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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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존슨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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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써몬드

네이트 아치볼트

데이브 빙

데이비드 로빈슨

데이브 코웬스

돌프 세이즈

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

릭 베리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모제스 말론

밥 페팃

빌 러셀

빌 셔먼

빌 커닝햄

빌 월튼

샤킬 오닐

샘 존스

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

얼 먼로

엘빈 헤이즈

엘진 베일러

오스카 로버트슨

웨스 언셀드

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

월트 프레이저

제리 루카스

제리 웨스트

제임스 워디

조지 거빈

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

존 하블리첵

줄리어스 어빙

카림 압둘 자바

칼 말론

케빈 맥헤일

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

패트릭 유잉

피트 마라비치

하킴 올라주원

할 그리어

찰스 바클리

밥 쿠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영구결번

No. 32


1987년 NBA 정규시즌 MVP

래리 버드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1989년 ~ 1990년 NBA 정규시즌 MVP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1980년 NBA 파이널 MVP

데니스 존슨

매직 존슨

세드릭 맥스웰

1982년 NBA 파이널 MVP

세드릭 맥스웰

매직 존슨

모제스 말론

1987년 NBA 파이널 MVP

래리 버드

매직 존슨

제임스 워디

1981년 ~ 1982년 NBA 올해의 스틸왕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

매직 존슨

마이클 레이 리차드슨

1990년 NBA 올스타 MVP

칼 말론

매직 존슨

찰스 바클리

1992년 NBA 올스타 MVP

찰스 바클리

매직 존슨

칼 말론 & 존 스탁턴

1983년 ~ 1984년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조니 무어

매직 존슨

아이재아 토마스

1986년 ~ 1987년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아이재아 토마스

매직 존슨

존 스탁턴


1980

1982

1985

1987

1988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매직 존슨

헌액 연도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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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No.32

{{{#552582 어빈 "매직" 존슨 주니어
(Earvin "Magic" Johnson Jr.) }}}

생년월일

1959년 8월 14일 (60세)

국적

미국

출신지

미시간 주 랜싱

신체 조건

206cm[1], 100kg

포지션

포인트 가드, 파워 포워드[2]

드래프트

1979년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지명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79~1991, 1996)

지도자 경력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4, 감독 대행)

프런트 경력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12~, 공동 구단주)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 (2014~, 구단주)

등번호

32번

수상내역

NBA Champion 5회(1980,1982,1985,1987,1988)
정규시즌 MVP 3회 (1987, 1989, 1990)
NBA 파이널 MVP 3회 (1980, 1982, 1987)
NBA All-Star 12회 (1980, 1982-1992)
NBA All-Star Game MVP 2회 (1990, 1992)
All-NBA First Team 9회 (1983-1991)
All-NBA Second Team 1회 (1982)
NBA All-Rookie First Team (1980)
NBA assists leader 4회 (1983, 1984, 1986, 1987)
NBA steals leader 2회 (1981, 1982)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명예의 전당 헌액

1. 개요
2. 성장기
3. 미시간 주립대
4. 레이커스의 전설
5. 플레이 스타일
5.1. 매직의 득점하는 방식에 대해
5.2. The Show Time
5.3. 래리 버드와의 라이벌리
6. 감독으로서
7. 사업가로서
8. 운영진으로서
9. 동영상
10. 말말말
11. 기타

1. 개요

NBA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선수이자 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 현역시절 등번호는 32번. 본명은 어빙 존슨 주니어(Earvin Johnson Jr). 이견의 여지없이 첫손에 꼽히는 올타임 레전드이자 독보적인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

2. 성장기

어빈 매직 존슨은 1959년 어빈 존슨 시니어와 크리스틴의 6남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매직 존슨은 농구에 꽂혀 하루종일 연습을 했는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모두 농구를 했기에 이미 농구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였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그 당시 농구로 유명했던 (게다가 흑인들 위주였던) 섹스톤 고등학교로 가고 싶어했지만 사정상 백인이 많은 에버렛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할때라 처음에 매직도 섹스톤 학교에 가지 못한걸 후회했으나 인종차별을 견뎌내면서 농구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패스조차 안했던 그의 팀원들이었으나 결국 선생의 개입과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농구실력은 결국 그가 에버렛 고등학교에서도 주전으로 뛸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매직의 유한 성격도 인정받아 백인동료들도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0학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경기에서 36득점 18리바운드 16어시스트라는 흠좀무한 성적[3]을 기록했고 평생 따라붙는 "매직" 이라는 칭호를 한 저널리스가 붙여주었다. 싱스테이트저널의 프래드 스타브리라는 기자가 고등학교 당시 그의 플레이를 보고 '마술같다'는 의미에서 별명을 "매직"이라고 붙여줬는데, 이때부터 이름대신 모두 매직이라고 부르기 시작해서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해졌다. 오히려 매직이 본명인 줄 아는 사람이 대다수(베이브 루스의 경우와 같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미들네임 식으로 Earvin 'Magic' Johnson으로 불리기도 한다.[4][5]

결국 매직 존슨은 이렇게 다재다능한 실력을 바탕으로 에버렛 고등학교를 전국 우승으로 이끌게 되며, 고향 근처에서 살고 싶었던 그는 대학을 미시간 주립대로 선택하여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 미시간 주립대

미시간 주립대에 입학간 그는 역시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1학년때부터 17득점 8리바운드 7어시에 해당하는 성적을 거뒀으나 아쉽게 8강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리고 다음해 2학년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칼을 간 미시간 주립대는 매직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승수를 쌓아나갔고 결국 1979년에 현재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대학경기라고 이뤄지는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는데 이 결승전에서 농구 역사상 최고 라이벌이라고 여겨지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경기를 하게 되었다.

이 유명한 경기의 승자는 매직이었다. 당시 경쟁자였던 인디애나 주립대는 거의 버드의 원맨팀이었기 때문에 미시간 주립대는 버드에게 더블팀, 트리플 팀의 집중경기를 했고 이로 인해 버드는 평상시보다 훨씬 저조한 경기를 펼칠수 밖에 없었기에 이 둘 사이의 라이벌전에서 첫 승은 매직이 가져가게 된다.

미시간 주립대를 우승으로 이끈 매직은 대학 농구의 MVP에 해당하는 Most Outstanding Player 상을 받았고, 1979년 드래프트에 신청하게 된다.

4. 레이커스의 전설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에 의해서 첫 픽으로 뽑히게 된 매직은 가세하자마자 레이커스를 우승후보로 만들어놓았다.[6]

레이커스가 전체 1순위를 가진 것은 약간 씁쓸한 행운에 가깝다. 원래 이 픽은 그해 꼴찌인 뉴올리언스 재즈의 것인데, 이 픽을 행사하기 3년전인 1976년 레이커스의 슈퍼스타 가드이자 UCLA의 레전드인 게일 굿리치가 자유계약선수로 재즈와 계약하면서 그때 있었던 베테랑 FA 보상 제도로 인해 굿리치를 잃은 대신 재즈의 신인 지명권을 받아왔던 것. 1979년 1라운드 픽을 가져오는데 그해 재즈가 전체 꼴찌를 하고, 동부지구 꼴찌를 했던 시카고 불스동전 던지기를 해서 최종적으로 1번 픽을 얻게 되어 매직 존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굿리치는 이적 첫해인 1976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시즌 2/3을 날렸고 굿리치는 이전부터 자신이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억지로 뛰게 했다는 사유로 레이커스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미 굿리치는 레이커스의 마지막 시즌 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달고 뛰었으며 이때문에 프리시즌 훈련캠프를 빠졌다고 무려 1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했기 때문.

루키 시즌에 결승에 진출해 Dr. J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식서스와 붙었을 때, 2승 2패로 동률이던 상황에서 센터이자 주장인 카림 압둘 자바가 발목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투혼을 보여주며 5차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국 부상으로 뛸 수 없게 되자 모두들 '아 이젠 시망이구나'하고 좌절해 있는데 매직 혼자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매직이 있습니다."라고 선언. (다들 어 그래, 라고 신경도 안 썼다고. 원래 좀 떠벌이 경향이 있었으니까..) 경기시작 전 코치를 찾아가 "저 센터볼래요"라고 했던 매직은 웃음을 터트린 코치에게 농담 아니라고 부연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직은 6차전에서 센터로 시작해 가드와 포워드 역할까지 수행하며[7] 42점 15리바운드 7어시스트라는 파이널 1경기 최다득점에서 역대 2위에 올라있는 괴물같은 성적을 올리면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8] 결국 파이널 MVP는 자바가 아닌 매직의 차지였고,[9] 자바는 살짝 삐쳤다고(…)[10][11]

성공적인 루키 시즌을 거뒀지만 공교롭게도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인상은 래리 버드가 가져갔다. 이때 매직은 자신도 충분히 신인상이 될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버드에게 완전히 밀려서 실망했다고 한다.[12][13] 이때부터 슬슬 둘 사이의 라이벌 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82년에 팻 라일리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결국 레이커스는 82년에 필라델피아 식서스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매직은 두번째 우승과 두번째 파이널 MVP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84년에 결승전에 진출하고 드디어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와 만나게 된다. 1차전을 잡으며 이기나 했지만 2차전과 4차전에서 매직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결국 7차전에서 셀틱스에 무너졌고 버드에게 복수당했다. 매직은 이때의 패배가 그를 바꿔놓았다고 회술한다.

85년에 이를갈고 다시 결승에 진출했으며 이번에는 철지부심한 레이커스 멤버들과 (특히 압둘 자바) 성공적으로 셀틱스를 이겨냄으로 작년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 다음해에는 아쉽게 휴스턴에 패배하면서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매직은 그 해에 첫 MVP를 따내게 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에 기다리던 셀틱스와 버드와 또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매직이 이기게 된다. 특히 4차전에그 유명한 매직의 훅샷이 (그가 스스로 쥬니어 쥬니어 훅샷이라고 부르는) 나오게 되었는데 이 게임에서 탄력을 받으며 우승을 하게 된다. 이 후에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셀틱스가 부진하게 되며 매직과 버드는 다시 재회하지 못하게 되어 이 시리즈가 그 둘의 마지막 시리즈가 된다. 그리고 매직은 이 시리즈에서 그의 마지막이자 세번째인 파이널 MVP를 얻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은 그의 절친 아이재아 토마스의 "배드 보이즈" 를 상대로 우승을 거두며 60년대 보스턴 이후로 처음으로 2년 연속 우승을 거둔 팀이 되었고 다섯번째 우승을 거두게 된다. 그 다음해인 1989년에 두번째 MVP를 수상하고 팀도 파이널에도 진출을 하나 2차전에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일찍 아웃되면서 "배드 보이즈"에게 스윕당하고 만다.

그 다음해가 시작하기 전에 압둘 자바가 은퇴를 하고, 매직은 세번째로 MVP를 수상하나 피닉스 선스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매직의 역사상 가장 빨리 플레이오프에서 제거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다음해에 매직과 레이커스는 파이널에 진출하나 상대는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 스카티 피펜의 수비에 고전하며 (그래도 18득점과 8리바운드 12어시) 우승에 실패하고 사실상 마지막 경기를 밟는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으나... 1991년에 HIV 양성반응으로 은퇴를 선언해야 했다. 참고로 기자가 "누가 당신에게 에이즈를 옮긴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니 너무 많은 여자와 잠을 자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고(…).[14] 침대에서도 올라운드 플레이어 역시 마법의 거시기가 맞나보다 [15]

당시 HIV보균자라는 사실은 대중에게 에이즈환자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에이즈는 걸리면 바로 죽는 공포의 병이라 에이즈 환자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매직 존슨은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살았고, 이는 일반인과 환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완치제는 없지만 HIV 억제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서 관리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만성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에이즈 관련 약품이 개발완료되어 시판되기 직전단계에서 많은 제공을 받는다고도 한다.

1991년 은퇴선언을 했지만 1991-92시즌 올스타 득표에서 서부 가드 중 2위, 서부 전체로는 칼 말론, 클라이드 드렉슬러, 크리스 멀린에 이어 4위의 득표를 해버렸다. 매직의 득표수는 65만표가 좀 넘었는데 서부 1위 말론은 76만표대였으며 전체1위는 유일하게 백만표를 넘긴 마이클 조던이 차지했고 전체2위는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있었던 조던의 절친 찰스 바클리가 조던과 99만여표로 차지했다. 덕분에 92년 올스타 게임 주전으로 발탁되었고 당시 반시즌을 쉬었다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대활약. 게다가 결정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며 올스타전 MVP등극했다. 그리고 현역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NBA 드림팀 1기에 뽑히며 프로팀 선수가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가 허용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16][17]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95-96 시즌 중반에 현역 복귀를 선언하여 레이커스에서 32번을 다시 달고 뛰기도 했는데, 이때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전처럼 주 포지션이었던 포인트 가드로 뛰지 못하고 파워포워드로 플레이하였다. 마이클 조던과 잠시 매치업MJ對MJ이 되는 등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은퇴했...으나, 다시 은퇴할 때까지의 기록은 역대 통산 기록 평균에 꽤 뒤지긴 하지만 그럭저럭 준수했다. 복귀 당시 스탯은 14.6점 6.9어시 5.7리바로 커리어 평균에 크게 못 미쳤으며 36분 환산 스탯과 윈셰어 등 2차 스탯도 마찬가지였다. 센스는 여전했지만 전성기보다 크게 느려진 몸놀림과 무릎부상으로 예전같은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닉 반 엑셀, 에디 존스 등 젊은 코어로 리빌딩을 마무리해가던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전성기 기량을 잃은 과거의 전설이 사실 크게 필요하진 않았다. 올드팬들은 매직을 보며 즐거움을 느꼈지만 선수 커리어 측면에서 볼때 성공적인 복귀라고 하긴 어렵다. 조던의 위저즈 시절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당시 레이커스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로스터였고 매직 나이도 30대 후반이였기에 팬, 언론도 전성기 플레잉타임과 영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4년 이상의 공백기간이 있었음에도 저 정도의 스탯을 보여준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따라서 매직의 복귀는 성공적으로 봐도 무방하지만 이미 20시즌 전 이야기 이고 관련기사들도 찾기 어렵다. 당시 농구잡지를 참고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다. 개인마다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다르기에 각 자 판단에 맡기지만 매직은 이미 10시즌의 경력으로 이미 NBA 올타임 레전드 입성한 인물이기에 95-96시즌 복귀는 91년 파이널 이후 HIV로 인한 갑작스러운 은퇴에 대한 마무리이자 팬 서비스 차원의 선수경력이지 더 높은 곳을 가기 위한 복귀는 아니였기에 크게 중요한 시즌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조던과는 정 반대 상황이다. 위저즈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당시 위저즈는 팀이 워낙 안습해서 복귀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조던에게 복귀를 종용했었고[18], 그의 존재로 팀 성적이 두배나 뛰었다. 또한 당시 레이커스는 전성기를 달리던 블라디 디박, 훗날 올스타에 선정된 닉 반 엑셀, 에디 존스 등 좋은 선수들이 즐비했고 복귀 전에 이미 48승을 거둔 팀이었다. 즉, 매직 없이도 잘 성장 중인 팀이었고 굳이 그가 전력적으로 필요없는 상황에서 복귀했고 복귀 이후에도 크게 전력이 상승하진 않았다. 복귀 시즌에도 32경기만 뛰었고. 반대로 조던의 경우 01시즌에 19승에 그치는 형편없는 팀성적과 팀 내에서 수준급 선수가 리처드 해밀턴 [19], 그리고 그와 트래이드되어서 합류하는 제리 스택하우스 뿐이었다. 또한 복귀 후 조던은 02시즌에 60경기, 03시즌에 전 경기를 뛰고 그 기간동안 팀성적이 각각 37승으로 두 배 가까이 뛰는 등 확실히 전력이 상승했다. 이걸 보면 조던의 복귀와 비교는 확실히 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은 커리어 성적에서 볼 수 있다. 통산 기록이 거의 트리플 더블에 가깝다. 단일 시즌 통산 기록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오스카 로버트슨에 필적하는 대단한 기록.

5. 플레이 스타일

매직의 플레이는 불규칙한 바운드로 성큼성큼 드리블치다가 예측못할 타이밍에 갑자기 대상 선수를 보지 않고 찔러주는 노룩패스를 빼곤 설명할수 없다. 워낙 패스가 마법같다고 하여 그의 닉네임 '매직'이 생길정도. 큰키에 팔도 길어서 휙하고 패스할때 속도감이 배가 된다. 그의 현역시절 기준이나 지금이나 이 정도 키면 파워 포워드로 뛰는게 정상인데 206cm의 큰 키로 앞선에서 뛰며 당시 레이커스의 쇼타임 속공농구를 주도했으니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의 뒤를 잇는다고 주목받았던 수많은 장신 포인트가드들이 결국은 그에게 미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수많은 그의 후계자 후보 중 가장 위협적이었던 올랜도 매직 출신 가드 앤퍼니 하더웨이는 결국 누적된 무릎 부상으로 기량이 급격하게 쇠퇴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20]

물론 비상시에는 큰 키를 바탕으로 센터, 포워드, 가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게다가 단순히 속공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게임 리딩 능력이나 코트의 시야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농구역사에서 포지션 파괴자의 원조라고도 할수 있다. <슬램덩크>에서 최강캐릭터 중 하나로 묘사되는 윤대협의 모티브가 매직 존슨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증거로 첫 우승을 거둘때 카림 압둘 자바를 대신하여 센터를 보면서 우승으로 이끈 것이 있다.

원포지션은 포인트 가드지만 매직 자신은 농구 인생 최악의 선택을 NBA에서 포인트가드를 주포지션으로 선택한 것으로 꼽는다. 포인트가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하고 수비 때는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매직이 수비하러 따라 다니기엔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갔기 때문이다. 덕분에 매직은 선수생활 내내 무릎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게다가 그의 큰 사이즈는 공격 시 유리함을 가져다 주었으나 수비시 빠른 선수들에게 고전한다는 약점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전성기에도 수비시에는 놈 닉슨, 바이런 스캇(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감독)같은 보조가드들이 상대 포인트가드를 맡고 매직은 상대 슈팅가드, 스몰포워드와 매치업하는게 많았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산 어시스트가 10141개로 4위, 통산 게임당 평균 어시스트는 11.19개로 1위인 선수이다. 만약 매직이 포워드로 뛰었으면 이와 같은 기록은 나오지 않았을 수도. 게다가 만일 그가 포워드였으면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역인 제임스 워디가 없었을 수도 있다.[22]

현재 기준으로 보면 3점슛이 적어보이나 후술하겟지만 그 당시 치고 3점이 약한 선수는 아니었다. 80년대만 해도 삼점슛이 많이 사용되는 시대가 아니었고 [삼점슛], 그거 없이도 포스트업과 골밑에서의 플레이가 화려했으며 애초에 포인트 가드로 자신이 주득점이 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딱히 큰 문제가 될 건 없다. 그래도 가끔 클러치 샷을 잘 넣는 편이기는 했다. 말이 가드지 플레이 스타일은 포워드에 가까웠다.

5.1. 매직의 득점하는 방식에 대해

매직의 슈팅력에 대해 갑론을박이 있어 정리한다.

기존에는 "매직이 점퍼가 없었다"는 서술에 반박해 "매직이 3점이 장점이고 세트슛을 쏜다는 건 헛소리"란 서술이 있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매직의 중거리 슈팅력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다. 특히 자유투가 뛰어난 편이었는데, 버드 수준은 아니라도 커리어 84.8%에 88-89시즌에는 91.1%로 리그 1위를 한 적도 있었다.

다만 원래부터 자유투를 엄청 잘하는 건 아니고 루키 시즌 81%, 그 다음에는 76%, 76%, 80%, 81%으로 괜찮은 수준이었다가 점점 성공률이 늘어난 케이스.

3점슛 자체는 당대 기준으로도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고 그냥 괜찮은 편 정도였다. 매직은 데뷔 후 9년차때까지 매시즌 경기당 3점슛 시도 갯수가 1개가 안되었고 성공률이 1,2할대를 오갔다. 82-83시즌엔 시즌 내내 21개를 시도해 단 한개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다만 80년대 중반까지 선수들은 3점 자체를 시도하는 것을 생소하게 생각해 안 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때 통계들은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래리 버드도 경기당 1개도 안 쏘던 시절이 허다하다.

매직이 3점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했다고 볼 만한 건 경기당 2.4개를 시도 하고 0.8개를 넣었던(31.4%) 88-89시즌 부터이고, 그 다음시즌엔 1.3개 성공/3.5개 시도 (38.4%), 그 다음엔 1개 성공/3.2개 시도 (32%), 복귀 후엔 0.7개 성공/1.8개 시도(37.9%)였다.

매직과 성공률과 성공/시도 갯수가 가장 유사한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었다. 89-90시즌에 1.1개 성공/3개 시도 (37.6%)했다. 즉, 매직은 당시 조던과 마찬가지로 3점슛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수였지만, 장점이라고까지 할 순 없다.[24] 그가 뛰어난 3점기록을 낸 시즌은 복귀시즌까지 합해야 단 두 시즌뿐이니...[25] 또한 슈팅력을 꾸준히 키워서 초창기보다 후반기에 더 슛을 잘하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 종합해보면 이렇다. 매직은 스페셜리스트까진 아니었지만 3점슛을 곧잘 쏘는 선수였으며, 이를 옵션 중 하나로 이용했다.

- 그렇다면 매직의 슈팅력은? 결론부터 말하면 매직은 수비가 헐거워지면 중거리슛을 기습적으로 정확하게 잘 꽂았고, 중거리슈팅력이 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용어에서 혼용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보통 세트슛이라고 하면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를 하면서 쏘는 슛"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는 잘못된 용어로 세트슛은 점프를 하지 않고 서있는 상태에서 쏘는 슛, 점프슛은 점프를 하면서 쏘는 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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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슛이라는 용어의 문제일 뿐 높이 점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매직존슨의 점프슛의 점프높이가 낮은 것은 맞다. 이는 매직은 양발점프가 낮은 유형의 신체적 특징을 가진 선수여서 한발 점프가 아닌 양발을 붙인 상태에서 하는 점프슛은 높이 뛰지 못한다. 하지만 점프를 높이 하지 못하는 것과 점프슛이 약한 것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일단 상술했듯이 매우 정확한 슛을 가지고 있었고 장신의 신장과 긴팔, 그리고 자신의 슛이 블럭당하지 않는 수비수와의 거리감을 매우 정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매직은 점프슛을 거의 블럭당하지 않았다. 높이 점프할 수 있느냐 혹은 풀업점퍼를 쏘느냐 아니냐는 결과적으로 수비의 방해를 받지 않고 높은 확률로 슛을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고 매직은 낮은 점프력의 점퍼로도 수도 없이 수비수를 괴롭히고 높은 확률로 성공했다.

그리고 풀업 점퍼를 쏘지 못했느니 하는 주장도 나오지만 매직은 풀업점퍼를 잘 쏘지 않았지만 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가지인데 일단 선패스를 위해 동료들을 항상 보고 있으니 냅다 드라이브인 하다 슛부터 쏘는 경우가 당연히 많지 않고 드라이브인 상황에서 골밑으로 돌진하여 떡대와 스피드, 그리고 절묘한 레이업 기술로 득점하는 것이 당연히 풀업점퍼보다 확률이 높으니 그대로 골밑으로 드라이브인 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렀다 하더라도 시간이 얼마 없거나 골밑에 공간이 없어 못들어갈 때는 충분히 풀업점퍼를 쏘았고 굉장히 잘 성공시켰다.

게다가 엄격한 의미의 풀업점퍼를 잘 쏘지 않았을 뿐이지 요즘의미에서 한 두발 드리블로 드라이브인 할 듯 움직이다가 점프슛을 쏘는 것도 풀업이라고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드리블 하다 점프슛은 충분히 많이 사용하는 옵션이었다. 이것이 요즘 풀업점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매직의 드라이브인이나 드리블 자세가 굉장히 높기 때문에 낮은 자세로 드라이브인 하다 위로 몸을 일으켜 점프슛하는 것보다 덜 역동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높은 드리블 자세에서 이어지는 점프슛의 이점이 있었던 것은 드리블 하다 공을 잡고 슛모션을 가져가서 슛까지 이루어지는 동작이 간결하기 때문에 슛모션이 빠르지 않음에도 수비수들이 블러킹을 시도하기에 이미 한발 늦어버리기 때문에 매직의 점프슛을 잘 막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매직 특유의 슛자세는 특유의 낮은 양발점프를 극복하기 위해 높은 드리블 자세를 활용한 결과물로 수비수들이 제대로 잘 막지 못한 공격옵션 중 하나였기 때문에 점프슛이 약한 것은 아니다.

종합해보면 이 전의 갑론을박은 용어에 대한 이해 차이로, "점프와 거의 동시에 슛을 쏘는 것"이 매직의 주요 슈팅방식이라는 것에 대한 이해는 동일하나, 이를 두고 세트슛이라고 부르느냐, 점프슛이라고 부르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세트슛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 역시 점프슛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말해 맞다.[26]

매직이 고득점한 경기들의 영상을 통해 그가 어떻게 득점했는지 보자 (로우포스트에서 매직이 포스트업하다가 패스해주면 그거 받아서 점프슛 쏘는 선수 워디와 스콧 등과 헷갈리지 말것) 매직은 커리어 하이가 46점이던 선수라, 아래 영상들은 매직치고 충분히 고득점을 한 경기들이다.

이 영상은 1991년 휴스턴과의 플레이오프 경기이다. 당시 만 31세이던 (생일이 안 지났다) 매직은 퍼스트팀 멤버였으며 신체적으론 조금 하락세였으나 기술적으로 완성된 시점.

여기서 그는 38점을 득점했는데, 영상에서는 필드골 14개 중 6개가 묘사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7개)

1.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하다가 골밑에서 레이업, (이후 동일한 과정 이후 훅슛 마무리하려다 블럭당함)

2.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던 제임스 워디의 패스를 받아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해서 3점슛.

3. 다시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다가 돌파 후 레이업

4. 또 백다운하다가 베이비훅슛

5. 속공에서 코스트 투 코스트 레이업 (해설자가 매직이 연속으로 "two easy lay-ups"를 넣었다는 걸 보면 영상에서 생략된 그 전 득점도 레이업이란 걸 알 수 있다.)

6.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하다가 또 돌파 후 레이업

여기서 보듯이 그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3번 내지 4번, 현재 기준으로 보면 빅맨에 가까운 플레이를 했다. 득점이든 패스든 거의 모든 플레이를 포스트업 상태에서 백다운하며 시작했으며, 중거리슛 위치에서 턴어라운드 점퍼가 아닌 훅샷으로 마무리하거나 골밑돌파를 했다. 심지어 슈팅가드인 바이론 스콧이 여러번 그에게 엔트리패스를 넣어주는데, 마치 조던이 피펜에게 엔트리 패스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조던보다도 더욱 로우포스트에서 득점하는 빈도가 높았고, 포스트업 실력이 더욱 뛰어났다는 것. 특히 훅슛의 완성도가 넘사벽이었다.

초창기의 경기를 한 번 보자. 이 영상은 매직이 루키로 압둘자바를 대신해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그 유명한 경기다.

우승이 결정된 6차전에서 매직은 야투 23개를 쏴서 14개를 넣었다. 이 영상에서는 14개 중 13개가 나와있다.

1. 드리블을 하다가 수비수가 공간을 주자 세트슛으로 득점을 한다.

2. 돌파후 레이업

3. 돌파 후 레이업

(주의: 4:58에 점퍼 쏘는 선수는 매직이 아님. 자세히 보면 매직은 포스트업에서 패스빼주는 선수다)

4. 돌파 후 자유투라인 부근에서 한손 슛

5. 패스 받은 후 페인트존 바로 밖에서 훅슛

6. 공격리바운드 후 풋백득점

7. 돌파 후 레이업

8. 공간이 나자 20피트 지점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

9. 삼점라인 바로 안쪽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해설자가 Magic will take a set shot on Bobby Jones라고 직접적으로 언급)

10. 돌파 후 레이업

11. 공격리바운드 후 팁인

12. 골밑슛

13. 패스받아 덩크슛

초창기라 포스트업을 많이 하기보다는 돌파나 컷인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매직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또 하나 보자. 이 영상에서 30세의 매직은 MVP에 올랐으며, 43점을 기록했다. 1990년 서부 준결승 5차전이다. 여기서 그는 필드골 26개를 시도해 15개를 넣었다.

1. 리바운드 후 풋백

2. 로우포스트에서 백다운 후 왼손 훅슛

3.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4.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5. 포스트업하다가 오른쪽 훅슛

6.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7.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8. 포스트업하다가 골밑슛 미스 후 리바운드해서 풋백

9. 기습적인 컷인 후 레이업

10. 포스트업하다가 스핀무브 돌파 후 레이업

11.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하다가 뱅크슛

12. 속공에서 패스받아 점프슛

13. 포스트업하다가 돌파후 욱여넣기 슛

14. 속공 과정에서 레이업

15. 22피트 지점에서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슛

11번 득점코스의 경우 골밑에서 점프하며 한손으로 슛을 올리는 건 샤킬 오닐도 자주 하는 플레이였다.

보면 매직 본인에게 대단히 높은 43점을 넣는 도중 15개의 필드골을 하면서 절대 다수가 로우포스트에서 포스트업이며 레이업/골밑슛이고, 먼거리에서 세트 자세에서 점프슛을 하는 걸 볼 수 있다.[27]

이 세 영상 외에도 매직의 경기를 보면 초창기건 후반기건 대부분 세트 포지션에서 점프와 동시에 쏘는 걸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초창기의 매직은 포스트업도 하긴 했지만 활발한 운동량으로 컷인, 레이업, 골밑슛, 훅슛을 했으며, 기습적으로 세트슛을 쐈으며, 후반기에는 거의 빅맨처럼 득점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중거리에서 슈팅비중이 적으며, 그나마도 거의 세트된 상태에서 쏘는 점프슛이다.

결론적으로 매직의 중장거리슛의 절대 다수는 세트된 상태에서 점프와 동시에 쏘는, 흔히 세트슛이라고 알려진 슛이었다. 그러나 점프 후에 슛을 쏘던,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던 점프슛이 맞기 때문에, 매직 존슨은 점프슛을 쏜 것이 맞으며 점프슛 능력이 당시 기준으로 좋은 것도 맞다. 또한 이 정의대로는 가만히 점프하지 않고 쏘는게 대부분인 자유투를 제외한, 점프와 동시에 쏘는 슛은 모두 점프슛이란 걸 알 수 있다. 즉, 샤킬 오닐이 3점슛을 가끔 쏠때 세트된 상태에서 살짝 점프하면서 쏘거나 하는 것 역시 점프슛인 것이고 자유투 하듯 쏘지 않는 이상 세트슛으로 필드골을 쏘는 선수는 사실상 프로건 아마추어건 없다시피 하다. 즉, 엄밀히 정의를 따지면 사실상 NBA의 극초기[28]를 제외하면 프로수준에서 세트슛은 자유투를 제외하곤 없다.

선수로서는 일류였으나 지도자로는 범용한 수준이었다. 그 내용은 밑에서 후술한다.

5.2. The Show Time

매직의 전매특허는 역시 전광석화같이 상대의 혼을 빼놓는 화려한 패스. "쇼타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80년대 레이커스의 농구는 농구 역사상 런앤건이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된 화려한 빠른 템포의 농구였고, 그 중심에는 단연 매직이 있었다. 특유의 노 룩 패스는 말 그대로 매직을 보는 듯 하다. 선수생활 시 같이 뛰었던 선수가 "매직의 패스는 마치 나와 그 사이의 사람을 뚫고 와 버리는 것 같다"라고까지 표현. 심지어 몇몇 패스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 뿐만 아니라 카메라맨조차 속아서 공을 놓쳐 버리고는 했다. 두 말이 필요없으니 아래의 동영상을 감상해 보자.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나게 화려하다.

아래 영상 2분대에 주로 나오는 것처럼 매직은 그야말로 파워패스라는 말이 어울릴정도로 패스를 엄청나게 강하고 빠르게 예측불허의 타이밍으로 던졌기 때문에 팀원들조차 조금이라도 방심하고 있다간 패스 캐치 타이밍이 늦어서 공을 놓쳐서 턴오버가 되고 매직의 폭풍 갈굼을 당하는게 일상이었다. 이때문에 매직 중심으로 팀이 짜인 쇼타임 레이커스는 그의 패스를 받아낼 수 있는 선수만 한 팀에서 뛸 수 있다는 암묵적인 조건이 있었다. 매직의 후배이자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전이었던 제임스 워디 역시 데뷔 초엔 매직의 패스가 너무 강해서 받기 어려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대신 그런 언제 킬패스가 날아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경기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레이커스 특유의 런앤건과 속공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원동력이었다. 일단 매직은 동포지션을 압살하는 수준의 떡대와 드리블링으로 상대 수비진 한가운데까지 압박해들어오기 때문에 지공상황에서도 상대 수비수 전부를 끌어모을 수 있는데, 이때 강한 어깨와 자신만의 패싱레인 읽는 타이밍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서 레이커스 팀원을 놓치는 걸 보자마자 순식간에 패스를 발사하여 팀원이 본능적으로 잡아 마무리하는 정도였다. 매직은 세트슛 폼때문에 풀업점퍼가 아예 없어서 1대1수비때 슛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던 편임에도 이 본능적인 타이밍과 떡대, 그리고 웬만한 빅맨급 우겨넣기 스킬[29]로 트리플 스렛이 되기 때문에, 공들고 밀고들어오면 수비수들을 되려 압박했다.

다만 이런 화려한 패스 때문에 턴오버가 상당히 많은 편. 906경기를 뛰면서 3506개의 턴오버를 기록했고 평균으로 환산하면 3.9개이다. 83-84 시즌에는 4.6개의 턴오버를 하기도 했다.

래리 버드와는 NCAA 결승전 때부터 라이벌이었으며,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한 때 결승전이 녹화 중계될 정도로 안습했던 NBA의 인기를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이 결승에서 만날 때마다 명경기가 벌어졌는데, 그중 87년 결승 4차전에서 상대 수비에 줄 곳이 없자 직접 본인이 드리블하며 들어가 훅슛을 성공시킨 'Baby Hook Shot'은 명장면 중의 하나.

바로 이 장면.[30]

5.3. 래리 버드와의 라이벌리

래리 버드의 은퇴식에서 셀틱스의 라이벌인 자신의 소속팀 레이커스 트레이닝복을 입고 웃으며 등장했는데, 트레이닝복을 벗자 안에 입고있던 셀틱스 유니폼이 나타나는 장면은 역대 모든 선수의 은퇴행사 중 최고의 퍼포먼스로 꼽힌다.

매직 존슨래리 버드는 각자의 농구 실력으로도 인정받았지만 이들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로 이들이 망해가던 NBA 를 살렸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라이벌리는 NCAA 부터 즉 대학 농구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둘은 대학 경기 결승전에서 만났으며, 이 경기에서는 매직의 미시간 주립대가 버드의 인디야나 주립대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 했다.

이 경기를 시점으로 NBA는 대놓고 이들을 앞세우며 망해가던 인기를 다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다. 후세에 이들의 등장을 사람들은 "하늘이 내려준 라이벌 관계", "가장 완벽한 출연진" 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NBA는 결승전마저 녹화를 할 만큼 인기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등장을 앞세우는 건 어찌보면 NBA로서는 당연히 해야할 숙명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대조점을 비교해보면 너무나도 인기를 끌만한 요소들이 많다.

1. LA 레이커스보스턴 셀틱스는 오랜 기간동안 숙명의 라이벌 이었다는 점

2. 한 명은 흑인이고, 다른 한 명은 백인 이었다는 점.

3. 한쪽은 화려한 스타일의 LA 출신이라는 점, 한쪽은 다소 꼿꼿한 보스턴 출신이라는 점.[31][32]

4. 한쪽은 서부를 대표하고 한쪽은 동부를 대표한다는 점.

이런 다른 점들 때문에 매직과 버드는 초반에는 정말 라이벌 답게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컨버스 농구화 광고를 찍게 된 시점으로는 코트에서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사적으로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버드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매직의 기록을 확인하곤 했다"라거나, 매직이 "나에게 1년 일정은 셀틱스와의 2경기와 나머지 80경기였다"라고 말한 말은 유명. 둘의 실력도 막상막하이고 전적도 일방적이지 않으며 경기장을 벗어나면 최고의 친구인 정말 만화에서조차 등장하기 힘든 좋은 라이벌 관계.[33] 당연히 경기장 내에서는 전력을 다해싸웠다. ESPN은 이 둘을 조명해서 Magic & Bird - A Courtship of Rivals 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시청한다면 라이벌이면서도 친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기자는 "사람들이 마이클 조던이 NBA를 살렸다고 하더군요. 웃기고 자빠졌네요.[34] 매직하고 버드가 NBA를 구했습니다. 매직과 버드가요" 라고 강조할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컸다.

6. 감독으로서

매직의 은퇴 후, 레이커스는 바이런 스캇 등 쇼타임 레이커스의 멤버들이 떠남으로써 성적도 점점 하락해 마침내 1993-94시즌에는 커다란 슬럼프에 빠져 플레이오프에 못 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이에 구단은 시즌 중반에 해고당한 랜디 펀드(Randy Pfund)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즌 막판에 가서야 매직을 불러오게 되었다.

부임 초반에는 5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생겨 당시 레이커스 홈구장인 잉글우드 포럼에 팬들이 연신 몰려들었지만, 이후 10연패를 당하면서 정규시즌 33승 49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시즌 후 구단주 제리 버스가 다음 시즌에 1400만 달러의 연봉을 제시하며 정식 감독에 오를 것을 제의했지만, 그는 감독직을 거절하고 대신 주주로 경영에 참여한다.

7. 사업가로서

결국 감독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신 사업수완에는 재능이 있어서 선수생활 은퇴 이후 사업으로도 매우 크게 성공했다. 은퇴한 운동선수 중 사업으로 가장 성공했고, NBA의 은퇴선수의 롤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부사장직을 맡고있으며, Magic Johnson Development Corporation이라는 자신의 기업을 만들어 사업에 크게 대성공했고 지금은 Magic johnson Enterprises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매직 존슨의 회사는 4개의 도시에 매직존슨 극장을, 그리고 미국 전역에 114개의 스타벅스, 39개의 버거킹, 13개의 피트니스 센터를 가지고 있다. ㅎㄷㄷ.

당시 미국의 흑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우범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이런 지역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주변의 평가를 물리치고 우범지역에 흑인들을 주로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하고 그들이 그 급료로 소비를 하면서 지역경제를 끌어올리고 범죄율과 실업률을 낮추는 등 사업에서도 마법을 부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잡지 포브스에서 주목받는 흑인 기업가 중 한명으로 뽑히기도 했다.[35] 2012년에 30년지기 친구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워싱턴 내셔널스 사장이었던 스탠 카스텐과 같이 컨소시엄을 이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인수에서도 나섰다. 그만 홀로 인수한다면 어렵겠지만 메이저리그 인맥이 많은 카스텐과의 협조 때문에 미국에서도 다저스 인수에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그리고 결국 다저스 인수쟁탈전에서 승리하게 되어 공동구단주가 됐다. 대신 맥코트가 돈방석에 앉았지만. 덕분에 막장으로 전락한 맥코트 구단주 시기 선수들에게 연봉을 줄 돈도 없어 중계권을 헐값에 팔아넘기려다 무산되는 등 망해가던 다저스는 안정적인 자금줄을 확보하며 재도약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최고의 투수를 영입했습니다 [36]

그리고 류현진의 입단식에도 얼굴을 비췄다. 현역 때 비해 더욱 후덕해진 모습. 앞으로 류현진과 관련해서 국내 팬들에게도 자주 모습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류현진이 완봉승을 기록하자 트위터를 통해 칭찬하기도 했다. 기사

전 야구선수 노마 가르시아파라, 그의 부인이자 미국 여자축구의 전설인 미아 햄, 유튜브의 창립자 채드 헐리 등과 함께 다시 한번 컨소시엄을 이뤄서 2017년 MLS에 참가할 LA의 신생 축구 구단 창단 작업에 들어갔다.

2014년에는 WNBA팀 로스엔젤레스 스팍스[37]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스팍스는 2016년 WNBA 정상에 올랐고, 구단주 매직 역시 오랫만에 농구로 우승했다.

2017년 2월 3일, 매직이 다시 레이커스의 프런트로 돌아온다는 기사가 나왔다. 자세한 기사는 여기를 참조.

8. 운영진으로서

2017년 2월 17일에 짐 버스에 의해 LA Lakers의 사장으로 고용되었다. 본인이 선수시절 뛰던 팀이니 어떻게든 레이커스를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약속을 했고 많은 기대를 불러모았지만 2018년까지 큰 움직임이나 활약은 없었다. 하지만.....

2018년 6월 오프시즌이 시작되자마자 2년 안에 레이커스에 슈퍼스타를 데려오지 못하면 물러나겠다 라는 발언을 했고 그리고 7월에 그 르브론 제임스와 계약함으로 인해 자신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카와이 레너드가 레이커스 행을 희망함으로 인해 르브론과 같이 카와이를 붙여주기 위해 많은 트레이드를 하느냐 마느냐 말이 많았지만 스퍼스의 제안에도 중요한 유망주들을 내주기를 거부하면서 버텼는데 이것이 꽤나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38] 게다가 매직은 내년에도 슈퍼스타를 데려올 계획이 있다면서[39]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줌으로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레이커스에 새힘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르브론 제임스 영입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레이커스의 18-19 시즌은 대실패로 마무리되었다. 특히나 시즌 도중의 앤서니 데이비스 트레이드 시도 파문으로 팀 분위기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르브론의 병장 농구는 이런 막장 사태에 기름을 끼얹어 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팀 관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ESPN 평론가 스티븐 A. 스미스 등은 매직 존슨을 초짜 경영자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매직 존슨이 전 사장의 흔적을 지운다고 트레이드했다가 뉴욕의 왕이 되어버린 디안젤로 러셀은 덤이다.

결국 4월 10일 매직 존슨은 사장직을 사임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면서 Adrian Wojnarowski 기자는 "매직 존슨은 사장으로 있을 때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여행이나 자주 가고 스카우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도 않았다."며 극딜을 퍼부었다.트윗

9. 동영상

매직 존슨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상 (1991, 링크는 1996년 개정판이다.)

10. 말말말

"농구 역사상 마이클 조던보다 위대하다고 논쟁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선수"[40]

ESPN.

"매직은 다른 모든 플레이어들 보다 머리 하나 그리고 어깨 하나는 위에 있었다(뛰어났다). 난 매직만큼 잘하는 다른 누구를 본적이 없다"

ㅡ (래리 버드, 시카고 선 타임스).

"매직은 단 세번의 슛만을 쏘고도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다"

줄리어스 어빙

"당신에게 미소 지으면서 동시에 (놀라운 플레이로) 창피를 주는, 또 다른 6피트 9인치의 포인트 가드는 앞으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제임스 워디[41]

"매직은 어릴때 (물론 나의 아버지를 빼고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선수였다. 레이커스가 챔피언쉽을 차지하던 시절 나는 그 당시 매직이 하던 플레이들을 따라해보곤 했었다. 나는 매직이 모든 사람들을 게임에 끌어들였다는 점을 사랑한다. 그의 팀메이트, 팬들, 모든 사람들을."

코비 브라이언트

코트 위의 마법사

이 이외에도 NBA의 전설이었던 그에 대한 매우 많은 평가들이 있다.

11. 기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훈남이다. 선수생활 초반에는 실수도 많은 놈이 실실 웃기만 한다고 까이기도 했...으나 근성과 승부욕은 래리 버드 못지 않은 선수.

아들이 자신이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버지인 매직 존슨은 아들의 커밍아웃에 대해 옹호해줬다.

국산 만화 달숙이에 나오는 매직 쫀슨은 이 캐릭터를 패러디한 것. 그렇다고 그 쪽이 된 건 아니니까 오해말자.

뮤직 비디오에도 출연했다. 92년 마이클 잭슨의 Remember The Time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초반부에 파라오의 시종(...)으로 나와서 왕비를 기쁘게 해줄 광대들을 소개하는 역할로 나온다. 또한 퍼렐 윌리엄스의 Happy에도 등장한다.#

사우스 파크 시즌12 1편에선 HIV에 감염된 카일과 카트맨이 치료법을 찾기 위해 그의 저택을 찾는 전개가 나오는데, 끝내 찾아낸 치료법은...[42]

농구 만화 디어보이스후지와라 타쿠미(디어보이스)는 매직 존슨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NFL램스가 2016 시즌부터 세인트루이스에서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것이 확정되고 시즌 티켓 예매를 시작했는데 돌아온 램스의 시즌 티켓 1호 예약자가 됐다.#

예전에 팀 동료 제임스 워디와의 호흡에 대해 인터뷰하던 도중 말실수를 했는데, 서로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뜻의 ESP(ExtraSensory Perception)라고 하려다가 "우리는 ESPN[43]이 있는 것 같아요!(It's almost like we have ESPN)"라고 했다가 이게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거의 흑역사가 된 적이 있다.

상식적으로 NBA 선수가 ESPN을 모를리가 만무하기 때문에[44] 단순한 말 실수로 보이나 그의 인기와 당시 위상 때문에 "멍청한 스포츠 선수들이 하는 말이 이렇다"라는 식으로 엄청나게 퍼져서 "역사상 가장 멍청한 1001가지 발언(1001 Dumbest Things Ever Said"" 등 여러 책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45]

1995년 4월 매직팀을 이끌고 우리나라 방한해서 기아와 연세대 농구팀과 시합했었다. 당연히 두게임다 승리.


  1. [1] 맨발 신장 203cm
  2. [2] 95~96 시즌 복귀 당시
  3. [3] 흠좀무라고는 하지만, 보통 NBA의 레전드들은 대부분 고교시절 이 정도의 성적을 보였다. 이 정도 성적을 가진 고교 선수가 아니라면, 스카우터들이 처다보지도 않는다. 당장 고등학교 졸업 당시 전국구 유망주긴 했지만 톱까진 아니고, 자기가 원하던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잇으로부터 스카웃받지도 못한 마이클 조던의 4학년 스탯이 26.8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였다. 카림 압둘자바는 무려 71연승에 고교 시절 내내 79승 2패를 기록했다. 다만 매직의 저 성적은 레전드들 중에서도 탁월한 축에 속하는 것은 맞다.
  4. [4] 본명인 어빙 존슨의 경우는 매직이 은퇴한 이후인 1993년에 1라운드 23번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 지명되어 데뷔한 센터 어빙 존슨(Ervin Johnson)이라는 선수가 한명 더 있다. 스펠링이 Ervin으로 다르지만, 이때문에 보통 어빙 존슨은 이 센터 어빙 존슨을 말한다. 센터 어빙 존슨은 시애틀,덴버,밀워키,미네소타등에서 활동한 평범한 몸빵형 센터로 이렇다할 주목을 받지 못하고 커리어를 마감했다.
  5. [5] 훙미롭게도 매직은 자신과 래리 버드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빈 존슨과 매직 존슨을 다른 자아로 설명한다. 어빈 존슨은 인간미를 가진 말 그대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고, 매직 존슨은 승부욕에 넘치는 농구 선수라고. 래리 버드 역시 동조하며 자신은 매직보다는 어빈이 좋다 라고 받아쳤다.
  6. [6]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매직은 첫 경기를 이기고 우승을 한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주변인들이 제발좀 그러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매직의 성격과 실력은 레이커스를 강호로 만들었고 결국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에 선정되고 레이커스는 60승을 거두게 된다. 결국 레이커스는 파이널에 진출하였고 우승을 하는데 그 과정이 극적이다.
  7. [7] 경기 영상 사실 경기 장면을 보면 진짜 압둘자바처럼 골밑을 철저히 지키는 센터로 플레이한 건 아니고 가드와 포워드를 오가는 평상시의 플레이에 가까웠다. 90년대 이후 농구를 본 팬들은 "어? 포스트업을 자주하니까 센터 역할을 한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매직 존슨은 원래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와 훅슛으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이다.(포스트업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보다 포스트업 빈도수가 훨씬 잦고 능력도 앞서면 앞섰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중거리에서 약한데 점프슛이 없고 세트슛으로 쏘기 때문. 때문에 매직은 외곽에서 게임리딩을 하다가 패스를 찔러주기란 가드스러운 플레이 + 포스트업으로 쭉쭉 밀고 들어가다가 본인이 마무리 or 오픈된 동료에게 패스란 파워포워드스러운 플레이가 공존하는 선수였다. 이때 압둘자바를 대신해서 센터로 점프볼을 한 것은 "내가 당신의 빈 자리를 메우겠다"는 제스쳐에 가까웠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8. [8] 지금은 5위 기록이다. 첨언히자면 1위는 누구나 아는 93년 파이널 4차전 마이클 조던55득점 경기. 그 해 조던은 시리즈 평균득점 41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세우며 맞상대 피닉스를 초토화 시키고 스리핏을 달성하게 된다. 이 인간은 도대체 적당히라는 것을 모른다. 물론 긍정적인 쪽으로 2위 기록은 18년 파이널 1차전 르브론 제임스의 북치고 장구친 경기. 당시 무려 51득점을 퍼붓는 엄청난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에서 나온 희대의 뻘짓이 더 유명해진 경기였다... 3위는 19년 피이널 3차전에서 나온 스테판 커리47득점 경기이다. 하지만 이때 골든스테이트는 팀원들 전체가 부상에 골골대는 바람에 준우승에 머무르며 스리핏을 문턱에 두고 아쉽게 실패했다. 3차전 역시 패배. 그리고 4위는 위 2위기록과 같은 시리즈 3차전에서 나온 케빈 듀란트43득점 경기이다. 이렇듯 파이널 득점 최다기록 보유자들은 각자 나름의 스토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확실한 점은, 여기서 언급된 모든 선수들은 NBA를 대표하는 레전드이자 아이콘이거나 이미 그랬음이 틀림없다.
  9. [9] 최연소 파이널 MVP(만 20세)이자 신인이 받은 첫번째이자 지금까지도 없는 파이널 MVP
  10. [10] 당시 압둘자바는 리그 MVP였고 당연히 팀 내 독보적인 에이스였다. 그런데 갑툭튀한 신인이 한 시리즈 잘했다고 MVP와 모든 주목을 독차지한 것이다. 이때 매직은 21.5점 11.2리바운드 8.7어시스트 2.7스틸로 트리플 더블에 가까웠으나 압둘자바는 무려 33.4점 13.6리바운드 3.2어시스트 4.6블럭을 기록하며 양팀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했다.
  11. [11] 게다가 압둘자바는 어차피 6차전을 질 거라고 생각하고 (사실 다들 그랬다) 홈에서 열리는 7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가지 않고 LA에 있었다. 지금은 NBA팀들이 전세기나 전용기로 이동하고 온갖 호화시설을 사용하지만 당시는 그렇게 환경이 좋지는 않았고 미국 끝과 끝인 필라델피아 - LA 왕복비행을 하느니 컨디션 조절하면서 7차전 준비하는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갑자기 원정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졸지에 팀의 에이스가 팀이 우승하는 자리에 빠지게 되는 꼴이 되버린 것. 여담이지만 당시만 해도 상위시드팀 홈-하위시드팀 홈에서 번갈아가며 하는 경기수를 2-2-1-1-1로 했다. 그러나 80년대에만 8번 결승에 올라간 레이커스가 서부 끝이고, 디트로이트가 강팀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매번 파이널에 올라가던 필라델피아, 보스턴이 모두 동부연안 도시 연고팀들이라 이동거리가 장난아니게 길어지자 86년 파이널부터 2-3-2 시스템으로 바꿨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위시드팀에 불리 (홈 2연전에서 1패라도 하게 되면 1승1패 상태에서 원정 3연전을 치르는 부담이 있고, 2대2로 시리즈 전적 타이인 상황에서 5차전을 이기는 팀이 통계상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이 경우 그 중요한 5차전을 무조건 하위시드 팀의 홈에서 치르게 된다)하다는 지적에 2014년부터 다시 2-2-1-1-1로 바꾼다.
  12. [12] 다만 당시 MVP나 신인왕 투표 기록을 보면 알지만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awards/awards_1980.html) 신인시절 둘은 까놓고 말해 레벨이 달랐다. (둘의 나이 차이가 있어서 버드가 훨씬 완성된 상태로 데뷔했기 때문) 버드는 이해에 전 시즌에 29승을 거둔 팀을 혼자 힘으로 리그 전체1위인 61승으로 이끌며 MVP투표에서도 4위에 오르며 올 NBA퍼스트팀에 올랐다. 반면 매직은 좋은 활약을 보이고 올스타에 선정되긴 했으나 MVP투표에서 한 표도 못 얻고, 퍼스트팀은 커녕 세컨팀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이 정도 차이가 나니 버드가 신인왕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투표에서도 버드는 63표를 얻은 반면 매직은 3표에 그쳤다. 둘의 커리어를 보면 초창기는 더 성숙했던 버드의 우세 (매직은 4년차가 되어서야 퍼스트팀에 올랐다), 중반기는 용호상박, 그리고 버드가 몸이 망가지고 난 이후 후반기는 매직의 확연한 우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버드가 84~86시즌 MVP를 차지한 이후 87, 89~90시즌에 매직이 MVP에 올랐다. 그러나 매직의 팀성적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개인기량은 백중세지만 커리어 상으로 매직이 더 높게 평가받는 것.
  13. [13] 매직의 이 발언은 HBO에서 방영한 A Courtship of Rivals Basketball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직접 한 발언이다. 객관적으로 실력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막 우승을 거두고 루키로써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던 매직이 버드가 받는 주목에 자극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4. [14] 1000명이 넘는다고 하며, 마돈나도 그중 하나였다고..
  15. [15] 그와 절친했던 기자에 의하면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많은 여자들이 매직과 관계를 갖고 싶으면 (...) 호텔있던 매직의 락커에 키를 두고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박스에 매일 수십개의 키가 들어있었다고...
  16. [16] 근거가 필요한 내용인거 같다. 일반적으로 알려진것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대표팀이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3위를 했기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때까지 미국은 올림픽에 대학선수들로 대표단을 구성해서 내보냈었다. 서울올림픽 당시에 미국 대표팀 명단에 데이비드 로빈슨도 포함되었었다. 그런데도 3위를 했고, 이는 종주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거라고 보고 NBA선수들을 보내기로 결정한거라는 말이 있다.
  17. [17]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는 당시 커미셔녀였던 데이비드 스턴과 선수들이 왜 다른 나라들은 프로를 내보내는데 NBA에서는 꼭 대학생들을 내보내서 당하게 해야하나 라는 의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도 프로농구 선수들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당시 가장 화제의 선수인 조던을 설득하였는데 조던이 거절하자 일단 상징적이었던 매직 그리고 버드를 설득한 다음에 그들을 주축으로 선수들을 모으고 결국에는 조던을 다시 설득하는데 성공하며 드림팀이 결정되었다.
  18. [18] 조던 자체는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완벽하게 커리어를 마무이한데다가 상식적으로 그가 황금기를 보낸 시카고도, 고향인 샬롯도 아닌 곳에서 굳이 뛸 이유가 없다.
  19. [19] 훗날 성장해서 올스타가 되지만 이때는 아직 롤플레이어 수준.
  20. [20] 매직의 은퇴 무렵 피펜, 페니, 그랜트 힐 등 장신인데 포인트 가드의 역할을 수행 가능한 선수들이 인기를 얻자 리그 전체적으로 장신 포가 만들기 붐이 일었다. 제일린 로즈와 스티브 스미스가 대표적이었는데 둘 다 포인트 가드로서는 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고 스윙맨으로서 나름 괜찮은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매직 존슨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세기말을 맞이하면서 리그에서 다시한번 스타 만들기에 돌입했는데 그게 바로 제2의 조던 찾기....
  21. [21] 그리고, 아직 포인트가드를 한 걸 후회하지 않던 젊은 시절, 앞에 언급된 2년 선배 놈 닉슨과의 포인트가드 경쟁이 자존심 싸움까지 번져서 결국 놈 닉슨이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 맞트레이드 상대가 바이런 스캇.
  22. [22] 다만 워디는 82년 당시 대학 최고의 선수이자 드래프트 최대어였고 이런 선수를 뽑아놓고 벤치에만 썩히는 바보짓을 할리가 없으니 매직이 포워드였다면 당연히 그를 트래이드했을 것이다. 워디가 팀내 3옵션으로 뛰느라(카림이 노쇠한 이후 2옵션으로 올라옴) 실력에 비해 저조한 기록과 수상실적을 남긴 걸 생각하면 워디 본인의 커리어만 봤을 때 더 빛났을 가능성이 크다.
  23. [삼점슛] 23.1 잘 쏘는 래리 버드 역시 일년에 100개 정도도 쏘지 않았다.
  24. [24] 이는 약간 부당한 비교인 것이 매직은 3점을 조던보다 먼저 3점을 장착했다. 매직이 3점을 장착한 시기에 조던은 한시즌 정도를 제외하면 여전히 3점을 옵션으로 쓸 정도의 선수가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 3점이 보다 대중화된 이후에 조던의 3점과 당시의 매직의 3점을 바로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부분은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야 하는 부분이다. 매직존슨은 3점 메이드 탑5에 들어갔던 시즌도 있지만 조던은 탑10에 들어간 시즌조차 한번도 없다. 매직이 3점을 장착한 이후 리그 탑 10위권 근처의 3점성공을 보이던 선수였다는 점에서 당연히 3점 스페셜리스트는 아니지만 조던수준의 옵션보다는 나았다고 봐야한다. 반론 "장착"의 기준이 경기당 삼점슛 성공횟수 1회 이상이라고 보면 매직은 이 기준을 충족시킨 적이 1989-90, 1990-91 두 시즌 뿐이다. 조던은 1차 은퇴 전까지 1989-90, 1992-93 시즌 두 시즌이다. 먼저 장착이라고 했는데 매직이 2.4개를 던져 0.8개를 성공시킨(성공률 31.4%) 1988-89시즌을 장착했다고 쳐도 고작 한 시즌 먼저 장착했을 뿐이다. 그 전 시즌에 그는 0.2개 성공/0.8개 시도였다.1989-90시즌은 두 선수 모두 삼점슛을 마이너 옵션 중 하나로 장착한 시즌으로 매직은 1.3/3.5개 (38.4%), 조던은 1.1개/3개(37.6%)였다. 매직과 조던 사이에 차이가 나는 건 90-91시즌으로 조던이 자제하기 시작해 시도수가 1.1개로 줄어든 사이(31.2%) 매직은 3.2개를 쏴서 1개를 성공시켰다. 삼점슛을 옵션으로 이용항 시즌이 1시즌 vs 2시즌, 0.2개 차이. 이게 그렇게 큰 차이인가? 해당 서술은 3점이 대중화된 이후 조던 (90년대)과 비교하는게 아니라 같은 시기 조던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직은 3점 메이드 탑5에 들어갔던 시즌이 있다고 했는데, 이건 1989-90시즌에 매직의 3점슛 성공갯수가 총 106개로 5위에 올라간 걸 의미한다. 마치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처럼 해놨는데 이때 둘의 경기당 3점 성공갯수 격차는 1.3개 vs 1.1개로 0.2개에 불과하다. 당연히 굳이 따지면 성공률이 약간 앞서고 성공갯수가 더 많은 매직이 더 앞선다. 그런데 크게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매직이 3점을 장착한 이후 리그 탑 10위권 근처의 3점성공을 보이던 선수였다"는 자세히 따져보면 그가 탑 10 이내에 들어간 것은 90시즌이 유일하며, 그 다음 시즌엔 경기당 3점 성공갯수가 1개로 18위로 떨어졌다. 96시즌엔 조던, 매직 할 것 없이 순위권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굳이 따지면 이때 매직은 0.7개/1.8개(37.9%)로 조던 1.4개/3.2개(42.7%)에 크게 못 미치지만 이때는 복귀시즌이고 단축라인이었으므로 공정한 비교가 아니라 이건 생략한다. 포인트는 이것이다. 기록으로 볼 수 있듯이 조던과 매직은 얼추 비슷한 시기에 3점능력을 장착했으며 (끽해야 한 시즌 차이) 이들이 옵션으로 활용했던 89-90시즌의 성공률이나 시도/성공갯수는 비슷하다. 매직이 약간씩 앞서지만 조던은 매직보다 훨씬 더 뛰어난 공격수로 훨씬 더 빡센 수비를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별 유의미한 차이도 아니다. 득점원으로서 매직을 더 견제하겠는가, 조던을 더 견제하겠는가? 전체적으로 둘 사이의 3점 슈팅력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시기인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둘 다 장점까진 아니었지만 옵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도, 딱 그 정도였다.
  25. [25] 장점이라고 할만한 선수는 매직과 비슷하게 쐈을때 4할을 여러번 넘기던 래리 버드, 3점슛을 주요 옵션으로 장착한 이후부터 매시즌 경기당 한개 이상 성공시키고 이후 9시즌동안 38.5%를 꾸준히 기록해준 대니 에인저 정도이다.
  26. [26]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농구인들이 이를 세트슛으로 알고 있다. 당장 영상에 나온 NBA해설가도 이를 당연한 듯 여러번이나 세트슛으로 부르고 있으며,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지금도 이런 슛(두 발을 고정한 상태에서 점프와 동시에 슛을 쏘는)은 세트슛이라 많이 불린다.
  27. [27] 이러한 슛은 그 특성상 갑자기 올라가 쏘는(pull-up) 슛에는 적합하지 않아 밀착수비를 제치고 쏠 순 없지만, 수비가 헐거울때 쏘면 그 안정감 때문에 쏘기 편한 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3점슛에 익숙하지 않은 8,90년대 빅맨들이 3점을 쏠때는 이 자세로 쏘는 경우가 많다. 샤킬 오닐의 몇 안되는 3점은 전부 이런 슛이며 알론조 모닝도 마찬가지. 심지어 중거리에서 훌륭한 점퍼를 자랑했던 하킴 올라주원과 야오밍 역시 3점은 이 자세로 쐈다. 저 선수들은 저 거리에서 견제받을 일이 거의 없기에 블럭당할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쏠 수 있는 것.
  28. [28] "점핑 조" 펄크스가 점프슛을 대중화하기 전부터 점프슛이 대중화된 이후. 사실 그 이후에 80년대까지 위에 언급된 세트된 상태에서 점프하며 쏘는 슛, 즉 세트슛으로 널리 알려진 슛을 쏘는 선수들은 많았으나 이 역시 엄밀히 따지면 점프슛이라고 해야 되므로.
  29. [29] 정석적인 점프슛만 엎어져서 쏘는 세트슛 자세라서 느리고 타점 낮은 문제였자. 원 핸드 슛 스킬은 매우 다양했다, 스쿱샷,레이업 정확도도 수준급에, 웬만한 빅맨도 흉내못낼 베이비 훅 슛 스킬로 베이스라인에 어중간한 거리에 몰려서도 득점을 성공시킬수 있었다.
  30. [30] 참고로 매직은 자바의 주무기 스카이훅을 그나마 비슷하게라도 따라하고, 이걸 경기 중에 응용해서 자신의 주무기로 써먹은 유일한 선수였다.
  31. [31] 다만 저 소속팀 연고지와는 달리, 두 사람의 실제 고향은 미국의 중북부에 해당하는 미시건인디애나 출신이다.
  32. [32] 그러나 출신지역만 봐도 두 선수는 대조적인데, 매직이 고등학교시절까지 보낸 랜싱시는 2010년 기준 11만명으로 미시건 주에선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고, 공업과 상업지역이 꽤 발달한 지역이었다. 반면 마찬가지로 버드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낸 프렌치 릭은 소속된 오렌지 카운티(캘리포니아의 있는 동명의 지역과 다르다) 인구를 쳐도 (2010년 기준) 2만명 남짓인데다 프렌치 릭은 고작 2천 명도 안되는 코딱지만한 시골동네였다. 이 때문에 버드가 고향 인구의 열배가 넘는 거대 캠퍼스를 가진 인디애나 대학에 처음 갔을때 적응 못하고 자퇴했던 것. 즉, 출신 지역만 봐도 도시 소년과 시골 소년으로 대비된다. 매직이 클 때만 해도 미시건 주는 미국 공업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지금의 안습한 위치까지는 아니었다.
  33. [33] 매직이 HIV에 걸렸다는걸 알게되자 버드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농구가 하기 싫었다고 하였고, 그 날 이후로 선수로써 농구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고까지 표현하기도 하였다.
  34. [34] 실제로는 욕설을 사용했다.
  35. [35] 비록 재산은 스포츠선수 출긴신으론 최초로 10억달러 자산가가 된 조던에게 크게 밀리지만 사업가로선 조던보다 월등히 평가받을만하다. 조던의 수익 대부분은 조던 브랜드와 본인의 네임밸류에 기댄 광고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던이 사업을 잘했다기보단, 스포츠 역사상 가장 가치가 높은 자신의 명성에 기댄 게 크기 때문. 물론 이것도 사업적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거긴 하지만 매직이 더 뛰어나다는 것.
  36. [36] 류현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기자회견 중. 맨 오른쪽 인물. 맨 왼쪽 인물은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은 네드 콜레티 당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단장
  37. [37] 레이커스, 클리퍼스, 킹스와 같은 스테이플스 센터를 사용하고 있다.
  38. [38] 어차피 레너드는 1년 후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게 되어있기에 굳이 1년 더 일찍 쓰자고 유망주를 내줄 필요는 없었던것. 솔직히 레이커의 전력은 르브론을 제외하면 범용한 수준이지만 르브론 하나만 있어도 플옵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무리하는 것이 더 무리수이기도 하다.
  39. [39] 아마도 카와이를 암시하는
  40. [40] It could be argued that he's the one player in NBA history who was better than Michael Jordan.
  41. [41]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에서 12년간을 뛴 스몰포워드로, 매직 존슨, 카림 압둘 자바와 함께 3번의 우승 (1985, 1987, 1988)을 차지할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한 선수이다.
  42. [42] 달러 입자 용액을 혈관에 주입시켜 에이즈 바이러스를 섬멸하는 것.
  43. [43]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채널 중 하나.
  44. [44] 이걸 국내로 비유하자면, 한국 국내 아이돌들이 Mnet이 뭔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45. [45] 여담이지만 여기 소개된 멍청한 발언 중 농구선수 편에서는 제이슨 키드의 "우리는 이 팀을 360도 변화시킬 겁니다"(...), 1980~90년대 선수였던 리온 우즈의 "당신은 동생과 혈연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선수였던 척 네빗의 "제 누나가 출산 예정인데, 제가 삼촌이 될지 숙모가 될지 모르겠어요"(...) 등 심하게 어이없는 발언이 있어서 말실수 정도인 매직으로선 좀 억울한 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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