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스튜어트

역대 스코틀랜드 국왕

스튜어트 왕조

스튜어트 왕조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5세

메리 1세

제임스 6세

1. 소개
2. 유년기
3. 프랑스의 왕비
4. 스코틀랜드 여왕
4.1. 왕위에 오르다
4.2. 불운했던 결혼생활
4.3. 사형
5. 그의 사후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스코틀랜드여왕. 한 때 프랑스왕비이기도 했다. 보통 메리 스튜어트라고 불리지만 국왕으로서 그녀를 가리킬 땐 '메리 1세' 쪽이 공식이라고 한다. 물론 스코틀랜드 기준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 중 하나였다고 전해지며 특이하게도 키가 180cm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보다도 평균 신장이 훨씬 낮은 시기임을 감안할 때 어마어마하게 큰 여인이었다.[2] 아름답고 교양이 풍부해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지기는 했으나, 감정 기복이 심하고[3]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아 바로 이웃나라의 여왕이자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와는 여러 모로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메리에게는 엘리자베스만큼의 통치력이나 정치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즉, 지식이 많아 똑똑하고 틀에 박힌 예절 때문에 교양은 있는데 정작 자제력이 없는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잘난 사람은 남들이 인정해줘도 자만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적인 결함 때문에 평생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2. 유년기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1512~1542)와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유력 귀족으로서 성장했던 로렌(현재의 알자스-로렌)의 기즈 가문 출신인 마리 드 기즈(1515~1560)의 2남 1녀 중 막내이자 고명딸로 1542년 12월 8일에 린리스고 궁에서 태어났다. 마리는 메리를 낳기 전에 이미 두 아들을 낳은 바 있으나 차남 로버트는 생후 이틀만에 숨졌고,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에 막 돌이 지난 장남 제임스 역시 요절했다. 이렇게 적법한 왕위계승권자가 갑자기 모두 없어지는 바람에 제임스 5세와 마리는 상심할 틈도 없이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슬러 후사를 갖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그 결실이 메리였다.

메리가 태어나던 당시에 제임스 5세는 친잉글랜드파(프로테스탄트)와 친프랑스파(가톨릭)로 나뉜 귀족들이 끊임없이 벌이고 있는 내전과 잉글랜드와의 잦은 전쟁으로 완전히 지쳐 병상에 있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이 혼란스러운 시국에 아들이 아닌 딸이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실망하여 "우리 왕조는 어린 딸(로버트 1세의 외동딸로 월터 스튜어트와 결혼한 마조리 브루스(Majorie Bruce))과 함께 시작해서 어린 딸로 망하리라."라고 한탄했다.그러나 알다시피 이 예언(?)은 빗나가게 된다.

그해 12월 14일, 즉 생후 6일 만에 부왕인 제임스 5세[4]가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으로 서거하자 메리는 그의 유일한 적자녀로서 왕위에 올랐다.[5] 제임스 5세가 서거하자마자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시키려 했다. 실제로 혼인 협정이 성사됐는데 헨리 8세는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메리를 잉글랜드에서 양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협정에 메리가 일찍 죽을 경우 스코틀랜드 왕위와 통치권 전부를 에드워드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6] 마리 드 기즈는 메리의 안전을 염려하여 잉글랜드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헨리 8세는 수 차례나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위협하면서 메리를 납치하려 들었고, 이 때문에 마리는 메리를 지키기 위해 수시로 몰래 이동시켜야 했다. 그러다 헨리 8세가 1547년에 서거하자 마리는 스코틀랜드 내의 다른 가톨릭 세력과 논의한 끝에 프랑스 왕세자인 프랑수아와 메리의 혼인 협정을 맺고, 1548년에 6세인 메리를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 왕실에서 양육하게 한 뒤 자신은 스코틀랜드에 남아 섭정을 했다.

3. 프랑스의 왕비

메리는 프랑스 왕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지적,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 우아한 매력을 지닌 그녀를 왕세자인 약혼자 프랑수아 2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족 대부분과 궁정에 출입하는 예술가들 모두 사랑하여 찬미했다고. 16세 때 프랑수아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됐고, 앙리 2세가 1559년에 서거하여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마침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시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처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맏며느리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이 시집올 때 예물로 가져왔던 당대에 가장 비싼 진주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메리는 벼락출세한 메디치 가문 출신인 카트린을 시종일관 무시했으며, 급기야 여러 사람 앞에서 카트린을 "피렌체 출신의 장사꾼"이라고 지칭해 결국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이 고부갈등 때문에 메리는 나중에 반란군에게 패해 망명해야만 했을 때 어머니의 고국이었던 프랑스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됐는데 이 역시 메리 스튜어트의 자제력이 부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메리가 장신에 건강한 미인인 반면에 그녀의 남편인 프랑수아 2세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는 왜소하고 매우 병약한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사실상 소꿉친구나 다름 없었던 프랑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들 부부는 금실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외가였던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즈 가문의 세력이 카트린을 능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역시 카트린이 메리를 곱게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7]

하지만 즉위 1년 6개월 만에 프랑수아 2세가 요절한데다 프랑수아 2세가 워낙 허약한 탓에 후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8] 메리는 사별하면서 프랑스 왕실에 연고가 끊어지게 됐다. 프랑수아 2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시동생 샤를 9세가 즉위하게 되면서 카트린이 섭정을 하게 되자 메리는 자신을 곱게 보지 못하는 카트린에 의해 깡촌인 스코틀랜드로 쫓겨나듯이 돌아갔다. 기즈 가문의 친척들이 몇몇 새 남편 후보를 추천했지만 메리가 프랑스에 남을 것을 우려한 카트린이 나서서 전부 무산시켰다.

다만 무작정 쫒겨났다고는 볼 수 없다. 그녀는 그 전에 이미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는데 일국의 군주가 타국의 궁전에서 통치를 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딸을 대신해 섭정하던 마리 드 기즈도 1560년에 숨졌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신료들은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4. 스코틀랜드 여왕

4.1. 왕위에 오르다

하지만 말이 스코틀랜드 여왕이지 6세 때부터 13년간이나 프랑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메리는 프랑스어라틴어만 구사했고 정작 스코틀랜드어는 거의 구사하지 못했다. 또 풍요로운 프랑스와는 너무나 다른 척박하고 거친 스코틀랜드에 적응을 하지 못해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 때 스코틀랜드는 섭정을 하고 있던 고위 귀족인 모레이 백작[9]을 비롯해 귀족들 대부분이 신교도였던 것 등 거의 신교도 국가였는데 메리는 가톨릭 교도였으므로 물과 기름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560년에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기 몇 달 전에 딸을 대신해 섭정을 했던 선왕비 마리 드 기즈마저 병사해 아직 어린 여왕이었던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고 그녀를 이끌어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할 땐 에든버러 조약을 비준하지 않는 등 엘리자베스에게 여러 모로 위협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양국의 관계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외국의 왕족인 것과 에드워드 6세와의 약혼이 깨졌던 것 등의 문제로 헨리 8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지만 메리는 헨리 8세의 누이 마거릿의 손녀이자 헨리 7세의 후손이기 때문에, 사생아 취급을 받았고 어머니 앤 불린의 평판이 나빴다는 문제가 있는 엘리자베스에 비하면 약간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 때의 메리의 행동은 그 후 엘리자베스와의 사이가 좋아진 것 등을 봐선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기보다는 헨리 8세가 박탈한 왕위계승권을 확실히 인정받으려 하기도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1세가 이 당시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메리와 수 차례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으로 교류한 바 있다. 그러나 둘 다 서신으로만 교류했고 메리가 먼저 죽을 때까지 평생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이 점을 근거로 일각에서는 겉으로만 예의상 좋은 말로 교류한 것일 뿐, 사실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문제로 앙숙일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4.2. 불운했던 결혼생활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후에 메리의 두번째 배우자가 누가 될지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독신을 선언한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측근인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그녀의 남편감으로 추천하며, 둘이 결혼한다면 그들의 자녀에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메리는 왕족으로 태어난 자신이 왕실과 혈통으로 닿지도 않은 귀족과의 결혼을 제안받은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더들리 역시 잉글랜드에 남겠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10]

이후 메리는 잉글랜드 귀족이자 자신에게는 사촌이 되는 4살 연하남 헨리 스튜어트(1546~1567, 보통 '단리 경'이라고 불린다.)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 1565년에 전격 재혼했다.[11] 메리와 단리 경 모두 튜더 왕가와 혈연으로 이어졌기에 둘의 결합은 자연히 독신을 선언해 후사를 둘 수 없는 엘리자베스 1세를 자극시켰다.

사실 많은 귀족들은 물론 메리의 오랜 친우들까지 아직 어리고 경솔한 단리 경은 여왕의 남편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반대했으나 메리는 사랑만 믿고 결혼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로 1566년 6월에 둘의 외아들인 제임스가 태어났다. 적법한 남자 후사의 탄생에 스코틀랜드 전역은 축제 분위기였고, 엘리자베스 1세도 신하를 보내어 왕자의 세례일에 황금 세례반을 전해주며 축하의 뜻을 전했고 메리의 요청대로 제임스 왕자의 대모가 되어 주었다.[12]

하지만 아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메리와 단리의 사이는 사실 매우 나빠져 있었다. 젊은 단리 경은 메리와의 사적인 일들을 신하들에게 떠벌리는 등 매우 경박한 사람이었고 몹시 신경질적인데다 권력욕이 많아서 메리와 수시로 충돌을 일으켰다. 메리 역시 불같던 사랑이 사그라들자 단리가 좋은 남편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단리 경은 여왕의 부군으로서 국왕(King consort)이 되고자 했으며 메리가 자신보다 일찍 죽을 경우 자신이 그녀의 뒤를 이어 왕위 되고자 했다. 참고로 유럽 군주국에서는 여왕이 통치자일 경우 보통 남편에게 prince consort란 칭호를 내렸는데 국왕(King)은 여왕(Queen)보다 높은 지위를 의미하므로 이를 허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역사상 King consort의 지위를 지녔던 여왕의 부군은 잉글랜드 여왕 메리 1세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가 유일하다.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도 공동 군주란 뜻의 co-sovereign이었지 king consort는 아니었다. 이는 모레이 백작이 있는 힘을 다해 막음으로써 무산되었고, 메리 역시 단리가 자신의 뒤를 잇는 것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단리 경은 '헨리 왕'[13]이란 무의미한 칭호와 함께 프랑스, 에스파냐, 바티칸의 인정을 받은 정도로 그쳤다.

결정적으로 단리 경은 메리가 제임스 왕자를 임신해 6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에 그 눈앞에서 이탈리아 출신 궁정음악가로 그녀의 비서인 다비드 리치오를 자신의 측근들을 이용해 끔찍하게 살해했다.[14][15] 심지어 이때 쳐들어 온 단리 경의 측근 중 하나였던 포오돈사이드는 피스톨을 임신한 메리에게 겨눠 충격을 주기도 했다.[16] 게다가 저렇게 리치오를 죽인 것도 모자라 메리를 감금한 뒤 자신들을 사면해 달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메리는 분노하면서도 소심하고 겁 많은 단리 경의 성질을 알고 그를 회유해 탈출을 준비했다. 단리 경이 측근들을 만취하게 하자 그 틈을 타 메리는 충실한 시종들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는데 이때 겁에 질린 단리 경은 임신 중기에 들어서 몸이 불편한 메리의 상태는 개의치 않고 탈출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나약하고 비열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메리의 전갈을 받은 보스웰 백작을 비롯한 다른 신료들은 리치오를 살해하고 메리를 위협한 만행을 저지른 이들을 처단했고, 메리는 형식적으로 단리 경을 용서하며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하지만 이 일로 메리와 단리 경의 사이는 영영 틀어져 버렸다. 급기야 메리는 출산 직후에 산실에 온 단리 경에게 갓 태어난 제임스를 보여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해 주셨다."라고 선언하며 그 곁에 있는 다른 귀족들에게 "나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심정으로 고백한다. 나는 (불륜 혐의에 대해) 결백하니 이 아이가 왕위계승권자라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말까지 했다. 이를 통해 메리가 자신에게 여전히 앙금을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당황한 단리 경은 냉담해진 아내를 피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해 12월에 제임스가 가톨릭 형식으로 세례를 받을 때조차 나타나지 않아 메리의 체면을 구겨버린다. 이후 메리는 믿을만한 사람을 찾다가 그나마 남자답게 강인한 제임스 헵번(보스웰 백작)에게 끌려 그를 곁에 두고 신뢰하며 중책을 맡긴다.

그 이후 메리와 단리 경은 한동안 별거했다. 단리 경은 계속 부친 레녹스 백작이 있던 글래스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1567년 봄에야 메리는 매독을 앓고 있는 단리 경에게 화해하자며 설득해 그를 커크 오필드로 데려왔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에 단리 경이 머무르고 있던 저택에 큰 폭발이 일어나는 사고가 생긴다. 집에 있던 단리 경의 측근들은 모두 끔찍하게 폭사했고, 단리 경 역시 교살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참사를 보스웰 백작 혹은 보스웰 백작과 메리가 모의하여 꾸민 일이라는 소문이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는 물론 국외에까지 돌았다. 자연히 메리는 대내외적으로 신뢰를 잃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런 메리에게 "부군 살해사건을 공정히 처리하라."며 스스로 혐의를 벗으라고 조언했다.

이후 메리는 애도 기간을 가졌고, 4월에 제임스가 보내져 자라고 있는 스털링 궁으로 찾아가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 다음날 홀리루드 궁으로 돌아오려다 무장 군대를 이끌고 나타난 보스웰 백작에게 납치당한다.[17] 이후 그는 메리를 자신의 성에 감금한 뒤 임신할 때까지 강간했으며 당시엔 강간당하면 그 남자와 결혼해야 덮을 수 있었기 때문에 메리는 단리 경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보스웰 백작과 다시 결혼한다. 참고로 결혼식 직후부터 메리가 보스웰 백작과 심하게 다투며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는 얘기를 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서 권력에 눈 먼 보스웰 백작이 여왕인 메리를 붙잡아 비인간적인 짓을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메리가 진정 사랑한 남자는 보스웰 백작이며, 무리하게 감행한 세번째 결혼조차 불륜으로 가진 아이에게 적법한 지위를 주기 위한 방편이라는 견해도 있다. 단리 경이 죽기 전에도 보스웰 백작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메리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는 등 둘 사이가 심상치 않았다는 루머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그러나 이 결혼 소식이 들리자 남편이 끔찍하게 살해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남편의 암살을 주도한 자로 추측되는 이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메리에 대한 여론은 심하게 악화된다. 얼마 가지 않아 단리 경의 암살 의혹과 메리의 종교 문제까지 더해 나빠진 여론으로 결국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으며, 메리는 패배하여 호수 속 섬에 세워진 로클레벤 성에 감금된다. 치욕스런 감금생활 동안 메리는 보스웰과 가졌던 쌍둥이를 유산하고 만다.

유산 후유증으로 누워 있는 메리에게 그녀를 몰아낸 귀족들이 왕세자 제임스에게 양위하라고 강요했다. 강요에 따르지 않을 경우 그녀가 보스웰과 주고 받은 편지들[18]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메리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위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했으며, 이에 당시 막 돌을 지난 제임스가 왕위에 오르고[19] 메리의 이복오빠였던 모레이 경이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결국 보스웰과 메리가 주고 받은 편지들을 의회에서 공개한 것은 물론 이 편지들의 사본을 외국 궁정에까지 보내 메리가 다시 왕권을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메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건강을 회복한 뒤 탈출하여 자신에게 협조하는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병사들을 모집하고 왕위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그러나 모레이 경의 군대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남쪽의 잉글랜드로 망명한다. 이후 메리는 잉글랜드의 군사지원을 받아 스코틀랜드 왕위를 다시 되찾으려 했지만, 잉글랜드로서는 가톨릭 군주가 이웃나라의 왕으로 있어봤자 아무런 득이 없었고 해만 될 게 분명했기에 그녀의 복위를 적극적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돌려보내자니 사형당할 게 분명하여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 잉글랜드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일단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망명을 받아주었지만 메리를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사실상 메리가 잉글랜드의 제1왕위 계승권자인데다가 가톨릭 교도라 프랑스, 스페인 등 구교도 국가에선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메리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일단 엘리자베스도 군주이므로 '신하들이 여왕을 몰아내는' 상황을 좋게 보지 않았고,[20] 도움을 요청한 가까운 친척을 버리는 것은 인간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메리를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보내게 된다면 가톨릭 국가인 그들의 지원을 업고 왕권에 지대한 위협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로 송환하자니 메리가 죽을 것이 뻔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메리를 붙잡아 두게 된 것이었다.[21]

이후 메리가 모반을 꾸몄다는 증거가 여러 차례 발각되었다. 하지만 성공회의 모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여간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변 가톨릭 국가에 침공의 빌미를 주는 것인데다 일단은 친척이어서인지 여러 번 덮어두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내에서는 이로 인해 말이 많았고 결국 메리의 사형을 주장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녀가 역심을 품었든, 그렇지 않았든, 가톨릭 교도인 그녀는 그 자체로 잉글랜드 내 가톨릭 교도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성공회 교도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어차피 그녀는 절반 이상은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메리의 망명은 공식적으로는 친척인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큰 문제가 없는 한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엘리자베스는 망명 온 메리 스튜어트를 유폐시키고 슈루즈버리 백작 등 관리인을 붙여서 감시하게 했다.

여담으로, 보스웰 백작은 단리 경 살인 혐의로 기소돼 사형되는 일을 면하기 위해 1567년에 스코틀랜드를 탈출해 노르웨이로 갔으나 거기서 체포되어 덴마크로 보내졌다. 메리를 몰아낸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살인 공모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보스웰 백작을 스코틀랜드로 송환하고자 했으나 메리의 외가친척인 프랑스의 기즈 가문 사람들이 손을 써 그가 송환되는 일만은 막았다. 하지만 여러 감옥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고, 그렇게 1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비참한 감금 생활을 하다 급기야 광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1578년에 4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역시 여담이지만 메리는 세번째 남편이었던 그의 행적을 수소문했다거나 그를 구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메리에게 호의적인 학자들은 메리가 마지 못해 보스웰과 결혼했다가 왕권을 잃었다고 동정하고 있다.

4.3. 사형

약 18년 동안 유폐 상태로 지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녀를 견제한 잉글랜드의 대신들이 엘리자베스의 의심을 수시로 부추겨 메리는 점점 열악해지는 대우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자유는 없었으나 정기적으로 나오는 연금 덕분에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렸고 식사는 밸더킨[22] 아래에서 정찬을 먹을 수 있었다. 감시병이 늘 따라다녔지만 산책과 사냥같은 제한된 야외활동도 종종 허용되었다. 하지만 자주 하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날을 정교한 수를 놓거나 시녀들과 소일하고, 외국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새와 개를 키우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옆구리에 간헐적인 통증이 일어났는데 신경성일 가능성이 높았다. 벅스턴 온천 여행이 몇 차례 허용되었지만 상태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발이 심각하게 붓고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등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 운동을 거의 못했다. 실제로 사형당할 당시에는 몸이 비대해져 있었던 데다가 거의 대머리 수준이라 가발을 착용하고 있었다고. 그럼에도 자유를 얻으려는 희망을 끝내 놓지 못하고 외부와 비밀리에 서신 왕래를 계속했으며 간간이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아들 제임스에 대한 그리움과 제임스를 잉글랜드로 데려와 직접 기르고픈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또 이런 어려운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견뎌냈다고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반을 꾸민 편지가 발각되었다. 곧 메리는 체포되었는데, 당연히 그녀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그러나 그녀의 처우를 두고 엘리자베스는 예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처형하자니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군주를 처형한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고, 처형하지 않자니 몇 번이나 그랬듯 국내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으로써 끝없이 반란의 불씨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메리를 처형시키라는 여론이 들끓어 결국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재판케 했다. 메리는 변호인도 허락되지 않은 재판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게다가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구하려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고작 생후 10개월 때 어머니와 헤어진 데다가 이후 메리에게 적대적인 귀족들에게 키워지면서 그들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들어 왔기에 어머니에게 애틋한 정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에게 맞설 경우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득이 되는 것이 없었기에 제임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일단 형식적으로 선처 요청만 했으며 메리가 처형당한 후에도 이를 빌미 삼아 잉글랜드와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23]

결국 1587년 2월에 메리는 사형을 당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가톨릭식 기도를 하고 자신은 죄를 지은 게 없다고 생각하며 죽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어쩔 수 없이 사형 집행장에 서명하기는 했지만, 메리 사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며 신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몇몇 신하들은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하지만 곧 복권시킨 것을 보면 우환거리가 사라진 거에 대한 후련한 마음이 더 앞섰을 듯하다.[24]

저 당시 발견된 증거에 대해선, 대체로 위조된 건지 아닌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일단 편지의 경우, 엘리자베스의 심복 측이 메리를 제거하기 위해 함정을 팠는데 메리가 낚였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많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 궁정에서 보내 화려함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던 메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패션에 신경을 썼다.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그 위를 검은색 망토로 덮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톨릭에서 순교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즉 옷차림을 통해 자신은 가톨릭 순교자임을 선언하려 한 것이었다. 단두대의 받침대에 목을 올려두고는 쉼 없이 "인 마누스 투아스, 도미네, 콘피데 스피리툼 메움(In manus tuas, Domine, confide spiritum meum. '주여, 당신께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라는 뜻)"이라고 되뇌었다. 첫번째 일격은 뒤통수에 빗맞았고, 이때 메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고 한다. 두번째 일격으로 숨을 거뒀으며, 세번째 일격에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목이 완전히 잘린 뒤에도 입술은 15분간이나 계속 움직였다고 한다. 메리의 드레스 속에 있던 메리의 작은 반려견은 메리가 숨지자 그 속에서 나와 메리의 핏물 위해 누워 애통해하다 계속 먹이를 거부하고 죽었다고.

이후 관계자들은 메리의 시신을 발가벗겨 사망 당시에 입고 있던 옷가지를 전부 태우고 메리의 피가 튄 모든 곳을 깨끗이 닦았다. 교황 절대주의자들이 유품으로 삼을 만한 물건이나 순례할만한 곳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메리의 시신은 새 옷으로 갈아입혀져 알콜로 방부 처리된 뒤 납관에 안치돼 피터버러 사원에 매장됐다. 훗날 엘리자베스 사후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6세가 비로소 메리의 시신을 발굴해 엘리자베스가 안장되어 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다시 매장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로써 일생을 두고 대립했으되 평생 직접 만난 적 없던 두 여왕이 사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됐다.

5. 그의 사후

그녀의 사망은 의외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일단 1년 뒤에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 사후 튜더 왕조가 단절되면서 튜더 왕조의 유일한 후손이자 스코틀랜드 왕으로 있던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왕위도 계승하여 '스튜어트 왕조'가 열린다. 그 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다.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유일하게 남은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평가는 "술수에 능한 요녀, 악녀"와 "종교 분쟁과 왕위 갈등의 희생자"라는 평으로 갈리는데, 전자는 그녀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은 성공회 교도들과 잉글랜드의 일반적 평가고, 후자는 최근에 점점 조명을 받는 시각[25].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매게체 중에서 오페라로써는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가 대표적이다.[26] 이 오페라는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27]중의 하나로 역사적 사실보다는 "돈 카를로스"[28]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쉴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이지만, 음악은 벨 칸토 오페라답게 아름답다는 평이 대부분이며, 실제 역사에서 전혀 만나지도 않았던[29]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서로 만나서 신경전 벌이는 부분(...)[30]은 이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엘리자베스 1세와 펠리페 2세의 대결을 그린 2007년도 영화 <골든에이지:엘리자베스>에서 사만다 모튼이 연기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영국과 스페인사이에 벌어졌던 칼레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으면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흥행에 실패한 원인도 이것 때문인데,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보면 상당한 명작이다.

초반부터 엘리자베스 1세(케이트 블란쳇 분)의 명에 의해 포더링헤이 성에 감금되어있는 상태로 나온다. 엘리자베스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꾸리고 스페인과도 연결루트를 구축해 영국 여왕으로 즉위할 음모를 꾸미지만 여왕의 충신인 프랜시스 월싱엄(제프리 러쉬 분)이 뒷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여왕이 예배를 드리러 행차하는 날 암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이 암살단의 단주가 미쳤는지 자객의 총에서 총알을 빼두는 바람에 암살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하고 음모자들은 모조리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당연히 메리도 무사할 수 없었고 결국 사형판결을 받고 목이 잘려 끔살.


  1. [1] 그녀가 태어난 지 고작 6일 만에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서거해 바로 여왕이 됐으며 생후 9개월만에 대관식을 치렀다.
  2. [2] 여담이지만 메리 스튜어트의 일생의 라이벌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도 170cm가 넘는 장신이고 이걸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당연히 메리가 더 컸다. 야사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자신보다도 더 크다는 얘기를 듣자 대체 키가 얼마나 큰 거냐며 놀랐다고.
  3. [3]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인 존 녹스와의 대담키배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 [4] 별칭이 투명인데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선량하여 투명하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5. [5] 제임스 5세는 제임스 4세헨리 7세의 딸 마거릿의 아들인데, 그가 헨리 7세의 후손이라는 점이 훗날 튜더 왕조가 단절되자 그의 손자이자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상속받는 큰 이유가 된다.
  6. [6] 헨리 8세가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메리를 죽일 수도 있다고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7. [7] 애초에 기즈 가문 자체가 앙리 2세의 정부로 카트린의 연적인 디안 드 푸아티에가 후원해서 성장한 가문이기도 했다.
  8. [8] 훗날 메리의 두번째 남편인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가 메리와 처음으로 동침한 후에 "여왕은 처녀였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는 야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프랑수아가 메리와 합궁 자체를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일부 전기 작가는 메리와 프랑수아가 당시에 모두 어린데다 메리에게 프랑수아는 남편보다는 돌봐줘야 할 병약한 친구라는 인식이 커서 성적으로 끌리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9. [9] 제임스 5세가 정부와 낳은 아들로 메리에게는 이복오빠가 된다.
  10. [10] 여담이지만 더들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죽마고우이자 오랜 연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제인 그레이를 옹립했다 처형당한 반역자였던지라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 현실적인 이유로 더들리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그 아이에게라도 왕권을 주고 메리도 견제할 겸 메리와의 결혼을 제안한 것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더들리가 끝내 거절했던 것. 일각에서는 더들리가 다루기 쉬운 남자라 여왕의 남편감으로 무난하기에 추천했다는 견해도 있다.
  11. [11] 헨리 7세의 딸이자 헨리 8세의 손윗 누이인 마거릿(1489~1541)은 생애 결혼을 세 번 했다. 첫번째 결혼 상대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1473~1513) 사이에서 낳은 제임스 5세(1512~1542)의 딸이 메리 스튜어트이고, 두번째 결혼 상대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라스(Archibald Douglas, 1489~1557)(1527년 이혼) 사이에서 낳은 딸인 마거릿(레녹스 백작 부인 마거릿 더글라스, 1515~1578)의 아들이 단리 경으로 불리는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이다.
  12. [12] 스코틀랜드의 외교관이자 메리와 인간적으로 가까운 심복이었던 제임스 멜빌 경의 비망록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는 사자로 온 그로부터 제임스 왕자의 탄생 소식을 듣자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스코틀랜드 여왕은 아들을 낳았다!'라며 상심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엘리자베스가 왕자의 탄생에 대해 '감사한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멜빌 경의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13. [13] 단리 경의 이름은 헨리 스튜어트이다.
  14. [14] 둘이서 즐기고 있을 때 쳐들어와서 죽였다는 등 메리와 리치오의 불륜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그러나 단리 경이 메리가 임신한 아이의 친부가 리치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직접적으로 여기저기에 발설해 메리를 힘들게 했던 걸 보면 리치오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듯하다.
  15. [15] 리치오는 여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어 메리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귀족도 아니었고 고작 이탈리아 음악가 출신인 자가 여왕의 총애를 받는 것에 많은 귀족들이 불쾌해했으며 단리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16. [16] 당시 유산할 경우 산모까지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메리에게 호의적인 학자들은 이때 단리 경을 위시한 세력들이 메리까지 제거해 아예 단리 경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
  17. [17] 메리의 수행 기사는 30여명에 불과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메리가 보스웰 백작의 뜻에 순순히 따랐다고 한다.
  18. [18] 일명 '보석함 편지'라 불린다. 단리 경의 살인을 모의하거나 보스웰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진위 여부에 대해 논란이 많다. 메리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메리의 반대 세력들이 편지를 위조할 틈조차 없었다며 진짜라 주장했으나 다른 학자들은 위조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19. [19] 참고로 이로써 스튜어트 왕가는 내리 3대가 아주 어린 시절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는 부왕 제임스 4세가 전사하는 바람에 만으로 2살이 되기 전에 즉위했고, 메리는 생후 6일만에 제임스 5세가 서거해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6세는 1살 무렵에 어머니가 폐위당하자 즉위했다.
  20. [20] 당시는 왕권신수설이 절대적인 통념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당연히 왕위는 신이 내려준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신하에 불과한 반역자들이 주의 기름 부음을 받은 여왕인 메리를 내쫓은 상황'은 불경 그 자체로 볼 수밖에 없었다. 메리가 그녀의 왕관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은 전제군주라면 달갑게 여길래야 여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21. [21] 이런 상황에 대해 파커 대주교는 '우리의 여왕(엘리자베스 1세)께서는 늑대 귀를 잡고 계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2. [22] 군주의 위엄을 나타내는 천개 모양의 상징물.
  23. [23] 메리만 제임스를 애타게 그리워한 듯하나, 메리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제임스가 신교도로 자라자 유언으로 자신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펠리페 2세에게 양도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자 모두 서로에 대한 정이 그닥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무엇보다 제임스 탄생 당시에 아이의 생부이자 남편인 단리 경과 사이가 심각히 나쁜 관계였던지라 제임스에게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견해도 있다. 에든버러 요새에서 태어난 제임스는 거의 곧바로 스털링 성으로 보내져 거기서 대대로 어린 왕족들을 돌봤던 귀족들 밑에서 자랐다. 설령 메리가 자신의 곁에서 아이를 직접 기르지 않는 것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관례라고 볼 수 있어도 출산 후 불과 4주만에 뱃놀이를 간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논란이 됐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24. [24] 사실 그녀의 '격노'는 스페인, 프랑스와 같은 카톨릭 국가의 군주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정치적인 연기였다. 그녀를 따르는 대신들조차 연기를 그만 두길 은근히 종용할 정도였다고.(...)
  25. [25] 특히 슈테판 츠바이크가 평전을 쓰면서 메리를 호의적으로 비평한 것이 유명하다.
  26. [26]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는 메리 스튜어트의 이탈리아어 발음이다.
  27. [27] 앤 불린의 이야기를 그린 안나 볼레나, 메리 스튜어트의 마지막을 그린 마리아 스투아르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내연남 에식스 백작이 처형되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로베르토 데브뢰를 통틀어서 여왕 3부작이라 부른다. 앤 불린은 여왕이 아니지만, 영어로 왕비와 여왕은 "Queen"이라 쓰는것이 맞으니까...
  28. [28] 주세페 베르디의 그랜드 오페라 "돈 카를로"가 바로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29. [29] 많은 매개체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가 만나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이는 가상이다. 둘은 생애 한번도 직접 만난적은 없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 스튜어트의 사형집행서에 사인하는 것을 주저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30. [30] 이 장면은 원작자 쉴러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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