명이나 온 것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해서 버리자고 했는데 마사장님은 처묵처묵...
  89. [89] 여담이지만 숙취라고 보도한 언론사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스카티 피펜은 이후 인터뷰에서 숙취설에 대해 일축한 바 있다.
  90. [90] 이것도 여담이지만 2017년 플레이오프에서 유타 재즈의 고든 헤이워드가 식중독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면서 조던의 대단함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사실 헤이워드가 정상인게, 식중독에 한번 걸리면 농구는 커녕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특히 조던처럼 가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고열까지 있는 경우는 더더욱...이걸 안고 그 빡센 NBA 경기를 소화했다는 건 부상투혼 수준이 아니라 상식 밖이다.
  91. [91] 재미있는 점은, 1차 3연패 때도 마지막 92-93 시즌에는 상대였던 피닉스 선즈가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갖고 있었다.
  92. [92] 딱 이틀 쉰 불스에 비해 재즈는 무려 열흘을 쉬었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동안 아무 부담없이 시카고가 혈투 벌이는 걸 말 그대로 구경한 것. 두 팀 모두 주축들이 노장들이라 체력적 어드밴티지는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재즈는 결승 전까지 6연승을 거두며 모멘텀 측면에서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93. [93] 공격시작 후 4초만에 득점을 성공시켰다. 설령 재즈가 다음 공격에서 24초를 모두 소모해도 마지막 공격권이 불스에게 있었을 상황이었기에, 재즈에게 '반드시 공격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줄 수 있는 플레이였다.
  94. [94] 1998 NBA 파이널 중계만 보더라도 "The Last Shot"을 본 NBC의 밥 코스타스가 "몇 달 후의 일은 누구도 모르지만, 저 슛이 조던의 마지막 슛일 수도 있다." "만약 저게 조던의 마지막 이미지라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스포츠 방송에서 공공연하게 언급될 정도로 다들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것.
  95. [95] 그러나 사실 닉스와의 루머는 2차 3연패 기간 내내 있었다. 95년 72승 시즌 중에도 시즌 종료 후 이적할 가능성이 있다며 기사화되고 한국에 보도되기도 했다.당시기사 당시 조던은 95-96 시즌에 장기계약이 끝났고, 그 이후 2년은 단년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떨어진 성적이 62승 20패라지만 시즌 중후반에 승률을 끌어올린 것이지, 시즌 초중반엔 진짜 좋지 않았다.
  96. [96] 1998년이 아니라 97년에 5번째 우승을 차지한 직후의 장면이다. 홈에서 우승한 후 카메라를 향해 '6번째 우승을 향해 ㄱㄱ'라는 식으로 장난친 거였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97. [97] 4분 58초부터 보면 된다.
  98. [98] 확실히 저하된 것이 시카고 시절과 달리 수비를 달고 뛰는 점프슛이 상당히 늘어났다. 응? 단적으로 2차 복귀 이후로 이상하게 2단 점프슛을 자주 시도했는데, 그 이유가 스피드와 점프의 약화로 인해 한번에 다른 선수를 제칠 수 없어서(…). 빨리 높게 못 뛰면 두 번 뛰면 되지!
  99. [99] 당시 나왔던 소인배복수
  100. [100] 덴버 너기츠의 영구결번 선수다. 등번호는 33번
  101. [101] 시카고 불스와 조던의 계약은 프로구단 역사에 유례가 없을 노예계약이다. 이때문에 그는 연봉에 대한 불만이 꽤나 많았으며 농구화 판매 등의 가외활동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정확히 말해 노예계약까지는 아니었으나, 계약 당시에는 연봉이 고액에 속했지만 90년대 초반 엄청난 연봉의 상향이 이뤄지면서 기존의 장기계약자들이 본의 아니게 노예계약이 되어버린 것. 사실 당시 연봉 인플레는 이후 너무 극심해서 개나소나 1000만이라는 분위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 불리츠의 주원 하워드. 그리고 조던보다 더 피를 본 것이 다름아닌 피펜이다.
  102. [102] 이 과정에서 좀 안좋은 뒷소문이 있는데, 어느 종목이건 사실 현역 선수의 구단 지분 매입은 금지되어 있다. 즉 원래 워싱턴 위저즈의 주주였던 조던은 선수복귀가 불가능했지만, 선수로 복귀하기 위해 주식을 당시 워싱턴 위저즈 이사회에 임시로 양도하고 선수활동 종료 후 주식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주식 양도 후 선수 복귀를 했는데, 이게 어쨌든 편법이라 구두계약으로밖에 할 수 없다 보니 위저즈에서 2시즌 뛰고 나서 다시 구단주로 복귀하려는 찰나 당시 대표이사였던 에이브 폴린 등이 구두합의를 꺠고 조던의 복귀&원 지분 양도를 거부한 뒤, 아예 조던을 해고해버린 것. 관련 기사. 법적으론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구두로 합의한 걸 깼다는 점에서 도의적으로는 2015년 디안드레 조던의 이른바 'D통수 사건', 캐벌리어스와의 구두합의를 저버리고 유타재즈와 계약하며 배신자 소리를 들었던 카를로스 부저만큼이나 위저즈 구단이 양아치 짓거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해 조던은 이미 망가져서 물이 수시로 차는 무릎을 가지고 팀을 플옵에 올려놓겠다고 개고생을 했는데 구단이 뒤통수를 친 것. 게다가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던은 선수복귀를 회의적으로 봤으나 구단이 이를 종용했고, 그 목표는 팀의 가치 향상이었다고 한다...안습
  103. [103] 실제로 샬럿 밥캣츠의 훈련 영상이 떴는데 슈팅 게임에서 조던이 승리했다. 현역 선수들 지못미.
  104. [104] 사실 조던의 경우 만40이 넘었을때 NBA에서 전경기 평균 37분을 뛸 정도로 몸상태가 비상식적으로 좋았다. 시카고 시절 조던이랑 비교하니까 늙었다, 느리다, 둔하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거지 사실 워싱턴 시절만 하더라도 웬만한 30대 슈퍼스타들급으로 잘 움직였다. 조던과 체격조건이 비슷하고 몸관리가 상당히 잘된 빈스 카터의 경우 만 40세가 된 2017시즌에 평균 24.6분을 뛰면서 고작 평균 8점을 기록했다는 걸 생각하면 조던의 몸은 일반 상식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수준(...)이란 걸 알 수 있다. (물론 카터가 NBA에서 훨씬 오래 뛴 걸 감안하긴 해야하지만) 또한 실제로 조던의 드래프트 동기인 케빈 윌리스 역시 만 45세를 목전에 앞둘때까지 뛴 적이 있다. 조던이 칼 말론 정도를 제외하면 역대 어떤 선수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튼튼한 육체를 가진 점, 그가 당시 전성기급으로 감량을 했다는 점, 나이는 많지만 NBA경기를 많이 뛰진 않아서 마일리지가 적게 쌓인 점을 생각하면 당시 50세이던 조던이 출장시간 관리를 철저히 받으면서 벤치멤버로 뛰는 것이 전혀 무리한 주장은 아니다. 위에 언급된 ESPN의 토론 당시에도 극렬 조던 빠인 스킵의 주장은 말 그대로 스킵(...) 하더라도, 코비 광팬이자 스킵과 철저히 대립하는 스미스 역시 조던이 뛸 수 있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어디까지나 "얼마나 잘할 건지"를 놓고 논했다. 실제로 현지 전문가들과 팬들 사이에서 이뤄진 토론의 주요 내용은 조던의 복귀가 가능하냐 마냐가 아니라, 일단 복귀는 가능하다고 대다수 인정하고 얼마나 잘할 건지 여부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벤치멤버급, 그것도 키식스맨이 아니라 데릭 피셔의 말년처럼 클러치 득점은 뛰어나나 수비는 자동문이고 나머지 부분에서도 별 뛰어나지 못한 후보선수급이 될게 유력하다. 물론 50대가 그 정도 하는 것도 기적에 가깝지만, 황제의 마지막 기억으론 너무 추레하기(...) 때문에 이 때 복귀는 팬들 사이에서도 그리 바라는 목소리가 높지 않았다.
  105. [105] 여담이지만 던컨은 그냥 농구 좋아하는 고위 공무원이 아니라 실제로 젊은 시절에 호주에서 4년간 프로선수로 뛴 적이 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학생선수들도 학점을 따고 제대로 수업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던컨은 스포츠 특기생 제도가 없는 하버드 출신) 64년생으로 다른 연예인들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지만, 잠깐이나마 프로물을 먹은 분답게 오히려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체력과 압도적인 기술을 보여주신다. 여담이지만 던컨의 경기를 보면 자기가 돋보이는 것보다 패스를 주로 하면서 다른 선수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하는데 2014년에는 맘먹고 나오셨는지 20점 11리바운드 6어시스트라는 엄청난 기록을 내면서 (20점은 Celebrity Game 사상 최고 득점. 참고로 이때 최종 스코어는 60대 56) MVP에 선정됐다.
  106. [106] 참고로 마이클 길크리스트는 그냥 듣보잡 수준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2픽으로 꼽힌 대형 유망주이다. 샬럿 밥캣츠의 차세대를 책임지는 선수. 이 때문에 팬들은 설령 조던이 이겼으면 이긴대로 빡쳤을 거라고(...) 이딴 놈이 우리 팀 유망주라니
  107. [107] 사실 1대1농구는 체력소모가 3대3이나 풀코트 농구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에 늙은 조던이라도 이기는게 가능하다. 이때 조던은 260파운드에 달하던 체중을 현역시절에 가깝게 줄인 상태라 몸상태가 매우 좋았다. 또 5점내기같은 짧은 경기에서는 얼마든지 이변이 가능하다. 농구는 공격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슛하나 놓치고 "어? 어?"하는 사이 5점 정도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조던이 은퇴후 주최한 농구캠프에서 조던과 나이가 비슷한 일반인이 무리한 페이더웨이를 연속으로 성공시켜 3점 내기 1대1에서 조던을 이긴 적이 있다. 하물며 한때 역대 최고 수준의 기술을 자랑했던 조던이야... 조던을 상대한다는 긴장감, 약간의 운이 따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다.
  108. [108] 사실 이러한 견해는 다소 비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80년대 NBA의 흥행을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는 각각 가드, 포워드 포지션에서 리그를 지배했다. 다만 매직은 카림 압둘자바, 버드는 로버트 패리시와 같은 리그 정상급 센터들과 함께 뛰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상급 센터없이 리그를 지배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기존의 NBA 패러다임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109. [109] 조던이 딱히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플레이를 한건 아니기 때문에 농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다. 다만 NBA의 인기를 끌어올려 NFL이나 MLB와도 경쟁을 할만한 단체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수많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데 우상으로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기 떄문에 'NBA'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수는 있을지도
  110. [110] 정확히 말하면 매직 존슨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의 정점을 찍은게 바로 조던이다. 예전에는 큰 선수들은 당연히 골밑플레이를 익혔으나 빅맨의 체격으로 퍼리미터에서 뛰는 매직의 등장은 70년대생 선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기존의 센터급 선수들이 다재다능한 포워드가 되는데 영향을 주었다.(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대표적인 선수들이 크리스 웨버케빈 가넷이다. 특히 가넷은 첫 올스타전에서 매직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이 손 안 씻을 거에요!"라고 카메라를 향해 농담할 정도로 매직을 존경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매직보다는 조던을 보며 자란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등 스윙맨들이 난립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며 빅맨이건 윙플레이어들이건 너나할 것 없이 골밑기본기와 풋워크보다는 화려한 외곽플레이를 연습하는 트렌드가 자리를 잡았다.(80년대만 해도 외곽 선수들도 골밑플레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스몰 포워드인 제임스 워디나 도미닉 윌킨스, 슈팅 가드인 마이클 조던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의 경기를 보면 주 활동반경이 중거리였음에도 골밑에서 훅슛과 골밑슛 등이 능했다) 또한 조던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부분은 아니지만, 조던 시대에 NBA가 크게 성장하며 어린 선수들이 당장 리그에 뛰어들어 큰 돈을 만질 수 있게되자 고졸 및 대학 1년만 다니고 데뷔하는 선수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문제점은 기본기는 대학시절에 대부분 배우는데 고졸 선수의 난립으로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 (기본기 부족, 빅맨인데도 골밑 기술 부족을 동시에 보여준 선수가 한때 케빈 가넷에 비견되던 초대형 유망주였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진 조나단 벤더이다) 현재 NBA는 고졸을 금지시키며 기본기 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외곽 중시 트렌드로 인해 센터 유망주들이 씨가 말라 버리며 NBA 팀들 역시 탁월한 센터 없이 농구를 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현재와 같이 센터에 의존하지 않고 외곽에서의 볼과 선수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시스템 농구, 퍼리미터 위주 농구가 대세가 되었다. 또한 가드나 포워드들 사이에서 훅슛 등 골밑에서 득점기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돌파에 이은 레이업과 다른 개념이다) 대신 3점슛이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아, 현재 3점을 아예 못 쏘는 1~3번은 매우 드물고, 반대로 3점을 수준급으로 쏘는 빅맨들이 많아졌다. 즉, 무게중심이 골밑에서 외곽으로 바뀌었다. 정리하자면, 조던 혼자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현재처럼 트렌드가 바뀌는데 크게 영향을 준 인물인 것은 맞다.
  111. [111] 다만 현재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손도 못 대는(공격진행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댈 수 있다. 밀면 안 되는 것) 심한 핸드체킹룰은 2004-05년에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시즌, 무려 득점 상위 5걸 중 4명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는 득점 인플레가 일어나기도. 이 중 앨런 아이버슨은 전성기가 지났고 평균 20점을 넣는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음에도 3점 가까이 올랐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그 다음 시즌, 팀내 상황이나 기량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득점이 크게 하락했다. 르브론과 코비는 각각 4,5점씩이나... 이는 핸드체킹룰 변화에 익숙치 못한 수비수들이 초기에 대응을 못했다가 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112. [112] 2012년에 드림팀 결성 20주년 기념으로 nba tv에서 제작한 "The Dream Team"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FIBA에서 "다른 나라의 프로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며 모든 나라의 프로팀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룰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미국은 팀을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u.s. basketball committee 소속이자 NBA VP를 지낸 로드 쏜이 처음 연락한 멤버가 조던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미 금메달도 있는데다가 "올림픽에 나가 혼자 고생하긴 싫다"며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참여여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등 당대 최고 스타들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던이 선수촌 입소 못한 걸 아쉬워했는지 여부는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으나 조던이 거의 매일 척 데일리 드림팀 감독과 골프를 치며 친해졌다는 내용은 나온다.과연 친목왕 척 데일리 또한 골프치고, 연습하고, 밤새 카드치고, 잠깐 눈붙이고, 경기하고를 반복하자 동료들이 그의 괴물같은 체력에 놀라며 질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113. [113] https://en.wikipedia.org/wiki/SportsCentury.
  114. [114] 참고로 조던은 커리어 통산 NBA 파이널에 6번 진출했고 6번 모두 우승했으며, 6번 모두 MVP에 선정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 한정으로 조던에게 털린 선수들의 팬들 사이에서 666 대악마 (...) 드립이 돌기도 했다.
  115. [115] 단일시즌 PER가 30+이상이면 역대급 선수라고 평가 받는데, 단일시즌 30+ PER를 4회이상 기록한 선수는 마이클 조던르브론 제임스뿐이다..
  116. [116] Value Over Replacement Player. 대체선수대비 생산력 지표.
  117. [117] 사실 질문 자체는 병크에 가까운 내용인데 위트 있게 받아쳐서 명언으로 남은 부분. 이 외에도 "신이 된 기분이 어떠냐?"란 이뭐병스러운 질문도 받은 적이 있다.
  118. [118] 점프슛은 슛(농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점프해서 올라오는 모멘텀을 자연스럽게 손목까지 전달해서 쏘는 슛이다. 그런데 대학시절부터 프로 초창기까지 조던은 손목 감각에 크게 의존해서 슛을 쐈다. (자유투는 초창기부터 완성되어 있었지만 이건 정자세에서 쏘는거니까) 엄청난 점프력과 균형감각의 소유자였던 조던은 일단 뛴 상태에서 수비를 제치고 더블클러치 점프슛을 던지는 등 플레이가 잦았는데 문제점은 이렇게 쏘는 슛은 포물선이 극히 낮아 거리가 멀면 성공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것. 이 때문에 조던은 중장거리 점프슛을 계속 연습해서 무기로 장착했다. 그러나 확률높은 공격을 선호하는 본인 성향도 있고, 장거리점프슛은 다른 슈터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삼점슛은 한번도 주요옵션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무서운 건 그럼에도 삼점슛으로 클러치슛을 터뜨린 적이 꽤 된다는 것. 97파이널 5차전은 아예 3점으로 위닝샷을 넣었고, 98시즌에 팀 던컨과 첫 만남에서 초반에 슈팅난조에 시달리다가 후반들어 점점 끌어올리더니 4쿼터 종료와 동시에 버저비터 3점을 꽂아넣어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가 결국 승리했다. 98 동부결승전 4차전에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공을 잡자마자 버저비터 더블클러치 (...) 삼점슛을 던졌는데 정말 아깝게 림을 한번 흝고 돌아나왔다. 이때 해설자의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UN-BE-LIEEEEEE-VABLE!!!!"란 격앙된 해설이 일품. 조던 하일라이트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심지어 성공륭이 2할대 초반이던 80년대 후반 (89시즌 전. 당시 입던 매우 짧은 반바지로 유추가능하다) 경기에서 종료직전 반대쪽 코트에서 질주해와 버저지터 위닝샷을 넣는 장면이 있다. 삼점을 그리 잘 쏘는 선수도 아닌데 왜 삼점클러치슛을 감독이 맡기고, 또 그걸 잘 넣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조던이란 선수가 원래 그렇다.
  119. [119] 90년대 조던에게 익숙한 한국 농구팬들이 80년대 조던의 경기를 보면 또 하나의 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 웨이트가 완벽하지는 않고 플레이도 90년대에 비하면 영 엉성해 보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듯한 스피드와 탄력을 지녔다.
  120. [120] 아무리 돌파의 비중을 높여도 빅맨이 아닌 이상에야 농구에서 대부분의 득점은 점퍼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처럼 스윙맨이면서 돌파로만 20점씩 넣는 이상한 놈들도 있다. 다만 이것은 현재 NBA가 조던이 젊었던 시대에 비해 1,2차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돌파하는 선수들에게 손을 대서 방향전환을 방해할 수 없게 한 데다가 파울콜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엄격하게 불기 때문에 돌파하는 것에 대한 신체적 부담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적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7GpIzCDynkE 영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이 불릴만한 파울이 그냥 파울, 혹은 아예 불리지도 않고 징계감인 파울을 해도 퇴장조차 당하지 않고 경기를 속개하는 걸 볼 수 있다. 조던 vs 르브론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폴 피어스나 빈스카터같은 2000년 이후 주로 뛴 선수들조차 90년대가 지금보다 훨씬 피지컬해서 지금이 득점하기 더 쉽다고 하고 있다.
  121. [121] 이 때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basketball-reference.com/boxscores/198804030DET.html 이때 조던은 야투 27개 중 21개를 넣고 자유투 19개 중 17개를 적중시켰다. 이때 훗날 스타가 되는 스카티 피펜과 호레이스 그랜트는 경기당 20분 정도 출전하는 후보에 불과했던 터라 (이날 둘이 합쳐 슛 7개 던져 1점 넣었다) 이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던의 원맨팀이었다. 오죽하면 팀내 2옵션이 득점이 아닌 리바운드와 수비에 특화된 파워 포워드 찰스 오클리(12.4점)일 정도. 심지어 팀에서 두자리수 득점을 한 선수는 이 둘뿐이었다.
  122. [122] 이 때문에 후에 LA 레이커스는 2000년대 초반의 샤킬 오닐, 그리고 그의 이적 후 영입된 파우 가솔같은 빅맨을 통해 트라이앵글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123. [123] 사실 조던의 몸을 결정적으로 키워준 계기가 된 건 그 당시 "배드 보이즈" 라고 불렸던 아이재아 토마스 를 중심으로 한 피스톤즈 덕분이었다. 당시 디트는 조던을 막기 위해 더블팀, 트리플팀을 기본으로 온갖 거친 방법을 동원하여 조던을 막았으며 (조던 룰) 제 아무리 최고의 기량을 가진 조던이었다고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가드는 물론이거니와 더티한 포워드나 센터들이 피지컬 플레이를 하는걸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결국 그 조던 룰을 이겨내기 위해 악착같이 웨이트를 하며 피스톤즈를 넘어서게 된다. 후에 조던도 인터뷰에서 그 점을 인정했다.
  124. [124] 이 사기더웨이는 카림 압둘자바가 구사하는 스카이 훅과 더불어 막을 수 없는 두가지 슛이라 불리우고, 조던 키드들은 휴식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이 사기더웨이를 열심히 흉내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거라면 사기더웨이가 아니다. 그리고 덕 노비츠키가 이 사기더웨이의 뒤를 잇고 있다. 이쪽은 아예 별명 자체가 사기꾼이다.(...) 노비츠키의 경우 7피트에 달하는 높이와 정확도가 사기라면 조던은 왠만한 선수들이면 터프샷일 정도로 뒤로 뛰면서 압도적인 안정감까지 갖췄다는게 사기다. 일단 페어더웨이를 구사하는 선수들은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 포스트업 상태에서 돌아서 페이더웨이를 던질때 선호하는 방향이 있다. 케빈 가넷의 경우 왼쪽으로 돌았을때도 성공률이 높지만, 습관인지 거의 오른쪽으로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오른손잡이의 경우 슛할때 자연스럽게 오른발이 앞으로 가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도는게 자연스럽다. 왼쪽으로 돌면 공중에서 자세를 한번 더 잡거나 몸이 약간 비틀린 상태에서 쏴야 한다) 그런데 조던은 어느 쪽으로 돌든지 폼도 거의 똑같고 성공률도 동일했다. 이 것이 왜 큰 장점이 되냐면 골대를 등진 기준으로 볼때 왼쪽 베이스라인 쪽에서 포스트업을 했을때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돌 경우 코트 중앙쪽에 밀집된 상대 수비에 부딫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 왼쪽으로 돌아서 안정적으로 쏠 수 있다면 더블팀하러 들어오는 상대 수비수를 바보로 만들고 여유있게 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페이더웨이 자체가 터프샷에 해당하는지라 주무기로 쓸만한게 아니다. 그런데 조던은 이걸 주무기로 쓰면서도 성공률이 높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다.
  125. [125] 다만 지역방어 때문에 포스트업형 센터가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NBA팀들은 대인방어가 기본에 다양한 수비전술을 쓰고 있으며 지역방어를 최우선적으로 쓰는 팀은 없다. 애초에 지역방어를 깨는 최적의 방법이 3점슛인데, 지금처럼 3점슛을 많이 쓰는 시대에 지역방어를 주구장창 쓰면 망한다. 결정적으로 지역방어가 2001시즌부터 도입되었는데 샤킬 오닐, 팀 던컨 등은 별 지장없이 포스트업을 주요옵션으로 사용했다.
  126. [126]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당시. 참고로 이 수치는 역대급인 피스톤즈의 수비 때문에 상당히 떨어진 수치다. 그 전까지 1,2라운드에서 그는 평균 40점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
  127. [127] 당시 득점 2위는 29점인 도미니크 윌킨스일 정도였다.
  128. [128] 여담이지만 이 트리플 클러치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상대팀인 뉴저지 네츠 선수들도 이 플레이에 경악해서 팀 동료가 슈퍼플레이 한 것 마냥 환호하려다가 감독 눈치보고 급하게 주저앉는다.(...)
  129. [129] 부상을 입어도 참아내는 인내력 또한 있었지만 아무리 인내한다 해도 매 시즌 82경기를 풀로 소화하는 건 그냥 타고나야 한다. 그의 입지에 도전하는 이들이 기술적인 측면보다 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괴물같은 체력. 물론 2년차때 부상을 당한 이후로 지독한 웨이트를 통해 근육을 단련한 덕도 있다. 신인시절에는 호리호리한 느낌의 선수가 점차 전신의 근육이 압도적인 수준이 된다. 하지만 웨이트 빡세게 하기만 해서 될 것만 같으면 아무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게다가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근육량을 급격히 늘릴 경우 프로선수들은 부상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40살까지 거의 풀 시즌을 매번 소화했으니 진정 괴물.
  130. [130] 상대해 본 선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눈, 어깨, 발, 무릎 등 온갖 부위로 일반인들은 아예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모션페이크들을 조합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반응조차 못한다고. 심지어 포스트업 상태에서 등짝으로도 페이크를 넣는다고 한다. 결국 억지로라도 막으려 하면 앤드원 유도.
  131. [131] 여담이지만 블랙캣 시절, 정확히는 선수생활 3, 4년차때 시즌 평균 37.1, 35.0득점을 기록하며 백투백 득점왕을 차지하면서도 팀 성적이 1라운드 탈락, 2라운드 탈락으로 끝나자 언론에서 '득점욕만 있는 볼호그'라며 비난했는데, 바로 그 다음 시즌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를 꼽으라면 반드시 언급되는 32 - 8 - 8의 평균 기록을 냈다. 이 시즌 중 7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후, 8번째 경기에서 40득점 7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다시 세 경기 연속으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시즌 내내 "내가 이래도 볼호그라고?"라고 시위한 셈. 또 여담이지만 91파이널 당시 역대 최고의 PG인 매직 존슨과 맞붙으며 "패스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고 싶었는지 시리즈 내내 고감도 패스를 선보이며 평균 31점 1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호레이스 그랜트, 존 팩슨, 스카티 피펜 등 가리지 않고 A패스를 꽂아주면서도 평상시처럼 고득점을, 그것도 5할 이상의 높은 확률로 넣는 걸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
  132. [132] 사실 단순한 지역수비보다 훨씬 악랄하고 빡센 전략이었다. 현재 NBA는 지역수비를 허용하지만 94년, 2005년 2차에 거친 핸드체킹룰 개정으로 공격수를 극도로 보호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개정 이전에는 수비수가 손으로 밀고당기며 공격수를 견제하는 "핸드체킹"이 가능했다. 그러나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공격수의 진행방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면 바로 파울을 불도록 되었다. 물론 골밑에서는 이렇게 일일히 불면 진행이 불가능하나 문제는 외곽이었다. 이 때문에 2차 개정이 있었던 직후인 05-06시즌엔 스윙맨들의 개인평균득점 인플레가 일어나 코비 브라이언트가 35점, 전성기가 지난(31세) 아이버슨이 갑자기 커리어하이인 33점을 찍고, 이때 3년차에 불과했던 르브론 제임스도 31점을 찍고선 (이후에 득점왕에 오를때도 이 정도 득점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 시즌에 어떤 부상이나 외부 요소도 없이 평득이 급감했다. 어쨌건 현재 수비는 지역수비+공격자 보호 성향이 강한데, 80년대 당시엔 수비가 정말 거칠게 공격수를 몰아세우는게 가능했고 이 때문에 전반적인 스틸 수치가 더 높았다. 그런데 피스톤즈는 룰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해 돌파를 견제하는 수비를 하면서도 그를 육체적으로 거의 구타하다시피했기 때문에 조던이 받는 압박은 역사상 그 어떤 스윙맨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후술되듯이 이런 수비 때문에 90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은 1,2라운드에 평균 40점 야투성공률 54.4%를 기록하다가 피스톤즈를 상대하자 평균 32점 46.7%로 기록이 급감한다.
  133. [133]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맨투맨 수비 시기였음에도 당시 조던을 그나마 잘 막는 팀은 개인수비가 아닌, 팀수비로 막는 팀이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 수비수인 조 듀마스가 있었지만, 강력한 팀 수비 때문에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것. 그 외에 뉴욕닉스, 96년에 파이널에 붙었던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잘 막은 편이었다. 물론 여기서 잘 막았다는 기준은 평균 30점대 초반이다(...) 또한 시애틀이 막았을때 조던은 33세로 전성기가 지났었고 약간의 등부상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피스톤즈는 팀이 불스보다 더 강해서 이긴 거지 위의 기록을 보듯이 조던 개인을 막는데 성공한 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전성기의 조던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슛감이 안 좋은 날은 어떤 선수라도 부진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선 수비로 조던을 봉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 그나마 조던이 막히기 시작한건 2차 3연패 때 나이를 들고 스타일이 점프슛 위주로 변하고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134. [134] 수비왕이라는 상 상당수가 골밑을 지키는 파워 포워드센터에게 가는 것을 생각하면 역대 공격력 1위 슈팅 가드가 수비왕을 수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기적이다. 그야말로 공수 완벽. 조던 이후로 2015년 현재까지 가드가 DPOY를 수상한 경우는 96년의 게리 페이튼뿐이다. 게다가 공수겸비의 선수들은 수비왕 투표에서 은근히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의 기자단 (=투표단)이 한 선수에게 상이 몰리는 걸 어느 정도 경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88시즌의 조던은 MVP, 득점왕, 올해의 수비수를 독식했다.
  135. [135] 두 선수의 수비력은 막상막하지만 피펜의 경우 조던보다 약간 더 커 조던보다 더 큰 선수들을 막는 능력이 좀 더 좋고 팀 수비가 더 좋다. 하지만 대인수비와 가드들을 막는 능력의 경우 조던이 단연 더 뛰어나다. 조던이 장신이란 점과 가장 미디어 노출이 많았던 시절이 30대, 결정적으로 알렌 아이버슨의 크로스오버에 당하는 장면이 너무 유명해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기 힘들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조던은 전성기 당시 아이재아 토마스와 매치업되던 선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UQZnESjOkyA) 아이재아 토마스가 어떤 선수냐면 조던보다 13cm 작은 185cm에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 엄청난 드리블링과 돌파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조던과 매치업되면 돌파를 거의 못하고 외곽에서만 거의 득점했다. 참고로 조던은 저 시리즈에서 피스톤즈가 조던만 노골적으로 집중수비하면서 두들겨 팼음에도 평균 29점을 기록했다. (위에도 언급되지만 조던치고 엄청나게 저조한 수치였다. 그리고 저 경기에서 조던은 18점에 그치며 공격에서 매우 부진했다) 즉, 공격을 하드캐리하면서 상대팀의 에이스를 전담마크한 것이다. 사실 농구에서 키가 크면 공격에서 유리하지만 반응속도가 느려져서 작고 재빠른 선수들을 따라가기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나 피펜같은 최강의 수비수들도 포인트가드들을 막기는 힘들어한다. 그런데 조던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선수를 아무 무리없이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아이버슨에게 당하던 장면도 자세히 보면 크로스오버에 낚였음에도 바로 쫓아가 블럭할 뻔했다. 실제로 아이버슨도 은퇴 후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무브를 먹였는데 거의 블럭당할 뻔했다"며 crazy하다고 감탄했다. 게다가 그 장면에서 조던은 만 34세였고 당연히 전성기 때보다 훨씬 느려졌다. 전성기였으면 바로 블럭당했을 것이다.
  136. [136] 사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전문가들에게 수비력이 저평가받기도 했다. 유튜브에 남아있는 초창기 경기를 보면 해설자들이 "조던은 종종 수비에서 도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설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실제로 87시즌 당시 역사상 최초로 200스틸 100블럭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음에도 디펜시브 세컨드 팀조차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던이 그렇게 스틸을 노리는 수비를 해도 빈틈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수정해 결국 88시즌 조던은 수비왕을 차지한다.
  137. [137] 물론 그렇다고 조던이 소위 "병장농구"를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할 때 작고 재빨라 수비부담이 큰 앨런 아이버슨을 막은 건 론 하퍼였지만, 조던이 막은 데리 스택하우스 역시 득점력이 아이버슨 못지 않았다. (이때 스택하우스는 아이버슨보다 1년 선배고 당시 팀은 아이버슨을 포인트 가드로 생각해 득점보다는 리딩을 중점적으로 시켰다.) 또한 대인방어 외에 불스의 가장 큰 장점인 팀수비에서 피펜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도움수비를 가는 선수였는데, 이 둘이 없었다면 아무리 데니스 로드맨이 대단해도 2미터에 불과한 로드맨, 허접하기 그지 없는 불스 센터진으로 오닐, 유잉같은 동부의 최강 센터들을 상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일례로 코비나 르브론은 "올 디펜스 팀에 이름값 때문에 들어간게 아니냐."는 논란에 몇번 시달렸는데 만 35세까지 계속 올 디펜스 퍼스트팀에 든 조던은 이런 논란이 없었다.
  138. [138] 조던은 힘과 민첩함, 센스를 동시에 갖춘 수비수라 상대 빅맨의 스크린을 깨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페이서스의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는 큰 덩치와 강한 힘, 탁월한 수비력으로 "Davis brothers(물론 실제 형제는 아니다)"라고 불리며 인디애나 가드들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고, 223cm에 달하는 릭 스미츠도 거대한 덩치로 스크린을 해줬는데, 이들의 스크린 플레이는 1대1 기술이 탁월하지 못한 레지 밀러가 수비수를 요리조리 떼어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조던은 앞서 언급한 대로 누가 스크린을 해주더라도 매치업 상대를 악착같이 따라가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조던이 막을때는 밀러가 거의 무력화되었다.
  139. [139] Whose game is it? It's Michael Jordan's game! 이라는 해설자의 극찬은 매우 유명하다.
  140. [140] 이렇게 커버할 수 있는 비결은 1차적으로 그의 민첩함이지만, 사실 그의 완벽에 가까운 기본기도 크다. 보통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공격수가 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면 따라갈 수 있는 스피드가 있지만, 그쪽으로 몸을 던지기 때문에 영상의 아이버슨처럼 한쪽으로 가는 척하고 크로스오버를 먹이면 손쉽게 제껴진다. 이런 걸 자주하면 수비에서 도박을 한다고 평가받으며, 아무리 스틸이나 블럭이 잦아도 수비수로 높이 평가받기 힘들다. 농구는 공격권이 엄청 잦기 때문에 공 몇번 뺏어도 쉽게 득점을 여러 번 내주면 말짱 꽝이기 때문. (대표적인 예가 운동능력 쩔던 시절 찰스 바클리) 그런데 조던은 농구명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기본기를 철저히 다지고 온 선수라 풋워크가 대단히 뛰어났다. 저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버슨의 왼쪽 돌파를 견제하면서도 두 발이 균형을 잃지 않아 바로 반대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던의 수비력의 진가를 보려면 그의 풋워크를 자세히 볼 것을 추천한다. 물론 그 외에 더블팀 들어갔다 빠지는 타이밍 등 팀수비에 대한 감각, 스크린 깨기, 스틸/블럭, 수비리바운드를 위한 박스아웃 (기껏 수비 잘하고 수비리바운드 못하면 꽝이다)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141. [141] 중간에 보면 조던이 카터를 잘 막아 무리한 슛을 쏘게 만들고 수비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카터를 잘 박스아웃했는데, 카터가 엄청난 점프력으로 조던의 등 뒤에서 날아올라 공격 리바운드를 낚아챈다. 기술적으로 보면 조던의 완승이지만 운동능력 때문에 농락당한 경우.
  142. [142] 득표수가 적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98년 올해의 수비수 투표에서 조던은 4위였다.
  143. [143] 르브론 제임스팬들이 대표적이다.
  144. [144] 리그 초창기 선수였던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논란이 제기된 적이 많다.
  145. [145] 여담이지만 당시 게임이라는 한계상 선수들의 기량을 100% 정확히 반영하진 못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외곽슛이 없고 운동능력이 좋으며 스틸/블럭 능력도 비슷한게 덩치가 약간 좋은 피펜이 전체적인 능력치가 더 높은 로스터 플레이어보다 활용도가 더 좋았다. 사실 90년대에 나온 농구게임엔 조던이 안 나오는데 불스 왕조가 워낙 인기가 좋은지라 2인자인 피펜이 거의 깡패급으로 능력이 좋게 나온 것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피펜이 (말그대로) 끝판왕이었던 NBA Hangtime. 파울이 없고 만화적인 덩크가 넘치는 이 게임에서 끝판왕은 불스의 피펜과 로드맨이었는데, 빅맨과 스윙맨의 파워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다 거의 전 능력치가 만빵에 가까운 (심지어 외곽슛조차 5점만점의 4점으로 스티브 커와 똑같다. 실제 능력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 피펜은 거의 악마급의 위용이었다.
  146. [146] 본인이 출연한 그 영화의 게임 버전.
  147. [147] 스페이스 잼 게임에는 각 캐릭터마다 필살기가 존재했는데 조던은 외곽지역에서 팔이 쑥 길어지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필살기였다...
  148. [148] 실사 디지타이징을 사용한 그래픽은 뛰어났지만, 너무 과하게 시뮬레이션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아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
  149. [149] 콰미랑은 좀 다른 것이, 콰미는 정말 포텐봤다 망한 거지만, 애덤 모리슨은 지병이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애를 3픽으로 뽑은 것 자체가 뻘짓이란 건 다를 바 없지만, 최소한 애덤 모리슨은 대학 무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사실 콰미는 하필 워싱턴이 1픽으로 뽑아서 그렇지,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와 워크아웃 결과에 따르면 리틀 가넷이나 크리스 웨버에 비견되었다(...) 당시 1~4픽 안에 고졸 루키인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가 싹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콰미는 어차피 최소 3픽안에는 뽑힐 것이었다. 뭐 레전설이 된거야 어쩔 수 없지만.
  150. [150] 어쩌면 본인이 정신력과 노력, 기술 등 비신체적인 부분에서 만렙이었기에, "피지컬이 되는데 정신력과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부족해 실패하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콰미는 약간 작은 손을 제외하면 좋은 신장, 긴 팔, 좋은 운동능력 등 원석으로서는 매우 뛰어났고 농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다. 여기에 본인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레전드 선수로 성장하기 충분했다. 실제로 이렇게 신체적으론 원석에 가까웠으나 본인이 갈궈서 성장시킨 선수들이 바로 스카티 피펜과 호러스 그랜트이다. 둘다 드래프트 당시엔 평범한 유망주에 가까웠으나 피펜은 레전드, 그랜트 역시 올스타급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압박한다고 성장하는 건 아니란 점. 사실 조던은 본인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불같고 참을성이 없는데다가 기준이 높아서 지도자로서 좋은 인물은 아니다. 본인도 이걸 알고 있어 감독직은 고려도 하지 않고 있지만.
  151. [151] 플레이보이 1992년 5월호 인터뷰 중.
  152. [152]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뿐만 아니라 조던 시대에 스포츠 미디어는 웬만하면 흥했다.
  153. [153] 대표적으로 스카티 피펜의 공헌도가 과소평가된다.
  154. [154] 사실 피펜은 첫 우승 당시 1991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지도 못했고, 첫 3연패까지만 해도 "슈퍼스타"라기보다는 "떠오르는 스타"의 위치였고(피펜이 본격적으로 리그에서 손꼽히는 스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조던이 은퇴하고 올NBA퍼스트팀에 처음 뽑힌 1994년부터다) 수비력도 조던이 확실히 더 뛰어났기 때문에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까지 반영하는 방법이 어찌 생긴다고 해도 조던의 비중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155. [155] 최정상급의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선수는 드물다. 재능의 문제도 있고, 체력적 문제도 있기 때문. 코비같이 근접한 선수들은 있지만, 코비도 조던처럼 수비왕급 수비력을 보여준 적은 없다.
  156. [156] 사실 유튜브에 래리 조던 덩크를 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꽤"가 아니라 괴물 수준으로 뛰어나다. 덩크도 그냥 덩크가 아니라 리버스 덩크나 백보드를 한 손으로 치고 덩크를 하는 등 1980년대 당시 기준으로 덩크콘테스트급 덩크를 선보인다. 조던이 키가 래리보다 훨씬 커지기 전까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는 걸 생각해보자.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이 장난스럽게 "형이 에어조던 1호에요. 전 2호고요"하고 한다.
  157. [157] https://www.whitehouse.gov/the-press-office/2016/11/16/president-obama-names-recipients-presidential-medal-freedom
  158. [158] http://sports.yahoo.com/nba/blog/ball_dont_lie/post/LeBron-James-was-not-the-first-to-toss-chalk-Th?urn=nba-291676
  159. [159] 레지 밀러같은 샤프 슈터들은 중요한 공격권 직전에 타임아웃에서 잔뜩 바르고 나오기도 한다.
  160. [160] 이 GIF 사진에서 보듯이 조던의 테러?를 우산으로 막거나, 마스크로 막거나, 아예 방독면을 쓰고 나온 적도 있다. http://national.suntimes.com/nba/7/72/838668/michael-jordan-lebron-james-chalk-toss/
  161. [161] 블로거들을 불러 구경시켜줬는데, 이 영상에서 나오는 차고만 여섯개 있는 저택은 게스트하우스다! 조던 본인과 가족이 쓰던 시설들은 나오지도 않은 것. https://m.youtube.com/watch?v=BKGaQIoaw70.
  162. [162] https://www.google.co.kr/amp/www.marketwatch.com/amp/story/guid/02B644A0-4AB2-11E6-8759-B085F3AB6106
  163. [163] 사실 이런 집은 골치아픈게 한화 150억 원 이상을 집에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상당한 부호다. 높은 확률로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일 것이다. 근데 그런 사람이 허구헌날 구경꾼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고, 집 구석구석에 남의 흔적이 있는 집을 굳이 거액을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설령 조던 광팬이라고 해도 천오백만불은 "덕질"에 쓰기는 부담스러운 액수다. 차라리 1~2백만불 정도 적당한 액수였다면 기념품 사는 셈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집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저런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조던이 자기 취향대로 기념품과 조형물로 떡칠해놓은 집이다. 사실상 조던덕질 외에는 굳이 살 가치가 없다. 게다가 조던의 흔적이 싫다고 이런걸 싸그리 치우고 리모델링을 하려면 애초에 굳이 이런 집을 살 이유가 없다. 즉, 어떻게 봐도 구매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
  164. [164] 시카고 불스는 조던 이전 9시즌 동안 2시즌 밖에 플레이오프를 못 간 약체팀이었는데 조던은 드래프트에서 불스에 뽑히면서 "내가 이 팀에 가는 이상 반드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겠다라고 선언했고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165. [165] 조던과 불스는 이 3번의 패배동안 하나씩 패배 횟수를 줄여가더니 끝내는 디트로이트를 꺾어버렸다.
  166. [166] 한 예로 토니 파커와 에바 롱고리아가 사귈때, 파커는 올스타급 선수고 롱고리아는 나름 인기가 많지만 연예계에서 정상급 스타는 아니었음에도 주목도는 롱고리아가 훨씬 높았다.
  167. [167] 당연히 MJ는 그녀의 오빠인 마이클 잭슨의 이니셜과도 같다.
  168. [168] 여담이지만 이 일화를 전한 백업센터 존 샐리(과거 배드보이즈 시절 피스톤즈의 주요 롤플레이어로 활약)는 "우리와 마이클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169. [169] 1990년대초 까지는 매직 존슨이 더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절대 장담할 수 없다. 존슨이 1991년 에이즈로 은퇴하고 조던이 스리핏을 차지하면서 확실히 역전되었지만 말이다. 매직이 조던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조던은 1987년도부터 1차 은퇴하기 전인 1993년도까지 연속으로 NBA올스타 투표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이때 기간을 보면 조던은 줄리어스 어빙, 아이재아 토마스가 경쟁상대였지만, 이 때 매직이 경쟁한 가드 상대는 인기가 훨씬 떨어지는 케빈 존슨, 알빈 로버트슨, 팻 레버 등이었다.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매직이 뛰는 동안 한번도 올스타에 팬투표로 선발못됐을 정도로 인기가 훨씬 떨어졌다) 물론 올스타 투표가 인기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지만, 참고자료 정도는 되는데 (중국인들의 몰표를 받은 야오밍같은 케이스가 있지만 당시엔 온라인 투표가 없던 시대니...) 여기서 조던이 훨씬 앞선 것이다. 매직이 조던보다 투표에서 앞섰던 건 조던의 루키시즌은 1985시즌, 부상으로 거의 못 뛴 1986시즌 뿐이었다. 게다가 매직은 1993년 설문에서 순위권에도 못 들었다. 반면 조던의 경우 1993~2003 사이에 두번 은퇴했는데도 한번도 전종목 1위를 놓치지 않았고 2003년에 최종 은퇴한 후에 2004,05년에도 1위였다.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2009년까지 1위였다. 냉정히 말해 매직의 인기도 대단하지만 조던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사실 매직은 조던의 등장 전까지 가장 인기많은 선수긴 했지만 래리 버드나 어빙처럼 비슷한 수준으로 인기많은 선수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조던의 경우 인기 측면에서는 경쟁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랜트 힐이 1996년에 딱 한번 근소한 차이로 올스타 1위를 뺏긴 했지만 바로 그 다음시즌부터 다시 1위를 달렸다. 한 마디로 조던의 인기는 같은 운동선수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매직은 물론이고 조던보다도 더 미디어 노출이 잦은 후대의 선수들조차 전성기 조던의 인기, 그리고 광고수입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170. [170] 이 두 선수는 조던 이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선수인데 커리어를 통틀어 이 리스트에서 조던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게 각각 한번씩 뿐이다. 르브론은 아직 커리어가 남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코비는 2010년 1위 이후 계속 순위가 하락세인데다, 2015년 12월 현재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더 올라가긴 힘들어졌다.
  171. [171] http://www.forbes.com/sites/kurtbadenhausen/2015/03/11/how-new-billionaire-michael-jordan-earned-100-million-in-2014/.
  172. [172] 미국에서 공식문서를 쓸때 제외하면 미들네임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미들네임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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