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해전

말레이 해전

날짜

1941년 12월 10일

장소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영국

일본 제국

지휘관

토마스 필립스 경
존 리치
윌리엄 텐난트 경

오자와 지사부로
미야우치 시치조
쇼지 하치로
나카니시 니치

전력

전함 1척
순양전함 1척
구축함 4척

뇌격기 34기
공격기 51기
정찰기 3기

피해 규모

전함 1척 침몰
순양전함 1척 침몰
840명 전사

항공기 3기 손실
항공기 28기 손상
수상기 2기 실종
18명 전사

결과

일본 해군의 승리

영향

태평양에서 영국 왕립해군의 영향력 상실, 일본의 남중국해 제해권 획득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3.1. 영국 해군의 오판
4. 결과
5. 평가
6. 여담

사진의 왼쪽 중간에 검은 연기를 피우는 배들이 공격받고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 사진의 앞쪽에 있는 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이고 뒤의 배가 리펄스다.

1. 개요

영국 해군태평양 전쟁 최악의 졸전

대영제국 해군 신화의 종말

Naval Battle of Malaya, マレー沖海戦. 태평양 전쟁 초기인 1941년 12월 10일에 일본군의 남방작전에 대응하고자 출격한 영국 해군 Z기동함대와 이를 요격하기위해 나선 일본군 해군 항공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제공권을 잃은 해군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 전투이며, 영국 해군의 흑역사이다.

영미권에서는 해전 명칭을 붙이지 않고 '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1]

2. 배경

일본군이 서방 국가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철수하기는 커녕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주둔하는 막장 행보를 보여주자 1941년 12월 영국은 일본으로부터 자국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톰 필립스 경을 사령관으로 Z함대[2]를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여기서 처칠과 해군 참모총장이던 더들리 파운드경의 의견이 충돌하였는데 영국 해군의 계획은 넬슨급 전함인 넬슨과 로드니,그리고 리나운과 R급 전함 4척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처칠은 이에 반대하고 신형전함인 킹조지 5세급과 순양전함 리펄스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을 포함한 소수의 주력함만으로도 통상파괴전을 수행하려고 하는 일본 해군을 마비시킬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처칠의 주장은 몇가지 잘못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우선 일본 해군은 수상함 전력에서 독일 해군을 간단히 능가하며 독일 해군처럼 눈치보며 통상파괴전을 수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해군이 가장 잘 나가던 1941~2 년의 경우 일본 해군은 확실히 영국해군을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항공모함 전력의 경우 영국 함재기는 숫자도 적고 성능도 상당히 떨어져서 제로센과 호각으로 싸울 수 없었다. 신형전함 1척과 순양전함 1척과 항공모함 1척을 동반한 영국 함대는 일본 해군에게 다소 긴장을 주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 뿐이며 결정적으로 일본 해군은 독일 해군에는 없는 해군 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처칠의 함대편성은 공고급의 통상파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였지만 이는 커다란 실수였다. 또한 일본이 말레이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지 않을거라고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차라리 두들리 파운드 경의 원래 계획대로 비록 구형전함이 여러척 포함되었어도 다수의 전함들을 보냈다면 오히려 일본군에 대항하는게 여러가지 면에서 효과적으로 대응이 가능했으며 구형전함 7척이 한꺼번에 모두 모여 행동하거나 1~2척씩 나뉘어 타이만을 헤집고 다닐 경우 공고와 하루나만으로는 대응할수 없어서 상륙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일본군은 세토 내해에 있던 전함 6척과 남은 항공모함들을 모두 남방에 파견해서 이들을 제거해야만 상륙이 가능했을것이다 . 다만 이 역시 항공 전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작전에 제한이 많이 걸리는건 마찬가지기는 하다.

결국 처칠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함대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인도미터블이 암초를 들이박아 노퍽으로 가서 수리를 하는 상황에 처하였으며 11월 16일에 케이프타운에 입항하였을때 항공모함 허미즈가 별다른 임무가 없는 상태였는데도 영국 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함대를 이동시켰다.

3. 진행 과정

3.1. 영국 해군의 오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8일에 싱가포르의 Z함대도 일본 항공기의 공습을 받았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의 코타바루에 상륙했고,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기들을 차례로 파괴해 나갔다. 동남아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은 전투기의 주종이 F2A 버팔로로 성능이 제로센보다 낮은데다가 숫자도 부족했고, 조종사들의 실력도 일본에 비해 보잘것 없었기 때문에 전투의 패배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영국 본토 항공전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항공전이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개전하기 전에는 동남아의 식민지 지역까지 일류급 항공기와 베테랑 조종사를 배치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습부대에 의해 싱가포르에 전함 2척이 정박중이었다는 사실이 보고되자, 당시 남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중장은 제22항공전대에 즉시 공격명령을 내린다.

공군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영국 해군은 상황을 너무나 낙관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항공기가 대양에서 작전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함선들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 정도는 무난히 막아낼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3] 이 오판으로 인해 Z함대는 어떠한 항공 엄호도 없이 싱고라의 일본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항하고 말았다.

제22항전은 명령에 따라 오전에 바로 정찰기를 출격시켜 Z함대를 찾기 시작했다. 정찰기는 영국 전함이 싱가포르에 정박중이라는 오보를 전했고, 일본 항공대는 그에 따라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3시에 I-65 잠수함이 Z함대를 발견하고는 위치를 보고했고, 항공대는 폭탄 무장을 어뢰로 교체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느라 출격했을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은 시점이었다. 이때 Z함대는 항공 엄호 없이는 작전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해군 중장 필립스 제독의 판단에 따라 이미 싱고라 공격을 포기하고 싱가포르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한편 오후5시 30분에 보고를 받은 오자와 중장은 중순양함 5척을 포함한 수뢰전대를 이끌고 Z함대의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스콜과 같은 날씨때문에 Z함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영국 함대는 일본 항공대를 피해 싱가포르로 귀항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항공대는 자국 중순양함 쵸카이를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착각하는 등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0일, 일본군은 새벽이 밝자마자 정찰기를 띄워 Z함대를 찾기 시작하면서 발견되기도 전에 공격대를 미리 발진시켜놓고 영국 함대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Z함대는 일본군 잠수함 I-58에 의해 발각되었으나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Z함대는 쿠안탄 해안에 일본군 함대가 있다는 오보를 받았다. 필립스 중장은 무전을 받고는 보고 없이[4] 쿠안탄으로 향했고, 함대가 쿠안탄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받지 못한 사령부는 항공엄호를 보내지 않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하자면 필립스 제독은 출항하기 전 10일 낮 동안 싱고라 상공에 전투기 엄호를 요청하였다.

그후 8일에 출항한 Z함대는 5시간후인 오후 10시 43분에 전문을 받았는데 10일에는 전투기에 의한 엄호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였으며 여기에는 싱고라 상공이라는 말이 빠져있었고 이를 본 필립스 제독이 상황이 매우 나빠 싱고라 상공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항공엄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무선침묵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어뢰에 맞고 나서도 전투기의 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구축함 파견을 요청한것을 볼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히려 교전 1시간후에 리펄스의 함장이 필립스 제독이 아직도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은걸 뒤늦게 알고 경악하며 긴급히 영국공군에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벌써 적절한 시기를 놓친후였다.

만약 항공요청이 제대로 되었다면 영국함대는 생존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고 오히려 항속거리 문제로 호위 전투기가 전혀없이 공격기들만 출격했던 일본해군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었을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군 공격기들은 배트남 사이공에서 출격했었다.

이 오인 정보로 인해 해안을 수색하는데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함대는 쿠안탄에 일본 함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퇴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안탄을 비행하던 일본군 정찰기가 그들을 발견한 뒤였다.

3.2. 영국동양함대궤멸

12월 10일 오전, 일본군 정찰기 중 한 기가 쿠안탄에서 끝내 Z함대를 발견하여 G3M[5] 폭격기들이 2차례에 걸쳐 출격했고, 오전 10시 및 11시 13분경에 각기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에서는 단 한발만이 리펄스의 4번 포탑에 명중했으며, 그나마도 별다를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영국 함대는 일제히 대공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진짜 타격은 뇌격기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17기의 일본군 G3M편대가 11시 40분경에 뇌격을 실시했다. 어뢰들 중 한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B번 엔진실에 명중해 침수됐고, 한쪽 스크류를 잃은 전함의 속력은 30km/h로 떨어졌다. 12시 20분경에 G4M편대가 추가로 뇌격을 실시했다. 상처입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어뢰 3기가 적중했고, 리펄스에도 어뢰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리펄스는 우수한 조함 실력으로 어뢰들을 회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1발의 어뢰가 좌현에 명중한 걸 시작으로 3발 이상의 어뢰가 리펄스를 강타했다. 안타깝게도 리펄스는 1차대전때 건조된 노령함인데다가 자매함 리나운과 달리 대개장도 받지 않아서 어뢰공격을 받아도 버텨낼 벌지도, 현대적인 장갑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난타당한 리펄스는 6분만에 함수쪽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단 하나의 스크류만이 남은채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시 40분경에 추가로 달려든 일본군 폭격기들이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켰고,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수많은 영국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필립스 경은 퇴함을 명령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영국 해군의 자랑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침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Z함대가 무선침묵을 깨고 모스 부호로 SOS신호를 타전하자 깜짝 놀란 호주 제453비행중대가 부리나케 달려와 오후 1시 15분에 도착했지만 이미 일본 항공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과 리펄스의 잔해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다행히 호위구축함들이 신속히 구조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은 승조원이 구조될수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구축함 일렉트라와 뱀파이어가 구조했다.

필립스 제독은 만류하는 참모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배를 빠져나가지 않고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부하들에게 건낸 그의 마지막 유언은 "굿바이." 함장 존 리치 대령[6]은 마지막까지 퇴함을 지휘하다 최후의 순간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목이 부러져 전사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10일 당일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를 만들어 방송하며 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대대적인 갈굼

4. 결과

영국 해군이 자신있게 파견했던 함대의 궤멸은 영국 및 연합국에게 충격을, 일본에게는 환희를 안겨줬다. 총리 윈스턴 처칠은 동양함대가 사실상 소멸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충격으로 [7]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하며 말레이 해전에서 상실한 두 척의 전함피해 보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충격을 안긴 일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더이상 의미있는 작전을 펼칠수 없게 되었고, 이어진 자바 해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이 사실상 전멸하면서 태평양의 연합군 해상 세력은 미국이 진주만 공습에서 보전했던 미약한 함대만 남게 되었다. 기세등등해진 일본 해군은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섬을 공습하기까지 했으며, 이때 영국 해군은 교전을 회피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이렇게 해서 영국군은 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5. 평가

말레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 비스마르크의 침몰과 함께 해전의 주도권이 함선에서 항공기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전투이자 전함으로 대변되는 거함거포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전함이 항공기의 공격을 받은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고, 타란토 공습과 같이 항공공격만으로 전함이 상실되는 전례도 있었지만, 타란토의 경우 정박중인 함대를 급습한 것이었으며, 항해중인 전함이 다른 요소는 일절 배제된 채 오로지 항공기의 공격에 의해서만 대파, 격침된 사례는 이전까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국의 군 지휘부 상당수는 항공기가 가지는 군사적 가치를 실제보다 낮게 보고 있었고, 정상적인 교전상황에서는 전함을 항공기만으로 격퇴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다.

거기에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술에 대한 과소평가는 연합군 지휘관들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일본에겐 독일과 이탈리아가 가진 장거리 대함공격능력이 없다는 것이 당시 연합국 지휘관들의 통념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는 추축국 중에서 제일 가는 장거리 대함공격능력, 특히, 뇌격능력을 가진 것은 일본이었지만 연합군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편견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및 리펄스의 격침과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상기한 처칠의 반응은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박살난데 따른 충격이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 및 정치계, 나아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그럴만한 것이 당시 전함이 가지는 전략병기로서의 가치와 인식은 전후에 핵병기가 가지게 된 그것과 동급이었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러한 전략병기가 '변방의 듣보잡'에게 무력화되었다는 충격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충격에서 벗어난 뒤 각 국 해군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해군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효과적인 항공엄호가 필요하며, 각 함선의 대공화기도 대대적으로 증설 및 개량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대 상공의 제공권을 쥐지 않으면 함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함대의 상공 엄호에 투입할수 있었던 항공세력은 호주방면에 배치된 몇기의 F2A 버팔로뿐으로 항속거리에 비해 배치지점이 너무 멀었고, 수량도 모자라니 지속적인 항공엄호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의 버팔로 전투기들은 쿠안탄까지 항공지원이 가능했다. Z기동함대 투입 초기에 전열에서 이탈해버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남아프리카에 입항했던 시점에 별다른 임무가 없던 허미즈를 Z함대에 포함시키지 않은것도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물론 항공모함이 있다 한들 당시 투입 가능한 영국군 함재기들의 수량과 전투능력 역시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으니[8]일본군 항공세력과의 정면대결은 무리였지만, 항공세력을 함대 상공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당시에 전투기 엄호가 전혀 없는 일본해군 공격/폭격기 편대에 대한 대응은 훨씬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일본해군 장거리 공격기 편대들이 영국공군에게 걸려서 큰 피해를 입었을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한편, 영국 해군이 자랑하던 대공포폼폼 포는 실제 운용하니 송탄불량이 자주 발생하고, 선회와 부앙 상승이 느려서 빠르게 접근하는 항공기를 쫒아기기 힘든데다가 결정적으로 유효사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드러났다. 대공포 자체의 문제와는 별개로 개별 함정에 배치된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겹쳐서 항공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적기를 저지한 시점에서 이미 적기는 무장을 투하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항공기의 성능이 급속히 발달했음과 동시에 기존 함선들의 대공방어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각국의 함선, 특히 전함을 비롯한 주력 함선들은 대공포를 최대한 많이 부착하고, 구식 대공포를 몽땅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형 함선들은 이후 작전운용에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고, 반대로 대공방어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던 쪽은 이후의 전투에서 주역으로 나서게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레이더 관제에 의한 대공사격 집중방식과 VT신관의 조합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공격해들어오는 적 항공세력을 대공포화만으로 죄다 잡아버린 사례도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41년 말 대서양 전투에서 U보트가 미국 동부해안에 진출하기 시작해 수세에 몰리고 있던 당시의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여력이 더 이상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영국 수상 처칠의 반응은 전함 한두척의 손실에 대한 충격 뿐만 아니라, 태평양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음을 알게된 절망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마이너 리그 취급받던 중국-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에 국한되었고,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1944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태평양 함대 (British Pacific Fleet)를 새로이 조직하여 일선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미 해군의 연합세력으로서 참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영국 해군은 과거 오대양을 전부 통상 작전영역으로 삼던 대영제국 시절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대서양 지역해군으로 남아야 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영국 자체의 국력 하락과 식민지 상실이 큰 원인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주는 교훈 중 한가지는 적을 무시하기만 해서는 이길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일본군도 이때의 성과를 다잊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같은 실수로 크게 패하게 된다.

6. 여담

  •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아들이 신참내기 해군 장교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복무를 시작할 때 함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아들은 일을 시작하자마자 HMS 모리셔스로 전보 조치되었다고. 아버지가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할 당시 싱가포르에 있었던 아들은 2차대전에서 생존했고, 오래오래 복무하며 해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바로 포클랜드 전쟁기 영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마가렛 대처 총리에게 포클랜드 수복 원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헨리 리치 제독이다.
  • 이 전투에서 전사한 톰 필립스 제독은 2차 대전에서 전사한 연합군 군인중 가장 높은 계급(Admiral, 해군 대장)의 전사자이다. 영국 공군의 트래퍼드 리맬러리의 경우 사고로 사망한 경우고 미 육군의 시몬 버크너 대장은 사후 추서로 전사할 때는 중장이었다.


  1. [1] 영어권 위키피디아에서도 저렇게 표기하고 있다.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 해당항목에서 일본에서는 이를 말레이 해전이라고 부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게 정신승리를 하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피해를 전혀 감추지 않고 보여준 것이 정신승리인지는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참고로 영어권에서는 페낭 해전도 그냥 sinking of haguro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2. [2] 함대 구성은 각각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HMS 리펄스, 구축함 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엔카운터, HMS 주피터.
  3. [3] 노르웨이 전역의 전훈으로 대공포만으로는 공습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전훈은 얻었으나 일본의 장거리 대함공격 능력에 대해서 오판한것.
  4. [4] 위치가 밝혀질까봐 무선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5. [5] G4M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 해군 주력 육상공격기. 96식 육상공격기로 칭하기도 한다.
  6. [6]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함교에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이 명중했을 때도 별다른 부상 없이 살아남았었다.
  7. [7] HMS 리펄스는 구형이니 그렇다 쳐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건조한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얕보고 있던데다 최신예 전함이 있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8. [8] 시파이어는 1942년 11월에 가서야 처음으로 투입되고 그 이전에는 그나마 쓸만한게 시허리케인인데 이 또한 41년 말에나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배치된 함재기들은 페어리 풀머같은 괴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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