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트 1세

* 상위 항목: 술탄

1. 즉위 당시
2. 발칸 반도 정복과 사망
3. 내치
4. 사후

오스만 터키어

مراد اول

터키어

I. Murat Hüdavendigâr[* 별칭인 휘다벤디갸르는 '신이 내린 권위자'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이다.

재위

1362년 ~ 1389년

오스만국[1]의 세 번째 술탄이자, 엄밀한 의미에서의 첫번째 술탄.

오스만국을 비로소 제대로 된 국가로 만들고, 발칸 반도의 제패자로 만든 인물.

1. 즉위 당시

무라트가 오스만국의 세번째 술탄으로 즉위한 1362년은, 오스만국으로서는 발칸 반도로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딱 좋은 시기였다. 동로마 제국과 그 북쪽의 이웃나라들인 세르비아 제국불가리아 제국이, 사이좋게 국가 막장 테크를 밟아나가고 있었기 때문. 먼저 동로마 제국의 경우, 잦은 내전에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1341년부터 1347년까지. 1352년부터 1357년까지 황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기울어가던 국력이 완전히 시망이 되어버렸으며, 무라트 즉위 이후인 1373년부터 1379년까지는 다시한번 내전크리. 결국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카, 그 주변의 영토들로 축소되어버린다[2].

한편 세르비아는, 무라트의 아버지이자 선대 술탄인 오르한의 시대인 1355년에 슈테판 우로시 4세(Stephen Uroš IV)가 죽은 뒤로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슈테판 두샨(Stephen Dušan)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슈테판은 1331년에 세르비아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 1341년부터 1347년까지 동로마 제국에서 일어난 내전을 기회로 제국의 영토를 하나씩하나씩 점령. 1346년에는 아예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Emperor of the Serbs and Greeks)' 를 자칭[3]. 중세 세르비아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빨리 영토를 확장한데다 대략 48세의 나이에 급사하는 바람에 새로 통치한 지방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하지 못했고,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해지는 것도 미처 통제하지 못했다. 그런데다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슈테판 우로시 5세(Stephen Uroš V)는, 이런 상황을 타개해나갈 수 없는 유약한 인물이었다. 결국 세르비아 제국은 그의 치세에 서서히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그가 죽은 뒤에는 아예 공중분해된다.

또 불가리아는, 황위 계승 문제로 인해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황제였던 이반 알렉산더르(Ivan Alexander, 재위: 1331~1371)가 정략상의 이유로 첫번째 황후와 이혼하고 수도원에 보낸 뒤 두번째 황후를 맞이한 것인데, 그와 동시에 황위 계승권도 두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본 아들인 이반 시슈만(Ivan Shishman)에게로 가 버렸다. 하지만 당시 이반 알렉산더르는 첫번째 황후와의 사이에서 장성한 아들인 이반 슈랏시미르(Ivan Sratsimir)를 두고 있었고, 계승권을 빼앗긴 데에 분개한 이반 슈랏시미르는 불가리아 제국의 서북쪽에 독립 왕국을 세워버린다. 이것이 1356년의 일로, 이후 불가리아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나라가 셋으로 쪼개져버린다.

여기에, 오르한 시대에 오스만국은 처음으로 유럽으로 진출하게 된다. 1354년에 갈리폴리 반도에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1341년부터 1347년까지 장장 7년동안 계속된 내전의 결과 심각한 수준으로 약해진 동로마 제국은 피해 복구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걸 오스만 제국이 꿀꺽해버린 것.

즉 이 문단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오스만국이 발칸 반도로 영토를 확장해갈 경우의 주적인 동로마,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사이좋게 망했어요 상태였고, 발칸 반도로의 영토 확장을 위한 디딤돌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 이제, 그 디딤돌을 딛고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2. 발칸 반도 정복과 사망

역시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는 봉신화. 다른 나라는 멸망 직전. 마지막은 시망.

먼저 '봉신화' 의 경우인 동로마 제국의 경우, 세르비아가 오스만군 앞에 개발살나고[4]. 또 당시 황제였던 요안니스 5세가 몸소 로마까지 달려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5]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1371년의 일로, 역시 역대 동로마 황제들 가운데 최초로 다른 나라의 봉신이 된 예. 이후 동로마 제국은 1394년에 이르기까지 오스만국의 봉신이 되어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요 술탄이 원정을 나갈 때마다 황제가 직접. 그것이 정 여의치 않으면 황족 가운데 한 사람이 군대를 이끌고 지원해야 했다. 또한 오스만국의 내정 간섭도 받아서, 1373년부터 1379년까지는 요안니스 5세와 그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가 내전을 벌이고 무라트에게 서로를 지원해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6].

다음으로 '멸망 직전' 의 경우인 불가리아 제국은 1371년에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가 죽은 뒤,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 그런데다 이반 알렉산더르의 아들들인 이반 슈랏시미르와 이반 시슈만은 오스만국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시종일관 치고받고 싸웠고, 심지어는 이반 시슈만이 오스만군의 공격을 받는데도 이반 슈랏시미르는 팔짱 끼고 구경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졌다[7]. 이에 오스만군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던 이반 시슈만은 1373년. 또는 1376년에 역시 오스만국의 봉신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스만국의 술탄 무라트에게 봉신화란 일단은 내버려두지만 기회가 있으면 정복해 없앤다는 것을 의미했고, 결국 1380년대 초에 전쟁 재개. 불가리아 제국은 멸망 직전에까지 이르렀다[8].

다만 무라트의 치세를 거치면서 '시망' 이 된 세르비아의 경우는, 나름대로 분전했다. 황제 슈테판 우로시 5세가 1371년에 후계자 없이 죽어 황통이 단절되면서 세르비아 제국은 공중분해되었지만, 지방의 유력한 귀족이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Lazar Hrebeljanović)가 세르비아 제국의 복원을 내걸고 세르비아의 여러 지방 귀족들을 제압해나갔기 때문. 또한 라자르의 군대는 오스만군과 세 번 싸워 2승 1무의 좋은 성적을 냈다.[9] 특히나 1386년. 또는 1387년의 플로치니크 전투(Battle of Pločnik)에서는 오스만국이군 2만 명을 궤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혀, 무라트가 잠시나마 발칸 정복을 포기할까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라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고, 라자르도 그에 응해 1389년의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가 벌어지게 되었다.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과 오스만군은 서로 누가 이겼다고 말하기 힘든 성적을 거두었다. 무라트와 라자르가 모두 사망했고 서로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무라트가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이야기가 다양하다.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투 후 전장을 둘러보던 중에 세르비아의 영웅 취급 받는 밀로슈 오블리치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 전투가 끝난 저녁에 자신을 알현하기를 요청한 포로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볼 때 오스만국의 승리였는데, 아나톨리아 반도의 주둔군을 끌어오면 피해를 그럭저럭 만회할 수 있었던 오스만국과는 달리 그야말로 코소보 전투 한 판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던 세르비아로서는 그 뒤가 없었기 때문. 즉 세르비아는 뒷심이 부족했던 탓에 결국 오스만국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는데, 코소보 전투로부터 5년 뒤에 라자르의 후계자인 슈테판 라자레비치(Stefan Lazarević)가 오스만국의 봉신이 된 것이다.

무라트 치세에 확장된 영토[10].

3. 내치

한편 무라트는, 오스만국의 내치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일단 1361년[11]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을 정복. 에디르네(Edirne)로 개명하고 이전까지의 수도였던 부르사(Bursa)와 함께 공동 수도로 삼았다[12]. 이는 발칸 반도에서의 영토 확장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였으며, 지금까지 소개한 것과 같이 그 의지는 결국 현실이 된다.

또한 무라트는 예니체리 부대를 창설[13]하고 그 징집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를 마련했으며, 관료 자문기구인 디완(Divan)과 최고 재판관인 카자스케르(Kazasker), 재무장관격인 데프테르다르(Defterdar)라는 직위를 신설했다. 또한 티마르 제도시파히 부대가 창설된 것도 무라트 치세의 일이며, 오스만국의 최상위행정단위로 1867년까지 변함없이 쓰인 에얄레트(Eyalet)가 처음 설치된 것 역시 무라트의 공적[14].

마지막으로, 무라트는 1383년에 술탄을 자칭했다. 이전까지. 즉 창건자 오스만과 그 뒤를 이은 오르한은 술탄보다 격이 낮은 베이(bey)[15]를 칭했는데, 무라트 시대에 처음으로 술탄을 칭했던 것. 후삼국 시대궁예견훤 등이 초창기에 '장군' 을 칭하다가 마침내 왕을 칭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 덕에, 무라트는 오스만국의 두번째 창건자로 인정받고 있다.

4. 사후

코소보 전투에서 전사한 무라트의 뒤를 이어, 장남인 바예지트(Bayezit)가 바예지트 1세로서 뒤를 이었다. 무라트에게는 바예지트 외에도 야쿱(Yakup)이라는 아들[16]이 있었는데, 무라트가 전사든 암살이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먼저 접한 바예지트는 야쿱에게 아버지가 부르시니 아버지의 막사로 오라고 전했고. 야쿱은 무라트의 부름에 응해 막사로 갔지만... 들어서자마자 끔살. 이로써 무라트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바예지트가 뒤를 이었다.

무라트의 시신 가운데 내장은 전투가 벌어졌던 코소보 평원에 묻히고 남은 부분은 부르사(Bursa)로 옮겨져 묻혔는데, 코소보에 위치한 무덤은 이후 이슬람의 종교적 성지가 되었다고.


  1. [1] 이 항목에서 '오스만 제국' 이라 하지 않고 '오스만국' 라 하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먼저, 당시 오스만국의 국격(國格) 문제다. 당시의 오스만국 군주들은 아직 황제를 칭하지 못하고 무라트의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술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제국' 이라 하기는 무리가 있다. 물론 아테네 제국이나 공화정 시대의 로마 제국처럼 국가의 규모가 커지거나 영향력이 강해지거나 하여 제국이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의 오스만국이 그런 의미에서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의문. 두 번째로, 당시에는 아직 튀르크인이 오스만국의 중심이었다. 역대 대재상(Vezîr-i Âzam 혹은 Sadrazam)들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튀르크인 출신의 전사 계층인 가지(Gazi)나 역시 튀르크계 지식인 계층인 일미예(İlmiye)가 독점했으며, 이러한 관행이 무너지고 데브시르메 출신자가 재상이 된 최초의 사례는 메흐메트 2세 때에 비로소 보인다. 즉 '오스만 제국' 이라는 표현은 메흐메트 2세 치세 때부터가 적합하다고 판단되나, 이견이 있는 분은 수정바람.
  2. [2] 물론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있었으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독립국가였다.
  3. [3] 당시 '그리스인' 이라고 하면 동로마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허약해 빠진 동로마 제국은 밀어버리고, 내가 그 후계자가 되겠음!' 이라고 선포한 거나 다름없는 것. 실제로 슈테판은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연계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는 계획까지 세우지만, 베네치아의 반대로 백지화.
  4. [4] 1371년의 마리차 전투에서, 최소 2만에서 최대 7만에 달했던 세르비아군이 겨우 8백 명에 불과했던 오스만군에 털린 일이 있다. 참고로 오늘날 역사가들은 당시 기록에 보이는 8백은 과장이고 적어도 만 명에서 만 5천 정도로 보고 있는 모양. 그래도 7만이 만 5천한테 털린다는 건...
  5. [5] 1369년의 일. 이때 교황은 요안니스에게 '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도와줄게. ' 라는 엄청난 요구를 했고, 요안니스는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개종해야만 했다.
  6. [6] 대략 '안드로니코스가 반란 -> 진압 및 투옥 -> 안드로니코스가 탈출하여 요안니스를 폐위하고 즉위 -> 요안니스 투옥 -> 탈출하여 안드로니코스를 폐위하고 복위' 의 순. 그런데 여기에서 웃지 못할 일은, 감옥에서 나온 안드로니코스와 요안니스가 모두 무라트에게 달려가 조공을 더 바치겠다. 영토 일부를 할양하겠다. 하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 물론 거저 들어오는 것을 사양할 이유가 없던 무라트는 양쪽을 모두 도와주었다
  7. [7] 이반 슈랏시미르의 독립 왕국은 불가리아 제국 가운데에서도 북서쪽에 위치한 곳이라, 아직껏 오스만군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따라서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라는 것이 이반 슈랏시미르의 생각이었다고 추측되고 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8. [8] 만일 무라트가 세르비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지만 않았더라면, 그의 치세에 불가리아가 정복됐을 것이다. 실제로 불가리아의 수도인 투르노보는 무라트 사후 4년만인 1393년에 함락되었고, 이반 시슈만은 1395년에 생포되어 처형되었다. 또한 이반 슈랏시미르도 1395년 말이나 1396년 초에 생포. 역시 처형되었으며, 불가리아는 그로써 멸망했다.
  9. [9] 세번 가운데 라자르와 무라트가 직접 군사를 지휘한 경우는 최종전인 코소보 전투가 유일. 즉, 라자르와 무라트 사이의 싸움이라기보다, 라자르군과 오스만군의 성적이라고 생각할 것.
  10. [10] 다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나 이 지도로 보나 무라트가 치세의 대부분을 발칸 반도에서 보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정작 그는 치세의 대부분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오스만국과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던 튀르크계 공국들을 때려잡는 데에 보냈다.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은 대부분 루멜리아(유럽 영토) 대총독으로 임명된 라랄 사힌 파샤(Lala Şahin Paşa)를 비롯한 부하 지휘관들의 공적이다.
  11. [11] 년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정확하지 못해, 학자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다. 가장 늦은 경우 1371년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12. [12] 유럽 영토와 아나톨리아 반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동로마 제국 영토가 놓여 있어, 각 지역마다 수도를 하나씩 둘 수밖에 없었다. 훗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로 결심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13. [13] 이에 대해서는 선군인 오르한 때라는 주장도 있다.
  14. [14] 다만 무라트가 '최상위행정단위를 두어야지~' 했다기보다는, '난 아나톨리아 반도의 일이 바쁘니까 루멜리아(발칸 반도)를 일단 하나로 묶고, 너. 랄라 사힌 파샤(에디르네를 정복한 사람)가 맡어.' 라고 한 것이 사실에 가깝다. 에얄레트 체제가 본격적으로 행정단위답게 된 것은 메흐메트 2세셀림 1세때. 이르게 잡는다면 아나톨리아 반도도 에얄레트로 편제한 바예지트 1세 때라고 할 수 있다.
  15. [15] 굳이 번역하자면 '공작' 정도. 또한 지방에 파견된 태수라는 뜻도 있다.
  16. [16] 두 사람은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의 좌익과 우익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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