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덴노

  관련 문서: 메이지 유신,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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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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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전후반의 메이지 덴노


 
메이지 덴노의 어진영(御真影)

일본제국의 제122대 덴노

제호

메이지 덴노 (明治天皇)

무츠히토 (睦仁/목인)

어칭호

사치노미야 (祐宮)

출생일

1852년 11월 3일

출생지

에도 막부 야마시로국 교토 카미교 구
교토교엔 (京都御苑)

사망일

1912년 7월 30일 (59세)

사망지

일본 제국 도쿄 고쿄 메이지 궁전

능묘

일본 교토 부 교토 시 후시미 구
후시미모모야마릉 (伏見桃山陵)

즉위식

1868년 10월 12일 (교토고쇼)

장례식

1912년 9월 13일 (도쿄 고쿄)

재위기간

1867년 2월 3일 ~ 1912년 7월 30일
(45년 17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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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고메이 덴노, 어머니 나카야마 요시코 (中山慶子)[1]

형제자매

2남 4녀 중 셋째

배우자

쇼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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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연호 "메이지"
3. 생애
4. 가족관계
5. 이미지 조작
6. 트리비아
7. 메이지/출생
7.1. 실존인물
7.1.1. 메이지 원년 ~ 9년(1868~1876)
7.1.2. 메이지 10년대(1877~1886)
7.1.3. 메이지 20년대(1887~1896)
7.1.4. 메이지 30년대(1897~1906)
7.1.5. 메이지 40년대(1907~1912)
7.2. 가상인물
7.2.1. 원년 ~ 9년(1868~1876)
7.2.2. 메이지 10년대(1877~1886)
7.2.3. 메이지 20년대(1887~1896)
7.2.4. 메이지 30년대(1897~1906)
7.2.5. 메이지 40년대(1907~1912)
8.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소개

일본의 제122대 덴노. 휘는 무츠히토(睦仁, 목인). 메이지(明治, 명치)라는 제호는 그가 덴노로 재위했을 때 사용한 연호다. 일본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명군(明君)으로 꼽힌다고 한다. 같은 섬나라인데다 치세가 겹치고, 본격적인 제국주의 군주였다는 점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실제로는 시대를 잘 만나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입헌 군주로, 실제 개혁에 앞장선 건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무사 출신의 정치인들이었다.

일본 극우 계열이 부를 때는 메이지 대제(大帝), 무츠히토 대제, 메이지 성제(聖帝)라고도 부르는 듯.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개혁 성향의 인물이라고 쉽게 오판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다.

2. 연호 "메이지"

한자로는 明治(명치), 한 글자(일본어 2바이트 규격)로 압축하면 .

주역》<설괘전(說卦傳)>에 나오는 ‘聖人南面而聽天下 嚮(성인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천하를 듣고, 밝은 곳을 향하여 다스린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이 시절부터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2]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무츠히토 덴노의 재위기간을 메이지 시대라고 부르며, 무츠히토 덴노를 가리켜 메이지 덴노라고도 부른다. 메이지 유신이 이 때 일어났다.

사실 즉위 이듬해인 1868년까지 선황인 고메이 덴노의 연호인 게이오(慶應)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일세일원제는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본래 동아시아권의 연호는 군주가 사망하더라도 당해년까지는 전황의 재위년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1867년까지 게이오 연호를 썼다면 정상적으로 제대로 연도를 센 게 맞다. 하지만 메이지라는 연호가 채택된 것은 1868년 9월인데, 사망한 전임 덴노의 연호를 1년 넘게 사용했다는 점은 확실히 드문 예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메이지로 개원함과 동시에 연호를 1868년 1월까지 당겨서 소급적용했기 때문에 일세일원제가 확립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태음력에서 태양력으로의 변환도 동시에 진행했기 때문에 이 해의 날짜를 세는 건 약간 복잡하다.

즉 1868년 음력 9월 8일(양력 10월 23일), 연호를 '메이지'로 개원하면서 게이오 4년 1월 1일부터 9월 8일까지의 날짜를 삭제하고 이를 메이지 원년 1월 25일부터 10월 23일로 고쳤다. 그리고 '일세일원의 조'를 발표해 이제부터는 한 덴노에 하나의 연호만을 쓰도록 공포했다.

문제는 근대 일본은 연대를 셀 때 서력기원을 병기하지 않고 연호만을 표기했기 때문에, # 메이지 20년대와 30년대는 각각 1887년부터 1896년, 1897년부터 1907년이 되어 우리에게 익숙한 서기연도와 대응시켜 이해하기가 힘들다.

3. 생애

무쓰히토의 어린 시절의 궁호는 사치노미야(祐宮). 1860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1867년 아버지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면서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고메이 덴노와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는데, 2남 4녀인 그의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유아기에 죽지 않은 인물이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英照皇后)[3]는 아들을 낳지 못해[4], 측실 소생인 무츠히토를 양자로 맞았다.

한편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은 에도 막부 제1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메이지 덴노의 고모부가 된다. 아빠 외로울까봐 고모부 보냈어

20세 때의 메이지 덴노. 소쿠타이류에이노칸으로 이루어진 정장 차림이다.

같은 해, 궁정 개혁 후의 사진. 이각모(Bicorne)와 서양식 제복(군복)을 착용 중.

즉위한 다음 해인 1868년 1세 1원제를 정했으며, 그 다음 해인 1869년에는 고셋케 중 하나인 이치죠 가문의 딸 이치죠 마사코황후로 책봉했다. 이때 마사코는 하루코(美子)로 개명했다. 또한 하루코 황후는 본래 메이지 덴노보다 3살 위였는데, 당시 일본의 풍속에서 3살 연상은 좋지 않다 하여, (서류상) 2살 연상인 것으로 고쳤다. 즉 하루코 황후가 1850년생인 것으로 고쳤다.

쇼켄 황후의 독사진

메이지 덴노 부처의 그림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 일본 황실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은 황후이다. 복장 뿐 아니라 역할 면에서도, 이전까지의 황후들과 달리 서구적&근대적 황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 사진도 메이지 덴노와 같이 서양식으로 수정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사진 속의 책은, 쇼켄 황후의 서양식 옷차림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여성의 부덕(婦德)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69년 에도 막부가 무너진 에도로 황궁을 옮긴 후, 칙명을 내려 에도를 지금의 도쿄(東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870년에는 신토를 국교로 정하고(국가신토) 제정일치를 천명했다.

정치엔 크게 개입하지 않았지만 정한론이 대두될 때 사이고 다카모리조선 파견을 중지시키는 개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서남전쟁을 일으켰고, 그걸 진압한 건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오쿠보 도시미치가 중심이 된 주류 개혁파였다.

다만, 정치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일본 근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책에 따르면, 쇼켄 황후와 함께 지방 순행을 자주 하면서 이른바 국민 통합의 차원에서 신정부의 얼굴마담 역할을 함은 물론[5] 앞서 말한 메이지 6년 정변도 그렇고,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에 일본 지도부 사이에 벌어진 혼란을 수습하는 데 덴노가 개입했다고 한다.

4. 가족관계

그림이 기이하다 불쾌한 골짜기

가운데 남자가 메이지 덴노,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 오른쪽 남자는 아들 요시히토 황태자, 왼쪽의 서 있는 여자는 며느리 사다코 황태자비, 나머지 4명의 작은 여자아이들은 공주들.

정실 쇼켄 황후는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여러 측실들을 거느려 자녀를 많이 낳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죽었고, 1남 4녀만이 살아남았다.

측실중 야나기하라 나루코소노 사치코가 낳은 메이지 덴노의 자녀만이 살아남았다.

  •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1888-1940)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7] 왕에게 시집가 1남[8] 1녀를 낳았다.
  •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1890-1974) - 측실 소노 사치코 소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北白川宮成久) 왕에게 시집가 1남 3녀를 낳았다. 1947년의 신적강하 때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으로 전락했다. 후사코의 손녀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1939년에 태어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으나, 평민출신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9]한 후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5. 이미지 조작

항목 최상단에 올라가 있는 메이지 덴노의 모습은 어진영(御眞影)이다. 하지만 메이지 덴노의 실제 모습은 아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미화시켜 그려진 그림을 다시 사진으로 찍는 것이기 때문.

메이지 덴노는 사진 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는 등 본인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사진을 찍은 이후 10년 후 다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그 점을 이용하여 메이지 덴노의 사진을 조작해 어진영으로 재구성하면서, 인물 자체를 백인의 외모처럼 바꿔 프로이센카이저 같은 강인하고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심고자 했다. 이 작업을 위해 궁정화가로 고용된 이탈리아 출신 '화가' 에도아르도 키오소네(Edoardo Chiossone)가 평소의 모습을 스케치해서 초상화를 완성한 뒤 이 그림을 다시 흑백사진으로 찍어서 복제했다는 의미. 사진 찍기 좋아했던 고종황제와는 대조적.

사진에도 조작을 가했다. 이 것은 1890년대 전후반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데, 외모를 서양인처럼 수정한 물건이다. 지나치게 회화적으로 표현된 얼굴 부분의 그림자나 수염의 부자연스러운 톤 등을 보면 조작된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지 않다. 사진이란 것 자체를 접하기 힘들던 시절의 대중들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대성공. 전국의 관청, 학교 등에 붙어서 덴노 그 자체인 것처럼 숭배시되었는데, 심지어는 불타는 학교에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 들어갔다 죽는 교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숭배는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러일전쟁의 삽질로 유명한 노기 마레스케 육군 대장은 삽질의 책임을 지고 종전 직후 할복하려다 메이지 덴노가 "나 죽기 전에는 절대로 못 해" 라고 못박아 버리자, 덴노 사망 후까지 기다려 장례절차가 다 끝난 날 밤에 부부가 동반자살했다.

6. 트리비아

의외로 서양 문물에 부정적이었다. 한학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나 사사키 다카유키(佐々木高行)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는데, 특히 교육에선 유학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서구식 학제를 도입하려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礼, 1847~1889)가 문부성의 고문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2개월 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최종 승인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 배째).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적절한 설득으로 입헌군주제 등에 반대하진 않게 되었고, 1886년부터는 궁중에서 양장 차림을 허락하였다. 대신 그의 이런 성향은 《군인칙유(軍人勅諭)》(1881), 《교육칙어(敎育勅語)》(1890) 같은 봉건적 요소가 가득한 표어들을 만드는 데 영향을 크게 끼쳤다. 물론 본질적으로는 일본 개방의 중심이던 사츠마, 조슈 무사단의 성향 자체가 보수 개혁파였기 때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대인기피증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기 자식들도 잘 안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자녀들의 혼인날 처음 만났다(...)는 농담 같은 소문도 있다

이 사람을 모시는 신사가 그 유명한 메이지신궁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한편 그에 대한 음모론도 존재한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참조.

이 사람이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골수 덴노주의 군인과 신료들의 영향을 받아 '교육에 대한 훈시'를 한 '교육칙어'라는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군국주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것을 암송하고 글자까지 모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사무치게 배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학생들도 이걸 외울 것을 강요당했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을 흉내낸 한국의 10월 유신시절에도 이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민교육헌장을 무조건 외우도록 강요했다. 그 시절 학교를 다닌 중장년층은 아직까지도 "민족 중흥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 같은 구절이 머릿속에 박혀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암송이 가능한 사람이 많다. 강제로 국민들에게 삶의 방향을 주입하는 효과가 있는 독재 정권의 특징적 행태라고 한다.

생전에 여자와 유흥을 매우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렘천황[11]

메이지 정부에서 덴노란 것은 사실 통치의 명분을 위한 장식에 가까웠다. 자신도 한계를 알고 있었는지 정무에 별 관심이 없어 신하들이 알아서 개혁을 추진하도록 묵인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능력 있는 신하들은 메이지 덴노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개혁을 주도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은 신속한 개혁을 거쳐 근대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대신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메이지 덴노를 '장난감'에 비유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저런 발언을 한 적은 없다는 말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 항목 참조.

야마다 아사에몬이 바친 일본도 코류 카게미츠를 패용했다고 한다. 남북조시대의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검으로 전해지는 물건인데, 마사시게가 일본 제국에서 덴노에 대한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된 것을 생각하면 정치적 상징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문단에서도 몇 번 이웃나라 한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언급되는데, 재미있게도 고종과 메이지 덴노는 1852년으로 동갑이고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고종이 양력 9월 8일(음력 7월 25일), 메이지가 11월 3일로 메이지 덴노가 2개월 늦다. 현재 11월 3일은 문화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7. 메이지/출생

7.1. 실존인물

7.1.1. 메이지 원년 ~ 9년(1868~1876)

7.1.2. 메이지 10년대(1877~1886)

7.1.3. 메이지 20년대(1887~1896)

7.1.4. 메이지 30년대(1897~1906)

7.1.5. 메이지 40년대(1907~1912)

7.2. 가상인물

7.2.1. 원년 ~ 9년(1868~1876)

7.2.2. 메이지 10년대(1877~1886)

7.2.3. 메이지 20년대(1887~1896)

7.2.4. 메이지 30년대(1897~1906)

7.2.5. 메이지 40년대(1907~1912)

8.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대한제국구한말만큼이나 격동의 시대였던지 창작물에서도 배경으로 종종 쓰인다.


  1. [1] 고메이 덴노의 측실
  2. [2] 한 군주가 재위기간 내내 한 연호만을 쓰는 제도. ex)히로히토 - 쇼와, 아키히토 - 헤이세이, 군주가 정치적 혹은 주술적인 이유로 연호를 갈아치우면 여러 가지로 피곤해지기 때문에 한번 연호를 정하면 못 바꾸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명대부터 시행되었다.
  3. [3] 이름은 아사코(夙子). 고셋케 중 하나인 쿠죠 가문의 딸이다.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에게는 고모이자 시할머니가 된다.
  4. [4] 두 딸 요리코(順子) 내친왕과 후키노미야(富貴宮) 내친왕을 낳았지만, 모두 1~2살 무렵 죽었다.
  5. [5] 가령 지방 순행 중 특별히 재해를 입었거나 빈공한 사람들을 볼 경우 금전을 하사한다든가, 다 덕치 개념을 이용해 국민들을 체제에 순응하게 하고자 하는 거다.
  6. [6] 나루코의 오빠인 야나기하라 사키미츠(柳原前光)의 서녀 야나기하라 뱌쿠렌은, '다이쇼 시대 3대 미인' 중 하나이자 문학가로, 그리고 파란만장한 사생활로 유명했다.
  7. [7] 츠네히사 왕의 여동생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는 기타시라카와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이며, 쇼다 미치코가 하츠코를 제치고 황태자비가 된 후로는 나가코 황후시녀장(侍女長)을 지내며 미치코 황태자비 시집살이 시키기에 한 몫을 했다.
  8. [8] 이 아들인 다케다 츠네요시는 731 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한 천하의 개쌍놈 전범이다.
  9. [9] 이 무렵 후사코는 이세신궁의 제관장(祭官長)이었다.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결혼식을 올리기 전 이세신궁에 참배하러 왔을 때, 후사코는 미치코를 홀대했다고 한다. 자신의 손녀를 제치고 황태자비로 정해진 미치코가 미웠던 것이다.
  10. [10] 난징 대학살의 총 지휘관이다.
  11. [11] 반면에 그의 아들인 다이쇼 덴노와 장손인 쇼와 덴노는 아내 외의 다른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어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아들을 4명이나 낳아 후사 문제가 없었으나,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는 결혼 후 줄줄이 딸만 4명을 낳았다. 그래서 주위에서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고 권유하며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추천하기까지 했으나, 쇼와 덴노는 끝내 거절했다고. 이후 나가코 황후는 어렵게 두 을 낳았고, 그제야 후궁 이야기는 수그러들었다.
  12. [12] 일본 최장수 노인이었던 사람.
  13. [13] 과거 일본 최장수 노인. 사망 당시인 2013년 한국 나이로 117세. 19세기에 태어난 전세계 남성 중 최후의 1인. 참고로 1920년대 문화기만통치시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통역으로 잠깐 일한 경력이 있으며, 이후엔 우체부로 살았다.
  14. [14] 원작 기준으로, 애니메이션을 기준으로 할 경우 다이쇼 태생이다.
  15. [15] 제목대로 주요 캐릭터들은 다이쇼 시대 출신이지만, 이 2명은 7월 30일 이전 출생(타마키 : 2월 7일생, 사치코 : 3월 26일생)이라 시간상으로는 메이지에 해당.
  16. [16] 쿠제 반코의 전 7권 분량의 만화. 메이지시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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